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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개편/대한ㅁ닌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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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연혁4. 고구려5. 백제
5.1. 신라5.2. 발해5.3. 고려5.4. 조선
5.4.1. 8도5.4.2. 23부제5.4.3. 13도5.4.4. 통감부의 조선 행정 구역 대개편
5.5.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대개편 ( 부군면 통폐합)
6. 대한민국 행정구역 개편사
6.1. 서울특별시 확장6.2. 경기도 변천6.3. 연속된 승격과 1995년 대규모 시군 통합( 기초자치단체 통합)6.4. 도와 시, 군의 신설 및 경계 조정6.5. 직할시 광역시6.6. 행정구역 명칭 및 청사 소재지 변경6.7.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과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7. 북한8. 관련글

1. 개요

한국사에서의 행정구역 개편의 역사, 행정구역 역사에 대한 항목이다.

2. 상세

행정구역은 정부가 지방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앙집권국가체제가 확고해 진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한다. 삼국시대부터 각 나라는 영토를 몇 개의 지역으로 구분하고 이에 해당하는 명칭을 붙였으며, 수도와 같은 특수한 지역은 별도의 행정구역을 설치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또한 상위 행정구역과 하위 행정구역이 구분되었다. 남북국 시대에 통후기신라는 전국을 9주 5소경, 115군 201현으로 편제하는 주군현 제도를 완성하였고 발해 5경 15부 62주 100여 현으로 편제하는 부주현제도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모든 지역에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게 존재했다.

고려시대에도 남북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지방관이 파견되는 지역이 많지 않았으나, 신라 시기와 다르게 이원화된 행정체계인 5도 양계를 갖추었고, 이후 개경을 중심으로 하던 경기가 고려 후기에 도로 성장하여 실질적으로 8개 도 체제의 기반이 잡히게 되었다.

고려시대 후기부터 조선초기까지 현을 통합하기 시작하고 조선초기에 고 2원화된 지방행정구역 체계를 도로 1원화시키며 향(), 소, 부곡을 철폐하고 면리제를 시행하여 조선후기에 모든 지역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근대 이전에는 군권과 행정권이 분리되지 않았다. 이는 중앙정부의 통치가 완벽하지 못했다는 점이 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신분제가 있었기 때문에 향·소·부곡과 같이 천민들만이 모여 있는 행정구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군승강법이 있어서 여몽전쟁 등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나 왕비의 배출 유무에 따라 행정구역의 급이 높아지기도 하고, 반대로 역적을 배출한 지역의 경우 반역향으로 지정해서 군대에서 문제가 발생한 부대단위를 강등하거나 해체하는 군대와 같이 행정구역 위계가 강등되거나 없어지고 지역 출신자는 출세길을 막아버리는 식으로 차별하기도 하였다.

근대인 1895년···을 모두 군으로 통일되었으며, 8도 23부제로 개편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기존 도제로 회귀하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를 남북(및 동서)으로 갈라 13도제로 보완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에 대규모로 부군면 통폐합이 이루어지며 종전 군, 면, 동리 2~4개를 통합하고 한자화하며 우리 지명이 크게 유실되었다. 현행 행정구역 명칭과 범위는 이때에 그 기틀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1]

해방 및 정부 수립 이후 굵직한 행정구역 변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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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혁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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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행정구역의 시대별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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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ec9f19,#11499C><colbgcolor=#000,#fedc89>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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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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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5부 지방 5부 3경
백제
5부 5방 22 담로
신라
6부 5주 2소경
삼국시대 (삼국의 중앙집권체제 확고 - 삼국통일전쟁)
발해 5경 15부 62주 통일신라 9주 5소경 115군 201현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10도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5도 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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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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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1부 8도 하위 행정구역
(조선건국 - 고종)
파일: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 태극기.svg 조선 23부제
파일:대한제국 국기.svg 대한제국 1부 13도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제강점기: 13도, 부군면 통폐합
남북​분단
~
19​63​년
<colbgcolor=#fee,#300>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colbgcolor=#eef,#003>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1특별시 6도
(1946-49년)
1특별자유시 9도
(1946-49년)
1특별시 7도
( 자강도 설치 / 1949-51년)
1특별시 9도
(서울특별자유시를 서울특별시로 개칭 / 1949-63년)
1특별시 7도 1지구
( 개성시 설치 / 1951-52년)
1직할시 7도 1지구
( 평양시를 직할시로 승격 / 1952-54년)
1직할시 9도 1지구
( 량강도 설치, 황해남도· 황해북도 분도 / 1954-57년)
2직할시 9도
( 개성시를 직할시로 승격 / 1957-60년)
3직할시 9도
( 함흥시를 직할시로 승격 / 1960-63년)
19​63​년
~
19​95​년
4직할시 9도
( 청진시를 직할시로 승격 / 1963-70년)
1특별시 1직할시 9도
(부산시를 부산직할시로 승격 / 1963-81년)
2직할시 9도
( 함흥시, 청진시를 일반시로 격하 / 1970-77년)
3직할시 9도
( 청진시를 직할시로 승격 / 1977-79년)
4직할시 9도
( 남포시를 직할시로 승격 / 1979-85년)
1특별시 3직할시 9도
(대구시, 인천시를 대구직할시, 인천직할시로 승격 / 1981-86년)
3직할시 9도
( 청진시를 일반시로 격하 / 1985-2000년)
1특별시 4직할시 9도
(광주시를 광주직할시로 승격 / 1986-89년)
1특별시 5직할시 9도
(대전시를 대전직할시로 승격 / 1989-95년)
19​95​년
~
1특별시 5광역시 9도
(지방자치제 실시 및 행정구역 대개편 / 1995-97년)
4직할시 9도
( 라선시를 직할시로 승격 / 2000-03년)
1특별시 6광역시 9도
(울산시를 울산광역시로 승격 / 1997-2006년)
3직할시 9도
( 개성시를 특급시로 격하 / 2003-04년)
1직할시 9도
( 남포시, 라선시를 특급시로 격하 / (2004-10년)
1특별시 6광역시 8도 1특별자치도
( 제주도 제주특별자치도로 개편 / 2006-12년)
1직할시 2특별시 9도
( 남포시, 라선시를 특별시로 승격 / 2010-19년)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8도 1특별자치도
( 연기군을 해체하고 그 일대에 세종특별자치시를 신설 / 2012-23년)
1직할시 3특별시 9도
( 개성시를 특별시로 승격 / 2019년- )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7도 2특별자치도
( 강원도 강원특별자치도로 개편 / 2023-24년 )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6도 3특별자치도
( 전라북도 전북특별자치도로 개편 / 2024년- )
}}}}}}}}}

4.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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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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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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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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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고려

5.3.1. 10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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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 5도 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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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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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 8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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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시기인 1413년에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8도가 이때 확립되었고 일부 을 통폐합하고 주(州) 이름이 달린 중소 고을들을 천(川), 산(山)으로 치환하는 명칭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 8도제가 조선시대 대부분에 걸쳐서 조선 광역행정구역으로 기능하였다.

8도 체제가 확립된 이래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때는 1895년에 이루어진 23부제 시행과 이듬해인 1896년에 이루어진 13도,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1914년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인 부군면 통폐합이다.

5.4.2. 23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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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전통적인 8도 체제는 제정된 지 시일이 상당히 지난 탓에 간 인구 격차가 크고, 실제 생활권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조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남부 지방이 겨우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개 도(통칭 삼남)로 편성된 데 비해 인구 밀도가 희박한 북부 지방은 평안도, 함경도 2개 도(통칭 양북, 서북)로 편성되었고, 생활권이 서로 다른 영동 영서가 같이 강원도에 묶여 있는가 하면, 생활권이 비슷한 충주를 중심으로 한 남한강 수계 일대는 충청도와 강원도로 양분되어 있었다. 구한말 행정구역 개편은 인구 분포 및 생활권을 보다 실질적으로 반영하고, 지역 편차가 큰 도를 로 더 작게 나누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1896년에 각 의 면적과 인구 등을 감안하여 1등군부터 5등군까지 총 다섯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군의 수장은 종전대로 군수(郡守)로 하였다.

