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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1:32:03

파올로 로시

파올로 로시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세리에 A 로고.svg
파일:실버볼.png
1978 FIFA 월드컵 실버볼
파일:골든볼.png
1982 FIFA 월드컵 골든볼
파일:골든슈.png
1982 FIFA 월드컵 골든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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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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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파일:파올로 로시.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파올로 로시
Paolo Rossi
출생 1956년 9월 23일
이탈리아 프라토
사망 2020년 12월 9일 (향년 64세)
이탈리아 시에나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키 178cm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선수 유벤투스 FC (1973~1975)
코모 1907 (1975~1976)
LR 비첸차 (1976~1979)
AC 페루자 (1979~1980)
LR 비첸차 (1980~1981)
유벤투스 FC (1981~1985)
AC 밀란 (1985~1986)
엘라스 베로나 FC (1986~1987)
국가대표 48경기 20골 ( 이탈리아 / 1977~1986)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사망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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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환호하고 있는 로시.jpg
FIFA - 파올로 로시 영상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현역 시절 유벤투스에서 세리에 A 2회와 유러피언컵 등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1982 스페인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골든볼과 골든슈, 그리고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 특히 1982년에 월드컵 개인상들이 제정된 이후, 월드컵 우승, 골든볼, 골든슈(골든부트)를 동시에 석권한 선수는 현재까지도 파올로 로시와 마리오 켐페스가 유이하다.[1][2]

2. 선수 경력

2.1. 클럽

게르트 뮐러는 타고난 골잡이라 불러 마땅할 선수로,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먼저 포착할 뿐 아니라 어떻게든 볼을 골문 안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본능적인 솜씨를 지닌 사나이였는데, 이 뮐러의 시대가 저물어갈 때쯤, 이탈리아 축구에도 그에 비견될 만한 천부적인 골잡이가 출현했으니 그가 바로 파올로 로시다.

유벤투스 유스에 있다가 1973년 코파 이탈리아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으나 커리어 초기에는 대부분 벤치 신세였다. 1975년 유벤투스는 그를 코모 1907로 임대 보냈고 1976년 유벤투스를 떠나 세리에 B 클럽 비첸차에 둥지를 틀게 된다. 이 때 로시는 윙어에서 스트라이커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파일:Paolo_Rossi_Vicenza.jpg
비첸차 시절의 로시

1976-77 시즌 로시는 21골을 터뜨려 비첸자의 승격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지만, 이는 그 다음 시즌 그가 세리에 A에서 24골을 터뜨려 비첸차를 2위까지 끌어올린 놀라움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었다. 로시는 세리에 B와 세리에 A에서 모두 득점왕에 오른 최초의 선수가 되었고, 이는 훗날 유벤투스의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달성하기까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1979년 비첸차가 강등당하자 로시는 페루자 임대를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시의 축구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이 터졌다. 1980년 AC 밀란, SS 라치오, 볼로냐 FC, US 팔레르모, AC 페루자 칼초 등이 연루된 축구 도박 스캔들, '토토네로 스캔들'이 이탈리아를 뒤흔들었고 이 사건에서 로시는 뇌물 수수 혐의로 3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에 처해진다.[3]

1981년 유벤투스로 돌아온 로시는 1982 스페인 월드컵 직전인 1982년 4월 29일 징계에서 복귀했다.

1982 스페인 월드컵 이후 로시는 유벤투스에서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안토니오 카브리니, 가에타노 시레아 등의 대표팀 동료들, 그리고 플라티니,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 같은 월드컵 스타들과 더불어 활약하면서 크고 작은 트로피들을 계속 들어올렸다. 그 가운데에서도 ‘ 헤이젤 참사’가 발생했던 1985년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꺾고 차지한 유러피언컵은 로시의 클럽 축구 인생 최대의 트로피로 기록된다. 이후 그는 밀란으로 이적해 1985-86 시즌 밀란 더비에서 두 골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후 잦은 부상으로 로시는 31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택하게 됐다. 그러나 이탈리아 축구사에 파올로 로시는 결코 잊지 못할 위대한 선수로 남아 있다. 2020-21 시즌부터 세리에 A 득점왕의 명칭을 파올로 로시 상(Paolo Rossi Award)로 정했다.

