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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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영어: Battle of Gettysburg 프랑스어: Bataille de Gettysburg 독일어: Schlacht von Gettys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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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863년 7월 1일 ~ 7월 3일 | ||||
장소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애덤스 카운티 게티즈버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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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북군의 승리, 남군의 공세종말점 도달, 북군의 반격 시작 | ||||
교전국 | |||||
미합중국 | 미연합국 | ||||
지휘관 | |||||
포토맥군 사령관 소장
조지 미드 1군단장 소장 존 F. 레이놀즈 → 애브너 더블데이→존 뉴턴 2군단장 소장 윈필드 핸콕 3군단장 소장 대니얼 시클스 5군단장 소장 조지 사이크스 6군단장 소장 존 세지윅 11군단장 소장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12군단장 소장 헨리 슬로컴 기병군단장 소장 앨프레드 플레선튼 |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대장
로버트 리 1군단장 중장 제임스 롱스트리트 2군단장 중장 리처드 이월 3군단장 중장 A. P. 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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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
병력 83,289명 | 병력 75,054명 | ||||
피해규모 | |||||
3,155명 전사 14,529명 부상 5,365명 포로 및 실종 총합 23,049명 |
3,500명 전사 18,000명 부상 6,500명 포로 및 실종 총합 28,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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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남북 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 1863년 7월 1일부터 7월 3일까지 벌어졌다.2. 배경
남부 육군은 1863년 5월의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연방 육군의 포토맥군을 격파하여 기세가 올라있었다. 로버트 리 장군은 이를 활용하여 북부로 진격하고자 결정한다. 리가 북부로 진격하고자 한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우선은 북부 육군의 여름 전쟁계획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빅스버그에 포위된 남부 육군 수비대에 가해지는 압박을 분산시키고자 했으며, 잇단 전쟁으로 피폐해진 버지니아 주를 위해 북부의 농장들에서 물자를 탈취하려는 것 등이었다[1].하지만 리의 궁극적 목적은 북부의 주력군을 격파하여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종전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하여 남부에게 유리하게 종전협상을 이끌고자 하는 것에 있었다. 남부의 형편상 북부와 전쟁을 길게 끌고가면 갈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리는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3]
당초 빅스버그의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해 제임스 롱스트리트 장군의 2개 사단을 파병하는 안이 추진되었지만 리 장군은 이번 기회에 아예 북부 육군 주력을 격파하자는 생각으로 이 안을 반대하고 롱스트리트 장군의 2개 사단뿐만 아니라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워싱턴 D.C.를 위협하는 전략을 구상하게 된다.[4]
롱스트리트 장군의 2개 사단을 보내는 사이에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빅스버그가 함락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북부의 주력군을 격파한다면 자연스럽게 빅스버그의 포위가 풀리고 그때까지 남부연합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데 미적거리는 유럽 각국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북군의 잇단 패배로 북부에선 전쟁을 그만두자는 반전운동이 일고 있었기 때문에 북군을 격파한다면 이런 추세가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이에 따라 리는 롱스트리트의 2개 사단과 가용가능한 육군 병력을 모두 모아 7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북부로 진격했다.
이에 맞서는 북군의 포토맥군은 조셉 후커 장군의 지휘 아래 약 9만 5천의 육군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전투 불과 사흘 전 후커를 소환하고 조지 미드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한다. 후커가 챈슬러스빌 전투의 패배후 리를 상대하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오히려 리를 피해 남부 수도 리치먼드로 진격하자고 주장하자 미드로 교체한 것이다[5]. 게다가 챈슬러스빌 전투 항목에서도 서술된 바이지만 후커는 이미 허풍으로 악명높았던 인물이라 애진작에 링컨 대통령의 눈 밖에 난 후였다.[6]
3. 편제
자세한 내용은 게티즈버그 전투/편제 문서 참고하십시오.4. 전개
4.1. 전초전
게티즈버그의 전쟁터들 |
양측은 전면전보다는 탐색전 성격의 전투로 6월 한달여를 보냈다. 최초의 충돌은 6월 3일에 벌어진 버지니아 쿨피퍼 근처의 브랜디 역에서의 기병대 전투였다. 북군 기병대가 남군 기병대를 기습하여 벌어진 이 전투에서 초반 북군 기병대에 밀리던 남군 기병대가 결국 승리하긴 했으나,[7] 이 습격으로 남군 기병대를 지휘하던 젭 스튜어트는 꼭지가 돌아 북군 후방 깊숙히 들어가[8] 보복전에 매달렸다.[9][10] 본래 기병대의 역할이 적정 탐색과 보병대 엄호였고 리의 명령도 A. P. 힐의 군단 우측방을 엄호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가 스튜어트에게 힐 군단 엄호 명령과 북군 후방 교란의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 간의 우선순위를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스튜어트는 셰넌도어 계곡으로 북상 중인 힐을 엄호하기는 커녕 볼티모어 방면으로 혼자 돌아다니며 보복전에 매달리기만 했다. 결국 스튜어트의 독단 행동은 게티즈버그 전투 초장부터 남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셈이다.[11][12] 실제로 리는 북군 포토맥군의 동향에 대해 전혀 정보를 얻지 못했다. 반면 북군의 미드는 충실하게 남군의 동향을 보고받고 있었다.
더욱이 리는 스튜어트가 날뛰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기병대 지휘를 맡기고 북군을 견제하게 했다. 스튜어트는 결국 게티즈버그 전투의 중요한 첫째날과 둘째날에 그 자리에 없어서 패배에 큰 영향을 주고 말았다. 어떻든 간에 스튜어트를 제어하지 못한 리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스튜어트가 보복전에 날밤새는 가운데, 리의 본대인 북버지니아군은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 주로 진격할 채비를 갖췄다. 후커가 지휘하는 북군의 포토맥군도 6월 25일에서 6월 27일 사이에 남군을 추격하며 포토맥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6월 29일, 남군은 게티즈버그 북서쪽과 북쪽 20~30km 지점에 반원형으로 길게 산개하여 전개했다.
반면 북군의 주력 포토맥군의 총사령관 후커 소장은 챈슬러스빌 전투 패전 이후 부하 군단장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고, 링컨 대통령의 신임도 잃고 있었다. 남군의 북상에 대응하여, 후커는 남군의 수도 리치먼드로 역공을 가하겠다는 계획을 보고했는데, 링컨과 행정부의 반응은 "허풍은 그만 됐고, 북상한 북버지니아군이나 막으세요."였다. 결국 후커는 논쟁을 벌이다 자신을 확실히 신임할 게 아니면 사임하겠다며 사표를 제출했는데, 후커의 기대와는 달리 링컨은 사표를 곧바로 수리했고, 6월 28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5군단장 조지 미드를 기용했다. 여담으로 미드는 워싱턴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자 자신이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줄 알았다고.
