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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원지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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府院之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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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원지쟁의 주인공인 리위안훙과 돤치루이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국회의 정쟁3.2. 총통과 총리의 대립3.3. 대독절교안3.4. 대독선전안3.5. 장훈복벽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 문서

1. 개요

1916년~1917년 중화민국 대리총통 리위안훙과 국무총리 돤치루이 사이에 벌어진 정쟁을 의미한다. 대총통부의 부 자와 국무원의 원 자를 따서 부원지쟁이라 하며 부원의 쟁이라고 번역하는 일도 있다.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성을 따서 여단지쟁(黎段之爭)이라고도 한다. 결국 장쉰 장훈복벽을 야기하여 중화민국 약법과 국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고 돤치루이는 이를 이용하여 독재와 세계대전 참전을 강행, 남방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1차 호법운동 호법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1918~1920년 사이 대총통 쉬스창과 돤치루이 사이의 분쟁을 2차 부원지쟁이라 부르는 일도 있다.

2. 배경

1915년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황제에 즉위하려 했지만 호국전쟁이라는 전국적인 반발에 부딪쳐 몰락하고 급병으로 사망했다. 뒤를 이은 대리총통 리위안훙은 구국회와 임시 약법을 복구하고 국무경 돤치루이를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돤치루이 내각은 위안스카이가 제정한 여러 악법을 폐지하고 내각 개조를 요청했다. 리위안훙은 돤치루이에게 남방의 인사를 입각시켜 남북 화해 분위기를 조성할 것을 제안했고 돤치루이도 이에 동의하였다.

1916년 8월 21일 중의원에서 돤치루이의 총리 임명안은 찬성 407대 반대 6이라는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통과되었고 참의원도 찬성 187대 반대 6의 압도적 지지를 보냄에 따라 돤치루이는 손쉽게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돤치루이 내각이 출범했다. 돤치루이는 장군과 순안사의 명칭을 도독과 성장으로 바꾸고 차이어를 사천도독, 탕지야오를 운남도독에 임명하여 서남의 실력자들을 달랬다. 하지만 리례쥔 등 국민당원들은 배제되었으며 용제광의 경우, 광동독군에 임명되었으나 루룽팅이 용제광을 무력으로 축출하여 스스로 도독에 앉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회 내부에는 구 국민당과 구 진보당 강경파로 구성된 헌정상각회와 구 진보당으로 구성된 연구계가, 정부 안에서는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그 위세를 우려한 대총통 리위안훙, 부총통 겸 강소도독 펑궈장 연합의 충돌이 시작되면서 중화민국 정계는 혼란에 빠졌다.

3. 전개

3.1. 국회의 정쟁

9월 5일, 위안스카이에 의해 무산된 헌법제정 운동이 재개되어 9월 13일 헌법기초위원회가 천단 헌법 초안의 취지를 설명하고 초독하였다. 9월 15일부터 1917년 1월 10일까지 24차례에 걸쳐 심의회가 개최되고 1월 26일부터 제2독회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회 폐회 기간 위원회 설치를 통한 국회 직권 대행 조항 폐기, 대총통 긴급명령권 폐기, 의원의 국무원 겸임 금지 등이 삽입되었다. 또한 유교를 국교로 정하는 문제와 각성 자치를 두고 국회 내부에서 정쟁이 벌어졌다.

