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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21:48

에메 자케

에메 자케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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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France FFF 2010.png

22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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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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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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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프랑스의 前 축구감독
파일:external/static1.purepeople.com/180477-aime-jacquet-jouera-son-propre-role-950x0-2.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에메 자케
Aimé Jacquet
본명 에메 에티엔 자케
Aimé Étienne Jacquet
출생 1941년 11월 27일 ([age(1941-11-27)]세)
프랑스국 오베르뉴론알프 루아르주 몽블랑군 부엔소리뇨눙시 셀수쿠잔[1]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
직업 축구선수 (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셀수쿠잔 (1958~1960 / 유스)
AS 생테티엔 (1960~1973)
올랭피크 리옹 (1973~1975)
감독 올랭피크 리옹 (1976~1980)
FC 지롱댕 드 보르도 (1980~1989)
몽펠리에 HSC (1989~1990)
AS 낭시 (1990~1991)
프랑스 대표팀 (1992~1993 / 수석 코치)
프랑스 대표팀 (1993~1998)
국가대표 파일: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원정).svg 2경기 ( 프랑스 / 1968)

1. 개요2. 생애3. 축구인 생활
3.1. 선수
3.1.1. 생테티엔3.1.2. 리옹
3.2. 감독
3.2.1. 리옹3.2.2. 보르도3.2.3. 프랑스 대표팀
3.3. 은퇴 후
4. 기록
4.1. 선수
4.1.1. 대회 기록
4.2. 감독
4.2.1. 대회 기록4.2.2. 개인 수상
4.3. 수훈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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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93년부터 1998년까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선수 시절 생테티엔의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이름을 날렸고 감독으로선 프랑스 리그에서 여러 팀을 맡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93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뒤 팀 운영에 있어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끝까지 고집하였고 마침내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자국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성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월드컵 우승 이후에는 프랑스 축구 연맹의 기술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1941년 11월 27일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마을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부모의 품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을의 농부들과 긴밀한 교류를 맺은 아버지로부터 관용, 존중의 가치를 배웠다. 자케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학교 교사가 이끄는 아마추어 클럽에 소속되어 축구 활동을 시작했다.

자케는 처음에는 185cm에 달하는 큰 키 때문에 골키퍼로서 활동했지만 얼마 안가 골을 넣는 재능을 인정받고 포지션을 스트라이커로 변경했다. 그는 1958년 16살의 나이에 지역의 축구 클럽인 셀수쿠잔에 입단했고 그해 드 라 르와르 지역 리그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1960년, 그는 리그에서 대활약했고 팀을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3. 축구인 생활

3.1. 선수

3.1.1. 생테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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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자케는 AS 생테티엔과 파트타임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생테티엔 관계자들은 아마추어에서 활약했을 뿐 프로에선 활약한 바 없는 그의 실력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1960년 12월 4일에 처음으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그는 곧 축구선수로서의 인생과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병행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게다가 그는 척수염에 걸려 있어서 출전을 제대로 하지 못할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그는 축구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고 1961년에 정식으로 프로계약을 체결한 뒤 5월 28일에 데뷔골을 터트렸다. 그러던 중 알제리 전쟁이 터지자, 그는 군대에 징집되어 군대 주둔지에서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벌이는 축구 경기에 동원되었다. 그는 마르세유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주둔 연대에서 축구 팀을 결성하여 그 팀의 코치가 되었다. 얼마 후, 그가 이끄는 팀은 군대스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훗날 그는 이때부터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1963년 3월 생태티엔으로 돌아온 그는 축구 선수로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자신에게 공격수보다는 수비쪽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포지션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변경했다. 이후 그는 팀이 2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다음 해, 그는 겨우 6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한 것에 실망했지만 팀이 1부리그를 우승한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1964-65 시즌, 그는 겨우 3경기 밖에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1965-66 시즌, 그는 마침내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당시 생테티엔의 감독으로 부임한 Jean Snella은 그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자케를 미드필더진에 합류시켰다. 이후 자케는 팀 동료인 로버트 허빈과 함께 미드필더진을 결성하고 탁월한 수비력을 발휘하며 어느덧 팀의 핵심 선수로 부상했다. 하지만 생테티엔은 정작 5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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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서 있는 사람들 중 왼쪽에서 두번째 선수가 에메 자케 선수다.

