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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8:38:30

고든 뱅크스

고든 뱅크스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FWAlogo.png
베스트팀
파일:월드사커 로고.png
1969 · 1971 · 1972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잉글랜드의 前 축구 감독
파일:고든 뱅크스.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고든 뱅크스
Gordon Banks
출생 1937년 12월 30일
잉글랜드 사우스요크셔 주  셰필드
사망 2019년 2월 12일 (향년 81세)
잉글랜드 스태포드셔 주 스토크온트렌트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
직업 축구선수 ( 골키퍼 / 은퇴)
축구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체스터필드 FC (1958~1959)
레스터 시티 FC (1959~1967)
스토크 시티 FC (1967~1973)
클리블랜드 스토커즈 (1967 / 임대)
헬레닉 FC (1971 / 임대)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 (1977~1978)
세인트 패트릭스 애슬레틱 FC (1977 / 임대)
감독 AFC 텔포드 유나이티드 (1979~1980)
국가대표 73경기 ( 잉글랜드 / 1963~1972)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사망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수훈
6. 평가
6.1. 뱅크스에 대한 말, 말, 말
6.1.1. 축구 황제 펠레와의 관계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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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축구인.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이다.

FIFA 월드컵 통산 89.1%의 선방률을 기록한 월드컵 역대 최고 선방률 보유자이며, 1966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활약한 골키퍼이다. FIFA 월드컵에서 통산 9경기에 출전해 4실점만을 기록했으며, 특히 1966년 월드컵에서는 443분 연속 무실점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레스터 시티 FC와 스토크 시티 FC에서 커리어의 전성기를 보냈으며, 1972년 10월에 비운의 교통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면서 전성기를 마무리지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뱅크스는 석탄 광부 또는 벽돌공 등으로 일했는데, 어느 아마추어 축구 경기에서 결원을 메우기 위해 대신 뛰게 되었다. 이 기회를 통해 그는 지역 팀에서 뛰게 되었으며 1955년에는 체스터필드에서 파트 타임 프로 선수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뱅크스의 팀은 FA 유스 컵 결승에 올랐는데 보비 찰튼이 군림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유스 팀에게 4-3으로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첫 시즌부터 대활약을 한 뱅크스는 바로 한 시즌만에 레스터 시티로 이적한다. 레스터시티에는 존 안데르손 데이브 맥라렌이라는 이름있는 골키퍼들이 있었지만 뱅크스는 그들을 제치고 그 시즌에 바로 주전을 차지해버린다. 골키퍼가 첫 시즌에 주전으로 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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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시티 시절의 뱅크스

그 이후부터 이적 전까지 계속해서 주전으로 뛴다. 그 다음 시즌인 1960-61 시즌에 레스터 시티를 FA컵 결승까지 이끌었으나, 리그 챔피언이었던 토트넘 홋스퍼 FC에게 패배하면서 더블 우승을 헌납하고 말았다.

그 다다음시즌인 1962-63 시즌에도 다시 한번 FA컵 결승에 오르지만 이번엔 맨유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그러나 또 다음 시즌인 1963-64시즌에는 스토크 시티 FC를 상대로 1~2차전 합계 4-3으로 이기며 드디어 커리어 첫 우승컵을 획득했다. 그러나 다음시즌인 1964-65시즌에는 첼시 FC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을 했다. 레스터에서만 1번의 우승과 3번의 준우승을 한 그는 폭풍저그 ​선수생활에 슬럼프가 올만했으나 그 해 월드컵 우승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뱅크스는 1966-67시즌에 스토크 시티 FC로 이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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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크 시티 시절의 뱅크스. 장갑 없는 손과 더러운 유니폼이 눈에 띈다.

뱅크스는 잔부상이 꽤 있었지만 계속해서 주전을 차지했다. 30줄을 타기 시작한 뱅크스는 노련함이 묻어나는 안정적인 세이브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대망의 1971-72시즌, 우승타이틀과는 거리가 멀 것 같던 뱅크스는 리그컵 결승에서 첼시를 2-1로 꺾으며 자신의 클럽 커리어의 마지막 우승컵을 들어올리고 본인은 그 시즌 FWA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했지만 1972년 10월 22일, 어깨 부상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운전하던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로 오른쪽 눈을 잃어버리게 된다.
파일:BanksAccident.jpg
눈 수술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뱅크스의 모습

