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15:25:08

윤선도

남인
南人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동인
선조
(1575 ~ 1608)
이황 정개청 이덕형 김성일 류성룡
우성전 정구 김응남 이원익 심희수
허성 윤승훈 신식 이광정 신용
정경세 이성구 이준
광해군 - 인조
(1608 ~ 1649)
근기남인 (북인) 영남남인
정구 장현광 윤선도 윤휴 이현일
이하진 이수광
효종 - 숙종
(1649 ~ 1720)
윤선도 허목 민희 민점 윤휴
목내선 류형원 이서우 김덕원 민암
이의징 신경제 이운징 신필청 장희재
청남 탁남
허목 홍우원 윤휴 허적 권대운
이원정 오시수 오정창 류혁연 허견
경종 이후
(1720 ~ )
실학 (중농학파) 탁남
이익 이중환 류득공 정사효 이인좌
청남
신서 공서 (벽파)
채제공 이가환 이승훈 신후담 안정복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홍낙안 목만중
세도 정치
조선의 붕당
( 관학파 · 훈구파 · 사림파 · 동인 · 서인 · 남인 · 북인 · 소론 · 노론 · 개화당 · 수구파 · 정동파 · 위정척사파 · 급진개화파 · 온건개화파)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문화부 심볼.svg 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90년
7월
김정희
8월
장영실
9월
김소월
10월
세종대왕
11월
김홍도
12월
신재효
1991년
1월
나운규
2월
정철
3월
한용운
4월
김정호
5월
방정환
6월
정약용
7월
문익점
8월
안익태
9월
허준
10월
주시경
11월
윤선도
12월
이해랑
1992년
1월
이황
2월
정선
3월
박지원
4월
우장춘
5월
신사임당
6월
류성룡
7월
일연
8월
홍난파
9월
고유섭
10월
이윤재
11월
안창호
12월
윤동주
1993년
1월
이이
2월
이인문
3월
장보고
4월
이천
5월
윤극영
6월
원효
7월
지석영
8월
안중근
9월
박연
10월
최현배
11월
장지연
12월
윤백남
1994년
1월
우륵
2월
황희
3월
김유정
4월
홍대용
5월
강소천
6월
이상백
7월
안견
8월
박은식
9월
박승희
10월
이희승
11월
정도전
12월
신채호
1995년
1월
강세황
2월
조식
3월
월터 정
4월
최무선
5월
이원수
6월
김병로
7월
이육사
8월
김구
9월
채동선
10월
김윤경
11월
이수광
12월
곽재우
1996년
1월
김만중
2월
최치원
3월
이순지
4월
서재필
5월
김명국
6월
유일한
7월
도선
8월
심훈
9월
왕산악
10월
정인승
11월
전형필
12월
이제마
1997년
1월
송석하
2월
성현
3월
최윤덕
4월
이중환
5월
초의 (의순)
6월
한호
7월
이세보
8월
박제가
9월
박진
10월
장지영
11월
왕인
12월
송진우
※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윤선도
尹善道 | Youn Sun-do
파일:yunsundo.jpg
<colbgcolor=#94153e> 시호 충헌(忠憲)
본관 해남 윤씨(海南 尹氏)[1]
성명 윤선도(尹善道)
약이(約而)
고산(孤山), 해옹(海翁)
출생 1587년 7월 27일[2]
한성부 동부 연화방[3]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사망 1671년 7월 16일[4] (향년 83세)
전라도 영암군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
(現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411번지)
직업 시인, 정치가, 학자
붕당 [[동인(조선)|
동인
]] (1575 - 1591)
[[남인(조선)|
남인
]] (1575 - 1671)
부모 부친 - 윤유심(尹惟深, 1551 ~ 1612)
모친 - 순흥 안씨(順興 安氏, 1551 ~ 1609) 안계선(安繼善)의 딸
형제자매 형 - 윤선언
남동생 - 윤선계, 윤선하
부인 초배 남원 윤씨(南原 尹氏, 1588 ~ 1655)
- 윤돈(尹暾)의 딸
계배 한양 조씨
자녀 슬하 7남 3녀
장남 - 윤인미(尹仁美, 1607 ~ 1675) 윤씨 소생
차남 - 요절(? ~ 1630 이전) 윤씨 소생
3남 - 윤의미(尹義美, 1612 ~ 1636) 윤씨 소생
4남 - 윤예미(尹禮美, 1619 ~ 1669) 윤씨 소생
장녀 - 청송 심씨 심광면(沈光沔, 1622 ~ 1647의 처
차녀 - 이보만(李保晩)[5]의 처 윤씨 소생
5남 - 윤순미(尹循美, 1638 ~ 1667) 조씨 소생
3녀 - 이익로(李翼老)의 측실 조씨 소생
6남(서자) - 이름 미상(1631 ~ 1639)
7남(서자) - 윤직미(尹直美, 1643 ~ 1724) 측실 순창 설씨 소생
서명
파일:윤선도 서명.svg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작품
4.1. 산중신곡〔山中新曲〕
4.1.1. 만흥(漫興) 4.1.2. 조무요(朝霧謠)4.1.3. 하우요(夏雨謠)4.1.4. 일모요(日暮謠)4.1.5. 야심요(夜深謠)4.1.6. 기세탄(饑世歎)4.1.7. 오우가(五友歌)
4.2.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4.2.1. 추야조(秋夜操)4.2.2. 춘효음(春曉吟)4.2.3. 고금영(古琴詠)
4.3. 증반금 〔贈伴琴〕4.4. 초연곡 〔初筵曲〕4.5. 파연곡 〔罷宴曲〕4.6.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5. 원림
5.1. 수정동 원림5.2. 금쇄동 원림5.3. 부용동 원림
6. 풍수지리
6.1. 산릉의〔山陵議〕6.2. 고산 윤선도 묘소6.3. 명지관 이의신과의 관계
7. 의학
7.1. 중궁전과 대전에 올렸던 처방전들7.2. 화제(和劑)
8. 여담9.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조선조 문신이며 시조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예조참의(禮曹參議)의 벼슬을 하였으며,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2. 생애

1587년 7월 27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윤유심(尹惟深, 1551 ~ 1612)[6]과 어머니 순흥 안씨(1551 ~ 1609)[7]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8] 아버지 윤유심은 별제(別提)를 지내다가 1576년(선조 9) 식년 생원시에 2등 20위로 입격한 뒤 음서로 1587년(선조 20) 청안현감(淸安縣監, 종6품), 1597년(선조 30) 사헌부 감찰(監察, 정6품)을 거쳐 1605년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종3품)에 올랐다. 출생 이후 첫째 작은아버지 윤유기(尹惟幾, 1554. 9. 19 ~ 1619. 5. 13)[9]에 입양되었다. 양아버지 윤유기는 1576년 식년 생원시에 3등 23위로 입격하고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에 올랐다.

1612년( 광해군 4) 증광(增廣) 진사시에 1등 2위로 입격한 뒤 성균관 유생으로 얼신(孼臣)인 이이첨과 그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양부 윤유기가 이이첨과 같은 당파인 대북파 임에도 # 집권세력이 저지르는 불의를 보면 충분(忠憤)의 상소를 올렸으나, 그들의 무함(誣陷)으로 세 차례나 벽지의 유배지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집권세력인 서인들의 과도한 횡포로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등도 오히려 그를 두둔하고 마지못해 집권세력의 뜻에 동조하는 자세를 보였다.

인조반정 이후 유배에서 풀려났고, 서윤(庶尹, 종4품)에 제수되었다. 1633년(인조 11) 증광 문과에 병과 17위로 급제한 뒤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어 인조의 총애를 얻었는데, 이때가 바로 윤선도의 생애에서 출사할 첫 번째 기회였다. 이후 왕자 시절 제자였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한 뒤 다시금 기회를 얻었다. 이때에 여러 차례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으나 당쟁이 치열했던 상황 속에서 북인 가문 출신이었지만 북인의 영수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벽지에 유배를 가고 반정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南人)의 입장에서 집권 세력인 서인(西人)에 맞서 강력하게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정치적 한계를 느껴 더이상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세상의 일상사마저 뒤로한 채, 사화와 당쟁으로 인해 은거하는 조선의 유학자들의 이상향(理想鄕)인 주희(朱熹)의 운곡기(雲谷記)에 기록된 은일적(隱逸的)인 삶[10]을 찾아 자연에서 유거(幽居)하는 생활로 지냈다.

인적이 없던 깊은 산속인 해남의 수정동(현산)ㆍ문소동ㆍ금쇄동이나, 바다 가운데인 보길도 부용동의 천석(泉石)이 뛰어난 은거지에 물을 끌어오고, 나무를 심고, 그 위에 정자를 지어 자연친화적인 원림(園林)을 조경하여 산수(山水)를 즐겼으며, 그곳에 거문고와 장구, 가무(歌舞)를 배치하여 곡조를 박자에 맞게 익히도록 해서 때때로 듣고 감상하며 자기의 회포를 부치고 답답한 심정을 푸는가 하면, 〈산중신곡〉과 〈 어부사시사> 등의 시를 지었다. 시가무(詩歌舞) 합일(合一)이라는 예악사상(禮樂思想)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작용한 것이다.

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朝鮮)의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했다.

