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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12:42:33

발렌티노 마촐라

발렌티노 마촐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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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실비오 피올라
(1940~1947)
발렌티노 마촐라
(1947~1949)
리카르도 카라펠레세
(1949~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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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노 마촐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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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세리에 A 로고.svg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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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imortaisdofutebol.files.wordpress.com/valentino_mazzola_display_image.jpg
이름 발렌티노 마촐라
Valentino Mazzola
출생 1919년 1월 26일 /
이탈리아 왕국 카사노 다다
사망 1949년 5월 4일 (향년 30세)
국적 이탈리아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신체 176cm | 체중 72kg
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소속팀 알파 로메오 (1938~1939)
베네치아 FC (1939~1942)
토리노 FC (1942~1949)
국가대표 파일: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2경기 4골 ( 이탈리아 / 1942~1949)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eeeeee,#191919> 등번호 -[1]
가족 아들 산드로 마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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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어록5. 뒷 이야기6. 수상
6.1. 클럽6.2.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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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가 팀의 절반이다. 남은 절반은 나머지 우리 10명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리오 리가몬티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이자 토리노 FC의 전설적인 선수로 수페르가의 비극의 희생자다.

산드로 마촐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 선수 생활

마촐라는 운동으로 성공한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운동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수영 사이클에서 그러했다. 하지만 마촐라는 축구의 길을 선택했고 지역 팀 중 하나인 GS 트레솔디에서 뛰었다. 하지만 11살 때 마촐라의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마촐라는 졸지에 소년가장이 되어 밀란의 알파 로메오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알파 로메오 팀에서도 뛰면서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의 길을 선택하였다.

1939년 전쟁이 발발하여 마촐라는 베네치아로 가서 해군으로 복무하였다.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베네치아 팀의 선수로도 활약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의 신발이 없어 맨발로 플레이를 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전화위복. 더욱 유명해졌다.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그의 활약이 최고조로 달했던 대회가 바로 1940-41 시즌의 코파 이탈리아였다. 베네치아를 이끌고 코파 이탈리아의 결승까지 진출했고 결승전의 상대는 AS 로마였다. 결승전에서 베네치아는 아마데이에게 전반 4분부터 5분만에 해트트릭을 얻어맞고 끌려가고 있었지만 마촐라의 37분 득점에 뒤이어 후반에는 결국 동점을 만들어 재경기로 이끌었다. 재경기에서 결국 베네치아는 1:0으로 승리. 팀의 현재까지 유일한 메이저 트로피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그의 활약을 보고 그에게 입단 제의를 한 곳이 바로 토리노의 두 구단. 유벤투스 토리노 FC였다.

2.2. 토리노 FC

원래 마촐라는 유벤투스 FC에 입단하기로 구두 계약을 맺었던 상태였지만 토리노는 마촐라를 데려오기 위하여 무지하게 애를 썼다. 결국 20만 리라와 선수 두 명을 유벤투스에 내주면서 마촐라를 토리노에 데려오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토리노는 세리에 A 최강의 팀이었다. 1946년부터 팀 컬러를 제대로 갖춘 토리노는 나머지 팀들을 승점 10점 차 이상[2]으로 가뿐히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하였고 그들을 막을 팀은 없어보였다. 게다가 마촐라는 주장으로서 단연 그란데 토리노의 핵심 선수였다.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놀라운 활약의 순간은 1946/47 시즌 리그 29라운드 비첸자 전이었는데, 고작 3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2.3. 수페르가의 비극

이 사고가 일어날 당시 마촐라는 부상을 참고 포르투갈에 건너가 벤피카와의 친선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향년 30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그의 팀과 함께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기술도 훌륭했지만 그 위에 엄청난 체력과 스피드를 갖추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수비수들에게는 악몽이었다. 게다가 수비 능력과 주장으로서의 카리스마까지 갖추고 있던 최초의 현대 축구적 올라운드 플레이어라고 알려져 있다.

4. 어록

당신이 팀에서 변하는 만큼, 당신은 축구에서 승리할 수 있다.
축구는 항상 11명으로 이루어진 게임이다.

5. 뒷 이야기

파일:마촐라 부자.jpg
발렌티노와 어린 산드로

6. 수상

6.1. 클럽

6.2. 개인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당시에는 현재처럼 승리시 승점이 3점이 아닌 2점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승점차이는 현재보다 더 큰 전력의 차이를 의미한다. [3] 당시 토리노의 회장이었던 페루초 노보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