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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09:04:26

이괄의 난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시대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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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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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李适—亂)
파일:쌍수정 사적비.jpg
공산성에 위치한 쌍수정 사적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을 당시의 행적이 기록됐다.
<colcolor=#000> 시기 1624년 1월 24일 ~ 4월 1일
장소 한반도 북부 일대
원인 인조반정 이후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봉기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이괄의 반란군
지휘관 인조
장만
정충신
남이흥
이시발
이중로†
이원익
박효립†
김충선[1]
임경업
심기원
이괄
기익헌
한명련
흥안군 이제
이수백
이흥립†
한윤
김효신†
서아지
사쇄문
고효내† 등
병력 관군 30,000여명[2]
정충신, 남이흥의 별동대 2,000여명
항왜 300명
관서군 12,000여명
관군 포로 5,000여명
항왜 120여명[3]
피해 지방군 와해 및 퇴각
베테랑 지휘관 다수 사망
전 군 병력 전멸 및 도주
결과 관군의 반란군 진압
영향 조선의 북방 방어선 약화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팔기군의 신속한 조선 침략 진군 성공의 원인

1. 개요2. 배경
2.1. 김류와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원인?
3. 전개
3.1. 반란 고변3.2. 금부도사를 죽이다3.3. 반란 초기, 양측의 삽질3.4. 황주 전투3.5. 마탄 전투3.6. 임진강을 넘어 한양으로3.7. 단 하룻밤 동안의 한양 생활3.8. 안령(무악재) 전투
4. 결말5. 평가
5.1. 이괄의 난과 호란 관련
6. 관련 인물
6.1. 이괄 군6.2. 조정6.3. 관군
7. 관련 링크8. 대중매체에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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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24년 1월( 조선 인조 2년)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정치적인 혼란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

조선 역사에서 한성(현 서울특별시)과 경기도가 아닌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의 유일무이한 반란이다.[4] 또한 도성을 점거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도 실패한 유일한 반란이다. 다행히 반란을 진압에 성공한 덕분에 조선 후기 왕실이 전조(고려)처럼 무신정권이 세워져서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할 운명을 면했다.

2. 배경

조선 중기의 무신 이괄 인조반정 광해군을 실각시키는 데 동참하여 큰 공을 인정받아 2등 공신의 첫 자리에 오른다. 비록 무관이고 초기부터 결사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반정 당시에 칼을 잡고 갑옷을 입고 나서서 사기를 드높였기에 그만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심지어 대장 김류가 늦는 동안 잠시 임시로 대장을 맡기도 했다.

본래 병마절도사로서 북방을 지키는 무장이었던 이괄은, 공신을 도성에 둬야 마땅하다는 김류의 주장에 따라 한성에서 벼슬을 하게 된다. 인조는 북방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이괄뿐 이라며 내키지 않아 했으나, 김류만이 아닌 이귀까지 주청하자 받아들여 이괄을 불러들였다. 이후 한성판윤에 임명되었으나 1달 만에 무슨 이유인지 사직을 청했다가 인조가 거부하여 반려되었으며,[5] 그 외에는 좌포도대장을 지냈다.

그러나 북방 후금의 낌새가 심상치 않자 인조는 도원수 장만에게 대책을 물었고, 장만은 이괄 혹은 이서를 부원수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인조는 이를 허락하여 이괄이 부원수로 임명된다. 6월 비변사가 후금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며 부원수 이괄을 미리 내려보낼 것을 요청하여 인조가 받아들여 1만 5천 명의 대군을 내리고 방비에 임하게 한다. 군량 문제 때문에 인조는 1만 5천을 다 데리고 갈 거냐고 넌지시 감축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괄은 방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다음날인 8월 17일, 인조는 출발하는 이괄에게 "도원수와 자네가 가니 서쪽의 근심을 전부 잊을 수 있다."라며 굳건한 신뢰를 보내며 격려했고, 이괄은 "신이 중책을 맡아 떨리고 두렵습니다. 올해 적군이 쳐들어오면 숫자와 강함의 차이가 확실하니 어찌 당해내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죽기로 싸워 나라의 은혜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라며 두려움과 동시에 결사의 각오와 충성심을 내비치며 작별했다.

약 2개월 뒤인 10월 15일, 이괄의 요청으로 전라도 군사가 추가로 더 보내진다.

2.1. 김류와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원인?

연려실기술에서는 이괄이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반정 당일에 김류와 다툰 일로 불화가 일어나 견제를 받았고 이로 인해 김류보다 낮은 자리를 받게 되자 큰 분노를 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연려실기술은 후대의 야사 모음집이라 신뢰도를 높게 인정받지 못하며, 정사인 실록의 이괄 관련 기록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 더욱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리고 후대의 기록인 만큼, 역적인 이괄에게 왜곡된 관점이 적용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일단 반정 당일에 이괄이 임시 대장을 맡았다가, 뒤늦게 온 김류에게 반항하여 다툰 내용은 실록에도 있다. 하지만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것처럼 이괄이 칼을 들고 김류를 죽이려고 했다는 내용은 없다. 그리고 김류는 훗날 이괄을 2등 공신의 첫 자리라는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반정 당일에 무장을 하고 나와 사기를 올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6] 그날 정말 김류가 죽을 뻔해서 이괄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면 나오기 힘든 말이다.

게다가 실록에서 김류는 오히려 이괄에게 내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우선 반정 이틀 뒤에 '공을 세운 사람을 변방에 둬서는 안 된다'라고 인조에게 강하게 요청하여 이괄을 한성에서 벼슬하게 해 주었다. 인조 1년 3월 25일에는 이괄을 자신에게 추천해준 김원량[7]의 인격과 공로를 인조 앞에서 칭찬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이괄도 같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이괄이 한성판윤이 된 것[8]에 대해 이수일이 공조 판서에 임명된 것에 비해 낮다고 불만을 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수일이 반정 당시에 내응한 공적이나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실록에 없다. 이괄보다 큰 공을 인정받았다는 사람이 공신 목록에조차 없었다. 이수일이 판서가 되는 것은 훨씬 후인 인조 6년이며 공조가 아닌 형조 판서였다.

그리고 한성판윤은 한직이 절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수도를 담당하는 관직은 결코 푸대접받는 자리가 아니다.[9] 임금이 사는 수도인데 당연히 그 수장으로는 믿을 만한 심복을 앉히는 것이 맞고, 그래서 한성판윤은 다른 지방관과 급을 달리하였다. 한성판윤의 품계인 경관직 정 2품은 육조판서와 동급이며 육조판서, 좌우참찬과 함께 ' 9경'이라 불리던 고위직이었다. 따라서 이괄이 한성판윤에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을 이유는 없다.

한편 승정원일기에는 이괄이 판윤에서 사직하겠다고 청했으나 인조가 받아들이지 않은 기록이 있다. 이것이 판윤 직에 불만을 품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사직하려고 한 이유는 일기에 나와있지 않으므로 불만을 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 자리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고, 주로 일선 행정, 지휘관으로 커리어를 쌓았던 이괄로써는 한성관아보다도 궁궐에 더 자주 앉아있어야 하는 경관직 판윤 자리가 단순히 자기와 안 맞다고 느낀 것일 수도 있다.

이괄이 좌포도대장으로 지낼 때 부사 박진장을 잡아들이면서 그의 노모를 때리고 집을 부수고 재물을 빼앗는 등의 행패를 부렸다고 탄핵을 당해서, 이괄이 반정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민감한 시기부터 행패를 부리다가 신하들과 사이가 나빠졌고 이것이 반정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순한 해프닝이었다. 일을 저지른 범인은 공조 좌랑 홍진도였으며 이괄은 홍진도의 요청을 받고 군관들을 빌려줬을 뿐이었다. 조정에서 조사해 보니 홍진도가 이괄에게 보낸 편지도 다 남아있었고 모두 홍진도가 한 짓으로 밝혀졌으며, 그저 군관들이 본래 이괄의 부하들이어서 이괄이 누명을 쓴 것뿐이었다. 진상이 밝혀지자 인조가 조사를 중단시켰다.[10]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이괄이 평안도에 부원수로 보내지면서 쫓아 보내는 거라고 화를 냈다고 되어 있으나, 실록의 기록은 역시 다르다.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떠나는 날에 이괄은 막중한 책임을 느끼면서 "이 한 몸 바쳐 나라에 보답하겠다."라고 불굴의 충성과 투지를 드러내었다. 물론 왕의 앞이니 속마음이 어쨌든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위에 서술되었듯이 이괄은 출발을 전후해서 방비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왕의 질문을 받자, 자세한 현지 정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전략을 설명한다. 최소한 자기가 맡을 임무에 관심을 갖고 성실히 임했다는 뜻이다. 연려실기술에서 묘사되는 무절제하고 분노를 폭발하는 모습하고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애초에 이괄이 다른 신하들 앞에서 2등 공신이라고 불만을 말하고 다녔을 수가 없다. 공신 책봉이 이루어진 것은 인조 1년 10월인데, 이괄은 이미 8월에 북방으로 떠난 뒤였다. 이괄은 부임지에서 따로 공신 책봉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괄이 2등 자리에 불만이 있었다고 해도 야사에 나오는 것처럼 그걸 다른 신하들 앞에서 말하고 다니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최소한 실록에는 이괄이 김류와 불화를 일으킨 기록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다는 기록도 없다.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승정원일기에 나오는데, ‘이괄은 이러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내용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온 사절이 물어보면 이괄은 이러한 인물이었다고 설명하자.’는 내용이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꾀했다.’는 말은 공적을 탐낸 문회 같은 사람들이 지어낸 무고였으며, 인조 정권이 명나라에게 최대한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민 소문이었던 셈이다.
(전략) 이정귀가 아뢰기를,
“천사(天使)를 접견할 때의 절목(節目)에 대해서는 승정원이 어전 통사(御前通事)로 하여금 등록을 상고하여 추출하게 한 다음 초안을 작성하여 신에게 보내왔으므로 신이 이미 그것을 보았습니다. 조사(詔使)가 만약 반정(反正) 때의 일을 묻는다면 당연히 주문(奏聞) 안에 갖추어진 내용대로 대답하면 될 것입니다. 역적 이괄의 변란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할 말을 의논하여 정해야겠지만, 당연히 ‘역적 이괄은 거의(擧義)한 훈신(勳臣)으로 망녕되이 자기의 공을 과신한 나머지 불만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다가 변방의 곤수(閫帥)로 나가게 되면서 더욱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반란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후략)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4월 29일(병오) 비

