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혹스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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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62a2a><colcolor=#ffffff> 하워드 혹스 Howard Hawk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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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하워드 혹스 (Howard Hawks) |
출생 | 1896년 5월 30일 |
미국 인디애나 고센 | |
사망 | 1977년 12월 26일 (향년 81세) |
미국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스 | |
국적 | 미국 |
신장 | 185cm |
배우자 |
디 하트퍼드(1953 결혼, 1960 이혼) 슬림 키스(1941 결혼, 1949 이혼) 애톨 시어리(1928 결혼, 1940 이혼) |
자녀 | 5명 |
데뷔 | 1926년 영화 '영광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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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영화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제작자, 군인.
고전 할리우드의 거장 중 한 명이며, 당대 거의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여, 통칭 "장르의 대가"라고 불린다.
지금은 그 유명세가 조금 줄었지만, 생전엔 존 포드, 앨프리드 히치콕, 장 르누아르와 함께 당대 영화사 최고의 거장으로 대우받았으며 당시에도 흥행과 비평을 다 잡은 몇 안되는 스타 감독 중 한 명이었다.
2. 소개
과거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보다 훨씬 위대했습니다. 그 위대함을 상징하는 것이 하워드 혹스입니다. 그는
갱영화,
필름 느와르, 전쟁영화,
서부극,
스크류볼 코미디,
뮤지컬 등 정말 미국적인 장르를 거의 다 다루고 있습니다.[3]
ㅡ 하스미 시게히코
ㅡ 하스미 시게히코
할리우드 황금기 시절[4] 거장 중 하나이자,[5] 거의 모든 장르에서 걸작과 대표작을 만들어낸 괴물 같은 감독.
미국에 마틴 스코세이지, 스티븐 스필버그, 브라이언 싱어, 로버트 알트만, 마이클 만과 같은 거물 감독들도 혹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여러번 경의를 표했다. 그 영향은 해외에도 뻗쳐, 장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를 필두로 한 누벨바그 감독들이 하워드 혹스를 영화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꼽았으며, 작품에서도 그 영향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 서부극의 존 포드', ' 스릴러의 히치콕', ' 블랙 유머의 빌리 와일더'처럼, 거의 한 장르만 집요하게 파고든 당대 거장들과 달리, 혹스는 할리우드 최신 유행에 따라 항상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고, 그만큼 다양한 걸작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가 손댄 장르만 해도 코미디, 스릴러, 느와르, 서부극, 로맨스, 뮤지컬, 전쟁, Sci-Fi[6] 등 모두 미국 영화의 근간이 되는 장르들이라, 지금도 미국 영화계에선 하워드 혹스를 각 장르의 시조이자 모범답안으로 여겨 깊이 연구하고 뒤따르고 있다.
특히 스크류볼 코미디와 남성 전문가들의 팀웍 묘사에 능했는데, 존 카펜터는 후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이다. 멀리 갈것도 없이, 카펜터의 대표작 더 씽은 혹스가 만든 원작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스크류볼 코미디 같은 경우 미친듯한 속도감과 똘끼마저 느껴지는 상황 설정, 팽팽한 남녀 간의 성 대결로 유명했는데 현대 로맨틱 코미디의 어법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대 유행에 발맞춰 활약했기 때문에, 하워드 혹스의 경력은 당시 할리우드 유행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그의 작품을 따라가다보면 고전 할리우드 역사가 단번에 정리된다. 또한 같은 배우를 돌려 쓰지 않고 영화마다 새로운 배우를 써서, 그와 함께 작업한 배우 목록도 화려하다. 마릴린 먼로, 캐서린 헵번, 로렌 바콜, 리타 헤이워스, 바버라 스탠윅, 루이스 브룩스[7], 존 웨인, 험프리 보가트, 케리 그랜트, 로버트 미첨, 게리 쿠퍼, 존 배리모어[8], 커크 더글러스 등,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배우들임을 알 수 있다.
배우들과 단순히 같이 일하기만 한 게 아니라, 각 배우의 연기를 최대로 끌어내기도 하여서, 모두 하워드 혹스를 통해 대표작을 찍거나 뛰어난 연기로 주목을 받았다. 존 웨인을 연기 못한다고 무시하던 존 포드도, 혹스의 〈 붉은 강〉을 보고 존 웨인을 다시 보게 되었을 정도.[9][10]
2.1. 존 포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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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여배우 미셸 캐리.[11] |
실제로 이 둘은 동종업계 종사자이자 실력있는 동료감독으로 서로 알고 지냈으며, 각자의 실력에 깊은 존중감을 가졌다. 존 웨인 같은 유명 배우를 공유하기도 했고, 틈틈이 사적인 만남을 가지기도 했는데, 말년의 존 포드가 건강악화로 입원했을 땐, 하워드 혹스가 피터 보그다노비치와 함께 병문안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존 포드는 함께 병문안 온 보그다노비치를 가리키며 “혹스야 저 애가 너도 괴롭히든?”이라 했다고(...)[12]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의 연출 차이에 대해선, 오슨 웰스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평론가 태그 갤러거도 비슷한 취지의 글을 썼다.
