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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선)/비판과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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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왕자들의 활동
2.1. 반론
3. 대명 사대 외교를 위한 공물 수급의 폐단
3.1. 반론
4. 부민고소금지법
4.1. 반론
5. 노비종모법
5.1. 반론
6. 사민 정책
6.1. 반론
7. 화폐개혁8. 고려 문화재 훼손
8.1. 반론

[clearfix]

1. 개요

조선시대 성군으로 평가받는 위인 세종대왕에 대한 세부적인 의견들을 종합한 문서이다.

세종은 많은 업적과 애민정신을 인정받아 오늘날 '세종대왕'이라 불리며 성군으로 추앙받는 군주임에는 틀림없으나, 몇몇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20세기만 하더라도 세종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자료에 접근하기 쉬운 학계 수준이 아닌 이상 불가능했던지라 한글을 창제한 기승전 성군이었으나, 21세기 인터넷 대중화 시대 이후부턴 여러 자료들에 일반인들도 접근이 수월해지면서 논리적이고 건전한 비판이라면 충분히 제기 가능할 만큼 사회 분위기도 많이 유연해진 편이기에 '인간 세종'에 대한 연구 또한 활발한 상황이다.

한편으론, 이런 세종 관련 비판적 주장이 2010년대 후반을 전후하여 뉴라이트 세력에서 정치적 목적성을 가지고 유행시켰다는 의견도 있다.[1] 일본 식민사관에 옹호적인 이들이 일제강점기를 그나마 정당화시키기 위해선 조선을 깎아내려야 되는데, 그러려면 일단 조선의 최고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부터 까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비판의 행간을 유심히 읽을 필요가 있으며, 그럼에도 적절한 지적이라면 수용하고, 아닌 것은 반론하면서 정반합하는게 민주 사회의 역량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왕자들의 활동[2]

세종은 집권 중반부부터 세자인 문종 외에도 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광평대군 왕자들이 대외 활동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각종 연구 및 정책 수행을 맡겼다. 실제 세종대왕의 업적엔 왕자들의 업적이 포함된 것도 상당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왕자들의 정치적 입지도 비정상적으로 커지기 시작했으며 왕자들 간의 대립도 조금씩 생겨나는 부작용이 생겼던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본인 경험을 통해 왕자들 간의 대립에 민감했던 태종과 달리[3], 세종은 이런 위험성에 대해 많이 둔감한 편이었다.

이는 세종대왕 본인도 왕자(충녕대군) 시절 세자가 아니었음에도 학문을 열심히 닦고 국정에 관심을 가진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에 신하들이 이 점을 지적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장남 장손 적장자 - 적장손이라는 정통성이 워낙 확실했기 때문에 안심한 것으로 보인다. 적장자 계승이라는 정통성을 놓고 볼 때 적장손으로 태어난 단종은 태어나서부터 군주로 어린 나이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나선 수양대군을 비롯한 다른 종친 신하들과도 군신 관계가 성립하여 강력한 정통성을 지녔다.

하지만 세종의 생각과는 달리 문종은 즉위 2년만인 향년 37세로 요절해 버렸고,[4] 세자빈 문제로 단종의 나이가 어린 데다 단종을 지원해 줄 마땅한 왕실 어른이 없다는 점 등이 방아쇠가 되어 오히려 화를 불러왔다. 다른 왕자들,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의 야심은 이미 도를 넘었고 그 결과가 바로 계유정난. 결국 운명의 장난인지 세종과 단종 입장에선 얄궂게도 문종은 2년만에 떠나고 심지어 수렴청정 소헌왕후, 현덕왕후가 일찍 사망한 것도 치명타라고 할 수 있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단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있어 수렴청정을 했거나 문종이 오랫동안 재위했다면 계유정난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란 의견이 많다. 그 외에 왕실 종친으로 양녕대군 효령대군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수렴청정과 같이 직접적으로 정사에 관여할 수 없었다. 특히 양녕대군은 아예 수양대군을 지지하며 동생 종손자의 뒤통수를 쳤다.

사실 이 왕실 종친의 권력 문제는 중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복잡하다. 삼국지에서 위나라 조조가 후한의 사례를 들어 환관들을 싫어해서 힘을 주지 않았으며, 종친들도 의심하고 감시하여 형식상 왕에 봉하고 원천적으로 정치 영향력을 봉쇄하여 황제를 보호할 울타리가 사라졌고, 그 영향으로 힘을 키운 사마의가 일으킨 쿠데타로 위나라가 너무 쉽게 무너졌다. 이 사건을 기억한 서진의 황제 사마염은 반대로 자기 종친들에게 너무나 많은 힘을 주었고 이는 팔왕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답이 없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남북조시대가 된 중국은 수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혼란을 피할 수 없었던 걸 보면 종친의 힘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히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 적당히가 무척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결국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세종이 아들 교육과 관리, 권력 상속의 균형을 못 맞춘 일종의 실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5] 한편으로는 미래가 세종도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방향으로 갔을 뿐 일반적인 예상치 내에선 세종이 그렇게 무사안일하게 대처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맏아들이 그렇게 요절할 거라고, 그리고 둘째 아들 장손(조카)의 왕위까지 빼앗고 피를 나눈 형제들을 죽일 정도의 막장 인간일 거라고 어느 아버지가 생각할 수 있을까. 수양대군이 큰아버지 양녕대군이나 후대의 임해군 같은 망나니였다면 모를까, 계유정난 이전의 수양대군은 나름대로 모범적으로 행동하는 왕자였다. 물론 야심을 숨긴 교활한 위선이었다는 해석도 설득력은 있지만, 적어도 세종과 문종 입장에서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아들이자 동생 정도로만 비쳤을 것이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야심을 완벽하게 캐치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 시대만 해도 실제 수양은 반역할 생각이 없다가 단종대 들어 김종서랑 적대하면서[6] 반역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결국 문종의 요절과 단종이 성인이 되는 그 10년도 안되는 기간을 커버해 줄 왕후 등 정통성 있는 후원자가 없었다는 것이 역사의 비극이었다.

2.1. 반론

위 문단의 주된 비판 내용은 상당히 박시백 사관에 경도된 서술로 판단된다. 실제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 편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윗 문단은 단순히 박시백 책만 읽거나 얕은 지식으로 억지 논리를 전개하는 것밖에 안 된다. 역사학 전공도 아닌 박시백의 해석은 말 그대로 하나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봐야 하며, 박시백의 만화 또한 단순히 조선사 입문 교양 만화 정도로 봐야 한다.[7]

일단 계유정난을 가능하게 한 시대적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저 배경들 중 세종이 알고 있거나 예상할수 있는 상황은 소헌왕후와 현덕왕후[8]의 이른 사망 밖에는 없었으며, 문종이 약 5년에서 10년만 더 살았어도 단종이 미성년으로 즉위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온갖 if들이 다 들어맞은 로또급 상황에서도 수양대군의 진영 내에서도 너무 무모한 짓이라고 주저하는 자들까지 나오는 상황이였다. 말 그대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저질렀는데 된 것이다. 될놈될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야말로 사람의 영역을 넘어선 문제였던 것.

사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이전까지 철저하게 저()자세로 일관했다. 그리고 안평대군을 비롯해서 다른 왕자들이 세종의 일에 도움을 주어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문종의 정통성과 능력이 확실했기 때문에 막 나간다는 건 자기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밖에 안 된다. 그리고 세종이 문종의 건강에 둔감했다고 했는데 이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태종과는 달리 형제분쟁의 위험성을 잘 몰랐다고 했는데, 자신의 아버지는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친형을 유배보내면서까지 왕위에 올랐고 자신도 왕자 시절에 친형 양녕대군과 투쟁 아닌 투쟁을 벌여서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과연 둔감하거나 몰랐을까?

위 비판 주석에 연개소문의 예를 들었는데, 연남생은 누가 봐도 많이 모자란 인물이었다고 치지만 문종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문종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한국사의 역대급 왕위 후계자였으며 그의 재능은 매우 뛰어나고 비범하여 감히 동생들이 대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9] 게다가 문종의 나이는 그 당시로 봐도 한창인 나이인 30대 중후반으로[10] 사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문종이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1%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가지고 그것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부정적인 평가라고 치부하는 것은 부정적인 평가를 만들기 위한 평가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게다가 세조의 막장성은 그 당시 사람들도 정말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야차, 인간백정, 패륜아라고 불리던 세종의 아버지 태종마저도 자신의 친형제들과 자식들에게는 너그러웠으며, 1차 왕자의 난은 상식적으로 먼저 치지 않으면 이방석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라도 본인의 안위가 위험해 지는 상황이였다.[11] 심지어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형마저도 용서해 주는 비범함을 보인 인물이다.[12] 세종 역시 형제들과 자식들에게 너그러웠고 세종의 부인 소헌왕후 역시 그 당시엔 자비롭기로 소문난 왕비였다. 그런 사이에서 나온 세조가 막장 오브 막장인 패륜아에, 자신과 닮은 먼치킨인 문종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걸 생각해 낸다는 게 사실 더 웃긴 일이 아닐까?

애초에 문종이 딱 9년만 더 살아서 47세에 죽었어도 단종이 20세 나이에 즉위했을 것이고, 조선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지닌 단종에게 그 어느 누구도 태클을 걸지 못했을 것이다.[13] 계유정난 자체가 명분이 빈약한 반정이었는데, 그나마 단종이 성인이었다면 그냥 왕위에 눈이 뒤집힌 숙부의 역모로밖에 보이지 않고, 지지자도 그만큼 없었을 것이다.

