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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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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b6c><colcolor=#f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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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1년 12월 15일 | ||
러시아 제국 핀란드 대공국 색스매키[1] | |||
사망 | 1944년 2월 29일 (향년 82세) | ||
핀란드 남카리알라 루매키 | |||
재임기간 | 초대 총리(1기) | ||
1917년 11월 27일 ~ 1918년 5월 27일 | |||
초대 국무섭정 | |||
1918년 5월 18일 ~ 1918년 12월 12일 | |||
초대 총리(2기) | |||
1930년 7월 4일 ~ 1931년 2월 18일 | |||
제3대 대통령 | |||
1931년 3월 2일 ~ 1937년 3월 1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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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b6c><colcolor=#fff> 배우자 | 엘렌 스빈후부드[2] | |
자녀 | 6명 | ||
학력 |
알렉산드르 제국대학 (
문학 /
석사) 알렉산드르 제국대학 ( 법학 / 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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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 핀란드 복음주의 루터교회) | ||
최종 당적 |
[[국민연합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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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의 제3대 대통령.2. 생애
2.1. 출신성분
아브(af)는 스웨덴어로, 독일어의 폰( von)이나 프랑스어의 드(de), 영어의 오브(of)에 해당하는 말로 귀족 출신 임을 나타내는 수식어이다. 스빈후부드 아브 크발스타드 가문은 1574년 귀족으로 서임된 군인 출신 귀족 집안으로, 따지고 보면 1693년 귀족이 된 상인 출신 만네르헤임 가문 보다도 유서깊은 가문이다. 스웨덴의 스빈후부드 본가는 스웨덴 왕실과 통혼도 한다. 다른 페노마니아들이 모두 핀란드어 성씨를 창씨하는 와중에도 스빈후부드는 500년 전통의 성씨를 버릴 수 없다고 스웨덴어 성씨를 유지했다.2.2. 율사 시절
스빈후부드가 두 살이던 1863년 부친이 선박 침몰사고로 사망하자 조부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3년 뒤인 1866년 조부마저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 결국 스빈후부드는 가문의 저택을 매각하고 헬싱키로 상경했다.1878년 16살의 나이에 헬싱키 대학교에 입학해 1881년 학사, 1882년 석사, 1886년 율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이후 변호사 자격을 얻고 스웨덴계가 다수 거주하는 도시 투르쿠 항소심재판소의 판사보가 되었다. 1882년에는 불과 31세로 원로원( 핀란드 대공국의 행정부) 입법위원회에 법무관료로 임용되어 세법을 개정했다. 1894년부터는 핀란드 스빈후부드가 당주로서 신분제의회 의원으로 출석했다.
스빈후부드는 세법개정에 싫증을 느끼고 1902년 투르쿠 항소심재판소로 돌아갔다. 같은 해, 러시아 제국의 동화정책에 반발해 징병거부 운동이 일어났는데 핀란드인들은 이를 러시아 제정이 폭력진압했다며 투르쿠 재판소에 소송이 들어왔다. 스빈후부드는 니콜라이 보브리코프 총독을 피고로 하는 소송 절차를 진행했다. 빡돈 총독은 스빈후부드 등 판사 여섯 명을 잘라 버렸는데, 핀란드인들은 이것을 폭거라고 받아들였고 스빈후부드는 일약 정치적 유명인사로 부상했다.
원래 스빈후부드는 온건 페노마니아, 러시아 제국 협조파인 핀란드당 당원이었으나 이 일을 겪고 판사를 조지려 드는 폭거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불의라며 호헌파 청년 핀란드당으로 전향했다. 스빈후부드는 헬싱키로 상경해 신분제의회에 등원하며 호헌파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1905년 혁명의 결과 1906년부터 의회개혁이 시작되었고, 헤이놀라 지역 판사로 임용된 스빈후부드는 정치에서 물러나 시골 판사로서 여생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스빈후부드는 1907년 초대 의회에서 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뿐 아니라 초대 의회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자당인 청년 핀란드당 뿐 아니라 다수당이었던 사회민주당도 명망이 높은 스빈후부드를 인정해 그를 추천했다. 스빈후부드는 율사 출신답게 의회의장으로서 법치를 강조했으나, 혁명이 가라앉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매년 의회해산으로 맞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핀란드인들을 더이상 믿을 수 없다며 핀란드인 관리들을 러시아인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스빈후부드는 이것이 핀란드 헌법상 위법하다고 판단하고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스빈후부드는 1914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2.3. 핀란드 내전과 독립 전후
2월 혁명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자 스빈후부드는 시베리아 동네 경찰서로 찾아가 "날 여기로 보낸 놈이 체포당했으니 나는 이제 집에 갈 거요"라고 말하고 그대로 귀국, 일약 영웅으로 대접받았다.1917년 7월, 사회민주당의 오스카리 토코이 원로원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려 했으나 핀란드 우파들은 그렇지 않아도 원내 다수인 좌파가 독립을 주도하면 기득권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여 케렌스키에게 쿠데타를 사주했다. 9월 러시아 공화국군에 의해 토코이 원로원이 해산당했다. 이후 2개월간 토코이 원로원에서 사민당 원로들만 빠진 에밀 네스토르 세탤래의 과도적 원로원이 유지되다가 11월 27일 스빈후부드가 원로원장이 되었다. 스빈후부드가 원로원장이 되기 직전인 11월 7일 10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공화국이 무너지고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섰다. 12월 6일, 스빈후부드 등 11인이 연서한 우파 주도의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아직 "총리"라는 직함이 사용되기 전이지만 이 때를 핀란드의 공식적인 독립으로 여겨서 스빈후부드는 초대 핀란드 총리로 여겨진다.
