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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3:19:38

마라카낭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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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colcolor=#00296d> 비극의 시작
언어별 명칭
한국어 마라카낭의 비극
포르투갈어 Maracanaço
스페인어 Maracanazo
1. 개요2. 사건 이전
2.1. 폭풍전야2.2. 운명의 경기
3. 경기 종료 직후 반응4. 사건 이후5. 마라카낭의 기적을 만들어낸 영웅6. 유사 사례7. 관련 사례8. 기타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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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4강 결선 리그[1] 최종전인 브라질 우루과이의 경기를 지칭한다. 앞선 2경기에서 2승을 거둔 개최국 브라질은 1승 1무를 거둔 우루과이와 비기기만 해도 우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승을 예약해놓은 듯 한껏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후반전 초반에 선제골을 넣자 브라질의 분위기가 역대급으로 더더욱 고조되었지만 후반전 중반에 들면서 우루과이에게 갑작스럽게 1:2 역전패를 당하여 결국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브라질 국민들을 매우 큰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은 마라카낭의 비극(기적)으로 명명되었다.

2. 사건 이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2년 만에야 다시 열리게 된 FIFA 월드컵에서 개최권을 따낸 브라질은 첫 우승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다[2].

지역 예선이 시작되기 전 아르헨티나가 기권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CONMEBOL 코파 아메리카에서 3연패(1945~1947년)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강팀이었기 때문에 그런 아르헨티나가 기권했다는 것은 난적이 하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승을 노리는 브라질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는 호재였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원래 1946년 월드컵 개최자격을 따냈으나 2차 세계대전 전쟁 전후복구하느라 아무도 참가신청을 하지 않아서 대회가 취소가 되었다. 그래서 다음 대회 개최권을 주겠노라고 FIFA에서 약속했으나 이후 FIFA는 약속을 깨고 1950년 월드컵 개최권을 투표해서 브라질이 따내게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이에 불만을 품고 이 월드컵은 물론 그 다음 월드컵인 1954년 스위스 월드컵까지 기권해 버렸다. 단, 아르헨티나가 다시 진출한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1라운드 16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여 대회 13등으로 8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렇게 아르헨티나가 빠진 상태와 동시에 6.25 전쟁도 발생된 상태에서 시작된 월드컵 본선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치렀다. FIFA와 브라질 월드컵 조직 위원회는 경기수익을 한 푼이라도 더 뽑아먹기 위해, 모든 경기를 8강도, 토너먼트도 없이 조별리그로 바꿨으며 그 조별리그에는 총 4개 조 16개 팀이 참가하는 걸로 했다. 하지만 우루과이가 속한 조를 비롯한 두 개의 조에서 기권팀이 연거푸 발생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13개 팀이 13강 조별리그를 치렀다. 그리고 8강전이 없이 조 1위 4강 결승리그 진출제도로 진행되었다.

개최국 자격으로 13강 조별리그 1조에 배정된 브라질은 개막전을 멕시코와 치르고 그 다음은 스위스, 마지막으로 유고슬라비아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멕시코를 4:0으로 크게 꺾고 스위스와는 2:2로 비겼지만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꺾으며 조 1위로 당당하게 최종 리그에 진출하였다.

옆의 2조는 껄끄러운 상대로 여겨졌던 잉글랜드 미국에 0:1로 덜미를 잡히는 이변이 일어났다. 원래 미국 팀은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서 준결승에 진출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팀이었지만, 이 월드컵에서 미국은 원래 출전할 예정이었던 선수들이 2차 대전 6.25 전쟁에 죄다 징집당해서 그 빈 자리를 불법체류자, 유학생들로 대충 메워서 급조된 어중이떠중이 팀이었다. 즉, 네임밸류만 있었지 내용물은 부실한 팀이었다. 그런 팀한테 축구 종주국의 세계 최정예 멤버로 구성된 잉글랜드가 뜻밖의 일격을 먹은 것이다.[3] 결승골을 넣은 조 게이젠스 미국 국적조차 취득하지 못한 아이티 출신 일개 유학생이었지만, 이 득점 하나로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가 되었다. 그 여파로 잉글랜드는 스페인에도 털리며 8등으로 탈락하여 4강 결승리그 진출권을 스페인에 내줘야만 했으며 3조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이탈리아가 1949년에 있었던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국대 전력이 누수된 탓에 스웨덴에게 2:3으로 덜미를 잡혀 광탈(7등)해 버렸다.[4] 단지 4조의 우루과이는 지난 1949 브라질 코파에서 자신들에게 2:3패배를 일으키며 1949코파 4위를 기록한 볼리비아 단 한 팀을 8:0으로 복수하고 4강 결승리그에 올라갔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 터키가 2차 세계대전 복구 문제와 한국전쟁도 발생되어서 일찌감치 기권했고 바통을 넘겨받은 프랑스, 포르투갈, 인도까지 줄줄이 기권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당시 서독 동독은 추축국으로 2차 대전을 일으킨 책임 징계가 있었기 때문에 진출이 불가능했다.[5]

이러니 브라질 입장에서 남아 있는 난적이라고는 우루과이 하나 밖에 없었으며, 월드컵 우승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기 시작한다. 4강 결승리그 첫 경기는 스웨덴과 치르고 그 다음은 스페인, 마지막으로 우루과이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브라질은 스웨덴을 상대로 7:1 대승을 거두고, 스페인을 상대로 역시 6:1 대승을 거둔다. 그러는 동안 우루과이는 스페인을 상대로 2:2로 무재배를 하더니, 스웨덴을 상대로는 선제골을 얻어맞고 엄청나게 고전하다가 3:2로 겨우 역전승을 거두었다.

