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1635, #0D164A 20%, #0D164A 80%, #0D1635); color:#ffc22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 | 도널드 트럼프 | ||
}}}}}}}}}}}} |
에이브러햄 링컨 관련 틀
|
||||||||||||||||||||||||||||||||||||||||||||||||||||||||||||||||||||||||||||||||||||||||||||||||||||||||||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 1809년 2월 12일[1] | ||
켄터키 주 라루 카운티 호젠빌 싱킹스프링 농장 | |||
사망 | 1865년 4월 15일 (향년 56세)[2] | ||
워싱턴 D.C. 피터슨 하우스 | |||
재임기간 | 제16대 대통령 | ||
1861년 3월 4일 ~ 1865년 4월 15일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ㆍ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토머스 링컨(1778~1851) 어머니 낸시 링컨[3](1784~1818) |
|
배우자 | 메리 토드 링컨(1818~1882) | ||
자녀 |
장남 로버트 토드 링컨(1843~1926)[4] 차남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1846~1850) 삼남 윌리엄 월러스 링컨(1850~1862) 사남 토머스 태드 링컨(1853~1871) |
||
학력 | 초등학교 중퇴 | ||
종교 | 개신교 ( 초교파)[5] | ||
신체 | 키 193cm[6] / 체중 78kg / A형[7] | ||
소속 정당 |
|
||
의원 선수 | 1 (하원) | ||
의원 대수 | 30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1. 개요2. 약력3. 생애4. 링컨과 노예제5. 가족관계
5.1. 아내 메리 토드 링컨 (Mary Todd Lincoln)5.2. 자식
6.
평가7. 여담8. 대중매체에서9. 관련 어록10. 소속 정당11. 선거 이력12. 둘러보기5.2.1. 장남 로버트 링컨 (Robert Todd Lincoln)5.2.2. 차남 에드워드 링컨 (Edward Baker Lincoln)5.2.3. 삼남 윌리엄 링컨 (William Wallace Lincoln)5.2.4. 사남 토머스 링컨 (Thomas Ted Lincoln)
5.3. 가정사에 대한 결론[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미국 역사상 최초로서 건국 당시로서는 13주 이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대통령이자 공화당 출신 첫 대통령이다. 또한 193cm의 신장을 가져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신인 대통령이기도 하다.[10]
국가 통합과 민주주의 및 인권을 위해 활약한 대통령으로 알려지며 오늘날에도 딱히 인종이나 정파에 가리지 않고 존경받고 있다. 다만 후술되어 있듯 생전에는 되레 실패도 많이 겪었으며, 이러한 실패가 역설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그의 다사다난한 일대기는 지금도 대중매체에 종종 소개된다.
2. 약력
3. 생애
3.1. 낙선, 실패, 패배로 점철된 인생
1809년 2월 12일, 에이브러햄은 켄터키주에서 넉넉치 못한 목수 토머스 링컨(Thomas Lincoln, 1778 ~ 1851)의 아들로 태어났다(애칭은 에이브). 부친 토머스가 확고한 기독교적 신념의 소유자라 매우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틀에서 자랐다고 한다. 남매로는 누나 세라 링컨 그릭스비(1807 ~ 1828)가 있는데, 살던 곳이 워낙 시골 개척지라서 주변 이웃이 많지 않던 탓에 누나와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며 놀았기에 누나와 정이 많았는데, 세라는 결혼 이후 아기를 낳다가 21살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 남동생 에이브러햄을 슬프게 했다. 토머스가 그 주에서 3번째 고액 납세자라는 과세자료를 들어서 아들 링컨은 아버지가 비록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부유하게 자라지 못했다는 해석도 있고[13], 아니면 아버지가 매우 검소한 성격이라 부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가난하게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한 속사정을 알아보면, 에이브러햄의 아버지 토머스는 원래는 켄터키 주에서 15번째 가는 부농이었으나, 에이브러햄이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번의 파산을 경험한 후 인디애나 주로 거처를 옮겼다. 더군다나 재혼 후에 식구가 불어나자 생활고에 찌들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고, 에이브러햄에게 공부가 아닌 농사와 노동의 길을 강요하며 생계의 짐을 지웠다는 일화 역시 잘 알려져 있고 링컨 스스로도 자주 언급한 바 있다. 가족 소유의 농장에서만 일한 게 아니라, 주변 이웃들의 농장에 품삯을 받고 일손으로 보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파산 이후로는 식구 모두가 원체 가난하게 살았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토머스 링컨은 후처 사라와 달리 교육보다는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인물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애를 너무 부려먹는다"고 지적할 정도로 아들을 과하게 혹사시켜 에이브러햄의 교육받을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상당히 독선적이고 보수적인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들이 시간을 쪼개 독서와 공부에 매진하면 '일을 안 하려고 게으름 부린다'고 생각했다. 화전민에 가까운 개척농 집안이었다는 것과 아버지 본인이 까막눈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렇게 단정했을 수도 있다.
에이브러햄도 이것에 대해 불만을 품어 이후 자신은 아들(특히 삼남 윌리와 사남 테드)에게 매우 자상하고 친밀한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굴렸던 기억 때문에 노예해방 사상을 품게 되었다는 주장(영어)도 있다. 즉, 당해봤기에 인간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노동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는 얘기.
때때로 나도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아버지가 구두장이였다는 일화는 오쇼 라즈니쉬의 책에서 처음 나타나나, 그 진위와 관련된 사항을 교차검증할 수 없어 진위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에이브러햄의 친모 낸시 링컨(Nancy Lincoln Hanks, 1784 ~ 1818, 혼전 이름은 낸시 행크스)은 그가 9살 때 서양등골나물[14]이라는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먹고 걸리는 밀크병(Milk sickness)에 걸려 죽었다.[15][16] 그 후 아버지는 재혼했는데, 새어머니 사라 부시 링컨(1788 ~ 1869)은 독서광인 아들 링컨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지원했다. 그녀도 재혼 당시 2남 1녀를 둔 미망인이었는데, 이들도 에이브러햄과 친형제처럼 잘 지냈다.[17] 토머스 링컨이 아들에게 노동의 길을 강요할 때도 아들을 지지하고 도와주며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링컨은 정규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지만, 그 대신 풍부한 독서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18]. 또한 세라는 유머 감각이 풍부하여 에이브러햄과 곧잘 농담과 장난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아래 더글러스와의 토론에서처럼 링컨이 정계에서 보인 유머 감각은 대부분 세라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주류 의견이다. 이 때문에 에이브러햄의 가족사는 계모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 사례로 흔히 인용된다.[19][20][21]
1829년 멕시코와 국경분쟁이 벌어질 때 참전하기도 하고 군인으로 복무하기도 한 그는 성인이 된 이후 돈도 직접 벌 겸 독립하려는 생각으로 집을 나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루이지애나에서 자취를 시작한 뒤 그 후 우체국장[22], 뱃사공, 측량기사, 프로레슬러[23], 가게 점원 등 여러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사업을 실패하고 다음 해 치른 1832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서도 13명 중 8위로 낙선했다. 이듬해 그는 또 사업에 실패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두 번의 사업 실패의 빚을 갚는 데만도 17년이 걸렸다고 한다.
1846년. 첫 하원 당선 당시. [24] | 1860년. 특유의 수염으로 잘 알려진 그의 면도한 모습이 어색하다.[25] |
간신히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834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 재출마해 당선되면서 비로소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일리노이 주 의원 의장에는 낙선. 1840년 대통령 선거인단으로도 낙선, 1844년에는 연방하원 의원 공천 탈락, 1846년에야 간신히 하원 의원에 당선되니 그의 나이 37세. 20대 초반이라는 상당히 이른 나이에 정계에 투신한 것 치고는 상당히 늦은 것이었다. 게다가 고작 2년만 재임하였다.
다시 1855년 연방상원의원 낙선, 1856년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도 1/3 정도의 지지(110/350)만 받으며 월리엄 데이튼에게 낙선. 그사이 어느덧 그의 나이도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향하고 있었다.
1858년엔 상원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해 당시 유명 정치인이던 스티븐 A. 더글러스와 경쟁을 벌인다. 이 선거에서도 링컨은 낙선했지만, 노예 문제에 대해 단호히 반대입장을 밝혀 노예제 반대 입장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우뚝서게 된다. 이때 링컨과 더글러스가 벌인 세차례의 토론은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에 남은 명토론으로 평가된다.
당시 이슈는 새로 미연방에 편입되는 주들에게 노예제를 금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였다. 더글러스는 해당 주의 거주민들이 스스로 노예제의 허용 여부를 결정하게 하자는 주장이었고, 링컨은 투표를 통하더라도 노예제를 허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후에도 벌어지는 링컨과의 라이벌 관계 때문에 더글러스가 매우 적극적인 노예제 찬성론자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고, 앞서 언급했듯이 주의 자율에 맡기자는 온건파에 가까워 도리어 남부 민주당 강경파들에겐 비판받던 인사였다. 이 당시 링컨은 노예제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주들에서도 노예제를 바로 폐지해야 한다는 급진적 공화당 분파와 노예제에 찬성하지 않지만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했던 민주당 온건파의 중간에 위치하였다. 당시에는 미 연방 상원의원을 주의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했기 때문에, 링컨에 대한 지지 자체는 더 높았으나 선출되진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개표결과도 그렇게 큰 격차가 아니었다.
이 당시 토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찬성측 입론(더글러스)
링컨은 상원의원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인 '분열의 집(House Divided)'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그 연설문 중 일부를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분열되어 자기 자신을 향해 적대하는 집은 바로 설 수 없으리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은 노예제를 찬성하고 절반은 반대를 하는 상태로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집이 무너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집의 분열이 그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간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노예제도가 추가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고 노예제도가 궁극적으로는 폐지되는 과정 속에 놓여있다는 신념이 대중 속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반면에 노예제도 옹호론자들은 기존의 주에서부터 신생 주에 이르기까지, 남쪽에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합법화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밀어붙이려 할 것입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한다는 그의 얘기를 듣고 흑인 공화당원들은 아주 좋아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링컨은 멕시코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또한 노예도주법을 반대하고 워싱턴에서 노예 해방을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링컨은 백인과 흑인에 대한 모든 사회제도 상의 평등을 주장하며 심지어는 흑인과 백인이 결혼할 수도 있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링컨의 주장은 사회적인 불안과 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여기서 제가 밝혀둘 것은 제가 통과시킨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의 원래 취지는 무엇보다도 미합중국이 자치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문제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 스스로가 결정하게 하자는 주권재민(Popular sovereignty)의 원칙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새로 편입되는 주의 지역주민들이 노예제도에 관해 허용할 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주권재민의 올바른 적용이야말로 노예제도로 인한 갈등을 끝내고 북부와 남부의 주들이 평화로운 공존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반대측 질문(링컨)
더글러스 후보는 저를 모함하는 많은 의문과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모함하는 자신의 주장들에 대해 아무런 근거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의 질문에 대해 분명히 대답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그동안 취해왔던 정치적 입장들 중 일부는 제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제가 속해 있는 공화당의 입장도 섞여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먼저 저는 도주 노예법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고 수정을 요구했음을 밝혀 둡니다. 더글러스의 주장은 이렇듯 사실 부분에서 여러가지로 잘못된 점이 많습니다. 저는 '흑인은 헌법상 연방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재판을 청구할 자격이 없고 노예의 소유는 헌법에 보장된 재산권의 일부로써 보호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드레드 스콧 판결문을 지지했던 더글러스에게 묻습니다. 이 판결문의 법리대로라면 지역 주민 대다수가 노예제도의 폐지를 원한다고 해도 과연 가능키나 한 것일까요?
더글러스가 통과시킨 캔사스-네브래스카 법은 그동안 미합중국에서 노예제도가 인정될 수 없는 지역이라고 국가적 합의가 이루어졌던 지역에 다시 노예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길을 여는 행위 아닙니까? 더글러스야말로 노예제도를 미국 전역으로 확산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노예제도가 과연 주정부 자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보십니까? 과연 주류법 같은 자치 영역의 문제들과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일까요?
반대측 입론(링컨)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론에 앞서 먼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저와 더글러스가 결코 다투지 않고 기꺼이 합의하는 원칙들이 다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모든 주가 노예제도를 포함하여 자치 문제에 관해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그의 주장인데, 저 역시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는 제가 이 문제에 관해 그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거듭 주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제 견해를 계속 왜곡하고 있지만 이에 관한 제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왜 우리 정부가 절반은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절반은 반대를 하는 상태로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서 저의 그와 같은 의견에 대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그의 또다른 질문 한 가지는 '왜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토대를 그대로 놔두지 않는가?'였는데 바로 이 점이 그와 제가 정확히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저는 더글러스와 그의 동료들이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다져 놓은 원래의 건국이념을 훼손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더글러스가 우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노예 매매를 근절시켜서 노예제도의 근원을 차단했으며, 기존의 주 이외에 새로 생기는 주에서만큼은 노예제도를 제한시키는 제도를 채택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는 너무나 명백해서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든 그것이 노예제도의 근절을 염두에 둔 포석임을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더글러스는 저더러 왜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든 그대로 놔둘 수 없느냐고 물었는데 오히려 제가 그에게 왜 그분들이 만든 대로 놔두지 않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더글러스와 그의 동료들은 이 건국 당시의 정책을 파기시켜버린 후에 미국 전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구적인 제도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 어디서건 제가 요구하거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건 오직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원래 닦아놓은 법률적 토대로 이를 다시 되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노예제도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지역들에서만 합법화하고 새로운 주들에게로 확산시키지 않도록 제한함으로써 건국의 아버지들이 추구했던 정책으로 다시 되돌리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노예제도가 완전히 사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캔자스-네브래스카 주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것이 주권재민에 관한 문제인 양 본질을 호도하는 것은 자유인과 노예가 공존할 수 없다는 미국 건국이념에 위배된다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찬성측 질문(더글러스)
링컨은 국부들이 노예제도 폐지를 원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맞는 말입니까? 과연 그럴까요? 우리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은 이에 관해 뭐라고 말했을까요? 과연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링컨의 주장대로 생각했을까요? 미국 건국의 주역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 백인 남성들이었습니까? 아니면 흑인들이었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가 흑인들과 동등히 대우받아야 한다는 링컨의 주장에 찬성하십니까?
찬성측 반론(더글러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정부는 백인이 주축이 된 건국의 아버지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즉 백인에 의해, 백인의 이익을 보호하고, 백인의 무궁한 번영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다가올 모든 시대에도 백인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세워졌습니다. 링컨의 연설은 일리는 있지만 내전을 부추기는 연설입니다. 링컨이 드레드 스콧 판결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백인과 흑인 간의 인종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주장하는 주권재민이야말로 우리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이 꿈꾸었던 지역분권형 정부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독립선언서들의 참여자들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선언했을 때, 흑인이나 인디언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흑인이 백인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사회적, 정치적, 법적인 평등까지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동의하신다면 링컨에게 표를 던지십시오. 저는 노예해방뿐만 아니라 백인과 흑인의 사회적 통합까지 지지하는 링컨 같은 급진적인 공화당원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링컨은 북쪽으로만 가면 극단적인 노예해방론자처럼 굴면서도, 남쪽으로 가면 또 자신이 충실한 휘그당원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렇게 링컨은 지역에 따라서 자신의 주장을 이리저리 바꾸는 사람입니다. 링컨처럼 가는 곳마다 주장이 달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입니다. 또한 그는 예전에 자신이 경영하던 상점에서 법을 어기고 술을 판 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불법행위이고, 이렇게 법을 어긴 사람이 상원의원에 당선된다면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링컨은 절대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밝혀두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가 만든 법안이 반드시 노예 해방 반대 입장 쪽으로만 이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노예 해방을 원하는 주의 주민들은 지역 경찰법에 노예소유주가 도망간 노예를 경찰권으로 되찾아올 수 있는 조항을 제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예제도를 선택하지 않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측 반론(링컨)
더글러스는 저더러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제가 얼굴이 하나 더 있었더라면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하필 잘생긴 얼굴을 놔두고 이렇게 못생긴 얼굴로 여기까지 나왔겠습니까?
그리고 더글러스가 제가 술을 팔았다는 얘길 한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가게를 운영하던 때에 제 가게에서 가장 술을 많이 사 먹던 고객이 바로 더글러스였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저는 이미 술을 파는 계산대를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더글러스는 아직까지도 그 술 파는 가게의 충실한 고객으로 남아있다는 점입니다.[26]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언제 백인과 흑인 간의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주장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흑인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다거나, 배심원이 된다거나 혹은 공직에 오르고 또 백인과 결혼하는 것까지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진 이후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어디서도 흑인이 독립선언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독립선언서에 흑인이 포함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3년 전 어느 무렵부터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이란 말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물론 저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3년 전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노예제도의 우위와 영속성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독립선언서에 대한 이러한 공격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제가 단언컨대, 적어도 3년 전까지는 아무도 감히 그것을 대놓고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라도 믿는 척 가장하는 은밀한 방식이었던 것이 이 무렵부터 독립선언서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낸 사람은 드레드 스콧 사건의 수석필사인 테이니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여러분이 아시는 더글러스이며, 아시다시피 그것은 지금 더글러스가 속해 있는 당 전체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었습니다.
또한 더글러스는 제 주장이 가는 곳마다 달라진다고 하는데 제 연설문은 아시다시피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직접 비교를 해 보시면 과연 제 말이 달라졌는지를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인종평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노예해방론자들 못지않게 노예제도를 혐오해 왔습니다. 저는 노예제도 자체가 적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싫습니다. 저는 이 제도가 미국이 민주국가로서의 모범을 전 세계에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는 자유에 기반을 두는 민주주의 제도의 적이 될 수 있고, 우리를 위선자로 조롱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 참된 동반자들이 우리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독립선언문을 조롱하고 이기심 이외에는 인간에게 적절한 행동원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나 전제들과 대립하도록 우리의 많은 선한 이웃들을 몰아가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는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지향과 반대되는 이기심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미주리 타협안을 배척하고 독립선언문을 무시하고 우리의 지난 모든 역사를 되돌린다 해도 고귀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을 모두 떨쳐버릴 수는 없습니다. 노예제도의 확산이 나쁘다는 도덕적 판단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 심성 깊숙히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생명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자치의 원칙은 옳습니다. 절대적으로 영원히 옳습니다. 그러나 주권재민의 원칙은 이 문제에 관해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노예제도에 자치의 원칙이 적용되는 문제는 흑인이 인간인지 아닌지 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흑인이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제를 자치에 내맡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흑인이 인간이라면 그들 스스로를 규율할 수 있는 권리를 막는 것 그 자체가 자치의 원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요?
