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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0:24:15

에이브러햄 링컨/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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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판과 반론3. 나바호족 탄압 논란과 반론4. 용인술5. 전시 지도자6. 링컨에 대한 말말말

1. 개요

링컨은 노예 해방과 통합된 미국을 만들었다는 업적 덕분에 오늘날에도 대중적인 인지도와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다. 정치학자나 역사학자 등의 전문가들도 링컨에 대해 상당히 후한 평가를 내린다. 역대 대통령 평가나 인기도에서도 언제나 최상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아무리 못해도 탑3 안엔 대부분 든다.[1] # 임기 중에는 시대적 한계와 맞물려, 비슷하게 고평가받는 다른 두 대통령과 달리[2] 정치적으로 꽤나 험난한 위치에 있었지만[3], 그 상황이 링컨을 더 고뇌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기도 한다.

러시모어 산에 얼굴이 새겨진 4명의 대통령 중 한명이기도 한데, 흑인을 해방하고 분열된 미국을 통합한 공로로 인해 미 연방의 보존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렇듯 미국에선 상당히 강력한 까방권의 소유자. 허나 정작 살아생전엔 못생긴 외모로 고릴라를 닮았다는(...) 반대파들의 인신공격도 많이 당했고, 낙선 등 정치적 실패도 많이 겪는 다사다난했던 삶을 산 것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 노예제 해방이라는 업적 덕에 마틴 루터 킹이나 버락 오바마와 같은 흑인 인사들에게 자주 언급되는 대통령이기도 하다.[4]

특히 버락 오바마의 경우 공식 출마 선언 장소부터 링컨이 '갈라진 집' 연설을 한 장소인 스프링필드주 청사 광장으로 정하여 링컨의 신념을 언급하거나, 당선되자마자 링컨의 취임식 기차여행을 오마쥬하여 본인 역시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입성하는 등 링컨을 상당히 의식하는 편이었다. 심지어는 링컨이 대통령 취임선서에 사용한 성경을 그대로 가져다가 본인 취임선서에도 사용했을 정도.[5] 선임 대통령 링컨이 서명한 노예 해방법안이 146년 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나비효과를 낳은 셈이니 오바마에게 있어선 의미가 남다른 인물일 듯.

그가 남긴 게티즈버그 연설은 지금도 인용되는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 분열된 미국을 남북전쟁으로 통합하여 본격적인 하나의 미국을 만들었으며, 흑인노예해방을 선언해 사실상 현대적 의미의 통합된 나라 미국을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 또 피를 보긴 했지만 북부의 승리로 나라가 통합된지라 제퍼슨, 해밀턴 시기부터 이어져오던 반연방주의와 연방주의의 미묘한 구도가[6] 일시적으로 해소되고 한단계 더 나아가는 담론의 계기를 마련했다. 덕분에 오늘날의 미국은 일부 주에서 연방 탈퇴 드립을 쳐도 대다수가 드립성 발언 정도로 생각하는 것처럼, 반연방주의와 연방주의자들 모두가 원칙적으론 연방의 필요성에 대해선 공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정치인 링컨은 말 뒤집기를 잘했다고 한다. 다만, 이런 사실을 내세워 링컨을 '말 잘 뒤집는 닳고 닳은 정치가'라는 이미지로 포장하려는 시도는 어린이용 위인전 등에서 도덕과 정직의 화신마냥 표현되던 링컨의 기존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에 가깝다. 물론 말 뒤집기가 잘했다는 소린 아니고 일관성이 없다고 깔 수도 있지만, 당대 현실을 감안하면 본인 신념을 잠시 접어두면서까지 현실과 타협할 줄도 아는 정치인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7] 사회적 변화를 이뤄낸 웅장한 꿈을 품고도 현실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 인류 역사의 많은 이상가들과 다르게, 링컨은 현실과 적절히 타협해가며 뜻을 이룬 이상가였던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카를 마르크스도 '다른 사람들이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념을 위해 싸운다고 말할 때, 링컨은 이념을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고 평한 바 있다.[8] #

링컨은 해외에서도 유명한 대통령으로, 한국인들도 아는 경우가 대다수다.[9] 예를 들어 예능 식스센스 1에서 이미주, 전소민, 이상엽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이라는 질문에 답했는데, 이 중 2명이 링컨이라고 답했을 정도로[10] '링컨=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퍼져있다.

2. 비판과 반론


현대 자유지상주의를 대표하는 론 폴의 견해를 기반으로 만든 론 폴 vs 링컨 영상.

다만 이 동영상은 전제부터가 틀렸다. 전 하원의원 론 폴은 링컨이 "몇몇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전쟁을 시작했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Lost Cause Myth(남부연맹의 미신)으로, 전쟁은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의 요새인 섬터요새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론 폴은 기본적으로 정치인이지 역사학자가 아니며, 그 반란 전쟁(The War of the Rebellion)[11]이 노예제가 아니라 관세 문제 때문에 터졌다고, 지속적으로 현대 역사학자들에게 논파당한 남부연맹의 미신을 계속 주장하고 있으므로, 론 폴의 남북전쟁 관련 말들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구 남부연방 지역 출신들에게는 남북전쟁으로 과거 자신들의 생활영토를 깡그리 파괴했던 인물인 까닭에, 종종 악당으로 부당하게 비난받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이 먼저 전쟁을 시작한 반란군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다지 논리적이지 못한 비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정작 남부군도 미국 세력권에 들어와서 동일하거나 비슷한 수준의 파괴 및 약탈행위를 자행했고, 구 남부연맹 혹은 아메리카 연합국이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조차도 남부연맹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남부연맹 정부를 압제자라 여겼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제대로 된 비판조차 아니다.

