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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6:22:19

모리스 가믈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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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Maurice Gustave Gamelin
모리스 귀스타브 가믈랭
출생 1872년 9월 20일
사망 1958년 4월 18일
복무 프랑스군(1893~1940)
최종 계급 대장(Général d'armée)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레지옹 도뇌르 훈장

1. 개요2. 일생
2.1. 1차 세계대전 이전2.2. 1차 세계대전2.3. 전간기2.4. 2차 세계대전2.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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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스 귀스타브 가믈랭은 프랑스의 육군 장성으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 장군으로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조프르 장군 휘하의 참모로서 마른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고, 그 뒤로도 여러 전투에서 능숙한 지휘를 통해 조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후 프랑스 군부 내 핵심 장성으로 발돋움한 가믈랭은 프랑스군의 세계 대공황 극복 및 재무장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라인란트 재무장, 뮌헨 협정 등 나치 독일의 군사 도발에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기동전, 제병협동 교리가 도입되는 등 변화한 전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태적인 실책을 반복하여 결국 프랑스가 패전하는 원흉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의 영웅에서 2차 대전 최악의 졸장 중 한 명으로 전락했다.[1]

2. 일생

2.1. 1차 세계대전 이전

가믈랭은 1872년 9월 20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피린은 나폴레옹 3세의 육군 총사령관이였는데[2] 아들인 가믈랭의 예술가적 기질을 알고 예술가로 키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부친의 마음과는 달리 어린 나이부터 군대에 관심을 보이던 가믈랭은 1891년 10월 31일 생 시르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1893년에 수석으로 졸업함으로서 본격적인 군인 인생을 시작했다.

가믈랭의 첫번째 군 경력은 북아프리카였다. 그는 알제리 주둔군 제 3연대에서 복무했고 뒤이어 튀니지 주군 여단에서 장교로서 근무했다. 가믈랭은 그곳에서 종종 그림을 그리며 여유롭게 살았다. 1897년 파리로 돌아온 가믈랭은 육군대학 입학시험을 합격한 후 사관학교에서 수년간 공부했다. 이 당시 가믈랭은 특유의 성실성과 재능 덕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고 샤를 랑르자크(Charles Lanrezac) 장군으로부터 미래의 프랑스군을 이끌 인재라는 극찬을 받았다.

1904년, 가믈랭은 샤쇠르 알팽[3]의 제 15대대 장교로 복무했다. 이곳에서 가믈랭은 맡은 임무를 깔끔하게 수행하고 부하들을 잘 이끌어 상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1906년에 '전술에 관한 철학적 연구'라는 책을 출판했고,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군 사상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책을 감명깊게 읽고 몇년 뒤 그를 발탁해 자신의 부관으로 삼은 장성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훗날 가믈랭의 상관이 되는 조제프 조프르 장군이었다. 여기엔 훗날 프랑스군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게 되는 페르디낭 포슈 중령의 도움도 있었다고 한다.

1908년, 가믈랭은 조프르 장군의 부름을 받고 제 2군단의 참모로 부임했고 1910년에는 전쟁부의 관료가 되었다. 1911년, 가믈랭은 샤쇠르 알팽 제 11대대장으로 부임하여 3년간 복무한 후 1914년 3월 조프르 장군의 참모가 되었다. 그러던 1914년 8월 3일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2.2. 1차 세계대전

파일:3_180px-Maurice_Gustave_Gamelin.jpg

가믈랭은 조프르 장군의 휘하에서 열정과 탁월한 전술적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마른 전투에서는 반격 작전을 고안하여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중령으로 승진했고, 1914년 11월 1월에 제2 반여단의 지휘관으로서 독일군의 측면을 치기 위한 '바다로의 행진'을 수행했다. 그 후 알자스 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고, 솜 전투에도 참가했다.

