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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라우드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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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라우드루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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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994)
미카엘 라우드루프
(1994~1998)
페테르 슈마이켈
(1998~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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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라우드루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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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3년 수상 당시 국명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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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라우드루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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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호마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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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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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만 유로)
1995
스탠 콜리모어
(1300만 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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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크리스티안 에릭센 138회 2009.6.6 2024.10.16
2 시몬 키예르 132회 2010.3.3 2024.6.9
3 페테르 슈마이켈 129회 1988.5.10 2001.4.25
4 데니스 롬메달 127회 2000.8.16 2013.6.11
5 욘 달 토마손 112회 1997.3.29 2010.6.24
6 카스페르 슈마이켈 109회 2013.2.6 2024.10.16
7 토마스 헬베그 108회 1994.4.20 2007.10.17
8 미카엘 라우드루프 104회 1982.6.15 1998.7.3
9 마르틴 예르겐센 102회 1998.3.25 2011.11.15
10 토마스 쇠렌센 101회 1999.11.17 2012.5.26
}}}}}}}}}}}}}}} ||

}}} ||
덴마크의 축구 감독
파일:external/i.telegraph.co.uk/michael-laudrup_2320170b.jpg
이름 미카엘 라우드루프
Michael Laudrup
출생 1964년 6월 15일 ([age(1964-06-15)]세)
덴마크 수도 지역 프레데릭스베르시
국적
[[덴마크|]][[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코펜하겐 BK (1981~1982)
브뢴뷔 IF (1982~1983)
유벤투스 FC (1983~1989)
SS 라치오 (1983~1985 / 임대)
FC 바르셀로나 (1989~1994)
레알 마드리드 CF (1994~1996)
비셀 고베 (1996~1997)
AFC 아약스 (1997~1998)
감독 덴마크 대표팀 (2000~2002 / 수석 코치)
브뢴뷔 IF (2002~2006)
헤타페 CF (2007~2008)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2008~2009)
RCD 마요르카 (2010~2011)
스완지 시티 AFC (2012~2014)
레크위야 SC (2014~2015)
알 라이얀 SC (2016~2018)
국가대표 104경기 37골 ( 덴마크 / 1982~1998)
가족 동생 브리안 라우드루프

1. 개요2. 선수 경력
2.1. 선수 초기 ~ FC 바르셀로나 시절2.2. 레알 마드리드 CF 시절~은퇴2.3.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지도자 경력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6.3. 수훈
7. 기타8.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덴마크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선수 시절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이끄는 바르셀로나 드림팀의 주축이었으며, 알란 시몬센과 함께 덴마크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였다.[2]

2. 선수 경력

2.1. 선수 초기 ~ FC 바르셀로나 시절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한 라우드루프는 17세 때 코펜하겐 FC(Kjøbenhavns Boldklub)에서 프로 데뷔를 한다. 1983년 재능을 인정받아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물론, 아무리 뛰어나도 스무살 풋내기를 중용할 만큼 유벤투스의 멤버가 녹록하지 않은지라, 임대 형식으로 SS 라치오에서 2년 동안 활약하다가 유벤투스로 복귀했다.

85/86 시즌 유벤투스에서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아직 본인의 전성기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85/86 시즌 월드 사커가 선정한 Top 10위 중에 6위였다. 1위는 당연히 끝판왕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그래도, 반대로 생각하면 고작 2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월드 사커 선정 탑 10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그러던 1988년, FC 바르셀로나에 감독으로 부임한 요한 크루이프는 자신의 입맛대로 팀을 개조하기 위해 수많은 선수들을 방출하고, 또 영입한다. 크루이프가 눈여겨보았던 선수들 중 하나였던 라우드루프는 1989년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라우드루프 이외에도 안도니 수비사레타, 로날드 쿠만, 펩 과르디올라, 호세 마리 바케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훗날 호마리우 게오르게 하지 등등 수많은 선수들이 모여 드림팀이 탄생했다. 이후 90/91 시즌을 시작으로 바르셀로나는 4년 연속으로 라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1992년 오랜 숙원이던 유러피언컵[3]마저 제패함으로서 팀의 성적은 절정에 이른다. 이 시절 라우드루프는 1992-93 시즌 라리가 외국인 MVP(돈 발롱 어워드)에 선정되며 라리가 최고의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1993년 여름 호마리우가 영입된 이후 크루이프는 라우드루프 대신 호마리우를 중용하며 대놓고 라우드루프를 천대하면서 심각한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호마리우에게 밀려 벤치에조차 앉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크루이프의 노골적인 행동은 팬들은 물론 현지 언론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결국 93-94 시즌, 후보 명단에서조차 제외된 라우드루프가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는 한 수 아래라고 얕잡아보던 AC 밀란에 4:0으로 참패를 당한다.

