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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3세 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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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리투아니아 제4대 국왕
스웨덴 바사 왕조 제4대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
Zygmunt III Waza
파일:King_Sigismund_Vasa_of_Poland.jpg
이름 스웨덴어 시기스문드 바사
(Sigismund Vasa)
폴란드어 지그문트 바사
(Zygmunt Waza)
리투아니아어 지그만타스 바자
(Zigmantas Vaza)
출생 1566년 6월 20일
스웨덴 마리에프레드 그립스홀름 성
사망 1632년 4월 30일 (66세)
폴란드-리투아니아 바르샤바
재위 스웨덴 국왕
1592년 11월 17일 ~ 1599년 7월 24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587년 8월 19일 ~ 1632년 4월 30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아나 (1592년 결혼 / 1598년 사망)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체[1] (1605년 결혼 / 1631년 사망)
자녀 안나 마리아,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얀 올브라흐트, 카롤 페르디난트, 알렉산데르 카롤, 안나 카타지나 콘스탄치아
아버지 스웨덴 국왕 요한 3세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2]
형제 이사벨라, 안나, 요한(이복 형제)
종교 기독교 ( 로마 가톨릭)
서명
파일:지그문트 3세 바사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선임되다2.3. 얀 자모이스키와의 갈등2.4. 스웨덴 국왕 등극과 폐위2.5. 카자크 반란2.6. 몰다비아 공략2.7. 바르샤바 천도2.8. 폴란드-스웨덴 전쟁(1600 ~ 1611)2.9.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2.10. 폴란드 - 스웨덴 전쟁(1617 ~ 1618)2.11. 폴란드-오스만 전쟁2.12. 암살 미수 사건2.13. 폴란드-스웨덴 전쟁(1621 ~ 1629)2.14. 사망
3. 가족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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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의 왕. 폴란드에서는 지그문트 3세로, 스웨덴에서는 시기스문드로 불린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566년 6월 20일, 당시 스웨덴 그립스홀름 성에 수감되어 있던 스웨덴 왕자 요한과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딸 카타지나 야기엘론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누이로 이사벨라[3], 안나[4]가 있었다. 당시 부모는 스웨덴 국왕이자 요한의 이복형인 에리크 14세의 명령으로 그립스홀름 성에 감금되어 있었다. 1567년 10월, 시기스문드의 삼촌 칼 공작이 왕에게 이들을 석방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지면서, 그는 태어난 지 1년여 만에 가족과 함께 풀려날 수 있었다. 1569년 1월 에리크 14세가 궁중 쿠데타로 폐위당하고 시기스문드의 아버지 요한이 요한 3세로 스웨덴 국왕으로 등극하면서 시기스문드는 스웨덴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스웨덴어를, 어머니로부터 폴란드어를 배웠기에 두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도 능통했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가톨릭에 푹 빠졌다. 미사를 두 번 드리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하며, 죽을 때까지 매일 성무일도와 <시간의 책>[5]을 암송했고, 예수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그림과 금세공에 재능이 있었고, 클라비코드를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었으며, 건축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다. 그는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된 뒤 베네치아와 플란데런 거장의 그림을 수집하여 폴란드 최초의 갤러리를 만들었으며, 조각, 판화, 목각, 금세공, 호박 가공 분야에 상당한 지원을 했다. 그리고 금잔, 성채, 성광, 촛대, 등잔을 만들었고 시계 만들기를 즐겼으며, 자신이 만든 물건을 교회와 친구들에게 기부했다. 그러면서도 연금술에 관심이 있었으며, 사냥을 좋아했고, 축구를 즐겼으며, 여가 시간에 과수원과 정원을 돌보기도 했다.

1583년 어머니 카타지나가 사망한 후, 아버지 요한 3세는 1585년에 카타지나의 시녀이자 루터교회 신자였던 구닐라 비엘케와 재혼했다. 칼 공작은[6] 결혼식에 불참할 정도로 반발했지만, 그는 아버지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요한 3세와 구닐라 비엘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요한은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으로 선임되면서 여러 차례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거론되었지만[7] 전부 거절하고 영지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2.2.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선임되다

1586년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587년 6월 30일, 바르샤바 인근 볼라 선거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새 왕을 뽑기 위한 선거가 소집되었다. 이 선거에는 21세의 스웨덴 왕자 시기스문드와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8]가 후보로 제안되었다. 폴란드 귀족들의 경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던 즈보로브스키 가문은 막시밀리안 3세를 지지했지만, 폴란드 대원수 얀 자모이스키는 유럽에 강대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차지해버리면 귀족들의 특권이 제한받을 것을 우려해 시기스문드를 지지했다. 스테판 바토리의 공동 여왕이었던 안나 야기엘론카는 여동생의 아들인 시기스문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별도의 회의장에 모인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어느 쪽을 특별히 지지하지 않고, 리보니아를 리투아니아에 넘겨주는 쪽을 왕으로 인정하려 했다.

1587년 8월 19일, 귀족들은 폴란드 추기경 스타니스와프 칸코프스키의 주도하에 스웨덴 왕자 시기스문드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로 추대했다. 그러나 며칠 뒤인 8월 22일, 즈보로프스키 가문은 키유프 주교 지명자 야쿠프 보로니에츠키의 주관하에 막시밀리안 3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추대했다. 여기에 리투아니아 대표단은 8월 25일 바르샤바에서 리보니아를 리투아니아에 넘겨주지 않는 한 지그문트 3세와 막시밀리안 3세 모두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폴란드의 대다수 귀족들은 지그문트 3세를 받아들였고, 지그문트 3세의 사절인 에리크 브라헤와 에리크 스파레는 왕을 대신하여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겠다고 맹세했다.

