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그룹 해체 및 크라운그룹의 해태제과 인수 이후에 대한 내용은 크라운해태그룹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e21c2a><colcolor=#fff> 해태 HAIT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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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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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 1945년 10월 3일([age(1945-10-03)]주년) |
해체 | 2001년([age(2001-01-01)]주기) |
창업주 |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
규모 | 대기업 |
유형 | 기업 집단 |
사업 분야 | 식품, 음료, 건설, 오디오, 중공업, 전자 |
모회사 | 해태제과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72길 3 ( 남영동)[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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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5년부터 2001년까지 존속했던 기업 집단. 롯데제과와 top 2로 경쟁하던 대형 제과 업체인 해태제과로 시장 인지도를 높였고 1980~1990년대 KBO 리그의 절대 강자였던 해태 타이거즈 등으로도 명성을 떨쳤다.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영동에서 창업을 했고 본사도 여기에 있었는데도[2] 금호아시아나, 교보생명, 삼양그룹, 대상그룹, 쌍방울, 하림, 부영, 아남[3] 등과 더불어 전라도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4] 이 때문에 호남 출신 방송인 김병조는 해태그룹이 무너질 때 "일부러라도 부라보콘만 먹고 초코파이 대신 오예스를 꼭 사먹게 하곤 했는데!"라며 당시 비통한 마음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존속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haitai.com'이었다.
2. 역사
소비더머니의 영상 |
1945년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등 4명이 적산기업 나가오카(永岡)제과 용산공장을 인수해 ' 해태제과합명회사'를 세운 게 이 그룹의 시초이다. 1958년 해태산업을 세워 사세 확장을 시작해 1973년 해태식품을 세워 음료사업에도 진출했고, 다른 한편 농어촌개발공사로부터 한국산토리, 감귤냉장판매, 메도골드코리아까지 인수했다. 이후 1978년 해태관광, 1978년 해태상사, 1979년 신방전자, 1982년 코스코, 1986년 무궁화식품 등을 각각 인수/설립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거의 식품 위주로만 사업을 확장했다.
60년대를 거치며 해태제과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특히 호남 사람들의 열렬한 애향심을 바탕으로 전라도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60년대 이후 호남 사람들이 대거 서울로 상경하면서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에서도 엄청난 판매량을 보였다. 당시 호남 사람들이 많이 살던 서울 변두리 지역 슈퍼 마켓에는 100% 해태제과 제품만 취급하고, 롯데, 빙그레, 크라운 등 다른 회사 과자는 아예 팔지 않는 가게도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1977년 공동창업주 박병규가 급서하자 공동창업주들 간에 경영권 분쟁이 생겼다. 박병규의 장남 박건배 기획과장이 부친 사망 직후 상무로 긴급 승진했다. 이후 1978년 전무, 1979년 부사장을 거쳐 1981년 해태제과 등 3개사 사장이 되어 사실상 경영권을 잡았다. 반면 신덕발의 아들 신정차는 1981년에 해태관광을 들고 먼저 분가했고, 민후식의 아들 민병헌도 1988년에 해태유업을 들고 독립해 동거 시대를 끝냈다.
1981년 박건배는 회사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1983년부터 그룹회장에 취임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사업다각화에 열의를 보였다. 1981년 코래드를 세워 광고업에 진출했다. 이어 1981년 프로야구 출범 직전에 운좋게 참여하여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를 창단했다. 당시 해태는 규모가 작아 프로야구단 창단 기업 대상에 들지 못했지만 호남 연고 기업으로 야구단을 창단할 마땅한 기업이 없어 막판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한국커피, 대아상호신용금고, 미진금속을 잇달아 인수하여 금융업 및 중공업에도 뛰어들었다. 미진금속은 나중에 해태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같은 해 계열사 자율경영체제로 전환했고, 이듬해인 1984년 회장 부속실을 '종합조정실'로 개편해 본격적인 그룹의 형태를 갖추었다.
1994년에는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하지만 저물어가던 사양 산업이었던 오디오 사업에 뛰어들어 인켈을 인수했다. 당시 인켈이 해태를 인수했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인켈의 브랜드 파워와 규모가 컸었다. 그러나 문제는 MP3의 도래로 오디오 산업이 급격히 몰락했다는 점이다. 인켈은 당시 부동의 국내 1위 오디오 제조사였지만 서서히 몰락해고 있었다. 해태는 이를 기회로 인켈을 저렴하게 인수하였다고 생각했겠지만 인켈 인수 얼마 후 오디오 산업 자체가 와해되었다.
이듬해인 1995년에는 가정용 무선전화기로 유명한 나우정밀을 인수했다.
