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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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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52a2a><colcolor=#ffffff> 박제가
朴齊家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Park_Chega.jpg
출생 1750년( 영조 26) 11월 5일
조선 한성부
사망 1805년( 순조 5) 7월 6일 (향년 54세)
조선 한성부
본관 밀양 박씨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초정(楚亭)[1]
부모 부친 - 박평(朴坪)
모친 - 전주 이씨
부인 덕수 이씨 - 이관상(李觀祥)의 딸
자녀 슬하 4남
장남 - 박장림(朴長稔)
차남 - 박장름(朴長廩)
3남 - 박장암(朴長馣)
4남 - 박효석(朴孝錫)
1. 개요2. 생애
2.1. 박제가의 사신 방문 및 북학의 집필
3. 평가4.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자는 재선(在先)ㆍ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ㆍ위항도인(葦杭道人). 한양 출신이며 본관은 밀양.

2. 생애

1750년 왕실 승지 박평과 이씨 사이에서 서자로 출생했다. 그러나 박제가는 신분이 서자였던 탓에 승지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아버지 박평은 박제가를 아끼고 잘 대해주었으며 박제가에게 글재주가 있음을 알자 아들이 글을 배우도록 도와주었다.

1761년 집안이 풍비박산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국법은 한양 도성 내에서 집을 사고 파는 것으로 위장한 채 함부로 일반 백성들의 집을 빼앗는 행위를 금하였는데, 이를 '탈입(奪入) 금령'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조가 법을 제대로 시행하는지 점검하고자 불시에 위반자 목록을 보고하라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제가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씨가 걸려들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아서 박제가의 어머니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신하들은 '박제가의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고 이씨가 미망인이자 첩인 점을 감안해서 정상을 참작하자.'고 했지만, 영조는 '일일이 사정을 봐줘서는 끝도 없다.'는 다른 신하의 주장을 인용해서 원칙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에서 금령 위반자가 받는 처벌은 벽지유배형이었다. 그러나 이씨는 여자라서 유배형에 처할 수 없었고 아들 박제가 또한 당시에는 11세 미성년자였는지라, 대신 집안 노비 중 1명을 덕원으로 유배를 보내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어머니 이씨는 이 사건 이후 집안을 나와야 했고 청교, 필애, 묵동 등으로 계속 이사를 다녔다. 이후 박제가의 어머니는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렸기에 박제가는 가난하게 살아가야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을 아끼며 가난한 살림에도 박제가가 공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글재주 뛰어난 명사가 있다면 직접 찾아가서 아들에게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며 그들에게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주기도 했다.

1766년 박제가는 17세 나이로 스승 이관상(李觀祥)의 첩이 낳은 둘째 서녀와 결혼했다. 장인이자 스승인 이관상은 박제가를 아껴 박제가 부부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집에 거주하게 하며 박제가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배려를 해주었다. 박제가는 아내와 사이에서 아들 4명을 두었다.

박제가는 어린 나이에도 서화(書畵)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인정받으면서 신동으로 평가받았으며 1768년 스승인 연암 박지원을 만나 제자가 되었고 이덕무, 유득공 등 북학파 연구자들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북학파 연구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박지원에게 많은 지식을 배웠으며 이외에 이덕무, 홍대용, 류득공과도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773년 박제가가 24세가 되었을 때 그 해 겨울에 어머니 이씨가 고작 4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2] 어머니와 사이가 각별했던 박제가는 어머니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박제가가 지은 『초정전서(楚亭全書)』, 「서풍수정기후(書風樹亭記後)」에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슬픔을 말하고 있다.

1779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되었으며[3] 청나라로 가서 청나라 왕조의 문물 및 유물을 접하여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를 나누었는데 이 때를 기록하여 < 북학의(北學議)>를 집필했다. 이 때부터 박제가는 다산 정약용을 만나서 그와 친구가 되어 교류를 나누었고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청하기도 하였다.

1791년 정조의 원자(훗날 순조)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연경에 건너갔다. 정조 사후인 1801년 연경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자마자 '흉서 사건(凶書事件)'의 주모자인 윤가기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갔고 1805년 귀양이 풀렸으나 향년 56세로 사망하였다.

2.1. 박제가의 사신 방문 및 북학의 집필

박제가의 아버지는 조정 대신을 지내 글을 배웠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었으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로 명성을 얻어 상류층, 지식인들과 폭넓은 사회적 관계를 맺었고 홍대용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박제가는 북경을 직접 방문하길 원했고, 채제공(蔡濟恭)이 이덕무(李德懋)에게 북경으로 가는 그의 조공 사신단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며 북경으로 향할 수 있게 된다. 박제가는 북경에서 기윤(紀旳), 반정균(潘庭筠), 철보(鐵保), 풍신은덕(豐神股德)[4] 등 저명한 한인, 만주인 문인 50여 명과 시를 주고받거나 필담을 나눴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으로 돌아와 3개월 동안 북학의를 집필하는데 몰두한다.[5]