1587년 9월 말, 20척 이상의 선박으로 구성된 스웨덴 소함대가 그단스크 만 해역에 진입했다. 지그문트 3세는 이 배에서 내린 뒤 10월 7일에 올리바로 이동해 수십 명의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식으로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후 프로이센 공국의 재무관 얀 둘스키가 부재 중인 왕관 대원수 안제이 오팔린스키를 대신하여 그를 왕으로 선포했다. 다음날 그단스크로 돌아가서 배에 재탑승한 뒤 10월 20일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로 떠났다. 12월 9일 크라쿠프에 도착한 뒤 카미에니에츠 주교 바브지니에츠 고실리츠키의 환영을 받았다. 12월 27년 바벨 대성당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 스타니스와프 카르노프스키에 의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1587년 11월 24일, 폴란드 대원수 얀 자모이스키는 크라쿠프로 진군하던 오스트리아군 8,000명을 격파했다. 뒤이어 1588년 1월 24일 퇴각하는 적을 따라잡아 비치나 인근에서 또다시 격파하고 막시밀리안 3세를 체포한 뒤 크라스니스타프에 가두었다. 1589년 3월 9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는 막시밀리안 3세를 대신해 앞으로는 폴란드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비톰-벵진 조약에 서명했고, 막시밀리안 3세와 추종자들은 석방되었다. 한편, 그는 리투아니아가 리보니아를 가지는 것을 고려하겠다고 약속해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웠다.

2.3. 얀 자모이스키와의 갈등

폴란드 대원수이자 왕실 수상으로서 폴란드 전반의 국정과 군대를 이끌던 최고 실권자 얀 자모이스키는 초기에는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 국왕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그를 위해 막시밀리안 3세를 사로잡기도 했다. 1589년 3월에는 연방 국왕 선거에 관한 광범위한 개혁을 제안했는데, 여기에서 폴란드 토착 왕조의 일원만이 미래에 폴란드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주장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 폴란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을 영구적으로 배제하려 했다. 그러나 지그문트 3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동조하는 행보를 보이고 대항종교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가톨릭 연맹을 설립하려 하자, 자모이스키는 그때부터 지그문트 3세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1590년 3월에 소집된 세임에서, 자모이스키는 오스트리아의 음모 가능성과 오스만 제국의 다가오는 위협을 설명하면서, 막시밀리안 3세가 향후에 폴란드 왕위 후보로 올려질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이에 스타니스와프 카르노프스키를 비롯한 반대 세력은 이 법령에 맞서기 위해 연합을 결성했다. 이에 지그문트 3세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려 애쓴 결과, 그해 말에 재차 열린 세임에서 3월에 결정된 사항이 전면 폐기되고 막시밀리안 3세를 도왔다가 세임 출임이 금지되었던 즈보로프스키 가문이 복권되었다.

1591년, 지그문트 3세가 예수회 출신 수도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측근으로 삼는 것에 위협을 느낀 개신교 귀족들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1573년 바르샤바 조약을 준수하라고 요구하는 연합을 결성했다. 자모이스키는 이 파벌에 가담했고, 빌뉴스와 크라쿠프에서 비 가톨릭 신자들을 향한 폭동이 벌어지자 왕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에 지그문트 3세는 개신교도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개신교 파벌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향후 연합을 금지했다. 그러나 금지령은 별 실효가 없었고, 이듬해에도 개신교 인사들의 모임은 계속되었다.

1592년, 지그문트 3세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9]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아나와 결혼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완전히 화해했고, 개신교의 위협에 맞서 오스트리아와 가톨릭 동맹을 맺겠다고 서약했다. 지그문트 3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인과 결혼한 것에 불만을 품은 자모이스키는 그해 6월 1일 미코와이 제브지도프스키,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10] 등과 함께 옌제유프에서 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면서 지그문트 3세가 장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한 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오스트리아 대공 에른스트[11]에게 넘기려 한다고 주장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왕실 서명이 포함된 지그문트 3세와 에른스트 대공 사이의 편지를 증거로 제시했다.

1592년 9월 7일, 지그문트 3세는 바르샤바 세임에서 자신에게 제시된 혐의를 전면 부인하면서, 그 편지는 조작되었으며 서명은 위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보좌관들은 궁정 서기가 서명을 위조했다고 여겨 지알도보에 수감한 뒤 고문을 가했지만, 서기가 끝까지 부인하면서 무위에 그쳤다. 자모이스키는 왕이 거짓말을 하면서 무고한 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고 몰아세우면서, 용병을 포함한 모든 외국 고위 인사를 궁정에서 즉시 쫓아내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그후 세임에 모인 귀족들은 장기간 논의한 끝에 왕에 대한 지속적인 비난은 국가의 안정에 무익하고 해롭다고 여기고, 지그문트 3세에 대해 걸린 혐의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상황은 진정되었고, 자모이스키는 왕에게 공개 사과를 했지만, 지그문트 3세와 자모이스키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지그문트 3세는 자모이스키의 강대한 권력을 두려워했지만, 그의 직위를 해임하는 것은 연방법이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이에 자모이스키에게 더 높은 권위가 있는 크라쿠프 총독을 제안했지만, 자모이스키는 명예는 높지만 실권은 없는 자리로 자신을 보내려는 술책이라는 걸 눈치채고 거절했다. 이렇듯 두 사람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내전을 벌이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는 짓은 벌이지 않았다.

2.4. 스웨덴 국왕 등극과 폐위

1592년 11월 17일, 아버지 요한 3세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지그문트 3세는 세임으로부터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허가받은 뒤 스웨덴으로 향했다. 스웨덴 의회는 처음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가 등극하면 스웨덴의 지배적인 종교가 된 루터교회를 박해하려 들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지그문트 3세가 루터교회를 스웨덴의 국교로 존중하겠으며, 비루터교인이 공직에 임명되거나 교육 시스템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전쟁을 위해 자유롭게 세금을 인상하는 것을 막겠다고 약속하자 그의 등극을 받아들였다. 1594년 2월 19일 웁살라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이때 왕실 행렬에 교황의 특사가 참석하자, 스웨덴 사람들은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

즉위식을 마친 후, 지그문트 3세는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을 섭정으로 임명하고 스웨덴을 곧장 떠났다. 그후 그는 약속과는 달리 가톨릭 신자들을 주지사로 임명했고 스웨덴 의회가 아닌 자신에게 직접 책임을 지도록 했다. 여기에 클라우스 플레밍을 핀란드의 스토톨라레(ståthållare: 현지 총독)로 선임해 칼 공작을 견제하도록 했으며, 핀란드에서 가톨릭을 박해하는 것을 삼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급기야 로마 가톨릭 신자인 에리크 브라헤를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총독으로 세우자, 일부 스웨덴 귀족들의 불만이 위험한 수준으로 고조되었다.