당대엔 라이벌이나 동료로 불렸던 둘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존 포드가 1인자이고, 하워드 혹스가 2인자인 것처럼 평가가 달라졌다. 아무래도 하워드 혹스를 지지하던 세력이 쇠퇴하고, 존 포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인 듯하다. 또한, 유행에 철저했던 하워드 혹스와 달리, 존 포드는 유행과 상관없이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 존 포드는 하워드 혹스나 히치콕 같은 한명의 천재에게만 라이벌로 인식된 게 아니라 여러 명의 천재 영화인들에게 라이벌 의식을 받았는데, 이는 그만큼 그가 압도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하워드 혹스는 존 포드를 견제하는 성향이 아니었고 신사적 성향이라 그를 존경했지만, 히치콕은 선배인 존 포드를 견제하기도 하고, 배우 섭외로도 직간접적으로 다투며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 정작 존 포드 본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하워드 혹스를 더 좋아하는 영화광들이 꽤 있는데, 대표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포드보다 혹스를 더 선호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3. 일생
1896년, 인디애나 주에서 종이 공장장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모의 직업이 직업인지라, 경제적으론 전혀 걱정없는 윤택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대신 이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동안 위스콘신, 캘리포니아 순으로 이사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엔 뉴햄프셔로 옮겨 살았으며, 이후 뉴욕으로 옮겨 코넬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고 한다.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으로 활동하였고, 계급은 중위였다. 종전 후 기계공, 디자이너, 카 레이서 등의 직업을 전전했으며, 공군 경력을 살려 비행기 파일럿을 하기도 했다.
1922년, 파라마운트 픽처스 스토리 부서에서 일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머리가 비상했던 하워드 혹스는, 연출하기 힘든 장면이 있을 때마다 해결사처럼 나타나 손쉽게 연출해내는 재능을 보였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1926년에 데뷔작인 〈영광의 길 The Road to Glory〉을 찍게 된다.
이후 1970년 은퇴작 〈 리오 로보 Rio Lobo〉를 찍기까지, 약 4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15]
1977년, 자택에서 애완견에 걸려 넘어져 부상을 입었는데, 이에 의한 합병증으로 몇 주 뒤 별세했다. 향년 81세.
4. 기타
- 존 웨인과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이다.
- 타인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는 강인한 여성상을 자기 영화 속에서 즐겨 썼는데 이를 부르는 '혹스식 여인'이라는 표현도 있다. 실제로 본인의 이상형이었는지 두 번째 부인이자 뉴욕 사교계 아이콘이었던 낸시 키스[16]는 그야말로 궁극의 '혹스식 여인'이었다고. 여성 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던 걸로 유명하다.
- 쿠엔틴 타란티노가 하워드 혹스의 팬이지만, 사실 혹스는 타란티노가 "10편만 찍고 은퇴하는 것이 적절하다"라는 의도찮은 교훈을 준 당사자다. 사정인즉, 타란티노가 하워드 혹스의 유작 〈 리오 로보〉(1970)를 보고 "이딴 영화 찍으며 퇴물 취급받느니 차라리 전성기에 은퇴하는 게 낫겠다."라는 걸 깨달았다고(...) #
5. 필모그래피
연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제작 | 비고 |
1926 |
영광의 길[17] The Road to Glory |
O | O | 장편 데뷔작, 유실 영화 | |
1926 |
무화과 잎 Fig Leaves |
O | O | O | |
1927 |
요람 강탈자들 Cradle Snatchers |
O | O | ||
1927 |
페이드 투 러브 Paid to Love |
O | O | ||
1928 |
모든 항구의 소녀 A Girl in Every Port |
O | O | ||
1928 |
파질 Fazil |
O | |||
1928 |
에어 서커스 The Air Circus |
O | |||
1929 |
트렌트 최후의 사건 Trent's Last Case |
O | |||
1930 |
새벽의 출격 The Dawn Patrol |
O | |||
1931 |
형법 체계 The Criminal Code |
O | O | ||
1932 |
스카페이스 Scarface |
O | O | O | |
1932 |
군중은 울부짖는다 The Crowd Roars |
O | O | ||
1932 |
타이거 샤크 Tiger Shark |
O | O | ||
1933 |
투데이 위 리브 Today We Live |
O | O | O | |
1934 |
20세기 Twentieth Century |
O | O | ||
1934 |
비바 빌라! Viva Villa! |
O | |||
1935 |
바르바리 해안 Barbary Coast |
O | |||
1936 |
실링 제로 Ceiling Zero |
O | |||
1936 |
영광의 길 The Road to Glory |
O | |||
