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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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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 |||||
7월 김정희 |
8월 장영실 |
9월 김소월 |
10월 세종대왕 |
11월 김홍도 |
12월 신재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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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 ||||||
1월 나운규 |
2월 정철 |
3월 한용운 |
4월 김정호 |
5월 방정환 |
6월 정약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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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문익점 |
8월 안익태 |
9월 허준 |
10월 주시경 |
11월 윤선도 |
12월 이해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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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
1월 이황 |
2월 정선 |
3월 박지원 |
4월 우장춘 |
5월 신사임당 |
6월 류성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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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일연 |
8월 홍난파 |
9월 고유섭 |
10월 이윤재 |
11월 안창호 |
12월 윤동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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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
1월 이이 |
2월 이인문 |
3월 장보고 |
4월 이천 |
5월 윤극영 |
6월 원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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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지석영 |
8월 안중근 |
9월 박연 |
10월 최현배 |
11월 장지연 |
12월 윤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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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 ||||||
1월 우륵 |
2월 황희 |
3월 김유정 |
4월 홍대용 |
5월 강소천 |
6월 이상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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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안견 |
8월 박은식 |
9월 박승희 |
10월 이희승 |
11월 정도전 |
12월 신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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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 ||||||
1월 강세황 |
2월 조식 |
3월 월터 정 |
4월 최무선 |
5월 이원수 |
6월 김병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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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이육사 |
8월 김구 |
9월 채동선 |
10월 김윤경 |
11월 이수광 |
12월 곽재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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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
1월 김만중 |
2월 최치원 |
3월 이순지 |
4월 서재필 |
5월 김명국 |
6월 유일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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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도선 |
8월 심훈 |
9월 왕산악 |
10월 정인승 |
11월 전형필 |
12월 이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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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 ||||||
1월 송석하 |
2월 성현 |
3월 최윤덕 |
4월 이중환 |
5월 초의 (의순) |
6월 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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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이세보 |
8월 박제가 |
9월 박진 |
10월 장지영 |
11월 왕인 |
12월 송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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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 |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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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1974 조택원 무용가 |
1975 안수길 소설가 |
1976 홍종인 언론인 |
1977 최석채 언론인 |
1978 방정환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
1979 고유섭 미술사학자 |
1980 전봉초 음악가 |
1981 김소월 시인 |
1982 이효석 소설가 |
1982 조지훈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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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홍승연 언론인 |
1983 천관우 언론인 |
1983 이육사 독립운동가, 시인 |
1984 이원수 아동문학가 |
1984 장발 미술가 |
|
1985 강소천 아동문학가 |
1986 홍진기 언론인 |
1987 김남중 언론인 |
1990 모윤숙 시인 |
1990 주시경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
|
1994 김상만 언론인 |
1994 나운영 음악가 |
1994 이숭녕 국어학자 |
1995 공병우 한글연구가 |
1995 김소희 국악인 |
|
1995 문신 미술가 |
1995 정명훈 음악가 |
1995 이대원 미술가 |
1995 류경채 미술가 |
1996 송석하 민속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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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신용호 기업인 |
1996 조병화 시인 |
1997 신순남 미술가 |
1997 홍두표 언론인 |
1997 최창봉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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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정진숙 출판인 |