위에서 왕자들의 대외 활동을 장려해 정치적 입지가 비정상적으로 커진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입지가 커진 수양대군도 형 문종이 살아있을 때는 큰소리 한 번 못 내보고 알랑방귀만 뀌던 신세였다.[14] 입지가 커졌다고 한들 문종 입장에서 수양대군 따위는 말 잘 듣는 귀여운 동생일 뿐이었을 정도로 왕권에 1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더하여 왕자들의 대외 활동을 장려해야 했던 현실적인 배경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수양대군은 명 사신의 접대를 맡은 적도 더러 있는데, 이건 무슨 수양대군에게 여러 경험을 하게 해주겠다 하는 게 아니라 세종도 아프고 세자도 아프니 대타로 수양대군이 투입된 것이었다.[15] 세종이나 문종 모두 능력과는 별개로 젊은 시절부터 건강과는 담을 쌓아서 각종 병을 달고 살았고, 사실 세종조의 그 분야를 가리지 않는 무지막지한 업적들을 보면 몸이 남아나는게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때문에 아버지 태종이 기껏 왕권 강화한다고 육조직계제를 시행한 것도 의정부서사제로 돌려서 업무량을 분산시키고 능력있는 관료는 정말 문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쥐어짜서 부려먹었음에도 언제나 일손은 부족했고, 국가 재정상 관료를 무한정 충원시킬수는 없으니 가장 만만한 것이 바로 아들들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저 왕자들의 활용이 아니었으면 세종조의 그 수많은 업적 중 일부분, 어쩌면 상당수는 당대에 실현되지 못하고 후대로 밀리거나 아예 역사에 등장하지도 못했을거라는 이야기다. 태종과 세종 저리가라 하는 강력한 황권을 구축한 명나라도 결국 황제의 물리적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권력의 행사를 환관에게 분담시키면서 그야말로 환관이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된 걸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친아들들의 활용은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또한 문종이 승하했다고 해도 수렴청정을 할 대비나 대왕대비가 있었다면 계유정난의 성공 가능성은 극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가 세자빈 시절 모두 죽었기 때문에 어린 단종을 보호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유정난의 성공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김종서를 필두로 한 단종에게 충성하는 고명 대신들은 군권과 정치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16], 수양대군은 이때도 야망을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 즉, 문종이 아들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수렴청정을 할 왕실 어르신도 없는 상황에서도 혹시라도 누가 감히 딴맘을 먹지 못하도록 탄탄한 정치 기반을 마련해 주고 떠났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기어이 반정을 성공시킨 것이 대단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의 결정적인 실책을 굳이 찾자면 소헌왕후의 3년상이 끝난뒤에도 새로운 문종의 세자빈 혹은 자신이 계비를 들이지 않은거 밖에 없다. 만약 계비를 들였다면 계유정난의 가능성은 낮은것을 넘어 0%가 충분히 되고도 남았다. 전후술하다시피 그 계비가 없어도 괜찮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론 실책이지만 객관적으로는 큰 실책도 아니었다.[17]

하지만 굳이 새로 계비를 들일 것도 없이 현덕왕후 사후 사실상 안주인 노릇을 했고 명에서도 공인했던 귀인 홍씨를 그냥 세자빈이나 중전으로 올리기만 했어도 간단한 일인데 그냥 놔둔 걸 보면 애초에 세자빈 내지 중전 자리를 채울 필요성 자체를 못 느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계비를 들이는 것이 정답이라 보기도 어렵고, 당시의 조선 왕실은 당연히 계비라면 학을 뗄 수밖에 없었다.[18] 이전의 김씨 봉씨야 애도 낳기 전에 폐출된 것이니 현덕왕후를 세자빈으로 올려도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홍귀인을 덜컥 정궁으로 올렸다가 새 대군이라도 낳아버리면 문종의 형제들의 야심이 문제가 아니라 홍씨와 그 아들을 두고 어떤 장난질이 들어올지부터 걱정해야 할 일이었다.[19][20] 실제로 홍귀인은 아들은 고사하고 자식 하나 없었음에도(유일한 딸은 요절) 오히려 수양대군에 의해 숙빈으로 승작되면서 도리어 단종의 친위세력이었던 혜빈 양씨의 영향력만 감소되고 말았는데, 그런 그녀가 설령 왕비로 봉해지고 대비가 된다고 해서 단종을 적극적으로 보호했을지는 의문이다.[21]

즉, 계유정난은 아직 30대에 불과했던 문종의 요절 등 예측이 불가능했던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생긴 비극이지, 왕자들의 정치적 입지가 비정상적으로 강한 게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후대의 왕족이나 세종의 형제들에 비해 세종의 아들들의 정치적 입지가 강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강해진 입지조차 실질적인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계유정난은 위에 언급된 확률 낮은 일들이 겹치면서 일어난 것이지 수양대군이 너무 존재감이 커서 일어난 일만이 아니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측하기도 힘들었을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을 선대 왕의 실책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세종을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대명 사대 외교를 위한 공물 수급의 폐단

세종은 지금에 와서야 한자를 대신하는 훈민정음 덕분에 자주적인 왕으로 그려지지만, 시대가 시대다 보니 세종 역시 일정 부분 사대 외교를 표방했고 세종실록 등 당대 기록에는 현대인 기준으로는 의외라고 여겨질 정도로 다수 실려있다. 실제로 그의 통치 기간 중 몇몇 법들이 "중국이 하니깐"이라는 이유로 통과된 경우도 있곤 했었다.

세종 시절에는 일단 특산품을 황제 개인이 달라는대로 구해주어야 했기에 공물 관련해서는 왕부터 일반 백성까지 명나라 상대로 가장 뺑이를 많이 쳤다고도 할 수있다. 특히 일하는 만큼 노는 것도 대륙 황제 스케일로 아주 확실하게 놀아제끼던 선덕제는 원말명초의 연경 고려양 페티시즘에 맞춘 후궁용 미녀와 이들을 수발할 고자 소년(동자 내시)들은 물론 큰 사냥개와 길들인 송골매, 야생 스라소니 같은 아주 구하기 더럽게 까다로운 것만 요구했고, 이거 맞춰주느라고 지방관하고 백성들이 농한기가 되어도 쉬지도 못하고 산짐승 몰이 하느라 산야를 돌며 뺑이를 쳐야했다. 심지어 송골매 조달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와도, 세종은 "민간의 폐해가 있는 것은 그 일이 경한 것이나, 사대(事大)를 성실히 하지 않는 것은 그 일이 중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사신 접대에 드는 과도한 경제부담도 문제였다. 일단 명 사신이 북경에서 출발하는 의주에서 한번 잔치를 베풀고, 평양에 도착하면 또 잔치, 황주에 도착하면 또 잔치,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영접사를 보내 잔치를 베풀고, 한양에 도달하면 문무 백관과 왕이 한데 모여 접견한 후, 태평관에서 하마연이라고 잔치, 그다음 날도 익일연이라 잔치, 왕의 특별 잔치, 종친의 잔치, 의정부가 마련한 잔치 등...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도 송별연을 벌여 잔치, 길목인 개성 - 황주 - 안주 - 의주 이렇게 또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무역 금지의 여파로 조세운반 이외의 물류순환이 거의 안되다보니 잔치에 필요한 대량의 물자(음식, 술, 옷감 등)를 현지 주민들에게서 충당해야했고 이는 자연히 국소적 생필품 부족과 물가상승으로 이어져 지역경제의 파탄을 일으켰다.

게다가 사신 개인에 대한 선물 명목으로 뇌물도 두둑히 챙겨줘야 해서 더 문제가 되었다. 실제로 조선에서 황제의 요구보다 사신의 요구가 더 큰 부담일 수가 있던 게 사신이 서너 개의 궤짝(상자)를 들고 와서 200개의 궤짝을 들고 가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비용 또한 조세로 충당하니 이는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3.1. 반론

큰 그림으로 보면 조공 = 무역 활동에 가까우며 사실상 조선 쪽이 명백히 흑자를 보는 거래에 가까웠다.[22] 또한 대명 사대는 생존 외교를 위해 대외적으로 표방한 명분일 뿐, 위에서 예시를 든 외교 활동상의 폐단을 사대주의와 직접적으로 관련짓는 것은 선동에 불과하다.

일단, 사대란 대국을 섬기는 것이지 사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23] 흔히 우리가 아는 굴욕적인 '사대주의'의 모습은 병자호란 ~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할 때까지 모습에 가깝고 세종 때의 '사대 외교'는 전혀 달랐다. 그런데도 백성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환관 출신 사신들에게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던 건, 당시 명나라에서 환관의 권력이 비정상적으로 강대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황제의 최측근으로 서열에 상관없이 자국 내에서도 부릴 횡포는 다 부리고 다니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조선도 이들에게 어그로 잘못 끌었다간 무슨 국가적 봉변을 당할 지 알 수 없었다.[24]

