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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2:41:37

마지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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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80px-Maginot_Line_ln-en.svg_.png
프랑스- 독일 국경에 표시된 빨간색 실선이 실질적인 마지노선이고, 점선은 이름만 마지노선이었던 약한 방어선이다.

La ligne Maginot
Die Maginot-Linie
Maginot Line


1. 개요2. 건설 목적
2.1. 1차대전 서부전선의 참호전 체계2.2. 프랑스의 인구사회 구조 - 인구의 역전2.3. 프랑스의 국가적 자존심 - 영토 절대사수주의
3. 구조
3.1. 동서방향 배치구조3.2. 상하 배치구조
4. 무장
4.1. 보병용 포곽4.2. 전투 블록4.3. 엘리베이터식 회전포탑
5. 능력6. 벨기에 국경이 빠진 이유7. 실전에서의 역할8. 한계점9. 전후 활용10. 유사한 요새 지대11. 관용적 표현12. 대중문화에서의 마지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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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지노선(Ligne Maginot, Maginot Line)은 1929년부터 1938년까지 프랑스 독일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프랑스-독일 국경에 설치한 대규모 요새 지대이다. #1

마지노선의 이름은 요새 건설을 주장한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전쟁부 장관인 앙드레 마지노(André Maginot)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마지노선의 건설 예산은 마지노가 전쟁부 장관에서 물러난 뒤인 1926년에 프랑스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때문에 마지노선 설계는 후임 전쟁부 장관인 폴 팽르베(Paul Painlevé)의 지시를 받아 이루어졌다.

마지노선 건설에는 50억 ~ 70억 프랑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계획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30억 프랑만이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프랑스 침공을 실행했기 때문에, 실제로 마지노선에서 벌어진 전투는 많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한계선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쓰인다.

2. 건설 목적

제1차 세계 대전의 지옥 같은 참호전을 통해 든든한 방호벽 뒤에서 아군의 소모는 최소화하고 적군에게는 소모를 강요하는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에 항구적인 방어 시설을 계획하게 된다.

원래 요새지대 설치의 기안자인 마지노는 적 공세에 대한 조기경보와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는 단촐한 전초방어선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실제 기획자인 팽르베에 의해 다중 철조망과 대전차호, 각종 포대와 기관총좌에 지하에 마련된 지휘소, 탄약고, 식량창고, 내부철도망 등 당시의 축성기술의 정수(精粹)를 모은 최고의 시설과 상당한 종심을 가진 거대한 요새선으로 완성되었다. 요새의 방어력은 가장 얇은 콘크리트 보루의 두께가 3.5m일 정도로 압도적인 우주방어를 자랑해, 이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군대는 당시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2.1. 1차대전 서부전선의 참호전 체계

우리가 처음부터 공병의 기술을 신뢰했다면 베르됭 앞에서 벌어진 싸움은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두오몽 요새는 틀림없이 점령당했겠지만 그렇게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1] 처음부터 독일군의 목표를 방해했을 것이다. 방어 시설은 조금만 남아 있어도 승리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필리프 페탱 저 《 베르됭 전투》 中[2]
병력으로 대포와 맞서 싸우지 않는다. 전쟁은 병력의 지원을 받아 대포로 하는 것이다.
필리프 페탱, 육군장관 재직 중[3]

1차대전 서부전선은 개전 첫 1달을 제외하면 전쟁기간 내내 참호전으로 유지되었다. 포병과 기관총의 화력지원 속에 상대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상대의 참호로 돌격해 그곳을 점령, 사수하는 것이 모든 군사행동의 기반이 되었다. 1920년대 군사전문가들의 사상은 모두 참호전에 기반하였으며, 때문에 참호선을 몇 단계나 강화시킨 거대한 요새선은 돌격해오는 적군에 맞서싸우기 최적의 시설물이었다.

후대에서 항공기와 기계화부대라는 요소를 간과했다고 비판받았지만, 1920년대 기준으로 항공 및 기계화부대 모두 초창기 수준이었다. 항공기들은 복엽기, 삼엽기가 주력이었고 폭격능력에 심각한 제약이 있었으며 기계화부대는 탄생하기도 전이었고, 전차는 여전히 초창기 수준[4]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악몽같은 베르됭 전투 참전자들은 1차대전 종료 직후부터 마지노선까진 아니더라도 강력한 방어시설물의 구축을 강력히 주장했다. 베르됭 전투의 주인공이기도 한 필리프 페탱을 필두로, 역시 베르됭의 영웅 중 한 명인 레날 육군 예비역 소령[5] 등 수많은 베르됭 전투 참전자들은 자신들이 몸소 겪은 전훈을 바탕으로 요새와 방어설비의 강화를 적극 주장했다.

