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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甲錫
1929년 3월 10일 ~ 2016년 11월 8일 (향년 87세)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진짜 손에 꼽을정도인 이등병부터 별까지의 사병 출신 장성 중 소장 직위까지 오른 인물이다. #군사정권의 군부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육군사관학교 특유의 텃세에 왕따를 당했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유능하면서 원칙과 소신에도 충실했던 참군인. 본관은 전주(全州), 호(號)는 설암(雪巖). 창씨명은 토미타 코우샤쿠(富田甲錫).
2. 생애
1929년 3월 10일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 180번지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7년에 조선경비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사병으로 일등상사까지 진급한 뒤에 1950년에 현지임관으로 6.25 전쟁 도중 소위가 되었다. 중령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근무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포병대대장(소령)으로 근무하던 1955년에 임관한 육군사관학교 11기(최초의 4년제 학사 졸업자 출신 기수)들이 그보다 먼저 1973년에 준장을 달았다고 한다. 그는 1974년에 준장으로 진급했고 1978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8보병사단장을 역임하고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1]을 마지막으로 1983년 10월 31일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한국 전쟁 발발 당시 재무 담당관 보직의 상사로서 제6보병사단에서 복무하다가 소위로 현지임관하며 포병으로 전과 했다. 한국 전쟁시 포병 전문가로써 군 내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때 송요찬 장군이 1만발을 밤새 쏘라고 하자 요란하게 쏜 뒤 적당히 기록지를 가라로 만들어 보고해 칭찬을 받은 일화도 있다.[2] 1960년대 후반, 육군포병연대장으로써 야전에서 근무하던 도중 대간첩작전을 수행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베트남전에서는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인사참모로 지내면서 파병 군인들의 복지와 파월 한국군의 군수와 인사 업무를 수행했다.
소령 시절 제6군단 포병대대장을 맡다가 28사단에 배속되어 당시 사단장 서정철 장군을 지프에 태우고 포병 훈련장을 돈 적이 있었는데, 서 장군은 보조석에서 코까지 골며 단잠을 자고는 사단 참모회의때 운전 잘한다고 대놓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다.[3]
중령, 대령시절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인사참모부의 중견 실무자로 근무하다가 당시 5.16 군부 세력의 진급 문제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다. 아닌게 아니라 현지임관 출신으로서 실전경험과 근무실적까지 흠잡을데가 없는 이력을 갖고도, 군사정권이 비육사 출신을 홀대했고 또 유능하면서도 시대에 맞지 않게 아첨을 안하는 최갑석 장군의 강직한 성향을 눈엣가시로 여겼는지 항상 진급에서 육사출신들에게 밀렸다고 한다.
육군 항공감[4]으로써 육군항공에 큰 기여를 했으며 포병과 같은 전투병과 뿐만 아니라 비전투병과인 인사, 경리, 감찰, 군수 등 여러 방면에 있어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원칙과 소신을 지킨 군인이라 평가 받는다.[5] 군 복무 시절 최장기 근속 보유자, 최다 계급 진출자, 전 신분을 거친 최다 신분 경력자, 보병, 포병, 경리, 감찰, 항공 등 최다 병과 근무자, 28개 부대를 전속 복무한 최다 부대 전속자, 여순사건에서 베트남전 참전까지 최다 전역(戰域) 참가자, 최다 아이디어 창안연구 보고자 등 '살아있는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 이자 산 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서 '장군이 된 이등병'이 있으며 제12보병사단 예하 포병여단에는 그의 이름을 딴 '최갑석 대대'가 있다.