링컨은 상원의원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인 '분열의 집(House Divided)'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그 연설문 중 일부를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분열되어 자기 자신을 향해 적대하는 집은 바로 설 수 없으리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부가 절반은 노예제를 찬성하고 절반은 반대를 하는 상태로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집이 무너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집의 분열이 그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간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노예제도가 추가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고 노예제도가 궁극적으로는 폐지되는 과정 속에 놓여있다는 신념이 대중 속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반면에 노예제도 옹호론자들은 기존의 주에서부터 신생 주에 이르기까지, 남쪽에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합법화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밀어붙이려 할 것입니다."
노예제도를 반대한다는 그의 얘기를 듣고 흑인 공화당원들은 아주 좋아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링컨은 멕시코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또한 노예도주법을 반대하고 워싱턴에서 노예 해방을 주장한 적도 있습니다. 링컨은 백인과 흑인에 대한 모든 사회제도 상의 평등을 주장하며 심지어는 흑인과 백인이 결혼할 수도 있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링컨의 주장은 사회적인 불안과 충돌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여기서 제가 밝혀둘 것은 제가 통과시킨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의 원래 취지는 무엇보다도 미합중국이 자치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문제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 스스로가 결정하게 하자는 주권재민(Popular sovereignty)의 원칙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새로 편입되는 주의 지역주민들이 노예제도에 관해 허용할 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주권재민의 올바른 적용이야말로 노예제도로 인한 갈등을 끝내고 북부와 남부의 주들이 평화로운 공존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반대측 질문(링컨)
더글러스 후보는 저를 모함하는 많은 의문과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를 모함하는 자신의 주장들에 대해 아무런 근거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의 질문에 대해 분명히 대답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그동안 취해왔던 정치적 입장들 중 일부는 제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제가 속해 있는 공화당의 입장도 섞여있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먼저 저는 도주 노예법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고 수정을 요구했음을 밝혀 둡니다. 더글러스의 주장은 이렇듯 사실 부분에서 여러가지로 잘못된 점이 많습니다. 저는 '흑인은 헌법상 연방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재판을 청구할 자격이 없고 노예의 소유는 헌법에 보장된 재산권의 일부로써 보호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드레드 스콧 판결문을 지지했던 더글러스에게 묻습니다. 이 판결문의 법리대로라면 지역 주민 대다수가 노예제도의 폐지를 원한다고 해도 과연 가능키나 한 것일까요?
더글러스가 통과시킨 캔사스-네브래스카 법은 그동안 미합중국에서 노예제도가 인정될 수 없는 지역이라고 국가적 합의가 이루어졌던 지역에 다시 노예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길을 여는 행위 아닙니까? 더글러스야말로 노예제도를 미국 전역으로 확산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노예제도가 과연 주정부 자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보십니까? 과연 주류법 같은 자치 영역의 문제들과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일까요?
반대측 입론(링컨)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론에 앞서 먼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저와 더글러스가 결코 다투지 않고 기꺼이 합의하는 원칙들이 다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모든 주가 노예제도를 포함하여 자치 문제에 관해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그의 주장인데, 저 역시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는 제가 이 문제에 관해 그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거듭 주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제 견해를 계속 왜곡하고 있지만 이에 관한 제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왜 우리 정부가 절반은 노예제도를 찬성하고 절반은 반대를 하는 상태로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서 저의 그와 같은 의견에 대한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그의 또다른 질문 한 가지는 '왜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토대를 그대로 놔두지 않는가?'였는데 바로 이 점이 그와 제가 정확히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저는 더글러스와 그의 동료들이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다져 놓은 원래의 건국이념을 훼손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더글러스가 우리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노예 매매를 근절시켜서 노예제도의 근원을 차단했으며, 기존의 주 이외에 새로 생기는 주에서만큼은 노예제도를 제한시키는 제도를 채택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건국의 아버지들의 의도는 너무나 명백해서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든 그것이 노예제도의 근절을 염두에 둔 포석임을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더글러스는 저더러 왜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든 그대로 놔둘 수 없느냐고 물었는데 오히려 제가 그에게 왜 그분들이 만든 대로 놔두지 않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지만 더글러스와 그의 동료들은 이 건국 당시의 정책을 파기시켜버린 후에 미국 전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영구적인 제도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 어디서건 제가 요구하거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건 오직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원래 닦아놓은 법률적 토대로 이를 다시 되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노예제도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지역들에서만 합법화하고 새로운 주들에게로 확산시키지 않도록 제한함으로써 건국의 아버지들이 추구했던 정책으로 다시 되돌리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노예제도가 완전히 사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캔자스-네브래스카 주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하는 것이 주권재민에 관한 문제인 양 본질을 호도하는 것은 자유인과 노예가 공존할 수 없다는 미국 건국이념에 위배된다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찬성측 질문(더글러스)
링컨은 국부들이 노예제도 폐지를 원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맞는 말입니까? 과연 그럴까요? 우리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은 이에 관해 뭐라고 말했을까요? 과연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이 링컨의 주장대로 생각했을까요? 미국 건국의 주역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 백인 남성들이었습니까? 아니면 흑인들이었습니까? 여러분들은 우리가 흑인들과 동등히 대우받아야 한다는 링컨의 주장에 찬성하십니까?
찬성측 반론(더글러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정부는 백인이 주축이 된 건국의 아버지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즉 백인에 의해, 백인의 이익을 보호하고, 백인의 무궁한 번영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다가올 모든 시대에도 백인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세워졌습니다. 링컨의 연설은 일리는 있지만 내전을 부추기는 연설입니다. 링컨이 드레드 스콧 판결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백인과 흑인 간의 인종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가 주장하는 주권재민이야말로 우리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이 꿈꾸었던 지역분권형 정부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독립선언서들의 참여자들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선언했을 때, 흑인이나 인디언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흑인이 백인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사회적, 정치적, 법적인 평등까지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동의하신다면 링컨에게 표를 던지십시오. 저는 노예해방뿐만 아니라 백인과 흑인의 사회적 통합까지 지지하는 링컨 같은 급진적인 공화당원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링컨은 북쪽으로만 가면 극단적인 노예해방론자처럼 굴면서도, 남쪽으로 가면 또 자신이 충실한 휘그당원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렇게 링컨은 지역에 따라서 자신의 주장을 이리저리 바꾸는 사람입니다. 링컨처럼 가는 곳마다 주장이 달라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입니다. 또한 그는 예전에 자신이 경영하던 상점에서 법을 어기고 술을 판 적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불법행위이고, 이렇게 법을 어긴 사람이 상원의원에 당선된다면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링컨은 절대로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밝혀두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가 만든 법안이 반드시 노예 해방 반대 입장 쪽으로만 이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노예 해방을 원하는 주의 주민들은 지역 경찰법에 노예소유주가 도망간 노예를 경찰권으로 되찾아올 수 있는 조항을 제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예제도를 선택하지 않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측 반론(링컨)
더글러스는 저더러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제가 얼굴이 하나 더 있었더라면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하필 잘생긴 얼굴을 놔두고 이렇게 못생긴 얼굴로 여기까지 나왔겠습니까?
그리고 더글러스가 제가 술을 팔았다는 얘길 한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가게를 운영하던 때에 제 가게에서 가장 술을 많이 사 먹던 고객이 바로 더글러스였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저는 이미 술을 파는 계산대를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더글러스는 아직까지도 그 술 파는 가게의 충실한 고객으로 남아있다는 점입니다.[26]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언제 백인과 흑인 간의 완전한 사회적, 정치적 평등을 주장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흑인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다거나, 배심원이 된다거나 혹은 공직에 오르고 또 백인과 결혼하는 것까지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진 이후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어디서도 흑인이 독립선언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독립선언서에 흑인이 포함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3년 전 어느 무렵부터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이란 말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물론 저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3년 전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노예제도의 우위와 영속성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독립선언서에 대한 이러한 공격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제가 단언컨대, 적어도 3년 전까지는 아무도 감히 그것을 대놓고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라도 믿는 척 가장하는 은밀한 방식이었던 것이 이 무렵부터 독립선언서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낸 사람은 드레드 스콧 사건의 수석필사인 테이니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바로 여러분이 아시는 더글러스이며, 아시다시피 그것은 지금 더글러스가 속해 있는 당 전체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었습니다.
또한 더글러스는 제 주장이 가는 곳마다 달라진다고 하는데 제 연설문은 아시다시피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직접 비교를 해 보시면 과연 제 말이 달라졌는지를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인종평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노예해방론자들 못지않게 노예제도를 혐오해 왔습니다. 저는 노예제도 자체가 적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싫습니다. 저는 이 제도가 미국이 민주국가로서의 모범을 전 세계에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는 자유에 기반을 두는 민주주의 제도의 적이 될 수 있고, 우리를 위선자로 조롱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 참된 동반자들이 우리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독립선언문을 조롱하고 이기심 이외에는 인간에게 적절한 행동원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나 전제들과 대립하도록 우리의 많은 선한 이웃들을 몰아가기 때문에 싫습니다. 노예제도는 정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지향과 반대되는 이기심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싫습니다. 미주리 타협안을 배척하고 독립선언문을 무시하고 우리의 지난 모든 역사를 되돌린다 해도 고귀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을 모두 떨쳐버릴 수는 없습니다. 노예제도의 확산이 나쁘다는 도덕적 판단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 심성 깊숙히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생명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자치의 원칙은 옳습니다. 절대적으로 영원히 옳습니다. 그러나 주권재민의 원칙은 이 문제에 관해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노예제도에 자치의 원칙이 적용되는 문제는 흑인이 인간인지 아닌지 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흑인이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제를 자치에 내맡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흑인이 인간이라면 그들 스스로를 규율할 수 있는 권리를 막는 것 그 자체가 자치의 원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흑인 노예제 문제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던 1860년 말 치러진 대선에서, 링컨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이 북부 민주당(스티븐 더글러스)과 남부 민주당( 존 C. 브레킨리지)으로 쪼개지면서 링컨으로선 어부지리적인 효과도 얻었다. 당시 스티븐 더글러스가 노예제를 각 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민주당 출신 치고 나름대로는 중립적인 발언을 해서[27] 브레킨리지를 대표로 한 남부 출신 인사들의 미움을 산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28] 더글러스는 유권자 선거에서는 100만 표 넘게 받으며 2위를 차지하지만, 텃밭이던 남부를 존 C. 브레킨리지가 가져가면서 선거인단은 12명밖에 못 얻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한다.
"악어와 흑인이 함께 있다면 나는 흑인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백인과 흑인이 함께 있다면 백인을 돕겠다."
- 대선 연설전에서 스티븐 더글러스가 한 말.
- 대선 연설전에서 스티븐 더글러스가 한 말.
또한 이 선거는 당선자의 득표율이 40%를 넘지 않은(39%) 유일한 선거다. 공화당의 분열 덕에 당선된 것으로 유명한 우드로 윌슨도 41%는 됐다.
여하간 정리하면 그는 인생에서 두 번의 사업 실패와 10번의 선거 중에 7번의 낙선을 밟았다. 거기에 9살 때 어머니를 잃고, 19살 때 누이를 잃고, 26살 때 약혼녀를 잃고, 41살 때 차남 에드워드, 53살 때 삼남 윌리엄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그리고 자신도 제 명을 다하지 못했고, 아내도 출신 성분 때문에[29][30] 사치와 성질이 조금 쩔어준데다 성격도 좀 이상하고 인격도 좀 개차반이었다고 한다.[31] 게다가 평생의 정적이 따라붙어 곤욕을 치르기까지 했다.
다만 링컨의 저학력에 대해선 이 당시 미국은 의무교육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된다. 미국에서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852년 매사추세츠부터이고, 전국적인 의무교육 보급은 19세기 후반이 되어서부터이니 링컨처럼 그 이전에 유소년기를 보낸 세대들은 당연히 무학의 비율이 높았다.[32] 거기에다가 좀 배웠다거나 부유했다거나 하는 사람들도 집에서 가정교사를 따로 두며 공부를 하거나 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33] 당시 대학은 부유한 집에서 교양 및 과시용으로 다니는 게 아니라면 순수하게 학문 자체를 하려는 사람들만 진학했으며, 변호사도 변호사 사무소에서 일 좀 배운 뒤에 개업하는 경우가 더 많았을 정도였다.[34] 이처럼 정규교육을 안 받고도 본인 분야에 필요한 실력을 갖추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35][36] 즉, 의무교육이 당연해진 21세기의 사정과 비교하기는 힘들다는 얘기이다.
3.2.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고 영웅이 되다
1862.10.03. 왼쪽부터 앨런 핑커톤[37], 에이브러햄 링컨[38], 존 알렉산더 매클러넌드.[39] |
당시 노예제를 시행했던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열차를 갈아타는 시간은 일부러 새벽 3시 30분에 맞췄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새벽 시간에 워싱턴DC에 도착한 링컨 대통령에 대해 당시 일부 신문은 "밤도둑처럼 수도에 들어왔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남부는 강경하게 노예제를 반대해 온 정치인이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서 심하게 반발하여 당선 직후 차례로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아메리카 연합국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링컨이 "어느 주도 미연방에서 탈퇴하지 못한다"며 이들을 반란군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의 취임 1달 만에 남북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중이던 1864년 어렵사리 재선에 성공하였다. 결국 1865년에 남북전쟁은 남부의 항복으로 끝났지만, 종전 11일 후 그는 극장에서 극렬한 남부 지지자였던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게 암살된다. 이때 주치의가 상처에 미라 가루를 뿌렸다는 기록과 총알 꺼낸다고 눈을 쑤셨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한편 부스 추적과 일당 재판에 대해서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전해오는데, 역시 대통령 암살이라는 사건이라서 그럴 것이다.
한편, 링컨은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명인데, 그의 일생이 영웅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행보와 거룩한 희생으로 끝맺어졌다는 점과 함께 한 나라로서의 아메리카 연방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링컨 이전의 미국은 어디까지나 각 주(州)의 연합체였을 뿐 한 나라라는 의식은 희박했다. 조지 워싱턴이 물려준 미국이 주끼리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해체할 수 있는 연맹이었다면, 링컨이 물려준 미국은 하나의 나라이자 운명을 같이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미합중국 The United States'였던 것이다. 그때까지 "The United States are~"라고 복수형으로 표현해서 주들의 연합체로 표현하던 합중국을 링컨 이후에는 "The United States is~"라고 단수형으로 표현해 하나의 국가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링컨 기념관에 새겨진 헌사가 '이 성전에는 미합중국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 미국을 구원한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기억들이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국가통합과 함께 노예제를 완전히 몰아낸 업적은 미국이 지금까지도 그토록 부르짖는 해방, 자유 등 미국인들이 말하는 미국의 근본적인 정신과 맥이 닿아 있기에 그것을 지키고 실천해서 더 나은 국가로 만들어낸 링컨이 영웅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미국이 만들어낸 링컨의 영상들의 끝맺음은 국가통합과 더불어 그 어떤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국가, 숭고한 가치를 추구해 갈 것이라는, 미국이 계속해서 곱씹을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언급이 들어가고는 한다. 대충 21분 40초경부터 보면 남북전쟁과 링컨이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링컨은 역대 미국 대통령 인기조사 시 정당과 정치성향을 막론하고 늘 Top 5 안에는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며,[40]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미국을 확실하게 통합시켰다는 점에서 고평가받는 대통령으로 손꼽히고 있다. 덕분인지 반사효과로 그의 전임자 제임스 뷰캐넌과 후임자 앤드루 존슨은 인기조사 최하위를 두고 경합을 벌이는 수준이고[41], 전전임자인 프랭클린 피어스, 전전전임자인 밀러드 필모어도 낮은 편이다. 후후임자인 율리시스 S. 그랜트도 1913년부터 50 달러 지폐의 모델이었으나 꽤나 오랫동안 하위권이었다. 최근에는 아버지 부시와 함께 중위권 라인을 형성하는 중.
3.3.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
자세한 내용은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4. 링컨과 노예제
말년의 링컨(1865년)[42] |
결론부터 말하면, 링컨은 노예제 폐지라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는 미국에서 "노예제"라는 비도덕적 제도를 추방한다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정치 생명을 모두 바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수정헌법 제13조를 통과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실 링컨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후술되어 있듯 그가 지역의 유불리에 따라서 상반된 발언을 했다는 점이나 연방을 위해 노예제를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을 예로 들며 링컨이 노예제 문제는 뒷전으로 두고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막는데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자면 링컨의 최대 관심사는 연방의 유지와 노예제 폐지 둘 다였다.
사실 링컨은 급진파라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정치인이었고[43][44] 그러다 보니 당선을 위해 아래 발언들처럼 (물론 추측의 영역이긴 하지만) 본심을 교묘히 숨긴 측면도 있어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경우 링컨이 포퓰리스트적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과감한 개혁을 시행하기 위해선 우선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노련한 정치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이니, 이 인종 저 인종이니, 다른 인종은 열등하므로 열등한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등의 이 모든 궤변은 이제 버립시다. 이 모든 걸 버리고 이 땅 전역에서 한 국민으로 단결해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합시다.
1858년 7월 일리노이 주 북부(시카고) 영어전문.