또한 그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널리 경사(經史), 백가(百家)를 읽었으며, 의약(醫藥), 복서(卜筮), 음양(陰陽), 지리(地理)까지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의약에도 뛰어나 내의원에서 수차례 그를 불러 왕과 중궁전, 대비전의 의약에도 참여케 하고, 정적이었던 원두표(元斗杓)의 심한 설사병을 치료해주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효종이 승하하자 능자리를 선정하는 간산(看山)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정조대왕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융릉[11]으로 옮기면서 그를 가리켜 "오늘날의 ' 무학'으로 신안(神眼)을 가졌다"라고 칭송하였다.

노년에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송시열이 효종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서인세력과 함께 복제문제로 효종을 서자 취급하는데에 격분하여 논례소(論禮疎)와 예설(禮說) 2편을 상소했다가 험난한 유배생활을 마치고, 85세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유훈에 따라 그가 생전에 점지해 놓았던 전남 해남 구시리 문소동터에 안장(安葬)되었다.

사후 숙종이 하교(下敎)하기를 “이제 전례(典禮)가 바르게 되고 시비(是非)가 정해져서 송시열이 이미 악당(惡黨)의 우두머리의 죄인으로 처벌받았다. 그러고 보면 비록 윤선도의 관작(官爵)을 회복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저승의 원통함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니, 의정(議政)을 추증(追贈)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 중에 허적이 과중(過重)하다고 하므로, 마침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했다.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 탓에 4번이나 유배를 당하며 모두 25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했다.이러다보니, 남인 내부에서도 적을 만들었는데 1675년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숙종은 그를 특별히 의정(정승)으로 추증해야 한다고 했고 허목 윤휴가 계속 추천하여 그를 의정 벼슬 중의 하나를 추증하려 했으나 허적, 권대운 등 탁남파의 반대로 실패하고 결국 이조판서에 추증된다.

3. 가족관계

고조(高祖) 윤효정(尹孝貞)은 생원(生員) 출신으로 은자(隱者)의 덕을 소유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호(號)는 어초은(漁樵隱)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증조(曾祖) 윤구(尹衢)는 호가 귤정(橘亭)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으로 당세(當世)에 저명하였다. 중종 초년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현인(賢人)들과 장차 큰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끝내 기묘사화(己卯士禍)에 걸려 찬출(竄黜)되었으며 전원(田園)에 돌아가 생을 마쳤다. 기묘 명신(己卯名臣: 기묘사화 때에 화를 입은 사림[士林])으로 이 사실이 기묘당적(己卯黨籍 기묘년에 화를 입은 제유[諸儒]의 약전[略傳])에 실렸다. 관직은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이르렀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윤구는 홍중(弘中), 의중(毅中), 공중(恭中) 삼형제를 두었다. 장남 윤홍중(尹弘中)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차남 윤의중(尹毅中)은 문과 출신으로 관직이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이르렀으며, 선조조(宣廟朝)의 명경(名卿)이었다.

윤홍중은 아들이 없고, 윤의중은 유심(唯深), 유기(唯幾), 유순(唯순)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윤유심(尹唯深)은 관직이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에 이르렀고, 윤유기(尹唯幾)는 문과 출신으로 관직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윤홍중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윤유기는 능성 구씨(綾城具氏) 현령(縣令) 운한(雲翰)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역시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윤유심의 차자(次子)로서 윤유기의 뒤를 잇게 되었다.

윤유심의 비(妣)인 생모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손이고, 좌의정(左議政) 현(玹)의 손녀이며, 승의랑(承議郞) 계선(繼善)의 딸이다.

부인 남원 윤씨(南原尹氏, 1588- 1655)[12]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인미(仁美), 의미(義美), 예미(禮美) 그리고 두 딸이 있으니, 심광면(沈光沔: 청송)의 처와 이보만(李保晚: 광주)의 처이다. 추우당 심단(沈檀)이 심광면의 아들이다.

첫째 아들: 윤인미(尹仁美, 1607년? ~ 1674년, 진사, 자(字)는 자수(子壽)이고 호(號)는 뇌치헌(牢癡軒))
며느리: 전주 유씨(감사(監司), 유항(柳恒)의 딸, 유영경의 종손녀)
손자: 윤이석(尹爾錫)
손자의 며느리: 청송심씨 (종친부 전부(宗親府 典簿) 심광사(沈光泗)의 딸, 이조판서 심액(沈詻)의 손녀, 남인 산림 공조참의 심광수(沈光洙)의 조카)
증손자: 윤두서(尹斗緖)

둘째 아들: 윤의미(尹義美, 1612년 9월 25일 - 1636년 5월, 진사) - 형 윤선언(尹善言)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손자: 윤이후(尹爾厚)

셋째 아들: 윤예미(尹禮美, 1619년 4월 28일 - 1669년 8월)
며느리: 이씨, 이숙진(李叔鎭)의 딸
손자: 윤이구(尹爾久, ? - 1656년 3월)
사위: 심광면(沈光沔, 1622년 - 1647년)
외손자: 심단(沈檀, 1645년 - 1730년)
사위: 이보만(李保晩) 또는 이간만(李侃晩)

경주 설씨(1620년 ~ ?)와의 사이에
윤직미(尹直美, 1643년 ~ 1724년): 학관(學官). 보길도에서 그를 모시고 생활하였으며 윤선도의 시문과 작품을 일부 정리하여 보존, 후대에 전하였다.
사위: 황도빈(黃道彬), 양헌직(楊憲稷)

국보 제240호 윤두서 자화상을 그린 이가 증손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이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이 윤두서의 외증손자이다. 현대 후손으로는 제12대 대법원장을 지낸 윤관(尹錧), 크라운제과 창업주 백포 윤태현이 있다.

4. 작품

그가 해남 수정동, 금쇄동, 보길도 부용동, 양주 고산, 함북 경원 등에서 지은 75수의 시조(詩調)가 고산유고에 실려 있다.[13]

가사(歌辭)의 배열 순서는 다음과 같다.
〈산중신곡(山中新曲)〉 18수:
만흥(漫興) 6수, 조무요(朝霧謠) 1수, 하우요(夏雨謠) 2수, 일모요(日暮謠) 1수, 야심요(夜深謠) 1수, 기세탄(饑世歎) 1수, 오우가(五友歌) 6수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장:
추야조(秋夜操) 1수, 춘효음(春曉吟) 1수, 고금영(古琴詠) 1수
〈증반금(贈伴琴)〉 1장
〈초연곡(初筵曲)〉 2장
〈파연곡(罷宴曲)〉 2장
〈어부사시사(漁父四詩詞)〉 40수
〈몽천요(夢天謠)〉 3장
〈견회요(遣懷謠)〉 5편
〈우후요(雨後謠)〉 1장

4.1. 산중신곡〔山中新曲〕

1642년 임오년( 인조 20년) 금쇄동(金鎖洞)에 있을 때 지은 시조들이다.

4.1.1. 만흥(漫興)

바회 아래 뛰집을 짓노라 ᄒᆞ니
그 모론 ᄂᆞᆷ들은 욷ᄂᆞᆫ다 ᄒᆞᆫ다마ᄂᆞᆫ
어리고 햐암의 뜻의ᄂᆞᆫ 내 分분인가 ᄒᆞ노라
산수간 바위 아래 띳집을 짓는다 하니
그 모르는 남들은 비웃는다 한다마는
어리석은 내 뜻에는 분수인가 하노라
보리밥 픗ᄂᆞᄆᆞᆯᄋᆞᆯ 알마초 머근 後후에
바횟 긋 믉ᄀᆞ의 슬ᄏᆞ지 노니노라
그 나믄 녀나믄 일이야 부ᄅᆞᆯ 줄이 이시랴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추 먹은 뒤에
바위 끝 물가에서 실컷 노니노라
여남은 일이야 부러울 줄이 있으랴
잔 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ᄇᆞ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옴이 이리ᄒᆞ랴
말ᄉᆞᆷ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ᄒᆞ노라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던 임이 온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없어도 못내 좋아하노라
누고셔 三도곤 낫다 ᄒᆞ더니 萬이 이만ᄒᆞ랴
이제로 헤어든 巢ㅣ 냑돗더라
아마도 林을 비길 곳이 업세라
누구는 삼공[14]보다 낫다 하더니 만승[15]이 이만하랴
이제 헤아려보니 소부(巢父)와 허유[16]가 약았더라
아마도 자연 속 한가한 흥취를 비길 곳이 없으리라
내 셩이 게으르더니 하ᄂᆞᆯ히 아ᄅᆞ실샤
인간만ᄉᆞᄅᆞᆯ ᄒᆞᆫ 일도 아니 맛뎌
다만당 ᄃᆞ토리 업슨 江강산을 딕희라 ᄒᆞ시도다
내 성품이 게으른 걸 하늘이 아셔서
인간 만사를 하나의 일도 아니 맡겨
다만 다툴 이 없는 강산을 지키라 하시도다
강산이 됴타 ᄒᆞᆫᄃᆞᆯ 내 分분으로 누얻ᄂᆞ냐
님군 恩ᄅᆞᆯ 이제 더옥 아노이다
아므리 갑고쟈 ᄒᆞ야도 ᄒᆡ올 일이 업세라
강산이 좋다 한들 내 분수로 누웠느냐
임금의 은혜를 이제 더욱 알겠노이다
아무리 갚고자 해도 해드릴 일이 없어라

4.1.2. 조무요(朝霧謠)

월츌산이 놉더니마ᄂᆞᆫ 믜운 거시 안개로다
왕뎨일봉을 一일시예 ᄀᆞ리와다
두어라 ᄒᆡ 퍼딘 휘면 안개 아니 거드랴
월출산이 높더니마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왕제일봉(天王第一峯)을 일시에 가리웠다
두어라 햇빛 퍼진 후면 안개가 아니 걷히랴