1896년 2월에 서해안과 남해안에 있는 여러 섬을 짜깁어 전주부에 지도군(5등군, 현 전남 신안군, 전남 영광군 낙월면·위도면, 전북 군산시 옥도면)을, 나주부에 완도군(5등군)을 신설하였고, 동시에 조선 초에 여수가 폐현될 때 같이 폐현되어 순천 땅이 된 돌산현이 돌산군(5등군)으로 재설치하였다. 하지만 완도, 돌산, 지도 3군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중심지인 지도, 완도, 돌산도와 멀리 떨어져있는 섬도 무리하게 편입하였다. 예를 들면 완도군은 종래 영암 영암은 남해와 접하지 않았으나 해남 동부와 소안군도를 월경지로 두고 있었다.], 강진, 장흥의 섬들을 짜깁었는데, 이 중 금당도는 완도읍과 멀고 오히려 고흥군 녹동항에서 꽤 가깝다. 또한 돌산군은 고흥군과 낙안군의 섬 다수를 편입해서 고흥 거금도, 내 / 외나로도와 벌교 노루섬이(장도가) 돌산군에 편입된 적이 있었고 거문도, 초도 등은 아예 고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또 지도군은 영광군 낙월도, 안마도 및 부안군 위도까지도 관할했다. 이처럼 섬들을 묶은 행정구역 설정은 1900년대에 신설된 오천군과 진남군도 있는데, 영역상 각 지역 수영이 관할하던 섬들을 묶은 것으로 보인다. 돌산군은 전라좌수영, 완도군은 전라우수영 중 남해, 지도군은 전라우수영 중 서해, 오천군은 충청수영, 진남군은 경상우수영 관할 섬들을 관할하였다. 보령시에 딸린 섬들이 접근성이 더 좋은 대천5동( 대천항)이 아닌 오천면으로 편성되었고, 고흥군이 더 가까운 거문도 여수시에 있고, 고흥 녹동항 접근성이 더 좋은 금당도가 완도군에 속해 있는 이유다.

갑오 -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된 행정구역 개편이지만, 결국 1년 반도 되지 않아 도 체제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 행정구역 제도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

5.4.3. 13도

23부제 탁상행정으로 갑자기 제도와 행정구역을 변화시켜 혼선을 빚자, 시행 1년만인 건양 원년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를 반포하여 23부제를 폐지하고 도제로 환원하였다. 대신 기존 8도제를 약간 보완하여 8도 중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를 제외한 나머지 도를 남도와 북도로 분할하여 총 13도가 되었다. 사실 전근대 조선왕조는 8도 내에 좌도, 우도를 설치하고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암행어사를 좌우 따로 두(거나 보내)어 실질적으로 분도를 했지만, 관찰사는 좌우 따로 있지 않았고 도마다 1명씩 있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한 도였다. 좌우도 체제에서 착안하여 남북도로 공식 개편했다. 이 13도제가 근현대 한국 광역행정구역 근간이 되어 이어진다.
수부(首府) / 도감찰부)道監察府) , 경기도 수원군 부면 화성행궁

4부 34군
광주부, 개성부, 강화부, 인천부 수원군 여주군, 양주군, 장단군, 통진군 파주군, 이천군(利川郡), 부평군, 남양군, 풍덕군, 포천군, 죽산군, 양근군, 안산군, 삭녕군, 안성군, 고양군, 금포군, 영평군, 마전군, 교하군, 가평군, 용인군, 음죽군, 진위군, 양천군, 시흥군, 지평군, 적성군, 과천군, 연천군, 양지군, 양성군, 교동군 오익수
충청북도 충주 17군 충주군, 청주군 옥천군, 진천군 청풍군, 괴산군, 보은군, 단양군, 제천군, 회인군, 청안군, 영춘군, 영동군, 황간군, 청산군, 연풍군, 음성군 이건하
충청남도 공주 37군 공주군 홍주군 한산군, 서천군, 면천군, 서산군, 덕산군, 임천군, 홍산군, 은진군 태안군, 온양군, 대흥군, 평택군, 정산군, 청양군, 회덕군, 진잠군, 연산군, 노성군, 부여군, 석성군, 비인군, 남포군, 결성군, 보령군, 해미군, 당진군, 신창군, 예산군, 전의군, 연기군, 아산군, 직산군, 천안군, 문의군, 목천군 박규희
전라북도 전주 26군 전주군, 남원군 고부군, 김제군, 태인군 여산군, 금산군, 익산군, 임피군, 금구군, 함열군, 부안군, 무주군, 순창군, 임실군, 진안군 진산군, 만경군, 용안군, 고산군, 옥구군, 정읍군, 용담군, 운봉군, 장수군, 구례군 윤창섭
전라남도 광주 1목 32군 광주군, 나주군, 영암군, 영광군, 순천군(順天郡), 제주목 보성군, 흥양군, 장흥군, 함평군, 강진군, 해남군, 무장군, 담양군 능주군, 낙안군, 무안군, 남평군, 진도군, 흥덕군, 장성군 창평군, 광양군, 동복군, 화순군, 고창군, 옥과군, 곡성군, 완도군, 지도군, 돌산군 대정군, 정의군 윤웅렬
경상북도 대구 41군 상주군, 경주군 대구군, 성주군, 의성군, 영천군(永川郡), 안동군 예천군, 김산군, 선산군, 청도군 청송군, 인동군, 영해군, 순흥군, 칠곡군, 풍기군, 영덕군, 용궁군, 하양군, 영천군(榮川郡), 봉화군, 청하군, 진보군, 군위군, 의흥군, 신녕군, 연일군, 예안군, 개령군, 문경군, 지례군, 함창군, 영양군, 흥해군, 경산군, 자인군, 비안군, 현풍군, 고령군, 장기군 이성렬
경상남도 진주 1부 29군 동래부, 진주군 김해군, 밀양군 울산군, 의령군, 창녕군, 창원군, 거창군, 하동군, 합천군, 함안군, 함양군, 고성군(固城郡) 양산군, 언양군, 영산군, 기장군, 거제군, 초계군, 곤양군, 삼가군, 칠원군, 진해군, 안의군, 산청군, 단성군, 남해군, 사천군, 웅천군 이항의
황해도 해주 23군 황주군, 안악군 해주군, 평산군, 봉산군 연안군, 곡산군, 서흥군, 장연군, 재령군, 수안군, 배천군, 신천군, 금천군, 문화군 풍천군, 신계군, 장련군, 송화군, 은률군, 토산군, 옹진군, 강령군 민영철
평안남도 평양 23군 평양군 중화군, 룡강군 성천군, 함종군, 삼화군, 순천군(順川郡), 상원군, 영유군, 강서군, 안주군 자산군, 숙천군, 개천군, 덕천군, 녕원군, 은산군, 양덕군, 강동군, 맹산군, 삼등군, 증산군, 순안군 이헌영
평안북도 정주 → 녕변 21군 의주군, 강계군 정주군, 녕변군, 선천군 초산군, 창성군, 구성군, 룡천군, 철산군, 삭주군, 위원군, 벽동군, 가산군, 곽산군, 희천군, 운산군, 박천군, 태천군, 자성군, 후창군 이용익
강원도 춘천 26군 춘천군, 원주군, 강릉군, 회양군, 양양군, 철원군, 이천군(伊川郡), 삼척군, 영월군, 평해군, 통천군, 정선군, 고성군(高城郡), 간성군, 평창군, 금성군, 울진군, 흡곡군, 평강군, 금화군, 낭천군, 홍천군, 양구군, 인제군, 횡성군, 안협군 조병필
함경남도 함흥 1부 13군 덕원부 함흥군, 단천군, 영흥군 북청군, 안변군, 정평군 삼수군, 갑산군, 장진군, 리원군, 문천군, 고원군, 홍원군 이승우
함경북도 경성 1부 9군 경흥부 길주군 회령군, 종성군 경성군, 경원군, 온성군, 부령군, 명천군, 무산군 남정철
한성부 한성부 서 방 게 동 동서, 서서, 남서, 북서, 중서

또한 23부제 실시로 군이 된 기존 부 일부가 다시 부로 환원되었다.