2.1. 폭풍전야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1 브라질 2 2 0 0 13 2 11 4 ?
2 우루과이 2 1 1 0 5 4 1 3 ?
3 스페인 2 0 1 1 3 8 -5 1 우승 실패
4 스웨덴 2 0 0 2 3 10 -7 0 우승 실패
마지막 경기를 남겨 두고 이렇게 되자, 아예 브라질에서는 아직 경기도 치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우승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경기가 사실상의 결승전이 된 모양새인데, 무승부만 해도 쥘리메컵은 브라질의 손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페인과 스웨덴을 상대로 고전했던 우루과이가 그 두 팀을 압살한 브라질을 이기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브라질 전역에선 모두가 브라질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였고, 브라질 바깥의 축구 팬들 가운데서도 어느 누구 하나 농담으로라도 우루과이의 우승을 점치지 않았다. 우루과이에서도 진작 체념한 사람들이 많았고 일부 팬들이 '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며 격려를 해 줄 뿐이었다. 이미 우승컵의 주인공은 브라질로 정해져 있고 우루과이는 들러리일 뿐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6]

게다가 FIFA와 브라질 월드컵 조직위원회까지 월드컵 우승 메달에 1950 FIFA 월드컵 우승국 브라질이라는 글귀를 굵직하게 새겨넣기까지 하면서, 브라질은 월드컵 우승을 축하할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언론사 역시 이 설레발에 동참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마치 우승팀이 브라질로 미리 정해져 있다는 뉘앙스의 기사를 내보냈다. 오히려 비관적이거나 냉정하게 보는 중립적인 브라질 발 기사를 찾는게 더 빠를 정도. 숙소에서 이 신문을 본 우루과이 팀의 주장인 옵둘리오 바렐라와 훗날 역전 결승골을 넣게 될 선수인 알시데스 기지아"우리가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자!"며 팀 동료들과 함께 문제의 신문에 오줌을 누는 퍼포먼스를 했다.

브라질 전역에 울려퍼지는 대대적인 우승 설레발 속에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지나친 설레발은 필패라고 우려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상파울루 FC의 감독인 파울루 마샤두[7]가 있었다. 경기 전날 브라질 대표팀의 훈련을 참관한 그는 훈련 도중에 정치인, 기자, 사진기사들을 비롯해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훈련장을 찾아와 선수들을 "미래의 챔피언"이라 립서비스를 하는 광경을 보고 당시 브라질 대표팀 감독이던 플라비우 코스타에게 선수들에게 지나치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는데 그에게 무시당하자 "이 경기는 우리가 졌다!"고 분통을 터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우려는 다음날 현실이 되고 말았다.

드디어 7월 16일, 운명의 그 날이 왔다. 킥오프 전부터 리우데자네이루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 관중석에는 조국 브라질이 우승하는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려는 브라질 관중들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173,850명이 경기장에 입장했으며, 2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기록도 있다. 이러니 아직 킥오프도 안 했는데 우루과이 선수들이 분위기에 눌려 버리기는 당연지사. 게다가 결승전에 킥오프 직전 연설위원으로 초대된 당시 리우데자네이루 시장이었던 안젤루 멘데스 지 모라이스조차 미리 브라질의 우승은 기정사실이라는 식의 연설을 했다.
몇 시간 뒤 수백만 명의 동포들로부터 챔피언으로 환영받을 선수들이여! 지구상에 적수가 없는 당신이여! 그 어떤 경쟁자도 이길 당신이여! 내가 이미 승자로서 경례하는 당신이여!
당시 리우데나자이루 시장 안젤루 멘데스 지 모라에스

2.2. 운명의 경기

파일:1950 FIFA World Cup Brazil Poster.png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결선리그 제6경기(결승전)
1950년 7월 16일 15:00(UTC-3)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심: 조지 리더 (잉글랜드)
파일:브라질 국기.svg 1 : 2
파일:쥘리메 컵.svg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브라질 우루과이
47' 프리아사 득점 66' 후안 스키아피노
79' 알시데스 기지아
관중: 199,954명[8]
라인업 [9] 번호 이름 비고 라인업 번호 이름 비고
선발 1 바르보자 GK 선발 1 로케 마스폴리 GK
2 아우구스투 파일:주장 아이콘.svg 2 마티아스 곤살레스
3 주베나우 3 에우세비오 테헤라
4 바우에르 4 슈베르트 감베타
5 다닐루 아우빙 5 옵둘리오 바렐라 파일:주장 아이콘.svg
6 비고지 6 빅토르 로드리게스 안드라데
7 프리아사 파일:득점 아이콘.svg 7 알시데스 기지아 파일:득점 아이콘.svg
8 지지뉴 8 훌리오 페레스
9 아데미르 9 오스카르 미게스
10 자이르 10 후안 스키아피노 파일:득점 아이콘.svg
11 시쿠 11 루벤 모란
교체 카스틸류 GK 교체 아니발 파스 GK
네나 엑토르 빌체스
니우통 산투스 윌리암 마르티네스
노로냐 후안 카를로스 곤살레스
후이 로돌포 피니
엘리 두암파루 와싱톤 오르투뇨
마네카 루이스 리호
바우타자르 에르네스토 비달
아당지뉴 카를로스 로메로
아우프레두 Ⅱ 후안 부르게뇨
호드리게스 훌리오 세자르 브리토스

