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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세기 천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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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 세계 각지의 상황
2.1. 동아시아2.2. 유럽
2.2.1. 30년 전쟁과 패권의 변화, 근대적 외교의 출현2.2.2. 프랑스의 절대왕정2.2.3. 영국의 내전과 명예혁명2.2.4. 동유럽(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2.2.5. 과학 혁명
2.3. 중동, 인도
3. 주요 사건4. 연도 목록5. 연대 목록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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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세기는 서력으로 1601년부터 1700년까지의 시기로,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의 요일과 달력 모양이 완전히 일치한다.[1]

단군기원 4000년은 17세기에 있었다.

과학혁명 바로크 문화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된 세기로 보이나, 실제로는 소빙기로 인한 참상이 어마어마한 세기였다. 30년 전쟁 명청교체 등 전세계적인 전란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17세기 위기론) 한편으로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근대적인 외교 관계가 출발한 세기이기도 하다.

2. 전 세계 각지의 상황

2.1. 동아시아

2.1.1. 중국: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교체

중국에서는 명나라 F4라 일컫는 무능한 황제들이 16세기 동안 명나라의 위상을 추락시켰다. 임진왜란을 틈타 만주족 천명제가 세력을 확대했고, 1616년 후금을 건국했다. 이후 28년 간의 명청교체기에 접어들었고, 1636년 후금의 숭덕제 청나라로 국명을 변경했으며 1644년 순치제 시대에 명나라를 흡수시켰다. 이후 18년 간 남명에서 명나라 부흥 운동이 있었으나 1662년 진압되었다. 정성공이 대만으로 이주해 세운 동녕 왕국도 1683년 강희제 시대에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강건성세의 개막을 알린 강희제는 1661년부터 1722년까지 61년 간 청나라를 다스렸으며 1681년에는 삼번의 난을 진압했고 1689년에는 시베리아로 팽창해오던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짓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아담 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등을 통해 유럽의 문물이 중국 궁정에 널리 퍼진다.

2.1.2. 일본

일본은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 승리를 거두며 일본은 도쿠가와 가문이 장악했다. 1603년 에도 막부를 수립했으며 1615년까지 버티던 도요토미 가문은 오사카 전투 이후 완전히 멸망하며 일본은 에도 막부에게 넘어갔다. 에도 막부 초기 일본은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고, 슈인장을 발급하는 무역 구조를 유지했으나 1635년 슈인장 발급을 중단했고, 안 그래도 가톨릭을 금지하는 일본에서 1637년 가톨릭교도가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터지면서 가톨릭 선교 문제로 1639년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중단했다. 그리고 1641년 데지마를 설치해서 나가사키에서 서양 국가 중에서는 네덜란드와의 교역만을 허용했다. 이후 일본은 급성장기를 맞이했으며 서양 학문 즉 란가쿠가 나타나면서 훗날 19세기 메이지 유신의 발판을 닦게 된다.

2.1.3. 조선

조선은 17세기 초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최우선으로 극복해야 했다. 광해군 시대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중립 외교를 실시했으나 여러가지 도덕적 문제 때문에 1623년 인조 인조반정을 일으키며 폐위됐고, 인조는 서인과 함께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즉위 초기부터 이괄의 난이 터지는 등 많은 전란이 있었다. 이로 인해 승정원일기의 1620년대 이전 기록이 소실되었다. 이후 중국의 국제정세가 급변하면서 후금의 국력이 강해졌고, 조선은 주화론(청과 화친하자는 것)과 척화론(청과의 화친을 거부하는 것) 두 의견으로 갈리다가 결국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통해 각각 후금/청의 침공을 받아 패배했고, 조선의 조공책봉관계는 청나라와 이어나가게 되었다.

1650년대 효종 시기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다. 이후 17세기 말엽에는 숙종이 즉위하여 환국 정치를 행했다.

한편으로는 이때부터 호랑이, 표범 등의 대형 맹수들의 개체수가 줄어들었고 늑대들이 몰려왔다.

