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KBO 리그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bordercolor=#002561> |
KBO 리그 역대 시즌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
|
1. 개요
한국의 프로야구 리그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이다.2. 역사
2.1. 1970년대~1981년
1970년대 고교야구를 보러 동대문야구장을 찾은 인파 |
아래는 1983 프로야구 연감 등을 통해 알려진 내용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고교야구가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1970년대 고교야구는 준준결승부터 이미 매진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당시 대표적인 스타로 1971년 경북고등학교의 남우식, 1972년 역전의 명수 군산상업고등학교의 김봉연, 1976년 경남고등학교의 최동원, 1978년 부산고등학교의 양상문, 선린상업고등학교의 박노준 등 매년 대스타들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197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까지 총 4개 토너먼트 대회에 입장한 관객은 112만 명에 달했다. #
고교야구는 1982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 출범 후에도 한동안 프로야구 못지않게 인기가 있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고교야구 보도 및 중계를 억지로 줄이면서 그 인기를 일부러 눌러버릴 정도였다. 사실 프로야구도 프로 축구처럼 리그 출범을 너무 급하게 추진했다는 것을 야구계에서도 동의한다고 한다. 프로축구가 2프로팀과 3실업팀으로 리그를 급조하고, 정상적인 연고 밀착 운영을 하지 못했던[1] 잘못이 있다면, 프로야구는 정상적인 고교야구의 인기를 억지로 죽여가면서 프로야구를 홍보했다는 과오가 있는 것이다. 2006년에 재창간되었다가 1년도 못 가 폐간된 월간 야구지 컬럼도 프로야구의 출범 시의 아쉬운 점으로 이 점을 언급했다.
고교야구의 인기와는 별개로 1970년대 중반 야구의 프로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표면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인 홍윤희가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야구협회 관계자, 감독들을 규합하면서 프로야구 창설에 대한 의견을 타진했고,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자 미국에서 약 20만 달러의 프로화 비용을 마련하여 재입국, 프로야구 창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며 리그 운영계획서 등을 작성하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되었다.[2] 당시 대한야구협회 김종락[3] 회장은 프로 출범에 찬성하는 입장 이었지만, 다른 야구협회 이사진들이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며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시 경제 개발에 올인하면서 국민들을 옥죄던 유신 정권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프로화 움직임은 좌초되고 홍윤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어서 이때 홍윤희를 중심으로 논의했던 계획안은 수 년 뒤 고스란히 한국 프로야구 리그 창설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독재 정권 제5공화국이 출범한 직후인 19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로 프로스포츠 창설의 논의가 이루어졌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명분은 국민 정서와 여가 선용을 위함이지만 실제로는 3S 정책의 일환이었다. 특히 경남고등학교 출신으로 정권의 실세였던 이학봉 민정수석비서관은 그 전에도 사석에서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박영길 전 감독이 전했다.
하지만 여가 선용이란 말이 꼭 명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별다른 여가가 없던 당시 국민들의 가장 큰 여흥거리가 바로 정치 얘기였기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도 건전한 여가거리를 제공할 필요성은 있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건 틀어막았지만 대학교에서 한창 최루탄을 맞고 화염병을 던져봤던 이들이 회사원이 되면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지는 뻔한 일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논란을 다 논외로 한다고 쳐도 그 당시에 가족 단위로 즐길 만한 여가거리가 정말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4] 야구는 이미 프로화를 위한 기반을 민간 차원에서 갖춰놓았으므로, 전두환 정부가 정치적 이유에서 야구의 프로화를 추진하자 MBC의 역할과 의지 및 국민들의 호응이 겹쳐 성공적으로 프로리그가 열렸다.
그리하여 이상주 교육문화비서관이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에 프로화 검토를 의뢰하게 되었다. 이 당시 축구계에서도 프로화를 추진하였는데,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운동장 야간 조명 설치 등을 이유로 139억 원의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정부에게 보고를 올렸다. 반면 대한야구협회 전무를 지낸 이용일과 운영부장 출신 이호헌이 주도하여 수립한 야구 프로화 계획서는 정부의 지원금 한 푼 없이도 프로화가 가능하다는 골자의 내용이 있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 우선 프로야구부터 출범시키기로 결정되었다.
정부의 지원이 없는 방법은 대기업들이 야구단을 하나씩 맡도록 한 것이다. KBO 리그 팬들 입장에서는 기업이 구단을 맡는 게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현재까지도 타 스포츠 리그에는 각 지방자치단체의 운영 자금 지원을 통해 연명하는 리그 또한 존재한다. 당시에 창설된 할렐루야 독수리만 해도 기업구단이 아니었다.[5] 스스로 프로에 참여한 기업도 있었고 반강제적으로 시작한 기업도 있었다. 물론 정착을 위해 야구단을 만든 기업들에게 운영 및 세무 면에서 혜택을 주기는 했다.
- 청와대 보고 기획안
1순위 기업을 우선적으로 접촉하고 불가능할 시 2순위 기업에 접촉하기 위해 1, 2순위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청와대 보고 이전 이용일, 이호헌의 계획안의 기업들은 사뭇 달랐는데 아래와 같다.
- 1순위
- 서울 - 롯데 자이언트: 이호헌과 한국프로야구를 계획했고 주도했던 이용일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실업야구 최강이었던 롯데 자이언트가 서울에 오는 것이 프로야구 흥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일본에서 이미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어 프로 구단 운영 능력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었다고 한다.
- 부산·경남 - LG: 창업주 구씨 일가의 고향이 경남 진주였고, LG의 뿌리인 ㈜럭키가 부산에서 창업했기 때문에 부산·경남 연고 1순위 기업으로 거론되었다. 실제로 LG는 프로야구에 뛰어들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출범 논의 단계에서 그룹 고위층은 해외에 있어서 제대로 접촉을 못했다. 당시 구자경 회장이 귀국하여 자초지종을 듣고 프로야구 출범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9] 여하튼 출범 준비를 하면서 LG를 데려올 수 있다고 믿었기에 나중에 롯데가 서울을 내놓으라고 나오자 '롯데를 대신해서 부산·경남을 대신 줄 그룹은 얼마든지 있다'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다.
- 대구·경북 -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현 삼성의 모태이자 최초 설립 회사인 삼성상회를 대구에서 창업하였고, 구미, 경산 등지에 제일모직과 삼성전자 등의 생산 공장이 밀집했던 연고와 더불어 프로야구 출범 당시 대구·경북 지역 야구는 극강 수준으로 거의 대표팀급이었기에 삼성 특유의 1등주의 또한 발동하여 대구·경북을 연고로 프로야구에 참여하는 것을 최초로 확정지었다.[10]
- 인천·경기·강원 - 현대그룹: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 강원도 통천이고, 젊은 시절 인천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주영은 서울 올림픽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11] 연감의 내용에서는 전 대통령이자 당시 현대건설의 이명박 사장이 서울 올림픽에 전력투구해야 하여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한다.
- 전라도 - 삼양사: 호남권은 경제 개발에서 소외되었기에 지역 연고 기업 중에 뚜렷한 대기업이 없었다. 그나마 거론된 게 식품 업체 삼양사와 고속버스 업체 광주고속, 보험 회사인 교보생명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하면 명백하게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었다. 이후 2007년에 스포츠 2.0과 가진 인터뷰에서 삼양사는 "아무리 전두환이가 시키는 거라지만 우리가 무슨 스포츠냐"라며 난색을 표했고, 자신들의 먼 친척이 운영하는 동아일보에 제안서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측에서도 거절하며 파토날 뻔했는데 해태의 참여로 6개 구단이 참가할 수 있었다고. 고속 경제 성장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호남권이라서 지역 연고 기업들도 몇 개 없었고, 그나마 규모가 있는 기업들이 모조리 외면했기에 심지어 호남 지역 관가에서는 전남도민구단 이야기까지 나왔었다고 한다.
- 충청도 - 동아: 창업주 최준문 명예회장의 고향이 대전으로 동아건설도 충남토건으로 창업했다가 훗날 이름을 바꾼 것이다.
- 2순위
- 서울 - 대우그룹: 창업주 김우중 회장은 대구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이사를 와서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하지만 김우중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축빠인지라 프로야구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12] 프로축구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부산에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를 창단했다.
- 부산·경남 - LG
- 대구·경북 - 포항제철: 당시 포항제철은 한국실업야구의 명문팀이었던 포항제철 야구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박태준 회장이 열렬한 축빠여서 야구단을 창단하지 않고 포철 축구단을 프로팀으로 전환시켰다.
- 인천·경기·강원 - 대한항공: 대한항공이 속한 한진그룹의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고향이 인천으로, 해방 직후 조중훈이 인천 선린동에서 트럭 1대로 한진상사를 차린 게 한진그룹의 시작이었다.
- 전라도 - 금호그룹 or 해태제과 or 미원
- 충청도 - 한화: 창업주 김종희 회장의 고향이 충남 천안이며, 이미 천안북일고등학교 야구부도 지원해왔다. 결과론이지만 창단 과정에서 한화와의 접촉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프로야구 출범이 준비 중이던 1981년 7월 김종희 회장이 지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프로야구단을 만들 경황이 없었다. 당시 충청권은 연고 기업이 없어서 창업주의 고향이 경기도 광주인 두산의 참여를 종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만약 김종희 회장이 건강한 상태에서 한화에 먼저 접촉했다면 두산은 참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특이 케이스인 MBC를 비롯해[13] 청와대 비서실과의 조율을 통해 실제 확정된 보고서는 위에 언급한 대로다. 하지만 무려 절반의 연고지가 계획안과는 다르게 바뀌게 되었다. 처음의 연고지안부터 최종안까지 공통점으로는 그룹 오너의 고향 지역이거나 그룹이 위치한 곳, 혹은 처음 시작한 곳 같은 각 그룹에 있어 중요한 지역을 맡긴다는 원칙을 내세워 계획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룹 회장들의 애향심을 이용하려던 것이다.[14] 이렇게 염두에 두었지만 MBC, 삼성, 롯데를 제외하고는 연고권 문제와 프로야구라는 생소한 사업에 진출한다는 불안함과 부담감을 표출하며 대부분 고사하는 걸로 인해 출범은 어려움을 맞았다.
삼미그룹의 참여는 결과적으로 기적이라고 묘사되지만, 어쩌면 결과론일지도 모른다. 현대그룹이 경기 연고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게 된 두산이 경기 연고를 요구했다는 것은 본문에 나오는데, 이걸 막은 것은 이용일 등이 KBO 리그에 충청권에 참여할 기업이 마땅치 않아서 두산에게 충청권을 맡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2안에서는 충청권 연고의 기업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한화다. 실제로 한화도 오너 일가가 야구 팬들이었기 때문에[15] 만일 제의했으면 받았을 것이란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하지만 출범 당시 한화의 상황상 김종희 회장이 후계자를 정해두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사망하였고, 이 때문에 김승연- 김호연 형제간에 재산 분쟁이 터진 상황이었다. 결국 어느 정도 정리된 후 프로야구에 뛰어드는데 그 팀이 빙그레 이글스. 만일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빙그레는 원년 기업일 수도 있었고, 두산이 인천 연고 구단으로 출발했다면 인천 연고 구단의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결과론적 이야기다. 인천 야구의 문제점은 단순히 모기업 클래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인천은 서울 위성도시의 성격을 털어내지 못하고 권역 거점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했다는 데 진짜 문제가 있다. 인천-경기권이라고 하지만 경기도 내에서 인천을 중심 도시라고 여기는 지역은 단 한 곳도 없다. 그리고 인천의 도시 구조 자체가 명확한 중심을 가지지 못하고 이후의 성장도 저마다 중구난방식으로 서울과 직접 연결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것도 문제. 수원의 경우 경기 남부의 확실한 거점 도시지만 규모가 문제였다.
충청, 인천·경기·강원권과 더불어 연고 기업의 물색에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은 호남이었다. 호남 지역 연고 기업으로 금호 측에 제의를 했지만, 금호 입장에서는 광주고속(現 금호고속)을 빼곤 당시 내세울 만한 소비재 계열사가 없었고[16] 기업 지원 방침도 예술 쪽에 비중을 좀 더 두고 있기도 해서 스포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목상으로는 오너인 박인천 회장은 아들들이 자기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나가리시켰다. 이상주 수석의 이야기는 이와는 다른데, 언론에 금호가 거론되자 박성용 부회장이 직접 찾아와서 노조와의 분쟁으로 골치가 아픈데다 적자까지 겹쳐 정신 차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 기업을 우선 살려 놓고 봐야 한다며 프로야구 참여를 거절했다고 한다. 금호가 거절한 다음 호남 연고 기업으로 접촉한 곳은 대한교육보험(現 교보생명)이었다. 대한교육보험 자체는 호남 지역과 연고는 없으나 설립자인 신용호 회장의 고향이 전남 영암이었다. 그러나 대한교육보험 역시 프로야구 참여를 거절했다.