요약하면, ‘인조 정권과 김류는 이괄을 후대했으며, 이괄 또한 큰 불만 없이 정권에 복종했다.’ 정도가 되겠다. 이괄은 반란 고변이 있기 전까지는 군소리 없이 직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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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개

3.1. 반란 고변

반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서인 정권은 남인세력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하면서 북인에게 대해서는 특히 북인 정권 시절에서 권신이었거나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은 재기하게 되면 반드시 서인 권력에 견제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바로 즉시 처벌했다. 이때 이이첨 정인홍 류희분이 목숨을 잃었고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으며[11] 폐모론에 반대했던 유몽인이 인조정권에 출사하기를 거부 했다는 이유만으로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무고를 받아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러한 북인들의 기혹한 처벌은 오히려 반발을 사서, 정국 불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회[12], 이우, 권진 등이 "이괄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전 교수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전 첨사 권진(權聄), 전 참봉 정방열(鄭邦說), 충의(忠義) 윤안형(尹安亨), 허통 한흔(韓訢) 등이 대궐에 나아가 상변(上變)하니, 곧 궐내에서 추국하였다. 문회가 공초하기를,

"(중략) 대장(大將)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괄(李适)이 거의(擧義)한 날 집에 돌아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 하였다. 이때부터 불궤(不軌)의 뜻을 품고서 한명련(韓明璉)의 세 부자와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모의하고, 그 아들 이전(李栴)은 정돈·정찬과 함께 유산(游山)한다는 핑계로 외방을 두루 다니며 일을 같이할 사람을 맺었는데, 안변(安邊)의 수령인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도 그 일을 알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바로 훈신(勳臣)들에게 밀고하고 왕복한 서찰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후략)
인조 2년 1월 17일 임신 1번째 기사
"갑자년(1624) 1월 《일월록》에는 14일이라고 하였다.문회(文晦)ㆍ이우(李佑)ㆍ김광숙(金光熽)김광숙은 《승평시장(昇平諡狀)》에 기록되어 있다. 등이 기자헌(奇自獻)ㆍ현집(玄楫)ㆍ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ㆍ한명련(韓明璉)과 그의 아들 난윤(瀾潤) 등이 반란을 음모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때 원훈(元勳)들은 처음으로 특별한 공훈을 세웠으므로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복종하지 않을까 지나치게 염려하여, 널리 기찰하려고 밀고할 수 있는 길을 크게 넓혔다. 이때에 문회 등이 고변하였으므로 임금이 대신 및 원훈을 불러 의논케 하였던바 김류는 이괄이 반역하지 않을 것이라 하고, 이귀와 최명길 등은 반드시 반역하리라 하여 어전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이귀가 노하여, “김류는 틀림없이 이괄과 공모하였으므로 이괄이 원통하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이괄의 아들 이전과 기자헌 등만을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이날은 17일이였다. 이귀가 또 말하기를, “만약 이괄이 반역 음모가 없으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인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그 아들만을 체포하면 그가 어찌 기꺼이 공손하게 명을 듣겠는가. 부자를 함께 체포하느니만 못하다. 만약 그 일이 억울한 것이라면 그를 도로 부임지에 돌아가게 한들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250_010_0010_2002_006_XML《연평행장(延平行狀)》 《하담록(荷潭錄)》

인조는 '이괄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고 상당히 비호했으며 김류 또한 이괄을 두둔했으나, 이귀는 표독스러울 정도로 이괄을 잡을 것을 역설하며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귀의 행적은 그의 문집인 《묵재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적인 기록이라 신빙성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실록에서도 이귀가 "당장 이괄을 잡아와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묵재일기의 내용 역시 이귀의 행동부분에 한해서는 상당 부분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최명길 역시 이괄을 체포할 것을 주장하였다.

고변에는 어떤 명확한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인조와 김류가 이괄을 두둔한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이귀의 태도도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군권을 가진 사람이 수도에서 자신을 역적으로 의심한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면 없던 역심도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류의 주장처럼 처음부터 이괄을 건드리지 말거나, 이귀의 주장처럼 이괄을 확실히 죽이거나 조사 후 부임지에 보냈어야 뒤탈이 없었을 것이다.

인조는 이괄이 반란을 일으킬 거란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듯하다.[13] 북쪽에 경험이 뛰어난 다른 서인 계통의 장수들도 있었음에도, 굳이 이괄에게 조선의 주력군 거의 대부분을 맡기기도 했고. 상식적으로 이괄을 의심했다면 그 정도로 막중한 권한을 맡겼을 리가 없다.[14]

결국 조정에서는 "이괄의 아들만 체포하여 국문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임진왜란때 비변사가 부원수 신각을 참하려는 결론을 내렸을 때나, 이순신 압송할 때 달랑 금부도사만 파견한 데서 알 수 있듯 유교를 꾸준히 보급하고 중앙집권을 굳혀온 조선시대에는 자신이 반군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순순히 압송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중앙에서 부임해 나가 있는 무장을 압송하는데 별도로 군사 동원한 케이스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괄은 몇 안되는 예외였다. 참고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괄이 반역할 것이라고 고변한 자들은 곤장을 맞았고 당시에 추관(推官)이었던 김류가 저들이 고변한 것을 무고(誣告)라 생각하여 고변한 한흔을 죽이고 문회와 이우도 죽여 옥사를 번복하려 하려 하였다고 한다. 인조가 이괄의 아들 이전만을 체포하도록 하자 이귀가 이에 반대하자 이귀를 추고(推考)하라고 인조가 명령을 하였다 참고로 인조는 신경진이 역모 고변을 하자 국문 좀 하다가 그들이 무고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석방시켜 준 일이 있었는데 인조는 앞에서 서술했 듯이 이괄을 믿고 있어기 때문에 이전을 체포해서 형식적으로 조사 좀 하다가 옥사를 덮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3.2. 금부도사를 죽이다

인조는 주모자로 거론된 이들 중에 이괄 정충신에 대해서는 체포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금부도사 고덕상과 선전관 김지수 등을 보내 이괄의 아들은 압송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아들 이전은 이괄과 같이 있었고, 이괄은 자기 군영을 찾아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살해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금부도사가 아들을 잡으러 오자, 이괄은 일부러 문을 늦게 열어주며 시간을 끌고는, 아비인 자신이 무사할 수 없다며 차라리 반역하겠다는 심리를 부하들에게 털어놓았고, 이에 심복들이 반역을 부추기자 결심을 굳히고 다른 장수들을 불러 위협한 뒤, 도사를 안으로 들인 다음 베어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비록 야사의 기록이지만 실록에도 '이괄이 도사 등을 죽이고 장수들을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라고 유사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비교적 신뢰성이 높다.

하지만 정말로 충동적으로 난을 일으킨 것인지는 이괄이 이후 생포되지 않고 죽는 바람에 국문을 못해 밝혀진 바 없다. 부하들이 앞장서서 난을 부추겼다는 것이나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한 일사불란한 행동을 볼 때, 어렴풋이라도 반란의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다.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인 이괄은 1월 24일에 항왜 100여 명과 휘하 병사 1만여 명을 모두 통솔하여 영변에서 남하하기 시작한다. 조정에서는 깜작 놀라 바로 대책을 논의했으나, 초기에는 영의정 이원익이 관서 지방에서 존경받고 있으니(이원익은 임진왜란 초기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평안도의 병력을 편성해 일본군을 저지한 바 있다.) 인심을 장악해 반란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제안하자, 다른 신하들도 전부 동의했을 정도로 반란을 비교적 쉽게 진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인조도 이를 받아들여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이원익으로서는 임진왜란 이후 2번째 도체찰사 부임이다)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15]

한편 인조반정과 유몽인의 옥사를 거치면서 북인 출신 권신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을 잔혹하게 처벌한 서인 정권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이번에도 북인 출신 권신이었던 기자헌을 비롯한 북인들과 광해군의 측근세력들은 또다시 이괄의 난을 조사한다는 명목 하에 붙잡혔다. 서인 정권은 이번 기회에 북인 세력 자체를 몰살하기 위해, 북인의 씨를 말릴 계책을 세웠다. 여기서 기자헌과 북인 정치범 37명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논쟁이 이어졌다.