또한 여느 군인이나 공무원과는 달리 예전엔 관행화되어있던 군납비리까지 철저하게 멀리할 정도로 원칙과 소신을 준수한 인물이었다. 준장으로 진급하고[6] 받은 2차 보직이(1차 보직은 육군본부 인사근무처장) 야전부대 지휘관이나 참모가 아니라 육군의 비전투 군납을 관리하는 장인 원호관리단장[7]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PX를 점검[8]하고 군납품 생산지 현황을 점검하자[9] 아주 분노가 들끓었다고 한다. 결국 물품 하나하나의 규격과 청결도를 본인이 직접 지정하고 확인할 정도였다고 한다.[10] 사단장 임기를 마친 후에는 보통 사실상 소장전역대기자가 지내는 한직인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내고 예편하였다.[11]
예편 후에는 전 2군사령관이었던 차규헌 교통부장관의 배려로 전국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 상임 이사장으로 취임하여[12] 2~4대 이사장을 역임한다. 이사장 재임 당시 고속버스 예매 시스템의 전산화와 고속버스 터미널 시설의 개수 및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예편이후 2016년 11월 8일 그는 향년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3. 여담
육군 제12보병사단 제51보병여단(향로봉) 예하 51포병대(옛 65포병대대)는 최갑석 대대라고도 불린다. 군에서의 최갑석 장군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군인이라는 딱딱한 이미지와는 달리 가무와 시짓기를 즐겼다. 하모니카를 잘 불었고 부인인 황정남 여사와 오카리나를 함께 부르기를 좋아했다고.
젊은 시절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면 자녀들과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하며 하모니카를 불렀다고 회상하는 등 음악을 좋아하였다.
수기를 보면 부대대장 시절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방한했을 때 수도사단을 지나쳤다. 이때 의전을 위해 대대장 김수산 중령과 함께 실탄장전을 한 예포 21발을 쏴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원더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의전이었소" 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한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 경호상 무모한 행동이었는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래도 유쾌하게 받아주고 한국에 많은 지원을 해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
[1]
그의 회고록을 보면 2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했을 때 당시
차규헌(육사 8기. 하나회 후원자. 1929~2011) 2군 사령관이 깍듯하게 영접하였다 한다. "부사령관 각하, 우리 함께 서로 이해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2군사에 모두 남기고 떠납시다"라는 인상적인 환영사도 했다 한다. 본인 역시 2군 사령관이 최종 보직이었다.
[2]
사실 탄약은 CSR(통제보급율)을 고려하지 않고 사격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할 양이 없거나 부족할 수 있다.
[3]
이때는 운전면허자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운전병이 없으면 운전을 못하는 지휘관도 허다했다.
[4]
당시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부탁해서 맡았다고 한다.
[5]
실상은 윗선에서 흠잡을데 없이 전투임무에 능하고 실전경험까지 풍부한 병 출신 비주류를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 일찍 전역시키려고 해본 적이 없거나 못할 것 같은 여러 보직에 돌린 것에 가깝다. 근데도 그걸 모조리 잘 해내고 진급했으니 군인으로선 엄청난 먼치킨인거다.
[6]
진급한 그 날 모친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수기에는 진급 12일 후 모친상을 당했다고 써있다.
[7]
現
국군복지단의 전신이다. 과거에는 군별로 복지단이 있었다.
[8]
PX 술이 담긴 통을 열었더니 헌 농구화 짝이 나오고, 살이 벗겨진 죽은 쥐가 나왔다 한다. 그리고 미군이 쓰다 버린 드럼통에 술을 운반하는 것을 알게 된 최 장군은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9]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더러운 변소 옆에서 풀빵을 굽고 있었다고 한다.
[10]
원래 원호관리단장은 소장 진급에 실패한 준장이 끝물에서 상인들과 적당히 어울리면서 한 재산 해먹고 전역하는 한직인데 최갑석 장군은 이 원호관리 임무까지 완벽하게 수행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운영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공로로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야전지휘관인 8사단장을 맡았다. 당시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이 그를 칭찬하였다.
[11]
당시 2군사령관은 아래에 나오는 차규헌이다. 12.12의 그 차규헌 맞다.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의 육군사관학교 시절 4학년때 교장이 차규헌이고 박지만의 첫 소위 근무지가 8사단이고 당시 8사단장이 최갑석이란 점을 보면 이미 차규헌이 최갑석을 잘 봐둔 것으로 보인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예편했고, 2년 정도 같이 일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부사령관 각하, 우리 함께 서로 이해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2군사에 모두 남기고 떠납시다”라고 인상적인 환영의 말을 했다고 한다.
[12]
최갑석 장군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감찰을 담당하고 군 내부에서도 비리와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던 자신을 예편 이후에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고. 당시 기업들과 공조직에서는 횡령, 배임, 뇌물수수가 관례로 여겨졌다는 점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