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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군사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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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이치가야에 있던 육군사관학교. 1941년부터 해당 건물은 육군성 청사가 되었다. 이후 육상자위대 동부방면대 주둔지가 있었으며, 이 시절에 이곳에서 미시마 사건이 일어났다. 현재 해당 부지에는 방위성이 자리한다.


1937년의 일본육사 기록영상.

1. 개요2. 역사3. 교육방식
3.1. 교육과정
4. 패전 후5. 조선인 일본군
5.1. 국군 창설5.2. 조선인(한국인)
6. 유명 출신인물
6.1. 일본인6.2. 중국인

1. 개요

[ruby(陸軍士官學校, ruby=りくぐんしかんがっこう)] / 陸軍士官学校

일본 제국 육군 장교를 양성하던 교육기관. 1868년 교토에 세워진 병학교(兵學校)[1]가 기원이다.

사관학교 예과는 2년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3월에 졸업하여 4월부터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0월에 본과로 진학하는 구조가 된다. 37기부터 적용된 일이다. 본과에 가면 1년 10개월간 교육을 받은 뒤에 견습사관( 상사)이 되어 다시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다.

일본해군병학교는 철저히 학력주의에 근거하여 성적을 공표했고 진급 순서도 졸업 성적대로 했지만 육사는 성적을 공표하지 않았고 육사 성적도 일본 육군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 육군은 육사 교육기간의 문제 때문에 초급장교들의 질이 낮았기 때문이다. 예과는 군사교육이 살짝 들어간 고급교육과정이라 정말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는 것은 1년 10개월짜리 육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육군에서는 양성기관이 아닌 보수기관인 육군대학교 진학여부와 육군대학의 성적이 더 중요했다. 육대 우수 졸업자는 천황이 직접 하사한 군도를 받았다. 육대는 장군이 되기 위한 필수 코스였다. 육군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대좌까지밖에 진급할 수 없으며 고급 지휘관이나 주요 참모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육대 입학 자체도 경쟁률이 매우 높았는데, 사단장의 인사 고과엔 휘하 사단에서 사실상 후배들인 육대 입학자를 몇 명이나 냈냐가 반영될 정도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평시에 소대가 없었기 때문에 위관급은 중대에 배치된 신병들을 교육 시키거나 당직 근무를 서는 일만 했는데, 똘똘한 위관급들의 경우 일체의 과업을 면제시키고 입시 공부에만 전념케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의 부대 별칭은 상무대(相武台)[2]였다. 한국 장성군에 있는 그 상무대(尙武臺)와는 관계 없다. 한자도 다르게 쓴다. 작명방식을 일본군에게 배웠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는 낭설일 뿐이며, 상무(尙武, 무를 숭상함), 진무(振武, 무력을 떨침), 신무(神武, 귀신 같은 무예), 충무(忠武, 충성스런 무) 같은 말들은 한중일을 막론하고 한자문화권에서 군인을 교육하는 관청이나 무관에게 주어지는 시호 등등 예전부터 흔하게 많이 쓰던 말들이며 심지어 무술을 수련하는 무파 등에서도 쓰던 말들이다. 대(臺, 台) 역시 높고 평평한 시설물을 뜻하는 말로서[3] 그 자체로 성문(城門)이나 사열대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군에서 많이 쓰던 글자다.

2. 역사

상술했듯 기원은 1868년 교토에 세워진 병학교(兵學校)이다. 1869년에는 오사카로 이전하고 1871년 도쿄로 이전한다. 병학교 출신은 기수가 없었으며, 명치 3년에 한번, 명치7년 3번 모집 후 대략 2년간 교육 받고 졸업 후 다시 1년이 지나 소위로 임관하였다. 교육중에 세이난 전쟁이 터져 교육 기간이 불안정 했다.
(1872년 이전의 일본은 태음력이라 연도 표기가 1년 정도 오차가 있을 때가 있음. 명치 3년은 서기 1870년 2월 1일~1871년 2월 18일에 해당함)

사관생도(士官生徒) 1875년~
1874년에 육군사관학교 조례가 생기면서 1875년에 사관생도 1기가 입교한다. 1기생은 1875년 1월 28일에서 2월쯤에 입학하여 1877년 7월 18일에서 12월 22일 사이에 117명이 졸업 하였다. 중간에 세이난 전쟁이 터져 2기생과 함께 참전하여 34명이 사망 하였다.(한국판 육사 생도 1~2기생[4]) 사관생도 3기는 세이난 전쟁 영향으로 입학이 연기되어 1877년 5월에 입교하여 1879년 12월 22일에 96명이 졸업하였다.