이후 생테티엔은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탁월한 경기력을 펼치는 그의 활약을 앞세워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다. 1966-67 시즌 우승을 시작으로, 셍테티엔은 1967년~1970년까지 4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트로페 데 샹피옹 대회에서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코페 데 프랑스 대회에서도 1968년과 1970년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1970년, 그는 시즌이 개막하기 전에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시즌아웃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부상에 시달렸고 1971-72 시즌에 겨우 2경기만 출전했다. 하지만 1972-73 시즌에 무사히 복귀하여 리그 29경기, 컵대회 4경기에 출장했다. 하지만 자신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것을 직감한 자케는 1973년 리옹으로 이적했다.

3.1.2. 리옹

올랭피크 리옹으로 이적한 뒤 두 시즌 동안 22경기 출장하여 3골을 넣었다. 이후 그는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리옹에서 코치 연수를 시작했다.

3.2. 감독

3.2.1. 리옹

1976년 2월, 올랭피크 리옹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1980년 6월까지 4년간 183경기를 지휘하여 65승 42무 76패를 기록했다. 이후 1980년 6월, 자케는 보르도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3.2.2. 보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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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FC 지롱댕 드 보르도는 팀의 체질 개선을 위해 패기가 넘치는 젊은 감독을 원하고 있었고 아직 30대 중반인 자케가 적임자라고 보고 그를 선임했다. 자케는 보르도에 부임한 후 레네 기라드, 프랑수아 베라치, 그리고 장 페란데스를 영입했다. 자케는 4-4-2 전술을 도입했고 팀내 노장들을 정리하는 한편 유스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했다. 그 결과 보르도는 한 시즌 만에 리그의 강자로 등극했다. 그들은 1980-81 시즌에 3위를 기록하여 유로파 진출권을 획득했다. 이후 보르도는 유로파에서 16강까지 진출했고 리그에선 4위를 기록했다.

이후 보르도는 자케의 지휘하에 리그 최강팀으로 거듭난다. 자케는 1983-84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84-85 시즌과 1986-87 시즌에도 역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코파 데 프랑스 대회에서도 1986년과 1987년에 2연속 우승을 달성했고 트로페 데 샹피옹 대회에서도 1987년 우승을 달성했다. 자케는 1980년부터 1989년까지 9년간 보르도에서 422경기를 지휘하여 219승 115무 88패를 기록하며 승률 51.9%를 기록하며 프랑스 리그 최고의 팀으로 육성시켰다. 이때가 보르도의 최전성기였기에 보르도 팬들은 지금도 에메 자케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 하지만 국제 대회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1989년, 자케는 클루이드 베즈 구단주와 갈등을 빚다가 "팀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싶다"는 구단주의 의향에 의해 경질되었다.

3.2.3. 프랑스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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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에서 해임된 후, 자케는 낭시와 몽필리에서 각각 한 시즌 동안 감독을 맡았다. 그후 1991년에 자케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술 디렉터로 부임했다. 이듬해 그는 제라르 울리에 대표팀 감독의 수석코치가 되었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 지역 예선에서, 자케는 수석코치로서 감독에게 작전에 대해 조언하고 선수들의 훈련을 지휘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1993년 10월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불가리아에게 통한의 패배를 당해 미국행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제라르 울리에는 사임했고, 그를 대신해서 자케가 1993년 12월 17일 프랑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자케는 1994년 2월,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첫 경기인 이탈리아와의 친선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이후 2월의 친선 경기들을 모두 승리했고 프랑스 축구 협회는 임시 감독이었던 그를 정식으로 대표팀 감독으로 삼고 1996 유로 대회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를 준비하게 했다.

자케는 대표팀을 1996 유로 대회에 대비하여 팀의 조직력을 강화하고자 기존의 스타 선수들( 장 피에르 파팽, 에릭 칸토나, 다비드 지놀라 등)을 제외하고 20대의 젊은 선수들을 프랑스의 핵심 멤버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로랑 블랑이나 디디에 데샹 같은 팀에 꼭 필요한 노장 선수는 계속 중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많은 선수들을 교체하여 조직력이 일시적으로 흐트러져 1996 유로 지역 예선의 첫 경기에서 승리를 챙기지 못했지만, 곧 조직력이 갖춰진 프랑스는 훌륭한 밸런스를 과시하며 조 1위를 기록하며 유로 1996 본선에 진출했다.

자케가 이끄는 프랑스 대표팀은 유로 대회 B조에 속하여 스페인,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한 조가 되었다. 프랑스는 첫경기 루마니아전에서 1:0으로 이기고, 2차전은 스페인과 1:1 무승부를 거뒀으나 3차전 불가리아전에는 3:1로 승리하며 조 1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이후 8강전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프랑스는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네덜란드 선수 세도르프가 실축을 범하면서 5:4로 승리, 4강전에 진출했다. 4강전인 체코와의 경기는 8강전처럼 0:0으로 끝났고 승부차기에서 6:5로 패하며 결승전 진출이 좌절되었다.