1997 고병익 역사학자 |
1998 방우영 언론인 |
1998 김연준 작곡가 |
1999 방일영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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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방종현 국어학자 |
1999 김세형 음악가 |
1999 이유태 미술가 |
1999 김흥수 미술가 |
1999 장준하 독립운동가, 언론인 |
|
1999 송건호 언론인 |
2000 황순원 소설가 |
2000 백남준 미술가 |
2000 서정주 시인 |
2001 김기창 미술가 |
|
2001 김천흥 국악인 |
2001 장우성 미술가 |
2001 김수영 시인 |
2001 최영희 역사학자 |
2002 임권택 영화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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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오지호 미술가 |
2003 박동진 국악인 |
2003 윤석중 아동문학가 |
2004 구상 시인 |
2004 이혜구 음악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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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성용 기업인 |
2005 정세영 기업인 |
2006 신상옥 영화감독 |
2006 김동원 연극인 |
2006 차범석 극작가 |
|
2006 조남철 바둑기사 |
2007 송도균 언론인 |
2007 노성대 언론인 |
2007 송범 무용가 |
2008 박경리 소설가 |
|
2008 이청준 소설가 |
2008 김영랑 시인 |
2009 유현목 영화감독 |
2010 전숙희 수필가 |
2010 앙드레 김 패션 디자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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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김영환 군인, 6.25전쟁기 해인사 폭격명령 거부 |
2011 박완서 소설가 |
2012 지관 해인사 주지 |
2012 이건희 기업인 |
2012 허동수 기업인 |
|
2012 김형규 국어학자 |
2013 이우환 미술가 |
2014 호머 헐버트 선교사, 한글 체계화 공헌 및 한글 보급·한글 홍보 공로 |
2014 전형필 문화재수집가 |
2014 이은관 국악인 |
|
2016 백성희 연극인 |
2016 임영웅 연극인 |
2017 박맹호 출판인 |
2018 최인훈 소설가 |
2018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
|
2018 정지용 시인 |
2018 황병기 국악인 |
2020 서세옥 미술가 |
2019 김성환 시사만화가, 대표작《 고바우 영감》 |
2020 손창근 미술품소장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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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윤여정 영화배우 |
2021 이어령 문화부장관, 작가, 정치인 겸 문학평론가 |
2021 박서보 화가 |
2022 송기숙 작가 |
2022 송해 희극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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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김우창 문학평론가 |
2022 김지하 시인 |
2022 이정재 배우 |
2022 황동혁 감독 |
2023 이미자 대중음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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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조수미 성악가 |
2023 이미경 기업인 |
2024 이문열 소설가 |
<colbgcolor=#fff><colcolor=#000000> 일제강점기의 시인 김소월 金素月 | Kim So-wol |
|
1934년 동아일보 게재 사진, 탈북한 셋째 아들 김정호, 그의 손자 김영돈의 사진을 참조해 만든 초상화. | |
본명 | 김정식(金廷湜, Kim Jung-sik)[1] |
출생 | 1902년 9월 7일[2] |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량동 (現 평안북도 구성시 금산리[3]) |
|
사망 | 1934년 12월 24일 (향년 32세) |
평안북도
구성군 방현면 남시리[4] (現 평양시 방현동[5]) |
|
원적 |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6] |
본관 | 공주 김씨(公州 金氏)[7] |
호 | 소월( 素 月) |
직업 | 시인 |
학력 |
남산보통학교 (졸업) 오산고등보통학교 (중퇴)[8]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도쿄상과대학 전문부 (중퇴) |
부모 |
부친 - 김성도 모친 - 장경숙 |
부인 | 홍단실 |
자녀 | 슬하 4남 2녀 |
[clearfix]
1. 개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진달래꽃》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진달래꽃》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시인. 본관은 공주(公州)로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본명보다 소월(素月, 흰 달)이라는 아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토속적인 한과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시를 써냈다.
2. 생애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리의 외가에서 아버지 김성도(金性燾, 1863.5.13. ~ ?)와 어머니 인동 장씨 장경숙(張景淑, 1882.7.15. ~ ?)[9]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자란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현 평안북도 곽산군 남단리)이다.1904년 아버지 김성도가 친척집에 음식을 싸들고 말을 타고 가던 길에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이 이 음식을 뺏으려고 김성도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구타당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으나 심한 폭행을 당한 일로 PTSD에 시달리면서 음식을 거부하며 집안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굶어 죽게 되었으며 어린 김소월은 이런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멸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후 김소월의 가족은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김소월의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했는데 김소월도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직후인 1905년 훗날 김소월의 민요적 어조에 김억과 더불어 큰 영향을 끼친 계희영이 김소월 집안에 김소월의 숙모로 들어왔다. 김소월의 숙부는 당시 경성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남편이 자리를 비워서 홀로 남은 계희영은 어린 김소월을 앉혀놓고 자신이 알던 전래 동화나 민요들을 들려주었다고 한다.[10]
width=100%]]| 오산학교 재학 당시의 모습. |