건양 원년(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이 반포되었다. 반포일부터 시행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전국의 23개 부를 13개 도로 개정하는 것이다. 각도에는 관찰사 1인, 지주사 6인, 총순 2인을 두며 한성의 5서 구역에는 특별히 1부를 두는데 부청의 위치는 그대로 두었다. 한성부에는 판윤 1인, 소윤 1인, 지주사 5인을, 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덕원·경흥에는 부윤 1인을, 제주에는 목사 1인, 지주사 2인을 두었다. 13도에서 관할하는 339개 군은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정하였는데 군수는 그대로 두었다.
건양 2년(1897년) 1월 14일 칙령 제8호로 홍주·태안·서산 3개 군이 관할하던 안면도가 온전히 홍주군 소속이 되었다.
동년 3월 7일 칙령 제14호 〈완도군에 속한 비금도와 도초도 두 개 섬을 지도군의 관할에 이속하는데 관한 안건〉으로 두 섬이 지도군에 이속되었으며 칙령 제15호 〈평안북도 관찰부의 위치를 영변으로 개정하는 데 관한 안건〉으로 평안북도 관찰부가 영변군으로 변경되었다.
동년 칙령 제21호 〈전라남도 구역 내 전 좌수영을 여수군에 신설하는 일〉에 의해서 전라좌도수군절도영이 관할하던 옛 여수현 지역인 순천군 율촌면, 소라면, 삼일면, 여수면을 분리해 여수군(麗水郡, 3등군)으로 재설치하였다.
광무 원년(1897년) 칙령 제29호와 칙령 제30호 〈지방 제도 관제의 개정에 관한 건〉으로 제주목에서 제주군(5등군)이 분리되었으며, 삼화군과 무안군이 각각 삼화부와 무안부로 승격되었다.
광무 2년(1898년) 칙령 제12호 〈지방 제도 중 개정〉으로 강원도 평해군 울릉도에 도감을 두었다.
동년 칙령 제27호 〈함경북도 길주군 구역 내 전 성진진에 성진군을 신설하는 건〉과 칙령 제28호 〈성진군의 위치와 관할구역 획정 건〉으로 길주군 남단 동해안 지역을 성진군(城津郡, 4등군)으로 분리하였다.
광무 3년(1899년) 칙령 제16호 〈지방 제도 중 일부 개정에 관한 안건〉으로 옥구군, 창원군, 성진군이 각각 옥구부, 창원부, 성진부로 승격되었다.
광무 4년(1900년) 칙령 제9호 〈길성부 설치에 관한 안건〉에으로 성진부와 길주군을 길성부로 통합하였다.
동년 칙령 제18호 〈함경북도 성진부를 다시 설치하는 데 관한 안건〉으로 길성부를 성진부로 개칭하였다.
동년 칙령 제19호 〈경상남도 고성군 구역 내의 전 통제영 구역을 진남군으로 설치하는 데 관한 안건〉으로 경상남도 고성군 일부와 거제군 가좌도·한산도를 관할하는 진남군(4등군)을 설치하였다.
동년 칙령 제30호 〈평양군을 평양부로 개칭하고 군수를 부윤으로 개칭하는 일에 관한 안건〉으로 평양군을 평양부로 승격하였다.
동년 칙령 제41호 〈강원도의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 데 관한 안건〉으로 울도군(5등군)으로 승격하였다. 이 행정구역 개편을 기념하고 독도 수호를 위해 독도의 날을 년에 제정하였다.
광무 5년(1901년) 칙령 제11호 〈충청남도 관하 오천군 신설에 관한 안건〉으로 충청남도 보령군, 홍주군, 태안군, 결성군, 서산군, 비인군이 관할하던 서해안 도서 지역에 오천군(4등군)을 신설하였다.
동년 칙령 제19호 〈성진부를 폐지하고 길주군에 합부하는 건〉으로 길주군으로 격하되었다.
광무 6년(1902년) 칙령 제1호 〈길주부로 개정할 일에 관한 안건〉으로 길주군이 길주부로 승격하였다.
동년 칙령 제8호 〈흡곡·안변 양군 구역 개정 건〉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학포사가 강원도 흡곡군에 편입되어 학포면으로 개편되었다.
동년 칙령 제9호 〈낭천군을 화천군으로 개정할 일에 관한 안건〉으로 강원도 낭천군이 화천군으로 개칭되었다.
광무 7년(1903년) 칙령 제10호 〈부윤을 군수로 개정하는 건〉으로 인천부, 옥구부, 무안부, 동래부, 창원부, 평양부, 삼화부, 덕원부, 길주부, 경흥부를 각각 인천군(4등군), 옥구군, 무안군, 동래군(3등군), 창원군, 평양군, 삼화군, 덕원군(4등군), 길주군, 경흥군(4등군)으로 격하하였다.
광무 7년(1903년) 칙령 제15호 〈함경북도 성진군을 다시 설치하는 일에 관한 안건〉으로 성진군을 다시 설치하였다.

5.4.4. 통감부의 조선 행정 구역 대개편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탈취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몇 번의 행정 구역 개편을 실시하였다.

광무 10년(1906년) 칙령 제47호 〈감리와 목사를 폐지하는 건과 기사무를 인계에 관한 건〉, 칙령 제48호 〈부를 군으로 개칭하고 군을 부로 개칭하는 건과 부청급군청에 관한 건〉으로 다음과 같이 개편하였다.
제주목을 제주군에 편입하고, 광주부, 강화부, 개성부를 각각 광주군, 강화군, 개성군으로 격하하고 개항장 및 개시장인 인천군, 옥구군, 무안부, 동래군, 창원군, 각각 인천부, 옥구부, 무안부,
창원군 → 창원부
동래군 → 동래부
덕원군 → 덕원부
성진군 → 성진부
삼화군 → 삼화부
경흥군 → 경흥부
의주군 → 의주부
용천군 → 용천부
충청남도 문의군이 충청북도로, 전라북도 구례군 전라남도로, 전라남도 무장군·고창군·흥덕군이 전라북도로, 강원도 울도군 경상남도로 이관되었다.

동년 칙령 제49호 〈지방 구역 정리 건〉으로 각 군 영역에서 월경지 땅거스러미들을 실제 생활권과 군역을 고려해 정리하여 각 지방 정부에서 관리하기 쉽게 하였으며, 이 조치를 '월경지 정리'라고 칭한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큰 고을에서 비정상적인 행정구역 설정이 자주 보이는데, 초기에는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속현들을 주현군현에 통합하거나 주현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더 지나서 각종 산물(공물, 특산물)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이런 행정구역이 설정되었다. 그동안 조정도 이러한 비정상적 행정 구역을 여러 번 조정하고자 하였으나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오히려 행정구역이 개선된 셈이라고 하겠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그만 고을이던 음성군[2], 평창군[3]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을 얻었으나, 정리를 잘못해서 양산시 웅상지구 같이 실질 월경지를 또 만들어버린 경우도 있다. 지금 경기도 의왕시 지역처럼 땅거스러미 정리에서 빠진 지역도 있었다.

월경지

융희 2년(1908년) 칙령 제30호 〈관찰도 위치 개정에 관한 건〉으로 충청북도 관찰부가 충주에서 청주로, 평안북도 관찰부가 영변에서 의주로 이전하였다.
동년 칙령 제69호 〈군을 합치는 데 관한 안건〉으로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였다.
경기도 양근군 지평군 양평군으로,
경상남도 창원부, 진해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서면, 진전면인 삼진지역), 웅천군(현 진해구, 성산구 웅남1·2동 부산 강서구 가덕도동)이 창원부로, 함안군 + 칠원군 → 함안군
동년 칙령 제72호 〈전라남도의 군 폐합에 관한 안건〉에 의해서 화순군이 능주군에, 옥과군과 담양군 일부가 창평군에 편입되었고, 낙안군은 순천군과 보성군에 분할 편입되었다.
동년 칙령 제83호 〈평안남도 군의 폐합에 관한 안건〉에 의해서 행정구역의 변동이 있었다.
강동군 + 삼등군 → 강동군
순천군 + 자산군 + 은산군 → 순천군(順川郡)
함종군 + 증산군 + 순안군 진방면 → 증산군
함종군 오산면 → 강서군(오산면)
용강군 월곶면·당점면·삼존면
이는 일제가 독자적인 고을 2개 이상을 통합한 사례로 최초다.
융희 3년(1909년) 칙령 제2호 〈황해도 군을 합치는 데 관한 안건〉으로 1909년 황해도에서 여러 군현들이 통폐합되었다. 황해도는 이때가 1914년 부군면 통폐합보다 여파가 더 컸다.
옹진군 + 강령군 → 옹진군
송화군 + 풍천군 → 송화군
은률군 + 장련군 → 은률군
신천군 + 문화군 → 신천군
동년 칙령 제28호 〈경상남도 진남군을 용남군으로 고치는 데 관한 안건〉으로 진남군을 용남군으로 개칭하였다. 평안남도 삼화부 진남포와 혼동되기 때문이었다.
융희 4년(1910년) 칙령 제7호 〈강원도 흡곡군을 폐지하고 통천군에 합치는 데 관한 안건〉으로 흡곡군이 통천군에 합군되었다.
칙령 조정 대상 조정 결과
69호 경기 양근군(楊根) + 지평군(砥平) 양평군
경남 창원부(昌原) + 진해군(鎭海)[4] + 웅천군(熊川)[5] 창원부
경남 함안군(咸安) + 칠원군(漆原) 함안군
72호 전남 능주군(綾州) + 화순군(和順) 능주군[6]
전남 창평군(昌平) + 옥과군(玉果) 창평군[7]
전남 낙안군(樂安) 순천군, 보성군의 각 일부[8]
83호 평남 함종군(咸從) 강서군, 증산군, 용강군의 각 일부[9]
평남 순천군(順川) + 은산군(殷山) + 자산군(慈山) 순천군[10]
평남 강동군(江東) + 삼등군(三登) 강동군