이때 프로야구 창단 소식을 들은 박건배 해태제과 사장이 프로야구 준비위에 전화를 해서 " 호남 지역 창단을 우리가 하면 안 되느냐"라고 나서게 되었다. 사실 해태는 기업 규모가 작아서 프로야구단 창단 기업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호남 연고로 후보에 있던 기업들이 줄줄이 고사하던 상황에서 해태가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요컨대 알려진 것처럼 해태 회장을 청와대에 불러 협박한 것이 아니라 박건배 회장이 야구를 좋아해 직접 나서 야구팀이 생긴 셈. 사실 삼미 슈퍼스타즈, 쌍방울 레이더스, NC 다이노스, SSG 랜더스처럼 한국프로야구 팀의 확장은 야빠 사업가들의 공이 컸다.[17]
다만 이 부분에는 이견이 있는데, 해태의 초대 감독이자 당시 유명 야구인인 김동엽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김동엽은 MBC의 프로야구 창설 계획 극초창기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후에 광주 지역을 맡을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본인의 연줄을 이용해 해태를 청와대에 추천했다. 그리고 청와대에서는 김동엽과 박건배 회장을 부르는데, 이 자리에서 정부는 프로야구 참여를 권유한다. 이때 박건배 사장이 정부 인사 앞에서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참여를 결정했다는 것이 김동엽이 1995년에 쓴 자서전 <그래, 짤라라 짤라>에 나온 내용이다. 본인이 청와대에 연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달라는 부분은 1983년 프로야구 연감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문제는 해태가 프로야구 창단에 끼어들자 롯데가 반발했는데, 이는 프로야구 창단 당시 동종업계 회사는 참여를 배제시킨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룰이 생긴 이유는 당시 기업들이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유는 다름아닌 기업 홍보 효과였는데, 동종산업의 기업들이 야구에서 경쟁한다면 광고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롯데 입장에선 제과 업계 라이벌인 해태가 갑자기 들어온다고 하니 펄펄 뛰었던 것이다. 더구나 두산의 서울 연고권과 겹치면서 문제는 더 심화된다. 두산은 대전·충청권과는 연고가 없었던데다 대전·충청권의 선수층은 두터운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산은 처음에 서울을 요구했었다. 그러다가 현대그룹이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포기하고 삼미그룹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창업주 박승직이 경기도 광주시 출신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게다가 두산 역사의 시작은 현재의 서울 두산타워 건물 위치이기도 한 청계천 인근에서 이루어졌다. 연고 요건으로 따지면 이 부분이 더 당위성이 있고 적합했지만, 결국 이 두 가지 요청은 구단주 회의에서 모두 거부되었다.
이렇게 두산이 서울 연고를 주장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롯데는 해태의 참가 거부와 롯데의 서울 연고를 주장하고 나섰다. 롯데는 유일하게 실업야구팀 롯데 자이언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시 실업야구는 지역 연고가 없었고 대부분의 경기가 서울에서 열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팀이 서울에서 운영되고 있었고 롯데 자이언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시 롯데는 일본프로야구에서 롯데 오리온즈(現 치바 롯데 마린즈)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수도권이 아니면 흥행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18] 당시 운영 중이었던 실업야구팀 이름을 자이언트라고 지은 이유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해태가 뒤늦게 참여하게 된 것도 문제였다. 동종 산업에 있는 회사는 프로야구에 넣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는데 해태가 들어오면서 제과업계 라이벌 구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 좋은 구실이 되었다. 게다가 롯데는 무슨 배짱인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서울로 가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의 근자감을 부리기도 했다.
서울 연고를 주장하는 팀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재안이 나왔는데, 우선 롯데는 힘으로 눌렀다. KBO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럭키그룹이었다. 2015년 현재 롯데의 재벌 순위는 5위로 4위 LG를 턱밑까지 쫓아온 상태이지만, 1980년대 초반 롯데는 재계 순위 10위권 안팎을 들락거리던 수준으로 1980~1990년대에 꾸준히 재계 순위 3~5위권에 있던 럭키금성보다 재계 순위가 낮았다. 더구나 당시의 LG는 지금의 GS, LIG그룹, LS그룹 등이 분사되기 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롯데가 서울로 가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의 당랑거철을 행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
이후에 밝혀지듯이 LG도 분명히 프로야구 참여 의사는 갖고 있었다. 다만 하필이면 그룹 오너이던 구자경 회장이 당시 해외 출장을 나갔는지라 프로야구 참여 여부에 대한 확답을 내지 못했고, 아무튼 KBO는 LG가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당신들(롯데) 아니더라도 창단 후보는 얼마든지 있다"라며 롯데를 압박할 수 있었다. 당시 출장 중이던 구자경 회장 대신 이헌조 그룹 기획조정실장이 부산 연고 프로팀 창단 제의를 받고 "지금 오너가 부재 중이니 돌아오신 후에 협의 후 확답하겠다"라며 답변을 미뤘지만, 결국 더 이상의 객기를 부릴 여력이 없었던 롯데는 조건 없이 부산 연고를 받아들임으로서 무산되었다. 이후 구자경 회장은 귀국하여 그런 일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자 무릎을 치며 "이 문디야, 그냥 하겠다고 받아들였어야 안카나!"라며 이헌조 실장을 눈물이 빠질 정도로 호되게 나무랐다고 한다. 사실 기업 내 실무진 입장에서는 구단 창단과 같은 막대한 경비가 소요될 안건을 오너의 확실한 재가도 없이 받아들였다가는 월권 내지는 하극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중대한 일임에 틀림없지만[19][20], 이헌조 실장이 원칙적으로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자경 회장이 그를 질책한 것으로 보면 상당히 아쉬웠던 것으로 보인다.[21] 당시 프로야구의 구조는 구단주 회의로 대표되는 재벌들의 카르텔 수준인지라 한 번 때를 놓치면 마음대로 참여할 수도[22] 없었다. 그래서 LG는 MBC 청룡을 인수한 다음에나 프로야구 참여가 가능했고, 현대그룹은 타 구단들이 전부 대놓고 반대하는 바람에 현대 피닉스를 통해서 외부 전쟁 비슷하게 가다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프로야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MBC는 상황이 좀 달랐는데, 애초에 MBC에게 서울을 준 이유 자체가 홍보를 해달라는 것과 비서실과는 별도로 프로야구 창설을 기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서울로 정해져 있었고 심지어 이진희 사장이 내심 KBO 총재를 노리기까지 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팀들이 두산은 3년간 대전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다는 공증문서에 도장을 찍을 때 MBC가 서울 연고를 나눌 수 없다고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청와대 측에서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는데, 이상주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 수석비서관, 이학봉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이 이진희 MBC 사장을 겨냥해서 압박한 것이다. 특히 이학봉 민정수석은 전두환 정권의 실세였는데 창립 총회 전날 결국 윽박질러서 이진희 사장에게 도장을 받아냈다. 사실 전두환은 MBC를 뺄 것이냐 말 것이냐도 잠깐 고민한 장면이 있다. MBC가 친정부 언론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MBC에 힘을 실어줄지도 모른다는 것이 싫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여차하면 프로야구를 때려치울 수도 있다는 협박까지 굴러다닌 끝에 MBC도 굴복하게 된다. 서울은 MBC와 두산의 공동 연고로 하고, 두산은 3년간 대전에 있다가 올라오며, 이 동안 드래프트는 MBC와 두산이 2:1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원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MBC는 김재박과 이해창을, 두산은 박철순을 각각 지명하게 되었다.
결국 당시 신군부 세력을 포함한 정치권의 연줄 등을 총동원하여 협상을 한 결과 광주에 해태그룹이, 두산이 연고지인 충청도에 선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3년 후 서울 연고 이전을 약속받고 충청권에 들어왔다. 그리고 창립 총회 직전 거의 기적적으로 삼미그룹이 인천직할시 연고 기업으로 프로야구 참여를 확정지었다.
이상이 기존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정설이었다. KBO에서 1983년 발간한 연감[23]에서도 위와 비슷하게 창설 과정을 설명했고, 과거 유명 야구 기자인 홍순일 기자 역시 같은 내용을 연속 기고하기도 했다. 홍순일의 야구이야기 - 프로야구 탄생 비화
다만 어느 자료를 참고하더라도 MBC의 참가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것은 같았는데, 이후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었고 그것이 아래의 내용이다. 실제로는 당시 MBC 사장이었던 이진희 사장이 "MBC만 프로야구 팀을 만드는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4팀이 참여하는 리그를 구상하라"라고 지시를 내려 MBC TF 팀에서 그걸 기획한 다음 이진희 사장에게 보고했고, 이진희 사장이 그걸 청와대에 들어가 전두환에게 보고했는데 전두환이 깜짝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 뭐야. 야구야?
출처
그 뒤 전두환이 한 이야기는 "난 프로축구인 줄 알았지". 사실 전두환은 과거
육군사관학교 시절
골키퍼 출신일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다. 그래서 축구 때문에 전두환과 인연이 된 연예인들도 제법 많은 편.[24]
박종환 감독이 다른 건 집어치고 축구에 관해서만은 전두환을 존경한다고 말한 것도 괜히 그런 게 아니다.출처
다만 MBC의 참가와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었다는 언급과는 달리, 프로야구 출범 직전 1981년 말 기사를 보면 MBC에서 프로야구를 주도했으며 서울 연고를 확정했다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김재박이 실업야구 8관왕이었으나 현재는 7관왕이라 불리는 것처럼[25]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 기사가 잊히는 과정에서 MBC의 역할이 묻힌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대 기사를 찾아보면 MBC에서 시작한 단일팀 기획이나 프로 원년 6개 팀 구상 모두 MBC의 주도로 보도되고 있다.[26][27]
즉 프로야구는 대중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전두환이 기획하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과 MBC라는 두 곳에서 동시에 시작된 별개의 기획이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져 형태를 갖추고 출범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자의 경우도 청와대 비서관들 선에서 논의가 나오고 야구계와 접촉해 진행을 한 것이지, 전두환이 직접적으로 프로야구 창설을 지시했다는 증언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정부가 개입을 하긴 했는데 이건 주도를 한 것이 아니라 연고지 등의 조정 등에 관련한 것이었다.
당시 정부가 프로야구를 3S 정책에 이용하려 하기는 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마침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우승한 상황이라 야구 쪽으로 시선이 쏠려있었기에 시기적절한 상황이긴 했다. 네이버 스포츠 박동희 칼럼 매거진S 하일성-허구연 대담 "마이크가 나를 불렀다." 지역 연고 역시 윗 각주에서 보듯이 지역감정 조장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용일의 아이디어로, 되려 5공은 초기에 지역감정 심화를 우려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1년 뒤에 시작한 K리그는 각 팀에게 권역을 나눠주긴 했지만 전국 순회 경기를 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연고지와 홈원정 경기를 바탕으로 한 리그 운영을 하지 않아서 초창기에 충성도 높은 팬을 못 만들었고, 1987년부터 지역연고제를 도입했지만 이미 프로야구와는 격차가 상당히 벌어진 상태인 데다가 그나마도 연맹 사무국의 부재로 인해 구단들이 각자 사업 거점으로 옮겨가며 각자도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미 각 지역별 대도시를 중심으로 두터운 지역 연고 팬층을 형성한 프로야구와 지역 연고 정착에 뒤늦게 뛰어든 프로축구의 격차는 넘사벽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프로축구의 지역연고 부재는 단순히 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KBO 리그가 원년부터 지역 밀착 속에 흥행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고교야구라는 강력한 지역 기반 컨텐츠가 성업 중이었고, 그 기반을 적절히 승계, 활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야구는 국가대항전이 거의 없이 고교야구 등 국내 컨텐츠를 소비하는 형태로 발전하면서[28] 프로야구 출범을 위한 토대가 착착 쌓인 반면[29], 축구는 국가대표인 화랑팀이 매년 국가대표 및 클럽팀을 상대로 수십 경기를 치르고 수십일씩 전지 훈련을 떠나는 등 사실상 국영클럽화되다 보니 국내 컨텐츠가 성장할 공간이 없었다.[30] 당장 지역별로 명문 고교야구팀과 고교축구팀, 주요 고교야구 대회와 고교축구 대회의 인지도만 생각해봐도 쉽게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정부는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어 대놓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뉘앙스를 띄면 정권 유지에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실제로 해태가 예상과 달리 강세를 띄면서 삼성과 영호남 대립 구도를 형성하자 당시 5공 정권은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해태를 중심으로 호남인들이 결집해서 정치적인 행동을 할까 봐 우려했던 정권은 매년 5월 중순이면 5.18 민주화운동을 의식해 해태는 원정 경기만 다니도록 외부 압력을 가했다. 5월 18일이나 그 즈음 광주에서 홈 경기를 하면 야구장에 모였던 관중들이 시위 군중으로 돌변할까 봐 우려해서 내건 조치였다.[31][32] 그 정도로 광주의 민심은 5공 내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5공은 심지어 프로야구가 다 자리를 잡은 1984년에 느닷없이 프로야구의 전국순회경기를 추진하기도 했다. 지금은 보편화된 중소도시 제2구장도 원래 이 전국순회경기 구상의 일환이었다.[33]
2.2. 1982년~1989년
서울 운동장에 걸린 구단 포스터 |
1982년 열린 한국야구선수권대회(KBO 리그) 개막식. |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우승팀 OB 베어스 |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젊은이에게는 낭만을, 국민들에게는 여가선용을!
한국프로야구의 초기 캐치프레이즈
1980년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독재자 이미지가 굳은
전두환은 정권 안정을 위해
우민화 정책인
3S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청와대에서 최초로 프로야구 설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기업들을 불러들여 투자를 유치하였고, 이에 참여하는 기업들에게 각종 세제 혜택과 행정적, 법적, 제도적 지원을 파격적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논의한 지 불과 1년 만인 1982년에
KBO 리그가 만들어지게 된다.