1594년 8월 4일,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의회가 왕실의 동의 없이는 기능할 권리가 없다는 선언서를 반포했다. 그러나 칼 공작은 1595년 가을 쇠데르셰핑에서 의회를 소집한 뒤 의회는 추밀원과 상호적으로 스웨덴을 통치할 정부 수반이라고 선언했다. 플레밍이 지그문트 3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칼 공작의 행위를 반역이라고 규탄하자, 칼은 외스테르보텐 지역의 농민들을 선동해 플레밍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플레밍은 이 반란을 가볍게 진압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을 대거 처형하고 용의자들을 대상으로 가혹한 고문을 가해 민심을 잃었고, 칼은 이를 이용해 지그문트 3세와 가톨릭 세력에 대한 스웨덴 귀족과 민중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1597년, 칼 공작은 마침내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삽시간에 스웨덴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핀란드는 지그문트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저항했다. 칼 공작은 그해 9월 핀란드 해안에 상륙해 때마침 사망한 클라우스 플레밍의 미망인인 에바 스텐보크로부터 오보를 탈취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핀란드 전체를 정복할 만한 병력이 없었고, 물자도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 그래서 10월에 스톡홀름으로 철수했고, 에바는 오보를 탈환했다. 한편, 지그문트 3세를 여전히 따랐던 몇몇 고위 귀족들은 긴급 체포된 뒤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처형당했다.

크라쿠프에서 칼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지그문트 3세는 격분했다. 그는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4세로부터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그단스크, 뤼베크, 로스토크 한자동맹의 주요 항구 도시에 스웨덴과의 무역을 중단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여기에 폴란드 사략선들은 발트해에서 스웨덴 선박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598년 2월 폴란드군 5,000명을 모집한 그는 그 해 7월 23일 수송선 80척, 전함 몇 척, 칼 공작의 숙청으로부터 가까스로 빠져나온 스웨덴 귀족들을 이끌고 그단스크에서 출항해 8월 만에 칼마르에 상륙해 별다른 전투 없이 입성했다.

지그문트 3세는 여세를 이어가 스톡홀룸을 손쉽게 공략했고, 우플란드의 스웨덴 기병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등지에서 새로운 군대를 소집했다. 칼 공작이 이끄는 병력은 수적으로는 지그문트 3세가 이끄는 군대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잘 훈련되지 않은 민병대라서 전투력이 허약했다. 1598년 9월 18일 스토녜보르 전투에서,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가 칼 공작이 이끄는 민병대를 상대로 큰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던 스웨덴인들이 무참히 죽어가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던 그는 도망치는 적군을 끝까지 추격해 섬멸하자는 얀 자모이스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전열을 재정비할 여유를 얻은 칼 공작은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5,200명 가량을 이끌던 지그문트 3세에게 접근했다.

1598년 9월 27일, 스토녜브로에 주둔하고 있던 지그문트 3세는 칼 공작의 군대가 동쪽에서 접근하자 즉시 도시 밖으로 출격했다. 양자는 스탕 강의 스토녜브로 다리에서 첫번째로 맞붙었고, 지그문트 3세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다. 칼 공작이 인근 언덕 위로 후퇴하자, 지그문트 3세는 이들을 마저 무찌르기 위해 언덕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명령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서 윙드 후사르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고, 칼 공작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뒤 힘겹게 기어오르고 있던 적군을 상대로 반격을 가해 격파했다. 지그문트 3세는 급히 강 건너편으로 후퇴했고, 그의 병사 2,000명이 그를 따라 퇴각하다가 전사하거나 강에 빠져 익사했다.

스토녜브로 전투에서 막대한 전력 손실을 입은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내용의 휴전 협정을 맺은 뒤 폴란드로 귀환했고, 스웨덴 추밀원 의원들은 칼 공작에게 항복했다. 그후 칼 공작은 유일하게 지그문트 3세를 계속 따르던 칼마르를 포위 공격해 1599년 5월 12일에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스웨덴 전체의 통치자가 된 그는 1599년 7월 24일 스톡홀룸에서 열린 스웨덴 의회를 통해 지그문트 3세의 폐위를 공식화했고, 지그문트 3세를 위해 싸우다 체포된 귀족 8명을 린셰핑에서, 이듬해에는 오보에서 집단 처형했다. 이후 5년간 섭정을 자처하면서, 지그문트 3세에게 그의 아들 블라디슬라브 왕자가 개신교 신앙으로 양육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아들을 스웨덴 국왕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지그문트 3세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그는 1604년 3월 22일 스스로 스웨덴 국왕 칼 9세로 등극했다.

2.5. 카자크 반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자국에 편입된 카자크들이 크림 칸국, 몰다비아 공국 오스만 제국의 여러 영토에 대한 지속적인 습격을 벌이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급기야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무라트 3세로부터 카자크가 자국과 속국의 영토를 습격하는 걸 막지 않는다면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자, 바르샤바 세임은 1580년 우크라이나 명령법을 통과시켜 모든 등록된 카자크인들은 정부의 허락 없이 주변 지역을 습격하거나 포로를 잡거나 약탈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어긴 자는 즉시 처형하기로 했다.