4.1.3. 하우요(夏雨謠)

비 오ᄂᆞᆫᄃᆡ 들희 가랴 사립 닷고 쇼 머겨라
마ᄒᆡ ᄆᆡ양이랴 잠기 연장 다ᄉᆞ려라
쉬다가 개ᄂᆞᆫ 날 보아 ᄉᆞ래 긴 밧 가라라
비 오는데 들에 가랴 사립문 닫고 소 먹여라
장마가 매양이랴 쟁기와 연장 다스려라
쉬다가 개는 날 보아 사래 긴 밭 갈아라
심심은 ᄒᆞ다마ᄂᆞᆫ 일 업ᄉᆞᆯᄉᆞᆫ 마히로다
답답은 ᄒᆞ다마는 閑한가ᄒᆞᆯᄉᆞᆫ 밤이로다
아ᄒᆡ야 일즉 자다가 東동 트거든 닐거라
심심은 하다마는 일 없기로는 장마로다
답답은 하다마는 한가하기로는 밤이로다
아이야 일찍 잤다가 동 트거든 일어나거라

4.1.4. 일모요(日暮謠)

셕양 넘은 後후에 山산기ᄂᆞᆫ 됴타마ᄂᆞᆫ
황혼이 갓가오니 物믈ᄉᆡᆨ이 어둡ᄂᆞᆫ다
아ᄒᆡ야 범 므셔온ᄃᆡ 나ᄃᆞᆫ니디 마라라
석양 넘은 후에 산기운은 좋다마는
황혼이 가까우니 물색이 어두워진다
아이야 범 무서우니 나다니지 말아라

4.1.5. 야심요(夜深謠)

ᄇᆞ람 분다 지게 다다라 밤 들거다 블 아사라
벼개예 히즈려 슬ᄏᆞ지 쉬여보쟈
아ᄒᆡ야 새야 오거든 내 ᄌᆞᆷ와 ᄁᆡ와스라
바람 분다 지게문 닫아라 밤 들었다 불 앗아라
베개에 드러누워 실컷 쉬어 보자
아이야 새어 오거든 내 잠을 깨워다오

4.1.6. 기세탄(饑世歎)

환자 타 산다 ᄒᆞ고 그ᄅᆞᆯ사 그르다 ᄒᆞ니
이졔의 노픈 줄을 이렁구러 알관디고
어즈버 사ᄅᆞᆷ이야 외랴 ᄒᆡ운의 타시로다
환자(還子) 타 먹고 산다고 그것을 그르다 하니
백이와 숙제가 높은 줄을 이럭저럭 알겠구나
아아 사람이 그른 것이랴 세운(世運)의 탓이로다

4.1.7. 오우가(五友歌)

내 버디 몃치나 ᄒᆞ니 水슈셕과 松숑듁이라
동산의 ᄃᆞᆯ 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ᄉᆞᆺ 밧긔 또 더ᄒᆞ야 머엇ᄒᆞ리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물〔水〕
구룸 빗치 조타 ᄒᆞ나 검기ᄅᆞᆯ ᄌᆞ로 ᄒᆞᆫ다
ᄇᆞ람 소ᄅᆡ ᄆᆞᆰ다 ᄒᆞ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 뉘 업기ᄂᆞᆫ 믈뿐인가 ᄒᆞ노라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어지길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많음이라
좋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돌〔石〕
고즌 므스 일로 퓌며서 쉬이 디고
플은 어이ᄒᆞ야 프르ᄂᆞᆫ ᄃᆞᆺ 누르ᄂᆞ니
아마도 변티 아닐ᄉᆞᆫ 바회뿐인가 ᄒᆞ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른 듯 누레지니
아마도 변치 않을 건 바위뿐인가 하노라
솔〔松〕
더우면 곳 퓌고 치우면 닙 디거ᄂᆞᆯ
솔사 너ᄂᆞᆫ 얻디 눈 서리ᄅᆞᆯ 모ᄅᆞᄂᆞᆫ다
구쳔의 블희 고ᄃᆞᆫ 줄을 글토 ᄒᆞ야 아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과 서리를 모르느냐
구천까지 뿌리 곧은 줄을 이로 하여 아노라
대〔竹〕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ᄂᆞᆫ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ᄂᆞᆫ다
뎌러코 四ᄉᆞ시예 프르니 그를 됴하ᄒᆞ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키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게 사철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달〔月〕
쟈근 거시 노피 떠셔 萬만믈을 다 비취니
밤듕의 光광명이 너만 ᄒᆞ니 또 잇ᄂᆞ냐
보고도 말 아니 ᄒᆞ니 내 벋인가 ᄒᆞ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광명이 너만 한 것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4.2.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1645년 을유년( 인조 23년) 11월 금쇄동(金鎖洞)에 있을 때 지은 시조들이다.

4.2.1. 추야조(秋夜操)

창승이 쓷뎌시니 ᄑᆞ리채ᄂᆞᆫ 노히시되
락엽이 늣거오니 美미인이 늘글게고
댇숩픠 ᄃᆞᆯ빗치 ᄆᆞᆰ으니 그ᄅᆞᆯ 보고 노노라
쉬파리가 죽었으니 파리채는 놓았으되
낙엽이 느껴오니 어여쁜 님 늙을 게고
대숲에 달빛이 맑으니 그를 보고 노노라

4.2.2. 춘효음(春曉吟)

동이 디나거냐 雪셜풍이 어듸 가니
쳔산만산의 봄긔운이 어릐엿다
지게ᄅᆞᆯ 晨신됴애 열고셔 하ᄂᆞᆯ빗츨 보리라
엄동이 지나갔느냐 설풍이 어디로 갔느냐
천산만산(千山萬山)에 봄기운이 어리었다
지게문을 새벽에 열고서 하늘 빛을 보리라

4.2.3. 고금영(古琴詠)

ᄇᆞ렷던 가얏고ᄅᆞᆯ 줄 연저 노라보니
쳥아ᄒᆞᆫ 녯 소ᄅᆡ 반가이 나ᄂᆞ고야
이 曲곡調됴 알리 업스니 집 겨노하 두어라
버려졌던 가얏고를 줄 얹어 놀아보니
청아한 옛 소리가 반가이 나는구나
이 곡조 알 이 없으니 집에 껴 놔두어라
우연히 불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 가야(伽倻)의 고금(古琴)을 얻어 먼지를 털고서 한 번 퉁겨 보니, 청량한 열두 줄의 음색에 최선(崔仙)의 마음 자취가 완연한지라, 차탄하고 영탄(詠歎)하는 중에 절로 한 곡조가 완성되었다. 또 생각해 보니, 이 가야금이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버려진다면 먼지 쌓인 한 조각 고목(枯木)이 될 것이요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쓰인다면 오음(五音)과 육률(六律)을 이룰 수 있을 것이지만, 세상에 음률을 아는 자가 드무니 오음과 육률을 이루고 난 뒤에도 어찌 지우(知遇)를 받고 못 받는 일이 없겠는가. 그러한즉 이 가야금에 대한 감회가 단순하지 않기에 다시 고풍(古風) 한 편을 지어 이 가야금의 울울함을 쏟아 낸다.

가야금 있으나 알아주는 이 없으니 / 有琴無其人
먼지 속에 묻힌 지 몇 해이던고 / 塵埋知幾年
안족(雁足)은 반나마 부서졌어도 / 金雁半零落
오동나무 몸통 그래도 온전하여라 / 枯桐猶自全
줄 고르고 한 번 퉁기어 보니 / 高張試一鼓
빙철 소리 임천에 울려 퍼진다 / 氷鐵動林泉
서성 위에서 소리 낼 만도 하고 / 可鳴西城上
남훈 앞에서 들려 드릴 만도 하네 / 可御南薰前
귓가엔 쟁적 소리 넘쳐 나는 판이니 / 滔滔箏笛耳
이 뜻을 누구에게 전할 것인가 / 此意向誰傳
비로소 알겠노라 도연명이 / 乃知陶淵明
끝내 안족과 줄 갖추지 않은 까닭을 / 終不具徽絃

4.3. 증반금 〔贈伴琴〕

반금에게 준다는 뜻이다. 1645년 을유년( 인조 23년)에 쓰여졌다.
소ᄅᆡᄂᆞᆫ 或혹이신ᄃᆞᆯ ᄆᆞᄋᆞᆷ이 이러ᄒᆞ랴
ᄆᆞᄋᆞᆷ은 或혹이신ᄃᆞᆯ 소리ᄅᆞᆯ 뉘ᄒᆞᄂᆞ니
ᄆᆞᄋᆞᆷ이 소ᄅᆡ예 나니 그를 됴하ᄒᆞ노라
소리는 혹 낸다 한들 마음이 이러하랴
마음은 혹 이러한들 소리를 누가 내겠나
마음이 소리에 나니 그것을 좋아하노라
훌륭하오. 그대 마음이 은연중에 천지조화와 합치되어 거문고 일곱 줄에서 나는 온갖 소리들이 모두 방촌(方寸, 마음) 사이의 일이니, 내가 매양 들을 적마다 고기 맛을 잊는다오.
금쇄동(金鎖洞)의 병든 몸이.

