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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3:43:10

박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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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1차 지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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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
(7명)
장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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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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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이경필
(고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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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최경훈
김동주
(고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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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수
홍성흔
(고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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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명 후 미입단 / 지명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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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준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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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s-2|{{{#a78329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MVP
김호근
( 부산고등학교)
박노준
(선린상업고등학교)
선동열
( 광주제일고등학교)

파일:oeiwjnFKre1sqk8veo7_r1_540_2.jpg 1980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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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2~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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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0ad67> 1984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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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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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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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조
삼성 라이온즈
<rowcolor=#d0ad67> 1986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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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은
MBC 청룡
장효조
삼성 라이온즈
김종모
해태 타이거즈
이광은
MBC 청룡
장효조
삼성 라이온즈
<rowcolor=#d0ad67> 198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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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0ad67> 1990 1991
이강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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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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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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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0ad67> 1994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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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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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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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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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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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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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봉
(1985)
박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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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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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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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극천
(1992)
박노준
(1993~1997)
오충원
(1998~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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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대 안양대학교 총장
제15대 우석대학교 총장
박노준
朴魯俊 | Park Nohjun
파일:박노준총장.jpg
출생 1962년 10월 26일 ([age(1962-10-26)]세)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1][2]
학력 서울봉천초등학교 (졸업)
선린중학교 (졸업)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 / 학사) [3]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스포츠산업학 / 석사)
호서대학교 밴처전문대학원 (스포츠경영학 / 박사) [4]
직업 야구선수( 투수[5], 외야수 / 은퇴 )
해설위원
단장
교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86년 1차 지명 ( OB)
소속 <colbgcolor=#004098> 선수 OB 베어스 (1986~1991)
해태 타이거즈 (1992)
쌍방울 레이더스 (1993~1997)
지도자 뉴욕 메츠 인스트럭터 코치 (1999)
프런트 우리 히어로즈 단장 (2008)
해설위원 ITV 경인방송 야구 해설위원 (2000)
SBS / SBS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01~2007, 2009~2010)
KBS N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4)
TV 조선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해설위원 (2012)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해설위원 ( JTBC)
경력 KBO 규칙위원 (2007)
KBO 기술위원 (2008)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회장 (2019~)
교수 서울산업대학교 겸임교수 (2009)
우석대학교 레저스포츠학과 교수 (2009~2020)
안양대학교 총장 (2020~2024)
우석대학교 총장 (2024~)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1.1. 부상
2.2. 프로 경력
3. 코치 연수 ~ 해설자 1기 시절4. 프런트 경력5. 해설자 2기 시절
5.1. 2013 WBC 중계와 비판들
6. 학위 및 강의 경력
6.1. 안양대학교 총장6.2. 우석대학교 총장
7. 여담8. 연도별 주요 성적
8.1. 타자 기록8.2. 투수 기록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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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석대학교 제15대 총장이자 前 안양대학교 제11대 총장. 前 OB 베어스, 해태 타이거즈,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의 외야수이자 前 우리 히어로즈 단장. 前 우석대학교 체육과학대학 체육지도학과 교수.

2019년 1월 7일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파일:박노준 선린상고.jpg
영광의 선린상고 재학 시절
파일:external/www.kjclub.com/12.jpg
박노준과 김건우

서울봉천초등학교 시절 1학년을 2번 다닐 정도로 몸이 약해 체력을 기르고자 야구를 시작했는데, 선린중학교를 거쳐 선린상고 시절엔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야구실력과 훤칠한 외모로 유명했다. 선린상고 시절의 별명은 유독 챙이 짧은 선린상고 모자와 굳게 다문 입 때문에 ' 독일병정'.

어쩌다가 마운드에서 내려오면 야수로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거기에 발도 빠르고 외야로 나가면 총알 송구까지 하는 등, 그야말로 고교야구의 로망인 투수인 동시에 중심타자였다.

선린상고 2학년 때인 1980년에는 전국 대회에서 이미 당시 고교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6]이 마운드에 버티고 있던 광주제일고를 상대로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이겼던 경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빼어났다. 거기에 고3 때는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양 대회에 걸쳐 경북고와 혈전을 벌이면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성까지 갖췄다.[7]

2.1.1. 부상

파일:external/mlbpark.donga.com/1219675289.jpg

1981년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부상을 당한 다음날 입원한 병원 앞에는 그의 부상을 안타까워한 여고생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방송국에서 병원에 입원해서 발목에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그를 찾아와서 준우승에 머문 심경 등을 인터뷰해 갔을 정도였다.[8] 그 후로 대한민국 야구 사상 이렇게 여고생들한테까지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야구선수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선린상고의 쌍두마차이자 또 하나의 천재 김건우는 선린상고 때도 관심을 못 받았다. 그리고 프로로 진출한 뒤에도 교통사고로 인해 선수생활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9]