2.2. 국가대표

파일: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린채 기뻐하고 있는 로시.jpg
FIFA - 파올로 로시 1982년 월드컵 활약상 영상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977년 A매치에 데뷔한 로시는 엔초 베아르초트가 이끄는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의 일원이 되기에 이른다.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로시의 활약은 관점에 따라선 4년 후보다 낫다고 여겨질 만큼 매우 인상적이었다.[4]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로시는 유벤투스 선수들인 로베르토 베테가, 프랑코 카우시오와 매우 훌륭한 호흡을 과시했으며 특히 자신의 옛 포지션인 측면 위치로 돌아 나아갈 경우에도 좋은 플레이를 펼쳐보였다. 로시는 1차 조별 리그[16강]에서 첫 경기 선제골, 두 번째 경기 선제골, 세 번째 경기에서 이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에게 맞서 1:0 승리를 일궈내는 어시스트를 연결하며 3전 전승을 이끈다.

그러나 2차 조별 리그[8강]에서 서독, 네덜란드, 오스트리아와 배정되어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선 그 경기 유일한 득점을 뽑아내지만 당대 최강팀들인 독일과 네덜란드를 넘어서지 못하고 탈락하고 만다. 이 대회의 로시는 활발한 움직임과 정확한 패스에 의한 어시스트들을 비롯, 이탈리아의 공격을 화끈한 것으로 만드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상술했듯 로시가 전체적으로 골의 거장 게르트 뮐러 계열의 선수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1978년의 로시는 조금 더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첫 월드컵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실버볼을 수상했다.

토토네로 스캔들로 인해 2년이라는 기나긴 공백이 있었으나 대표팀 감독 베아르초트는 로시를 신뢰했다. 그와 동시에 베아르초트는 유로 1980에서 공격수 가뭄을 실감했기에 로시가 아니고서는 이탈리아가 우승할 수 없다는 확신하에 로시를 발탁하고, 그가 주전이 될 것임을 천명했다.

이는 이탈리아 전역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대표팀이 1차 조별 리그[24강]에서 폴란드, 페루, 카메룬 등의 손쉬운 상대들로 배정되었음에도 3경기에서 단 두 골만을 기록하며 3무로 간신히 진출하자 베아르초트 감독과 대표팀에 대한 언론의 비난은 점점 더 거세졌다. 특히 실전 감각이 부족한 로시가 세 경기 동안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하고, 그것도 모자라 경기장 안에서 행방불명되며 부담을 가중시켰다.

언론의 공격에 맞서 베아르초트 감독은 언론 접촉을 아예 차단하고서 2차 조별 리그[12강]를 준비했다. 간신히 1차 조별 리그를 통과한 이탈리아는 최강으로 평가받는 브라질, 전 대회 우승국 아르헨티나와 같은 조를 이뤘다.[9] 언론은 형편없는 용병술로 약체국들을 상대로도 조 1위를 차지 못하고 죽음의 조에 배정되었다며 베아르초트를 질타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의 비난세례 속에서도 디노 조프를 위시한 이탈리아 선수단은 오히려 단단하게 결속되었고, 이러한 정신적 무장은 실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잔카를로 안토뇨니, 브루노 콘티,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등이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와 4년 전 우승 멤버들이 포진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여유있게 2-1 승리를 거둔 것. 하지만 그보다도 큰 점수차로 압도적 승리를 거둘수도 있었던 이탈리아의 전력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아야 했을 로시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한 그대로였다.

이제 득실에서 이탈리아를 압도해서 비기기만 해도 4강에 진출하는 브라질과의 경기가 남았다. 이 경기에서도 로시가 제몫을 해내지 못한다면, 향후 이탈리아 선수들의 장래는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82년 브라질이 얼마나 대단한 팀이었는가? 지쿠 - 소크라치스 - 호베르투 파우캉 - 토니뉴 세레주. 일명 황금의 사중주로 대표되는 브라질은 우승 전력을 넘어 페렌츠 푸스카스의 헝가리나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 펠레의 브라질, 지네딘 지단의 프랑스, 메이저 3연패 시절의 스페인과 같은 역대 최강의 전력을 갖춘 팀 중 하나로 회자될 만한 전설적인 팀으로, 이탈리아와의 경기 전까지 24경기 무패 행진에 20승 4무 70득점 13실점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쓴 최강의 팀이었다. 이미 앞선 경기에서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훨씬 아름답고 완벽하게 분쇄하는 경기를 선보였으며 이탈리아가 4경기에서 4골을 넣을 동안 그들은 13골을 퍼부었다. 간신히 승리해온 이탈리아를 상대하는 황금의 사중주 브라질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으나, 그 모든 예상이 부질없게도 경기를 쥐고 흔든 건 다름 아닌 파올로 로시였다.
브라질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달성한 로시
안토뇨니의 절묘한 패스가 오버래핑하던 카브리니에게 연결, 그리고 크로스가 로시의 머리에 닿으며 5분 만에 선제골이 터졌다. 브라질은 소크라치스 지쿠의 2:1 공격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로시가 브라질 수비진에게서 공을 낚아채며 재차 골을 성공시켜 2:1로 전반을 마친다. 후반전 브라질의 집중 공세 속에 호베르투 파우캉이 2:2를 만들어낸다. 그러자 경기 분위기는 다시 뒤바뀌어 브라질은 걸어잠그고 이탈리아가 두드리는 형국으로 변한다. 결국 승부는 세트피스에서 갈리는데, 코너킥 찬스에서 로시가 득점, 해트트릭으로 3-2 승리를 이끌어냈다.[10]