대전의
OB 베어스,
서울의
MBC 청룡,
광주의
해태 타이거즈,
부산의
롯데 자이언츠,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
인천의
삼미 슈퍼스타즈 총 6개 팀으로 출범했다.한국프로야구의 초기 캐치프레이즈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시구와 함께 시작된 프로야구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나온 드라마같은 만루 홈런 두 개[34]로 인하여 이 홈런으로 앞으로 10년은 족히 먹고 살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또한 1982년에는 OB의 박철순이 22연승을 거두었고, MBC의 백인천이 4할 타율을 기록했으며, 해태의 김성한은 투타를 겸업하며 3할 타율에 13홈런, 10승을 기록[35]하는 등의 진기록이 세워졌다. 최약체 삼미의 역대 최저 승률과 특정 팀 상대 전패 기록 역시 출범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을 만큼 좋던 나쁘던 각종 기록들이 쏟아져 나온 원년 시즌이었다.
1983년의 스타는 누가 뭐라 해도 KBO 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한 시즌 30승 투수이자 400이닝을 던진 재일교포 출신 장명부. 전년도 꼴찌팀이자 국가대표 출신 한 명 없는 철저히 무명 선수들로만 구성된 삼미를 혼자서 3위로 끌어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외에도 OB의 최일언, 삼성의 김일융 등 재일교포 선수들이 대거 유입되었던 때가 바로 이때이다. 삼성의 장효조는 신인임에도 타율과 출루율 1위, 홈런과 타점 3위를 기록하는 등 MVP급 활약을 펼쳤으나 이미 실업무대에 선 적이 있으므로 신인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신인왕을 뺏기기도 하였다.
1984년은 " 져주기 게임"과 " 최동원" 두 키워드로 압축된다고 할 수 있다. 전기리그 1위를 차지한 삼성은 후기리그 1위 자리를 두고 다투던 OB와 롯데 중 OB를 피하기 위해 롯데에게 져주기 게임을 시전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시리즈에서는 4완투 4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긴 최동원, 그리고 7차전 역전 3점 홈런의 주인공 유두열 등의 활약으로 롯데의 승리로 끝나며 삼성은 창피를 당하게 되었다. 최동원은 정규시즌에서도 27승 223K를 기록하며 철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해태 방수원의 KBO 리그 역사상 최초 노히트 노런 역시 이 해 어린이날에 나왔다.
1985년, 전 시즌 통한의 준우승을 기록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 가면 지니깐 한국시리즈를 없애버리자(...)는 집념으로 전/후기 리그 1위를 독식하며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한 팀이 되었다. 전무후무한 7할 승률과 함께 승률 왕, 홈런왕, 타율왕을 독식한 삼성이었지만 한국시리즈가 없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평가 절하되기도 한다. 한편 OB가 대전에서 서울(잠실)로 이동하며 리그 최초로 연고이전이 발생했고, 삼미는 청보 핀토스로 이름이 바뀌며 리그 최초의 구단 인수도 일어났다.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해태가 통합 4연패를 기록하며 해태 왕조의 시대가 열렸다. 역대 통산 평균자책점 1위, 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MVP 3회, 골든글러브 6회 등 가지고 있는 기록들을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의 레전드 투수 선동열이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고, 타선에서는 1988~1989년 2년 연속 홈런 및 장타왕을 차지한 김성한과 함께 1988년 도루왕 이순철과 1989년 출루왕 한대화 등이 활약했다. 그리고 1986년의 김정수, 1988년의 문희수 등 한국시리즈에서 나타난 깜짝 스타들도 해태 왕조에 기여했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삼성, 두산 베어스 등도 나름의 왕조를 세웠지만 2011~2014년 삼성과 함께 KBO 리그를 대표하는 왕조가 바로 해태 왕조이다.
1986년에는 OB가 떠나며 비어버린 대전을 연고로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되었으며, 태평양화학이 청보를 인수해 태평양 돌핀스가 탄생하며 인천은 프로야구 출범 10년도 되지 않아 벌써 3번째 팀을 맞이하게 되었다. 빙그레는 1988년에 처음 한국시리즈의 맛을 봤으며, 태평양은 오랜 기다림 끝에 1989년에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1988년에 이뤄진 삼성과 롯데의 초대형 트레이드는 양팀 팬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하였으며, 전후기리그가 폐지되며 준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한국시리즈의 3단계 포스트시즌이 완성되고 전문 마무리 투수가 도입되고 프로야구 전 경기 중계가 이루어지는 등[36] 1980년대 후반을 거치며 점점 현대 프로야구의 모습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 한국프로야구/1982년
- 한국프로야구/1983년
- 한국프로야구/1984년
- 한국프로야구/1985년
- 한국프로야구/1986년
- 한국프로야구/1987년
- 한국프로야구/1988년
- 한국프로야구/1989년
2.3. 1990년~1997년
1997년 해태 타이거즈 우승 모습[37] | 1994년 LG 트윈스 우승 모습[38] |
1991년에는 홈런왕 장종훈과 에이스 한희민을 보유한 빙그레 이글스를 해태가 다시 한 번 꺾으며 2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92년에는 절치부심한 빙그레가 다승왕, 구원왕을 동시에 딴 송진우을 앞세워 3전 4기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MVP 박동희와 소총부대를 앞세운 3위 팀 롯데 자이언츠에게 막히며 삼성과 함께 콩의 대명사로 떠오르게 되었다.[40] 한편 고졸 신인 선수인 롯데의 염종석과 빙그레 정민철이 평균자책점 1, 2위를 나란히 차지하며 야구 선수층이 점차 대졸에서 고졸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도 1992년의 일이다.
1993년에는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등 10승 투수를 무려 6명이나 배출한 해태가 V7을 달성하였으며, 신인왕을 차지한 삼성의 양준혁, 그리고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한 해태의 이종범이 동시에 데뷔한 연도이기도 하다. 이 둘의 라이벌리는 2010년대 후반 이정후[41]- 강백호와 함께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 라이벌리로 손꼽힌다.[42]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상훈 등 선발 트로이카와 유지현 등 신인 트로이카를 앞세운 LG와 오랜 암흑기 끝에 마침내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태평양 돌핀스가 맞붙었고, LG가 4승 0패 시리즈 스윕으로 V2를 달성했다. 해태의 이종범은 백인천 다음인 .393의 타율을 기록하고 무려 84번이나 베이스를 훔쳐 한 시즌 도루 1위를 기록해 리그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한편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 리거 박찬호가 탄생했고, OB 베어스 항명 파동이 일어나는 등 명과 암이 공존하는 시즌이었다.
1995년, LG의 에이스 이상훈이 최초로 선발 20승을 달성한 가운데 한국시리즈에서는 항명 파동의 아픔을 떨쳐낸 OB가 플레이오프에서 LG를 업셋한 롯데를 꺾으며 원년 이후 오랜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96년에는 선동열과 김성한이 떠나면서 다소 전력이 헐거워진 해태가 MVP 이강철을 앞세워 현대 유니콘스를 꺾고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현대의 박재홍은 KBO 리그 최초 30-30 클럽 가입자가 되었으며, 구대성은 투수 4관왕을 달성해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다. 김성근 감독의 쌍방울은 지옥 훈련과 벌떼 작전으로 창단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1997년에는 홈런, 안타, 타점 부문을 석권한 국민 타자 이승엽이 자신의 첫 MVP를 수상한 가운데 한국시리즈에서는 3홈런의 이종범과 3세이브의 임창용을 앞세운 해태가 LG를 꺾고 V9의 위업을 이룩하며 왕조의 마지막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후 선동열에 이어 이종범도 일본으로 떠나고, 모기업도 재정난에 빠지며 이는 해태의 이름으로 달성한 마지막 우승이 되었다. 박철순과 이만수, 한대화 등 1980년대 스타들이 은퇴한 것도 이때였다. 때마침 1997년 10월 IMF 사태가 터지며 프로야구의 인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편 박찬호는 미국에서 14승, 선동열은 일본에서 39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며 해외야구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1990년 처음으로 300만 관중을 돌파한 프로야구는 1993년 400만 돌파에 이어 1995년에는 무려 50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야구장을 찾는 등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롯데는 1991년, LG는 1993년 각각 팀 100만 관중을 돌파했다. 특히 전통의 인기팀 엘롯기가 모두 2회 이상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등 당시까지만 해도 강팀 반열이었고, 만년 약팀이었던 신생팀 쌍방울과 현대도 가끔씩 치고 올라오는 등 순위 싸움도 예측할 수 없는 혼전 양상이었다. 팀별로 프랜차이즈 선수도 다량 배출되어 화제성에 있어서는 2000년대 후반에 뒤지지 않았다. 당시 1995년에 수립했던 540만 관중 돌파 기록은 2009년에야 다시 달성되게 된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KBO 리그는 급격하게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 한국프로야구/1990년
- 한국프로야구/1991년
- 한국프로야구/1992년
- 한국프로야구/1993년
- 한국프로야구/1994년
- 한국프로야구/1995년
- 한국프로야구/1996년
- 한국프로야구/1997년
2.4. 1998년~2007년
현대 유니콘스의 우승 모습 | 당시의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1999년에는 KBO 리그 최초로 양대 리그제가 시행되어 전년도 시즌 성적으로 매직 리그, 드림 리그 두 리그로 나뉘어 시즌을 진행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종합 1위 두산 베어스를 꺾고 올라온 한화 이글스가 정민철-송진우-구대성의 레전드 투수진에 힘입어 롯데 자이언츠를 꺾고 20세기 최후의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되었다.[43] 지금은 거품이니 뭐니 하는 KBO FA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도 이 해이다. 한편 시즌이 끝나고 현금 트레이드로 겨우겨우 연명하던 쌍방울은 해체 통보를 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선수단을 SK 와이번스가 이어받아 인천으로 떠났다.
2000년에는 모두의 예상대로 정민태-임선동-김수경의 18승 트로이카와 박경완, 박종호, 박재홍, 이숭용 등 올스타급 타선을 구축한 현대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무리한 서울로의 연고이전을 추진하다 돈 문제로 수원에 눌러앉게 되어 연고권도 증발하고 인천, 수원 양쪽 팬들에게서 외면받아야 했던 아픔이 있었다. 한화의 송진우가 이 해에 기록한 노히트 노런은 2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국내 투수 최후의 노히트 노런으로 남아있다. 최초로 시즌을 중단하고 나선 국제 대회인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일본을 이겨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1년에는 전년도와 반대로 승률 .508에 불과했던 두산이 강력한 우승후보 삼성 라이온즈를 이기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우승을 차지했다. 실패로 끝난 양대 리그제가 폐지되고 다시 단일 리그로 돌아왔으며, 기아에서 자금난을 겪던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여 KIA 타이거즈로 거듭났다.
2002년에는 준우승만 7번 하며 이를 갈았던 삼성이 이승엽의 극적인 동점 쓰리런과 곧이어 터진 마해영의 기적같은 끝내기로 창단 20년 만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44] 하지만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4강 신화를 쓰면서 지금으로서는 믿기 힘들지만 프로야구의 인기가 프로축구에 밀리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45]
2003년에는 선발 21연승을 기록한 정민태를 앞세운 현대가 3번째 우승을 차지한 가운데, 이승엽이 (당시) 아시아 신기록인 56홈런을 쏘아올리며 그의 홈런볼을 잡기 위해 관중석에서는 잠자리채 열풍이 불기도 했다.
2004년에도 홈런 타자 브룸바와 클로저 조용준의 현대가 배영수가 준-노히트[46]를 기록한 삼성을 9차전 우중 혈투 끝에 꺾으며 4번째 우승을 달성, 이견이 없는 당대 최강팀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해 발생한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수십 명이 연루되며 프로야구는 또 다시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삿포로의 굴욕이라 칭하는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겸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 대회에서의 참패[47]로 인하여 2004 아테네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2000년대 이후 A급 야구대표팀의 3번의 실패 사례.
2005년에는 백업 김재걸의 미친 활약과 오승환, 권오준 등 강력한 불펜을 보유한 삼성이 우승을 차지했다.
2006년에도 배영수와 막강 불펜의 삼성이 한화를 스윕하며 2년 연속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05년에는 오승환, 2006년에는 류현진이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두 투수가 데뷔 무대를 가졌으며 두 선수 모두 신인상을 수상했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대표팀이 약속의 8회에 터진 이승엽의 역전 투런으로 한일전 승리에 이어 MLB 올스타를 끌고 온 미국마저 꺾으며 4강에 진출해 2년 전 삿포로 참사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냈다. 자세한 내용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2라운드/1조 5경기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2라운드/1조 3경기 참조. 다만 도하 참사가 터지며 이 흥행을 이어나가지는 못했다.
2007년에는 김성근의 SK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2007년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고,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 타선 대폭발과 4차전 신인 김광현의 역투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극적으로 창단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다만 이 과정이 매우 저열해 2007년 한국시리즈는 사상 최악의 한국시리즈로 남았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또한 현대는 재정난에 골골대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해체를 선언했다. 한 시대를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팀이었으나, 모기업이 야구단에 관심을 끊었고 연고권도 없어 신인 수급도 하지 못해 쓸쓸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농업협동조합, STX, KT 등이 인수를 추진했으나 모두 무산되었고 결국 이장석의 창업 투자 회사인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팀을 인수하며 다음 해부터 우리 히어로즈라는 이름을 달고 뛰게 되었다. 또한 이 해는 KBO 리그 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해로 꼽히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2007년 한국프로야구 미스터리 참조.