링컨의 이런 태도는 링컨의
존 C. 프리몬트의 노예해방선언문의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미군 육군 서부 방면군 소장이자
공화당 급진파 소속 인물 존 C. 프리몬트는 노예제를 지지하지만 연방을 지지한 국경 지대 주인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 시에서 미주리주의 계엄령을 발동하면서 "남부연합군 소속 인물들의 노예들을 포함한 재산을 몰수하고, 몰수된 노예들은 해방될 것이며, 연방정부를 반대한 이력이 있는 남부연합군 소속 인물은 사형당할 수 있다"고 선언했는데, 링컨은 프리몬트의 선언문이 너무 극단적이며, 자칫하면 연방을 지지한 노예제 지지 주들이 분리 독립해서
남부연합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프리몬트에게 선언문을 "노예해방선언 조항을 기존 연방법인 '남부연합군 소속으로 직접 전쟁에 참전한 노예들만 몰수하고 해방하는 것'에 부합하도록 수정하라"고 명령했으며, 프리몬트가 월권행위를 한다고 판단해서 이후 해임했다.1858년 7월 일리노이 주 북부(시카고) 영어전문.
한편,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가져와서 링컨이 노예제에 관심이 없었고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저는 백인종과 흑인종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평등을 가져오는 것에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한 적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흑인종(Negroes)을 투표인이나 배심원으로 만드는 것, 정권을 쥐게 하는 것, 백인들과 결혼하게 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고 찬성한 적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저는 흑인과 백인종 사이엔 물리적인 차이점이 있으며 그 차이점이 영원히 두 인종이 사회적, 정치적 동등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방지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이 평등하게 살 수 없는 한,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동안 우월한 지위와 열등한 지위가 남아있어야 하며, 다른 그 누구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1858년 9월 일리노이 주 남부(찰스턴)에서 영어전문.
1858년 9월 일리노이 주 남부(찰스턴)에서 영어전문.
다만 이 문장은 주의할 것이, 그 뒤 계속되는 링컨의 연설을 짤라먹었다. 링컨은 바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빌려 다시 이야기하건대 저는 개인적으로 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한다고 해서 흑인종이 모든 권리를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흑인 여인이 노예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해서 제가 그 흑인 여성분과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환호와 웃음소리)
사실 이 문장도 그냥 보면 좀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링컨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해왔고 그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는지 좀 더 이해하면 청중들이 왜 웃었는지도 알게 된다. 이때 토론 상대방인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링컨의 개인적인 취향이 흑인 매니아로, 그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려고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흑인 소녀를 아내로 삼고 싶어한다는 흑색선전으로 링컨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링컨은 노예제는 반대하되, 흑인들이 투표권처럼 백인들과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당장 얻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라고 에둘러 반박했다.[45] [46]
남북전쟁에서 연방군을 도운 흑인들을 보고 노예제와 흑인선거권에 대해서 마음을 고친 많은 백인들처럼, 링컨도 (본심이 뭐였든 간에) 처음에는 흑인들이 하등하다고는 하나 그것이 노예가 되어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미국 독립선언문 정신에 따라서 신체의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번 것을 남들에게 이유없이 빼앗기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사상에서 출발해서 전쟁 말기 쯤 되면 보상없고 즉각적인 노예해방 그리고 나라에 의무를 다한 흑인들에게 선거권이라는 급진주의자로 변하는 것. 그리고 청중들이 웃은 이유는 당시 노예 찬성론자들인 남부 지주들이 여성 흑인 노예들을 성노리개로 삼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였는데, 링컨이 자신이 흑인애호가라는 비난을 위트있게 부정하면서 정작 이런 흑색전선을 펴고 있는 민주당이 흑인 정부(情婦)를 두고 있는 남부 지주들의 지지를 받는 상황을 꼬집은 것이다.[47]
한편, 링컨은 이런 말도 했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다 필요하다면 그 역시 그렇게 하겠다.
다만 이 글만 보면 노예제 폐지보단 연방제를 더 중시한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는 내용인데, 사실 링컨은 그 와중에도 노예제 폐지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은 변치 않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원문은 이렇다.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다 필요하다면 그 역시 그렇게 하겠다.
이 싸움에서 내가 견지하는 최대의 목표는 바로 연방을 지키는 것이며 노예제를 지키거나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어떤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며, 일부는 해방시키고 일부는 내버려둠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가 노예제나 유색인에 대해 취하는 행동은 그것이 이 연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내가 삼가는 행동은 그것이 연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나는 여기서 내 공적 직무에 대한 내 견해에 따라 내 목적을 언급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어디서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내가 자주 표명했던 개인적인 바람을 수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영어전문]
참고로 링컨이 이 말을 한 배경은 '왜 일을 급진적으로 진행시키지 않느냐'는 노예 해방론자들에 대한 답변이었다. 위의 말은 1862년 7월(그러니까 남북전쟁 도중) 통과된
2차 몰수법(Second Confiscation Act)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지 않고, 링컨이 여기에 대해서 태만한 태도를 보여 지지자를 실망시키고 있다고 쓴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 당시 뉴욕『트리뷴(Tribune)』 주필)의 편지에 대한
링컨의 답장에서 나온 것이다.[49][영어전문]
전문에서 링컨은 "누군가가 노예제만 폐지된다면 연방이 분열되어도 상관없다 한다면 난 동의하지 않겠다, 누군가가 노예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연방이 분열되든 말든 상관없다 한다면 그 역시 반대한다"라고 밝히며 개인으로서의 링컨이 아닌 대통령으로서의 공직자 링컨은 연방을 지키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둘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명한다. 링컨 개인은 만인의 평등이란 가치를 신봉하였지만 그 가치를 위해 나라가 분열되는 꼴을 내버려둔다면 대통령으로서 옳은 처신이 아니고 또 다른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렇게 해명한 것이다. 링컨은 특히 전쟁 초기에는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비추었다.
왜냐하면 실제 남부가 떨어져 나가던 시기에도 끝까지 연방에 남길 고수하던 미주리, 켄터키, 델라웨어, 메릴랜드 등 노예제 주들은 적지 않게 있었는데, 만약 링컨이 노골적으로 노예제에 반대 표시를 했다면 이들은 최악의 경우 연방에서 탈퇴했을 것이고,[50] 그럼 어쩌면 남북전쟁의 흐름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노릇이기 때문. 즉, 그는 사회운동가마냥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살긴 어려운 현실적 상황이 있었다. 그리고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급진적인 개혁은 아무리 그 시대에 필요했던 해결책이라 할지라도 반대파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좌절된 케이스 역시 많았다.
한편, 정치에 갓 입문한 초짜 시절의 링컨은 어떻게 보면 그의 정적 더글러스보다 더한 인종차별로 보일 수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바로 노예제를 폐지하고 흑인 노예를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51] 그러나 링컨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링컨의 이 주장이 인종차별적이라고 하기보다는 당시 현실을 고려한 결과라고 본다.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고 난 뒤에도 미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 사상 때문에 제대로 진입을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라는 뜻이다. 당시엔 흑인, 백인 서로 구역 나눠살면 서로 싸울 일도 없고 좋다고 생각한 미국인들도 상당했다고 한다.
링컨은 전쟁 초반, 노예 해방의 급진적 진행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일례로 헨리 할렉(Henry Halleck) 장군은 노예들이 드나들며 적에게 군사정보를 보내고 있다고 믿고서는 1861년 11월 전선에서 모든 탈주 노예(contraband)의 부대 입대를 금지시키고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링컨은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 남부와 마찬가지로 북부 역시 붙잡힌 노예들이나 연방세력으로 돌아선 탈주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긴 커녕 수용소에 갇혀 많은 숫자가 죽었다. 존 C. 프리몬트[52] 장군이 1861년 7월,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반대한 그 주의 노예 소유주들의 모든 노예들은 자유라고 발표했을 때와 1862년 5월에 데이비드 헌터 장군이 조지아, 플로리다 및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모든 노예는 자유라고 선언하는 명령을 발했을 때도 링컨은 즉각 무효화시켰다고 한다. 이는 두번 다 전쟁 초기에 일어난 일인데 링컨은 이에 대해 노예해방에 대한 성급한 시도는 경계주의 상실을 의미하며, 켄터키 주를 잃는 것은 전체 전투에서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전쟁 초기 양상이니 경계주와 북부 민주당원들의 남부 전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같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두번의 장군령 모두 해방론자들 사이에서 나름의 지지를 얻긴 했지만, 현실적 난관도 많았기에 링컨으로선 이를 취소시킬 수밖에 없었다. 우선 프리몬트 장군의 경우 상관인 링컨 대통령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미주리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그 내용이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북 경계주인 미주리 지역에서 활발한 테러 활동을 벌이던 남부 게릴라들을 견제하기 위해 북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총을 소지한 민간인은 군법재판을 통해 처형될 수 있다"는 계엄령을 발표한 것인데 이 조치에 대한 보복으로 남군은 북부 지지자들을 처형했고 미주리 주 주변에선 그야말로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리고 프리몬트의 남부 지지자 소유인 노예는 모두 해방된다는 선포는 미주리와 켄터키, 그리고 북부를 지지하지만 노예해방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상당수를 남부 지지자로 만들었고 오히려 더 큰 테러를 불러왔다. 경계주의 이탈, 그중에서도 특히 켄터키의 남부화가 연방의 확실한 분열과 패전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북군으로선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이 초래된 것. 링컨이 그 조치를 취소시킬 것을 건의하지만 프리몬트가 듣지 않고 오히려 아내를 보내 링컨을 상대로 협상을 제시하자 링컨은 자신이 나서서 계엄령을 해제하고 문제를 일으킨 프리몬트를 2개월 후 해임시킨 뒤 율리시스 그랜트를 임명하는 결정을 내렸다.[53]
또 한 명의 장군인 데이비드 헌터는 군사적 능력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프리몬트보다 유능했고, 경험도 많았으며 충성심 등에 있어 링컨이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인물이란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이다. 헌터 장군령의 궁극적인 의의는 그릴리가 편지에서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 병사들의 자유 참전이었다. 그러나 헌터의 장군령은 당시에도 말이 많았는데 우선 탈주 노예들 중 자신의 자유의지로 참전하는 용병들은 극소수에 가까웠고, 백인 부대원들이 아무 설명도 없이 일하고 있는 노예들을 납치하듯 강제로 끌고 가서 입대시킨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어서 흑인들 사이에서도 괴담이 돌곤 하였다. 프레몬트 때와 달리 링컨은 헌터 장군에 대해 자신의 친구이자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조치를 취소시켰고 이후 1주일 뒤 흑인 병사들을 모집하는 것 자체는 당연히 찬성이지만 강압적으로 참전을 강요하거나, 전쟁에 적합하지 않은 흑인들까지 강제 동원시키는 것을 반대할 뿐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의회에는 흑인 병사 참전을 찬성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는데 반대 여론은 역시나 전쟁 초기 링컨이 가장 신경쓰고 있었던 켄터키 주를 앞세운 경계주의 의원들이었다. 헌터의 장군령이 무산으로 돌아간 이후 의회에서는 대안으로 1,2차 몰수법을 발의하는데 링컨은 이 법이 무조건적인 사권박탈법이라고 말하면서 법이 수정될 때까지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으며,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그 법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명하고 이를 수행하지 않았다.[54] 이에 대해 링컨은 의회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쟁 사령관 직권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노예 해방 선언을 준비하게 된다.
어쨌거나 링컨은 자신의 생애 내내 노예제를 반대해왔으며 노예제를 미국의 암덩어리로 여겼다. 그의 행보를 보면 알겠지만 링컨은 급진적인 혁명가라기보다는 점진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에 가까웠다. 당장 해결하기에는 어렵지만 연방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사라져야할 악습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릴리와의 편지 답장에 대해서 오랫동안 여러가지 해석이 있어왔으나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링컨이 노예제를 정치적으로만 이용했다거나, 노예제에 대해 반대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링컨이 노예제를 철저하게 연방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만으로 생각했다는 의견에도 반박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경우 그의 발언이 오히려 북부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에게 노예제 철폐가 아닌 "연방의 유지"라는 명분을 제공하여 그들을 회유하려는 수단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학자 스티븐 오츠의 경우 링컨이 전쟁 초반 경계주들의 이탈과 북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했던 발언들만이 선택적으로 인용되어, 링컨이 했던 노예제 반대에 대한 다른 수많은 발언들과 당시의 정치, 군사적 맥락이 철저히 무시당하고 그릴리의 답장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고 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했다.
노예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라는 나의 직책이 이러한 의견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이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내가 결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를 지배했었던 거 같다.
링컨 본인도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직책과 정치인으로서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던 상황 등에 대한 나름의 회한이 존재했던 것 같다. 물론
만악의 근원은 노예제를 당연시하던 당시 상당수 지역의 사회 분위기였겠지만.또한 초반에 급진적인 법안이 중립 입장을 취하고 있는 주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몸을 사리긴 했어도 링컨은 꾸준히 자신이 직접 제정할 노예 해방선언을 위한 준비를 성실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링컨은 반대의사를 표명했다고 알려진 몰수법에 대해서도 의회의 권력만으론 시행시킬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자신의 직권으로 그것을 가능케하고자 계획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2차 몰수법이 발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 해방선언의 초안을 내각에 발표했고[55] 이듬해에 마침내 노예 해방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남북전쟁이라는 상황과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도 과감하게 노예 해방을 발표한 것,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한 것은 그 기저에 깔린 정치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링컨의 큰 업적이다. 전쟁이 끝났으니 노예 해방합시다! 그럽시다! 와! 이런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노예는 여전히 남부의 자산이었고 노예해방은 자산 강탈로 비추어졌다. 북부에서도 서민층은 자기보다 밑인 흑인노예와 동급이 되는 것을 그닥 달가워하진 않았고, 이를 반영한 여당과 야당 모두 노예해방에 조심스럽거나 적대적이었다. 링컨의 해방선언은 향후 미국의 역사가 인종차별의 철폐로 이어지도록 방향을 결정하였다. 즉, 노예제 폐지와 인권 향상에 링컨은 큰 공적을 세운 것이며, 링컨의 소신이 옳았음은 그의 정치기반 일리노이에서 탄생한 흑인 미국 대통령이 다시 한 번 증명해 주었다.
5. 가족관계
5.1. 아내 메리 토드 링컨 (Mary Todd Lincoln)
젊은 시절에 에이미 스튜어트[56](1812 ~ 1836)라는 여성을 사랑하여 청혼까지 했는데, 그녀도 링컨을 좋아하여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달만에 그녀가 24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장티푸스로 사망하면서 슬픔에 빠져 한동안 여성을 사귀지 않았다가 1842년에 메리 토드라는 남부 출신의 부잣집 여성을 소개받아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메리 토드의 전 남친은 남편의 정적 스티븐 A. 더글러스였다.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 1818 ~ 1882)[57]는 실제 성격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메리 링컨은 히스테리와 편집증 증세가 있었고, 이는 남편과 후술된 아이, 형제자매들의 사망 이후엔 거의 정신병 수준으로 심해진다.[58] 이와 별개로 실제 부부간 사이는 생각보단 큰 갈등 없이 유지되었으며, 공처가였던 링컨 역시 메리의 성화를 참고 살아준 것도 한몫했다. 또한 링컨은 결혼 생활 내내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지 않고 메리에게 헌신했으며 메리도 성격상의 결함 때문에 여러 잡음과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두 사람은 백년해로하며 부부로서 서로에게 충실했다. 허나 메리는 남편이 암살당하고 옆에서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슬픔과 고통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고 188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보다 17년 더 오래 장수했다.[59]
5.2. 자식
장남은 장수한 편에 속하지만,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20세를 맞이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장남만 제외하고 먼저 태어난 자식일수록 먼저 사망했고, 더 짧은 생을 살았다.5.2.1. 장남 로버트 링컨 (Robert Todd Lincoln)
일단 첫째는 풀 네임 로버트 토드 링컨(1843~1926)으로, 유일하게 성인으로 자라 당시 기준으론 꽤 오래 산 83세까지 살았다. 남북전쟁 때는 육군에 입대하기도 했고, 심지어 그 유명한 로버트 리 장군의 항복을 목격한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는 변호사이자 사업가로도 성공을 거두고 전쟁장관과 주영대사를 역임하는 등 공직에서도 탄탄대로를 걸었으며, 결혼해서 자손도 남겼다.[60] 남북전쟁 시기의 군인이 제1차 세계 대전은 물론 워렌 하딩과 캘빈 쿨리지의 당선까지 보고 세상을 떠났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감이 올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미국도 평균 수명이 짧은 편이었던 시기였다.)그러나 대통령 암살에 대한 음모론 때문에 본의 아니게 맘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자 미국을 구원한 영웅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아들이기 때문에 공화당 내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고, 대선 후보로도 거론된 거물이라 어느 미국 대통령도 쉽게 만날수 있는 위치였던 게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 그는 미국 역사상 4건 있었던 대통령 암살 사건 중 3번이나 연관이 있는데, 아버지가 죽음을 맞은 날엔 전날 하루종일 말을 탔다는 이유로 극장 관람을 불참하여 현장을 모면했으나, 그 외에도 20대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 25대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둘 다 그를 만났다가 암살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버트는 그 뒤 대통령과 관련된 곳엔 (링컨 관련 행사 정도를 제외한다면)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일화는 2020년 1월 26일자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900회 방송분에 소개되었다. 하나 더 묘한 인연은, 아버지가 대통령으로 재직 중이던 시절에 열차에 깔릴 뻔 한 적이 있는데 그를 구한 것이 당대 유명한 배우인 에드윈 부스, 즉 얼마 뒤 아버지의 암살범이 되는 존 윌크스 부스의 형이었다는 것이다.
사망 4년 전인 1922년, 링컨 기념관이 개관되자 미합중국 해병대 장병들의 부축을 받으며 개관식에 참석한 사진이 있다. # 그는 하딩과 전직 대통령 겸 연방 대법원장인 윌리엄 태프트 옆에 섰다.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고 부끄럽지 않은 자신만의 삶을 잘 살아낸 로버트는 앨링턴 국립묘지에 안장 되었으며, 그의 아내는 "위대한 부친과는 별도로 자신의 역사를 만든 남편은 태양 아래 양지 바른 곳에 묻혀져야 한다"라고 그를 추억했다.