2.2. 프로 경력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4)
파일:ob 박노준.jpg
투타겸업을 시도하던 OB 베어스 시절
파일:쌍방울 박노준.png
말년을 보낸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그러나 1982년 선린상고 졸업 후 고려대를 거쳐[10], 프로까지도 이어진 투수와 타자 겸업 등으로 인한 혹사와 집중력 결여로 인해 프로에 입단한 후에는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프로 시절에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투타 겸업을 선언했으나, 아무리 수준이 낮아도 성인 야구는 학생야구와는 달랐다. 사실 고려대 졸업 직전 투수 생명은 사실상 종료됐다는 평이 대다수였고, OB 베어스의 제의도 신인 최고 계약에서 '타자' 신인 최고 계약으로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OB 감독이던 김성근이 투타 겸업을 제의했고, 그 와중에 여전히 투수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박노준은 그걸 또 좋다고 받아들였다. 여기서 투타겸업을 먼저 제의한 것이 어느 쪽이냐의 논란이 약간 있기는 한데, 어차피 양 쪽 다 투타겸업에 미련이 있었기에 큰 의미는 없다.
박노준 33경기 5승 6패 7세이브 ERA 2.28
17경기 0.173 1타점(타자)
김건우 37경기 18승 6패 ERA 1.81 탈삼진 102

만약 욕심을 버리고 투, 타 중 하나라도 빨리 진로를 정해서 전념했다면 다른 야구 인생을 살았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특히 고등학교 동기이자 항상 2선발 취급이었던 김건우가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일찌감치 투수로 정착해서 큰 활약을 했던 점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김건우는 86년 신인왕을 차지하면서 승승장구했고 그 후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려다가 뺑소니 차량에 치이는 교통사고라는 야구 외적인 요인으로 선수 생명이 단축되었다.

프로에 와서도 부상을 많이 당한 케이스이다.

1987년 어깨 부상
1988년 손등 뼈 골절
1989년 손가락 골절
1992년 왼쪽 무릎 인대 부상
1993년 갈비뼈 골절
1994년 쌍방울에서 골글 탈 정도의 활약한 다음에 허벅지 근육 파열
1996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
1997년 결국 은퇴.

OB-해태-쌍방울을 거친 그의 프로 통산 성적은 타율 0.262, 28홈런, 266타점. 그리고 5승 7패 7세이브 3.13. 이 좌완투수 기록이 투타 겸업으로 망했다는 1986년 신인의 기록이다. 대신 타격이 망했다. 1986년 타격기록은 0.173, 0홈런, 1타점. 사실 투수 기록도 그다지 특출난 것도 아닌 것이, 이 시기는 투고타저의 시대라 3점대 ERA는 평범한 기록이었다.

결국 1989년 이후로는 사실상 투수의 길을 포기한 채 타자로만 나왔고, 1991년 시즌 후 이광우를 상대로 해태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됐다. 프로에서 딱 한번 연타석 홈런을 쳤는데, 그게 바로 해태 시절인 1992년 롯데를 상대로 한 플레이오프 2차전이다. 그런데 페넌트레이스 성적이 워낙 별로였던지라 그대로 트레이드 크리. 편파해설을 하는 것을 보면 팀 내 알력이 있지 않았나 싶다.

박노준이 이적할 당시 30세면 여느 팀에서도 고참급이고 잘 나가는 선배라곤 선동열,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 그리고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은 김종모 밖에 없었고, 동기생으로는 성격 좋기로 유명한 장채근, 김정수, 이건열, 차동철 등이 있었다. 연배로 봐선 갈궜다면 김성한 밖에 갈굴 사람이 없다.[11]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구한성이 밝힌 바로는 박노준은 해태에서 뛰던 시절 팀 분위기에 전혀 적응을 못했고 찍어치는 스윙 스타일을 구사하여 레벨 스윙과 어퍼 스윙을 중시하던 김봉연 타격코치와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박노준은 해태 시절 팀 후배인 구한성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고 한다. 김성규와 같은 좌타자로 김성규가 먼저 있던 해태에 합류했고, 김성규가 쌍방울로 떠난 뒤 박노준도 쌍방울로 이적하게 된다. 김성규는 전설의 타이거즈 출연 당시 감독 이름을 밝히지 않았느나 한동화 당시 쌍방울 감독과 불화가 있었고 선린상고 후배인 박노준을 쌍방울로 데려왔다고 덧붙였다. 김성한이 술회할 일화로 박노준이 팀내 위계질서를 따르지 않고 개인행동을 일삼자 보다 못한 이순철이 박노준에게 '어디 OB 베어스에서 배워먹은 짓이냐?'[12]면서 심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해태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해인 1992년 1년만 뛰다가 다시 트레이드됐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는 하나도 없다.

