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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레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설명한 문서.2. 드리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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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블링에 있어서 펠레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왼발과 오른발을 막힘없이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는 것인데, 이런 유형의 공격수를 상대하게 되면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정말 골치가 아파진다. 공격수의 반대 발 사용을 유도하는 축구 수비의 기본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펠레는 현대 축구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넛맥[1], 헛다리 짚기, 사포, 라 크로케타, 라보나 킥 등 각종 고난도 기술들을 모두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레벨의 테크니션이었다.[2]
공중볼을 섬세하게 컨트롤하는 것은 펠레의 전매특허였다. 펠레는 발과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 등, 무릎 등 몸의 거의 모든 부위를 사용하여 완벽한 트래핑을 할 수 있었다. 이 트래핑 자체를 하나의 드리블 기술로 흡수하여 상대 선수를 제치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머리와 어깨로만 공을 통통 띄워 골키퍼 바로 앞까지 가져가는 묘기 축구나 다름 없는 장면도 자주 만들어냈다. 어렸을 때부터 길거리 축구로 실력을 단련시킨 덕에 온 몸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공을 다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모두에게 인정받는 개인기의 달인이 되었다.
그는 신체적으로도 드리블에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100m를 10초 대에 주파하는 스피드, 폭발적인 순간 가속력과 민첩성, 단단한 신체와 절륜한 균형 감각, 흑인 특유의 탄력과 브라질리언 특유의 리듬감까지 모두 보유한 선수였다.
상대의 성급한 수비를 역으로 이용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더미 플레이, 노 터치 트릭을 들 수 있는데, 상대 선수의 수비 타이밍을 미리 읽고 그 타이밍을 깨버리는 플레이를 했다. 또 자신의 앞을 막아선 수비수의 발에 일부러 공을 맞힌 후, 태클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수비수로부터 재빨리 공을 빼앗아오는 기묘한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상대팀 모두를 제친 골 상황에 대한 묘사[3] |
이렇게 기술적으로도 우수했던 펠레에게 한 경기에서 두세 명의 선수들을 제치는 장면 정도는 허다하게 나왔으며, 상대 팀 전체를 제치는 어마어마한 드리블 능력도 보여줬다는 사례도 전해진다. 이러한 면모 덕분에 그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드리블러를 뽑을 때도 항상 그 이름이 거론된다. 브라질 선수 중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드리블러라고 평가받은 호나우두를 세계에서는 펠레의 재림이라고 띄워주곤 했다.
그런데 영상을 눈으로만 판단했을 때, 주 비교 대상인 마라도나와 메시보다는 투박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드리블 능력을 가졌음에도 앞의 두 선수 만큼의 많은 드리블을 시도하진 않았다. 혼자서 상대 수비를 헤집은 골들도 있지만 상대 수비를 벗길 때 연계 플레이를 자주 활용하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펠레에게 역대 최고 크랙의 모습을 기대하고 그의 볼터치 영상을 봤다가 실망하거나 저평가를 내리는 팬들도 있으며, 언론들도 드리블 능력은 마라도나, 메시가 더 뛰어났다는 평가들을 내고 있다. 그 이유는 두 선수가 펠레보다 더 정교한 드리블 능력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펠레 입장에서는 당시 장비와 경기장 상태가 낙후되었기 때문에 기술을 구사하기 불리한 환경에 놓여있었다. 같은 영향으로 당대의 다른 선수들도 현재의 선수들에 비하면 투박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4]펠레 시대의 장비 수준에 대해서는 평가의 세부 사항 문단에 후술되어 있다. 대신 왼발이 주발이었던 마라도나, 메시와는 달리 펠레는 양발을 골고루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강점이다.