이 사관생도 제도는 11기까지 지속됐고 총 1,285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교육기간은 병과마다 달라 보병이나 기병은 2년이었고 1876년엔 3년으로 변경되었다. 포병 공병은 3년이었지만 1881년에 5년으로 늘어났다. 당시의 교육 방식은 프랑스의 사관학교를 본 뜬 것이었다.

사관후보생(士官候補生) 1890년~
1887년에는 프로이센군식으로 사관후보생을 받게 된다. 1890년에 제1기가 입교한다. 이들은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한 이들로 일병에서 상병으로 잠시 복무를 하다가 들어간다. 중학교 출신자는 12월에 생도 일병으로 입대해 이듬해 6월에 상병으로 진급한다. 도조 히데키가 입학한 17기(1904년~1905년)의 경우 중앙유년학교 출신 300명[5] + 일반 중학교 출신 63명 하여 총 363명이었다.[6]

참고로 1909년 일본 정부 대한제국군의 장교 양성기관인 육군무관학교를 폐지하고 이들은 육군 유년사관학교를 거쳐 일본육사 26기와 27기에 나눠서 입교시켰다.

육군사관학교본과(陸軍士官学校本科) 1925년~1945년
1920년에는 사관학교를 둘로 나누어 육군사관학교 예과라고 불리게 되고 육군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로 바뀌게 된다.
1925년에 입학한 37기부터 이에 해당된다.

이전까지는 졸업월의 차이로 유년학교 졸업생은 상등병으로 일반 구제중학교 출신은 일등병으로 근무하다가 상등병이 된 이후 얼마 뒤 예과에 들어가는 체계였는데 이미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 적응에 큰 지장이 없던 유년학교 출신들에 비해 일반 구제중학교 출신은 생판 맨바닥에 그대로 헤딩하는 꼴이라 이로 인해 문제가 생겼기 때문.

1937년엔 본과가 다시 육군사관학교로 돌아간다. 예과는 육군예과사관학교로 분리 독립하고 현재의 육상자위대 아사카주둔지가 위치한 곳으로 이전한다. 육사는 가나가와현의 자마로 이전하고 1938년엔 교육기간이 1년 8개월로 단축된다. 1941년에는 1년으로 단축된다. 전쟁에 인원이 부족하니 막 줄인 듯 하다. 웨스트포인트도 전시에 6개월 빨리 임관시킨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3년 6개월은 교육시켰다. 한편 육군예비사관학교라고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예비 군장교들을 1년간 교육시킨다.

항공병과는 1937년 육군항공사관학교로 독립시킨다. 이들은 병으로 근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육사를 졸업 후 항사로 가는 방식이라 별도의 기수가 없었다.

3. 교육방식

5년제인 구제중학교(심상중학교에서 명칭 변경) 4학년 2학기(16세) 부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응시 할 수 있었으나, 보통을 5학년 졸업하면서 응시하였고 육사 과정도 이에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격 요건 때문에 조선인들이 다니던 4년제 고등보통학교(이하 고보) 출신들은 지원 자체가 불리했다. 또한 중학교에는 교련과목이 있어 육사 입시에 도움이 되었지만, 고보는 교련 과목이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3년부터 조선인도 입교 가능했는데 주로 조선반도내에 일본인을 위해 설치된 구제중학교에 다니던 조선인들이었고, 고보 출신도 소수나마 있었다.

지원자들은 지방의 연대 본부로 가서 3일간 시험을 치렀다. 이틀은 국어(일본어), 영어, 수학, 기하학, 역사, 지리학, 물리학, 화학, 작문 등 학과 시험이었고 마지막날은 신체 검사였다. 입교 전에 헌병대에서 가정 환경을 엄격히 조사하며 술집, 극빈자 등을 제외한 중류 이상을 선발한다.

일제 말기에는 한 기수에 2천 몇백명씩 뽑았다. 원래는 예과 2년 + 본과 2년 구조였으나 이 역시 말기에는 예과 1년 + 본과 1년 8개월로 대폭 단축 되었다. 조선인들은 일제 말기부터 입교 가능해졌으니 모두 이 과정이었다.[7]

특이하게 일본은 병종, 병과, 부대가 예과를 마칠 때 결정된다. 기본적으로 본인이 희망 병과/부대를 밝히나 TO등을 고려해서 배정되다. 그리고 예과 교육이 끝나면 4~6개월간 해당 부대로 가서 '대부(隊付)'을 받는다. 1개 연대에 평균 5~6명의 생도가 배정되는데 전선에 있는 부대까지 가서 교육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연대의 생도까지 대신 받아 1개 연대에 15명씩 파견된다.