4.4. 초연곡 〔初筵曲〕

집은 어이ᄒᆞ야 되엳ᄂᆞᆫ다 大대쟝의 功공이로다
나무ᄂᆞᆫ 어이ᄒᆞ야 고든다 고조즐을 조찯노라
이 집의 이 뜯을 알면 萬만슈무강ᄒᆞ리라
집은 어이하여 되었는가 대장(大匠)의 공이로다
나무는 어이하여 곧은가 고조줄[17]을 좇았노라
이 집의 이 뜻을 알면 만수무강하리라
술은 어이ᄒᆞ야 됴ᄒᆞ니 누록 섯글 타시러라
국은 어이ᄒᆞ야 됴ᄒᆞ니 鹽염ᄆᆡ ꥹᆞᆯ 타시러라
이 음식 이 뜯을 알면 萬만슈무강ᄒᆞ리라
술은 어이하여 좋은가 누룩 섞은 탓이어라
국은 어이하여 좋은가 염매 탄 탓이어라
이 음식의 이 뜻을 알면 만수무강하리라

4.5. 파연곡 〔罷宴曲〕

즐기기도 ᄒᆞ려니와 근심을 니즐 것가
놀기도 ᄒᆞ려니와 길기 아니 어려오냐
어려온 근심을 알면 萬만슈무강ᄒᆞ리라
즐기기도 하려니와 근심을 잊을 것인가
놀기도 하려니와 길기는 아니 어려우랴
어려운 근심을 알면 만수무강하리라
술도 머그려니와 德덕 업스면 亂란ᄒᆞᄂᆞ니
춤도 추려니와 禮례 업스면 雜잡 되ᄂᆞ니
아마도 德덕례ᄅᆞᆯ 딕희면 萬만슈무강ᄒᆞ리라
술도 먹으려니와 덕 없으면 어지러우니
춤도 추려니와 예 없으면 잡스러우니
아마도 덕례를 지키면 만수무강하리라

4.6.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1651년 신묘년( 효종 2년) 부용동(芙蓉洞)에 있을 때 지은 시조들이다.
봄〔春〕
압 개예 안개 것고 뒫뫼희 ᄒᆡ 비췬다
ᄇᆡ 떠라 ᄇᆡ 떠라
밤믈은 거의 디고 낟믈이 미러온다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강촌 온갓 고지 먼빗치 더옥 됴타
앞 강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떠라 배 떠라
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18]
강촌 온갖 꽃의 먼빛이 더욱 좋다

날이 덥도다 믈 우희 고기 떧다
닫 드러라 닫 드러라
ᄀᆞᆯ며기 둘식 새식 오락가락ᄒᆞᄂᆞ고야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낫대ᄂᆞᆫ 쥐여 잇다 濁탁쥬ㅅ甁병 시릿ᄂᆞ냐
날이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하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낚싯대는 쥐여 있다 탁주 병 실었느냐

동풍이 건듣 부니 믉결이 고이 닌다
돋 ᄃᆞ라라 돋 ᄃᆞ라라
동호ᄅᆞᆯ 도라보며 西셔호로 가쟈스라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압뫼히 디나가고 뒫뫼히 나아온다
동풍이 건들 부니 물결이 고이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꾸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아온다

우ᄂᆞᆫ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 두어 집이 ᄂᆡᆺ속의 나락들락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말가ᄒᆞᆫ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뛰노ᄂᆞ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인가
이어라 이어라[19]
어촌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맑고 깊은 소(沼)에 온갖 고기 뛰노누나

고은 볃티 쬐얀ᄂᆞᆫᄃᆡ 믉결이 기름 ᄀᆞᆺ다
이어라 이어라
그믈을 주어두랴 낙시ᄅᆞᆯ 노흘 일가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탁영가의 興흥이 나니 고기도 니즐로다
고운 볕이 쬐었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이어라 이어라
그물을 넣어 두랴 낚싯줄을 놓을 건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탁영가에 흥이 나니 고기도 잊겠도다

셕양이 빗겨시니 그만ᄒᆞ야 도라가쟈
돋 디여라 돋 디여라
안류뎡화ᄂᆞᆫ 고븨고븨 새롭고야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삼공을 불리소냐 萬만ᄉᆞᄅᆞᆯ ᄉᆡᆼ각ᄒᆞ랴
석양이 비꼈으니 그만하여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언덕 버들 물가 꽃은 굽이굽이 새롭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정승을 부러워하랴 만사를 생각하랴

방초ᄅᆞᆯ ᄇᆞᆯ와 보며 蘭난지도 뜨더 보쟈
ᄇᆡ 셰어라 ᄇᆡ 셰어라
일엽편쥬에 시른 거시 므스것고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갈 제ᄂᆞᆫ ᄂᆡ뿐이오 올 제ᄂᆞᆫ ᄃᆞᆯ이로다
방초(芳草)를 밟아 보며 난지초도 뜯어 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일엽편주에 실은 것이 무엇인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갈 적에는 안개뿐이오 올 적에는 달이로다

ᄎᆔᄒᆞ야 누얻다가 여흘 아래 ᄂᆞ리려다
ᄇᆡ ᄆᆡ여라 ᄇᆡ ᄆᆡ여라
락홍이 흘러오니 桃도원이 갓갑도다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인세홍딘이 언메나 ᄀᆞ렷ᄂᆞ니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리련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붉은 낙화 흘러오니 무릉도원 가깝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속세의 티끌이 얼마나 가렸느냐

낙시줄 거더 노코 篷봉창의 ᄃᆞᆯ을 보쟈
닫 디여라 닫 디여라
ᄒᆞ마 밤들거냐 子ᄌᆞ규 소ᄅᆡ ᄆᆞᆰ게 난다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나믄 興흥이 無무궁ᄒᆞ니 갈 길흘 니젓딷다
낚싯줄 걷어 놓고 봉창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들었나 자규새 소리 맑게 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남은 흥이 무궁하니 갈 길을 잊었도다

ᄅᆡ일이 또 업스랴 봄밤이 몃덛 새리
ᄇᆡ 브텨라 ᄇᆡ 브텨라
낫대로 막대 삼고 柴ᄉᆡ비ᄅᆞᆯ ᄎᆞ자보쟈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어부ᄉᆡᆼ애ᄂᆞᆫ 이렁구러 디낼로다
내일이 또 없으랴 봄날 밤이 곧 새리라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싯대로 막대 삼고 삽짝문 찾아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부의 생애는 이러구러 지내리로다
여름〔夏〕

구즌 비 머저 가고 시낻물이 ᄆᆞᆰ아 온다
ᄇᆡ 떠라 ᄇᆡ 떠라
낫대룰 두러메니 기픈 興흥을 禁금 못ᄒᆞᆯ돠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연강텹쟝은 뉘라셔 그려낸고
궂은 비 멎어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 떠라 배 떠라
낚싯대를 둘러메니 깊은 흥을 금치 못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안개 낀 강 겹겹의 산은 누가 그려냈는고

년닙희 밥 싸 두고 반찬으란 쟝만 마라
닫 드러라 닫 드러라
쳥약립은 써 잇노라 綠녹시의 가져오냐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무심ᄒᆞᆫ 白백구ᄂᆞᆫ 내 좃ᄂᆞᆫ가 제 좃ᄂᆞᆫ가
연잎에 밥 싸 두고 반찬일랑 장만 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푸른 갓은 쓰고 있노라 녹색 도롱이 가져오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갈매기는 내가 좇는가 제가 좇는가

마람 닙희 ᄇᆞ람 나니 蓬봉창이 서ᄂᆞᆯ코야
돋 ᄂᆞ리라 돋 ᄃᆞ라라
녀ᄅᆞᆷ ᄇᆞ람 뎡ᄒᆞᆯ소냐 가ᄂᆞᆫ 대로 ᄇᆡ 시겨라
지국총지국총어ᄉᆞ와
븍포남강이 어ᄃᆡ 아니 됴흘리니
마름 잎에 바람 부니 봉창이 서늘쿠나
돛 내리라 돛 달아라
여름 바람 일정할소냐 가는 대로 배 맡겨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북쪽 포구 남쪽 강이 어디가 아니 좋을런가
물결이 흐리거든 발을 씻은들 어떠하리
이어라 이어라
오강(吳江)에 가자하니 천년노도(千年怒濤) 슬프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초강(楚江)에 가자하니 어복충혼(魚腹忠魂) 낚을세라

버들 숲 녹음(綠陰) 어린 곳에 이끼 낀 바위 낚시터도 기특하다
이어라 이어라
다리에 도착하거든 낚시꾼들 자리다툼 허물 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학발(鶴髮)의 노옹(老翁)을 만나거든 뇌택(雷澤)에서의 자리 양보 본받아 보자

긴 날이 저무는 줄 흥에 미쳐 모르도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돛대를 두드리고 〈수조가(水調歌)〉를 불러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애내(欸乃) 소리 가운데에 만고(萬古)의 마음을 그 누가 알까

석양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깝구나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이 솔 아래 비껴 있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푸른 숲에 꾀꼬리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구나

모래 위에 그물 널고 그늘 밑에 누워 쉬자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모기를 밉다 하랴 쉬파리에 비하면 어떠한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다만 한 근심은 상대부(桑大夫)가 들을까 하는 것이네

밤사이 풍랑을 어찌 미리 짐작하리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들판 나루터에 비껴 있는 배를 그 누가 일렀는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시냇가 그윽한 풀도 진실로 어여쁘다

오두막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둘러 있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부들부채 비껴 쥐고 돌길로 올라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옹(漁翁)이 한가하더냐 이것이 구실이라

