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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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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튜어트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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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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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 여배우 순위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케리 그랜트
베티 데이비스
제임스 스튜어트
오드리 헵번
말론 브란도
잉그리드 버그만
프레드 아스테어
그레타 가르보
6위 7위 8위 9위 10위
헨리 폰다
마릴린 먼로
클라크 게이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캐그니
주디 갈런드
스펜서 트레이시
마를레네 디트리히
찰리 채플린
조안 크로포드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게리 쿠퍼
바버라 스탠윅
그레고리 펙
클로데트 콜베르
존 웨인
그레이스 켈리
로런스 올리비에
진저 로저스
진 켈리
메이 웨스트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오슨 웰스
비비안 리
커크 더글러스
릴리안 기시
제임스 딘
셜리 템플
버트 랭카스터
리타 헤이워드
막스 형제
로렌 바콜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버스터 키튼
소피아 로렌
시드니 푸아티에
진 할로우
로버트 미첨
캐롤 롬바드
에드워드 G. 로빈슨
메리 픽포드
윌리엄 홀든
에바 가드너
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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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자|Academy Honorary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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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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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28년 1928/1929년 1929/1930년 1930/1931년
워너 브라더스 찰리 채플린 없음
1931/1932년 1932/1933년 1934년 1935년 1936년
월트 디즈니 없음 셜리 템플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시간의 행진
1936년 1937년
W. 하워드 그린
해럴드 로슨
에드가 버겐 W. 하워드 그린 현대미술관 영화도서관 맥 세네트
1938년
J. 아서 볼 월트 디즈니 디아나 더빈
미키 루니
고든 제닝스 외 10인 올리버 T. 마쉬
앨런 데이비
1938년 1939년
해리 워너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디 갈랜드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 영화구호기금
1939년 1940년 1941년
테크니컬러 USA 밥 호프 네이선 레빈슨 월트 디즈니
윌리엄 가리티
존 N. A. 호킨스
RCA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그의 동료들
1941년 1942년
레이 스콧 영국 정보부 샤를 부아예 노엘 코워드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1943년 1944년 1945년
조지 팔 밥 호프 마가렛 오브라이언 리퍼블릭 스튜디오
대니얼 J. 블룸버그
리퍼블릭 스튜디오 사운드 부서
월터 웡거
1945년 1946년
내가 사는 집 (영화) 페기 앤 가너 해롤드 러셀 로런스 올리비에 에른스트 루비치
1946년 1947년
클로드 자먼 주니어 제임스 바스켓 윌리엄 니콜라스 세릭
앨버트 E. 스미스
조지 커크 스푸어
빌과 쿠 (영화) 구두닦이 (영화)
1948년 1949년
월터 웡거 무슈 빈센트 (영화) 시드 그라우만 아돌프 주커 진 허솔트
1949년 1950년
프레드 아스테어 세실 B. 드밀 자전거 도둑 (영화) 루이스 B. 메이어 조지 머피
1950년 1951년 1952년
말라파가의 벽 (영화) 진 켈리 라쇼몽 (영화) 메리안 C. 쿠퍼 밥 호프
1952년 1953년
해럴드 로이드 조지 미첼 조셉 M. 쉔크 금지된 게임 (영화) 20세기 폭스
1953년 1954년
벨 & 하웰 컴퍼니 조셉 브린 피트 스미스 부스 & 롬 컴퍼니 대니 케이
1954년
켐프 니버 그레타 가르보 존 휘틀리 빈센트 윈터 지옥문 (영화)
1955년 1956년 1957년
사무라이 i: 미야모토 무사시 (영화) 에디 캔터 영화 및 텔레비전 기술자 협회 길버트 M. 앤더슨 찰스 브래킷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B. B, 카헤인 모리스 슈발리에 버스터 키튼 리 드 포레스트 게리 쿠퍼
1960년 1961년
스탠 로렐 헤일리 밀스 윌리엄 L. 헨드릭스 프레드 L. 메츨러 제롬 로빈스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1966년
없음 윌리엄 J. 터틀 밥 호프 야키마 카넛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Y. 프랭크 프리먼 아서 프리드 존 챔버스 오나 화이트 케리 그랜트
1970년 1971년 1972년
릴리안 기시 오슨 웰스 찰리 채플린 찰스 S. 보렌 에드워드 G. 로빈슨
1972년 1973년 1974년
앙리 랑글로아 그루초 막스 하워드 혹스 장 르누아르 메리 픽포드
1976년 1977년 1978년
없음 마가렛 부스 월터 란츠 로런스 올리비에 킹 비더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현대미술관 영화과 할 엘리아스 알렉 기네스 헨리 폰다 바버라 스탠윅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미키 루니 할 로치 제임스 스튜어트 국립예술기금 폴 뉴먼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알렉스 노스 랄프 벨라미 없음 코닥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구로사와 아키라 소피아 로렌 머나 로이 사티야지트 레이 페데리코 펠리니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데보라 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커크 더글러스 척 존스 마이클 키드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스탠리 도넌 엘리아 카잔 안제이 바이다 잭 카디프 어니스트 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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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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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시드니 푸아티에 로버트 레드포드 피터 오툴 블레이크 에드워즈 시드니 루멧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로버트 올트먼 엔니오 모리코네 로버트 F. 보일 없음 로렌 바콜
2009년 2010년
로저 코먼 고든 윌리스 케빈 브라운로 장뤽 고다르 일라이 월랙
2011년 2012년
제임스 얼 존스 딕 스미스 돈 앨런 페네베이커 할 니덤 조지 스티븐스 주니어
2013년 2014년
안젤라 랜스버리 스티브 마틴 피에로 토시 장클로드 카리에 미야자키 하야오
2014년 2015년 2016년
모린 오하라 스파이크 리 제나 로우랜즈 성룡 린 스털마스터
2016년 2017년
앤 V. 코츠 프레더릭 와이즈먼 찰스 버넷 오웬 로이즈먼 도날드 서덜랜드
2017년 2018년 2019년
아녜스 바르다 마빈 레비 랄로 쉬프린 시실리 타이슨 데이비드 린치
2019년 2020년 2021년
웨스 스투디 리나 베르트뮐러 없음 새뮤얼 L. 잭슨 일레인 메이
2021년 2022년 2023년
리브 울먼 피터 위어 유잔 팔시 다이앤 워런 안젤라 바셋
2023년
멜 브룩스 캐롤 리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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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평생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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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존 포드 제임스 캐그니 오슨 웰스 윌리엄 와일러 베티 데이비스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헨리 폰다 앨프리드 히치콕 제임스 스튜어트 프레드 아스테어 프랭크 카프라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존 휴스턴 릴리안 기시 진 켈리 빌리 와일더 바버라 스탠윅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잭 레먼 그레고리 펙 데이비드 린 커크 더글러스 시드니 푸아티에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엘리자베스 테일러 잭 니콜슨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틴 스코세이지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로버트 와이즈 더스틴 호프먼 해리슨 포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톰 행크스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로버트 드 니로 메릴 스트립 조지 루카스 숀 코너리 알 파치노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워렌 비티 마이클 더글러스 마이크 니콜스 모건 프리먼 셜리 맥클레인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멜 브룩스 제인 폰다 스티브 마틴 존 윌리엄스 다이앤 키튼
2018년 2019년 2022년[1] 2023년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줄리 앤드류스 니콜 키드먼
[1] 2020년 시상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으로 인해 시상식 개최가 2년 연기되었다. }}}}}}}}}}}}

파일:Kennedy Center honors.jpg
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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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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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1978년 <colbgcolor=#fff,#1f2023>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푸아티에,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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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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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000> 2001년 <colbgcolor=#fff,#1f2023> 줄리 앤드류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롤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맥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먼 리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레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201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세서미 스트리트, 샐리 필드, 린다 론스태드, 마이클 틸슨 토머스
2020년 데비 엘렌, 조안 바에즈, 가스 브룩스, 미도리, 딕 반 다이크
2021년 저스티노 디아즈, 베리 골디, 론 마이클스, 베트 미들러, 조니 미첼
2022년 조지 클루니, 에이미 그랜트, 글래디스 나이트, 타니아 레온, U2 ( 보노, 디 에지, 애덤 클레이튼, 래리 뮬렌 주니어)
2023년 퀸 라티파, 르네 플레밍, 빌리 크리스탈, 디안 워윅, 배리 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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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고.svg

