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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독일어: Finnlandisierung
- 영어: Finlandization
- 핀란드어: suomettuminen
- 스웨덴어: finlandisering
- 러시아어: финляндизация
냉전 시기 핀란드가 소련에 취한 외교정책을 말하는 용어. 냉전 시대였던 1960년대에 친서방 정책을 주장하는 서독의 학자, 언론, 정치인들이 핀란드와 소련의 관계를 비판하려고 만든 용어다. # 여기서 더 나아가 강대국에 인접한 약소국이 생존을 위해 독립국으로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권리들을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예속되는 상황을 말하기도 한다.
핀란드인에 동화되는 핀란드화(Finnicization)와는 다르다. 이 핀란드화는 핀인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핀인(Finns)이 아닌 소수민족(주로 스웨덴계 핀란드인)이 핀란드인의 언어와 문화,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핀란드화(핀인화)의 대표적인 예는 핀란드를 지배했던 스웨덴의 문화와 언어를 핀란드 문화와 핀란드어로 대체해야 한다는 페노마니아(Fennomania) 운동이 있다.[1]
2. 역사
2.1. 겨울전쟁-계속전쟁 이후
핀란드는 근대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러시아 혁명과 핀란드 내전을 거쳐 독립하였다.소련은 일단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했지만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죄다 되찾으려는 스탈린은 핀란드 정복 의욕을 대놓고 드러냈다. 이로 인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이 일어났고 핀란드는 독소전쟁을 치르던 나치 독일과 협력까지 했으나 결국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소련에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에서 핀란드인들은 대부분 반소 감정을 드러내며 소련에 맞서 싸웠고 주요 전투 여럿에서 이기는 등 국력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당시 인구가 400만 명이었던 약소국 핀란드가 2억에 육박하는 강대국 소련을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핀란드인들은 대부분 소련에 맞서 싸웠던 경험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맞서 싸워 보면서 소련의 국력이 얼마나 강대한지 체감했다. 거대한 소련을 이웃한 마당에 대다수가 소련과 교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도 컸다.
핀란드는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을 통해 소련의 핀란드 합병이나 위성국화 의욕을 꺾어냈지만 한편으로 소련과의 전쟁이 재발하지 않도록 소련의 국익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암묵적 타협을 하였다. 이에 따라 핀란드는 냉전 구도에서 파시키비-케코넨 독트린을 통해 친소적 중립을 선언하여 나토에 가입하지 않았고 마셜 플랜도 거부했으며 소련에게 내정간섭을 많이 받았다. # 물론 당시 핀란드인들도 소련 사회의 비리나 부조리상을 모르지야 않았지만 언론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보도를 피했다.
핀란드군은 소련의 요구에 따라 소련제 무기를 사용해야 했다. 핀란드 육군은 소련제 T-55, T-72 전차, BMP-1, BMP-2 보병전투차, 2S5 기아친트-S 자주포, AK-47을 핀란드에서 면허생산한 Rk 62 돌격소총으로, 핀란드 해군은 리가급 호위함과 오사급 고속정으로, 핀란드 공군은 MiG-21 전투기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후
1948년 핀란드와 소련은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 의해서 핀란드는 냉전 시기 중립 국가가 되었다. 이 때문에 핀란드는
마셜 계획에 참가하지 않았고, 소련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도 중립을 취했다. NATO 및 서방 군사 세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바르샤바 조약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반 소련 매체는 자체 검열되었고, 정치인과 기자들은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행동이나, 소련의 정치범 억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공 도서관 및 서점에서는 반 소련 도서를 유통할 수 없었고, 금서 목록도 관리되었다. 핀란드의 영상물 등급 위원회에서는 반 소련 영화를 금하였다. UN 세계인권선언에서 보장한 정치적 망명은 러시아인에 대해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반소 러시아인이 핀란드로 망명하면 망명자들을 소련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평범한 핀란드인의 삶에 러시아가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하윅이 말하길 매일같이 국영 라디오 방송은 15분간 뉴스 단신, 일종의 '오늘의 이웃 나라 소식' 같은 뉴스를 내보냈고, 방송은 '순화된 소련 선전' 투성이였다. 또 집집마다 하우스 북이라는 기록대장을 두고 그 집에 사는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방문객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1월이 되면 가족 중 한명이 지역 경찰서에 줄을 서서 대장을 확인받고 도장을 받아야 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되었다.