가을

속세 밖의 좋은 일이 어부의 삶 아니더냐
배 떠라 배 떠라
어옹을 비웃지 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니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계절의 흥이 한가지이나 가을 강이 으뜸이라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만경창파에 실컷 배 띄워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 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흰 구름이 일어나고 나무 끝이 흐늘댄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 타고 서호(西湖) 가고 썰물 타고 동호(東湖)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흰 마름 붉은 여뀌는 가는 곳마다 보기 좋다

기러기 떠가는 저 편으로 못 보던 산 보이네
이어라 이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취한 것이 이 흥취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석양이 비치니 뭇 산이 수놓은 비단이로다

반짝이는 물고기가 몇이나 걸렸는가
이어라 이어라
갈대꽃에 불 붙여 가려서 구워 놓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질흙 병을 기울여서 박구기에 부어다오

옆바람이 고이 부니 다른 돗자리에 돌아왔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어스름은 나아오대 맑은 흥취는 멀어진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단풍나무 맑은 강이 싫지도 밉지도 않구나

흰 이슬 비꼈는데 밝은 달 돋아 온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봉황루(鳳凰樓) 아득하니 맑은 빛을 누구에게 줄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옥토끼가 찧는 약을 호객(豪客)에게 먹이고저

하늘과 땅이 제각기인가 이곳이 어드메뇨
배 매어라 배 매어라
서풍(西風) 먼지 못 미치니 부채질해 무엇하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들은 말이 없었으니 귀 씻어 무엇하리

옷 위에 서리 내려도 추운 줄을 모르겠도다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낚싯배 좁다지만 뜬구름 같은 속세에 비겨 어떠한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내일도 이리하고 모레도 이리하자

소나무 사이 석실(石室)에 가서 새벽달을 보려 하니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빈산에 낙엽 진 길을 어찌 알아볼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흰 구름이 쫓아오니 여라의(女蘿衣)가 무겁구나

겨울

구름 걷힌 뒤에 햇볕이 두텁다
배 떠라 배 떠라
천지가 얼어붙었으되 바다는 의구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끝없는 물결이 깁 비단 편 듯하다

낚싯줄이며 낚싯대 손질하고 뱃밥을 박았느냐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소상강(瀟湘江)과 동정호(洞庭湖)는 그 물이 언다 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이때에 고기 잡기 이만한 데 없도다

얕은 개의 물고기들이 먼 소에 다 갔나니
돛 달아라 돛 달아라
잠깐 날 좋을 제 낚시터에 나가 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미끼가 좋으면 굵은 고기 문다 한다

간밤에 눈 갠 후에 경물이 다르구나
이어라 이어라
앞에는 유리 같은 만경창파요 뒤에는 옥 같은 천 겹 산이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그물이며 낚시 잊어 두고 뱃전을 두드린다
이어라 이어라
앞 개를 건너려고 몇 번이나 헤아려 보았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공연한 된바람이 행여 아니 불어올까

자러 가는 까마귀 몇 마리나 지나갔는가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앞길이 어두우니 저녁 눈발이 잦아드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아압지(鵝鴨池)를 누가 쳐서 초목의 치욕을 씻었던고

붉게 물든 벼랑 푸른 절벽이 병풍같이 둘렀는데
배 세워라 배 세워라
크고 작은 물고기를 낚으려나 못 낚으려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쪽배에서 도롱이 걸치고 삿갓 쓴 채 흥에 겨워 앉았노라

물가의 외로운 솔 혼자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궂은 구름 한하지 마라 세상을 가리운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물결 소리를 싫어하지 마라 속세의 시끄러움 막는도다

창주오도(滄洲吾道)를 예로부터 일렀더니라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칠리(七里) 여울에서 양피(羊皮) 옷은 그 어떠한 이던고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삼천 육백 날 낚시질은 손꼽을 제 어찌하던고

어와 해 저물어 간다 쉬는 것이 마땅하도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 붉은 꽃 흩어진 데 흥청이며 걸어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설월(雪月)이 서봉(西峯)을 넘어가도록 송창(松窓)에 기대어 있자

동방에 예로부터 〈어부사(漁父詞)〉가 있는데,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시(古詩)를 모아 곡조로 만든 것이다. 이 〈어부사〉를 읊조리노라면 강바람과 바다 비가 얼굴에 부딪히는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훌쩍 세속을 떠나 홀로 서려는 뜻을 가지게 한다. 이 때문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도 좋아하여 싫증 내지 않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도 칭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음향이 상응하지 못하고 말뜻이 잘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니, 이는 고시를 모으는 데 구애되었기에 국촉(局促)해지는 흠결을 면치 못한 것이다. 내가 그 뜻을 부연하고 언문을 사용하여 〈어부사〉를 지었는데, 계절별로 각 한 편씩이며 한 편은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곡조며 음률에 대해서는 진실로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며 창주오도(滄洲吾道)에 대해서는 더욱이 감히 내 뜻을 가져다 붙일 수 없으나, 맑은 강 넓은 호수에 조각배를 띄우고 물결을 따라 출렁일 때에 사람들에게 한목소리로 노래하며 노를 젓게 한다면 또한 하나의 쾌사(快事)일 것이다. 또 훗날 창주(滄洲)에서 거처할 일사(逸士)가 반드시 나의 이 마음과 뜻이 부합하여 백세의 세월을 넘어 느낌이 일지 않으리라고는 못할 것이다.

신묘년(1651, 효종2) 가을 9월 부용동(芙蓉洞)의 낚시질하는 노인이 세연정(洗然亭) 낙기란(樂飢欄) 옆 배 위에서 적어 아이들에게 보인다.


어부사 여음〔漁父詞餘音〕

강산이 좋다 한들 내 분수로 누운 것이겠는가
임금님 은혜를 이제 더욱 알겠노이다
아무리 갚고자 해도 해 드릴 일이 없어라

이것은 바로 〈산중신곡(山中新曲) 만흥(漫興)〉의 제6장인데,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여음(餘音)이 되겠기에 여기에 거듭 기록한다.


몽천요 3장 〔夢天謠 三章〕

임진년(1652, 효종3) ○고산(孤山)에 있을 때이다.

생시런가 꿈이런가 백옥경(白玉京)에 올라가니
옥황상제는 반기시나 신선들이 꺼리도다
두어라 오호연월(五湖煙月)이 내 분수임이 옳도다

풋잠에 꿈을 꾸어 십이루(十二樓)에 들어가니
옥황상제는 웃으시되 신선들이 꾸짖는구나
어즈버 백만억(百萬億) 창생(蒼生)의 일을 어느 겨를에 물으리

하늘이 이지러졌을 제 무슨 기술로 기워 내었는고
백옥루(白玉樓) 중수할 제 어떤 장인바치가 이루어 내었는고
옥황상제께 아뢰어 보려 했더니 다 못하고서 왔도다

《시경(詩經)》 〈위풍(魏風) 원유도(園有桃)〉에 이르기를 “동산에 복숭아나무 있으니 그 열매를 먹도다. 마음에 근심하는지라 내 노래 부르고 또 흥얼거리노라. 이내 마음 모르는 자들 날더러 교만한 선비라 하네. 저 사람이 옳거늘 그대는 어이하여 그러느냐 하네. 마음에 근심함이여. 그 누가 이것을 알리오. 그 누가 이것을 알리오. 또한 생각하지 않아서로다.〔園有桃 其實之殽 心之憂矣 我歌且謠 不知我者 謂我士也驕 彼人是哉 子曰何其 心之憂矣 其誰知之 其誰知之 蓋亦勿思〕”라고 하였고, 두보(杜甫)의 시에 이르기를 “강해에 은거하여 맑고 깨끗이 세월 보내고픈 마음 없지 않으나, 살아서 요순 같은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 만났으니 차마 곧바로 아주 이별 못하겠네. 동학한 늙은이에게 비웃음 받고 호탕하게 노래 부르니 더욱 소리 높도다.〔非無江海志 瀟灑送日月 生逢堯舜君 不忍便永訣 取笑同學翁 浩歌彌激烈〕”라고 하였다. 내가 탄식하고 읊조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소리로 발현되어 길게 노래 부르게 되었으니, 어찌 동학들의 비웃음 섞인 비난과 “그대는 어이하여 그러느냐.”라는 책망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이른바 “내가 옛사람을 생각하노니 실로 내 마음을 아셨도다.〔我思古人 實獲我心〕”라는 경우인 것이다.

임진년(1652, 효종3) 5월 10일에 부용동(芙蓉洞)의 낚시질하는 노인이 병으로 고산(孤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쓴다.