결국 바르셀로나는 팀 개편에 착수하고, 드림팀을 이끌던 30대 주역들이 여름 이적 시장에 대거 흘러나왔다. 라우드루프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복수의 칼날을 갈던 라우드루프는 오직 크루이프와 바르셀로나를 깨부수기 위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2.2. 레알 마드리드 CF 시절~은퇴

당연히 바르셀로나 팬들은 뒷목을 잡았고, 살기등등한 비난을 쏟아냈다. 레알 마드리드가 캄 노우 원정을 왔을 땐 10만 가까운 관중의 열화와 같은 야유 속에 사방을 'Laudrup Judas(라우드루프는 유다 같은 배신자)' 플래카드로 도배했다. 그러나 라우드루프의 이적은 크루이프에게 내쳐진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바르셀로나 팬들의 반응은 몇 년 후 루이스 피구에 비하면 그리 심하지 않았고 지금도 피구에 비해서는 별로 언급되지는 않는 편.

이적한 첫해 레알 마드리드가 라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라우드루프는 무려 5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2시즌 만에 스페인 생활을 접고 당시 막 프로 리그를 만들어서 어마어마하게 돈을 쏟아붓던 J리그 비셀 고베로 이적한다. 유럽에서도 주목받은 '사건'이었고 '축구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사람'이라는 수식어도 쓰이곤 했다. 그리고 1년 뒤[4] 아약스로 이적해서 1시즌을 더 활약하고,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동생 브리안 라우드루프도 그렇고 미카엘도 그렇고 한 클럽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여러 군데 옮겨다니며 커리어를 쌓았다.
등번호는 10번

2.3. 국가대표 경력

오늘날 덴마크는 FIFA 랭킹도 상위권이고 유럽의 강팀이란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80년대 이전에는 변방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 페테르 슈마이켈과 미카엘 라우드루프, 그리고 동생 브리안 라우드루프, 에베 산이 함께 뛰던 시기에 유럽 축구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라우드루프는 FIFA 센추리 클럽 가입자답게 대표팀 경력도 풍부했다. 1982년에 덴마크 국가대표에 데뷔하여 104경기 37골의 기록을 세웠다. UEFA 유로 1984 UEFA 유로 1988에 출전했으나, 정작 덴마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UEFA 유로 1992에는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미카엘 라우드루프는 예선3경기를 치르고 본선지출이 좌절되는 과정에서 감독 닐센과 강하게 대립했기 하면서 국가대표팀을 은퇴한 상태였다. 동생 브리안 라우드루프는 덴마크의 본선진출이 우여곡절 끝에 결정되자[5] 닐센 감독에게 사과를 하고 국가대표팀 복귀 후 본선에 참가했지만[6] , 미카엘 라우드루프는 은퇴를 번복하지 않았다.[7] 당시 덴마크의 우승은 대한민국의 2002 월드컵 4강처럼 운이 따라줬던 대회였기 때문에 만약 이 대회에 라우드루프가 있었다면 덴마크는 우승을 좀 더 쉽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과, 당시 덴마크는 닐센 감독의 지휘 아래 5백이 수시로 등장하고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에 의존하는 철저한 수비위주의 경기를 통해서 우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카엘이 참여했다면 역으로 우승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당시 덴마크 현지 언론의 평가도 존재한다. 당시 덴마크는 개인 전력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8], 이걸 순전히 닐센 감독이 밀어붙였던 전원수비로 헤쳐나갔는데 그 분위기에 훨씬 공격적이고 에고가 강했던 미카엘이 부품으로 작용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덴마크는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는데, 조예선 우루과이를 상대로 6:1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라우드루프가 보여준 현란한 드리블에 이은 득점 장면은 라우드루프 최고의 플레이를 언급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명장면이다. 하지만 16강에서 스페인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한 명에게만 4골을 얻어맞으며 1:5로 참패하고 탈락한다.