당시 경기를 중계한 브라질의 라디오 중계 실황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유튜브에도 올라와 있다. 골영상 브라질의 국가 연주부터 경기 종료 후의 침묵까지 모두 상세히 남아 있으니 관심있다면 참고할 것. 현재 골영상 은 유투브에 올라와 있지만 전후반 90분 풀로 기록된 동영상은 존재하지 않거나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브라질은 초장에 끝장을 내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거칠게 우루과이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우루과이에는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와 레프트 하프 빅토르 로드리게스 안드라데가 있었다. 브라질은 아웃사이드 라이트인 프리아사 쪽으로 많이 공격을 해왔고 그 때마다 안드라데는 벽처럼 브라질 공격수들을 가로막았고 마스폴리는 신들린 선방으로 우루과이의 골문을 방어해냈다.

10분 이후에는 우루과이도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두 번 모두 브라질의 골키퍼 바르보사에게 걸리고 말았고, 오히려 아데미르가 위협적인 움직임으로 돌파를 시도했지만 마스폴리의 판단에 막히고 말았다.

전반 17분, 우루과이에서 처음으로 결정적인 찬스를 맞이하였다. 우루과이의 에이스 후안 스키아피노가 패스해 준 볼이 브라질의 바우에르를 지나쳐 좋은 위치에 있던 페레스에게 가고 말았지만 페레스는 그 찬스를 놓쳐버렸다. 브라질도 마스폴리의 볼 캐칭 미스가 있었지만 아데미르도 그것을 놓치고 말았고, 아데미르는 그를 만회하기 위한 듯 시쿠의 크로스를 헤더로 연결했지만 마스폴리의 슈퍼 세이브로 인해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브라질 선수들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지지뉴, 아데미르, 자이르, 프리아사, 시쿠 등 공격진이 총출동하여 우루과이의 문전에 슈팅을 날려댔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따금씩 역으로 우루과이의 후안 스키아피노가 좋은 찬스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브라질의 골대를 때리는 슈팅을 날리기도 했지만[10] 우루과이 역시 소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계속 공은 우루과이의 진영에서 놀았고 브라질의 슈팅 숫자와 마스폴리의 선방 횟수만 늘어갈 뿐이었다.

초반부터 당연히 압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브라질은 우루과이를 상대로 골을 터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지만 않는다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기 때문에 브라질의 우승을 굳게 믿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리고 후반 2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계속해서 우루과이의 왼쪽을 공략하던 프리아사가 날린 슈팅이 마스폴리의 오른쪽을 뚫은 것이다. 그 순간 마라카낭은 물론이고 브라질 전체가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고 축제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랐다. 그렇게 브라질이 이대로 첫 월드컵 우승을 할 것만 같았다.

이 쯤 되면 우루과이는 기가 죽을 만도 했지만 우루과이 선수들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주장 옵둘리오 바렐라를 축으로 단결하여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타이트하게 브라질 공격수들을 압박하였다. 반면 브라질 선수들은 선제골이 독이 되었는지 뭔가에 홀린 듯한 눈동자를 한 채 경기를 했다. 브라질 선수들의 얼굴은 해맑긴 한데 이게 엄청 불길한 얼굴이었다. 마치 술 먹은 얼굴 같았다.

우루과이는 선제골을 허용하고는 오히려 더 악착같이 맹공을 퍼부은 끝에 후반 21분 우루과이의 알시데스 기지아가 땅볼 크로스를 올렸고 후안 스키아피노가 브라빌의 수비수 주베나우를 앞에 두고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했다. 바르보사는 이를 막지 못했고 골문 오른쪽 상단 구석을 찌르면서 1:1 동점을 만들었다. 순간 우루과이 벤치에서는 화색이 돌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브라질 선수들과 관중들의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중계 방송으로 경기를 시청하고 있던 브라질 국민들도 "이거 정말로 역전골 먹혀서 지면 어쩌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초조하고 불안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브라질 관중들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스키아피노의 슈팅이 기술적이긴 했지만 쉽게 나올 수 없는 골이기도 했고, 비기기만 해도 우승이라 설령 우루과이의 파상공세에 밀리더라도 나머지 시간만 잘 버티면 우승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반 27분, 브라질의 공격 상황에서 우루과이의 자책골이 나올 뻔 했지만 감베타의 호수비로 위기 상황을 모면하였다.