핀란드 언론과 출판계는 소련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자료를 늘 조심했다. "선배들 말로는 특히 외교 정책이 민감한 사안이었다고 합니다."
<헬싱긴 사노마트>의 기자 헤이키 아이토코스키가 말했다.
"외무장관은 국민을 심하게 압박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핀란드의 독립이 소련에 달려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가령 반소련 관련 도서는 도서관에서 다 치웠습니다. 고르바초프가 헬싱키에 와서 핀란드는 중립국이라고 선언한 사건은 엄청난 뉴스였어요. 지금이라면 그러겠죠. '그래서 어쩌라고? 핀란드는 이미 자유국가 아니었어?' 하지만 당시에는 대서특필감이었답니다. 고르바초프는 핀란드를 독립국이 아닌 중립국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핀란드는 소비에트 연방이 아니니 '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이었죠."
이 모든 우려는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냉전시기 거의 내내 러시아 전차가 핀란드 국경을 따라 정렬한 채 출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가 쳐들어왔다면 누가 핀란드를 지원하러 왔을까? 머리망을 한 중립국 스웨덴? 무장해제한 독일? 미국은 심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신 핀란드인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일을 했다. 당시 유행하던 현실정치를 받아들이고 자존심을 굽혀 머리를 숙인 채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 마이클 부스 저 / 김경영 역
하지만 반 소련 매체는 자체 검열되었고, 정치인과 기자들은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행동이나, 소련의 정치범 억압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공 도서관 및 서점에서는 반 소련 도서를 유통할 수 없었고, 금서 목록도 관리되었다. 핀란드의 영상물 등급 위원회에서는 반 소련 영화를 금하였다. UN 세계인권선언에서 보장한 정치적 망명은 러시아인에 대해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반소 러시아인이 핀란드로 망명하면 망명자들을 소련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평범한 핀란드인의 삶에 러시아가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하윅이 말하길 매일같이 국영 라디오 방송은 15분간 뉴스 단신, 일종의 '오늘의 이웃 나라 소식' 같은 뉴스를 내보냈고, 방송은 '순화된 소련 선전' 투성이였다. 또 집집마다 하우스 북이라는 기록대장을 두고 그 집에 사는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방문객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1월이 되면 가족 중 한명이 지역 경찰서에 줄을 서서 대장을 확인받고 도장을 받아야 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되었다.
핀란드 언론과 출판계는 소련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자료를 늘 조심했다. "선배들 말로는 특히 외교 정책이 민감한 사안이었다고 합니다."
<헬싱긴 사노마트>의 기자 헤이키 아이토코스키가 말했다.
"외무장관은 국민을 심하게 압박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핀란드의 독립이 소련에 달려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가령 반소련 관련 도서는 도서관에서 다 치웠습니다. 고르바초프가 헬싱키에 와서 핀란드는 중립국이라고 선언한 사건은 엄청난 뉴스였어요. 지금이라면 그러겠죠. '그래서 어쩌라고? 핀란드는 이미 자유국가 아니었어?' 하지만 당시에는 대서특필감이었답니다. 고르바초프는 핀란드를 독립국이 아닌 중립국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핀란드는 소비에트 연방이 아니니 '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이었죠."
이 모든 우려는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냉전시기 거의 내내 러시아 전차가 핀란드 국경을 따라 정렬한 채 출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가 쳐들어왔다면 누가 핀란드를 지원하러 왔을까? 머리망을 한 중립국 스웨덴? 무장해제한 독일? 미국은 심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신 핀란드인은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일을 했다. 당시 유행하던 현실정치를 받아들이고 자존심을 굽혀 머리를 숙인 채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 마이클 부스 저 / 김경영 역
2.2. 소련 붕괴 이후
1991년 소련 붕괴 후에도 핀란드는 한동안 나토에 가입하지 않는 등 핀란드화 시절의 정책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이러한 흐름이 바뀐 것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다. 이 시기부터 나토와 협력을 시작했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립을 포기하고 2023년 나토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스웨덴도 중립에서 벗어나 2024년 나토에 가입했다.
