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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20:04:22

데이비드 니븐

데이비드 니븐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남우주연상
제30회
( 1958년)
제31회
( 1959년)
제32회
( 1960년)
알렉 기네스
( 콰이강의 다리)
데이비드 니븐
(애수의 여로)
찰턴 헤스턴
( 벤허)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남우주연상 - 드라마(영화)
제15회
( 1958년)
제16회
( 1959년)
제17회
( 1960년)
알렉 기네스
( 콰이강의 다리)
데이비드 니븐
(애수의 여로)
앤서니 프랜시오서
(캐리어)
남우주연상 - 뮤지컬 및 코미디(영화)
제10회
( 1953년)
제11회
( 1954년)
제12회
( 1955년)
도널드 오코너
( 사랑은 비를 타고)
데이비드 니븐
(푸른 달)
제임스 메이슨
( 스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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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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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데이비드 니븐
DAVID NIVEN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384 Hollywood Bl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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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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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데이비드 니븐
DAVID NIVEN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텔레비전 심볼.jpg 텔레비전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623 Vine Street
}}}}}}}}}}}} ||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데이비드 니븐
David Niven
파일:EVCPBDDANIEC010H__68965.1541993015.jpg
본명 제임스 데이비드 그레이엄 니븐
James David Graham Niven
출생 1910년 3월 1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벨그레이비어
사망 1983년 7월 29일 (향년 73세)
스위스 샤토 데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묘지 스위스 샤토 데
신장 183cm
배우자 프리뮬러 수전 롤로(1940년~1946년 사별)
요르디스 옌베리(1948년 결혼)
자녀 아들 데이비드 니븐 주니어(1942년생)
아들 제임스 니븐(1945년생)
딸 크리스티너 니븐
딸 피오너 니븐

1. 개요2. 상세3. 출연작
3.1. 영화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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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영화배우이자 저술가. 물론 전자 쪽으로 훨씬 유명하다. 진중한 이미지와 패션, 특유의 콧수염 덕에 영국 신사의 대표적인 전형으로 꼽히는 배우였다.

2. 상세

니븐은 젊은 시절 영국 왕립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경보병단에서 중위로 복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열망때문인지 군을 떠나 할리우드에 입성, 초기에는 잡다한 역할만을 주로 맡았다. 그러다 프로듀서 새뮤얼 골드윈에게 주목받으면서 천천히 한계단씩 올라간 사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때는 다시 군에 입대하여 중위 신분으로 복귀, 연대장으로 전역했으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훈장도 받은 바 있다. 팬텀 시그널이라는 특수한 부대(정보부대)의 일대를 지휘했으며 중령으로 전역했다.

1946년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온 후, 그가 찍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1946), <주교의 부인>(1947), <매혹>(1948) 등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왕성하게 활동한 니븐은 윌리엄 홀든과 주연을 맡은 <푸른 달>(1953)로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탔다. 필리어스 포그로 출연한 < 80일간의 세계일주>(1956)는 작품상을 수상했고, 흥행도 성공했다. 그리고 <Separate Tables>(1958)에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15분 38초라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역사상 가장 짧은 출연시간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1][2]

이후 TV와 영화계, 라디오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 나바론의 요새>(1961), < 북경의 55일>(1963), < 5인의 명탐정>(1976), < 나일강의 죽음(1978)>, <바다의 늑대들>(1980)을 찍는다. 이후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인 < 핑크 팬더의 추적>(1982), <핑크 팬더의 저주>(1983)를 끝으로 배우 생활을 마감한다.

67년 작인 007 카지노 로얄을 찍으면서 제임스 본드 역할도 해봤던 적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007 시리즈의 적자가 아니어서 정통 본드로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이 영화화 시 1순위로 고려했던 배우가 바로 니븐이기도 했을 정도로 제임스 본드와 이미지가 잘 부합하는 편이다. 영화 자체는 패러디 영화로서 괴작 취급을 받지만, 피터 셀러스, 오슨 웰스, 우디 앨런, 데버러 카, 윌리엄 홀든, 존 휴스턴, 장폴 벨몽도, 피터 오툴이라는 미친 캐스팅에서 나오는 아스트랄함이 돋보인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회자하는 46회 시상식 당시 라버트 오펄(Robert Opel)의 알몸 난입 사건 때 호스트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소개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갑작스러운 난입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는데, 이때 니븐의 재치있는 반응이 압권(이는 작가들이 당시 스트리킹이 유행하기 때문에 무대에 출연하는 사람들에게 다 알려줬는데, 우연히 말을 할 기회가 니븐에게 돌아간 것 뿐이라고 한다).
Well, ladies and gentlemen, that was almost bound to happen... But isn't it fascinating to think that probably the only laugh that man will ever get in his life is by stripping off and showing his shortcomings?"[3]

알렉 기네스와 배우로서의 행적이 상당히 유사한데, Sir가 붙는 기네스와 달리 니븐은 기사작위를 받진 못했다. 이게 다 스타워즈 때문이다.[4] 재미있는 건 이렇게 유사한 배우로서의 경력과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둘이 같이 출연한 작품은 76년 작인 < 5인의 명탐정>이 유일하다.[5]

말년에 루게릭병으로 크게 고생하다가, 73세를 일기로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3. 출연작

3.1. 영화

4. 여담



[1] 그의 유일한 아카데미 후보작이자 수상작. 흔히 양들의 침묵 앤터니 홉킨즈를 남우주연상 수상자 중 가장 짧은 출연 시간(16분)을 기록한 배우로 알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니븐이다. [2] 일단 기네스북에는 앤터니 홉킨즈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역사상 가장 짧은 출연 시간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 니븐 측이나 관계자들이 기네스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 듯 수정치 않고 있다. [3] 자아, 신사 숙녀 여러분, 일이 터져버린 것 같군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일 아닙니까? 저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발가벗고 나와서 남들 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4] 스타워즈 드립은 농담이고 재정적인 이유로 생애 후기에는 스위스나 프랑스에서 거주했는데, 이것이 세금을 피해서 떠났다는(Tax exile) 이미지가 생겨서 영국에서 좋은 평가는 못받았다고 한다. [5] 기네스는 이 작품을 촬영하면서 자신에게 제의가 들어온 한 대본을 두고 출연을 고민하다가 결국 출연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작품은... [6] 영국 제작.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파월과 프레스버거의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