파일:박제가초상.jpg
1790년 박제가의 두 번째 연행 중에 북경에서 만난 중국의 화가 나빙(羅聘)이 그린 초상.[6]

박제가는 1778년 북학의를 집필하며 현재 잘 알려진 북학의 의제를 완전한 형태로 제안하게 된다. 물론 북학의 의제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박제가 이전에도 연암 일파 인물들에 의해 함께 논의되고 있었다.[7]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하나의 의제로 묶어 조선 엘리트 지식인의 경직된 태도의 전환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북학의에서 그는 다리, 도로, , 도시 건설부터 도자기, 종이, , 의 생산, 언어, 의학 등 조선이 청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을 논했다. 특히 그는 중앙정부의 주도하에 기술을 도입한 뒤 관료제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지방 관청과 민간에까지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국에서의 ‘ 수레’ 사용을 조선에도 확대하기를 원했다. 사람들이 안락하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자 화물 운반에 소모되는 인력과 축력(蓄力)을 크게 절감하는 능력으로 요약되는 수레의 기술적 효율성에 대해 박제가와 박지원은 강조했다.[8] 실제로 그들은 수레의 도입으로 인해 조선 사회 전반에 거시적인 파급 효과가 발생하여 ‘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가치’가 실현되기를 원했다.

박제가는 조선이 청의 성취를 인식하지 못하고 청의 정교한 실용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화이담론에 따라 자발적으로 고립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조선의 대청 인식은 청에 관한 매우 불완전한 지식에 기반하며, 실제로 조선은 번영한 청에 비해 낙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희를 인용하며 조선에 자신처럼 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더 많길 바란다고 말했다.[9] 박제가는 홍대용의 뒤를 이어 상류층 지식인들이 받아들이기 꺼렸던 청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3. 평가

안대회 교수는 <쉽게 읽는 북학의 : 조선의 개혁 개방을 외친 북학 사상의 정수>에서 박제가가 말한 북학의 의의를 5가지로 요약 정리해서 밝혔다.

4. 여담



[1] 이외에도 정유(貞蕤),위항도인(葦杭道人) 등 다른 호도 사용하였다. [2] 이씨가 사망한 원인은 과로사였다. 이씨는 아들의 공부를 할 비용을 댄다고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새벽에도 일할 정도로 과로를 했다. 그래서 과로로 인해 몸이 허약해졌는데 그 와중에도 일을 손에 놓지 않다가 결국 쓰러져 죽었다. [3] 류득공, 이덕무,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정조가 최초로 임영한 초대 4검서이다. 영조 때부터 서얼 출신도 문과 실시가 가능했고, 정조 때부터는 청요직인 규장각 검서관까지 진출을 하였다 [4] 니오후루 허션의 아들이자 건륭제 부마이다. [5] 왕위안충(王元崇), 「조선은 청제국에 무엇이었나」, 손성욱, 너머북스. 2024, p.141 ~ 142 [6] 과천시추사 박물관 소장 [7] 박제가, 안대회 역,『완역 정본 북학의』"북학의서 (박지원)" 돌베개(2013), pp. 33~34 [8] 심지어 박제가와 박지원은 "움직이는 집"(能行之屋)이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다. 박제가, 안대회 역, 『완역 정본 북학의』"북학의서 (박지원)" 돌베개(2013), pp.46; 박지원, 김혈조 역, 「열하일기」 "일신 수필(馹汛隨筆)", 제1책, p.265 [9] 朴齊家, 『貞蕤集』, 서울: 탐구당, 1971, pp.437~438 [10] 당시 조선은 중국대륙에 있던 청나라를 자신들이 계속 무시해오던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나라라는 생각으로 오랑캐 나라라고 생각했고, 사대부들은 진정한 중국인 명나라를 잇는 정통 나라는 바로 자기들이라는 소중화사상이 팽배해있었다. [11] 사실 강조라고 했지만, 실제론 중국어(한자) 공용론을 주장했다. 때문에 현대 학자들이 북학파라고 마냥 치켜세우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박제가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저렇게 해서라도 나라 발전을 염원했다는 부분적 옹호론도 있긴 하다. 또 정확하겐 박제가는 후술되어있듯 청나라가 아닌 재조지은과 대명사대를 강조한 명나라 추종자였다. 청의 기술을 배워 명의 복수를 하자는 뜻이다. [12] 한 번에 냉면 3그릇과 만두 100개를 먹었다기보다는 한번에 냉면 3그릇과 만두 100개를 먹어치울 것 같은 먹보였다는 뜻인 듯. [13] 후일 정약용은 형 정약전 흑산도에 유배된 후 고기가 먹고 싶은데 어찌해야 하냐고 편지를 보내자, 개고기를 먹으라며 박제가에게 배운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14] 흥미롭게도 동시기에 살았던 박지원도 자신이 썼다고 여겨지는 허생전에서 허생의 입을 빌려 부국강병을 위해 호복 입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던 조무령왕을 언급하며 조선 국내의 북벌론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