조지 미드가 포토맥군의 사령관이 된 다음날인 6월 29일, 리는 북군이 포토맥 강을 건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리는 전군에게 게티즈버그 서쪽 13km에 있는 캐시타운이라는 마을로 집합할 것을 명령했다. 사실 리도 미드도 게티즈버그가 아닌 다른 결전장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게티즈버그에 양군 통틀어 가장 먼저 도착한 북군 기병사단장 존 뷰포드 준장[13]은 게티즈버그와 그 주변의 구릉지대를 먼저 장악한 쪽에게 유리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자신의 기병대를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하여 전투 준비를 하는 한편 1군단장 레이놀즈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뷰포드의 빠른 판단이 북군 승리에 기여한 셈이다.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없는 탓에 전혀 상황을 파악 못한 남군은 6월 30일, 힐 중장이 지휘하는 3군단 휘하의 존스턴 페티그루가 이끄는 노스 캐롤라이나 여단이 게티즈버그에 접근하여 북군 존 뷰포드의 기병대가 게티즈버그 서쪽의 언덕에 주둔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14]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남군은 게티즈버그에 북군의 대병력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펜실베이니아 민병대 정도일 것이라 생각한 힐 중장은 다음날 상당한 규모의 정찰병력을 게티즈버그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4.2. 7월 1일
전투는 남군과 북군의 대규모 지원병력들이 가세하면서 점점 가열찬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오후에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가 이끄는 북군 제11군단이 도착했고, 남군은 이월(Ewell)의 제2군단이 도착하여 남군은 북쪽에서 대공세를 취하고, 북군은 막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남군측 로버트 로즈의 사단과 히스 사단이 오크 힐과 세미너리 릿지(신학교 능선, 루터교의 신학교가 있었다)에 맹렬한 공세를 퍼붓자 북군 제11군단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11군단이 밀리자 우측이 비게 된 1군단도 후퇴하게 되어 세메터리 힐(묘지 언덕)까지 밀리게 되었다.
리는 2군단장 이월에게 "가능하다면" 세메터리 힐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월은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사실 "반드시"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리의 잘못이겠지만(...). 리는 후에 "챈슬러스빌에서 사망한 '스톤월(Stonewall)' 잭슨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하고 통탄했다고 한다. 참고로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이자 저명한 남북전쟁 역사학자인 James M. McPherson은 그의 저서에서 ' 스톤월 잭슨이라면 분명히 점령했겠지만 이월은 잭슨이 아니었다'라고 썼다.
사실 꼭 리의 잘못이라고만 말하기도 어려운게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없던 탓에 게티스버그에 북군이 얼마나 배치되어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리는 A.P. 힐과 함께 챔버스버그 파이크 쪽에 있어서 세메터리 힐 쪽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만약 반드시 점령하라고 명령했다면 이월은 북군의 방어가 아무리 견고해도 막대한 희생을 감내하고 점령해야만 하는데 이걸 바란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맡겨 적 병력이 적으면 점령하고 많으면 점령하지 말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군단장이 이런거 판단하라고 있는 직책이지 그저 총사령관의 명령을 전달만 하는 녹음기가 아니다. 그런데 당시 북군은 챔버스버그 파이크와 오크 릿지 방면에서 세메터리 힐로 정신없이 퇴각중이었고 방어선을 펼친게 아니었기에 만약 이월이 세메터리 힐을 공격했다면 점령할 수 있었다.
이월도 할 말이 없는건 아니었다. 그의 군단은 긴 행군으로 지쳐 있었고, 하워드의 11군단과 전투로 피해도 꽤 입었는데다, A. P. 힐에 요청한 지원도 거절되었다. 게티스버그 마을에서 세메터리 힐을 공격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한 점도 있었다. 그래서 컬프스 힐을 대신 점령하려고 했는데 이월 휘하 주발 얼리(Jubal Early) 사단장이 게티스버그 동쪽(요크 파이크 방면)에서 북군이 접근중이라는 보고(슬로컴의 12군단)를 하는 바람에 이것도 포기했다. 하지만 12군단은 아직 컬프스 힐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고, 북군이 언덕에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점령할 수 있었다.[16] 만약 남군이 두 언덕 중 하나를 점령했다면 북군 본진을 포병으로 공격할 수 있는 위치라 북군이 게티즈버그에서 철수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한편, 레이놀즈의 전사 소식을 들은 북군 총사령관 조지 미드는 가장 신뢰하던 부하인 소장 윈필드 핸콕을 보낸다. 핸콕은 미드로부터 병력을 철수할지, 전투를 벌일지 결정하는 권한도 받았는데 세메터리 힐을 둘러보고는 이곳보다 방어하기 좋은 곳은 없다며 게티즈버그에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북군이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하는 중대한 결단이라 평가된다. 그리고 이월이 세메터리 힐과 컬프스 힐을 공격하지 않자 밤 사이 두 언덕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이틀째와 사흘째 이월의 2군단은 방어가 구축된 두 언덕을 공격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어쨌거나 이월은 세메터리 힐을 공략하지 않았고 북군은 덕분에 전열을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리의 애매한 명령이 게티즈버그 전투의 패전 원인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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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월 2일
당초 늦게 게티즈버그에 도착한 롱스트리트는 형세를 살피고서는 구릉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북군을 공격하는게 쉽지는 않겠다는 판단을 하여 리에게 방어적인 전략으로, 즉 후퇴해서 워싱턴과 포토맥군 사이로 위치를 잡고 워싱턴을 위협해 미드가 공격하게 만들게 하자는 전략을 밀었다. 그러나 평소 빠른 공격적 전략을 선호하는 리는 이에 반대했다. 리는 빨리 공세로 나가고자 했으나 롱스트리트는 후드 사단 소속 러(Law) 여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피켓의 사단은 아예 도착하지 않았다) 아침에 공세를 취하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하여 결국 아침에 공세가 취해지지 않게 되었다.
리의 계획은 일단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이월의 2군단이 컬프스 힐을 향해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북군 우익을 붙들어두면, 묘지 능선(세메터리 릿지)을 우회한 롱스트리트의 1군단이 북군 좌익 배후를 겨냥하여 주공격을 퍼붓고 결정적일 때 이월의 2군단도 가세하여 북군을 몰아붙인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젭 스튜어트가 떠나버린 상황에서 리는 북군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리는 북군 좌익이 에미츠버그 로드를 따라서 측면이 노출된 채로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북군측 제3군단장 시클스의 독단적인 판단이 리의 구상을 흐트려버렸다. 미드는 시클스에게 2군단 옆, 세메터리 능선을 따라 리틀 라운드 탑을 왼쪽에 두는 위치에 포진할 것을 명했다. 시클스는 처음에는 이 명령에 따랐지만 세메터리 릿지가 방어상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세메터리 릿지 정면 1.12km에 있던 고지대인 셔파이 집안 소유의 복숭아 과수원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시클스의 독단적인 행동은 위험스러워 보였다. 시클스의 군단이 적을 향해 돌출되어 버린 형국이 되어버린데다가 2개 군단이 지키기에는 방어선이 너무 길어졌다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미드는 이런 시클스의 독단적 판단을 나중에야 알고 격노했지만,[18] 이미 남군의 공격이 임박해 다시 위치를 조정하기에는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롱스트리트의 오판이 시클스의 독단적 판단과 결합하여 재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버렸다. 롱스트리트는 리틀 라운드 탑의 북군 통신부대 관측소에 관찰되지 않으려고 멀리 우회하다가 공격지점으로 오다보니 공세가 한나절 가까이 지체되어 버렸고 그 틈에 북군 제3군단의 병력이 에미츠버그 로드에 배치되어 롱스트리트의 1군단 정면에 있는 형국이 돼버렸다. 이 상황에 롱스트리트의 부관들은 깜짝 놀랐다.