칙령 조정 대상 조정 결과
2호 황해 옹진군(甕津) + 강령군(康翎) 옹진군[11]
황해 송화군(松禾) + 풍천군(豊川) 송화군[12]
황해 은율군(殷栗) + 장련군(長連)[13] 은율군
황해 신천군(信川) + 문화군(文化) 신천군[14]

5.5.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대개편 ( 부군면 통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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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 일제는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본격적으로 대규모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군면 통폐합이다. 현재 남한의 행정 구역은 이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부군면 통폐합 참조.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앞서 1911년 시흥군과 같은 일부 지역은 동리(洞里) 통폐합이 진행되었다.

상세한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당시 행정구역을 연도별로 전자지도화 한 것이 있다. 고려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주도한 연구로 다른 대학의 사회교육, 지리학 전공자들이 참여한 프로젝트다. PDF 파일을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북한은 일제가 전면적으로 바꿔놓은 행정구역을 완전히 철폐하고 다시 자기들이 세운 기준에 맞춰서 새로운 시군을 신설하였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북한 지역의 행정 구역을 이북 5도라 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당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정한 행정구역을 기준-당시 조선총독부가 설정한 행정구역에서 황해도 황주군 겸이포읍 · 봉산군 사리원읍을 송림시· 사리원시로 승격하고 평안북도 신천군 신도면을 신설해 변경했다.-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6. 대한민국 행정구역 개편사

6.1. 서울특별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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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부터 점점 확장된 구한말 당시 한성부 관할구역은 대략 현재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성동구, 동대문구, 성북구, 강북구, 서대문구 전역과 은평구( 진관동 제외), 마포구( 난지도 제외) 대부분, 광진구 일부, 영등포구 여의도동,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효자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다 위에 언급한 대로 1914년 대개편으로 한성부 성저십리 대부분인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인창면, 용산면, 서강면, 한지면, 두모면 대부분과 연희면, 은평면 전역이 고양군으로 넘어가 일제강점기 초기에 사대문 안 용산 정도가 서울(당시 경성부) 영역이었다. 그러나 1936년에 일제가 대경성 계획을 수행하여 고양군, 시흥군 각 일부를 편입하면서 동쪽으로 청량리, 서쪽으로 홍제천변, 남쪽으로 영등포 및 대방천(복개되어 현재 여의대방로가 됨)변, 북쪽으로 정릉천변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었고, 1943년에는 종로구, 중구, 성동구 동대문구, 서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가, 이듬해인 1944년에 마포구가 설치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6년에 독립 행정구역인 서울(특별자유)시를 설치하고 1949년 8월 15일에 서울특별시로 개칭하였다. 1949년에 고양군 3개 면(현재 은평구, 성북구 북부-장위동, 월곡동, 석관동, 정릉동, 미아동-, 강북구, 성동구, 광진구, 동대문구 장안동, 중랑구 면목동, 송파구 잠실)와 시흥군 동면 3개 리(구로구 구로동, 신대방동, 신도림동 및 영등포구 대림동)를 편입하는 한편 성북구가 설치되었다.

현재와 같은 서울시역이 거의 확정된 시기는 1963년이다. 이 때 김포군(현재의 강서구, 양천구), 부천군(현재의 구로구 개봉동, 오류동, 온수동 일대), 시흥군(현재의 금천구, 관악구, 서초구) 각 일부가 영등포구에, 광주군 일부(현재의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15], 강동구)가 성동구에, 양주군 일부(현재의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16])가 성북구, 동대문구로 편입되었다. 이 중 시흥군 신동면, 광주군 언주면 / 중대면에서 편입된 지역은 지금의 강남[17]으로 성장하였다.

이 확장은 서울 생활권으로 편입된 주변 경기도 소재 시가지들을 편입시키는 차원이 아닌, 그저 시골이던 곳을 앞으로 도시 팽창에 대비하여 선제적으로 편입시킨 것이었다. 압구정동의 경우 1963년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음에도 1970년대 말에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시작으로 본격 개발되기 이전에는 전형적인 농촌 지대였다. 비슷하게도 노원구의 경우 노원역에 올려진 개통 당시 짤에 나타난 것과 같이 서울로 편입된 지 20년이 넘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서울시는 지금의 고양시 일부, 광명시, 안양시, 과천시, 성남시 일부까지의 편입도 생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과천시, 광명시(당시 시흥군 서면 북부, 현 광명동·철산동·하안동), 고양시 신도 지역(당시 고양군 신도면, 현 삼송동·화전동 일대)는 아예 서울 도시 계획에 포함시키켰고(위에서 굵은 글씨 처리한 지역)[18], 그 중에서 광명시는 기존의 서울 시계 내 시가지와 연계된 시가지까지 조성했을 정도.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거대한 논란의 싹이 되고야 만다.

하지만 이후 10년도 안되어 서울의 인구가 800만을 돌파하면서 서울 과대화 문제가 심각해진다. 대한민국에서 서울은 수도 이상의 지위를 갖고 있는 도시이고 지나친 인구 집중으로 인한 부작용[19]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후에는 서울로의 추가 편입이 중단되어 위성도시를 본격 육성하기 시작하였고, 서울 내부의 발전[20]에 따른 분구 위주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서울 편입이 예정되었던 시흥군 서면(소하읍) 북부와 고양군 신도읍도 이런 이유(+위성도시 육성에 대한 전두환의 강한 의지)로 배제되어 각각 광명시 승격과 고양군 잔류로 마무리되었으며, 이 시기에 경기도로부터 편입된 지역은 지금은 은평구 진관동 지역 뿐이다.

1973년에 도봉구 성북구에서, 관악구 영등포구에서, 1975년에 강남구 성동구에서, 1977년에 강서구 영등포구에서, 1979년에 강남구에서 강동구가,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1980년에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1988년에 강서구에서 양천구가,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도봉구에서 노원구가, 동대문구에서 중랑구가,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구되었고, 1995년에 마지막으로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도봉구에서 강북구가,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구되고 더 이상 분구되지 않고 있다. 물론 자치구나 동 간 미세한 경계 조정은 틈틈이 일어나고 있지만. 최근까지의 서울시 경계가 획정된 것은 1995년 3월 1일로, 이때에 경계 미세 조정 차원에서 고양시 지축동 일부와 광명시 철산3동 일부가 서울시로 편입되었다. 이후에 2015년 12월 위례 신도시 쪽 서울시 경계 조정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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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경기도 변천

6.25 전쟁 이후 산업화와 함께 무시무시한 인구 집중이 일어나면서 서울의 외곽 지역인 경기도의 행정 구역도 엄청난 변화를 보였다.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시가 되고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으로 개칭되는 것을 시작으로 1963년 의정부시, 1973년 성남시, 안양시, 부천시가 설치되는 등 서울 근교의 시 승격 행진이 시작되었다. 경기도 기초 단체 31개 중 군은 연천군, 가평군, 양평군밖에 없으며, 가 무려 28개인 점에서 경기도의 도시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1980년 이후 경기도 시군의 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큰 변화는 시흥군 부천군에서 일어났고 광주군, 양주군도 큰 변화를 보였다. 특히 시흥군 변화를 정리하기 위한 별개의 문서가 나무위키 내에서 다른 시군을 제치고 최초로 필요할 정도로 완전히 산산조각났다. 지금의 시흥시를 비롯하여[23] 서울시 남부, 광명, 안양, 군포, 의왕, 안산, 과천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부터 시흥군이었으나, 지속적인 독립 과정에서 지금의 시흥시로 쪼그라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시흥군 참고.

