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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21:48:09

전주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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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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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 崔氏
전주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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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191919>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득성조 소벌도리(蘇伐都利)[1]
시조 문열공계 최순작(崔純爵)[2]
문충공계 최군옥(崔羣玉)
사도공계 최균(崔均)
문성공계 최아(崔阿)[3]
집성촌 대구광역시 달성군
광주광역시
강원도 인제군
경기도 안성시· 연천군· 오산시· 의정부시· 화성시
충청북도 음성군· 청주시
충청남도 금산군· 부여군· 서산시· 서천군· 청양군
전라북도 김제시· 남원시· 무주군· 부안군· 순창군
전라북도 익산시· 임실군· 장수군· 전주시· 정읍시
전라남도 고흥군· 곡성군· 구례군· 담양군· 무안군
전라남도 순천시· 신안군· 영광군· 영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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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통영시
강원도 이천군· 통천군
경기도 장단군
황해도 곡산군· 금천군· 서흥군· 수안군
황해도 안악군· 평산군· 황주군
평안남도 강서군· 개천군· 맹산군· 성천군
평안남도 순천군· 안주군· 양덕군· 중화군
평안북도 구성군· 박천군· 선천군· 용천군
평안북도 영변군· 자성군· 정주군· 철산군· 후창군
함경남도 단천군· 덕원군· 북청군· 영흥군
함경남도 정평군· 함주군· 홍원군
함경북도 길주군· 명천군· 성진군
인구 458,191명(2015년)[4]| 국내 19위
링크 전주 최씨 평도공종중[5]
전주 최씨 인재공파[6]

1. 개요2. 설명3. 계파
3.1. 문열공계3.2. 문충공계3.3. 사도공계
4. 논쟁거리
4.1. 유래: 당최설과 토최설
4.1.1. 당최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들4.1.2. 토최설을 뒷받침있고 있는 근거들4.1.3. 토최설만 인정한 문열공·사도공계
4.2. 떡밥: 최씨 경주대동기원설
4.2.1. 입장: '최씨상계보'를 인정하지 않음
4.3. 문열공계와 문성공계 분리 과정
4.3.1. 1650년대 이전4.3.2. 대동보 발간 중 발생한 사건4.3.3. 현재의 상황
5. 지역별 인구 분포6. 연도별 인구 추이7. 항렬
7.1. 문열공계7.2. 문열공계 평도공파7.3. 문충공계
8. 집성촌
8.1. 강원·경기8.2. 충청8.3. 전북8.4. 전남8.5. 대구·경상8.6. 북한
8.6.1. 강원·경기·황해8.6.2. 평안8.6.3. 함경
9. 유명 인물

[clearfix]

1. 개요

전주 최씨는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시조를 달리하는 4계파로 나뉜다. 각각 최순작(崔純爵), 최군옥(崔羣玉), 최균(崔均), 최아(崔阿)를 시조로 한다.[7][8]

최씨 가운데 인구 숫자로는 2번째 자리를 차지한다.[9][10]

2. 설명

전주 최씨는 4개 계파가 있는데, 서로 연원과 조상이 다르다.

전주 최씨는 조선 시대에 모두 109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이는 최씨 중 본관별로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 숫자다.[17] 정승은 3명( 최명길, 최석정, 최석항), 대제학은 2명(최명길, 최석정), 청백리는 3명(최유경, 최사의, 최관), 한성판윤은 5명(최유경, 최사위, 최명길, 최석정, 최석항)을 배출했다. 종묘 배향공신은 1명(최석정)이다. 정승과 대제학, 청백리, 한성판윤, 배향공신은 모두 문열공계에서 나왔다. 공신은 4명으로 각각 정사공신(靖社功臣)[18] 최내길·명길 형제(문열공계), 진무공신[19] 최응일(문충공계), 영사공신[20] 최산휘(문성공계) 등이 있다.

3. 계파

3.1. 문열공계

전주 최씨 중 가장 번성한 계파는 최순작의 후손들인 문열공계다. 문열공계의 설명에 따르면, 최순작은 신라 말 삼최(三崔)로 불렸으며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진 최언위의 후예다. 최순작은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해 숙종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검교신호위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을 지내고 완주백(完州伯)에 봉해졌다.[21]

후손으로는 호부상서를 지낸 최숭, 공부상서와 수문전태학 겸 대장군을 역임한 최남부(崔南敷), 선부전서 상호군을 지낸 최득평(崔得枰), 감찰대부를 지낸 문정공 최재(崔宰), 조선 개국원종공신이자 청백리였던 최유경(崔有慶)[22] 등이 있다. 특히 최유경의 아들 6명이 크게 현달했는데 4남인 최사강(士康)[23]은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문열공계는 최유경과 최사강 이후 조정 요직을 역임하며 왕실과 연이어 인척관계를 형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유력한 명문가로 성장했다.[24][25] 병자호란 때 주화론의 대표주자인 문충공 최명길은 최사강의 8세손이다. 또 영의정을 9번이나 역임한 최석정[26], 좌의정을 지낸 최석항(崔錫恒)[27]은 최명길의 손자다.[28]

문열공계 세계는 크게 예의판서파와 평도공파로 나뉜다. 그리고 평도공파 안에서 판윤공파, 양도공파, 지평공파, 경절공파, 첨추공파, 감무공파 등 6파로 갈라진다. 예의판서파는 문정공 최재의 장남 최사미(崔思美)를 파조로 하며, 평도공파는 최재의 셋째 아들 최유경을 파조로 한다. 앞서 평도공 최유경 이후 문열공계가 번성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집안 인구는 평도공파 안에서 갈라진 6대파 후손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3.2. 문충공계

문충공계 시조인 최군옥은 고려 선종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고 '전해진다'.[29]

문충공계 인물로는 최군옥의 아들 최송년(崔松年)·구년(龜年) 형제가 각각 밀직사사와 문하찬성사을 지냈다. 또 문하찬성사를 역임한 최선능(崔善能), 여말선초 대마도를 정벌한 최칠석(崔七夕) 등이 유명하다. 하지만 문충공계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한미한 가문이 됐다. 최군옥의 8세손인 최양은 고려 우왕 때의 학자로, 포은 정몽주의 외조카이며 고려에 대한 지조를 지키고자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 때문에 문충공계 후손들도 출사에 소극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양은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이라고도 전해지지만, 역사학계는 두문동 72현을 정사가 아닌 야사로 간주하고 있다.[30]

3.3. 사도공계

사도공계는 고려 때 인물 최균을 시조로 한다. 최균은 동북로도지휘사(東北路都指揮使)가 되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다가 순절했다. 이후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으며, 예부상서에 증직됐다.