얼굴을 200바늘, 안와는 미세하게 100바늘을 꿰매야 할 정도의 중상이었기에 모두가 그의 축구 인생이 끝났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스토크의 스카우터로 활동하며 축구에 대한 사랑을 이어갔고 급기야 1977년에는 거의 마흔 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선수생활을 더 하게 된다.
파일:FLBanks.jpg
미국 리그로 간 뱅크스

팬들은 이런 그에게 많은 찬사를 보냈으며 1978년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한쪽 눈은 잃어도 축구만은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눈을 하나 잃었으니 당연하겠지만 예전과 같은 기량은 보여주지 못했다. 근데 그런 상태에서도 북미 리그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었으니,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

2.2. 국가대표 경력

1963년에 알프 램지가 잉글랜드 대표팀의 감독이 된 후, 잉글랜드가 맞이한 첫 메이저대회는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 4강 본선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1963년에 열린 지역예선 경기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2-5라는 굴욕적인 점수의 패배를 내주고 4강 본선 유로에 진출 실패하였다. 이 충격패를 기점으로 잉글랜드 선출위원회는 감독에게 선수 선발 권한을 넘겼고, 램지는 프랑스전에서 실수를 연발한 골키퍼 론 스프링겟을 대체할 새로운 수문장을 찾기 시작한다.

램지는 레스터 시티의 젊은 골키퍼 고든 뱅크스를 주전 골키퍼 자리에 앉혀보기로 했고, 이후 여러 경기에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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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잉글랜드 vs 세계 올스타 경기에 출전한 뱅크스의 모습

뱅크스 외에도 블랙풀의 토니 웨이터스, 첼시의 피터 보네티, 맨유의 알렉스 스테프니, 그리고 재기를 노리는 전임자 론 스프링겟 등 걸출한 골키퍼들이 램지의 미래 국가대표 골키퍼 후보군으로 발탁되어 크고 작은 경기에 출전했지만, 결국 뱅크스는 쟁쟁한 경쟁자들을 모두 이겨내고 주전 자리를 꿰찼다. 1965년까지도 이 흐름은 계속되었고 뱅크스는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준비하게 된다.

뱅크스는 레이 윌슨, 바비 무어, 잭 찰튼, 조지 코헨이 이끄는 잉글랜드의 철통 수비진의 일원이 되었고, 매 경기 중요한 선방들을 해내며 잉글랜드의 월드컵 직전 무패행진을 이끌었다.

1966월드컵이 시작된 후, 준결승전에서 포르투갈의 에이스 에우제비우에게 페널티킥 실점을 내주기 전까지 443분 동안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페널티킥도 좀 어처구니 없이 내주었는데, 당시 팀의 최고참이던 잭 찰튼이 경기 막판에 저지른 어이없는 핸드볼 반칙 때문이었다. 여튼 이 443분 무실점 기록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발테르 쳉가(517분)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무려 24년 동안 지속됐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을 상대로도 2:1승리를 거두었다. 결승전에서 떠오르는 신예 베켄바워가 있는 서독을 상대해야 했지만, 이 역시 문제없었다. 절정의 폼을 맞고 있던 바비 무어 마틴 피터스, 제프 허스트 통칭 '웨스트햄 트리오'가 각 2어시스트, 1골, 해트트릭으로 맹활약하며 4:2승리를 거두었다. 뱅크스는 쥘 리메 컵을 만져본 유럽 국적의 마지막 골키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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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리메 컵을 들어올리는 뱅크스

UEFA 유로 1968 4강 본선에서도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잉글랜드가 최종 3위를 기록하는 데에 기여했다.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유럽예선 없이 바로 진출한 1970년 월드컵 16개국 본선에서도 당연히 주전 골키퍼였다. 뱅크스는 바비 찰튼과 함께 팀의 최고참이었고 1966년 월드컵 우승 덕에 라커룸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수였다. 16강 조별리그 1차전 루마니아전에서 잉글랜드의 빈공에도 불구하고 뱅크스와 무어 등 철통 수비진의 훌륭한 활약 덕에 1:0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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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스의 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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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 save! Gordon Banks...!"
케네스 월스턴홈, BBC 해설위원.

특히 16강 조별리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누가 봐도 구석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골이 될 만한 펠레의 헤더를 세이브한 장면은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으로 첫 손에 꼽힌다. 잉글랜드의 축구 응원가로 유명한 Three Lions에서도 이 명장면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 당시 펠레의 헤더는 굉장히 막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당시 뱅크스는 펠레와 반대방향에 있다가 크로스를 따라 올라온 상황이라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거기다 펠레의 헤딩은 골대 2야드 앞에서 바운드 되어 궤적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뱅크스는 서있던 자리에서 오른쪽 뒤로 대각선 방향으로 몸을 날려야 했고, 그런 자세에서 잡는 것은 고사하고 옆으로 쳐내는 것도 공이 골문 안쪽으로 걸릴 위험이 있었다. 완벽한 세이브를 위해서는 오로지 공을 위쪽으로 튕겨보내 공을 크로스바 위로 걷어내는 것만 가능했다.