부천군의 경우 옛 부평도호부의 중심지였던 인천 동북부권( 계양구, 부평구)과 역시 부평도호부에 속했던 인천 서구(검단 제외)와 서울 구로구 일부(안양천 이서지역), 인천도호부 지역이었던 인천 동남부권( 남동구, 연수구, 남구[24])과 소래(훗날의 시흥시 지역), 그리고 경기만 일대의 도서 지역( 인천 옹진군)까지 포함한 광활한 지역이었지만 대부분이 인천으로 흡수되고 소래면 지역은 현재의 시흥시가 되면서, 서울과 인천 사이에 낀 소사읍과 오정면만이 남아 부천이란 이름을 잇게 되었다. 부천시/역사 문서 참조.

광주군은 강남 지역, 성남시, 하남시 지역이 분리되고 지금의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양주군의 경우 1970년대에 군의 남동부 지역이 월경지로 있었다가 남양주군으로 분리되었다. 지금 서울 강북 지역의 1/3 이상은 예전에는 고양군에 속해 있었다.[25]

서울특별시 서북부에 붙어 있는 고양시 1992년에 시로 승격하였다. 1949년에 승격한 수원시 서울특별시의 주요 위성도시들( 성남시, 부천시, 안양시 등)의 시 승격 연도와 비교해 보면 인구 100만 명에 근접하는 고양시의 현재 규모에 비해 시 승격이 상당히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양군은 각 읍면 지역(원당, 능곡, 삼송, 벽제, 일산 등)이 따로따로 시가지를 형성하는 바람에(...) 이들을 죄다 분리시켜 시로 승격시킬지, 2개 ~ 3개씩 묶어 시로 승격시킬지, 아예 통째로 승격시킬지를 계속 검토해왔기 때문에 시 승격이 늦게 이루어진 것. 자세한 내용은 고양시/역사 문서 참고.

한편 경기도의 경우 크고 아름다운 인구 포화와 행정구역 격절로 인하여 경기도 분도론이 제기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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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연속된 승격과 1995년 대규모 시군 통합( 기초자치단체 통합)

대한민국의 시는 대한제국 시절에 대도시 또는 개항장으로 지정된 에 기원을 둔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할 때에 현재 남한 지역에 내각 직할 한성부( 경기도 경성부), 경기도 인천부, 전라북도 옥구부(군산부), 전라남도 무안부(목포부), 경상북도 대구부, 경상남도 동래부( 부산부), 경상남도 창원부(마산부) 7개, 북한지역에 평안남도 평양부, 평안남도 삼화부(진남포부), 평안북도 의주부, 함경남도 덕원부(원산부), 함경북도 부령부(청진부) 5개로 총 12개가 지정되어 있었다. (괄호 안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인 10월 1일에 일제가 개칭한 명칭.)

이후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이들 지역은 부역(府域)을 축소하고, 부의 농촌 지역은 별도의 군으로 분리시키거나(군산부 외곽을 옥구군으로, 목포부 외곽을 무안군으로, 대구부 외곽을 달성군으로, 부산부 외곽을 동래군으로, 마산부 외곽을 창원군으로 분리), 인접 군과 통합시키는 등의( 경성부 외곽을 고양군에, 인천부 외곽을 부평군과 합쳐 부천군으로)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도농 분리제다. 도농 분리제는 일본인 거주 지역과 조선인 거주 지역을 구분하여 차별대우하고, 군 전체가 승격하는 것이 아닌 개별 읍면 단위만 승격하는 일본식 행정구역 제도( 시정촌제)와 유사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1공화국 제2공화국에서는 이것을 계승하여 지방자치법의 자치단체를 현재와 같은 시군이 아닌 시읍면제로 만들었다. 이 시와 동급이었던 것이다. 또한 은 형식상으로만 존재 하였으며 군수 직선제로 선출되는 시읍면장과는 달리 도지사가 임명하였다.[26] 이것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공포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27]으로 인해 지방자치는 정지가 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임명제로 바뀌면서 읍면장의 권한이 군수로 위임이 되고 군수가 실질적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나마 지방자치법에 기재되어 있던 도와 시읍면의 이중 체계는 1988년 지방자치제가 다시 부활하면서 도와 시군으로 조정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이후 해방 직전까지 남한지역에 1935년 충청남도 대전부, 전라북도 전주부, 전라남도 광주부가, 1939년 경상남도 진주부가 추가되고, 북한지역에 1930년 경기도 개성부(해방 이후 6.25 전쟁까지 남한 관할)과 함경남도 함흥부가, 1936년 함경북도 나진부가, 1938년 황해도 해주부가, 1941년 함경북도 성진부가, 1944년 함경남도 흥남부가 추가되어 해방 이전까지 총 22개 (남측 11개, 북측 11개) 부가 있었다.

광복 후에 1945년 황해도 송림시 사리원시, 1946년 청주, 춘천, 1947년 이리( 익산), 1949년에 수원, 여수, 순천, 포항, 김천이 부로 승격되었으며, 곧이어 부의 명칭이 로 바뀌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1949년 이후 시로 승격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연도 지역
1955년 제주, 강릉, 경주, 충무(현 통영), 원주, 진해(현 창원시 진해구)
1956년 충주, 삼천포(현 사천)
1962년 울산
1963년 의정부, 천안, 안동, 속초
1973년 안양, 성남, 부천
1978년 구미
1980년 동해, 창원, 제천, 영주
1981년 광명, 송탄(현 평택시 송탄출장소지역), 동두천, 태백, 정주(현 정읍시), 남원, 금성(현 나주시), 영천, 김해, 서귀포
1986년 과천, 구리, 안산, 평택(현 평택시청소재지역), 삼척, 공주, 대천(현 보령시)
온양(현 아산시), 여천(현 여수시 서부), 상주, 점촌(현 문경시), 송정(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일부)
1989년 오산, 의왕, 군포, 시흥, 미금(현 남양주시), 하남, 서산, 김제, 동광양(현 광양시), 경산, 밀양, 장승포(현 거제시)
1992년 고양[28][29]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찾자면, 1949년 순천과 여수의 부 승격 이후로, 1981년 나주에 금성시가 설치되기 전까지 32년 동안 호남에서 시 승격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989년 1월 1일 이후로 도농분리를 한 이력은 없다.[30] 그리고 지방자치제가 전면 시행되기 전인 1992년부터 군이 통째로 시로 승격하는 최초의 사례가 등장하게 되었다. 다만 아직 이때는 시(市)에 읍·면을 둘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었기에 승격하는 군의 모든 읍·면은 행정동으로, 법정리는 법정동으로 일괄 전환되었다.

1994년까지 지방자치법 조항에 '군에 속하는 인구 5만 이상인 지역
'''[31]이 인구 5만 이상만 되면 시로 승격될 수 있었다. 꼭 읍이 아니어도 되고 도시화된 지역의 인구가 5만 이상이면 되지만[32], 대부분 읍을 거쳐 승격되었다. 산업화 시기의 급격한 도시화와 맞물려 수도권을 중심으로 소읍들에 인구가 몰리기 시작했는데, 바로바로 시로 승격시키는 바람에 중심지를 잃어버린 주변 농어촌 지역에는 행정 편의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원래는 윗 문단에 적혀있는 대로 시읍면제하에서는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시군제로 재편이 되며 형식상으로만 있던 군이 실질 행정 구역이 되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다.

