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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8:18:05

모윤숙

파일:국회휘장(8대).svg 전국구 제8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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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모윤숙
毛允淑
파일:모윤숙.jpg
<colcolor=#ffffff><colbgcolor=#808080> 본관 광주 모씨
출생 1910년 3월 5일
함경남도 원산시
사망 1990년 6월 7일 (향년 80세)
서울특별시
학력 원산보통학교 (졸업)
함흥영생보통학교 (졸업)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 제적)
이화여자대학교 (문학 / 명예박사)
배우자 안호상(이혼)
종교 개신교( 감리회)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8

1. 개요2. 생애3. 낙랑클럽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언론인, 기자, 수필가, 정치인, 시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

파일:Yoon Sook Mo.png
젊은 시절의 모윤숙.

함경남도 원산시에서 모학수의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모씨[1]이고 원적지는 평안북도 정주군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영문학 전공) 선과[2]로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제적됐다.

이광수의 소개로 만난 안호상 결혼하였지만 딸 경선을 낳고 바로 이혼하였으며 1990년 서울특별시에서 80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평생 홀몸으로 살아 왔다고 한다.[3]

초기 작품인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은 ' 일제 치하에서 민족적인 진로를 모색하는 의미와 정열적인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지향'이 엿보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1937년 출간된 그녀의 산문집 <렌의 애가>는 1978년까지 53판이 출간될 정도로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판매된 책이며 1969년 김기영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시기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학병 지원 관련 강연과 저술로 친일 행각을 활발하게 펼쳤다. 특히 매일신보 기사글을 찾아보면 고정 필진급이다. 당시 그녀와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 김활란, 노천명 등인데 공교롭게도 이들 여성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8.15 광복 이후 일제히 반공을 부르짖으면서 독재 정권의 앞잡이가 되었다.[4]

1940년 11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아 1943년 4월까지 활동했다. 1941년 1월 『삼천리』에 시 「지원병에게」, 5월 『매일신보』에 시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이하여」를 발표했고 같은 해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채권가두유격대’를 꾸려 ‘애국채권’을 팔 때 종로대원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의 경성지부 발기인 겸 산하 부인대의 간사를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사업부 부원을 맡았고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도 전사(戰士)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군복 수리 근로와 조선임전보국단과 국민총력 경성부연맹이 주최한 ‘저축강조 전진 대강연회’ 연사, 5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 12월 ‘대동아전(大東亞戰)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 참여했다. 1943년 3월과 8월 작사한 군국 가요 「군국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희망」이 방송되었고, 8월 경성부와 대일본부인회 경성지부가 공동 개최한 부인계발강연회에 ‘시국에 처한 부인의 각오’란 주제로 강연했다. 같은 해 11월 12일자 『매일신보』에 시 「내 어머니 한 말씀에」를 발표하고,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선전 선동하기 위해 조직한 전위여성격려대의 강사로 활동했다. 1945년 7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의용대의 경성부 연합 국민의용대 결성식에 참석했다.
파일:Korean Commission to UN with French diplomats.jpg
1948년 12월, 파리 샤오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임시총회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준 프랑스 외무성 직원들과 감사의 만찬을 하고있는 모습. 오른쪽 끝 한복입은 여자가 모윤숙, 그 뒤로 사람 하나건너 장기영, 가장 뒤 정중앙에 장면, 그 왼편 하나건너 조병옥, 가장 왼쪽 끝에서 두번째 여자가 김활란.

1948년 제3차 UN 총회 한국 대표로 참가해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는데 사실 모윤숙이 제대로 활동한 것은 이승만 지지를 위한 로비 활동이었다.

1948년 당시 남한 단독 정부를 반대하던 인도 외교관 벵갈릴 크리슈난 크리슈나 메논[5]과 교제하면서 이승만 지지 측으로 회유시켰는데 그녀는 이에 대해서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 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6]라고 했고 메논은 이 심정 변화에 대해서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린 것은 내가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 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고 표현했다.[7] 이후 "건국의 아버지는 크리슈나 메논이고 건국의 어머니는 모윤숙이다"라는 비웃음이 당시 세간에 퍼졌다.

1948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문학 강사로 출강했으며, 부산 피난지와 휴전 후에도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이어갔다. 이후 정식으로 교수로 임용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선무 방송에 참여해 종군했다.

1955년에는 국제펜클럽 한국 대표로, 1960년에는 한국본부 회장으로 활동했다.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 3·1문화상을 수상했다.

제5공화국에서는 문학진흥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1981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90년 서울 중앙병원에서 별세했다. 1991년에는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총 12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낙랑클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낙랑클럽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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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6.25 전쟁이 지속 중이던 시기에 외국인 대상 사교클럽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것이 1951년[8] 이승만의 지시로 만들어진 '낙랑클럽'이다. 모집 조건은 영어 능통한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자였고 총 100여 명 정도[9]가 소속되었으며 이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혹은 숙명여자전문학교 출신[10]으로 영어 능통자라는 조건이었다.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6. 같이 보기


[1] 해당 본관은 전국에 1,000명도 안되는 희귀 본이며 모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함평 모씨와는 한자부터가 다르다. [2] 경성제대 예과를 거치지 않고 예과 수준의 타 학교 학력을 인정받아 소정의 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과정이다. 경성제대 예과는 남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으나 선과를 통한 입학은 여학생도 가능했다. 선과는 본과와 같이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봤으나 학위는 주지 않았는데 선과를 통해 본과로 입학하거나 편입할 수도 있고 검정시험에 통과해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3] 안호상은 훗날 유우정과 재혼하게 되고 1남 3녀를 뒀다. [4] 사실 부모형제라도 공산당이면 용서하지 말고 처단해야 한다고 외쳤을 만큼 가히 광신적인 반공주의자인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이들이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지 않았다면 당장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제주도민 30만을 다 죽여서라도 제주도의 공산당을 뿌리뽑자는 발언을 했을 만큼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조병옥도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 집에서 테러를 당해 죽을 뻔했을 정도다. [5] 단독 정부 수립 등 복잡한 상황에서 유엔 조선 임시 위원회 중립국 대표로 한국에 방문했다. [6] 신동아 1983년 2월호 [7] 런던에서 찍어낸 자신의 자서전 내용이다. [8] 이건 모윤숙의 주장인데 실제로는 미군정기에 설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낙랑클럽에 소속된 인물 중 하나가 김수임인데 김수임은 6.25 전쟁 직전에 리강국 사건으로 총살되었기 때문이다. 미군 CIC 보고서에 의하면 낙랑클럽의 설립 시기는 1948년에서 1949년으로 추정된다. [9] 적게 잡은 경우가 50명, 많이 잡은 경우는 최대 300명 이상. 당장 모윤숙의 말부터 논란이 있고 관련 글들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다. [10] 많은 경우는 이화여자대학교만 언급되는데 머릿수를 많이 잡는 경우에는 숙명여자대학교도 포함된다. [11] 한국전쟁당시 경기도 광주 근처 산골에서 숨어 지내던 작자가 국군의 시체를 보고 썼다고 한다 [12] 18회 방영분에서 경성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연경(김해경의 동생. 조안 분)이 어머니에게 정신대 모집 공고문을 보여주며 "아침에 학교에 모윤숙 씨가 왔었다."는 언급으로 지나간다. 극 중에서도 열심히 정신대 홍보를 하고 다닌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