베를린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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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제임스 스튜어트 없음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없음 알렉 기네스 더스틴 호프먼 올리버 스톤 없음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없음 빌리 와일더 그레고리 펙 소피아 로렌 알랭 들롱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잭 레먼 엘리아 카잔 킴 노박 카트린 드뇌브 셜리 맥클레인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잔느 모로 커크 더글러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로버트 올트먼 아누크 에메
2004년 2005년 2006년
페르난도 솔라나스 임권택 페르난도 페르난 고메스 이안 맥켈런 안제이 바이다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아서 펜 프란체스코 로시 모리스 자르 한나 쉬굴라 볼프강 콜하세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아민 뮬러스탈 메릴 스트립 클로드 란츠만 켄 로치 빔 벤더스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마이클 볼하우스 밀레나 카노네로 윌렘 대포 샬럿 램플링 헬렌 미렌
2021년 2022년 2023년 2024년 2025년
없음 이자벨 위페르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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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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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1956년
세실 B. 드밀 월트 디즈니 대릴 F. 재넉 진 허숄트 잭 L. 워너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1961년
머빈 르로이 버디 아들러 모리스 슈발리에 빙 크로스비 프레드 아스테어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1966년
주디 갈랜드 밥 호프 조셉 E. 레빈 제임스 스튜어트 존 웨인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찰턴 헤스턴 커크 더글러스 그레고리 펙 조안 크로포드 프랭크 시나트라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1977년
앨프리드 히치콕 새뮤얼 골드윈 베티 데이비스 핼 B. 월리스 월터 미리쉬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레드 스켈튼 루실 볼 헨리 폰다 진 켈리 시드니 푸아티에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로런스 올리비에 폴 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바버라 스탠윅 안소니 퀸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도리스 데이 오드리 헵번 잭 레먼 로버트 미첨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로렌 바콜 로버트 레드포드 소피아 로렌 숀 코너리 더스틴 호프먼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셜리 맥클레인 잭 니콜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알 파치노 해리슨 포드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진 해크먼 마이클 더글러스 로빈 윌리엄스 안소니 홉킨스 워렌 비티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 모건 프리먼 조디 포스터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우디 앨런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메릴 스트립 오프라 윈프리
2019년 2020년 2021년 2023년 2025년
제프 브리지스 톰 행크스 제인 폰다 에디 머피 비올라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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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조합 평생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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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Academy Award for Best 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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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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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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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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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트레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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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도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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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델피아 스토리)
게리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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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그니
( 성조기의 행진)
제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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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1945년)
제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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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1947년)
제20회
(1948년)
폴 루카스
( 라인의 감시)
빙 크로스비
( 나의 길을 가련다)
레이 밀랜드
( 잃어버린 주말)
프레드릭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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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 생활)
제21회
(1949년)
제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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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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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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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로런스 올리비에
( 햄릿)
브로데릭 크로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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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페레
( 시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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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의 여왕)
게리 쿠퍼
( 하이 눈)
제26회
(1954년)
제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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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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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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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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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 포로수용소)
말론 브란도
( 워터프론트)
어니스트 보그나인
( 마티)
율 브리너
( 왕과 나)
알렉 기네스
( 콰이 강의 다리)
제31회
(1959년)
제32회
(1960년)
제33회
(1961년)
제34회
(1962년)
제3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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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니븐
( 애수의 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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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허)
버트 랭카스터
( 엘머 갠트리)
막시밀리안 셸
( 뉘른베르크의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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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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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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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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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스코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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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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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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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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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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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1984년)
제57회
(1985년)
제58회
(1986년)
제59회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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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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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회
(1989년)
제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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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3회
(1991년)
제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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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회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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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인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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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파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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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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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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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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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행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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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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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708 Vine Street
}}}}}}}}}}}} ||


}}} ||
<colbgcolor=#151538><colcolor=#ffffff>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파일:JS료1.jpg
본명 James Maitland Stewart
제임스 메이틀런드 스튜어트
출생 1908년 5월 2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인디애나[1]
사망 1997년 7월 2일 (향년 89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배우, 군인, 시인, 가수, 영화감독
서명 파일:제임스스튜어트서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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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151538><colcolor=#ffffff> 신체 191cm
학력 프린스턴 대학교 (1928-1932 / BA)
수훈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1985년)
묘소 캘리포니아주 그린데일 포리스트 론 묘지
활동 기간 1932년 – 1991년
복무 기간 1941년 – 1947년 ( 육군)
1947년 – 1968년 ( 공군)
최종 계급 공군 준장[2]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베트남 전쟁
정당

애칭 지미 (Jimmy)
혈통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종교 개신교 ( 장로회)
데뷔 1932년 'Carry Nation'
부모 아버지 알렉산더 스튜어트
(1872. 5. 19 ~ 1961. 12. 28)
어머니 엘리자베스 루스 스튜어트
(1874. 3. 16 ~ 1953. 8. 2)
배우자 글로리아 헤트릭 맥린 ( 1949년 결혼)
(1918. 3. 10 ~ 1994. 2. 16)[3]
자녀 아들 로널드 월시 맥린[4]
(1944. 6. 19 ~ 1969. 6. 8)[5]
아들 마이클 스튜어트[6] (1947. ~ )
주디 스튜어트 메럴 (1951. 5. 7 ~ )
켈리 스튜어트 하커트[7] (1951. 5. 7 ~ )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1. 개요2. 생애
2.1. 1908년 ~ 1932년2.2. 1933년 ~ 1941년
2.2.1.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2.2.2. 로맨틱 코미디2.2.3. 아카데미
2.3. 제2차 세계대전 참전2.4.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
2.4.1. 멋진 인생2.4.2.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2.4.3. 서부극2.4.4. 살인의 해부 (1959)2.4.5. 기타
3. 제임스와 정치4. 사생활5. 출연작 목록
5.1. 영화5.2. 연극5.3. 다큐멘터리5.4. 라디오5.5. TV5.6. 그 외
6. 여담7.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66.media.tumblr.com/tumblr_inline_nh44uwhRt91qgp297.gif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의 한 장면
존 웨인,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은 우리가 자연스러운 배우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화면 밖에서나 화면 안에서나 똑같다. 그러나 제임스 스튜어트는 그렇지 않다. 그는 엄청난 작업을 통해 대중이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그의 연기는 연구의 산물이다.[8]
존 포드
미국 배우, 군인.[9]

할리우드 황금기의 국민 배우[10][11]이자 미합중국 공군의 장군으로, 할리우드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192cm나 되는 큰 키[12], 긴 다리[13],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우등생, 노블레스 오블리주, 완벽주의자임에도 여유롭고 순탄했던 모범생, 비행 덕후, 흥행면에선 몰라도 작품성 면에선 기복이 없던 역대급 필모[14] 등으로 많은 후배 배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사후 오랜 시간이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가장 사랑 받는 클래식 할리우드 남배우 중 한 명이다.

2. 생애

2.1. 1908년 ~ 1932년

파일:external/40.media.tumblr.com/tumblr_nffnhndDaA1rola9no1_500.jpg 파일:external/cakeyhankerson.files.wordpress.com/jimmy-stewart-accordion.jpg

영국계 미국인 가족이고 관광과 문화 생활을 열심히 했다. 어린시절 말수가 적고 기계설계도를 그리거나 화학 실험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릴적 소원은 아프리카와 사파리에 가보는 것이었다. 간행물과 책을 좋아하고 보이스카우트에서 열심히 활동하기도 했다. 기계, 공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사업차 출장으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칼럼니스트 동생은 제임스가 유명해지기전에 출연한 망한 연극 리뷰를 기고한 적이 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장래희망은 파일럿이었다. 미국해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아이비리그[15]에 전원 합격 하고 대통령 아들들이 다니던 머서스버그 아카데미에 갔다. 10대에 친구와 만든 광석 라디오를 팔고 경험삼아 도로 작업과 마술사를 도우면서 고등학교 학비를 벌고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라틴어는 싫어했다고 한다.

14세에 키가 191cm가 되면서(14세에 성장을 멈춤) 항공사나 의류 모델 제의를 받곤했다. 10대가 되기전 피아노와 아코디언 등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루고 운동신경도 좋은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평범한 학생이었다. 미식축구 학교 대표팀은 광탈했지만 54kg팀 센터였고 야구와 육상 선수였다. 라디오공학(재즈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문학, 합창단, 글리클럽, 토론대회 참여, 교내 신문 편집자로 활동하는 등 교내 모든 활동을 했지만 독서와 데이트겸 영화관람이 가장 기억에 남고 즐거운 일이었다고 한다. 연출과 기획도 하면서 개구리 왕자로 연기를 처음 해보게 된다. 그러나 병약해서 한번씩 기숙학교에서 돌아와 안정을 위한 휴식을 취했고 더 야위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외출도 못하고 가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종부성사까지 받았다.[16] 입학도 한 해 미루게 된다. 밖에 걸어다니기 조차 힘든 기간 동안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를 보면서 더욱 비행사를 선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등 연구소도 속해 있던 신입생 500명 규모의 프린스턴 대학교를 다녔다. [17]

마천루가 들어서던 1920년대에 건축을 전공한 걸로 알려져 있지만 프린스턴 대학에만 건축과가 있었고 학부에서 가업을 위한 전기공학과였다. 기계제도 수업에서 모두 채플을 설계할때 미래적인 공항을 설계한 논문으로 동대학 대학원의 건축과 전액 장학생이 되기도 했다. 동네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 제임스는 평소에 여유가 넘치는지 영화속 보다 더 느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외할동까지 열심이었다. 운동은 잘하는 편이었지만 힘들고 공부할 시간도 필요해서 그만두고 치어리더팀에 들어가서 단장이 되었다.

