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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1:30:18

고정운

1 이상욱 · 2 김종민 · 3 박경록 · 4 이용혁 · 5 정한철
VC
· 6 김경준 · 7 장윤호 · 8 김준형 · 9 이현일
10 브루노 · 11 플라나 · 13 김민재 · 14 허동호 · 15 서보민 · 16 임준우 · 17 김희성 · 18 류지민
19 이현규 · 20 김민호 · 21 서재민 · 22 김채운 · 23 최재훈
C
· 24 루이스 · 25 임도훈 · 26 이강연
VC

27 이종현 · 28 김현훈 · 29 권승비 · 30 김진욱 · 31 손정현 · 33 이환희 · 37 권순호 · 40 김원균 · 72 김성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고정운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인창수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한범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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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구단으로 임대 간 선수는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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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김판근
(1995~1996)
고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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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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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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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이달의 감독상 수상자
3월
홍명보
( 울산 현대)
4월
고정운
( 김포 FC)
5월
남기일
( 제주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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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전력강화위원
Gimpo Football Club
파일:2024 고정운감독.png
이름 고정운
高正云|Ko Jeong-Woon
출생 1966년 6월 27일 ([age(1966-06-27)]세)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現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삼례읍)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7㎝
직업 축구 선수 ( 윙어,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해설가
소속 <colbgcolor=#203D41> 선수 일화 천마- 천안 일화 천마 (1989~1996)
세레소 오사카 (1997~1998)
포항 스틸러스 (1998~2001)
감독 선문대학교 (2003)
전남 드래곤즈 (2004 / 코치)
FC 서울 (2005~2006 / 코치)
풍생고등학교 (2008 / 코치)
풍생고등학교 (2010~2011)
FC 안양 (2018)
김포시민축구단-김포 FC (2020~ )
해설 SPOTV (2014~2015)
행정 대한축구협회 (2024~ / 전력강화위원)
국가대표 77경기 10골 ( 대한민국 / 1989~199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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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colbgcolor=#ffffff,#191919>삼례중앙초등학교 (졸업)
호남중학교 (전학)
이리동중학교 (전학)
전주해성중학교 (졸업)
이리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상경대학 (무역학 / 학사)
가족 딸 고나래[1], 아들 고태규
종교 불교
서명 파일:고정운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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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2.3.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
3.1. 초기3.2. FC 안양 감독3.3. 김포 FC 감독
3.3.1. K3리그 (2020~2021)3.3.2. K리그2 (2022~ )
3.3.2.1. 2022년3.3.2.2. 2023년3.3.2.3. 2024년
3.4. 지도 스타일
4. 해설가 경력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어록7. 논란8. 여담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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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축구 해설자이다. 2020년부터 K리그2 신생 구단 김포 FC의 감독을 맡고 있다.

윤상철, 김현석, 신태용 등과 함께 90년대 K리그를 풍미했으며 K리그와 성남 일화 천마의 레전드로 통한다. 현역시절 빠른 움직임 덕분에 ' 적토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프로 이전

삼례중앙국민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해, 호남중학교, 이리동중학교, 전주해성중학교를 거쳐 이리고, 건국대를 차례로 진학했다. 이리고 시절 이미 전국에서 유명한 선수로 거듭났지만 동기 유승관과 함께 상대적 약체인 건국대로 진학했다. 1학년부터 주전으로 자리했고, 피나는 노력끝에 웨이트로 몸무게를 14kg 이상 찌우며 자신의 우상이었던 차범근과 비슷한 몸을 지니게 됐다.

2.1.2. 일화 천마

건국대를 졸업한 뒤 1989년 드래프트에서 연고지 우선지명으로 신생팀 일화 천마에 입단하였다. 입단 동기들인 김이주, 유승관, 임종헌 등과 함께 박종환식 지옥의 트레이닝을 견뎠다. 약체였던 건국대시절처럼, 신생팀인 일화에선 곧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하며 31경기 4골 8도움을 기록할 수 있었다. 결국 1989년 신인왕에 올랐다. 그와 함께 대학 최고 윙어 자리를 두고 다투던 심봉섭 김봉길이 선발과 교체를 오간 것에 비교하면 신생팀 선택은 탁월했다. 왼쪽 측면에서 저돌적으로 뛰어가는 모습은 흡사 적토마를 연상케 하였고, 그의 별명이 되었다.