최균은 아들 최보순(崔甫淳)·보연(甫延) 형제를 두었다. 대표적 인물로는 고려 후기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성지(崔誠之)와 그의 아들 최문도(崔文度), 고려 말 충신인 최을의(崔乙義) 등이 있다.

4. 논쟁거리

이조 동성동본(異祖 同本同姓)이란 성씨와 본관이 같으나 시조가 2명 이상이고 각자의 연원이 달라 계파가 나뉜 집안이다. 대표적으로는 안동 김씨, 선산 김씨, 상산 김씨, 함창 김씨, 전주 류씨, 진주 류씨, 인동 장씨, 남양 홍씨 등이 있다. 하지만 전주 최씨는 이런 집안 가운데서도 연원이 가장 복잡한 가문에 속한다.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우선 경주에서 발원한 신라의 토성인 최씨가 백제의 땅 전주에서 세거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때문에 전주 최씨 후손 가운데 혹자는 시조가 경주에서 옮겨 왔다고 말하고, 다른 이는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의 후예라고 설명하는 등 제각각의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시조의 고증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고려 중기 이후 전주 출신의 최씨들이 다수 역사에 등장했고, 그 후손들이 저마다의 기억으로 선대의 역사를 정리하다 보니 계보가 심하게 엉켜버렸다. 이는 조선 중기 문열공계와 문성공계가 분리하기로 한 배경이 됐다.

전주 최씨 4계파 시조 중 가장 연대가 앞서는 것으로 알려진 최순작이 활동한 때가 고려 문종 시기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2000년이 흘렀으니 이제 와서 계보를 확실하게 정리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남은 역사적 기록과 장래에 발굴될 자료들을 통해 그나마 사실에 가깝게 고증하고 계보를 정리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았다.

이하에서는 전주 최씨 기원에 관해 제기된 몇 가지 논쟁거리에 관해 요약 정리한 내용이다.

4.1. 유래: 당최설과 토최설

전주 최씨의 기원에 대해선 '당최설(唐崔說)'과 '토최설(土崔說)'로 나뉘었다. 당최설은 전주 최씨의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는 주장이고, 토최설은 최언위를 포함해 최씨 득성조인 소벌도리의 후손 중 일부가 전주로 와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4.1.1. 당최설을 뒷받침하고 있는 근거들

당최설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선 최치원이 쓴 쌍계사 진감선사탑비[31]를 보면 진감선사[32]의 집안에 대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선사의 법휘는 혜소이며, 속성은 최씨다. 그 선조는 한족으로 산동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변방의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당나라가 4군을 차지함에 이르러 지금 전주의 금마 사람이 되었다.
禪師法諱慧昭 俗姓崔氏 其先漢族 冠蓋山東 隋師征遼 多沒驪貊 有降志而爲遐甿者 爰及聖唐囊括四郡 今爲全州金馬人也

또 최언위가 썼다고 전하는 무위사 선각대사탑비를 보면 선각대사[33]의 집안에 대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34]
대사의 법휘는 형미이며, 속성은 최씨다. 그의 선조는 박릉의 고관으로 큰 마을의 인재였으나 계림에 사신으로 왔다가 토군으로 흘러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음을 운수에 두고 자취를 해연에 멈추어 이에 무주(지금의 광주광역시 일대) ▩▩ 사람이 됐다.
大師法諱逈微 俗姓崔氏 其先博陵冠盖 雄府棟梁 奉使雞林 流恩兎郡 所以栖心雲水寓蹟海壖 今爲武州▩▩人▩[35]

아울러 문성공계는 족보에 '최씨본원(崔氏本源)'이라는 글을 수록했다. 여기엔 중국 서책 운부군옥(韻府羣玉)과 진감선사탑비를 근거로 전주 최씨가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해당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운부군옥'에 따르면 " 강태공의 후손이 나라를 사양하고 최읍(崔邑)에 거주하게 되면서 최씨가 되었고, 그 후손에 청하와 박릉 등에 살면서 모두 저명한 성씨가 됐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이 쓴 '혜소스님의 비문'[36]에서는 대략 "최씨의 선대와 근본은 한나라 벼슬했던 집안이다. 산동지방에 세거하다가 수나라 양제가 동쪽(고구려)을 정벌할 때 왔다가 많은 사람이 죽고, 일부는 고구려와 예맥에서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살았다. 이후 우리나라 백성이 됐고, 후에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4주로 나눌 때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전주와 금마를 관향으로 한 자는 모두 그 후예들이다.
韻府羣玉有曰 姜太公之孫讓國居崔邑 因爲崔氏 其後居淸河博陵 並爲著姓云 崔孤雲所撰 僧慧昭碑略曰 崔氏之先本 漢之冠盖族也 世居山東 隋煬帝東征時 將士多沒高句麗濊貊之地 爲其遐氓 自後 爲我東之民 至唐囊括四州 沿爲全州金馬之人 今之全州金馬貫者皆其後也云爾

위의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 최씨본원 등에 따르면 최씨 중엔 소벌도리의 후손인 신라 사량부 출신도 있지만, 고구려와 중국 등 북방계통에서 유래한 최씨도 있었고 이들은 주로 전주와 광주 등 전라도 지역에 모여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1.2. 토최설을 뒷받침있고 있는 근거들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의 기록을 곧이 곧대로 신뢰하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계에선 혜소나 형미 등 '중국계를 자처한 전라도 출신'들이 실제로는 중국계가 아니라 고구려 유민인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고구려 유민들을 남원경(南原京)으로 집단 이주시켰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남원시 일대다. 고구려가 망한 후 신라에 대항해 부흥운동을 벌였던 보덕국의 근거지는 남원경 인근의 금마였으며, 보덕국은 남원경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을 주축으로 활동했다. 학계에선 신라에 대항했던 고구려 유민들이 상류사회로 진출하는 방법은 승려가 되는 것이었고, 혜소나 형미 등은 고구려 유민으로 받게 될 차별대우를 피하고자 중국인의 후예를 자칭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는 후삼국시대 활동한 승려 현휘(玄暉)와 경유(慶猷) 등이 있다. 현휘는 노자의 후예를, 경유는 한족의 후예를 자처했다.[37]