1차 암흑기 당시 발생한 벤치클리어링 모음집 |
인기 하락에 관해 개별팀을 살펴보면 최고 인기팀 해태는 이종범이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진출하고 임창용을 삼성에 보내는 등 스타 선수 부재 현상이 생겼고 팀 성적도 추락했다. 돌풍을 일으킨 적이 있는 쌍방울은 애초에 전주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을 연고로 하였는데, 모기업의 문제로 선수까지 죄다 팔고 성적도 바닥으로 떨어지자 팬심이 다 떠나게 되었다. 1999년 준우승 이후 롯데는 2000년대 초반 최악의 경기력으로 8888577을 찍으며 관중이 100명도 안 가는 사례가 나올 정도로 망가졌다. 매년 우승부터 꼴찌까지 순위가 갈라지는 게 당연한 프로 리그지만 팀이 단순히 성적 하락이 아닌 진짜 망가져 버렸다는 인식을 주어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 반면 이 기간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현대는 연고이전 여파로 팬들을 거의 다 잃으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음에도 매진을 시키지 못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당시 현대의 야반도주 이후 인천 야구팬은 현대 또는 SK 팬, 그리고 야구에 관심을 끊는 팬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결국 현대와 SK 모두 비인기 팀이 되었고, 그나마 SK는 2000년대 중후반에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며 인천 팬들의 지지를 회복했지만 현대는 그런 거 없이 해체의 길을 걷고 말았다.
- 한국프로야구/1998년
- 한국프로야구/1999년
- 삼성 fn.com배 2000 프로야구
- 삼성 fn.com배 2001 프로야구
- 삼성증권배 2002 프로야구
- 삼성증권배 2003 프로야구
- 삼성증권배 2004 프로야구
- 2005 삼성 PAVV 프로야구
- 2006 삼성 PAVV 프로야구
- 2007 삼성 PAVV 프로야구
2.5. 2008년~2019년
2008년부터 2021년까지 일별 순위 변화 |
2008년 SK 와이번스의 우승 모습[53] | 롯데 자이언츠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 |
2009년에는 우주의 기운을 받은 KIA 타이거즈가 윤석민- 서재응- 양현종의 탄탄한 국내 선발진과 다승왕 아킬리노 로페즈- 릭 구톰슨 및 S K Y 불펜 및 시즌 중 트레이드 됐음에도 정규시즌 MVP와 홈런왕, 타점왕을 차지한 김상현과 같이 활약한 최희섭, 신예 나지완과 안치홍 및 포수 김상훈 등 장타력이 득실대는 타선을 갖춰 팀 타율 0.267로 8위로 최하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노리던 SK를 꺾고 2009년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다만 이는 변론의 여지가 있는 게, KIA는 눈야구로 출루율 5위를 차지했고 팀 장타율 4위, 홈런 3위(156홈런), 팀 타점 2위, 팀 득점 3위로 정말 타율만 낮았을 뿐 강력한 OPS 기반의 야구를 했다. 또한 팀 평균자책점 2위, 최저 사사구, 최저 피홈런을 기록했고, QS와 WHIP도 1위일 정도로 강력한 투수진을 갖추고 있었다. 우주의 기운을 가득 받아 핵심 전력이 플루크인 게 흠이긴 했지만 이 해만 놓고 보면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할 정도의 전력은 되었다는 것. 2위인 김성근의 SK는 정규시즌 마지막 20경기에서 19연승을 기록했으며, LG 트윈스의 추격쥐 본능으로 인해 1무가 있긴 했지만 실로 믿기 어려운 성적을 거두며 지지 않는 야구를 선보였다.
이 두 팀은 성향이 완전히 달랐는데, OPS[54] vs. 타율과 도루[55], 막강 선발 투수야구 vs. 벌떼 불펜이라는 단순히 팀대팀의 매치업이 아닌 2010년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트렌드의 야구[56]와 2000년대를 이끌어갔던 야구[57]의 매치업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2009년 한국시리즈는 팀대팀을 넘어 정반대 두 성향의 야구 운용 방식의 한판 대결이라는 점에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두 팀이 치열하게 맞붙은 결과 나지완의 7차전 끝내기 홈런으로 KIA가 12년 만에 한국시리즈 패권을 찾아오며 KBO 리그 최초 V10 금자탑에 올랐다. 다만 SK도 졌지만 잘 싸웠다의 정석을 보여주며 그간 승리만 아는 매너 없는 야구, 지독한 야구라는 이미지로 본인들에게 향했던 부정적인 시선을 다소 지워내는 데 성공했다. 실제로 졌지만 잘 싸웠다/사례 문서에도 이 2009년 한국시리즈가 기록되어 있다.
롯데는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로이스터 매직이 플루크가 아님을 증명했으며, 박용택의 수위타자 논란[58], 무승부=패 제도에 대한 불만[59], 잠실 X존 설치와 DTD 이론 증명 등 소소한 볼거리들이 많은 시즌이기도 했다.
한편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전한 대표팀은 준결승 진출의 쾌거를 이루며 국제대회 호성적을 이어갔다. 그야말로 이 시기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야구 국가대표팀과 WBC 야구 국가대표팀이 보여준 대승으로, 야구 붐이 분 시기에 적절하게 해태 시절 이후 한물 갔다고 평가받으며 엘롯기로 조롱당하던 KIA가 장타를 앞세워 좋은 성적을 내며 관중을 몰고 다녀 야구 팬 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롯데도 가을야구에 진출해 이 시기 KBO 리그는 아주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앞세우며 베이징 뉴비와 해태 시절 올드팬, 엘롯기 팬까지 모두 모여 대흥행을 맞이하게 된다.
수치로만 봐도 이 해 관중도 최다, 수입도 최다였다. 포스트시즌 누적 관중은 최초로 40만 명을 넘었고, 수입 역시 최초로 70억 원을 넘었다. 총 16경기에 41만 262명이 야구장을 찾았다. 지난 1995년에 기록된 역대 최다 관중(37만 9978명)을 넘었고, 수입도 70억 4803만 300원으로 단숨에 70만을 돌파했다. 역대 포스트시즌 최고 수입은 14경기를 치른 지난해 53억 6057만 6000원이었다. 수입이 대폭 늘자 KIA가 신났다. 먼저 제하는 정규시즌 1위 배당금 20%와 한국시리즈 우승 배당금까지 역대 최고 상금인 약 25억 원으로 돈잔치를 벌이게 됐다. # KBO 리그의 르네상스 시절로 꼽히는 이 시기는 2011년의 한 사건으로 하락세를 걷기 이전까지 이견 없는 최전성기로 평가받고 있다.
2010년에는 SK가 다시금 압도적인 전력으로 손쉽게 V3를 달성하며 이견이 없는 당대 최강팀으로 올라선 가운데 롯데의 이대호가 도루를 제외한 타격 7부문을 석권하며 전인미답의 7관왕에 올랐다. 또한 9경기 연속 홈런을 때려내며 MLB, NPB를 넘어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후 이대호는 한미일에서 모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유일한 타자가 된다. 마운드에서는 한화 이글스의 류현진이 23경기 연속 QS, 한 경기 최다 17탈삼진을 기록하며 빛났다. 다만 디펜딩 챔피언인 KIA는 잠실 KIA팬의 난이 터지는 등 뒤숭숭했다. 그래도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이 결승에서 대만을 이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1년에는 JOKKA 라인을 손안에 넣은 삼성이 김성근의 경질로 문학구장 소요 사태가 벌어져 어수선해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한 SK에 지난해의 복수를 성공시키며 한 시대의 끝과 다른 시대의 시작을 동시에 알렸다. KIA 투수 윤석민은 투수 4관왕[60]에 오르며 국내 최고의 우완투수로 자리잡았다.
2012년 역시 지난해 우승 전력에 일본에서 돌아온 이승엽이 가세한 삼성이 최형우, 윤성환 등의 활약으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만수-장종훈-이승엽의 홈런 타자 계보를 이어받을 넥센 히어로즈의 박병호가 트레이드 이후 기량 폭발로 홈런왕과 MVP에 올랐다. 한편 MLB에서 맹활약했던 박찬호가 은퇴 시즌을 치르기 위해 고국 KBO 리그의 한화에 복귀하며 그를 보기 위해 수많은 팬들이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로 몰리기도 했다.
2013년 역시 삼성의 손쉬운 우승이 될 것으로 보였으나, 준플레이오프부터 기진맥진한 상태로 올라온 두산 베어스가 3승 1패로 삼성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박한이를 필두로 타선이 기적적으로 깨어나며 준 리버스 스윕으로 삼성이 3년 연속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패패승패승승승) 창원을 연고로 한 9구단 NC 다이노스가 1군에 처음 참가하였으며 7위로 시즌을 마쳤다. 동시에 NC의 창단을 유일하게 반대했던 롯데와의 낙동강 시리즈는 잠실시리즈 버금가는 흥행 카드로 자리매김했다. 류현진이 KBO 리그에서 MLB로 진출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으며,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14승을 거두며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러나 세 번째로 출전한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네덜란드에게 충격패를 당하며 예선 탈락의 쓰라림을 맛봐야 했다.
2014년 삼성 라이온즈의 우승 모습[61] |
2015년 역시 삼성이 여유롭게 앞서가며 KBO 리그 신기록인 통합 5연패를 달성하는가 했지만,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으로 주축 투수들이 대거 빠져버리며 두산에게 2년 전의 복수를 허용하고 말았다. 당시 1년차 초보 감독이었던 두산의 김태형 감독은 한 팀에서 선수, 감독으로 모두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NC의 에릭 테임즈는 전대미문의 40홈런-40도루를 기록하며 이승엽 이후로 오랜만에 50홈런 고지에 오른 넥센의 박병호와 선의의 MVP 경쟁을 펼쳤다. 10구단 kt wiz가 1군에 처음 참가해 10구단 시대가 활짝 열렸고, 김성근 감독의 한화는 불펜 투수들의 불꽃 투혼으로 '마리한화' 열풍을 일으키며 TV 시청률 1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시즌 종료 후 열린 2015 WBSC 프리미어 12에서는 대한민국이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9회 0:3에서 4:3으로 대역전극을 펼치며 대회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2016년 두산 베어스 우승 모습[62] |
2017년에는 20승 투수 2명 양현종-헥터 원투 펀치[63]를 배출하고 타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폭발한 KIA가 2017년 최장 기간 1위를 지키며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했고, 2017년 한국시리즈에서도 2차전에서 양현종이 11K로 최다 탈삼진 완봉을 기록해 2009년 한국시리즈 당시 아킬리노 로페즈 이후 8년 만에 나온 한국시리즈 완봉승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3차전 나지완의 대타 홈런, 5차전 이범호의 만루 홈런과 양현종의 터프 세이브로 어우두를 앞세워 쓰리핏을 노리던 두산을 꺾고 8년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한화의 김태균은 연속 경기 출루 기록을 갈아치우며 레전드 반열에 올랐고, 삼성의 이승엽은 은퇴식에서 멀티 홈런을 때려내며 화려하게 선수 시절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KBO는 당시 치열하던 정규시즌 순위 경쟁으로 인해 이승엽 은퇴식을 보지 못할까봐 KBO 리그/2017년/정규리그 최종전의 시간을 조정했다. 하지만 시즌 전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이스라엘과 네덜란드에 패해 또다시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고, 시즌 중에는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으로 심판매수 논란까지 터지며 프로야구 위기설이 슬슬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중 수는 840만을 돌파하며 여전히 흥행몰이에는 성공했다. 다만 이는 2010년대 중반 잠시 부침을 겪었던 KIA[64]와 롯데가 정규시즌에서 각각 1위, 3위로 날아오르며 흥행의 쌍끌이 역할을 했던 것이 가장 컸다. 여기에 KIA는 시즌 후반 맹추격을 펼친 두산과의 막판 1위 경쟁, 롯데는 경남 라이벌 NC와의 3위 대결이라는 서사도 추가되어 KBO 리그/2017년/정규리그 최종전까지 간 것도 컸다. 당장 시즌 마지막 KT와 KIA의 3연전에서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는 사상 최초로 3연속 매진을 달성하게 된다.