우파의 탈법적 집권에 불만을 가진 좌익세력이 민병대를 소집하고, 우파 역시 이에 맞서 민병대를 소집하자 스빈후부드는 우파 민병대가 핀란드 국군이라고 선언했고 때마침 귀국한 러시아 제국군 중장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을 그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좌익민병대가 이에 불복하여 봉기함으로써 핀란드 내전이 발발했다. 스빈후부드는 3월 헬싱키를 탈출하여 서해안의 항구도시 바사로 피난해 거기에 원로원을 차리고 독일 제국과 스웨덴에 개입을 요청했다. 독일군의 개입으로 적군이 쓸려나가며 별다른 평화회담도 없이 적군 궤멸로 내전이 종료되었다.
스빈후부드는 좌익과 내전을 치르면서 좌익의 "폭력성"과 "불법성"에 경악하여 급격히 우경화되었고, 심지어 군주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빌헬름 2세의 매제 헤센 공자를 국왕으로 영입해 핀란드 왕국을 세우기로 하고 정부수반인 원로원장에서 사퇴, 헤센 공자가 오기 전까지 국가원수 대리인 섭정을 맡았다. 한편 만네르헤임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자는 자기 제안이 독일[3] 및 친독 원로원에 의해 기각당하자 빈정이 상해서 총사령관직에서 사퇴한다.
하지만 얼마 뒤 독일 제국이 패망하고, 헤센 공자의 영입도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청년 핀란드당은 당내 우파인 제비파와 당내 좌파인 참새파로 분열되었는데, 제비파의 영수는 스빈후부드였고 참새파의 영수는 스톨베리였다. 핀란드당과 제비파는 왕정을, 참새파와 농민당, 그리고 내전에 참여하지 않아 탄압을 면한 사민당 잔당은 공화정을 지지했다. 이 국체 논쟁으로 몇 달간 국정이 마비되었는데, 헤이키 리타부오리 등의 활약으로 공화국 헌법이 통과되었고, 농민당과 사민당의 몰표를 받은 스톨베리가 만네르헤임을 트리플스코어로 바르고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되자 스빈후부드는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2.4. 악마들과 손잡다
제비파와 참새파는 국체논쟁으로 엄청나게 골이 벌어져 결국 분당했다. 참새파는 국민진보당을 창당했고, 제비파는 핀란드당과 합당하여 국민연합당이 되었다. 1925년 리타부오리의 암살 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스톨베리가 연임을 포기하자 스빈후부드는 국민연합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지만 농민당의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에게 밀려 낙선했다.렐란데르는 국가원수로서는 젊은 편이었고 정치적으로 미숙했다. 1929년부터 핀란드에는 라푸아 운동이라는 자생적 파시즘 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했는데, 스빈후부드는 이들과 손잡음으로써 정치적으로 재기했다. 1930년 6월, 서해안의 오울루, 바사에서 출발한 라푸아 운동 대원 1만 2천 명 이상이 7월 7일 헬싱키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왕국에서 벌어진 검은 셔츠단의 로마 진군을 떠오르게 하는 대형사건이었다. 무능한 렐란데르는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라푸아 운동의 요구들을 들어주고 만다. 그 요구란 공산주의 언론을 불법화하는 법을 통과시킬 것과 자기들이 지지하는 스빈후부드를 총리로 임명하라는 것 등이었다. 이로써 스빈후부드는 12년만에 권력을 되찾았고 핀란드에는 "공화국수호법"이 제정된다.
1931년 대선에서 스빈후부드는 대통령직에 재도전한 스톨베리를 간발의 차(2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스빈후부드는 만네르헤임 남작을 국방평의회 주석으로 임명하고 공산주의 성향 의원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1932년 2월, 맨챌래 반란이 일어났다. 라푸아 운동은 사회민주당 대회를 방해하는 폭동에서 시작하여 농민당의 유호 수닐라 내각을 실각시킬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수닐라 내각은 불과 재작년 라푸아 운동의 압력으로 제정되었던 공화국수호법을 근거로 라푸아 운동을 국가전복세력으로 지목, 반란 엄단으로 맞섰다. 이를 파훼할 논리를 찾지 못한 스빈후부드는 라디오 방송으로 지도부만 처벌될 것이니 단순가담자들은 생업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고, 반란은 허무하게 진압되었다.