또다른 부당한 비판은 헌법으로 보장된 남부 노예주들의 자치권[12]을 무시하고, 남부 노예주들의 노예해방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링컨과 공화당은 1860년 대선에서 남부주의 자치권을 무시하고, 노예제를 남부에서 폐지하겠다고 공약한 적이 없다. 링컨과 공화당은 1860년 대선에서 단지 연방정부가 관할하던 서부[13]의 광활한 연방영토에서만 노예제를 금지시키겠다고 공약했을 뿐이다. 링컨과 공화당은 노예제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노예제가 서서히 없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보았고, 이것은 노예제를 지지하는 측도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주의 자치권을 침해하지 않는 법안조차도 남부 노예주들은 극렬하게 반대했다.[14]

1860년 링컨과 공화당은 헌법으로 보장된 각 주의 (노예제를 포함하는) 자치권을 침해할 의사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자치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고 밝혔다. 이는 링컨을 비롯한 공화당 중도파 인물들, 특히 미국법을 잘 이해하는 변호사들이 헌법으로 정해진 주의 자치권은 침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공화당의 기반인 북부 자유주들의 큰 불만사항 중 하나가 연방정부의 노예탈주방지법에 따라서 자유주의 시민이 노예제에 반대하거나 노예제에 관심이 없어도 연방법에 따라서 연방영장을 연방요원과 노예사냥꾼들에게 (무보수) 협력을 강요당하고, 자유주의 시민이 조금이라도 흑인 피가 섞였다는 것이 의심이 된다면 제대로 된 재판(due process)이 없이 탈주노예로 취급당해 남부로 끌려가는 등, 연방정부를 내세워 북부 자유주들의 자치권을 짓밟는 남부 노예주들의 횡포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노예주들은 노예제 사수를 위해서면, 헌법으로 보장된 자유주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링컨이 이에 관해 비판을 받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노예주들은 노예제 사수가 가장 우선이였으며, 연방정부, 주 자치권 침해, 연방법원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그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연방 탈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뿐이다.

일부에선 결국 내분과 전쟁이라는 국가 초유의 사태로 치닫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역시 부당한 비난이다. 정작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비롯해서 남부 노예주들이 연방을 탈퇴해서 반란에 합류하기 시작했을 때 링컨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욕은 뷰캐넌이 먹어야 하는데, 그나마 뷰캐넌은 레임덕 상황이였으며, 그 뷰캐넌조차도 참아준 것에 불과하며[15], 섬터(Sumter) 요새가 공격당하자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했다. 게다가 링컨과 공화당은 선거 공약이었던 서부의 연방영토[16] 노예제 폐지를 제외한 여러가지 절충안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Corwin Amendment(코윈 헌법)[17]으로 수정헌법의 골자는 연방정부가 각 주의 고유 제도(=노예제)에 대해서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는데, 남부 노예주는 Dred Scott 판결에서 나온 것처럼 연방영토내 노예제 완전 합법화가 최소 협상조건이었고, 이게 대선 공약으로 국민(자유주)의 선택을 받은 공화당은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또 링컨이 남북전쟁 당시 했던 일들을 부당하게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기소나 고발없이 사람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Habeas Corpus(인신 보호 영장)라는 제도를 정지시키는 것은 오직 의회만 할 수 있었음에도 링컨은 이것을 의회의 동의 없이 시행하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두고 Ex parte Merryman이라 불리는 재판에서 대통령이 Habeas Corpus을 정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링컨은 그것도 무시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당시 상황과 미국 법을 완전히 무시한 주장이다. 첫번째, 미국 헌법에는 반란(Rebellion) 혹은 침략(Invasion)등으로 인해 공공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험에 처했을 때는 예외적으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했으며[18], 두번째 당시 워싱턴 D.C가 있던 메릴랜드에서 친 남부연맹 폭동 및 소요사태가 일어나서 당시 휴정상태였던 의회로서는 국회의원들을 소집하여 워싱턴 D.C 의회로 가기에는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 정부에서 인신 보호 영장을 중지시킬 필요성이 있었다.[19] 세번째 링컨은 대통령으로 의회의 선언 없이 이미 '전쟁(반란)이 일어난 상태'이므로 대통령의 헌법 권한으로써 전쟁시에는 필요에 따라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킬수 있다. 네번째 정작 미국 의회는 간접적으로[20] 혹은 직접적[21]으로 링컨을 옹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작 당사자인 메릴랜드 주지사는 이를 쌍수들고 환영했다. "저는 그 체포들을 환영했었고 지금도 환영하고 있습니다. 정부에게 가진 유일한 불만사항은 이 체포된 자들을 감옥에서 내보내준 것이죠."[22]