5.2.2. 차남 에드워드 링컨 (Edward Baker Lincoln)
차남 에드워드 베이커[61] 에드워드는 1846년 3월 10일 태어났다. 이때 에이브러햄 링컨은 절친 조슈아 스페드에게 "자네 아들 어릴 때를 똑 닮았다"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고작 4세 때, 디프테리아에 걸려 무려 52일을 앓다가 1850년 2월 11일, 생일을 한 달 앞두고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사망 일주일 후 누군가가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작은 에디(Little Eddie)'라는 제목의 에디(에드워드)를 추모하는 시를 보냈다.원문 | 번역 |
Those midnight stars are sadly dimmed, That late so brilliantly shone, And the crimson tinge from cheek and lip, With the heart’s warm life has flown— The angel death was hovering night, And the lovely boy was called to die. The silken waves of his glossy hair Lie still over his marble brow, And the pallid lip and pearly cheek The presence of Death avow. Pure little bud in kindness given, In mercy taken to bloom in heaven. Happier far is the angel child With the harp and the crown of gold, Who warbles now at the Saviour’s feet The glories to us untold. Eddie, meet blossom of heavenly love, Dwells in the spirit-world above. Angel boy—fare thee well, farewell Sweet Eddie, we bid thee adieu! Affection’s wail cannot reach thee now, Deep though it be, and true. Bright is the home to him now given,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Heaven.” |
그날 밤 별들이 슬피 빛났다. 늦은 밤을 환히 밝히던 별들이. 붉은 빛의 볼과 입술을 지닌 마음 따뜻한 아이의 생명은 밤하늘을 날던 죽음의 천사의 부름에 함께 스러졌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아이의 머릿결은 여전히 그의 이마 위에 찰랑이는데, 그의 창백한 입술과 진주같이 흰 볼은 아이의 죽음을 선포하고 있구나. 친절과 자비로움으로 천국에서 싹틀 순결한 꽃봉오리. 행복하도다, 하프와 금관을 쓰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 노래하는 이 어린 천사의 기쁨이 우리에게는 말로 다 못할 영광이기에. 성령의 나라에서 천국의 사랑으로 꽃을 피울 에디. 어린 천사여, 잘 가렴. 안녕. 사랑스러운 에디, 우리는 작별을 고하네! 우리의 애정어린 울음소리는 너에게 닿지 않으나 이것이 깊고 무거운 진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라 하였으니, 에디가 그 집을 지금 환히 비추고 있다네. |
5.2.3. 삼남 윌리엄 링컨 (William Wallace Lincoln)
삼남 윌리엄 월리스 링컨은 차남 에디가 사망한 바로 그 해인 1850년 12월 21일에 태어났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자형 윌리엄 월리스 박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 에이브러햄이 어찌나 기뻐했는지 '먼저 떠난 에드워드 대신 윌리엄을 주셨다'며 감사기도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대 증언에 따르면 두 형보다도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성격도 아버지를 닮았고, 어머니 토드도 "아버지를 닮아 신앙이 깊었다"라고 언급했다. 1861년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동생 테드와 함께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으로 이사를 갔는데, 백악관으로 온 지 1년이 막 지나자마자 장티푸스에 감염되고 말았고, 결국 2년째를 맞이한 1862년 2월 20일 1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워낙 예의바르고 주변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아들이라 장례식에 참석한 지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고난이 닥쳐도 꿈쩍않던 그 에이브러햄이 아들의 죽음 앞에 주저앉아 넋을 잃었다."라고 언급했다. 시신은 조지타운의 오크 힐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이후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작은형 에디와 함께 이장되었다.5.2.4. 사남 토머스 링컨 (Thomas Ted Lincoln)
막내아들 토머스 '테드' 링컨은 1853년 4월 4일 생이다. 세 형제 중에선 그나마 더 오래 산 아들이다. 유난히 머리가 커서 어린 나이에 머리 무게를 잘 감당하지 못해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붙은 별명이 '올챙이 머리'. 또 태어나면서부터 구강구조에 이상이 있어 발음이 불분명하고 어조도 이상했다고 전해진다. 형들과는 다르게 굉장한 말썽꾸러기였는데 서고의 책을 몽땅 뒤엎어놓는가 하면, 고관들에게 소방호스로 물대포를 퍼붓는다든지, 찻잔을 복도에 늘어놓는 장난을 자주 쳐서 백악관의 골칫거리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 셋째형 윌리엄과도 장난감 때문에 많이 싸웠다고.보다못한 어머니 토드가 가정교사를 구했지만 테드는 공부를 상당히 싫어했고 교육에 큰 진척이 없었다. 형처럼 아버지와 극장에 가는 걸 좋아했는데 무슨 우연인지 아버지가 암살당한 1865년 포드 극장에 가던 날, 에드는 포드 극장에 가지 않고 선생님을 따라 포드 극장 맞은편의 그로버 극장에서 아동극 《 알라딘》을 관람했다. 그런데 연극 중 잠시 휴식시간에 공연 관리자가 무대로 올라와 아버지인 링컨 대통령이 옆 포드 극장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발표하자 쇼크를 받았는지,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고 겨우겨우 백악관으로 후송되다시피 돌아와 잠이 들었다. 다음날에야 아버지가 죽었다는 걸 제대로 실감했는지 그 때부터 사람이 올바르게 바뀌었다고 한다. 가족들의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묵묵히 있는가 하면, 우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끌어안고 위로까지 했다고 한다. 테드를 위로하러 온 백악관 직원에게도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 이제 대통령의 아들이 아니다. 언젠가 나도 아버지의 곁으로 갈 거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을 보면, 아버지의 죽음을 제대로 실감했지만 다른 가족들을 위해 그 슬픔을 참아낸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인 에이브러햄이 사망한 후 그의 가족들은 백악관을 떠나 시카고로 이사했는데, 아버지를 닮아 글 실력이 뛰어났던 테드는 브라운 초등학교에서 학교 신문 편집부에 소속되어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18살이 되던 1871년에 갑자기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져 앓기 시작했고, 체중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등의 심각한 증세를 보였다. 심지어 누우면 숨을 쉬지 못해서 어머니 토드가 테드를 의자에 앉혀서 재워야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결국 2개월 뒤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7월 15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테드의 병명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대부분은 폐결핵을 유력하게 꼽는데, 폐렴, 흉막염 등도 가능성으로 거론되고 있다. 테드의 시신은 두 형처럼 나란히 아버지인 링컨 대통령의 곁에 매장되었다. 당시 맏형 로버트가 동생의 관을 운구했는데 어머니 메리 토드는 남편에, 세 아들을 연달아 잃은 쇼크가 극심했는지 장례식 내내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5.3. 가정사에 대한 결론
각설하고 다시 링컨 얘기로 돌아와서 이렇게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매우 힘든 삶을 살다 보니, 링컨은 거의 평생에 걸쳐 우울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이 시작된 정확한 계기에 대해선 확실한 설이 없지만, 가장 인기있는 설은 20대 중반일 때 사랑하던 여인 에이미 스튜어트를 장티푸스로 잃고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는 것이다. 하여튼 링컨의 정신장애는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나서 아내의 심각한 히스테리, 어린 아들들의 연이은 참척,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살상 속에서 더욱 악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평온한 성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오히려 초조·불안해 하는 각료들에게 농담을 던져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실제로 링컨 본인은 "나는 울지 않기 위해서 웃는다, 그게 전부야, 그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어."라고 말하기도 했다.링컨이 마르팡 증후군 환자였기 때문에 우울증을 앓았다는 건 가설에 불과하며, DNA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62] 입증할 방법이 없다. 의학자들은 링컨이 앓은 것이 마르팡 증후군일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마르팡 증후군 환자에게 흔히 따라오는 특성들인 저시력, 심혈관계 질환, 30살 남짓에 불과한 기대 수명, 약한 관절, 낮은 운동 능력 등등이 링컨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 링컨은 50대 중반까지 멀쩡히 걸어다니고 일도 하던 도중에 총기 사고로 사망했고, 젊었을 땐 막노동에 프로레슬링까지 할 정도로 건강했었다.
현재 유력한 가설은 링컨이 다발성 내분비계 종양을 앓고 있었으며 이 병이 친모인 낸시 링컨에게서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낸시 역시 키가 매우 크고 팔다리가 길쭉하며 깡말랐고, 두개골에 마르파노이드 환자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며 30대에 사망했다는 것이 그 근거.
추가적으로 현재에는 거의 낭설로 치부되는 링컨 매독설도 있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온 책인 데버러 헤이든의 <매독>[63]의 주장에 따르면, 링컨이 매독 말기로 실제 뇌가 상당수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메리 토드에게 옮은 건 아니고 링컨이 젊을 때 알고 지내던(?) 여성에게 옮았다는 주장. 일설에는 링컨 막내아들인 토머스(1853~1871)의 병사 역시 이 후유증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책의 주장에 따르면 링컨이 총에, 그것도 뇌에 맞아 죽는 통에 정신질환 말기 증세까지는 겪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인 메리는 그 뒤 17년 동안 서서히 증세가 나타나면서 같은 신발을 64켤레나 마구 사고 거리에서 욕하면서 날뛰고 그야말로 참혹하게 지내야 했다고 써 있다. 하지만 링컨의 매독설은 한 전기작가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해 딱히 그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보이진 않는다.
6. 평가
자세한 내용은 에이브러햄 링컨/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7. 여담
- 5달러 지폐에 실려 있다.
-
깡마른 인상으로 인해 잘 매치가 되지 않지만, 힘이 엄청난 장사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막노동을 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힘이 셌다고. 이와 관련해 동네 불한당이 시비를 걸어온 일화가 나름 유명하다. 링컨은 시비를 피할 수 없어서 결국 1:1 싸움이 벌어졌는데, 많은 구경꾼들이 키는 크지만 깡마른 링컨보다는 다부진 체격의 불한당의 승리를 점쳤다. 허나 예상과는 달리 링컨이 상대를 가볍게 발라버렸고, 이후 링컨과 불한당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보다 상세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831년, 링컨은 일리노이 주 뉴 세일럼으로 이사하였다. 이 동네에는 '클래리즈 그로브 녀석들'이라는 동네 젊은이들의 패거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항상 패거리의 리더인 잭 암스트롱이 동네에서 가장 강한 싸움꾼이라 자랑하고 다녔다. 당시 링컨은 덴튼 오풋이라는 사람의 가게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었는데, 오풋은 '링컨이야말로 동네에서 가장 강한 사내'라고 주장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잭 암스트롱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링컨에게 한 판 붙자고 제안을 했고, 링컨은 승낙했다.
클래리즈 그로브 녀석들'(Clary's Grove Boys)의 리더 잭 암스트롱
두 사람이 붙은 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왁자지껄 떠들고 구경을 하며 돈내기를 했다고 한다. 링컨은 키 193cm에 몸무게 78kg 가량 되었으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훨씬 키가 작지만 '황소처럼 힘이 세다'고 알려진 잭 암스트롱에게 걸었다.
싸움이 시작되자, 두 사람은 서로 탐색전을 펼치다가 서로 끌어안고 용을 썼으나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암스트롱이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암스트롱이 힘에서 밀리자 링컨은 암스트롱의 목을 잡고 팔을 뻗어 들어올린 채 암스트롱이 꼬마인양 흔들어댄 후 내동댕이쳤다.
암스트롱에게 초크슬램[64]을 먹이는 링컨
이 모습을 본 '클래리즈 그로브' 패거리는 분노하여 링컨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링컨은 오풋의 가게 쪽으로 물러나 가게 벽을 등지고서는 '전부 상대해 줄테니 한 놈씩 덤비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런 링컨의 모습을 본 잭 암스트롱은 그의 용기에 크게 감동하여 패거리를 만류하였고, 링컨과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며 "이봐, 이제는 에이브(Abe)가 우리 중 최고다!"라고 외쳤다. 이 일이 발생한 이후 암스트롱은 링컨의 친구 겸 정치적 후원자가 되었다. 링컨이 정치권에 데뷔할 때부터 자금이 부족했는데 암스트롱이 자신의 갱단을 이끌고 번 돈으로 링컨을 계속 후원해 줘서 링컨이 나중에 대통령이 될 때까지도 후원을 지속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이후 링컨은 암스트롱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이 때의 일을 회고하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고 한다.
- 상술한 잭 암스트롱의 아들 더프는 장성한 후 살인범으로 몰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에 링컨은 더프의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더프에게 무료 변호를 해 주어 더프의 누명을 풀어줬다.[65] 이 재판은 변호사 시절 링컨의 행적 중 유명하게 꼽히며, '달빛 사건'이라 하여 미국의 어린이들이 이 사건을 연극으로 만들어 발표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 프로레슬링계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이름높았다. 단순히 후일 대통령이 된 것 때문에 커리어가 덩달아 유명해지거나 과대평가된 게 아니라, 12년 동안 300~500 경기를 치르면서 단 한 번밖에 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66][67] 거꾸로 '그의 스포츠 커리어가 시들해지자 정치 커리어가 꽃피기 시작했다'라고 표현한 역사학자가 있을 정도로 링컨은 정치 인생에 지지 않는 화려한 레슬러 인생을 보냈다. 명예의 전당에서는 링컨의 체구에서 오는 긴 리치와 완력을 연승의 비결로 꼽고 있는데, 그 괴력은 19세의 나이로 자신의 이복형제의 바지선에서 강도들을 강에 가볍게 번쩍 들어 던져버리고, 상술했던 것처럼 세월이 지난 후에도 동네 깡패 암스트롱을 가볍게 붕붕 휘둘러 메다꽂을 정도였다. 이 당시의 프로레슬링은 술집 언저리에서 한 판 붙은 다음에 경기가 끝나면 주변에 운집해 있던 팬들이 난투극을 벌이는 식의 다분히 엉망진창인데다 터프한 스포츠였고, 현대와는 다르게 승패를 정해놓고 각본대로 하는 엔터테인먼트도 아니어서[68] 선수들이 죽기살기로 상대를 넘어뜨려야만 했다. 링컨은 당시의 대세였던 칼라 앤 엘보[69]의 방식을 거스르고 상대를 괴력으로 집어던져버리는 호쾌한 스타일을 구사했다고 한다. #
-
젊은 시절 링컨의 벌목 실력 또한 당시 자주 회자되던 이야기였다. 실제로 링컨의 젊은 시절을 묘사한 그림 중에는 그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는 모습이 많다. 링컨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몇 배 이상 빠르게 엄청난 도끼질로 나무를 넘겨대던 괴력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는 듯. 저 아래 "도끼질로 뱀파이어 때려잡는 링컨"의 상상은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것.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라는 영화가 몇 년 전 개봉했는데, 이 이미지에서 파생된 듯 하다. 인자한 빼빼마른 할아버지 같은 링컨 대통령이 사실 젊었을 적에는 엄청난 파워캐릭터였다는 것이 소소한 아이러니.
대충 이런 이미지.
- 게이 의혹이 있어 Gay Bar의 뮤직비디오는 1863년 백악관을 무대로 하는 것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한 근거는 딱히 없다. 동성애 이론 전문가 C.A. 트립 교수는 링컨이 결혼생활도 그저 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젊은 남성들과의 교제를 즐겼다고 주장했다. LGBT 옹호로 유명한 극작가 래리 크레이머가 미국인들(The American people)이라는 책에서 링컨을 게이였다고 소개했지만[70] 사료로 교차 검증되는 것이 없어 그저 낭설로 보인다.
-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공통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문서로. 다만 파고보면 상당수는 도시전설 수준으로, 예를 들어 많은 실패와 고난 속에 역경을 헤쳐온 링컨과 달리, 케네디는 엘리트 집안 출신으로 정치 인생도 꽤나 탄탄대로였다. 다만 케네디도 아예 역경이 없었던건 아닌데, 우선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적도 있었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 후유증으로 고생도 많이 했다.
- 노무현 前 대통령이 링컨 전기를 쓴 적이 있다.[71] 심지어 링컨박물관장의 말에 의하면 세계에서 링컨 전기를 쓴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한다. # 책 제목은 2001년 집필한 '노무현이 만난 링컨'. 실제로 워싱턴 D.C. 포드 극장 박물관에 특별 전시되어 있다. #
- 그림 실력 향상을 위해 소묘를 할 때 애용되는 모델. 워낙 얼굴의 요철이 강해 윤곽이 두드러지는지라 해칭하는 맛이 일품이다.
- 베이컨과 진저브레드를 매우 좋아하여 즐겨 먹었다. 사과와 사과파이도 매우 좋아했으며, 비스킷을 곁들인 치킨 프리카세와 굴 스튜도 좋아했고 대식가이기도 했다. 다만 술은 좋아하지 않아서 거의 마시지 않았다.
- 대통령이 되기 전에 미국-멕시코 전쟁을 반대했던 전력이 있다. 이미 멕시코의 영토인 곳을 점령하는 것은 부도덕한 침략전쟁이라는 얘기인데, 당시 그런 논리로써 침략전쟁을 반대한 사람이 링컨만이었던 건 아니기는 했다.[72]
-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자주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을 방문해 군인들과 밤새 놀고 이야기 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당시 남부연합 해군의 가장 강력한 철갑군함이었던 메리맥(Merrimack) 함[73]이 버려져 있던 한 해군 기지를 공략하는 군대를 시찰갔다. 가서 지휘관에게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자 대장은 "수심이 얼마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고, 링컨은 흔쾌히 "그럼 여기 나하고, 육군장관하고 재무부장관하고 가서 확인하고 오겠네." 라고 말했고, 장병들의 극구 반대에도 밤에 몰래 미군 최고 수뇌부 세명이 가서 수심을 확인하고 아침에 멀쩡히 돌아왔다. 이후 이 이야기는 링컨의 모험담 중 링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된다.
- 상술한 연이은 참척 때문에 링컨은 생전에 자기 아들들에게 전혀 야단을 치지 않았다고 한다. 상술했듯이 자식들이 장남을 제외하곤 전부 요절했는데, 살아생전에도 이미 다들 병약해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4남 토머스가 정부의 고관들에게 갖가지 장난을 쳐서 백악관에 말썽꾸러기로 찍힌 일도 그렇고, 정계 입문 직전에 변호사 생활을 할 때 장남 로버트는 아버지의 사무실을 마구 뒤엎어놓는 장난을 쳤는데도, 그때마다 오히려 링컨 본인도 그 장난에 합세하는 식으로 넘어갔다. 언제 세상을 뜰지 몰랐던 아들들에게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행복하게 해주고픈 소망이 있던 모양인데, 이 때문인지 아이들을 매우 좋아해서 상술한 자신에게 수염을 기를 것을 권한 소녀와의 일화도 있었고, 그 이외에도 백악관 앞에서 공놀이하던 아이들을 발견하자 대통령 신분도 잊고 아이들과 놀아준 일화도 있었다.