1995년 지방자치제를 본격 실시하기에 앞서 김영삼 정부는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도농복합시 제도를 출범시키며 역사적 배경과 생활권이 같은 시와 군을 통합하였다. 구미시 - 선산군 등이 있으며 물론 이때 통합되지 못한 지역들도 많다. 자세한 것은 하단 참조.] 광복 이후에 한 최대규모 행정구역 개편이다. 도농통합 정책은 역사, 생활권 문제 때문에 통합할 명분이 워낙 커서 대부분 지역이 1995년에 도농통합이 이루어졌다. 학계에서도 소규모 지역 단위의 풀뿌리 지방자치를 중시하거나 지역 불균형을 심각히 바라보는 일부 학자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1995년의 도농통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이로써 대한민국 행정구역 승격 제도는 현이 군으로, 군이 도호부로 승격했던 조선 고유한 군현 승격 제도와 비슷하게, 군을 시로 승격하는 형태가 되었다.

다만 이때 통합되지 못한 시와 군 중 일부는 나중에 통합되었다. 1998년 삼여 통합이 대표적인 예다. 2000년대 들어 통합된 사례는 2010년 마창진 통합 2014년 청주-청원 통합이 있다. 1995년 당시에 도농통합이 고려되었으나 통합되지 않고 아직도 분리된 지역으로 속초시 - 양양군, 목포시 - 무안군 - 신안군, 전주시 - 완주군, 구리시 - 남양주시[33], 동두천시 - 양주군(현 양주시)이 있다. 서울 근교의 구 시흥군 지역( 광명시,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 과천시, 안산시, 시흥시)[34]과 구 수원군 지역( 수원시, 화성시[35], 오산시), 구 광주군 지역(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36]), 구 양주군 지역의 의정부시는 수도권 도시화 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도농 통합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인천광역시 인근의 부천시(구 인천부와 구 부천군의 통합)도 비슷한 이유로 도농 통합 대상에서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하게, 서울특별시 고양시의 통합이 고려조차 되지 않았는데, 이는 훗날에 서울시로 편입된 고양군 지역이 대부분 옛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이라는 역사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현재의 광명시 지역을 서울 편입에서 배제했을 만큼( 1981년 광명시 승격) 당국 입장에서도 서울시의 추가 확장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규모 도농 통합을 추진했던 1990년대 초중반은 정관계에서 서울 분할 문제에 매달렸던 시기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기상청 분석 영상을 보면 1995년 개편 이전의 행정구역 경계가 그대로 남아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1994년 12월 26일 화성군 반월면 분리 이전이다. 1993년 12월 4일에 있었던 논산군- 공주군 경계 조정 이후인 것을 볼때 그 사이 시점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경계가 궁금한 위키 이용자들은 참고하자. 기상청 분석영상 홈페이지

또한 1995년 개편과 동시에 일부 광역시 영역이 추가 확장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옹진군 전역과 김포군(현 김포시) 검단면을 편입했고,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부산광역시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 기장군이던 양산군(현 양산시) 일부를 편입하였다. 당시 직할시 추가 확장안에 대한 기사 원래는 부산, 대구의 대폭적인[37] 추가 확장을 고려했으나 논란이 일자 역사적 도농 통합 차원에서 부산은 기장군(당시 양산군 일부)만 대구는 달성군만 편입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인천의 경우는 역사적 도농 통합 차원[38]이 아닌 그저 시세(市勢) 키우기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패스. 울산은 당시 경상남도 산하 자치시(그래도 울산군을 흡수하는 식으로 도농통합이 이루어짐)였고, 대전과 광주의 경우 이미 대덕군, 광산군을 통째로 편입한 역사가 있어서 당시에 이들 광역시의 추가확장이 고려되지 않았다.

1995년 행정 구역 개편 백서(국가기록원 원문 - 온라인 열람 가능)

6.4. 도와 시, 군의 신설 및 경계 조정

1946년 제주도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도(道)로 승격되었다. 이후 1953년 경상남도 거제도 통영군에서 분리되어 거제군으로 독립했다. 1969년 신안군이 신설되어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관할하던 도서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1980년 의정부시의 존재로 양주군과 단절된 경기도 양주군 남부 지역이 남양주군으로 독립되었고, 같은 해 삼척군의 북평읍 지역과 명주군의 묵호읍 지역이 동해시로 독립했다. 1981년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황지읍이 태백시로 독립했다. 1989년 충청남도 서산군에서 관할하던 태안 반도와 안면도 일대가 분리되어 태안군으로 독립했다. 1995년 경상남도 양산군 해안 지역이 기장군으로 독립되었다. 2003년 충청남도 계룡시[39] 논산시에서 분리되었고, 동년에 충청북도 증평군 괴산군에서 독립했다.

특별시, 직할시( 1995년 이후 광역시) 확장 및 승격을 제외한 가장 큰 도계(道界) 조정은 1962년 12월 11일에 이루어졌는데, 이때에 강원도 울진군 경상북도로, 전라북도 금산군 충청남도로, 강원도 철원군 신서면 경기도 연천군으로,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이 충청남도 논산군으로 편입된 뒤 구자곡면과 합쳐 연무읍이 되었고, 전라남도 영광군 위도면이 전라북도 부안군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위도면은 지도군이 설치된지 78년만에 환원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제 전면 시행을 앞두고 경기도 강화군 옹진군 인천광역시에, 경상북도 달성군 대구광역시에,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 지역이 기장군으로 독립하여 부산광역시에 각각 편입되었다. 사실 대개편 당시에 내무부 차원에서 이들 광역시의 대폭 확장을 고려했으나 편입 고려 대상으로 거론된 지역들 중 일부가(인천권의 경우 시흥시, 김포시 중 구 검단면을 제외한 지역, 대구권의 경우 경산시, 청도군 일부, 칠곡군 일부 등, 부산권의 경우 김해시 대동면과 양산시 웅상출장소, 창원시 진해구 웅천2동) 편입되지 않았다.

경기권의 행정 구역 경계 조정 무산 사유가 공개되었다.

6.5. 직할시 광역시

직할시, 그리고 직할시를 계승한 광역시는 도와 같은 위상을 갖는 도시다. 1963년 부산, 1981년 대구 인천, 1986년의 광주, 1989년의 대전의 순으로 직할시가 되었으며, 1995년에 직할시가 광역시로 바뀌면서 산하에 을 두게 되는 등 행정 구역 체계도 크게 변화하였다. 이후에는 1997년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된 이후 아직 더 이상의 광역시는 설치되지 않고 있다.

광역시 설치에 정치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다. 애초에 광역시 승격에 대한 명시적 기준 자체가 없으며, 흔히들 광역시 승격 조건이라고 알고 있는 인구 100만 이상은 법적 근거가 없다. 초창기 직할시였던 부산과 대구, 인천은 직할시로 승격해 원 소속 도에서 분리될 당시 이미 인구 100만을 한참 넘긴 지 오래였고 광주 대전, 울산이 직할시와 광역시로 승격된 이유에는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에 대한 정치적인 배려가 포함되어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현재 수원시 창원시처럼 도시 규모를 따지면 이미 광역시가 되고도 남을 만한 곳은 존재하나, 여러가지 문제로 사실상 승격 가능성이 막힌 상태. 그 외에도 지방 중 100만 이하인 청주시[40], 전주시( 완주군과 통합한 뒤) 등도 광역시 논쟁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행정구역 개편/ 참조

6.6. 행정구역 명칭 및 청사 소재지 변경

1986년 전라남도 금성시가 나주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89년 강원도 원성군이 원주군, 경상북도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1년 강원도 춘성군이 춘천군, 충청남도 천원군이 천안군, 경상남도 의창군이 창원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95년 시군 통합을 골자로 한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도농복합시의 경우, 명칭이 다른 시와 군이 통합되면서 기존의 시명을 승계하거나 기존의 군명을 따서 시명을 변경했다. 대체로 이전에 시, 군 분리 과정에서 시가 기존의 명칭을 승계하고 군의 명칭이 바뀐 경우(예: 강릉시, 순천시, 진주시, 충주시 등)나 시의 인지도가 높거나 시로 승격된 역사가 길 경우(예: 구미시, 군산시, 포항시 등)는 시의 명칭이 유지되었고, 시, 군 분리 과정에서 시가 다른 명칭으로 분리되었거나(예: 장승포시, 온양시, 정주시 등), 시로 승격된 역사가 짧거나 시의 인지도가 군보다 높지 않을 경우(예: 동광양시, 점촌시)나 혹은 시 측에서 스스로 기존 명칭을 포기하거나(예: 삼천포시, 이리시) 하는 경우에는 군명으로 통합시의 시명을 변경했다.
1967년 서울에 소재했던 경기도청 수원으로 이전하면서 수원이 경기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그리고 1983년에는 경상남도청 부산광역시에서 창원으로 이전했고, 2005년에는 전라남도청 광주광역시에서 무안 남악신도시로 이전했으며, 2013년에는 충청남도청 대전광역시에서 홍성 내포신도시로 이전했다. 그리고 대구광역시에 있는 경상북도청 2015년 안동 / 예천으로 이전했다.