구 국민당은 전 참의원 의장 장계를 중심으로 1916년 9월 9일 400명의 의원을 모아 헌정상각회를 조직하였다. 구 국민당 내부에는 장쥐, 왕정팅 호국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파들로 구성된 객려파, 린썬, 쥐정 등 호국전쟁에 참여한 급진파로 구성된 병진구락부, 구 진보당 출신으로 손홍이, 정세택 등 호국전쟁에 참여한 도원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 진보당은 국회 회복 이후 부당주의, 즉 정당이 필요없다는 주장 하에 정당을 구성하지 않고 량치차오 산하의 헌법연구회와 탕화룽(湯化龍) 산하의 헌법토론회로 갈라졌다. 이들은 연구계라고 불렀는데 연구계 소속 국회의원들은 150명 정도가 되었다. 그 외에 10여개 소수정당이 있었는데 대개 돤치루이 지지파이거나 돤치루이 어용정당이었다. 돤치루이는 아예 자신의 입맛대로 움직이는 3당을 조직하려 했으나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구국회 회복 이후 1916년~1917년 사이 헌정상각회 객려파와 연구계, 북양군벌 소속의 독군들은 돤치루이를 지지했지만 헌정상각회 도원파와 병진구락부, 남방의 실력자들은 대총통 리위안훙을 지지했다. 돤치루이 반대파가 350석, 돤치루이 옹호파가 340석, 중립이 30석 정도를 차지하였다. 헌정상각회는 헌법에 성헌을 포함시켜 각성의 성장을 민선으로 선출함으로 북양군벌을 견제하자고 주장했으나 당연히 북양군벌과 연구계는 이런 국민당의 주장에 반대했다. 또한 헌법 연구회는 유교의 국교화를 지지하였으나 헌정상각회는 유교의 국교 지정에 대해 반대했다. 쌍방의 쟁론은 격화되어 국회 내부에서 주먹다짐이 벌어지는 형국이었다. 결국 유교에 대해서는 <국민 교육은 공자의 도를 가지고 수신의 모범으로 삼는다>는 조항을 <중화민국 국민은 공자를 존경 숭배하고 종교 신앙의 자유가 있으며 법률에 의하여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다>로 수정하였고 각성 자치에 관하여 16개조 초안이 추가되었다

3.2. 총통과 총리의 대립

국회에서 헌법 제정 문제로 싸우는 사이에 정부 내부에서도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대립이 이어졌다. 근본적으로 중화민국 임시약법은 내각책임제를 표방하면서 대총통과 국무총리의 권한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통과 총리의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약법 상 대총통에게는 법률 공포, 선전, 화평, 군통수권 등 막강한 권한이 있긴 했으나 행정적으로는 국무총리에게 책임이 있었으며 국무총리는 대총통이 아니라 국회에 책임을 졌다. 군통수권 문제에 있어서도 군정권은 육군부가, 군령권은 참모본부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대총통이 통수권을 행사할 건덕지가 없었다. 여기에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성향 차이가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리위안훙은 신해혁명 직후부터 공화당을 조직하는 등 정당정치와 의회에 호의적인 인물이었고 돤치루이의 위세를 우려했기 때문에 직예군벌의 수장인 부총통 겸 강소독군 펑궈장과 연계하여 돤치루이를 견제하려 했다. 돤치루이는 돤치루이 대로 안휘파의 정국 장악을 위해 리위안훙과 충돌했다. 게다가 리위안훙과 돤치루이는 원래도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돤치루이는 펑궈장을 일개 여단장 출신이라고 깔보면서 경력면에서 형편없는 인물이라고 무시했고 자신 덕분에 대총통이 된 '정치포로'로 간주했다. 반면 리위안훙은 자신의 호북도독 지위와 군사기반을 돤치루이가 박탈했다는 점에서 불만이 많았다.

이들 사이의 불화는 단순한 정책 문제를 떠나서 돤치루이가 리위안훙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났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을 단순히 '결재기관' 정도로 보고 우습게 알았다. 돤치루이는 자신의 친구이자 심복인 쉬수정을 비서장을 임명했는데 쉬수정은 리위안훙의 결재가 필요할 때 언제나 대리인을 보내 결재를 받았고 본인이 직접 가도 불손한 태도로 리위안훙을 대해 리위안훙의 불만을 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리위안훙이 지방장관 임명건에 대해서 그들의 출신과 경력을 묻자 쉬수정은 총통이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총통부비서장이 사직하면서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국무회의 후 보고도 없고 영을 발표해도 총통은 그 뜻을 몰랐으며 관리를 임명해도 총통은 그의 경력을 몰랐다. 대총통은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없이 날마다 결재하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것이 직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반발하여 리위안훙은 군사권을 육군부에서 회수하여 총통부에 귀속시키려고 시도하다가 돤치루이와 연구계의 반발에 실패하기도 했으며 법률 제정, 공포, 이행, 관리 임면권에 있어서 계속 충돌했다. 리위안훙에게 있어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재를 거부하는 것이었는데 리위안훙은 이 점을 노려 1916년 10월, 쉬수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내무총장 손홍이를 돤치루이가 파면하자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후 대독절교안에도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무원의 행정능력 마비를 유도했다.