연극부에 들고 영화관람도 많이 했다. 후에 영화에서만 보던 스타와 데이트하게 되어 신기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가 회원이면 자동으로 가입 되는 가장 보수적인 사교 클럽에서 대학극단과 트라이앵글 클럽 활동, 데이트가 많았음에도 대담한 조슈아 로건과의 소문만 무성한 관계로 처음에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조슈아 로건은 제임스가 순진하진(?) 않았고 허약하지만 감수성이 뛰어나 대학 극단 단원이 되기를 기대했었다고 한다. 부유하고 여러번 결혼 했지만 게이였던 로건은 어디서든 성향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녔다. 극단단원만이 그를 대수롭지 않게 대했고 극단에는 배우 밀드레드 냇윅과 미남 배우 앤서니 퍼킨스(젊은 시절이 제임스와 비슷한 이미지였다고)의 아버지 오스굿 퍼킨스도 있었고 사이가 좋았다. 배우 헨리 폰다도 여기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극단은 소련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많고 개방적이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조슈아 로건을 따라 연극계 인사를 만나러 소련에 가기도 했다. 연극부와 달리 폐쇄적인 클럽은 동성애자가 가입할 수 없었다. [18] 클럽 멤버들은 제임스를 게이로 의심하며 냉소적으로 대했지만 제임스는 곧 클럽의 최고 인기남이 된다. 여대생을 끌어 클럽 멤버들 미래의 신부를 만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나와서 혼자 생각에 잠기는것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렇게 알찬(?) 학창 시절을 보내고 졸업 후에는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대공황으로 취업이 어려워졌다. 프린스턴으로 돌아가려다 조슈아 로건에게 설득당해 뉴욕 브로드웨이로 간다. 사실 제임스는 조슈아 로건의 연극 공연(제임스가 뮤즈)에서 일찍이 워너 브라더스의 명함도 받아 놓은 상태였다. 대학 공연에서는 훌륭하지만 항상 어딘가 부적응자 처럼 보였고 뮤지컬에서 금방 웃을수는 없는 독특한 분위기로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제임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연예계에서의 성공보다는 장학생이니 학교로 돌아가거나 가업을 직업으로 삼기를 바랬다고 한다.

2.2. 1933년 ~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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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로건의 설득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잠시 머물다가 1935년 헐리우드에 데뷔. 단편영화 단역으로 시작했고 초기에는 싱거워보여 좋은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캐스팅에 난항을 겪어야 했다. 펄 벅의 <대지, The Good Earth, 1937>에서 반나절을 걸려 중국인으로 분장 하지만 당시의 편견에 따른 눈매와 큰 키가 중국인으로 보이지 않는다하여 모두 편집 당했다. 헐리우드 신인시절에 대학극단 단원이었던 마가렛 설리번과 헨리 폰다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마거릿 설리번에 의해 작은 영화에 출연하거나 큰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해 점점 메이저 영화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제임스도 설리번에게 힘이 되고자 했었다. 헨리 폰다와는 불확실한 미래를 함께 준비하며 평생지기가 되었고 설리번과 에이전트 헤이워드 부부 옆집에 살면서 설리번에게 개인 연기 지도를 받았다. 설리번과 여러번 공연하면서 많은 영화인과 친분이 생기고 할리우드에 무사히 정착하게 된다.

2.2.1.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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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후에 염세주의자나 무례한 캐릭터, 선악이 모호한 역을 맡을 때도 있지만 선하고 확실한 이미지를 추구했기 때문에 악역만은 하지 않으려 했다. 유일한 악역은 시나리오를 선택할 수 없었던 신인 시절에 해보았는데 어색하고 악역에 소질이 없어 보였다. 할리우드 초기에는 여자친구에게 의지하는 역할을 많이 했고 순수하고 유쾌한 프랭크 카프러 감독 영화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캐프라는 영화 <Navy Blue & Gold> 의 사관생도 스튜어트를 보고 출연 시키기 시작한다. 발성과 목소리, 동작 하나하나까지 멋있는 배우도 있지만 그런 카리스마있는 배우와는 다르다고 할수있다. 알프레드 히치콕도 무엇보다 평범해서 제임스를 캐스팅했다고 한 적이 있다. 군필에 적당히 교육받고 누구나 좋아하는 성격미남이며 등등을 덧붙였지만.

제임스 스튜어트, 헨리 폰다[19], 조슈아 로건은 할리우드 신인시절에 동거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했다고 한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처음이자 마지막 뮤지컬 영화. 유니폼을 입은, 그의 여자친구 말대로 언제나 이기는 허우대 좋은 해군장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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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드라마. 사관학교 선전물인듯하지만 익숙한 장치들이 적절히 배치되어있어 재미도 있는 편이다.
1939년은 작품상을 받고도 남을 걸작이 많이 나왔지만 모두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묻힌 해이기도 하다. 이 무렵, 안소니 만과 존 포드와의 작업 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첫 서부극 출연작 <사진(沙塵, 1939)>을 찍는다. 극에서 폭력을 싫어하고 서부극 세계에서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지만 약탈을 일삼는 건달들에게는 치명적인 명사수이다. 바에서 우유를 찾고 레이스 양산을 쓰는 허허실실한 영웅으로 젊음을 발산하였다.

2.2.2. 로맨틱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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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출연작은 대부분 로맨틱 코메디였다. 당시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위트있는 대량의 시나리오 중심이었고 연극처럼 배우의 매력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상업적인 프랑소와 트뤼포, 우디 앨런 영화 같았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동시대 배우의 느끼함이 없는 상냥하고 귀여운 옆집 오빠, 형 같은 이미지였다. 낭만적인 허당으로 나와 가끔 노래도 부르고 필요하면 사지가 흐느적거리는 춤도 추며 순수 오락을 선사했다.

잘하는건 없었지만 노래를 부르면 평소와 다르게 목소리가 좋아 졌다고 한다. 아카데미를 받은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에서 < 오즈의 마법사, 1939]> OST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부르기도 했다. 콜 포터 [20]에게 <Easy to Love>를 부를 사람으로 산택되어 완벽했다는 반응을 얻기도 했다.

듣기 Easy to Love
듣기 DAY AFTER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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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acious lady (1938)>는 지금 보아도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이다. 영화에서 삼각관계를 이루는 빈틈 많은 식물학자로 젊은 제임스 연기의 장기인 알코올 흡입 후 이상행동 연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하다.
통속적이지만 개봉 당시에는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고 알고보면 수많은 드라마의 오리지널(영상 매체에 한해서) 격이다.
영화에서 1930년대 조차 양산된 호남의 속물스럽지 않은 재벌 캐릭터이지만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으니 그 사회적 지위가 안맞는 옷을 입은것 마냥 어색하기만 하여 생각보다 적역이었다. 빅 애플도 추고 생기 넘치지만 무난했고 담배 연기를 코로 뿜어대는 행위가 역할에는 어긋나 보이지만 오히려 인상적이다.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처음 출연한 프랭크 카프러 감독 영화가 아카데미까지 받으면서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TV 연속극 같은 시부모, 부부 사이의 갈등.
모퉁이 상점은 헝가리 부다페스트가 배경이고 원작과 설정이 조금 다르지만 멕 라이언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 유브 갓 메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펜팔로 싹트는 유사 사내 연애 속에서 사회 생활 전반에 대한 고찰이 돋보여 로맨스의 감동만으로도 훌륭하지만 전부가 아니다. 귀여운 커플. 세련된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은 제임스 스튜어트를 출연시키려고 제임스의 스케쥴 따라 촬영일을 조절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관객 반응에 희비가 교차하는 코미디 작가 역. 고상하고 아름다운 배우의 너그러움으로 로맨스는 순탄하지만 작가의 슬럼프는 후원자의 아낌없는 지원에도 쉬이 극복되지 않는다. 스튜디오 대여로 참여하여 초기에 출연한 영화에서와는 사뭇 다른 입체적인 캐릭터. 표정과 조명이 달라지니 가끔씩 잘생겨 보이기도 한다.
로맨스 소설 작가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국적 취득을 위해 접근하는 유럽인 그리고 그녀의 애인과 애인의 아내까지 느슨한 삼각관계 내지 사각관계 로맨스이다. 바램을 길게 썼더니 출판해주질 않나, 게다가 글이 픽션에서 논픽션이 되려는 상황에 이른다.

2.2.3.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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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카프러 감독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1939》로 처음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뉴욕 비평가상을 받는다.

프랭크 카프러는 비상식의 상식화를 재치있게 풍자하여 아카데미에서 환영받는 감독이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스미스씨로 아카데미를 수상하지 못해 다음 해에 보상 차원으로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로 받았다는 반응이 있지만 제임스 본인은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연기가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에서 보여준 배짱을 연기력 보다 높게 샀다. 막 주목받기 시작하던 때라 열정이 앞서 초췌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애쓰다가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스튜어트는 이 영화를 찍을 때쯤 자신이 영화속 캐릭터를 은연중 모방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기도 했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로 명성을 얻고 이로인해 평생 사람좋은 이미지로 많이 소모되었지만 단순하고 한정된 이미지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헐리우드 고전기 극영화 연기스타일 이긴 하지만 초기에는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코미디 연기에서만큼은 늘 적절한 타이밍과 센스로 돋보였다. 자신이 외모로 관객들의 호감을 얻는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총각시절 볼품없는 다리는 어릴 때부터 콤플렉스였는데 영화에서도 다리가 불편한 역이 많다.