또한 링컨에게 부정적인 메릴랜드 주의 언론을 탄압하고 폐간한 것 역시 언론의 자유를 크게 침해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받는데, 이 역시 위의 전시상황을 고려하면 부당하다고 볼 수가 있다. 체포된 언론인들은 대부분 대놓고 남부연맹편을 든 적성 언론들이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링컨을 노예해방을 지지하고 그것을 이루어낸 성자라고 추앙한다. 링컨이 암살되면서 미국연합을 지키기 위한 순교자화 되며, 일각에서 성역화된 것도 사실이다. 허나 사실 링컨은 살아있는 시절, 죽을 때까지 엄청나게 욕을 얻어먹었다. 당시 기준 북부 급진 폐지주의자, 친남부파 양쪽에서 다 욕을 먹었는데, 폐지주의자 측에서는 온건파 컨셉의 링컨이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욕 얻어먹었고 남부 유화파 측에서는 노예제 괜히 건든다고 욕 먹었다. 전쟁에 관해서는 한 쪽에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파를 탄압하지 않고, 무능함으로 전쟁을 말아먹는다고 욕 얻어 먹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전쟁 때문에 대통령 권한을 너무 늘리고 무능한 주제에, 쓸데없는 전쟁을 계속 한다고 욕 얻어 먹었다. 미국이 전투에 한 번 패배할 때마다 언론들은 내일 당장 워싱턴 D.C가 함락당할 것 처럼 떠들어 댔고, 금방 끝날줄 알았던 전쟁이 지속되자 군중들은 불안에 떨고 링컨을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에 대한 결과로 노예해방이 슬슬 현실화될 것 같으니 사회 밑바닥 계층 이민자 백인들(특히 아일랜드인들)은 노예해방으로 해방 흑인들과 일자리를 가지고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될지도 모르니 이것에 대한 반발 또한 대단했다. 이렇게 사방에서 폭격을 맞으면서도 링컨은 노예제 폐지라는 개인적인 신념과 연방을 지켜야 한다는 대통령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해서 매우 부단히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링컨이 암살되는 시점에는 전쟁이 사실상 미연방의 승리로 종결되고 있었고, 링컨이 노예해방 수정헌법 13조를 밀어붙여 상원과 하원에 모두 통과되어 다 판을 짜놓고 각 주가 비준할 것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링컨은 실질적으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 되었다. 이 때문에 죽기 직전 링컨에 대한 지지는 매우 높았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암살당하는 통에 연합을 구한 영웅, 노예제를 위해 순교한 성인으로 미화가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링컨은 내전 이후 임기가 몇 년 남았기에, 지저분한 내전 뒷처리를 해야 했는데 정작 링컨은 암살당하는 통에 내전 승리에 대한 찬사만 받고, 뒷처리에 대한 욕은 부통령이자 후임인 앤드루 존슨이 다 먹게 된다.[23]

링컨은 노예주 처리에 우물쭈물한 측면이 있다? 일단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공화당 내에서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대선 공약이였던 연방영토에서 노예제 폐지를 양보해야 하지 않냐는 이야기가 나올때도 링컨은 단호하게 유권자들과 약속이라며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링컨은 전쟁 중에도 헌법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고, 노예제는 각 주의 자치권에 맡겨야 하며, 연방정부가 이를 침해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것에 기본적으로 동의했다. 또한 노예제를 유지하던 경계선 주들(border states)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어디까지나 전쟁은 연합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링컨의 노예해방도 어디까지 제한적이고, 합법적이고 미국연합을 위해서 이뤄졌다. 실제로 노예 해방은 탈주 노예들의 전시 약탈품 혹은 노획품으로 취급으로 시작되었다. 노예해방선언 또한 대통령의 전시권한에 불과 했으며, 반란 상태인 남부 노예주들에 대해서만 적용되었으며 그나마도 연합에 협력적인 노예주들의 노예들은 노예해방에서 제외되었다. 이때문에 일부 노예 주인들은 미국정부에 충성해서 자신들의 자산인 노예를 지키기 위해 연방군에 입대해 싸우던 중이었다. 실제로 테네시같은 노예주에서는 한 쪽에서는 노예 경매가 다른 한 쪽에서는 탈주 노예들의 미군 입대가 동시에 이뤄지던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링컨은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노예제 폐지를 위해서 노력했으며, 원래는 계획에 없던 전쟁이 터지자 연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묘하게 노예제 폐지를 밀어붙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노예제 폐지만 외친 것이 아니라, 보상을 통한 주의 자발적인 노예제 폐지[24]를 시도하기도 하고, 해방노예들과 자유흑인들을 남아메리카에 보내는 것도 시도하였다. 그러면서 미국 대중들의 찬성율이 그닥 높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흑인의 입대를 허락할 뿐만 아니라 장려하고[25], 수정헌법 13조를 하원에서 통과시키기 위해서 온갖 술수를 다 썼으며[26] 말년에는 흑인 참정권을 옹호하기 시작한다. 링컨은 노예제 처리에 우물쭈물했다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맞게 노예제 폐지를 진행시켰으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 없는 상황에서도 기회가 있으면 노예제 페지를 더 빨리 진행시킬수 있도록 노력했다.