기자헌과 북인 정치범 37명에 대해서는 이귀는 국문을 통해 처형이나 유배로 가릴 것이다는 주장을 했고, 김류는 반란군과 내통할 수 있다는 이유 아래 바로 처형을 할 것임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괄의 반군에게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정부군 측에서 불리하게 돌아가자 인조와 서인 정권은 김류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기자헌을 사사하고 북인 정치범 37명을 참수했다. 비록 김류 혼자 우겨서 진행한 것은 아니고 삼정승과 인조가 동의하여 일어난 일이었지만, 인조반정 때에는 북인들을 1차로 가혹하게 숙청하더니 이번에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2차로 북인들을 잔혹하게 숙청했다. 이로 인해 북인들은 왕과 서인, 남인들이 북인들에 대해 몰살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특히 기자헌은 비록 광해군 시절에는 권신이었으나 이이첨 허균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려 폐모론을 주도할 때 반대했던 대신이었는데도 모함을 받아 본인 뿐만이 아니라 일가가 몰살 당하는 억울한 변을 당했다. 결국 나중에 인조와 서인 정권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귀의 이원익의 상소를 받아들여 기자헌을 포함한 몇몇 북인 정치범들을 복권 시켰고 북인 정치범들의 숙청을 주도한 김류 본인 조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숙청 피해자들의 복권에 찬성할 정도였다.

북인들의 여론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때 두 번에 걸친 엄청난 숙청으로 크게 악화되었고, 북인들의 민심 이반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북인들은 반역을 준비했는데 이괄의 난이 끝난 직후에 박홍구가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자는 거사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서 처형되었다. 이후에도 북인들은 1628년에 임취정과 유효립등이 반역을 꾀하고 1631년에 정한추대사건이 발각나는 등 서인 정권에 반격을 노렸지만 모두 실패했다.이렇게 해서 북인 세력들은 이이첨, 정인홍 박승종, 기자헌, 류희분, 유몽인, 박홍구 임취정을 비롯한 북인 영수들의 이어지는 죽음과 끊임없는 반역 시도로 인해, 세력들을 남김없이 소멸하면서 완전히 멸망했으며, 남이공과 김신국을 비롯한 소북 인사를 중심으로 이후에 남인에 흡수되었다.

3.3. 반란 초기, 양측의 삽질

한편 이괄과 내통했다고 알려진 한명련은 붙잡혀 압송되고 있었으나 이괄이 구출해내어 자신의 군에 편입시켰다. 반대로 함께 이괄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은 안주 목사 정충신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군무지를 이탈, 도원수부에 합류해 토벌군의 선봉에 섰다.

반란 초기에는 변변한 전투가 없었다. 아무런 명분 없이 '임금님 옆 간신배들을 몰아내자.'는 식의 주먹구구식 궐기였으니 제대로 된 전략이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괄이 택한 전략은 빠른 전격전이었다. 이괄 군은 토벌군과의 전투를 극도로 회피하며, 철저하게 산속 오솔길만을 통해 진군했으며[16] 관군이 징발되어 비어 있는 고을들을 빈집털이하여 쌀과 군수품을 노획하는 식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이들은 영변대도호부의 관아를 점령하고 영변행궁에 처들어가 행궁 내부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하지만 이괄 군이 후발대로 남겨둔 김효신이 투항해버렸고, 한명련의 옛 부하들 역시 투항한 데다가 이괄의 중군 이윤서 등이 병력을 이끌고 이탈하는 바람에 이괄 군은 숫자가 많이 줄었다.[17] 그러나 장만이 자만하여 정찰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이괄 군은 산속으로 숨어 이동했고 결국 평양을 우회해 배후로 돌아갈 틈을 내주고 말았다. 이 때문에 장만은 이괄의 난을 진압한 최고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18] 심지어 "애초에 장만이 일을 똑바로 했으면 일이 이렇게까진 안 됐는데 일을 키워놓은 작자가 역적 토벌 공신이라는 것이 황당하다."라는 사관의 기록도 있다.

3.4. 황주 전투

1624년 2월, 평양 남쪽의 요충지인 황주를 우회하여 진군하던 이괄 군은 황주와 봉산 사이의 산산(蒜山)에서 관군에게 덜미를 잡힌다. 장만이 이끄는 관군의 본대는 중화로 나아가 이괄 군을 쫒는 한편, 황해 감사 임서(林㥠)로 하여금 황해도의 병사들로 황주 동쪽에 위치한 상원과 수안을 지키도록 하였다. 황주 남쪽의 봉산에도 관군이 집결하여 이괄 군을 막을 준비를 하니, 이괄 군은 북, 동, 남 삼면으로 포위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은 봉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관군에 의해 차단되자, 남쪽으로 이동하던 군을 되돌려 지나쳤던 황주로 되돌아가서 포위망을 살짝 흔들어본다.

뜻밖의 움직임에 당황한 장만은 선봉이었던 정충신에게 남이흥을 비롯한 지원군을 보내 맞서게 하였다. 하지만 정충신 군은 기동 병력에 약간의 지원군만 받고 이괄 군을 상대해야했으므로, 장만의 포위망은 단순히 관군의 병력만 여러 갈래로 분산시킨 채 정작 전투 부대에는 큰 지원을 못해주는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마침내 2월 2일, 황주 신교(薪橋)에서 이괄 군과 관군은 처음으로 회전(會戰)을 벌이게 된다. 정충신, 남이흥의 관군은 급작스러운 작전 변경으로 휘하 병력만 이끌고 왔기에 규모가 크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기록된 정충신의 병력은 2천여 명 이하이며, 다른 장수들도 포함한 것이기에 추가 병력도 확실치 않다. 최대로는 8,000명을 초과한 이상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 북방 병력들의 분포를 보면 굉장히 미심쩍은 수준이다.

그런데, 교전이 시작될 무렵 이괄의 병력이 대규모로 관군에게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실록에 따르면 교전 중 정충신과 남이흥이 반군을 향해 "올바른 이치"에 대해 크게 소리치자 반군 1천여 명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이괄 군의 선봉이었던 허전, 송립 등이 관군으로 투항해 왔다고 한다.[19] 흩어진 병사 1천여 명도 대부분 토벌군에게 귀순했으나, 관군이 투항병들로 어수선해져 진형이 무너지자 이괄은 과감하게 항왜들을 앞세워 기습하여 관군을 패퇴시킨다.[20]

관군은 완전히 와해되고 여러 장수들이 사망하거나 이괄군에게 생포되었지만,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관군의 피해는 전사 30 여명, 포로 30여명에 그쳤다. 실제로 정충신은 황주 전투 이후에도 이전과 다름 없이 계속해서 이괄을 추격했기 때문에, 정말로 피해 자체는 적었다고 볼 수 있다.[21] 즉, 애초부터 관군 장수들이 적은 병력으로 싸움을 걸었고, 첫 번째 해프닝만으로도 병사들이 붕괴되어버리고, 장수들만이 계속 싸우려고 하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 자체는 아귀에 맞는다.

즉, 당시 관군 측에서는 지휘관들을 제외한 병사들은 싸움없이 흩어질 정도로 병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 전투는 승리했을지언정 1천이 넘는 병사가 관군에 투항한 이괄 군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은 결속력과 명분[22]을 확인할 수 있는 전투이다.

3.5. 마탄 전투

황주에서 패배한 것은 정충신의 선봉대 뿐으로, 관군의 포위망은 아직도 건재했다. 또한 이괄 군이 한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영변에서 황주까지 진군해왔던 거리보다 먼 거리를 가야 했다. 따라서 황주 전투 이후에도 이괄은 소모전을 피해서 오솔길을 골라 진군하고, 정충신은 이괄의 뒤를 지독하게 추적했으며, 장만의 본대는 투항병들과 패잔병을 추스려 봉산 남서쪽 서흥에서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수일과 합류하는 전개가 이어진다.

이괄 군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각 지역의 관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한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예성강을 건너야 했으므로 스스로 사지를 돌파해야 했다. 때문에 관군은 예성강을 방어선으로 설정하여 방어사 이중로 등의 방어군이 강을 지키고, 정충신의 추격 부대와 장만의 관군이 뒤에서 협공을 가해 이괄 군을 포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괄 군이 예성강을 건너게 된다면 개성이 지척일 뿐 아니라 계속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관군의 입장에서 예성강은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설령 이괄 군을 섬멸하지 못한다고 할 지라도 방어선이 제대로 형성되어 삼남(충청, 전라, 경상)의 병사들이 집결하는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이괄의 반란은 수포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23]

결국 이괄은 최대한 소모전을 피하고 신속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으로 이동한다. 이중로 또한 이괄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마탄에서 미리 병력을 결집했다. 문제는 황해도 지방군이 나름대로 훈련 수준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이괄 군에 합류한 북방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데다가, 지원군이라고 도착한 경기도 지방군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에 160리나 되는 거리를 강행군한 끝에 겨우 도착한 상황이라 절대로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이들의 후방에는 재편성을 마친 정충신 군[24]이 이괄을 뒤따라 오고 있었지만, 당시는 한 겨울인 데다가 이괄 군이 앞서 진격하면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불살랐고 배후에는 항상 복병을 두어 10리간의 간격을 유지했다. 게다가 이괄 군의 진로가 험악한 산길이었기에 그 뒤를 뒤따르는 정충신 군의 고생은 엄청났고, 결국 지치고 굶주린 정충신 군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장만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병사들이 먼 거리를 행군하여 피곤하니 안타깝고 염려된다고 썼을 지경이다.