후드는 상황이 달라지자 롱스트리트에게 라운드 탑을 우회하여 북군의 후미를 치기 위해 리틀 라운드 탑 고지를 점령하자고 제안했지만 롱스트리트는 리의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며 이를 묵살했다. 이미 이날 오전에 리와 작전진행에 관한 이견으로 인해 격론을 벌였던 롱스트리트로서는, 리의 계획을 자신이 수정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틀 라운드 탑에는 그때까지 북군이 없었기 때문에 남군으로선 승리의 실마리를 걷어차버린 셈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이 시클스의 단독 판단과 결합하여 롱스트리트는 시클스의 위치를 놓친채로 당초 계획과는 달리 에미츠버그 로드의 왼쪽으로 선회하여 공격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날의 전투는 대단히 치열하고 거친 전투였다. 후드는 전투중 머리위에서 포탄이 터지는 바람에 왼쪽 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19] 전선을 이탈하여야 했고 애매한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20][21][22] 그의 부대는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은채로 북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북군 전선 최좌익에 포진한 북군 제20 메인 의용보병연대[23] 지휘관 조슈아 체임벌린 대령은 남군 2개 연대의 맹렬한 공격을 수 차례 격퇴한 끝에 탄약이 다 떨어지자 허를 찌르는 착검돌격을 감행,[24] 일대를 무아지경으로 내달리며 남군 우익을 완전히 밀어내고 리틀 라운드 탑 고지 점령 시도를 끝장내버린다.[25][26]
다른 곳에서도 남군이 의도한 식으로 전투가 진행되지 못했다. 남군은 세메터리 릿지의 정상에 도달하긴 했지만 북군의 지원병력에 밀려 철수해야 했다. 양측은 상당한 병력의 피해를 보았지만 북군은 현재의 방어선을 고수했고, 남군은 상당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북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지 못한데에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미드는 리가 북군의 좌우 날개를 공략하는데 실패하여 다음날 북군의 중앙으로 돌격할 것이라 예상했다.
4.4. 7월 3일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오전 11시가 지나면서 잦아들었지만 북군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에 리는 북군의 좌익과 우익이 견고하므로 중앙은 상대적으로 약할 거라 판단했고 북군의 본진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미드의 예상과 일치한 것이다. 이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게 돼버린다. 롱스트리트는 이 공격이 실패할 것이라 판단하여 리에게 병력의 철수를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후 1시부터 남군 포병대는 보병대의 진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남북전쟁 중 최대 규모인 150여 문의 포를 동원해 포격을 북군 방어선에 퍼부었다. 그러나 남군은 포탄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저질 퓨즈가 장착된 작열탄이 사용되어 예상지점보다 더 뒤쪽에서 포탄이 터지는 상황이 벌어져 북군 방어선에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전장을 가리는 연기 때문에 포병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편 북군은 약 80문의 대포로 대응사격을 개시하였으나, 포탄을 아끼기 위해서 곧 멈추었다. 하지만 마치 남군의 포격이 효과있는 것처럼 속이기 위해서 마치 하나하나씩 파괴되고 있는 것마냥 대응사격을 점점 멈추어갔다. 그리고 연기로 시야가 가려진 남군은 북군의 대응사격이 잦아들자 북군의 포병대가 대부분 괴멸된 것으로 착각했다.
오후 3시가 되자, 남군의 포격은 멈췄고 롱스트리트의 지휘 하에[27] 롱스트리트의 군단 소속인 피켓의 버지니아 사단과 A.P. 힐의 3군단 소속의 트림블이 이끄는 펜더 사단,[28] 페티그루가 이끄는 히스 사단[29]으로 구성된 1만 2500명의 남군 병사들이 세메터리 릿지를 향해 돌격했다. 이것이 유명한 "피켓의 돌격"[30]이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남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학익진의 형국과 비슷하게 3면으로 포진하고 있던 북군이었다.[31] 게다가 그곳은 탁 트인 평원으로 엄폐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남군은 3면의 포격에도 불구하고 돌격을 멈추지 않아 한때 북군이 동요하기도 했다. 그 여파로 북군이 방어선으로 삼던 낮은 돌담이 뚫리기도 했으나 지원병력의 가세로 남군의 공세는 차단되었다. 한편 리의 지시에 따라 남군 보병들이 북군 중앙을 공격하는 동안 북군 우익을 크게 돌아 볼티모어 파이크를 따라 있는 북군의 통신선과 퇴로를 끊고 후방을 협공하려던 젭 스튜어트의 기병대[32] 역시 데이브 그레그(David McMurtrie Gregg) 준장 휘하 기병사단과 커스터 휘하 기병여단에 저지되었다.
돌격으로 인해 남군이 입은 피해는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1만 2500명의 남군 병사 중 6,55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실종, 포로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 돌격에 가담한 병력의 절반 이상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것이다. 남군의 사상자 중 적어도 1,123명은 전장에서 즉사했으며, 4,019명은 부상당했다. 부상자 중에는 다리를 잃어버린 사단장 트림블과, 팔 부상을 입은 사단장 페티그루[33]가 포함됐다. 남은 한 명의 사단장 피켓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지만 그 휘하 여단장 3명 중에 두 명이 전사했고,[34] 남은 한명 역시 중상을 입었으며 결국 후퇴 중에 포로로 잡혔다. 북군 보고서에 의하면 남군 3,750명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남군이 이런 막대한 피해를 입는 동안 북군의 피해는 사상자 합계 1,500여 명에 불과했다.
Lost Cause 지지자들은 리를 신성시하는 편이라 게티즈버그의 패배를 다른 장군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둘째날 롱스트리트가 공격을 늦게 시작했다는 것을 패배의 이유로 제시한다. 이는 롱스트리트가 전후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여 남부의 배신자로 여겨진 탓도 있다. 하지만 그전까지 북군과 남군의 피해는 비등했으나 피켓의 돌격으로 교전비는 급격히 북군쪽에 유리해졌다. 결국 게티즈버그에서 남군이 패한 최종적인 원인은 분명히 피켓의 돌격이고, 이를 명령한 리에게 게티즈버그 패배의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5. 결과
"
전우들, 나의 책임이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Friends, it is all my fault. It is entirely my fault.") -
로버트 E. 리
그 다음날인 7월 4일,
율리시스 S. 그랜트에 포위되어 있던 빅스버그의 남군 수비대는 항복하게 된다. 이는 게티즈버그 전투와 함께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평가된다.큰 피해를 입은 남군은 퇴각을 결정하고 리는 방어형으로 부대를 재편했다. 그러나 신중한 성격인 미드는 리를 추격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형식적으로 남군 잔존병력을 추격했고 이 때문에 나중에 미드는 비판을 받았다.[35] 남군은 포토맥 강의 범람으로 퇴각이 지체되었지만 7월 13일 버지니아로 철수하여 리의 북부 침공은 완전한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된다.
빅스버그의 함락으로 남부는 오하이오 강에서 서부 주들, 텍사스, 루이지애나, 아칸소로 통하는 교통로가 차단되어 버렸다. 또한 테네시에서는 털라호마 전역에서 북군이 승리하며 브랙스턴 브래그의 남군 테네시군이 테네시주 남동쪽 끝 채터누가까지 후퇴했다. 이에 남부는 브래그를 구원하기 위해 게티즈버그에서 비교적 피해를 덜입은 롱스트리트의 군단 등 리의 휘하인 북버지니아군의 병력 일부를 차출하여 브래그에게 지원군으로 파병했다. 이 때문에 리는 더이상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36]
리가 북부에 대한 공세를 택했던건 다른 전선에서 밀리던 남군의 상황을 북부의 핵심 인구 밀집지와 가까운 동부전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뒤집기 위해서였다.[37][38]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정면 공세만을 선호하고 느슨한 지휘방식을 고수한 리 본인의 실책으로 인하여 이기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던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39]
게티즈버그에선 북군과 남군을 모두 합쳐 5만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미국에선 상징성 측면에서 종종 게티즈버그 전투가 남북전쟁에서의 최대(최고)의 전투였다고 평하곤 하는데, 비록 동원된 병력 규모에선 상위권 수준은 아니었으나[40] 실제로 가장 큰 사상자 수치가 발생한 전투가 되었다. 그 중에서 7천 명의 병사들은 전투에서 즉사한데다 5천 마리의 말들도 죽어 게티즈버그는 더운 여름에 악취가 진동하여 마을 주민들은 고통스러워 했다. 숨진 병사들이 묻힌 곳은 국립 묘지로 봉헌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11월 19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국립 묘지 봉헌식에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남기게 된다.