꿈인가 생시인가 한번 백옥경에 오르매 하늘문이 열리니
夢耶眞耶一上玉京閶闔開
옥황상제는 반기시나 신선들이 꺼리도다
玉皇靑眼群仙猜
두어라 오호연월을 한가로이 배회하도다
已矣乎五湖煙月閑徘徊
야인이 나비로 화하여 나풀나풀 십이루로 날아드니
野人化蝴蝶翩翩飛入十二樓
옥황상제는 웃음 띠셨으나 신선들이 꾸짖는구나
玉皇含笑群仙尤
어즈버 백만억 창생의 일을 어느 겨를에 물으리
吁嗟乎萬億蒼生問何由
구천(九天)이 이지러졌을 제 무슨 기술로 기워 내었는고
九重天有缺時補綴用何謨
백옥루 중수하던 날 어떤 장인바치가 이루어 내었는고
白玉樓重修日何工成就乎
옥황상제께 아뢰어 보려 했더니 물을 겨를 없는지라 돌아와 하릴없이 한숨짓노라
欲問玉皇無暇問歸來空一吁

이상은 〈몽천요〉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병신년(1656, 효종7)


견회요 5편 〔遣懷謠 五篇〕

이 이하는 무오년(1618, 광해군10) ○경원(慶源)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것인데, 여기에 부록(附錄)한다.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그르다 하나
내 몸의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밖의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있으랴

내가 한 일 망녕된 줄을 나라고 하여 모를쏜가
이 마음 어리석음도 님 위한 탓이로세
다른 사람 아무리 말해도 님이 헤아려 보소서

추성(楸城) 진호루(鎭胡樓) 밖에 울어 예는 저 시냇물아
무엇을 하려고 주야로 흐르느냐
님 향한 내 뜻을 좇아 그칠 때를 모르는도다

뫼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리워하는 뜻은 많고 많고 크고 크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나니

어버이 그리워할 줄을 처음부터 알았건마는
임금 향한 뜻도 하늘이 생기게 했으니
진실로 임금을 잊으면 그것도 불효인가 여기노라


우후요〔雨後謠〕

어떤 사람이 “시임 재상이 허물을 고치자 때마침 궂은비가 갰다.”라고 하기에, 나는 “그가 허물을 고친 것이 진실로 이 비가 개고 이 구름이 걷히고 이 앞내가 도로 맑아진 것과 같을 수 있다면 우리들이 감히 그의 인(仁)을 허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언문으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궂은비 개었단 말인가 흐리던 구름 걷혔단 말인
앞내의 깊은 소(沼)가 다 맑아졌다는 것이냐
진실로 맑기만 맑아지면 갓끈 씻어 오리라

5. 원림

윤선도는 보길도와 금쇄동(문소동, 수정동 포함)에 원림을 직접 조영하였는데, 그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 화려함을 생각하고 찾아갔다가 막상 이 원림을 대하게 되면 실망을 하게 된다. 유적지에는 순수자연, 일부의 생활공간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림의 뜻을 이해하고 대자연에 몰입하여 그를 느끼게 되면 비로서 그 앞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하여 그는 "사군자의 처세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두 가지 길일 따름이니, 조정이 아니면 산림이라 한 것은 곧 고인의 말입니다. 제가 이미 병이 들어 세로에서 행세할 수 없으니 수석에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지 아니하고 다시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자가 운곡[에 들어가고] 이자현이 청평[에 들어가며] 최고운이 가야[에 들어간 것]은 오래된 일입니다. 이원이 반곡으로 돌아가자 한퇴지는 서를 지어 찬양했고, 유지지가 여산에 살자 구양수는 시를 지어 훌륭히 여기었으니, 내가 어찌 이원과 여지지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또한 당세인이 어찌 구양수와 한퇴지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원림(園林)이란 순수자연은 그대로 둔 채 거기에 최소한의 인위만을 가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원(庭園, garden)과 다르다. 

서울대 성종상공학박사는 "윤선도는 당시 여타 선비들과 구분되는 성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탁월한 예술적 소질과 감성의 소유자란 점이고, 둘째 자연에 대한 특별한 애호와 성벽을 숨기지 않고 토로하면서 적극적으로 찾아 즐기려는, 관념에 머물었던 당시 선비들과는 다른 실천궁행(實踐躬行실제로 몸소 실행함)의 자세를 지녔으며, 세 번째 당시 사상적 한계를 뛰어넘는, 유불선을 포용하는 열린 태도와 편력, 그리고 시대를 앞선 독창적인 시각으로서 천문, 지리, 의학을 위시한 과학적 지식에 대한 폭넓은 조예와 그에 입각한 실학적 자세를 견지하였다는 점 등이다. 그의 원림들에서 당시의 유교적 관념을 뛰어넘는 자연 경물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원림에 대한 적극적인 예술적 활동과 체험이라는 점이 유달리 부각되는 것은 이같은 그의 독특한 개성에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대표적인 원림조영의 실천가로 평가하였다.

그는 원림을 조성한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빈번한 유람과 탐승을 통해 체험하고 그 경험을 시, 수필, 음악 등으로 노래함으로써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켰다

5.1. 수정동 원림

수정동 원림은 그가 성산현감을 사직하고 정치에 염증을 느껴 속세를 벗어나 깊은 산속에 은거하기로 작정하면서 찾은 은거지이다.

5.2. 금쇄동 원림

그가 수정동 원림과 문소동을 오가다 금쇄석궤를 얻는 꿈을 꾼후 발견한 은거지로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181번지 산 정상부위에 위치해 있다.

금쇄동에 관한 내용은 그가 지은 금쇄동기(金鎖洞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마치 신선세계를 찾아 올라가는 과정처럼 경물에 의미를 부여해가며 산수자연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5.3. 부용동 원림

병자호란때 근위병을 조직하여 강화도로 가던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치욕이 있자 이에 충분을 느껴 더이상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자 제주도로 가던중 보길도에 들려 부용동을 발견하고 마지막 삶터로 작정한 곳이다.

그는 부용동의 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지역은 비록 해도(海島)라고 말은 하지만, 천석이 절승(絶勝)하여 참으로 세상 밖의 선계(仙界)라서, 나의 삶을 마치도록 소요할 수가 있으니, 〈운곡기(雲谷記)〉에서 '산에서 밭 갈고 물에서 낚시하며, 성품을 기르고 서적을 읽으며, 거문고를 타고 질그릇을 두드리면서, 선왕의 풍화를 노래하면, 즐겁게 생활하며 죽음을 잊을 수 있다.'라고 말한 경지를 또 거의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집안일을 정리하고 이 산속에 숨어 살 계책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언덕을 거닐고 골짜기를 찾아가서 놀다가 쉬다가 하고 멀리 바라보기도 하며, 소나무를 어루만지고 대나무에 기대기도 하며, 물고기를 구경하고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회포를 잊곤 하나니, 옛날에 산속과 바다에 들어간 사람들이 꼭 무심(無心)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들도 대개 때를 만난 것이 좋지 못하여 포부(抱負)를 펴지 못한 채 당시 세상을 상탄(傷歎)하면서 불쾌한 기색과 우울한 회포가 없지 않았으므로 산수(山水)를 즐기며 세상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보길도 부용동의 조경에 대한 내용은 그의 5대 손인 윤위(1725~1756)가 그의 사후 78년경에 보길도를 답사한 후 작성한 보길도지(甫吉島識)에 실려있다.

6. 풍수지리

윤선도는 풍수지리에도 특별한 능력을 갖추었다. 정조대왕은 "윤선도는 오늘날의 무학(無學)’이라고 부른다. 감여(堪輿)의 학문에 대하여 본래 신안(神眼)이 있었다."라고 일컫을 정도였다. 교하천도론을 부르짖었던 명풍수 이의신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6.1. 산릉의〔山陵議〕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己亥

효종이 승하하자 간산(看審)을 위하여 윤선도를 불렀다. 이 산릉의는 그때 윤선도가 여러 곳을 둘러본 후 작성된 것이다.

과천(果川)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묘산(墓山), 광주(廣州) 안여경(安汝敬)의 묘산, 헌릉(獻陵) 이수동(梨樹洞)의 터, 영릉(英陵) 홍제동(弘濟洞)의 터 등 이상 네 곳의 산론(山論)은 초고(草稿)가 전하지 않는다.


김영렬의 묘산〔金英烈墓山〕

평평한 지맥(支脈)의 용이 멀리서부터 내려와 매우 유순(柔順)해져서 강을 굽어보는 큰 들판에 구불구불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마치 등나무 덩굴이 서로 얽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산과 하나의 물이 정답게 감싸는 곳마다 모두 혈(穴)을 짓고 있으니, 참으로 예로부터 마디마디가 옥(玉)의 땅이라고 말해지는 곳인데, 김영렬(金英烈)의 산소도 바로 여러 군데 맺혀 있는 혈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혈이 많이 맺혀 있기 때문에 단연 뛰어나게 특이한 하나의 혈이 없으니, 국가의 능침(陵寢)의 큰 용도를 논의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윤반의 묘산〔尹磻墓山〕

용혈사수(龍穴砂水)가 좋다고 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하니, 참으로 쉽게 얻지 못할 길지(吉地)입니다. 그러나 당초 대룡(大龍)이 크게 혈을 맺은 곳이 아니라서, 능침의 후보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게다가 이곳은 세조대왕(世祖大王)의 국구(國舅)의 장지(葬地)입니다. 간산(看山)하러 가는 일행이 그 산에 들어가는 것도 온당치 못할 듯하니, 감히 그 가부(可否)를 논하지 못합니다.


광주 속달의 동래군 묘산〔廣州束達東萊君墓山〕

산세가 힘차면서 약동을 하며 뭇 산들이 폭주(輻輳)하여 에워싸고 있으니, 길지라고 말할 만합니다. 그러나 명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내수구(內水口)가 조여지지 않아서 2천 보(步)쯤의 거리까지 물길이 보이니, 완전무결한 국세(局勢)는 못 되는 듯싶습니다. 그리고 비록 길지라고 말은 하지만, 하나의 산줄기 위에 장사 지낸 분묘가 무려 17기(基)에 달합니다. 200여 년 동안 대대로 큰 벼슬아치를 배출하다 보니 지기(地氣)가 새어 나간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남아 있는 것은 얼마 없을 듯합니다.