결국 2월 7일, 마탄에서 관군은 이괄의 기습으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고 인조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25] 전투의 양상은 황주 전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괄 군은 기동력, 훈련도, 숫자까지 관군을 크게 웃돌았고, 순식간에 얕은 여울을 건너 관군을 격파해 버린다. 이중로를 포함한 8명의 장수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강을 건넌 이괄 군이 역으로 관군을 강쪽으로 몰아서 포위해 버려 전멸한다.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항복했다고 하며 관군을 이끌던 장수들이 7명이나 전사했다. 이 중 이중로는 직접 조총으로 군관 7명을 쏴 죽였다(擊殺)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을 정도니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26] 그나마 살아남은 평산 부사 이확은 자신의 말을 일부러 죽인 뒤 피를 바르고 밑에 숨어 죽은 척 해서 살아남았을 정도니 관군의 참상에 대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27][28]

이괄은 전사한 관군의 충성파 장수 7명의 목을 베어 뒤늦게 도착한 추격군에게 보내 일시적인 공황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본 남이흥이 "잡혀간 우리 장수는 나와 잘 아는 자들이다. 이 얼굴들을 보니 모두 장수가 아니다. 틀림없이 군졸들의 머리인데 적이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다." 라고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물론 충성스러운 장수들이 7명이나 사망하고 반란군에게 효수까지 당한 사건으로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29]

3.6. 임진강을 넘어 한양으로

관군은 최종 방어선인 임진강이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기서도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이괄 군의 기동력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임진강 하류에는 이귀, 상류에는 수원 부사 이흥립, 임진강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인 청석령에는 이서를 배치해놓았는데, 정작 도하 지점인 임진나루에는 파주 목사 박효립이 지방 포졸도 아닌 민병대 수백만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30]

이괄은 이를 신속한 기동으로 돌파했는데, 일단 청석령에는 항왜 병사들을 보내 밤중에 소리를 질러 마치 포위되었다는 인상을 주어 이서 군을 묶어둔 후에 샛길로 지나쳤으며, 너무나 신속한 나머지 이귀는 임진강 방어선에 도착하지도 못했고, 게다가 이흥립 군은 무질서하게 패주하여 통제가 되지 않았다.[31] 결국, 이괄은 임진강의 나루가 허술하다는 점을 간파해 신속하게 강을 건넜다. 결국, 인조는 음력 2월 8일 밤에 파천해야 한다는 정엽의 의견을 받아들여 급히 공주 공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32], 이괄은 음력 2월 10일에 한양에 입성했다.

3.7. 단 하룻밤 동안의 한양 생활

인조는 내통 위험이 있다는 김류의 주장으로 기자헌 외 37명의 정적들을 몰살시키고 도망쳤다. 이런 명분이 없는 숙청 덕분에, 백성들의 민심이 매우 악화되었다. 게다가 기자헌은 북인이었지만 폐모론에 반대하여 서인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때문에 조정에 등돌린 민심은 이괄을 지지했고, 이괄은 한양에 입성했다. 그때 이괄의 아우 이수는 이충길과 이시언의 아들 이욱[33] 등을 데리고 급히 모은 수천명을 거느리고 무악의 북쪽에서 이괄 일행을 영접하여 앞을 인도하였다. 또 각 관청의 서리와 하인들도 의관을 갖추고 나와 영접하였으며 도성민들은 길을 닦고 길 위에 황토를 펴고 극진히 환영하여 맞이하였다. 이괄은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추대하고 살아남은 북인들을 등용하려고 했으며,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려고 했다. 실제로 광해군 때의 권세가들의 빼앗긴 집은 그들의 살아남은 친족과 노비들에게 도로 점거되었다.

수도 한양을 내어준 관군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최고 지휘관인 장만조차 "군사를 물려 힘을 기른 다음 다시 싸우자" 라고 할 정도였다. 사실상 패배를 인정한 셈. 하지만 이괄이 한양에 입성한 것부터가 큰 실수였는데, 정충신이 예언한대로[34] 왕인 인조를 붙잡는 데 실패하자 추격할 생각은 안하고 한양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스스로 관군의 포위를 기다리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35]

한양에 도착한 정충신은 후퇴를 주장하는 장만에게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안령(무악재)을 점거하면 한양을 내려다 보니 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고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높은 곳에 있으니 적을 이길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남이흥이 동조하여, 2월 10일 저녁에 정충신의 추격 부대는 병사 2천 명으로 야음을 틈타 안령을 점거한다. 안령을 점거한 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상없다는 봉화를 올려 반란군을 안심시키는 바람에 2월 11일 아침이 되어서야 이괄은 안령이 점령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3.8. 안령(무악재) 전투

정충신의 예측대로 이괄은 관군이 안령(무악재)에서 자리를 잡으면 한성의 민심이 이반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한성 농성을 포기하고 정면으로 대결을 결심한다.

이괄은 안령을 점령한 정충신의 병력이 작은 규모라는 점을 파악하자 ' 저 정도 병력은 점심 먹기 전에 처리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지, 방을 붙여 큰 싸움이 있으니 구경하고 싶은 자는 오라, 관군을 정복하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정권이 교체된 직후라 한양 민심은 유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영웅인 광해군은 궁궐공사로 민심이 낮았으나,[3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조측도 집권 직후라 권위가 확고하지 않았고, 이괄 측도 별다른 사직 상의 드라마도 없고 행실이 나빴던 흥안군을 내세워 인조보다 명분이 빈약했다. 누가 이기는지 보자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37]

이리하여 이 전쟁의 메인 이벤트는 2월 11일 묘시(오전 5~7시)에 수많은 백성들이 몰린 가운데 펼쳐지게 된다. 이괄의 군대는 이미 실력을 보인 항왜들을 앞세웠고, 북방에 배치되었던 조선의 최고 정예 군단을 끌고 내려온 것이었으나, 이에 비해서 관군은 급조된 지방 병력인 데다 2천 명밖에 안 되는 등 전력이 딸렸기에, 선봉을 맡은 선천 부사 김경운이 전사하고 토벌군 전체까지 궤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정충신이 높은 곳에 견고한 진지를 확보해 놓았기에 이괄 군은 진격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고, 점심을 먹기 전에 끝내겠다던 생각과는 달리 전투는 2시각(4시간)이 지난 사시(오전 9~11시)까지 지속되어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는다.

정충신은 유효걸(이순신의 부하인 유형의 아들)을 거느렸고 휘하에 남이흥과 변흡은 고개 안에서 진을 쳤으며, 김완(이순신 휘하의 장수와 동명이인)이 고개 서쪽을, 신경원과 이정이 고개 북쪽을 막고, 황익·안몽윤·최응일·이경정을 중견사(中堅使)로 삼고, 이확은 포수 100명을 거느리고 치마 바위에 주둔해 창의문 길목을 틀어막았다. 정충신이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의 곁에서 종군했던 것을 고려해 보면 입지 선정을 잘 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 측의 명장이나 우수한 참모들이 죄다 달라붙었음에도 승리했던 전투를 권율 곁에서 함께 경험해본 인물이다.

격전 중 이괄의 진영으로 엄청난 돌풍이 불었고, 이 틈을 타 관군측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춧가루를 살포하는 화학전 시도가 성공함에 따라 반군 측 병력의 시야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는 바람에 전세는 이괄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운다. 거기다 돌풍에 이괄의 군기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자꾸 기우는가 하면 부장인 한명련이 화살에 맞아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하는데, 때마침 한명련과 외모가 닮은 이양이란 군관이 탄환에 맞고 전사하자 남이흥이 기지를 발휘해 '역적 한명련이 죽었다! 역적 이괄이 도망친다!' 라고 외쳤고 화학전 상황이라 눈이 보이지 않던 이괄의 군대는 그 소리를 듣고 진짜 우리가 정말로 졌나 하면서 사기가 떨어지며[38] 이괄 등의 명령도 무시하고 전부 도망가서 와해되고 만다. 여기서 패병 400여 급의 머리를 베고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괄 측은 숫자·숙련도·사기까지 절대적으로 우세했으므로 더 공세를 퍼부었으면 정충신의 군대는 패배했을 것이고, 관군의 본대를 이끌었던 도원수 장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어서, 관군 입장에선 말 그대로 기적같은 역전승이었다.[39] 반군은 죽음을 면할 겨를이 없어 민가에 달아나 숨기도 하고 마포 서강으로 달아나 강물에 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

관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충무공 이순신의 서자 이신은 이 격전의 와중에 전사했다. 전사자들 속에 섞여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기록도 거의 없고, 정조 때 증직을 시켜주려 했으나 전해줄 사람이 없어 하지 못했다.[40]