유로 대회에서 4강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둔 자케였지만, 팬들은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특히 4강전에서 프랑스에 비해 전력상 열세로 평가받는 체코를 상대로 별다른 공격 없이 지루한 축구로 일관한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게다가 프랑스는 1997년 브라질, 이탈리아, 그리고 잉글랜드와 함께 가진 친선 토너먼트에서 내내 부진에 휩싸여 3위에 그치자 그를 해임하라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이제 자국에서 열릴 월드컵이 코앞인데, 아직도 경기력이 그 따위인 게 말이 되느냐는 게 비판자들의 주장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케의 전술이 지나치게 수비적이며 경기에 이기려면 골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흑인 및 아랍계와 혼혈 선수들을 중용하는 그의 정책에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2]

하지만 프랑스 축구 연맹은 자케를 굳건히 신뢰했고, 자케는 축구 협회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다. 이후 프랑스는 월드컵이 열릴 무렵 조직력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 로베르 피레스가 새로 합류하여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윽고 개최된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프랑스는 C조에 소속되어 덴마크,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한 조를 이루었다. 프랑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첫 경기에서 크리스토프 뒤가리, 티에리 앙리의 연속 골과 상대의 자책골을 얻어내며 3:0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2차전에서는 앙리의 2골, 다비드 트레제게의 한 골, 비셴테 리사라수의 한 골로 4:0 완승을 거두며 16강을 확정지었다. 마지막 예선 3차전에서는 주전 선수 체력 안배 차원에서 백업 선수들을 대거 출전시키고도 덴마크를 2:1로 격파하고 3전 전승으로 16강에 올랐다.

16강전 상대는 파라과이었다. 여러모로 프랑스의 압도적인 우세가 예상되었지만 지단이 사우디와의 예선 2차전에서 퇴장당한 후 추가 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이 날 출장하지 못했고 지단이 사라진 프랑스 대표팀은 공격 패턴이 단순화되었다.[3] 당시 프랑스는 크리스토프 뒤가리, 스테판 기바르쉬,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 등 뛰어난 공격진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앙리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포지션이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윙어였고, 트레제게는 이번이 첫 월드컵이어서 경험이 부족했다. 뒤가리는 예선 1차전에서 득점을 기록한 후 2차전에서 부상을 당하며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기바르쉬는 예선 1차전에서 부상을 당한 후 예선 3차전 후반 막판에야 복귀해서 16강전에 바로 선발로 나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4] 게다가 파라과이의 골키퍼는 희대의 레전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였다. 칠라베르트는 이날 일방적인 반코트 경기에서도 엄청난 선방을 연거푸 보여줬다. 당시 해설진이 "골키퍼는 최소한 너만 잘하면 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걸 현실로 구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파일:external/pbs.twimg.com/BnLAR-RCMAAeyhb.jpg

결국 승부는 연장전으로 끌려갔고, 프랑스는 연장전 막판까지 득점을 거두질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승부차기까지 갔다간 이 날 엄청난 선방을 해대는 칠라베르트가 페널티킥마저 막아낼 지도 몰랐고 그렇다면 프랑스는 월드컵을 자국에서 개최해놓고도 16강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을 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연장 후반 막판, 프랑스의 수비수 로랑 블랑[5] 상대 문전 앞에서 다비드 트레제게의 헤딩 패스를 받아 다이렉트 발리슛을 찼고 그토록 터지지 않던 골을 기록했다. 이 골은 당시 적용되던 골든 골[6] 규정에 의해 경기를 마감하는 것이 되었고, 프랑스는 가까스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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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자케는 전술을 바꿔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회 초반에 4-2-3-1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원톱에 기바르쉬가 있었고 유리 조르카에프, 지네딘 지단, 티에리 앙리를 나란히 2선에 배치하고 디디에 데샹 에마뉘엘 프티가 중원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라과이와의 16강전에서 앙리가 극도로 부진하여 골이 터지지 않자, 자케는 8강전을 앞두고 앙리를 벤치로 내려보내고 카랑뵈를 아래로 내리고 4-3-2-1 크리스마스 트리 전술을 구축했다. 지단은 이 시스템에서 이전보다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고 팀의 전체적인 밸런스도 한층 강화되었다.