게티즈버그 전투가 결정적 전환점이었는가에 대해서 오해를 할 수는 있다. 게티즈버그 전투로 인해 남북전쟁이 종료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을 예로 들더라도 미드웨이 전투 이후로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미드웨이 전투를 결정적 전환점으로 보는데 누구도 이견이 없다.[41][42][43] 게티즈버그 전투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이 전투 전에는 북군이 전력 우세에도 사령관의 무능으로 참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44] 예를 들어 제2차 불 런 전투에서는 6.2만 대 5만의 싸움에서 북군이 패했고, 챈슬러즈빌 전투에서는 13.3만 대 6만의 싸움에서 북군이 패했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는 11.4만 대 7.2만이었는데 또 북군이 패했다. 셰넌도어 계곡 전역에서는 아주 큰 전투는 없었지만 스톤월 잭슨이 북군을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농락당했다. 앤티텀 전투에서는 성공적으로 남군의 공세를 막아내긴 했지만 8.7만 대 4.5만의 싸움의 결과라기엔 너무나 초라했다. 그러니 북부는 아무리 많은 군대가 있더라도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고, 반대로 남부는 부족한 병력에도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게티즈버그는 8.3만 대 7.5만의 유례없는 호각세였음에도 북군이 무너지지 않았고, 특히 피켓 사단의 돌격 여파 때문에 사상자 수도 남군이 더 컸는데 이는 병력 동원 능력이 떨어지는 남부에게는 뼈아픈 결과였다. 따라서 수도 워싱턴을 위협하여 북부에게 큰 충격을 안기고 협상으로 남부연합을 인정받겠다는 전략은[45] 게티즈버그 전투로 동력을 상실하고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북부와 남부의 전쟁 수행 능력 차이로 시간이 지나면 남부의 패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수세전략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게티즈버그에서의 패배와 연이어 빅스버그의 함락이 유럽에 전해지자 유럽 국가들로부터 외교적인 인정을 받겠다는 계획 역시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이 전투의 결과와 영향을 보면 게티즈버그의 전투를 결정적 전환점으로 보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985년 당시 호화 캐스팅에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들며 인기를 끈 미국 드라마 시리즈 남과 북에서도 꽤 나온다. TV 드라마이니 아주 상세하지 않지만 반대로 드라마라는 점을 감안하면 꽤 고증을 들이고 전투씬도 나온다. 80년대 중순에 KBS-1를 통해 국내에서도 심야 드라마로 방영해 인기를 얻어 주말 오후에 재방영되기도 했다.
초기 대체역사물인 《Bring the Jubilee》에서는 게티즈버그 전투가 역사를 바꾸는 주요한 분기다.
지금은 도산한 미국의 게임회사 탤론소프트(TalonSoft)에서 게티즈버그 전투를 배경으로 한 턴제 전략게임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1995년에 출시된 배틀그라운드 2: 게티즈버그(Battleground 2: Gettysburg)가 그것으로, 탤론소프트의 대표 프랜차이즈였던 배틀그라운드 시리즈의 2번째 타이틀이었다.[46]
1997년에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거장 시드 마이어가 만든 실시간전술게임 '시드 마이어의 게티즈버그!(Sid Meier's Gettysburg!)'가 출시되었다. 시드 마이어의 게임답게 대다수 게임매체로부터 90점 이상의 평가를 받은 수작으로, 이후 전략게임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005년에는 캣 대디 게임즈에서 American Civil War: Gettysburg라는 타이틀을 발매했다. 턴제 전략 형태로 진행되는 것은 탤론소프트의 배틀그라운드 게임과 유사하나 룰이나 게임 진행이 비교적 간소화되고 3D 그래픽을 채용한 것이 차이점.
또한, 토탈 워 시리즈의 유명 모드 시리즈인 다스모드의 제작자가 만든 Ultimate General: Gettysburg란 게임도 있는데, 토탈 워 비슷한 느낌으로 진행되지만 (다스모드 제작자답게) AI가 더 다이나믹하고, 캠페인도 게티즈버그로 한정되는 대신 디테일하게 몇번에 나눠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첫 전투에서 오크 힐을 연방이 지키지 못했으면 그 다음 전투에선 오크 힐 재점령을 시도하던가 아니면 오크 릿지를 방어하는데 전력을 다한다던가 등으로 분기도 나뉜다. 즉, 저번 전투중 한 연대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으면 그 다음 전투에선 그 연대는 남은 전력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 그외 연대 이름들이나 지형들이 역사 고증에 철저히 맞게 되어 있고(위에 있는 지도와 똑같다), 토탈 워: 쇼군2 때부터 지속적으로 간략화된 토탈 워 시스템에 비해 군의 사기, 엄폐물, 지형, 체력 등이 꽤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그래도 UI가 꽤 직관적인 편이라 접근성이 낮진 않다. 전투 또한 전멸에 중점을 두는 토탈 워와는 다르게 실제 전투처럼 적을 후퇴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대신 그러면서 라인을 전진시켜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여 포인트를 쌓는 식으로 진행된다. 해외 워게임 웹진 등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스케일을 키워서 남북전쟁 전체를 아우르는 후속작 Ultimate General: Civil War도 발매되었다.
6.1. 영화 《게티즈버그》
고증이 매우 뛰어나 역덕들에게 평가가 높다. IMDb 평점 7.5 로튼지수 88%로 평점도 꽤 높은 편. 영화의 스토리라인도 역사적 사실을 덤덤하게 따라가고 있지만, 특히 전투장면의 재현도는 놀라울 정도여서 전쟁 영화 사상 최고의 퀄리티 중 하나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다.