이러한 활발한 인수합병 덕분에 해태그룹은 1996년 말 기준 재계 24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본업과는 전혀 무관한 비식료품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문어발식 경영, 총수의 대외활동 편중 등이 화를 불렀다.[5] 그의 과감한 사업 확장은 별로 안목이 좋지 않았는데 사양 산업인 오디오 산업과 휴대폰이 태동하던 시기에 사양산업인 가정용 무선전화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물론 해태는 나우정밀을 바탕으로 휴대폰 사업에도 진출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이미 나우정밀은 해당 분야에서도 다른 대기업 계열사들에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게다가 겉보기와 달리 가정용 무선전화와 장거리 무선통신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이쪽에는 이미 삼성, LG 같은 전통의 대기업은 물론이고 팬택같은 벤처 기업들이 해당 분야에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태는 해당 기업들을 인수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차입했는데, 결국 1997년 외환 위기 때 유동성 자금난을 겪게 되었고, 결국 2001년 프로야구단 해태 타이거즈와 해태제과 중국법인을 매각하면서 그룹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3. 역대 그룹 임원
- 명예 회장
- 민후식 (1983~1985)
- 회장
- 박건배 (1983~2000)
- 부회장
- 강남형 (1989~1991)
- 김현곤 (1996~1998)
- 그룹 종합조정실장
-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 정기주 (1998~2000)
4. 오너 4가계 일가
- 박병규 (1925 ~ 1977) 해태그룹 공동 창업주
- 박건배 (1949 ~ ) 해태그룹 회장 (1983 ~ 2000)
- 박성배 (1954 ~ 2020) 해태유통 부회장. 코로나로 사망.
- 민후식 (1907 ~ 1985)해태그룹 공동 창업주, 명예회장
- 민병헌 (1933 ~ ) 해태유업으로 분가, 해태유업 회장
- 민정기 (1961 ~ ) 해태유업 前 사장 (1999 ~ 2006) 동원그룹에 인수합병
- 신덕발 (1906 ~ 1979) 해태그룹 공동 창업주
- 신정차 (1940 ~ ) 해태관광(現 큰길)으로 분가, 큰길 회장
- 한달성 (1910 ~ ?) 해태그룹 공동 창업주
5. 기업 정신
-
해태 이념: 보람을 심는 기업, 사랑이 있는 기업, 새로움을 찾는 기업
- 경영 방침: 인간존중의 경영,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 제공
- 사원 정신: 새롭게 생각한다, 스스로 일한다, 더불어 산다
- 사훈: 창의, 진실, 협조
- 사가: 작사는 박목월, 작곡은 나운영이었다.
(1절)신선한 새맛을 창조해주는 조국의 산업계의 빛나는 성좌 해태여 해태여 정직과 성실로 다져진 신용있고 정다운 우리의 해태 (2절)넉넉한 즐거움 마련해주며 세계의 시장마다 감동을 심는 해태여 해태여 창의와 봉사로 다져진 보람차고 정다운 우리의 상징 (후렴)찬란한 내일로 해태가족과 번영을 누리며 손을 맞잡고 줄기차게 뻗어가는 해태그룹 해태그룹 만만세 |
6. 계열사 목록
- 해태제과: 2000년 부도 후 2001년에 건설사업부만 존속하여 '하이콘테크'라는 파산법인으로 바뀌었다가, 청산과정을 거쳐 2012년 소멸됨.
- 제과사업본부: 2001년 9월, UBS컨소시엄이 해태제과식품에 (구)해태제과의 브랜드, 우량자산, 부채를 매각했으나, 2005년 크라운해태그룹에 인수되었다. 과거에도 홈런볼, 맛동산, 오예스, 부라보콘 등 주력상품 몇 개로 버티는 이미지였다. 다만, 아이스크림 사업은 수지타산이 안 맞았는지 2020년대에 들어 해태아이스크림이라는 별도법인을 세워 빙그레에 매각했다.
- 건설사업본부: 1989년에 발족되어 '해태아파트' 브랜드로 주택건설 사업도 했다. 2001년 '하이콘테크'로 변경된 후 존속되었으나 2003년에 건설업 면허를 반납했다.
- 완구사업부 : 1980년대 말에 사업했던 부서이며, '우리들'이란 문구점 브랜드를 썼다. '동물나라 친구들'이나 '토순이네 집'[6] 같은 완구들을 발매함. 그 중 우리들은 당시 수도권에 6개의 점포를 보유했으며 비수도권에도 지점을 보유했다.
- 해태가루비: 일본 가루비사와 합작으로 1999년 해태제과에 합병됐으나, 2011년 해태제과식품에서 재분사됨.
- 해태음료: 2000년 히카리인쇄 컨소시엄이 세운 신규법인 '평촌개발'에 자산이 매각됨. 이후 2004년에 일본 아사히맥주로 대주주 지위가 넘어갔다가 2010년 LG생활건강에 인수되었다. 코카콜라음료(주)를 산하에 둔 기업이다. 반면 구 해태음료는 청산법인 (주)해우가 되었다가 2006년 폐업됨.