프랭크 카프러, W.S. 밴 다이크와 MGM사의 루이 B.메이어 등은 늘 5kg 정도의 증량을 요구했고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면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 찍을때마다 들으니 비쥬얼을 위해 계절 가리지 않고 내복하의를 즐겨 입고 바지는 맞춰 입었다는 후문이 있다. 영화감독에게 부탁해서 다리 대역도 썼다. "관객들이 내 다리를 보면 제 영화계 커리어는 그날로 끝이에요." 라며 사정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수영복 입는 장면도 캐서린 헵번에게 부탁하여 없던일로 하기로 했다. 헵번이 상태를 보고 "그래요. 정말 끔찍하네요."라면서 들어줬다고.

하워드 휴즈의 저작권 선물로 헵번은 영화의 제작자에 가까웠다. 이 영화로 헵번은 흥행 독약도 만회 하게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커플은 아니지만 <필라델피아 스토리> 헵번 & 스튜어트를 미국 영화 최고의 커플로 선정했다. 영화는 그레이스 켈리의 마지막 영화 <상류사회>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스튜어트를 제외한 배우들은 저돌적으로 대사를 쏟아내고 연극연기같은 과장된 감정표현이라 조금 구식 연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배우들의 열정으로 실수 한번 없는 분위기였지만 하필 제임스에게만 주어지는 느끼한 대사로(헵번도 인정) 인해 실수를 반복해 진땀을 뺐다. 하지만 이 영화의 기자, 작가역으로 조연 분량이었지만 특급 배우들과 연기하다 보니 일취월장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게된다. 이 영화에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말도 빨리한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조연분량이 주연상을 받은 드문 경우이다. 당시에는 최연소 수상이었다. 여우 주연상은 최연소 수상자가 1920년대부터 20대였지만 남우주연상 최연소 수상자는 최근에서야 30대 기록이 깨졌다. 키스 4부작으로 화제가 되었던 <피아니스트 (2002년)>의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지금까지도 유일한 20대 수상자이다. 당시의 오스카 시상식은 무대와 절차가 간소했고 대통령의 오스카 축하 메세지가 있었다. 제임스가 아카데미를 수상한 1941년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오기도 했다.

아카데미상을 받고 주저없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최초로 실전에 지원한 할리우드 스타가 되었다. 그 뒤 스튜어트 외에도 클라크 게이블을 비롯해 많은 스타가 참전했고 전사한 사례도 있었다.

2.3.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헐리우드 최고의 영화배우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육군 항공대에 자원 입대하여 폭격기 조종사로서 그 험악한 유럽 전선에서 수십차례 전투비행을 치렀다.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이 징병제로 전환하자 자원 입영원을 내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체중미달로 불합격을 받자[21] 스테이크를 꾸역꾸역 먹어가며 살을 찌워서 다시 도전했는데 아슬아슬하게 또 불합격, 결국 군의관에게 사정해서 합격판정을 받아낸다. 1941년 3월 22일, 육군 이병으로 들어가 군번 0433210을 받았다. 입영지는 캘리포니아 포트 맥아더였고, 카메라맨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속옷 입고 있는 사진을 찍어 신문에 냈다. 훈련소의 한 늙은 하사관은 "너 참 불쌍한 새끼구만."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튜어트가 기초 군사훈련을 받던 훈련소 정문에는 그를 잠깐이라도 보고픈 소녀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언론에서는 그의 군복무를 카메라로 찍고 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스튜어트는 묵묵히 훈련에 임했다.

사실 제임스 스튜어트는 1935년에 이미 조종면허를 취득했었고 소형이지만 전용기도 소유한 숙련된 조종사였다. 자연스레 미 육군항공대로 가서 비행 훈련을 마치고 1942년 1월 장교로 임관, 전선에 배치되었다. 원래는 전투기 조종사를 지망했으나 결국 폭격기 조종사가 되었다. 1942년 12월, 스튜어트는 4발 엔진 비행학교[22]에 입과하여 거의 탑으로 수료했고, 이후 제29폭격비행단으로 가서 B-17 교관이 된다. 그 시기에 그의 룸메이트가 사고로 죽었고 3명의 훈련생도 불운을 겪었다. 스튜어트는 군복무에 관해서는 입이 무거웠다. 스튜어트가 사망하고 몇 년이 지난 뒤 당시 스튜어트의 훈련생이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스튜어트는 모든 비행기가 돌아올 때까지 관제탑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모든 부하의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그당시의 모두가)다 그런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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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는 대전중에 B-17과 B-24를 모두 몰았다. 1943년 3월, 그는 제445폭격기전대 703대대 작전장교가 되었고, 3주 후에는 대대장이 된다. B-24로 20회 출격을 하고 나서, 1945년 초 스튜어트는 버킹햄셔로 가서 453전대의 작전장교로 발령받았다. 453전대는 B-17이 주력이었고, 이때 그는 주로 관제탑에서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이 일에 심드렁해진 스튜어트는 직권남용을 한다. 그는 453전대의 선도기 B-17 '페이퍼 돌'의 부조종석을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지정한 것이다.[23] 페이퍼돌의 부조종석은 고위장성이 앉았고 스튜어트가 타고 작전에 나가기도 했다. 그 폭격기 기총수 댄 브로디는 이렇게 말했다.
"스튜어트는 우수한 조종사임을 보이고 싶어했다. 특히나 위험한 작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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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4 리버레이터 폭격기 앞에서 부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제임스 스튜어트(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스튜어트는 폭격기 전대 사람들의 많은 신뢰를 받았다. 그는 지프차를 몰다가 막사로 걸어가는 대원들을 보면 항상 태워주었다. 원래 최선임 참모장교는 매 5회 폭격마다 교대된다. 5회째 되는 작전에는 그도 작전에 참가해야 했다. 그런데 스튜어트는 작전장교 보직을 하면서 11회나 출격했다. 2차대전 당시 폭격기 요원을 오늘날의 전투기 조종사 처럼 우아한 병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은 유럽전선에서 어지간한 육군 병사들보다도 훨씬 전사할 확률이 높았다. 폭격기가 대공포에 직격으로 맞으면 승무원들은 탈출할 여유도 없이 몰살당하는 신세였고, 대공포탄 파편으로 인한 과다 출혈로 너무나 많은 승무원들이 죽은 탓에 Flak Vest라 불리는 방편복을 다른 병과보다 먼저 지급받을 정도였다. 심지어 한번 폭격 작전에 25% 이상의 손실을 기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유럽 본토 폭격을 담당한 미 육군항공대 제8공군의 항공승무원 사망률은 자그마치 12.38% 이상으로, 2차대전기 미군 내에서 최악의 사상률을 감당한 부대 중 하나다. 미 육군에서 이를 뛰어넘는 사상률을 기록한 병과는 오로지 18.9%의 전사자 비율을 기록한 보병 하나뿐이다.

그는 B-17을 몰게 되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리버레이터를 그리워했다. 나중에 B-24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전투에서 B-17은 25,000피트 상공 대열폭격에 잘 어울리지 않았다. B-17은 12,000-18,000 피트에 더 잘 어울렸다."

종전 후 영화배우 활동을 하면서도 군사 재판을 맡거나 미 공군 항공우주 시스템을 선전하는 등[24] 군을 떠나지 않았으며, 미합중국 공군이 육군 항공대를 기반으로 창설될 때 공군으로 전군했다. <전략 공군 사령부, 1955> 같은 공군 홍보영화도 찍었다.[25]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린든 존슨 임기 때 상원의원과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마 권유를 받았지만, 공군 직위를 고집하며 거절했다. 사실 할리우드 스타들은 한번씩 저런 권유를 받는다고 한다. 1959년 7월 23일 미 예비공군(AFRC) 준장으로 진급했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있지만, 제복군인으로는 제일 높이 올라간 미국 연예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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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부모님과 동료 배우 진저 라저스와 미 예비공군 준장으로 승진 이후

1942년 Jimmy Stewart and Edgar Bergen Radio Routine

매파의 상징 존 웨인이 징집을 피해 전쟁 영화 출연 등으로 때운 것과 비교가 된다. 군 경력은 베트남전까지 이어져, B-52 스트라토포트리스에 옵저버로 탑승하여 베트남 전선에 참가했다. 2차 대전의 원로이자 장군인 헐리우드 스타였지만 항상 소박하고 자상한 태도를 보인 그의 인기는 군부대에서도 일반 사회를 방불케 했다.

스튜어트는 과묵하고 느긋한 성격으로 매사에 느렸다. 말도 느리고 밥도 느리게 먹고 걸음도 느렸다. 그러나 부대 안에서는 다른 사람 같았다고 한다. 군에서 그러기 쉽지 않은데 상사로서 평판이 좋았다. 시키는 일이 없고 알아서 신속 정확하게 기계처럼 움직였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위험한 작전을 수행한 후 이런 말도 했다. "공포는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공포는 우리의 판단을 왜곡시키고 반사운동을 잠재운다. 그렇게 실수를 하게 되는것. 더욱 나쁜 것은 그게 전염된다는 것. 내가 공포를 느낄 때 난 그걸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전염시킨다." 1968년까지 복무하고 퇴직금은 미국공군사관학교에 기부했다.