2018년의 포스트시즌은 한화의 11년만의 가을야구 진출, 포스트시즌 역사에 남을 넥센과 SK의 5차전 명승부, 한동민과 최정, 박정권의 홈런 군단과 마무리로 김광현까지 동원해 " 어우두"를 외치며 6번째 우승을 꿈꾸던 두산을 무너뜨린 SK의 8년만의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1~4위팀 팬 모두에게 볼거리 많은 가을잔치였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는 데 성공했지만 대표팀이 몇몇 선수들의 병역 문제 해결을 위해 변질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들은 끝에 선동열 감독이 국정감사까지 불려나가기는 수모를 겪었다. 넥센은 "빌리장석" 이장석 대표의 구속 그리고 KBO 트레이드 이면 계약 파문까지 일며 힘든 시즌을 보냈으며, LG 역시 사인 훔치기 논란에 휘말리며 두 팀 모두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우와 박동원이 성폭행 혐의로 조기에 시즌을 마감하고 박병호, 서건창, 이정후, 로저스, 김상수, 김하성[65], 최원태 같은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에도 불구하고 김규민, 송성문, 김혜성 같은 신예들을 발굴하며 마지막까지 한화와 3위 싸움을 계속했으며 이후 4위를 했지만 와일드 카드에서 KIA를 1승으로,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승 1패로 누르더니 SK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이정후, 이택근, 최원태가 부상으로 빠졌음에도 원정에서 2연패 후 홈 2연승으로 시리즈를 5차전까지 끌고 갔고, 5차전에서 김혜성의 송구 실책과 불펜의 방화로 8회말까지 9대 4로 끌려갔으나 9회 강승호의 송구실책, 박병호의 동점 투런으로 경기를 연장까지 끌고 갔으며, 10회 임병욱과 김민성의 연속 2루타로 역전하면서 리버스스웝 + 4년만의 한국시리즈 진출이하는 기적을 쓰나 했지만 아쉽게도 김강민과 한유섬[66]에게 백투백 홈런을 맞으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엔 실패했다. 그래도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과 모기업의 지원이 끊긴 와중에도 여기까지 왔으니 졌잘싸.
2019년에는 2015년 히어로즈 스폰서 논란이 마무리되고 넥센이 키움증권으로 스폰서가 변경되어 키움 히어로즈로 정규시즌이 시작되었으며, SK가 8월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앞서나가며 2년 연속 우승에 다가가나 했지만 이재원의 초상집 발언 이후 9월에 갑자기 추락하며 승수를 쌓아오던 두산에 마지막 날 추월을 허용한데 이어 플레이오프에서 키움에게 지난해의 복수 겸 업셋을 당하며 80승에 선착하고도 최종 3위에 머무른 창피를 당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두산이 KS 최초 이틀 연속 끝내기를 때리며 키움을 압도, 2010년대 중후반은 두산의 시대라는 걸 다시 한 번 알리며 정말 어우두를 달성했다. 시즌 종료 후 열린 2019 WBSC 프리미어 12에서는 스타의 부재를 실감하며 일본에게 이틀 연속 패하는 수모를 당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도쿄 올림픽 출전권은 획득했다.
2006 WBC |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
국제 대회에서의 호성적으로 야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특히 월드컵 세대)의 관심을 다시 끌어오는 데 성공했으며[67], 당시 국가대표 선수를 많이 배출했던 SK와 두산이 이 효과로 신규 팬들을 가장 많이 흡수했다. 또한 전통의 인기팀 롯데가 암흑기를 깨고 5년 연속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고, KIA는 명맥이 끊겼던 해태 왕조 이후로 오랜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흥행에 큰 몫을 했다. 이러한 흥행 돌풍에 힘입어 KBO 리그는 2008년 13년 만의 500만대 회복에 이어 2011년에는 600만, 2012년에는 700만 관중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하여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2013년 다시 600만 명대로 떨어졌지만 2015년 700만대 복귀에 이어 2016년에는 800만 관중 시대를 열어젖혔고, 2017년에는 840만 관중을 기록하며 KBO 리그 40년 역사상 최다 관중이 야구장으로 운집했다.
이러한 열풍 속에서 롯데는 한국 프로야구단 사상 첫 흑자 구단의 탄생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프로야구단에 경영의 개념을 강조한 넥센은 2012 시즌에 괄목할 만한 관중 수 증가를 이뤄냈고 2013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성공하며 대기업 스폰서 없이도 프로야구단을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로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사회 전반에 야구 열풍이 불어 사회인 야구단이 무더기로 탄생하기 시작했으며, 리틀야구단 또한 두 배로 숫자가 늘어나고 중학생 이상의 아이들을 위한 리틀야구단인 시니어 리틀야구단의 출범까지 이야기가 오갈 정도로 야구계의 발전을 위한 발판이 만들어진 기간이었다.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기를 바탕으로 리그의 규모를 키울 겸 제 2의 현대 유니콘스 해체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9, 10구단 창단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프로야구에 관심이 많은 IT 기업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구단주의 적극적인 주도 아래 창원시를 연고로 한 NC가 창단했고, 이어 유일하게 야구단이 없었던 통신사 KT와 수원시가 손을 잡고 전북-부영과의 머니게임에서 승리하며 막내구단 kt wiz가 창단했다. 10구단 체제로 접어들면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팀이 4팀에서 5팀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KBO 준플레이오프 이전에 실시하는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신설되었다. 동시에 2015년을 기점으로 리그의 명칭이 KBO 리그로 바뀌게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KBO B SAFE 캠페인을 통해 구장 내 안전 대책을 강화하며 1980~1990년대에 심심하면 터졌던 관중 난동의 위험성도 줄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스타들도 많이 탄생했다. 황금세대로 일컬어지는 이대호, 정근우, 오승환, 김태균 등의 80년대 초반생들의 선수들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을 맞이하여 기량이 만개했으며 또다른 황금세대인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 김현수, 강정호 등의 80년대 후반생들이 20대 초반부터 국가대표와 리그에서 맹활약하여 리그의 수준과 끌어올리며 KBO리그가 인기를 얻는게 크게 공허했다. 그중 일부는 NPB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고 과거 선배들이 가보지도 못한 MLB(또는 MiLB)에 진출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진출을 많이 하는 것만으로도 성과라 할 수 있다.
2017년 한국시리즈의 KIA 팬들. | 2016년 800만 관중 돌파 기념으로 선수들이 유니폼에 붙인 패치. |
스타급 선수가 배출이 안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맞이한 프로야구 경기력 저하 논란은 프로야구계에 큰 떡밥으로 떠올랐다. 특히 2000년대 중후반에 비해 성적이 침체된 SK, 롯데, 한화 쪽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반면 LG, 삼성, 넥센 등의 팀은 오히려 성적이 급등하였으므로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본인 팀의 성적이 떨어져서 나오는 볼멘소리로 매번 결론이 났다. 또한 2013과 2014년 2년간 9개 구단으로 운영되어 3일 동안 한 팀은 쉬어야 하는 비정상적인 일정으로 인해 선수들의 경기 감각과 집중력 등을 비롯한 내적인 요소들이 불안정해져 경기력에 문제가 있다는 말도 있다.
그 외 2000년대 초반의 축구 열풍으로 인해 축구계에 유망주를 빼앗겼다는 분석[반박], 유망주 수보다도 육성 시스템이 문제라는 분석[70] 등 경기력의 질적 하락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들이 오고갔다.
이에 KBO도 1차 지명 부활과 2차 드래프트 제도 도입[71], 고교야구 활성화 등 프로야구의 전략적 우위를 위해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후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면 구단이 10개 팀으로 늘어나면서 정읍 인상고, 시흥 소래고, 수원 장안고 등 신규 야구단 창단이 줄을 잇고 있다. 또한 기존 팀들에게도 10억 6천만 원을 지원해주는 등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처음으로 고교야구 팀이 60개를 돌파했으며, 대한야구협회에 등록된 고교야구 선수는 역대 최다를 2012년부터 갱신하고 있다. 기사 허나 10구단 체제는 결과적으로 프로야구의 저변을 늘리는 판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60개밖에 안 되는 고교야구 인재층 중에 실력이 미달되는 선수까지 프로층에 유입될 수도 있으며 대학야구에도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전망도 있기 때문에 아마야구 저변을 좀 더 늘려야 한다는 말이 많다.
또한 경기력의 질적 향상을 위해 2014년부터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를 3명으로 늘리는 방안이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다만 한 경기에 출전 가능한 외국인 선수는 2명으로 제한될 것으로 보이며, 3명 모두 투수/타자 한 포지션에 몰빵하는 것 역시 금지될 것으로 보인다. 새 제도는 2013년 11월에 확정되어 2014년부터 시행되었다. # 이후 2020년에 3명 보유, 3명 출장이 가능해지면서 외국인 타자 2명 혹은 외국인 불펜 등 보다 다양한 외국인 라인업 구성이 용이해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구단들은 선발 2명과 타자 1명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 어떻게든 2군에서 키우면 되는 타자, 불펜과 달리 오랜 공을 들여 육성해야 하는 토종 선발 투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KBO 리그의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다.
- 2008 삼성 PAVV 프로야구
- 2009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 2010 CJ 마구마구 프로야구
- 2011 롯데카드 프로야구
- 2012 팔도 프로야구
- 2013 한국야쿠르트 7even 프로야구
- 2014 한국야쿠르트 7even 프로야구
- 2015 타이어뱅크 KBO 리그
- 2016 타이어뱅크 KBO 리그
- 2017 타이어뱅크 KBO 리그
- 2018 신한은행 MY CAR KBO 리그
- 2019 신한은행 MY CAR KBO 리그
2.6. 2020년~현재
코로나19로 인해 무관중 경기가 펼쳐지고 있는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 |
NC 다이노스가 창단 첫 정규시즌 우승을 달성한 가운데, 2017년 못지않게 치열한 2~5위 싸움이 펼쳐졌다. 그 결과 kt wiz가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으며, 두산 베어스는 10월 초 6위에서 최종전 3위까지 수직 상승하며 작년에 이어 미라클 두산임을 증명해 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4년 전의 나테이박을 계승하는 '나테의박' 타선으로 무장한 NC가 구창모, 송명기 등 마운드 영건들의 활약을 앞세워 창단 첫 통합우승에 성공, 4년 전의 복수를 성공했다.
2021년에는 신세계그룹이 SK 와이번스를 전격 인수하며 SSG 랜더스로 바뀌었다. 시즌 극후반까지 무려 8팀이 얽히고 설킨 역대 최강의 순위 싸움이 펼쳐졌고, 1위 자리는 144경기로도 정해지지 않아 KBO 리그 역대 2번째 타이브레이커 끝에 kt가 창단 첫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외국인 투수 2명이 모두 빠진 두산이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를 모두 업셋시키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서는 kt가 체력이 고갈된 두산을 4승 0패로 스윕하고 지난해 NC에 이어 창단 첫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2022년에는 SSG가 KBO 리그 최초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을 달성하며 인수 이후 최초, 통산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즌에는 준우승을 차지한 키움 히어로즈 또한 큰 화제가 되었다. 시즌 초반 팀의 대들보였던 박병호나 박동원을 타 팀에 넘겨주게 되어 유력한 꼴찌 후보였지만, 약화된 전력임에도 깜짝 돌풍으로 정규시즌 3위를 기록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접전 끝에 스코어 2:4를 거두는 등 SSG의 우승을 실질적으로 위협했기 때문이다. SSG의 우승만큼 키움의 투혼 또한 졌잘싸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화제가 되었다.
2023년에는 LG가 29년 만에 우승에 성공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을 kt에게 패배했고 2차전 역시 선발 투수의 부진으로 업셋을 당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박동원의 기적적인 역전 2점 홈런으로 경기를 뒤집고 3차전에도 마찬가지로 오지환의 역전 3점 홈런을 통해 끝끝내 많은 LG 팬들의 염원이었던 우승을 이루어냈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에 패하고 아쉬워하는 대표팀 선수들 |
국제 대회 성적 역시 좋지 못했다.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김인식 감독의 베테랑 중심의 지나친 믿음의 야구로 인해 예선 탈락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는 선동열호가 금메달을 획득하긴 했지만 선수 선발 과정에서 몇몇 선수의 병역 문제 해결을 위해 공정하지 못한 차출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터져나와 선동열 감독이 국정감사에 불려나가기까지 했다.[73] 2019 WBSC 프리미어 12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지만 2021년 열린 도쿄 올림픽에서의 노메달 충격이 국제 대회 부진의 결정타가 되었다. 한국보다 야구 수준이 높은 개최국 일본과 미국한테는 질 수 있다 쳐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도미니카 공화국한테까지 패배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였다.[74] 선수 선발 과정에도 의문이 많았고 정작 그렇게 뽑은 선수들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또한 야구인들이 일으킨 각종 사건사고 및 논란들도 꽤 많았다. 2012년과 2016년 두 차례의 승부조작 사태[75], 2014년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76], 2017년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77] 그리고 음주운전[78], 금지약물 복용[79], 폭행[80], 불법도박[81], SNS 망언[82], 팬 서비스 불량[83], 학교폭력 적발[84] 등 구단, 선수 할 것 없이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연례 행사처럼 터져나왔다. 특히 한때 자립 구단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키움 히어로즈는 이장석 대표이사의 횡령과 구속 이후 옥중 경영, 트레이드 이면 계약, 허민 키움 의장의 선수단 상대 갑질과 팬 사찰, 석연찮은 감독 해임 등 수많은 논란들에 휘말리며 KBO 리그의 문제아로 전락하고 말았다. 2021년에는 몇몇 야구선수들[85]이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위반하고 유흥을 즐긴 것이 적발되어 많은 팬들이 분노하기도 했다. 코로나 시국 당시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문제 때문에 KBO 리그가 제2의 암흑기를 맞이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2022년에는 코로나 여파로 인한 시즌 초반 육성응원 금지 등으로 인해 1999년 이후 23년 만에 개막전 전 경기 매진 실패라는 불명예 기록까지 나왔다. 또한 시즌 초반 관중수도 눈에 띄게 줄어든 상황이라서 흥행 적신호가 제대로 켜졌다. 다만 이 당시에는 오프관중을 모으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2022시즌 후반에 가서는 비인기팀간의 한국시리즈도 전 경기가 매진되는 등, 다시 평년 수준의 관객 회복에 성공한다.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첫 경기 한 수 아래라고 여겨졌던 트리플 A 마이너 리거들로 이루어진 호주에게 8:7로 패했고, 또 세계 최정상급이라는 일본에게는 투수들의 자멸로 13:4라는 점수차와 함께 현격한 수준 차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최종전을 앞두고 호주가 체코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3대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이 확정되어 이 여파는 KBO 리그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어서 서준원 아동 성착취물 제작 혐의 기소 사건, KIA의 박동원 상대 뒷돈 요구와 같은 여러 사건사고가 개막 직전 터지면서 더욱 우려를 자아냈다.
