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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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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Şuşa_qalası_2024-cü_ilin_aprelində.jpg
랜드마크인 슈샤 성채의 갠재 성문
파일:Shusha_NKR-1200x640.jpg
아르차흐 공화국 시절의 슈샤 시가지 전경

1. 개요2. 역사
2.1. 근대
2.1.1. 카라바흐 칸국의 수도2.1.2. 러시아 제국2.1.3. 슈샤 학살 (1920년)
2.2. 소련 시기2.3. 현대의 분쟁
2.3.1. 아제르바이잔의 탈환

1. 개요

아제르바이잔어 Şuşa
아르메니아어 Շուշի
영어 Shusha / Shushi

아제르바이잔 서부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의 역사 도시. 근세 시기 카라바흐 칸국의 수도였기에 당시 유적들이 다수 남아있다. 하지만 여러 분쟁들을 겪으며 여러 훼손을 겪었다. 18-19세기에 번영하며 캅카스 남부의 문화 중심지 중 하나로 성장한 도시에는 본래 아제르바이잔인과 아르메니아인이 공존했고, 두 민족 모두 슈샤를 문화 및 종교적으로 중시했다.

다만 19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아르메니아 인구가 아제르바이잔 인구를 추월하며 기존 주류이던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불만을 샀고, 이는 1920년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 시절의 슈샤 학살로 이어졌다. 이로써 아르메니아 구역이 파괴되고 최대 2만의 아르메니아 주민이 학살되었다. 그렇게 다시 아제르바이잔 주류 도시가 되었다가, 소련 시기 아르메니아 인구는 다시 20% 전후로 늘었다.

그리고 1988년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초엽에 아르메니아 주민들이 축출되었다가, 1992년 결국 아르메니아군이 점령하며 역으로 아제르바이잔 주민들이 추방되었다. 이후 아르차흐 공화국 시절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정착해 약 5천명의 인구를 지니게 되었다가, 2020년 또다시 아제르바이잔 군이 수복하며 아르메니아 인구를 1920년과 1988년에 이어 재차 추정하고 현재는 5백여 아제르바이잔 주민이 거주 중이다.

해발 1500m에 위치하여 카라바흐 중부에서 두드러진 고지대이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당시 요충지였다. 2020년 11월에 아제르바이잔 군이 점령한 후에는 이슬람 유적들의 재건 및 관광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유적으로는 슈샤 성채, 유카리 고바르 아가 모스크, 성 요한 성당 (카나 잠) 등이 있다.

2. 역사

지명에 대해서는 페르시아어로 유리병을 뜻하는 시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동북쪽의 인근 마을이자 아르메니아어로 고지대를 뜻하는 쇼쉬 (혹은 슈쉬켄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양립한다. 아르메니아 전승에 따르면 일대는 중세에 쉬카카르 혹은 카라글루크로 불렸고, 9세기에 아르메니아 왕공 사흘 슴바테안이 아랍 침공군을 격퇴한 것이라 한다. 중세 후기에는 인근의 쇼쉬가 아르메니아계 바란다 공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2.1. 근대

18세기 초엽, 일대를 지배하던 사파비 왕조가 사실상 멸망하자 현지 아르메니아인들은 호족 아반 유즈바쉬 하에 뭉쳐 공백기를 틈타 침공해 온 오스만 제국군에 맞섰다. 아르메니아측 기록에 따르면 1724년, 아반 유즈바쉬가 현 슈샤인 슈쉬에 첫 성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 러시아 제국의 장군 수보로프에 의하면 1750년경 바란다 왕가의 호족 멜리크 샤나자르가 다른 아르메니아 공국과의 분쟁에 있어 카라바흐 튀르크 부족장 파나 알리 칸의 힘을 빌리며 대가로 슈쉬 성채를 넘겼다고 한다. 파나 알리 칸은 성채를 요새화하고, 카라바흐 칸국을 선포하며 그 수도로 삼았다.