이후 월드컵에서는 덴마크가 연달아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고, 결국 34세로 선수 생활도 막바지에 이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주장 완장을 달고 커리어 마지막 월드컵에 뛰게 되었다. 1승 1무 1패로 프랑스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진출, 나이지리아를 4:1로 압도하고 8강에 진출했는데 하필 상대가 최전성기의 호나우두를 앞세운 브라질. 결국, 접전 끝에 3:2로 브라질에게 석패했고 이 시합이 라우드루프의 대표팀 은퇴 경기가 되었다.[9] 그래도 이 성적은 2022년 현재까지 덴마크의 월드컵 최고 성적이다. 이 경기는 그의 동생 브리안 라우드루프가 2-2 동점골을 넣고 보여줬던 모델 세리머니로도 유명하다. 클럽에서 97-98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1998년 월드컵이 그의 선수 커리어 마지막 무대였다.

3. 플레이 스타일

90년대 최고의 테크니션, 플레이메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하나''였다. 미드필더가 가져야 할 모든 기술과 역량이 월드클래스에 도달한 최고의 테크니션이다. 20세기 말 바르셀로나에서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군림한 덴마크 역대 최고의 선수이기도 하다. 다재다능한 선수라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폴스 나인 역할의 중앙 공격수, 세컨드 스트라이커,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등 공격 관련 포지션을 전부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이다.

라 크로케타, 일명 팬텀 드리블의 교본[10]으로 불릴 정도의 엄청난 볼 컨트롤로 여러 가지 기술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183의 큰 키와 단단한 체격의 우월한 피지컬에 어울리지 않게 우아함과 역동성을 동시에 갖춘 몸놀림으로 정교하고 섬세하게 공을 드리블했다. 몸놀림은 민첩했으며, 화려한 발재간을 부드럽게 부렸고, 빠른 속력에 몸싸움도 강하고 큰 키인데도 균형 감각과 밸런스가 엄청났다.[11]

온 더 볼에서 절정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선수였는데, 키 크고 빠른 이니에스타를 상상하면 된다.[12] 탈압박 테크닉은 화려, 유려, 민첩, 정교, 여유로웠으며 드리블은 빠르고 역동, 여유, 저돌적이었다. 스피드도 뛰어나서 상대 수비들을 찢어버리는 돌파 능력을 갖췄다. 드리블이라는 덕목에서는 절정에 이른 선수 중 한 명이다.

골 결정력 또한 훌륭했다. 정교하고 센스 있는 슛팅으로 공격수, 특히 폴스 나인 자리에서 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발을 가리지 않고 슈팅해 득점했다. 순도 높은 골 결정력, 중요할 때 골대 구석으로 정확하고 강력하게 박히는 중거리 슛, 뛰어난 축구 센스까지 그야말로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이 강력한 중거리 슛 덕분에 덴마크산 다이너마이트라는 멋진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패서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선수 시절 마라도나의 킬 패스 능력에 가장 근접했던 선수라고 평가받았을 정도. 전문가들은 리즈 시절 호나우지뉴 정도는 돼야 미카엘 라우드루프의 패스 능력에 비교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무지막지한 시야로 농구선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노 룩 패스를 눈이 돌아갈 정도로 잘했다. 수비수는 말할 것도 없고, 동료조차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다가 갑자기 자기 발 밑에 볼이 나타나서 식겁할 정도였다. 그 이외에도 발로 톡 찍어 올려 공격수들 발 밑에 정확하게 떨궈 주는 로빙 스루 패스, 어마어마한 시야를 바탕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창의적인 루트로 아웃사이드를 비롯, 발 어느 부위로든 패스를 할 수 있는 패스 마스터였다.