성벽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한성 주민들은 이괄 군이 패배하자 직접 서대문을 지키던 이괄 군을 몰아낸 다음 성문을 걸어 잠가버렸고[41] 결국 이괄 군은 성을 뺑 돌아 남대문으로 겨우 입성하지만 지킬 병력이 없어서 한성에서 물러나게 된다. 사기가 오른 관군이 이괄을 추격하러 했으나 남이흥·정충신이 궁지에 몰린 적은 쫓으면 안 된다고 극구 말리며 이괄의 목은 앉아서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 관군은 추격을 멈춘다.[42]

4. 결말

결국 이괄은 예상대로 경기도 광주에서 도주 중 밤중에 잠을 자다가 부하 장수이던 기익헌·이수백에게 배신당해 한명련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둘은 참수를 면하고 유배되었으며 기익헌은 7년 뒤 유배가 풀려 하위 군관으로 평생을 잘 살았다. 반면에 마탄 전투 막바지에 관군 8대장의 목을 베어 보내게 한 모략을 꾸민 장본인이었던 이수백은 유배로 풀려난 지 몇 해 안 되어[43] 희생양으로 죽은 이중로·박영신의 아들들인 이문웅(李文雄)·이문위(李文偉) 형제 및 박지병(朴之屛)·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藩) 형제에게 대낮에 살해당했다.[44] 이들 형제는 이수백의 목을 자른 뒤 대궐을 찾아가 자수했다. 이들에 대한 처벌을 놓고 비록 역적이었다곤 하나, 이미 왕이 용서해줬는데도 사적인 복수를 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수백은 수절하는 과부를 모욕하고 겁탈하거나 거리에서 행패를 부려 민심도 나빴던 까닭에 그가 저 5명에게 끔살당하자 주위 반응은 '고놈 당해도 싸다'라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삼정승은 이수백이 역적이라는 점과 효도라는 가치관을 들어 용서해줄 것[45]을 청했으나, 인조는 이를 거부하며 법 기강 확립을 들어 처벌할 것을 명했다. 다만, 부친들이 충신이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이씨 형제는 익산·전주에, 박씨 형제는 창평·의성에 유배보내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지리 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지역들은 대부분 햇빛 좋고, 밥 잘 먹을 수 있는 평야 곡창 지대다. 대부분의 유배지가 섬이나 산골 마을이라 밥은커녕 수수깡이나 배불리 먹을까 말까 한 척박한 곳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인조도 정승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관대하게 참작해준 게 맞다. 또한 충신들의 자제들인 것과, 당시 유교적 사상을 고려하면 지역유지들과 관리들에게 잘 보살핌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문웅과 이문위는 유배 후 장성현감과 충청병사로 관직생활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던 걸 보면 역모에 깊게 관련되지 않은 다른 이들도 유배로 끝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괄의 아내 예이와 며느리 계이는 마탄 전투가 있던 시점에 인조의 명령으로 칼이 채워진 채 연행당한 후 모두 참수되어 효수당했다. 달아나서 천민이 되길 자처한 이괄의 형제들의 자손은 살려줬고 이괄의 친척들도 무사했음을 감안하면, 급박한 상황에 이어 배신감과 분노 등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46]

이괄의 난으로 북방의 정예 부대와 임진왜란 때부터 유지되었던 명장들은 패가 갈려서 와해되었고,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 등 이괄 밑에 있던 장수들은 후금으로 도망가서 조선을 침공하자고 부추겼다. 여진족을 상대해야 할 관서군의 기병 상당수가 이 난으로 인해 사라져버려 조선은 전투다운 전투를 할 수 없었고, 도망친 이들이 이괄의 난 진격 루트를 그대로 알려주는 바람에 청군은 이전의 어떤 침략군보다 빠르게 내려와 왕을 붙잡아버린다.

이괄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던 흥안군 이제는 대역죄로 심기원에게 교수형당하는데, 억울하다고 외치며 심기원에게 "네놈도 억울한 대역죄로 죽을 것이다!" 라고 저주했다는 야사까지 전해진다. 허나 흥안군은 이괄의 난 초기부터 내통했다는 기록이 많으며 결정적으로 인조를 호종하다가 중간에 달아났다. 왕조 국가인 만큼 역성혁명을 감행하지 않는 이상 반군은 추대할만한 적절한 왕족이 필요했으며, 이를 잘 알고 있는 인조도 피란갈 때 반군이 왕으로 내세울만한 왕족들을 죄다 데리고 갔었다. 당연히 흥안군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감시가 느슨해지던 때를 노려 한강을 도로 건너서 이괄과 합류한 것.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괄과 한패였던 대역죄인 맞다.[47] 흥안군은 200여 년 뒤인 고종 초기(1871년)에 복권되었다가 30년 뒤인 1900년에 도로 복권이 취소된다.

어쨌거나 저주는 먹혔는지 심기원은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세우는 역모를 모의하다가 소현세자가 왕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곤 인조와 소현세자를 모두 몰아내는 역모를 꾀하다 들켜서 이제의 말처럼 진짜로 거열형을 당한다. 야사에 따르면 심기원도 저주를 남겨, 자신의 처형에 관여한 김자점에게 너도 나와 같은 방법으로 죽게 될 거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자점도 7년 뒤 아들들과 난을 꾸미다가 들키는 바람에 정말로 일가와 함께 처형당한다.

반란 당시 선봉에 선 항왜들이 무지막지한 전투력을 발휘하자 동래에서 인 1천 명을 용병으로 사용해서 맞불을 놓자라는 건의가 올라오니 다들 정신 없던 차에 좋다고 했으나 이원익이 "천 명보다 많이 보내면 어쩔 것이며, 그 왜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아시오?" 라고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당시 인조는 가도의 모문룡에게도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다급했는데 이괄의 항왜들은 무악재(안현)에서 섬멸당했다. 안현에서 살아남아 이괄과 함께 도망쳤던 항왜들은 왜관이 있는 경상도 쪽으로 도망쳤으나 그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같은 항왜 출신 장수 김충선이었다. 당시 김충선은 대구 우륵동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는데 전란의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경상 감사의 명을 받아 자신을 따르는 항왜 25명과 조선인 포수 17명을 데리고 52세의 노구를 이끌고 추격전을 벌여 서아지를 비롯한 항왜들의 목을 베어 난을 마무리 짓는다. 다만 같은 항왜들을 처벌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김충선은 상으로 받은 벼슬과 토지를 극구 사양했고 억지로 떠받은 서아지의 토지조차 수어청에 반납하여 둔전으로 쓰게 했다(서아지와 김충선은 사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그런 사람을 직접 목 베었으니,). 심지어 13년 후 김충선은 다른 장교들이 은퇴할 나이에 다시 한 번 전쟁에 참가한다.

이 사건으로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 양화전(養和殿), 환경전(歡慶殿)이 불탔고, 춘추관 사고도 불타 전란 이후 복원한 조선왕조실록 5질 중 1질이 소실된다. 이후 춘추관 사고는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이괄의 형제들 중 첫째 형 이적의 첫째 아들 이로와 간성군수를 지낸 다섯째 동생 이돈, 호조정랑을 지낸 여섯째 동생 이수와 그 아들 이개동은 사형당했다. 둘째 형 이운의 손자 이복령은 어머니 류씨를 모시고 서산 해미로 달아났으며, 첫째 형 이적의 둘째 아들 이만세는 목숨을 잃은 형과는 다르게 제주도로 도주에 성공했다. 그나마 조정이 작정하고 도망가 천민을 자처한 자들까지 싸그리 죽이려 들지는 않아서 이괄의 아버지 이제의 후손들이 저 두 명으로부터 이어지기는 했다. 이괄의 사촌이자 경기감사, 전라감사를 지낸 이구는 가까운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있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이후 사직하여 낙향한다). 연좌는 이괄과 그 형제들의 일가에만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난이 수습된 이후 한양에서는 장만이 볼만이요 이괄은 꽹괄이라는 펀치라인 유행어가 생겼다. 장만은 볼 만했고, 이괄은 관군의 꽹과리 소리에 놀라 달아났다는 뜻. 혹은 이괄이 사기를 올리려고 꽹과리를 쳤으나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5. 평가

반란의 전후 사정이 상당히 복잡해서 인조 대의 실책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일단, 광해군 중기의 대숙청에서 시작되었던 원한과 피바람이 해소되지 못했던 것, 그 외에도 단순한 1위 권력 다툼의 문제로만 보기 힘든 다양한 생존 문제들이 겹쳐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특정한 일부 서인들이 반란을 꾸몄다는 해석은 당시 시대 배경을 마음에 드는 것만 뽑아서 축약한 지나친 단순화이다. 재앙의 시작은 서인들이 이괄보다 능력과 충성심이 더 뛰어난 장수들을 제치고 검증이 충분히 되지 않았던 이괄에게 큰 책임과 권한을 맡긴 것이었다. 이때 서인들은 설마 누가 이득을 보겠다고 반란을 일으키겠느냐고 심각하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정황이 여러 기록에서 드러난다.