대부교육은 대위급인 훈육중대장이 담당하며 처음에는 상등병 계급장을 달지만 일반 병사와 구분하기 위에 상의 목 깃 오른쪽에는 계급장, 왼쪽에는 별을 달았다. 실습이 끝날 때는 오장(하사)을 거쳐 군조(중사)로 진급한다. 이 기간중 계급에 맞추어 분대장을 맞거나 교대로 병사들과 내무생활을 하며 병사들에 대한 실정과 심리를 파악하게 된다.

다만 생도 숙소는 따로 있었고, 식사는 철저하게 장교 식당에서 선배 장교들 사이에 앉아 실시하였다. 교대로 매일 한명씩은 연대장과 식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본과로 올라가면 2년 과정인데 중일전쟁( 1938년)이 발발하여 1년 10개월로 단축되었고, 이는 다시 1년 8개월까지 줄었다.

본과를 졸업하면 견습사관이 되는데 조장(상사) 계급장을 달고 대부교육을 받았던 그 부대로 배치되어 신병들을 교육[8] 시키거나 당직근무를 서다가 약 6~8개월 후에 정식 소위로 임관되게 된다. 이 기간중에 자신의 병과 학교에 가서 교육도 받게 된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일제말기 기준으로 예과 1년 + 본과1년 8개월으로 순 교육시간은 짧으며, 대부교육+견습사관 기간까지 합쳐야 보통 4년, 길면 4년 반이었다. 시대마다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루틴이었다.

한일병탄 시기인 육사 26기(홍사익, 이응준 등)의 경우 1912년 5월 육군중앙유년학교(예과3년+본과2년 과정)를 졸업하고 6개월간의 대부교육후 12월 1일 육사 입교, 1914년 5월 26일 육사 졸업, 6개월 간의 견습사관 근무 후 12월 25일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 당시는 유년학교 졸업 후 육사 1년6개월 + 견습사관 6개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후 딱 2년뒤에 중위로 진급한다.

그리고 대부교육, 견습사관으로 근무했던 연대 또는 독립대대를 원대라고 하는데, 보통 중위때 갈수 있는 3년 과정의 육군대학교도 파견 형식이라 다시 원대로 오게 된다. 또한 원대의 연대장과는 일종의 사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특수 관계로 평생 밀어주고 끌어주게 된다. 뭐 다른 부대로 전임 갈 사람은 간다.

3.1. 교육과정

예과때 배우는 교과목으로는 수신, 국어 및 한문[9], 외국어[10], 역사(일본사, 서양사), 수학(삼각법, 기하, 기하 및 미적분, 대수 및 미적분), 물리학, 지리 및 지질, 심리 및 논리, 법제 및 경제, 도화로 세부과목까지 포함해 총 16개의 과목을 배웠다. 여기서 외국어가 402코마(コマ)[11], 수학이 318, 국어와 한문이 269코마를 차지했고 물리학과 화학이 각각 167, 100코마씩 차지했다. 이외에 군사교육은 교련, 진중근무, 사격, 검술·체조·유도·마술, 훈화, 학과, 내무지도 및 검사과정을 배웠고, 이 밖에 각 견학과 야영훈련, 유영훈련도 했다고 한다.

본과때는 전술학, 전사, 군제학, 무기학, 사격학, 항공학, 축성학, 교통학, 측도학, 마학, 위생학, 교육학(군대교육, 일반교육), 외국어, 교내교련, 교외교련, 진중근무, 사격, 검술·체조·마술, 전령범·복무제요등을 배운다. 외국어는 보통문서를 독해 하고 일상 회화와 작문 가능한 정도에 그쳤으며 본과에서는 주로 군사에 관한 군사문서 독해력을 상승시킨다. 이 외에도 현지 전술, 측도 훈련, 야영 훈련, 각급 견학도 했다.

4. 패전 후

미군이 점령하여 현재는 주일미군의 기지인 "캠프 자마(座間)"가 되었다. 2007년 마이클 잭슨이 위문공연을 오기도 했다. 육상자위대 간부후보생학교 후쿠오카에 새로 자리잡았다.