3. 특징
3.1. 장점
소국인 핀란드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강대국인 소련의 국력 차이는 하늘과 땅 수준이었는데 그런 국가와 이웃하면서 대놓고 적대시하거나 대결하기란 무모했다. 소련을 제어할 만한 강대국은 당시 미국뿐이었는데 미국이 핀란드에 개입해 소련으로부터 지켜 주기에는 너무 멀었으며 당시 핀란드의 이웃국가이자 나토 소속국인 노르웨이는 소련을 견제하는 역할만 할 뿐이었지 핀란드까지 도와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2]핀란드는 비록 소련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자제하고 내부검열했지만 소련에게 주권을 크게 제한당한 동유럽 공산권 위성국이나 아예 나라가 소련에 먹힌 발트 3국에 비하면 주권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핀란드는 친소 정책을 실시하면서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았지만 냉전 시절 핀란드의 주요 무역 상대국이 소련일 만큼 활발하게 교역하였다. 소련 정부 입장에서도 핀란드는 공산국가가 아닌 서방식 민주국가였지만 소련의 외교 방침을 크게 거스르지 않았을 뿐더러 억지로 공산화시킬 경우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반발할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에 소련은 망할 때까지 핀란드를 공산국가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런 관계 덕분에 1970년대에 오일 쇼크가 일어났을 때 핀란드가 타격을 별로 입지 않는 등 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서방 국가들이 대거 불참하는 와중에도 핀란드는 국기를 내세워 정상적으로 참가했다.
소련은 핀란드로부터 서방의 문물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특히 에스토니아와 레닌그라드 일대에서는 핀란드의 YLE TV 전파가 잡혔기 때문에 이를 통해 서구 음악이 유입되었다. 한편 에스토니아인들은 핀란드의 시사보도 프로그램이 소비에트에 그리 비판적이지 않다며 방송 내용을 불만스러워했다는 풍문도 있다.
어찌되었던 결국 소련은 멸망하였지만 핀란드는 독립국으로서 주권을 지켜내 오늘날까지 이르게 한 것도 핀란드의 현명한 외교정책에 있었으니 강대국에 대응하여 국권을 지키는 중소국가의 사례로 볼 수도 있다.
3.2. 단점
핀란드화 정책이 냉전의 또다른 한 축이었던 미국과 서방은 배려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핀란드에는 '독일 또는 그 동맹(즉 나토)이 핀란드를 경유하여 핀란드 또는 소련을 공격할 때 소련과 함께 방어전에 나설 의무'가 있었다. 서방권은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핀란드가 소련군을 잠시라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고 일찌감치 핀란드를 표적으로 하는 핵탄두를 장전해 두고 있었다. 만일 미소간에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소련군을 적으로 돌림을 면하는 대신 미국의 핵을 맞을 신세였다는 이야기다.핀란드가 스스로 외교주권을 제한하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해 얻어낸 소련의 호의도 별 볼 일 없었으며 실질적으로 소련의 보호국이자 준위성국 수준이었단 비판도 있다. 핀란드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어차피 소련은 핀란드를 존중할 의사가 없었다는 주장인데 소련이 핀란드 대통령 케코넨과 정식 외교라인이 아닌 KGB 비선을 통해 대화했다는 점, KGB는 케코넨 대통령 외에도 핀란드 공산당을 비롯한 수많은 비선을 핀란드 국내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3], 일국의 대통령이 그 비선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점, 유사시 헬싱키를 접수하기 위한 군부대가 바로 건너 에스토니아 탈린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점[4] 등을 정황근거로 제시한다.
사실 소련과 공존하던 시절 핀란드의 대내적, 대외적 정치적 자유는 심각하게 제한당해서 서방에서 핀란드는 공공연히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이라고 조롱을 당했다. 핀란드는 소련에서 망명자가 넘어왔을 경우 잡아서 소련에 넘기기도 했는데 이건 세계인권선언에서 보장된 정치적 망명권의 위반이다. 중요한 부분은 소련인 망명자에 대해서만 핀란드가 세계인권선언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핀란드의 권력자들은 핀란드화를 이용하여 권력자가 국내의 정치지형을 좌지우지했다.
1958년의 밤서리 위기는 당시 선거를 통하여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출범한 핀란드의 제3차 파게르홀름(Fagerholm) 내각이 소련의 승인을 받지 못하여 결국 소련의 간섭 탓에 붕괴되었던 사건이다. 당시 소련은 핀란드 사회민주당 내 우파를 반동분자로 취급하였고 핀란드 내 친소 정당인 인민민주동맹이 전체 200석 중 50석을 얻었음에도 내각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핀란드의 신생 제3차 파게르홀름 내각을 비토하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핀란드를 상대로 운하권 협상, 어로권 협상, 무역협정을 무기한 지연시키고 외교관을 철수시키는 등 양국간의 관계를 밤서리(Night Frost)처럼 얼어붙게 만들었고 결국 제3차 파게르홀름 내각은 이런 위협에 굴복하여 총사퇴하였다.