아울러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의 기록만을 근거로 삼아 '전주 등 전라도에 살았던 기록이 있는 최씨라면 모두 북방계통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김헌창의 난과 관련해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최웅은 경주에서 전주로 파견된 관리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18일에 완산주 장사 최웅과 주조(州助) 아찬(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왕경(王京)으로 도망해 와 그 일(김헌창의 난)을 알렸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級飡)의 관등과 속함군(速含郡) 태수(太守)의 관직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
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湌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即授崔雄位級湌 速含郡太守 令忠位級湌

통일신라 시대 장사와 주조란 지방행정 조직인 주(州)를 다스린 도독을 보좌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통일신라에선 도독을 포함해 장사와 주조 등 지방행정을 담당한 외관은 모두 중앙으로부터 임명·파견됐다.[38] 최웅은 전주에서 지방관을 지냈으나, 전주 토착민이 아니라 경주 사람으로 전주에 파견돼 살던 인물인 셈이다.

또 조선 후기 실학을 연구한 서유구는 최치원의 문집인 ' 계원필경'에 '교인계원필경집서(校印桂苑筆耕集序)'라는 서문을 썼는데, 여기서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가 아니라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 일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유구의 글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이름은 치원이요, 자는 해부이며 고운은 그의 호이다. 호남의 옥구 사람이다.
公名致遠 字海夫 孤雲其號也 湖南之沃溝人

교인계원필경집서에는 서유구가 최치원의 출생지를 옥구로 상정한 자세한 이유에 대해선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을 내세웠던 서유구가 최치원의 출생지를 옥구로 상정한 것을 보면 1800년대 무렵 전라도 일대엔 경주에서 이주해 온 사량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나 문화재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4.1.3. 토최설만 인정한 문열공·사도공계

이상에서처럼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 이야기, 문열공계 및 문성공계의 설명, 삼국사기 최웅의 기록, 서유구의 최치원 출생지 언급, 각종 역사학 논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가 건국되기까지 약 3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전주에는 고구려 유민들, 중국에서 내려온 사람들, 경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섞였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 왕조시대엔 조세의무와 농경, 공역 등을 위해 거주지 이전이 엄격히 제한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대 삼국시대에도 거주지 이전은 가능했다. 관직 부임이나 결혼 등을 이유로 본적지 관청에 신고한 후 적법한 절차를 밟으면 이주가 가능했다. 특히 통일신라 당시에도 지방민이 왕경(王京)인 경주로 옮겨오는 것은 다소 제한적이었으나, 반대로 경주에서 지방으로 옮겨가는 것은 인구분산 차원에서도 장려되는 편이었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39]

다만 현재에 와서 당최설은 '모화사상으로 인해 자신의 선조를 중국에서 왔다는 식으로 지어내려고 했던 의도'라고 풀이되며[40], 현재 문열공계와 사도공계는 족보에서 토최설만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4.2. 떡밥: 최씨 경주대동기원설

'최씨 경주대동기원설(慶州大同起源說)'은 한국에 있는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사량부(沙梁部, 옛 돌촌 고허촌)를 중심으로 살아온 경주 최씨가 한국 모든 최씨의 중심세력( 종가)이고, 다른 본관의 최씨들은 사량부에서 각각 지방으로 흩어져 살면서 분적했다고 설명한다. 조선 말기에는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을 바탕으로 '최씨상계보(崔氏上系譜)'라는 세계표(世系表)까지 만들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당최설과 토최설이 제기된 데서 드러나듯 한국의 최씨 중엔 소벌도리의 후손들이 상당수인 것은 맞지만, 중국에서 동래했거나 고구려 유민 등 북방계통에서 유래한 경우도 존재한다.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에 대한 대표적인 반례는 통일신라 말기 활동한 낭공대사(朗空大師, 832년~916년)다. 그는 신라 출신으로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했고, 왕으로부터 국사(國師)의 예우를 받은 고승이다. 하지만 그의 조상은 소벌도리가 아니고 중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최언위가 경명왕의 명을 받아 찬술한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를 보면 대사의 출생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행적(行寂)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그의 선대는 주나라 조정 상보(尙父: 태공망)의 먼 자손이자 제나라 정공의 먼 후예인데, 그 후손이 현토군(玄兎郡)에 사신으로 나왔다가 계림에 머물러 살아 지금은 경만(京萬) 하남(河南) 사람이 되었다.
大師 法諱行寂 俗姓崔氏 其先周朝之尙父遐苗 齊國之丁公遠裔 其後使乎兎郡 留寓鷄林 今爲京萬河南人也

특히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의 근거로 쓰이는 최씨상계보는 그 신빙성 자체가 의심스럽다. 따라서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은 현재 정설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4.2.1. 입장: '최씨상계보'를 인정하지 않음

최씨상계보란 최씨가 소벌도리로부터 어떻게 혈연 관계가 이어지는지를 표기하는 문서다. 다른 말로는 '최씨선계보(崔氏先系譜)' 또는 '선의계 추록(先疑系 追錄)'이라고도 한다. 이 자료는 '최씨 경주대동기원설'의 주요 근거로 쓰인다. '최치원이 소벌도리의 24세손'이라거나 '◇◇ 최씨가 소벌도리 또는 최치원의 00세손'라고 말하는 근거는 모두 최씨상계보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라의 유리 이사금이 소벌도리가 속한 사량부에 최씨 성을 하사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41], 현재 최씨 인구 중에서는 경주 최씨의 숫자가 가장 많다. 때문에 '최씨는 대부분 소벌도리의 후예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최씨상계보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씨상계보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파일:20210212_choi.jpg
최씨상계보-1
파일:choichoi.jpg
최씨상계보-2
이 자료는 최치원 사후 900년이나 지나서 작성됐고, 역사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소벌도리로부터 30여대 걸친 계보를 일일이 열거해 소벌도리와 각 최씨들을 무리하게 연결하고 있다.[42][43] 경주 최씨가 대동보를 처음으로 만든 건 1734년 갑인보(甲寅譜)[44]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년 뒤, 기존에는 어떤 사료나 족보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던 내용이 갑자기 개인의 필사의 형태로 출현했다는 건 최씨상계보의 신빙성을 의심케 한다.[45]

최씨상계보가 역사적 사실 또는 각 최씨가 주장하는 세계도와 맞지 않는다는 것은 몇 가지 사실만 확인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본편의 이미지로 첨부된 '최씨상계보-2'를 보면 전주 최씨 문열공계 시조 최순작은 소벌도리의 27세손이며[46], 최치원의 둘째 아들인 도함(道含)의 손자라고 표기되어 있다.[47] 하지만 이는 문열공계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이야기다. 문열공계 족보에서는 "우리 집안은 소벌도리의 후손이지만 선대의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고증이 가능한 최순작부터 시조로 삼는다"라고 되어 있다.