8강 상대는 우승 후보 이탈리아였다. 프랑스는 조별 예선에서 덴마크에 한 골 먹힌 걸 제외하면 실점을 하지 않는 최강의 수비력을 자랑했고 이탈리아 또한 카테나치오로 대표되는 수비축구의 나라답게 강력한 수비진을 구축하였다. 거기다 체사레 말디니는 당대 최고의 레지스타중 한 명인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를 선발에서 제외하여 수비형 미드필더를 1명 더 배치함으로 지단을 집중 마크하여 봉쇄시켰다.[7] 결국 승부는 정규 시간에서 결판이 나지 않았고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승부차기 결과,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4:3으로 격파하고 4강에 진출했다.
파일:external/img.fifa.com/526525_full-lnd.jpg

4강전 상대는 1990년 월드컵과 유로 1996 대회를 재패한 독일을 상대로 3:0 승리를 거두며 돌풍을 일으킨 크로아티아와의 경기였다. 크로아티아는 초반에 다보르 슈케르의 골로 앞서 나갔지만 릴리앙 튀랑이 연이어 2골을 터뜨리며 프랑스를 결승으로 이끌었다. 튀랑은 A매치에서 142경기에 출장했으나 골은 단 2골만 넣었는데, 바로 이 날 경기에서 2골이 터진 것이다.

릴리앙 튀랑의 인생 경기에 힘입어 오랫동안 바랬던 결승전에 진출한 프랑스의 마지막 상대는 호나우두를 필두로 세계 최강의 축구 대표팀으로 손꼽히는 브라질이었다. 사람들은 세기의 대결이 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호나우두는 뜻밖에도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한 반면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 공격진은 훌륭한 조직력을 과시하였고 지단이 2번의 헤딩 골을 터뜨리고 에마뉘엘 프티가 쐐기골을 넣으며 3:0 완승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프랑스는 마침내 대표팀 역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8]

3.3. 은퇴 후

1998년 7월 29일, 자케는 월드컵 우승 이후 대표팀 감독을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감독 인생을 그만두고 국가 대표팀 기술 디렉터로 부임했다. 비록 자케가 떠나긴 했지만, 프랑스 대표팀은 여전히 강력했고 그들은 유로 2000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2002년 8월, 자케는 20대 기업에 속하는 카시노 그룹의 요청을 받아들여 광고에 특별 출연했다. 그는 이전까지 광고에 나와달라는 요청을 모조리 거부했는데 카시노 그룹의 요청은 수락했다. 이에 대해 그는 카시노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광고에 나오기로 했다고 밝혔다.

에메 자케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경기들을 직관했는데, 대한민국 선수진의 경기력에 감탄했는지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한국 대표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과 스페인 간의 8강전을 앞두고 르몽드에 다음과 같은 기고문을 올렸다. #
한국팀은 세계 축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팀이 이런 축제를 맞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일본이 더 잘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9] 이탈리아로서는 한국전에서 전략적인 제압에 성공함으로써 좋은 경기를 보여줬으나 한국은 그런 이탈리아를 맞아 엄청난 도약을 실현했다. 이탈리아는 그러나 경기내용이 진부했고 한국의 압박, 속도, 두드러진 팀플레이에 질식했다.
한국의 힘은 단단하고 균일화된, 파괴할 수 없는 팀 정신에서 나오며 이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팀의) 유대는 감독에게는 기쁨이다. 한국팀에게는 모든것이 가능하다. 그들은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함께 싸웠으며 냉철함을 잃지 않음으로써 공격을 서두르거나 상대팀에 틈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팀은 수비를 바탕으로 안정되게 경기를 이끌어나갔으며 충만한 의지로 모든것을 흔들어놓았다. 이는 지난 98년 내가 경험했던 팀을 떠올린다.
나는 강력하게 부상한 이 팀의 재능 앞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이 팀은 어떤 허점도 보이지 않는 만큼 누구도 멈추기 어렵게 됐다. 전술적으로 거스 히딩크는 첫 3번의 경기를 통해 팀을 가다듬을 수 있는 영감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끝없이 움직이며 운동장의 전공간을 완벽하게 활동한다. 한국팀의 경기내용은 매우 풍부하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팀플레이에서 꼭 필요한경기관리를 실제로 행하는 당사자는 재능이 풍부한 이 선수들이다. 예를 들어 브라질 선수들과 반대로 한국 선수들의 드리블은 실제적이고 팀의 전진을 가능케 한다. 한국 선수들은 신념에 차서 점점 과감해지고 있다.
한국팀의 체력은 놀라우며 그간의 연습이 결실을 보는 것 같다. 한국은 그들이 개최한 이번 대회의 고지에 서 있으며 확고한 명성을 만들어가고있다. 그들은 16강에 진출함으로써 이미 목표를 달성했으나 자신의 역사를 쓰고 있으며 이 다음 역사는 8강전에서의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두 공격수에 의지하고 있으나 한국 수비는 이미 이탈리아전에서 비장의 무기를 입증했다. 나는 또 한국의 활기찬 공격수들이 스페인의 무거운 수비를 뒤흔들어놓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스페인은 중원을 보강해야 할 것이다. 한국선수들이 여기저기 뚫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예고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역시 그랬다.