고든 뱅크스 스스로도 이건 놓쳤다고 생각했는데, 직후 펠레의 반응을 보고 막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괜히 세기의 선방으로 불리는게 아니다. 막아낸 이후 고든 뱅크스는 "앞으로 사람들은 저를 월드컵 우승이 아니라 그 선방으로 기억할 겁니다. 그건 그럴만한 것이었어요." 라고 회상했다.

아쉽게도 0:1로 잉글랜드가 지고 대회 8위로 탈락하고 말았으나,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은 펠레 자이르지뉴, 토스탕, 호베르투 히벨리누, 제르송이 군림한 세계 최고의 팀이었고 축구 역사상 최강의 대표팀을 뽑을 때 1위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팀이다. 본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제외하면 만나는 팀마다 3:1, 4:1 정도로 승리를 거뒀으며 남미예선부터 12전 12승으로 월드컵을 우승하는 정신 나간 기록을 세웠다.

잉글랜드는 16강 조별리그 3차전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3전 2승 0무 1패 2득점 1실점으로 브라질에 이어 조 2위를 기록하며 8강에 무난하게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 뱅크스는 식중독으로 인해 다음 경기에 결장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고 8강 상대였던 서독에게 3:2로 패하여 탈락하게 된다. 특히 실점한 세 골 모두 뱅크스 대신 출전한 피터 보네티의 아쉬운 경기력 때문에 나온 실점이었기에 잉글랜드로서는 정말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1971년 북아일랜드와의 브리티시 챔피언쉽 경기에서 코앞에서 자신을 방해하던 조지 베스트에게 골을 먹혔지만 파울로 취소된 일이 있었다. 상당히 유명한 일화다.

1972년에는 유로 지역예선을 6전 5승 1무 0패로 손쉽게 통과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팀 서독을 만나게 되면서 탈락했다. 어느덧 35세가 되었음에도 뱅크스의 활약은 여전히 빛났는데, 결승골이 된 귄터 네처 페널티 킥을 완전히 읽어냈고 날아오는 공을 손에 맞히기까지 했으나 슈팅의 파워가 워낙 강력해 바로 옆그물로 들어갔다. 이후 고군분투했지만 게르트 뮐러에게도 추가골을 실점하며 3:1로 패했다. 그리고 2차전에서는 양 팀 모두 무득점을 기록했고, 따라서 총합 3:1로 서독이 4강 본선 유로에 진출하게 되었다. 1972년 10월에 교통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으면서 국가대표팀에서 피터 쉴튼& 레이 클레멘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3. 플레이 스타일

뱅크스는 뛰어난 위치선정을 바탕으로 한 안정감 있는 플레이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골키퍼다.

찰튼이나 베스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뱅크스의 최대 장점은 어려운 선방을 쉬워 보이게 하는 위치 선정 능력이다. 쉴튼이나 제닝스처럼 슈퍼 세이브를 주무기로 하는 골키퍼와 비교했을 때 뱅크스가 상대적으로 싱거워 보이는 이유가 이것인데, 위치 선정 능력이 워낙 좋아서 상대의 슈팅이 거의 정면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좋은 위치 선정으로 실점을 미리 차단해 버리기 때문에 본인이 출전한 월드컵 9경기에서 37개의 유효슛 중 33개를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선방 중 보자마자 '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크로바틱한 선방은 1970년 펠레를 상대로 보여준 그 선방이 유일하다.[2]

그러나 베스트가 말했듯이 반응 속도가 느린 골키퍼는 절대 아니었다. 동시대에 자주 비견되던 제닝스처럼 말도 안 되게 빠른 반응 속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빠른 반응 속도로 많은 슈퍼세이브를 기록했다. 당장 펠레를 상대로 한 그 선방이 나왔던 상황은 골키퍼의 모든 덕목 중 반응 속도가 가장 우선시되는 상황이었다. 뱅크스의 반응 속도가 느렸다면 그런 선방이 나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 화려한 선방을 보여줄 수 있는 골키퍼였다.
뱅크스의 플레이를 유형별로 모아둔 영상