후반 34분, 우루과이의 알시데스 기지아가 오른쪽에서 빈 공간으로 공을 몰고 들어가다 페널티박스에 진입하자 곧바로 슛을 날려 2:1 역전골을 넣었다. 각도가 별로 없는 상황이었지만 공은 바르보사 골키퍼와 골포스트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이렇게 역전을 당하면서 뜨거운 함성이 가득했던 마라카낭은 그 자리에서 찬물을 끼얹은 듯이 완전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급해진 브라질은 수비수 바우에르까지 공격에 가담해 계속해서 우루과이의 골문을 두드렸지만 터지라는 동점골은 터지지 않고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갔다. 브라질 모두가 꿈에도 상상하지 않은 시나리오, 즉 우루과이에게 지고 우승을 놓친다는 그 시나리오가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기지아가 역전 결승골을 넣은 지 10분 남짓 지나자 브라질 우승의 불씨가 거의 다 꺼져가는 와중에 마지막 공격 기회가 찾아왔고 우루과이의 골문 근처에서 브라질의 자이르가 공을 받아 최후의 슈팅을 날렸으나 그마저도 마스폴리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고 잠시 후 주심은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우루과이는 이 우승으로 인하여 기록을 하나 세우게 되었는데, 그것이 '최소한의 경기로 FIFA 월드컵 우승을 이룩한 팀'이다.[11] 아이러니한 것은 그 우루과이가 정확하게 60년 후에는 오히려 정반대로 'FIFA 월드컵 한 대회 최다 경기팀'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우루과이는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륙간 플레이오프 코스타리카전과 3, 4위전 독일전까지 총 27경기[12]를 뛰었다. 총 전적 10승 9무 8패를 기록했다.

한편, 같은 시각 상파울루에서 벌어진 스웨덴과 스페인의 마지막 경기는 스웨덴이 3:1로 승리하였다. 아래는 최종 순위표.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1 우루과이 3 2 1 0 7 5 2 5 우승
2 브라질 3 2 0 1 14 4 10 4 준우승
3 스웨덴 3 1 0 2 6 11 -5 2 3위
4 스페인 3 0 1 2 4 11 -7 1 4위

3. 경기 종료 직후 반응

오로지 세 사람만이 마라카낭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교황[13], 프랭크 시나트라[14], 그리고 입니다.
알시데스 기지아, 마라카낭의 비극을 회상하며

주심이 경기 종료를 선언하며 휘슬을 분 그 순간, 브라질 관중들은 그대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쥘 리메 FIFA 회장은 이를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적막감이 있었다" 라고 표현했고, 어느 한 브라질 관중의 목격담에 따르면 경기장 안에서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경기가 끝난 직후 2명의 관중이 심장마비, 2명의 관중이 권총 자살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경기 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브라질의 우승을 예상했기에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브라질 우승 기념 메달을 22개나 만들었고[15] FIFA에서도 포르투갈어로 된 우승 축사만 만들어 와서 브라질의 우승 연설만 준비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역전패하는 바람에 이 메달들은 전부 폐기되고 우루과이는 시상식 없이 쥘리메컵을 받았다. 게다가 우루과이 선수들도 분위기가 매우 험악해질 것이라고는 어느정도 예상했는데 정반대로 분위기는 극도로 차분해졌으며, 극도로 고요해졌다.

수용인원이 무려 20만명이었던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기장 중 하나였던 그 마라카낭의 경기장이 차분함을 넘어 괴기스러울 정도로 조용해져서는 설명하지 못할 위화감이 관중석 분위기가 감돌았고, 이러한 분위기에 역으로 더 겁을 집어먹은 우루과이 대표팀은 환호성도 세리머니도 접어두고 살기 위해서 그냥 우승 트로피만 챙겨든 채 황급히 허둥지둥 경기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재빠르게 우루과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상황에서 우루과이 선수들이 기뻐하면서 우승 세리머니를 했다간 수십만명이 경기장에 난입해서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였다.

브라질의 첫 월드컵 우승을 기념하기 위한 노래인 "Brasil os vencedores(승리의 브라질)"도 미리 만들어졌지만 결국 연주되지 못하고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 외에도 브라질의 우승 기념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는 등, 미리 터뜨려 놓은 샴페인들이 한순간에 모조리 김칫국으로 변해버렸다.

경기가 끝난 마라카낭에서는 10만이 넘는 관중이 스탠드에 주저앉아 밤새도록 통곡을 하는가 하면, 울분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설레발 연설을 한 리우데자나이루 시장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4. 사건 이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후 2년간 모든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으며, 4년 동안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후배들이 64년 후 다시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브라질 축구의 또다른 치욕을 만들게 되었다.[16][17]
파일:diariodesevilla.jpg
1950년[18]
파일:1-nike-brazil-home-away-world-cup-2018-shirts.jpg
2018년

이 비극으로 인해 분노한 브라질 축구 협회는 그 당시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입었던 유니폼들을 모조리 수거해서 싸그리 불태워버린 후, 유니폼의 색깔을 새로 정했다. 1914년 브라질 축구 협회의 창립 이후 상/하의 모두 흰색 유니폼을 입어왔는데, 이를 버리고 새로 디자인한 유니폼은 노란색 유니폼, 카나리냐다.[19] 이 유니폼이 세계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현재 유니폼이며 앞으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1950년 이전과 같은 흰색의 유니폼을 착용하는 꼴을 볼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브라질의 축구 팬들은 현재까지도 그 당시 입었던 흰색 유니폼을 백기, 즉, 항복과도 같은 상징이자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다.[20] 브라질 국적의 축구 팬들에게 이 경기 이야기를 하면 표정이 싹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19 코파 아메리카 개막전 홈 유니폼을 다시 흰색으로 결정하였다.