- 해태산업(초대): 1959년 설립된 비스킷 생산업체로, 1963년 1월 해태제과공업에 합병.
- 해태산업(2대): 구 한국산토리-해태주조. 2001년 플러스기업구조조정에 넘어가면서 '해태앤컴퍼니'가 됐다가 2003년 국순당에 매각되어 2006년부터 국순당L&B로 사명이 변경되었으나, 2010년 8월 국순당과 합병했다.
- 주류사업부문: 주력 제품은 '나폴레온'과 '런던 드라이진'이었다.
- 제과사업부문: 대구(하양) 및 청주 스낵공장 운영을 담당했으며, 1999년 해태제과로 사업부가 넘어갔다.
- 해태유업: 구 메도골드코리아. 민후식 공동창업주 장남 민병헌의 몫으로, 1989년에 지분을 매각하여 그룹에서 분리된 상태였으나 해태관광과 달리 사명을 변경하지 않아 해태 계열사로 인식된 게 아킬레스 건이 되어 부도 처리되었다. 동원그룹에 인수되어 덴마크 밀크(DM푸드)와 합쳐져 현재 '동원데어리푸드'로 사명이 변경되었다가 '동원F&B'로 통합되었다. 참고로 칼슘우유 광고를 하면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갖고 고인드립을 친 것으로도 악명높았다.
- 금성유업: 1976년 해태제과에 합병됨.
- 해태농수산: 구 감귤냉장판매-해태감귤냉장. 1988년 해태음료에 합병됨.
- 해태식품: 구 무궁화식품. 1993년 해태산업에 합병됨.
- 한국커피: 일본 UCC 커피 수입업체로, 1988년 해태식품에 합병됨.
- 해태상사: 종합무역상사로, 2000년 법정관리를 거쳐 11월 파산 후 2009년에 소멸됨.
- 해태유통(現 이마트에브리데이): 구 코스코. 해태백화점 및 해태수퍼마트 운영법인이었다. 1997년 부도난 후, 2000년 그룹이 해체되어 법정관리를 받아 2004년에 상장폐지됐다. 2006년 이랜드그룹에 인수되어 '킴스클럽마트'로 변경했다가 2011년 신세계에 재매각되어 '이마트슈퍼', '에브리데이리테일'을 거쳐 이마트 에브리데이로 운영중이다.[7] 강동구 고덕동에 있던 해태백화점 역시 현재는 이마트 명일점으로 운영중이다.
- 해태관광(現 큰길): 신덕발 공동창업주 장남 신정차의 몫으로, 1981년 계열 분리됨.
- 해태전자(現 인켈): 2000년 법정관리로 들어가면서 '이트로닉스'가 됐다가, 2006년에 풍안방직 컨소시엄으로 매각됨.[8]
- 인켈사업본부: 구 인켈. 1996년 합병 후에도 브랜드가 존속중이다. - 오디오 브랜드이다.
- 바텔사업본부: 구 나우정밀. - 유무선전화기로 유명했다.
- 에어로시스템: 구 인켈의 스피커 제조 자회사로, 그룹 해체 후 파산절차를 밟고 2002년에 소멸됨.
- 인켈오디오월드: 인켈아트홀 및 인켈음악학원 운영법인으로, 1999년에 폐업됨.
- 해태I&C: 구 소프트월드. 컴퓨터 유통체인 '에이젠시' 운영법인으로 그룹 해체 후 파산절차를 거쳐 2002년 소멸됨.
- 해태텔레콤: 구 해태그룹 정보통신사업단. 무선 통신장비 제조업체로 그룹 해체 후 파산절차를 거쳐 2002년 소멸됨.
- 해태중공업: 구 미진금속. 1999년 법정관리를 거쳐 2001년에 폐업됨.
- 금속부문: 주로 건축용 관이음쇠를 만들었다.
- 철도차량부문: 철도 동호인에게는 무궁화호 해태중공업 특실 객차로 유명한 곳으로, 1998년 디자인리미트에 철도차량사업을 매각함.
- 대한포장공업: 골판지 제조업체로, 1997년 부도 후 1998년 폐업됨.
- 코래드: 제일기획, 대홍기획, 동방기획, 오리콤 등과 더불어 이름 높은 광고기획사. 1999년부터 GMH가 일부 지분을 인수하고 이듬해 그룹 해체 후 2002년부터 대우자동차판매에 인수되었다. 2004년 프랑스 광고 기획사 하바스에 일부 지분을 팔기도 했으나 2012년 이후 대우자판도 망하게 되면서 청산에 들어갔다.