결국 1993년 시즌을 앞두고 백인호와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면서 1년만에 유니폼을 다시 갈아입었다. 그나마 쌍방울에서는 해태 시절보다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1994 시즌 타율 0.303으로 커리어 유일하게 규정타석 3할을 기록했다.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한 번 수상한 것도 이 때의 일. 이후로는 다시 부상에 시달리는 등 제대로 뛰지 못하다가 1997년 시즌 후 방출되면서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등 끝까지 순탄치 못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여담으로 쌍방울에서 뛰던 당시 가족들은 서울 양천구 목동에 거주하고 본인만 전주시로 내려와 혼자 생활했다고 한다.

3. 코치 연수 ~ 해설자 1기 시절

파일:박노준 메츠코치.jpg
1999년 뉴욕 메츠 코치 시절[13]

은퇴 후에는 선수 시절의 인기가 무색하게 되었다. 일단 은퇴 직후에는 마이너리그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고, 1998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1999년 뉴욕 메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기도 했다. 특히 메츠에서는 연수 도중 인스트럭터 코치로 채용되어 한 시즌 동안 메이저리그 선수단과 동행하며 각종 훈련 보조 등을 맡기도 했다.[14]

하지만 그를 코치로 영입하려는 KBO 팀들은 아무도 없었고, 더군다나 이팀 저팀 옮겨다닌 데다 마지막으로 뛰었던 팀이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진 쌍방울 레이더스였다 보니 한국에서 지도자를 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2000년부터 iTV 박찬호 등판경기 방송 해설로 데뷔, 이후 2001년부 SBS SBS Sports로 이적했다.
손가락 벌렸죠? 스플리터예요.[15]

경인방송 시절에는 나름대로 해설이 신선하다 내지는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송재우 위원의 버프를 어느 정도는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SBS 스포츠로 이적한 이후에는 손가락 벌렸죠? 스플리터예요[16], 인사이드 파크 호텔 등 컬트적인 발언으로 야구팬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전설의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본선 2라운드/1조 3경기를 중계한 해설자이기도 하다.

한편 한국시리즈를 끝낸 두 홈런을 중계한 유일한 해설자기도 하다. 2002년 6차전 끝내기 홈런 당시에는 상당히 흥분한 목소리였는데, 2009년 7차전 끝내기 홈런 당시 우승 당시에는 멘트가 매우 김샜다. 특히 2002년 한국시리즈 2009년 한국시리즈는 각각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 KIA 타이거즈의 12년만이자 현대자동차그룹의 구단 인수 후 첫 우승이라는 의미있는 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설자로서 커리어를 쌓아가던 어느 날, 갑자기 매력적인 제의를 받게 되는데….

4. 프런트 경력

파일:박노준 우리단장.jpg
우리 히어로즈 단장 시절

2008년에 창단한 우리 히어로즈의 단장을 역임했다. 당시 이장석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GM과 같은 역할로 박노준을 영입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박노준의 진짜 역할은 얼굴마담 겸 대신 욕먹는 담당이었다. 선수들 연봉 깎는 것부터 시작해서, 목동야구장 인근의 아파트 민원 담당까지 했다. 이때 선수들 연봉은 깎으면서 현대 시절 리스한 에쿠스를 그대로 몰고 다닌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에쿠스 박.[17] 일단 히어로즈의 창단 감독으로는 과거 박노준이 OB 시절 스승으로 모셨던 이광환 감독이 선임되었다.[18]

그런데 정작 이 장면 이후는 아무것도 구단에 영향력 행사를 못 했다고 한다. 단적인 예가 당시 SK 감독이었던 김성근이 아직 터지기 전이었던 백업 포수 정상호를 내놓으면서, 당시 히어로즈 프런트와 선수단의 갈등에서 선수단 측 총대 중 하나였던 이숭용 [19]을 데려가는 트레이드가 진행되었다. 이는 SK에서 전권을 가지고 있던 김성근 당시 SK 감독, 그리고 히어로즈에서 트레이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박노준 단장과 이광환 당시 히어로즈 감독이 모두 동의하면서 성사 직전이 되었는데, 히어로즈 구단 상층부에서 현금 1억을 추가로 요구하면서 무산되었다.[20] 이 사건을 계기로 박노준은 아무런 실권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결국 선수단, 팬, 구단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욕만 우라지게 먹고 2008 시즌이 끝나자마자 구단 수뇌부와 마찰을 빚은 후 사임했다. 이 시기 박노준은 KBO와 히어로즈의 연결 통로이기도 했기 때문에, 박노준 링크로 들어온 인물들의 상당수가 히어로즈를 떠났고, 이광환도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21] 욕먹을 일이 터질 만큼 터진 이후였던 히어로즈에는 과거 현대 시절부터 팬들의 지지를 받던 김시진 전 현대 감독이 1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했다.