세종만 가지고 비방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게, 당장 전대 왕 태종 때도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환관 황엄이 전국 각지를 물건을 갈취하러 돌아다니며 저항하는 자는 두들겨 패질 않나, 조선 국왕 앞에서 방자하게 굴어 잔치를 파탄내고 또 조선 국왕 보고 불상에 절하라고 강짜를 부리기까지 해서 임금 본인이 빡쳐서 황제한테 직소하려고 했으나[25] 신하들이 말려서 안 했었다. 태조 대에는 아예 사신으로 온 고려 출신 환관인 신귀생이 연회 중에 술에 취해 태조의 면전에서 발검[26]을 하려 하는 추태를 보일 정도였다.[27] 그러므로 명나라의 사신을 대접했던 것은 전대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사신 개인에 대한 로비 비용이나 접대 비용의 문제는 조선의 사대 외교의 폐단이라기보다는 명나라의 환관 정치의 폐단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종 시대는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이 정상화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일단 명에 보내는 공물이나 예물 중에서 금과 은을 제외하게 된 것이 세종 때부터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금이나 은은 화폐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를 공물로 보내는 것은 경제에 심한 부담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비록 로비를 통해 조선 출신 환관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28] "옛날에는 조금 나왔는데 이미 고갈이 되었다"고 구라를 쳐서 조공 항목에서 금은을 삭제한 것은 큰 공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29] 더욱이 세종 후기에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개인 선물(=로비) 역시 황제의 명으로 금지되었고, 환관 출신 사신도 급격히 줄어들게 되어 여러모로 문제가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대명 사대 외교는 태조 이래 조선의 국가 이념이자 국가 전략이었고, 특히 태종 이후로는 더 굳어졌다. 영락제 조공 문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세종 조선의 조공 정책은 조선에게 엄청난 무역 흑자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당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은게 아쉬운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세종 치세 초기의 명나라 황제는 전투력으론 나름 알아주는 영락제였다. 그는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親征)하고 몽골과 베트남까지 원정을 했으며, 이전까지 원나라 때를 제외하면 중국에게 "바다 멀리 골치 아픈 놈들이 있었지" 수준이었던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고, 정화를 파견해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진출한 포부가 큰 인물이었다. 이런 와중에 바로 옆에 붙어있는 조선이 명나라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쟁하자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실제 《태종실록》을 보면 명나라의 남월(베트남) 정벌을 보고 식겁한 장면이 나오고 세종 대에 들어서 결국 독립한 베트남을 보고 기뻐하면서 대놓고 황제를 신하들과 디스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30]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명나라에서도 번영하던 당시 조선을 어느 정도 경계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 또한 있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에 일어난 어여의 난과 관련하여 "조선의 왕이 어진 이로 번창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알려지는 것은 좋지 않다."하여 관련자들의 출국을 금한 사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세종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으며, 실용주의자임과 동시에 조선주의자였다. 정말 열렬한 사대주의자였으면 《 훈민정음》이나 《 칠정산[31]을 만들 생각도 없었을 터 비록 당대 명나라가 영락제와 이후 후대까지 나름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라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내해야 했을 뿐[32], 세종은 재위 기간 내내 조선의 정체성과 실리주의를 지속히 강조했으며, 이 태도는 문종 세조에게도 이어진다.[33] 더군다나 세종은 삼한고토 회복을 기치로 조정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야인들의 땅으로 남아있던 곳으로 북진하여 현대까지 내려오는 한반도의 경계를 확립한 사람이다.

물론 명나라와 관계 개선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조선 왕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세종에게 그러한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종은 독자적으로 최신예 군사 무기를 개발하고 (명목상이지만) 명나라 영토였던 곳을 군사를 보내 무력으로 정복하고 군진을 설치했으며 한자가 아닌 조선만의 독자적인 문자를 창제하고 보급하는 정책도 시행했는데, 이것은 필요한 정책이긴 했지만, 충분히 명나라에 개기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명나라와 이로 인한 외교적 마찰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당시의 사대는 이러한 실리를 취하기 위해 연기해 준 것에 가깝다.

또한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도 명나라에 아직까지 남아 있던 순장 풍습을 "아무리 중국의 풍습이라지만 이뭐병이네"라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 당시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꼬장의 대가 허조가 대표적이었다. 영락제가 죽고 그의 아들 홍희제가 즉위하자 영락제를 위해 영락제가 총애하던 조선인 궁녀 한씨를 비롯한 궁녀 15인을 순장했단 말을 듣고는 "허수아비라도 순장하면 자손이 끊어진다는[34] 말은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데 황제의 무덤에 궁녀 15인을 순장했다니 중국의 일이라도 본받을 것이 못 되옵니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따지고 보면 실제로 명나라엔 원나라의 ' 오랑캐스러운' 풍습이 많이 남아있기도 했고 말이다.

대국을 섬기는 게 백성의 곤궁함보다 중하다는 말도 다르게 해석할 필요도 있다. 대국 즉 명나라를 잘 섬긴다는 것은 만일 명나라가 고약한 요구를 해온다 해도[35] 조선이 고분고분하게 말만 잘 듣는다면 명나라도 자기네 말 잘 듣는 (자국 입장에서는) 거의 호구나 다름없는 나라에 구태여 군사를 보내 침공 및 정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게다가 고려 때 원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면 굴복하지 않고 맞선 것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몽골과의 전쟁으로 수십만의 무고한 고려인이 죽었다. 명나라 군이라고 이 짓을 못할 리는 없을 터. 결국 명나라를 잘 섬겨서 차라리 백성이 곤궁해지는 게 명나라를 개무시한 댓가로 전쟁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야 낫다는 의미일 지도 모른다. 이른바 대미 자주외교 한다는 나라들의 현실을 보라.

분명한 것은 세종 후기 이후 조선은 조공 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무역 흑자라는 실리를 취하였다는 것이며, 가난한 농업 국가인 조선 입장에서 이 무역 흑자는 정부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귀중한 자금줄이었다. 국가 재정이 있어야 국방도 하고 행정 조직도 돌아가는데 이걸 백성들과는 무관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국가 행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소리다. 당장 저 조공 무역을 통한 수입품 중에는 구리, 납 등의 희귀 자재와 각종 약재, 서적 같은 문화자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금속은 절간의 종까지 떼어다 화포를 만드는 데 쓸 정도로 만성적인 금속난에 시달렸던 조선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전략 물자 그 자체였다. 비록 초기, 중기 백성들의 고통도 분명 있었지만 결국 조선은 국경선을 확립하며 조공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냈고, 그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 바로 세종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당장 세종 초기 영락제가 세종에게 잔치하는데 보태라고 양, 거위, 옷감, 다량의 책 등을 후하게 하사한 기록이 있는데, 이민족에 대해서는 툭하면 직접 출정해 두드려패고 보는 영락제가 이민족들 중 가장 강성했던 조선을 이 정도로 우호적으로 대한 것은 조선 조정이 전임 태종 때부터 정난의 변을 주시하면서 영락제 코인을 타기 위해 벌인 외교공작의 결실이었다. 그냥 단순히 굴욕적인 사대외교라는 한마디로 치부할 수 없는 것.[36]

또한 원나라의 일본원정 문서를 봐도 원 간섭기 시절 원나라가 고려에게 요구한 것을 보면 명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는데 세종의 사대 외교에만 뭐라하는 것도 부당한 면이 크다.

4. 부민고소금지법

태종 재위 기간인 1410년에 실시되었다가 반발이 심해 일시 폐지되었던 수령고소금지법은 세종 때 다시 시행된다.

이 법을 제안한 사람은 허조로 태종~세종 대 최고의 예론 전문가로 태종 대부터 중용된 인물이다. 청렴강직한 인물로 조선의 예학 정립에 큰 공을 세웠으나 당시 신하들의 '군기반장' 역할을 수행하여 젊은 신하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37] 대중들에게 퍼진 이야기는 허조가 눈물 탄식하면서 "종이 상전을 고발하면 무조건 교형에 처하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면, 종사에 관계된 일이나 살인한 일[38]이 아닐 경우 곤장 100대, 유형 3,000리에 처하도록 하라."라고 청하자 세종이 받아들였고 세조가 폐지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 법안을 이유로 "세종은 흔히 말하는 애민 군주가 아니었다"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피해 주는 걸 용납치 않은 전근대 유교 이데올로기의 소산이라는 비판이 있다.[39]

조선왕조실록[40]에 자세히 나오는데,
예조판서 허조 등이 상계했다.
"......전조(고려)의 풍속은 이 뜻을 받아들여, 백성으로 수령을 능멸하거나 반항하면 반드시 이를 몰아냈고, 심지어는 그 집까지 물웅덩이로 만들고야 만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속관이나 아전의 무리로서, 그 관의 관리와 품관들을 고발하거나, 아전이나 백성으로 그 고을의 수령과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죄의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종사의 안위에 관한 것이거나, 불법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면, 위에 있는 사람은 논할 것도 없고,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아래에 있는 자의 받는 죄는 보통 사람의 죄보다 더 중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1. 반론

모든 정책을 해석 및 평가할 때는 시대상과 맥락을 이해하며 평가해야 한다. 전후 사정을 뜯어보면 해당 법을 악법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다.

먼저 조선은 모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한 최초의 국가이다. 고려는 일부 지역(주현)에만 지방관을 파견했고 나머지는 고려 초 해당 지역의 호족이나 토호들이었던 향리가 대를 이어서 계속 통치했으며, 이 탓에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도 향리가 군사, 행정 실무를 수행하는 읍사(邑司)가 따로 있을 정도로 향리들의 권한이 강했다. 그 실태가 어땠는지는 제2차 여요전쟁 당시 현종의 피난길 기록이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41] 고려가 안정적일 때는 적은 비용으로 쉽게 지역 여론을 장악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무신 정권 이후 중앙 정계가 흔들리자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했다. 처음부터 국왕 대리인인 지방관의 권한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정책이 지방에 일률적으로 적용되기 힘들었다. 지역마다 제도가 다르니 조세는 형평성을 잃었으며 권문세족의 침탈에도 취약했다. 당장 최씨 무인정권이 몽골과의 전쟁에 극히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급기야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가의 노비가 수령을 깔보고 심지어 폭행하는 사례가 벌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향리와 토호들은 어디까지나 해당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 대부분이라 몽골과 왜구와 침입으로 유민이 급격히 늘어난 고려 후기에는 한계를 여실히 나타내며 쇠락해 갔다.