외국의 축구팬들이 옵타의 기준으로 드리블을 세어본 결과, 1958년 월드컵 4강 프랑스전과 결승 스웨덴전은 5회, # 1962년 월드컵 조별 리그 멕시코전은 14회, # 1966년 월드컵 조별 리그 불가리아전은 10회 #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마라도나가 1986년 월드컵 8강 잉글랜드전에서 기록한 19회, 메시가 2014년 월드컵 조별 리그 이란전ㆍ16강 스위스전ㆍ결승 독일전과 2018년 월드컵 조별 리그 나이지리아전에서 기록한 7회, 2018년 월드컵 조별 리그 아이슬란드전에서 기록한 9회와 비교해도 그다지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반면 1970년 월드컵에서의 총 횟수가 16회, 그 중 결승전 이탈리아전은 단 1회에 그쳤는데, # 펠레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주었음을 알 수가 있다. 1966년 월드컵에서 당한 부상[5]이 펠레의 신체 능력이나 도전적인 마인드를 줄였을 수 있다는 추측들도 나오고 있다.
바지가 벗겨지는 장면이 많다. 거친 파울이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였으니 바짓가랑이도 많이 잡힌 모양. 상대 팀이 전술적 움직임을 포기하고 2명 이상을 밀착 마크로 붙이는 경우도 빈번했다. 당시 전술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는 있으나 스타 플레이어로서 플레이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축구 선수 중 테크니션들은 신체 보호와 파울 유도를 목적으로 다이빙을 곧 잘하는 경우가 많은데, 펠레는 최고의 테크니션이었음에도 다이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악의적인 태클에 걸려 넘어지면 주심에게 항의하거나 어필하기보다, 빨리 일어나 일단 공부터 다시 따내고 보는 스타일이었다. 드리블에 언제나 자신감이 차 있었고, 늘 집념 가득한 플레이를 펼쳤다. 펠레가 파울을 얻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날리는 장면은 어느 경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드리블러들에게 다이빙이 잦은 것에 비해 펠레는 다이빙을 절대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때문에 펠레는 집중 견제의 대상이 되었고 수비수들이 압박해 악의적인 파울을 자주 당하는 선수가 되었다.
3. 득점력
펠레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코어러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발로 골을 결정짓는 능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뛰어났다.[6] 기본적으로 슛 파워 자체가 매우 강력했으며, 양발잡이라서 왼발과 오른발 모두를 사용하여 파괴력 있는 슈팅을 구사할 수 있었다. 언제나 상황에 알맞는 슈팅을 시도했고, 여차하면 칩슛을 통한 득점에도 능했다. 중거리 슛 능력도 탁월해서 어느 위치에서든 각만 나오면 위협적인 슈팅으로 골키퍼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하프라인에서도 호시탐탐 골문을 노렸다.공중에서 슈팅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뛰어났다. 펠레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공을 처리했는데, 단순 헤더는 물론 양발을 모두 사용하여 바이시클 킥, 발리 슈팅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팔을 제외한 온 몸을 사용하여 마치 기계처럼 골을 집어넣었다.
펠레는 170cm대 초반의 크지 않은 키를 가졌음에도 공중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선수였다. 일단 점프 높이부터가 남달랐는데, 펠레의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바우데마르 지브리투는 펠레의 타고난 신체적 탄력을 눈여겨보았고, 오른발, 왼발, 양발 점프를 이용해 어떤 상황에서든 탄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킨 결과, 펠레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압도적인 점프력 덕에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선수들을 상대로도 제공권에서 우위를 점했다. 이탈리아의 자친토 파케티는 펠레보다 20cm가량 큰 191cm의 신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공중 경합에서 패배했으며, 이후 인터뷰에서 펠레의 점프력에 "펠레와 공중 경합에 나섰다. 내가 더 크고 힘도 셌다. 땅에 떨어져서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펠레는 그때까지도 공중에 떠서 헤더를 시도하고 있었다. 마치 원하는 만큼 공중에 머무를 수 있는 선수 같았다" 라며 경외심을 보냈다. 펠레와 함께 활동했던 골키퍼 셰프 메싱도 "펠레의 서전트 점프 높이는 48인치[7] 이상이며, 마이클 조던 보다 높게 점프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펠레의 점프력은 동시대 선수들과 후대 선수들에 의해 퓨마, 헬리콥터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펠레가 넣은 헤더 골은 영상으로 남아있는 것만 추려도 100골 가까이 된다.