1591년, 키예프주의 등록 카자크 대령이었던 크시슈토프 코신스키는 리투아니아 대귀족 집안인 오스트로그스키 가문에 의해 로키트노와 올자니체 마을에 있는 자신의 토지를 몰수당했다. 이에 격분한 그는 휘하 부대를 모아 빌라 체르크바 성을 점령한 뒤 카자크의 헤트만을 자칭했다. 이에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반란에 가담했고, 볼히니아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지그문트 3세와 얀 자모이스키는 그저 우크라이나 내의 권력 다툼이라 여기고 개입하지 않았다. 반란은 1593년 2월 2일 코신스키가 피옹테크 마을 인근에서 리투아니아 대귀족 콘스탄틴 바실 오스트로그스키에게 패배하면서 진압되었다. 코신스키는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지만, 1594년에 약속을 어기고 자포리자로 탈출한 뒤 2,000명의 병력을 모아 체르카시로 진격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1594년, 리투아니아 대귀족 마르친 칼리노프스키에 의해 살해당한 모피 상인의 아들이었던 세베린 날리바이코가 콘스탄틴 바실리 오스트로그스키 휘하 기병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반기를 일으켰다. 그는 농노제에 시달리고 있던 폴란드 농민들을 포섭한 뒤 크라쿠프로 진격해 귀족을 파괴하고 절멸할 계획을 세웠다. 일설에 따르면, 지그문트 3세가 루테니아 정교회를 교황의 권위에 종속시킨다는 브레스트 조약의 비준을 막으려는 오스트로그스키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반란군은 오늘날의 우크라니아 중부 지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남동부 지역을 장악했으며, 얀 자모이스키가 속한 가문의 재산이 있던 샤로그라드를 파괴했으며, 뒤이어 브레스트 조약을 지지했던 히파시 포시에이와 시릴 테를레키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 소식을 접한 폴란드 세임은 이번에는 토벌대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2년간의 전쟁 끝에, 1596년 우브니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이 카자크 반란군을 제압했다. 그는 동료들에 의해 토벌군 사령관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에게 넘겨진 뒤 바르샤바로 끌려가 1597년 처형되었다.

2.6. 몰다비아 공략

1595년, 에르데이 공 바토리 지그몬드가 헝가리 용병 사령관 라즈판 이슈트반을 설득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뒤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리 통치자였던 아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슈트반은 아론을 잡아 에르데이 공국으로 압송한 뒤 자신을 새로운 총독이자 바토리 지그몬드의 충실한 가신이라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접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3세는 아론의 보호자이자 주권자로서 개입해 왈라키아 공국에 새로운 통치자를 세우고, 몰다비아 공국을 폐지한 뒤 몰다비아를 직할령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몰다비아 공국을 장차 자국의 영역으로 삼으려 했던 폴란드 귀족들이 격분했다.

1595년 여름, 얀 자모이스키는 왕으로부터 명목상 허락을 받아낸 뒤 5,000명의 기병대, 2,300명의 보병, 그리고 몇 개의 포병으로 구성된 폴란드군을 이끌고 몰다비아 공국으로 진군해 8월 27일 호틴을 점령했으며, 9월 3일에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 이아시를 점령했다. 이후 자모이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우호적인 성향을 지녔던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몰다비아 공으로 선임했다. 왈라키아 공 미하이 비테아줄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메흐메트 3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직접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기에 크람 칸국의 칸 가지 2세 기라이에게 자신을 대신해 적을 물리치게 했다.

가지 2세 기라이는 주군의 명령에 따라 25,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몰다비아 공국으로 진격했다. 이를 일게 된 얀 자모이스키는 프루트 강을 건넌 뒤 9월 6일에 강 양쪽 측면에서 보호되는 요새화된 숙영지를 세우게 했다.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들은 이 숙영지를 연이어 공격했지만 도저히 뚫을 가망이 없는 데다 칸의 조카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자 전의를 잃고 퇴각했다. 그 후 크림 칸국은 모빌라는 몰다비아의 공으로 인정하고 폴란드군이 공국에 영구적으로 주둔하는 데 동의하는 평화 협약을 맺고 철수했다.

1600년 봄 왈라키아 공 미하이 비테아줄이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몰아내고 몰다비아를 탈취하자, 얀 자모이스키는 몰다비아를 되찾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때마침 미하이는 에르데이 공국으로 쳐들어온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참패하고 에르데이를 잃었기에 자모이스키를 막을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 해 10월 20일, 자모이스키는 부코보 전투에서 미하이 비테아줄을 격파하여 해외로 내쫓은 뒤 아이레미아 모빌라를 몰다비아 공으로 복위시켰다.

2.7. 바르샤바 천도

1596년,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천도했다. 그후 바르샤바는 그의 치세 동안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중부 유럽 최강국의 수도다운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1644년 지그문트 기둥을 바르샤바 광장에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 기둥은 로마 시에 남아있던 포카스 기둥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높이 22m에 코린트식 양식으로 제작되었고, 십자가와 칼을 들고 있는 왕의 동상이 장식되었다.

2.8. 폴란드-스웨덴 전쟁(1600 ~ 1611)

지그문트 3세는 숙부에 의해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당한 뒤 스웨덴 왕위를 되찾는 작업에 골몰했다. 그는 자신이 스웨덴 국왕으로 복위하는 것을 돕는 데 지극히 소극적인 폴란드 대귀족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1599년에 열린 세임에서 귀족들에게 더 많은 특권을 양도하고, 스웨덴 영토였던 에스토니아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일부로 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귀족들은 에스토니아를 공략하면 발트해의 지배력을 좀더 강화시키고 곡물 수출을 늘릴 수 있으리라 여겼고, 100만명 밖에 안 되는 스웨덴인에 비해 1000만 명에 인접한 자국이 질 이유가 없다고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에스토니아를 놓고 폴란드와 스웨덴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1600년 크시슈토프 미코와이 라지비우 휘하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공세를 개시해 스웨덴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군은 왈라키아 공 미하이 비테아줄을 몰아내기 위해 대거 남하했던 터라, 에스토니아에 투입된 병력은 지극히 한정되었다. 이로 인해 스웨군이 투입한 병력의 1/3밖에 안 되었고, 이로 인해 점점 밀린 끝에 에스토니아 뿐만 아니라 리보니아 대부분을 스웨덴에 상실했다. 이에 세임은 군사비를 증진하고 남부 전선에 있던 군대를 북부 전선으로 보내기로 결의했다.

1601년, 리투아니아 헤트만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와 몰다비아에서 소환된 폴란드 수상 얀 자모이스키가 지휘하는 군대가 리보니아를 넘어 폴란드 영내로 진입한 스웨덴군과 격돌했다. 1601년 6월 23일, 자모이스키와 코드키에비츠는 코켄하우젠[12]에서 보병 3,000명에 기병 1,000명을 이끌고 스웨덴 보병 5,000명과 기병 4,000명을 상대했다. 그 결과 윙드 후사르 1,000기를 앞세운 폴란드군이 적병 2,000명을 사상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폴란드 기병대의 사상자는 100~200명에 불과했다.