킥 능력도 뛰어났다. 당시에는 골키퍼에 대한 압박을 주심이 크게 통제하지 않는 편이어서, 공을 들고 있는 골키퍼에게 공격수가 달라붙어 발길질을 하거나 펀트 킥을 하려는 골키퍼를 바로 앞에서 가로막고 서 있는 장면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뱅크스는 양 발을 모두 사용하여 골킥을 할 수 있는 선수였기에 이와 같은 압박에서 비교적 쉽게 벗어났다. 펀트 킥은 양 발로 모두 찼지만, 놓고 차는 킥은 오른발로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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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 또한 대단했다. 가히 엄청난 점프력의 소유자였고, 이를 잘 이용하여 상대의 크로스를 쳐내거나 미리 잘라먹는 데에 능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강한 어깨(당시의 공은 지금에 비해 무겁고 잘 뜨지도 않았는데, 뱅크스는 이걸 던져서 하프라인을 쉽게 넘길 정도로 어깨가 강했다)를 통해 바로 던져서 공격을 전개하거나 팀의 수비를 재정비했다.

그리고 엄청난 안정감을 자랑했다. 평가 부분에서 후술하겠지만 뱅크스는 국가대표 73경기를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4실점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다. 언제나 경기력에 일관성이 있었으며, 실수가 정말 드물었다.

키 185cm로 당시 골키퍼로서는 큰 키를 가지고 있어 피지컬적인 측면에서도 어디 하나 모자람 없던 선수였다.

피터 슈마이켈처럼 소리를 빽빽 지르면서 수비를 조율하는 골키퍼이기도 했다. 당시의 잉글랜드 대표팀 경기를 보다 보면 코너킥 상황에서 뱅크스와 무어가 카메라에 함께 잡히는 경우가 있는데, 뱅크스가 바비 무어와 함께 수비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면 엄청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파일:BanksHands.jpg
뱅크스의 손에 부상 이력(1~9)과 기억에 남는 선방 부위(A~F)를 표시한 그림. 숫자, 즉 점으로 표시된 곳은 모두 탈골된 적 있거나 골절상을 입었던 부위이다.

그리고 부상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용맹함의 소유자이다. 보호 장비도 미흡하고 선수들도 거칠게 플레이했던 시절 이렇게 용맹한, 나쁘게 말하면 무모하고 위험한 플레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잔부상을 커리어 내내 당했으며, 특히 손바닥 쪽은 안 다친 곳이 없을 정도로 매번 부상을 당했다. 선수 시절 엉덩이도 부러지고, 다리에 철심도 박는 등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 몸을 안 사려서 부상으로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에게 조언할 때 늘 용맹한 태도를 강조하며, 골키퍼로서의 기본기를 중시한다.

단점을 굳이 말하자면 26세가 되어서야 국가대표팀에 승선했을 정도로 늦게 빛을 본 대기만성형 선수라서 다른 역대급 골키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성기가 짧았다. 그러나 1972년 교통사고 직전까지 약 10년 정도는 전성기의 폼을 유지했으므로 전성기가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니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잡힌 선수라서 플레이 자체의 결점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닝스나 쉴튼 같은 후배 골키퍼들이 말했듯이 뱅크스의 시대에는 골키퍼 코치가 없었고, 뱅크스도 그런 환경에서 자란 터라 위대한 골키퍼 레프 야신의 플레이를 많이 참고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켰다고 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뱅크스는 야신과 마찬가지로 몇 안되는 '완성형' 골키퍼로 군림하였으며, 많은 선수들의 존경을 받아 그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야신과 마찬가지로 스위핑이나 수비 조율에서도 막힘없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현대 골키퍼와 비교해도 모자랄 것 없는 플레이를 보여줬으니, 사실상 무결점 골키퍼라고 봐도 무방하다.

4. 사망

2019년 2월 12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이후 스토크 시티의 홈구장 앞에 놓인 그의 동상에는 구단을 가릴 것 없이 많은 팬들이 머플러를 두고 가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에서는 골키퍼 조 아년, 카스퍼 슈마이켈, 잭 버틀랜드, 조 하트[3] 관을 들었다. 바비 찰튼, 제프 허스트, 데이비드 시먼, 팻 제닝스, 레이 클레멘스 등도 모습을 보였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수훈

대영제국 훈장 4등급 (OBE): 1970

6. 평가

1960년대 레프 야신과 1970년대 디노 조프의 사이를 잇는 골키퍼계의 본좌이자 레프 야신과 더불어 1960년대를 대표하는 골키퍼, 그리고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는다.[5]