2.2. 프랑스의 인구사회 구조 - 인구의 역전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인구를 가진 국가였으나 19세기 후반부터 독일이 통일국가를 이루고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그리고 프랑스의 출산율이 저하되는 등의 이유가 겹치면서 인구가 역전되고 만다. 인구는 병력은 물론 노동력 등 생산인구, 그리고 경제와 국가조세 등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기에 프랑스로선 민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전 전 독일의 인구는 6,500만 명에 육박했는데, 프랑스의 인구는 고작 4,000만 명으로 1.6배의 차이가 났다. 물론 식민지 인구까지 합치면 프랑스가 압도적이겠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같은 식민지 사람들은 아무때나 동원할 수 있는 인구가 아니다.

더구나 1차대전으로 프랑스는 135만의 전사자와 426만의 부상자(+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 30 ~ 40만)를 내었다. 독일이 전사자 203만, 부상자 421만(+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 10 ~ 60만)을 내어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독일은 19세기 이래 역전한 인구를 바탕으로 이 피해를 어느 정도 메꿔내었던 반면 프랑스는 출산율 감소 및 식민지로의 이민 등으로[6] 인구 증가세가 크게 꺾였기에 130만이 넘는 전사자가 가져오는 인구충격을 흡수하기 버거웠다. 사실상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트라우마로 손꼽힐 정도. 대전으로 잃은 인구 비율은 프랑스가 4.32 ~ 4.39%로 독일의 3.39 ~ 4.32%보다 높았다.

이런 상황에 놓인 프랑스로선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전략은 국가의 미래를 망가트리는 무모한 짓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미래전쟁이 참호전이라고 생각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프랑스는 국가인구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젊은 청년층의 추가적인 인명 피해를 피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다가올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이겨야 한다는 딜레마에 놓였다.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방어전에 올인하여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규모 요새선의 건설이었다. 막대한 예산을 낭비했다고 비판받지만, 프랑스 미래 인구를 위한 예산 투입이었다.

2.3. 프랑스의 국가적 자존심 - 영토 절대사수주의

1870 ~ 18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은 철저히 찢겨져 나갔다. 이는 독일과의 전쟁시 주력을 모아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총공세를 펼친다는 1차대전 이전의 작계인 제17계획에서도 드러난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알자스-로렌을 되찾았으나, 프랑스인들에게 여전히 1871년의 굴욕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었고, 그때와 같은 일을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열망이 있었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바로 영토 절대사수주의로 발전하여 국경을 따라 건설되는 요새선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영토 절대사수주의는 단순한 트라우마와 자존심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었다. 1차대전의 주전장은 벨기에와 프랑스 동북부 지역이었고, 이들 지역은 4년여에 걸친 전화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패전국이었음에도 본토의 피해가 거의 없었던 독일과 달리 전후복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자국 영토가 전쟁으로 초토화되는 것을 경험한 프랑스로선 영토 절대사수주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3. 구조

파일:attachment/MaginotLine1.jpg
마지노선의 구조도 예시

'Line' 이라는 명칭이나 '요새' 의 이미지 때문에 거대한 단일 구조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대전차 장애물 철조망을 프랑스 - 독일 국경 10km 정도부터 쫙 깔아놓고, 그 뒤에는 교통호와 내부철도선으로 연결되어 500명에서 1천명을 수용하는 대형 요새 17개, 20명에서 30명이 들어가는 벙커 352개, 대피소 78개, 관측용 대형 철근 콘크리트 벙커 17개, 지상 특화점 약 5천개 정도가 널려 있는, 길이는 스위스부터 룩셈부르크까지의 프랑스 - 독일 국경 750km에 종심이 최대 20km에 달하는 요새 '지대' 였다.

아래의 설명을 간결하게 압축하자면 벙커와 방어구조물이 750km x 20km 범위에 걸쳐 수두룩하게 깔려있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아무데나 던져놓은 게 아니라 서로의 위치를 세심하게 조율해서 상호간에 엄호할 수 있으며, 그 부근마다 기동을 방해하는 참호나 철조망이 깔려있고, 포탑 중 일부는 한번 쏘고 난 뒤 지면 아래로 내려가기까지 한다. 총안구를 노리거나 포탄을 쏟아부어도 무력화하기 어려운데, 지하로도 내려가니 당시 전력으로 정면돌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3.1. 동서방향 배치구조

최전방인 동쪽에서 후방인 서쪽까지 마지노선의 배치구조는 아래와 같다.

3.2. 상하 배치구조

파일:attachment/MaginotLine2.jpg
마지노선 안으로 들어가는 수비군[7]
마지노선의 구조물을 지표면부터 지하까지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4. 무장

마지노선에는 7.5mm 레이벨 기관총부터 135mm 구포까지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장착해서 사용했다. 화포의 경우에는 75mm, 81mm, 135mm의 3개 구경으로 종류를 제한하여 총 343문을 보유했으며 일반적인 방어화력의 주류는 기관총과 소구경 박격포와 대전차포였다.