그러나 리그 흥행이 실패할 것이라는
2023년 조사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팀 순위 |
2024년에는 대한민국 야구사 최초로 메이저 리그 소속팀이 한국에 방문했다. MLB 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오타니 쇼헤이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김하성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3월 20일, 21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경기를 가졌다.[90] 두 팀은 개막전을 가지기 전인 3월 17일, 18일, 19일에는 키움 히어로즈, LG 트윈스,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과 연습경기를 가졌다.[91][92][93]
한편 2024 시즌부터 KBO 리그는 전 세계 프로야구리그 중 최초로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utomatic Ball-Strike System, 일명 ABS)를 도입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94]
2024년 KBO 리그는 70경기만에 100만 관중을, 148경기만에 200만 관중을 돌파했다. # 특히 인기팀 중 하나인 KIA 타이거즈는 전년 대비 관중수가 89% 증가했고, 한화 이글스는 홈 경기가 17경기 연속으로 매진되는 등, 흥행 청신호가 제대로 켜졌다. 이 정도 흥행이 시즌 말까지 유지된다면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900만, 혹은 1,000만 관중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 대회의 좋지 않은 성적, 일부 선수들의 물의, 중계 유료화 등, 여러 자잘한 문제로 인한 위기가 많았지만, 항저우 아시안 게임부터의 꽤 나아진 국제대회 성적과 류현진의 복귀, 인기팀들의 상위권 마크와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의 호평, 김도영을 대표로하는 신인급 선수들의 활약 등으로 몰락할 수 있단 예측을 비웃듯이 KBO 리그는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후 전반기가 종료된 7월 4일, 역대 최소인 418경기만에 600만 관중을 돌파했고, 8월 18일에는 역대 최다 관중 기록을 돌파, 그리고 9월 15일에는 결국 1,000만 관중을 돌파하는 등, 압도적인 인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 # #
3. BI
역대 KBO 리그 BI | ||
1982년~2012년 | ||
2013년~2021년 | ||
일반 로고 (국문) | 일반 로고 (영문) | |
유색 배경 (국문) | 유색 배경 (영문) | |
2022년~ [95] |
#EE1D23 | #007EC5 | #FECA0A | #231F20 | ||||
#EC1C2F | #0095D5 | #FFC20C | #808085 | ||||
#002461 |
3.1. 전용 색상(2022년 리브랜딩 이후)
KBO 전용 색상 | |||
색상 명칭 | Pantone | RGB | CMYK |
KBO Blue | Pantone 3581 C | R0 G37 B97 | C100 M80 K50 |
Pantone 287 C | R2 G63 B126 | C100 M80 K20 | |
Pantone 2145 C | R0 G76 B152 | C100 M75 K10 | |
KBO Silver | Pantone 877 C | R188 G190 B192 | K30 |
KBO Gold | Pantone 871 C | R179 G161 B119 | M10 Y40 K35 |
KBO 리그 전용 색상 | |||
색상 명칭 | Pantone | RGB | CMYK |
KBO Blue | Pantone 3581 C | R0 G37 B97 | C100 M80 K50 |
KBO Light Blue | Pantone 2194 C | R0 G174 B139 | C100 |
KBO Red | Pantone 485 C | R237 G28 B36 | M100 Y100 |
KBO Silver | Pantone 877 C | R188 G190 B192 | K30 |
KBO Gold | Pantone 871 C | R179 G161 B119 | M10 Y40 K35 |
KBO 퓨처스리그 전용 색상 | |||
색상 명칭 | Pantone | RGB | CMYK |
KBO Blue | Pantone 3581 C | R0 G37 B97 | C100 M80 K50 |
KBO Mint | Pantone 2227 C | R95 G190 B187 | C60 M3 Y30 |
KBO Light Blue | Pantone 2204 C | R163 G211 B215 | C35 M3 Y15 |
KBO Silver | Pantone 877 C | R188 G190 B192 | K30 |
KBO Gold | Pantone 871 C | R179 G161 B119 | M10 Y40 K35 |
3.2. 행사 전용 색상(2022년 리브랜딩 이후)
KBO 행사 색상 | ||||
종류 | 색상 명칭 | Pantone | RGB | CMYK |
기본색상 | KBO Blue | Pantone 3581 C | R0 G37 B97 | C100 M80 K50 |
KBO Light Gray | Pantone 420 C | R209 B211 B212 | K20 | |
KBO Gray | Pantone 423 C | R167 G169 B172 | K40 | |
한국시리즈 | KBO Red | Pantone 485 C | R237 G28 B36 | M100 Y100 |
포스트시즌 | KBO Light Blue | Pantone 2194 C | R0 G174 B139 | C100 |
올스타전[97] | ? | |||
미디어데이 | KBO Pink | Pantone 2039 C | R240 G90 B148 | M80 K10 |
드래프트 | KBO Lime | Pantone 388 C | R215 G223 B35 | C20 M100 |
오리엔테이션 | KBO Green | Pantone 369 C | R114 G191 B68 | C60 Y100 |
골든글러브 | KBO Golden | Pantone 4023 C | R208 G173 B103 | C20 M30 Y70 |
KBO 시상식 | KBO Award Gold | Pantone 7407 C | R219 G166 B40 | C15 M35 Y100 |
윈터미팅 | KBO Dark Gray | Pantone 424 C | R147 G149 B152 | K50 |
4. 역대 개막전 시구자
5. 역대 연고지 제도 변천
제4장 연고권
제17조 [연고지역] ① 구단은 제2항의 연고지역 내에서 KBO 규약에서 정한 바에 따라 KBO 리그와 관련된 모든 이익을 보호받는 연고권을 가진다.
② 각 구단의 연고지역은 다음과 같다. (중략)
③ 어느 구단도 다른 구단의 연고권을 침해할 수 없다.
제18조 [다른 구단의 연고지역 사용] 어느 구단이 다른 구단의 연고지역에서 경기를 실시하거나 KBO 리그와 관련된 행위를 하 고자 하는 경우 그 연고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구단의 사전 서면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제19조 [연고권 침해에 따른 제재 등] ① 구단이 제18조를 위반하여 다른 구단의 연고권을 침해한 경우 연고권을 침해 당한 구단이 총재에게 제재 신청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총재는 위반 구단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② 다른 구단의 연고권을 침해한 구단은 피해를 입은 구단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한다. 이 경우 보상금의 하한은 100만원으로 한다.
제20조 [구단의 준수 사항] 구단은 구단의 연고지역에 있는 전용구장에서 KBO 리그 경기 중 홈경기의 80퍼센트 이상을 실시하여야 한다. 다만, 총재의 사전 승인을 얻은 경우에 한하여 실시할 경기수를 변경할 수 있다.
제21조 [연고지역의 변경] ① 연고지역은 그 연고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구단의 의사에 반하여 변경 또는 합병할 수 없다. 다만, KBO 규약에 따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연고지역을 변경하고자 하는 구단은 전년도 10월 31일까지 총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2009.2.9 개정]
KBO 정관 제 4장 연고권
KBO 리그는 국내 4대 프로스포츠 리그 중 연고지 의식이 가장 뚜렷한 리그다. 프로 원년부터 전국을 권역별로 나눠 광역 연고제를 시행했고 뿌리 깊은 연고 의식은 리그 흥행의 기반이 됐다. 광역 연고제는 2000년부터 도시 연고제로 전환돼 오늘에 이른다. 아래는 시대별 변화에 따른 연고지 제도 변천사.제17조 [연고지역] ① 구단은 제2항의 연고지역 내에서 KBO 규약에서 정한 바에 따라 KBO 리그와 관련된 모든 이익을 보호받는 연고권을 가진다.
② 각 구단의 연고지역은 다음과 같다. (중략)
③ 어느 구단도 다른 구단의 연고권을 침해할 수 없다.
제18조 [다른 구단의 연고지역 사용] 어느 구단이 다른 구단의 연고지역에서 경기를 실시하거나 KBO 리그와 관련된 행위를 하 고자 하는 경우 그 연고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구단의 사전 서면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제19조 [연고권 침해에 따른 제재 등] ① 구단이 제18조를 위반하여 다른 구단의 연고권을 침해한 경우 연고권을 침해 당한 구단이 총재에게 제재 신청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총재는 위반 구단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② 다른 구단의 연고권을 침해한 구단은 피해를 입은 구단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한다. 이 경우 보상금의 하한은 100만원으로 한다.
제20조 [구단의 준수 사항] 구단은 구단의 연고지역에 있는 전용구장에서 KBO 리그 경기 중 홈경기의 80퍼센트 이상을 실시하여야 한다. 다만, 총재의 사전 승인을 얻은 경우에 한하여 실시할 경기수를 변경할 수 있다.
제21조 [연고지역의 변경] ① 연고지역은 그 연고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구단의 의사에 반하여 변경 또는 합병할 수 없다. 다만, KBO 규약에 따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연고지역을 변경하고자 하는 구단은 전년도 10월 31일까지 총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2009.2.9 개정]
KBO 정관 제 4장 연고권
기간 | 연고지 제도명 | 연고권 분류[161] | 비고 |
1982~1989 | 광역 연고제 |
▲
서울 (
MBC,
OB[162]) ▲ 부산· 경남 ( 롯데) ▲ 대구· 경북 ( 삼성) ▲ 인천· 경기· 강원· 이북5도 ( 삼미→ 청보→ 태평양) ▲ 광주· 전남· 전북 ( 해태) ▲ 대전· 충남· 충북 (OB[163], 빙그레[164]) |
|
1990~1999 |
▲
서울 (
LG, OB-
두산) ▲ 부산· 경남 (롯데) ▲ 대구· 경북 (삼성) ▲ 인천· 경기· 강원· 이북5도 (태평양→ 현대) ▲ 광주· 전남 (해태) ▲ 대전· 충남· 충북 (빙그레- 한화) ▲ 전북 ( 쌍방울) |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에 따른 전라북도 연고권 분리[165] |
|
2000~2011 | 도시 연고제 |
▲
서울특별시 (LG, 두산, ▲ 부산광역시 (롯데) ▲ 대구광역시 (삼성) ▲ 인천광역시 ( SK) ▲ 광주광역시 (해태→ KIA) ▲ 대전광역시 (한화) |
|
2011~2013 |
▲
서울특별시 (LG, 두산, 넥센) ▲ 부산광역시 (롯데) ▲ 대구광역시 (삼성) ▲ 인천광역시 (SK) ▲ 광주광역시 (KIA) ▲ 대전광역시 (한화) ▲ 경상남도 창원시 ( NC) |
NC 다이노스 창단에 따른 창원시 연고권 부여 |
|
2013~ |
▲
서울특별시 (LG, 두산, 넥센-
키움) ▲ 부산광역시 (롯데) ▲ 대구광역시 (삼성) ▲ 인천광역시 (SK→ SSG) ▲ 광주광역시 (KIA) ▲ 대전광역시 (한화) ▲ 경상남도 창원시 (NC) ▲ 경기도 수원시 ( kt) |
kt wiz 창단에 따른 수원시 연고권 부여 |
6. 기타
KBO 리그 역대 마운드 변화 | |
1982 ~ 1989 | 15인치 |
1990 ~ 1999 | 10인치 |
2000 ~ 2006 | 13인치 |
2007 ~ | 10인치 |
-
거의 대부분의 규격은 변함이 없는데 마운드는 매우 드물게 변화를 준다. 1980년대에는 마운드 높이 기준이 15인치였는데, 보통 마운드가 높으면 투수한테 유리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1980년대에 대체로 투수들의 성적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1990년대에는 마운드의 높이가 10인치로 낮아졌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도 마운드 높이 규정에 대한 강제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구장마다 마운드 높이가 제각각이었고 구단별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마운드 높이를 조정하기도 했다. 1996년 플레이오프에서 쌍방울의
김성근 감독이
자기 팀에게 유리하게
전주 야구장 마운드를 아예 평지로 깎아버려서[169] 논란을 일으키는 등 마운드 높이로 인해 시비가 붙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8년 7월 11일 수원에서 열린 현대-쌍방울 전에서 김성근 감독이 수원구장의 마운드가 높다면서 경기를 거부하다가 퇴장당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구장의 마운드 높이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99년 그 유명한 타고투저 시즌을 겪고나서 2000년부터 마운드를 13인치로 높였는데 다시 투고타저현상이 도래했다. 참고로 2006년 이대호가 홈런왕에 오를 때 시즌 홈런 개수가 26개였다. 사실 원래 돌고 도는거라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은 아니다. 또 마운드 높이 뿐만아니라 공인구 반발력 계수나 스트라이크존 등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 부분이다. 10인치 마운드에서도 2012년처럼 투고도 있었고 2014년 타고투저 시즌을 맞하기도 했다. 참고로 현재 메이저리그를 비롯해 국제적으로 10인치 마운드가 일반적이다.