1966년 월드컵 이후 스타로 발돋움하여 1972년 부상 직전까지 약 6년간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군림했으며(물론 유로 1968의 디노 조프나 1970 월드컵의 마수르키에비츠처럼 단기적으로 뱅크스급의 임팩트를 남긴 골키퍼들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1966~1972년 최고의 골키퍼가 뱅크스라는 의견에 당대 선수들도, 전문가들도 딱히 이견이 없다.) 특히 1970년 펠레의 헤더를 막아낸 이후로 더한 명성을 얻었고 교통사고 부상 직전까지 폼을 잘 유지하며 역대 골키퍼 중 야신 바로 다음으로 거론될 만한 위치까지 올라섰다. 실제로 1981년 플라카르의 올타임 XI 투표에서 야신, 사모라에 이어 골키퍼 중 득표율 3위를 기록했다.

현역 시절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70년(월드컵 이전이다) 월드스포츠의 '지난 20년간 최고의 팀' 투표에서는 지우마르[6], 베아라 등을 제치고 야신에 이은 2위에 올랐으며, 당시 전문가들이 선정했던 풋볼 리그 올스타팀에도 거의 매번 만장일치에 가까운 결과로 이름을 올렸다. 뱅크스의 현역 시절 유명한 별명 중에는 'World No. 1'이 있었을 정도로 야신을 잇는 골키퍼계의 상징이었다.

IFFHS에서는 뱅크스를 20세기 골키퍼 중 2위로 선정했다. 디노 조프를 근소한 차이로 제치고 2위에 등극한 것이다. 1위는 레프 야신. 이후에도 2013년 월드사커의 올타임XI 투표나 프랑스 풋볼이 자체적으로 선정한 역대 골키퍼 Top 10에서 모두 2위에 선정되는 등 여전히 그 위상이 굳건하다. 그러나 2020년 발롱도르 드림팀 투표에서는 8위에 그치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클럽 커리어가 상대적으로 저조하고 월드컵 활약이 뛰어나서 그런지 유럽보다는 남미 쪽에서 평가가 좋은 인물이다. 이는 비슷한 스타일의 커리어를 보낸 바비 무어와 일맥상통한다. 특히 브라질에서는 그 평가치가 거의 야신에 맞먹을 정도로 높다. 이는 선술한 1981년 플라카르 올타임XI 투표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토스탕이나 제프 마이어와 마찬가지로, 뱅크스도 비운의 사고로 인해 은퇴한 선수를 거론할 때 늘 거론된다. 특히 뱅크스는 경기 중 손가락이 부러지든, 다리가 부러져서 철심을 박든 개의치 않고 금세 부상에서 회복하여 몇 경기만에 복귀할 정도로 놀라운 내구성과 성실성을 자랑했으나, 축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교통사고로 커리어를 일찍 마감하고 말았다는 점이 더더욱 아쉽다.
파일:BanksS.jpg
브리타니아 스타디움 앞의 뱅크스 동상

뱅크스의 메이저 트로피 수는 커리어를 통틀어 단 3개뿐이다. 그러나 레스터나 스토크같이 리그 중하위권을 맴돌던 팀에서 커리어의 90% 이상을 보냈고, 특히 스토크는 지금까지도 메이저 대회 우승이 단 1회인데, 그게 다름아닌 뱅크스와 함께 달성했던 1972년 리그컵 우승이다. 스토크 시티 홈구장에 동상까지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만 아무래도 소속팀의 한계 때문에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의 영향이 있었는지, 발롱도르 투표에서 유효표를 받은 것은 1966년의 14위, 1970년의 10위, 1972년의 7위가 전부다.

뱅크스의 국가대표팀 기록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 총 73경기에서 0.78실점률을 기록했고 35경기는 무실점으로 지켜냈다. 그리고 뱅크스가 나온 73경기에서 잉글랜드는 단 9번만 패했다.

야신, 조프, 노이어, 부폰, 카시야스 등 뱅크스와 비슷한 급으로 거론되는 역대 최고의 골키퍼들이 모두 A매치에서 4실점 이상 기록한 적이 있는 반면, 뱅크스는 A매치 73경기에서 단 한 번도 4실점 이상 기록한 적이 없다[7]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정리하자면, 뱅크스는 중하위권 팀에서 커리어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았고, 거기에 더해 국가대표팀에서의 전설적인 활약을 통해 세계 축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며, 레프 야신 다음 역대 No. 2 골키퍼 자리를 두고 잔루이지 부폰, 디노 조프, 마누엘 노이어등과 경합할 수 있는 레전드이다.