펠레는 프리킥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다. 2번의 FIFA 월드컵에서 프리킥으로 득점한 5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8] 1966년 월드컵에서는 가린샤와 1970년 월드컵에서는 호베르투 히벨리누와 함께 브라질의 프리킥을 도맡아 찼다. 펠레의 프리킥은 같은 시대에 활동한 대부분의 선수들처럼 비슷하게 먼 거리에서 달려와서 발등 혹은 인프런트와 아웃프런트로 강하게 때려넣는 스타일이었다. 펠레의 프리킥 스타일을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프리킥 스타일과 비교했을 때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펠레는 주로 쓰는 발인 오른발 뿐만 아니라 왼발로도 프리킥을 즐겨 찼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펠레의 프리킥 통산 득점은 44골이다.[9]
4. 패스와 기회 창출
펠레와 동시대에 비슷한 포지션에서 활약했던 선수들 중에서 에우제비우처럼 높은 수준의 플레이메이킹 능력과 연계 능력을 갖춘 선수들도 있었지만 펠레는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는데, 정말 군계일학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수준이었다.타이밍에 맞추어 공격수의 앞 공간으로 보내주는 스루패스에 매우 능했으며, 전방에 있는 선수와의 섬세한 연계 플레이로 상대 수비진의 혼을 빼놓았다. 또 공중볼을 트래핑할 때와 비슷하게 온 몸을 사용하여 단 한 번의 간결한 볼터치를 했고, 이를 통해 즉흥적으로 찬스를 만들곤 했다. 백힐 패스는 예사였고, 호나우지뉴처럼 등으로 패스하거나 노룩패스를 하기도 했다. 롱패스 역시도 수준급으로 했고 펠레는 단순한 패스에 노골적인 트릭을 접목하여 사용한 선수들의 원조격이었다.
월드컵 때에도 펠레의 패스 능력은 빛났다. 그 중에서도 1970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경기 조율 능력은 단연 압권인데, 스포츠 통계 사이트 옵타에 따르면 1970년 월드컵 6경기에서 28회의 기회 창출 횟수와 6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는 제대로 기록이 집계되기 시작한 1966년 대회 이후 각각 역대 단일 월드컵 4위[10]와 1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펠레는 슈팅이나 드리블을 할 때에는 양발을 비슷한 빈도로 섞어서 쓰는 선수이다. 그러나 패스할 때에는 일단 공을 잡아두고 오른발을 주로 사용하여 패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70년 월드컵 잉글랜드전에서 자이르지뉴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장면, 그리고 결승전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장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패스할 때는 왼발보다는 오른발을 더 선호한다. 아무래도 패스는 드리블이나 슈팅에 비해 더 정교함을 요하므로 펠레 입장에서도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오른발을 자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케빈 더 브라위너, 스티븐 제라드와 같이 강한 속도로 깔아차는 패스를 구사하지는 못했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패스를 할 때 공이 다소 통통 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애초에 잔디 상태나 관리가 고르지 못한 당시 상황에 기인한 탓이 크다.[11]
5. 수비
펠레는 승부욕이 강했으며 수비 가담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과거의 축구가 현재에 비해 압박이 적었고 이에 따라 수월하게 공격 작업을 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 펠레지만, 정작 펠레가 수비 입장이 되면 압박을 잘 수행했다. 공의 소유권이 넘어가면 전방 압박, 드리블 치는 상대를 끝까지 쫓아가는 모습, 팀의 문전 앞까지 내려와서 탈취하는 모습 등 보여줄 수 있는 건 모두 보여줬다. 이렇게 뺏은 공을 직접 상대 문전까지 운반하기도 했으며, 결과적으로 역습의 기점이 되어 득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펠레는 스탠딩 태클 뿐만 아니라 슬라이딩 태클도 자주 시도했다. 심지어 골키퍼를 상대로 영악한 플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골키퍼가 골킥을 차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뒤에서 머리를 불쑥 들이밀거나, 골키퍼가 잡은 공을 의도적으로 툭 건드렸으며 고든 뱅크스와 레이 클레멘스가 이에 당황했다.펠레는 1970년 월드컵 당시 6경기에서 9개의 태클을 기록했다. 2018년의 앙투안 그리즈만이 7경기에서 11개의 태클을 기록한 것을 볼 때 현대 선수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펠레가 퇴장 또는 부상으로 경기에서 빠진 골키퍼를 대신하여 경기 도중 골키퍼 장갑을 낀 경기는 통산 7경기나 된다. 펠레는 그 7경기 동안 단 1골만을 실점했다. 골키퍼로서의 기량도 필드 플레이어 중에서는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다.