2.1.1. 카라바흐 칸국의 수도

파일:2014_Szuszi,_Twierdza_(01).jpg
슈샤 성채
파일:prezident_mescid_100523_9.jpg
유카리 고하르 아가 모스크

당시에는 창건자의 이름을 따 파나바드로 불렸고, 1762년까지 도시가 완성되자 일대의 아제르바이잔 및 아르메니아인들이 몰려들어 빠르게 성장했다. 한편 파나 알리 칸은 아프샤르 왕조의 책봉을 받았으나 곧 북이란의 카자르 부족의 모하마드 하산 칸이 과거 카자르계 지야드오을루 가문이 카라바흐를 통치했다며 침공해 파나바드를 포위했다. 다만 카림 칸의 공격에 카자르 군이 대포도 남겨둔 채로 급히 퇴각하자 파나 알리 칸은 반격하여 아르다빌을 일시 점령하기에 이른다. 1760년 경에는 우르미아의 군벌 파트 알리 칸 아프샤르가 3만 병력 및 아르메니아 호족들과 함께 슈샤를 포위했다. 이에 파나 알리 칸은 유일하게 남은 동맹 멜리크 샤나자르와 함께 6개월간 공성전을 버텨내어 적을 격퇴했다. 이렇듯 슈샤는 창건 직후부터 연이어 우주 방어를 보였다.

1763년 파나 알리 칸이 쉬라즈에 볼모로 있다 사망하자, 아들 이브라힘 칼릴 칸이 계승했다. 그는 안정적으로 통치하며 슈샤의 인구를 1만여까지 늘렸다. 하지만 1795년 여름, 이란을 통일한 카자르 왕조의 군주이자 모하마드 하산 칸의 아들인 아가 모하마드 칸은 사파비 제국처럼 캅카스 남부를 직할 지배하기 위해 그 최대 난관인 난공불락의 슈샤를 공격했다. 7만 카자르 대군이 포위하자 이브라힘 칼릴 칸은 민족과 성별을 불문, 주민 전원을 수비에 투입했다. 관민이 합심하여 한달 간의 공성전을 버텨내자, 아가 모하마드 칸은 슈샤를 포기하고 서진하여 트빌리시를 함락한 후 파괴하는 것으로 설욕했다. 이로써 영토가 카자르 령으로 둘러싸이자, 이브라힘 칼릴 칸은 현실을 인정하고 항복을 협상했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이때 아가 모하마드 칸이 그에게 '신께서 돌을 뿌리실 때에 그대는 유리 (슈쉬) 성채에 안주하고 있지 말라'고 조언한 것에서 슈샤 지명이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연공 납부 및 인질 제공을 대가로 카라바흐 칸국은 카자르 조에 복속했지만, 여전히 슈샤에 카자르 군이 배치되지 않는 등 어느정도의 자치는 유지되었다. 하지만 1797년, 남부 캅카스가 대부분 평정되자 아가 모하마드 칸은 협정을 파기하고 재차 슈샤를 공격했다. 카자르 군은 인근 지역들을 초토화시켰고, 이후 3년간 기근이 들게 되었다. 포위군의 연이은 포격을 견디다 못한 슈샤는 항복했고, 이브라힘 칼릴 칸은 다게스탄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그토록 원하던 슈샤에 입성한 후 며칠만에 암살되었고, 돌아온 이브라힘 칼릴 칸은 그 시신을 예를 갖춰 수습한 후 파트 알리 샤에게 인도하며 자신의 딸 아가 베곰을 결혼시켰다.

2.1.2. 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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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76년에 세워진 아샤그 고하르 아가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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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에 세워진 가잔 체츠소츠 성당