그후 얀 자모이스키는 12,000명의 병력과 50문의 대포를 이끌고 리보니아를 탈환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그의 군대는 1601년 12월 18일 볼마르를 탈환했고, 1602년 5월 17일에 펠린을 탈환했다. 1602년 말, 스웨덴군이 차지하고 있는 리보니아 영토는 탈린, 페르나우, 합살루 및 도르파트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 60세를 넘긴 얀 자모이스키는 중병에 걸려 크라쿠프로 돌아갔고, 코드키에비츠가 실질적으로 지휘를 맡았다. 그는 1603년 4월 아르비드 에릭손 스톨라름의 스웨덴군을 격파하고 도르파트를 공략했고, 비아위 카미엔[13] 전투에서 2,000명의 윙드 후사르로 7,000명에 달하는 스웨덴군을 격파했다. 스웨덴군의 사상자는 3,000명에 달했던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피해는 50명 전사, 100명 부상에 불과했다.

1604년 9월 23일, 코드키에비츠는 리가에 진군한 스웨덴 국왕 칼 9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스웨덴이 복수를 다짐하며 병력 증원을 단행한 반면, 세임은 추가적인 재정 지원을 거절했다. 이로 인해 칼 9세는 10,000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킨 반면, 코드키에비츠의 병력은 3,600명에 불과했다. 1605년 9월, 양군은 키르홀름[14]에서 결전을 벌였다. 칼 9세는 비록 3배가 넘는 대군을 이끌었으나, 윙드 후사르의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경계하여 7~8열의 격자 진형을 편성했다. 코드키에비츠는 적이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이자, 4시간에 걸쳐 거짓 후퇴 전술을 구사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칼 9세는 아군이 여러 차례 벌어진 소규모 접전에서 적군을 물리치자, 지금이 복수할 기회라고 여기고 추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전투가 개시된 지 불과 반 시간 만에, 스웨덴군은 윙드 후사르를 위시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기병대에게 완패했다.

키르홀름 전투에서 스웨덴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무려 8,000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5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국왕 칼 9세 역시 부상당한 채 가까스로 도주했다.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피해는 100명 전사, 200명 부상에 불과했다. 코드키에비츠는 키르홀름 전투로 인해 유명인사가 되었고, 유럽 각지의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이단을 응징한 영웅'이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세임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 데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추가 공세를 하지 못하고, 라트갈레(현 라트비아의 동쪽) 지역에 머물렀다.

그러던 1606년, 지그문트 3세는 전쟁에 비협조적인 세임에 반감을 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특별세를 부과하고 왕의 권한을 임시로 강화하겠으며, 군대를 증강한다는 내용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안건은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세임은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이후 미코와이 제브지도프스키 등을 비롯한 폴란드 대귀족들이 스텡지카에서 연합을 결성하고 절대군주제를 폴란드에 도입하려는 지그문트 3세에 맞설 뜻을 표명했다. 이 연합의 결의안에 서명한 이들은 145명에 달했으며, 이들에 소속된 사병대는 보병 10,000명, 기병 600명, 대포 28문에 달했다. 반란군이 크라쿠프로 쳐들어오자, 지그문트 3세는 코드키에비츠와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에게 진압을 맡겼다. 두 장군은 9,100명의 보병과 3,200명의 기병, 대포 24문을 이끌고 진군했다. 1607년 7월 5일, 왕실군은 구주프 전투에서 반란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반란군은 이후에도 저항을 이어갔지만, 1608년 지그문트 3세가 왕권 강화책을 철회하고 자신들을 사면하겠다고 제안하자 귀순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이렇듯 내전에 휘말린 틈을 타, 요아킴 프레드리크 폰 만스펠트가 지휘하는 스웨덴군은 1608년에 리보니아를 재침공했다. 그들은 페르나우를 공략하고 리가를 포위했다. 이에 코드키에비츠는 리보니아로 재차 진군했고, 그해 10월 가우야 강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격파한 뒤 1609년 리가를 구출하고 페르나우를 탈환했다. 이후 소규모 함대를 급조하여 살리스 해전에서 스웨덴 해군을 기습해 타격을 입혔다. 이후 양국은 소규모 전투만 벌일 뿐 교착 상태에 빠졌고, 1611년 칼 9세가 사망한 뒤 공식적으로 휴전이 체결되었다.

2.9.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

1598년 루스 차르 표도르 1세가 사망하면서 류리크 왕조가 단절된 뒤, 루스 차르국 혼란 시대에 휘말렸다. 새로운 차르인 보리스 고두노프는 무능한 통치자임이 드러났고, 가짜 드미트리 1세가 폴란드의 몇몇 귀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반기를 들었다. 1605년 4월 보리스 고두노프가 뇌출혈로 사망한 뒤, 새 차르인 표도르 2세는 가짜 드미트리에게 패배해 그가 모스크바로 입성하는 걸 허용했고, 1605년 6월에 피살되었다. 그러나 가짜 드미트리 역시 1년 동안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못해 민심의 이반을 야기했고, 결국 1606년 5월 17일 바실리 슈이스키가 이끄는 보야르들의 반란으로 피살되었다.