6. 총평
그의 높은 위상에 걸맞게도 모든 능력이 정점에 가까운 완성형 축구 선수였다. 최근 들어 멀티 플레이어나 육각형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약점이 없다'는 표현이 남용되고 있지만, 펠레는 그중에서도 단연 정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인사이드 포워드의 표본이라 불릴만한 뛰어난 드리블 능력과 패싱 능력을 활용하여 많은 기회를 창출하고 골 결정력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해결사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중 경합 능력도 당대 최고 수준인데다 수비 가담까지 했다는 점에서 모든 부분이 완벽했던 ' 컴플리트 포워드'라 불리기에도 제격이었다.펠레의 높은 득점 기록 때문에 그를 전형적인 골게터로 착각하기 쉽지만, 펠레는 자서전에서 스스로를 공격형 미드필더라 칭했을 정도로 미드필더적인 성향도 있는 선수였다. 1970년 월드컵 직전에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 펠레를 센터포워드로 뛰게하자, 당시 언론의 인터뷰에서 거기는 당신이 좋아하는 포지션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펠레도 이에 대해 15년을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갑자기 하라고 하면 되겠느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실제로 이 링크처럼 펠레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당시 펠레의 포지션은 브라질에서 Ponta de Lança(창날)이라 불렸던 포지션이다. 이 창날 포지션은 빠르고 날렵한 드리블로 라인을 부순 뒤, 창처럼 침투해서 마무리를 짓기도 했고, 때때로 3선까지 내려와 박스 사이를 휘저으며 중원 장악을 돕기도 했다. 현재의 전술 및 포지션과 완전한 1대1 대응은 어려우나, 연관짓자면 지금의 세컨드 스트라이커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발롱도르 드림팀은 펠레를 공격형 미드필더 후보로 분류했다.[12]
7. 그 외
펠레는 승부근성이 강해서 상대의 반칙에는 반칙으로 맞받아치기도 했다. # 대표적인 예로 1970년 월드컵 우루과이전에서 펠레가 우루과이의 미드필더 다고베르토 폰테스에게 파울을 당하자 아예 팔꿈치로 폰테스의 얼굴을 가격해 버렸던 장면을 들 수 있다. 폰테스는 그 상황 이전에도 펠레가 돌파하다 파울을 당해 쓰러진 상황에서 펠레의 다리를 밟은 적도 있었고 돌파 중에 뒤에서 또 파울을 걸자 펠레가 아예 팔꿈치로 찍어버린 것이다. 물론 현대 축구였다면 동반 퇴장을 당하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심판은 폰테스의 파울로 판정하고 브라질에게 프리킥을 주었다.그리고 의외로 펠레는 현역 시절 공식적으로 팀의 주장에 선임된 적이 없으며, 임시로 주장직을 수행했던 경기도 몇 안 된다.[13]그러나 동료들과 주변인들의 언급에 따르면 리더십 자체는 매우 뛰어났다. 노년기의 활발한 언론 활동이나 정치 활동을 보면 빈 말은 아닌 듯하다. 또한 최고 레벨의 플레이어들이 자신만의 세계가 강고하고 외골수적인 면이 있는 것에 비해 경기 중 동료의 조언에 따라 포메이션이나 플레이 스타일을 즉석에서 바꿔 재미를 보는 등 유연한 태도를 보여줬다고 한다.
