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09:10:53

엘 그레코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00 Greatest Greeks
※ 2009년 그리스 Skai TV 방송이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알렉산드로스 3세 게오르요스 파파니콜라우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소크라테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리스토텔레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플라톤 페리클레스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 멜리나 메르쿠리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니코스 카잔차키스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호메로스 마노스 하지타키스 레오니다스 1세 히포크라테스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피타고라스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마리아 칼라스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엘 그레코 콘스탄티노스 11세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리가스 페레오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아리스 벨루키티오스 요안니스 메탁사스 니코스 갈리스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코스 데모크리토스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 야니스 마크리야니스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 야니스 리트오스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테미스토클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투키디데스 에우클레이데스 파블로스 멜라스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아테네의 크리스토둘로스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 테오도로스 자고라키스 디미트리 나노풀로스 무명용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페이디아스 아리스토파네스 코스티스 팔라마스 에톨리아의 코스마스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소포클레스 니코스 벨로야니스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니콜라오스 마르지오리스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에피쿠로스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 오톤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반젤리스 솔론 클레이스테네스 아이스퀼로스 바실리오스 2세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콘스탄티누스 1세 이온 드라구미스 코스타스 시미티스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테오 앙겔로풀로스 니코스 실루리스 스텔리오스 카잔티디스 차릴로스 플로라키스 에우리피데스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카롤로스 코운 유스티니아누스 1세 라키스 라조폴로스 헤로도토스 다나시스 벤고스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헬레네 글리카츠아흐와일러 카티나 팍시누 알리키 부지욱라키 마르코스 밤바카리스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바실리스 치차니스 피로스 디마스 마노스 로조스 마노리스 글레조스 엘레나 무잘라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필리포스 2세 디미트리스 혼 라스카리나 부불리나 탈레스 프락시텔레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후안 카를로스 1세 미겔 데 세르반테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아돌포 수아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펠리페 6세 파블로 피카소 예수의 테레사 펠리페 곤살레스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이사벨 1세 세베로 오초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호세 사파테로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살바도르 달리 안토니오 가우디 엘 시드 알폰소 10세 페르난도 알론소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프란시스코 데 고야 프란시스코 프랑코 안토니오 마차도 미겔 인두리안 미카엘 세르베투스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로라 플로레스 펠리페 2세 카를로스 1세 로시오 주라도 그레고리오 마라뇬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디에고 벨라스케스 이사벨 판토하 호세 오르테가 미겔 데 우나무노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비센테 페레르 카밀로 호세 셀라 페드로 두케 다니 페드로사 파우 가솔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다비드 비스발 라파엘 나달 카마롱 데 라 이슬라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산티아고 카리요 안토니오 반데라스 이냐시오 데 로욜라 페드로 알모도바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미겔 에르난데스 후안 마누엘 세라 로페 데 베가 엘 그레코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호아킨 사비나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앙헬 니에토 마누엘 아사냐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조르디 푸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알레한드로 산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에르난 코르테스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카를로스 사인츠 파퀴리 텔모 사라 몽세라 카바예 마누엘 데 파야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이삭 페랄 플라시도 도밍고 미겔 길라 루이스 부뉴엘 엘 코르도베스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프란시스코 피사로 마리아노 바울바시드 라울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초아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아만시오 오르테가 마놀레테 에두아르도 칠리다 페란 아드리아 아란차 산체스 비카리오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호아킨 로드리고 에밀리오 보틴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프란시스코 헨토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세바 바예스테레스 이삭 알베니스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카르멘 아마야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 마누엘 산타나 알리시아 코플로비츠 안토니오 루이스 솔러 자코네로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colbgcolor=#000><colcolor=#fff> 엘 그레코
El Greco
파일:el-greco.jpg
[1]
본명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Δομήνικ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
출생 1541년 10월 1일
베네치아 공화국 크레타 섬 칸디아[2]
사망 1614년 4월 7일 (향년 72세)
스페인 톨레도
국적 베네치아-그리스, 스페인
직업 화가
사조 매너리즘, 스페인 르네상스
스승 티치아노 베첼리오