조선은 이러한 전 왕조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중앙집권화와 수령의 권한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이 법으로, 위에 언급한 문제의 향리들이 중앙에서 파견한 수령에게 불복하고 중앙 정부의 시책에 반하는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게 본 뜻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지방관을 고소하는 세력은 대부분 힘있는 지역 유지들이지 일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 중앙 집권을 꾀하는 정부 입장에서 일반 백성들이 "우리 고을 수령은 세금을 착복하고 가혹한 형벌을 멋대로 가한다!"라며 항의하는 것과, 지역에서 재산과 권력이 있는 토호들이 "이 수령은 우리 마음에 안 든다. 마침 꼬투리 잡을 것도 있으니 이걸 걸고 넘어져서 내쫓자."라고 쑥덕거리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심각하게 여길까? 그것도 이미 수백 년간 무너진 지방 행정력을 회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물론 부작용이 없을 순 없겠지만[42] 조선 정부는 무신정권 이후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방 행정 확보가 무력화된 상황을 극복하려면 이 정도 법안이 필요하며, 그로 인한 효과가 폐단(ex. 힘없는 백성들의 억울함)보다 크다고 보았다. 사실 그 백성들의 억울함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중앙에서 내려보내 인사평가와 교체가 가능한 수령보다는 그 지방에 뿌리를 박고 살면서 백성들이 죽을 때까지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 토호들 쪽이 몇 배는 큰 문제였다. 그리고 이렇게 강화된 권위를 가지고 지방에 파견된 수령들은 중앙 정부에서 부여받은 행정력을 바탕으로 각 지역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축적했다. 이는 공법을 비롯한 세종 대의 여러 국가 시책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조선의 재정을 충실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괜히 세종실록에만 세종실록지리지가 붙어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중앙 집권화와 지방 통제를 지속적으로 실시한 결과 조선은 임진왜란 때 수도가 점령 당하는 초유의 사태 때도 버텨준 막강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일본군에 반격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법이 있다고 고소를 안 한 게 아니다. 분명 수령 고소 금지를 때렸음에도 무시하고 고소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1429년에는 고소가 끊이지 않는 수령은 장 100대에 처하는 법도 제정했다.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했던 세조조차 별것 아닌 일이나 허위로 신고하는 폐단이 너무 심해져서 도로 부활시켜야 했다. 게다가 법이든 뭐든 철판 깔고 고소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고[43], 법적 절차로 전가사변이라는 형벌을 새로 신설해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도록 최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뒀다. 즉, 부민고소금지법 하나 믿고 갑질했다가는 야인들이 득실거리는 추운 변방으로 끌려가야 했다는 것. 세조 때 잠시 폐지된 원인도 폐단을 우려해서가 아니라 쿠데타 과정에서 협력한 이들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중앙과의 연줄을 믿고 막 나갔기 때문이었다. 세조 시기 지나치게 비대해진 특권층과 지방 세력의 충돌은 세조 말년에 터진 이시애의 난으로 절정에 달한다.

수령에 힘을 실어주는 이 법이 시행된 뒤에도 조선의 수령은 끊임없는 도전과 견제를 받았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직전 전란을 감지한 조정에서 대비를 지시해서 지방관들이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릴 때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세력이 지역 토착 세력인 영남 유림이었다. 이들은 중앙에 상소를 올리고, 학맥으로 중앙의 관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고소만 안 했지 여전히 지방관들과 힘싸움을 벌였다. 합천 지역 유지였던 문덕수가 백성들을 쥐어짠다며 경상감사 김수를 탄핵하다 구금당하자 이에 반발한 그의 제자들이 구명 운동을 하는 등 조직적으로 태클을 걸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곽재우가 근왕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김수를 죽이라는 격문을 돌린 것도 수령과 지방 유지들 간 충돌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중후기에 일종의 변호사였던 외지부들을 탄압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민간의 법조 활동을 탄압한 것이지만, 당대의 상황에서는 국가(가 권한을 위임한 수령)의 고유 영역인 사법 판결에 민간인이 개입해 압력을 행사하려는 것이고, 이들을 돈 주고 고용할 수 있는 법무 소비자가 누군지야 뻔했다.

경상감사 김수와 영남 유림의 대립에서 보이듯 고소를 안 하더라도 우회해 수령과 맞대거리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부민고소금지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불과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마찬가지어서 속오군, 대동법 등 대대적인 제도 개편이 진행되자 향교, 서원에 근거하고 있던 지방 세력의 이해관계와 맞부딪쳐 지속적인 충돌이 벌어졌고, 대동법 전국 시행까지 근 100년을 잡아먹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5. 노비종모법

당시의 양인(천민을 제외한 나머지) 아버지와 천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면 설사 아버지가 양반이라 해도 서자가 아닌 노비가 된다는 법. 조선 초기에는 노비 남성과 양인 여성이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는 일은 드문 사례고 그 반대가 많았기 때문에 자기 나라 백성을 노비로 만들려는 조치처럼 보인다.

5.1. 반론

한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조선시대는 奴婢인구의 大擴張期였으며 奴婢制의 最全盛期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노비인구가 늘어나게 된 주요 원인은 고려시대에 마련된 ‘賤者隨母法’과 ‘ 一賤則賤’의 원칙이 조선왕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良賤交婚이 성행하여 良役인구를 크게 잠식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양역인구의 노비화를 막기 위해 양천간의 교혼을 금지하거나,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良人과 婢간의 소생에게는 ‘從父法’을, 그리고 奴와 良女간의 소생에게는 ‘從母法’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유 노비인구의 규모를 늘리려는 兩班士族의 집착에 의해 결국 『 經國大典』(1485년 반포)에서는 양천교혼의 소생에게 모두 ‘ 일천즉천’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으로 규정하게 된다.

‘일천즉천’의 원칙은 18세기에 들어와 수정되기에 이른다. 즉 양역인구의 증대를 위해 고심하던 조선정부가 ‘奴娶良妻所生從母從良役法’을 1731년부터 永久的으로 시행하면서 노와 양녀간의 소생을 모두 양인 신분으로 귀속시켰던 것이다. 더군다나 19세기에 이르러 納貢하던 內․寺奴婢의 從良(1801년), 奴婢世襲制의 폐지(1886년), 노비제의 전면 폐지(1894년) 등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1894년 甲午更張에 의한 노비제의 혁파는 법제상의 조치였을 뿐이며, 일제강점 초기까지도 노비는 殘存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던 노비가 법제상의 변화로 인해 급격히 사라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 조선시대 奴婢制의 推移와 노비의 존재 양태 -동아시아의 奴婢史 비교를 위한 摸索-《역사민속학》 2013, vol., no.41, pp. 73-99 (27 pages)

간혹 세종대왕 노비종모법을 시행함으로써 조선 시대에 노비가 폭증하였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이는 세조의 치세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일천즉천 종모법을 동일시하면서 나온 무지 혹은 오해의 결과다.

사실 이도 역사적 연유가 있다. 고려 시대 이래 양천교혼(良賤交婚)은 금지하였으며 그나마 소생은 모두 천인계를 따라 천인으로 규정하였다. 그 결과, 양역(良役) 부담자인 양인의 수가 갈수록 감소되자 조선 건국 초부터 국방 정책과 관련하여 이에 대한 대책이 빈번히 논의되다가 양인 소생이 다수인 점에 착안하여 1414년(태종 14)부터 노비종부법을 양인의 비처첩소생에 대하여 실시한 것이다. 그 뒤 실시에 따른 여러가지 폐단 때문에 실시 여부를 놓고 논란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1432년(세종 14)에는 이를 폐지하고 종모법으로 '환원'시킨 것이다. 출처 즉, 없던 게 툭 튀어나온 게 아닌 것.

무엇보다 세종 시절때의 노비종모법은 최소한 아버지가 노비라고 할지라도, 어머니가 양인이라면 자식이 양인이 될 수 있었지만, 세조가 확립시킨 일천즉천은 그런 것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노비종모법은 조선 초기에 세종시절부터 세조시절때 까지 아주 잠시 동안만 시행되었고 ( 세종 노비종모법을 시행한 1432년 부터 세조 일천즉천제도로 바꾼 1461년까지 약 29년 동안만 노비종모법이 시행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영조시절때인 1731년에 다시 노비종모법으로 노비제도가 환원될때 까지 일천즉천법이 무려 270년(1461년 ~ 1731년) 동안이나 계속 유지되었다. 즉, 노비종모법이 시행된 기간(약 29년)과 일천즉천법이 시행된 기간(약 270년)만 놓고 보아도 노비종모법 때문에 노비 인구가 조선시대 내내 폭증(?)했다는 주장은 말이 안되는 주장인 것이다. 오히려 조선시대 당시 노비 인구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정확히 일천즉천법이 시행된 시기하고 대부분 겹치는 편이다.

실제로 실록의 기록을 보면 경국대전의 형전 반포는 세조 7년때인 1461년이며, 신찬 《경국대전》 형전을 반포하기를 명하다 그때 이미 경국대전속에 일천즉천의 원칙이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세조 노비제에 관해 feat 일천즉천 간혹 경국대전의 최종 수정본인 《을사대전(乙巳大典)》의 반포가 성종 시절인 1485년이라 성종 시절에 일천즉천이 확립되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비제도에 있어서 일천즉천의 원칙이 확립된 《형전(刑典)》의 완성과 공포, 시행은 세조 시절인 1461년 7월이었으므로 일천즉천이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시기는 성종 시절이 아닌 세조 시절인 1461년 부터였다.