특이한 점은 의도적으로 135mm 구포를 초과하는 구경의 중화기는 마지노선에 고정배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평시에는 다른 곳에 있다가 유사시에 철도를 통해 후방 포병진지로 이동시킨 후 방렬한 다음에 사격하기로 했고 주로 열차포를 사용한다. 그래서 마지노선의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중화기의 숫자는 적은 편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화기가 고정포 방식으로 붙박이로 설치되었으며 간단하게 분해 및 탈거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1차대전의 베르됭 전투 당시 두오몽 요새를 비롯한 주요 요새들의 요새포를 비롯한 각종 요새 화기를 프랑스군의 장비가 모자라다고 대부분 분해해서 회수하는 바람에 요새가 제대로 된 무기가 거의 없는 무장해제상태로 전락하여 독일군에게 순식간에 함락당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모조리 고정포 방식으로 설치한 것이다.

4.1. 보병용 포곽

보통 아머드 클로치(Armoures cloches) 라고 불리는 구조물로 직역하면 장갑화 이다. 형태가 마치 종처럼 생긴 넓적한 원통형 바가지 형태의 합금강 구조물로 보통 200mm 에서 300mm 에 도달하는 중장갑을 가지고 있지만 클로치 자체는 회전이 안되는 특성을 가지므로 포곽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클로치에는 보통 4방향으로 총안구가 설치되어 있어서 회전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최대한 상쇄하려고 노력했다.

4.2. 전투 블록

아머드 클로치가 장착된 전투 블록은 노출된 일부 부위에 37mm 대전차포와 47mm 대전차포를 장착하여 독일군의 전차에 대전차포탄을 날리도록 설계하였다.

그 외에도 135mm 구포, 1897년식 75mm 야포, 81mm 박격포, 60mm 박격포, 50mm 박격포의 일부가 전투 블록에 직접 설치되어 전투를 지원하였다. 그리고 호치키스 기관총의 13.2mm 대구경 중기관총인 M1930도 86정을 따로 설치하여 대전차포를 장착하기 협소한 총안구나 라인강변에서 독일군의 상륙정을 상대하기 위한 용도로 설치되었다.

4.3. 엘리베이터식 회전포탑

파일:Img00203.webp
철갑을 두른 기관총 포탑[8][9]
아머드 클로치(Armoures cloches) 만으로는 몰려오는 독일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근접화력지원을 담당하는 회전포탑들이 필요했다. 해당 포탑들은 회전이 가능했으며 엘리베이터 방식을 사용해서 사격시에만 1m 정도 상승해서 포격을 한 후 다시 하강하여 포탑 천정에 붙은 300mm~350mm 두께의 단단한 장갑으로 보호를 받는 방식이라 쉽게 무력화하기가 어려웠다. 총안구나 포안구는 작은 편이었지만 화기를 고정포 형태로 설치하고 포탑 내부를 넓게 만들어서 포구를 약간만 내밀면 포구 각도 조절이 쉽기 때문에 고각사격이나 곡사포격이 쉬운 편이었다. 총 152개소의 포탑이 존재했다.

5. 능력

독일도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마지노선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구스타프 열차포 같은 사기급 병기를 만들어 뚫을 예정이었지만, 정작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독일군은 룩셈부르크 아르덴 숲 → 스당을 통해 넘어와 버려서 마지노선의 병력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프랑스 항복과 함께 투항,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자세한 건 프랑스 침공 문서로.

사실 마지노선의 방어력이나 방어 구조 자체는 어마어마한 거라서, 전통적인 방식의 전술로는 도저히 돌파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공격자 측에서 병력을 얼마를 집어넣든 간에 대량살육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된 독일군도 이걸 어떻게 돌파해야 되는지 굉장히 고민했는데, 만약 정면으로 뚫고 들어갔다면 천하의 독일군이고 뭐고 거기서 지지부진 하다가 이래저래 제1차 세계 대전 꼴 났을 가능성도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노선을 뚫어야 한다고 이를 악문 독일군은 구스타프 열차포를 위시한 초대형 열차포 제작에 열을 올렸다.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을 히틀러가 채용하여 마지노선을 우회하였기 때문에 정작 돌파용도로 사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런 물건을 진지하게 만든 것 자체가 어떻게든 마지노선을 뚫으려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6. 벨기에 국경이 빠진 이유