나중에 이장석이 구속되고 실형을 선고받은 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당초에는 단장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이장석이 직접 "히어로즈 구단 지분 40%를 줄 테니 제발 맡아달라"라는 간절한 부탁 끝에 단장직을 수락했는데, 정작 단장직을 맡고 난 뒤에는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으며 박노준 본인은 히어로즈 구단 주주명부에 단 한번도 이름을 올린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 본인은 기존 8구단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며 노력했고 이장석 대표는 당시 선수를 절대 현금 트레이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뒤로는 다른 구단들에게 현금 트레이드로 선수를 팔려고 알아보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선수단 원정 숙식비까지 제대로 결제 처리가 되지 않아 온갖 욕은 본인이 다 먹었고 이를 수습하느라 바빴다고 한다. 심지어 단장 명의의 법인 카드도 안 나오고, 해설할 때보다 수입도 줄어드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

훗날 인터뷰에서도 히어로즈 단장을 맡았던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한 해"라고 표현한 걸 보면 본인에게나 구단에게나 양쪽 모두 흑역사로 남은 셈이다.

5. 해설자 2기 시절

단장에서 물러난 후 원래 있던 SBS에서 해설가로 복귀했는데 여전히 해설에 여러가지 문제[22]가 많아서 박동희 기자와 더불어 각 팀빠들이 서로 자기 팀의 팬이 아니라며 타 팀에 떠넘기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명언록도 무한증식했다. 명언/야구 참조.

후술하듯이 우석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면서 해설은 부업으로만 하게 되었는데[23], 2012년 TV조선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중계 해설을 맡았다. 그리고 이 때 인사이드 파크 호텔 나올 뻔했다. "인사이드 파크 호...홈런을..." 2013 WBC 해설을 JTBC에서 맡았으며, 2014년에는 KBS N 스포츠에서 일본프로야구 해설을 맡았다.

5.1. 2013 WBC 중계와 비판들

2013 WBC에서 네덜란드와 대만의 경기를 중계하며 보스턴 레드삭스 유격수가 시즌아웃되었다는 근거 없는 드립을 던지며 위태위태[24]하더니, 본선 1라운드 C조 베네수엘라-도미니카 경기를 중계하며 마틴 프라도 치퍼 존스의 공백을 메꿔야 한다는 개드립을 치며 그란도시즌을 작렬했다. 아니발 산체스 에딘슨 볼케즈의 프로필을 바꿔 읽기도 했으며, 파블로 산도발을 좌타 거포라 칭했고, 에릭 아이바에게 류현진의 동료 드립을 쳤다.[25][26] 또한 페르난도 로드니가 모자 비뚤게 쓴 채 투구를 하자 이제 그 모자 삐둘게 쓰는 건 트레이드 카드가 됐어요란 드립을 작렬하며 인사이드 파크 호텔에 이은 새로운 유행어를 창시했다.

이튿날 미국 vs 멕시코 경기에서는 R. A. 디키의 2012년 성적을 보고 아메리칸리그 이야기를 해서[27] 이틀 연속 그란도시즌을 작렬시켰다[28]. 그리고 그런 와중에 미국이 득점기회를 잡자 홈런보다 나은 안타 발언을 꾸준히 설파하기도 했다.

6. 학위 및 강의 경력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포츠산업과 관련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히어로즈의 단장에서 물러난 이후 2009학년도 1학기에 서울산업대학교 겸임교수로 강단에 섰다. 같은 해 8월에는 우석대학교의 겸임교수로 초빙됐다.

2011년 2월 스포츠마케팅 관련 논문으로 호서대학교 벤처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우석대학교 체육과학대학 레저스포츠학과[29]의 교수로 정식 임용되었다. 전임교수 임용에 따라서 해설위원 생활도 끝.

6.1. 안양대학교 총장

"야구로 치면 저는 5회초쯤 와 있습니다."
- 2020년 3월 20일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

2020년 2월 11일, 안양대학교 11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임기는 3년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최초 프로 운동선수 출신 대학 총장이 되었다. 운동선수는 무식하다는 편견을 깨부수고 싶다는 소감을 밝히며 대학교 총장이 된 것에 감격스러워했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임기가 시작하자마자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일어나버려 취임식도 비대면으로 진행되었고 수업도 비대면으로 진행되어버려 안양대 학생들과 자주 교류할 수도 없다.

