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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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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제3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足利義滿
파일:아시카가 요시미츠.jpg
출생 1358년 9월 25일
북조 야마시로국 교토
(現 교토부 교토시)
사망 1408년 5월 31일 (향년 50세)
야마시로국 교토
(現 교토부 교토시)
재임기간 제3대 정이대장군
1368년 9월 25일 ~ 13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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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성 미나모토(源)
아시카가([ruby(足利, ruby=족리)])
요시미쓰([ruby(義滿, ruby=의만)])[1]
부모 부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모친 기노 요시코
형제자매
배우자 정처 히노 나리코
후처 히노 야스코
자녀 장남 아시카가 요시모치
종교 불교( 선종)
봉호 : 일본국왕(日本國王)
시호 : 공헌(恭獻) }}}}}}}}}
1. 개요2. 생애
2.1. 어린 나이에 쇼군이 되다2.2. 권력 강화와 남북조 통일2.3. 명과의 감합무역 천황 2.4. 죽음과 천황 찬탈 시도설
2.4.1. 반론
3. 인물 평가4. 여담5. 대중 문화

[clearfix]

1. 개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 명나라와의 감합 무역과 함께 명(明)으로부터 천황을 제치고 ' 일본국왕(日本国王)'에 봉해지기도 했던 초유의 인물.

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키고 막부와 쇼군의 권위를 확립하였으며 무가 문화와 전통적인 공가 귀족 문화를 융합한 '기타야마 문화(北山文化)'라는 풍조를 개화시켜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무로마치 막부의 최전성기를 구축했다. 3대 쇼군이면서 초대 쇼군이자 창건자인 할아버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만든 무로마치 막부의 기틀을 다진 태종 포지션의 인물이라고 봐도 좋은 인물이다.

무로마치 시대의 어원이 되는 교토 무로마치 저택으로 쇼군의 거처를 옮긴 게 바로 이 사람이다. 무로마치 시대의 역사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자 일본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이다.[2]

2. 생애

2.1. 어린 나이에 쇼군이 되다

1358년 2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태어난 날은 할아버지이자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사망한지 딱 백 일이 지난 날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시대가 한창이라 남조와 북조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시기였는데 1361년에는 남조군에 의해 막부의 본거지인 교토가 점령되어 피난을 가기도 했었다. 이듬해인 1362년에는 북조군이 교토를 탈환하여 돌아오긴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아마가사키 근처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4세였던 요시미츠는 이 주변의 경치를 마음에 들어해서 따르던 무사들에게 주변의 자연물들을 가리키며 "여기 경치가 마음에 드니까 교토에 가져가고 싶어. 너희들이 저거 다 들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1367년에 아버지 요시아키라가 병사하자 이듬해인 1368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쇼군이 되었다. 위의 일화도 그렇고 어린 나이였어도 제법 영특하고 대범했던 모양이지만 한 정권을 이끌기에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관령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頼之]의 보좌를 받으며 그에게서 정치를 배운다. 이 요리유키는 요시미츠 정권에서 중추를 담당했는데 요시미츠의 원복(성인식) 때 요시미츠에게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로 관모를 씌워준 것도 바로 그였다.

사실 요시미츠 재임 초기의 정치는 거의 관령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담당했는데, 요시미츠가 쇼군에 취임하자마자 오안 대법(応安大法)이라는 법령을 발표하여 막부의 토지 지배권을 확립했고 교토나 가마쿠라 일대에서 종교 통제를 강화했으며 남조 세력의 중요 거점인 규슈 방면으로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와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를[5] 파견하여 남조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힘썼다.

그리고 막부 권력 향상에도 노력하여 1378년에 쇼군 거처를 교토의 기타코지무로마치(北小路室町)로 옮겨 이곳을 막부의 중심지로 삼았는데 무로마치 시대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정과 막부에 2분화되어있던 교토의 행정권과 고세권을 모두 막부로 1원화시켰으며 슈고다이묘에 대항할 수 있는 쇼군 직속의 상비군인 호코슈(奉公衆)와 실무 관료직인 부교슈(奉行衆)를 정비했다.