또한, 미국 한국학의 대부로 평가받는 제임스 팔레의 저서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에 따르면 노비 인구 증가의 이유는 종모법 때문이 아닌 납세와 군역, 기타 잡역을 피해 16세기쯤부터 양인 농민들이 양반 가문에 자발적으로 몸을 예속[44]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이로인하여 노비 인구가 증가하는 현상을 불러왔다고 한다. 그외 팔레는 고려 중기때인 무신정권 이후로 노비 인구가 폭증했다고도 주장하였다. 참조 링크 또한, 16세기 이후부터 전쟁을 여러 차례 치르는 등으로 생활 수준이 하락하여, 양인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노비로 파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즉, 노비 인구가 늘어난 것이 세종의 노비종모법 때문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역사학자라면 할 소리가 아니다.[45] 게다가 세종은 이 제도와 함께 양인 아버지와 천민 어머니가 결혼하는 양천교혼을 금지시켰다. 양천 교혼 관련 세종 실록 기록[46]

즉, 세종은 노비의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것을 막은 대신에, 노비의 수가 증가될 수 있는 양천교혼을 금지시켜서 노비의 수가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기의 제도를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세종의 조치가 노비 증가를 불러왔다는 주장은 세종대 노비 수의 실증적 검토 없이는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종모법은 오히려 종부법에 비해 천출의 생산이 더 어려워진다. 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뿌리기와 씨받기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자는 많은 여성과 어려움 없이 관계를 하여 자신의 자녀를 낳을 수 있지만, 여성은 한 남성과의 관계 후에 임신을 하면 아이를 품는 데 10개월, 임신 후에도 최소 3개월의 몸조리가 필요한데 과연 남성과 여성 중 어느 쪽의 신분을 따르는 것이 천민 증가에 유리하겠는가? 아니 굳이 관계를 시킬 필요도 없이 그냥 아비가 천민이라고 우기기만 해도 천민을 쉽게 양산할 수 있는 것이 노비종부법의 대표적인 폐해였다.[47]

당시 기록을 보면 세종이 노비종모법을 실행한 이후에 세종대에 노비 수가 과연 늘어났는지도 의문이다. 위의 기록은 세조 5년 때의 기록인데 이 기록에 따르면 1432년 노비종모법 실행 이후에도 공천이 오히려 날로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세종이 실행한 노비종모법의 경우엔 예외 조항이 꽤 많아 양인 남성과 노비 여성이 결혼해 낳은 자식의 상당수가 양인이 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이라고 해서 노비 세습제가 없었던 게 아니다. 시대나 왕조에 따라 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인데,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다. 그 예로 당나라의 노비들은 신분이 자식들에게 세습되지 않았지만 원나라의 경우 노비 세습제를 정책으로 삼았고, 노비들은 면천되기 어려웠다. 또한 조선 초기 중국이라면 명나라인데, 명나라의 노비도 실질적으로 세습되었다. 홍무제의 치세 때 사노비 소유가 금지되자 기존부터 노비를 소유했던 가문들은 노비들을 가문에 입적시켜 법적으로는 노비가 아닌 것처럼 눈 속임을 하였으며, 이들의 자식들 또한 신분이 세습되었다. 더욱이 타 민족 노비들은 아예 논외로 친다.[48] 표면 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지된 중국의 노비 세습제는 명은 물론 청대에까지 이어졌으며, 1685년 강희제의 치세 때 다시 한번 폐지령이 내려졌다. 유형원(柳馨遠)이나 이익(李瀷) 등의 저술에는 중국에 노비 세습제가 없다는 내용이 보이지만 이러한 실정을 자세히 알지 못했던 것. 다만 일천즉천과 같은 제도는 시행하지 않았으며, 양인 이상의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의 자녀는 노비가 되지 않았다.[49]

세종 사후 후대의 세조 시절때인 1461년 경국대전의 《형전(刑典)》에선 다시 일천즉천으로 못 박았으며, 이후로 노비를 줄이고 양인들을 늘리기 위해 노비종모법을 주장한 사람들은 기득권층의 맹공을 받아야 했다. 조광조는 노비종모법과 한전론을 중심으로 민생 개혁을 꾀하다 사약을 받았으며, 조선 후기 개혁론의 뼈대를 만든 율곡 이이 역시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을 주장했다. 송시열은 1669년 노비종모종량법, 즉 공사천 양처소생은 남녀 불문하고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자고 했다가 주위의 거센 반발과 매도에 몇 년 뒤 내가 망언을 했다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단순히 노비종모법이 노비를 폭증시킨 악법이라면 왜 기득권층이 반발하는 모습이 보인단 말인가.

1669년(현종 10년), 조선은 양인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종모종량법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는 부재지주로서 전호에 의한 소작경영이나 고용노동력의 동원으로 토지를 경영하고 있는 자들이 많았던 서인 측이 지지한 정책으로, 노비노동력에 의존하는 바가 큰 중소지주가 다수인 남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서인과 남인의 정권 교체기마다 번복되었다. 갑인예송으로 남인이 주도권을 쥔 숙종 1년(1675)에는 종부종천법으로 변경되었고,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주도권을 쥔 숙종 7년(1681)에는 다시 종모종량법으로 기사환국으로 또 남인이 정권을 쥔 숙종 15년(1689)으로 종부종천법으로 바뀌며 개변에 개변을 반복했다. 이러한 갈등과 개변의 양상은 남인이 경쟁 구도에서 탈락하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진행되던 1730년, 다음해 1월 1일부터 아버지가 노비이되, 어머니가 양인인 자들의 신분을 양인으로 만드는 노취양처소생종모종량법, 쉽게 말해 노비종모법을 실시하도록 확정 짓고 이를 불변의 법으로 공표하면서 법적으론 종료되었으나 노비매매문서를 보면 이 경우에도 노비가 되었다. 영조가 종모법을 허가할 때 한 "마땅히 전의 하교에 의해서 거행하고, 만약 폐단이 있으면 다시 변통해야 한다."라는 발언처럼, 종모법, 종부법 등 노비에 대한 정책은 국가의 이익과 정치 지형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더욱이 세종 대의 종모법은 종친과 관료들과 40세 이상인 백성들의 자손에게는 예외 규정으로 적용되었음으로, 노비 인구가 급속도로 늘지 않게끔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제재 장치를 걸어놓은 셈이다.

그나마 조선은 19세기에 들어서는 노비 비율이 한자리수로 떨어졌으나 태국 같은 경우에는 20세기 초기까지도 전국민의 30%가 노예였다가 점진적으로 폐지되었다. # #

그리고 노비 문제로 따지면 조선보다 고려 말기가 더 악질이었던 것이, 충렬왕 원나라가 고려의 노비개혁을 시도하자 “옛날 우리 시조(始祖)께서 뒤를 잇는 자손들에게 훈계하며 이르시기를, ‘무릇 이 천류(賤類)들은 그 종류가 다르니 진실로 이 무리들을 양인으로 삼지 말라. 만약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뒤에 반드시 벼슬길로 나아가고 점차 요직(要職)을 구하여 국가를 어지럽히기를 꾀할 것이니, 만약 이 훈계를 어긴다면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50][51]

6. 사민 정책

4군 6진 개척 당시, 삼남 이남 지방의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다. 강제로 징발된 백성들은 북쪽으로 가는걸 피하기 위해 자해까지 벌였지만, 세종은 자해한 백성들까지 강제로 북쪽으로 올려 보냈다. 그나마 빠지는 데 성공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이 있었다면 를 잡아 바치는 것. 그 과정에서 돈 있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빠지게 되었다는 듯.[52]

다만 혜택을 기대하고 자원한 경우도 있다. 세제상 특혜, 농업 기술 보급, 의료 시설 정비, 원주민의 좋은 밭(숙전, 熟田)을 떼어 이주민에게 제공, 원래 관직에 종사한 사람을 찾아서 그 품계를 높여 주기, 처음 벼슬에 나갈 때는 특별히 8품직에 임명, 향리일 경우 부역을 면제해 주고 양반으로 높여 주기, 천인은 면천해 양인이 되게 하고 부역 면제 등이 그것. 또한 유럽 역사를 읽어보면 중세 가톨릭 교회와 봉건 제후들이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오지를 개발했고 고려 때도 여진족 침략을 막기 위해 남부 지방 백성을 함경도 영흥 평안도 평양 이북으로 이주시킨 적이 있는지라 사민 정책은 기존 정책을 답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주한 백성들은 북방의 혹독한 환경에 수천 명이 죽었다. 그 악명높은 중강진이 4군 가까이에 있고, 6진은 아예 한반도 최북단 지역들이다! 때문에 추운 날씨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이하생략.[53] 거기에 틈만 나면 쳐들어오는 여진족들한테 시달려야 했다. 한편으로는 중국 사신들에 대한 접대 비용도 대야 했고, 흉년이 겹치고 역병까지 돌아 또 수천 명이 죽었다. 그리고 세종이 개척한 4군은 세조 이래 포기되어 폐4군이라 불릴 지경이었다. 당시 그 때문에 원성이 아주 높았다고 한다. 또한 이주된 자들 중 일부가 도망치는 일이 있었고, 이는 선조 대에서 도망친 자들의 후손을 색출하는 쇄환령이라는 비극으로도 이어진다. 함경도에 대한 차별도 있어서 먼 훗날 임진왜란 때 함경도 사람들이 임해군 순화군을 붙잡아 일본에 넘겨버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54]

6.1. 반론

원성은 높았지만, 당시 변방의 사정상 사실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세종은 북방 개척을 위해 고려시대 동북 9성과 관련한 역사를 깊이 연구했고, 산맥을 방어선으로 삼으려 했던 동북 9성의 한계를 꿰뚫어 보았다. 세종은 안정된 영토 확보를 위해서는 압록강 두만강 유역까지 치고 올라가 하천을 방어선으로 삼고 그 지역의 인구를 늘려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아마 이 6진 개척 없이 당대 조정에서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경성 남쪽 어랑천 일대까지 내려버렸으면 니탕개의 난은 족히 함흥평야를 위협했을 것이다.