골키퍼로 뛰었던 모아시르 바르보자 나시멘투와 수비진 모두가 이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21] 특히 바르보자는 더욱 심했는데, 일례로 바르보자가 은퇴 후 길을 가고 있는 도중 한 아이가 바르보자를 보고 엄마에게 누구냐고 묻자 아이 엄마의 대답이 "브라질 국민을 절망과 좌절감에 빠뜨린 인물이란다."라고 한 일이 있다.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자 만악의 근원 취급.[22] 그는 2000년에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 '브라질에서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도 43년 이상 형을 선고받지 않는데 나는 그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50년을 죄인처럼 지내야만 했다'는 넋두리를 유언으로 남겼다.

마라카낭 참사가 터지기 전만 해도 바르보자는 남미에서 가장 잘 나가던 골키퍼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이 경기로 인해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실제로 그는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코치 자리에 지원했지만 브라질 축구 협회로부터 패배의 징크스를 가진 선수를 쓸 수는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1993년에는 라디오 중계를 맡으려 했으나 이것도 브라질 축구 협회에서 막았다고 한다. 심지어 바르보자가 흑인이었다는 것까지 꼬투리를 잡혀서 이후 모든 흑인 골키퍼들에게 인종차별이라는 커다란 벽까지 생겼으며, 실제로 지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선발출전 전에는 월드컵에서 선발로 출전한 흑인 골키퍼가 단 한 명도 나오지 못했다.

그나마 참화를 비껴 간 선수들도 인생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월드컵 골든 볼러 지지뉴는 7월 16일, 그러니까 마라카낭의 비극이 발생했던 그 날만 되면 전화선을 끊어 놓았다고 한다. 그것도, 무려 50년 동안이나.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브라질 전역에서 "그 때 왜 졌냐?"는 전화가 하루 종일 울려댔기 때문이다. 지지뉴는 선수 시절의 수많은 영광보다 그 한 경기의 상처에 평생 가슴아파했다고 한다.

이 경기에서 역전 결승골을 넣은 주인공 알시데스 기지아는 50년 정도 지나서 브라질에 여행을 갔다가 정말 기가 막힌 일을 겪었다. 어떻게 봐도 20대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여성 세관원이 기지아를 알아본 것. 기지아가 놀라서 "그건 50년 전의 일이다"라고 답하자 세관원은 "브라질의 우리들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오늘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낀다."고 대답했다고... 이 정도라면 정말 무서울 지경이다. 사실 이 정도의 열성이 있었기에 브라질이 세계 축구 최강국의 지위와 월드컵 최다 우승국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만 이게 너무나 과도한 나머지 축구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국민적 정서가 심해졌고, 그래서 과거에 스콜라리 감독이 "축구 말고 딴 것도 신경 써라! 쫌!"이라고 했을 만큼 집착이 심하다.

이 비극으로부터 63년이 지나서 2013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던 알시데스 기지아 2014 브라질 월드컵 32강 본선 조추첨을 맡게 되었다. 이제는 마라카낭의 참사를 떨쳐내고 우승을 해낸다는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초청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의를 불태웠던 자국의 두 번째 월드컵에서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결국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말았다.

국제적으로는 안 그래도 브라질이 우루과이와 사이가 나쁜 편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우루과이에 대한 브라질의 분노와 증오가 증폭되었다. 즉,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두 나라가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사이가 더더욱 나빠진 것이다.

펠레는 이 경기의 패배를 라디오로 들으면서 브라질을 반드시 세계 최강의 팀으로 만들겠다고 아버지와 예수상 앞에서 맹세했다. 그리고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4강 상대가 우루과이로 정해지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나이대가 비슷한 동료들은 물론이고 당시 아기였던 젊은 선수들까지 4강전이 끝날 때까지 틈만 나면 모두 불러 모아서 이 시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왜 반드시 이겨야 하는지를 연설하고 다녔으며, 당시 해설자로 멕시코에 와 있던 지지뉴와 아데미르도 브라질 선수들에게 "우승을 못 해도 좋으니 반드시 우루과이만큼은 꺾어 달라" 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결국 자신이 선두에 나서 우루과이에 승리를 거두면서 어릴 적 아버지와 예수상 앞에서 했던 그 맹세를 지켰다.

그 날 안타깝게 우루과이의 벽에 막혀서 우승이 좌절되었던 브라질은 다음 월드컵인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과 단체 현피(일명, 베른의 전투)를 뜨는 등 개판을 쳐서 우승은 커녕 준결승조차도 가지 못했다.[23] 하지만, 그 다음 1958년에 이르러서는 펠레의 활약으로 드디어 첫 우승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후 브라질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 4강에서 우루과이를 만나 3:1로 승리하여 이전의 비극을 설욕하고, 우루과이를 4등으로 떨어뜨린 뒤 우승을 차지했다. 우루과이와의 경기 직전에 펠레"우승을 못해도 좋으니 우루과이만큼은 꼭 이기자!"라고 말하면서 서로 결의를 다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201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우루과이를 꺾으며 마라카낭의 복수를 했다. 지금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남미 지역 예선이나 코파 아메리카 그리고 월드컵 결선 토너먼트에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만나면 꼭 이를 악문다. 마치 대한민국 대표팀 일본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을 때처럼 말이다.