6.1. 뱅크스에 대한 말, 말, 말

The World Number 1 Goalkeeper
ITV 축구해설자 브라이언 무어[8]
당신은 마법의 골키퍼였다.
그 때 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공을 보냈고, 셀레브레이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뱅크스가 나의 시야에 나타나더니 공을 밖으로 쳐냈다. 마치 푸른 도깨비 같았다.
펠레
고든을 상대로 플레이하는 것은 악몽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막아내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공격수로서의 의욕을 잃게 된다. 그러나 내가 국가대표팀에서 그랬듯이 그와 같은 팀에서 뛰면 이 이야기는 반대가 된다. 그는 좋은 운동신경도 가졌지만, 그의 진짜 비밀은 위치 선정 능력이다. #
바비 찰튼
그는 나를 상대로 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의 위치선정은 언제나 정확했다. 그는 그의 덩치에 비해 매우 용감했다. 그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1970년에 펠레를 상대로 증명했듯이 자신이 원할 때는 언제든 화려해질 수 있었다. #
조지 베스트
나는 당신의 완벽한 선방을 보고 꿈을 키운 많은 골키퍼 중 한 명입니다.
잔루이지 부폰
그것은 내가 본 최고의 선방이었다. 반응, 스피드, 공을 막기 위해 그가 이동한 거리, 막은 방식, 선방 후 공이 날아간 위치까지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한 선방이었다. 나는 그 선방을 반복해서 보았고, 볼 때마다 그것이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나는 뱅크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
피터 슈마이켈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여겼다. #
리나트 다사예프
나와 같은 시대에 뛴 모든 골키퍼들은 그를 따라하려고 했다. 그는 기준을 세웠고, 빠지는 경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꾸준했다.
그가 뛰었던 필드를 보라. 그곳은 울퉁불퉁한 진흙탕이었는데, 그는 거기에 적응했고 그 문제점을 극복했다. 또한 그가 거의 장갑 없이 경기하거나 면장갑만 끼고 경기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다. #
팻 제닝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골키퍼 코치가 없어서 뛰어난 선수를 보고 따라해야 했는데, 내가 참고한 롤모델은 뱅크스였다. 그는 나의 영웅이다.
그와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훈련하던 시절, 나는 그에게서 위치선정 센스와 플레이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이다. #
피터 쉴튼
그는 나의 멘토였으며, 누가 봐도 어려운 것을 쉽게 해내는 선수였다.
레이 클레멘스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장면 중 하나다. 그 선방을 여러 번 봤고, 정말 대단한 선방이며 믿을 수 없는 선방이라고 생각했다. #
로돌포 로드리게스
그는 멋있어 보이려고 하지 않았고, 늘 올바른 위치에 있었으며, 각도를 좁히고 페널티 박스를 지배했다. 그와 함께하는 선수들은 든든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경기를 할 수 있었다.
피터 보네티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팀이라도 뱅크스를 그리워했을 것이다.(1970년 월드컵 8강 독일전을 두고)
알렉스 스테프니
우리가 아무리 슛을 날려도 그는 모두 막아내곤 했다. 결국 우리는 그에게 '이러다가는 골을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잃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앨런 볼
그는 당대 최고의 골키퍼였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선수 중 그에 근접했던 선수는 팻 제닝스뿐이다.
앨런 멀레리
그는 엄청난 선수였다. 사람들은 늘 그가 펠레를 상대로 기록했던 선방에 대해서만 말하지만, 내가 고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몇몇 골키퍼들과는 달리 쓸 데 없는 다이빙을 거의 하지 않고 필요한 선방만 하기 때문이며, 그의 위치선정 능력과 각을 좁히는 능력은 분명 퍼스트 클래스였다. #
그레이엄 테일러
사람들은 그가 브라질전에서 보여준 선방만 기억하지만, 그는 항상 좋은 선방들을 보여줬다. 매우 꾸준하고, 뛰어난 슛 스토퍼이며, 공중 장악력이 훌륭하고, 팀에 침착성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선수이다. 잉글랜드는 좋은 골키퍼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그 누구도 뱅크스만큼 뛰어나지는 않았다. #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매우 기쁘다. 그러나 고든 뱅크스의 선방이 더 의미 깊었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영광이다.
빅토르 발데스, 2013-2014 시즌 레알 베티스전에서 자신이 기록한 세이브가 고든 뱅크스의 '세기의 선방'과 비교되는 것에 대한 소감
그는 우리 포지션에서 배출된 몇 안 되는 슈퍼스타 중 하나이다. 매우 훌륭한 선수였다. #
카스퍼 슈마이켈

