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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崇寧, Lee, Sung Nyong
1908년 음력 6월 7일[1] ~ 1994년 2월 2일
1. 개요
대한민국의 국어학자. 본관은 연안(延安)[2], 호는 심악(心岳)이다. 아명은 이경록(李慶祿)이었는데, 매동공립보통학교 학적부에는 호적계의 실수로 '이경복(李慶福)'이라는 이름으로 오기되어 있다.중세 국어의 모음 체계 연구에 힘쓴 국어학자로, 진단학회 상임 이사 및 국어학회장 등을 지냈다.
2. 생애
1908년 6월 7일 한성부 남서 대평방 수하동계 수하동(現 서울특별시 중구 수하동 39번지)의 외가에서 아버지 춘사(春沙) 이병관(李炳觀, 1858 ~ 1949) 슬하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이종녕(李鍾寧)·이식녕(李植寧), 아래로 남동생 이익녕(李益寧)이 있었다. 출생 이후 한성부 북서 순화방 사재감하패계 체부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 72번지)의 아버지 집으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아버지 이병관은 광해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광정(李光庭)의 후손으로, 경기도 파주목 조리동면 노곡리(現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에서 태어나 1890년( 고종 27)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 19위로 급제하고 1891년( 고종 28) 증광 진사시에 3등 170위로 입격한 뒤 사간원 사간(司諫, 종3품), 비서원 승(秘書院丞), 규장각 직각(直閣)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보인학교(輔仁學校)와 매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 1926년 졸업했다. 이후 삼수 끝에 1928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B조)에 입학하여 1930년 수료했는데, 이때 허난설헌의 문학론에 대해 쓴 「 허부인난설헌」이라는 졸업논문을 제출해 학과 교수들의 칭찬을 받고 학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으면서 학문의 길을 비로소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본과 법문학부로 진학해 처음에는 사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했으나, 재학 중 언어학자였던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1903 ~ 1978)의 '언어학개론' 강의를 듣고 감명을 받아 음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곧 문학과 조선어문학전공으로 전과하게 되었다. 이때 전공인 국어국문학 뿐만 아니라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그리스어까지 섭렵하며 학문에 매진했으며, 당시 전공 조교였던 조윤제로부터 조선어학을 책임지도록 하라는 권유를 받고서는 국어학 공부에 더욱 뜻을 두게 되었다. 졸업논문으로는 「조선어의 Hiatus 현상에 대하여」를 제출해 1933년 마침내 학사 과정을 졸업했다.
졸업 후 1933년부터 평양사범학교 교유로 부임하여 1945년 8.15 광복 전까지 재직하면서, 국어학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평양사범학교 재직 시절 진단학회의 학회지 진단학보에 국어 음운론에 대한 논문을 다수 기고하였다. 특히 아래아의 음가와 모음 체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당시의 연구 성과는 해방 후인 1949년 "조선어 음운론 연구 제1집 : 아래아 음고"로 편찬된다.
1945년 10월 경성대학 예과 교수, 11월 법문학부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며, 경성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개편되자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1947년 1월 예과 부장에 부임했다. 이 시기 외솔 최현배와 아래아의 음가를 두고 학술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3] 이후 1954년 4월 6일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2분과 회원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3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 音韻論硏究( 음운론연구)」이라는 학위논문으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71년 2월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했고, 1973년 8월 정년퇴임하면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그 뒤 1973년 12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에 부임했고, 1974년 한양대학교 국학연구원이 출범하자 초대 연구원장에 취임해 1980년 5월까지 역임했다. 1980년 1월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초대 대학원장에 취임했다. 1981년 4월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평소 등산을 좋아해 1948년 한국산악회 이사에 선출되었고, 1959년에는 한국산악회 부회장에 추대되었다. 1962년 4월 대한산악연맹이 출범하자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고, 1968년에는 한국직장산악인협회장에 선출되었다. 1985년에는 한국산악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1994년 2월 2일 새벽 6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1158-21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3. 평가 : 실증적 국어학의 정립
이숭녕은 소쉬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국어학에 있어서도 국수주의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과학적, 실증적인 국어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외국어 학습 및 비교언어학에 입각한 연구 태도를 견지할 것을 강조하였다.4. 참고 자료
- 이병근, 「 현대 국어학의 개척자 이숭녕 선생, 『새국어생활 』, 26권, 4호,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