이런 안일함의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광해군 통치 후반기 때는 이미 인재들이 광해군의 기분 따라 쓸려나가서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한 경각심을 가질 만한 '똑똑한' 정치 세력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서인들의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을 제외한 정치 세력들까지도 대부분 정리된 상황이었다. 여기서 이괄처럼 더 이상의 반란을 일으켜봐야 국가 멸망이 현실화될뿐, 아무도 이득을 볼 수 없는 진짜 막장이 찾아올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합리적으로 따졌을 때 더 이상의 반란은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다.

광해군의 대숙청부터 시작된 피바람이 인조반정 이후에도 수습되지는 못하여, 쿠데타에 성공한 1등 공신들마저 생존을 걱정하며 도성에서 떠도는 소문들의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도 힘든 정보 혼란 상황이었고, 인조는 검증되지 않은 이괄을 공신이란 이유로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그 결과 반란의 방아쇠를 당겨버렸고, 이괄은 인조와 장만 등이 맡긴 신임과 막중한 사령관의 도의를 현실적으로 배반하여서, 제각기 살아남기 위한 심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한편 이괄의 반란의 촉발한 이괄의 아들 이전의 압송문제를 두고 적절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옹호측에서는 조선시대 윤리는 가만있는 게 정상이다. 신각이 괜히 순순히 칼 받고, 선조가 이순신을 신뢰해서 압송하는데 금부도사만[48] 보냈겠는가?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이괄의 사례가 예외다.

그러나 반대측에서는 이괄을 신각이나 이순신과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윤리라는 게 그렇게 어기기 어려운 일이었으면 이괄을 건드리지 말거나, 아예 확실히 죽여버리자는 의견이 나오진 않았을 것이고, 윤리고 뭐고 다 떠나서 자식을 지키려는 건 인간의 생물학적인 본능이다. 신각이나 이순신이 체포될 때 선조는 이미 재위 20년을 넘긴 왕이었고, 왕(중종)의 서손이니 해도 결국 명종에게서 정식으로 계승을 받은 입장이었다. 왕이 자기 목숨 위협한다고 신하가 들고 일어나 봤자 권위에서 상대가 되질 않는다. 반면에 인조는 이괄의 난 때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며, 이때 명나라로부터 제대로 책봉도 못 받아서 정통성이 매우 불안했기에 임진왜란 때 선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한 정통성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괄은 북방 방어를 총괄하면서 실질적으로 왕을 위협할 무력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즉 이순신/신각과 이괄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왕의 권위와 장수들이 손에 쥐고 있던 무력에 있었는데, 인조는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49] 인조는 고변이 나왔을 때 금부도사와 별개로 따로 이괄에게 사자를 파견해서 이괄을 어르고 달래든지, 아니면 아예 이괄의 군권을 박탈해서 후환을 없앴어야만 했다. 그러나 인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아들의 목숨이 위협받게 된 이괄은 결국 칼을 뽑고야 만다.

내전이며 긍정적 사건은 아니지만 이괄의 난은 관련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는 물론이고 이괄의 난 진압에 참전하거나 관련된 사람들의 증언이 담긴 문집 등에도 자세하게 남아 있어서 이 관련 기록들은 17세기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나 조선군의 전투 방식을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서 이괄은 높은 벼슬자리를 탐내어 추악한 정권쟁탈전을 벌였을 뿐이며 인민들의 어떤 지지와 호응도 받지 못했다고 매우 폄하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정일이 직접 이괄을 더러 "리괄은 인조반정에서 자기가 한몫 하였기 때문에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타산하였는데 그 뜻이 이룩되지 않자 거기에 불만을 품고있다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라고 교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괄의 난으로 서북지역의 방어가 무너져 청나라에 당하게 됐다고 덤으로 더 깐다.

5.1. 이괄의 난과 호란 관련

이괄의 난이 호란의 발발에 영향을 준 것은 주로 부정적인 영향이었다. 당장 후금을 방어할 북방의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는데, 이괄의 난 이후 호란 때 조선군의 북방 방어 태세는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심지어 이괄의 난의 패잔병 일부는 후금에 항복해 그들의 길잡이가 되어 후금의 쾌속 진격에 기여한다.[50]

병자호란 시에 인조나 척화파를 옹호하는 역덕들은 당시 청나라가 물자난에 고전하고 있었다는 근거를 들면서, 이괄의 난이 없었더라면 병자호란이 일어날 수 있게 한 정묘호란 자체가 없었기에 후금은 세력을 키우기도 보다 어려워졌을 것이고 물자 보충도 힘들어 더욱 고전했을 것이며, 병자호란 때와 같은 세력 규모를 얻어낼 가능성도 희박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병자호란에서 조선을 수탈하여 군자금을 모은 청나라군이 대륙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즉: 만주의 식량난→이괄의 난으로 망가진 조선을 쳐 식량을 탈취한다(정묘호란)→조선의 식량을 먹고 명을 밀어낸다→이자성의 난으로 만주의 방비가 줄어든 틈을 타 조선을 정복한다(병자호란)→조선의 식량을 왕창 먹고 명을 친다... 식의 구도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이괄의 난 때문에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확장 정세를 보면 이괄의 난이 도움이 되었겠지만, 크게 결정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괄의 난 직후인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군은 참패하고, 누르하치는 전사 혹은 전상을 입고 사망하며, 이어 홍타이지가 뒤를 잇는다. 홍타이지는 이후 명나라와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자신의 배후지를 확고히하는 전략을 펴는데, 그 첫타깃이 바로 정묘호란이었다. 후금은 조선을 손쉽게 굴복시키고 명나라와의 동맹을 끊을 것을 강요했다. 조선을 침공한 후금군은 이번에는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1630년대까지는 감숙성까지 진출하여 내몽고를 완전히 복속하고 북원의 옥새를 얻어 대칸을 자칭하며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다. 그 사이에 명나라는 내분이 일어나 1629년 원숭환이 가도에 주둔하던 모문룡을 제거함으로써 동부에서 후금을 견제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사라진다. 게다가 더 한심한 것은 영원성에서 후금군을 저지한 원숭환마저 1630년 숭정제에 처형된다. 이렇게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와중, 조선의 어설픈 중립 외교에 명확한 답을 원한 청에 의해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된다. 이런 여러 사건의 한 부분이 이괄의 난이지, 이괄의 난 때문에 갑자기 청나라가 힘을 키울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거슬러 올라간다면 호란의 원인은 임진왜란이나 명나라 말기의 암군들이 더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병자호란의 패전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포로로 잡힌 것이며, 그 원인은 청나라는 정묘호란 당시 수군이 전혀 없었지만, 원숭환 모문룡을 처형한 이후, 모문룡의 부하들이 100여척의 전선을 가지고 청나라에 망명하면서부터 수군을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는 농민반란이 너무나 심각해져서 대부분의 병력을 서부인 섬서성쪽으로 보냈기 때문에 청나라군은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조선에 대군을 투입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인조는 장수로서는 심히 부적격한 김경징과 장신을 강화도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두 사람은 애초부터 능력이나 세간의 평가가 매우 나빴던 자였고, 이런 자들이 강화도 방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사 참사는 인조의 책임이니, 양 호란의 패전은 이괄의 난 보다는 인조나 척화파들에 더 책임이 있다.

6. 관련 인물

6.1. 이괄 군

6.2. 조정

6.3. 관군

7. 관련 링크

8. 대중매체에서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같은 야사를 다룬 서적에는 이괄의 평이 극과 극. 악역 같이 나온 장면이 많다. 가령 인조반정 직후 인조가 용상에 앉기 머뭇거리자, 뭐가 두려울 게 있겠냐면서 자기가 용상에 털썩 주저앉아 어그로를 산다거나, 벼슬에 불만이라는 점과 무작정 왕을 추대하고 군림했다든지 백성들이 이괄의 횡포가 싫어 한양 문을 열지 않았다고 나온다.[54] 하지만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이괄의 용맹함과 결단성을 인정하며, 무인임에도 시와 글 짓기에 능하며, 왕이 되기 전 인조의 성품을 테스트 하는 등 복합적인 인물로 나온다. 대체로 이괄이 악역이 된 계기를 만든 김류가 나쁜 놈이라는 분위기. MBC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안하무인으로 나온다.
네이버 웹툰에서 고일권이 연재하는 만화. 이괄의 난을 배경으로, 굉장히 좋은 고증을 보여주고 있다.

문회가 이괄이 인성군을 왕으로 세우는 역모에 가담했고 조정에 고발하자 이귀는 이괄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하고 김류는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했으며, 금부도사를 보내 이괄의 아들 이전을 잡아들이겠다고 하자 이괄은 금부도사를 죽이고 난을 일으킨다.

이괄은 황주, 영변 등을 공격해 승리하고 영변에서 거병을 개시했으며, 여러 지방에 사람을 보내 수령들을 불러들였는데, 안주로 간 정충신이 수상한 것을 알아챘다. 이괄을 상대하기 위해 정충신, 장만 등이 평양에 모이고 정충신이 이괄이 평양을 지나쳐 도성으로 갈 것이라 자산에서 군사를 보내 막아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괄의 병력을 막을 준비가 되지 않아 자산에 군사를 보내지 않기로 한다.