2년 차인 1990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며 21경기 4골 3도움에 그쳤고, 이듬해 40경기에 출장해 13골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커리어 유일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그 해 커리어 첫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1994 시즌은 최고 전성기였다. 월드컵에 참가하느라 21경기 밖에 출장하지 못했지만, 4골 10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커리어 유일 두 자릿수 도움을 기록한 시즌이 됐는데, 리그 10도움은 이흥실에 이어 역대 두 번째 단일 시즌 리그 두자릿수 도움 기록이다. 또한, 이흥실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30-30 클럽에 가입했다. 또한 일화의 리그 2연패를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흥실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신인왕 출신 MVP라는 기록마저 세웠다. 그 해 리그 MVP와 도움왕, 베스트 일레븐을 차지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1995 시즌 시작 전, 차범근 당시 현대 호랑이 감독을 통해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오퍼를 받고 독일에서 이적 협상을 진행했다. 알려진 바로 당시 이적료 3억에 연봉 1억5천만원을 제의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규남 일화 단장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됐고, 대신 연봉 1억5백만원을 받으며 홍명보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억대 연봉 프로축구선수가 됐고, 1억을 받은 홍명보의 기록을 깨며 당시 역대 최다 연봉자가 됐다. 29경기 5골 4도움으로 일화의 K리그 최초 3연패를 함께하며 2년 연속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1996년에는 어깨와 종아리 등의 부상으로 K-리그에서 12경기 4골 1도움으로 부진했지만, 아시안 슈퍼컵과 아프리카 챔피언 올랜도 파이리츠 FC와 치른 아프로-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을 들어올리는데 기여했다.

2.1.3. 세레소 오사카

1997 시즌을 앞두고 세레소 오사카에서 이적료 8억 연봉 5억6천만원이라는,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금액을 제의받고 J리그로 진출했다. 이로써 K리그에서 J리그로 넘어간 첫 번째 한국 선수가 됐다. [2]

그러나 잦은 대표팀 차출과 브라질 용병 선호 현상 등을 이유로 부진했고, 1998 프랑스 월드컵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만다.

한 시즌 반 동안 36경기 6골을 기록했다. 그래도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며 1997 시즌 세레소 오사카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다.

2.1.4. 포항 스틸러스

결국 1998년 8월, 국내 복귀를 추진했다. 친정팀인 천안과 연봉 협상에서 이견이 보였고, 당시 포항에서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한 황선홍과 트레이드에 가까운 이적으로 포항으로 전격 이적한다.

국내로 복귀하자마자 맹활약을 선보였고, 김현석과 경쟁하듯 공격 포인트를 쌓으며 당시에 누가 먼저 최초의 40-40 클럽 가입자 타이틀을 가져갈 지 세간의 집중을 받았다.

일화에서 41득점 37도움을 기록했던 고정운은, 결국 1998년 9월 5일 전남 드래곤즈전 어시스트를 추가하며 K리그 최초 40-40 클럽 가입자가 됐고, 반 시즌 동안 무려 16경기 5득점 6도움을 기록했다.

이듬해 21경기 9득점 5도움을 기록하며 좋은 페이스를 보였으나, 교통사고[3]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하락세를 맞이한다. 비록 1999 시즌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됐지만, 그게 그의 사실상 마지막 시즌이 됐다.

2000년에는 재활로 인해 R리그에서도 나서지 못했고, 2001년 전반기에 4경기 출장한 뒤, 8월 5일 K리그 올스타전에서 은퇴했다.

한편 2024년 4월 2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기록 정정 과정에서 1992시즌 리그컵 결승전 1도움, 1995시즌 챔피언결정전 1골 3도움이 추가가 됐다. 이에 따라 1999시즌 7월 21일 포항-대전 경기 득점으로 K리그 역대 첫 번째 50-50 클럽 가입 선수로 공식 인정됐다. 기존 첫 번째 달성 선수였던 김현석(2001년 7월 21일 달성) 현 충남아산 감독보다 731일 앞선 기록이다. 고정운의 리그 통산 기록은 235경기 56골 52도움.

2.2. 국가대표 경력

대표팀에서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지만, 대학교 재학기간 내내 단련한 런닝 크로스는 대표팀 역대 측면자원을 통틀어서 최고의 정확도를 자랑했다. 대표팀 후배 중에선 설기현 정도를 제외하면 비견될만한 선수가 없다.