프랑스도 1차 대전의 전훈을 통해 독일-프랑스 국경 뿐만 아니라 벨기에 방면의 방어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노선의 초기 계획에서는 벨기에 국경을 포함해 프랑스 동부 국경 지대 전체를 요새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벨기에에서는 이러한 계획을 크게 반대하였다. 당시 군사력이 약한 벨기에는 독일군이 공격해 올 경우 프랑스군의 지원 없이는 독일군을 막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한다면 1차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벨기에를 침공할 것이 명확한데, 만약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에 요새선이 존재한다면 프랑스는 요새선의 방어를 고수할 것이고, 따라서 벨기에 방어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프랑스 군부 역시 마지노선의 연장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기존 마지노선이 건설된 알자스-로렌 구간은 라인강을 경계로 산과 언덕에 요새를 만든 반면, 프랑스-벨기에 국경은 평야 지대여서 효과적인 방어선의 구축이 어려웠다. 또한 저지대 곳곳에 강과 습지대가 있고 지하수위가 높아 대형 구조물을 건설하기 어려웠다. 벨기에와 인접한 공업도시 과 여러 마을을 철거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마지노선을 됭케르크 해안까지 연장하려면 이전 공사비의 3 - 5배에 달하는 예산이 추가로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였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군부는 비현실적인 건설 사업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소모하는 대신, 마지노선을 건설하는 동안 우선 순위에서 밀렸던 군사장비에 투자해서 벨기에로 진출하는 것을 선택했다.[10]

벨기에는 독일과의 국경선에 에반-에마엘 요새를 건설하고, 전국의 철도망과 교량에 폭약을 설치한 뒤 유사시 폭파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고 했다. 벨기에의 부족한 방어를 보강하기 위해, 독일을 상대로 전쟁이 발생하면 프랑스군이 벨기에로 진입해 알베르트 운하- 뫼즈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여 독일군을 방어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한편 벨기에의 군사 역량을 완전히 믿지 못했던[11] 프랑스는 마지노선의 끝에서부터 벨기에 국경을 따라 낮은 수준으로 요새화를 하고 연장된 마지노선으로 가칭하였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마지노선만큼의 방어 능력은 기대할 수 없었다. 독일군은 작전을 변경해 벨기에 방어선과 마지노 방어선 사이에 있어 방어가 취약한 아르덴을 돌파하였다. 독일-벨기에 국경에서 시간을 끌어야 할 에반-에마엘 요새는 독일군 공수부대의 기습 공격으로 빠르게 무너져 프랑스군의 방어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7. 실전에서의 역할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가 단 6주만에 무너지며 변변찮은 전투도 못 치른 채 너무나도 맥없이 그 효용이 다해버린 마지노선이었지만, 그렇다고 전쟁에서 마지노선이 완전히 무용지물만은 아니었다.

우선 낫질 작전 자체가 공세를 어떻게 설계하건 간에 마지노선을 절대로 돌파할 수 없었기에 만들어진 계획이며, 독일군이 낫질 계획에 따른 루트를 통해 특공대가 프랑스 본토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마지노선을 지키는 병력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수십만에 달하는 독일군이 계속 페이크를 치면서 마지노선 앞을 왔다갔다 해야 했다.

즉, 알려진 것처럼 순식간에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진 않았다. 그렇다고 요새 자체가 무슨 루르를 점령했다거나 독일군 수만 명을 갈아버리진 않았지만, 요새는 그 존재를 적에게 의식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 당장 전열함, 전함이나 핵미사일도 그리 사용되지 않더라도 그 존재만으로 아무도 무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마지노선에 퍼부은 천문학적인 코스트 대비 효율만큼의 이익이 나오지 않아서 문제였을 뿐.

사실 프랑스 입장에선 마지노선의 의미는 충분했다. 참호전 이후 국토 수호에 있어 결코 돌파할 수 없는 요새란 말 그대로 전쟁에서 절대 패배하지 않을 수 있는 수단이었기에, 프랑스는 독일과 맞닿은 국경은 충분한 방어시설과 최소한의 병력만으로 수비하고 나머지 가용병력으로는 벨기에에서 독일군을 요격하려 했던 것이다. 때문에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 당시 마지노선 방면으로의 공격은 포기하고 벨기에 방면 및 아르덴 산림지역으로 공세를 펼쳐야 했다. 전쟁에서 공격 측이 가지는 이점은 공세장소와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이점이 사라질 경우에는 방어측이 매우 유리해진다. 그리고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통해 독일의 공세가능 구역을 마지노선 외의 벨기에 방면 및 아르덴 지역으로 국한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엄청난 자원을 쏟아붓긴 했지만 덕분에 독일은 대 프랑스 전쟁계획에서 상당히 제한적인 공세 루트만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군의 결정적인 실책은 마지노선을 프랑스 영토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를 절대 사수해야 하는 목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비병력으로 15개 사단만 깔아놓아도 충분한 마지노선에 패전 직전까지 무려 40개 사단을 박아놓는 삽질을 감행하였다. 덕분에 낫질 계획 1차 완료후 프랑스에게 남은 사단은 마지노선에 투입한 병력을 합해서 총 65개 사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독일군이 몰려올 프랑스 북부를 방어할 사단은 마지노선과 이탈리아 쪽 국경선을 제외하면 고작 20개 사단이 되는 참상이 발생했다. 그렇게 해놓고도 밑에 따로 서술하지만 최서단 구역이 함락되었다. 이 엄청난 실책에 비하면 아르덴 지역은 전차가 통과할 수 없다고 자만했다거나, 독일군의 실력을 평가절하했다는 것은 애교로 보일 지경.