돤치루이 역시 리위안훙에게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리위안훙을 타도하기 위해 독군단을 조직하였다. 각 성의 군사력을 장악한 독군들을 장악함으로 자신이 중국의 지배자가 되려는 속셈이었다. 돤치루이는 안휘성 독군 장쉰과 결탁하여 9월 20일[1] 제2차 서주회의를 개최, 13개 성의 독군을 모아 독군단 성구연합회를 조직하고 장쉰을 맹주로 추대했다. 그런데 장쉰은 청조의 복벽을 주장하는 인물로 돤치루이와 딴 마음을 먹고 손을 잡은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들 독군단은 돤치루이에게 협조하여 1917년 1월 9일, 펑궈장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여러 독군이 난징에 모인 기회를 이용하여 3차 서주회의를 개최, 돤치루이 지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편 1916년 출범한 일본 제국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돤치루이를 지지하며 돤치루이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제공했다. 조선은행 총재 쇼다 가즈에와 그의 개인비서 니시하라 가메조 등이 돤치루이 지지를 주장하여 1917년 1월 교통은행 차관 500만 엔을 제공했고 이후 니시하라 차관이라는 매국적 차관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돤치루이는 1917년 3월 중화구락부를 조직하여 어용정당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 중화구락부는 훗날 쉬수정의 주도로 안복구락부로 개조되어 안복국회라는 어용국회를 만드는데 일조하게 된다.

3.3. 대독절교안

한편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라 온 세계가 어수선하였다. 일찍이 세계대전이 발생했을때 위안스카이는 1914년 8월 6일 중립을 선포했으나 연합국으로부터 차관과 무기원조를 받고 제제에 대한 열강의 승인을 얻기 위해 연합국에 참전 의사를 타진했으나 일본 제국은 중국이 세계대전에 참여하면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발언권이 높아질 것을 우려하여 이에 반대했고 위안스카이는 참전을 단념했다. 하지만 1917년 1월 31일 독일 제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발표, 2월 2일부터 중립국, 교전국 선박이 영해에 들어올 시에 공격할 것이라고 선포하자 미국이 2월 3일 독일과 단교하고 2월 4일 주중미국공사 폴 라인쉬가 중화민국에게도 독일과 단교할 것을 권고하는 미국 국무부 전문을 통지했다. 중화민국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중국인의 생명과 재산에 손해를 끼친다고 엄중항의, 이 정책을 취소하지 않으면 외교관계를 단절할 수밖에 없다고 독일 제국에 통보했다. 1917년 2월 28일 미국, 영국 등은 중국 외교부에 독일에 선전포고하여 세계 대전에 동참할 것을 권고했다. 중국의 참전에 대해 반대하던 일본은 국제적 고립을 우려하여 1917년 2월, 중국의 참전에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중국에서의 미국 영향력 감소를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전을 종용했다.

열강이 참전을 요구함에 따라 중국 내부에는 참전파와 중립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쉬스창은 참전에 찬성하여 돤치루이에게 북양 세력의 확장을 위한 기회라고 주장했다. 또한 의화단 사건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지급해야 하는 배상금을 더 이상 지급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몰랐으며 불평등 조약 개정, 국권 회수 등 자주권 확보와 국제적인 위상의 강화 역시 노려봄직 했다. 이 때문에 량치차오와 연구계 의원들도 참전에 찬성했다. 량치차오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카밀로 카보우르 크림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한 것을 예로 들어 중국의 지위 향상을 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참전을 주장했다. 참전파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았다.

하지만 중국 내부에서는 참전 반대론이 우세하였다. 쑨원의 경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 전쟁은 유럽 사람들의 전쟁이지 중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참전한다는 것, 즉 연합국 측에 가담한다는 것은 오히려 국내정치에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

쑨원은 3월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 뿐만 아니라 영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중국에게 참전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국회의원들에게도 전보를 보내 중국인들은 독일인과 다른 유럽인을 구별할 수 없으니 독일과의 전쟁은 그저 반서구주의를 부채질할 뿐이라며 중립주의를 호소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할 시에 중국 내부의 이슬람 교도들이 불안해할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돤치루이가 참전 후 비상대권을 이용하여 입헌정부를 압박할 가능성이 높았다. 쑨원은 자신의 반전 주장을 <중국존망문제>, 영문으로 <The Vital Problem of China>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대총통 리위안훙, 부총통 펑궈장, 외교총장 우팅팡 역시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로 참전에 반대했다. 캉유웨이도 열강이 싸우는 동안 중국이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반대파들의 주장은 크게 다음과 같았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세계대전 참전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세계대전에 참전한다는 명목으로 차관과 무기를 들여와 안휘군벌을 강화시키고 끝내는 그 무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17년 3월 돤치루이는 내각에 <대독절교안>을 제출하였고 각국에 조회하자고 주장했다. 대독절교안은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국회에 상정되었으나 국회에서 대독절교안이 부결되자 리위안훙은 선전문제가 대총통의 권한임을 강조하며 대독절교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총통이 내각의 결의안을 함부로 번복하는 것은 전제군주와 같은 짓이라는 비난이 있었으며 화난 돤치루이는 사직하여 텐진으로 나가버렸다. 펑궈장이 텐진으로 가서 돤치루이에게 사과하고 그를 도로 불러들이는 쑈를 해야 했고 돤치루이는 대총통이 모든 행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복직했다.