1916년 4월, 가믈랭은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몇번 더 전공을 세워 준장이 되었다가, 8개월 뒤 도로 대령으로 복귀했다. 그 뒤로는 1917년 4월부터 제 11보병사단의 지휘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1차 대전 말 연합군의 대반격인 백일 전투 때 누아용 지방에서 패주하는 독일군을 공격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대승을 거두어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이렇듯 가믈랭은 1차 대전에서 참모, 야전 지휘관으로서 훌륭한 지휘력을 선보이며 프랑스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2.3. 전간기

전후 가믈랭은 해외 각지로 파견되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는 브라질에 있었고, 이후 레반트, 시리아, 레바논 주둔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그러던 1931년, 그는 막심 베이강의 뒤를 이어 프랑스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군의 행정 업무 대다수를 처리했고, 1935년 이후에는 장성들의 감독관으로서의 권한도 부여받았다. 여기에 1938년 1월 21일 제정된 법률에 따라 육, 해, 공군을 조율하는 역할도 부여받았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누린 이는 1차 대전 당시 조프르 원수 외에는 오직 가믈랭 밖에 없었다. 가믈랭은 이 막강한 권한을 사용해 마지노 선을 건설하고, 프랑스군 재무장에 집중했다.

그가 이렇게 많은 힘을 받았던 것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어있었다. 1936년 프랑스에는 SFIO를 중심으로 급진당, 공산당이 연대하는 좌익적인 인민전선이 집권했는데 군대는 반대로 우파적인 성격의 구성원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공화정의 파괴와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극우단체였던 악시옹 프랑셰즈는 필리프 르클레르와 같이 군대 내에 많은 동조자들을 가지고 있었고 비시 정부에서 페탱을 비롯한 수뇌부가 적극적으로 프랑스의 공화주의를 파괴했던 것이 있다. 그러나 가믈랭은 이들과 다르게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이를 자랑스러워했던 인물이었고 인민전선의 입장에서는 그를 신뢰할 수 있을만한 인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36년 3월 나치 독일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단행할 때 이를 방관하는 실책을 범했다.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 피에르에티엔 플랑댕과 총리 알베르 사로는 가능하다면 영국과 협력해서, 만일 영국이 협조하지 않더라도 프랑스 단독으로 독일과 맞서려 했다. 플랑댕 외무장관은 국제연맹에서 독일을 규탄하고 로카르노 조약 당사국들에게 프랑스의 군사 조치에 대한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이처럼 당시 프랑스 정부는 압박을 통해 독일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고 싶었지만, 실패한다면 군사력을 동원 할 생각과 의지가 충만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훗날 "만약 당시에 프랑스가 라인란트로 진격했다면, 우리는 철군해야 했을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가믈랭은 정부의 강경 노선에 미온적으로 답했다. 가믈랭은 플랑댕 외무장관에게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최선을 다하겠지만, 군 예산의 구조적 삭감[4]과 방어 전략 때문에 일방적인 군사 공격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또한 2월 19일 프랑스 참모본부 회의에서 독일군은 이미 프랑스군에 비해 전력이 우위이니 프랑스 단독으로 독일을 라인란트에서 몰아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라인란트에 파견된 첩보원들이 독일군의 규모를 크게 오판해 50만 대군이 라인란트에 진주했다는 비관적인 보고를 올리는 바람에[5] 가믈랭의 발언은 혜안이 되었고, 정부는 뭣도 모르면서 강경하게만 나가는 군알못 취급을 받으며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할 수 밖에 없게되었다.

2.4.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가믈랭은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서 독일과 맞서게 되었다. 당시 가믈랭의 명성과 영향력은 매우 높아, 독일의 장성들조차 가믈랭을 상대하는 것을 꺼렸다. 가믈랭은 현 프랑스의 전력으로는 선제 공격에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 선 방어 후 역습한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우선 마지노선에 36개 사단을 배치하고, 프랑스 북부에 전개된 육군 주력부대를 벨기에 중부에 위치한 딜 강에 전개시켜 딜 강을 자연 방어선으로 삼아 벨기에 영토 중앙 대부분을 가르는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이 마지노선으로 오든,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로 진입하려든 뭐를 시도하든 방어해 적의 손실을 극대화한 후 때가 되면 총반격을 개시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딜 계획은 1940년 1월 10일 딜 방어선에 집중 공세를 취한다는 독일군의 작전 계획서를 입수하며 그 당위성이 입증되는 듯 하였다. 이에 강력한 기갑부대를 가능한 빨리 딜 방어선으로 파견해 적의 기갑사단을 격퇴하기로 결정하고 프라우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을 돌입시켜 딜 방어선 바깥에서 지연전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여기에 가믈랭은 독일군의 예상 침공로 중 하나로 예측되는 네덜란드도 보호하기 위해 딜 방어선의 북쪽 끝에서 네덜란드까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가믈랭은 북동부전선 전략예비대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었던 제 7군을 벨기에 북부로 투입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때 북동부전선 사령관 겸 프랑스군 부사령관인 조르주 장군은 프랑스군 북동부전선의 유일한 예비 야전군을 섣불리 최전선으로 보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가믈랭은 묵살했다.