1989년 5월 23일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지역예선 싱가포르전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는 포함되지 못했고, 대신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하고 4강 진출에 기여했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 엔트리에 포함되어 10번을 달고 조별리그(24강) 전경기에 풀 타임 출전하였다. 미국 월드컵 당시 기존의 장점이었던 전진 돌파력에 전술적인 움직임까지 크게 향상된 모습으로 스페인전에서 상대팀의 핵심 수비수였던 미겔 앙헬 나달[4]을 퇴장시키기도 하는 등 본선 3경기에서 전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으며,

파일:94 나달 퇴장.gif

2골을 넣은 홍명보와 함께 해외진출이 가장 유력한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5] 특히 3차전 독일과의 경기에서는 독일의 우측을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는데, 골에 가까운 슈팅 두차례 포함해 [6] 끊임없는 돌파, 크로스를 작렬시키며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후 활약을 이어가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1996년 AFC 아시안컵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나이가 들며 조금씩 하향세를 탔고,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 엔트리에서는 제외되었다. 사실 차범근호의 기본적인 골격은 고정운과 서정원을 양 날개로 두고 백업으로 이상윤과 김대의를 사정에 따라 교대로 기용하는 것이었는데, 2차전인 우즈베키스탄전까지도 사실 고정운은 평소처럼 상대 측면을 초토화시키다시피 하며 거의 골에 가까운 슈팅들을 뿜어냈으나, 하필 그의 백업인 이상윤이 극적인 결승골을 뽑아내며 존재감이 묻혔고, 이후 3차전인 한일전에서의 역대급 실책으로 인해, 이후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내내 뭐에 씌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당시 지역예선에서 최용수 다음가는 맹활약을 한, 고정운의 대체자원인 이상윤의 상승세가 두드러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포지션 경쟁에서 밀렸다. 상술한 1997년 9월 28일 한일전 당시 아군진영으로 공을 몰고가다가 빼앗기면서 일본의 미드필더 야마구치 모토히로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다. 한마디로 원조 역주행이었다.[7]

사실 당시 장면을 되돌아보면 고정운의 실수 이후에 수비진이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부분도 있고, 김병지의 머리 위를 넘긴 야마구치 모토히로의 로빙슛이 워낙 절묘하기도 했기에 실점 장면이 완전히 고정운만의 잘못이라 하긴 뭐하지만, 당시 경기가 하필이면 한일전이었다는 점, 그리고 평가전도 아닌 월드컵 최종 예선이라는 중요한 경기였다는 점에서 많이 까였다. 그나마 서정원과 이민성의 골로 역전했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패하거나 비겼어도 두고두고 씹힐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국대에서 에이스급이었던 고정운은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나이가 이미 32세에 들어서 노장축에 들기도 했지만 도쿄 대첩에서의 저 실수의 여파때문에 98년 월드컵에서도 낙마했다.[8] 이후 차범근 감독과 불화설마저 터지며 논란이 됐고, 그 시기를 끝으로 국가대표팀에 부름받지 못했다.

국가대표팀에서의 전성기가 짧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의 임팩트 있는 모습에 비해 저평가를 받고 있는 선수 중 한 명이다.

2.3. 플레이 스타일

주 포지션은 좌측 윙어로, 지칠줄 모르는 체력과 빠른 스피드, 유럽 선수들을 몸싸움으로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피지컬, 양발로 날리던 정확한 크로스를 바탕으로 하여 저돌적으로 측면을 돌파하던 클래식 윙어. 러닝 크로스로는 역대 국대에서도 손꼽히는 선수로 상대 공격수를 제치고 얼리 크로스를 올리는데도 뛰어났다. 94 월드컵에서 90분 내내 미친듯이 움직이며 저돌적인 돌파에 이은 크로스로 엄청난 활약을 했고 유럽에서 여러 오퍼를 받기도 했는데 레버쿠젠으로의 이적이 거의 성사직전으로 가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는 단순히 상대를 제치고 크로스를 올리는 선수가 대부분이었는데 파워로 측면을 휘저으며 돌파해 사이드로부터 패널티 에어리어 지역까지 공을 몰고 들어가 상대 수비수들을 당혹케 하는 한차원 높은 플레이를 선보인바 있으며 수비가담도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다.

여러모로 설기현과 굉장히 비슷한 타입의 선수다.[9]

3. 지도자 경력

3.1. 초기

은퇴 이후 2003년, 일화 재단 산하에 있는 선문대학교 지휘봉을 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 일화 시절 감독이었던 이장수 감독을 따라 전남 드래곤즈의 코치직을 맡았고, 1년 만에 이장수 감독이 FC 서울 감독으로 부임하자, 이장수를 따라 2005년부터 2006년까지 FC 서울의 코치로 활동하였다.