브라질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우루과이와 맞붙게 되면 실력차이의 여부를 떠나서 "니들한테만큼은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2016년 3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있었던 헤시피 경기장 브라질 vs 우루과이전에서 루이스 수아레스가 동점골을 넣자 브라질의 관중들은 죽일 듯한 기세로 수아레스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다. #

이 사건을 나타내는 포르투갈어인 마라카나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브라질 대표팀 또는 그 곳을 쓰는 프로 팀인 플라멩구, CR 바스쿠 다 가마, 플루미넨시, 보타포구 FR 등의 팀에게 이길 가망이 없이 작살나버린 팀을 조롱하는 뜻의 일종의 슬랭으로 쓰인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같은 장소에서 치러진 여자축구 4강에서 브라질 여자 축구대표팀이 스웨덴 여자 축구대표팀을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끝에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그나마 브라질 남자 축구대표팀은 마라카낭에서 열린 4강전에서 온두라스를 6:0으로 KO시키며 결승전에 진출해 첫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비록 U-23이지만, 2년 전 브라질에게 치욕을 안긴 독일과의 빅매치가 성사됐다.

이후 브라질은 독일과 1:1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에서 이기며 브라질의 올림픽 축구 역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하게 되었다. 비록 U-23 팀이 나간 관계로 A매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홈에서 개최한 국제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2년 전의 대패와 66년 전의 마라카낭의 비극을 조금이나마 씻어낼 수 있는 의미있는 승리였다.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은 알시데스 기지아는 이 경기에 출전한 22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로 상술하듯이 2014 브라질 월드컵 조추첨에 나왔다. 그는 브라질이 미네이랑의 비극을 겪는 걸 다 보고 다음 해인 2015년, 참으로 기묘하게도 바로 이 경기가 열리던 7월 16일 딱 65년이 지난 그 날[24] 심장마비로 만 88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2021년 7월 11일, 2021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게 0:1로 석패하며 다시 마라카낭의 비극이 재현되었다.[25]

그리고 2026 FIFA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에서 브라질은 두 앙숙인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에게 연달아 패배하는 비극을 당했는데 특히나 아르헨티나전의 경기장이 마라카낭 스타디움이라 또 마라카낭의 비극이 재현된 꼴이었다.[26]

5. 마라카낭의 기적을 만들어낸 영웅

브라질에서 우루과이로 입장을 바꾸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라카낭의 기적', 그 중심에는 당시 우루과이의 주장이자 경기 전 멘탈 관리에 굉장히 도움이 된 옵둘리오 바렐라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 경기 전날 숙소에 브라질의 우승을 미리 기사로 내보낸 신문이 투척되자 그 신문지에다가 오줌을 누는 퍼포먼스를 주도한 그 선수 맞다. 경기 당일 당시 우루과이의 감독이었던 후안 로페스조차 홈 어드밴티지를 등에 업은 브라질의 막강한 화력을 의식하여 수비적인 플레이를 주문했는데 후안 로페스가 나가자마자 옵둘리오 바렐라가 말하기를
후안 로페스는 좋은 감독이야. 하지만 오늘은 그의 판단이 틀렸어. 만약 우리가 수비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스페인이나 스웨덴과 같은 꼴을 당할 것이야.
그리고 세계 최고의 팀과 그 팬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식으로 감동적인 연설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긴다.
경기를 하는 것은 제3자가 아니야. 쇼를 보여주자.
이 말에 선수들이 감동을 받아 킥오프를 하자마자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수비적인 플레이로 일관할 것이라던 예상을 완벽히 깨는 플레이였기 때문에 처음 브라질 선수들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브라질의 화력은 막강했다. 어쩔 수 없이 브라질의 화력에 밀려 전반에만 17개의 슈팅을 허용하고 말았고,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의 선방으로 전반을 동점으로 마무리하였다. 후반 2분, 브라질이 선제골을 넣자마자 우루과이 선수들이고 코치진이고 완전 멘붕에 빠졌는데, 유독 바렐라만이 평정심을 전혀 잃지 않고 공을 하프 라인에 가져다 놓으며
이제 우리가 본때를 보여줄 때가 왔다!
이렇게 외쳤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투지를 잃지 않은 진정한 멘탈갑이었다. 이 말에 우루과이 선수들은 더 맹렬하게 브라질의 골문을 두드렸다. 한 골 먹으면 모든게 끝이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더 거세게 나오니 브라질 선수들은 당연히 더 당황해서 연신 허점을 드러냈다. 결국 브라질 선수들도 20만명이 들어찬 경기장과 국가적인 우승 분위기에 압박을 받는 보통 사람이었고, 우루과이 선수들이 그 허점을 잘 파고들어 동점골과 역전골을 만들어 낸 것. 이렇게 보면 바렐라가 마라카낭 대첩의 진정한 영웅인 셈이다. 그가 우루과이 선수들의 투지를 북돋워주지 않았다면 스키아피노의 동점골도, 기지아의 역전골도 없었을 테니까. 옵둘리오 바렐라는 경기가 끝난 뒤, 그에게 달려들어 승리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순전히 우연이었지.
그리고 64년 후, 당시 우루과이의 영웅 기지아가 2014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식에 참석하였다. 물론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일부러 초청한 것이다. 나이 탓인지 지팡이를 딛고 등장. 64년 전의 일을 생각하면 오묘한 상황일 듯.