안양대학교 대진성주회 매각 논란이 진행되면서 김광태 17대 이사장이 교육부에게 해임되자마자 선임된 것이라서 우일학원의 분위기 쇄신용 카드라는 의심의 눈초리도 받고 있다. 게다가 안양대는 박노준 총장이 취임하기 이전에 체육 관련 학과가 하나도 없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안양대는 장로회 미션스쿨이라서 역대 총장들이 목사, 장로 같은 기독교계 인물들인데, 박노준 총장은 10대 장병집 총장에 이은 두 번째 비기독교계 출신 총장이라서 안양대학교의 기독교 정체성이 흔들리는것 같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물론 저명한 야구 인사라서 총장으로 선임되자마자 뉴스로도 알려져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안양대학교 총장 자리는 7대 김석준 총장 이래로 그동안 내부승격 없이 외부 교육자들을 총장으로 선임했다가 임기를 완전히 채우지 못하고 교체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30] 박노준 총장도 우석대학교 교수 출신이라서 교내에서 지지기반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일련의 사건 때문에 생긴 학내 구성원들의 불만을 없애는 것과 임기를 다 채우는 것이 관건이다. 일단 선임되었으니 소방수 역할을 해내주길 바라는 여론도 많다. 이를 의식해서 자신은 CEO형 총장이고 사기를 진작시키고 배우고 싶은 학과 중심으로 체질 개선을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안양대학교 노조와 기독교계에게 크게 견제받고 있다. 축구부 설립을 시도하다가 크게 비판받고 무산되었다고. 그런데 그럴만한게, 상술했듯이 박노준 현 총장처럼 비기독교계이면서 외부 교육자 출신인 전임 장병집 총장이 대진성주회와 김광태 전 이사장의 대변인 노릇을 하다가 짤렸고, 우일학원의 위성호 현 이사장이 부총장을 대진성주회 계열 인사로 임명해버렸기에, 교육부에 해임당한 김광태 전 이사장이 아직도 안양대의 운영에 관여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임 부총장은 인문대학과 신학대학을 통폐합시키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기독교계가 안양대 운영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게다가 박노준 총장은 대진성주회 매각 논란에 대해 어떠한 의견도 낸 적이 없어서 논란을 일축시키긴 커녕 오히려 방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20년 3월 17일 최대호 안양시장과 지역청년 취업활성화에 공동 노력할 것을 약속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관내기업의 채용정보를 제공해 졸업예정자의 일자리매칭 취업연계서비스를 실시하고, 지역 청년들이 취업지원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을 다양화한다고 한다.

7월 28일에는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하였는데,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가 야구 선수 시절이 아니라 교수로서 10년간 연구와 논문을 쓰며 자유롭게 공부하였던 시절이라고 밝히며, “지식과 경력을 쌓으며 나 자신을 항상 무장하고 준비하라.”라는 어록을 남겼다.

8월 24일에는 경기도 청년을 격려하는 캠페인인 아프지마 청춘 챌린지에 동참하였다. 아이스버킷 챌린지처럼 다른 사람에게 지목받고 지목하는 캠페인이라서 강남대학교 윤신일 총장을 지목했다.

8월 28일에는 안양시와 안양학[31] 개발을 위한 공동협약을 채결했다. #

2020년 10월 21일에는 다른 전,현직 개신교 대학교 총장들과 함께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

2021학년도를 앞두고 학제 개편을 하였는데, 예술대학을 예술체육대학으로 개편하고 뷰티메디컬디자인학과, 게임컨텐츠학과, 스포츠지도학과, 실용음악과를 개설하였다. 자신의 경험을 살리는 동시에 교내 지지기반을 키우려는듯.

4월 28일 어린이 교통 안전 릴레이 캠페인에 참여했다. # 5월 19일에는 중국의 텐진청젠대학교와 교수·학생 교류, 학술 교류, 문화 교류 및 과학 연구 합작에서 상호협력을 위한 협약을 비대면으로 체결하였다. 기묘하게도 텐진청젠대학교도 안양대학교와 비슷하게 수도권 중소규모 대학이다.

6월 22일 안양대학교의 교단인 예장 대신의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보냈다. # 그리고 7월 28일 디지털 콘텐츠 전문 기업인 이브이 알 스튜디오와 메타버스 기술 개발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하였으며, # 8월 6일에는 화장품 전문 기업 웰메이드인터네셔널과 협약을 체결하였다. # 사실상 취업율 향상을 위해 산학협력을 추구하는 모양새이다.