또 '최씨상계보-2'에서는 최순작의 셋째 아들이 해주 최씨의 시조 최온(崔溫)인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48] 즉 최치원의 손자에서 전주 최씨(문열공계)가 갈라져 나왔고, 문열공계 시조(최순작)의 셋째 아들이 해주 최씨 시조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전주 최씨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다.

아울러 최치원의 사촌인 최승우의 아들이 동주 최씨 시조 최준옹인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도 동주 최씨에서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최순작의 둘째 아들 공(空)[49]의 손자가 전주 최씨 사도공계의 시조인 최균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상과 같이 최씨상계보에 나오는 내용은 대체로 그 진위를 의심케하는 기록들이다. 최씨상계보의 다른 이름인 선의계 추록이라는 용어도 '윗세대(先)의 의심스러운 계보(疑系)에 대해 추측하여 기록한다(追錄)'는 뜻이다. 명칭 자체가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기록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최씨상계보는 역사적 진실과 정통성 등을 외면한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오히려 이런 문서가 유행하는 현상은 자신의 성씨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문거족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50] 그러므로 실제 한국의 고대사가 최씨상계보의 내용과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할 일이다.[51]

이런 배경에 따라 전주최씨중앙화수회[52]에선 1986년 발행한 '전주최씨화수회보' 제17호를 통해 최씨상계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문정공파(文貞公波)의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600년의 역사를 전해오고 있으나 초씨원류대계(崔氏源流大系)에서 말하는 경주최씨상계보는 불과 100년 전후의 것이며, 이경도인 율계 강필동(栗溪 姜必東)이라는 사람은 어느 연대인지도 알 수 없다. 그분이 개인 취미로 성씨를 수집하여 미완된 제성(諸姓) 사보(私譜) 자료 중 경주최씨상계보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는 과신할 바가 못 된다.

또 오문(吾門)의 상계를 최치원의 둘째 손자 첨로의 계통으로 연계시켜 놓은 점은 용납할 수 없다. (최씨상계보)보다 수백년 앞서 족보를 편찬해 온 오문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역사적 차이가 허다하다. 만일 문제의 계보를 인정한다면 오문의 족보 600년사는 도외시되는 중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 문열공계와 문성공계, 문충공계 일부 후손들이 1995년 합동으로 발간한 '전주최씨연원지(全州崔氏淵源誌)'라는 책[53]에서는 최씨상계보를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단순 참고용'이라고만 밝혔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선의계 추록은 '경주최씨상계보(慶州崔氏上系譜)로써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인 1877년[54]에 함경남도 이원군 동서면 효우리 강성우(姜聖佑)씨 집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성우씨의 6대조인 율계 강필동(栗溪 姜必東)씨가 수집한 여러 성씨들의 족보가 비장되어 오던 것을 함경남도 단천에 사는 최장환(崔章煥)씨가 강성우씨 집을 예방하여 최씨에 관한 부분을 필사하였던 것이다.

그후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최홍연(崔弘淵)씨가 서울의 여러 종친과 상의하고 지난 1937년에 경주최씨상계보라 하여 발간하였다. 이것을 또 1949년에 경상북도 월성군 천북면 손곡리에서 중간(重刊)하여 현재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성씨별로 성자(姓字)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시대인 신라 건국 초부터 성명의 자(字) 또는 계대를 어떻게 고증하였는지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상계보에 본관별 최씨의 계대를 이어 거의 모든 최씨가 경주 최씨 상계의 어딘가에서 분적되었음을 상세히 계도화(系圖化)하여 수록하여 놓았다.

그러나 여기(전주최씨연원지)에서는 상계보를 확실한 고증으로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후예로 하여금 혼돈을 막기 위하여 신라 말기에 해당되는 계대 이하는 삭제키로 하였다.

상계보란 당시 학자이며 야사가(野史家)였던 율계 강필동 선생이 증보(增補)한 자신의 작품이 아닌가 사료되며, 다만 선계에 대한 정통성 문제 이전에 후예로 하여금 참고하기 바랄 뿐이다.

4.3. 문열공계와 문성공계 분리 과정

이 문단에서 다루는 내용은 전주 최씨 가운데 문열공계와 문성공계에 해당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전주 최씨'란 문열공계와 문성공계만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4.3.1. 1650년대 이전

문열공계 시조인 최순작은 고려 문종 때 사람이다. 문성공계 시조인 최아는 고려 말 인물로, 최순작의 7세손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계대를 알 수 없다. 전주 최씨가 족보 형태의 문서를 처음 만든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최순작의 7세손 최재가 사망한 후 이색이 쓴 그의 묘비명을 보면 "완산 최씨 보계에서 상고하여 볼 만한 이로 순작이라는 이가 있는데, 벼슬이 검교신호위상장군에 이르렀다[完山崔氏譜 可考者曰 純爵 官至 檢校神虎衛上將軍\]"면서 최순작부터 최재까지의 혈연관계를 열거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최순작 이후 최재까지는 문서 형태로 전하는 계보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에는 인쇄 기술과 여건이 발달해 족보를 간행하는 간격이 짧아졌으나 과거엔 사정이 좋지 못해 족보를 만드는 간격이 길었다. 문헌으로 전하는 전주 최씨 최초의 대동보는 1567년(명종 22년) 발간된 것으로, 당시 연호 융경을 따서 '융경보'라고 불렸다.[55] 융경보는 최재를 대종으로 삼아 그의 아들 3형제와 평도공 이하 6파의 후손들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 전주 최씨는 신라 말 최언위를 원시조로 하고, 최순작을 시조로 정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난리를 거친 탓에 융경보의 완전한 실물은 현재 전해오지 않고 있다.[56]

4.3.2. 대동보 발간 중 발생한 사건

양란 이후 전주 최씨에선 최명길과 최석정, 최석항 등이 잇따라 정승을 지내며 정치적으로 득세하게 됐다. 또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되는 등 어지러워진 혈통을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게 됐다. 이에 양반가에선 족보를 만드는 게 성행했다. 전주 최씨도 대동보를 편찬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됐는데, 문열공계와 문성공계가 나누어진 것도 이때다.