또한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호나우두가 살아난 것에 기쁨을 표시하며 "호나우두를 잃지 않은데 너무 감사하다. 그는 4년전보다 더 여유가 있어 보였고 축구를 즐길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한국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일까.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 대한축구협회는 히딩크 다음으로 선임할 감독 1순위로 자케를 지명했다. 사실 자케는 2000년 말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축구협회로부터 감독 제의를 받았지만 "아직은 다른 나라의 대표팀을 맡고 싶지 않다"며 고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자케는 이번에도 한국 대표팀 감독에 부임하는 것을 거절했고 축구협회는 그 대신 움베르토 코엘류를 선임했다. 그 후에도 그의 이름은 종종 대한축구협회의 선임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그저 구색을 맞추는 것에 불과했다.

2002 월드컵 이전 감독직 제의를 거절했지만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축구협회에서 에메 자케에게 국내 지도자 강의클리닉을 부탁했고 이에 에메 자케가 방한해서 국내 축구팀 지도자들에게 강의를 해준일도 있었다.

자케는 2006년 12월 31일 프랑스 국가대표팀 기술 디렉터직을 그만두었다. 그후 2007년 9월, 그는 모로코 왕립 축구 협회의 고문으로 부임했다. 협회의 대변인은 그가 모로코 대표팀의 기술적 지원을 맡아줄 것이라고 밝혔다. 자케는 1년간 직임을 수행하다가 2008년 사임했고 이후 프랑스 리그 1 중계 방송에서 패널로 활동했다.

2009년 11월, 자케는 레몽 도메네크 프랑스 대표팀 감독을 비판했다. 그는 도메네크가 대표팀 감독을 처음 맡았을 때는 그를 지지했지만 2008 유로에서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당한 데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플레이오프로 떨어지자 그에게 등을 돌렸고 '프랑스풋볼'과 가진 인터뷰에서 "도메네크 감독은 유로 2008에서 실패했을 때 감독직에서 물러났어야 했다. 프랑스축구협회(FFF) 역시 다른 사령탑을 세워 월드컵 예선을 준비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 축구협회는 도메네크를 계속 신임했고, 그 결과 프랑스는 남아공에서도 결국 일부 선수들의 파멸과 함께 광탈하기에 이른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98.jpg

현재 그가 태어나 자랐던 셀수쿠잔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동상을 세웠다.

4. 기록

4.1. 선수

4.1.1. 대회 기록

4.2. 감독

4.2.1. 대회 기록

4.2.2. 개인 수상

4.3. 수훈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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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ail-sous-Couzan [2] 그의 재임 기간에 드사이, 튀랑, 앙리같은 흑인들이 적극 중용되었다. 지단같은 아랍계도 있었다. 이걸 갖고 대표적인 인종차별주의 극우 정치인 장 마리 르 펜은 당연히 물고 늘어졌다.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장 마리 르 펜이 자케에게 유색인종을 배제하고 백인만 대표팀에 선발하라는 요구를 했는데, 자케가 '이 인종차별주의자 대표팀을 만들어서 월드컵에 나가든가'라며 무시해 버렸다. [3] 지단이 나오지 못한 경기들은 유리 조르카에프가 지단의 위치에서 지단의 역할을 대신하였고 어느 정도 활약을 했다. [4] 물론 부상 당하기 전이나 이후 8강전부터는 1옵션 주전 스트라이커였지만 대회 내내 극도로 부진하며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했다. [5] 경기 내내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이 무수한 찬스를 다 날리고 승부차기로 갈 기세가 보이자 연장 후반 막판쯤부터 아예 직접 상대 골문 앞까지 올라가서 공격수처럼 골을 넣으려 애쓰고 있었다. [6]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까지 존재했었다. [7] 다만 덕분에 유리 조르카에프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게 되는 상황이 나오게 되었다. [8] 또한 자신이 프랑스 대표팀에 감독으로 있던 시절 자신이 데리고 있던 선수인 디디에 데샹이 20년 뒤에 이어서 우승을 했다. [9] 그렇게 예상한 건 사실 당연했다. 전년도 컨페더컵에서 한국은 프랑스에게 8개국 조별리그에서 0:5로 참패한 반면(한국 최종 5등), 일본은 결승까지 올라가 프랑스에게 0:1로 석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