야심차게 준비했던 야구부, 축구부 창단은 안타깝게 무산되었으나 대신 안양대학교가 기독교 학교로 존속하면서 학교의 내홍도 소강되었으며 박노준 총장이 신설한 학과들도 안정적인 충원률을 보이면서 호평을 받고 있다.

강화도에 개설했던 학과들을 안양캠퍼스로 옮기려고 하다가 결국 학교 내부의 반발에 부딪혀서 무산되었다. 물론 입결을 생각하면 안양으로 이전이 더 나은 편이기는 하다만 소통 없이 밀어붙인 것이 반발의 원인.

2022년도 9월 26일 안양대학교 노조가 박노준 총장을 송별하는 플래카드를 걸어뒀다. 하지만 아직 임기가 5개월 남았다. 박노준 총장마저 임기를 꽉 채우지 못하고 퇴임하는 것인지 짐작되는 상황. 그리고 10월 20일 안양대학교 노조가 박노준 총장을 송별하는 플래카드는 내려가고 "박노준 총장은 관련 내용을 상세히 가감없이 문서를 첨부하여 설명하라"는 플래카드가 올라갔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불명이다. 또한 안양대학교 노조는 박노준 총장의 관련 인사 등용과 공문서 위조 혐의를 들면서 학교 운영 정상화와 박노준 총장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2023년에는 예술체육대학에 체육학과를 신설하였다. 이로써 안양대는 2개의 체육학과를 갖게 되었다.

임기를 1년 연장하게 되었다. 사실 임기 말에 일어난 학교 내부의 반발을 제외하면 꽤 무난하게 임기를 지낸 편이었다. 다만 대진성주회 사태에 대해서 어느 의견도 내지 않아서 대진성주회의 안양대 인수에 대해서 어떤 개입도 하지않을 것 같아보인다는 우려도 있다.

실용음악과를 폐과하고 체육학과들을 단과대학 규모로 키워버렸다. 실용음악과의 경우에는 2년만에 폐과해버린 것이라서 첫 신입생들이 졸업하기도 전에 과가 폐과되었다.

연장된 임기를 마치고 사표를 낸 상황이다. 다만 임기를 완전히 끝마쳤기 때문에 중도퇴임은 아니다. 2024년 2월까지 총장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6.2. 우석대학교 총장

2024년 2월 15일 제15대 우석대학교 총장으로 내정되었다. 임기는 2024년 3월 1일부터 2028년 3월 1일까지이다.

7. 여담

8. 연도별 주요 성적

8.1. 타자 기록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6 OB 17 52 .173 9 1 2 0 1 3 0 2 .269 .204
1987 34 89 .315 28 4 2 0 7 8 2 8 .404 .371
1988 67 146 .240 35 5 2 4 20 18 0 12 .384 .294
1989 107 326 .298
(7위)
97 12 2 0 26 54 25
(6위)
39 .347 .373
1990 106 342 .249 85 9 2 3 24 37 13 26 .313 .300
1991 120 430 .293 126
(9위)
17 4 5 39 60 19 34 .386 .345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2 해태 92 238 .239 57 11 3 2 28 39 11 22 .336 .302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3 쌍방울 113 331 .227 75 14 3 0 26 28 14 29 .287 .289
1994 108 340 .303
(7위)
103 15 1 3 36 44 43
(3위)
39 .379 .374
1995 107 332 .220 73 11 3 2 20 39 20 21 .289 .266
1996 52 139 .345 48 7 1 4 20 15 1 11 .496 .393
1997 93 155 .187 29 4 2 5 19 23 6 24 .335 .296
KBO 통산
(12시즌)
1016 2920 .262 765 110 27 28 266 368 154 267 .347 .323

8.2. 투수 기록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WHIP
1986 OB 33 110⅓ 5 6 7
(3위)
2.28
(7위)
91 4 38 61 1.15
1987 9 16 0 1 0 6.19 16 3 15 8 1.88
1988 1 3 0 0 0 18.00 5 0 2 1 2.00
KBO 통산
(3시즌)
43 129⅓ 5 7 7 3.13 112 7 55 70 1.26