- 한국갤럽 2018년 설문 조사부터 2023년 설문 조사까지 6년 연속으로 KIA가 선호구단 1위를 차지했다. 2등은 롯데,삼성이 주로 차지하고 있다.
- 2011년, 국민체육진흥공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한국프로야구의 경제 파급효과는 자그만치 1조 2,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같은 해 7,800억 원을 기록한 K리그와 2,000억 원을 기록한 한국프로농구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이다. # # #
KBO 리그 역대 팀당 경기수 | ||||
년도 | 구단수 | 팀당 경기수 | 팀간 경기수 | 비고 |
1982 | 6 | 80 | 16 | 전·후기 각 40경기 |
1983 ~ 1984 | 6 | 100 | 20 | 전·후기 각 50경기 |
1985 | 6 | 110 | 22 | 전·후기 각 55경기 |
1986 ~ 1988 | 7 | 108 | 18 | 전·후기 각 54경기 |
1989 ~ 1990 | 7 | 120 | 20 | |
1991 ~ 1998 | 8 | 126 | 18 | |
1999 | 8 | 132 | 20/18[170] | 양대리그[171] |
2000 | 8 | 133 | 19 | |
2001 ~ 2004 | 8 | 133 | 19 | |
2005 ~ 2008 | 8 | 126 | 18 | |
2009 ~ 2012 | 8 | 133 | 19 | |
2013 ~ 2014 | 9 | 128 | 16 | |
2015 ~ 현재 | 10 | 144 | 16 |
-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팀당 133경기제,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팀당 128경기제로 바뀐 이후 2015년부터는 팀당 144경기 (총 720경기)로 확대하기로 확정되었다. 경기 숫자로만 보면 늘어나는거 같지만 실제로는 9구단으로 운영하던 때와 리그의 기간은 차이가 없는데 왜냐하면 9구단 체제에서는 한 팀은 반드시 쉬어야만 하는데 10구단 체제에서는 쉬는 대신 경기를 하게 되므로 144경기를 하는데 걸리는 날짜는 동일하다. 숫자로 계산하자면 2013~2014 시즌의 경우 (128 * 9) / 2 = 576경기를 하루에 4경기씩 진행하니 총 144일이 든다. 10구단 체제에서는 144경기를 쉬는 팀 없이 진행하므로 같은 기간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 2015년까지 각 구단별로 시합구를 지정했으나 타고투저 현상과 더불어 공인구의 반발력이 높다는 논란이 불거지자 2016년 부터 리그 통일구를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7. 참고 자료
8. 관련 문서
[1]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지역감정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야구는 지역 기반의 고교야구 인기로 정부를 설득해서 지역 연고를 관철시켰지만 축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흥하는 컨텐츠는 국가대표였고 지역 이미지는 현재에 비하면 전무한 수준이었다.
[2]
KBO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으로 일한
이용일과 이호헌도 여기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했고, 본 계획을 수정하여 KBO 리그 출범에 사용했기에 KBO 리그와는 별개의 얘기임에도 연감에 함께 수록되어있다.
[3]
당시 유신 독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큰형이다.
한일은행
임원을 지내고 14년간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야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4]
서울 시내에 최초의 테마파크인
드림랜드가 개장한 것이 1987년, 가깝다면 가까운
서울대공원이 1984년에 개장했고
자연농원은 당시 사실상 자가용이 없으면 못 가는 곳이었으니 이제 막 자가용 시대가 시작되던 1980년대 초에는 아무나 가서 놀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 시절에 서울시 내에서 애들을 데리고 놀러갈 만한 곳이래봐야 시가지가 확장된 지금도 동쪽 끄트머리로 인식되는
서울어린이대공원 아니면 영화관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도 극장은 어른들이 담배 뻑뻑 피우는 곳이었다. 심지어
한강시민공원도 이제 막 조성이 시작되던 단계였다. 그나마 서울이 이 정도고 지방은 말할 것도 없었다.
[5]
창단 자체는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이 했지만 소속은 한국기독교선교원 산하 팀으로 되었다. 애초에 팀 창단 목적이 선교를 위함이 컸다.
[6]
당시
울산광역시는 기초자치단체로 경상남도에 속하고 있었고 광역자치단체도 아니었다.
[7]
당시
광주광역시는 기초자치단체로 전라남도에 속하고 있었고 광역자치단체도 아니었다.
[8]
당시
대전광역시는 기초자치단체로 충청남도에 속하고 있었고 광역자치단체도 아니었다.
[9]
프로야구단 설립은 당시 기준으로도 연간 수십억 원, 현재 기준 연간 400~500억 원이 들어가는 데다가 프로이니만큼 별도 법인 설립에 경기장 등 인프라 활용을 위해서 대관부서도 총동원해야 하는 사업인데, 1980년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이 정도 안건은 어느 조직이건 비대면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은 이메일로 수십 장의 보고서 전문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라도 있지 이 당시에 해외에 나가있는 총수에게 자료를 보고할 방법은 팩스로 한 장 한 장 보내는 것 뿐이고, 해외에서 바쁜 일정을 수행하는 총수가 호텔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이거 보고만 받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그것도 미국처럼 아예 시차가 정반대면 더더욱.) 설령 창업주가 구두로 허락한다 해도 당장 자리에 없는 이상 사업 추진 과정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10]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고향이 경남 의령이고, 삼성의 3대 모태기업(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중 하나인 제일제당이 부산에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부산·경남 연고로도 고려되었으나 부산·경남에는 롯데, LG 등 다른 대안이 많았기 때문에 삼성상회와 제일모직이 설립된 대구·경북을 연고지로 하는 안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당시 재계 라이벌인
현대그룹, LG,
대우그룹이 빠지고 롯데,
삼미그룹,
해태그룹 등 10대 재벌 근처에도 들지 못하고 순위가 한참 처지는 기업들이 들어오자 수준이 떨어진다며 발을 빼려 하기도 했었다.
[11]
정주영은 야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농구빠로 유명해서
잠실체육관에서 농구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방송에 여러 번 잡혔다.
이충희도 정주영이 직관 후 그의 활약상에 반해서 무조건 스카우트하라고 지시해서 현대전자 농구단에 입단하게 된다.
[12]
그룹 중역 회의에서 "우리도 다른 기업처럼 프로야구단을 창단하는 것은 어떻습니까"라는 의견이 나오자 김우중이 듣는 척도 안 했다는 일화가 존재한다.
[13]
창설에 직접 관여
[14]
애향심도 애향심이지만 지역연고제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행정 당국과의 연계나 지역 관민의 유무형적 지원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각 창업주 일가가 지역에 보유한 인맥을 무시할 수 없었다.
[15]
김종희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던 재단 학교 북일고에 야구부를 창단해 공격적인 스카웃을 하기 시작했다.
[16]
그나마 내세울 만한 계열사가
삼양타이어인데, 화물차나 버스라면 몰라도 당시 자가용 보유량을 생각하면 그다지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 금호산업(현 YK스틸, 금호건설의 전신인 동명의 법인과는 무관)도 1980년에 이미 가전제품 사업을 철수했다.
[17]
사실 박건배 회장의 부친은 박병규 창업주인데, 박병규의 고향은 광주이다. 그래서 해태가 광주에 야구단을 창단하려고 했던 근거도 있는 셈이었다.
[18]
롯데는 당장
일본에서도 수도권으로 복귀하기 위해 홈구장도 없이 떠돌아다니고 가나가와로 복귀하기까지 임시 연고지였던 센다이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전적이 있다.
[19]
이 당시 대한민국의 대기업 경영 체제는 창업주가 생존한 상황에서 창업주의 지시 하에 움직이는 구조였으므로 창업주의 허락이 없는 별도 사업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설사 이헌조 실장이 구자경 회장의 의사대로 승락했다 하더라도 이사진들이나 중역들이 "회장님의 허락을 받고 추진하는 거냐?"라고 물어봤을 때 독자적으로 행하는 것이라 대답한다면 완고하게 반대할 가능성이 높았다.
[20]
가신 중 가신인 기조실장이라면 회장을 야구 좋아하는 걸 모를 리도 없으니 보고 정도는 하면 되지 않느냐 생각되겠지만, 이건 1981년의 일이다.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과 딱 한나절 차이나는 미국에 나가있는 회장과 실시간으로 연락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롯데도 빙다리핫바지는 아니라 럭키금성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부산 연고를 받아들였으니 이헌조 실장이 제안을 들은 그 자리에서 승낙하는 것 외에 다른 시나리오는 없었다.
[21]
구자경 회장 및 그 일가는 상당한 야구광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22]
미국의 경우 기존 구단의 연고지 이전이나 신생 구단 창단 시 각 기본 구단의 구단주의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23]
매년 발간 중이다. 비매품이지만 도서관에서 확인 가능하며 2008년도 연감부터는 KBO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나마
1983년판은 2020년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디지털 파일 형식으로 공개되었지만 협약 도서관 내 원문검색용 컴퓨터로 열람 가능하다.
[24]
당장
이주일 역시 엄청난 축구광이었다. 투병 당시 2002 한일 월드컵 조 편성을 듣고 우려했을 정도.
[25]
당대 기사에서는 8관왕이라 칭했으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7관왕이라 불려졌다.
[26]
동아일보 81.10.24 프로야구時代(시대) 열린다 내년 MBC 獨自(독자) 팀創團(창단)…각企業(기업)서도 호응
[27]
중앙일보 81.10.29 프로야구팀은 MBC(문화방송)가 주도하고 3만명 이상의 종업원을 가진 삼성·현대·롯데·두산·금호등 6개 재벌기업의 참여로 내년 4월 중순 프로야구팀을 출범시킬 예정이다.
[28]
특히 고교야구의 경우 대부분의 고교야구 명문들의 팀 창단 년도도 긴데다
일부 고교야구팀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활동한 경력이 있는 곳도 많았다.
[29]
한 가지 예로 현재까지 연고지를 이전한 야구팀은
두산 베어스와
현대 유니콘스뿐이다. 그마저도 두산은 처음부터 서울로 연고를 옮기겠다는 확약을 받은 상태였고 현대는 연고를 이전한 후 10년도 가지 못하고 해체된다.
[30]
당장 축구의 인기가
국가대표팀의 비중이 높은 것,
기성용이나
이청용 등 현역으로 뛰고 있음에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면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선수들이 생기는 것이 그 예다.
[31]
전두환 정부는 1982년까지 5.18 민주화운동 추모 행사를 금지했지만 이듬해인 1983년부터는 허용하게 된다.
[32]
김응룡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광주에서 "5월달에 소복입은 여자 3000명이 야구장에 올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33]
물론
6월 항쟁 당일에는 정말로 현실화되어 6월 항쟁의 서막을 알리기는 했다. 야구장이 아니라 축구장이었고 그 장소도
마산이기는 했지만.
[34]
개막전은 MBC의
이종도가,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는 OB의
김유동이 기록했으며 공교롭게도 이 두 방의 만루 홈런을 전부 삼성의
이선희가 두들겨 맞았다. 이 때문에 한동안 만루 홈런으로 동터서 만루 홈런으로 해 저물었다는 유행어가 떠돌았다.
[35]
69타점으로 타점 1위까지 먹었다.
[36]
1980년대 초반에는 지상파에서 몇몇 경기만 방송해 주었으며, 그마저도 7회가 넘어가면 뉴스를 한답시고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37]
헹가래를 받고 있는 인물은 해태 왕조의 사령탑
김응용 감독이다. 맨 왼쪽에는
조계현 전
KIA 타이거즈 단장, 맨 오른쪽에는
이강철 현
kt wiz 감독이 보인다.
[38]
중앙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는 투수는 LG의 영구결번이자 최초의 한국시리즈 2회 MVP를 수상한
김용수이다. 앞쪽으로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 중 하나인
김동수가 보인다.
[39]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술회하기를 이 25% 상한 규정 때문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도 큰 폭의 연봉 인상이 불가능하여 구단과 징하게 싸웠다고 했다.
[40]
이때 2번째로 우승한 롯데는 2024년 현재까지도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하고 있다.
[41]
이종범의 아들이다.
[42]
투수 라이벌리는 당연히 선동열 vs 최동원이다.
[43]
사실 20세기는 2000년까지이므로 20세기 마지막 우승팀은 현대지만 현대는 구단이 해체되었다.
[44]
1985년의 우승은 한국시리즈 없이 했던 통합우승이라 당시는 삼성 구단에서조차 외면받았던 우승이다. 물론 현재는 1985년을 V1, 2002년을 V2로 계산한다.
[45]
그 유명한 경기장 내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던 사진이 이때 등장해 당시 프로야구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가 되었다.
[46]
10이닝 노히트를 기록했으나 경기가 끝나지 않아 정식 노히트로 기록되지 못했다.
[47]
대만전 4:5 패, 일본전 2:0 패.