이후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보통학교(南山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었던 오산학교(五山學校)[11] 중학부로 진학했다. 오산학교 재학 중이던 1916년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결혼한다.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시로서의 스승인 김억[12]과 사상적 스승인 조만식[13]을 만났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한편 같은 시기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받던 오순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교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소월은 이미 홍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의 인연은 오순이 19살의 나이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끊어졌고 오순은 의처증이 심했던 남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당시 김소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탄식하며 김억에게 배운 시 작법으로 많은 양의 시를 썼는데 이들 시는 훗날 김소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에 실려서 김소월의 대표적인 서정시들로 자리잡았다. 김소월의 대표시 중 하나인 <초혼>은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 직후 쓰여졌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한다. 이후 1923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오늘날 히토쓰바시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하필이면 입학 직후 관동대지진과 일본의 잔혹한 한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일본의 분위기가 흉흉해진 탓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1924년 도쿄상과대학을 중퇴한 후 귀국했다. 당시 집안이 점점 기울던 김소월의 집안은 가문의 마지막 자존심[14] 겸 집안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가문의 전재산 절반을 밑천 삼아 가까스로 김소월을 도쿄상과대학에 입학시켰기 때문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아쉬움과 자책감은 김소월에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귀국 후 김소월은 스승 김억과 경성에 가서 약 4개월간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경성에서 머무는 동안 김소월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소설가 나도향[15]과 친하게 지냈으며 경성에서 구성군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25년 자신의 유일한 시집이 된 <진달래꽃>을 김억의 자비 출판으로 출간하였다.
낙향한 김소월은 할아버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광산이 경영 실패로 망한 이후 할아버지의 집에서 독립하여 <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신문 배포, 수금, 경영 모두를 혼자 도맡아서 했을 정도로 돈을 벌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신문사는 얼마 못 가서 당시 대중들의 신문에 대한 무관심과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고 말았다. 신문사가 문을 닫은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했고 결국 193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라면서 쓴 웃음을 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하며 사망 당일 김소월이 시장에서 아편을 샀다는 기록이 있어서 "김소월이 빈곤에 시달리다가 아편을 먹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고는 했다가 아편 과다 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한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소월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3. 기타
- 김소월이 서정시로 유명한 시인이다 보니 현실에 대해선 무감각할 것 같은 예술가적 이미지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1977년 발견된 그의 미발표 창작노트를 보면 가장으로서의 고된 삶[16]에 대한 고뇌와 일제 치하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적은 글이 보이는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7] 실제로 시집 < 진달래꽃>에 실린 시들로 대표되는 전성기 이후 발표한 시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시어는 '집'과 '돈'이며, 말년에는 시 쓰기를 본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취미 활동으로 여겼다고 한다.
- 한국 귀화 필기시험에 < 진달래꽃>의 지은이가 누구냐는 문제가 나온다. 즉, 김소월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소리다. 민족시인이자 한국 서정시의 원류로 불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전 국민 애송시 1위 역시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김소월 시인의 < 진달래꽃>이다.[18] 김소월은 노래로 불려진 시가 가장 많은 시인, 교과서에 맨 처음으로 시가 등재된 시인이기도 하다.
- 김소월이란 이름 석자와 인지도는 매우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진 하나 남기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김소월의 취향 때문인데 아들 김정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소월은 살아생전에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본 문서에도 있는 오산학교 재학 시절의 사진이 김정호 씨가 집에서 본 김소월의 유일한 사진일 정도였다고 한다. 참조 이렇다 보니 김소월의 이름과 시속의 화자들이 여성적인 느낌을 많이 주어 오늘날에도 가끔 그를 여류시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 자신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의 약산은 현재 북한에 속하기 때문에 남북분단 이래 남한에서는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지역이 되었으며 심지어 21세기에는 안 좋은 의미로 더 유명해졌으며, 설령 미래에 통일이 이루어지더라도,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서 타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고, 경비인력과 방사능 제거 인력을 제외한 민간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될 지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
- 흔히 김소월이 쓴 글로 오해 받는 "제 시는 사랑을 받고 있나요 그 때쯤은 독립을 했을런지요"라는 문장은 사실 소와다리출판사 마케팅 팀이 만든 문구라고 한다. #
4.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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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달래꽃 : 1999 수능 출제
- 엄마야 누나야 : 작곡가 안성현과 김광수가 각각 곡을 붙인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 초혼
- 먼 후일
- 제이 엠 에스 : 이 사이비 교주가 절대로 아니다.