2008년 친정 팀 성남 일화 천마의 유소년 코치를 맡았다가, 2010년 성남 일화 천마의 U-18팀으로 운영하던 풍생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해서 다음 해인 2011년까지 2년 간 지냈다. 이 기간, 홍철, 황의조, 김동준 등 향후 국가대표가 되는 선수들을 대거 길러냈다. 2012년을 앞두고 풍생고에 역시 성남 출신인 김우재 감독이 새로 부임하면서 고정운은 풍생고를 떠나 한동안 야인으로 지냈다.

2015년 고향 전북에 호원대학교 스포츠학부 교수가 되었다.

3.2. FC 안양 감독

파일:20171109_022745.jpg

2017년 FC 안양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프로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으며 부임 후 데뷔 경기인 부천 FC 1995와의 경기컵 대회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성공적인 데뷔 경기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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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정폭력 문제에 연루되어 있는 데다, 과거 연고이전 문제로 안양팬들에게 원수 취급 받는 FC 서울 선수인 심우연을 다이렉트로 영입하면서 논란이 일었고[10] , 안양팬들은 시즌 시작도 전부터 고정운의 퇴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후 안좋은 여론을 의식했는지 심우연은 안양 구단과 계약을 해지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논란이 될만한 선수를 영입하려했다는 점에 있어서 팬들의 비난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감독 데뷔전인 2018 K리그2 광주와의 개막전에서는 무승부를 거두었다. 하지만 개막 이후 11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치욕스러운 기록을 세우며 리그에서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채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다.

5월 20일 광주 FC전을 통해 겨우 리그 첫 승을 거두었으나나 안양 팬들은 광주 FC 전부터 임은주 및 고정운 사퇴 전 까지 응원 전면 중단을 선언한 상태라 승리했음에도 고정운은 사퇴 압박을 더 심하게 받았다.[11] 이후 11경기[12] 에서 6승 2무 3패 20득점 14실점이라는 성적을 거두며 시즌 초반 11경기 무승하던 안양이 맞나 싶을정도로 반전에 성공했는데, 시즌 초반과는 달리 점점 전체적인 조직력이 다져지고 전술이 생기며 시즌 초반과는 확실히 달라진 경기력을 보이자, 고정운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많이 줄어들었으며, 안양 팬들은 응원 재개 시점을 임은주 사퇴 후로 변경했다.

그러나, 약속한 11경기가 잘 지나간 뒤, 귀신같이 경기력이 다시 개판이 됐다. 전체적으로 잘 다져졌던 조직력은 뭐에 홀린 것 마냥 도로 무너져버렸고, 잘 통하던 전술이 안 먹히기 시작했는데도 한가지 전술만 고집하고 있으며, 선수들은 이전 11경기에서 보여주던 투지는 사라져버렸다. 이후 임은주가 사퇴하고 난 후 첫 경기, 1위 아산 무궁화 전에서 지난 경기 개판이였던건 또 어디로 가고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 그동안 한번도 이기지 못한 아산을 무려 3-0이라는 스코어로 박살낸다. 역대 전적(1무 5패 안양 열세)과 1위와 9위에 대결이였다는 것과 3경기 연속 무득점이였다는걸 생각하면 놀라울 수준이었다. 그리고 부천 FC 1995를 상대로 또 3-1로 이기고, 1위인 성남과 1-1로 비기고 수원 FC또 3-1로 이기며 3년만에 수원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등 단장 사퇴 이후 3승 1무 10득점 3실점을 기록하는걸 보아 정말 단장 사퇴 버프가 실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후 마지막 홈 경기에서 부산 아이파크에 1-2로 패한 뒤 이어지는 원정 경기에서 3연승을 달렸다.

하지만 대전 시티즌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2:0으로 이겨가다가 내리 두 골을 허용하며 무승부를 거두며 리그 6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면서 재계약에 실패,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하면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

3.3. 김포 FC 감독

2020 시즌을 앞두고 새로 개편된 K3리그 참가팀 김포 FC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

3.3.1. K3리그 (2020~2021)

2020 시즌에 16개 팀 중 리그 8위를 기록하면서 정확히 중위권으로 시즌을 마쳤다.


2021시즌은 시즌 내내 공격 위주의 축구를 펼치며 천안시 축구단과 1, 2위를 다투며 우승경쟁을 펼쳤는데, 팀이 차기 시즌 프로리그인 K리그2 진출을 천명함에 따라 2022년에는 다시 프로 팀 감독으로 돌아갈수도 있게 되었다.