영화를 제작하기에 앞서 제작진들은 미국 전역의 리인액터들에게 영화촬영의 개요와 일정을 소개하고, 촬영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는 연락을 대량으로 뿌렸다. 사실 당시 제작자들도 흥행이 어둡다고 투자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제작비 2500만 달러는 적은 돈은 아니지만 당시 엄청난 블럭버스터들이 7~8천만 달러는 들이고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받은 게 아니었다. 제작자인 목테스마 에르파르자(Moctesuma Esparza)나 로버트 카츠는 저예산 영화를 주로 만들던 이들이었으며 그만큼 큰 부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국내 영화월간지인 스크린이나 로드쇼 기사를 봐도 감독이나 제작진은 제작비 부족에 옳지! 그들을 쓰면 되겠다! 라고 리인액터들에게 이 영화를 소개하며 자발적인 촬영을 권유하도록 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수 천명의 리인액터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 이런 물건이 만들어져 버렸다. 이만한 밀도로 넓은 들판을 동시에 꽉꽉 채운다(...). 특히, 실제 전투에서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남부연맹군 병사들의 마지막
리인액터들은 촬영기간 중에 숙식제공만 받을 뿐 일당은 턱없이 낮았다. 이걸 사전에 공지했지만, 알고도 다들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러닝타임 4시간 14분(감독판 4시간 31분)이라는 상영시간을 자랑하는데다가,[47] 영화 자체가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대중성이 없었던 것이다. 제작비로 2500만$를 들였는데 극장 흥행성적은 1100만$에도 못미치는 수준. 영화 내용이 내용인지라 해외 시장에서도 거의 팔리지 않았다. 사실 미국에서도 흥행 전망은 부정적이었고 극장 흥행에만은 이 예측이 에누리없이 들어맞았다.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들도 시대착오적인 영화라고 배급을 꺼려 중소업체이던 터너 픽처스[48]와 뉴라인 시네마가 공동 제작하고 뉴라인 시네마에서 배급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배급하고 2000년 초반만 해도 마이너 업체에서 잘나가던 뉴라인 시네마지만 이때만 해도 뉴라인 시네마라면 프레디 크루거로 유명한 나이트메어 시리즈 배급사로나 알려졌을 뿐이었다.
결국 극장 흥행은 망했으나 2차 시장에서 뜻밖의 대박을 쳤다. 비디오(90년대 당시인만큼), DVD 등 2차 판권시장에서 터진 것이다. 내용이 역사적, 교훈적이어서 교육용으로 딱인데다가, 집이나 학교에서 쉬엄쉬엄 끊어 보면 긴 런닝타임도 별로 부담될 것이 없어, 미국의 어지간한 가정/학교/마을회관/교회 등에서 구매하여 비치해 두고 상영하는 용도로 많이 팔렸다. 1994년 6월에는 TNT에서 방영권을 사서 케이블 TV로 3400만명이 시청하여 1994년 기준으로 미국 케이블TV 역대 최다 시청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덕분에 제작비는 뽑고 수익도 거둬들일 수 있었다.
마틴 신이 로버트 리 역을 맡았는데, 연기도 출중했고 촬영 당시 보조 연기자들[49]에게도 정중하게 대해서 평가가 좋았다.
이 장면은 본래 계획되지 않은 것으로, 마틴 신이 촬영을 위해 이동하자 갑자기 리인액터들이 열성적으로 뛰쳐나와 환호했고, 이것이 영화 본편에 들어갔다. 아이러니한 점은 저 리인액터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남부 측 리인액터들인데 마틴 신은 진보 성향이 강한 헐리우드 배우들 중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강성 진보주의자라는 것. 일단
이런 흥행 속에 론 맥스웰 감독은 2003년에는 프리퀄에 해당하는 신의 영웅들(원제: Gods and Generals)[51]이 제작될 수 있었다. 전편 제작자인 제작자인 목테스마 에르파르자(Moctesuma Esparza)나 로버트 카츠가 그대로 제작을 맡고 게티즈버그 제작사인 터너 픽쳐스가 워너 브라더스에 넘어가 테드 터너 픽쳐스 이름으로 제작했고 워너브라더스에서 배급을 맡았다. 뉴라인 시네마도 2008년 워너브라더스에게 팔려 같은 운명이 되지만.
2차 매체 흥행에 힘입어 이 영화는 제작비는 훨씬 올랐고 전편에 나온 제프 다니엘스, 스티븐 랭, 케빈 콘웨이, C. 토마스 하우웰을 비롯한 배우진에서부터 로버트 듀발, 미라 소르비노 같이 이 영화도 배우진은 꽤 화려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지나치게 친남부적인 시각으로 비판을 받았고 그 여파로 57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 1200만 달러 남짓 벌며 흥행도 쫄딱 망해버렸다. 이러한 부분은 게티즈버그 역시 비판을 받았지만 솔직히 타당치 않은 비판이었다. 맥스웰 감독은 원작 책인 "킬러 앤잴스"를 그대로 영화로 반영시킨거고 남부의 입장을 설명하되 노예제도는 철저히 비판했다. 예를 들자면 남군 장교인 롱스트리트가 "차라리 노예를 해방시키고 전쟁을 선포할걸..."이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 그러나 게티스버그를 다룬 그 많은 책중에 하필 킬러 앤젤스를 택한 맥스웰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라는 변명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고, "노예제도 때문이 아니라, 연방정부의 권력남용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남부 지지자들의 상투적인 변명으로, 롱스트리트 같은 인물은 매우 드물었다. 결국 이런 대사가 노예제도라는 아킬레스건에서 남부 인물들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애초에, 노예를 해방시켰다면 전쟁을 선포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남부연방은 "남부 연방의 논리대로라면 우리 주의 입장을 결정하는 것은 주 정부에 달려있으니, 우리 주는 중립을 지키겠다."라고 선언한 경계주에 대해서는 바로 침략을 자행한 바 있다. 즉 남부연방은 각 주의 자치권을 존중하는 모임이 아니라, 그냥 연방정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또다른 연방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면 게티즈버그는 대놓고 구남부를 미화하는 신과 장군들에 비하면 그나마 객관적으로 양측을 다루고 있다. 부연하면, 간혹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을 연방 권리와 주 권리 사이의 충돌로 설명하는 시각을 볼 수 있는데 전쟁의 원인은 노예 문제가 백만배는 컸다. 왜냐하면, 온건파인 링컨은 개인적으로는 노예 해방론자였지만 정치가로서는 노예 문제은 각 주가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는 태도를 철저히 유지했고, 따라서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링컨 화형식을 하고 연방을 탈퇴하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남부는 링컨이 노예 해방과 관련된 어떤 조치를 강요해서 연방을 탈퇴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탈퇴했는데 이는 링컨이 개인적으로 노예 해방론자였기 때문, 즉 주 권리 문제가 아니라 노예 문제가 핵심이라는 뜻이다. 경제적으로도 노예의 생산성과는 별개로 노예의 가치가 폭등해서 자유주의 자유 흑인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먹는 인신매매가 횡행할 정도였으니 노예 폐지는 곧 남부인들의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의미했고 연방을 탈퇴할 이유로 충분했다.
게다가 남부연합은 징집제를 도입하면서 노예 20명 이상 소유한 사람은 군역을 면제시켜주는 등 스스로 노예 제도를 문제의 중심에 계속 두었을 뿐 아니라, 노예 해방이 아닌 흑인 노예에게 군 입대 기회를 주고 복무가 끝나면 자유를 주는 방안도 남부연합이 망해가는 상황에서나 마지못해 통과시켰기 때문에, 롱스트리트의 "차라리 노예를 해방시키고 전쟁을 선포할걸..." 발언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
다만 이 발언이 영화 제작진이 순전히 남부 미화를 위해서만을 위해 이런 장면을 넣었다고 볼 수도 없는게 만일 다른 장군이 대사를 하게 했다면 모를 일지만 해당 대사한 배역인 제임스 롱스트리트는 실제로 노예제 폐지론자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전쟁이 끝난 뒤에는 말이다. 롱스트리트는 남북전쟁이 끝난뒤 공개적으로 남부는 노예제 폐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흑인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미국 헌법 수정 14조와 흑인 투표 권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남부측 유명 인사 중에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롱스트리트 밖에 없었고, 때문에 죽을때까지 남부인들에게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1874년에는 뉴올리언스에서 흑인 민병대를 지휘해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반란에 맞서기도 했다.[52]
그가 전쟁 전에도 노예제 폐지를 지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쟁에 졌다고 사람의 신념이 쉽게 바뀌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노예제를 부정적으로 보았을 가능성은 높다. 그의 자서전에서는 남군에 참가한 이유로 고향( 앨라배마주)의 부름에 외면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해당 대사는 단순히 친남부적인 시각 때문은 아니고,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노예제를 반대한 롱스트리트의 캐릭터성을 살리는 대사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적어도 게티즈버그는 중립적으로 대하며 교육용으로 볼 가치라도 있었지만 신의 영웅들은 남부를 엄청 미화한 탓에 교육적으로도 부적격이라는 평을 듣어 2차 매체 흥행도 참혹했다. 남부미화 아니라도 순전히 전투에 집중한 게티즈버그와는 달리 군더더기 장면이 많아서 지루하다는 평가도 많았다. 덕분에 속편 제작은 완전히 무산되어 버렸다. 하지만 최근작인만큼 전투장면의 퀄리티는 엑스트라의 움직임이 어설픈 감이 있고 피 한방울 나오지 않는 <게티즈버그>를 훨씬 능가한다. 적어도 영화 스케일로 남북전쟁의 대규모 전투들을 보여주는 작품들 중에는 이걸 능가할 작품이 아직까지는 없다. 다만, 3시간 40분이 넘는 상영시간도 긴데 감독판은 무려 4시간 40분이나 된다!