- 산(山) : 1994-1 수능 출제
- 삼수갑산 : 1996 수능 출제
- 산유화
- 길
- 개여울 : 작곡가 이희목이 곡을 붙여 가수 김정희가 1967년 처음 불렀고, 이후 1972년 정미조가 리메이크해 히트했으며, 2017년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을 통해 다시 한 번 리메이크 되었다.
- 가는 길
-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1978년 해변가요제에서 배철수가 속한 그룹 활주로가 곡을 붙여 노래했다.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밴드 라스트포인트가 곡을 붙여 만들었다. 1977년 TBC 젊은이의 가요제 장려상 수상.
- 밤 : 장범준이 이 시를 바탕으로 자작곡을 만들었다. 앨범에 수록된 곡과는 다른 곡으로 일명 '김소월밤'이라고 불리는 버전이다.
5. 가족
생전 김소월은 아내 홍실단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얻었다. 이 중 장녀 김구생과 3남 김정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북한에 남았다. 맏딸 김구생은 6.25 전쟁 도중 요절했으며, 3남 김정호는 조선인민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뒤 3년 후에 대한민국 국군에 자진하여 재입대하였고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후에 남한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김소월의 시에 대한 지적재산권조차도 없으며 시인의 아들이라는 혜택도 전혀 못 받고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는 1958년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으며, 결혼 초기부터 선천적 신부전증으로 인해 몸이 허약한 아내[24]의 병수발을 평생 들어줬다고 한다. 그는 평생 남한에 아버지 김소월 문학관을 건립하고 싶어했으나,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06년에 세상을 떠났다.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김소월의 후손은 손녀 김은숙과 손자 김영돈, 그리고 증손자 3명, 총 5명이 생존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들이 할아버지의 시로 인해 받은 돈은 엠피그룹측에서 광고를 낼 때 <진달래꽃>의 문구를 패러디하며 준 돈 약간뿐이라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김소월 문학관을 만들기 위해 애썼고, 2003년 소설가 겸 한의사로 유명한 (사)새한국문학회 경암 이철호 이사장이 김소월의 후손들로부터 2003년 김소월 문학기념사업의 모든 권한을 일임받아 2019년 사재 40억원을 들여 충북 증평군에 ‘소월·경암 문학관’을 개관했다. [25]
6. 둘러보기
한국의 현대문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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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퇴폐적 낭만주의 소설 ( 김동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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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 1950년대 |
이념시(연간조선시집) · 해방기념시집 · 순수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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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
[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
[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
[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의
날개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
[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의
태평천하,
염상섭의
삼대가 있다.
[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
[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의
'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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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 (1990-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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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 |||||
7월 김정희 |
8월 장영실 |
9월 김소월 |
10월 세종대왕 |
11월 김홍도 |
12월 신재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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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 ||||||
1월 나운규 |
2월 정철 |
3월 한용운 |
4월 김정호 |
5월 방정환 |
6월 정약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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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문익점 |
8월 안익태 |
9월 허준 |
10월 주시경 |
11월 윤선도 |
12월 이해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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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
1월 이황 |
2월 정선 |
3월 박지원 |
4월 우장춘 |
5월 신사임당 |
6월 류성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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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일연 |
8월 홍난파 |
9월 고유섭 |
10월 이윤재 |
11월 안창호 |
12월 윤동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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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
1월 이이 |
2월 이인문 |
3월 장보고 |
4월 이천 |
5월 윤극영 |
6월 원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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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지석영 |
8월 안중근 |
9월 박연 |
10월 최현배 |
11월 장지연 |
12월 윤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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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 ||||||
1월 우륵 |
2월 황희 |
3월 김유정 |
4월 홍대용 |
5월 강소천 |
6월 이상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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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안견 |
8월 박은식 |
9월 박승희 |
10월 이희승 |
11월 정도전 |
12월 신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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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 ||||||
1월 강세황 |
2월 조식 |
3월 월터 정 |
4월 최무선 |
5월 이원수 |
6월 김병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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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이육사 |
8월 김구 |
9월 채동선 |
10월 김윤경 |
11월 이수광 |
12월 곽재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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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 ||||||
1월 김만중 |
2월 최치원 |
3월 이순지 |
4월 서재필 |
5월 김명국 |
6월 유일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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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도선 |
8월 심훈 |
9월 왕산악 |
10월 정인승 |
11월 전형필 |
12월 이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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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 ||||||
1월 송석하 |
2월 성현 |
3월 최윤덕 |
4월 이중환 |
5월 초의 (의순) |
6월 한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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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이세보 |
8월 박제가 |
9월 박진 |
10월 장지영 |
11월 왕인 |
12월 송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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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 ||||||
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 |
[1]
공주김씨곽산파세보 167쪽에는 金珽湜으로 등재되어 있다.