그만큼 북방 안정이 시급했기에, 세종대왕 본인도 백성들의 원망을 감수한 것이다. 당시 사민정책이 지나치다는 신하들의 진언에 본인이 직접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해서야 되겠느냐!"라고 버럭했을 정도로 그 집념은 대단했다. 실제로 4군은 비록 실패했지만 6진은 세종 대에 성공했다.[55] 비록, 엄청난 고생과 희생을 들여서 얻어낸, 넓이도 작고 생산성도 떨어지는 땅이기는 하지만, 세종은 한반도를 완전하게 조선의 영토로 만들었다.[56] 이런 외곽 방어선이 없으면 위에서 지적한대로 생산성이 높은 땅 역시 무사할 수가 없다. 고구려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핵심지역인 평안도-황해도 평야지대를 생산성이 떨어지는 요동 방어선이 단단히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며 이 방어선이 뚫리자마자 허무하게 멸망했다. 또한 여진인 귀화정책과 범죄자 이주 정책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4군 6진은 사람이 살아본 적 없는 전인미답의 땅이 아니다. 4군은 옛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 근처이자 발해 5경 중 하나인 서경압록부(추정)가 있던 곳 근처이고, 6진 역시 옛 동부여의 핵심영역이자 발해 5경인 동경용원부(추정)가 있던 곳 근처이다. 지리 상 벼농사는 힘들지만 , , 메밀, , 수수, 귀리 등은 당연히 재배할 수 있으며 고구려인들은 이 곡류들이 주식이었다. 4군 6진보다 더 북쪽의 여진족도 농사를 지었는데 이곳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던건 당연하다. 세종 19년 농사직설을 함경도와 평안도에 가르치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 4군이 폐군된 것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서가 아니라 단종 때 이곳에 여진족의 침입이 집중되면서 방어상 어려움 때문으로 폐군된 4군은 정조 때 무창을 시작으로 1869년에 나머지 3군 모두 복군되었다. 이 시절 여진족은 바로 청나라이므로 더이상 외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왕실의 조상인 이안사와 그를 따르는 고려인들부터가 두만강변 알동에 거주했고 이것이 조선왕조가 육진을 개척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유가 되었다.

4군에서 도망자가 나왔다는 것은 여러 사료에 기록된 사실이지만, 혹독한 환경 탓에 수천 명이 죽었다는건 사료상 근거가 없는 뇌피셜이다. 중국사신은 의주를 거쳐 한양으로 내려가지 이런 벽지에 갈 일은 당연히 없고, 간다고 해도 어쩌다 한두번 현지시찰 명목으로 방문한 것이지 평안도처럼 아예 주 이동경로였던 게 아닌데 사신 부담으로 트집을 잡자면야 아예 평서 전역을 무인지경으로 비워뒀으면 명군이라 불러줄 일이다. 함경도가 차별 받은건 조선초 조사의의 난, 이징옥의 난, 이시애의 난이 연달아 일어나 반역향으로 찍히고 생산력의 한계와 역사적 배경 탓에 전통적인 사족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4군 6진과는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다. 4군과 6진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대표하는 지역조차도 아니고 전체 판도로 보면 한 귀퉁이라 할 만한 곳들이다. 그리고 조선 자체가 생산력의 한계로 인한 주기적인 기아에 시달렸기 때문에 수천명이 죽었다 한들 딱히 4군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당장 세종대에 황해도에서 사람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돈 것은 혹독한 황해도 땅에 무리하게 사민을 시켜서 그런 것인가?

4군 6진의 설치는 물론 여진족에 대한 방어대책으로 하천을 경계로 안정된 국경을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지만, 세종대왕은 신하들의 반대에 대해 "조상들의 강역을 줄일 수 없다"고 밝혀 역사적인 인식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한 얘기지만 왕가의 발상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왕실의 권위를 크게 훼손시킬 수 있는 문제다.

7. 화폐개혁

세종은 중국의[57] 화폐 제도를 모방하여 조선에도 화폐 제도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태종 대 고려 말에 쓰이던 화폐인 저화[58]를 재도입하여 유통하려 했으나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태종이 열심히 통용하려고 빡세게 나갔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에 새로운 대책으로 중국에서 사용하듯이 금속을 이용한 동전 형식의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상거래에 더 이상 물물 교환을 금하고 화폐를 통한 거래만 할 것을 명령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열악한 조선의 화폐 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정책을 수립하고 동전과 저화를 대대적으로 발행했으나 쉽게 정착되지 않았다. 백성들은 늘 물물교환이나 다른 교환 수단을 사용했고, 정부는 강제성을 나타내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물 교환을 하는 백성들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거기에 벌금형을 때리는 처벌을 받았으며, 벌금을 때우기 위해 사채를 쓰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윗 사람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갔으나, 당연히 백성들이 재수 없으면 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화폐 사용 경험 부족 및 국내 교역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도 해동통보, 동국통보, 동국중보, 해동중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등 동전과 철전을 만들어 널리 유포하려 하였으나 관영 상점이나 일부 주점 및 약방에서 쓰이는 것 말고는 사실상 화폐 유통이 미비했다. 영토가 넓어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평야가 많은 데다 대운하를 통해 널리 물자를 유통할 수 있었던 중국과 달리 한반도는 면적이 중국보다 작은 데다 그나마도 산지가 70%를 차지했다. 물론 일본이나 유럽에는 당시도 화폐경제가 충분히 발달해 있었으나 자원이 적고 척박한 한반도의 전근대의 기술력으로는 수레가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도로를 산에 놓기는 사실상 어려웠기 때문에 물자를 널리 유통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18세기 이후 농업생산량의 증가와 은 유통 경험이 쌓이고, 대동법의 시행과 점진적인 확대가 되면서 화폐를 널리 유통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화폐 불신이었다. 여기에 조정에서 특산물은 현금으로 받으려는 모순적인 체제도 한몫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대 백성들은 화폐를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태종 대에도 저화를 발행하면서 세액 납부를 일부 저화로 대체 가능하게 하고 녹봉도 저화로 지급하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이것만으론 신뢰를 얻기는 힘들었다.

이처럼 화폐 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마음이 급해진 세종대왕과 신하들은 점차 강력한 법규를 제정하여 동전 유통을 강제하려 들었고 때문에 관아와 민중 간 충돌이 점차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물물 교환식으로 물건을 사고팔던 사람들이 적발되어 처벌받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민중의 반발 역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쌀 한 됫박으로 물물 교환을 하던 사람이 관리에게 적발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수군으로 끌려가다 자살하고 아내는 목을 매는 일이 발생했으며, 종로 시전 일대가 방화로 쑥대밭이 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그러다 마침내 한양성 안 여론이 폭동 전야 수준으로 흉흉해지자 세종대왕은 화폐 개혁을 포기하였고, 결국 이전의 물물 교환 경제로 회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다. 애초에 전국을 다 털어도 한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시장조차 없는 나라에서 무리한 화폐 도입이 잘될 리가 없었다.

조선은 명종조부터 장시가 등장, 활발해진 이후에 은화가 들어오면서 시장이 활성화 되고, 전국에 장시가 들어서고 나서야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시대를 한 200년 정도 앞지른 개혁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셈이다. 아무리 이상이 크고 높아도 현실의 벽은 엄연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

8. 고려 문화재 훼손

세종은 영의정과 좌의정을 포함한 신하들의 강력한 주청과 논의끝에 전 왕조 고려의 몇몇 흔적을 없애게 되었는데, 물론 모든 것을 없애려 한 것은 아니고 상징성이 높은 몇몇 문화재에 한해 시행되었다. 고려 임금의 어진, 동상이나 몇몇 불교 문화재들을 찾아내 땅속에 묻거나 불에 태웠다. # 1426년(세종 8년) 도화원에 간수된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역대 군왕과 비주의 영자초도(影子草圖)를 불태웠고, 1428년(세종 10년) 충청도 천안시가 소장한 태조 왕건 진영, 문의현(충청북도 청주시)이 소장한 태조의 진영과 쇠로 만든 주물상 및 공신들의 영정, 전라도 나주시가 소장한 고려 2대 왕 혜종의 진영과 조각상, 전라도 광주에 있던 태조 왕건의 진영을 개성으로 옮겨 묻었다. 여담으로 개성 현릉에서 실제로 이때 묻었던 것으로 보이는 왕건의 동상이 1992년에 출토되기도 했다.[59][60] 때문에 현재 고려 충신들의 영정은 몇 점 남아있지만 고려 군주들의 영정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61]

8.1. 반론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나라의 초기 국왕이었던 만큼 고려의 정통성을 낮추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가피한 점이 있었다. 이씨 조선 왕조의 국왕으로서 백성들도 중요하지만 자기 왕조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애초에 전근대 시기 문화재 훼손은 꽤 흔한 일이었다. 고대 이집트 왕조들도 재정이 부족해지면 전 왕조인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하는 것으로 재정을 충당하는 방식이 있었고 중국도 문화대혁명 말고도 문화재 훼손이 심했던 나라였다.

국가 정통성의 개념에서 봐도, 예를 들어 만약에 북한 정권이 붕괴되고 대한민국 주도로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김일성, 김정일의 황금 동상은 당연히 부숴버릴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일제강점기 건축양식도 역사라며 보존해야 한다던 여론이 일부나마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 문민정부 시절 철거했다. 현대 한국인들의 관점에서야 조선이나 고려나 과거의 시대이니 문화재로 바라보지만 조선시대 당시로서 고려 국왕들의 어진과 불상[62]은 파괴해야 하는 전 왕조의 부산물일 뿐이었을 것이다.