2.2. 권력 강화와 남북조 통일

그러던 중 1379년 유력 슈고다이묘였던 시바 요시마사(斯波義将)와 토키 요리야스(土岐頼康) 일파가 쇼군 저택을 포위하여 막부의 중추이자 대립관계였던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파면할 것을 요구하자 결국 요리유키는 실각하고 후임 관령으로 요시마사가 임명되어 막부의 요직을 시바 일파가 장악하게 되지만 이듬해 요리유키는 사면되어 다시 복직했다. 이는 요시미츠가 시바 일파와 호소카와 파벌의 다툼을 이용해 상호견제하면서 이틈에 쇼군의 권한을 강화한 술수라고 해석되고 있다. 또한 실제로도 이후 요시미츠의 권한은 상당히 강력해져서 토키 요리야스가 사망하고 토키 가문이 분열하자 이를 이용해 토키가를 토벌했다.

이렇게 강화되는 권력을 증명하듯 조정으로부터 받는 관위도 높아져서 내대신(內大臣), 좌대신(左大臣)을 거쳐 1383년에는 무사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족과 동등한 위치에 서는 준삼후(准三宮)직에 올라 명실공히 무사 정권에서나 조정에서나 최대의 실력자로 부상했으며 각지의 다이묘와 사찰 세력을 시찰해가며 이들을 견제, 막부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1391년에는 11개국의 슈고를 겸임한 야마나 가문의 내분에 개입하고 토벌하여 야마나 가문의 힘도 위축시켰다.

이후 1392년에 지속된 공격으로 쇠약해진 남조에 화평을 제의하여 남조의 고카메야마 덴노가 가지고 있던 3종신기를 양도받아 50여년 간 지속된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황의 황통도 하나로 통일되었다. 이후 규슈를 평정하여 거대한 세력을 갖게 된 이마가와 사다요를[6] 실각시키고 역시 규슈 평정에 공을 세워 이 지역을 장악하여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오우치 요시히로를 경계하여 그를 압박,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하여 1399년 요시히로의 반란마저 평정하여 일본 서부 지역의 지배권도 장악해 버린다.

남북조의 분란을 종식시킨 2년 후인 1394년 요시미츠는 적자인 아시카가 요시모치에게 쇼군직을 넘겨주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요시모치에게 권력은 거의 없었고 실권은 요시미츠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관위도 조정 관료의 최고 직위인 태정대신(太政大臣) 직위를 받았다. 흔히 금각사라고 알려진 '로쿠온지(鹿苑寺)'가 있는 기타야마 산장을 건설하여 무가, 선종, 귀족문화가 합쳐진 형태의 문화 풍조인 기타야마 문화가 형성된 것도 바로 이 무렵. 이 기타야마 문화는 뒷날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 대에 형성된 문화 풍조인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化)'와 함께 무로마치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이다.

또한 일본의 전통 가면극인 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그의 집권기. 노로 유명했던 간아미(觀阿彌)와 제아미(世阿彌) 부자를 초빙하여 그들을 적극 후원하여 노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한창 잘나가던 요시미츠가 이렇게 출가한 것은 이미 무가와 귀족 사회 뿐만 아니라 승려 사회에서까지 최고의 권위를 차지하여 사찰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이 요시미츠의 출가 때에 많은 가신들이 요시미츠를 따라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후술된 내용대로 명과의 통교를 위한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2.3. 명과의 감합무역 천황