남양 홍 정승의 묘소와 홍기영의 족장〔南陽洪政丞墓所洪耆英族葬〕

용세(龍勢 산세(山勢))가 멀리서부터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서 구불구불 내려오는 가운데, 소조(小祖)의 산(山)이 존경스럽게 우뚝 서 있고, 똬리를 튼 국세가 견고하고 주밀하며, 조안(朝案)이 정답게 바라다보이니, 이곳이 길지임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홍 정승과 홍기영의 양묘(兩墓)가 모두 같은 국(局) 안에 있으면서 단지 한 겹의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또 홍기영의 묘소와 같은 맥(脈)의 약간 위에 홍섬(洪暹)의 묘소가 있으니, 이는 곧 홍기영의 아비로서 역시 정승(政丞)을 지냈습니다. 등록(謄錄)에서 말하는 홍 정승은 바로 홍언필(洪彥弼)이니, 이 사람은 홍섬의 아비입니다. 그리고 홍언필의 묘소와 같은 능선의 조금 아래에 있는 하나의 묘에는 그 비갈(碑碣)에 홍 동지(洪同知)라고 적혀 있는데, 묘소 아래의 사람들은 그 이름은 말하지 못하고 단지 홍언필의 부친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묘소는 바로 홍씨(洪氏)의 성(姓)이 이 산에서 발복(發福)한 시조(始祖)의 무덤으로, 대대로 고위 관원을 배출한 것이 100여 년을 밑돌지 않는다고 사료되니, 이곳은 정기(精氣)가 비축되어 있는 완전한 땅은 못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백발의 노파에게서 후사(後嗣)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옛사람이 깊이 경계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런 곳을 국가 능침(陵寢)의 후보지로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수원 호장 집의 뒷산〔水原戶長家後山〕 * 현 융릉자리

신이 삼가 이 산을 살펴보건대, 용혈사수(龍穴砂水)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아름다워 조그마한 결함도 없으니, 참으로 대단한 길지로서 그야말로 천 리 이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천재일우의 땅입니다. 안팎과 주변이 모두 길격(吉格)인 것에 대해서는, 여러 술관(術官)들이 모두 구체적으로 진달할 수 있을 것이니, 신이 꼭 중복해서 상세히 진달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대개 그 용의 국세〔龍局〕가 영릉(英陵)의 그것에 버금가는 만큼, 주자(朱子)가 말한 ‘종묘(宗廟)의 혈식(血食)이 길이 이어지게 하는 계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수원(水原) 향교(鄕校)의 터도 이 원국(垣局) 안에 있으면서 혈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호장(戶長) 집의 뒷산과 견주어 논할 수는 없습니다. 호장 집 뒷산의 건너편에서 또 새로 하나의 혈(穴)을 얻었는데, 여기도 똑같이 하나의 원국 안에 있고 사수(四獸 청룡, 백호, 주작, 현무)도 법도에 합치됩니다. 호장 집의 뒷산에 비교하면 고하(高下)가 현격하긴 합니다만, 여기도 쓸 수 있는 곳입니다.


낙생역의 이증 묘소〔樂生驛李增墓〕

순한 용이요 순한 사격(砂格)으로서, 국(局)을 빌려다 쓰면서 조금 혈(穴)을 맺었을 뿐이라서 눈길을 줄 만하지 않으니, 어찌 감히 국가의 용도를 의논하겠습니까. 그저 주전(廚傳)만 허비할 따름이니, 이런 곳이 등록(謄錄)에 기재되어 있다니 괴이할 뿐입니다.


양재의 새로 천거하는 산〔良才新薦山〕

원국이 에워싸 보듬고 있으면서 산세가 지극히 유순한데, 높은 곳에 자리를 잡으면 공중에 떠서 노출되고, 낮은 곳에 자리를 잡으면 우묵해서 움집처럼 됩니다. 혈을 이룬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국가의 용도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벌아치산(伐兒峙山)

남산(南山)이 끝나려 하는 부위에서 몸을 뒤집어 형세를 역전시키며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의 형국을 이루었는데 하수(下手)에 힘이 들어 있습니다. 안산(案山)과 역수(逆水)가 활처럼 감싸고 있으며, 바깥의 조산(朝山)도 정답게 바라다보이니, 완연히 하나의 길지(吉地)가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대세(大勢)를 가지고 논하건대, 이곳은 산의 배후(背後)에 해당하는 데다가, 여기(餘氣)가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명당(明堂)이 반듯하지 않으며, 용맥(龍脈) 중에 골짜기를 지나는 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니, 옛사람이 말한 병든 용이 아닌가 의심되므로 성주(聖主)의 의관(衣冠)을 모실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을 듯합니다.


왕십리의 산〔王十里山〕

원국(垣局)이 잘 둘러 있고 조산과 안산이 구비되어 있어 완연히 혈(穴)을 이룬 땅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혈과 가까운 곳의 능선에 퇴사(退卸 변화)가 없어서 그 능선의 형태가 완둔(頑鈍)하며 순욕(唇褥 혈 앞의 봉긋 솟은 부분)이 단정하지 못하니, 쓸 만한 곳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건원릉 안에서 새로 얻은 산〔健元陵內新得山〕

신이 삼가 구(舊)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의 우측 두 번째 언덕을 간심(看審)해 보건대, 용세(龍勢)가 서너 번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며 기상(氣象)이 매우 유순하였고, 안산(案山)이 정답게 수구산(水口山)과 합금(合襟)하였으며, 바깥의 조산(朝山)도 수려하였습니다. 이런 점은 좋았습니다마는, 혈도(穴道)가 급한 듯하고 혈(穴)이 있는 곳에 골바람이 비껴 불어오는 것이 흠이었습니다.

구(舊) 목릉의 좌측 첫 번째 언덕은 일찍이 장중귀인(帳中貴人)이라고 말해지던 곳인데, 귀인(貴人)이 아니라 바로 돈금(頓金)이었습니다. 그러나 용맥(龍脈)의 형세는 서너 차례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였지만, 단지 기상이 유순한 점에 있어서는 우측 두 번째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중에도 혈도는 평탄하고 혈에 임한 곳은 굽은 듯하였는데, 수구(水口)가 합금하지 못해 텅 비어 있는 공간이 꽤나 컸고, 바깥 조산의 수려함도 우측 두 번째 언덕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이 언덕의 흠이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혈도가 평탄하고 혈에 해당하는 곳에 움푹 팬 곳이 없는 것으로 본다면, 우측 두 번째 언덕에 비해서 조금 나을 듯합니다.

대개 두 개의 혈(穴) 모두에 미진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대개 건원릉(健元陵 조선 태조의 능) 국내(局內)의 남은 기운이 맺힌 것일 뿐이요, 온전한 기운이 혼융하게 이루어진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흠결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합해서 논해 보건대, 모두 쓸 수 있는 혈이긴 합니다만, 양쪽 모두 완전히 구비된 아름다운 곳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개의 혈(穴)과 수원(水原)의 산의 우열을 정하는 일은, 신(臣)이 당초에 수원의 산을 논할 적에 소견을 망녕되게 진달하였으니, 지금 감히 재차 그르칠 수 없기에 뭐라고 진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건원릉 좌측의 첫 번째 언덕〔健元陵左一岡〕

신이 일찍이 주자(朱子)의 말을 들어 보건대, 선조의 무덤 근방에서 토목공사를 일으켜 선조의 영혼을 놀라게 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간심(看審)한 건원릉의 첫 번째 언덕은, 건원릉의 입장에서 말하면 청룡(靑龍)에 해당하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60보쯤 되고, 목릉(穆陵)의 입장에서 말하면 백호(白虎)에 해당하는데 서로 떨어진 거리가 40보쯤 됩니다. 그렇다면 미안(未安)할 뿐만이 아니고, 청룡과 백호의 땅을 파서 상하게 할 경우, 선왕(先王)의 능침에 해가 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선왕의 능침에 해가 되는 점이 있다면, 용맥(龍脈)이나 혈도가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나 길한지의 여부는 논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6.2. 고산 윤선도 묘소

고산 윤선도의 묘소는 풍수지리를 하는 이들이리면 한 번쯤은 방문했을 만한 명당자리로 정평이 났다.

윤선도가 지은 금쇄동기에 보면 그가 자신의 묫자리를 발견한 기록을 남겼는데 "국고대(臺)아래 서북쪽에 깊은 계곡이 있으니 바로 옥녀동(玉女洞)이다. 내가 지난해 여름에 이곳을 얻었는데 기이한 형상이 있다."라고 하였다.

옥녀는 풍수지리 형국론에 나오는 용어로 "옥녀(玉女)는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여인으로서 도교에도 자주 등장하여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깊고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런 형국이 있는 양택이나 음택에서는 만인이 부러워하는 인물이나 재자가인(才子佳人)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윤선도는 자신이 얻은 묘소자리의 형국이 옥녀형이라 하였는데, 과연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 현손자인 낙서 윤덕희, 내손자인 청고 윤용까지 3대가 유명한 화가인 것을 보면 이 옥녀형 묘소자리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금쇄동기를 지은 시기가 55세 되던 1641(신사)년 겨울에 지었으니, 이곳을 발견한 때는 전년 여름인 54세 되던 1640(경진)년 여름이 된다.

6.3. 명지관 이의신과의 관계

교하천도론을 주장했던 조선조 명지관 이의신(李懿信)은 윤선도의 넷째 증조부인 행당공 윤복의 셋째 사위다.