여담으로 2003년에 이 영화를 기초로 갓즈 앤 제네럴즈라는 FPS 게임이 만들어졌으나, 그야말로 희대의 똥겜으로 악명을 떨치며 처절하게 망했다. 항목에 있는 영상만 봐도 왜 똥겜인지 알만하다.
그럼에도 2013년 론 맥스웰은 코퍼헤드(Copperhead)라는 남북전쟁 영화를 감독해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게티즈버그보다 제작과정이 참 험난했다. 전편 신과 장군들이 워낙 망해 워너브라더스는 그 어떤 제작 투자를 포기하고 전편들을 제작한 목테스마 에르파르자 또한 제작 투자를 거부했다. 공동 제작자인 로버트 카츠는 2010년 77살로 병으로 죽었기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에스파르자처럼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캐나다와 공동 제작으로 만들어야 했고 제법 배우진이 화려하던 이전 두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주로 TV 배우이던 빌리 캠블 같은 이들이 주연을 맡고, 그나마 알려진 배우론 피터 폰다가 나왔을뿐이었다. 이런 어려운 과정에 제작비도 전작의 1/5 가까이나 내려갔기에 상영시간도 2시간도 채 안된다. 이렇게 만들었지만 1200만 달러 제작비가 무색하게 북미 흥행이 꼴랑 17만 달러로 철저하게 망했고 평도 차라리 신의 영웅들이 볼만하다라는 지적 속에 참패했으며 감독도 이게 마지막 감독 영화가 될 것이라고 발언하여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론 맥스웰은 1980년에 리틀 달링스라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흥행에 성공하는 등, 70~80년대 만들던 영화들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90년대 이후로 남북전쟁 관련 영화 3편씩을 이렇게 10년에 1편씩 만들어 개봉했는데 2023년에 4편을 만들 것이냐는 질문에 어렵다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사실 코퍼헤드도 해외 투자와 합작으로 배우진도 겨우 채울 정도로 어렵게 만들고도 망했으니 2023년에 남북전쟁 관련 영화 4편을 만들려고 해도 제작 투자를 받을 희망은 없다, 결국 2023년에 4편은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자막은 상태가 영 좋지 않다. 헌데, 국내 정발된 DVD판부터 자막이 엉망진창이다. 일단 반말, 존댓말이 기준이 없이 왔다갔다한다. 당시 장교들끼리는 서로 'Sir'를 붙여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상급자의 입장에서 하급자에게도 sir를 붙여주었기 때문에 혼란이 생긴 듯하다. 일개 포병 대령이 롱스트리트 장군에게 반말을 써대지 않나 롱스트리트 장군이 리 장군에게 반말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전투지역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했는데 'Cemetery Ridge'를 죽음의 능선이나 그냥 전투지역으로 부른다든지 한다. 굳이 번역하자면 '묘지 능선' 정도가 알맞다.
이 영화의 엉터리 번역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전투 둘째날에 롱스트리트가 후드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자, 후드가 한참을 반대하다가 어쩔 수 없자 "General, I do this under protest"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거를 "장군, 난 하지 않겠네"라고 번역해버렸다. 원문에 명확히 '하겠다(I do)라고 되어있음에도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명령이니까 하긴 하는데, 저는 분명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니 실패해도 제 책임 아닙니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사단장인 후드가 직속상관인 군단장 롱스트리트에게 보란듯이 반말을 하는 번역은 덤이다. 영미권의 군대 문화에는 부하 장교라도 정직한 반대 의견은 오히려 좋은 지휘관의 자질로 여겨져서 이런 직접적 반대 의견 표명이 동양과 달리 가능하다.
[1]
리의 북버지니아군이
메릴랜드주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메릴랜드 주민들의 냉소와 냉대를 받는데 메릴랜드가 노예주였음에도 그랬다.
[2]
사실상 남부로서는 이게 북부를 상대로 결전을 시도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원래 남부는 북부에 비해서 전쟁에 임할 준비도 되지 않았고, 공업화되어 있던 북부와 달리 남부는 면화나 생산하던 곳이었다. 당장
기아자동차
조지아주 공장이 있는 웨스트포인트의 주력 산업이 방직업이었다. 게다가 북군이 남부의 항구를 점령하고 장악해 해상봉쇄를 하면서부터는 수출 마저도 불가능해졌다. 또, 남부는 북부와 달리 중앙화되고 체계화된 정부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아서 남부의 각 주는 거의 따로 놀았고 이들은 자기 주를 지키기 위해 수비에만 몰두했을 뿐 전쟁 전체를 이기기 위한 전략 면에서는 크게 미흡했다. 따라서 남부로서는 그야말로 천운으로 북부의 수도 워싱턴과 에이브러험 링컨을 사정거리에 둘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3]
이후로는 비록 남군이 아무리 북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북부는 그 압도적인 생산력과 인구를 가지고 계속 새로운 병력과 장비를 철도를 통해 보낼 수 있었고 빈약한 남부의 생산력으로는 이를 만회하기가 불가능했다. 실제로 이 게티스버그 전투 이후로는 북군의 무장의 질도 좋아졌고 그런만큼 군인 자체의 자질도 향상되어 전력마저도 북군의 우세가 시작되었다.
[4]
워싱턴 DC를 직접 점령할 계획은 없었는데, 1차 불런 전투 패배 이후 북군은 워싱턴을 완전 요새화했기 때문이다. 당시 워싱턴에 요새를 68개, 대포 포대를 93개 만들어 19세기 중반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의 요새도시라 부를만했다. 게다가 남쪽에서 공격하려면 요새의 공격을 받으며 포토맥 강에서 상륙작전을 벌여야했다.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피해를 감당할게 아니라면 워싱턴의 직접 점령은 힘들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점령하면 남군의 승리가 명백했기 때문에 굳이 워싱턴을 직접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5]
미드는 공병장교 출신이었는데다 특히 지형지물 전문이어서 이후 후술된 북군의 부대배치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6]
링컨이 후커의 허풍에 "나는 암탉이 가장 지혜로운 동물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놈은 알을 낳기 전에는 안 울거든요."라고 후커의 허풍을 우회로 비꼴 정도였다.