이 경기에서 승리한 우루과이는 월드컵 역사상 최소 경기 우승팀이라는 이색적인 기록(조별리그 포함해서 4전 3승 1무 0패)을 달성했으며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월드컵 역사상 최다 경기를 치른 팀이라는 또다른 이색적인 기록(총 27경기, 지역예선 18경기 + 대륙간 플레이오프 2경기 + 조별리그 3경기 + 토너먼트 3경기 + 3/4위전.)을 갖게 되었다.

또한 첫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이기고 우승한 데에 이어 이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을 이기고 우승한 우루과이는 당시 기준으로 남미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얻게 된다. 물론 이 수식어는 1970년대 이후 빛이 바래버리고 말았다. 이 우승이 현재까지 우루과이 대표팀의 마지막 월드컵 우승이며, 그 이후 2010년 월드컵 4강을 빼면 8강에서 멈췄기 때문.

그리고 64년 후인 2014 브라질 월드컵, 우루과이는 64년 전 브라질을 초상집으로 만든 업보인지, 이탈리아, 잉글랜드, 코스타리카와 한데 묶이는 월드컵 역사에 남을 죽음의 조에 걸려 버렸다. 그리고 우루과이는 루이스 수아레스가 빠진 1차전에서 코스타리카에게 사상 첫 패배를 당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으나, 이후 잉글랜드와 이탈리아를 잇달아 잡으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루과이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루이스 수아레스가 조르조 키엘리니를 상대로 핵이빨을 시전하면서 징계로 16강전을 결장하게 되었고, 결국 16강에서 64년 만에 다시 찾은 마라카낭에서 수니가 동네한테 0:2로 발려버렸다. 브라질 사람들은 우루과이가 마라카낭에서 발리는 모습을 보면서 속이 시원해졌겠지만, 또다른 재앙이 터지게 된다. 자신을 이런 구렁텅이로 내몰아버린 상대가 우루과이에서 독일로 바뀌었을 뿐. 게다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네덜란드한테 또다른 굴욕까지 당하고 만다.

6. 유사 사례

사례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FIFA 월드컵 본선 사례만 기재한다.