-
과거 링컨 관련 이런 유머글이 돈 적이 있었다.
공부는 안하고 망나니 짓만 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훈계를 했는데, "에이브러햄 링컨이 네 나이 때는 무엇을 했는지 아니? 열심히 독서하고 공부했단다." 이 말을 들은 아들 왈, "아, 그 사람 저도 알아요. 아버지 나이 때는 대통령이었잖아요!"
다만 이게 여러 버전이 있어서 링컨이 아니라 존 F.케네디를 넣는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40대라면 케네디가 딱(링컨은 51살에 대통령이며 케네디는 44살에 대통령이 되었으니)이다. 아빠와 아들을 직장 상사와 부하로, 링컨을 고르바초프로 바꾼 버전도 있다.
- 한 많은(?)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라서 그런지 워낙에 대중적인 인지도와 명성이 드높은 대통령이라서 그런지 어쨌는지 링컨은 백악관에 가장 자주 출몰하는 유령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이런 류의 괴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암살로 억울한 죽음을 당해서 혼이 이승을 못 떠나고 있다는 떡밥으로 써먹히는 중. 진실 여부는 그렇다치고 백악관은 건물이 낡아서 그런지 유령에 대한 목격담이 한둘이 아닌데 목격자들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독 링컨의 유령을 봤다고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백악관에는 링컨의 침실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문과 링컨이 당시 사용한 책걸상 및 침대 등이 놓여 있는데 윈스턴 처칠은 귀빈으로써 백악관에 묵을 당시 이 링컨 침실에 묵었다가 링컨의 유령을 보았고 말을 건넸다고 한다.[74]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당시 백악관 보좌관들 중 몇몇은 링컨의 유령을 목격하여 비명을 지르고 뛰쳐나간 적이 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아내 엘리너 루스벨트 영부인은 유령을 보진 못했지만 링컨의 존재를 느꼈다고 증언했다.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은 백악관에 묵을 당시 한밤중에 누가 노크를 하길래 문을 열었다가 링컨의 유령이 서있는 모습을 보고 기절했다는 소문도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밤새 링컨 유령의 악몽에 시달렸고, 심지어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은 뒤 링컨의 유령을 보기도 했다고. 결국 빡친 나머지 백악관을 불도져로 밀어버리고 리모델링 했다고 한다.[75]
-
링컨의 사진 중 하나는
합성 사진이다.
파일:external/twistedsifter.files.wordpress.com/abraham-lincoln-doctored-photoshopped-john-calhoun-body.jpg
좌측 사진은 사실 링컨의 풍모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서, 당당한 체구의 정치인의 사진에 링컨의 머리만 붙인 것이다. 합성된 정치인은 존 칼훈인데, 존 칼훈은 부통령을 두 차례나 지냈을 정도의 유명 정치인이지만 주의 분리와 독립, 노예제도 유지를 지지했던 남부 옹호세력의 거두였다.
-
데스마스크가 있다.
-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을 암살하고 난 후 "폭군의 말로는 언제나 이렇다." 라는 의미의 라틴어 "Sic Semper Tyrannis"를 외쳤다고 한다. 버지니아주의 표어이기도 하다.
- 놀랍게도 현상 수배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다만 이는 링컨이 뭔가 잘못했다는게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 현상 수배범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하필 그 사람이 링컨의 외모와 닮았다는 것. 이 얘기는 스펀지에서도 다룬 바 있고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도 주인공인 장고가 처음 처리하여 부적으로 들고다니는 현상수배범의 포스터로도 다루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의 혈흔이 남아있는 전보와 머리카락 뭉치가 경매에서 8만1천달러(약 9천600만원)에 팔렸다. #
- 링컨과 관련된 괴담 중 하나인데, 링컨이 죽기 며칠 전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링컨이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울고 있냐고 하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어요!하면서 울고 있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 4월 15일 링컨은 총에 맞아 서거했다.
- 의외로 공화당 급진파 지도자 찰스 섬너와 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866년 9월 메리 토드 링컨이 링컨의 전기 작가 윌리엄 H. 헌든(William H. Herndon)과 인터뷰를 했는데 메리는 섬너와 링컨이 "서로 알게 된 이후 절친한 친구였다(great chums after they became acquainted)”고 말했으며, “(링컨이) 죽을 무렵에는 남자 아이들처럼 가까이 지냈다(like boys during his last days)”고 말했다. 그리고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이 끝나서 같이 기뻐했다(were so glad the war was over)"라고 말했다. #
- 스페인 내전 당시, 미국에서는 링컨의 이름을 딴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이 형성되어, 공화파 진영을 도왔다. 규모는 대략 2,500명 정도로 유명한 소설가인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이쪽 소속으로 내전에 참전했다.
- 2008년에는 링컨의 16대손이라고 자칭하는 당시 뉴저지 네츠 치어리더 보니 링컨의 얘기가 언론에 보도되어 잠깐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조상이 태어난 통나무집의 나뭇조각을 가보로 지녀왔다고 한다.
-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Lincoln and Liberty라는 선거송을 이용했다.
- 링컨이 기독교도였나 아니었나 하는 것은 링컨이 적극적으로 기독교적 모습을 보였느냐 아니었느냐란 의미다. 당대 미국 사회의 사람이었다면 그 자신이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기독교적 가치관과 완전히 상반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기 때문이다.[78] 그런 정도의 언행이라면 진작에 링컨은 반기독교적이었다는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공식석상에서의 링컨의 언행을 보면 기독교인이라 봐도 괜찮은 수준으로 보이긴 한다. 실제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면서 링컨은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하나님은 미국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시리라 믿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링컨은 연방 수도를 워싱턴 D.C.로 옮긴 뒤 항상 백악관에서 인접한 라파예트 광장의 세인트 존 교회에서 대통령 취임식 예배를 하고 성경에 선서하는 의식을 최초로 거부하고 자신이 다니던 일리노이주의 First Presbyterian church의 예배에 참여했지만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세인트 존 교회에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저녁 예배에 참여하는 등 인생 후반기로 갈수록 점점 기독교 신앙이 점점 강해졌다는 것이다.[79] 남북전쟁 중에는 어느 기도집회에서 신도들이 "우리 북군의 편이 되셔서 우리가 이기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듣고는 "하나님이 북군 편에 서실 것이 아니라 북군이 하나님 편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기독교에 대한 링컨의 시니컬적인 면모라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애초에 성경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에 기도 한 것이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신의 의지를 인간의 의지보다 우선시한다.[80] 링컨이 성경과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링컨은 신이 인류를 향해 가진 계획이 있다고 믿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신론적 생각은 있었지만 성경과 기존 신학을 배제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링컨과 개인신앙(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링컨은 기독교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링컨과 교회의 기존 교리로 봤을 때 링컨은 이신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말년에는 특히 가장 사랑하던 아들 윌리가 장티푸스에 걸리자 아들의 침대 옆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곤 했고 윌리를 잃은 후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며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한 적도 있다. 아내인 메리는 링컨은 전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종교적인 인물이었다고 표현하였으나 아들 윌리가 죽은 이후부터는 그가 기독교적 믿음에 의지하여 신에게 자기자신을 모두 바쳤다고 했다고 한다. 즉 아들의 죽음 이후 신에 귀의했다고 할 수 있다.
- 역사가 알렌 C. 구엘조는 링컨의 신앙을 ' 칼뱅화된 이신론'이라고 불렀다. 그 1999년 저술하고 출판한 <링컨:구원자 대통령> (Lincoln: Redeemer President)에서는 그의 유소년기에 접했던 칼빈주의 사상과 뿌리가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이 구엘조의 칼뱅화된 이신론(Calvinized Deism)이란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신의 창조 후 인간역사에 무개입하는 그 이신론을 뜻한 것이 아니다. 칼뱅의 대표적 신학사상인 그리스도의 구원론과 예정론은 창조 후 신의 무개입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인데 이러한 모순적인 뜻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구엘조의 칼빈주의적 이신론이란 건강한 정교분리를 갈망하고 당시 혼란스런 종교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링컨의 내면을 대변하고자 사용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링컨의 신앙관에 관해 언급하는 저명한 연구서적으로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미국사 교수인 리처드 커워딘(Richard Cawardine)이 집필한 <링컨: 목적과 권력의 삶>(Lincoln: Life of Purpose and Power)인데 이곳에서 커워딘은 링컨의 북부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을 그들이 신의 택함 받은 사람들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조성하고 키워 미합중국의 깃발 아래 결집시킨 그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2006년 2월 19일자 뉴욕타임즈의 커워딘 교수의 책에 대한 기사에서는 이에 대해 "이러한 특출난 재능이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로 의심되었던 사람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종교적 회의론자인 동시에 연방의 유지와 노예해방을 어떠한 높고 신비한 목적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링컨의 내면을 묘사했다. 중립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는 어느 특정 교단의 멤버가 아니었으며,[81] 만인평등 정신에 위배되는 노예제도에 찬성하거나 침묵했던 당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자였지만 어릴 적부터 칼빈주의적 사상에 깊게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개신교인'이라는 것이 다수 현대 역사가들의 결론이다.[82] 하지만 그것은 곧 역대 대통령들의 기독교 종파 주류이자 미국 주류 계층의 종파인 미국장로교, 연합감리교, 성공회가 아니었고 신앙관도 미국의 전형적인 복음주의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기준으로 신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이 맞는가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는 것.
- 미국 역사 최고의 대통령 중 1명으로 꼽히지만 사적으로 링컨은 호감형 인물은 아니었다. 외모에서부터 당대 미남상과는 거리가 먼 비쩍 마르고 투박한 이미지로 굉장히 매력없다는 평을 받았다. 게다가 도회지가 아닌 시골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지라 말투조차 미국 남부 특유의 사투리가 약간 섞인 억양인데다 목소리도 가늘었으며, 변호사임에도 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편도 아니었다고.[83] 심지어 그의 얼굴은 인신공격을 퍼붓는 일부 정적들에겐 고릴라라고 까이는 소재로 이용되기도 했다. 참고로 그 중에는 연방군 사령관이자 그의 재선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된 매클레런도 있었다.[84] 링컨 본인도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 있었는지, 링컨 - 더글러스 논쟁 중에 더글러스가 링컨에게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비난하자 "저한테 얼굴이 하나 더 있다면 잘생긴 얼굴로 하고 나왔지 이 얼굴을 하고 다니겠습니까!"라고 받아치기도 했을 정도다. 으레 평소에 숫기 없는 사람이 가끔씩 이렇게 터지는 발언을 하면 큰 호응을 받는 것처럼 청중들도 링컨의 발언에 빵터져서 더글러스의 인신공격은 실패로 끝났다고. 저 발언을 한 더글러스조차 본래 링컨을 망신주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와서 시동을 걸기 위해 두 얼굴 이야기를 했다가 링컨의 위와 같은 재치있는 반격에 도리어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여러분, 우리는
고릴라를 보려고 구태여
아프리카에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가면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에드윈 M. 스탠턴(1814 ~ 1869)
에드윈 M. 스탠턴(1814 ~ 1869)
- 그의 정적 에드윈 스탠턴은 더글러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링컨의 숙적으로 선거기간 내내 연설할 때마다 링컨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를 공개적으로 적대시했다고 한다. 둘은 노예제에 대한 입장이 같아서 함께 더글러스를 상대해야 한 것을 계기로 처음 만남을 가졌는데 불같은 성격의 스탠턴이 그 당시 촌뜨기 신출내기 변호사이던 링컨을 자기와 함께 묶었다는 것에 노발대발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을 알아본 링컨은 참모진들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했음에도 그를 남북전쟁 중 전쟁부 장관에 임명했다. 링컨과는 대통령 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이가 매우 나빴던 스탠턴은 링컨이 자신을 전쟁부 장관에 세우자 그가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그 자리에 올렸다고 여겼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링컨은 그가 업무에 대한 의무감이 투철하다는 것을 과거 그가 변론을 하던 것을 보면서 알았던 탓에 그를 신뢰하여 그 자리를 맡겼던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후, 감격한 스탠턴은 링컨과 그의 정부에 충성심을 보이며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링컨의 강력한 지지자로 남았다. 링컨은 "그는 부서지지 않는 바위 같이 날 지탱한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부서졌을지도 모른다"라고 할 정도로 스탠턴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 대통령 취임 후, 정적이었던 에드윈 스탠턴을 국방부장관에 발탁시킨 일로 그와 관계가 호전되었을 때, 스탠턴이 평소 사이가 안 좋던 번 사이드 육군장관과 사람들 앞에서 대판 싸우고 나서 링컨에게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스탠턴이 '사이드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며 씩씩거리고 있어 링컨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더니 그는 '편지를 보내 뜨거운 맛을 보여줄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링컨은 '조금 전에 나한테 털어놓았던 것까지 다 포함해서 지금 당장 편지를 쓰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스탠턴은 그 자리에서 엄청난 장문의 편지를 휘갈겼는데, 편지를 읽어본 링컨이 '이제 부치기만 하면 됩니까?'라고 묻고, 스탠턴이 그렇다고 하자 링컨은 "그렇다면 저 벽난로 속으로 부치십시오. 분노로 쓰는 편지는 칼이 되어 상대를 찌르게 됩니다."라고 스탠턴을 설득했고, 스탠턴도 마지못해 편지를 벽난로 속에 던졌다고 한다. 훗날 스탠턴은 링컨이 피격당해 후송되자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고 그가 사망하자 "이곳에 가장 완벽한 통치자가 누워 있습니다. 그는 이제 역사로 남으려 합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이후 스탠턴은 정력적으로 암살범과 그 동료들을 물색하여 체포하고 재판에 넘기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스탠턴은 링컨의 후임자인 존슨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 파면되었고, 이것은 미국 최초의 탄핵이 발생하는 계기가 된다. 다만 워낙 링컨과 스탠턴 간의 사이가 나빴던 걸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던 탓인지 링컨 암살 사건 때 그가 배후에 있었을 것이라는 음모론이 돌았기도 했다. 실제로 존 제이크의 소설, 클라이브 커슬러의 모험 소설에서는 이 시각을 전제로 삼았던 적도 있었을 정도.
외국 귀빈들에게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고 소개될 저 인물의 멍청하고 시시껄렁하고 쓰레기와 같은 연설을 듣는다면 모든 미국인들은 부끄러움으로 뺨에 경련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시카고 타임즈[85]
- 시카고 타임즈[85]
- 1863년 링컨의 한 연설에 대한 신문 사설의 평가인데 저 연설이 바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이다. 현대 기준에서 이런 평을 받는게 의아하겠지만 게티즈버그 연설은 그 당시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겨졌던 연설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시 연설문은 대체로 말을 늘리고 수식어구를 잔뜩 붙이는 만연체가 유행했는데 게티즈버그 연설은 짧고 간결하면서도 핵심 주제가 확실하게 드러난 연설이었던 것. 즉, 링컨은 담고 싶은 내용은 훌륭했지만 당대 보편적인 연설 형식에 맞춰서 문구를 세세하게 준비하지 못했다. 그래서 게티즈버그 연설은 매우 짧게 끝나 대통령의 연설을 기대했던 청중들은 실망했으며, 언론에서도 정말 쓰레기같은 연설이라고 혹평을 받고 말았다. 사실 게티즈버그 연설은 짧아도 너무 짧았는데, 평균 2시간은 기본으로 깔고 가던 시대에 고작 2분 동안 말하고 끝냈다. 링컨 자신도 연설 후에 내가 했지만 이건 실패한 연설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하튼 준비를 못했으면 즉흥적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링컨은 그 정도로 달변가는 아니었단 소리. 이렇듯 임기 내내 당시 미국 엘리트의 조롱과 멸시를 한몸에 받는 인물이었으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정치력을 발휘해서 미국을 구해냈다는 게 정말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 그를 눈여겨 본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소녀가 편지로 그에게 턱수염을 길렀으면 하고 조언한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에 보존되어 있는 링컨이 살았던 집에 가보면 실제로 이 편지가 그의 집무실 벽에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 링컨은 그 후로 기르기 시작한 턱수염 덕분에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고, 인자하고 따뜻한 인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후 베델을 만나게 된 링컨은 "덕분에 내가 대통령이 되었다"며 감사인사와 함께 뺨에 입을 맞추었다고 한다.
- 평소 위트가 넘쳐났다. 가끔은 넘치다 못해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활력으로까지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툭하면 찾아오는 공직희망자들이나 의회와의 관계를 유지할 때 그 힘이 발휘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장관 1명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그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공직희망자 중 1명에게 "장의사가 동의하면 관 속에 들어가도 좋습니다"라고도 했었고 매일같이 공직희망자에 시달리다 전염력이 강한 병에 걸렸을 때에는 주치의를 보며 "드디어 제가 뭘 좀 나눠줄만한 게 생겼네요."하고 빙그레 웃기도 했다. 이는 다른 고루한 상류층 자제들과 달리 어린 시절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그는 계모와 농담 따먹기를 자주 했다고 하는데 그 영향이 있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출신 성분 탓에 행동에도 그다지 기품이 없고, 업무 중에도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책을 읽는 등 거리낌없이 행동했다. 즉 성격은 쾌활했지만 분위기를 못 읽는 사람이었다. 위트 실력도 실제로는 다른 의미로 좀 떨어져서, 그의 측근들은 링컨이 시도때도 없이 썰렁한 농담을 해대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아무리 농담을 잘 해도 분위기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안하느니만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링컨이 딱 이런 모습이었다.