해남윤씨 문중에는 당악문헌이라는 문중기록이 있는데 충헌공 유사에 보면 윤선도와 이의신과의 관련 내용이 있는데,

​"충헌공은 젊은시절 선대의 집에 불길한 조짐이 있어 이의신과 함께 산천을 두루 다녔는데 드디어 월출산 아래에서 길지 4~5곳을 얻었다. 귤정공으로부터 이하 모두 옮겨 안치하였다. 아마 충헌공은 이의신에게서 세상에서 훌륭한 것을 얻음이 또한 많다." 또

​"이의신은 경자년(1660, 현종 1) 당시에 어떤 사람의 집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충헌공이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고, 탄핵이 있을것을 추측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길 '윤씨 가문에 산소를 잘 쓴 음덕이 내리는구나'고 하였다." 한다.

이 내용을 보면 그와 이의신은 풍수지리로 자주 어울렸으며, 이의신으로부터 풍수지리에 관하여 많은 얻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7. 의학

윤선도는 의학(醫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내의원에서 불러 인조와 현종 그리고 중궁전의 의약을 하였고, 정적들의 병까지 치료해주었으며, 집과 유배지에서도 진료를 해준 약화제의 기록이 있다.
46세(1632, 인조10)때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며 예조 판서(禮曹判書)인 최명길(崔鳴吉)이 그를 유의(儒醫)로 천거하자[20] 거절하면서 말하길, "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병들어 침상에 누워 있을 적에 용렬한 의원에게 내맡기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에 견줄 수 있다. 따라서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술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 부자(天子)가 또 그 말을 《 소학(小學)》이라는 책에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소싯적에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원을 맞아 처방을 점검할 즈음에 대략 듣고 본 것이 있을 뿐이요, 의도에는 실로 어둡기 그지없으니, 어떻게 감히 지존(至尊)의 약을 함부로 의논하겠습니까. 성의는 비록 한이 없다 해도 알지 못하는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민간에서 알고 지내는 자가 간혹 와서 물어보기라도 하면 번번이 “알지 못해서 감히 알려주지 못한다.”라고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혹 일가(一家)에 같은 병증(病症)을 앓는 자가 힘은 없고 일은 급해서 의관(醫官)을 찾아볼 수 없는 경우에 나에게 와서 물어보기라도 하면, 대략 들은 바를 설명해서 채택하는 데에 참고하도록 한 것이 한두 번 있긴 하였습니다만, 그때에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거나 확신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항상 남을 그르치고 스스로를 그르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였다.

58세 1644, 인조22) 2월 인조가 병이나 그를 불러 의약하려 했으나 그도 병으로 가지 못하고 상소했으나 보고되지 않았다.

66세 (1655, 효종6) 6월 좌윤(左尹) 송시길(尹時吉)이 병으로 자문을 구하자 그가 답하였다.
"나에게 약(藥)을 물어보는 것은 바로 맹인(盲人)에게 길 안내를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탁을 받고서 그만둘 수 없기에, 애오라지 옛 처방을 참고하여 멀리서 청한 뜻에 부응하려니,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에 매우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잡치부(雜治賦)〉에 이르기를 '사기(邪氣)를 없애는 것은 도적을 쫓는 것과 같으니, 괴수는 섬멸하되 협종(脅從)은 용서해야 한다. 정기(正氣)를 기르는 것은 소인(小人)을 대하는 것과 같으니, 자기를 바르게 하고 지나치게 따지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구본론(求本論)〉에 이르기를 '그 근본을 찾지 않고 다스린다면, 음양(陰陽)의 사기(邪氣)가 더욱 벋어 나가서 제어하기 어렵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보내신 기록 중에 잡증(雜症)이 많습니다마는, 작은 것에 눈길을 주다 보면 큰 것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대병(大病)은 주(酒)가 습(濕)을 발생시키고, 습이 화(火)를 발생시키고, 화가 기(氣)를 잠식하여, 그로 인해서 기가 허(虛)해진 것이니, 담(痰)과 풍(風)은 모두 습과 화가 불러들인 것입니다. 소병(小病)은 대개 심(心)과 신(腎)이 교통하지 못하고 비(脾)와 위(胃)가 화합하지 못한 탓이니, 여러 증상은 모두 여기에 근원하는 것입니다. 대병에는 육군자탕(六君子湯)을 써야 하고, 소병에는 고암심신환(古庵心腎丸)과 삼백탕(三白湯)을 써야 합니다. 《의학입문(醫學入門)》의 잡병제강(雜病提綱) 풍조(風條)를 자세히 음미하면 육군자탕이 얕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깊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울조(鬱條)의 말단(末端)의 주(註)를 자세히 음미하면 삼백탕이 가벼운 것 같아도 실제로는 무거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의논에 대한 참고용으로 써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70세 (1656, 효종7) 중궁의 의약차 내국에 입궐했으며 72세 (1658, 효종9) 4월 공조참의 윤선도가 소를 올렸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의술의 전래는 그 유래가 깊습니다. 역대의 성군(聖君)ㆍ철보(哲輔)로서 이것에 유의하지 않은 이가 없고, 예로부터 어진 사람이나 효자라면 다 같이 이것에 주의할 줄 알았습니다. 신농씨(神農氏)가 온갖 약초들을 맛보았고 황제(皇帝)는 침구법을 창안하였으니, 이 두 임금이 성군(聖君)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또 이윤(伊尹)은 탕액(湯液)의 시조이고 적양공(狄梁公)은 침술이 신묘하였으며, 범중엄(范仲淹)은 명의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이 세 신하가 현신(賢臣)이 아니면서도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이천 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기를 ‘병상에 드러누워 있을 때 되잖은 의원에게 맡기는 것은 부자(不慈)하고 불효(不孝)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의술도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를 《소학》에 실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다 같이 도를 알지 못하면서도 이처럼 좋은 교훈을 만세에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어렸을 때 어버이의 질병 때문에 옛 의방을 검토해 보기는 하였으나, 지식이 얕아서 남들이 더러 지나친 추대를 하여도 신은 이것을 매개로 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전하 역시 이것을 가지고 신을 등용하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74세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현종의 체후(體候)가 미령(未寧)하자, 그를 불러서 약을 의논하게 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인 이상 경석(李相景奭)이 처음으로 공을 만나 보고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당초 이 사람을 본 적이 없지만 지금 약방에서 살펴보건대, 지금 막 중한 논핵(論劾)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털끝만큼도 개의(介意)하지 않으니, 천품(天稟)이 온통 나라를 위한 지성(至誠)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서 말하길, " 원두표가 설사(泄瀉)가 한도없이 나오는 병을 앓아서 윤선도에게 약을 묻자 윤선도가 냉수를 양껏 마신 뒤에 그만 두게 하였다. 원두표의 자제들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우리 집안에 화(禍)를 입히려고 하기 때문에 질병이 더욱 심해지게 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으나, 원두표가 마침내 밤에 몰래 우물가로 가서 물을 흠뻑마시고 나니 병이 잘 나았다. 자제들이 그렇게 한 까닭을 물으니, 원두표가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입히고자 한다면 어찌 약으로 죽이겠는가?'하였다.
나(정약용)는 어려서 매번 여름철 설사로 고생을 하였는데 번번이 냉수를 가지고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해 주니 또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가 남긴 약화제(藥和劑)를 보면

오선주방(五仙酒方) - 건강주,
선창약(癬瘡藥) - 버짐을 없애는 약,
회충약(蛔충藥) - 회충을 없애는 약,
해수약(咳嗽藥) - 노인들의 해수병 치료약,
복학신방(腹학神方) - 어린애들의 자라배를 다스리는 약,
우역신방(牛疫神方) - 소의 전염병을 퇴치하는 처방, 등

다양하고 신기한 처치법이 남아있어 고산선생의 의술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7.1. 중궁전과 대전에 올렸던 처방전들


7.2. 화제(和劑)

8. 여담

9. 참고 문헌


[1] 어초은공파(漁樵隱公派).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1476 ~ 1543. 2. 6)의 현손이다. [2] 음력 6월 22일 [3] 부친의 본가가 해남에 있었기에 보통 해남 출신으로 여겨진다. [4] 음력 6월 11일 [5] 또는 이간만(李侃晩) [6] 초명은 尹深으로, 해남윤씨대동보 권1 74쪽에도 이 한자로 등재되어 있다. 『임자증광생원진사방(壬子增廣生員進士榜)』에는 윤선도의 아버지 이름이 윤의(尹義)로 기재되어 있다. [7] 안계선(安繼善)의 딸이다. [8] 남동생 윤선하(尹善下)는 아버지 윤유심의 첩 소생이다. [9] 해남윤씨대동보 권1 75쪽에는 尹幾로 등재되어 있다. [10] 산수간에 밭갈고 낚시질하며 본성을 기르고 책을 읽고, 거문고 타며 장구치고 선왕의 유풍을 노래하니, 즐거움에 죽음도 잊을만 하다. [11] 윤선도가 잡은 효종의 능자리 [12] 판서(判書) 윤돈(尹暾)의 딸이었다. [13] 고산유고 제6권 하 별집에는 가사(歌辭)라고 분류되어 있다. [14] 의정부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일컫는다. [15] 만 개의 수레를 부리는 자, 즉 천자를 의미한다. [16] 자연에서의 안분지족의 삶을 대표하는 고대 중국의 인물들이다. [17] 고조는 집을 지을 때 수평 등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먹통의 옛말로, 고조줄은 먹줄을 뜻한다. [18]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정도의 추임새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라 여겨진다. [19] 흔든다는 뜻으로, 배를 저으라는 말이다. [20] 호의의 뜻이었지만 사대부가 의약에 밝다고하면 천시하던 세태에 의약은 잡학이나 기술이 아니라 의도(醫道)라고 여겼던만큼 못마땅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