[7]
북군 사상자가 더 많았으며, 남군 기병대는 위치를 지켰다는 점에서는 남군 승리가 맞다. 뿐만 아니라 북군은 리의 본대의 위치를 찾아내지 못하고 후퇴했다. 하지만 본래 적정 탐색을 통해 기습을 예방해야 하는 기병이 오히려 기습을 받았다는 점은 스튜어트에게 굉장히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전까지 북군 기병대는 남군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밀렸지만 브랜디 역 전투부터는 북군 기병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8]
북군의 움직임 때문에 그들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멀리 돌아야 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약탈품을 챙기고 그 과정에서 북군과 충돌하면서 리에게 복귀하는 것이 상당히 늦어져버렸다.
[9]
남부 지역 신문에서 '기세등등하던 스튜어트의 코가 납작해졌다'라며 조롱조의 기사를 낸 것 역시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10]
물론 바로 보복전을 개시한 건 아니었고, 리가 처음 진군할 때에는 북군 기병대의 정탐을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1]
리는 스튜어트의 보좌를 얼마 받지도 못하는데, 일년 후 스튜어트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스튜어트는 1864년 5월 11일 벌어진 옐로 터번{Yellow Tavern; 노란 선술집}전투(전장 근처에 옐로 터번이란 이름의 여관이 있었다)에서
필립 셰리든의 포토맥군 기병대와 맞닥뜨렸고 이 과정에서 북군 저격병의 총탄을 맞고 전선을 이탈, 의사였던 처남의 집으로 이송되었으나 다음날 전사했다.
[12]
여담으로 스튜어트를 처리했던 셰리든은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동부 전역으로 부임해오면서 데리고 온 장교들 가운데 한명이었는데 지지부진한 동부 전역의 상황을 못마땅해 한데다 전형적인 기병대 임무에 감질나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그랜트에게 과감한 임무를 요구했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스튜어트 제거였다.
[13]
John Buford. 1826-1863. 게티즈버그 전투 5개월 뒤에 장티푸스로 사망한다.
M8 뷰포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4]
페티그루 여단이 왜 게티즈버그에 갔는지는 의문이다. 일각에선
신발을
찾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게 아주 말이 안되는건 아닌 것이 당시 남군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해서 상당수의 병사들이 맨발로 이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식량도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아 펜실베이니아로 진입한 남군이 처음으로 한 일이 약탈이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가축을 빼앗았다.
[15]
북군과 남군 모두 샤프슈터{Sharpshooter}라 불리는 저격병을 운용했으며 1년 뒤
존 세지윅 역시 남군 저격병에 의해 희생당한다.
[16]
영화 게티즈버그에서는 트림블 소장(원래 스톤월 잭슨의 사단장이었으나 부상으로 회복중 급하게 합류해서 휘하 병력이 없었다)이 이월에게 처음에는
사단, 두번째는
여단, 세번째는
연대 하나만 주면 비어있는 저 언덕을 점령하겠다고 했지만 이월이 그냥 보고만 있었다며 개빡쳐서 이월 앞에 칼을 내던지고 리에게 이런 인간과는 같이 못 있겠으니 전출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원작소설)에서 좀 각색하긴 했지만 트림블이 이월에게 언덕 점령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 열받아서 칼을 내던졌다는 것은 실화이다.
[17]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이후 요양하다가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남군 테네시군의 사령관이 되지만 북군의 셔먼과 스코필드, 토머스에게 차례로 대패하고 야전군 하나를 말아먹는다. 미국내의 최대 육군기지인 텍사스의
포트 후드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
[18]
시클스가 지킬 수 없는 곳까지 전진하여 방어를 펼치는 바람에 미드는 전략적 예비군을 시클스에게 보내야만 했다.
[19]
결국 후드는 이 상처의 후유증으로 인해 부상당한 왼팔을 절단해야 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오른쪽 다리마저 잃는다.
[20]
그는 전투를 개시하면서 "착검하라! 용감한 텍사스인들이여! 전진하라, 그리고 저 고지를 빼앗아라!"라고 외쳤다. 그가 의도한 고지가 어딘지도 불분명하다.
[21]
후드는 용맹하기는 했지만, 이 때 겨우 30대 초반이었고 일개 중대장이면 모를까 그 이상 그릇은 솔직히 아니었다. 실제로 나중에 서부전선으로 가서 야전군 사령관을 하다가 무모한 공세로 서부전역의 남군 병력 대다수를 까먹는다.
[22]
한편 후드의 전선 이탈 이후 후드의 사단을 지휘했어야 했던 로 여단장은 자신이 사단을 지휘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23]
연대장이었던 체임벌린 대령부터 연대의 휘하 장병들이 메인 주 출신이며 정규군 경력을 가진 장병들은 극소수였다고 한다. 체임벌린 대령 자신도 본래 직업은 대학 교수였고 전쟁으로 본인이 군 입대를 자원했지만 남북전쟁이 개전되고 병력이 급팽창하면서 장교가 극심히 부족했던 현상에서 생긴 고육지책의 장교 임용이었다. 또한 1900년대 초 미국 내의 민병대, 비정규군의 정규군화가 진행되기까지 미국이 벌인 전쟁에서 이런 형식의 의용병과 부대들이 많았다. 체임벌린 대령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리틀 라운드 탑 고지의 공적으로
명예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전시계급으로 소장까지 진급하고 퇴역했다.
[24]
계속되는 공세로 북군이 지치긴 했지만, 남군 역시 지쳤을 것이란 체임벌린 대령의 자체적인 판단에서 시도했다.
[25]
이 부분은 영화 《게티즈버그》에서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참고
[26]
위의 전투 상황도에서도 묘사됐듯이 만약 체임벌린의 연대가 리틀 라운드 탑을 사수하지 못하고 함락됐다면 미드의 북군이 그대로 남군에게 등 뒤를 드러내는 위험한 상황이 되어 버린다. 앞의 각주에 링크된 동영상에서도 체임벌린 대령이 설명하지만 고지의 사수는 북군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임무였다. 체임벌린의 메인 의용대가 뚫려버리면 북군 전체가 몰살당할 수 있는 절대절명의 상황이었고 그래서 목숨을 걸어서라도 고지의 사수는 절대적이었다. 이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 하면 리틀 라운드 탑 방어를 맡고 있던 북군 5군단 1사단 3여단장이었던 스트롱 빈센트 대령이 지휘 중 입은 부상으로 끝내 전사했다. 북군은 총 2996명을 투입하여 134명 전사 + 402명 부상 + 29명 실종 = 565명의 손실을 보았고 남군은 총 4864명을 투입하여 279명 전사 + 868명 부상 + 219명 실종으로 전체 투입 병력의 28%라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27]
롱스트리트는 끝까지 이 돌격명령에 반대했기 때문에, 말로 돌격명령을 꺼내지도 못하고 부하가 전진하냐고 물어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28]
원 지휘관인 펜더는 전날 중상을 입어 지휘가 불가능했고, 결국 2주 후 사망했다.
[29]
역시 히스가 지휘하고 있었지만, 전투 첫날 머리에 총상을 당해 의식불명 상태였다.
[30]
하지만 전체적인 책임은 리 장군에게 있었고, 피켓은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리 장군을 증오하였다.
[31]
특히 좌우의 두 지역은 전날 남군이 점령하지 못했거나 도로 빼앗긴 곳이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32]
전날 정오 쯤에 복귀하였으나, 두번째 날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33]
열흘 후 버지니아로 퇴각하는 작전 중 추격하던 북군 기병대에 맞서 보병대를 독려하다 복부에 총을 맞고 전사.