- 성격이 제법 소심했는지 대놓고 남 앞에서는 욕이나 비난을 못하고 뒷담화를 하거나 노트에 일일이 그 사람을 욕하는 글을 잔뜩 써 놓았다고 한다. 이게 나중에 가서는 재치가 넘치는 위트로 발전한다. 게티즈버그의 연방군 사령관 '조지 미드'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미드의 경우는 게티즈버그 전투 승리 이후에 후퇴하는 남부연합군을 쫓지 않아서 사실상 전쟁의 종결을 방치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점도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뒤늦게 추격했을 때조차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그 며칠 사이에 충분한 기회가 있음에도 놓쳤다는 게 아쉽다. 사실 어찌 보면 그 정도의 실책을 거두고도 즉각 해임이나 공개적인 비난을 하지 않은 링컨이 오히려 대인배일지도 모른다.[88]
-
젊었을 적에는 평소에 영 맘에 안 든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놀리는 말을 작은 쪽지에 써서 길가에 슬쩍 떨어뜨리고는 누군가 그걸 주워 읽고 재미있어 하는 걸 몰래 지켜보면서 즐거워 했다고 한다. 어느날 쉴즈라는 사람의 나쁜 점을 지적하는 글을 익명으로 신문사에 올렸는데 해학적으로 쓴 글에 구독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쉴즈가 게시자가 링컨이라는 걸 알아내고서는 다짜고짜 찾아와
결투[89] 신청까지 하고 말았다.[90] 링컨은 결투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지간히 화난 쉴즈가 계속 밀어붙였기에 어쩔 수 없이 약속 장소까지 갔으며 결투 직전에 칼을 들긴 했지만 싸울 의향이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링컨의 친구 1명이 적극 중재를 해준 덕에 결투 당일 결투가 취소되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경험이 퍽 인상적이었는지 링컨은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타인을 조롱하는 짓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고 한다.[91] 이후 결투 상대였던 쉴즈와는 화해를 넘어서 아예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92] 하지만 그 후로도 비방문을 안 쓴 것은 아닌데 결투 사건 이후로는 그냥 혼자만 읽고 즐기다 없애버렸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링컨은 자수성가한 변호사답게 거리낌없이 남을 모욕하거나 자기 도취적인 발언을 일삼았는데[93] 이 시점부터 변화하기 시작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시점에서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소심한 링컨의 인격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 링컨 프로젝트라는 미국의 정치단체가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으로부터 이름을 가져온 단체로 반트럼프 성향이다.
8. 대중매체에서
- 박물관이 살아있다 2에서 링컨 기념관에 있는 링컨 대리석상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물체들이 다 그렇듯 아크멘라의 석판의 힘으로 생명을 얻었다. 석상이라서 그런지 비둘기를 무척 싫어하며, 파라오 카문라가 소환한 라의 병사(새머리를 했다)들을 겁먹게 만들고, 비둘기를 싫어하는 마음으로 이들을 해치운다.[94]
-
미국의 국민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도 가끔 출연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편.
의외로 심슨 가문과 놀라운 인연을 가지고 있는데, 노예제가 성행하던 시절 심슨 가문의 딸인 일라이자 심슨이 자신의 집에 숨겨주던 노예 버질을 일라이자의 어머니 메이블 심슨이 대신 데리고 도망치던중 버질과 메이블이 수배를 당하게 되고 난관에 봉착한다. 이때 이들을 지켜보던 링컨이 그들을 돕는다. 트레이드 마크인 모자를 빌려주며 메이블의 마지 심슨 스타일의 눈에 띄는 머리를 감추라고 제안한 것. 이때 메이블이 어떠냐고 물으니까 아래가 불룩한 난로같다고 대답하곤 메이블이 못마땅해하자 "솔직한 에이브(Honest Abe)잖아요"라며 껄껄 웃고 변명한 뒤 난 너무 재밌는거 같다며 스스로는 만족한다. 이후 메이블과 버질은 도망쳐서 새 가정을 이루고 그들 사이에서 아이도 태어나는데 이 아들이 현재 호머 심슨의 고조부인 에이브러햄 심슨 1세다. 링컨이 버질과 메이블을 탈출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었으니 링컨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듯. 할로윈 특집 에피소드로 유명인사들에게 광고비를 지불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광고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인사를 호머 심슨이 돈을 받고 죽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광고에 조지 워싱턴과 링컨이 격렬히 키스를 하는 광고가 천국에 방영된다. 워싱턴은 분노하는데 비해 링컨은 불편해하는 척 하면서 웃고 있다. 나중엔 천국에 간 호머 심슨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엔딩. 링컨의 아내도 자신의 그런 지향을 이해했다고...[95]
- 폴아웃3엔 링컨의 유품이란 아이템이 다수 등장하고, 이에 관련된 퀘스트와 언급이 다중으로 등장하는데, 이 중 링컨의 리피터는 이 게임 후로게이(?) 아이템 중 하나다. 충격적이게도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링컨 기념관은 추노꾼들이 점령하고 있다. 반면 탈출한 노예들에게 링컨은 '위대한 해방자' 로 추앙받으며, 부서진 링컨 석상의 머리부분도 이들이 가지고 있다.
-
팀 포트리스 2에선 1850년대 블루팀의 첫번째
파이로는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고 한다.
팀 포트리스 2의 게임모드중 아레나 모드가 제일 좋다고 연설한바가 있으며 세익스페라클레스[96]라는 작가 겸 발명가가 로켓 발사기랑 2층집은 발명했는데 계단은 발명하지 못해 사람들이 집의 2층에 로켓점프[97]로 올라가고 있던 정신나간 상황에서 1857년에 운좋게 계단을 발명하였고 암살당하지는 않았으나, 계단의 사용법을 완벽히 익히지 못해 포드 극장의 연구소에 있는 계단에서 로켓 점프를 하다가 사망하였다. 그 이후 로켓 점프 실수로 다리를 잃은 루즈벨트가 링컨의 낡은 노트를 통해 계단을 개량함으로서 더 이상 인류는 로켓 점프로 2층에 올라갈 필요가 없어졌다.
-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남북전쟁(분리전쟁) 패배로 인해 하야하고 북부에서도 이뭐병 취급을 받는 운동가로[98] 처음 나온다. 이후 1884년의 2차 멕시코 전쟁 때 남부연합에 포로로 잡힌다거나 하는 모험 뒤에 사회주의에 감동하여 카를 마르크스를 잇는 사회주의 이론가로 활약하여 북부에 사회당 결성의 아버지가 된다.[99]
- Ugly Americans에선 좀비가 되었으며, 그 세계의 현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트웨인과 존 윌크스 부스가 2차 암살을 계획하나...
- 2010년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음모자(The Conspirator)는 링컨 암살을 다루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링컨은 작중 초반에 죽고 링컨 암살자들 가운데서도 메리 서럿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 잭 런던의 소설 강철군화의 인용문에 따르면 링컨은 그가 죽기 직전 "이 나라는 통합되었지만 이제는 정치의 나라가 아니라 트러스트(=재벌)의 나라가 된다."라는 투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 미국의 향방을 가르는 것은 노예제도가 아닌 빈부격차긴 하다.
- 키아누 리브스 코미디 배우 시절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쳐에도 나온다. 이 영화는 타임머신을 타고 잔 다르크,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칭기스 칸, 빌리 더 키드, 프로이트 같은 역사적 위인을 현대로 데리고 오면서 벌어지는 코미디영화인데 링컨은 그나마 덜 망가진다. 미국 백화점 여기저길 둘러보는데 흑인들도 많이 오고가는 걸 보고, 놀라워하고 백화점 안에서 연설하다가 사람들이 미친 놈보듯이 하지만 일부는 그래도 연기 잘하네? 라는 투로 손뼉까지 쳐준다. 그리고 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간다. 전자 키보드 연주에 매달리는 베토벤이나 백화점 안에서 사람들을 흥미롭게 보고 정신 분석학을 이야기하는 프로이트와 더불어 그나마 잘 나온 셈. 칭기스 칸은 가장 망가지고...나폴레옹도 망가지고 잔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가 된다든지 캐붕된 다른 위인들에 견주면 확실히 나은 편이었다. 연설에 뛰어난 정치인인데다 근대 미국인인 만큼 등장 위인들 중에 의사소통이 잘된다는 점 때문에[100] 빌과 테드의 구술시험 마지막에 학생들을 상대로 대표로 마지막 인사를 멋들어지게 했다.
- 스티븐 스필버그가 2005년 출판된 링컨 전기의 판권을 사들여 영화 '링컨'을 만들었다. 2012년 12월 16일(미국)에 개봉. 링컨 역을 맡은 배우는 대니얼 데이루이스이다. 작중에서 링컨과의 싱크로는 100%를 넘어서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영화 상에 딱히 액션이나 볼거리는 없는 잔잔한 드라마를 가진 영화로, 극적인 재미는 없어도 진지한 주제의식과 함께 배우들의 연기력과 영상미가 돋보인다. 영화 해설은 이 글에 나온다. 데이루이스는 이 영화로 201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흥행도 대박이라서 제작비 6500만 달러로 저렴하게 만들어 북미에서 1억 8220만 7973달러를 벌어들였다. 뉴욕 타임스에서도 이례적으로 다수의 영화평이 나오는 등 미국에서는 대중적 흥행과 더불어 지식인들의 격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북미를 제외한 세계 흥행수익은 9300만 달러로 역시 미국인들 역사적 이야기라서 다른 나라에선 그다지 흥미로운 구석이 없는 듯 싶다. 3월에 한국에서도 개봉했으나 전국 10만 관객을 겨우 넘기면서 막을 내려 개봉한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 영화 엑스맨 2에서 백악관의 큐레이터가 링컨의 초상화 앞에서 그가 취임식에서 16대 대통령으로써 첫번째로 한 말을 관광객들에게 소개한다. "우리는 적이 아닌 친구입니다. 우리는 절대 적이 돼서는 안됩니다. 열기에 긴장했을 수 있지만, 우리의 유대감을 깰 수 없습니다.[101]" 이어 큐레이터는 이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라고 하며 영화의 오프닝이 시작된다.
- 2012년 6월에 팀 버튼이 제작한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가 개봉했다. 동명소설이 원작. 링컨이 뱀파이어 헌터로서 대통령이 된 것도 사실 뱀파이어들로부터 미국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것. 소싯적 벌목공으로 잘 다루던 도끼로 뱀파이어들을 때려잡고 다닌다. 당연히 미국에서도 컬트 영화 취급이다.
- 소설 해저 2만리와 이를 오마주한 애니메이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는 이 대통령의 이름을 딴 미합중국 해군 소속 순양함 USS 에이브러햄 링컨 함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 초반부에 미지의 바다 괴물의 공격을 받고 선체가 파손, 혼란의 와중에 주인공들이 물에 빠진 줄도 모르고 퇴각해 버린다. 이 이름은 현재 실존하는 미 해군의 니미츠급 항공모함 한 척에 붙어 있으며, 함번은 CVN-72이다.
- 문명 시리즈에서는 조지 워싱턴에 밀려 출연하지 못한 문명 5를 제외한 전 작품에 나왔다. 문명 4 비욘드 더 소드의 오프닝에서는 남북전쟁 후 남군의 조인서를 주머니 속에 넣고 간지나는 연설을 하는 모습이 그대로 링컨 기념관에 있는 자신의 석상과 오버랩되는 명연출을 보여준다. 두 번째 확장팩인 비욘드 더 소드에서 미국의 지도자로 추가되기 때문인데[102], 링컨 자체의 특성은 나쁘지 않으나 미국 문명 자체가 문명 6 이전까지 그닥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암울한 신세는 면하기 어렵다. 문명 6에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밀려 초기에는 등장하지 못했으나, DLC 리더 패스에 미국 문명 추가 지도자로 등장한다.
- 세계정복 ~모략의 즈베즈다~의 히로인 호시미야 케이트의 말에 따르면 링컨에게는 총탄에 약했다는 결점이 있었다고 한다.
- 음악 ' Gay bar'뮤비에서는 링컨이 연상되는 인물이 게이로 나온다.
- 스타 트렉 온라인에서 등장하는데, 본인은 아니고 엑스칼비안이 변신한 것이다. 10주년 에피소드인 '도덕성의 척도'에서 엑스칼비안인 야넥의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는 '시련'을 도와준다. 그런데 도중에 시련의 요소들이 장소를 이탈해 야넥을 공격하자 도끼를 들고 적을 썰고다니는 위엄을 보여준다. 여담으로 이 도끼는 '도덕성의 척도 2부'가 끝난 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
- 2차대전에서 추축이 승리한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대체역사게임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전면 핵전쟁으로 지구의 모든 국가가 멸망하는 So Long 엔딩이 나온다. 핵전쟁 이후 새로 생기는 문명에서도 링컨을 기억하며 링컨 기념관에서 그를 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란 끝에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으며 심지어 기념관에 새겨진 링컨의 이름조차 지워져 이름은 알지 못하며 그의 업적에 대해서도 마틴 루터 1세 왕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을 사슬에서 해방시키고 탐욕스러운 로마인을 교회에서 퇴출시켰으며 정당한 통치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고 서술된다.
-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과 동맹국이 승리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미국이 2차 내전이 날때 생디칼리즘을 주장하는 IWW는 마르크스, 엥겔스 사진을 걸어놓고 그옆에 링컨의 초상화[103]를 그려놓는다. 링컨의 사회주의 성향과, 노예해방 때문인지 작중에서는 공산주의, 생디칼리즘의 시초로 여겨지는듯.
- 몰리 맥기와 유령의 1기 5화 1부 "Not So Honest Abe"에 유령으로 등장한다. 사후세계에서 유령 캐릭터인 스크래치가 VIP 전용 클럽인 "오만방자 클럽(Haughty Haunts Club)"의 손님으로 마주한다.
9. 관련 어록
하나님이 백인에게 자유를 주셨듯 오늘은 흑인에게도 자유를 주셨으니 오늘 모든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령 선포와 함께 노예들에게
-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령 선포와 함께 노예들에게
나는 책의 내용을 두 감각으로 파악한다. 책을 큰 소리로 읽으면, 보는 동시에 듣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기억은 잘 할 수 있다.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유지될 수 없다.
(스스로) 분열된 집안은 유지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시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있느냐는 것일세.
- 남북전쟁 종결 후 자신의 비서가 "신께서 우리 편에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을 때 한 대답
- 남북전쟁 종결 후 자신의 비서가 "신께서 우리 편에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을 때 한 대답
세상에 천한 사람이 있을 뿐이지, 천한 직업은 없다네.
- 백악관에서 직접 구두를 닦는데 비서가 천한 일이라며 말릴 때
- 백악관에서 직접 구두를 닦는데 비서가 천한 일이라며 말릴 때
Home Sweet Home
즐거운 나의 집
즐거운 나의 집
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
이 또한, 지나가리.
Whichever way the war ends, I have the impression that I shall not last long after the war...
어떤 식으로 전쟁이 끝나든지, 전쟁 뒤에 나는 얼마 못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104]
어떤 식으로 전쟁이 끝나든지, 전쟁 뒤에 나는 얼마 못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104]
You can fool all the people some of the time, and some of the people all the time, but you cannot fool all the people all the time.
모든 사람들을 잠깐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또 일부의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들을 잠깐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또 일부의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The ballot is stronger than the bullet.
표는 총알보다 강하다.[105]
표는 총알보다 강하다.[105]
I am a slow walker but I never walk back.
나는 천천히 걷는 사람이지만 결코 뒷걸음치지는 않는다.
나는 천천히 걷는 사람이지만 결코 뒷걸음치지는 않는다.
Those who deny freedom to others, deserve it not for themselves
남을 위한 자유를 부인하는 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자유도 누릴 자격이 없다.
남을 위한 자유를 부인하는 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자유도 누릴 자격이 없다.
10.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1834 - 1854 | 정계 입문 | |
|
1854 - 1864 | 분당 |
1864 - 1865 | 합당[106] |
11.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 당선 여부 | 비고 |
1832 | 미국 일리노이주 주 하원 의원 선거 | 상거먼 카운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 낙선 (8위) | |
1834 | 미국 일리노이주 주 하원 의원 선거 | 스프링필드 | - | 당선 (2위) | 초선 | |
1836 | 미국 일리노이주 주 하원 의원 선거 | - | 당선 (1위) | 재선 | ||
1838 | 미국 일리노이주 주 하원 의원 선거 | - | 당선 (1위) | 3선 | ||
1840 | 미국 일리노이주 주 하원 의원 선거 | - | 당선 (5위) | 4선 | ||
184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일리노이 7구 | 6,340 (55.53%) | 당선 (1위) | 초선 | |
1855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일리노이 |
|
15 (15.46%) | 낙선 (3위) | [A] |
185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46 (46.00%) | 낙선 (2위) | [A] | ||
1860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1,865,908 (39.80%, 180명) | 당선 (1위) | 초선 | |
1864 | 미국 대통령 선거 | 2,218,388 (55.03%, 212명) | 당선 (1위) | 재선[109] |
주 하원의원 선거와 1번의 연방 하원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대통령 선거 전의 주요한 선거는 모조리 졌다. 참고로, 미 연방상원 선거가 직선제가 된 것은 수정헌법 제17조가 비준된 1913년부터이며, 링컨 당대에는 주 의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였다.