심지어 의원 선거 시절엔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라는 말을 하다가도 1860년 대선 등에선 백인과 흑인은 평등하지 않고 흑인의 참정권이나 공직권을 주지 않겠다고 말하며 오락가락하기도 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당시 다양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란 의견도 있다. 노예제 반대와 흑인 참정권 혹은 공직권은 전혀 다른 주제다. 노예제 페지론자들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는데, 흑인도 백인과 동등하니 노예 해방을 하고 흑인에게도 참정권을 주자는 입장은 극소수로 당시엔 극단주의자 소리 듣기 십상이었다. 다수 공화당 지지자들의 입장은 멕시코에게 빼앗은 서부 연방영토는 가난한 백인 자영농에게 돌아가야 하며, 값싼 흑인 노예를 대거 들여와 불공정한 경쟁을 유발하는 노예제는 서부 연방영토에서 금지되어야 한다 이 정도였고, 링컨이나 일부 정치인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도덕적인 이유로 노예제는 결국 궁극적으로 폐지되어야 하나 헌법적으로 노예에 대한 자치권이 각 주에 보장되어 있으므로 직접 노예주에 대해서 각 주에 간섭을 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하되, 노예제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노예제가 장기적으로 상업적인 가치가 없게 만들어 노예주들이 자발적으로 노예해방을 할 수 밖에 없이 만든다 정도였다. 또 다른 극단에는 흑인은 쓰레기 인종이므로 같은 대륙에 살수가 없으니 빨리 노예제를 폐지하고 노예들을 죽이던가 다시 아프리카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다른 파벌로는 노예제 회의파[27]는 노예제로 인해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이 노동을 혐오하게 되고, 같은 인간인 노예들을 인간이 아니라 자산으로 취급하므로써 백인 농장주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특히, 흑인들은 노예제로 아메리카에 와서 더 나은 삶을 살면서 인구수를 늘렸기 때문에 흑인이 백인의 인구를 넘어서 백인들이 노예 반란 및 폭동에 노출되게 되었다. 즉, 백인들은 흑인 노예제로 이렇게 피해를 보고 있으니 장기적으로 노예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게 옳으나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미래 세대에게 맡기자, 사실상 노예제를 계속 존속시키자고 주장했다.[28][29]

애초에 링컨이 이렇게 비판을 많이 듣게 된 이유는 노예를 해방한다통일 연방을 유지한다라는, 당시로서는 크게 상충되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았기 때문이다. 연방주의를 좀더 중요시하는 입장은 왜 미국을 분열시켰냐?고 욕하고 이 때문에 차별주의자들까지 어르고 달래가며 전쟁을 수행하고 최대한 갈등을 봉합하려 애쓰던 링컨보고 흑인 인권을 중요시하던 이들은 노예해방에 진정성이 있는 건 맞냐?고 욕하기 때문. 하지만 링컨이 지금까지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받는 것은 통일연방&노예해방이라는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았기 때문. 그러기 위해서 링컨의 말은 표면적으로 보면 오락가락했고 교묘하게 법적언어로 진의를 숨겨놓은 경우도 있었으며 흑인 민권 운동가들에게 현재 기준으로는 상당히 차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말들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링컨이 성취해내려고 했던 것은, 이 두 가지의 당시로서는 양립 불가능해보이는 외줄타기를 완수해내는 것이었고, 결국 온 정치인생을 베팅해 성공시켜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다. 즉, 비판받는 부분들마저도 링컨이 당시로서는 양립시키기 어려운 과제 둘을 해내기 위해 아등바등댄 결과라고 생각하면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만약, 조금 더 급진적인 발언을 했더라면 미국의 분열이 심화되었을 것이며 정치적 동력을 잃어 분열은 분열대로 되고 노예제 폐지도 지지부진해질 수 있었고, 그렇다고 연방을 유지한답시고 남부 말을 무작정 들어줬으면 노예 해방이 날아갔을 테고 아마 지금의 링컨 평가보다는 훨씬 낮았을 것이다.

지금에야, "와, 수정헌법 13조 대단해! 역시 대단한 미국!"이라고 현재 미국인들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이지만 당시에는 노예제 폐지가 절대 당연한 일도 아니었고 실질적인 노예해방선언인 그것을 통과시키기위해서 2/3의 의회의 동의를 받아야했으며 이를 위해 미친듯이 물밑작업을 들어가고 링컨의 총 정치력을 동원해야했을 정도로 힘겨운 작업이었다는 것을 고려해야한다. 즉, 바로 그 비판점들(현실과 타협해가며 흩어진 여론을 모아가며 궁극적으로는 개혁을 밀어붙여 성공시킨 것.)이야말로 링컨의 성공요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는 말.

결론적으로만 보면 노예해방선언이 통과되고 나서는 이것이 결국 남북전쟁의 명분작을 완성함으로서 남부의 외교줄을 끊어놓았고 북부군의 사기도 진작시켜서 오히려 연방 재통일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호재가 되어 더이상 두 마리 토끼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통과되고 나니까 쉬워보이는거지, 통과되기까지는 링컨의 물밑노력과 지분이 지대했고 당대 노예들을 재산으로 보며 그것을 마음대로 없앤다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차별주의자들/자유지상주의자들과 줄타기를 해가며 거기까지 끌고간 링컨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튼 이렇기 때문에 정작 링컨 본인은 집권기 동안은 양쪽으로부터 정치적 부담을 감수해야 했고, 지지율도 아슬아슬했다. 암살 직전에는 전쟁 승리로 인해 지지율이 탄탄해져 있었지만,[30] 전후 처리 및 남부 재건 문제로 인해 링컨은 다시 급진파와 보수파 양쪽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링컨은 이미 1864년 공화당 급진파의 재건 법안인 웨이드-데이비스 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여 급진파와 대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건 문제가 본격화되기 직전에 암살당하고 미국의 위인이 되었다.