장만이 이윤서의 종인 효생을 이윤서에게 보내 투항을 권유했고 투항권유문을 이괄군에게 돌리면서 이괄군이 동요했으며, 자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한 이괄군은 군사들의 동요로 자산으로 회군하고 저녁에 이윤서를 비롯한 이괄의 군사가 4천 명이 이탈해 조선 관군에 투항했다. 이괄은 평양을 우회해 강동으로 가고 군사 일부는 평양으로 보내 장만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정충신이 이괄이 있는 강동으로 가고 남이흥은 정충신의 후방을 지원하며, 장만은 중화에서 진을 치기로 한다.

이괄군이 삼등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관군의 야습을 받지만 이들을 물리치고, 교전을 피하기 위해 샛길로 빠져 상원 근처를 지나도록 하면서 일부 군사들은 중화에 보내 기습하려 했으나 중화의 관군을 도우러 온 조선군에게 발각되어 실패했다. 장만이 이끄는 관군이 황주로 향하고 이괄군은 샛길을 통해 황주로 향하다가 샛길을 통해 산산으로 갔다.

이괄이 척후를 통해 봉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관군이 매복한 것이 파악되자 황주로 회군했으며, 황주 신교에서 이괄군과 정충신의 관군이 대치해 싸우려 했지만, 이괄군의 선봉인 허전, 송립이 이끄는 1천의 군사가 관군에 투항했다. 관군이 투항한 군사들을 받은 틈을 타 이괄군의 항왜 부대가 관군을 공격하고 이괄군의 본군도 따라서 관군을 공격해 황주 신교에서 이괄군이 승리했으며, 관군은 황주로 물러났다.

이괄군은 한양으로 가기 위해 남하하고 정충신의 관군은 이괄을 추격했으며, 이괄군은 마탄, 청석동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공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이괄군은 한양으로 입성했고 흥안군이 찾아오면서 이괄이 흥안군을 왕으로 내세우며, 이괄이 한양에 머물러 인조를 추격하지 않자 관군은 이괄군이 장악한 경기 감영을 습격해 군량을 보급하고 안산을 점령했다.

정충신이 이끄는 관군은 안현에서 진을 쳐 이괄군의 공격에 맞서 거세게 저항하며, 이수백이 이끄는 이괄군의 군사는 안산의 봉수대로 올라가려 했지만 관군의 저항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괄군과 관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었고 홍제원에 있다가 나타난 장만, 최명길이 이끄는 관군이 이괄군의 후방을 공격했으며, 이괄군의 한명련이 화살에 부상을 입자 관군에서 한명련이 화살에 맞아 거꾸러졌다고 외쳐 이괄군을 동요시키고 치열한 전투 끝에 이괄군이 패해 달아났다.