정규리그는 2위로 마감했으나, K3리그 챔피언십 2라운드에서 김태영 감독이 이끄는 천안시 축구단을 꺾고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김포가 2022년 K리그2 합류를 확정하며 개인적으로 4년 만에 프로 무대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편 프로화 이후에도 기존의 공격 축구를 계속 시도할 것임을 예고했다. #

3.3.2. K리그2 (2022~ )

3.3.2.1. 2022년
전지훈련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고정운 감독은 "선수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후회하게 해주자고. 우리 팀에 있는 선수들은 정신적으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미팅 때마다 '기존의 지도자들이나 구단 관계자들에게 너희들이 버린 내가 다른 팀에서 잘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다'라고 한다." 라고 각오를 밝혔으며, 기자회견에 동석했던 구본상은 "대전에서 나는 실패했다. 지금은 도전자가 됐다. 무서움 없이, 이 팀에 맞게 움직이겠다. 동계 전지훈련에서 하는 노력이 나를 배신하지 않게끔 팀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고정운 감독의 출사표와 어울리는 다부진 각오를 전했다. #

2월 19일의 K리그2 1라운드 광주 FC 원정에서 단단한 수비를 바탕으로 순간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슛을 때려박는 흥미로운 축구를 선보이며 지난 시즌 1부리그 팀을 상대로 1:2의 역사적인 프로무대 첫 승리를 챙겨왔다. 2월 26일의 리그 2라운드에서는 AFC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한 전남 드래곤즈를 상대로 0:2 승리를 가져오며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하지만 간절함 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었고, 이후에는 시즌 초반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며 우여곡절을 겪었고, 특히 잦은 퇴장에 눈물 흘리기도 했다.

2022시즌 꼴찌 후보로 꼽혔음에도 불구하고 40경기에서 10승11무19패로 8위에 등극, 두 자릿수 승리와 한 자릿수 등수를 기록함으로써 프로 전환 첫해치고는 선전한 한 시즌을 보냈다.
3.3.2.2. 2023년
스리백을 기반으로 한 3-4-3 내지는 3-4-1-2 포메이션은 그동안과 거의 동일하고 마찬가지로 공격 축구를 바탕으로 하되, 모든 선수들에게 적극적인 수비 가담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 선수들에게 "90분을 다 뛸 생각을 하지 말고 45분만 뛴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뛰어다니라"며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선수들이 이를 잘 받아들여 시즌 초반 리그 최소 실점에 기여하고 있다.

스프링캠프부터 시즌 초중반까지 이어지는 선수들의 부상에도 일단 이를 잘 극복하고 있다. 주전 키퍼였던 이상욱의 빈 자리는 박청효를 고정으로 기용하여 해결하고 있으며, 공격의 핵심이었던 손석용이 풀타임 출전이 어려운 문제는 외국인 3인방과 윤민호, 김종석 등을 잘 분배해서 활용하고 있다.

첫 10경기에서 6승 4무 0패를 기록, 무패행진을 이어가며 리그 선두에 올랐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개인 첫 4월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K리그2 감독으로서 올 시즌 첫 수상이다. #

10라운드 김천 상무와의 경기 후 인터뷰에서 "24라운드정도 까지 상위권에 남아있다면 승격이든 PO든 노려볼 수 있겠으나, 아직 시즌은 많이 남았다"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즌 중반으로 갈수록 선수들의 작은 부상들이 생기는 난관이 생기고 있고, 상대팀이 실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비 라인을 완전히 내리는 경기도 있어 득점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잘 해결한다면 김포의 돌풍이 봄의 반란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5월 6일 서울 이랜드와의 홈경기도 0:0 무승부로 마무리하며 첫 번째 라운드 로빈을 무패로 마무리했다.

1라운드와 달리 2라운드의 절반을 3무 3패를 기록하며 부침을 겪었다. 특히 체력적인 부분에서의 아쉬움을 각종 인터뷰에서 지속적으로 표현했는데, 이후 김천과 서울E와의 경기를 연속으로 잡아내면서 그러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있다.

25R 현재 1위와 승점 6점 차, 2위와 2점 차이로 4위를 달리며 상위권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시즌 초 주전으로 출발한 장윤호, 송준석 등이 부상으로 장기간 이탈했지만 박광일과 송창석 등의 선수들이 잘 메워주며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2라운드 로빈에서는 4승 4무 4패를 기록, 3위[13]에 자리했다. 상기했듯 라운드 초반을 3무 3패로 시작했지만 나머지 절반을 4승 1무 1패의 호성적으로 통과한 것은 희망적인 부분. 특히 송창석, 이상혁, 배재우, 윤민호 등 전반기에 많이 나오지 못한 선수들을 다수 기용하여 시너지를 내고 있다.