카자르 조의 캅카스 지배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01년에 러시아가 조지아를 병합했고, 1804년에는 전면적으로 카자르 왕조와 전쟁에 나섰다. 1805년, 이브라힘 칼릴 칸은 러시아에 복속했으나 그 고압적인 자세에 이듬해 재차 샤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러시아 군은 그를 살해하고 아들 메흐디 콜리 칸을 옹립했다. 메흐디 콜리 칸은 1812년 카자르군이 기습하여 카라바흐에 근접한 후에도 러시아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고, 결국 승리한 러시아는 이듬해 굴리스탄 조약을 통해 카라바흐 칸국에 대한 종주권을 공식적으로 확립했다. 1822년, 내통 의심을 받게 된 메흐디 콜리 칸은 카자르 왕조로 망명했다. 1826년에 카자르 왕조는 수복을 노리며 2차 전쟁을 일으켰고, 카라바흐 주민들 역시 이에 호응하여 각지의 러시아 주둔군에 저항했다. 하지만 슈샤만큼은 러시아 군이 끈질기게 버텼고, 수개월의 공성전에도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이에 힘입어 러시아가 승리한 후, 카자르 왕조는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통해 캅카스 전역을 포기했다. 전후 슈샤는 카라바흐 주의 치소가 되었고, 1840년에는 엘리자베트폴 주의 슈샤 우예즈드로 개편되었다. 러시아 지배기에 슈샤능 점차 성장했고, 이주민들이 몰렸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은 인근 고지대에서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1830년대 들어 슈샤 시가지는 튀르크계 무슬림과 아르메니아계 기독교도 주민 간에 동서로 갈라졌고, 각각 구도심과 신도심을 형성했다. 무슬림 구역은 17개의 마할레로 나뉘었고, 각각의 마할레에서 주민들은 원로들 중에서 대표를 선출했다. 또한 마할레마다 터키탕과 우물 등이 있었고, 자체적으로 운영되었다. 아르메니아 마할레는 12개였고, 5개의 성당 및 남녀 학교가 있었다. 주민들은 무역, 카펫 제조, 말 목장, 와인 및 보드키 제조 등에 종사했다.

동시에 슈샤는 캅카스 최대의 비단 생산지였다. 유목 성향이 있던 무슬림 주민들은 양과 말을 기르며 여름에는 슈샤 등의 고지대, 겨울에는 카라바흐 저지대를 오가며 생활했다. 19세기 중엽, 2만 인구를 상회한 슈샤는 예레반이나 바쿠보다 더 큰 도시였고 실크로드 상에 놓여 있어 여러 카라반사라이가 세워졌다. 도로 역시 잘 정비되었고 큰 돌로 세워진 주택, 다채로운 비단, 질 좋은 말 등이 여행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 주민의 1/3은 아르메니아, 2/3은 아제르바이잔계였고 대부분 튀르크계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페르시아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도한 무역은 주로 인근의 타브리즈, 코이 등지와 행해졌다. 그러던 19세기 말엽, 민족주의의 고조와 함께 아르메니아 인구가 아제르바이잔 인구를 추월하며 슈샤에서는 양측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2.1.3. 슈샤 학살 (1920년)

파일:1280px-Armenian_boroughs_of_city_of_Shusha_destroyed_by_Azerbaijani_armed_forces_in_1920_with_defiled_cathedral_of_Holy_Savior_on_background.jpg
학살 후의 슈샤 아르메니아 구역

1905년 2월 바쿠에서의 무력 충돌 후 같은해 8월 슈샤에서도 충돌이 벌어져 수백명이 사망하고 주택 2백여 채가 불탔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후 들어선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은 기존 행정 구획대로 카라바흐를 편입했으나, 아르메니아 측은 크게 반발했다. 1차 대전 종전 직전인 1918년 10월에는 오스만 군대가 슈샤에 진주했고, 아르메니아 주민들은 일단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전 소식이 들리자 아르메니아 민병대는 곧장 공세에 나서 아제르바이잔군을 격파하고 슈샤로 진격했다. 다만 영국이 이듬해 파리 회담에서 일대의 지위를 결정할 것이라며 중재하자 민병대는 철수하고 영국군이 카라바흐를 접수했다.