당시 전주 최씨 대동보를 만드는 작업을 주도한 건 최재의 후손인 최관(崔寬, 앞서 전주 최씨에서 배출한 청백리를 언급할 때 거론한 그 최관)이었다. 그런데 최관이 대동보 편찬을 다 끝내지 못하고 관직으로 나가게 되면서 최아의 후손인 최세영(崔世榮)이 일을 대신하게 됐다.[57] 하지만 최세영은 '최아를 최순작의 후손으로 하고 족보를 만들기엔 두 사람 사이의 정확한 계대를 상고할 수 없다'면서 최아를 시조로 한 족보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그 단서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대동보 작업을 맡은 이후 여러 보첩과 자료들들을 종합해서 세밀하게 연구해보니 불분명한 곳이 많고…(이하 중략)…본원(本源)의 같고 틀림과 세대의 앞뒤가 서로 엇갈리고 있으니 이는 처음부터 임의로 할 의도는 없었으나 모두 서로가 개인적 의견을 혼동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하 중략)…이에 종인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확실한 것만 거론키로 했으며 최아를 시조로 하되 그 위의 7세는 후인들의 고증과 연구의 대상으로 남겼다"

이로 인해 최세영은 1686년 최아를 시조로 하는 족보를 만들게 되니 흔히 '초성일권(草成一卷)'이라고 하는 책이 바로 이것이다. 이를 통해 문성공계는 문열공계에서 분리가 됐다. 문성공계에선 '초성일권'을 당시의 연호 강희를 따서 '강희보'라고 칭하기도 하고, 병인년에 제작됐다고 해서 '병인보', 서울에서 만들어졌다고 '경보(京譜)'라고도 한다.

이후 문성공계에선 1743년(영조 19년)에 비로소 완전한 형태의 첫 대동보를 만들게 된다. 이 책은 당시 연호인 건륭을 따서 '건륭보'라고 부른다.

4.3.3. 현재의 상황

문열공계와 문성공계가 분리된 배경엔 최순작과 최재, 최아의 혈연관계를 어떻게 할 것이냐 여부가 쟁점이다.

문열공계에선 최순작에서 최재로 이어지는 계대를 직계로 여기고 있다.[58] 문열공계는 융경보를 포함해 현재까지 10번 대동보를 편찬했다.(1567년→1745년→1798년→1843년→1901년→1924년→1957년→1981년→2003년).

문성공계는 상황이 복잡하다. 초성일권이 만들어진 후 300여년이 지난 현재에 와서 문성공계 일부 지파에선 '최아를 시조로 해 문성공계를 따로 분리한 것 자체도 속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59] 사실 문성공계에선 최아의 묘소 실존 여부를 놓고도 논란이다. 현재 전주에 있다는 최아의 묘를 인정하는 지파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지파끼리 시조 향사도 따로 지낼 정도다. 당연히 대동보 편찬도 중단됐으며 지파별로 파보만 발간하고 있다.

다만 조선 고종 때 칙명으로 간행한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 권48 씨족고(氏族考)를 보면, 전주 최씨를 설명하면서 문열공계와 문성공계를 한 집안으로 간주하고 있다. 해당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순작은 검교신호위대장군[60]이며, 한 일파를 이루었다
崔純爵(檢校神虎衛大將軍, 爲一派)

7세손[61] 유경은 참찬을 지낸 평도공이고 청백리에 선정됐으며 서원에 배향됐다.
七世孫 有慶(參贊 平度公 選淸白吏 享書院)

유경의 아들 사의는 판돈녕부사를 지낸 양도공이며 청백리에 선정됐다. 사강은 찬성을 지낸 경절공이다.
有慶 子 士儀(判敦寧 讓度公 選淸白吏) 士康(贊成 敬節公)

순작의 10세손 덕지[62]는 문신으로 직제학을 지냈고 서원에 배향됐다
純爵 十世孫 德之(文 直提學 享書院)

덕지의 손자 충성은 서원에 배향됐다.
德之 孫 忠成(享書院)

덕지의 종손 수손은 진사로 서원에 배향됐고, 수손의 아들 필성은 진사로 서원에 배향됐다.
德之 從孫 秀孫(進士 享書院) 秀孫 子 弼成(進士 享書院)

사강의 7세손[63] 내길은 문신으로 판서를 지냈고 공신이 돼 완천군에 봉해졌다.
士康 七世孫 來吉(文 判書 功臣 完川君)

내길의 동생 명길은 문신으로 영의정이며 공신이 돼 완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문충공 시호를 받았고 서원에 배향됐다.
來吉 弟 鳴吉(文 領議政 功臣 完城府院君 文忠公 享書院)

명길의 손자 석정은 문신으로 영의정이며 문정공 시호를 받았고 숙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鳴吉 孫 錫鼎(文 領議政 文貞公 配享 肅宗廟庭)

사의의 9세손[64] 관은 문신으로 참찬을 지냈고 청백리에 선정됐다.
士儀 九世孫 寬(文 參贊 選淸白吏)

아울러 문열공계와 문성공계, 사도공계는 뜻을 모아 1958년 '전주최씨중앙화수회'라는 종친회를 구성했다. 전주최씨중앙화수회는 1978년부터 '전주최씨화수회보'라는 종중회보를 발행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발행한 제1호에서 '전주 최씨 상계 고증'이라는 글을 싣고 최순작으로부터 최균과 최아가 갈라져 나왔다고 밝혔다. 화수회보에 따르면 최균은 최순작의 둘째 아들 '공'의 손자이며, 최아는 최순작 6세손 입평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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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0월 1일 전주최씨화수회보 1호 4면 '전주 최씨 상계 고증'