2.2. 유럽

16세기가 스페인의 패권의 시대, 종교 개혁의 시대였다면 17세기는 절대왕정의 시대이자 종교전쟁의 시대, 잉글랜드, 프랑스, 프로이센, 네덜란드라는 신흥 강자의 출현의 시대이자 과학 혁명의 시대, 바로크의 시대였다.

2.2.1. 30년 전쟁과 패권의 변화, 근대적 외교의 출현

종교적으로는 구교도와 신교도의 갈등, 경제적으로는 보헤미아의 상업적 번영이 원인이 된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던 보헤미아가 개신교로 돌아서려 하자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이를 탄압했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면서 30년 전쟁의 1차 전쟁인 보헤미아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 덴마크의 개입(2차 전쟁), 스웨덴 제국의 개입(3차 전쟁)으로 이어지다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국이 신교도의 편을 들어 참전하면서(4차 전쟁) 독일은 황폐화되었다.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결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권인 스페인과 독일이 몰락하였고[2], 대신 동방식민운동 과정에서 성장한 독일계 동방 국가 프로이센 공국과, 독일을 수백 조각으로 찢어버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프랑스 왕국이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현재까지도 외교가의 의례적 활동들이 되어 근대적 조약 체결 과정의 기틀을 닦았다.

이후 스위스 네덜란드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존속하게 되었으며, 칼뱅주의 또한 인정을 받았다. 사실상 전근대적 유럽의 종교 전쟁은 이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으며 이제 유럽사에 종교보다는 정치적인 이슈들이 더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2.2.2. 프랑스의 절대왕정

재정군사국가가 발전하면서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필요했다. 그리고 종교기관을 비롯해 모든 기관을 왕에게 복종하게 만들어야 했다. 장 보댕과 자크 보쉬에와 같은 학자들은 폭정이 무정부보다 나으며, 신 아래 왕이 있듯이 왕 아래 모두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절대 왕정을 정당화했다.

스페인을 제압하고 유럽의 최강자가 된 프랑스 왕국에서는 1643년 루이 14세가 즉위했다. 루이 14세가 어렸을 적 귀족들에 의해 프롱드의 난이라는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귀족들과 타협해야만 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성장 과정에서 귀족들을 어떻게 제압할지만을 고민했다. 모든 귀족들이 왕 하나만 바라보게 만들기 위해 그들을 세뇌해야만 했다.

루이 14세가 고안한 절대왕정은 루이 14세 자신을 하나의 국가기관으로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의 연극처럼 조직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연극에 참여해 스스로를 태양으로 연출하면서 귀족들을 세뇌하는 데에 성공했고, 귀족들을 복종시키는 데에 이르렀다. 루이 14세를 '태양왕'에 비유하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베르사유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은 왕의 프라이버시이기 이전에 국가의 공적인 통치행위로서 그 일상이 24시간 내내 백성들에게 공개되었다.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와 유대인에 대한 관용을 없애면서 경제적인 타격을 입기도 했으나, 종교적 통합을 이루는 데에는 성공하면서 프랑스의 절대군주제는 공고화되었다.

2.2.3. 영국의 내전과 명예혁명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고 스코틀랜드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가 즉위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새 왕조는 스코틀랜드 출신이었기에 넓은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고 절대왕정을 추구함으로서 귀족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었다.

1625년 찰스 1세가 즉위한 이후 정책의 계속되는 실패로 재정이 부족해졌고,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다. 당시 의회에는 젠트리, 요먼과 같은 신흥 세력이 진출해 있었다. 신흥 세력의 정치적 성장을 위해 의회에서는 1628년 권리청원을 제출하며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를 막을 것을 요구했으나, 찰스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다시금 의회를 소집했으나, 의회에서는 여전히 왕의 독단적 행위에 반발하고 의회를 정기소집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왕이 의회를 무력으로 공격하면서 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발생했다.