1954년 함안군청이 함안면에서 가야면으로 이전했고, 1979년 익산군청 이리시에서 함열면으로 이전했으며, 1985년 승주군청 순천시에서 쌍암면(현 승주읍)으로 이전한 바 있다. 최근에는 신안군청 목포시에서 압해면으로, 완주군청 전주시에서 용진면으로 옮긴 바 있다. 울주군청 울산광역시 남구에서 청량면으로 이전되었다.[43]

6.7.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과 세종특별자치시 설치

행정수도안이 본격적으로 실행된건 후술되어있듯 참여정부 때였으나, 임시행정수도안은 1970년대 후반에도 논의된 적이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 공주군 장기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일대에 행정수도(이른바 '장기지구' 수도이전 백지계획)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당시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부지는 현재의 공주시 신관동·월송동, 우성면·의당면 각 일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서부, 연기면· 금남면 각 일부 등에 해당됐다. 즉, 당시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지역은 오늘날 세종특별자치시(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서쪽 내지는 중심부에 해당된다.[44][45] 당시 말단 실무자로 참여했던 김진애 의원의 포스팅. 박정희의 수도이전 계획과 현 행정도시의 입지 비교

그렇게 안이 확정되면서 용암리, 용현리 일대에 인공 호수[46] 대통령 관저를 조성하고, 그 남쪽으로부터 장군산에 이르는 지역(현 장군면 소재지 일대)에 삼부( 정부종합청사, 국회, 대법원)를 비롯한 수도기능을 배치하며 이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상업·업무지역 및 주거지를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주한미군 철수문제로 인한 안보위기와 경제위기에 더해 급기야 구상자인 박정희 10.26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에서 이 안은 결국 백지화되고 행정수도 계획은 폐기되었다. 다만 이 계획은 훗날 둔산신도시 개발에 일부 간접적인 영향은 미쳤다.

이후 2002년 9월 30일,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한계에 부딪힌 수도권 집중 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 청와대와 중앙부처부터 옮겨가겠다"라면서 행정수도 이전을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기사(연합뉴스)

2002년 12월 19일에 대선에서 승리하며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21일 정부를 제출자로 하여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안'을 발의하게 된다. 의안(국회 의안정보시스템)

2003년 12월 29일,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은 제16대 국회 제244회 임시회에서 재적 194인 중 찬성 167인, 반대 13인, 기권 14인으로 가결되었다. 같은 해 4월 17일에 해당 법률이 시행되었다. 법률(국가법령정보센터)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최상철 외 221인(대리인: 이석연 등)이 청구한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47]에 대해 단순위헌 결정을 선고했다. 결정례(국가법령정보센터) 여기서 ' 관습헌법'이라는 전대미문의 논리가 등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헌법재판소/주요 헌재결정례 요약 문서 참조 바람. 이로써 이 법률의 효력이 상실되었으며, 이후 '신행정수도후속대책을위한연기ㆍ공주지역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위한특별법'으로 대체되면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서 계승·추진되게 되었다. 의안(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법률(국가법령정보센터)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변경된 이후의 추진내용에 대해서는 아래의 문서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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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20년 7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세종특별자치시로의 행정수도 이전을 재차 추진하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 관련 내용은 아래의 문서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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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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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여러 번 개편했으나 기본적으로 일제 시대에 획정된 행정구역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남한과 달리, 북한은 기존 행정 구역 체계에 대한 상당한 마개조 재편이 이루어졌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량강도 자강도 신설, 황해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분도, 함경남도 원산시, 문천군, 안변군 강원도 편입, 읍을 면으로, 동을 리로 각각 개칭, 시/도 - 시/군/구 - (읍/)면 - 리(/동) 4단계로 구분되던 행정 체계에서 면 단계를 생략하여 시/도 - 시/군/구역/지구(/구) - 읍/ 로동자구/동/리 3단계[48]로 개편한 것 등이 있다. 그 밖에 해방 전에 없었던 여러 군이 신설되었는데, 특히 충청남도에 육박하는 드넓은 함경북도 무산군 삼지연군(1974), 대홍단군, 백암군, 연사군이 설치되면서 그 크기가 대폭 줄어들었고, 무산군 다음으로 드넓은 평안북도 강계군 역시 만포군(1949, 1952), 시중군, 장강군(1949, 1952), 성간군, 룡림군군이 설치되면서 마찬가지로 줄어들었다.