5. 지역별 인구 분포

지역별 인구 분포는 아무래도 관향지(전주)가 위치한 전라북도를 비롯해 인근의 전라남도에 많이 살고 있다. 아래의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른 전주 최씨 인구 분포도를 보면 조사 시기[65]와 무관하게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에 전주 최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상남도 고성군에서도 높은 인구 밀집도를 보여주는데, 이곳은 문성공계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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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도별 인구 추이

전주 최씨는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성씨와 본관을 조사하기 시작한 1985년 이래 꾸준히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66] 최씨 본관별 인구 수로 봤을 때는 경주 최씨 다음으로 많다. 그런데 사실 전주 최씨는 4개 계파(문열공계, 문충공계, 사도공계, 문성공계)가 모여서 인구를 이루는 것이므로, 한 개 계파당 인구는 10여만 명 수준일 것으로 추산하는 게 옳다.[67]
1985년 조사 2000년 조사 2015년 조사
순위 본관 인구 수 본관 인구 수 본관 인구 수
1 경주 87만6732명 경주 97만6820명 경주 94만5005명
2 전주 34만2849명 전주 39만2548명 전주 45만8191명
3 해주 16만1782명 해주 18만1840명 해주 20만1625명
4 강릉 13만2300명 강릉 14만854명 강릉 14만8716명[68]
5 탐진 6만1841명 탐진 6만8127명 탐진 8만9943명
6 수성 4만4004명 수성 5만1780명 월성 8만2843명
7 삭녕 3만7872명 삭녕 3만8736명 수성 6만1231명
8 화순 2만7517명 화순 3만1173명 삭녕 5만8142명[69]
9 초계 2만2209명 초계 2만7213명 화순 3만8604명
10 월성 1만7514명 영천 1만8721명 초계 3만7527명
11 영천 1만5863명 강화 1만4557명 영천 2만1431명
12 수원 1만5442명 낭주 1만4264명 낭주 1만9500명[70]
13 강화 1만2553명 충주 1만3466명 충주 1만5705명
14 충주 1만2165명 월성 1만3463명 흥해 1만4792명
15 낭주 1만1723명 수원 1만3156명 수원 1만4687명
16 동주 1만562명 동주 1만1699명 강화 1만3372명
17 흥해 9189명 흥해 1만1479명 동주 1만1403명
18 통천 7751명 통천 8144명 통천 1만1178명
19 간성 6122명 진주 7289명 양천 8736명
20 양천 5933명 양천 6914명 밀양 4743명

7. 항렬

전주 최씨 각 계파마다 항렬이 다르다. 하지만 모두 오행상생법[71]을 사용해 항렬자를 만든 것은 동일하다.

7.1. 문열공계

26세 O식(植) 27세 병(炳)O 28세 O규(奎) 29세 종(鍾)O 30세 O락(洛) 31세 동(東)O
32세 O섭(燮) 33세 원(遠)O 34세 O호(鎬) 35세 승(承)O 36세 O근(根) 37세 용(容)O
38세 O교(敎) 39세 선(善)O 40세 O수(洙) 41세 상(相)O 42세 O양(陽) 43세 용(用)O

7.2. 문열공계 평도공파

최유경을 1세로 한다. 17세부터 23세까지는 火, 土, 金, 水, 木 오행으로, 24세부터 26세까지는 一, 二, 三 수교법으로 정했다. 26세 항렬자 善은 수교법 三과 오행 金에 모두 해당한다. 26세 항렬자부터 30세 항렬자까지는 다시 金, 水, 木, 火, 土 오행으로 정했다.
17세 O환(煥) 18세 중(中)O 19세 O용(鏞) 20세 호(浩)O 21세 O식(植) 22세 학(學)O[72]
23세 O호(護)[73] 24세 백(百)O[74] 25세 O진(振)[75] 26세 선(善)O[76] 27세 O수(洙) 28세 집(集)O
29세 O하(夏) 30세 교(敎)O

7.3. 문충공계

26세 O식(植) 27세 병(炳)O 28세 O규(奎) 29세 용(鎔)O) 30세 O한(漢) 31세 환(桓)O
32세 O섭(燮) 33세 주(周)O 34세 O호(鎬) 35세 해(海)O 36세 O동(東) 37세 희(熹)O
38세 O균(均)