요시미츠는 중국 명나라에 관심이 많다 못해 일종의 '숭명' 기질이 있었던 듯한데 어느 정도였냐면 역병이 돌아 메이토쿠(明徳) 연호를 바꿀 때가 되자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홍무제( 주원장)의 연호인 '홍무(洪武)'에서 한 글자인 '洪'을 일본의 연호로 삼자고 천황에게 억지를 부렸을 정도였다. 이는 다른 조정 신하들에게 '홍수(洪水)'를 연상시키는 단어라고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대신 바뀐 연호는 오에이(応永). 덧붙여 이 연호는 일본 역사에서 일세일원제가 확립되기 전에 제일 길게 사용된 연호(1394년 ~ 1427년)다.[7] 무려 34년이나 되어 쇼와, 메이지 다음으로 길며, 요시미츠가 죽은 뒤에도 20년간 더 사용되었다.

남북조가 통일되기 전부터 요시미츠는 명과의 통교를 바라고 있어서 명에 사신을 보냈으나 명나라는 당시 일본의 정식 무역 대상을 북조나 막부 정권이 아니라 남조를 상대로 인정하고 있었던 데다가 천황을 일본의 왕으로 보고 쇼군과 막부 정권은 모두 천황의 신하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아니라 왕의 신하를 무역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8] 요시미츠는 이후로도 줄기차게 ' 무역 좀 하게 해 주세요'라고 징징댔지만 잘 되지 않았다. 요시미츠가 출가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출가를 하면 천황의 신하 자격이 아니라 자유로운 입장이 되기 때문이라고. 태정대신 직을 받긴 했지만.[9]

어쨌든 1401년에 명에 사신을 파견하자 명 황제 건문제는 요시미츠를 일본국왕에 책봉하여 양국은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게 되었고 감합무역을 1404년부터 개시했다. 당시 조정의 귀족들은 천황을 두고 국왕에 책봉된 이 상황에 대해 불만을 품었지만[10] 워낙 요시미츠의 권한이 막강했기 때문에 이를 문제삼지 못했다.

2.4. 죽음과 천황 찬탈 시도설

이렇듯 위세를 떨치며 막부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요시미츠는 1408년 5월 6일 50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요시미츠가 워낙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아서 그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가 요시미츠를 모살한 것이라는 떡밥이 있다. 바로 명으로부터 ' 일본국왕'의 칭호를 받은 것과 연계되는 요시미츠가 천황 자리를 찬탈하려 했다는 설과 관련되어 있다.

요시미츠는 일찍부터 수결(서명)을 할 때도 막부에서 쓰는 서명과 조정에서 쓰는 서명을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두 번째 정실인 히노 야스코를 거의 천황의 양어머니가 되도록 했었다. 또한 조정의 제사를 지내는 권리나 인사권까지도 천황 가문으로부터 가져와 자신이 주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요시미츠가 죽던 해에 열린 조정의 행사에서는 천황이나 상황만이 쓸 수 있는 다다미를 요시미츠가 사용했을 정도였으며 자신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츠구의 원복 의식을 태자의 원복과 똑같은 형식으로 진행했다.

또한 당대 지어진 건축물들에서 요시미츠의 의중이 드러난다는 해석도 있다. 저 유명하고 독특한 킨카쿠지의 경우 각각의 층마다 특이하게 다른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은 공가의 주거양식인 신덴즈쿠리, 2층은 무가의 주거양식인 쇼인즈쿠리, 3층은 선종 불교의 부츠덴즈쿠리를 채용했다. 이를 두고 공가(조정) 위에 무가(막부), 그 위에 출가한 요시미츠가 있다는 걸 드러내려는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또한 요시미츠는 교토어소 근처에 쇼코쿠지라는 큰 절을 지었는데 이 절에 있던 칠층목탑의 크기가 장난아니게 높았다고 한다. 도다이지의 목탑보다 훨씬 높은 360척, 오늘날의 도랑형으로 환산하면 109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이었다는 것. 이 탑의 꼭대기에 오르면 교토어소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을 것은 자명할것이고 조정과 천황에게 요시미츠의 위세를 과시하면서 압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런 행동들을 두고 요시미츠가 쇼군과 천황을 완전히 통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는 해석이 존재하며 이것은 요시미츠가 스스로 천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천황으로 올리고 자신은 천황의 부친으로 천황 가문을 흡수한다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시미츠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러한 움직임을 경계한 조정에서 요시미츠를 독살한 것이라는 게 요시미츠 천황 찬탈 시도설과 암살설의 요지이다.