본 문단의 주요 내용이 실린 기고문(영문)

2.4.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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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후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약 80편의 영화 출연작 중 1/3은 참전하기 전까지 5년간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다작 한 결과이다.[26] 영화산업이 첨단이었던 1930 ~ 1940년대 할리우드는 독자적인 작가색과 개성은 부족하지만 완성도 높은 영화를 단기간에 완성하는 꿈의 공장이 되어 많은 명작을 남긴 황금기였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좋은 영화를 성실하게 제작하던 대형 스튜디오의 방식을 좋아했고 고정수입이 있는 배우였다. 그러다가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러닝 개런티를 받은 배우가 된다. 이는 스태프들이 출연료 외에 흥행결과에 따라 개런티를 받는 방식으로 고가의 배우나 감독의 개런티를 줄여 제작비가 지나치게 상승하는 것을 방지하고 계약 당사자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영화의 완성도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헐리우드 배우로서는 거의 최초로 독립영화에 출연하여 흥행수입에 비례하는 출연료를 제안했고 영화가 흥행하면서 1950년대 최고수입 스타대열에 들었다. 1950년대 흥행 배우 1위인데 밑에 찰턴 헤스턴, 록 허드슨을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돈가방 수준이었다.

2.4.1. 멋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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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에 잠시 은퇴를 고려해본 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잠시, 군인이나 파일럿이 중요한 일을 힘들게 하는것에 비해 연예인은 과잉수입과 대접을 받는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좋은것은 아니지만 자원입대 했고 책임의 한계에 부딪혀본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고 한다. 전쟁 후 첫 출연작은 제임스 스튜어트 출연작중 가장 대중적인 멋진 인생 이다.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왠지 처음에는 이역을 맡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영화의 감독 프랭크 카프라는 스튜어트를 인민주의 표상으로 활용하여 스타덤에 오르게 하였고 긴 공백기를 가지고 방황하고 있을 때도 출연 제의를 하며 할리우드에 남을 수 있게 해주었다. 스튜어트는 < 멋진 인생>으로 다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사회도 보고 재기에 성공한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1985년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소감에서 긴 세월 동안 내가 잊혀지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는 상으로 무척 의미있다는 소감과 프랭크 카프라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하였고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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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인생》은 낙관적이고 결말이 허무맹랑하지만 폭력을 강조하지 않아 제임스 스튜어트가 가장 좋아하는 출연작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여름에 촬영 했고 처음으로 인공눈을 사용했다. 작은 아이디어를 구체화 했고 단조로워 보이지만 보기만해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영화로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늘 새롭게 감동할 수 있으며 기준을 제시한 시금석 같은 영화라고 격찬했다. 개봉 당시에는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저작권이 만료되고 TV로 방영되면서 인기를 얻어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클래식이 되었다. 스튜어트에게 이영화는 각별하여 모스크바 국립 대학과 협력하여 러시아어 번역본을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에 가장 먼저 파급된 미국 TV 매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프랭크 카프러가 스튜어트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조지 베일리는 악독한 포터씨의 횡포로 평생 집을 구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고군분투 하는 착한 은행가 이면서 할리우드에 오지 않았다면 세계를 돌며 직접 비행장을 건설하고, 미래 도시를 설계하는 모험가를 꿈꾸지만 양보만 하다 가업을 물려받고 고향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오버랩된다. 그의 보통 영웅 이미지는「멋진 인생」이 한몫했다.

2.4.2.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

제임스 스튜어트는 케리 그랜트와 함께 앨프리드 히치콕이 가장 선호한 배우였다. 보통 제임스 스튜어트하면 따뜻한 이웃 이미지이지만, 히치콕 영화에서는 사뭇 이미지가 다른데,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냉혹함을 보인다. 히치콕 영화의 두드러지는 특징상 언제나 수사하는 사람[27]이다. 관음증 편집증이 있거나 신체가 불편하고 날카롭지만 감정 없는 사람같다. 히치콕은 대중적이고 사려 깊은 이미지의 스튜어트가 서스펜스를 극화 시킬 수 있다고 보았고 a painstaking craftsman 이라고 묘사했다. 제임스는 히치콕이 가장 선호한 배우로 보다 예술성 있는 영화에 나오지만 성실한 샐러리맨 같고(히치콕의 표현) 그랜트와는 다르게 히치콕이 영화를 구상할 때 의견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히치콕이 이미 능수능란하게 해오던 종류의 것보다 영화적 기법을 실험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적어도 10년은 들어 보이면서 영화 안팎으로 일복이 넘쳤는지 오십줄에 들어서자 마자 은퇴한 경찰이나 검사 같은 은퇴한 노동자역(?)을 많이 맡게되고 나이에 맞지 않는 소수의 미스 캐스팅을 인정하면서 더 흥미로운 영화에 많이 출연하게 되었다. 전쟁 전에는 주로 로맨틱 코미디나 코미디 영화에서 순진한 이상주의자를 맡았지만, 1940년대 말부터는 참전으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보고 결혼도 하면서 연기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영화에서 일반적인 로맨스는 물 건너갔지만 노안은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배우 커리어에 있어 좋던 나쁘던 대수였다. 히치콕은 스튜어트의 노안이 《 현기증(미국 영화)》 흥행실패의 큰 요인이라 보고 《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 제임스 스튜어트 대신 4살 연상이지만 케리 그랜트를 캐스팅했다. 스튜어트는 30대 초반까지 소년 같은 면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후부터 노화가 빠르게 진행 되었다. 현기증의 상대역 킴 노백보다 20살 넘게 연상이었지만 스튜어트는 점점 더 노화해서 1970년대부터는 킴 노백보다 40살은 더 많아 보인다.[28] 동영상. 《현기증》은 제임스 스튜어트의 마지막 히치콕 영화 출연작이 되었지만 히치콕과는 후에도 잘지냈다. 히치콕은 생의 마지막 행사인 제임스 스튜어트의 AFI 행사에 참석해 주기도 하였다. 좋아했다던 그레이스 켈리가 참석해서일 수도 있지만.
히치콕 영화 첫 출연작은 실험적인 《로프(1948)》였다. 17세에 로스쿨 입학을 앞둔 영재에 부유한 집안의 커플 레오폴드-로엡 사건을 모티브로 한 연극[29]이 원작이다. 동성애자라는 설정 때문에 몇 명의 캐스팅이 무산된 뒤 세계대전 후 전환점을 맞은 스튜어트가 캐스팅 되었다. 두 남자가 하버드 학생[30]을 살해하고 시체를 넣은 관이 있는 곳에 피해자의 부모와 약혼녀를 초대하고는 스릴을 즐긴다. 스튜어트의 사건을 주도하는, 자신이 초인이며 범인은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머저리 같은 제자가 신봉하는 은사역은 잠을 설칠 정도로 불편했다고 한다. 히치콕은 배우를 곤란하게 만들고 은근슬쩍 딜레마에 빠뜨리곤 했다. 제임스는 로프에 출연한 후에 다음 히치콕 영화에 출연하기까지 6년의 텀이 있었다. 《로프, 1948》에서 원테이크 처럼 보이려는 카메라 워크를 "카메라가 춤춘다." "여기서 리허설은 카메라만 했다."며 농담 하기도 했는데 난해한 촬영법과 현장 분위기 를 떠올리며 《이창》(1954)에 출연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곧 출연료를 조절 하면서까지 히치콕 영화의 출연을 원하게 되었다. 히치콕이 지금은 누벨바그 비평가의 공으로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거장으로 재발견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카데미와도 인연이 없고 작품성보다 장르영화에 특화된 흥행작 감독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창에서 히치콕의 또다른 페르소나 그레이스 켈리와 함께 출연한다. 여기서 그는 다리를 다쳐 하루종일 방 안에 갇혀있는 사진작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OST 케세라, 세라 로 유명한 앨프리드 히치콕의 유일한 본인 작품 리메이크작으로 원제는 「The Man Who Knew Too Much」이다. 모로코 마라케시, 런던을 오간 로케 촬영과 장황한 오케스트라 장면에서 원작보다 대작을 만들어 보겠다는 히치콕의 의지가 엿보인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극중에서 가수와 결혼했다. 그녀는 매일 불특정의 수많은 인파를 겪는 인기 가수인지라 남편보다 이방인이나 낯선사람에 대한 직감이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제임스 스튜어트도 히치콕표 일사불란한 주인공이지만 사건해결의 중요한 키는 대부분 그녀가 가지고 있다. 서스펜스의 교과서라 할만한 히치콕 영화 중에서는 재미가 덜 하다는 평이 있지만 모모씨의 위궤양과 모모씨의 알레르기 덕분에 모처럼 얻은 휴가의 즐거운 분위기가 관객에게까지 전해져 흥행했다. 제임스의 대사는 처음 계획 했던 것보다 몸개그와 오케스트라, 풍경으로 대체되기도 하면서 상당부분 줄었다.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로 아카데미를 받고 《멋진 인생, 1946》으로 가장 유명하고 대표작이 많지만 개봉한지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의 영화 평론가와 영화광들은 히치콕의 대표작이기도 한 《현기증》을 그의 대표작으로 본다. 히치콕의 1958년작. 이미 가루가 되도록 분석된 불세출의 걸작. 10년 단위로 걸작 순위를 발표하는 영화소식지 사이트앤사운드 에서 50년만에 시민케인 대신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시민케인이 머지않아 탈환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예술적 성취를 지향하는 작품보다 사적 의미를 갖는 작품이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추세가 반영된 결과였다고 한다. 개봉 당시에는 식은땀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루하고, 비교적 비호감 인물만 등장하는 등[31] 흥행할만한 요소가 없어 외면받았었다. 이 영화는 병적인 로맨스 라는 점에서 타르콥스키의 영화 <솔라리스 (Солярис, 1972)>나 히치콕이 존경하고 무신론자로 유명한 스페인 출신 멕시코 초현실주의 영화 거장 루이스 부뉴엘 <이상한 정열(Él, 1952)> 과 비교되기도 한다. 시네마베리테 운동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 《활주로 (La Jetée, 1962)》에도 영향을 줬다. La Jetée는 활주로 혹은 승강장, 환송대라는 한국어 제목으로 20분 남짓한 사진으로만 구성된 발전적인 형태의 시네로망 단편이고 <브라질>, <몬티 파이선>시리즈의 테리 길리엄 감독 영화 <12몽키즈>를 비롯한 여러 SF영화에 영감을 준 명작이다. La Jetée가 원작인 <12몽키즈>에서는 현기증의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크리스 마르케는 현기증 단 한 개의 영화만이 기억, 광기의 기억을 영상으로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하였고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 「태양없이」에서도 현기증의 여정을 따라가며 영화의 해석을 내놓았다.