3. 나바호족 탄압 논란과 반론

링컨은 1864년 북부군의 반대파인 나바호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하여(Long Walk of the Navajo) 상당수 나바호족 노약자와 아동들을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하게 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다만, 이에 대해선 이 시기가 남북 전쟁 기간과 겹친다는 점을 고려해볼 필요는 있다. 과거 링컨은 젊은 시절 소크족이라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 대한 토벌전에 참전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소크족들을 포함한 원주민들을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항복 문서를 들고 오려다가 미군[31] 병사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 소크족 사람을 구해낸 전적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인종차별적인 생각에 이런 짓을 저지른 건 아니었을 것이다.

실상은 문명화된 다섯 부족 문서에도 볼 수 있듯이,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사람인지라 꼭 북부 지지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관계로 남북 전쟁 당시에 남부연맹 편을 들던 부족들도 있었으며[32], 노예 제도에 대해 반대하거나 최소한 관망하는 입장이던 부족들도 자기들 이해관계에 따라 남군이나 북군에 가담해서 싸우기도 했는데, 나바호족은 자기들 영토가 미국의 남부에 있었으므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남부연맹 편에 붙었다가 링컨의 북군에게 진압된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 백인들도 남부에 가담했다간 철저히 보복해 부숴버리는 판국에[33], 부족 전체가 통째로 연방 정부에 개기는 상황을 내버려둘 순 없었던 것이다. 원래 어느 나라의 국가원수들이든지 상식이 있다면 대놓고 정부를 상대로 반기를 드는 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특히 전시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이런 행위를 내버려두다가는 대놓고 적전 탈영하는 자들이 속출하게 되어 국가 체제가 뿌리 째로 흔들리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반란 세력을 놔둘 수 없는 것이다. 나바호족은 예나 지금이나 미국 내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서 인구 수와 경제력 면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이들이므로, 그들이 남부연맹과 손잡으려고 한 것은 분명히 심각한 안보 상의 위협으로 여겨질 만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사실 일반적인 인종청소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애초에 여전히 단발총과 기병대, 창칼 등으로 싸워대는 현대 이전의 전쟁에서[34] 대놓고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벌인 전쟁이 아닐 바에야[35] 부족 단위로 추방시키고 쓸어내는 것에 무조건적인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긴 어려웠다. 가령, 한국사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만 해도 예방전쟁을 이유로 국경 인근의 여진족 부락을 도륙내버리고 농지까지 싹 뒤엎는 학살극을 벌인 바 있는데, 이게 지금으로 치면 적의 전력을 미리 박살내놓는 전략폭격인 셈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민간인 마을에 무기고 설치하고 현지 주민들을 징집한 뒤에 지휘관 몇 명을 임명해놓기만 해도 즉석에서 조잡하게나마 군사기지 하나가 뚝딱 만들어지는 식이니[36], 이 시기에도 훗날의 커티스 르메이 말마따나 무고한 민간인은 없는 셈이었다. 그러니 죄없는 원주민들 척살하기 싫다고 남부연맹에 그들이 가입하도록 냅두는 것은 눈 앞에 다가온 노예 해방의 대업을 뿌리째 말아먹을 수도 있는 송양지인인 셈이니, 상술한대로 정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던 링컨이 이를 이해하지 못했을 리도 없다.

4. 용인술

링컨의 내각은 윌리엄 H. 수어드 국무장관[37], 샐먼 체이스 재무장관, 에드윈 스탠턴 전쟁장관 등 능력있고 자존심 가득한 인사들로 채워졌는데, 수어드는 사실상 공화당 창당에 1등 공신이었던 사람이라 경선때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국무장관직도 자신이 촌뜨기 링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락한 것인데 링컨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또 다른 경선 라이벌인 체이스 역시 입각 전후로 자신이 링컨보다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댔고 민주당원인 스탠턴은 사사건건 링컨에 대해 "비천하고 교활한 촌뜨기", "빼빼 마른 무식한 놈" 같은 악언을 퍼부어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입각한 후 하나같이 전시국가 운영에 있어서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게 된다.[38] 사이먼 캐머런 전쟁장관처럼 무능한 관료를 교체할 때에도 그와 그의 계파가 불만을 가지지 않도록 러시아 대사 자리를 준비하여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도록 했다.