결국 영미의 로비로 인하여 3월 10일 <대독절교안>이 중의원을 통과했고 3월 11일 참의원을 통과하면서 중화민국 정부는 3월 14일 정식으로 독일 제국과 국교를 단절했다.[2]

3.4. 대독선전안

독일과 국교가 단절되자 돤치루이는 이제는 <대독선전안>을 준비했다. 국민당 계열의 일부 독군이 이에 반대했고 3월 14일 안휘독군 장쉰이 참전 반대 전보를 타전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베이징에서 4월 25일 산서, 하남, 산동, 강소, 호북, 길림, 직예, 복건 등의 독군들을 모아 독군단 회의를 소집하여 국무회의에서 강제로 선전안을 통과시켰다. 광서독군 루룽팅은 회의 참가를 거절하며 참전 반대 의사를 드러냈으나 돤치루이는 막무가내였다. 5월 1일 대독선전안은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리위안훙이 의회의 통과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독선전안 재가를 거부하자 1917년 5월 7일 국무원이 대독선전안을 의회에 상정하였는데 돤치루이는 육해군인 청원단, 5족공민 청원단, 정상학계 청원단 등 3천명의 공민단을 동원하여 참전안을 통과시키라는 소란을 피우고 참전청원서를 배포하며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5월 10일 중의원에서 참전안을 토론할 때 돤치루이가 사주한 이들 공민단은 청원서를 받지 않으려는 2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폭행하기까지 했다. 이런 몰상식한 행패에 분개한 국회의원들은 5월 19일 국회를 정회하고 퇴장해버렸고 내각도 총사퇴하여 돤치루이 혼자만 내각에 남게 되었다. 돤치루이는 국회에 다시 대독선전안을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했으나 국회는 내각이 개편된 다음에야 심의가 가능하다고 거부하며 개각을 요구, 돤치루이의 사직을 종용했다.

5월 19일 당일, 돤치루이는 독군단을 동원하여 리위안훙에게 독군단의 연명으로 총통과 국회의 직권이 너무 크고 내각의 권한이 작다는 이유로 국회 해산을 요구했다. 독군단의 논리는 <대총통은 국무총리를 임명하며 국무위원의 부서가 필요없다.>, <양원의 결의안은 법률과 동등의 효력을 갖는다.>, <중의원에서 국무원의 불신임을 결의할 때 대총통은 국무원의 직을 면직할 수 있으며 혹은 중의원을 해산할 수 있다. 해산할 때에는 반드시 참의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등의 조항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위안훙은 독군들에게 총통에게는 의회 해산권이 없다고 거부하고 독군들이 떠나자 오히려 5월 22일 국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돤치루이를 해직한다는 총통명령을 내리고 5월 23일 외교총장 우팅팡을 국무총리 대리로, 장사옥을 육군총장 대리로 삼았다. 리위안훙은 전국 각지에 통전을 보내서 돤치루이를 경질한 이유를 밝히는 한편 쉬스창에게 국무총리직을, 왕시젠에게 육군총장직을 제안하였다. 또한 왕시젠을 경진임시경비총사령으로, 강조종과 진광원을 부사령에 임명함으로 경진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격노한 돤치루이는 자신의 면직은 자신의 동의가 없었으니 무효라고 주장하며 무력으로 일전을 준비하였다.
"공화각국의 책임내각제를 살펴보면 총리의 재가가 없으면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 이상 (돤치루이 본인이 면직당한) 사건은 본인의 재가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장래 지방, 국가에 어떠한 영향이 발생하더라도 본인은 책임질 수 없다."