펠레는 기복이 거의 없는 선수였다. 기량에 있어서 늘 일관됨을 유지했으며, 골 기록만 살펴봐도 그가 매우 꾸준한 선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꾸준함은 최고의 축구 대회인 FIFA 월드컵에서도 검증되었다. 월드컵 통산 14경기[14]에서 12골 8도움을 기록했으며, 골을 몰아 넣지 않고 1~2개의 골을 골고루 득점했다. 그러나 언제든 무섭게 몰아칠 수 있는 선수이기도 했다. 1964년 리그의 보타포구[15]를 상대로 8골을 넣은 것이 펠레의 단일 경기 최다 골 기록이다. 이 외에도 해트트릭 91회, 4골 31회, 5골 6회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해트트릭 횟수는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여 센 것이다. #[16]
[1]
알까기로 통칭되는 기술. 펠레가 매우 선호하는 개인기였는데, 1968년
서독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나온 알까기가 특히 유명하다. 무려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넛맥을 성공시켜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기도 했다.
[2]
위에 링크된 영상에선 크루이프 턴과 비슷한 동작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를 상대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펠레의 경우는 영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대략 절반 이상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되고 위에서 영상이 링크된 주벤투지전에서의 리프팅 골처럼 펠레의 베스트 골은 오히려 영상에 남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이 경기에서도 녹화가 허용되지 않아서 이 골은 영상으로 남지 않았다.
#
[4]
영상을 보면 수비수들이 공이 아닌 다리를 노리고 태클을 거는데, 이 때문에 투박해 보일수도 있다.
[5]
이때 당한 더블 백태클이 안타깝게도 펠레의 신체적 전성기를 끝장내고 말았다. 교체 제도도 없던 시절이라 부상을 당하고도 경기를 끝까지 뛴 것이 악재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6]
남아있는 영상을 보면 마무리하기 좋은 위치가 아니여도 골을 넣는 장면이 많음을 알 수 있다.
[7]
약 121cm. 다만 펠레의 서전트 점프 공식 측정기록이 없어 그냥 그렇게 보일 만큼 높이 점프했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
[8]
나머지 4명은
호베르투 히벨리누,
데이비드 베컴,
테오필로 쿠비야스, 베르나르 젱기니이다. 이들 중 펠레가 가장 먼저 성공하였다.
[9]
다른 유명한 프리키커들에 비해 골 수가 적어보이지만, 과거의 축구화와 공 품질을 생각하면 저것도 굉장히 많이 넣은 것이다.
[10]
1위는 7경기 36회의 1974년 크루이프, 공동 2위는 7경기 32회의 1974년 카지미에시 데이나와 2010년 사비 에르난데스.
[11]
그 당시 남미 축구장은 흙먼지가 풀풀 날릴정도로 상태가 저질이라 어떻게 깔아차든 공이 튈 수밖에 없었다.
[12]
다만 펠레 이상으로 미드필더 성향이 강했던
요한 크루이프는 센터포워드로 분류된 것을 보면 이는 주최 측이 포지션을 잘못 배정한 것에 가깝다.
[13]
그와 비교되는 선수들인 마라도나와 메시가 모두 주장으로서 월드컵을 우승한 것을 보면 재밌는 점이다.
[14]
4번의 대회에 출전했음에도 경기수가 적은 이유는 2번의 대회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다.
[15]
가린샤 등이 소속돼 있던
보타포구가 아니다.
[16]
수치상으로 봐도 펠레는 메시, 호날두에 비해 공식 골 수가 수십개나 적은데, 해트트릭 횟수가 30회 정도나 둘 보다 많다고 하면 몰아치기가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