상황은 이것으로 끝나는 듯 했지만, 1607년에 가짜 드미트리 2세가 등장해 모스크바를 위협했다. 이에 바실리 4세는 스웨덴 국왕 칼 9세에게 코렐라(Корела)[15]를 떼주는 조건으로 지원을 요청했고, 칼 9세는 1609년 2월에 지원군을 파견해 가짜 드미트리를 칼루가로 쫓아냈다. 이러한 상황을 예의주시한 지그문트 3세는 세임을 소집한 뒤 스웨덴이 이대로 루스 차르국을 병합하도록 내버려두면 장차 리보니아 전쟁이 위험해질 거라고 주장하면서, 그 전에 자국이 루스 차르국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해 승인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1609년 9월,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 6,500 ~ 6,800명은 국경을 넘어 루스 차르국으로 진격해 7월 4일 클루시노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 연합군 35,000명을 상대로 적병 5,000명을 사살하는 동안 불과 400명만 상실하는 대승을 거둔 뒤 9월 29일에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 그후 바실리 4세는 7명의 보야르들에게 축출되었고, 보야르들은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를 새로운 차르로 받들겠다고 선언하고 주키에프스키의 모스크바 입성을 허용했다. 1611년 6월, 스몰렌스크는 2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폐위된 바실리 4세는 마차에 실린 채 바르샤바로 이송된 뒤 1611년 10월 29일 바르샤바 왕궁에서 지그문트 3세와 세임 의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고스티닌으로 이송된 뒤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지그문트 3세는 이 시점에서 패착을 저질렀다. 보야르들이 폴란드와 협상하면서 내건 조건은 "브와디스와프가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다음 차르위에 오른다", "러시아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가톨릭을 강요하지 않는다"였다. 브와디스와프는 정교회 개종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던 지그문트 3세는 이를 극렬히 반대했고, 정교회를 가톨릭으로 강제 전환시키고 가톨릭을 수용하지 않는 귀족 및 백성들을 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폴란드군의 잔혹행위가 빗발치자, 1611년 쿠즈마 미닌과 드미트리 포자르스키가 폴란드 점령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폴란드군은 보급로를 끊고 유격전을 벌이는 적에게 시달리는 바람에 식량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졌다. 급기야 2천 명의 병사들이 봉급을 받지 못한 것에 분개해 폭동을 일으키자, 결국 폴란드 수뇌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몰렌스크로 철수했다. 이후 지그문트 3세는 모스크바를 재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려 했지만, 세임의 비협조로 인해 군자금 마련에 애를 먹다가 1618년 스몰렌스크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루스 차르국의 독립을 용인하는 데울리노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을 종결했다.

2.10. 폴란드 - 스웨덴 전쟁(1617 ~ 1618)

1617년 6월 19일,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 해군 함대 4척이 리가 만에 상륙한 뒤 뒤나뮌데 요새를 이틀 만에 공략한 뒤 리가를 봉쇄했다. 그 해 7월 지원군이 들어온 뒤, 스웨덴군은 공세를 더 이어가 리보니아 해안가 거의 전체를 공략했으며, 8월 11일 페르나우를 포위 공격한 끝에 사흘 만에 함락했다. 뒤이어 살라크그리바가 8월 18일에 함락되면서, 스웨덴군은 리가를 제외한 리보니아 전역을 장악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리투아니아 헤트만 크시슈토프 라지비우 휘하 소규모 군대가 출격했다. 그의 군대는 적보다 훨씬 열세했지만, 적군이 사방에 분산된 틈을 타 각개격파한 끝에 페르나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도시와 요새를 탈환했다. 크시슈토프는 지그문트 3세에게 자신의 업적을 알리면서 리보니아를 리투아니아에 정식으로 귀속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지그문트 3세가 받아들이지 않자 사임했다. 이후 얀 시친스키가 그를 대신해 리보니아 방면군을 이끌었다. 1618년 9월, 폴란드-리투이나아와 스웨덴 사이에 2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때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은 페르나우 반환을 요구했지만 스웨덴 측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양측은 휴전이 만료되는 대로 리보니아를 제패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2.11. 폴란드-오스만 전쟁

1619년,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군 10,000명을 에르데이 공국으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약탈하게 했다.[16] 베틀렌 가보르는 이에 앙심을 품고, 자신의 주군이자 오스만 제국 파디샤 오스만 2세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대상으로 보복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오스만 2세는 1620년 이스칸데르 파샤가 이끄는 20,000명을 파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하게 했다. 폴란드 대원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는 세임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세임은 오스만 제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아 이를 거절했다. 다만 상원의 비밀 평의회가 일부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자금을 풀어서 8,000명 가량의 보병과 수백 명의 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1620년 9월 야전 원수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와 함께 오스만군이 침공한 몰다비아 공국으로 향했다.

1620년 9월 10일 이아시 근처의 체초라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과 오스만군이 격돌했다. 주키에프스키와 코니에츠폴스키는 절망적인 수적 열세에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아 사기가 낮은 병사들을 이끌고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끝내 수적 열세를 버티지 못하고 둘다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고무된 오스만 2세는 1621년 봄 친히 12만 대군을 이끌고 코스탄티니예를 출발해 폴란드로 진군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지그문트 3세는 급히 코드키에비츠를 남쪽 국경으로 보내 오스만군을 막게 했다. 세임 역시 현실을 깨닫고 군자금을 대폭 지원하였다.

코드키에비츠는 2만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9월에 드네스트르 강을 건넌 뒤,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이끌고 온 10,000명과 합류했다. 또한 코자치의 지휘관 페트로 코나셰비치가 이끄는 25,000명도 가세했다. 여기에 국경의 병력까지 규합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병력은 63,000명에 이르렀다. 이후 벌어진 호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12만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코드키에비츠가 병사했다. 1621년 10월 9일, 양국은 호틴 조약을 체결했다. 지그문트 3세는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기로 했고, 오스만 제국은 폴란드를 침공하지 않기로 했다.

2.12. 암살 미수 사건

1620년 11월 15일, 바르샤바의 성 얀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려던 지그문트 3세가 전쟁 도끼로 무장한 하급 귀족 미하우 피에카르스키에게 습격당했다. 피에카르스키는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가던 왕에게 달려들어 처음에는 등을, 그 다음에는 뺨을 도끼로 가격한 뒤 팔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궁정 원수 우카시 오팔린스키와 왕실 근위대의 저지로 인해 치명타를 가하지 못했고, 지그문트 3세의 뒤를 따라가던 브와디스와프 왕자가 세이버로 미하우의 머리에 부상을 입혔다. 지그문트 3세는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가 응급 조치를 적절히 취한 의료진 덕분에 겨우 회복되었고, 바르샤바 왕궁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미하우에 대한 조사가 이어진 끝에, 그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우울증을 앓은 끝에 1610년 앙리 4세를 암살하여 유명해진 프랑수아 라바이약처럼 왕을 죽여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로 마음먹고 암살을 결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1620년 11월 27일 공개장소에서 고문당한 뒤 양팔과 양 다리가 네 마리 말의 다리에 걸린 밧줄에 묶여진 뒤 네 말이 채찍을 맞으며 앞으로 달려가면서 찣겨죽는 형벌을 받았다. 이후 그의 유해는 불태워졌고, 남은 재는 대포에 넣어 공중에 발사되었다.