2라운드에서는 전반전 수비, 후반전 공격의 전략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이 가장 잘 먹힌 경기가 전반 내내 텐백 급으로 수비에 집중하다 후반 루이스의 단 한 방으로 이긴 25R 안양전. 문제는 전반이나 후반 초에 실점을 허용하면 뒤집는 게 잘 안 되어, 9연패 중이던 안산에게 1:0으로 경기를 내준 적도 있다. 고정운 역시 "어처구니 없는 결과"라며 황당해했을 정도였다.

이후로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여 10월 중순 기준으로 3위를 하고 있으며, K리그2 참가 2년차에 김포 FC를 K리그2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리그가 끝나기 전에 조기 3위를 확정지음으로써 1부 승격도 노려볼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남과의 K리그2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승리하며 K리그1 10위팀 강원과 승강전을 치르게 되었다.

정규시즌이 끝난 후 김포 FC를 잘 이끈 공을 인정 받아 K리그2 올해의 감독을 수상하였다.

1차전은 0:0 무승부로 끝냈고, 2차전은 루이스가 퇴장당하는 악재 속에 조직적인 스리백 수비를 토대로 기동력과 수비 조직력을 생명으로 삼는 김포에 ‘수적 열세’는 치명적으로 다가오며 아쉽게 1:2로 패하며 승격은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다.

일부 K리그 팬들에게서 1부에서는 통하지 않을 그물망 수비 + 뻥축구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어쨌든 팀을 리그 내내 상위권에 위치하도록 했고 승강전에서도 끝까지 대등한 싸움을 이어갔다. 지난해 K리그2에 뛰어든 ‘프로 2년 차’에 선수단 총 연봉이 리그에서 두 번째로 적은 스몰 마켓임에도 불구하고 올해 정규리그를 3위로 마치고 승격PO를 통과했다는 점에서 24시즌을 더욱 기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3.3.2.3. 2024년
지난 해 주전 선수 중 절반 이상이 사라짐에 따라 스쿼드를 완전히 재편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3.4. 지도 스타일

공격수 출신답게 공격적인 축구를 주로 구사한다.

특히 측면 공격수들을 적극 이용하는데, 오프 더 볼 상황에 최전방 공격수들의 고립을 막기 위해서 측면 공격수들이 88분 동안 ‘대각선’으로 움직일 것을 주문한다. 이렇게 측면 공격수들이 측면에서 골대 쪽으로 움직임으로써 공격 숫자를 늘리는 시도를 하며, 측면 공격수들이 중앙으로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측면 공간은 윙백들로 매워준다.

그래서 인터뷰에서도 전술판을 그릴 때도 다이아몬드 형태로 그린다고 밝혔는데, 측면 선수들이 직선으로만 움직이면 공격이 단조로워지고, 측면 선수들이 측면에서만 움직이면 크로스에 이은 공격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었다. #[14]

하지만 안양 감독 시절 지나치게 구시대적이고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로 지도력에 의문을 드러내며, 속된 말로 꼰대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는데, 팀을 '원(one)팀' 으로 만들겠다는 이유로 선수들에게 튀는 머리나 튀는 등번호를 금지한다며 77번, 99번, 100번[15] 같은 큰 번호는 달지 못하게 했고, 배번을 1번~36번으로 제한하는 등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선수단으로 관리했다.[16]

만약 성적과 결과가 좋았다면 카리스마와 원칙을 앞세워 팀의 기강을 확립한 엄격한 지도자라고 어떻게든 포장할 수 있었겠지만, 정작 결과로는 보여주지 못하며 구시대식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지식한 감독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만일 안양에서 성적이 좋았었어도 이런 지도 스타일은 잠깐이라면 몰라도 분명 시간이 지나면 한계가 드러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인데, 현대 사회 들어서 리더로서의 덕목에 있어서 구성원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능력의 중요도가 커지면서 축구 감독 역시 단순히 축구 전술 짜기 등의 업무만 잘한다고 다되는게 아닌게 되었다.

설령 성적과 결과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강압적인 방식을 추구한다는 점은 비난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 김포 FC K3리그 우승을 이끌고, 다음 해 K리그2에 데뷔하면서 위와 같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부각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FC 안양 시절 때와 다르게 튀는 머리와 튀는 등번호를 금지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인도 이런 지도 방식에 문제 의식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김포 FC의 선수단 구성이 주로 기존 프로구단들에서 방출된 선수들 위주라 이들에게 헝그리 정신의 동기부여를 시켰고,[17] 이게 굉장히 잘 먹히면서 김포는 프로 첫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초반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그 다음 시즌인 2023시즌에는 승강 플레이오프까지 갔다.