사실 "프랑스 땅은 한 뼘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국토 사상에 입각한 정치적 집착이 이런 참상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유럽의 전쟁에서는 전선의 유동성은 일상적인 일이고, 전후의 국경은 실제 전선의 배치와는 거의 무관하게 국력과 전황에 따른 외교적 협상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집착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프랑스가 이러한 결단을 내린 것은, 보불전쟁-제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프랑스의 국토가 독일군에게 짓밟히고 전쟁에 그대로 노출되며 회생 불가능한 수준으로 크나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공포와 대처심이 극단적으로 불거진 사례였다고도 할 수 있다.

8. 한계점

마지노선은 완성 당시에도 그다지 완벽하게 가동되지 않았다. 건설할 때부터 프랑스 영토를 한뼘이라도 내주기 싫다는 것을 반영한 덕분에 연약 지반 위에 무거운 콘크리트 구조물을 억지로 올린 곳이 많아 침하가 상당히 심했고 지하수 침출 또한 심각했다. 요새 내부는 항시 습기가 가득했으므로 전기계통의 고장이 잦았고 누전에 의한 인명사고도 많았다. 지하수 + 오수 + 전기 고장 크리가 겹친 오수 처리 시설이 가동을 멈출 때가 많아 하수구 역류와 침출수가 뒤섞여 요새 내는 늘 악취가 코를 찔렀고 이는 근무하는 장병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그로 인해 가동 후 1년 쯤 될 무렵엔 요새 안에 있는 막사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 돼서 사용 금지 조치가 내려졌으며, 근무시간에만 요새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당연하지만 요새에 설치된 화포의 상당수도 습기 때문에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그래서 요새에 상시 근무하는 인원들은 마지노선 가까이에 지어진 막사와 인접 목조 주택 단지에서 생활하였다. 이는 마지노선 내부에서 사는 것 보다는 편안하였지만 독일군의 기습적인 포격이나 폭격에서 살아남을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았다. 훈련은 군사 훈련 지역에 건설되어 실사격 훈련이 가능한 요새에서 수행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지노선 건설 계획 당시와 전운이 감돌 무렵의 군사기술 발전 정도가 크게 달라져서 기존의 설비를 개량해야 하는 작업을 수행하고도 상당부분이 모자랐다. 아머드 클로치(Armoures cloches)는 튼튼하였으나 워낙 협소하여 25mm 대전차포를 1문 넣는 것도 상당히 어려웠는데 2차대전이 터질 쯤 해서는 25mm 대전차포는 위력면에서 탐탁치 않은 수준이 되버린 것이다.

그리고 37mm 대전차포도 그 때쯤 가면 가볍다는 것 빼고는 모든 면에서 구식화기가 되었고 간신히 47mm 대전차포가 1선급 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1897년식 75mm 야포는 항상 수량이 부족하였고 135mm 구포를 초과하는 중화기가 상시적으로 마지노선에 배치되지 않은 관계로 유사시에 기습 1번 제대로 먹으면 중화기가 도착하지 못해서 화력부족에 시달리기 딱 좋았다. 그래서 마지노선 개량작업도 진행했지만 예산과 시간 부족 및 프랑스군 자체를 근대화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작업속도가 지지부진했다.

따라서 마지노선은 그 명성과는 달리 그야말로 안팎으로 새는 바가지였던 셈이다.

그리고 마지노선은 단 한 군데긴 하지만 돌파당했다. 1940년 5월 18일, 마지노선의 좌측방인 라 페르테 요새가 독일 육군 강습 공병에 의해서 뚫려버린 것이다. 소위 '지하의 비극'이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강습공병부대 장교인 알프레드 게르머 육군 공병 중위가 벙커에 폭탄을 던져서 화재가 일어났고 이 불길이 요새의 탄약고까지 옮겨붙어 벙커의 강철 문짝이 찢어질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게다가 유독가스까지 퍼지자 너도나도 탈출하려고 했는데, 상부에서 사력을 다해 벙커를 고수하라고 지시해 어찌어찌 탈출을 막긴 했지만, 이로 인해 107명의 프랑스 육군 장병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 공격은 스당의 주공을 은폐하기 위한 망치와 모루 전술이었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고 전술적으로도 전혀 효과가 없는 벙커 사수에 여러 프랑스 육군 병력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프랑스군은 돌파당한 부분을 메우겠다고 독일군의 주공인 스당에서 병력을 빼내 505장갑벙커를 구원하려 시도하는 뻘짓까지 저질렀다.

