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프랑스군|{{{#fff 프랑스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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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91><colcolor=#fff> 장 조제프 마리 가브리엘 드라트르 드타시니 Jean Joseph Marie Gabriel de Lattre de Tassig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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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9년 2월 2일 | |
프랑스 제3공화국 모일레옹엔파레즈 | ||
사망 | 1952년 1월 11일 (향년 62세) | |
프랑스 제4공화국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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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생시르 특수군사학교 | |
직업 | 군인 | |
최종 계급 | 원수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리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군인이다.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889년 2월 2일 프랑스 서부 모일레옹엔파레즈[1]에서 태어난다. 1898년에 프랑스 해군학교에 입학하고 1908년에 생 시르 군관학교에 지원하여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수업을 받은 후 아프리카 모리타니(Mauritanie)에서 전체 성적 5위로 졸업한다. 그 후 소뮈르(Saumur)의 기병 학교에 입학했다.2.2. 제1차 세계 대전
1912년 소위(Sous-lieutenant)로 임관해 제12기병연대( #)에 배치되었으며, 1915년에 대위로 승진하고 제93보병연대( #) 배속되어 베르됭 전투에 참전하였다.2.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모로코에 배치되어 리프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소령으로 진급한다. 그 다음해인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대학에서 더 많은 과목을 이수받았으며, 1928년에는 5보병연대에 배속, 1931년에 중령으로 진급하였으며 막심 베이강의 사령부에 배속되고 이후 1935년에 대령으로 승진과 함께 151보병연대 연대지휘관으로 승진한다. 사족으로 이 시기인 1927년에 결혼해서 1년 뒤 1남을 두었지만,[2] 존 줄리어스 노리치 등의 증언에 의하면 사생활에서 동성애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의심되는 정황이 있다.2.4. 제2차 세계대전
프랑스 침공 당시 아르덴과 로렌 전역에서 활약하다가 프랑스 항복 후에 비시 프랑스와 합의하여 튀니지에서 근무하다 탈출하여 1943년 말 시기부터 샤를 드골 휘하의 자유 프랑스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 2차 세계대전 중에 장성급 장교로 진급하였다.2.5. 인도차이나 전쟁
전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르게 된다. 중국의 공산화로 북부에서 피난처와 무기를 대규모로 제공하는 우방국을 확보한 월맹군의 전력이 강력해지자 프랑스는 해결 방안을 찾게 된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2차대전의 역전의 용사 드타시니를 프랑스 극동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공수부대와 기갑부대를 인도차이나에 증파했다. 드타시니는 월맹군의 강화된 전면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 극동원정군에 여단급 독립부대 기동단[3]들을 창설하고 반격에 나섰다. 드라트르는 하노이, 통킹만, 홍강 삼각주까지 연결된 드라트르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베트민은 이 방어선에 철저히 막혀 도리어 큰 피해만 남긴 채 하노이 함락에 실패하게 된다.[4] 그러나 1952년 드타시니 장군은 악화된 지병 때문에 프랑스로 귀국하고, 1월에 별세했다.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들 중에서는 그나마 아군과 적 모두에게 명망이 있으면서 부하들에게 인기도 있던 인물로, 6.25 전쟁을 지휘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갈리아(프랑스) 버전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이후 전세는 베트민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면서 1954년에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패배로 인해 결국 인도차이나를 완전히 상실했다.
[1]
조르주 클레망소와 출생지가 같다.
[2]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군에서 복무한 베르나르 드 타시니가 바로 그다.
[3]
Groupes Mobiles,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전에
2차 대전 당시
미 육군이 임시로 편제한 여단급 편제 전투 사령부(Combat Command)가 영향을 줬다. 3개 차량화보병 대대를 근간으로 포병,기갑 전력과 공병,통신부대,의무 부대가 지원 제대로 배속되었다. 총 정원은 3천명에서 3천 5백명 사이 선이었다.
[4]
이 와중에 인도차이나 원정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아들 베르나르 드 타시니가 베트남에서 1951년 월맹군의 공격에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