이괄은 한양을 빠져나갔고 경안역에서 정충신이 이끄는 관군을 만났지만 달아났으며, 이천에서 이괄, 한명련, 이전은 기익헌, 이수백의 배신으로 죽고 신경진과 심기원이 흥안군을 밧줄에 목을 매달아 죽이면서 반란이 끝난다.
1976년에 경향신문에서 연재되던 소설.
이괄이 죽은 후 그의 부하 장수 중 한윤과 유운이라는 장수들이 반역죄에 대한 처벌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유운은 자수한 반면 한윤은 추격병을 죽이고 계속 도망가서 청나라에 귀순했다. 이후 두 사람 모두 병자호란에 투입은 되는데 유운은 반역 혐의로 죽는 대신 백의종군 신분으로 강등되어 조선군 병졸로, 한윤은 청나라 장수로 각각 참전해서 서로 전쟁터에서 싸우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유운이 한윤을 사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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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에서 귀화한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였던 항왜 출신의 장수였던 사야가.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위해 큰 공을 세웠고, 훗날 조선의 왕 선조로부터 벼슬과 '김충선' 이름을 하사받게 된다. [2] 한번에 3만이 집결한 적은 없고, 중간중간 이괄이 하나씩 부수고 내려온 관군 방어선의 병력 총합이 3만이었다. [3] 최대 500여 명까지 있었으리라 추산되지만, 실제로 기록된 건 120명이 전부다. [4] 엄밀히 말하자면 실패한 반란으로서 한성을 점거한 유일한 예시다. 성공한 반란인 제1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등이 있기 때문. 그러나 승자가 역사를 쓰고 승자에 의해 왕통이 이어지는 조선 왕조였기 때문에 상기 사례들은 잘못된 것을 돌이켜 바르게 한다는 의미로 반정이라 하여 구분하였으니 조선인 기준으로는 유일하게 한성을 점거한 반란이 맞기는 하다. 후대 기준에서야 그냥 실패한 반란과 성공한 반란일 뿐이지만. [5] 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4월 9일(무진) 맑음 [6] 인조 1년 10월 19일. [7] 김원량은 훗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김자점의 주장에 따라 사형당하고 효시된다. 인조 2년 2월 8일. [8] 실록에는 판윤 직책이 나오지 않으나 승정원일기에 판윤 자리에서 사직 상소를 올렸다가 인조에게 반려된 것이 있다. [9] 공자 노나라 군주의 신임을 받아 처음 받은 관직이 중도재(中都宰)인데, 중도는 노나라의 수도였고 따라서 중도재는 즉 수도를 관리하는 재상을 말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원소가 지낸 사례교위는 낙양과 장안을 관리하며, 지금의 서울특별시장 경기도지사 + 수도방위사령관 + 감사원장을 합친 요직이였고, 동탁을 피해 발해로 도주하면서도 한동안 원소는 사례교위를 자칭하며 자신의 권위를 다지는 데 잘 써먹었다. 명판관 포청천이 이름을 떨쳤던 때도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책임지는 개봉부윤 시절이었다. [10] 인조 1년 5월 27일. [11]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처벌 의지가 강했기에 만약 자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형 당했을 확률이 높다. [12] 문회라는 인물은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3등공신으로 임명되나 그후에도 명망있는 사람들을 역모로 무고했다가 무고가 밝혀져 끝내 유배형을 당했으며 형이 끝난 후 사대부사이에서도 경멸당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추측하거나 인조반정 직후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출세하고자 했던 기회주의자로 보인다. [13] 연려실기술 같은 야사에서는 과거 이괄을 평안도로 파견할 때도 마차를 손수 밀어주는 신뢰를 보여줬기도 했다. 다만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14] 현실적인 판단도 작용하긴 했다. 광해군이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들의 목을 날린 대숙청부터 시작되었던 피바람이 인조반정으로 겨우 마무리되는 상황이라서, 이제는 반란을 일으켜봐야 새 정권을 세울 만큼의 정치 파벌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반정공신까지 된 인물이 또 반란을 일으키리라고 생각치 못한 것이다. 인조 이전의 조선사에서도 반정공신들이 불온한 말을 건네받는 일이 있었으나(신복의의 옥사) 그뿐이었고 '이과의 옥사'라는 사건이 있긴 했지만 주모자 이과는 원종공신에 불과했다. 그나마 유사한 게 있다면 정난공신 봉석주가 역모죄로 죽은 사례였는데, 이 사람은 연산군 때 복권되었으며 선조 때는 아예 시호까지 받았다. 그러니 인조는 아들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리면 수 차례 신뢰를 보여준 이괄이 자신의 뜻을 알고 순순히 따라와서 해명할 거라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15] 인조 2년 1월 24일. [16] 나중에 정충신의 관군이 이괄 군의 진격로를 따라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 길이 말 그대로 절벽을 타고 벼랑에 매달리는 엄청난 악조건이었다. 결국 추격군은 전부 녹다운되어 지쳐서 제 시간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만큼 인조 이괄에게 맡긴 군대는 조선 최강의 강병이었고, 나머지 장수들이 이끌어야 했던 군대는 포졸 수준의 약한 병사들이었다는 뜻이다. [17] 이괄의 중군이었던 이윤서의 투항이 결정적이었다. 이윤서는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심복들과 이괄을 제거하려다가 실패, 대신 휘하에 이끄는 군 4천여 명을 해산시키고 장만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직후 죄책감을 느끼고 자결했다. 이윤서의 희생으로 그의 가문은 안위를 보전받았고 이윤서도 사후 공신에 추증된다. [18] 덕분에 이괄의 난 직후 장만은 책임지고 형식상 잠깐 백의종군하기도 한다. [19]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 해서 적진을 혼란케 하려는 이괄의 계략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당시 투항한 송립은 훗날 병자호란 때 왕을 보호해 남한산성으로 피난시켰다는 기록이 있을 뿐 아니라 정2품 관직인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기 때문에 단순한 거짓 투항으로 보기 어렵다. 사후엔 장정(壯靖) 이라는 시호까지 받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히려 이괄 군에 거짓으로 동참했다가 기회를 엿봐서 휘하 병사들을 이끌어 투항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 투항병들을 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이라 착각한 관군이 스스로 와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21] 정충신의 부대는 패배를 겪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괄을 꾸준히 추격한다. 마지막 날짜 기록을 보더라도, 이괄은 한양을 점령한 바로 다음날, 정충신이 밤중에 만들어놓은 진영에 싸움을 걸었다가 패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충신의 병사들이 황주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 [22] 병사들은 유닛이나 기계가 아니다. 이괄의 병사들이 국가의 이치에 대해 논하자 줄줄이 탈주하고 마지막 패배조차 이런 언급이 있는 걸 볼 때 국가의 명분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다. [23] 실제로 2월 7일에 전라도 병마 절도사 이경직이, 2월 9일에 충청도 병마 절도사 이완이 병사를 이끌고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미 2월 7일에 관군이 마탄에서 대패하고 한양까지 한번에 뚫리는 바람에 구심점을 잃은 상황이었다. [24] 모자라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이괄 군 투항자들까지 그대로 뽑아 올릴 정도로 반란군에 비하면 숫자와 훈련도가 부족했다. [25] 황주 전투와 마찬가지로, 마탄의 수비군 자체가 이괄 군에 비하면 질과 양이 모두 빈약한 병력이라서 패배는 확정이었다. 하지만 마탄 전투는 황주 때와는 달리 관군이 전멸해버렸고, 죽은 장수들이 임진왜란부터 활약한 베테랑 장교들이자, 순수하게 국가의 위기 사태를 방지하겠다고 목숨을 바친 충신들이라서 굉장한 파장을 일으켰다. [26] 저격(狙撃)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격살은 총으로 저격해 죽였다는 의미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이 있다. 본 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변역한 조선 왕조 실록을 참조하고 있다. [27] 이확의 행동이 겁쟁이처럼 보일수 있겠으나 이확은 젊은 시절 궁궐에 침입한 호랑이를 죽인 용사중의 용사였다. [28] 이 패전으로 이확은 죽을 고생을 하고 겨우 목숨만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괄 군과 내통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아 이를 해명하기 위해 고생했다. 그리고 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나라의 원수인 청 황제한테 절하고 왔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훗날 해명이 될 때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된다. [29] 이괄의 난에서 죽은 선전관이나 이괄의 처자식들과 함께 대표적인 비극으로 언급된다. 결국 충성파 장수들의 목을 베어서 욕보이는 계책을 냈던 이수백은 이후 그 장수들의 아들들에게 백주 대낮에 참살당한다. 같이 계책을 냈던 부장들과는 달리 죽어도 싼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 [30] 당연하게도 박효립의 부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으며 박효립 본인은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애초에 민병대만을 이끌었음을 생각해 보면 좀 안타까운 죽음이다. 박효립은 인조반정 당일 반정군에게 문을 열어준 창덕궁 금호문의 수문장으로 반정에 공이 있어 파주 목사에 올랐었다. [31] 이흥립은 본래 박승종과 인척 관계였다가 인조반정 때 슬그머니 참여해 공을 세운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이괄의 반란군에 투항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자 옥에서 자결하였다. [32] 상단 프로필란에 있는 이미지가 이때의 일을 기록한 쌍수정사적비이다.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소재이며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33] 이시언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무인이었으나, 김류가 내통을 우려해 기자헌과 함께 이괄의 일파로 몰아 억울하게 참살된다. [34] 정충신은 장만에게 이괄이 바로 추격하여 어가를 사로잡는다면 상책이고, 가덕도에 주둔 중인 모문룡과 합류한다면 중책이며, 한양에 머무른다면 하책이라고 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장만이 이 말을 했다고 하거나, 청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상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야사에 기록된 것이라서 그리 정확한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다. 다만 당시 군중이나 백성에서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5] 이괄의 반란군이 장만이 펼쳐놓은 포위망에 갇히기 전에 도망치듯이 한양으로 달려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미래가 없는 판단이었다. 물론 장만이 인정했듯이 관군 측에 이괄 군을 쫓아낼만한 정예 병력이 모자랐으며, 수도를 점령한다는 상징성 자체는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36] 인조는 광해군이 "폐·살를 하였다"는 명분을 세워 그를 폐위했다. [37] 지배 계급끼리의 전투를 일반 백성들이 남 일 보듯 구경했다는 사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발견된다. [38] 애초에 이괄이 데려온 정예 병사들은 이괄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같은 조선군과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이괄의 지휘 능력이 관군 지휘관들에게 압도적으로 이기는 입장이 아니라는 불안감이 현실화되자 더 이상 싸움을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39] 실록에서도 승장인 정충신이 "하늘이 도와 이겼다"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뒤집어서 보자면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서 진을 쳤던 정충신의 깡이나, 황주 전투에서부터 미약한 병력으로 이괄을 상대했던 관군 장수들의 용기도 대단했지만. [40] 이순신의 또 다른 서자 이훈은 정묘호란때 사촌형(이순신의 큰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역시 시신을 수습치 못해 무덤이 남아있지 않으며,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이순신의 다섯 아들 중 3명이 외적과 맞서다 후사를 남기지 못한채 전사했고, 가계는 맏이 이회, 둘째 이예의 후손이 이어갔다. [41] 관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 이괄 측이 고립되리라는 점은 한성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의 눈으로도 명확했을 것이므로, 이괄 일당과 한편으로 취급돼서 반역죄 연좌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관군이 한성에 입성한 후에 무고하게 처형당한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이런 사람은 극히 일부여서 별로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42] 이 전투의 승리 자체가 정충신 등의 소수 특공 작전으로 기어이 만들어낸 기적이었을 뿐, 여전히 관군은 이괄의 반군에 비해서 열세에 처해 있었다. 따라서 관군의 추격 사실을 반군 수뇌부가 알게 된다면 적당한 장소와 시점에서 후퇴를 멈춘 후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심정으로 역공을 가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훨씬 열세인 것도 모자라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을 떠나서 반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지치게 될 관군 병력들이 패배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즉 두 장수들의 판단이 옳은 것. 실제로 이괄을 막던 부사 임회(송강 정철의 사위)는 잔당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한편 삼국지의 소위 하북 평정 과정에서 동연으로 도망간 원소 아들 들을 추격하려는 조조를, 추격하면 뭉쳐서 대항할 것이지만 가만히 있으면 앉아서 목을 얻게 될 것이라며 말렸던 곽가가 연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43] 실록에 의하면 이괄의 난이 끝난 지 10년 후다. [44] 《성호사설》 제17권 〈이문웅〉 편을 보면, 이 형제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일까지 벌였다. 어엿한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 노비 문서까지 만들면서 노비로 위장하여 이수백의 이웃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수백의 여종과 위장 결혼까지 하여 수 년간 이수백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추적했다. [45] 조선은 특히 효(孝)를 가장 중한 가치로 삼은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만큼,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보복에 대해선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인조실록》 권29 12년 3월 13일 기해 2번째 기사. [46] 애초에 이 당시에는 반역죄에서 여성이 참수되는 건 법에도 어긋난다. [47] 다만 심기원도 잘못한 게 있는데 모든 사형이 다 그렇듯 반역죄로 사형시킬 때도 일단 임금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심기원은 보고 없이 처형시켰다. 때문에 인조가 굉장히 화냈다. 여담으로 이후 심기원은 공신으로 그럭저럭 나가다가 역모를 꾸미다 처형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 심기원을 죽인 김자점 역시도 역모를 꾸미다 죽는다. [48] 선조 입장에서는 죽이고 싶은데 명분이 부족해서 제발 반역해달라고 그랬다는 설도 있다. [49] 상황이 이런데 만약 "내가 왕인데 아들 목숨 위협한다고 반란 일으키냐?"라는 식으로 생각했다면 정말로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고방식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인조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서 이괄의 높은 윤리 의식보단 자신을 향한 충성심, 혹은 자신이 이괄에게 보인 총애에 마땅히 따라오리라 여겼던 신뢰관계를 거론하며 옹호했다.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어설프게 대처했다가 일을 키워버렸다. [50] 6.25 당시의 상황으로 예시를 들면 북한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남침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당시 경기도 지방을 방어하던 1사단과 7사단이 쿠데타로 인해 증발해 수도 사단 혼자서 북한군 대부분을 막아야 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12.12 군사반란 당시 노태우가 가장 욕을 먹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전방 9사단의 병력 일부를 빼돌리는 미친 짓을 저질렀기 때문. 만약 북에서 이 움직임을 알고 무력 도발이나 더 나아가 남침을 했다면 그야말로 남한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도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입을 빌어 '설마 (노태우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은 안하겠지?'라고 비난한다. [51]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에서는 유운이라는 인물이 청에 투항한 한윤을 암살한다는 결말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으며 한윤과 그 사촌 한택은 팔기군의 일원이 되어 건륭황제 때까지 기록을 남긴다. 그러나 정묘호란 때 한택은 열심히 조선인을 학살했으나 한윤은 비교적 그렇지 않아서, 이후 최명길 등이 그에게 다시 줄을 대 보자는 논의가 있기도 했다. 건륭제 시대 이후 그들의 자손에 대한 기록은 확실치 않다. [52] 이괄의 군세가 한양으로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53] 실록의 표현을 옮기자면 평안도 백성들이 이원익의 말이라면 어버이처럼 따랐다고 한다. 이 인심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평안도에서 대병력을 편성하는 데 성공한다. [54] 이괄이 한양에 도달할 당시에 백성들이 반군을 죄다 반겼다고 한다. 다만 이건 김류가 기자헌을 국문없이 처형하는 병크를 저질러서, 인조에 대한 여론이 인간 쓰레기 급으로 낮아졌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결국 관군에게 패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아마도 권세가들이 주축이 돼서) 한양 성문을 잠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