혹시 남북 협상으로 남북통일될 때 선거구에 밀리지 않으려고 도의 개수를 늘렸다는 영 좋지 않은 의도가 깔려 있다는 말이 있다. 다만 이것은 신빙성이 부족한 루머라는 의견이 많다. 과거 직할시로 지정되었던 청진, 함흥, 개성 등이 일반시로 격하된 사례가 있는데, 선거구가 문제라면 도급 행정 구역인 직할시는 왜 줄였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보다 주민 통제 강화에 좀 더 초점을 맞췄을 가능성이 높다. 각 행정구역이 좁을수록 각 지역당과 인민위원회에서 통제하기 쉬우니까. 마찬가지로 면을 폐지하고 자잘한 소재읍과 리에 행정권을 부여한 것도 명백히 주민 통제 강화를 위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은 북한내 정세를 따라 자주 바뀌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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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1개 시/군의 영역은 통합 전 2~3개 군의 영역과 같았다. 가령 홍성군은 원래 홍주군과 결성군 지역이었다. 또한 이러한 통합 과정에서 통합 군/면의 명칭을 짓는 데 있어 한 글자씩 따서 짓거나( 홍성=주군+결군) 아예 옛이름을 붙였다. [2] 1906년에 금왕, 대소, 감곡 등 차령 산맥 이서의 충주군 땅을 받았고, 1914년에 충주군에서 소이면을 또 받았다. 그 전까지 음성읍과 원남면에 해당하는 지역이 음성의 전부였다. [3] 1906년에 대화, 봉평, 진부 등 대관령 이서의 강릉군 땅을 받았으며, 같은 시기에 동면을 정선군으로 넘겨서 정선군 신동면이 되었다. 도암면은 1906년에 정선에 편입된 뒤 1931년에 평창으로 편입되었다. 즉 현 평창군 중에서 1906년 이전에도 평창이었던 곳은 평창읍, 미탄면밖에 없다. [4] 진해구가 아니라 마산합포구의 3진(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5] 여기가 현재의 진해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6] 1914년 능주군, 동복군이 화순군으로 통합. [7] 1914년 다시 갈라져서 옥과군이었던 지역은 곡성군에, 원래 창평군이었던 지역은 담양군에 편입. [8] 여기서 순천으로 편입된 지역은 현 낙안면·외서면, 보성으로 편입된 지역은 현재의 벌교읍이다. [9] 지형상 피자 자르듯 3개로 나눠서 편입시키기 적당하지도 않고, 북한 치하에서 옛 함종군 대부분이 증산군으로 편성된 것으로 보아, 위의 낙안군이 딱 절반으로 갈려나간 것과 달리 함종군은 대부분이 증산에 편입되고 일부 리 정도만 강서, 용강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증산군 전체가 강서군과 통합되었다가, 북한 치하에서 증산군이 재분리되었다. 광복 기준으로 옛 함종군의 중심지는 강서군에 있으며, 북한 치하에서는 증산군에 있다. [10] 북한 치하에서 은산군이 재분리되었으며, 자산군의 일부가 평성시가 되었다. [11] 북한 치하에서 옹진군 강령군으로 재분리되었다. [12] 북한 치하에서 송화군 과일군으로 재분리되었다. [13] 장산곶이 있는 장'연'군(長'淵')과는 다른 곳이다. [14] 북한 치하에서 신천군 삼천군으로 재분리되었다. 문화군이 온전하게 부활한 건 아니나, 어쨌든 옛 문화군의 중심지를 포함해 상당 부분이 삼천군으로 들어갔다. [15] 잠실 제외 [16] 면목동 제외 [17] 단, 과거 잠실 섬이었던 잠실역 일대는 양주군 고양주면(일제 시대 고양군 뚝도면)에서 온 것. [18] 1963년 1월 서울 대확장 직후인 9월에 도시 계획에 포함시킨 것. 만일 서울시 행정 구역 대확장이 늦춰졌다면 이들 지역도 대확장 때 아예 서울시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 [19]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지금이야 크게 상관없는 일이겠으나, 대한민국이 전형적인 개도국이었던 그 당시에는 상수도 보급이 지지부진했고 불량 주택 및 분뇨 / 하수 처리 문제가 도시 계획에 있어서 큰 골칫거리였다. 실제로 잠정적 서울 편입 예정지였던 시흥군 광명 출장소는 상하수도, 교통 여건이 열약했으며 서울 특별시 내 주거 지역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국토 개발 정책이 균형 발전이 아니라 성장 집중 발전이었지만 서울 인구 분산 정책을 펼친 데는 이런 이유가 컸다. (안보적인 이유도 일부 있었지만.) [20] 19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노원구 상계동 일대, 강남의 상당 지역이 서울로 편입된 후에도 아직 미개발 상태였다. 다시 말하면 서울 특별시에 소속된 지역 중 미개발지가 많은 상황에서 개발 용지 확보를 위해 굳이 서울시 행정 구역을 확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서울 시계 바로 옆에 있는 시흥군 서면 철산리, 광명리는 구로 공단 때문에 그린벨트로 묶인 적 없이 1970년대부터 주거 지구로 개발되었고 이는 광명시 서울 편입 논란의 불씨가 되고 만다. [21] 시흥군 소하읍 광명리ㆍ철산리의 구로구 편입 대신에 [22] 1995년 남양주군과 병합하여 남양주시로 개칭. [23]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에는 남부(정왕, 연성, 목감 등)만 해당되고 북부(신천, 은행, 대야 등)는 부천군으로 편제되었다가, 1973년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북부가 시흥군으로 넘어왔다. [24] 남구 관교동과 문학동은 옛 인천의 중심지였다. [25] 그러나 원래부터 고양군이었던 곳은 거의 없었다. 은평구 진관동 1906년 양주군에서 편입했고, 대부분은 성저십리에서 편입한 곳이었다.( 광진구 일대는 양주군) [26] 당시에는 정말로 일본과 유사하게 지방선거도 시읍면장과 서울시장· 도지사, 시읍면의회, 도의회선거를 따로 치뤘다. [27] 명목상으로는 통일이 될때 까지 지방자치를 무기한으로 연기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군사정권 하에서의 행정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28] 위 사례들과 달리 처음으로 군 전체가 시로 승격된 것으로 시 승격 당시에는 지방자치법에 '도농복합시'에 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고양군의 경우 모든 읍·면이 일률적으로 폐지되고 동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고양시 초기에는 갑자기 읍·면이 사라지고 시(市)-동(洞)체제가 되면서 대혼선이 있었다. 읍·면에서는 처리할 수 있지만 동에서는 처리하지 못하고 시에서만 처리할 수 있는 업무들이 생겼고 읍·면에서 처리하던 것을 시청까지 가서야 처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고양은 아직 일산신도시도 100% 완성된 상황은 아니었고 일산신도시 외의 고양지역은 아직까지 농촌 지역인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그 타격이 컸다. 하지만 고양시 승격 3년 후 지방자치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지방자치법에 '도농복합 형태의 시'에 대한 내용이 추가되면서 이후에 승격되는 도시들에는 시(市)내에 읍·면과 동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9] 고양시 승격 이후에 시로 승격되는 도시들은 계룡시를 제외하고 전부 고양시처럼 군 전체가 하나의 시로 승격하거나 생활권이 겹치는 주변 군과 통합하여 승격하게 된다. [30] 대신에 도도분리와 농농분리가 있었는데 1953년 거제군 통영군에서 분리, 1969년에 신안군이 무안군에서 분리, 1980년에 남양주군과 창원시가 각각 양주군, 마산시에서 분리, 1989년에는 태안군이 서산군에서 분리되고 1995년에는 기장군이 양산군에서 분리 2003년에는 증평군 계룡시가 각각 괴산군, 논산시에서 분리됐다. [31] 절대 군이 시로 승격하는 게 아니다! 그 당시에는 특정 군의 읍이 시 승격 조건을 만족하면 그 읍만 분리 독립해서 시로 승격하고, 잔여 지역만 관할하는 군을 남겼다. [32] 읍을 거치지 않고 면에서 바로 시로 승격된 곳으로는 경기도 안산시( 시흥군 군자·수암면, 화성군 반월면)와 과천시(시흥군 과천면), 전라남도 동광양시( 광양군 골약·태금·옥곡면) 등이 있다. 이외에도 성남시, 화성시, 계룡시가 있는데 화성시를 제외한 도시의 전신은 소속 도의 직할 출장소였다. 그리고 계룡시의 전신인 논산군 두마면은 논산시가 된 1996년부터 동이였다. 이후 4개동으로 분동. [33] 남양주시의 경우는 원래 미금시 - 남양주군으로 나뉘어 있다가, 1995년 남양주시로 통합되었다. [34] 해체 이전의 구 시흥군의 영역대로 재통합하자니 생활권이 다르다는 문제가 있다. 광명시는 서울 영등포권,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과천시까지)는 안양권, 안산시 시흥시 남부는 안산권에 생활권을 두고 있다. 삼국시대의 군소 현들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인접 군현에 통폐합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의 시흥군 지역인 시흥군(곡양현), 과천군(율진군), 안산군만큼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까지 각 군역을 삼국시대 이후로 괜히 계속 유지해온 것이 아니다. 다만 조선 초기에 금천과 과천, 금천과 양천이 잠시 통합되었다가 환원된 적이 있긴 하다. [35] 1995년 당시에는 화성군 [36] 1995년 당시에는 광주군 [37] 부산은 양산 웅상까지, 대구는 경산까지 편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38] 역사적 도농 통합 차원에서 인천의 확장이 이루어졌다면, 강화군과 김포 검단은 인천 편입에서 배제되었을 것이고 대신에 부천시 일대와 시흥시 북부의 인천 편입이 추진 되었을 것이다. [39] 지방자치법 제7조 ②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지역은 도농(都農) 복합 형태의 시로 할 수 있다. 4. 국가의 정책으로 인하여 도시가 형성되고, 제115조에 따라 도의 출장소가 설치된 지역으로서 그 지역의 인구가 3만 이상이고, 인구 15만 이상의 도농 복합 형태의 시의 일부인 지역 - 이 조문은 충남 논산군 중 군사 지역( 충청남도청 계룡출장소 소재지)을 시로 승격시켜주기 위해 김종필과 연합했던 김대중 정부가 만든 사실상 계룡시 특화 조문이다. [40] 100만엔 못 미치지만, 청원 통합으로 창원과 광역시를 제외하면 인구가 가장 많다. 게다가 면적도 창원, 세종, 서울, 대전 보다도 넓다. [41] 1995년에는 아직 광역시로 승격되기 전이었다. 울주군은 울산시와 통합되면서 울주구로 개편되었다가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다시 울주군으로 환원되었다. [42] 구리시 미금시가 순차적으로 남양주군에서 분리, 후에 미금시와 남양주군만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있다. [43] 이 때 옮겨진 신안군 압해면, 완주군 용진면, 울주군 청량면은 이후, 읍으로 승격되었다. [44] 장기지구는 원래 초기 검토 대상에는 없었으며, ' 공주지구'와 ' 대평지구'라는 2개의 지구의 각 일부였다. 이 중 대평지구는 공교롭게도 오늘날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정작 당시 선정위원들의 최종평가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가, 그 옆의 공주지구(현재의 공주시 시가지에 더 가까운 부지로, 역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음)와 절충해 만든 장기지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되어 최종 확정됐다. [45] 현 행정중심복합도시 지역 대부분은 연기군 남면이지만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 시절에는 공주군 장기면이었다. 그 지역이 행정중심복합도시 부지로 포함되면서 장기지구가 사실상 부활한 셈이다. [46] 이는 세종호수공원으로 계승되었다. [47] 기사(오마이뉴스#1) 기사(오마이뉴스#2) [48] 읍 안에 리가 없다. 읍은 중심지 리일뿐 리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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