8. 집성촌

8.1. 강원·경기

8.2. 충청

8.3. 전북

8.4. 전남

8.5. 대구·경상

8.6. 북한

8.6.1. 강원·경기·황해

8.6.2. 평안

8.6.3. 함경

9. 유명 인물


[1] 소벌도리는 신라가 건국되기 전부터 경상북도 경주에 형성된 6촌 가운데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촌장으로, 최씨 득성조(得姓祖)로 여겨진다. 하지만 전주 최씨가 실제 소벌도리의 후손이고 그를 비조로 삼을 수 있느냐에 대해선 계파마다 이견이 존재한다. 목차 중 당최설과 토최설 참고. [2] 완산 최씨에서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완산(完山)은 전주의 옛 이름이다. [3] 최아는 문열공계 시조 최순작의 7세손으로 알려졌다. 최순작과 최아의 혈연관계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었는데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문열공계와 문성공계는 같은 일족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1686년 문열공과 문성공을 연결할 공통 조상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문성공계에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족보를 만들면서 집안이 나누어졌다. 이는 논란이 많은 문제여서 문성공계 후손 중에서는 최순작이 최아의 선조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4] 전체 최씨 중 19.6%. [5] 문열공계 [6] 문성공계 [7] 열거 순서는 기록에 따른 활동연대로 나열했다. 최순작은 고려 문종 때, 최군옥은 선종 때, 최균은 인종, 최아는 고려 말 인물이다. [8] 1938년 중추원에서 작성한 '全州 崔氏의 始祖 및 婚姻에 관한 件'이란 문서에선 "전주 최씨라 불리는 자 중에는 최균을 시조로 하는 일파와 최순작을 시조로 하는 일파와 최군옥을 시조로 하는 일파가 있다. 그러나 각파 시조인 최균, 최순작, 최군옥 등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기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 각파 최씨가 과연 동일 남계혈족인지, 혹은 혈통이 전혀 다른지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적었다. [9] 경주, 전주, 해주, 강릉, 탐진 위 5개의 가문이 최씨의 대본이다. [10] 본 문서의 목차 중 연도별 인구 추이 참조 [11] 문열공계 족보에 따르면, 최순작은 신라 말 삼최(三崔)로 불렸으며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진 최언위의 후예다. 최언위는 말년에 전주에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최언위에서 최순작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소실된 탓에 정확한 뿌리를 소급할 수 있는 최순작부터 시조로 삼았다고 했다. [12] 최언위가 실제 최순작의 선조인지에 대해선 역사적 검증이 필요하다. 최언위가 말년에 전주에 정착했다거나 완산백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실록 사례처럼 최언위의 말년 행적이 기록된 역사서나 자료가 실전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3] 최군옥의 8세손인 최양(崔瀁)의 행장(行狀)을 보면 문충공계의 기원에 관해 "그의 선대는 영남의 상산( 상주)으로부터 호남의 전주로 옮겨 거족이 되었다(其先 自嶺南之尙山 移居于湖南之全州)"라고 적었다. [14] 고려 말 충신인 최영 장군의 집안 [15] 과거엔 복야공계(僕射公系)라고도 불렸다. [16] 사도공계 족보에 따르면, 최균은 신라 말 삼최로 불렸으며 완산백에 봉해진 최언위의 후예다. [17] 문과 급제자 가운데 수석을 의미하는 장원(壯元)은 6명을 배출했다. 이것도 최씨 중 본관별로 가장 많은 장원 숫자다. [18]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 [19]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신 [20] 인조 때 류효립(柳孝立)의 역모를 진압한 공신 [21] 최언위와 최순작의 관계, 최순작의 행적 등에 대해선 자세히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문헌으로 전하는 전주 최씨 최초의 대동보인 융경보(1567년 발간) 서문에선 "우리 전주 최씨는 최언위를 시조로 삼았는데, 목은 이색이 최언위가 아닌 최순작을 시조로 한 이유에 대해 의심했으나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전사(全史)를 열람하였더니 예종 3년에 최순작을 언급하면서 누구누구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건국 초 최언위의 후손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최언위와 최순작의 관계 및 최순작의 행적에 관해 기록된 고려시대 역사서나 자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실물로 전해오지 않아 자세히 상고할 수 없는 상황이다. [22] 시호가 '평도(平度)'여서 후손들은 평도공파를 이루었다. [23] 시호가 '경절(敬節)'이어서 후손들은 경절공파를 이루었다. [24] 최유경의 차남 최사의(崔士儀)의 딸은 세종의 후궁인 귀인 최씨고, 증손녀는 광평대군의 손자 남천군(南川君)과 혼인했다. 최사강의 두 딸은 각각 태종의 아들 함녕군(諴寧君), 금성대군에게 출가했으며, 최사강의 장남인 최승녕(崔承寧)의 딸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과 혼인했다. 최승녕의 손녀는 예종의 후궁 공빈 최씨이고, 다른 손녀는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永順君)에게 출가했다. [25] 임영대군과 최승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구성군 이준. [26] '9번'은 조선 역사상 최다 영의정 역임 기록이기도 하다. 최장 기간 영의정 역임은 황희(18년간 역임). [27] 소론 4대신 중 한명. 나머지 3명은 류봉휘, 이광좌, 조태구 [28] 최석항은 최명길의 손자로 태어났지만, 최명길의 동생 최혜길(崔惠吉)의 아들 최후원(崔後遠)의 양자로 출계해 대를 이었다. [29] 부원군이라는 칭호는 조선시대 왕의 장인이나 공신에게 주던 작호다. 고려시대엔 충렬왕 이후부터 부원군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최군옥은 고려 선종 때 사람인데, 선종과 충렬왕은 150년의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최군옥이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족보를 만들면서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30] 최양의 행장인 '만육최선생행장'에도 최군옥을 완산부원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만육최선생행장은 최양 사후 5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작성됐기 때문에 고증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최양의 행장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일부 포함됐다. 최양의 행장을 쓴 사람은 정조 때 후 우의정을 지낸 이휘지(李徽之, 1715~1785년)로, 500년 전 인물의 행장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은 야사 위서를 보고 글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31] 국보 제47호 [32] 진감(眞鑑)은 시호고 법명은 혜소(慧昭)다. 774년 태어나 850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33] 선각(先覺)은 시호고 법명은 형미(逈微)다. [34] 그런데 최언위가 실제로 선각대사탑비를 썼느냐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이 탑비는 '개운(開運) 3년에 세웠다'라고 되어 있는데, 곧 946년이다. 하지만 최언위는 그보다 이른 944년에 사망했다. [35] 선각대사탑비는 총 2049글자지만 훼손이 심해 약 300글자는 판독이 되지 않았다. 선각대사의 집안에 대한 기록 중 마지막 ▩ 표시 3개는 판독이 되지 않는 글자들이다. [36] 진감선사탑비 [37] 출처: 임병태 숭실대 사학과 교수, <新羅小京考>, 1967년. 