이후의 이탈리아는 파죽지세였다. 로시는 4강 폴란드전에서도 2골을 터뜨려 결승에 진출한다.
파일:Paolo Rossi Italy.jpg
서독과의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로시
서독과의 결승전에서는 후반전 0-0의 균형을 깨뜨리는 선제골을 기록, 이탈리아는 1934년, 1938년의 2연패 이래 44년의 기나긴 세월을 거쳐 월드컵 대관식을 치른다. 결국 1982 스페인 월드컵 최후의 승자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지쿠도, 마라도나도, 플라티니도, 루메니게도 아닌 2년 징계로부터 돌아온 로시의 차지가 되었다. 로시는 이 활약을 바탕으로 대회 골든볼과 골든슈는 물론이고 1982년 발롱도르까지 거머쥐기에 이른다.

로시는 1986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전을 대비한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입게 되고 월드컵에 참가하지만 경기에 뛰지 못하게된다.[11]

3. 플레이 스타일

기본적으로 빠르고 훌륭한 슈팅력과 뛰어난 위치선정으로 골을 넣는 포쳐 타입이지만, 영상에서 보이듯 공간이 열려 있으면 박스 밖에서부터 직접 공을 몰고가며 달라붙는 수비수 한둘 정도는 제칠 정도의 주력과 개인기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4. 사망

2020년 12월 8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임종전에 전처와의 자식들을 걱정 하며 떠나기 싫다고 했는데, 이때 아내가 그를 끌어안고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며 "파올로, 이제 가요. 그만해요, 당신은 이미 고생할 만큼 했어요. 이제 이 몸을 떠나요"라고 하자마자 그대로 눈을 감았다고 한다. #

장례식은 12월 12일 치러졌고 1982년 월드컵 우승 멤버였던 마르코 타르델리, 안토니오 카브리니 등이 참석했다고 한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기타

파일:골닷컴 선정 시대별 공격수 5인.jpg


[1] 월드컵 골든볼은 1982년에 제정되었으나 피파에서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마리오 켐페스의 골든볼 수상을 인정하였다. # 그 덕에 로시의 실버볼 수상도 마찬가지로 인정되었다. # [2] 이 기록에 가장 근접한 선수는 1986 멕시코 월드컵 때의 디에고 마라도나, 2002 한일 월드컵 때의 호나우두, 2022 카타르 월드컵 때의 리오넬 메시를 들 수 있다. 마라도나는 골든볼을 수상했지만 잉글랜드 게리 리네커에게 1골 차로 밀려 실버슈에 그쳤고 호나우두는 골든슈를 수상했지만 독일 올리버 칸에게 밀려 실버볼에 그쳤으며 메시는 골든볼을 수상했지만 프랑스 킬리안 음바페에게 1골 차로 밀려 실버부트에 그쳤다. [3] 이후 2년으로 감경됐다. [4] 사실 1982년 월드컵의 로시는 여러 모로 부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로시의 비첸차 후배 로베르토 바조와도 유사성이 있다. 절묘하게 그리고 어김없이 터져 나왔던 바조의 골들이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결승으로 이끈 원동력이기는 하더라도, 그 이전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더 젊은 바조가 펼쳐 보인 활약 또한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16강] [8강] [24강] [12강] [9]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탈리아라는 충격적인 조 편성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치열한 죽음의 조로 회자되고 있다. [10] 로시 본인도 "브라질을 이긴 경기는 세기의 경기였다. 내 선수 시절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중요한 경기였다"라고 말했다. [11] 결국 알레산드로 알토벨리가 1986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에이스 역할을 한다. [12] 브라질은 로시의 이탈리아에게 1982년, 지단의 프랑스에게 1998년과 2006년에 졌다. 그리고 2014년 독일에게 참패했다. 공교롭게도 로시의 이탈리아에게 패배하기 16년 전인 1966년에는 조별 리그 탈락, 그보다 더 16년 전인 1950년에는 마라카낭의 비극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