그리고 요시미츠 암살설에 대해서는 암살 주체가 조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지목되기도 하는데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요시미츠의 적자이자 제4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모치. 요시미츠와 요시모치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요시모치는 아버지의 정책 노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요시미츠는 요시모치가 아니라 요시츠구를 총애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래가 불안해진 요시모치가 손을 써서 아버지를 제거했다는 설.[11]

2.4.1. 반론

그러나 이후에 이루어진 연구에 따라 찬탈 시도설과 독살설에 대한 반론도 많이 나왔는데 우선 요시미츠가 일본 국왕의 칭호를 받긴 했지만 정작 요시미츠가 명과의 무역 때 명 황제에게 보낸 '일본 국왕 신(臣) 미나모토노[12] 요시미츠(源義滿)'란 답서를 썼던 것 외에 정작 일본 국내에서 요시미츠 스스로 '일본 국왕'이라고 칭했던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시미츠는 일본국 왕이라는 칭호를 그저 명과의 무역 때만 쓰는 직함 정도로 생각했지 '내가 일본의 진정한 킹왕짱이라는 걸 명나라 천자도 인증했음ㅋ'이란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 게다가 일본은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칭했고, 일본의 천황은 황제로 여겨졌기에, 오히려 일본국‘왕’이라는 호칭은 자신의 신분을 천황 아래에 놓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요시미츠를 고깝게 보고 있던 조정의 문신들의 일기나 수기에도 정작 요시미츠가 찬탈을 하려 한다는 식으로 적고 있는 기록도 없다. 만약 요시미츠가 그런 움직임을 보인 게 사실이라면 조정 문신들이 이를 그냥 넘겼을 리가 없는데 그런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전후의 사료에도 독살설을 암시할 만한 기록이나 직접적 증거도 없다. 또한 천황직을 찬탈하려 했다면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을 당시 태자를 압박했다거나 견제한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

설령 요시미츠가 찬탈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요시미츠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요시미츠에게 충성한 슈고 다이묘들이나 가신들 역시 그런 계획에 동조했다거나 찬동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시미츠의 권세가 워낙 유례없을 정도로 막강했기 때문에 이런 떡밥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 천황 찬탈설과 암살설은 그냥 '흥미거리'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제법 미스터리한 면모가 있어서인지 일본 역사의 손꼽히는 음모론 중의 하나이다.

요시미츠의 권세는 죽은 뒤에도 제대로 나타났는데 요시미츠가 죽자 천황은 요시미츠에게 태상천황(太上天皇)이라는 칭호를 수여하려 했다.[13] 하지만 후계자인 요시모치와 가신들이 사양하여 결국 받지는 못했다. 만약 이루어졌으면 무사 출신이 천황로부터 황(皇)의 칭호를 받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을 것이다.[14] 그리고 명나라 영락제는 요시미츠에게 '공헌(恭献)'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3. 인물 평가

시간 엄수에 대해 상당히 철저하여 지각하는 가신들은 엄격하게 처벌했다고 한다. 어떤 조정관료는 지각 한번 했다고 파직을 시켰을 정도였고, 한 번은 막부의 행사를 개최하는 데 행사장에 새벽부터 앉아서 자기보다 늦게 오는 무사들이나 관리들이 행사에 동석하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