7. 관련 사례

8. 기타

한국 SCP 재단에 마라카낭의 비극을 주제로 한 SCP가 있다. #SCP-947-KO 해당 SCP는 알시데스 기지아가 별세하자 무효화되었다.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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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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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별리그 방식 [2] 브라질이 첫 월드컵 우승의 감격을 누린 때는 1958년 스웨덴 대회에서였다. [3] 경기가 끝나고 한 잉글랜드 신문사는 현지에서 날아온 '잉글랜드 0:1 미국' 메시지를 멋대로 '탈자가 났군?' 하고 생각하고는 <잉글랜드 10:1 미국>으로 오보했다가 망신을 산 해프닝까지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축구 전술, 기술적인 면에서 타국의 추종을 불허했다. 종주국이었고 세계 축구의 틀을 만든 국가니 어찌보면 당연했다. 1930년대 아스날 FC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 만든 WM전술은 40년대, 50년대도 세계를 지배했고, 초반의 잉글랜드는 월드컵 같이 수준이 낮은 대회에 참석할 이유가 없다며 불참했다. 실제로 세계 최초 월드컵 연속 우승국가인 이탈리아를 영국에 초청해서 격파했다. 그 뒤 세계 축구를 무시하던 잉글랜드의 자존심은 1949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아일랜드에게 0:2로 덜미를 잡히고 1950년 월드컵에서 미국한테 0:1로 패배, 1953년과 1954년에도 그 매직 마자르를 웸블리로 초대해 치룬 세기의 대결(Century of the Match)에서 3:6이라는 더블 스코어로 박살나고, 복수한다고 헝가리로 원정을 갔다가 1:7로 박살나면서 산산조각난다. 게다가 잉글랜드는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 우승 이후 한번도 월드컵을 포함한 국가대항전에서 우승한 적이 없다. [4] 1950월드컵은 8강전이 없었다. 이탈리아는 이로부터 68년 후, 러시아 월드컵 본선진출권을 놓고 가진 플옵경기에서 또다시 리타이어 당했다. [5] 마찬가지로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는 1943년에 일찍 항복하여 연합국에 가담하였기에 패전국이 아니라 특수지위국 지위로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즉 이탈리아는 통념과는 달리 의외로 패전국이 아니다. [6] 상술한 바와 같이 브라질과 호각세를 다룰 만한 유럽세들은 일찌감치 기권한 데다 숙적인 아르헨티나마저도 대회 시작 훨씬 전에 기권해서 불참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단지 이를 대놓고 티냈다는게 문제였다. [7] 훗날 브라질 감독을 맡아 1958년 1962년 월드컵 2연패 업적을 달성한다. [8] 기네스북에 역대 최다 관중 축구 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9] 다만 이 경기에서는 포메이션을 알 수 있어서 등번호를 기재했다. [10] 전반 39분 스키아피노가 때린 중거리 슈팅은 굴러서 바르보사가 지키는 왼쪽 골대를 때렸다. [11]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는 팀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인 데다가 본선에서 기권을 하면 FIFA가 징계를 내릴 수도 있으니 이 최소 경기 우승 기록이 깨질 일은 없을 듯하다. [12] 월드컵 남미 예선 18경기 + 대륙간 플레이오프 2경기 +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3경기 + 16강전 + 8강전 + 준결승 + 3, 4위전. [13] 1997년 10월 6일, 브라질을 공식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장엄미사를 집전했다. 당시 경기장 안에서만 18만 명이, 경기장 바깥으로는 무려 150만 명의 시민들이 미사에 참석하였다. [14] 1980년 1월 26일, 프랭크 시나트라의 첫 브라질 콘서트가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렸다. 17만 5,000명의 관중이 입장하였는데, 그 당시 단일 콘서트로는 가장 많은 관중수를 동원한 콘서트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 기록은 10년 후인 1990년 5월 18일 같은 경기장에서 18만 4,000명을 동원한 폴 매카트니에 의해 깨졌다. [15] 당시 FIFA 차원에서 주던 상에는 메달이라는 물건이 아예 없었다. 그니까 브라질 정부에서 이 메달을 준비한 것이다. 즉, 정부 차원에서조차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던 셈이다. [16] 다만, 1950년 월드컵에서는 모두들 브라질이 우승할 것이라고 여겼던 반면에, 2014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절대적인 강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스쿼드 차이가 있다고 한들, 특히 강팀과 강팀 사이에서 7:1이라는 스코어는 쉽게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브라질 국민의 충격이 마라카낭의 비극보다 컸다고 보기는 힘들다. 브라질 국민들이 당연시 여기던 1950년 월드컵 우승을 놓친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1950년 월드컵은 출전 선수들 거의 모두가 대표팀에서 거의 축출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은퇴를 하고, 유니폼조차 아예 완전히 바꿔버렸을 정도로 브라질의 충격이 너무나 엄청났다. 전술했듯 경기장에서는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자살해버린 사람이 두 명, 심장마비로 죽은 이가 두 명이 나왔을 정도였다. [17] 포포투에서는 '미네이랑은 슬픈 코미디지만, 마라카낭에서의 비극은 아니다' 라는 기사에서 마라카낭과 달리 미네이랑에서는 폭동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디펜던트에서도 어째서 화요일의 상처가 1950년대의 마라카낭보다 깊지 않았나라는 기사에서 브라질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울지는 않았다며 마라카낭보다 큰 충격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브라질이 위대한 축구를 보여주던 1950년대와 다르게 현재의 브라질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들이 언더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충격적인 패배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충격의 수준으로 보면 4강전에서 7점을 실점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 만큼,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충격도 어마무시하긴 했다. 둘 다 세계를 뒤집어 엎어버렸을 정도이니... 심지어 2014년 월드컵의 로고도 브라질 입장에선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우는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 [18] 당시의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은 상의, 하의, 양말 모두 흰색 바탕에 옷깃과 소매 끝이 파란색으로 되어 있었다. [19] 또 다른 별명으로는 베르데-아마렐라. 우리말로 하면 초록-노랑이다. 이 둘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명이기도 한데 유니폼 색깔에서 따온 것이다. [20] 그 이후 흰색 유니폼이 등장한 적이 있긴 있다. 2004년 FIFA 100주년 기념 친선 경기에서 100년 전 유니폼을 재현했을 때 브라질이 입고 뛴 것. 그리고 경기 결과는 0:0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21] 하지만 경기 내용을 보면 그렇게 골문을 두드리고도 골을 뽑아내지 못한 공격진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게 옳았다. 수비진의 잘못은 브라질에 비하면 훨씬 적었던 우루과이의 몇 번의 공격에서 골을 내줬다는 것. 그것 뿐이다. [22] 하지만 24년 후의 대회 때 있었던 일에 비하면 이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 결승전에 못 올라갔다고 사람 이름을 전염병 이름으로 삼아버리는 실로 개막장짓까지 저질렀을 정도다. [23] 물론 이 대회에서는 브라질보다 헝가리가 강했다. 당시 헝가리는 매직 마자르라고 불렸다. 이후 헝가리는 준결승에서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메스암페타민을 맞은 서독에 밀려 준우승을 하고 만다. [24] 즉, 마라카낭의 비극 경기가 열린 날에 태어난 사람이 노인이 되는 날 [25] 다만 경우에는 아르헨티나를 옹호하는 사람이 더 많았는데 그도 그럴것이 무려 메시의 국가 대표 첫 우승 이였기 때문이다. [26] 물론 이건 브라질이 자초한 것이다. 관중들의 폭력 사태로 인해 경기가 30분이나 지연되었으며 브라질 선수들이 하도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때려대는 탓에 로드리고 데 파울은 코피까지 흘렸고 이로 인해 결국 브라질에서 1명이 퇴장당해 수적 열세 끝에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