요약하자면 우아함 그 자체이다.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역대 최고 수준으로 다 갖추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정에 이른 드리블 능력, 패스 능력,자유자재로 사용가능한 양발, 시야가 어우러져 발휘되는 경기 장악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등번호 10번에 담긴 의미가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 척 봐도 바이킹의 후예다운 용모인데, 공을 차는 모습은 남미 혈통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창조적인 플레이를 했다. 과거 그가 활약하는 모습, 득점, 드리블, 패스 플레이는 스페셜 영상을 다시 봐도 감탄을 자아낸다.

최전성기였던 바르사 시절에는 폴스 나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당대 최고의 골잡이 호마리우가 있었을 때는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했을 정도로 전술 이해도가 높았다. 라우드루프의 톡 찍어주는 로빙 패스를 호마리우가 로빙 슛으로 마무리하는 장면이 유명하다. #

라울 곤살레스는 인터뷰에서 "내가 함께 뛰어 본 선수 가운데 최고다"라고 밝힌 바가 있으며, 프란츠 베켄바워는 "60년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 70년대는 요한 크루이프, 80년대는 디에고 마라도나, 90년대는 미카엘 라우드루프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브라질의 레전드 축구선수 호마리우도 "라우드루프는 내가 인정하는 4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라며 그의 진가를 평가한 적이 있다.

다만 게으른 천재 유형이라 이미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임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재능이 온전히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고 한다. 선수 시절 게으른 천재의 대명사였던 요한 크루이프조차 항상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며 라우드루프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는 증언이 있다

4. 평가

키가 183cm로 상당히 큰 편이고 몸도 좋은 데다 영화배우 뺨치는 잘생기고 화려한 외모를 가졌으며, 더불어 덴마크를 대표하는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이자 불세출의 슈퍼스타였다.[13] 라우드루프가 한창 활약할 무렵엔 국내에서 유럽 축구 열기가 낮았기 때문에 지명도가 떨어지지만, 세계적으로 1990년대 초중반 유럽을 대표하는 미드필더로 꼽힌다.

이처럼 세계를 호령했던 불세출의 축구 선수였지만, 활약 시기가 대한민국이 해외 축구에 관심이 있던 시기 이전이므로[14] 대한민국 내에서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선수였는데, 스완지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기성용을 영입하면서 관심을 끌어모았다.

언론에서도 "미카엘 라우드루프의 반만 배워도 기성용 성공한다!"라면서 설레발을 치고 보통 사람들도 라우드루프의 플레이 영상을 본 뒤부터 그런 반응을 보이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말도 아니다.

유벤투스,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아약스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했고 특히 크루이프의 드림팀 멤버로 바르셀로나에서 4개의 라리가 타이틀을 포함한 9개의 트로피를 수집했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까지 합치면 무려 라리가 5연패다.
이처럼 라우드루프가 기록한 커리어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스페인 라리가의 양대 강호, 서로를 끔찍히 싫어하는 두 팀의 어엿한 레전드로 손꼽히는 것이다. 사실 레알 마드리드에서 그의 업적은 레전드라고 말하기엔 부족하긴 하지만,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레전드가 복수를 하겠답시고 덥석 찾아와주었으니 많은 지지를 받았다.

비록 국대에선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은퇴 후 복귀를 해서 유로 우승도 못하고 월드컵 성적도 8강에 그쳤지만, 그가 펼친 개인 기량만큼은 엄청났다.

5. 지도자 경력

대표팀과 프로팀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을 택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덴마크 코칭 스태프로 참가했으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덴마크의 브뢴뷔 IF(Brøndby IF) 팀 감독을 맡았다.

2005년 브뢴뷔를 덴마크 수페르리가 챔피언으로 올려놓았다. 2006년 소속 팀과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2007년 라리가 헤타페의 감독을 맡아 코파 델 레이, 유에파컵에서 돌풍을 일으켰으며, 한때 아브람 그랜트 감독 경질 이후 후임으로 첼시로 간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었다.

2008년 9월 러시아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감독에 취임했으나, 성적 부진을 이유로 7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2010-11 시즌부터 라리가의 마요르카 감독으로 부임, 누가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아니랄까봐 마요르카 가지고 바르셀로나 공략본을 만들어내고 있다.