이후 케코넨 대통령이 조율하여 제2차 숙셀라이넨(Sukselainen) 내각이 출범했는데 소련의 입맛에는 맞지만 핀란드 의회 전체 200석 중 합계 62석에 불과한 ( 농민동맹[5] 등등) 소수 정당간 연정으로 구성된 민주주의 국가로서는 참으로 기형적인 구성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케코넨 대통령은 30년간 핀란드 정치계의 유일무이한 권력자로 군림하였다. 케코넨을 비판한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후원 세력인 소련을 비판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극히 조심스러워졌고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의석수가 여전히 상위권이었음에도 소련에게 용서받는 1966년까지 핀란드 내각에 들어가지 못했다.
1961년 각서 위기는 서독에서 나치즘과 군국주의가 다시 발흥하고 있으니 소련과 핀란드 간 군사협력을 강화하자는 내용으로 작성한 소련의 외교각서(Note)에서 촉발되었다. 당시 각서에는 소련에서 파견된 군사자문단이 핀란드군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고 장차 핀란드 영토에 소련군이 무기한 주둔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핀란드 정치권 내부에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 각서를 받아들인다면 핀란드는 계속전쟁 이후 유지해 온 중립 정책을 포기하여 완전한 소련의 위성국이 되고 서방과 맺어 온 우호적인 관계도 단절되는 것이 확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반발을 의식하여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와 핀란드 대통령이자 농업동맹의 수장이었던 케코넨은 이러한 군사협력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그 대가로 케코넨보다 여론상 우위라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던 올라비 혼카(Olavi Honka)는 대통령 입후보를 포기했고 핀란드 의회는 해산되어 버렸다. 당시 올라비 혼카는 핀란드 사회민주당 등 6개 정당의 단일 후보로 차기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핀란드-소련 간 협상의 대가로 정치생명이 끝났으며 케코넨은 1962년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되었는데 때문에 각서 위기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려던 친소 정치인 케코넨이 소련과 결탁하여 인위적으로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사건이라고 평가받는다.
외교주권 포기에 비해 덜 알려진 핀란드화의 또 다른 치명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민주주의나 선거 같은 국내 정치 요소의 의미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입맛에 맞는 정치인만 선출하여야 하고, 약소국의 정치인은 그런 강대국의 개입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위기에 몰릴 때마다 이른바 "모스크바 카드(Moscow card)"를 사용해서 인위적으로 국내에 공포와 혼란을 부추기고 "속임수와 선동"[6]을 활용하여 자신의 정치기반을 강화시킨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적 원칙은 무시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핀란드 내에서는 케코넨을 진지하게 독재자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핀란드 정부의 지원을 받아 편찬된 인명사전에서도 독재자설을 정설로 수록했다.
4. 용어에 대한 비판
핀란드화라는 용어는 냉전 시기 서방권의 편협한 시각에서 나왔다는 비판도 있다. 핀란드는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고 겨울전쟁에서 맞서 싸운 경험이 있다. 당시 서방권은 소련을 규탄했지만 소련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결국 서방의 외면 속에 핀란드는 4개월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소련에 항복했고, 이후에도 독일과 손잡고 계속전쟁을 통해 다시 소련과 싸웠지만 또 패배했다. 두 차례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핀란드는 소련과 힘의 격차를 실감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초강대국이 된 소련의 위상을 받아들여야 했다.서방 세계는 비단 핀란드뿐 아니라 1953년 동독 봉기, 1956년 헝가리 혁명에도 립 서비스로 일관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련에 굴복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국익과 주권 수호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서방에서 핀란드를 실질적으로 도와준 적도 없으면서 핀란드의 굴복을 조롱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시선이다. 핀란드의 상황은 소련과 정면 대립했고 원래부터 열강이었으며 더불어 미국의 후원으로 그나마 소련과 맞설 역량을 갖출 수 있었던 서유럽 국가들이 아니라 소련에 주권을 제한당한 동유럽 국가들과 비교해야 마땅할 것이다.