옷차림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써서 자신의 옷차림은 물론 가신들의 옷차림을 두고도 잔소리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의 인물 이마가와 사다요는 요시미츠를 두고 "요시미츠님의 정치는 약한 사람은 죄가 가벼워도 엄벌에 처해지지만 강한 사람은 명령을 거역해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식의 평가[15]를 남겼는데 이를 두고 일본의 역사학자 사토 신이치(佐藤進一)는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정치술은 강한 자를 도와 약한 자를 다스리는 정치술"이었다며 "그는 오만함과 비굴함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요시미츠의 조카이자 승려였던 만자이(満済)라는 사람도 "요시미츠님은 명나라 사신이나 슈고다이묘들에 대한 접대 태도가 요시모치님이 접대하는 것보다 훨씬 정중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확실히 ' 강자에게 정중하고 약자에게 엄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보통 한 정권의 2, 3대째 군주들은 수성군주의 인상이 강하지만 요시미츠는 남북조 통일을 완수했고 막부와 쇼군의 권위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창업군주와 수성군주의 역할을 모두 수행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학이 들어온 에도 시대, 그리고 결정적으로 천황 중심 사관이 득세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천황을 제치고 일본국왕으로 책봉받은 것 때문에 할아버지 다카우지와 함께 "천황을 능멸한 놈" 취급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목상의 목이 잘려 길바닥에 효수된 적도 있었다. 또한 국수주의 사관의 확립으로 명나라에 사대나 하려 했던 비굴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재평가도 수행되어서 역적이라는 평가보다는 무로마치 막부의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는 편이다.

하지만 확실히 평가가 여러 가지로 엇갈리는 인물이긴 하다.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로 일본의 Top을 노렸던 호걸'이라고 평가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뒷날의 오다 노부나가와 비교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죽음에 '조정'이 관련되었다는 설이 존재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한국에는 흔히 <야망패자>라는 소설이나 <역설의 일본사> 저자로 알려진 소설가 이자와 모토히코(井沢元彦)[16]는 '노부나가에 필적하는 괴물 정치가'라고 평가했는데, 이 평가가 널리 퍼졌는지 일본 인터넷에서 요시미츠를 가리켜 '무로마치의 괴물 정치가' 등의 칭호로 언급한 곳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엇갈리는 평가야 어쨌든 전란을 수습하고 막부와 쇼군의 권위를 확립했으며 일본 문화사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만큼 능력이 있었던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무로마치 막부의 역대 쇼군 중 가장 스케일도 컸고, 일본사 전체에서도 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인물은 드물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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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미츠의 목상(木像). 출가 전의 모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상에서 턱수염을 매우 풍성하게 조각했고, 출가 이후 그려진 초상화 역시 자세히 보면 턱수염이 나 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턱수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의 요시미츠의 출가 전 모습은 이것을 바탕으로 묘사된 듯하다.

한국사에서는 신라 진흥왕이 요시미츠와 비슷한 행보를 보였었다. 요시미쓰가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를 가져오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해 출가한 것처럼 진흥왕도 신라의 전성기를 만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 등 불교에 귀의한 모습을 보였다.