2.13. 폴란드-스웨덴 전쟁(1621 ~ 1629)

1621년 8월, 스웨덴군은 폴란드군이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대거 남하한 틈을 타 148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를 투입해 페르나우에 기습 상륙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보병 14,700명, 기병 3,150명, 대포 375문을 이끌고 하선한 뒤 리가를 향해 진군해 8월 29일 포위 공격을 시작했고, 9월 25일에 함락에 성공했다. 뒤이어 10월 2일 뒤나뮌데 요새를 함락한 뒤 리투아니아 기병대를 피하기 위해 습지와 숲을 통해 진군하여 쿠를란트 공국에 진입해 미타우[17]를 함락했다. 이후 코켄하우젠 요새를 공략하려 했지만 수비대장 알렉산데르 고시에프스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1622년 1월 초, 스웨덴군은 볼마르[18] 등 여러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 동안 3,000 가량의 병력을 모은 크시슈토프 라지비우는 1월 7일 미타우 탈환에 착수했지만 포병 부족으로 성을 함락하는 데 실패했다. 얼마 후 스웨덴 주력군이 미타우에 도착했고, 양자는 장기간 교전했지만 쉽사리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1622년 8월 10일에 양측은 1년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이 휴전은 1623년에 1625년 3월까지 연장되었다.

지그문트 3세는 이대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난 뒤 가용 가능한 전 병력을 북쪽으로 이동시킬 계획을 세웠다. 크시슈토프 라지비우, 크시슈토프 즈바라스키 등 여러 장군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이 스웨덴과 영구적인 평화 협약을 맺고 리보니아를 받아내는 대가로 스웨덴 왕위를 포기하기를 원했다. 라지비우는 스웨덴군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사개혁 이후 상당히 강력해졌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대 역시 보병과 포병을 강화시켜야 하니, 스웨덴과 전쟁을 벌이는 건 무리라고 주장했다.

지그문트 3세는 장군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웨덴으로 원정하기 위한 함대 건설을 명령했다. 반독립적인 도시인 그단스크에서는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왕은 푸츠크에서 항구와 조선소를 확장하기로 했다. 1624~1626년에 푸츠크에서 200~400톤의 중형 선박 7척이 건주되었고, 잉글랜드 용병들이 해병대로 고용되었다. 이 새로운 함대의 가장 큰 전투함은 잉글랜드 용병 선장 제임스 머레이가 지휘하는 갤리온 선 크롤 다비트였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이같은 움직임을 전해 듣고, 루스 차르국 및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보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1625년 6월 27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리보니아에 상륙했다. 10,000명에 달하는 스웨덴 주력군은 다우가바 강 상류로 진군해 코켄하우젠을 포위해 16일 만에 함락시켰다. 이후 8월 27일 도르파트를 함락했고, 뒤이어 미타우도 점령했다. 1625년 9월 초, 스웨덴군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침공해 9월 7일 비르자이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리보니아에 남아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수비대와 리투아니아에 주둔한 수비대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다. 9월 27일, 스웨덴군은 바우스케[19] 요새를 추가로 공략했다.

1625년 10월, 라지비우가 반격에 나서 여러 성을 공략했고, 레프 사피에하가 이끄는 또다른 군대는 뒤나부르크를 공략하려는 스웨덴군을 격퇴했다. 이후 라지비우는 휘하 부대를 쿠를란트에 집중시킨 뒤 리보니아에 있는 스웨덴 부대를 괴롭히고자 분견대를 연이어 파견했다. 한편 사피에하는 바우스케와 코켄하우젠 중간 지점에 위치한 발호프 인근에 진을 쳤다. 이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라지비우와 사피에하가 서로를 질시하고 세력 다툼을 심하게 벌이고 있으니 서로 제대로 협조하지 않을 거라 여기고, 사피에하 쪽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마음먹었다. 1626년 1월 13일에 군대를 집결시킨 그는 1월 17일 발호프로 진격해 사피에하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 2,000명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500~1,000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중상을 입은 반면에, 스웨덴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이 전투는 스웨덴군이 야전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과 대결해 완승을 거둔 첫번째 전투였다.

1626년 5월,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함대에 몸을 싣고 프로이센 공국으로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7월에 필라우[20] 인근에서 하선한 뒤 별다른 전투 없이 해안 마을과 도시를 빠르게 점령했고, 프로이센 공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개신교 국왕이 가톨릭의 억압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하려고 왔다고 여기고 해방자로 받들었다. 다만 그단스크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항복하길 거부했고, 구스타브 2세는 그단스크를 포위했다. 지그문트 3세는 그단스크를 구하기 위해 2달 남짓 만에 소집한 군대를 파견해 스웨덴군이 점령한 그단스크 인근의 요새인 메베[21]를 포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메베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반격에 착수했다.

양군은 9월 22일과 9월 29일, 그리고 10월 1일에 메베 인근에서 3차례 격돌했다. 그 결과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더 많은 피해를 입고 패퇴했지만, 스웨덴군 역시 상당한 손실을 입은 데다 그단스크 봉쇄망이 약화되었다. 이후 지그문트 3세는 군대를 어떻게든 더 많이 모으기 위해 전국에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귀족들이 스웨덴과의 전쟁을 지긋지긋하게 여겨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역시 1627년 여름 디르샤우 공방전을 치르던 중 중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스웨덴군의 공세는 약화되었다.