9. 관련 문서


[1]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으로 되어있었으나 사실 인근 신안군 압해읍(당시 무안군 압해면) 출신이다. 목포시와 뿌리가 같은 무안군, 신안군 출신의 인물들이 자신의 고향을 말할 때 상대방이 지명을 잘 모르기에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목포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타 지방 출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군 단위 출신자 및 거주자들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지 않는 이상 인근 도시에서 살다 왔다고 말한다. [2] 서울봉천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특별시에서 자랐다. [3] 82학번 [4] 박사학위 논문 : 국내 프로야구단의 마케팅 실태분석을 통한 수익극대화 방안(2011년). [5] OB 시절 1986년 ~ 1988년까지 좌완투수로 활동하였다. [6] 선동열의 아마 시절 전성기는 광주일고 시절보다 고려대 경영학과(1981학번) 시절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한 시즌을 그대로 날린 것도 있고 해서 기대치가 대학 시절과는 비교도 안되었다. 더구나 이 때는 고교야구 전성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괜찮은 선수들(박노준과 선동열을 연파하면서 혼자서 약소팀을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던 세광고의 민문식, 경북고를 우승시킨 성준, 그리고 천재소리가 관용어구였던 본문의 주인공인 박노준과 그의 팀원 김건우, 천안북일고 이상군)이 군웅할거했기 때문에 더더욱 1년을 날려먹은 선동열이 주목받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선동열이 이 당시 고교생 중에서 최고가 아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본인 커리어상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한 게 대학 시절이지 고교 시절에도 이미 군계일학으로 점쳐졌다. 당장 졸업을 앞두고 당시 대학야구계의 큰손인 연세대와 고려대학교가 최동원에 이어 선동열을 두고 또 한 번 스카우트 전쟁에 나섰다는 점 자체가 이 당시 고교선수 중에서는 최고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7] 선린상고고3때의 준우승이 워낙 부각됐지만 이분은 이미 1, 2학년 때 우승을 경험했다. 고등학교 때 콩라인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8] 덕분에 그해의 우승팀 경북고를 이끌었던 나름대로 라이벌 성준이 묻혀 버렸다. 우승한 다음에 '박노준을 꼭 이기고 싶었습니다'라는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방송사도 그렇고 여러 야구팬들의 관심은 박노준이 입원한 병원에 집중되어 있었다. 덕분에 비참함이 두 배. 그리고 또다른 경북고 멤버로 류중일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감독도 있었다. [9] 무슨 마라도 끼었는지 김건우와 박노준 두 선린상고 에이스들은 부상 퍼레이드로 자신들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채 선수 생활을 끝냈다. 청소년 세계대회에서 노히트노런 한 것 제외하면 고교시절부터 대학까지 타자로 유명했던 김건우는 프로에 와서 투수로 전향하여 바로 신인 최다승을 기록하면서 신인왕에 등극했다. 그리고 다음해도 9월까지 12승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두 팔과 한 다리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겨우 복귀해서 투수로 좀 뛰다가 타자로 돌아가서는 바로 4번타자 겸 1루수로 교타자 전향에 성공하는듯 했지만, 이번에는 경기 도중에 타팀 선수와 부딪혀 손목 골절을 당했다. 은퇴했다가 다시 투수로 돌아와서 몇년 더 뛰기는 했지만, 본인의 잠재력과 부상 이전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둘 다 은퇴한 후의 행적도 그다지 운이 따르지 않았고, 해설자 시절에도 평판이 나빴다. [10] 이때까지만 해도 선린상고 때의 명성에 뒤지지 않은 천재성을 발휘했다. 하지만 대학야구 자체가 그 전에도 고교나 실업야구에 비해서 인기에 떨어졌고, 프로출범 이후로는 완전히 그들만의 리그화가 되어 사람들이 신경을 많이 안 써서 묻혔다. 참고로 MBC 청룡- LG 트윈스에서 뛰면서 106승을 올린 정삼흠은 동기인 선동열과 후배인 박노준에게 밀려서 대학 4년 동안 거의 등판 기회를 잡지 못했다. 덕분에 정삼흠은 싱싱한 어깨를 가지고 프로에 진출하게 됐고 이것이 나중에 프로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는 했다. [11] 근데 장채근은 나중에 김응용한테 술 먹고 개기다가 되리어 김응용에게 얻어터지고 난 뒤 주전포수가 됐는 게 아이러니. [12] 김성한은 쌍방울 레이더스라고 잘못 말했다. [13] 오른쪽은 당시 LA 다저스에서 뛰던 박찬호다. [14] 박노준 본인에 의하면 당시 메츠 감독이었던 바비 발렌타인의 눈에 들어 인스트럭터 코치로 발탁됐고, 정식으로 급여도 나오는 보직이었다고 한다. [15] 억울한 측면도 있다. 