1961년 12월 12일엔 육사 출신의 장교들이 쿠데타를 기도하려고 한 것이 발각된 3무사건(三無事件)이 일어나기도 했다. 왜 3무냐면 이 쿠데타를 기도한 육사 모임인 국사회(国史会)란데서 내건 게 무세금, 무실업, 무전쟁(無税・無失業・無戦争)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쿠데타를 기도했는지 알 수 없고 쿠데타에 쓰려던 장비도 일본도와 소총 몇 개가 전부였고 체포된 인원도 13명이었다. 이 중 가장 계급이 높았던 인물은 사쿠라이 타쿠타로(桜井徳太郎, 당시 64세)로 육군 소장 출신이었다. 미카미 다카시(三上卓, 당시 53세)는 5.15 사건에 참여한 일본군 해군 장교로 중좌 출신이었다.

이케구치 에칸(池口恵観, 1936-)[12]은 당시 25세로 참여했는데 중의원이었던 바바 겐지(馬場元治, 1902-1968)의 비서가 된지 2달만에 일어난 사건이라 문제가 됐는데 용케 잘 빠져나가고 지금은 불교에 입문하여 승려로 활동하고 있다. 이케구치 에칸은 당시 총리를 암살하고 군국주의 일본을 부활시키려던 쿠데타에 참여했는데 정작 2012년 북한을 방문하여 북일수교가 이뤄져야하며 식민지배에 사죄한다고 말했다. 이 인간은 아베 신조와도 친분이 있다.

5. 조선인 일본군

만주국육군군관학교와 더불어 대한민국 육군의 창군 멤버 상당수가 여기 출신이다. 나라가 일본 제국에 합병되었기 때문. 초기 육군참모총장들도 일본 육사 출신이 많았다.

초대 육군참모총장인 이응준(26기), 2대/4대 채병덕(49기), 3대 신태영(26기), 5대 정일권(55기 상당[13]), 6대/8대 이종찬(49기), 9대 이형근(56기)이 일본 육사 출신이다. 즉 7대/10대 육참총장인 백선엽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이고 나머지는 다 일본육사 출신.

계급으로 보면 이응준, 유승렬, 김석원은 일본 육군 대좌, 신태영은 중좌, 채병덕과 이종찬은 소좌 출신이며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출신이다.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으로 가보면 초대 이형근(56기), 2대 정일권(55기 상당), 3대 유재흥(55기), 4대 백선엽 순서이다.

조선말기 관비 유학생으로 약간명씩 유학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육군무관학교 1909년 폐지되며 일본중앙유년학교-일본육사 강제 편입된 홍사익 중장, 이응준 대좌, 유승렬 대좌, 안병범 대좌, 신태영 중좌, 박승훈 소좌(만주군 중교), 이대영 소좌, 김준원 대위등 13명은 일본육사 26기[14], 김석원 대좌, 백홍석 중좌, 장석륜 중위 등 20명[15]이 일본육사 27기로 마지막 조선인 일본 육사 출신이다. 그리고 조선 왕족이나 이형석(45기)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한동안 일본 육사 입학의 길이 막혀 있다가 조선무관학교의 아들 세대인 49기( 1933년)에서 채병덕, 이종찬 등 조선인 2명이 입교 한다.[16]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선에 살던 일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매 기수별로 약간명씩 조선인들이 입교 한다.(만주군관학교 출신 유학생은 별도)

몇 안 되는 일본 육사 출신끼리는 매우 친했는데 유승렬(26기) 대좌의 아들이 유재흥(55기) 대위, 신태영(26기) 중좌의 아들이 신응균 소좌(53기), 김준원 대위의 아들이 김정렬(1917)(54기), 안병범(26기) 중좌의 아들이 안광수(58기), 김석원(27기) 대좌의 아들이 김영수(57기)였고, 이응준(26기) 대좌의 사위가 이형근(56기), 백홍석(26기) 중좌의 사위가 채병덕(49기)으로 서로 가족관계를 맺게 된다.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이응준 대좌의 장인은 일본육사 15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갑이다. 즉 이들은 가족 같은 사이도 아니고 그냥 가족이었다.