즉 문화재 훼손이라는 비판은 현대인의 관점일 뿐이며,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1] 일본 식민사관에 대한 옹호가 담긴 2019년작 <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로 알려진 이영훈은 그에 앞서 2018년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또한 집필하며, 세종이 '만들어진 성군'이라는 주장을 넷 우익 중심으로 유행시키는 데 일조했다. # 또한 뉴라이트가 본격적으로 정권과 힘을 합치고 있는 2023년에 들어선 광화문에 설치된 세종, 이순신 동상을 공화국에 걸맞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며 이전하잔 주장을 하면서 이 의견을 부각시키고 있다. # [2] 본 문단의 내용은 역사 비전공자인 박시백이 저술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만을 중심으로 서술된 내용임을 참고하기 바란다. [3] 양녕대군이 그 망나니 짓을 해도 질책하고 야단을 칠지언정 마지막까지 그를 세자로 남겨뒀다. 적장자인 양녕이 어떻게든 세자 자리를 지키고 왕위에 올라야 형제 간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허나 이는 태종이 실수한 꼴로, 그대로 양녕이 왕이 됐다면 연산군 스핀오프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에선 고려 현종이 자식 농사는 잘 지은 케이스. [4] 재위 기간은 2년이지만, 세종 재위 기간의 마지막 7년 정도는 문종이 세자 자격으로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기에 실제 치세를 한 시기는 생각보다 길다. [5] 어느 정도 비슷한 이유로 비판받는 인물로 고구려 연개소문이 있다. 본인의 시대에는 본인의 능력으로 커버했지만 아들 3형제에게 막강한 권력을 골고루 나눠준 것이 내전으로 발전해 연개소문 사망 직후에 고구려를 망치는 큰 원인이 되었다. [6] 역사에 IF란 없지만, 실제 상기한 위진 시대의 사례를 봐도 종친의 힘을 너무 죽이면 다른 권신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오늘날 김종서는 충신으로 기억되지만, 만약 수양대군이 반역하지 않고 견제할 힘도 없는 상태였다면, 김종서가 사마의같은 권신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7] 이는 나무위키 내의 조선사 전반에 대한 서술의 큰 문제로, 대부분의 출처와 근거를 박시백 만화에 의존하면서 박시백의 주장을 전적으로 옳게 보는 서술이 많다. 또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도 당대의 다양한 평가나 역사학 전공자의 평가들은 모두 무시하고 박시백의 주장만을 서술하여, 마치 박시백이 조선사의 최고 전문가인 것처럼 생각되게 만든다. [8] 사망 당시에는 세자빈이였으며 사후 문종이 즉위하자 왕후로 추존. [9] 심지어 재능으로만 따지면 바로 위의 형인 수양대군보다 훨씬 위였던 안평대군조차 문종 앞에서는 순순히 한수 접고 들어갔으며, 수양대군은 아예 제갈량보다도 우위라며 아부하기 바빴다. [10] 조선시대 왕의 평균 수명은 40 중반이다. 심지어 태조 이성계는 70을 넘겼고, 태종 이방원도 55를, 본인 또한 50을 넘겼다. [11] 일단 전제군주제에서 형이라는 점만으로 부담인데, 그 형이 단 17세의 나이에 과거에 자기 실력만으로 급제할만큼 인텔리이고 고려 건국에 지대한 공이 있는 본인인 것만으로 본인이 방석에게 어떤 위치인지 몰랐을 리는 없다. [12] 물론 살아있는거 자체가 큰 위험부담이였던 이복동생들과 달리 이방간은 세력을 다 잃어버린 시점에서 아무런 위험 부담이 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굳이 죽일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태종은 엄연히 자기 판단에 살아있는게 위험하다고 여기는 인물들만 죽였다. 물론 태종 입장에서도 아버지와 형님도 있는 상황에 이미 이복 동생 둘도 본인 손으로 보낸 상황이라 동복 형까지 죽이는 건 부담이긴 했을 것이다. [13] 태조는 72세, 정종은 62세, 태종은 56세, 그리 건강 체질이 아니고 과로가 일상이었던 세종은 54세까지 살았으니 전혀 무리한 기대가 아니다. [14] 엄밀히 따지면 아예 못 낸 것은 아니고 자신의 권한을 넘는 짓을 가끔 하긴 했으나 왕권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애교에 가까웠다. 당시 형 문종이 자신의 병법이 " 제갈량에 살짝 모자랄 것"이라고 자화자찬하자 "어디 제갈량 따위를 형님께 비유하십니까?"(제갈양은 장재()가 부족한 사람인데, 성상께서 어찌 이에 비해 논하십니까?)라고 폭풍 아부를 떨 정도였으니 문종 입장에선 착한 동생이 까부는 정도였을 것이다. 사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 세자가 걱정이 됩니다..."라고 진지하게 걱정할 정도였으면 당시 문종의 힘으로 수족을 다 자르고 유배 보내거나 그냥 죽여버렸을 것이다. [15] 1441년 세손(단종)이 태어나기 전은 말 할 것도 없고, 단종이 태어난 후에도 세종이 세상을 뜨는 그 날까지 만 10살도 안 되었던지라 수양대군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16] 사극에서 흔히 묘사되는 "조정이 숙부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묘사는 완전한 허구이다. 반대로 김종서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또한 단종의 가장 큰 보호벽이었던 김종서 자체도 세종이 키운 인물이었다. 즉, 아들 문종이 더할 나위 없이 탄탄한 왕권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만 믿지 않고 정치적 입지가 강력한 충신도 남겨놓고 갔던 것이다. [17] 한편으로는 외척세력을 경계하는 태종의 영향을 받아서 계비를 들이지 않았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실제로 세종은 소헌왕후 생전부터 본인의 건강부터 이미 안좋아서 세자인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는데 정작 소헌왕후가 본인보다 먼저 사망하고 말았다. 당연 안그래도 안좋던 건강이 3년상을 치른뒤에는 더욱 안좋았을텐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무리하게 계비를 들이면 얼마안가 자신이 죽고 문종(+단종) 즉위 후 (대)왕대비가 될 자신의 젊은 계비와 그 외척세력이 문종과 단종의 발목을 잡을 것을 염려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중국 역사에서는 종친 뿐만 아니라 외척세력 역시 왕에게 위협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태종의 영향을 받은 세종 입장에서는 이미 나이가 들대로 든 본인의 후궁들을 왕비로 승격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훗날 대왕대비까지 될 가능성이 높고 그에 따라 외척세력을 크게 키울 수 있는 젊은 간택 왕비를 맞아들이는건 앞의 요인들로 인해 더 불안했을 것이다. 물론 문종과 고명대신들, 기타 종친들이 외척의 성장을 두고볼 바보도 아니고, 제지할 역량도 되지만 부성애 가득하고 신하들도 아꼈던 세종 입장에서는 아들과 고명대신들이 외척과 대립하는 것 자체를 매우 위험요인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단종 입장에서는 외척보단 종친들이 더 위험요소였고 결국 계유정난이 일어난 것이지만 말이다. 추가적으로 문종의 세자빈을 맞이하지 않은 것에는 비정상적인 2명의 세자빈을 폐하고, 새로 들인 정상적인 권씨마저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난 것을 보고 진절머리가 나서 그냥 안맞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18] 계비에 대해서 인식(?)이 좋아진건 오히려 세조 대 이후이다. 세조 본인이 계비가 없었던 탓에 계유정난을 성공했던 것도 있지만 세조의 며느리인 안순왕후가 신덕왕후 이후 실질적인 조선의 첫번째 계비로써 무난한 시작을 한것도 있다. 그 이후 성종은 첫번째 계비인 윤씨 폐위+ 사사 시킬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두번째 계비인 정현왕후와는 별 탈이 없었으며 정현왕후는 친아들인 중종 문정왕후까지 맞이하는 것까지도 보고 승하했으니 계비를 맞이하는데 있어서 이 시기 즈음부터는 확실히 안정화되었을 것이다. [19] 이것도 사실 아들을 낳기 어려운 나이인 세종 본인이 소헌왕후의 3년상이 끝난 1449년에 간택 왕비를 들이면 되는 일이긴했다. 다만 외척을 경계한 태종의 영향을 받은데다 당시 건강도 좋지 않았던 세종 입장에선 자신이 계비를 들이고 얼마안가 죽으면 아들인 문종이 즉위부터 외척세력의 중심이 될 젊은 계모이자 왕대비가 될 본인의 계비에게 압박을 받을것을 걱정하여 안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20] 위에서 언급한 안순왕후가 무난한 삶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예종의 전처였던 장순왕후의 유일한 아들 인성대군이 요절해 사실상 예종에게 적자가 없는 상태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 대군을 출산한 계비들은 하나같이 좋든 싫든 자의든 타의든 왕실 풍파의 중심에 서는 운명을 면하기 어려웠다. 진성대군을 낳은 정현왕후, 경원대군을 낳은 문정왕후, 영창대군을 낳은 인목왕후가 모두 그러했다. [21] 다만 홍귀인이 왕비가 되었었다면 어쨌든 단종이 즉위하면서 대비의 신분이었을 테므로 좋든 싫든 수렴청정을 해 줘야 할 처지였다. 사실 이쪽은 결과론적인 면이 여러모로 있다. 설사 홍씨가 세자빈+왕비가 되어 아들을 낳는다해도 문종이 언제 사망할지, 종친들과 대신들이 대군인 자신의 아들과 세자인 단종 중 누굴 지지할지, 홍씨 본인 역시 요절할지 등은 홍씨의 역량과 건강 + 전체적인 정세 + 문종의 건강상태 등에 달린 일이다. 이것은 비단 홍씨가 아니라 세종이나 문종의 새 계비가 될 누군가여도 마찬가지이다. 단종 본인 입장에서야 계비가 없어서 일어난 계유정난이 큰 비극이지만 세조의 잔악한 면모를 파악 못한 상태에서 거시적인 면까지 다 감안한 세종, 문종, 고명대신들 입장에서는 홍씨를 비롯한 제 3의 이름 있는 가문의 여인이 세종이나 문종의 정식 왕비가 되고, 세종 사망 이후 및 문종 요절시 (대)왕대비가 되어 외척세력의 중심이 되어 문종과 단종의 왕권을 위협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문종까지 요절해버리면 (대)왕대비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어린 왕인 단종에게 어떤 짓을 할지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본인들의 입장에선 신뢰를 항상 주고, 충성하는 아들(동생)을 더 믿었던 것이다. [22] 조공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중국은 결국 체면 때문이라도 조선에 더 많이 퍼줄 수 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조공 횟수를 줄이려고 하자 조선이 거부한 것을 생각해 보자. [23] 사신도 황제 입장에선 신하일 뿐이고 서열상으로는 황자급인 제후국 왕보다 밀린다. 