공이 날아가는 궤적을 보고 구종을 말하는 것에는 관대한 팬들이 되려 더 정확하게 구종을 판단할 수 있는 그립을 보고 스플리터를 던졌다고 해설한 것을 우스갯소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의 궤적만 보고 그립을 안 보면 알 수 없는 서클 체인지업이라고 말하는 해설자들에 대한 지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16] 이 발언은 후배 캐스터가 따라하기도 했다(…) 2022년 8월 19일 2회초 삼성-한화전에서 [17] 박명환야구TV에서 조용훈이 푼 썰에 의하면, 조용훈이 당시 연봉 고과 1위였으나 2천만원에서 고작 1천만원 상승 제시안을 말했다. 해외 전훈에 나가 있는 조용훈에게 계약을 종용하며 국제전화를 걸었는데 수신인에게도 통화료가 부과되는 국제전화 특성상 40만원이나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박노준 단장은 조용훈에게 통화료를 한 푼도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18] 당초 현대에서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는 과정에서 현대의 마지막 감독이던 김시진 감독을 그대로 유임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광환을 감독으로 선임하고 김시진에게는 2년간 수석코치 역임 후 차기 감독 취임이라는 조건을 제시하는 바람에 팀을 떠났다. 이후 박노준-이광환이 모두 1년만에 물러난 뒤 후임 감독으로 김시진이 선임되면서 결과적으로는 당초 조건보다 1년 빠르게 감독으로 복귀한 셈이 됐다. [19] 정민태는 고참 선수들에게 으름장을 놓기 위해서 진작 방출했고, 송지만도 LG의 이성열 + 심수창과 트레이드하려다 결렬됐다. 결국 둘 다 히어로즈로 오긴 한다. 타자 전준호도 1년 후 2,000안타 + 549 도루 이후에 일방적으로 방출당했다. [20]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매년 2할 7~8푼대에 한 자릿 수 홈런을 치는 38살의 중거리 타자를 얻겠다고 백업포수인 정상호를 매물로 내놓은 셈인데, 아무리 본래 주전 1루수인 이호준이 08시즌에 못 나왔다고 해도 이건 역대급 호구딜에 가까웠다. 제 3의 포수인 이재원이 있었다고 해도, 27살의 정상호와 38살의 이숭용 중에서 장기적으로 누가 더 SK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 [21] 당시 히어로즈는 이광환 감독 라인 + 이순철 수석코치 라인 + 강병철 2군 감독 라인 + 현대 출신 일부가 고루 섞여있었는데, 결국 시즌이 끝나고 상당수가 교체되었다. [22] 발음 같은 사소한 문제도 문제지만, 거의 종교 수준으로 스몰 볼을 맹신하는 게 더 문제였다. 좌타자는 무조건 결대로 밀어쳐야 한다던지, 9회 3점차에 등판한 마무리 투수에게 2점 홈런을 뽑자 여기서 홈런은 안 됩니다. 안타를 이어가야 투수를 무너뜨릴 수 있어요.라는 명언을 남겼다. [23] 일단 우석대가 전라북도 완주군에 있다보니 전국을 도는 해설위원 생활을 하기에 어려웠다. 그래서 전임교수로 신분이 전환된 이후 SBS와의 계약도 2010년을 끝으로 해지. [24]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보스턴 유망주 잰더 보가츠가 3루수로 출전했는데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네. 근데 레싹 유격수 다쳤다며? →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5] 프라도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간의 저스틴 업튼 트레이드로 디백스로 건너간 선수이며, 산도발은 스위치 히팅 슬러거고, 아이바는 류현진이 소속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라이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소속 선수다. 물론 현지 중계에서 에인절스가 아닌 다저스 선수로 표기하는 오류를 저지르긴 했지만, 해설자가 되어가지고 그걸 수정하지도 못하고 뻘소리를 작렬했다. 대체 2013년 전후의 MLB 동향에 대해 아는 게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었다. [26] 웃기게도 훗날 산도발은 스위치 히터를 포기하고 우투좌타로 정착한다. [27] 디키는 2012년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자였다. 데뷔 후 2009년까지 아메리칸리그에서만 뛴 건 맞지만 2010~2012년가지 디키는 내셔널리그에 있었고, 2013년에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하여 다시 아메리칸리그로 돌아갔다. [28] 이것 말고도 이 경기 그의 해설은 메이저리그를 아는 사람들은 도저히 실소를 금치 못할 정도로 틀린 정보가 많았다. [29] 학과 통폐합으로 스포츠지도학과가 됨. [30] 안양대학교 총장이 임기를 완전히 채우지 못하고 교체되기 시작한 일은 6대 이은규 총장부터지만 그래도 그는 안양대 신학대학 교수 출신이었다. [31] 말그대로 안양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32] 2009년 KBO가 주도해서 만들었던 사이트인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이트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본문에 언급된 레전드 카툰을 볼 길이 없다. 현재 발견되는 카툰은 최훈 작가 스스로가 블로그에 남겨놓은 이만수 편과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만 작은 사이즈로 발견되는 이정훈 편, 그리고 MLB 타운에서 남아있는 한용덕 편 정도이다. [33] 대상자가 단 1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