2.4.3. 서부극

지금은 철지난 장르지만 당시 할리우드 스타라면 누구나 서부극에 출연했다. 제임스 스튜어트도 많은 서부극에 나왔고 영화 출연 수입의 대부분일 정도로 서부 영화 흥행성적이 좋았다. 전통적인 교훈을 전달하면서 새로운 시도가 가미된 서부극에 많이 출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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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d of The River (1952)
안소니 만[32]의 심리 웨스턴이 대표적이다. 이 서부극들은 개척시대 배경일 뿐 필름 느와르 영향 아래 있었다. 밤의 웨스턴이라고 불리며 카우보이들이 정의롭고 호탕한 영웅이 아니라 불안한 정서에 커피를 많이 마신다. 제임스는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연출하던 안소니 만을 연출가로 추천하고 8편의 영화를 함께한다. 이중 다섯 편은 서부극이고 <The Naked Spur(1953)>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지만 흥행성적은 보통이었고 나머지 네 편의 서부극은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다. 이 다섯편의 서부극 모두 로튼 토마토의 토마토 지수 100% 이기도 하다. 1950년대 말 안소니 만은 스튜어트와의 파트너십을 끝낸 후 걸작 <Man of the West>를 제외하고는 평론가들에게 새로운 스타를 원한것이 아니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서로에게 좋은 기회였고 1960년대 인터뷰에서 제임스와의 작업에 대하여 격찬을 아끼지 않은 바가 있다. 앤서니 만과의 첫 작품인 <윈체스터 73>의 시사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영화가.시작하기 전에 제임스 스튜어트의 이름이 주연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키득거렸다. 로맨틱 코미디에나 어울리는 유순한 남자가 웨스턴의 주인공이라는 게 잘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앤서니 만과의 파트너십 시작을 알린 이 영화에서 만의 회상에 따르면, 승마에는 이미 능숙했던 스튜어트는 사격 연습에 매진하며 배역에 몰두했다고 한다. 스튜어트는 서부극에 출연할 때 파이라는 똑같은 말만 타고 똑같은 모자를 쓰고 서부극 통틀어 몇 가지 옷만 돌려 입는다. 존 포드의 요구가 있을 때만 다른 모자를 썼다. 애마 파이는 종종 제임스의 그림 모델이 되곤 했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도 4편 출연했다. 존 포드와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이라 할만하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이다. 가짜 명성으로 무법자의 세계를 종결짓는 법률인, 정치가로 나온다. <Two Rode Together>에서는 속물근성의 보안관 역으로 실용주의와 시장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본주의형 영웅을 연기했다.
<The Shootist>에서 존 웨인의 시한부를 알리는 의사로 출연했다. 이 영화는 존 웨인의 유작이다. 스튜어트는 존 웨인에 대해 그보다 뛰어난 연기자들은 많지만 존 웨인은 비슷한 서부 영화 배역만 수도 없이 반복함으로써 신뢰감이 생기고 디테일이 훌륭한 연기를 하게되었다고 했다.

2.4.4. 살인의 해부 (1959)

유럽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베를린 영화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수상경력이 이를 어느정도 증명하지 않을까 싶다. 오토 플레밍거의 《살인의 해부》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볼피컵(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법정영화이며 지금까지도 미국 사법제도를 날카롭고 통렬하고 재치 있게 분석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은퇴한 검사 폴 비글러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영화 캐릭터답게 조금은 유별난 인물이다. 독신주의자에 냉소적이고, 청렴하지만 순진하고, 자신만의 신념으로 일을 해나간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폴 비글러역으로 다섯번째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도 오른다. 이 영화의 판사역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어버린 실제 사법계의 거물 조지프 웰치가 연기했다. 영화의 포스터는 영화지 프리미어가 선정한 최고의 영화 포스터이고 이는 히치콕 영화의 타이틀을 주로 제작하던 솔 바스가 담당, 음악을 담당한 듀크 엘링턴은 재즈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료로 잠시 모습을 보인다. 당시에 보수적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의 아버지는 이영화가 심각하게 나쁜 문제작이니 절대 관람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지역신문에 광고를 내고 아들이 영화 시사회에 참여하는 것도 반대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2.4.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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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의 정신 (1957)

Call Northside 777 (1948)
1932년 일리노이 주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 한 종신범의 실화를 그린 작품으로, 무고한 한 인간이 모순된 법에 의해 희생되어야 하는 일면을 파헤쳤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유일한 필름 느와르 출연작이고 극중 시카고 타임즈 기자역이다.

전기 영화
준수한 양산형 전기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 투수 몬티 스트래튼, 마크 트웨인, 칼빈 소총을 만든 칼빈 윌리엄스 등.

하비 (1950)
코미디 영화《하비(1950)》로 네번째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다. 하비에서 보이지 않는 토끼친구 덕분에 그 옛날에 크로마키 촬영하듯 연기했다.《하비》에서의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편이었고 하비의 TV 영화와 연극에서도 같은 역을 했다.

No Highway in the sky (1951), No Highway
세월이 지나 SF 보다 재난물에 가까워졌지만 영국 엔지니어 출신 SF작가의 원작이 있는 <No Highway in the sky 1951> 에도 출연했다. 일말고 다른데에는 전혀 신경을 안쓰는지 집의 위치를 잊어버리는 괴짜지만 책임감 강한 엔지니어 역이었다.

1960년대
1960년대에는 가족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그 외에는 중국의 산악지대와 사막 등 터프한 로케이션을 선호했다. 그중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 사막의 기적(1965)이라는 재난영화는 휴 로리 주연으로 2000년대에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1962년에 가족 코미디 영화 <홉스씨 휴가 가다,1962>로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0년대 이후
1970년대부터 노안이 가속화되고 건강상태도 악화되어 활동이 줄기는 했다.[33] 사실상 이 시기 은퇴한거나 마찬가지였지만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매스컴에 빈번하게 노출되었다. 영화에는 단역이나 우정 출연 했고 TV에 많이 출연했다. 버라이어티 쇼나 코미디 쇼, 토크쇼, 연속극 등 여러 쇼에 출연했는데 TV에서도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을수 있었다. 이 시기에 스튜어트는 영화가 수위만 높아지면서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6번째 개정판)중 가장 많은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총 14편 이고 5번째 개정판은 13편, 7번째 개정판은 14편인데 6번째 개정판에 없던 다른 영화들이 있다. '썩토'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필모는 신선한 토마토로 가득하고 100% 토마토가 열개 넘을 뿐만 아니라 평점 미정인 좋은 영화도 많다. 연기 스타일에 단점이 있지만 작품을 잘 고르고 운도 따라줘 정말 많은 걸작에 출연했다. 다작하지만 망작은 손에 꼽을 정도 이다. 관객은 고객이 아닌 파트너이며 다양한 관객이 가장 좋은 비평가 라고 한 적이 있다. 정직하고 청교도적인 세계관 속 평범한 사람의 소박한 용기와 신념을 스크린에서 실천했다. 느린 말투, 발성이 안좋지만 상쇄시킬 어떤것이 있었다. 연기자임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많이 없다. 감탄사를 많이 쓰긴 하지만 목소리나 발성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 유행어 없는 코미디언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튀는 점 없는 제임스는 코미디 연기와 클래식 세대 답지 않게 생활연기를 잘했다. 동일한 사람과 여러번 작업하고 나는 나를 연기한다는 연기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데뷔가 늦고 연극 무대에 많이 서지 못한 점을 후회 했다고 한다. 영화에 많이 출연했지만 장시간 연속으로 연기하고 연기와 반응 모두 생생한 연극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특수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보다 일상을 연기하면서 감동을 주는 것이 더 고단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연기평에 영화는 온갖 기술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 영화연기는 태생적으로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3. 제임스와 정치

대부분의 할리우드 인사들과는 달리 공화당 지지자이다. 로널드 레이건이 한 때 민주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지지를 철회하려 했던 철저한 공화당원이었지만[34] 1968년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민주당 지지자들과 총기 규제 법안에 찬성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고 민주당 정책을 지지하는 등, 사안별로 다양한 의사를 표했다. 민주당 선거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언행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양측에서 환영받았다.