6.1.1. 축구 황제 펠레와의 관계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의 세이브.
펠레(자신의 헤더를 막은 고든 뱅크스에 대한 칭찬)
지금도 세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 순간에 대해 물어온다. 월드컵을 대표하는 장면이라며! 물론 과정이 너무 아름다워서라는 사실을 잘 안다. 자이르지뉴의 굉장한 드리블과 크로스, 이어진 헤딩이 멋졌다. 솔직히 말하면 내 선수 생활을 통틀어 그렇게 잘 맞은 헤딩도 없었다. 나는 결코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펠레
잉글랜드의 골 문은 은행 문만큼이나 문턱이 높았다.[9]
ㅡ 펠레(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 끝난 후 고든 뱅크스에 대한 평가)
펠레는 공보다 높이 점프하여 구석을 향해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것은 완벽한 헤딩이었다. 나는 오른쪽을 향해 몸을 날렸으며 공이 골라인 바로 앞에서 땅에 닿은 후 튕겨 올라가는 순간 오른손으로 공을 살짝 건드렸다.
ㅡ 고든 뱅크스(자신의 자서전에 서술)

7. 여담

고든 뱅크스가 루카스 맬로우에게 주는 골키핑 조언

안녕 루카스, 너희 아버지 말씀을 듣자하니 골키퍼가 되는 게 꿈이라며? 좋아. 우린 언제나 좋은 골키퍼가 필요하지. 몇 가지 조언을 해 줄게.

우선, 열심히 노력해야 해. 골키퍼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네가 노력한다면 더 쉬워질거야.
많은 플레이를 하다 보면 알맞는 각을 찾기 쉬워질 거야. 어디로 공이 향할지 알 수 있게 되지. 이걸 '예측'이라고 불러. 좋은 골키퍼는 좋은 예측 능력을 가지지.
눈은 공의 방향과 경로를 파악해서 뇌와 손에 메시지를 보내지. 계속 연습해. 익숙해질 거야.
자신이 골대의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파악하고, 각을 좁혀서, 스트라이커가 득점할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낮춰야 해.
작은 공으로 훈련해 봐. 작은 공에 익숙해지면 큰 공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쉬워질거야.
탁구 같은 운동을 해 보는 것도 좋아. 그런 스포츠는 반응을 예리하게 해 주고, 손과 눈의 협응성을 길러 주지. 테니스 공을 벽에 던지고 다시 받는 훈련을 하는 것도 좋아.
그리고 용감해져야 해. 뛰어나가서 크로스를 차단하거나, 너를 지나쳐 득점하려는 스트라이커의 발로 뛰어들려면 용감해야 해.
그리고 또 강해져야 해. 실점하거나 실수할 수도 있어. 그건 우리 모두가 그래.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 하지만 나는 내가 당황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하지.
행운을 빌게.

고든 뱅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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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쉴튼과는 운명의 선후배 관계다. 띠동갑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조금 늦게 빛을 본 뱅크스와 달리 쉴튼은 매우 이른 나이부터 초특급 유망주로 평가받으며 폭풍성장했고 쉴튼의 재능을 알아본 뱅크스가 쉴튼의 멘토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성장 배경 때문인지 쉴튼은 은퇴 이후에도 뱅크스가 자신의 우상이라고 자주 언급하고 다니며, 뱅크스도 쉴튼에 대한 좋은 평가를 많이 했다. 둘은 레스터 시티에서 스토크 시티로 이적했다는 공통점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수문장 자리에서도 배턴 터치를 한 특이한 사례이다.

* 한편, 뱅크스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쉴튼은 클럽의 주전 자리를 보장해주지 않으면 프로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1967년 레스터 시티는 뱅크스를 스토크 시티로 이적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는데, 하루는 뱅크스가 리차드 3세 초등학교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다가 당시 13세였던 피터 쉴튼을 보고 구단의 코치인 조지 데위스에게 "저 아이는 정말 잘하는군."이라고 말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피터 실턴을 직접 본 데위스는 "저 아이가 곧 너를 1군에서 밀어내겠는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3년 후 실턴은 뱅크스를 이적하게 만들고 만 16세에 불과한 나이에 레스터 시티의 주전 수문장으로 등극했다.[10]
파일:Bankswithtorch.jpg

* 2012년 런던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성화가 웸블리 스타디움 앞을 지날 때 뱅크스의 손을 거치는 것을 보면 감회가 남다르다.
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골키퍼.png

