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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14:11:52

승상

1. 개요2. 역사3. 이모저모4. 승상을 지낸 주요 인물들
4.1. 춘추전국시대4.2. 진4.3. 전한4.4. 후한4.5. 삼국시대4.6. 서진, 동진4.7. 남북조시대4.8. 수, 당4.9. 오대십국시대4.10. 요나라4.11. 송4.12. 요, 금4.13. 몽골제국, 원4.14. 명
5. 추증 승상

1. 개요

승상()은 중국사 관직으로, 전근대 중국 재상을 대표하는 말 중 하나이다.

2. 역사

춘추전국시대부터 유래한 역사 깊은 벼슬로, 전국시대 진나라 무왕 기원전 309년( 주난왕 6년) 좌·우승상을 둔 데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도울 승)'과 상국의 '상()'을 합쳐서 상국의 비서직 개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1] 쉽게 말해서 상국조무사. 실질적으로는 승상과 상국은 같은 벼슬이었고, 상국은 승상에게 예우를 덧붙여 부르는 말에 불과했다. 따라서 상국이 있으면 승상을 따로 두지 않고, 승상이 있으면 상국을 따로 두지 않았다. 하지만, 유방의 서자인 유비가 제나라 왕에 봉해지고 조참을 제나라 상국, 부관을 우승상으로 봉했던 것을 보면 모르는 일이다.

전한의 첫 번째, 두 번째 재상으로 예우받아 상국으로 불린 소하, 번쾌, 조참, 여씨 일가가 정권을 잡을 때 상국으로 봉해진 여산을 제외하면, 이후에는 원래대로 승상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조참 이후로는 승상을 좌승상 우승상으로 나누어, 우승상이 더 높은 직책으로 만들었다. 조참의 후임은 우승상 왕릉, 좌승상 진평이다.

한성제 삼공 체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며 대사도로 바뀌면서 폐지되었다가, 후한 조조가 삼공 체제를 폐지하고 스스로 승상이 되면서 다시 생겨났다.[2] 이후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며 차츰 명예직이 되다 사라졌다.

당나라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상서성에 좌·우승상이 있었지만, 상서승상은 상서복야를 이름만 승상으로 고친 것으로 과거의 승상에서 직접 이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로도 건국 초기 일부 기간을 제외하면 재상이 아니었다.

북송은 처음에는 당나라 제도를 따르다 관제 개혁으로 복야를 재상으로 삼았고, 남송 금나라에서 복야를 다시 승상으로 고쳤다. 원나라 3성을 중서성으로 통합하였기 때문에 중서성에 승상을 두었다.

명나라도 처음에는 중서성에 승상을 두었다가, 홍무 연간에 승상 호유용이 모반 혐의로 처형된 후, 왕권 강화의 여파로 중서성이 폐지된 것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이후의 명청시대 재상들은 내각대학사가 일반적으로 재상이라 불린다.

정리하자면, 중국 역사상 승상이라는 관직은 일관되게 존재한 것은 아니고, 일부 왕조에는 승상이라는 관직이 없었다. 다만, 여하간 왕조에 있어서 누군가는 승상과 유사한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승상과 비슷한 재상직은 언제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이모저모

시대에 따라 '왕의 최측근' 정도의 지위로 자리매김했으며, 조선의 정승이나 현대사회의 실세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급으로 비교된다. 왕 또는 지도자 밑에서 실질적으로 나라를 꾸려가는 핵심적인 직위이자 측근 역할을 했다. 황권이 약했을 때는 실권자들이 쥐던 관직이기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비교적 자주 나오며, 삼국지를 본 사람들은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관직으로 조조, 제갈량, 육손, 고옹 등이 역임했다.

중국사 재상직을 대표하는 관직으로, 실제로는 시대에 따라 재상의 명칭이 다양했지만 복잡하고 생소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장손무기처럼 다른 벼슬을 가지고 재상을 맡았던 인물이 사극에 나올 경우 일괄적으로 승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장손무기의 경우 고구려-당 전쟁 당시 직위는 상서복야[3]였지만 대개 승상이라고 불린다. 당나라에서는 복야의 다른 말이 승상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4. 승상을 지낸 주요 인물들

4.1. 춘추전국시대

4.2.

4.3. 전한

4.4. 후한

4.5. 삼국시대

4.6. 서진, 동진

4.7. 남북조시대

4.8. 수, 당

4.9. 오대십국시대

4.10. 요나라

대수 작위 성명 재임년수 재임기간 황제 퇴위원인
1대 충무공(忠武公) / 충무왕(忠武王) 술률노속(述律魯速) 25년 922년 ~ 947년 요태조 / 요태종 -
2대 연왕(燕王) 조연수(趙延壽) 1년 947년 요태종 요세종의 즉위
3대 충무왕(忠武王) 술률노속(述律魯速) 4년 947년 ~ 951년 요세종 / 요목종 자연사로 인한 퇴위
4대 소윤후(昭尹侯) 소연사(蕭延思) 12년 951년 ~ 963년 요목종 [8]
5대 연국공(燕國公) 마보충(馬保忠) 18년 1012년 ~ 1030년 요성종 -
6대 진왕(陳王) 장검(張儉) 7년 1024년 ~ 1031년 요성종 -
7대 양왕(梁王) 야율신녕(耶律信寧) 24년 1031년 ~ 1055년 요흥종 [9]

4.11.

4.12. 요, 금

4.13. 몽골제국, 원

4.14.

5. 추증 승상


[1] 현대 한국에서 '도울 조()' 자를 접두사로 쓰는 의미(ex. 조연출, 조교수, 간호조무사 등등)와 일맥상통하다. [2] 연의에서는 협천자하자마자 곧장 승상에 올랐지만 정사에서는 여러 이유나 원소의 눈치를 보느라 사공에 있다가 원소 사망 후에야 승상에 올랐다. [3] 이 명칭이 제대로 나온 사극은 아이러니하게도 괴작으로 유명한 연개소문이 유일하다. 이 드라마는 역대 최악 수준의 한국 환빠 드라마지만 동시에 역대 한국 사극 중 중국사를 가장 잘 다룬 드라마이기도 하다. 중국사 파트만 보면 명작이라고 불러도 될 수준. [4] 소하가 상국 혹은 승상일 때 역상은 난을 정벌한 이유로 우승상에 봉해졌는데, 복수 임명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5] 노관의 난을 정벌할 때 상국으로 봉해져 진압하러 갔는데, 역모에 휘말려 진평이 번쾌를 포박해 압송했다. [6] 여후로 인해, 왕릉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태부로 전직되고 총애를 받던 심이기를 우승상에 봉했다. [7] 주발의 자진 사퇴. [8] 사치와 살인을 일삼는 목종에 대해 간언하다 목종의 눈에 거슬려 목종에 의해 퍼진 거짓 소문에 의해 분노와 수치심으로 인한 분사 [9] 야율신녕은 보잘것 없는 평민에서 대승상과 대장군까지 오른 자수성가의 대명사로 요나라의 멸망을 늦춘 명장이었다. 때문에 간신 야율을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요도종이 즉위하자 야율을신에 의해 탄핵되었다. [10] 후경의 조부. 대승상으로 추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