링컨은 단순히 관용으로만 이들을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일에서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으며 휘하 각료들에게 링컨 자신이 보스임을 각인시켰다. 임기 초 수어드의 흔들기나 체이스의 타 부서 안건 참견, 조지 매클레런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다수 각료들의 서명을 링컨에게 들이댄 스탠턴 등에게 단호하게 대처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고, 많은 각료들은 오히려 그러한 링컨의 모습을 보고 링컨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 강한 각료들을 대할 때 언제나 유머러스하고 신사적으로 대했다. 각료들의 의견을 거스를 때는 그들이 부재중인 기간에 해당 안건을 슬쩍 처리하거나 아예 명령서에 어떤 반론의 여지도 없는 워딩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장관들과 척지지 않으면서 그들을 성공적으로 제어했다. 장관직이나 연방군의 고위 장교 자리 등을 미끼로 정치적 반대파들을 정부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도록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2005년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는 작가 도리스 컨스 굿윈은 링컨의 대통령 재임기간에 대한 역사서인 권력의 조건(Team of Rivals)을 출판했는데, 당내 정적들을 내각에 포함시킨 점 등을 부각해 링컨의 관용적인 리더십을 재조명한 책으로 꽤나 인기를 끌었다.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민주당 예비후보 시절 탐독한 책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실제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가 된 후 대통령까지 거머쥐자 미국 내에서 이 책을 너도 나도 사느라 동이 났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바마는 이 책에 나와있는 링컨의 용인술을 실제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힐러리 클린턴의 국무장관 기용,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의 유임 등이 그것이다. 힐러리 클린턴도 오바마의 최대 경쟁자였고, 로버트 게이츠는 전임정부인 부시 행정부 때부터 국방장관을 역임해 왔다. 실제로 오바마는 자신이 가장 본받고 싶은 대통령 롤모델로 링컨을 꼽은 바 있다.[39]

5. 전시 지도자

노예제 문제나 연방의 보존 등 가치 판단의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단순히 큰 전쟁을 치르는 나라를 이끈 전시 지도자의 역량 측면에서 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평가된다.

링컨은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대규모 전쟁 시기에 미국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인물이었다. 링컨은 참고할 만한 선례 없이 민병대 소집 및 징병, 연방군 조직 대확대, 전시 예산 편성, 계엄령 등 전시 정책들을 집행하고 성공시켰다. 후대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조지 W. 부시 등 전시 대통령들은 링컨의 사례를 참조할 수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은 조지 매클렐런, 헨리 할렉 등 연방의 최고위 장군들보다도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대전략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링컨은 전쟁의 목표인 연방의 재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영토를 회복하는 것보다도 남부연합군의 주전력을 격파하여 전쟁 의지 및 수행능력을 상실시켜야 한다는 것을 전쟁 초기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동부전선의 총책임자 매클레런이나 서부전선의 할렉 등 많은 장군들은 북군의 최대 우위인 보급 및 병력 규모의 우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지휘를 거듭했다. 링컨은 소극적인 지휘관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종용했고, 이들을 해임한 뒤 새로운 지휘관을 임명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링컨은 자신의 대전략에 부합하는 적극적으로 싸우는 지휘관인 율리시스 S. 그랜트를 거듭해서 승진시켜 총사령관 자리에까지 올렸다. 그랜트는 링컨이 주장한 바 있는, 각지의 남군 야전군을 다방면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서로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고 각개격파하는 계획을 구현해 실행하였다. 결국 남부연합을 최종적으로 굴복시킨 것은 링컨이 주장하고 그랜트와 셔먼이 완성시킨 이 대전략이었다.

한편으론 통수권자로서 개별 전투에 대해선 현장 지휘관을 믿고 쭉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전쟁 중 사상자가 많이 나오자 그랜트 장군을 경질하라는 의회의 요구가 빗발쳤지만 링컨은 그를 변호해주었으며[40], 반도 전역과 제2차 불 런 전투에서 패배한 뒤 장관들 대부분이 포토맥군 사령관 매클레런에 대한 신뢰를 잃고 그의 해임을 주장했지만 링컨은 장병들의 지지를 받고 한 번 패배한 군대를 재건하는 데 있어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 매클레런을 해임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그 결과 매클레런이 재건한 포토맥군은 앤티텀 전투에서 리의 북버지니아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리의 북진을 막는 데 성공했고, 링컨은 위기를 극복하고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6. 링컨에 대한 말말말