1649년 의회파의 승리로 내전이 끝나면서 찰스 1세는 처형당했고, 올리버 크롬웰이 집권하는 공화정 체제로, 잉글랜드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11년 간 통치되었다. 그러나 크롬웰의 청교도주의에 입각한 지나친 금욕 통치는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잉글랜드 연방은 사라졌다.

1660년 찰스 2세의 즉위로 왕정이 복고되었다. 찰스 2세는 크롬웰과 다르게 어느 정도의 방종을 허용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후계자가 동생인 제임스 2세밖에 없었고, 제임스 2세는 신앙을 숨기기는 했으나 가톨릭 신자라는 논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가톨릭 신자였다.

제임스 2세가 후계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은 휘그당이 되었고, 그가 싫기는 하지만 그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세력은 토리당이 되었다. 결국 1685년 제임스 2세가 즉위했다.

제임스 2세는 정치적 감각이 부족했다. 숨겨오기는 했으나 가톨릭 신자였던 만큼 가톨릭에 대한 관용을 펼쳤고, 결국 토리와 휘그 모두의 반발을 샀다. 의회는 1688년 제임스의 딸인 메리 2세와 남편 윌리엄 3세를 초대했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명예혁명이 이루어졌다.

메리와 제임스는 공동왕으로 즉위했고, 1689년 의회의 권리장전을 승인하면서 국가 통치에 있어 의회의 권능이 매우 강해지며, 군주조차 법률을 따라야 하는 입헌군주제의 원형을 만들었다.

영국에서 17세기 내내 진행된 이 과정은 시민들이 왕의 권력을 끌어내린 시민 혁명과는 거리가 멀며, 신흥 귀족들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왕의 권력을 끌어내린 일종의 정치 싸움이었다. 그러나 1690년 존 로크가 명예혁명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지나친 권력 행사에 대한 저항권을 주장하면서 실제로 자유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정치적 자유에 대한 논의는 민주주의로, 경제적 자유에 대한 논의는 자본주의로 이어지면서, 18세기 이후 전개될 영국의 산업 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17세기에 영국은 북미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13개 식민지를 세웠다. 그리고 인도와 같은 영역에서 세력을 불렸다. 그리고 신흥 강자 네덜란드 영란전쟁을 벌이며 네덜란드를 제압했다.

2.2.4. 동유럽(오스트리아, 러시아, 오스만)

파일:삼제국 시기 오스만.jpg

오스만 제국은 슬슬 쇠퇴기로 접어들었으나 아직까진 강대국이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번성했다.

동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주도권을 잃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일에 미련을 버리고 세습 영토에 집중했으며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를 주적으로 설정했다가 17세기 후반에 벌어진 제2차 빈 공방전에 실패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오스만 헝가리 에르데이 공국을 상실했다. 루스 차르국 타타르의 멍에를 서서히 걷어내며 발전하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대홍수를 거치며 쇠퇴하였다.[3]

2.2.5. 과학 혁명

17세기 후반에는 지성계의 일대 혁명이 일어나는데 바로 아이작 뉴턴이 1687년에 프린키피아를 출간한 것이다. 이것으로 인류는 근대 과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의 열매를 맛보게 되며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은 물리학을 넘어 생물학이나 사회과학 같은 다양한 과학 연구에 토대가 된다.

2.3. 중동, 인도

이슬람 역사에서 16세기 후반 ~ 17세기 말의 시기는 화약 제국의 시기라 한다.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 모두 전성기를 맞았다.

3. 주요 사건

4. 연도 목록

5. 연대 목록

6. 관련 문서



[1] 그레고리력은 정확히 400년이 주기이기 때문이다. [2] 독일은 30년 전쟁의 주전장으로 인구 1/3이 사라졌으며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수많은 제후국들이 행정, 외교, 사법,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며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다. 스페인은 가장 높은 세수를 자랑하던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해야 했다. [3] 대홍수 이전까지 연방은 동유럽 제일의 강국으로 모스크바를 함락하고 차르를 교체하는 등 막강한 세력을 과시했으나 대홍수 이후로 러시아와 처지가 반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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