오늘날 핀란드에서는 대체로 냉전 시대의 중립외교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지는 않으며 중립외교를 폄훼하는 뉘앙스인 '핀란드화'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핀란드에서는 '핀란드화'라는 표현을 매우 치욕적이고 불쾌한 단어로 받아들인다. 강대국의 도움 없이 홀로 소련과 맞서야 했던 핀란드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편견이자 핀란드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멸칭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현대 핀란드에서는 '핀란드화'를 자국을 모욕하는 용어로 간주하여 금기시한다. # 2014년 핀란드 환경장관이 핀란드가 러시아의 원자로 건설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 결정을 두고 '핀란드화'라고 비판했다가 역풍을 맞고 사임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핀란드화라는 용어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핀란드의 냉전 시기 외교정책을 '핀란드화'가 아닌 ' 파시키비-케코넨 독트린'이나 '중립외교'라고 부른다.
다만 오늘날 핀란드화라는 용어는 비판적인 어조로만 쓰이지는 않으며 냉전 시기 핀란드의 외교정책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긍정적인 맥락에서 종종 쓰기도 한다.
5. 한국의 경우
한국에서 핀란드화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널리 소개된 계기로는 작가 복거일이 2009년에 출판한 평론집 "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가 꼽힌다. 복거일은 이 책에서 핀란드화란 강대한 나라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가 강대한 이웃의 눈치를 보면서 강대한 이웃에게 점차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양보하게 되는 과정(적응적 묵종)으로 정의하면서 중국의 한반도 전략은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핀란드화라고 주장하였고 한국도 중국에게 어느 정도 숙이고 들어가는 '적응적 묵종(默從)'은 피할 수 없다고 보았으나 최소한의 외교적, 군사적 시민적 대항력은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 이후에도 중국의 한반도 전략이 '한반도의 핀란드화'에 있다는 점은 신동아 등 다수의 언론과 시사평론가들도 수 차례 제기하였다. # # 이에 반해 작가 장정일은 '사회의 도적적 변질'이 핀란드화에 따른 부작용이라고 지적한 복거일의 말에 대하여 '미국에 의한 (한국의) 핀란드화'가 오히려 문제라고 평가하였다. #정치학자 문정인은 '핀란드화'를 두고 "강대국에 대한 약소국의 일방적 예속"이 아니라 "변화하는 대외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한 약소국의 생존전략"으로 평가하면서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동북아 질서의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
복거일의 주장과 유사하게 2010년대부터 한국의 대중 외교 정책를 두고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핀란드화'나 다름없다는 주장이 친미 성향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제기되곤 하는데 이들은 한국의 대중 외교 정책이 지나치게 저자세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높은 무역 의존도, 북한의 존재로 인해 대북 견제나 향후의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카드를 쓰기 위해 비교적 저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반면 중국의 친북 성향, THAAD 배치 문제나 한한령 등 이미 적대적 관계인 상태에서 뭐가 아쉬워서 저자세를 취하냐는 재반론도 존재한다.
6. 기타
- 게임 크레믈린의 위기에서 핀란드는 친서방국이나 중립국이 아닌 친소련국으로 분류되었다. '서방식 민주주의' 체제인 국가 중에서 친소련국은 핀란드가 유일하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전략게임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확장팩 시나리오 중 '냉전'에서는 아예 소련 진영으로 나온다.
- 2021년 후반에 우크라이나 위기가 일어나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를 제안했음이 알려졌다. #1 #2 #3 그런데 정작 핀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 제안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였다. # 그들에게 핀란드화는 외부 사정으로 인해 강요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7. 관련 문서
[1]
특이하게도 페노마니아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핀계 토착민이 아니라 스웨덴계 이주민이었다.
[2]
마찬가지로 이웃한
스웨덴의 경우 서방에 속하긴 했지만 소련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등 냉전 시기 사실상 중립국에 가까웠다.
[3]
핀란드 공산당은 당 재정도 전적으로 소련에서 주는 공작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소련이 망하자 곧바로 파산해서 당이 해산되었다.
[4]
소련의 핀란드 침공 작계는 개정을 거듭해 항상 최신 상태를 유지했고 탈린의 핀란드 상륙부대는 소련이 붕괴되고 에스토니아가 독립하는 그 순간에야 해산되었다.
[5]
케코넨이 수장으로 있었다.
[6]
핀란드 정치인 베이코 벤나모(Veikko Vennamo)의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