5. 대중 문화

말년에 출가했기 때문에 창작물에서 묘사되는 요시미츠는 위 초상화처럼 승려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1] 외래어 표기법. [2] 일본 역사에서 그와 맞먹는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자기 혼자만의 의지로 일본 전체를 동원한 원정을 실행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일본 전근대 사상 가장 안정된 정권을 이룬 에도 막부 초기의 쇼군들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시피하다. [細川頼之] 뒷날 센고쿠 시대 호소카와 후지타카,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조상이 되는 호소카와 요리아리(細川頼有)의 형이다. [大内義弘] 자신들이 백제 임성태자의 후예라고 내세운 그 오우치 가문 사람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 요시히로가 조선 조정에 자신과 백제 왕실의 관련성을 알아봐 달라고 문의하는 기록이 나온다. [5] 법명은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 고려 정몽주 왜구 근절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만난 사람이기도 하다. [6] 주고쿠의 빈고, 아키국에 더해 분고국을 제외한 규슈 8주의 슈고직과 규슈 단다이직을 겸임하였다. [7] 1419년 세종대왕 때의 '대마도 정벌'을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부른다. [8] 같은 이유로 청나라는 현 베트남 남부에 있던 응우옌씨 정권(광남국)의 책봉 요청을 거부했다. [9] 출가한 뒤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으로써 이국과의 교역에 나선 것은 이미 요시미츠 이전에 헤이안 시대 말기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그런 적이 있기도 하다. [10] 요시미츠가 막부의 문무백관을 거느린 채 명나라 사신에게 세 번 절하고 무릎을 꿇은 채 황제의 조서를 받는 퍼포먼스는 오랫동안 대외관계에 담을 쌓아왔던 일본인들에게 굉장히 굴욕적인 광경으로 비쳐졌다. [11] 실제로 요시모치는 아버지 요시미츠가 어렵사리 성사시킨 감합무역을 '중국의 신하로서 조공하는 격, 자존심도 없나?' 라 하여 폐지했다(1411). 갑자기 조공 거부 선언을 하자 격분한 명나라 조정에서 일본 정벌 논의가 일어난 것은 덤. 감합무역이 재개된 건 훗날 제비뽑기 쇼군이라 불리는 아시카가 요시노리 때이다(1433). [12] 아시카가 가는 본성 미나모토(源)였다. [13] 천황 자신이 명목상 신하였던 요시미츠에게 천황 칭호를 수여하려는 것만봐도, 당시 천황의 권위가 말이 아니었음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즉위하지 않은 왕족에게 태상천황 존호를 붙이는 일은 인세이에서는 드물게 있기도 했지만, 그것도 신적강하하지 않고 왕족 신분을 그대로 유지했거나 승려로 출가하여 법친왕이 된 상태에 대해서였고, 요시미츠는 이미 까마득히 천년 전의 선대가 신적강하해서 촌수도 거의 남이다 싶게 먼데다 신분도 천황의 신하인 쇼군이었다. [14] 하지만 기묘하게도 교토 리센지라는 절에 요시미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위패에는 요시미츠 태상법황이라고 적혀있다. 법황은 알다시피 덴노가 출가했을 때 붙는 호칭인데, 왜 요시미츠의 위패에 태상법황이라고 새겼는지는 의문이다. 망자라서 봐줬던 것인가. [15] 사다요는 위에 언급되었듯 남북조 통일의 공신이었지만 결국 요시미츠에게 토사구팽되었기 때문에 요시미츠에 대한 비판을 많이 남겼다. [16] 일본의 주요 우익 단체의 하나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소속된 사람으로 2005년에 "역사왜곡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이 하고 있다"는 망언을 하며 혐한 발언을 떠드는 친일 한국인들의 책에 추천사를 써 주기도 하는 등 극우 성향을 보인 인물이다. # # [17] 잇큐를 불러다 호랑이 그림을 보여주면서 "저 그림 속 호랑이가 밤만 되면 그림 속에서 빠져나와 내가 곤란하다. 네가 저 호랑이를 잡아 묶어라"라고 명령하는데, 잇큐는 놀라지도 않고 밧줄을 들고 그림 앞에 서서 호랑이더러 나오라고 소리를 치더니 하인에게 "그림 밖으로 저 호랑이를 몰아 주시면, 나오는 대로 제가 바로 잡아 묶겠습니다. 쇼군께서 그림 속 호랑이가 나온다고 말씀하셨는데 쇼군의 말씀이 거짓말일 리가 없지요. 천하의 쇼군께서 어디 호랑이 한 마리를 두려워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해서 요시미츠를 벙찌게 했다. [18] '강자에게 정중하고 약자에게 엄했다'는 행적을 생각하면 인물 고증은 제대로 한 셈이다. [19] 한백무림서의 대부분 작품이 영락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영락제에 의해 폐위된 건문제에게 일본의 국왕으로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