1936 |
컴 앤 겟 잇 Come and Get It |
O | 윌리엄 와일러와 공동 연출 | ||
1938 |
베이비 길들이기 Bringing Up Baby |
O | O | ||
1939 |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 Only Angels Have Wings |
O | O | O | |
1940 |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 His Girl Friday |
O | O | ||
1941 |
요크 상사[18] Sergeant York |
O | O |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19] | |
1941 |
볼 오브 파이어 Ball of Fire |
O | |||
1943 |
에어포스 Air Force |
O | |||
1943 |
무법자 The Outlaw |
O[20] | O | 하워드 휴즈 연출작 | |
1943 |
초계함 K-225 Corvette K-225 |
O?[A] | O | ||
1944 |
소유와 무소유 To Have and Have Not |
O | O | ||
1946 |
빅 슬립(a.k.a. 명탐정 필립) The Big Sleep |
O | O | ||
1948 |
붉은 강 Red River |
O | O | ||
1948 |
어 송 이즈 본 A Song Is Born |
O | |||
1949 |
나는 전쟁 신부 I Was a Male War Bride |
O | |||
1951 |
다른 세계로부터 온 존재 The Thing from Another world |
O?[A] | O | O | |
1952 |
빅 스카이 The Big Sky |
O | O | ||
1952 |
몽키 비지니스 Monkey Business |
O | O | ||
1952 |
오 헨리 단편집 中 붉은 추장의 몸값 The Ransom of Red Chief |
O | 옴니버스 영화 참여작 | ||
1953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Gentlemen Prefer Blondes |
O | |||
1955 |
파라오의 땅 Land of the Pharaohs |
O | O | ||
1959 |
리오 브라보 Rio Bravo |
O | O | ||
1962 |
하타리 Hatari! |
O | O | ||
1964 |
가장 좋은 남성용 스포츠 Man's Favorite Sport? |
O | O | ||
1965 |
레드 라인 7000 Red Line 7000 |
O | O | O | |
1966 |
엘도라도 El Dorado |
O | O | ||
1970 |
리오 로보 Rio Lobo |
O | O | 유작 |
[1]
출처마다 문장이 다르다. great 대신 good이 들어간다든가.
[2]
#발언 출처
[3]
#발언 출처
[4]
유성영화 도입 이후
파라마운트 판결 전까지인
1930년대~
1940년대
[5]
이 시기 다른 거장으론
존 포드,
앨프리드 히치콕,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프랭크 카프라 등이 있다.
[6]
특히 SF 영화의 위상을 올리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제작한
더 씽과
바디 스내처 모두 미국 SF 호러 영화에 큰 자산이 되었을 정도.
[7]
〈
판도라의 상자 Die Büchse der Pandora〉(1929) 주연
[8]
드루 배리모어의
할아버지
[9]
내부 시사회에서 〈붉은 강〉을 본 포드는 '저 개자식(존 웨인)이 연기를 하네!'라고 외쳤고, 이후 존 웨인을 데리고 〈
황색 리본을 한 여자〉를 찍었다.
[10]
여담으로 〈붉은 강〉을 마친 웨인은, 함께 일한
몽고메리 클리프트에 대해 "그 녀석은 감히
메소드 연기를 하려고 해서, 하워드 혹스와 내가 진짜 카우보이처럼 행동하는 법을 처음부터 가르쳤다"고 말하기도 했다. 존 웨인이 배우 연기 간 조화에 신경썼음을 방증하는 일화. 그러나 성 정체성, 정치이념, 생활 방식 등 여러모로 혹스·웨인과 정반대였던 클리프트는 이후 두 사람과 작업하지 않았다.
[11]
〈
엘도라도 El Dorado〉(1967)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
[12]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존 포드를 오랜 기간동안
인터뷰했다.
[13]
#발언 출처
[14]
《존 포드》, 태그 갤러거 저, 안건형·신범식 역, 이모션북스, 2018, p.123
[15]
기록상 그의 진짜 마지막 경력은,
1971년 〈
프렌치 커넥션〉에
각본가로 이름을 올린 것인데, 이는 〈프렌치 커넥션〉 촬영 당시
윌리엄 프리드킨에게 귀중한 조언을 해준 것에 대한 표시다.
[16]
슬림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이 별명은 훗날
로렌 바콜에게 넘어간다.
[17]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
영광의 길〉과 국내 제목이 같음. 하단의 1938년 리메이크작도 마찬가지이다.
[18]
실존인물
앨빈 C.요크를 다룬 영화.
[19]
하워드 혹스의 유일한 아카데미상 후보 기록이다.
[20]
본래 1940년에 혹스가 직접 연출을 하려했으나, 당시 '요크 상사'를 연출하기 위해 촬영 2주만에 감독직에서 하차하면서 일부분 연출과 각본에만 참여한 작품. 나중에는 이 때문에 혹스 감독의
붉은 강이 이 작품을 표절했다며
하워드 휴즈에게 소송을 걸리게 된다.
[A]
제작이나 각본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혹스가 연출에도 참여했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작품들.
[A]
제작이나 각본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혹스가 연출에도 참여했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