[1] 이 대회에서 보여준 뱅크스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 레프 야신 유로 1976 이보 빅토르, 유로 1992 피터 슈마이켈, 2002 한일 월드컵 올리버 칸, 2006 독일 월드컵 잔루이지 부폰, 2014 브라질 월드컵 마누엘 노이어, 유로 2020 잔루이지 돈나룸마와 함께 단일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골키퍼 퍼포먼스로 평가받는다. [2] 물론 월드컵 본선에서 그랬다는 거고, 일반 국가대표 친선 경기나 클럽 경기에서는 슈퍼 세이브를 많이 보여줬다. [3] 각각 당시 체스터필드, 레스터 시티, 스토크 시티, 잉글랜드 국가대표 골키퍼였다. 염연히 따지자면 하트는 2019년 당시 국가대표는 아니었지만 현역 잉글랜드 골키퍼 중 가장 많은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했던 선수. 현재는 하트도 은퇴하면서 잉글랜드 대표팀 현역 최다 출장 골키퍼는 조던 픽포드가 되었다. [4] 2017년부터 시상되는 FIFA 올해의 골키퍼와는 다른 상이다. [5] 그나마 뱅크스에 비견될 만한 잉글랜드 골키퍼는 피터 쉴튼이 유일한데, 쉴튼은 뱅크스와는 달리 '압도적인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군림한 적이 없다. '전성기의 길이'로 따지면 10대부터 40대까지 미친 롱런을 보여주고 국가대표팀에서 20년 넘게 주전경쟁한 쉴튼이 뱅크스를 압도하겠지만... [6] 특히 이 사람은 전설의 브라질 대표팀에서 주전 수문장을 맡아 1958, 1962 월드컵에서 연속으로 우승한 골키퍼로, 축구 역사상 유일하게 2년 연속 월드컵을 우승한 팀의 주전 골키퍼라는 기록을 보유중이다. [7] 수비진 빨도 아니다. 이 시기 잉글랜드는 1964년에 뱅크스가 출전하지 않았던 브라질전에서 5실점으로 무너지며 5:1 패배를 당한 기록이 있다. [8] 1960년대의 케네스 월스텐홈(1966 WC 결승전 관중 난입 당시 They think it is all over이라는 멘트를 날린 것으로 유명한 그 해설자다)을 이은 Match of the Day 진행자. 1970년 브라질전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뱅크스를 늘 이렇게 표현했다. 1970년대 초 스토크 시티의 경기와 잉글랜드 대표팀의 경기를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브라이언 무어의 이 멘트를 꽤 자주 들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 경기. [9] 고든 뱅크스의 성인 뱅크스(Banks)가 영어로 은행이란 뜻인것을 이용한 말장난 [10]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당시 쉴튼이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뱅크스를 밀어낸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쉴튼이 그 정도로 대단했으면 국가대표팀에서도 쉴튼이 곧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했을 텐데, 쉴튼은 뱅크스가 1972년 교통사고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고 나서야 국가대표팀 주전 자리를 차지했으며, 이마저도 1970년대 중후반까지 레이 클레멘스와 엎치락뒤치락하며 로테이션으로 출전하다가 1980년대가 되어서야 완전한 주전 골키퍼로 자리잡았다. 또한 쉴튼이 그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면 올타임 넘버원 골키퍼는 레프 야신이 아닌 쉴튼이었을 것이다. 레스터에서 진행된 이 둘의 세대교체는 2014-15 시즌 첼시의 체흐-쿠르투아 세대교체와 비슷하게 '나이'가 주된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는 골키퍼의 가치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가 많든 어리든 이적료가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 실제로 1960년대 중반부터 뱅크스는 고향 연고팀 스토크 시티는 물론 리버풀, 에버튼 같은 빅클럽에게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고, 특히 1967년에는 리버풀 이적 직전까지 갔으나 아쉽게 불발된 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레스터 입장에서는 곧 30대가 되는 뱅크스보다는 그보다 열두 살 어리고 미래도 밝아 보이는 쉴튼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11] 사실 PL 자체가 자국인 슈퍼 스타 플레이어보다 외국인 슈퍼 스타 플레이어가 많기로 유명한 리그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타당한 이야기다. 그런 와중에도 리그 탑급 키퍼 자리를 지키던 조 하트마저 국대만 오면 이상할 정도로 부진했으니... 그나마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드디어 조던 픽포드가 확고한 주전 수문장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후로도 딘 헨더슨, 닉 포프 등이 연달아 등장하며 고민을 덜었다. [12] 물론 그린은 당시 리그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기 때문에 주전으로 내세워도 문제는 없었다. 정작 본선에서 너무 큰 실수를 저질러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