공화당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는 대부분 진영을 떠나 존경받은 인물이며, 심지어 공산주의자ㆍ반미주의자 인물에게 존경을 받기도 한다.
"내가 볼 때 링컨의 기묘한 점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점입니다. 즉, 또 하나의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기이하고 섬뜩하며 고도의 지능적인 현상입니다. 링컨에 관한 한 모두 그가 얼마나 지능적인 인물이었던가를 잊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행한 모든 조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을 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 남북전쟁의 저자 셸비 푸트
"링컨은 '차갑고 계산적이며 냉정한 이성'을 갖춘 마키아벨리적 근대 정치가였다. 배신한 자를 철저히 응징하고, 목표를 위해서는 핏발을 세우며 '쉴 줄 모르는 엔진'을 켜고 돌진하는 인물이었다."
- 링컨 전문가 데이비드 도널드, 저서 링컨(1995)에서
"유럽의 노동자들은 ~ 노동자 계급의 신실하고 확고한 아들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쇠사슬에 묶여 있던 종족을 구해내기 위한, 그리고 사회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유례없는 투쟁을 통해 조국을 이끌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가올 시대의 전조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 카를 마르크스
"링컨, 그 숭고한 정신."
- 피델 카스트로[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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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링컨과 비슷한 급으로 평가받는 대통령은 국부 조지 워싱턴이나, 대공황과 2차세계대전이라는 빅 이벤트를 치르면서 미국을 확고한 초강대국의 자리에 올리고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연 FDR(프랭클린 루즈벨트)정도 뿐이다. 그 외엔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슨, 트루먼, 아이젠하워 등이 상위권에 포진하는 편. 대중적 인기로만 치면 케네디와 레이건도 못지 않으나 전문가 평에선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다. [2] 워싱턴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유권자 투표&선거인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당선된 대통령이고 대통령 취임 전에는 아예 워싱턴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기도 했다. FDR도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선거인단 표 차이로 4선에 무난하게 당선될 정도로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3] 당시에는 연방주의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흑인 노예 해방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링컨 이후 이 둘은 미국이 나아갈 방향의 한 등대가 되었고,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전체적 국익과 잘 맞아떨어지는 방향이었다. [4] 참고로 흑인 정책 관련해선 후임 대통령인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 시절 후속 조치들이 이어진다. [5] 미국에서 선서를 할 때에는 보통 왼손을 성경에 얹는다. [6] 물론 이념적으론 이런 구도들도 여러 짬뽕 시기를 거쳐오긴 한다. 연방주의라고 무조건 주의 권리를 배격하는 것도 아니고, 반연방주의라고 무조건 연방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7] 노예해방선언을 배우게 되면, 노예해방선언으로 대다수의 노예들이 해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장 먼저 놀라며, 그마저도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전시법령으로, 전쟁이 종료되면 해방된 노예들이 법적으로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다시 놀라고, 미연방에 충성을 맹세한 노예주인들의 노예들은 해당사항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 경악하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과도한 미화에 대한 반발심 비슷한 반작용도 좀 섞여서) 비판적인 시각도 있으나, 옹호론자들은 결과를 봐야 한다고 옹호하는 편이다. 즉, 표면적으로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수표로 보이나, 실제로 더 파고 들면 주(州)의 자치권(노예제)이라고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된 대통령으로서의 전시권한, 내전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피해간, 나름 잔머리 굴린 전시법안이였다는 걸 알수가 있다. 그리고 이전에는 노예들을 단순히 주(州) 법에 따라서 인간이 아니라 자산으로, 즉 전시상황에서 적에게 빼앗은 전리품 혹은 노획품 취급하여 대우가 매우 애매했던 해방노예들을 합법적으로 해방시켜줌으로써 이들을 미군에 합법적으로 입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으며, 탈퇴한 남부 노예주들의 흑인노예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연방에 협력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링컨은 헌법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수정헌법 13조를 준비하는데, 이는 전시법령으로 해방된 노예들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해방될 수 있도록, 그리고 앞으로 미국에서 누구도 노예가 되지 않고, 더 나아가 다시는 미국이 노예제로 인해서 분열되지 않도록 조치를 마련한 것이였다. 이를 보면 미국에 충성하는 노예주들을 안심시켜, 미국이 남북전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도우면서도, 합법적으로 주(州) 자치권이라는 헌법을 피하여, 자신이 원했던 노예제 폐지를 이룩한 '변호사' 링컨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8] 참고로, 링컨은 마르크스가 글을 기고하던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애독자였다. [9] 물론 어린 시절 동화 위인전 이런데서 접했을 확률이 높은데, 어린이용 위인전 특성상 과장이나 미화는 좀 있다. [10] 물론 한국에서 이 질문에 바로 링컨을 답할 사람이 평균적으로 보면 그리 많진 않겠지만, 링컨이란 캐릭터가 일종의 위대한 성인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 이게 미 연방정부가 남북전쟁을 원래 불렀던 공식명칭이다. 실제로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도 자기 회고록에 이 명칭을 쓴다. 정확히는 'The War of the Great Rebellion' - 남부연맹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미국정부의 입장을 가장 확고히 보여준다. [12] 미 헌법 10조. [13] 미주리주 서부를 말하는데, 이 토지들은 텍사스, 캘리포니아 그리고 오레건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은 연방영토에 불과했다. [14] 이 당시에 남부 노예주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는 노예제를 점진적으로 폐지할 것인지 여부가 아니라, 노예제 사수를 위해서라면 연방을 탈퇴해야 하지 않겠는가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남부 노예주들조차 의견통일이 안 되었는데, 당시 득표상황을 보면 노예제와 연방을 포함한 헌법을 그대로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헌법수호당(Constitution Party)이 노예제 수호에 더 극단적이었던 남부 민주당과 꽤나 많은 표를 갈라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남부 노예주들은 연방금고를 약탈하고, 연방 무기고를 약탈하여 무기를 탈취하는등 그야말로 강도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16] 이때 미국 서부는 대부분 주로 승격된 상황이 아니었다. [17] 링컨은 적극적인 지지보다 그런 헌법이 통과하면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18] "the privilege of the writ of habeas corpus shall not be suspended unless when, in cases of rebellion or invasion, the public safety may require it" [19] 즉, 당시에는 워싱턴 D. C. 