하지만 1919년 6월, 아제르바이잔-쿠르드 민병대가 슈샤의 아르메니아 구역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했다. 이로써 긴장이 고조되었고, 1920년 2월에 아제르바이잔인 총독 술타노프가 병합을 선포하자 아르메니아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를 진압한 아제르바이잔 민병대는 노루즈에 아르메니아인 경찰들을 학살했고, 분노한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군대가 기습을 가해 보복했다. 그해 3월, 슈샤에서는 6일간 최소 500 ~ 최대 1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되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이때 1천 7백의 아르메니아 주택 중 25채만이 파괴를 면했다. 8천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도시를 떠나며 5만에 달하던 슈샤의 인구는 1만여 가구로 줄었고, 우물은 시체로 가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2.2. 소련 시기

학살 직후인 1920년 4월, 붉은 군대가 남하하며 일대는 소련령이 되었다. 영국 대신 카라바흐 문제를 떠안은 소련은 본래 아르메니아에 유리하게 처리하려 했으나, 민족 정체성이 강한 것을 우려하여 자치를 준 채로 아제르바이잔 SSR에 할양하였다. 다만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 지역의 중심지는 슈샤 대신 새로 세워진 아르메니아 도시인 스테파나케르트 (現 한캔디)로 이전되었다. 절반 가량 폐허로 남아있던 슈샤의 아르메니아 구역은 1960년대 들어 철거 후 ' 흐루쇼프 양식'으로 점차 재건되었고, 1970년대에는 소련의 주요 피서지로 각광받았다. 한편 1920년대에 불과 2백여 명에 남았던 아르메니아 인구는 1500여 명으로 소폭 회복했다. 연이은 충돌로 2만에서 4천 수준까지 줄었던 아제르바이잔 인구도 1980년대 들어 1만을 회복했다.

2.3. 현대의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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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차흐 공화국 시절의 갠재 성문

소련 붕괴기에 카라바흐는 재차 분쟁에 휩싸였다. 1988년에 발발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슈샤의 아제르바이잔군은 스테파나케르트를 포격해 큰 피해를 입혔으나, 1992년 5월 아르메니아군에 함락당했다. 이때 아제르바이잔 주민들은 피난가거나 추방되었고, 도시는 약탈과 방화를 겪었다. 이어진 아르차흐 공화국 시절 슈쉬로 개칭된 도시는 슈쉬 주의 치소였다. 다만 여전히 시가지의 80% 이상이 폐허였고, 묘지를 포함한 여러 이슬람 유적들이 철저히 파괴되었다.[1] 1만 5천에 달하던 인구도 재식민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3천 정도에 그쳤고, 전부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아르차흐 공화국은 슈샤를 관광지로 활용하려 했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2.3.1. 아제르바이잔의 탈환

파일:나고르노.png
2020년 11월의 전황. 스테파나케르트 (한캔디)를 향해 튀어나온 청록색 아제르바이잔 점령지 끝부분이 슈샤이다.
파일:Susa-Shusha-fortress_photo-©-Retan_shutterstock_2161373229-1024x683.jpg
점령 직후 아제르바이잔 깃발이 걸린 슈샤 성채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개전 후 약 한달 만에 아제르바이잔군은 삼림을 통해 슈샤에 접근하여 3개 방향에서 포위했다. 이에 마지막 남은 도로를 통해 아르메니아 주민들은 스테파나케르트로 피신했다. 그후 3일의 격전 끝에 아제르바이잔군 슈샤를 수복했고, 이로써 수도 스테파나케르트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자[2] 아르차흐 공화국은 이틀 후 사실상 백기를 들며 강화를 맺었다.

따라서 슈샤는 아제르바이잔 최전선 도시가 되었고, 아제르바이잔군인들은 시내의 아르메니아 유적들과 묘지를 훼손하였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 측은 아르메니아의 이슬람 유적 훼손에 대한 복수라고 일축했다. 또한 1992년 아르메니아의 점령 후 승리의 상징으로 있던 T-72 전차는 전리품이 되어 바쿠로 압송되었다. 2022년, 슈샤는 외부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었고 2023년부터 재정착이 이루어지고 있다.


[1]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줄파 묘지 파괴로 이어졌다 [2] 개성/서울로 치면 개성의 송악산 혹은 서울의 북한산 / 남산이 점령당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