1. 개요2. 생애3. 대표 작품4. 기타

[clearfix]

1. 개요

그리스 태생의 스페인인 화가로,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과 함께 근세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꼽힌다. 17세기 르네상스 말기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궁중 화가였고, 당시 매너리즘으로 분류된 그의 화풍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의 화풍은 20세기 독일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에는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그리스 크레타 섬 칸디아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는 그리스 사람으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Δομήνικος Θεοτοκόπουλος)인데,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3]로 불렸다.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의 지도를 받고 틴토레토(자코포 로부스티)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엘 그레코의 초기 화풍은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하였고 베네치아풍의 색채법을 사용하였다.

베네치아에서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엘 그레코는 당시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던 스페인에서 성공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스페인으로 건너갔으며 그가 원하던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궁중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화풍이 펠리페 2세의 마음에 들지 않아 궁중 화가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이 종교화와 초상화였고 회색빛 명암 색채,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고 뒤틀린 인체묘사로 당시 스페인에서는 매너리즘 미술로 평가절하되었다. 사후 오랫동안 그의 진가가 묻혀져 있었으나 19세기 이후 재평가되어 폴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가 등장하면서 그는 미술사에서 신기원으로 이룬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궁중 화가로서 톨레도에 정착한 후에 평생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고, 스페인 왕실이 마드리드로 천도한 뒤에도 톨레도에서 계속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3. 대표 작품

파일:external/allart.biz/el_greco_opening_of_the_fifth_seal.jpg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1614년, 캔버스에 유화)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어두운 단색으로 배경을 표현하여 인물을 강조하고 그 인물들을 10등신에 가깝게 길게 그려서 눈에 띄도록 한 독특하고 파격적인 화풍의 소유자이다. 그 당시에는 실제 사람과 사물을 똑같이 표현하는 고전주의 사조가 유행하였기 때문에 시각장애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 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화풍은 16세기 말에 매너리즘[4]이라는 사조로 발전한다. 후일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 추상주의에 영향을 준다.[5]
파일:external/www.artble.com/the_burial_of_the_count_of_orgaz.jpg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8년, 캔버스에 유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작품에서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스테파노가 오르가스 백작 시신을 매장하고 있고 그의 영혼 천사 천국으로 끌어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그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묘사였다. 특히 동시대 인물이 아닌 사람들[6]을 동시에 묘사한 것, 영혼을 실체있는 형상[7]으로 표현한 것 때문에 당시 백작의 유해를 모셨던 산토 토메 성당에서는 이 그림을 묘지 위에 걸기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그 그림을 보기 위해서 산토 토메를 찾는 관광객이 매우 많아진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8]

4. 기타



[1] 자화상으로 추정. 제목은 노인의 초상화다. [2] 오늘날의 그리스 크레타 섬 이라클리오 [3] 사실 엘 그레코라는 표현 자체는 약간 비하적인 표현이 섞여있어서 스페인 사람들이 불렀던 의미는 그리스인보다는 '그리스놈'이라는 표현에 더 가깝다. 이사벨 1세 여왕의 레콩키스타 성공과 통일 스페인 왕국 출범 이후 이방인들에게 까칠했던 스페인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는 한 단면인 셈. 또한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공표했으니 그의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들어있기도 하다. [4] 16세기 말 이미 소묘 실력이 정점에 달하면서 미술의 발전은 끝난 것이 아니냐는 생각과 함께 조화와 균형 대신 신체의 특정부분을 과장 왜곡하면서 부자연스러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5]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데 집중하는 것 대신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종교적 열망과 희열-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내었단 것을 생각한다면 표현주의, 추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400년 정도 앞서갔던 화풍이었던 셈. [6]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스테파노와 오르가스 백작, 동네 주민들, 심지어 왼쪽에는 엘 그레코 자신의 모습과 아들을 묘사해놓았다. 왼쪽에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아이가 엘 그레코의 아들이고, 군중들 중에 오른손을 들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엘 그레코 본인이다. 참고로 수많은 인물들이 그려져있지만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이 두 명 뿐이다. [7] 흰색 물결, 천의 형상으로 표현. [8]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오로지 눈으로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