9. 전후 활용


2차대전 후에도 일부 구간의 보수를 거친 후 계속 운용되었다. 그러나 이미 냉전 구도에 따라 동서독 국경으로 방어선이 옮겨 가 여기는 별다른 효용성이 없어진 상태였기에 1960년대부터 점차적으로 버려졌고, 버려진 시설들은 와인 저장고나 버섯 농장 등으로 전용되거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철거되지 못한 대형 벙커들이 다수 남아있어 대서양 방벽과 함께 관광상품이 되었다. 밀덕에게는 방문 시 필수적으로 봐야 할 장소이며, 일반인도 볼 만하니 프랑스를 방문한다면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10. 유사한 요새 지대

벨기에는 마지노선 바깥에 위치한 독일-벨기에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1935년까지 에반-에마엘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요새에 대한 정면 공격 대신 글라이더를 활용한 기습 공수 작전을 실행하여 적은 피해로 빠르게 요새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대전 발발 직전에 독일이 만든 지크프리트 선도 마지노선과 같은 꼴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크프리트 선은 나치 독일이 동부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서부에서 공격받는 것을 억제할 목적으로 지었고, 실제로 가짜 전쟁 상황이 이어졌으니 건축비용 값은 했다. 게다가, 이후 반쯤 버려지다 시피하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전에 대서양 방벽을 짓느라 잊힌 방어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기능은 정상적으로 해낼 수 있었다. 애초에 마켓 가든 작전이 미군의 보급 운송 특급인 레드 볼 익스프레스가 퍼져버릴 정도로[12] 보급선이 길어지고 있는데, 그 와중에 지크프리트 선이 성가시게 방해하니, 아예 그걸 피해서 진격하자는 발상으로 나왔으며, 모두 잘 알듯 해당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으니 밥값은 한 셈이다. 미국과 영국의 육중하고 무시무시한 공성전차들인 T28/T95 A39 토터스도 오로지 지크프리트 선 돌파를 위해 개발되었다.[13] 다만, 아르덴 대공세라는 뻘짓으로 병력과 장비를 날려먹으면서, 대전 말기에는 별 저지력을 제공하지 못하고 허술하게 정면에서 뚫려버리고 만다.

마지노선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요새선으로 핀란드에는 소련 방면 국경에 건설한 만네르헤임선(Mannerheim-linja)이 있었다. 핀란드라는 약소국의 국력 부족으로 인해 마지노선 같은 당대의 최첨단 콘크리트 요새와는 거리가 멀었고 호수가 많은 복잡한 지형을 이용하여 무수한 비밀 벙커와 야전 축성 요새를 복합적으로 구축하고 소수의 요새를 추가한 방어선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의 -선이라고 이름 붙은 것들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효과를 발휘했으며, 소련도 이 방어선이 무적이지만 뚫었다고 선전했다. 핀란드야 자기네 방어선이니까 자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소련에서도 이 방어선을 무적의 요새라고 선전한 이유는 이 방어선을 돌파하느라 상당한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다. 별 거 아닌 방어선에서 그렇게 고전했다고 하면 소련군 체면은 팍 깎일 것이다.

소련의 경우 스탈린에 의해 1928년 부터 소련-폴란드 국경에 스탈린 선이 세워졌으나, 1939년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국경이 바뀌면서 몰로토프 선을 새로 구축한다. 그러나 자재 부족등으로 인해 스탈린 선의 시설을 뜯어다가 몰로토프 선 건설에 써먹는 식으로 건설을 하다가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몰로토프 선은 미완성 상태로, 스탈린 선은 여기저기 뜯겨나간 만신창이 신세로 전쟁을 맞이하였고 소련군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돌파당한다.

그리스 역시 동마케도니아 트라키 지역을 위협하던 사실상의 적국인 불가리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당시 정권의 실권자였던 요안니스 메탁사스의 명으로 1936년부터 그리스-불가리아 국경에 메탁사스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침공 때에는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독일군이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빠르게 점령하는 바람에 방어선이 구축되어있지 않았던 그리스-유고슬라비아 국경을 통해 그리스 본토로 밀고 내려오면서 테살로니키를 점령하여 메탁사스선을 포위해버렸고 결국 메탁사스선은 항복하고 그리스 전역이 함락되었다.