고정운 감독이 안양에서 시도했으나 어설프게 구현되었던 공격 축구에 많이 뛰는 활동량을 덧입혔고, 그의 축구가 한층 진화했다는 평도 이끌어냈다.

4. 해설가 경력

슈띵을 해야지 댑니다
그마만큼 몸싸움이 강한 리그고든요
2014년 SPOTV 해설자로 데뷔한 이후 K리그 클래식 해설을 맡고 있다. 해설 스타일은 한마디로 축구판 모두까기 인형. 야구중계에 이순철이 있다면 축구중계에 고정운이 있다!

같은 선수 출신인데도 이런 소소한 단점까지 들춰내고 지적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가혹하게 비판한다. 못하는 플레이도 까고 잘 하는 플레이도 깐다. 결국, 문제점은 고정운 해설위원이 평범한 선수가 아니라 위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한국 축구계에서 손꼽히는 레전드급 수준의 선수였다는 것이다. 특히, 공격수의 기준점이 해설위원 본인이니 까이지 않는 것이 힘들다.

다만 원조 모두까기 인형과 다른 점이라면 "이게 다 형님이 다 애정이 있어서 까는 거다." 같은 티를 팍팍낸다는 것이다. 즉, 방송 초보답게 해설자의 객관성보다는 지도자의 주관이 담뿍 담긴 지적이다. 때문에 팬들은 '날방송 레벨이라 거북하다'는 쪽과 '식상한 해설보다 낫다'는 쪽으로 호불호가 확연히 갈린다. 또한, 잘한 플레이가 나오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면서 크게 칭찬하는 모습을 보인다. 해설 내용을 보면 고정운 본인의 축구철학은 점유율 축구인듯 한데, 고전적인 킥 앤 러쉬나 영혼의 텐백 전술도 제대로 해내면 잘한다고 칭찬한다. 일례로 2015년 5월 30일 포항과 대전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은 대전이 일찌감치 텐백 잠그기를 시도하고 포항이 수비벽을 뚫지 못하고 고전했는데[18] 몇번이나 반복해서 초조한 마음에 자잘한 실수가 많았던 포항 선수들을 까고 반대로 포항의 파상공세를 악착같이 막아내는 대전의 수비라인을 극찬했다.

특유의 말투 덕분에 호불호가 다소 갈린다. 방송용으로 말끔하게 다듬어진 음색이나 말투와는 제법 거리가 있으며 어휘선택도 부자연스럽다. '역시', '~거든요'를 즐겨 사용하고 '그...', '저...'하며 말을 자주 질질 끄는 편이라 답답하다고 느끼기도 시청자들도 많다. 그래도 듣고 있다 보면 묘한 중독성이 있다고. 또한 일반 상식도 부족한 편이라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예를 들면 2017년까지도 울산을 직할시라고 부른다.[19]

FC 안양의 감독으로 내정된 후 그는 상주에서 있었던 상주와 부산의 승강 PO 2차전 중계의 해설을 맡아 승격 팀 최초의 클래식 잔류라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어록

너희들이 여기에 오기까지는 상당히 힘들고 그런 시간들이 있었는데, 전에 있던 팀, 전에 있던 감독이 방출을 했고 버렸기 때문에 꼭 잘 되어서, 복수를 해서, 좋은 선수로 거듭났으면 좋겠어. 다른 팀 지도자들이 찾지 못했던 그런 보석들을 만들 수 있다니까. 만들어질꺼야.
선수들이 전부 선택을 받지 못하고, 선수들한테는 상처도 많이 있겠지. 나는 조금 역설적으로 우리 선수들한테 여기서 1년동안 축구에 미쳐보고, 열정 가지고 배고픔 가지고 해봐라 (라고 말했습니다.) (중략) 우리 베스트11, 11명 중에 한 8명 정도는 K리그 데뷔 무대였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 선수들이 상당히 긴장도 많이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들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광주) 홈이고. 제가 준비를 하면서 충분히 자심감을 가지라고 이야길 했어요. 우리가 물론 K3에서 올라왔지만, 네임벨류는 광주 선수들보다는 떨어지지만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거고, 충분히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다고 이야기 했었어요.우리의 장점이 있다고 했어요 분명한건.
축구단을 통해서 시민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축구를 해보고 싶고 정말 신바람 나는 축구를 해보고 싶어요.[20]