즉, 조선에서 왕에게 개긴다는 건 황자 앞에서 개긴 거랑 같은 것. 이마저도 명은 조선을 제후국 중 최상 등급으로 특별 대우하여 서열상 조선 국왕을 황태자와 황자의 사이로 두었다. 즉, 황태자가 아닌 황자도 조선 국왕보다는 서열상 아래였다는 것이다. 다만 황태자가 아닌 황자라도 아버지가 황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조선 국왕이 명의 황자를 예우해 주긴 했다. [24] 홍무제는 몽골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무너진 한족의 문화를 재건한다는 명목 아래, 모든 권력을 황제로 집중시켰다. 허울로나마 존재하던 승상이라는 지위가 호유용의 죽음을 계기로 완전히 폐지된 것이 바로 이 때문. 이후 영락제 때는 정난의 변으로 황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사대부들의 반발을 억누르고자 황제의 권력 독점을 목적으로 황제의 최측근 기관인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권력을 몰아주었고, 이는 후대 명나라 전체에 걸쳐 큰 골칫덩어리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명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위충현이 바로 환관이다. [25] 태종은 조선 시대 국왕들 중에서 불교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편에 속하는 군주였다. [26]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듦. [27] 그리고 신귀생의 난동을 육탄으로 막은 조순은 내시였음에도 사대부들이 초대해서 극진히 대접했을 정도였다. 즉,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명나라 환관을 제지하는 것은 국왕 앞이라 해도 사대부들 사이에서 경외의 대상이 될 정도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던 것. [28] 윤봉이라는 조선 출신 환관이 힘을 보태줬는데 이 사람도 조선에서 많이 받아 먹었다. 심지어 자기 동생을 벼슬에 앉혀달라고 청탁해 재상급에까지 올리는가 하면 은퇴하면 조선에서 살고 싶다며 집과 땅까지 얻어냈다. [29]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금과 은이 산출되는 것을 알게 된 명은 본격적으로 금과 은을, 특히 당시의 기축 화폐이던 은을 바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심지어 광해군 때는 조공 물품인 10만 냥의 은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 지역의 군벌 모문룡에게 은 8만 냥을 빌려오기까지 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의 군 파병 문제로 약점을 잡힌 처지라서 내놓으라는 대로 내놓아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30] 이방원은 왕이 되기 전 영락제랑 만난 적이 있는 친분이 있는 사이임에도 저랬으니 얼마나 명과의 외교에 민감했는지 알 수 있다. [31]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 하늘을 관측함은 천자만의 특권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하늘의 명을 받아 임금으로서 정당성을 부여받고 왕조의 권위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선이 독자적인 역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명나라 조정이 알면 외교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었다. [32] 다만 영락제 사후 선덕제도 전술했듯이 영락제만큼은 아니었지만 조선에게 꽤 많은 것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에선 공녀 뽑기, 사신 접대하기 등으로 조선 전국이 들썩거렸다. 사대 외교가 순전히 실익 정책으로만 자리 잡은 것은 선덕제 사후다. [33] 특히 세조 시기에는 야인들과의 교류와 토벌 문제로 명나라와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고(여진을 토벌한다고 조선군이 국경을 넘어온 터라 명나라에서 이 점에 대해 항의했다.), 명 사신의 요구를 함경도 관찰사가 알아서 무시하는, 일부 양반 계층의 지성 사대론이나 현대의 조선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으론 상상하기 힘든 일도 일어났을 정도였다. [34] 공자가 한 말의 변주다. 공자는 실제 사람을 본따 만든 순장 전용 등신대 피규어인 용(俑)을 가리켜 "이 따위 것을 발명한 놈은 자손이 끊어질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呼)"라고 저주했다고 한다.(출처 : 《맹자》 양혜왕편 상4장) [35] 처녀 바치기, 화자(내시) 보내기, 매 잡아 보내기, 개 보내기, 말 보내기, 음식할 여자 보내기 등등 [36] "황제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 중국에 술이나 과일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길이 하도 멀다 하시고, 생견(生絹) 3백 필과 안팎 옷감 30필과 양 1천 마리를 하사하시어, 술과 과일 값으로 하라 하시었으니, 이상의 물건들을 왕이 받으시고, 왕의 나라에 있는 것으로 잔치를 차리게 하시오."하고, 사신이 먼저 태평관으로 돌아가니, 병조 참판 이명덕과 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을 보내어, 채백(綵帛) 15필, 채견(綵絹) 15필, 생견 3백 필, 양 8마리, 거위 16마리, 《음즐서(陰騭書)》1천 권을 받아 오게 하였다. [37]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송골매 재상'이었다고 한다. [38] 종사는 '종묘사직'의 준말이다. 즉, '종사에 관계된 일'이란 '종묘사직을 뒤흔드는 범죄', 간단히 말해 역모를 뜻한다. 따라서 반역죄와 살인죄는 부민고소금지법에서 제외되었다. [39] 덧붙이자면 이러한 비판 자체도 사실과 거리가 멀다. [40] 세종 9권, 2년(1420년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9월 13일(무인) 4번째 기사 [41] 긴 문서를 일일이 읽을 자신이 없다면 그냥 지채문 항목에 들어가보면 된다. [42] 대표적으로 이시애의 난이 있다. [43] 전술했듯 수령을 고소하는 사람은 대부분 지방 유지들이다. [44] 이를 협호(挾戶)라 한다. 이러한 식의 노비화는 세조 시기에 활성화되었다. [45] 참고로 팔레는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해서 이영훈과 크게 논쟁했던 사람이다. 다시 말해 노비 문제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이 아님에도 이런 의견을 내놓는 것이다. [46] 이영훈 교수는 세종의 종부법 폐지가 양천교혼을 방조한 것이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를 펴는데, 종부법은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는 법이고 양천교혼은 천민과 양민의 결혼이다. 관련이 있을지언정 엄연히 다른 주제다. 세종에 대한 비판적 논지는 세종의 종부법 폐지가 양천교혼을 증가시켰다는 주장인데, 종부법 폐지가 양천교혼을 증가시킬 것을 우려한 세종이 양천교혼 자체를 막았다면 자연스러워진다. [47] 사실 양천교혼을 통해 노비의 수를 증가시킨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양천교혼 자체는 금기 사항이고, 억지로 양천교혼을 실행해서 임신을 하고 12개월, 태어난 노비가 노동력이 되기 위해서 적어도 8년-10년은 필요하고 그동안도 비용이 적잖게 드는데 노비 하나 늘리잡시고 그런 수고를 하느니 가난한 양민 한 명을 회유해서 노비를 만드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노비제 증가의 주된 원인은 양천교혼이 아니라 양민층의 경제적 몰락으로 인한 자발적 노비화로 보는 시각이 이 논의를 떠오르게 만든 팔레 교수의 주장이었다. [48] 사노비는 금지하였지만 군 소속 노비는 해방시키지 않았으며, 외국에서 팔려 오거나 조공받은 노비들은 그대로 유지했다. [49] 서유럽의 경우 동산으로서의 노예(chattel slavery)는 국내 거래에 한해서 12세기에 폐지되었고, 식민지를 포함한 전면적 노예 거래 철폐는 19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일본도 유럽과 같이 포르투갈 상인을 통한 외국 노예 거래는 포르투갈이 노예 거래를 막는 17세기 초에도 계속해서 이루어졌고 히닌 등으로 지칭되는 천민 신분은 메이지 유신 때까지 존재했다. 참고로 마지막까지 노예제가 존재한 중동의 경우 20세기 중반에야 노예제가 사라진다. [50] 출처: https://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kr_085_0010_0060_0190 [51] 전근대라는 시대상을 감안해도 천민은 종자가 다르므로 양인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은 엄청난 망언인 것이, 천민이라도 하늘이 낸 백성이라고 여겼던 세종(조선)이 보면 격노하여 "고려는 왕부터 저런 그릇된 생각을 하였으니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고 조선 건국 정당성을 위해 선전용으로 써먹어도 할 말 없는 수준이다. [52] 이 당시 조선에서는 조응을 바치는 것도 중요해서 조정에서는 매를 바치면 북방 이주마저도 면제해 주었다. [53] 4군 6진 지역의 겨울철 기온 [54] 다만 이는 임해군,순화군이 인간 말종들이라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쳐 순왜 국경인이 부추긴탓도 있으며 나중에는 함경도에서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과 조선인 순왜들의 횡포로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대표되는 의병 투쟁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55] 후일 니탕개의 난 같은 대변란이 함경도의 중심 지역인 함흥평야까지 미치지 못한 데는 6진의 역할이 지대했다. [56] 정확히는 지금 우리가 쓰는 한반도라는 개념이 서게 되는 영토를 확보했고 세종 때의 조선의 영토가 지금의 남북한의 영토인 한반도가 되었다. [57] 특히 당나라 [58] 지금의 지폐와 같은 종이 화페인데, 크기가 학교 책상만큼 크다. 덕분에 휴대성이 결여되어 돈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방석 대용으로 쓰였는데, 이는 돈방석의 유래가 되었다. [59] 이 왕건 동상은 햇볕정책으로 남북 관계가 좋아졌던 시기에 서울과 대구에서 특별 전시하기도 했다. [60] 신덕왕후의 초상화도 이 때 불태웠다. [61] 실제 얼굴을 알 수 있는 고려 군주도 초대 왕인 태조와 제31대 공민왕 단 둘 뿐이다. [62] 조선은 유교를 중심으로 하며 불교를 상대적으로 배척하는 정책을 펼친 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