2012-13 시즌부터 남부 웨일스에 위치한 프리미어 리그 스완지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데뷔전에서 박지성이 주장으로 나선 QPR을 5:0으로 압살하며 화려하게 첫 경기를 장식했다.[15] 그 이후엔 리버풀로 이적한 조 알렌의 대체자로 기성용이 스완지 시티로 영입하면서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급격히 높아질 전망이다.

브렌던 로저스 감독 이후 스완지 시티를 잘 이끌며 26라운드 팀 순위 8위를 달리고 있으며, 팀 창단 후 처음으로 컵 대회 결승까지 팀을 올려놓는 등 여러모로 선전하고 있다. 과거 선수 때부터 감독 시절까지 많은 시간을 스페인에서 보낸 터라, 스페인식 패스 축구를 프리미어 리그에 잘 접목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인물로 요한 크루이프를 꼽는 등, 패스 축구와 점유율 축구에 대한 철학을 확고하게 스완지 팀 컬러로 자리잡아 가는 중이다.

2013년 2월 25일 풋볼 리그 컵 결승에서 풋볼 리그 2 소속 브래드포드 시티를 압도하며 우승, 감독 커리어 사상 최초 우승이자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우승을 차지하는[16] 진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파일:external/static.guim.co.uk/Bradford-City-v-Swansea-C-008.jpg

이처럼 스완지 시티에서 성공적인 감독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차후 거취에 관해 많은 카더라가 나도는 가운데, 3월 9일 감독 계약을 1년 더 연장했다. 이로서 2015년 6월까지 스완지 시티를 맡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기성용의 태도에 대한 불만으로 둘 사이의 불화설이 대두되고, 기성용이 결국 선덜랜드로 임대를 가게 된다. 그리고 기성용이 선덜랜드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스완지서 기성용 자리를 차지한 선수들이 부진하자 기빠들은 열심히 라우드루프를 조롱하며 강등당해라 저주하는 등 한국 인터넷에서 별로 안 좋은 대접을 받는 중이다. 결국, 성적 부진으로 2월 4일 경질되어 감독직은 한방에 훅 갈 수 있다는 것을 인증했다.

아이러브사커 사커라인 둥 대부분의 축구 팬, 특히 기성용 팬들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라우드루프는 사랑입니다", "라우드Love"라고 하며 그를 찬양했으나 시즌이 바뀌자마자 순식간에 마음대로 기성용 내치더니 잘됐다며 그를 조롱하는 중.[17] 허나, 성적 부진은 구실이었을 뿐 실상은 선수단의 급작스러운 대격변으로 인해 기존 선수와 영입파의 내분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라우드루프가 팀 장악에 실패해 구단주에게 신임을 잃었기 때문에 잘린 것이다. 기성용은 그 사이에 있었던 것일 뿐, 기성용 한 명 때문에 경질되었다보는 건 무리이다. 스완지 시티의 2013~14 시즌 문서 참조.

2014년 6월 30일 카타르 스타즈 리그 레크위야 S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공교롭게도 남태희 선수의 소속 팀이기도 하다.

2015년 2월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을 해임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그에게 감독 제의를 했으나, 레크위야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일본의 제의를 거절했다.[18] 그리고 2015년 6월, 재계약에 실패하며 레크위야 감독직을 끝낸다. 당시 팀 성적이 리그 우승을 확정짓고 AFC 챔피언스 리그 8강까지 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성적 부진으로 인한 경질은 아닌 듯.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6.3. 수훈

7. 기타

파일: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jpg }}}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미드필더들 중 지네딘 지단 다음인 2위에 이름을 올렸다.