그의 조사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미국은 오늘 국가의 보물을 잃었습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위대한 배우이며 신사에 애국자였습니다."

좋아하는 미국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고 한다. 실제 생활과 군 경력도 흠잡을 데가 없어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았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권에 대한 야망까지 내비추기 시작했을 무렵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의 직설적인 잭 워너는 한 인터뷰에서 지미 스튜어트같은 사람은 왜 대통령 생각이 없는건지 의문스럽다고 농담 했는데 많은 미국인들이 공감하기도 했다. 1976년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선거운동을 벌였고 1968년과 1972년 선거에서는 리처드 닉슨을 위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극 민주당 지지자인 헨리 폰다와는 평생지기였고 정치 프레임을 떠나 건실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다른 성향을 지닌 폰다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했다.
"1940년대 헨리와 정치논쟁을 벌이다 싸움이 났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맞았지. 싸움이 끝난 후 폰다가 '우리 앞으로 정치얘기는 절대 하지 말자'고 했고, 나도 그의 말에 찬성했네."

1950년대에도 헨리 폰다는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를, 제임스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지지해서 논쟁을 벌이다 서로 냉대한 적이 있고 선거철만 되면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자신이 애국자이지만 구식임은 인정했고 크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존 에드거 후버의 FBI 홍보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에드거 후버가 캐스팅 하고 카메오 출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내키지 않았지만 1940년대 말에 정보요원으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일을 도운 적이 있다. 누군가의 밀고로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았던 민주당원 영화인 호세 패러는 제임스 스튜어트가 상당한 고충에 의하여 확실한 극단적 공산주의자의 정보만을 제공했다고 한다.

동시대 영화인 엘리아 카잔과는 다르다. 카잔의 경우 원래 공산당원이었는데 동료를 밀고한 것이고, 스튜어트의 경우 원래부터 반공주의자였으므로 격이 다르다고 봐야 한다.[35] 1970년대까지도 공산주의자들이 불안의 상당한 원인이며 잠재적인 위험으로 느껴진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워드 휴즈 제작의 <스카페이스, 1932>에 잘 묘사되어 있는 갱이 들끓던 20세기 초반을 겪었던 그는 FBI 자격으로 갱과 마피아 정찰에 열성적으로 임했고 자고 있을 때 마피아의 습격으로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4.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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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배우들과 파티

결혼 후에는 모범적인 생활을 했지만 결혼 전까진 대부분의 할리우드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생활을 했다.그러나 항상 뭔가에 집중하고 바빠서 독신주의자처럼 보였다고 한다. 화병으로 숨진 영화 제작자 어빙 솔버그와 사별한 할리우드 퀸 노머 쉬어러와 교제 하면서 경력이 급 좋아졌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유명인들 중에는 주로 중성적인 목소리에 미망인 여자들과 교제했다. 당시 유명인들이 결혼을 많이해서 미혼이 드문 탓도 있다. 연기파 배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드물게 미혼이었는데, 둘은 결혼할 뻔했다. 드 하빌랜드는 동생 조안 폰테인과는 앙숙이었는데 폰테인 역시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뛰어난 배우로 제임스가 결혼 전 마지막쯤에 사귄 적이 있었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상대역이었던 진저 라저스와도 교제 했는데 제임스에게 질리지 않고 빠져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할리우드 초기 시절 게이 루머 파장이 커지자 영화사 MGM 보스에게 매음굴에서의 난교를 증명해야 하기도 했다. 그 뒤 한동안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공연했던 진저 라저스(결혼 5회), 헤디 라마르(결혼 6회), 조안 크로포드(결혼 4회) 등과 이성애를 드러내길 바라는 소속사의 압력을 의식하여 공개 데이트하며 우정을 쌓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셋 모두 두 번째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제임스를 제외하고는 요즘 할리우드 영화인들보다 이혼이 많았다. 제임스와 같은 해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진저 라저스의 두 번째 남편 루 에어즈는 별거 중 제임스와 같은 영화에 조연으로 나오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 인기가 없던 연예인은 없겠지만 어떤 조건이나 걸림돌에도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5. 출연작 목록

5.1. 영화

5.2. 연극

5.3. 다큐멘터리

5.4. 라디오

5.5. TV

5.6. 그 외

시네마 천국, Menace II Society : 멋진 인생
라디오 데이즈 : 필라델피아 스토리
태양없이, 12 몽키즈 : 현기증

수상 이력 리스트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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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출신 영화배우 스튜어트 그레인저의 본명도 제임스 스튜어트였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예명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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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리 쿠퍼와도 친했다. 과묵해서 외출하면 한마디도 안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1961년 제임스는 게리 쿠퍼의 아카데미 공로상 대리수상자로 나와 울면서 게리 쿠퍼의 위급한 상태를 알리기도 했다. 제임스가 받은 다음해인 1942년 게리 쿠퍼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고 제임스가 수상자를 호명했다. 게리 쿠퍼는 <요크 상사>의 전쟁 영웅을 연기해 첫번째 아카데미를 받고 제임스 스튜어트는 전시 유니폼 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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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제임스 스튜어트
*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없고 모범적인 스타였다. 결혼 전 플레이보이였지만 게리 쿠퍼의 저녁 식사에서 만난 글로리아와 45년을 해로했다. 제임스는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뉴스릴을 만든 허스트 그룹 경영진의 딸이고(허스트 가문은 아니다.) 뉴욕 출신에 모델, 사교계에서 활동했다. 약간 낸 켐프너 같은 센 언니 스타일이다. 주변에 늙다리가 되어도 호색한 친구가 수두룩 했지만 결혼생활에 전념했다고 한다. 제임스는 초혼이지만 글로리아는 재혼이었다. 부유하지만 애연가에 요리도 못하고 무교라 처음에 집안의 반대가 약간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전 남편은 에블린 월시 맥린[53]의 아들이고 190이 넘는 미남이었지만 알코올 의존증에 문란했다. 제임스의 딸은 쌍둥이 자매이다. 한명은 은행가와 결혼 후 이혼, 한 명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만난 교수와 인류학 교수 부부이다. 의붓아들 한 명은 안타깝게 20대에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했고, 한 명은 다른 아들과 반대로 반전주의자여서 제임스 스튜어트와 잠시 멀어진 적이 있었다. 저녁식사 마다 언쟁을 벌이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제임스와 글로리아는 신혼여행지였던 하와이의 목장에서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지만 1994년 하와이에 가기 직전에 글로리아가 폐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제임스는 글로리아가 사망한 후부터 거의 은둔 생활을 하며 나를 걱정하지 않기를 바라고 더 살고 싶지 않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3년부터 착용했던 심장박동 조절기의 전지 교체를 중단했고 1997년에 사망했다. 유언은 "이제 글로리아와 함께 할 겁니다."였다.