7. 논란

1999년 9월 새벽 1시 20분경에 음주 상태로 자신의 BMW 승용차를 몰고 집으로 가다 자택 인근 동아쇼핑 앞길에서 인도를 넘어 동아쇼핑 1층 진열대를 들이받고 20여m 정도 날아간 뒤 10여m 아래의 지하 매장으로 추락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큰 사고였는데도 다행히 고정운은 가벼운 경상만을 입고 이날 퇴원했다. 사고 11시간 후인 이날 낮 12시경 경찰의 음주 측정 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는 0.012%였다고 한다. #

8. 여담

9. 관련 문서



[1] KLPGA 소속 프로 골프 선수 [2] 최초의 한국인 J리거는 노정윤이다. 노정윤은 대학 졸업 후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바로 일본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K리그 출신은 아니다. [3] 정확히 말하자면 음주운전으로 대형마트의 입구를 들이받아서이다. 새벽시간이라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4] 테니스선수 라파엘 나달의 삼촌이다. [5] 당시 레버쿠젠에서 눈독을 들였다는 소문의 진위가 20년 넘게 확인되지 않고 있었는데.. 2018년말 엠스플과의 인터뷰에서 고정운 본인이 월드컵 직후 실제로 레버쿠젠에서 오퍼가 왔고 개인합의까지 완료했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기사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당시에는 에이전트가 존재하지 않아서 차범근을 통해 오퍼가 왔으며 이후 독일로 가서 협상을 벌였고 이적료 5억, 연봉 2억 5,000만원에 합의를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구단에서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헐값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나 레버쿠젠의 오퍼가 있었던 1994년 당시 한국 프로축구 최고 연봉은 김주성의 8,400만 원이었다. 참고로 프로야구는 선동열의 1억 3,000만 원이 최고연봉이었으며, 한국 프로축구 최초의 억대연봉자는 1995년 홍명보와 고정운이 각각 1억과 1억 500만 원을 받으며 탄생했다. 어쨌든 단순비교는 힘들지만 현재 K리그 최고연봉이 15억 정도 하는 것으로 볼 때 마냥 적은 금액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한국축구나 K리그의 위상이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6] 그중 하나는 당시 독일 GK 보도 일그너가 그야말로 가까스로 쳐냈다. [7] 설기현과 고정운 두 선수가 모두 런닝 크로스가 대표팀 역대급으로 정확하다는점에서도 더욱 비슷하다. [8]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 캐스터는 "저건 웬 패스인가요?" "이상한 짓을 했어요" 라고 대놓고 비난했다. [9] 여담이지만 그런 두 선수가 감독이 되어 전적은 고정운 1승 2무 3패 설기현 3승 2무 1패다. [10] FC 안양 초대 단장은 " 서울에 있는 '그 팀'과의 직접적인 교류(즉, 서울에서 안양으로, 안양에서 서울로 이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라고 약속했지만 고정운이 그것을 깨버린 것이다. [11] 2015년 18경기 무승 당시에도 이우형 감독 사퇴/및 촉구나 응원 중단과 같은 강수는 두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응원하던 안양 서포터가 응원을 중단하고 사퇴 압박을 한다는걸 보면 당시 구단 상황이 얼마나 안좋았는지를 알 수 있다. [12] 5월 20일 광주전 포함, FA컵 제외 [13] 김천 48, 부산 44, 김포 42 [14] 대표적인 예시가 손흥민이다. 손흥민은 측면 공격수로 뛰지만 많은 득점을 기록하는 편인데, 계속 측면에서 중앙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15] FIFA 규정상 애초에 세자리 등번호는 달지 못한다. [16] 이로 인해 쭉 77번만 달아오던 김원민은 32번을 달아야 했고, 27번을 달았던 정재희는 11번을 달았다. 팀에서 고참에 속하는 박성진과 김민식은 35번과 36번이라는 어색한 등번호를 달아야했다. # [17] 실제 언론 인터뷰에서도 수시로 선수들에게 했던 말이 하술된 어록 문단에도 나온대로 "너희를 방출한 팀들에게 복수해라"였다고 한다. [18] 경기는 후반 추가시간도 다 끝나고 마지막 공격에서 극장골이 나오면서 포항이 2:1로 역전승 [19] 여담으로 울산은 직할시였던 적이 없었다. 직할시는 1995년 폐지되고 광역시로 전환되었고,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된 것은 2년 뒤인 1997년이었다. [20] 위에 나온 세 어록 모두 고정운 감독의 김포 FC K리그 2 데뷔전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김포는 작년까지 1부리그에 있던 광주 FC를 상대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신승을 거두었고, 그에 맞추어 K리그 공식 유튜브가 특별 영상을 만들었는데, 위 어록들은 거기서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