- 대아상호신용금고(現 애큐온저축은행): 1994년 한솔그룹에 매각되어 '한솔상호신용금고'를 거쳐 2002년 '한솔상호저축은행'이 됐으나 2003년 미국계 사모펀드 PPRF, 2006년 MBK파트너스로 대주주가 각각 바뀌어 'HK저축은행'으로 변경됐다가 2015년 미국 JC플라워에 매각되어 '애큐온저축은행'이 되어 2019년엔 홍콩 베어링PEA에 매각됨.
- 해태식품유한공사: 중국 현지법인, 포산시 소재로 2001년 매각됨.
- 학교법인 안용학원
7. 기타
- 경기도 화성시 소재 사립 중학교인 안용중학교가 이 그룹 재단이었다. 안용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는데 해태그룹 해체 후 그냥 평범한 사립중학교가 되었다. 하지만 해태그룹 전성기 시절에도 그다지 지원은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
- 금융업으로는 대아상호신용금고를 1983년 인수해 운영했으나 1994년 한솔그룹으로 넘어간 이래 한솔상호신용금고, 한솔저축은행, HK저축은행 등으로 바뀌다가 2017년 애큐온저축은행으로 변경되었다.[9]
- 1984~1986년까지 대한역도연맹 회장사, 1992~2000년까지 한국스카우트연맹 회장사였다.
- 1997년 5월 21일 뉴스에서 해태 부도설을 퍼트린 사람을 고발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그로부터 6개월 뒤에 해태제과가 부도났다.
- 해태가 부도난 후 박건배 회장은 재기를 위해 와인산업에 뛰어들어 금양인터내셔날이란 와인 유통회사를 설립했다.[10] 2000년대 중반부터 와인유통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한때 잘 나갔지만 신세계그룹이나 롯데그룹 등의 대기업이 직접 와인 수입사를 운영하면서 금양인터내셔날의 영업력이 위축되었고, 결국 건설업체 까뮤이앤씨(옛 삼환까뮤)에게 2017년 6월 경영권을 매각해 재기에 실패했다.
-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앞 해태상을 세운 것도 해태제과다. 자체 생산 보르도 와인 72병을 좌우 36병씩 나누어 묻고, 100년 뒤(2075년)에 축배를 들기로 했다.
관련기사.
불을 막아준다는 해치가 회사에 붙은 불은 끄지 못했다그리고 인구 감소 등으로 그때 축배를 들 수 있을지 불명
8. 참고 자료
- 해태 삼십년사 (1976)
- 공병호의 대한민국 기업흥망사: 실패의 역사에서 배우는 100년 기업의 조건 - 해냄. 2011. p209~218.
[1]
現
크라운해태그룹 본사
[2]
해태그룹이 종말을 맞던 1990년대 후반에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에 그룹 사옥이 있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마포역 4번 출구와
마포대교 북단 사이에 있는 대형 건물(現
불교방송 사옥)이 해태그룹 마포 사옥이었다. 용산구 남영동의 해태제과 본사는 지금도 있다. 다만, 크라운제과가 해태제과를 인수한 이후
크라운
해태제과의 본사 건물로 간판을 바꿨다.
[3]
앞서 언급된 기업은 모두 창업주가 각각
나주시(금호),
영암군(교보),
고창군(삼양),
정읍시(대상),
익산시(쌍방울, 하림),
순천시(부영) 등 호남지역 도시에서 출생했으며 각 기업의 기틀을 다진 창업지도 대부분 호남이었다. 다만 대상의 경우는 창업지가
부산이었고 초기에는 부산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만큼 70년대 이전에는 부산 향토기업이라는 인식도 강했다.
[4]
해태를 호남 연고 대기업으로 분류하는 배경에는
야구팀이 가장 크기도 했지만, 송당 박병규 창업주가
광주광역시 출신이라는 점 때문도 있다. 다만, 공동창업주 아당 민후식 전 회장은
황해도
연백군, 동릉 신덕발 전 부회장은
경기도
안성시 출신이었다.
[5]
후술하겠지만 제과업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전자 사업이나 건설 사업 등에 손을 댄 것이 경영난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6]
실바니안 패밀리의 카피제품.
[7]
규모가 큰 일부 매장은 이마트 메트로로 운영되고 있다.
[8]
[되돌아 본 재계 '실패에서 배운다'] (4) '무리한 짝짓기' M&A
[9]
재미있는 것은 애큐온저축은행은
해태 타이거즈의 후신인
KIA 타이거즈가 아니라
OB 베어스의 후신인
두산 베어스를 후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10]
옛 해태산업의 수입주류 전문 자회사로 설립됐다가 1999년 해태 부도 이후 직원들이 퇴직금으로 주식을 인수해 독립했다. 회사의 최대주주는 박건배 회장의 아들인 박재범 대표였지만, 박건배 회장의 후원이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