최병헌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신라 하대 선종 구산파의 성립>, 1972년 [38] 출처: 이문기 경북대 사학과 교수, <통일신라의 지방관제 연구>, 1990년.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고대사연구소 연구실장, <신라시대 漢山州에 대하여>, 2005년 [39] 출처: 김창석 강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7세기의 골품제와 관등제 - 주민의 편적(編籍)과 이주를 중심으로>, 2019년 [40] 가장 대표적인 게 다산 정약용을 배출한 나주 정씨다. 나주 정씨는 압해 정씨에서 분적했는데, 압해 정씨의 시조는 당나라 문종 때 대승상을 지낸 정덕성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약용은 정덕성에 대해 "사실 관계에 대한 고증이 어렵다"며 실존 여부를 회의적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증조부로부터 자신에까지 문헌을 연구하고 현지를 답사한 결과 정덕성은 후대에 모화사사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라고 주장했으며, 고려 중기의 무신 정윤종을 시조로 인정했다. [41]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해당 내용이 언급된다. [42] 삼국사기에서도 '최치원의 선대 기록이 사라져 세계를 알 수 없다'[崔致遠 字孤雲 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라고 기록됐다. [43] 최씨상계보가 처음 만들어졌던 1877년이나 해당 자료가 문서 형태로 발간된 1937년엔 정보의 유통이 활발하지 않아서 자료에 대한 교차검증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현대엔 인터넷이 발달하고 대부분의 주요 고전이 번역·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교차검증을 통해 해당 자료의 사실성을 검증·확인할 수 있게 됐다. [44] 전주 최씨 문열공계의 첫 족보는 1567년에 발간됐고, 문성공계 초성일권은 1686년에 만들어졌다. [45] 중국의 학자인 량치차오 위서를 판단하는 기준에 관해 "그 책이 과거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거나 혹은 결코 다른 사람이 인용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났다면, 열에 아홉은 위서다"라고 말했다. [46] '최씨상계보-2'에선 순(純)이라고만 표기가 됐다. [47] 최치원-최도함-최첨로-최순작 [48] 최씨상계보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최온은 소벌도리로부터 28세손, 최치원으로부터 4세손에 해당한다. [49] 실제 전주 최씨 문열공계 족보에선 공(崆)으로 표기된다. [50] 김동리의 소설 화랑의 후예 중 "아, 이럴 수가……. 온, 내 조상이 대체 신라적 화랑이구랴!"라는 대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51] 대표적으로 청주 한씨 족보를 거론할 수 있다. 청주 한씨는 기자(箕子)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는데, 족보엔 무려 황제(黃帝)로부터 기자로 이어져 마한까지 계려오는 계보가 수록됐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선 이 계보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52] 1958년 문열공계와 문성공계, 사도공계가 뜻을 모아 결성한 종친회 조직이다. [53] 전주 최씨 대동 광주·전남 화수회(全州 崔氏 大同 光州·全南 花樹會)에서 발간했다. [54] 고종 14년 [55] 특정 가문의 족보 가운데 문헌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은 문화 류씨 영락보(1423년)이다. 영락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라고 불리지만 완전한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실물이 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안동 권씨 성화보(1477년)이며, 그 다음이 문화 류씨 가정보(1562년)이다. [56] 융경보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서문(書文, 대제학 박충원이 씀), 기문(記文, 문열공계 첨추공파 최홍한이 씀), 발문(跋文, 문열공계 경절공파 최예수가 씀) 등이다. [57] 문열공계 최관이 문성공계 최세영에게 대동보 발간의 후속작업을 맡겼다는 데서도 드러나듯 당시까지 문열공계와 문성공계는 한 집안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58] 문열공계 족보에선 5세손 정신(正臣)의 3남 입평(立枰)에 관해 "후손이 있으나 족보를 같이 하지 않는다(有後孫 不同譜)"라고 표기함으로써 문성공계가 입평으로부터 이어진다는 단서를 달았다. [59] 문성공계가 최순작으로부터 이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지파에선 최아를 1세조로 놓은 세계표 앞에 별도의 목차(선의계, 先疑系)를 만들어 최순작→최숭→최남부→최전→최정신→최입평→최아까지 연결되는 계보를 수록했다. 다만 이 세계를 선의계라고 지칭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최순작부터 최아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윗세대의 의심스러운 계보'로 더 고증이 필요하다는 조건을 달았다. [60] 최순작은 검교신호위상장군을 지냈다. 상장군은 최고지휘관, 대장군은 상장군 바로 아래 직책이다. [61] 8세손이 맞으며 증헌문헌비고는 잘못 표기 [62] 문성공계 계보로 보자면, 최덕지는 최아의 5세손이다. [63] 8세손이 맞으며 증헌문헌비고는 잘못 표기 [64] 11세손이 맞으며 증헌문헌비고는 잘못 표기 [65] 성씨와 본관에 대한 인구주택총조사는 15년 주기로 1985년, 2000년, 2015년 세차례 실시됐다. [66] 성씨와 본관에 대한 인구주택총조사는 15년 주기로 1985년, 2000년, 2015년 세차례 실시됐다. [67] 물론 한 계파당 인구가 10만명일 것이라는 계산은 45만명을 단순히 4계파로 나뉘어 평균을 구했을 때의 숫자다.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역대 인명, 족보 및 문서간행 이력, 집성촌 현황 등을 고려하면 인구는 문열공계 > 문성공계 > 문충공계 > 사도공계로 추산하는 것이 실제에 가장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68] 강릉 최씨 14만5335명 + 강능 최씨 3381명 [69] 삭녕 최씨 5만1525명 + 삭령 최씨 3571명 + 삭영 최씨 3046명 [70] 낭주 최씨 1만7205명 + 랑주 최씨 2295명 [71] 오행에 해당하는 5글자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에 따라 5대의 항렬자를 순환시켜 정하는 방법. 절대다수의 집안이 이 방법을 쓴다. [72] 學을 자세히보면 爻(효)가 있는데 爻(효)가 火에 해당하므로 火오행이다. [73] 護를 자세히보면 隹모양에 土가 있어서 土오행이다. [74] 수교법 숫자 1(一)에 해당한다. [75] 수교법 숫자 2(二)에 해당한다. [76] 수교법 숫자 3(三)과 오행 金에 모두 해당한다. 그래서 26세손부터 30세까지 金,水,木,火,土 다시 오행으로 움직인다. [77] 독립유공자 최낙철이 이 마을 출신이다. [78] 최낙철 전 국회의원과 독립유공자 최경호·최영기·최원호가 이 마을 출신이다. [79] 독립유공자 최규원· 최규철· 최동림· 최병수·최사진· 최석호·최판열이 이 마을 출신이다. [80] 독립유공자 최낙종· 최낙희·최정원이 이 마을 출신이다. [81] 독립유공자 최우순 최갑환· 최재구 전 국회의원 부자가 이 마을 출신이다. [82] 독립유공자 최일호가 이 마을 출신이다. [83] 독립유공자 최관호가 이 마을 출신이다. [84] 독립유공자 최성록이 이 마을 출신이다. [85] 독립유공자 최응세가 이 마을 출신이다. [86] 독립유공자 최정수· 최팔용이 이 마을 출신이다. [87] 독립유공자 최국섭이 이 마을 출신이다. [88] 아버지 최중한(崔中漢)이 평도공 18세손 中(중)자 항렬을 사용했고, 본인은 평도공 19세손 鏞(용)자 항렬을 사용하였다. 참고로 평도공 18세손은 문열공계 25세손이고 평도공 19세손은 문열공계 26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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