12.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81018><tablebgcolor=#e81018> |
에이브러햄 링컨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81018> 선거 |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어록 | 게티즈버그 연설 | ||
사건사고 | 남북 전쟁 ·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 | ||
평가 | 평가 | ||
기타 | 링컨 기념관 · 링컨(영화) ·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 폐지주의 | }}}}}}}}} |
1934년 이전 미국 자유주의 관련 문서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주요 이념 | 고전적 자유주의 · 급진주의 | |
연관 이념 | 1934년 이전 | 공화주의 · 대중주의 · 민주주의 · 사회자유주의 · 세속주의 · 이신주의 · 진보주의 · 자유민주주의 · 자유방임주의 · 자코뱅주의 · 잭슨 민주주의 · 제퍼슨 민주주의 · 폐지주의 · 평등주의 · 초월주의 | |
1934년 이후 | 자유지상주의 · 재정보수주의 · 진보주의 · 현대자유주의 | ||
연관 개념 | 건국의 아버지들 · 개인주의 · 도금 시대· 미국 혁명 · 반연방주의(( 주의 권리) · 법 앞의 평등 · 서프러제트 · 자결권 · 자연권 · 자유국제주의 · 자유민주주의 · 자코뱅주의 · 작은 정부 · 지방자치 · 진보 시대 · 종교의 자유 · 친프랑스 · 표현의 자유 | ||
정당, 계파 | 국민민주당 · 공화당*( 급진파) · 공화파** · 민주공화당 · 민주당*( 잭슨 민주주의) · 반행정당 · 버번 민주당 · 자유공화당 · 진보당( 1912년 · 1924년) | ||
인물 | W. E. B. 듀보이스 · 랠프 월도 에머슨 · 로버트 M. 라폴레트 · 벤저민 프랭클린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앤드루 잭슨 · 우드로 윌슨 · 윌리엄 J. 브라이언 · 윌리엄 보라 · 찰스 섬너 · 토머스 제퍼슨 · 프레드릭 더글러스 · 하이럼 존슨 · 해리엇 터브먼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
▼ 현대 미국의 자유주의 | |||
미국 정치 관련 문서 (
사회주의 ·
현대자유주의(
←1934년 이전) ·
자유지상주의 ·
보수주의(
대안 우파)) * 진보 시대에는 주류, 그 외 시대에는 당 내 계파 자유주의/분파 |
}}}}}}}}} |
[1]
찰스 다윈과 생년월일이 똑같다. 또 두 사람은 생년월일 말고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링컨(193cm)/ 다윈(183cm)로 장신이었단 점,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점, 셰익스피어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취미, 자식을 일찍 잃은 비극, 노예제 폐지를 지지한 것 등등이다.
[2]
1865년 4월 14일 밤 포드 극장에서
저격당해 다음 날 오전 7시 22분에 사망했다.
[3]
결혼전 이름은 낸시 행크스. 유명 배우
톰 행크스는 낸시 링컨의 6촌 형제의 후손, 즉 링컨의 외증조부의 후손이다.
조지 클루니 역시 링컨의 친척인데, 이쪽은 낸시 링컨의 이복 여동생의 후손, 즉 링컨의 외조부의 후손이다. 두 배우 모두 민주당 지지자라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링컨 시절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성향이 현재는 반대로 바뀐 상황이기 때문에, 오히려 적절하다고도 할 수 있다.
[4]
링컨의 네 아들 중 유일하게 80세를 넘겼다. 나머지는 모두 20세도 맞이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5]
과거에는 어렸을 때 가족을 따라 다녔던 침례회 신자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에는 여러 문헌들을 검토한 결과 링컨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는 하나 특정 교파나 교단에 소속되지는 않았다는 시각이 주류이다.
자료 1
자료 2 젊은 시절에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등 기독교 신앙이 약해진 바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나이가 든 뒤에도 특정 교단에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가족과 함께 해당 교회의 소속 교단을 가리지 않고 거주지 근처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대통령 취임 선서 당시 링컨이 9살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품인 성경책에 손을 얹고 선서하였으며 이때 "저는 성경 말씀대로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을 약속합니다" 라고 하였으며,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병사의 앞에서 성경책을 펴고 여호수아 1장 9절을 읽어준 것, 죽기 얼마 전 아내에게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 그리고 가족/지인/지역 인사 등 여러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신앙을 고백한 부분 등을 종합해 말년의 링컨이 비교적 깊은 신앙을 지녔지만 특정 교단에는 속하지 않은 개신교인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상세한 내용은 하단의 링컨과 기독교를 참조.
[6]
역대 미국 대통령 내 최장신.
[7]
#출처 1,
#출처 2
[원문]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9]
the people이 인민으로 번역된 이유에 대해서는
게티즈버그 연설 문서의 4.1 문단 참조.
[10]
가장 단신인 대통령은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으로, 키가 163cm였다. 딱 30cm 차이다.
[11]
당시에는 전미, 혹은 세계 챔피언은 물론이고 아예 미국 전체를 아우르는 프로레슬링 단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주마다 단체가 있거나 서커스단같은 곳에서 권투 및 레슬링을 함께 흥행하는 식으로 운영했다. 링컨 역시 일리노이 주에서 친구들과 함께 일꾼을 하면서 나무 기둥과 로프를 설치해 지역 단체를 운영한 것이다. 참고로 미국 전체를 아우르는 단체는 1948년 NWA(National Wrestling Alliance)이 등장하고부터다.
[12]
1865년 재선 성공
[13]
하지만
위키백과와
네이버 캐스트에서는 원만한 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14]
미국 등 북아메리카 지역이 산지로,
대한민국에서는 1978년에 최초 발견되어 이와 같이 명명되었다.
[15]
서양등골나물은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동부 해안에서는 없고, 중서부 지방에 자생하는 식물로, 소나 양 같은 가축은 목초지가 드물어지는 가뭄같은 상황이 아니면 평상시에는 이 풀을 안 먹지만 먹을 게 없으면 결국 뜯어먹게 된다. 그러면 이 식물의 독성성분이 트레메톨(tremetol)이 그 가축의 고기나 젖에 섞여나와 그걸 먹은 사람에게 복통, 구토 등의 증세를 일으키고 2일 ~ 10일 사이에 사망하게 된다. 이 식물이 원인이라는 건 원주민 쇼니 부족 여인의 도움을 받은 안나 피어스 홉스 박사가 1830년대에 들어서야 파악했고, 정확한 독성 성분을 분리한 건 1928년이다. 당시는 소가 먹은 것이 대부분 그 소젖에도 반영된다는 것이 아직 밝혀지기 전이었다.
[16]
이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 링컨은 그 이후로는 우유를 아예 입도 안 대게 되었고, 또한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보좌관들한테 본인의 식단에는 우유 같은 유제품들은 절대 올리지 마라고 명했다.
[17]
이후 비슷한 사례를 가진 미국 대통령은
제럴드 포드(본명은 레슬리 린치 킹 Jr.). 차이점은 새어머니가 아닌 새아버지가 대상.
[18]
이 독서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평소 독서를 좋아하는 링컨이 어느 일하던 집(판본에 따라 학교 담임선생님의 집)에서
조지 워싱턴의
위인전을 빌려온 후 밤늦도록 읽다가 너무 졸려서 뒷부분은 다음날 마저 다 읽기로 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만 비가 와서 머리맡에 둔 책이 다 젖어버린 것이었다. 링컨은 용서를 빌려고 그 집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용서를 받는 대신 며칠 간 그 집에서 일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였다. 집주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링컨은 그 집에서 며칠간 일을 하였고, 집주인은 링컨이
책벌레라는 것을 알고 보답으로 그 워싱턴 위인전은 물론 다른 책들도 몇권 더
선물로 줬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시골에서
책은 귀한 사치품으로, 150년 뒤인
뉴딜 정책 시기에 켄터키 주의 문해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짐말에 책을 싣고 켄터키의 농장을 돌아다니며 책을 빌려주는 짐말 도서관 프로젝트(
Pack Horse Library Project)가 처음으로 시행될 정도였다.
[19]
계모의 이미지가 부정적인 옛날 이야기들을 보면 대체로 주인공 집안이 부자이거나(
신데렐라,
장화홍련전) 뭔가 이득을 노린 경우(
콩쥐팥쥐), 전 부인의 자식을 죽이려는 경우(
백설공주,
그리스 신화의 헬레와 프릭소스 이야기 등)가 대부분. 집안의 재산과 권력이 크면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남매&자매끼리도 개싸움을 벌이는 건 역사에서 흔히 일어났고, 지금도 재벌가들에서 흔히 벌어지는
왕자의 난 같은 것들만 봐도 잘 알 수가 있고, 비단 재벌가 뿐만 아니라 부잣집들은 이러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꼭 가난해도 사이가 나쁠 때는 나쁘고 부유해도 좋을 때는 좋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위의 경우를 봐도 계모 입장에서는 아들 링컨이 노동으로 돈을 벌어오는 쪽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20]
또 생몰년도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라 링컨은 의붓아들의 대통령 당선과
암살까지 보고도 4년을 더 살았을 정도로 장수했다.
[21]
의붓아들보다 오래 살아서, 비공식적인 호칭이지만 링컨 재임 내내 Mother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현직 미 대통령의 어머니)로 불렸다. 이 호칭은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아버지 부시의 영부인이자 아들 부시의 어머니
바버라 부시도 받은 적이 있다. 미국 대통령의 생존한 모친을 언급할 때 쓰는 표현이다.
[22]
말이 좋아 우체국장이지 사실상 집배원 일도 다 하고 작은 우체국 관리도 손수 하던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미국 집배원은 온갖 강도에게도 화물도 지키면서 하는 일이라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는데, 190이 넘는 상당히 큰 키에
멕시코와 벌인 국경 분쟁에도 참전하고 실전 경험도 갖추고
레슬링도 잘 할 정도로 생각보다 힘이 장사이던 링컨에겐 어렵지 않았기에 링컨 본인은 일은 마음에 들었으나, 돈은 박봉이라 측량 기사랑
투잡으로 일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23]
193cm의
거구였으며, 마른 체구로 보이나, 힘은 장사여서 일리노이 주 챔피언을 지내기도 했다. 인생이 험난했던 것과는 달리 프로레슬러로써의 경력은 매우 성공적이라서 12년간 단 한 번만 패배했다. 당시의 프로레슬링은 현재와는 달리 체육관의 링이 아닌 공터나 술집 앞 등의 맨바닥에서 구경꾼들이 선수들을 둥글게 둘러싼 상황에서 벌어졌다. 이때의 프로레슬링 활동으로 1992년 미국 레슬링 협회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었다.
관련 내용.
[24]
현재까지 확인 된 링컨의 사진 중 가장 최초로 찍힌 사진이다.
[25]
참고로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턱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공화당 대선 후보 시절
그레이스 베델(Grace Greenwood Bedell Billings)이란 어느 소녀가
수염을 기르면 보기 좋아 보일 거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라는데, 훗날 수염을 기르고 대통령 당선에 성공한 후 그 소녀가 링컨 본인을 찾아오고 자기소개를 하자 좀 나아졌냐면서 네 덕분에 대통령이 됐다고 흐뭇해했다는 일화도 있다.
[26]
두 사람이 과거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건 사실인데, 사실 링컨은 "베리&링컨"의 지분만 있을 뿐 실제 운영자는 아니었다. 당시 주세법은 술집으로 운영되지 않은 가게가 파는 건 되지만 가게에서 마시는 걸 금지 했는데, 이 가게는 술이 잘 팔려서 나중에 술집으로 등록한 케이스로, 링컨은 후일 지분을 정리했고 동업자 베리는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기록이 없어 더글러스가 실제 링컨의 충실한 고객(?)이었는 지 검증하긴 불가능에 가깝지만, 링컨은 술을 판 사람보다 마신 사람이 문제라는 논지에 더해 더글러스는 여전히 자신의 옛 주장(모호한 태도)에 메달리고 있다는 걸 은유한 역공을 펼친 것이다. 이 토론 자체가 후대로 갈 수록 윤문 된 것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27]
그렇긴 해도 남부 자체는 면화업 등의 이유 때문에 노예제가 활성화되었지만 미국 뿐 아니라 세계 전반적으로는 계몽주의와 산업혁명 등의 이유로 노예제가 사양화되고 있었다. 이미 유럽에서는 노예제가 사라졌고 공식적으로 서방권에서 노예제가 남아있던 국가는 미국 뿐이었다.
[28]
이처럼 링컨과 대립을 한 최대의 거물 정치인이었지만, 막상 훗날 남북전쟁이 터지자 연방주의자였던 더글러스는 링컨에게 협력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무려 2~30만의 의용군을 모으기도 했다. 이 사람도 뻘소리는 제법 했지만 보통은 아닌 셈.
[29]
아내 메리 토드는
은행가 출신의 부잣집 딸이었고, 또한 사실상
무학인 남편과 달리 고등교육을 받았다. 때문에 토드 집안 사람들은
흙수저 출신 남자인 링컨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지만, 링컨이 아니라 토드 본인이 어른들을 필사적으로 설득했다고 한다.
[30]
한편으로는 토드 본인이 '대통령이 될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 100% 더글러스와 결혼하겠네'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링컨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자 충격을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31]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토드를 악처라고
디스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링컨과 토드의 결혼 생활은 그럭저럭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32]
원래부터 청교도적 평등주의와 지성주의가 강해 교육 투자가 활발했던
뉴잉글랜드 등 북동부 지역은 의무 교육 이전부터 교육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었으나, 링컨이 일생 대부분을 보낸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 등의 내륙 지방 농촌은 당시로서는 신규 개척지에 가까워 교육 여건은 커녕 교육 받은 이의 수도 태부족이었다.
[33]
링컨 이전까지 15명의 대통령이 있었는데, 이 중에 독학 대통령은 무려 6명이었고, 심지어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학력도 지금의
초졸 정도의 수준이었다. 즉, 링컨의 전임 대통령들 중 절반 가까이가 독학한 대통령이었던 셈.
[34]
존 애덤스처럼 20대에 변호사가 되는 케이스도 흔했다.
[35]
애시당초 미국 건국 초기에는 독학 대통령이 많았는데, 이런 독학 대통령의 필수 코스(?)가 독학 - 변호사 - 대통령으로 어느 직업을 가지든 일단 독학한 이후 변호사가 되면 대통령 테크를 탔다는 거다. 참고로 현재까진 최후의 독학 대통령은 19세기 말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다.
[36]
물론 대부분의 독학 대통령들이 변호사 자격을 거친 것 역시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닌 것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법조인 출신 정치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법치국가에서 법조인(변호사)은 정치계에 진출하기 상당히 유리한 직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근대 미국 사회의 경우 (건국의 아버지들 가문을 비롯한 여러 명망 있는 가문들이 정치를 해먹었던 건국 초기를 제외하면) 근세 ~ 근대 유럽 사회에 비해 귀족이나 명문가 등이 차지하는 사회적 입지가 비교적 작았고 현대국가에 비교하면 전문적인
기술관료 집단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이었으니 자연히 공직자 중에서 법 전문자들이 차지하는 지분이 컸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정규교육을 안 받고도 지역의 유력자로 명망을 쌓아 정치적 경력을 시작하기에 변호사만큼 유리하고 좋은 직업이 별로 없었다는 것.
[37]
Allan Pinkerton, 1819.08.25.~1884.07.01.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링컨을 경호하는 일을 하였으며, 링컨이 당선된 후에는 그 유명한
핑커튼 전미탐정사무소를 차려 군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스파이 역할을 한 적도 있었다. 사설 탐정사무소이면서 정보기관 역할도 겸한 것.
[38]
자세히 보면 사진찍을 때 움직여서 얼굴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 193cm의 큰 키에 브룩스 브라더스 수트와 실크햇이라는 링컨을 상징하는 복장으로 대부분의 전장을 시찰했고, 1864년 남군의 기습으로 워싱턴 D.C.가 공격당할 위협을 맞는 가운데(모노카시 전투,
주발 얼리가 이끄는 남군 기습부대가 워싱턴 D.C.에서 겨우 4마일 거리까지 진격해온 사건이다)에서도 전선에 직접나가 남군 저격수들의 위협 속에서도 D.C.의 방어군을 지휘하는 결기를 보였다.
[39]
John Alexander McClernand, 1812.05.30.~1900.09.20. 일리노이의 법률가이자 정치인으로, 링컨의 정적이었다가 친구가 되었다. 링컨과의 친분으로
율리시스 S. 그랜트의 테네시군 휘하 군단장으로 복무했지만 그랜트와의 불화로 해임되었다. 전후 연방하원의원, 판사 등을 지냈다.
[40]
나머지는
조지 워싱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토머스 제퍼슨 정도가 있다.
[41]
다만,
앤드루 존슨은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관계로, 전임자인 링컨이 평생토록 이루고자했던 인종간 화합과 통합의 꿈을 무위로 돌려버린 탓이 크게 작용한다. 링컨의 계획을 크게 말아먹은 주제에,
알래스카 조약말고는 이렇다할 업적도 없을 만큼 대단히 무능하다는 점때문에, 주류
역사학계에서조차 전반적으로 존슨을 박하게 평가한다.
[42]
암살당하기 몇 달 전의 사진이다.
[43]
링컨을 당시 기준으로 보수주의 인물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현대적 기준에서 링컨이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모두 영향을 준 인물임은 분명하다. 일단 노예제를 기준으로 보면
공화당은 폐지주의를 표방한 진보정당이었고, 당시의
민주당이 보수정당이었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후 자본주의의 성장이라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노예제가 아닌 현대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해석 기준이 변화한 것. 다만 이는 말그대로 노예제만을 기준으로 두었을때 공화당이 진보주의라는 것이지, 단순히 민주당과 공화당이 현재와 정반대였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흔히 한국에서는 이 시기 링컨과 공화당은 모든 면에서 급진적 진보주의였다고 잘 알려져 있고 심지어는 사회주의까지 언급될 정도로 초강경 좌파 이미지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기 양당을 지금 기준의 좌우, 진보 보수로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실제로 링컨의 업적과 사상은 미국 현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양쪽 기준에서 모두 높게 평가받을만한 요소가 많으며, 이러한 점이 그가 매우 존경받는 인물인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로 소수긴 하지만 좌우 안티들이 있는 이유 중엔 이런 양쪽 모두의 요소가 온건적으로 적절히 포함되는 이념 성향이나 정치적 계보 탓도 있을 듯.
[44]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은 민주당이다. 오히려 공화당은 처음 배출한 대통령이 링컨인 신생당이다. 민주당은 초기 앤드류 잭슨 시기는 급진주의 성향이 강했으나 (이 시기 백인 서민에게 매우 우호적이긴 했으나 인디언 탄압 등 인종주의 성향이 강해 현대적 진보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남북 분열기 등을 지나 한동안은 그로버 클리블랜드로 대표되는 북부 친자본가적 보수주의 성향을 보였고 우드로 윌슨과 (인종인권 문제는 제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이 되어서 다시 진보적 성향이 강해지게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공화당이 보수, 민주당이 진보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다.
[45]
당시에는 백인 여성들도 투표권이 없던 시대였다.