멀리 동아시아로 가자면 당시 국민당 장제스가 지배하던 중국에서도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은 상황이었다. 옛날의 만리장성 마냥 무식하게 긴 국경선에다 지은 것이 아닌 수도권인 상하이- 난징[14] 사이에 만들어 놓은 젝트 선이 그것이다. 독일의 저명한 군인인 한스 폰 젝트 장군이 중국에 군사고문으로 있으면서 국민당군의 독일식 무장화와 함께 고안한 뒤 건설했고 후임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장군이 이어받았던, 중국의 수도권이자 가장 서구화된 지역을 감싸는 방어선이었다. 젝트 선, 이명 중국 힌덴부르크 선이라 불리는 이 방어선은 후에 중일전쟁에서 유용하게 쓰였고[15] 당시 3개월 만에 중국을 항복시키겠다며 호언장담하던 일본에 큰 희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군 독일식 훈련과 보병장비만 가진 알보병들이었고 기계화 수준은 매우 낮았으며, 100만에 가까운 대군[16]을 지휘해 본 적이 있는 사령관이 없어[17] 상하이 전투에서 결국 상하이가 함락당한 후 한달정도 지나 난징 전투에서 난징이 함락되는등 쉽사리 뚫렸다. 그럼에도 일본군이 우쑹 전투에서 고난을 겪고 장인 전투에서 지연전을 만나는 등 상하이를 완벽히 함락시키는데 3달이 걸리고 후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걸 고려하면 그래도 최대한 밥값은 한 방어선이었다.

대한민국 군사분계선 인근 지대에 대전차 장애물등 다양한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최근에는 출산율 저하로 인한 병력 부족 등을 고려해 방어 시설을 현대화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있어서는 러시아가 개전 초기의 전격전에 실패하고 우크라이나의 역습까지 받자, 세르게이 수로비킨 장군의 주도 하에 전선에 거대한 방어선인 수로비킨 선을 만들었다. 이 방어선은 최전방의 경계호부터 대전차장애물들과 3겹의 방어용 참호, 후방의 장갑 관측소와 다수의 병력이 대피할 수 있는 대형 벙커, 그리고 압도적인 포병 및 항공 전력까지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켰으며, 그 종심이 20km에 달한다고 한다. 결국 2023년 중후반 이후 본 전쟁은 거대한 소모전 양상이 되어버렸다.

11. 관용적 표현

실제 역사의 마지노선에서 착안하여, 관용적으로 최후의 보루 또는 반드시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한번 넘어서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저지하는 데 실패했을 때는 마지노선을 넘었다, 마지노선이 뚫렸다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

어감 때문에 사자성어인 줄 아는 사람도 있으나, 프랑스 사람인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표현이므로 사자성어가 아니다.

12. 대중문화에서의 마지노선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트 편에서는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구축했으나 독일군이 벨기에 방면으로 쳐들어오자 손쉽게 점령당해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서술했다. 큰 틀에서 틀린 말은 아니나 벨기에 국경에 요새를 구축하지 않은 이유와 같은 세부적인 사정은 서술하지 않아 "2차대전기 멍청하고 무능력한 프랑스"라는 인상이 남는 데 기여했다.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밀리터리 갤러리의 떡밥 중 하나였던 "논에 탱크가 빠지면 꼼짝 못한다"는 대전차 논밭술을 패러디해, 요새 앞에 논을 만들어서 '마지논'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대량의 쌀을 수확하여 아시아에 수출하고 있다는 묘사가 등장한다.

메탈슬러그 스테이지 4에서는 마지노선이 연상되는 256 능선(Ridge 256)에서 진행된다. 스테이지 중반부터 수많은 포대가 플레이어를 공격한다.

레드얼럿2는 각 국가마다 고유 유닛이나 건물이 등장하는데, 프랑스의 고유 건물로 마지노선에서 모티브를 따온 방어탑 그랜드 캐논이 나온다. 레드얼럿 세계관에서는 시간 여행으로 히틀러가 제거되지만, 대신 스탈린이 유럽을 침공해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과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체를 점령한다.

웹툰 가우스 전자 460화에서 마지노선을 설명하며 상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하필 마지노선을 1차 대전 때 지은 요새라고 잘못 서술했다. 댓글로 지적 받고 1차 대전 이후 독일을 막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대사가 변경되었다.