[2]
음력
8월 6일.
[3]
이북5도 행정구역으로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
[4]
출처.
[5]
왜
평안북도 한가운데에 있는 지역이 평양 소속이냐면 이곳에 북한의 전략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어
김정은이 주민들에게 특혜를 내려 준다는 의미에서 2018년 2월 10일에
평안북도
구성시 방현동(구
구성군 방현면 하단동, 와룡동, 창동 일대)만 평양에
월경지로 편입했기 때문이다.
[6]
공주 김씨 집성촌이다.
[7]
#. 곽산파(郭山派) 20세 정(珽) 항렬.
[8]
백인제,
백석,
김홍일,
함석헌,
황순원,
이중섭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다닌 학교다. 지금은
서울특별시에 있지만 당시에는
평안북도에 있었다. 김소월이 재적할 때
3.1 운동의 영향으로 학교가 폐교되어 배재고보로 편입 이적했다.
[9]
구성군 서산면 왕량동 출신으로, 장재온(張載蘊)의 딸이다.
[10]
그녀는 김소월보다 오래 살아서 훗날 김소월에 관한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11]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오산중학교&오산고등학교.
[12]
김억은 김소월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자비로 출판시켜 주기도 했고 김소월이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을 치러준 인물이다. 평소 김소월은 김억을 존경했으며 김소월의 유고 시인 <
삼수갑산> 또한 김억이 먼저 발표한 동명의 시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적은 시다. 다만 1977년 발견된 김소월의 유고에 김억이 발표한 시와 같은 시가 담겨져 있어서 김억이 김소월의 시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의혹이 있다.
[13]
김소월의 시 중 <제이 엠 에스(JMS)>라는 시가 있는데 조만식의
이니셜을 따서 지은 것이다.
[14]
김소월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도쿄 유학파였다.
[15]
<
벙어리 삼룡이>를 쓴 작가다.
[16]
특히 소월은 자신의 아버지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실질적인 가장의 의무를 하지 못한 것을 본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말년에 집안의 가장으로써 돈을 못 벌어 오는 자신의 모습에 굉장히 우울해했다고 한다.
[17]
다만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짧은 활동 기간 및 생애로 인해 현실을 비판하는 성격의 시를 발표할 여건은 안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8]
다만 조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다. 라이벌격인
윤동주의
서시 역시 매우 유명하다.
[19]
발표 당시에는 이 부분이 '반짝는'이라고 되어 있었다.
글자수를 맞추려고 일부러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
[20]
김소월이 중학생 때 쓴 시다.
[21]
접동새 전설을 모티브로 삼은 듯한 시로, 접동새 전설에서
접동새는 부모를 잃은 뒤 9명의 오빠와 같이 살던 어린 누이동생이
계모의 계속된 학대를 이기지 못하였는데 평소
남매를 시기해 오던 계모에 의해
장롱 속에 감금되어 불타 죽은 뒤 장롱 속에서 그 영혼이 새로 다시 태어난 접동새가 나왔다고 하며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누이동생을 죽인 계모도 같은 방식으로 죽었는데, 여기서는
까마귀가 나왔고 까마귀가 되어서까지 접동새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악독한 새로 나온다. 그래서 접동새는 까마귀가 된 계모가 무서워 죽어서까지도 낮에 맘 편히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밤에 이렇게 돌아다닌다고 한다.
[22]
주로 민요적이고 여성적인 느낌의 시를 쓰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성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시다.
[23]
김소월이 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다.
[24]
1999년 별세.
[25]
총 3층 규모로 1층 전시관에는 소월의 친필 작품집 300여권과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손편지, 가계도와 연보 등을 전시해 그의 생애를 한 곳에서 볼 수 있게끔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