1627년 11월 28일,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 침공을 위해 준비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함대가 그단스크를 해상에서 봉쇄하던 스웨덴 함대를 상대로 올리바 해전에서 격파했다.[22] 이로 인해 스웨덴 해군의 봉쇄가 붕괴되었고, 스웨덴군의 사기는 꺾였다. 1629년 6월 25일, 폴란드 왕실 원수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가 지휘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과 한스 게오르그 폰 아르님이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이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지휘하는 스웨덴군을 상대로 쾨니히펠데[23]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의 손실은 300명인데 비해 스웨덴군은 600~1,000명이 전사하고 200~5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특히 스웨덴 기병대가 막대한 손실을 입어, 5,500마리의 군마 중 1,300마리가 더 이상 전장에 투입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수비에 전념했고, 이 이상 전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던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군을 격멸하는 대신 프랑스 왕국의 실권자 리슐리외 추기경의 중재를 받아들여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그 결과, 1629년 9월 26일 알트마르크 휴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스웨덴은 리보니아의 통제권을 확보했고, 폴란드는 서프로이센, 라트갈레, 뒤나부르크의 통치를 인정받았다.

2.14. 사망

1631년 7월 두번째 부인인 콘스탄차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지그문트 3세는 정신적 충격과 함께 신체 또한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말년에 통풍과 관절통에 시달려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고, 막판에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1632년 4월 1일, 죽음이 임박했다는 걸 직감한 그는 특별 의회를 소집한 뒤 맏아들 브와디스와프를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부활절 일요일에 아들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지막 미사를 드렸다. 그 후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던 그는 4월 30일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에 안치됐다.

3. 가족

4. 평가

때를 잘 만난 암군. 이 인간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가 1648년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게 신기해보일 지경이다. 모국 스웨덴에서는 이미 루터파 위주인 스웨덴인과 심각한 갈등을 겪어 왕위에서 쫓겨난 것으로도 모자라, 이후에도 정신 못차리고 스웨덴의 왕위를 주장하는 등 스웨덴과 극한의 갈등을 빚었고 후일 대홍수에서 스웨덴이 개입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그래도 스웨덴군이 오합지졸이던 시기에는 폴란드령 리보니아로 진격해오는 스웨덴군을 폴란드군이 족족 털어먹어 영토를 빼앗기진 않았지만, 역으로 반격할 기회가 여러차례 있었는데도 폴란드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진격 한 번을 하지 못했다. 결국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제 개혁을 거친 스웨덴군을 상대로는 연패하여 리보니아와 발트해의 주요 무역항인 리가를 사실상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러시아(당시는 루스 차르국)을 상대로는 삽질을 훨씬 더 크게 벌였다. 사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정말로 루스 차르국를 멸망시키거나 병합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에 친폴란드 귀족들도 적지 않았고, 반폴란드 러시아인들도 오랜 내란과 기근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3세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가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다면 러시아인들은 그를 차르로 받아들일 의지가 있었고 브와디스와프 본인도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지그문트 3세가 거부하여 다된 밥에 재를 뿌렸다. 결국 폴란드는 엄청난 희생을 치룬 후에야 러시아와 데울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스몰렌스크 등지를 할양받았는데, 애초에 러시아를 병합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국경 요충지 몇 개를 할양받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으니 암군 소리를 들어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이 전쟁은 러시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것도 실패했고, 폴란드에 대한 적대감정이 엄청나게 치솟게 만들어 후일 대홍수에서 러시아는 카자크 편을 들어 개입한다.

이렇게 무수한 삽질을 벌이게 된건 본인의 역량 부족도 있었지만 스웨덴 왕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스웨덴 왕위에 애착을 가졌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는 어머니를 통해 덤으로 얻은 부가 요소로 취급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스웨덴인 지그문트 3세의 이해관계는 대부분 맞지 않았고,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데다 대부분 귀족들이 충성을 바쳤던[24] 스웨덴에 애착을 가졌던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1] 첫 아내 오스트리아의 아나의 여동생이다. [2] 지그문트 1세의 막내딸로,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막내여동생이다. [3] 1564 ~ 1566, 요절 [4] 1568 ~ 1625,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브로드니차와 골루브도브진의 스타로스타로 지냈으며, 1584년 루터교회로 개종했다. [5] 하루를 여러 시각으로 나눈 표준 시간에 맞춰 기도하는 데 사용되는 기독교 기도서. [6] 요한 3세의 동생이나 칼 공작의 형 망누스 바사는 정신병자라 바드스테나 성에 반쯤 유폐당해 갇혀 살았다. [7] 당시 스웨덴 왕위 계승은 완전 세습제가 아니라 바사 왕조 출신만 후보자로 나올 수 있는 준세습제였는데 칼 9세 사망 당시 요한은 왕위 계승 후보자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거부하고 칼 9세가 구스타브 1세와 칼 9세의 후손들만 스웨덴 왕위 계승 후보자로 나올 수 있도록 하였던 노르셰핑 협정을 존중하여 구스타브 왕자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8]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막시밀리안 2세의 4남. [9] 훗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아버지. [10] 훗날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외증조할아버지. [11] 에른스트는 막시밀리안 3세의 형으로 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었던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첫 외국인 국왕 선거에서 대결했던 인물이다. [12] 현 라트비아 코크네제. [13] 현재 에스토니아 파이데. [14] 현재 라트비아 살라스필스. [15] 오늘날 러시아 프리오제르스크. 당시에는 스웨덴어인 켁스홀름(Kexholm)으로 불렸다. [16]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지그문트 3세의 매형인 페르디난트 2세의 의뢰에 따른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에르데이 공작 베틀렌 가보르가 자신을 위협하자, 그를 꺾어놓기 위해 지그문트 3세에게 부탁한 것이다. [17] 현 라트비아 옐가바. [18] 현 라트비아 발미에라. [19] 현 라트비아 바우스카. [20]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발티스크. [21] 현 폴란드 그니에프. [22] 여담으로 이 올리바 해전의 패배로 구스타브 2세가 내놓은 함선이 바로 바사 호이다. [23] 현 폴란드 트슈치아나. [24] 실제로 칼 9세와 지그문트 3세의 스웨덴 왕위 쟁탈전 당시, 가톨릭 신자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귀족들 상당수는 지그문트 3세를 지원했다. 칼 9세가 승리한 후 스웨덴과 핀란드 각지에서 대규모 처형식을 집행한 것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귀족들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