8. 같이 보기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c9072a><tablebgcolor=#c9072a,#191919> 파일: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로고.svg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fff,#28a7e3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1922년 ~ 현재
미상
파일: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로고.svg
1대
피베브르
파일:체코 국기.svg
2대
코즐로프
파일:소련 국기.svg
3대
크바시닌
파일:소련 국기.svg
4대
포포프
파일:소련 국기.svg
5대
고로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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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포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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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고로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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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크바시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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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대행)
이사코프
파일:소련 국기.svg
10대
볼라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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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크바시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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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단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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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글라즈코프
파일:소련 국기.svg
14대
소콜로프
파일:소련 국기.svg
15대
굴라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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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시모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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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굴라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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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살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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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시모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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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굴라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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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크루티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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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베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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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로만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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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야르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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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로만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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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체르니쇼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27대(대행)
페도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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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스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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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스타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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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페도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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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체르체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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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대행)
레댜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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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대
라우드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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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카르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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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에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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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카르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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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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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야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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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알레니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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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카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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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대행)
리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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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코노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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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쿠즈네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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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테데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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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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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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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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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대(대행)
슬리슈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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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스탄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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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적으로 공격형 미드필더이지만 폴스 나인 유형의 중앙 공격수로도 활약했다. [2] 우연하게 시몬센이 먼저 1979년에 바르셀로나에 이적해서 3시즌 동안 활약했다. [3] 챔피언스 리그의 옛 이름이다. [4] 여름에 이적했기 때문에 뛴 기간은 정확히 1년이지만, 햇수로는 2년간 일본에서 활약한 셈이다. [5] 당시 덴마크를 젖히고 조별 1위를 차지한 팀이 다름아닌 유고슬라비아였는데, 이 당시 유고는 유고내전을 거쳐서 이 시기에는 보스니아 내전에 돌입했기 때문에 국제사회로부터 국제대회 참가자격이 박탈당했다. 그래서 유고 불참으로 인한 대리참가 자격이 덴마크에게 주어진 것. [6] 이 때 역시 가정사 등의 이유로 대표팀 복귀를 거부하다가 마지막에 합류한 선수가 킴 벨포르트인데, 유로 92 결승전에서 골을 넣고 92년 유로 우승을 다룬 92년의 여름이라는 영화의 사실상 주인공이 된다. [7] 미카엘 라우드루프는 1993년 8월 국가대표팀에 복귀한다. [8] 폴 개스코인의 잉글랜드, 칸토나의 프랑스, 오렌지3총사의 디펜딩 챔피언 네덜란드, 마테우스가 이끌었던 90년 월드컵 우승팀 독일이 상대였다. 전력적으로 조금이라도 나아보이는 팀은 스웨덴이 유일한데, 이 팀은 개최국이라서 잉글랜드, 프랑스, 덴마크가 함께 포함된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했다. [9] 브라질만 안 만났어도 4강 혹은 결승에 진출했을지도 모른다. [10] 이니에스타는 그의 시그니처 무브인 팬텀 드리블을 해당 기술의 원조 격인 라우드루프를 보고 연마했다고 알려져 있다. [11] 마치 마라도나처럼 태클을 당해도 휘청거리면서 다시 드리블한다. [12] 실제로 볼터치 스타일이 스페인 선수들과 제법 비슷하다. [13] 심지어 동생도 상당한 클래스의 축구 선수에 형 못지않을 정도로 굉장히 잘생겼다. 피어스 브로스넌을 닮았다. [14]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한국에서 유럽 축구, 정확히는 PL을 주말마다 볼 수 있게 된 것이 박지성 맨유 진출 이후부터이긴 하나 접근성의 문제이지 당연히 한국에도 유럽 축구 팬은 당시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박지성 이후 더욱 널리 보급되었을 뿐이다. [15] 그러나 아직 브렌던 로저스 前 감독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는 평도 많다. 스완지 시티를 성공으로 이끈 로저스 감독의 티키타카 전술이 아직 스쿼드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완지의 팀 스타일은 로저스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며 여러 감독을 이어 스타일이 유지되고 있는지라 로저스의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16] 바르셀로나 시절 1991-92 유러피언컵의 결승전도 웸블리에서 열렸다. 단 이때는 구 경기장이였고, 2013년 우승했을 때는 신 경기장이였다. [17] 그러나 아무리 감독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라 자신과 불화가 있는 인물마저 그저 실력 하나만으로 계속 쓰는 건 무리다. 알렉스 퍼거슨 데이비드 베컴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그 클래스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보내버린 것을 생각해 보자. [18]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울리 슈틸리케였기 때문에, FC 바르셀로나에서 황금기를 보낸 미카엘 라우드루프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한일전의 라이벌 구도와 똑같은 엘 클라시코가 벌어질 수 있었다. [19] 돈 발롱 어워드 [20] Order of the Dannebrog [21] 그래서 결국 폐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