당시 핀란드의 이원집정부제는 지금과 반대로 대통령의 권한이 더 강한 형태였다.[4] 그러나 이 시기에도 총리의 권한은 결코 약하지 않았기에 상호 견제가 가능한 시스템이었고, 따라서 스빈후부드는 전횡을 휘두를 수 없었다. 1934년에는 에드빈 링코미에스가 완전한 대통령중심제로 개헌할 것을 제안했지만 스빈후부드는 거부했다. 스빈후부드는 핀란드 사민당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콘크리트 지지층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5]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중심제가 되면 빨갱이들이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내각제 하에서 국민진보당과 농민당, 스웨덴인당을 잘 달래서 우익연정을 유지하면 적어도 빨갱이 집권은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2.5. 노욕과 노망
농민당 당수 퀴외스티 칼리오는 본래 스빈후부드 못지않은 반공주의자였으나 그간의 극우세력의 준동을 거치면서 스빈후부드와 국민연합당에 환멸감을 느꼈고, 대승적으로 사민당과 손을 잡기로 했다. 당시 사민당 당권파는 배이뇌 탄네르를 비롯한 당내 우파였다. 스빈후부드가 그렇게 경계하던 농민-사민 연정이 이루어짐으로써 스빈후부드는 1937년 대선에서 칼리오에게 패배하여 낙선한다. 거기에 국민연합당의 당권도 파시즘을 극혐하던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가 장악하면서 스빈후부드는 한순간에 몰락한다.소련의 침공으로 겨울전쟁이 일어나자 스빈후부드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만나겠다고 이탈리아로 건너갔지만 교황 비오 12세만 만나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가 버린 셈이다. 계속전쟁 때는 겨울전쟁 때 잃었던 땅을 되찾는 것을 넘어 소련 영토를 적극적으로 침공(즉 히틀러의 침공계획에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 만네르헤임과 리스토 뤼티를 비롯한 국가지도부가 독일을 손절매하려고 뛰어다닐 때도 용역깡패 수괴 마르티 피흐칼라와 함께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책자를 출판해 독일과 함께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핀란드 정부는 이들의 이런 짓거리를 그냥 내버려뒀다가는 소련과의 강화에 장애가 될 것이라 판단하여 피흐칼라를 체포했다. 스빈후부드는 국가원로여서인지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퇴물 취급을 받다가 1944년 죽었다.
3. 평가
핀란드 독립 전후의 우파 거두들( 만네르헤임, 스빈후부드, 스톨베리, 파시키비, 칼리오 등) 중 스빈후부드의 말로는 유독 추악한 편이다. 자연 현대 핀란드에서의 평가도 영 좋지 못한 편이다.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좌파는 스빈후부드가 내전기 좌익학살을 방조 내지 조장한 일과 전간기에 파시스트들과 결탁한 일을 두고 현재까지도 지탄을 하고 있다. 우파들도 핀란드 대공국 시기 반러 투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대통령으로서의 행적에 대한 거론은 피한다.소련 해체 이후 그동안 소련에게 굴종해왔던 것에 대한 반동으로 스빈후부드가 재평가 되기도 했다. 1999년에는 생가가 국유박물관으로 지정되었다. 2004년 YLE가 선정한 위대한 핀란드인 67위에 랭크되었다. 참고로 38위는 핀란드 내에서 이완용 취급받는 공산주의자인 오토 빌레 쿠시넨이다. 핀란드 사람들이 진짜로 쿠시넨과 스빈후부드를 존경해서 그랬다기보다는 핀란드에서 까야 제맛인 두 근현대사 악인이다보니 파맛 첵스 사건처럼 응답자들이 트롤링을 해서 그런 것이다.
[1]
現
핀란드
피르칸마 색스메키.
[2]
혼전성은 팀그렌(Timgren).
[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핀란드의 동의 없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핀란드 사이의 국경을 확정했다. 게다가 공격하고 싶어도 그럴 병력이 없었다.
[4]
냉전기에는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이 합법독재를 휘두르며 사실상 대통령중심제 국가였다. 1980년대
마우노 코이비스토(Mauno Koivisto) 대통령 때에 들어서야 총리의 권한이 대폭 강화됐다. 제대로 의원 내각제에 가까워진 형태가 된 것은 2000년대부터이다.
[5]
아이러니하게도 이 콘크리트를 깨뜨린 것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소련의 압력에 의한 공산당 합법화였다. 사민당 지지자의 절반이 공산당으로 빠져나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