[46]
사실 미국 사회운동사에서 인종차별, 노예제에 반대한 양심있는 백인들에게 'nigger-lover'란 낙인을 찍고 침묵시키려는 집요한 꼬리표의 역사를 모른다면, 앞뒤 문맥 자르고 악마의 편집을 가하여 영락없는 인종차별 발언으로 만든 해당 발언을 왜 인종차별 반대 연설로 봐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당장 위에 "흑인 여성이 노예가 되는 건 반대하지만 그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건 아니다"란 발언도 단순한 위트가 아니라 "나 흑인성애자 아니다"란 정치적 완곡 발언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노예제 유지 찬성 진영이 주구장창 하는 소리가 "노예해방론자들은 흑인들과 섹스하고 싶어서 해방시키려는 거다!"란 음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흑인들과 섹스, 그것도 합의간 섹스도 아니라 강간하고 다니던 건 주로 백인 노예주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지만 "인종평등을 지지하는 백인은 사실 해당 인종성애자(그것도 사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수간쟁이란 뉘앙스까지 풍긴다)라서 그런 거다!"란 꼬리표는 미국 인종 간 갈등의 역사에서 뿌리 깊은 흑색선전이었다.
[47]
참고로 상대방인 더글러스 역시 자유주의 사상이 강한 북부 민주당 출신으로, 노예제를 찬성하는 남부주들을 방임하는 경향은 있었지만(허나 남부 민주당 인사들은 이런 더글러스조차 배신자라며 깠다), 이들 역시 노예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측은 아니었다.
[영어전문]
[49]
그릴리의 편지를 더 살펴보자면 그릴리는 "우리의 철천지원수들에게 반역하여 평생의 압제자들로부터 탈주해온 이들이 자유와 보호를 원하여 우리에게 왔는데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적의와 감금, 그리고 살해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남부 흑인들이 우릴 위해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하든 하지 않든 간에, 정찰병·길 안내인·첩자·요리사·마부·도랑파는 인부·벌목꾼 등의 흑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붙여 몰수법을 제대로 집행해 달라고 말한다."고 링컨에게 전하고 있다.
[50]
실제 남북전쟁 발발과 함께 이들 지역에서도 초기엔 분리주의 움직임이 일었다. 연방군이 초기 진압해서 위기는 모면했지만..
[51]
이 주장은 당시에는 비교적 널리 동조를 받았으며, 국가의 주도로 전면적으로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실행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결과
라이베리아가 건국되었다. 의외겠지만 이런 주장에는 백인 우월주의자와 흑인 양쪽 모두 동감을 샀는데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흑인들이 아프리카로 가버리면 흑인들 안 봐도 되어서 좋다고 동감했고 흑인들은 아프리카로 가면 지긋지긋한 백인 얼굴 안 봐서 좋을 거라고 여겨서 동감했다.
[52]
1856년 대통령선거(그러니까 링컨이 당선된 선거 바로 전의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다.
[53]
물론 이 노예해방령은 명분 확보 측면에선 북부에 좋은 효과를 불러오긴 했다. 애초 남북전쟁의 표면적 대립은 노예제를 두고 수십 년간 이어져온 논쟁에서 비롯된 만큼 이 노예해방 선언은 북부군의 사기 입장에서도 매력적인 카드였다. 실제로 북군의 일개 병사가 "우리는 우리 선조와 달리 좀 더 숭고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선조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우리는 다른 인종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북부에 한정된 얘기였고, 남부나 간보던 다른 주에선 긴가민가한 상황이긴 했다.
[54]
출처,
일부 한역(오역주의).
[55]
링컨의 내각 내부에서조차 반대가 어마어마했다. 특히 부통령인 햄린부터가 노예 해방선언이 시기상조라며 태클을 걸고 나섰다. 햄린은 노예제 폐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예 해방 선언은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남부의 처분이 끝났을 때 해야 반발이 적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링컨을 지지하는 내각 인사는 샐먼 체이스 재무장관 등 몇 안 됐다. 상원의장을 겸하는 부통령인 햄린이 이 내용을 의회에 알리는 바람에 의회에서도 식겁해서 "노예 해방선언을 빨리 하면 유럽 외교에 악영향을 받는다며" 링컨을 말렸다고…
[56]
본명은 앤 루트리지
[57]
결혼 전 이름은 Mary Ann Todd로 결혼 후 원래 미들네임을 Ann 대신 본인의 가문 성 Todd로 바꿨다.
#
[58]
오죽하면 장남 로버트 링컨이 비밀리에
정신병원에 구금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찌어찌 탈출해서 아들을 까버렸다고 한다.
[59]
메리 토드 링컨이 실제 처신을 잘못한 부분도 분명 있었다. 예를 들어 메리 링컨의 여동생이자 링컨의 처제는 남군 육군
준장의 아내였는데, 메리는 제부가 남북전쟁 당시 서부전선에서 전사하자 그 전투가 연방군의 승리였음에도 공식석상에서 표정 관리도 못한 채 눈물을 보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남부에 살던 여동생을 백악관으로 불러서 며칠 묵고 가게 하기까지 하는 심각한 수준으로
편애에 가까운 가족애를 보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혼란한 전시 상황에서 미국 영부인으로서 냉철하고 엄격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적인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부적절한 행동과 잘못된 처신, 툭하면 헌신적인 남편에게 간헐적 히스테리와 우울증을 보이며 화풀이하며 불안을 일으키는 안 좋은 의미로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성격 탓에 오늘날에도 미국 영부인으로서의 메리 토드 링컨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나쁜 편이다.
[60]
자식으로는 마미 링컨 이샴, 에이브러햄 링컨 2세, 제시 할런 링컨을 두었다. 장녀 마미 링컨 이샴은 역사학자 찰스 브래드포드 이샴과 결혼해 외동아들 링컨 이샴을 낳았다. 링컨 이샴은 자식을 보지 못하고 1971년 9월 3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들인 에이브러햄 링컨 2세는 어릴 적 요절했고, 3녀 제시 할런 링컨은 워런 월리스 벡위스와 결혼해서 로버트 토드 링컨 벡위스를 낳았다. 로버트 토드 링컨 벡위스는 농부로 살았고, 그 역시 자식 없이 1985년 12월 24일에 8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에이브러햄 링컨의 직계는 끊기고 말았다.
[61]
에이브러햄 링컨 자신이 존경하는 의원의 이름을 따 지었다.
[62]
2000년대에 DNA 검사가 거부되었다.
[63]
이 책자를 보면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인 랜돌프에서부터
기 드 모파상,
프리드리히 니체,
아돌프 히틀러 등 무수한 인물들이
매독으로 망가진 것에 대하여 분석하고 있다. 단 히틀러 매독설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64]
링컨은 단순히 나무꾼 같은 막노동만 한게 아니다. 위에 서술되어 있듯 일리노이 주에서 12년간 패배를 단 한번밖에 안했을 정도로 우수했던
프로레슬러였기 때문에 보통 사람보다 무술에 단련된 몸이었다.
[65]
핵심 증인인 목격자가 사건 당일 보름달이 뜬 탓에 더프가 나무들이 많은 숲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멀리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고 했는데, 그 당시의 일기예보지에서는 그 날 초승달이 떴다고 나와 있었다. 즉 밝은 달빛 아래서 더프의 범행을 목격했다는 진술 자체가 거짓이었던 것. 링컨은 이 사실과 나무들의 위치를 근거로 들어 현장을 볼 수 없었을 거라 주장하며 증인을 몰아붙였고, 증인은 결국 위증을 했음을 자백했다.
[66]
링컨 연구가들은 이 '1패'에 분명한 근거는 없다고 하지만, 승률이 무시무시하게 높았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또한 (충분히 넓은 지역이기는 하나) 링컨의 커리어는 자신의 출신지와 그 주변의 주를 돌며 쌓은 것으로, 연방 전체를 돌아다니며 쌓은 전국구 커리어가 아니라는 한계는 있다.
[67]
하지만 애시당초 프로레슬링의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전국구 프로레슬링이 등장한 것 자체가 미국 전체를 아우르는 단체인
NWA가 설립되고 나서였다. 그 이전에는 유랑 서커스에서 돌아다니면서 흥행을 하거나 아니면 지역구 프로모터가 운영하는 지역 기반 프로레슬링 단체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교통수단이 이를 받쳐주지 못했다.
[68]
물론 현대에도 각본대로 움직이기는 하되, 기술 자체는 진짜로 거는 것이라서 오늘날의 프로레슬러들도 일반적인 운동선수들처럼 허구헌 날 갖가지 부상을 달고 산다. 심지어 일부 스페셜 매치는 옛날마냥 각본도 안 짜고 진짜로 승패를 가리는 식으로 치를 정도다.
[69]
아일랜드에서 유래된 전통 레슬링으로, 옷을 착용하고 주로 잡기 위주의 기술을 사용한다.
[70]
이 책에서는 링컨 뿐 아니라
조지 워싱턴이나
마크 트웨인 등도 게이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링컨이든 트웨인이든 딱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71]
공교롭게도, 링컨과 노무현 둘다 양국의 16대 대통령이다.
[72]
당장 링컨 휘하에서 남북전쟁에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율리시스 S. 그랜트도 군인이면서 전쟁 자체는 싫어했던 인물답게 미국-멕시코 전쟁에는 저주와도 같은 혹평을 했다.
[73]
남군측이 붙인 정식 함명은 CSS 버지니아.
[74]
당시 처칠은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올누드로 담배를 피우던 중이었는데, 벽난로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링컨의 유령을 보았다. 처칠은 "좋은 저녁이군요, 대통령 각하. 그런데 지금은 제가 좀 경황이 없는 상황이라서..."라고 했더니 링컨이 웃으면서 물러갔다고 한다. 물론
뻥카성 일화. 그런데 처칠은 노출광이었는지 비슷한 일화가 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나기로 했는데 당시 처칠은 샤워중이었다. 문제는 갑자기 대통령이 방문한 것. 처칠은 일단 수건으로 중요한 부위만 대충 가리고 나와 대통령을 맞이했는데 감싸고 있던 수건이 떨어져버렸다. 당연히 처칠은 올누드 상태가 되어 버렸고 상황이 뻘쭘해질 찰나 기지를 발휘하여 "대통령 각하께 영국 총리의 거짓없는 진실된 모습을 보여드려 영광입니다. 혹시 제 모습이 불편하신지?" 라고 물었다. 이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럼 진실어린 대화를 해볼까요?" 라고 답했다는 나름 훈훈한 이야기.
[75]
물론 그런 이유라기 보다는, 2층 피아노 무게를 천장이 못 견디고 무너져 1층에 피아노 다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건물이 노후화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콘크리트 재질로 보수한 이후로는 악몽도 꾸지 않고 튼튼한 관저에서 편안한 잠을 누렸다고 한다.
[76]
제38대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의 이름도
미국의 한 자동차 제조사의 상표로 쓰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제럴드 포드는 링컨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데다가 그의 전임자인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임해서 대통령이 된 것이고, 그의 재임 시기는 이미 포드가 설립되고 난 후로도 한참 후였다. 무엇보다도 포드는 링컨과는 달리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만든 상표가 아닌, 설립자인
헨리 포드가 자신의 성씨를 따서 만든 상표이다. 다만 제럴드 포드의 포드와 헨리 포드의 포드 둘 다 스펠링이 Ford로 같기는 하다. 여담으로 현재 포드와 링컨은 같은 포드 내의 계열사다. 한국으로 치면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자동차와
제네시스 같은 관계.
[77]
다만 이때는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절이었고, 제대로 된 집권은 미국이 그랜트 재임 시절이던 1873년에 시작되었다.
[78]
당장 유교세가 많이 약해진지 수십년이 지난 현대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교적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한국인은 적다.
[79]
재임 중에 전쟁에서 싸우다가 크게 다쳐 죽음이 가까워지는 청년이 어머니께 쓰려는 편지를 대신해 쓰고 난 뒤에 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함께하며 그 옆에서 성경책을 펴고 여호수아 1장 9절을 읽었다는 일화가 있다.
[80]
이 발언은 북군이 신의 뜻에 합치하는 선한 군대가 되도록 해달라고 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당시 발언 상황상으로도 올바른 해석이다.
[81]
대통령 취임 전에는 장로교와 성결교를 다녔고, 취임 후에는 침례회에 출석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침례회 신자로 분류된다.
[82]
위키피디아의 Abraham Lincoln and Religion 문서 참조.
[83]
2012년작 영화 링컨을 보면 링컨 역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일부러 목소리를 하이톤으로 내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당대의 기록을 참고해서 재현했다고 한다.
[84]
매클레런은 딱히 당시 민주당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전쟁영웅 이미지와 링컨 재선 저지를 위해 후보로 옹립되어 상당한 득표를 했다.
[85]
더글러스를 지지한 친 민주당, 반 링컨파 신문이었다.
[86]
미 최장수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평소 유머감각이 넘치며 대통령들의 위트에 관한 책을 쓴 인물이다. 평소 유머감각이 넘쳐나는 인물이지만 전쟁에서
퍼플 하트 2개와 동성훈장을 수훈한 군인이기도 하다. 1996년 대선의 공화당 후보이기도 했다. 미 정치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꽤나 유명한 인물로 링컨의 더글러스와의 담판을 보면 알 수 있듯 링컨은 원래부터 풍자에 재능이 많았는데 밥이 이에 흥미를 느껴 대통령들의 위트에 관련된 책을 썼다.
[87]
남북 전쟁 때 북군 사령관으로 링컨과 다툴 때가 많았다. 그런 그가 전장 상황을 더 잘 보고하라던 대통령을 놀려먹으려고 암소 몇 마리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까지 편지로 붙인 것이다. 결국 매클레런은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링컨과 박빙의 승부를 벌린 끝에 낙선했다. 대선 후보 등록 기간 마감 1시간 전에 매클레런이 기습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원래라면 링컨의 무투표 당선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매클레런의 빅엿으로 링컨은 전쟁통에 선거까지 치르게 된다.
[88]
미드를 변호하자면, 당시 미드가 이끌던 군대는 북부의 남쪽 전선 주력이었는데 당시 북군은 여러 똥별들의 삽질로 남군의 명장
리에게 연전연패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드는 리를 상대로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거꾸로 패배하면 오히려 북부가 남부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미국의 수도가 버지니아에서 약간만 더 올라가도 공격할 수 있는 워싱턴 D.C.였음을 생각하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89]
문자 그대로 목숨을 놓고 싸우는 결투였다. 칼과 총 중에 선택해야 했는데 상대방인 쉴즈는 군인 출신으로 총을 잘 다뤘기 때문에 링컨은 그나마 자신의 리치를 살릴 수 있는 기병도를 선택했다고 한다.
[90]
당시엔 결투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며 법으로 금지된 일도 아니었다. 마크 트웨인도 결투 신청을 받은 적이 있었을 정도. 다만 주마다 다른게 특징인 미국답게 결투가 금지된 주도 있었다.
[91]
또다른 일설로는 쉴즈가 정작 링컨의 큰 키와 긴 팔을 보고는 상대가 되지 않겠다 싶어서 포기했다는 내용도 있다. 관련 다큐에서는 이 사건 이후 링컨에 대한 5년간의 기록이 전무하다고 한다. 아마도 자중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조용한 삶을 산 듯.
[92]
그는 3개 주에서 상원의원을 역임했고 이후 남북전쟁에서는 북군 장군으로 복무하기도 했으며 육군 준장까지 진급하였는데 남북전쟁에서 전사했다.
[93]
사실 이 시기 미국 변호사들은 오늘날 변호사나 법률가 하면 떠오르는 깔끔하고 합리적인 인텔리가 아니라 법정에서 아가리 파이팅과 수틀리면 결투로 해결을 보는 터프가이들이 대다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앤드루 잭슨으로 그는 수많은 결투를 벌여 몸에 여러 개의 납탄이 박힌 채로 살았다.
[94]
안 그래도 커다란 석상이 살아 움직이는데다가, 목록에도 나와 있지만 링컨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제일 키가 컸다.
[95]
상술되었다시피 링컨에게는 게이 의혹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조지 워싱턴과 키스하는 장면이 나온 적도 있었다.
[96]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셰익스피어+헤라클레스라는 정신나간 조합.
[97]
자기 발 밑에 로켓을 발사하여 그 폭발력으로 높이 점프하는 기술이다.
[98]
초반에 묘사된
자본주의 비판 연설은 실제 링컨의 연설로 알려진 이야기. 다만 실제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99]
관계있다면 관계있는 이야기인데, 마르크스 역시 남북전쟁 당시 명확하게 북부측과 링컨의 입장을 지지한 바 있다. 1848년 혁명 당시 사이가 틀여저서 변절자라고 비판하던 옛 동료가 남북전쟁에서 북군 장교로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비판하지 않았을 정도.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지지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르크스의 주 수입원이 미국 신문에 기고한 원고료였다는 점에서, 미국과 마르크스가 관계없다고는 할 수 없다.
[100]
소크라테스도 연설에 능하긴 했지만 고대 그리스인이라는 점 때문에 의사소통이 안되어 보디랭귀지로 학생들에게 소감을 이야기했다.
[101]
We are not enemies, but friends. We must not be enemies. Though passion may have strained, it must not break the bonds of our affection.
취임연설전문
[102]
이 외에도 역시 새로 추가된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등장하며, 첩보 시스템을 표현하는 장면도 나온다.
[103]
현실에서는 세번째 자리에
레닌을 넣는 경우가 많으나 카이저라이히 세계에선 10월 소련 혁명이 실패했다. 다만 레닌이 완전히 잊혀진건 아니고 미노조연맹에서 전위당론자
얼 브라우더,
윌리엄 Z. 포스터는 레닌을 추종한다.
[104]
실제로 노예 폐지론자인 링컨은 극장에서 아내와 데이트 도중 열렬한 노예 지지론자 배우에게 암살당한다.
[105]
오늘날 민주주의 나라에서 많이 쓰인다.
[106]
남북 전쟁 기간 중
공화당,
연합당,
민주당 임시 통합
[A]
주의회에 의한 간선제
[A]
주의회에 의한 간선제
[109]
1865. 4. 15. 피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