그 후 과정은 프랑스 침공 참고.

이 시기 가믈랭의 대표적인 실책들은 다음과 같다.

2.5. 말년

프랑스가 패배한 뒤 가믈랭은 1940년 9월 6일 체포되어 에두아르 달라디에, 폴 레노, 레옹 블룸과 함께 패배의 책임을 묻는 리옹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은 비시 정부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올리고 패전의 책임을 전가하며 반대파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인 재판이었다. 그 근거로 프랑스 침공 당시 패전에 책임이 큰 졸장들은 가믈랭 외에도 막심 베이강을 위시로 수두룩했지만, 기소된 것은 페탱이 권력을 잡는 것을 거부했던 가믈랭이 유일했다는 점이 있다.[13] 가믈랭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은 전부 항전을 주장했던 정치인들뿐이었다. 가믈랭은 재판에서 침묵을 지켰다.[14] 재판이 순 억지라서 정치인 출신의 피고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자 재판정의 논리가 궁색해지면서 영 지지부진해졌고, 견디다못한 히틀러는 비시 정권에 재판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1942년 11월 독일군이 비시 정권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전역을 장악할 때 체포되어 부헨발트 수용소에 투옥되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스트리아의 이터 성채로 이송된 가믈랭은 1945년 5월 5일 미군에 의해 구출되었다.[15] 전후 프랑스로 귀환한 가믈랭은 회고록을 출판했는데, 그 내용은 1940년 프랑스군의 졸전에 대한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에도 명예 회복을 위해 애쓰던 가믈랭이었지만 프랑스에서 비웃음 속에 묻혀져 1958년 4월 18일 쓸쓸히 사망했다. 향년 86세.


[1] 비슷한 예로 1차 대전시기 전우인 로베르 니벨 장군이 있다. 그래도 니벨은 전투 하나에서 지는 것에 그쳤지만, 가믈랭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2] 1859년 솔페리노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3] Chasseurs Alpins 알프스 산악경보병부대 [4] 당시 프랑스군 국방 예산은 1930년부터 1934년까지 17% 삭감되었다. [5] 실제 라인란트에 진주한 독일군은 수천명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거의 몸만 온 수준으로 무장이 매우 형편없었다. 이들은 '프랑스가 반격하면 바로 도망쳐라' 라는 명령을 받고 진주했으나, 반격은 없었다. [6] "나는 선을 움직이는 운동이 싫다(Je hais le mouvement qui déplace les lignes)."라던지. 보들레르의 시 <LA BEAUTÉ>(1857) 의 구절이다. [7] 훗날 구데리안은 회고록에 "제9군 정보부서야말로 뜻하지 않은 동맹군이었다"며 비웃는 서술을 남겼다. [8] 1854년 크림 전쟁 때 한 타타르인이 세바스토폴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잘못된 보고를 전한 데서 유래한 관용구. [9] 아르덴 전선을 돌파한 기갑군 [10] 기본적으로 마지노선같은 요새를 건설한 이유가 소수의 군대로 다수를 맞아 싸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식밖의 패착이다. [11] 보프르는 이후 드골 대통령 시절의 프랑스 정부에서 나토 파견 대표 등을 역임했고, 학자로서도 간접전략 이론을 제시하는 등 냉전 시절 프랑스를 대표하는 장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12] 전간기 막바지에 소련과 대독 군사협정을 맺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불 협상단 대표 중 프랑스 대표로 파견된 그 조제프 두망이 맞다. 당시 총사령부 참모장 겸 방공총감을 맡고 있었다. [13] 물론 가믈랭의 책임이 가장 컸음은 부정할 수 없다. 동맹국들을 경악하게 만든 군사 운용은 물론이고 후퇴 시 장비를 버리고 가기까지 했으니 페탱이 항전을 선택해도 결과가 좋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14] 공산주의자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돌렸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책임회피를 한 것은 베이강이었다. [15] 참고로 이때 벌어졌던 이터성 전투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을 남긴 제 2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인 마지막 전투로 유명하다. 미군 독일 국방군이 연합했기 때문. 이 기묘한 연합군이 상대한 적은 바로 무장친위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