에 일어난 폭동으로 의회 기능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공공 안전 보호를 위해 의회를 대신하여 인신 보호 영장을 중지시켰다는 말이다. [20] 어차피 전시상황이고, 다 합법인데 왜 새로운 법안이 필요하냐는게 그 논리. [21] Habeas Corpus Suspension Act 1863은 링컨에게 국회차원에서 대통령이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시킬 권리를 재확인 한 법안이지만, 핵심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협약에 따라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정치적 수용수'들을 풀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22] "I approved them (the arrests) then, and I approve them now; and the only thing for which I condemn the Administration in regard to that matter is that they let some of these men out." [23] 정작 앤드루 존슨의 노예주들에 대한 유화정책은 링컨의 정책 방향성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이를 감안해도 지나치게 친남부적, 인종차별적이었기 때문에 당대는 물론 현대까지 미국 역대 최악의 대통령 소리를 듣게 된다. 링컨 암살이 없었다면 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을지는 미국 근대사의 영원한 떡밥이지만, 최소한 존슨보다는 흑인 인권을 보장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하다. [24] 노예인구 비율이 5% 이하였던 델라웨어 [25]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북부 백인들조차도 흑인 입대는 자연스럽게 흑인의 참정권 요구로 이어질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에 반대여론이 높았고, 실제로 전후가 되면 링컨이 이걸 빌미로 흑인 참정권을 옹호하기 시작한다 [26] 당시 미국은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는데, 링컨은 재선이후에 적절한 당근책으로 다음 선거에 낙선이 거의 확실시 되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을 관직으로 매수하는데 성공,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킨다. [27] 이들은 노예제 반대파나 폐지파가 아닌 노예제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파다. [28] 대표적으로 토마스 제퍼슨, 로버트 E 리 등 버지니아 농장주들의 입장이었다. 이들은 영국을 상대로 자유라는 미명 아래에 독립을 쟁취했으나 정작 자신들이 노예들을 억압하던 폭군이라는 도덕적 딜레마가 있었고, 필요에 따라 노예제를 존속시키되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 하다는 것 또한 인정하는 기묘한 입장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다. [29] 이들은 노예제로 이익은 보고, 노예제가 도덕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인정했지만 이에 대해서 뭘 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나 부정적이였고, 오히려 노예제 반대/폐지론자들을 국가를 위협하는 불순분자 취급하여 북부의 반 노예제 연대를 더욱 더 자극하게 된다. [30] 이렇게 올라간 정치력으로 겨우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켰다. [31] 연방군이 아니라, 당시에 임시로 결성된 의용군이었다. [32] 앞서 언급한 문명화된 다섯 부족이 그 예다. 여기에 속한 부족들은 하나같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던 터라, 그 노예들을 해방시키려는 북군에 가담할 리가 없었다. [33]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경우를 보면 남부연맹 소속인 마을마다 돌면서 철도나, 건물, 농장 등의 인프라를 닥치는데로 파괴하여 가뜩이나 경제력 면에서 북부에 뒤쳐져있던 남부의 경제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또 남부에 가담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징집을 거부하고 뉴욕에서 폭동을 일으키자, 연방군이 이들을 진압해버린 사례도 있었다. [34] 에이브러햄 링컨이 살았던 시기에 개틀링 기관총이 발명되어 남북 전쟁에 실전 투입되긴 했지만, 이 당시의 개틀링 총은 사람이 손으로 레버를 돌려서 발사하는 원시적인 물건이었다. 당연히 주력 무기는 이게 아니라, 옛날처럼 구식 소총에 갖가지 창칼들이었다. [35] 예를 들면, 링컨 사후에 벌어진 리틀 빅혼 전투의 경우가 있다. [36] 이해가 안 간다면, 탈레반이나 ISIL같은 게릴라전 위주의 테러집단들이 병력을 모으는 방식을 생각하면 된다. 당연히도 민간인 마을을 어엿한 군사기지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에서, 현지인들을 미리 포섭해서 자기 편으로 끌어다놓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37] 수어드의 냉장고를 사들인 사람이다. 링컨 재임기부터 국무장관 임기를 시작해 앤드루 존슨이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후로도 국무장관으로 활약하며 알래스카를 사들였다. [38] 그리고 재밌게도 상당수가 링컨의 편으로 돌아서 버렸다. 수어드와 스탠턴은 링컨의 암살까지 정부를 지탱한 최측근으로 남았고 링컨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체이스는 링컨과 사적으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링컨은 체이스를 그가 대통령 다음으로 원하던 대법원장으로 임명해 주면서 그의 불만을 잠재우는 동시에 목표로 했던 사법 개혁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 [39] 실제로 오바마의 재임기간은 SNS의 발달과 함께 정치적 양극화가 시작되었지만 트럼프 등장 이전까지는 가시화되지 않았던 이유로 링컨의 용인술이 꼽힌다. 정적이라도 타협이 가능하다면 정부인사로 기용했기에 반대편 인사들도 행정부에 협조하고 타협했었다. [40] 이런 링컨과 그랜트 사이를 신임과 존중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일화 중 하나로 링컨은 그랜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귀관이 수행하는 작전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본인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소. 귀관에게 어떠한 제한도 제약도 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한 신뢰를 보내는 상관에게 그랜트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원하거나 기대하는 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이는 각하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 밖에는 드릴 수 없습니다." [41]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다가 알고 나면 꽤 놀라워 하는 사실이지만, 반미 성향의 공산주의 독재자로 유명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의외로 링컨만큼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링컨 기념관에 방문하였을 때 링컨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카스트로의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미국과 카스트로의 관계를 생각하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미국에게 공격을 받을 당시엔 카스트로가 "(지금의) 미국인들은 링컨의 숭고한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 특히 미국 공산당은 노예해방 때문에 링컨을 고평가한다. 당장 미국 공산당 문서에 가보면 공화당 대통령인 대형 링컨 형상 앞에서 전당대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