7. 외부 링크



[1] 주(State)가 아니라 구(Borough) 인디애나이다. [2] 영화배우로서는 가장 높은 군 계급을 지녔다. 모든 영화인들 기준으로는 존 포드. 대장이다. [3] 글로리아의 폐암으로 인해 사별 [4] 제임스 스튜어트는 글로리아의 두 아들 로널드와 마이클을 입양했다. [5] 로널드는 1969년 6월 8일 24세의 나이로 해병대 중위로 복무하던 중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했다. [6] 제임스 스튜어트는 글로리아의 두 아들 로널드와 마이클을 입양했다. [7] 인류학자다. [8] 《존 포드》, 태그 갤러거 저, 안건형·신범식 역, 이모션북스, 2018, p.504 [9]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대전 이후 준장까지 승진했다. [10] 현 세대의 국민 배우라 불리는 톰 행크스를 후계자로 많이 언급한다. 다만 제임스 스튜어트는 열혈 공화당인데 반해 톰 행크스는 골수 민주당으로 정치 성향은 크게 다르다. 스튜어트가 연기한 배역들 중 AFI 선정 영웅에 9위( 조지 베일리)와 11위( 제퍼슨 스미스)가 포함되어 있는데, 스튜어트의 좋은 이미지가 순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11] 연기력이나 후대에 영향력 측면에선 연기론을 다시 쓴 말런 브랜도가 존재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브랜도는 국민배우 타이틀을 단적이 없고, 각종 논란은 둘째치더라도 겸손함과 친근함이 이 천재 배우의 스타성이었던 적은 없다. 일단 주로 맡은 배역들이 당대 주류의 소신 있는 지식인, 의인들이었던 스튜어트에 반해 브랜도의 배역들은(...) 다만 브랜도가 이런 배역들을 연기함으로써 기존의 할리우드에는 없던 '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된 것이다. 이 둘에 업적의 성격은 너무 다르다. 단적으로 제임스 스튜어트의 필모 중 역사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연기한 시대극은 단 한편도 없다. [12] 그보다 큰 명배우들은 많이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록 허드슨 정도가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컸다. 웬만한 공포영화 배우들과 동급 수준이다. 할리우드는 산업 생성 초기부터 큰 키를 매우 선호해 남자 배우들이 최소 1인치(약 2.5cm)씩 프로필을 늘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21세기까지도 이어져 실제 키 5피트 11인치의 브래드 피트가 20년간 6피트로 프로필을 유지하다가 40대 이후 실제 키로 바꾸기도 했다. 14세 때 이미 192cm였다는데, 이는 거의 배런 트럼프 못지 않은 수준이다. 당대 동료 배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영화 장면들에 비춰, 190 살짝 안 되는 189cm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13] 녹색 광선》의 에릭 로메르는 좌식이 불편한 미국인이라고 한 적이 있다. 본인은 이 다리를 콤플렉스라고 생각했으며, 기자로 나오는 《 이창》 등 몇몇 출연작 중에서 다리를 다친 역을 맡은 적도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 쇼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긴다리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앉아있는걸 볼수있다. [14] 출연작 중 무려 12개가 National Film Registry에 등록됐으며, AFI 선정 100대 영화에도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가장 많은 영화를 올린 배우다. 흥행 참패를 겪었던 《 멋진 인생》과 《 현기증》은 재평가를 받아 현재는 스튜어트의 대표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되었다. [15] 대략 0.5%. 서부대학과 공과대학의 입결이 요즘같지 않았다. [16] 당시에 병자성사라는 용어가 없었다. 죽음을 예상한 듯 하다. [17] 1947년에 명예 석사를 받기도 했다. [18] 1973년까지 미국에서 동성애는 정신질환으로 취급되었다. [19]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폰다와는 이 시절부터 엄청난 절친이었는데, 정치 성향이 정반대라 언제 한번 스튜어트가 흠씬 두들겨맞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폰다가 죽을 때까지 친한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20] 재즈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결혼은 했지만 동성애자였다. [21] 그래도 가장 건강하던 1950년대 말 신체검사에서는 72kg까지 나왔다고 한다. [22] 미 육군항공대의 조종사 양성과정은 기초과정 수료 후에 대형 폭격기 조종사들은 별도로 관리하여 교육시켰다. 4발 엔진이라 함은 곧 B-17, B-24, B-29 같은 대형 폭격기들을 말한다. [23] 작전장교로 데스크 워크만 하지 않고 그 와중에도 전투출격을 했다는 이야기다. [24]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 등에 영상자료가 있다. [25] 사실 이 영화는 거절을 못 해서 출연했다시피 하다. NASA의 제트기 10대로 시작한 전세기 사업 Executive Jet Aviation 설립에 참여한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미공군은 전략군으로, 미국이 경제위기가 오고 전쟁에서 지더라도 제공권은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어 홍보할 맛이 나긴 했을 것이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폭격기 조종사 출신이고, 당시 미 공군에서 폭격기를 담당한 곳이 전략 공군 사령부 였던게 컸던 듯. [26] 5년간 무려 20개 이상에 나온 것이다! 보통 1년에 2개 나오는 것도 힘든데 공장식으로 영화를 만들던 이 당시에는 한 배우가 1년에 4개까지 찍는 것도 가능했다. [27] 100퍼센트 그 역할만 한 건 아니다. 악역도 했었다. 단, 일반적인 악역이 아니라 여전히 영미식 신사 역할이다. 부인과 친구의 불륜을 알게 되어 분노하였으나, 신사라서 티를 내기 싫은 나머지 몰래 친구를 살해하고 그와 불륜을 저지른 부인에게 누명을 씌우려다가 잡히는 역할. [28] 의외로 노백이 좋아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진 성상납 비스무리한 걸 하려다가 스튜어트에게 문전박대 당하기도 했다. 스튜어트가 엄청난 원리원칙주의자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 [29] 줄거리에 대해서는 뮤지컬 쓰릴 미 문서 참조. [30] 우수하지만 학습 해야하는 학생. 가해자는 열심히 해야만 하는 학생을 비웃는 뉘앙스. [31] 우선 제임스 스튜어트가 맡은 캐릭터도 그의 대중적 매력을 살리기보단 이상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괴짜 아저씨 배역이라서 흥행에 불리했다. [32] 무대 감독을 거친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영화감독. 간결하고 경제적인 연출과 시나리오, 야외 촬영 효과의 교묘한 이용에 의해 서부극에 심리적 요소를 삽입하여 묘사. [33] 영화의 스펙트럼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이때는 B급 영화에 주로 나왔는데 1971년작 Fool's Parade에서는 당시 20세의 풋내기였던 커트 러셀, 이브의 모든 것에서 이브 역으로 나왔지만 당시에는 아줌마가 다 된 앤 백스터와 함께 출연한다. 여기서 의안을 끼고 코믹한 연기를 한다. [34] 아이러니하게도 레이건과 스튜어트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다. 그가 정치와 영화/친분 관계 등의 공적, 사적인 다른 관계들을 철저히 구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5] 그의 절친이었던 게리 쿠퍼와 가장 유사하다. [36] 제임스 스튜어트가 좀더 현대적이지만 로버트 테일러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었다. [37] 40분 지나서 등장하지만 주연이다. [38] 이 영화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편이고 현기증의 경우 평론적 평가가 높다. [39] 히치콕과 스튜어트의 첫 컬러영화. [40] 제목이 같은 영화가 몇 편 있다. 최초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시각을 바꾼 영화, 케빈 코스트너 감독의 <늑대와 춤을>과 제임스 카메론감독의 < 아바타>에 영향을 주었다. [41]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최악의 작품상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제임스는 피에로 분장을 하고 조연으로 출연했다. [42] 미국에서는 범작이라는 반응이었으나 프랑스 영화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그해의 영화 10편에 뽑혔다. [43] 다크 나이트(영화) 에 영향을 주었다. 영화 속에서 존 웨인은 스튜어트를 순교자라고 부른다. 스튜어트가 극중에서 약간 비겁한 인물이지만 두 사람 입장이 현실에서는 조금 반대인 점이 흥미롭다. [44] 주연은 아프리카 동물들. [45] 1975 영국 연극 데뷔작 [46] 2차 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바치는 연설로 6000만이 청취했다. [47] TV 시리즈 출연작. 전형적인 안방용 에피소드로 흔한 감동이지만 「Love in a Briefcase」, 「A Bunk for Unc」, 「Period of Readjustment」, 「Paper Work」 등은 훈훈한 편 이다. 지미 스튜어트가 아니고 제임스 K. 하워드 역이다. 그의 조상은 초상화로 한번씩 등장하고 매우 닮았으며 사실은 똑같이 생겼다. 제임스 하워드는 아코디언 연주가 취미이고 가정에 충실하고 가족을 사랑한다. 징그럽게 금술이 좋아 늦둥이가 조카와 또래이다. 평범한 중산층 인류학 교수 할아버지이며 유일한 친구인듯한 동네 할아버지는 노벨화학상 수상자라고는 하는데 하릴없이 직장과 집에서 붙어 다닌다. 자전거를 타고다니고 본인만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다닌다. 연기를 안 하고 있는 거 같다. 정치색이 약간있고 영화에 같이 출연했던 배우들이 게스트로 많이 나온다. 그리고 매니아층이 있는지 가끔씩 인터넷에 올라오기도 한다. [48] 3세였던 타이거 우즈와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49] 다만, 해리 S. 트루먼 치세의 민주당 공화당 뉴딜 정책의 성공으로 인해 미국 사회 전반에서 사회자유주의가 크게 화두에 오른 영향으로 인해, 양당이 모두 좌경화되면서 두 당 간의 정치 성향의 차이는 그리 크지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조지 월리스같은 딕시크랫계열 보수주의자가 민주당에 속해있다던가, 트루먼의 후임 대통령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같은 진보주의자가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는 등, 과거 양당의 성향이 21세기와는 정반대였던 역사로 인해, 두 당이 지역감정에 따른 포괄정당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민주당 소속 연예인이 공화당 소속 대통령에게 지지 서한을 보낸다던가,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 공화당원 연예인의 팬을 자처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50] 미국은 일부 부유한 정치인 케네디라던가 아들 부시라던가, 거대 기업가나 연예인, 셀러브리티와 그 자녀들도 기여입학 제도를 애용한다. [51] 저작권은 만료 되었지만 흑백영화 시대는 여전히 영화사의 황금기이다. [52] Beau?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 도그마 선언을 지키는 한 편의 단편 같은) [53] 광산왕의 외동딸로 네드 맥린과 결혼, 이혼했고 호프 다이아몬드(가격을 추정하면 3000억 정도. 현재는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의 소유자였다. [54] 당장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현기증에서 스튜어트는 50세였지만 50대 중반은 되어 보인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는데, 영화 관계자들은 영화의 흥행 실패 이유가 스튜어트의 노안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스튜어트가 50년대 총합 흥행 1위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긴 하지만. [55] 참고로 캐리 그랜트가 더 젊어보이지만, 4살 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