[34]
한 명(리처드 브룩 가넷 준장)은 전장에서 즉사, 다른 한명(
루이스 아미스테드)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됐으나, 이틀 후 사망했다. 여담으로 피켓의 돌격 정면에 있던 2군단장 윈필드 스콧 행콕 소장은 아미스테드 준장과 절친이었다. 핸콕 소장은 피켓의 돌격을 대응하는 과정에서 부상당했다. 영화 게티즈버그에서 아미스테드가 북군 병사들에게 포로로 잡힌 후 이 소식을 듣고 '우리 둘 다 죽으면 안된다. 제발 신이시여' 라며 절규하는 장면은 남북전쟁의 아픔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35]
사실 그랜트를 제외한 북군 지휘관들은 다 미드와 성향이 비슷했다. 당시 로버트 E. 리 장군의 신출귀몰한 기동에 몇 번이나 속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를 했음에도 승리한 건지 완전한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36]
더욱이 이 게티즈버그 전투를 통해 탄력을 얻은 북군이 매서운 기세로 반격해 들어가면서부터 남군의 전력손실 또한 커지기 시작했다.
[37]
이미 북군이 상당수의 남부 주요 요충지를 장악해 나가던 상황이고
빅스버그 포위전까지 진행되고 있던 실정이어서 가시적인 효과를 내고 있던 북군과는 달리 남군은 전쟁 초반에 있었던 몇몇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결정타를 날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던 탓에 연방측을 절망적인 입장으로 몰 수 있을만한 성과가 없었다.
[38]
아메리카 연합국의 수장인
제퍼슨 데이비스는 한 나라의 수장으로는 자격미달인 데다 반대파도 포용하고 기용한 적이 있던 링컨과 비교해서 인격적으로도 낫다고 보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리의 북진 전략에 결국 동의하고 리에게 병력까지 증원해 준 만큼 전체적인 책임은 데이비스보다는 리에게 있다.
[39]
이후 리는 북군에게 쫓기는 입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 측근들마저 잃는 비극까지 겪었다. 이미
스톤월 잭슨을 잃은 리는 갑작스런 롱스트리트의 전장에서의 이탈, 스튜어트의 전사 등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40]
오히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가 병력 규모 자체는 가장 거대한 규모였다.
[41]
그 이유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귀중한 항모 4척과 함께 유기적으로 구성되었던 전단 대부분을 상실했고 이는 일본군이 태평양 해전에서 패하는데 중요한 이유로 부각된다.
[42]
미드웨이에서 고속 정규항공모함과 항공기와 함께 숙련된 파일럿과 승무원, 정비요원, 함상 운용요원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단을 상실한 결과 미드웨이 전투 후에 일본군은 효율적인 항모전단을 더 이상 꾸리기 어려워지면서 태평양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후로 태평양 전쟁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굵직한 전투는 전부 동남아 부근에서나 벌어지게 되고 미국 본토가 타격받을 잃은 하와이를 포함해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만약 하와이를 공격받게 되었다면 설령 하와이가 점령당할 일은 없었겠지만 미국 본토가 공격받았다는 그 자체가 충격이 되어 전투 의지가 꺾여 일본 제국의 의도대로 협상을 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43]
다만 어차피 하와이 자체는 태평양 한가운데 있어서 그다지 충격을 줄 만한 위치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또 하와이는 이미 미군이 완전 요새화해놓은 곳이라 일본군의 전력으로 점령은 절대 불가능한 거나 다름없었다. 일본군이 미국 서해안에 닿았다면 모를까. 실제로 미 해군이 미드웨이에서 전멸이라도 했다면 굳이 하와이를 경유하지 않아도 미 서해안이 목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고(물론 일본군의 전력으로는 상륙은 어림도 없고 땅만 찍고 돌아왔을 테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상 정치적으로 미국은 패배한 거나 다름없었다.
[44]
여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너나할것 없이 새가슴들이었다는게 문제였다. 북군의 지휘관들은 묘하게도 하나같이 남군의 병력이 자신들보다 압도적인 우세를 가졌다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선공을 거는 것에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곧이어 서술된 예시에서도 보는 사실이지만 분명히 북군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속임수 내지는 남군의 양동작전이라 여겨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지 않았고 이때문에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복무했던 사령관들이 그대로 이 전쟁에서 활약했고, 군 경력이 탄탄했던 장교들의 상당수가 남부 출신들이라 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고향을 택해 연방을 등졌으며 사령관의 수나 자질이 부족했던 북군의 피해는 상당했다.
[45]
실제로 당시에 남부연방 부통령인 알렉산더 스티븐즈(Alexander Stephens)가 연방측으로 협상을 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남부연방은 원래 리가 게티즈버그에서 승전하여 워싱턴 쪽으로 접근하는 동안 스티븐즈가 도착하여 우세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기를 바랐겠지만, 게티즈버그 전투에서의 승전 소식을 들은 링컨은 스티븐즈가 전선을 통과하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46]
배틀그라운드 시리즈는 주로
남북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주요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게티즈버그 전투 외에
앤티텀 전투, 불 런 전투(1, 2차 전투를 한 패키지에 같이 수록), 서부전역의 샤일로 전투와 치카무가 전투도 게임으로 발매되었다. 단 시리즈 첫 작품은
2차대전의
아르덴 공세가 배경. 현재 남북전쟁 시리즈와 나폴레옹 전쟁 시리즈는 매트릭스 게임즈에서 판권을 이어받아 묶음으로 판매 중이다.
[47]
너무 길어 중간에 인터미션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어벤져스: 엔드게임도 고작 3시간 2분이었다.
[48]
1989~1996년까지 있던 영화사로 바로
테드 터너가 세운 영화사.
[49]
전술했듯, 적은 보수와 숙식만 제공했음에도 남북전쟁 시기 남군 육군 피복과 장비를 자비로 갖추고 무리지어 자원한
리인액터들이 대부분이었다.
[50]
다만 마틴 신은 이들 엑스트라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했고 또,
맡은 역할이 역할이기도 해서 그런 것이다.
[51]
게티즈버그에선 엉뚱한데서 헤매다 와서 질책만 들은 젭 스튜어트와 이미 고인이 되어 대사로만 언급되는 스톤월 잭슨의 활약을 볼 수 있다.
[52]
화이트 리그라는 백인 우월주의 준군사 무장 단체로 구남군병사들로 구성된 병력이 8,000명 이상이나 되었다. 이중 5,000명이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공화당원 켈로그의 해임을 요구하며 의사당과 시청을 점거했다. 롱스트리트는 켈로그의 요청으로 시위대와 협상하러 나갔다가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으며 루이지애나 주 경찰과 흑인 민병대로 구성된 3,500명을 지휘해 이들과 전투를 벌여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최종적으로는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이 군대를 보내자 철수하고 해산했다. 어쨌든 롱스트리트가 북부지지 발언을 하는데 그쳤다면 그저 승자인 북부에 아부하는 걸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나, 아무리 그래도 백인우월주의자들과 전투를 벌이는건 아부쟁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므로 현대 역사학자들은 제임스 롱스트리트가 적극적인 노예제 반대론자가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남부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아 미국 남부 도시들에 수없이 세워진 다른 남군 장군들 동상들과는 달리 롱스트리트의 동상은 북부인 게티즈버그에 세워진 것을 제외하면 단 한 개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