3.5. 장훈복벽

한편 장쉰은 5월 21일 5차 서주회의를 개최한 상황이었는데 돤치루이 면직 소식이 들리자 <총통 제거안>을 회의에 상정하여 각 성의 독립의 선포를 선동했다. 돤치루이도 안휘성장 니쓰충, 봉천독군 장쭤린, 산동독군 장회지, 하남독군 자오티, 직예독군 차오쿤 등을 사주하여 리위안훙 타도를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 5월 29일 안휘독군 니쓰충이 안휘를 시작으로 하남독군 자오티, 직예독군 차오쿤, 봉천독군 장쭤린, 섬서독군 진수모, 절강독군 양선덕, 복건독군 리허우지가 독립을 선포, 중앙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길림, 흑룡강, 산서도 뒤따랐다. 돤치루이는 톈진으로 물러나 환계 군벌과 연구계, 교통계를 규합하여 리위안훙 타도와 국회 해산을 모의하는 한편 텐진에 각성 군무총참모처를 설치하여 임시정부와 임시의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6월 2일 텐진에서 독립각성총참모단이 조직되어 리위안훙에게 압력을 가했다.

리위안훙은 5월 25일 국회에 출석하여 재정총장 리징시를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왕시젠을 접견하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5월 26일 중의원이, 5월 27일 참의원이 리징시 임명안에 동의했다. 리위안훙은 량치차오에게 베이징에 올 것을 청하는 등 어떻게든 파국을 막으려 했으나 운남의 탕지야오 정도를 제외하면 리위안훙을 도우려는 군벌은 아무도 없었다. 5월 28일, 리징시 내각이 출범했으나 리징시는 아직 베이징으로 올라오지도 못한 상태였고 돤치루이를 막을 힘이 없던 리위안훙은 6월 1일 안휘독군 장쉰에게 조정을 요청했다. 장쉰은 이를 받아들이는 척, 톈진으로 올라와 쉬스창 등 복벽파와 회동한 후 난데없이 리위안훙에게 국회가 있는 상태에서는 조정이 불가능하다며 48시간 안에 국회를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저항할 힘이 없던 리위안훙은 어쩔 수 없이 6월 12일 국회를 해산했고 약법 체제도 폐지되었으며 토론 중이던 헌법도 다시 유산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 장쉰은 7월 1일 선통제 복위를 선포하였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복벽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디까지나 리위안훙 타도를 원했지 선통제를 등에 업고 장쉰이 설치는 것을 봐줄 이유가 없었고 교통계, 연구계 등은 군주제에 단호히 반대하는 세력이었으므로 당연히 장쉰 토벌을 요구했다. 돤치루이는 즉각 리위안훙, 펑궈장과 연합하여 국무총리에 복직한 다음,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장쉰의 변자군을 토벌하여 7월 12일 베이징을 점령하고 복벽을 취소했다.

4. 결과

7월 14일 돤치루이가 베이징에 입성하여 연구계 인물들을 대거 포섭, 자신의 내각을 조직하였고 량치차오는 재정총장에 임명되었다. 돤치루이는 량치차오의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국회와 임시약법을 복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8월 14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하였다. 물론 돤치루이의 참전 목적 자체는 동맹국을 패퇴시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럽 전선으로 중국군이 파병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는 관여하였으며 20만명에 달하는 노동자도 파견했다. 또한 연합국인 프랑스와의 협정에 따라 근공검학 프로젝트에 실시하여 많은 유학생들을 프랑스에 보냈는데 여기에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리리싼 등 유명한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돤치루이는 1917년 11월 10일 임시참의원을 조직, 1918년 2월 <국회 조직법>과 <국회의원 선거법>을 다시 제정하여 신국회를 선거하게 하였다. 1918년 8월 12일에 신국회가 소집되었는데 이는 1918년 3월 8일 돤치루이가 조직한 안복구락부가 절대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어용국회로, 안복국회라 불렸다.

국회 해산 이후 남하한 구 국회의원들은 기존 국회의 회복을 요구했지만 돤치루이는 묵살했다. 이에 쑨원 등은 7월 17일 광저우로 남하하여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합작, 9월에 1차 광동 군정부를 수립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대독선전안을 가결한 돤치루이는 9월, 남방의 군정부 토벌에 나섰는데 이로 인하여 호법전쟁이 발발하면서 중화민국은 남북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5. 참고문헌

6. 관련 문서



[1] 혹은 9월 21일. [2] 이때 독일 제국 역시 로비를 하여 쑨원에게 200만원의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 쑨원은 나중에 이를 부인했지만 해롤드 시프린은 쑨원이 호법운동에 사용한 자금은 독일 제국 정부에서 지불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촌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