게임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프랑스 독일 국경의 지상요새가 최고치인 10등급이어서 매우 튼튼하기 때문에 적당한 병력이 배치된 경우 정면으로 돌파하기 매우 어렵다. 독일이 마지노선을 정면돌파할 경우 압도적인 공군과 기갑에 더해, 요새포 특성을 지닌 만슈타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AI 프랑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해 지상군 주력을 모두 저 지역에 배치하기 때문에 원 역사처럼 베네룩스 우회로 북부를 밀어버리거나, 이탈리아에게 군사통행권을 받고 북부/남부 상륙, 파리 공수 등으로 손쉽게 프랑스 점령이 가능하다. 독일 또한 서부 방벽 중점을 통해 프랑스 국경에 3등급 요새를 건설할 수 있다. 프랑스로 플레이한다면 벨기에 따윈 개나 줘 버리고 '마지노선 연장' 중점으로 아르덴을 포함해서 벨기에-룩셈부르크 국경까지 10단계 마지노선을 확장할 수 있는데, 제대로 마지노선이 연장되어 불굴의 프랑스 메타로 틀어막으면 그 엘랑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튼튼해지기 때문에 10단계 요새를 끼고 돌려막기까지 해주면 독일의 공세를 무리없이 돈좌시킬 수 있다. 제대로 마지노선에서 막으면 방어력이 네덜란드 침수그라드 이상으로 나오기 때문에 독일의 기갑사단은 물론 소련의 인민웨이브까지 막을 수 있다. 해군이 135척으로 압도적이고 여기에 영국 해군까지 불러오는지라 독일에게 상륙당할 걱정도 없고 3년간 공장 펌핑하고 전투기 생산만 해주면 공수테러를 당할 일도 없는 건 덤이며, 독일이 동맹이라고 데려오는 이탈리아라고 해봤자 손컨 조금만 하면 국경선에 박아놓은 산악사단한테도 털리는 게 이탈리아다. 이탈리아는 6보로 들어오기 때문에 시작부터 주어지는 12산악병 산악사단을 펌핑해서 알프스산맥 국경에 박아놓고 참호 깔면 잘 막는다. 이렇게 방어선 깔고 독소전쟁이 나거나 미국 들어올 때까지 계속 틀어막다가 반격하면 곧 벙커에서 시체로 발견된 총통을 볼 수 있다.

'심리적 마지노선'(psychological Maginot line)의 유래다. 예를들어 '1달러에 대한 원화의 환율 상한은 1400원이다'같이 쓰인다.
[1] 두오몽 요새는 베르됭 요새지구 최동단에 위치한 요새인데 베르됭 방면 공세가능성을 낮게 본 프랑스군에 의해 중포 등이 다수 철거되고 부수적인 방어설비조차 없는 상황에서 전투를 맞이했고, 독일군은 별 어려움 없이 해당 요새를 함락했다. 놀랍게도 독일 부사관 한명과 하급장교 한명이 각각 잠입해 총성 한발 없이 어이없게 요새를 빼앗기고 말았다. [2] 출처는 해당 저서의 문구를 인용한 앨리스터 혼 저, 조행복 역 <베르됭 전투>(2020, 교양인) 533p. 원 출처인 페탱작의 베르됭 전투는 대한민국에 번역되지 않았다. [3] 출처는 위와 마찬가지로 앨리스터 혼 저, 조행복 역 <베르됭 전투>(2020, 교양인) 534p [4] 이 초창기 수준의 전차들은 사실상 상대 참호까지 보병들이 보다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엄호해 주는, 움직이는 엄폐물 정도의 수준이었다. [5] 베르됭 요새지구의 보 요새에서 기약없는 1주일 동안의 결사항전을 벌이다 투항, 적군 지휘관이었던 독일 황태자로부터도 놀랍고 영웅적인 항전을 벌였다며 직접 치하받았고 전후 귀국해서도 영웅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6] 사실 이 당시의 독일도 미국이나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아메리카 국가나 나미비아, 탕가니카 등의 식민지로 인구가 많이 유출되었지만, 이 당시 독일이 프랑스보다 인구가 젊었기 때문에 인구유출로 인한 피해는 프랑스가 더 컸다. [7] Troops of 51st Highland Division march over a drawbridge into Fort de Sainghain on the Maginot Line, 3 November 1939. Keating G (Lt) © IWM (O 227) [8] 사진의 엘리베이터식 포탑은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타입이다. [9] 대전차포와 박격포 포탑 역시 존재한다. [10] The Republic in Danger. General Maurice Gamelin and the politics of French defence, 1933-4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11] 벨기에측 방어선은 에반-에마엘 요새를 빼고는 제대로 건설되지도 않았고, 유사시 운용 계획도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다. [12] 보급부대가 사용하는 기름이 보급하는 양보다 많아젔다. 보급 부대를 보내기 위해 보급을 해야하는 모순이 생겨버린것. 이 때문에 연합군의 진격은 반쯤 돈좌되다시피 했으니... [13] 물론 독일이 항복하면서 일본 상륙군의 최일선에 설 계획으로 전용되긴 했다. [14] 당시 중국의 수도는 난징이었다. [15] 다만 개전 당시 완공되지 못한 채 한창을 공사 중인 곳들이 많았다. [16] 중일전쟁 극초창기 화중 전역에 투입된 중국군은 약 '0만명이었다. [17] 여기에 장비 부족과 방어선이 덜 완성된 점 그리고 제해권과 제공권이 일본에게 있어 함포와 폭격 그리고 독가스 세례에 노출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