[48]
특히 두산과 LG의
어린이날 난투극
[49]
사실 엘롯기는 인기 팀 순위가 아닌 2000년대에 엘지, 롯데, KIA 세 팀이 부진한 후 꼴찌를 도맡아서 하는 세 팀을 일컫는 말이었다. 실제 인기 순위는
기롯삼한이라는 용어가 더 자주 쓰인다. 맨 앞부터 KIA, 롯데, 삼성, 한화 순이다. 물론 LG 또한 인기 팀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0]
2003년 삼성의 이승엽-
마해영-
양준혁은 가히 괴물 타선이었다.
[51]
당시만 해도 10000명만 수용이 가능했다. 현재는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로 옮겨 이보다 많은 수용석이 늘어나게 되었다.
[52]
구장이 작아서 관중 몰이를 덜하게 된 것일 뿐 타 팀들이 하락세를 탄 상태에서 거의 유일하게 상승세를 탄 삼성 팬덤이 대단한 강세를 보였고, 이 때문에 2003년 올스타전 동군은 2루수 고지행을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 삼성 선수들이 선발로 뽑혀서 사실상 삼성 단일팀이 되어버렸다.
[53]
김성근 감독이
2008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선수들의 헹가래를 타고 있다.
[54]
장타와 출루율
[55]
팀 타율 1위 및 정근우 등을 이용한 기동력 야구
[56]
뜬공 혁명 등
[57]
기동력과 불펜 이어던지기 야구
[58]
이른바 졸렬택 사건이다.
[59]
이 불만으로 인해 김성근 감독은
625 대첩을 일으켰다.
[60]
선동열 이후 두 번째 4관왕
[61]
2014년 한국시리즈 우승 세리머니. 중앙에 있는 선수는 KBO 리그의 상징적인 중간계투이자 당시에는 일본으로 건너간 오승환을 대신해 사자 군단의 마무리를 맡았던
임창용이다. 앞쪽으로 임창용과 함께 삼성 왕조의 마운드를 지켰던
장원삼,
안지만 등이 보인다.
[62]
2016년 한국시리즈 우승 세리머니. 중앙의 아이언맨은 "느린 공은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며 8년 연속 10승, 통산 101승을 거둔 투수
유희관이다. 유희관은 2015년에도 상의 탈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등 두산에서 쇼맨십이 가장 강한 선수이다. 앞쪽으로 두산의 전성기를 이끈
박건우,
장원준,
정수빈 등이 승리를 만끽하고 있다.
[63]
1985년 김시진-김일융 이후로 두 번째 동반 20승이며 순수 선발승으로 20승은 최초이다. 양현종은 이상훈 이후 20년 만에 좌완 20승을 기록했으며, 헥터는 2007년
다니엘 리오스 이후 10년 만에 200이닝+20승을 기록했다. 심지어 그때는
투고타저였으나 이 해는 기록에 남을 만큼 심한
타고투저였다.
[64]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8875 및
타이거즈는 어떻게 다시 강팀이 되었나 사태
[65]
그것도 우습게도 화분 정리하다 이렇게 된거다.
[66]
한유섬은 2018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위한 결정적인 홈런을 쳤고, 결국 MVP가 되었다.
[67]
이러한 효과를 편승효과(bandwagon effect)라고 한다.
[68]
단순히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거나 경기를 즐기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세이버메트릭스를 통해 야구 기록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웬만한 라이트 팬들은 관심 밖인 2군 선수들은 물론 아마 야구 유망주들까지 살피기도 하는 소위 하드 코어 팬들이 늘어났다.
[반박]
다만 이러한 주장만 마냥 내놓기엔 초등학교 야구부는 매년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7년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리틀야구단의 수가 늘어났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허나 리틀야구단이나 사회인 야구단에 비해 중고교 야구부의 증가세가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또한 감안할 필요는 있다. 야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거기에 취미 활동 이상의 의미를 주지는 않는 사람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엘리트 체육과 사회 체육의 간극이 상당히 벌어져있다는 점 또한 고려할 부분.
[70]
매년 꾸준히 지적된 혹사 논란과 코치들의 조련 능력 부족 등등이 그 예다. 그리고 예전부터 논란이 이어진 2004년 봉황기부터 적용된 나무배트 문제 등으로 인해 지난 몇 년 사이에 홈런 갯수가 크게 줄고 국제 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이 부진한 면을 보여 알루미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많았지만, 규정대로 만들어야 할 공인구를 양모의 비중을 속여 제조 판매한 업체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나무배트가 원인이 아님이 밝혀졌다.
백구(白球)안에 숨겨진 검은 진실
[71]
그러나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이 상당히 많이 드러났다.
[72]
이 당시
NC 다이노스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인기를 얻기도 했는데, 노스캐롤라이나의 약자가 ‘NC’이고
공룡 화석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메이저 리그 팀이 없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민들에게 잠깐 동안 홈팀이 되어주었다고.
[73]
이 때문에 선동열은 어떤
야알못에게 금메달을 따왔음에도 죄인 취급을 받는 희대의 수모를 겪었다.
[74]
다만 도미니카 공화국 또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 경력이 있는 만만하지 않은 팀인 것은 감안해야 한다.
[75]
2012년에는
박현준과
김성현(이상 LG), 2016년에는
이태양(NC),
유창식(KIA),
이성민(롯데),
안승민(한화),
문우람(넥센),
진야곱(두산) 등이 연루되었다. 그 외 2021년에는
윤성환(삼성)의 승부조작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76]
윤성환,
안지만,
임창용,
오승환 등이 연루되었다.
[77]
두산, KIA, 넥센, 삼성 4구단이 최 심판에게 돈을 건넨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사건은 이를 크게 보도했던 엠스플뉴스의 뻘짓으로 뒷맛이 개운치 않게 끝났다.
[78]
이용찬(2010, 두산),
고원준(2012, 롯데),
정형식(2014, 삼성),
정찬헌(2015, LG),
오정복(2016, KT),
에릭 테임즈(2016, NC),
윤지웅(2017, LG),
강민국(2018, NC),
박한이(2019, 삼성),
강승호(2019, SK),
최충연(2020, 삼성),
송우현(2021, 키움),
하주석(2022, 한화).
[79]
김재환(2011, 두산),
최진행(2015, 한화),
짐 아두치(2016, 롯데). 심지어 이 중 김재환은 2018년 MVP까지 수상하며 도핑에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KIA의
애런 브룩스가 2021년에 미국에 주문한 전자담배에서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어 퇴출되는 일도 있었다.
[80]
임정우(2017, LG),
이택근(2018, 넥센),
배재준(2020, LG). 이 중 이택근은 팀 후배
문우람을 배트로 가격하여 논란이 된 케이스.
[81]
안지만(2016),
윤성환(2020, 이상 삼성).
[82]
윤완주(2015, KIA),
장성우(2015),
장시환(2015, 이상 KT),
김원석(2017, 한화),
신동수(2020, 삼성),
박민우(2021, NC).
[83]
주로 KIA와 삼성 등 인기 팀에서 터졌다. 비인기 팀의 경우 팬 하나하나가 소중하기 때문에 팬 서비스에 각별히 신경쓰는 편이지만, 인기 팀의 경우에는 성적이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팬의 요청을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논란이 되었다.
[84]
안우진(2017, 넥센, 다만 안우진의 경우에는 지금까지도 누명을 쓴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김유성(2020, NC(지명철회), 이후 두산 입단)
[85]
NC
박석민,
권희동,
이명기,
박민우, 키움
한현희,
안유진, 한화
윤대경,
주현상. 이 중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던
박민우와
한현희는 국가대표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았다.
[86]
이는 역대 KBO 리그 개막전 관중 수 2위의 기록이다.
[87]
또한 현재 한국에서는 KBO 리그를 대체할 수 있을 만한 비슷한 규모의 프로 스포츠 리그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타 스포츠가 KBO 리그에 대항할 만한 경쟁력이 없는 것 또한 KBO 리그에 팬들이 몰리고 있는 이유 중 하나라는 주장 또한 있다.
[88]
이 위기론이라는 말 또한 KBO 리그에 사건이 터질 때마다
아전인수격으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성훈 기자의 논평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더 자세히 나와있다.
#
[89]
2023년 한국시리즈와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양대 강팀인 LG, kt 선수들(
고우석,
박영현 등)이 불참했다.
[90]
이벤트 경기가 아니라 정규시즌 162경기에 포함이 되는 실제 경기다.
[9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0:1,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는 2:5라는 접전을 만드는 고무적인 결과를 내었다.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는 1회 초 문동주의 폭투로 인한 1실점이 전부였으며, 다저스와의 경기에서는 일시적이지만 2:1로 우위를 점하는 등 꽤 비등비등한 점수를 만들어냈다.
[92]
LG 트윈스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에서 4:5를 기록해 2023시즌 우승팀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이날 경기에서 홈런을 기록한 타자는
김하성,
오지환,
이재원 등 전원 한국인이었다.
[93]
김하성의 전소속팀
키움 히어로즈는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3:14라는 큰 점수차로 패배했지만, 현재 리빌딩 중인 키움의 상황을 고려하면 오히려 선전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키움은 얼마 전 MLB에 진출한 간판 타자
이정후를 포함한
안우진,
김혜성,
이주형등의 주전 선수들의 부재로 개부분 저연차나 신인 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라인업을 짰다. 그럼에도 그
오타니 쇼헤이를 2번이나 삼진으로 돌려보낸
아리엘 후라도, 24시즌 신인임에도 무실점으로 이닝을 틀어막은
전준표와 멀티 히트를 만들어 낸
고영우, 안타를 기록한 2004년생 2년차 선수인
김동헌 등이 꽤나 선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94]
세계 야구를 선도하는
메이저리그도 아직은 마이너리그와 독립리그 등에서 시험 운영을 할뿐 본리그에는 도입을 못하고 있다.
[95]
40주년 기념 리브랜딩
[96]
해당 기사 중간에 위치한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 사진에 확인이 가능하다.
[97]
원래 매뉴얼 지침대로라면
Pantone 올해의 컬러를 써야 되겠으나, 다른 행사색상은 매뉴얼대로 지키면서도, 올스타전은 다음해인 2023년부터 예외가 되었다. 어쩌면 그냥 조금씩 다른 보라색 톤을 쭉 쓸지도 모를 일이다.
[A]
우천취소로 인한 개막전 연기
[99]
이 시즌부터는 개막전이 1년 전 순위 기준이 아닌 2년 전 순위 기준으로 배정되었다.
[B]
시구
[C]
시타
[B]
[C]
[B]
[C]
[B]
[C]
[108]
학교폭력 근절활동 참여 학생.
[B]
[C]
[A]
[B]
[C]
[D]
시포
[B]
[C]
[B]
[118]
2016 주니어 다이노스 스프링 챔피언십 MVP
[C]
[B]
[121]
2017 주니어 다이노스 스프링 챔피언십 MVP
[C]
[B]
[C]
[B]
[C]
[127]
이 시즌부터는 1~5위가 개막전을 홈에서 가지는 건 동일하나 6~10위의 경우 순위 순이 아닌 흥행이 높은 경기 위주로 배치된다.
[B]
[129]
2018 주니어 다이노스 스프링 챔피언십 MVP
[C]
[131]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김제혁 역으로 연기했으며 넥센 히어로즈의 스타급 투수이자 과잉방어로 교도소 수감중인 역할로 나왔다.
[B]
[133]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같이 출연했다.
[D]
[코로나19]
코로나19로 인한 무관중 경기로 따로 시구자를 초청하지 않음.
[코로나19]
[B]
[C]
[139]
김수환 군의 동생
[A]
[B]
[142]
원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김경문 감독의 시구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우천 순연으로 시구자가 바뀐 듯하다.
[C]
[144]
특별히 에어벌룬 시구를 진행했다.
[B]
[C]
[D]
[148]
코로나 바이러스 모양의 풍선을 폭파하는 이색 시구를 보였다.
[B]
[C]
[B]
[C]
[D]
[B]
[C]
[156]
드론 시구로 진행했다
[B]
[C]
[B]
[C]
[161]
구단이 매각된 경우 '→'로, 단순히 구단명이 바뀐 경우 '-'로 구분함.
[162]
1985~1989
[163]
1982~1984
[164]
1986~1989
[165]
전북 연고권은 2000년 쌍방울의 해체 이후 무연고 지역으로 남았다. 다만 전북지역 신인선수 지명권은 2004년
KIA 타이거즈로 환원됐다. 현재의 전북지역 신인선수 지명권은
KIA 타이거즈와
NC 다이노스가 나눠 갖고 있는데
전주고와
군산상고만 NC가 갖고 있고 나머지 전북지역 학교는 KIA의 연고 학교다.
[166]
2000~2007
[167]
서울 입성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어 무연고로 남았다. 당연히 1차 지명도 불가능했다. 자세한 내막은
현대 유니콘스 문서 참조.
[168]
2008~2011
[169]
당시 쌍방울에는
성영재,
김현욱,
김기덕 등
언더핸드 스로 투수들이 팀의 주축을 이뤘다. 언더핸드 스로 투수들은 공이 낮은 곳에서 출발해서 높은 곳으로 오르면서 날아오기 때문에 높이가 낮은 마운드에서는 업슛 효과가 배가될 수 있다.
김성근 감독이 이 점을 노린 것이다.
[170]
양대리그 시행으로 같은 리그 팀과는 20경기, 다른 리그 팀과는 18경기씩 진행.
[171]
1999시즌과 달리 2000시즌부터 리그 관계없이 팀간 19경기로 변경되었으며, 양대리그는 2년 만에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