또한 이하영 자작의 아들이 이종찬(49기) 대위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입교가 허락된 49기 이후의 조선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상이 검증된 친일파였다. 그렇기 때문에 회고록 같은 것을 보면 자신이 학창시절 일본인 학교를 다닐 때, 조선인이 자신 빼곤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함경북도 경흥군에는 일본인이 다니던 심상소학교 1곳, 조선인이 다니던 보통학교가 1곳 있었다. 이 중에서 유승렬 대좌의 아들 유재흥은 심상소학교를 다녔으며 일본육사에 갈 자격이 있었고, 반면에 동급생격이었던 경흥 보통학교에 다니던 정일권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가야만 했다.[17]

그리고 일본군에서 장군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일본육군대학 졸업이 필수인데 조선인들은 여기에 갈 수 없어 대좌가 진급 한계선이라 '대좌정지'라는 말까지 존재 했었다. 다만 홍사익만은 시범 케이스로 유일하게 육군대학을 나와 중장까지 승진이 가능했다. 다만 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조선 왕족들은 예외이다. 막판에 조선인 육대 제한 규정이 풀려서 유재흥 대위가 1945년 5월에 시험을 보았으나, 일본패망.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엔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이 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이며 장지량도 육항사 출신이다. 김창규는 일본 육사 출신이다. 8대 박원석 또한 육항사 출신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에는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이뤄졌던 대한민국 해병대의 인원들을 제외하면 설립 주체가 일본군과 무관했고[18], 또 일본 해군 역시 조선인에 대한 문호가 극히 좁았던 관계로[19] 한국 해군에는 일본군 출신 참모총장이 없다.

11대 송요찬 일본 육군 하사관 출신이다. 12대 최영희는 일본 센슈대학교를 다니던 중에 학병으로 소위가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장도영은 토요 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 김종오도 일본주오대 재학 중에 육군 소위로 끌려갔다. 민기식 만주국 건국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했다. 16대 참모총장인 김용배도 일본 육군 소위 출신이며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김계원도 일본 육군 소위로 전선에 갔다. 1969년에야 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 서종철이 19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를 볼 것.

일반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임에도 일본군을 거부하고 독립군으로 가거나 일본군 내에서 공작활동을 하여 독립군을 이롭게 한 독립운동가들도 존재한다. 다만 이들은 전원 조선 시대 유학가거나 한일병탄으로 강제 유학가게 된 케이스.

대표적인 예가 노백린(11기)과 지청천(26기), 김경천(23기) 등이 있다. 노백린은 경술국치 전에 졸업해 대한제국군에 소속되었다가 군대 해산 후 망명, 지청천은 졸업 후 일본 육군에 소속했다가 1919년에 만주로 망명, 김경천은 경술국치 전에 입학해 1911년 졸업 후 일본 육군 소위 임관을 거부했으나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일본군에 들어가 군사 기밀을 빼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중위로 복무 중 1919년에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조선인 입교가 다시 허가된 채병덕, 이종찬의 49기 이후로는 이렇게 독립군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아예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사상검증이 끝난 조선귀족 또는 조선인 일본군들의 자제들로 일본학교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자라 조선말조차 잘 못하였다.

여담으로 일본육사에서는 일요일 주간에 휴식을 주었다. 동경 출신들의 경우 집에 가서 쉬지만, 지방 생도들은 각현에서 출자한 '일요 하숙'에서 휴식을 취했다. 일요 하숙은 현별로 사관 학교 주변에 방 1~2개를 얻은 것으로 푹 자거나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목마른자의 샘물 같은 곳이었다.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진 49기부터 채병덕, 이종찬 등은 이런 일요 하숙이 없어 곤란해 하였는데, 선배인 이형석(45기)의 안내로 히로시마 현인회인 초수회에 몇 차례 간 적은 있었으나 1933년 6월에 이형석이 졸업하면서부터는 맞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일본군 교육총감부 중좌였던 영친왕 이은이 육사의 조선인 생도들이 일요하숙 문제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왕족부 무관 김인욱 소좌를 보내 도쿄의 요쓰야에 이들을 위한 일요하숙(고토 운송점 2층)을 마련해주었다. 이때 채병덕은 이종찬과 함께 친목모임을 결성했는데, 신라의 옛 이름을 따 <계림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실 조선인이라고 해도 한 기수가 2천여 명에 달해 선후배는 물론 동기라도 병과가 다르면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리 수밖에 안 되던 육사 재학 중인 조선인들은 모두 일요일마다 계림회에 모여 친목을 다졌고, 이 때문에 일본 육사 출신자들은 돈독한 유대관계는 여기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친왕 이은은 1년에 한번 이들을 불러 중국집에 불러 포식시켜 주고, 참석 할 수 없을 때는 시종 무관(이형석)을 보냈다. 그리고 육사 생도들은 정월마다 이은, 모모야마 켄이치, 이우의 집에 들러 세배를 하였다. 이때 이은의 집은 너무도 웅장해서(일제패망 후 프린스 호텔로 개조)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황족 중 제일 부자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다만 만주군관학교에서 유학온 정일권, 박정희 등은 조선인 생도들과는 전혀 교제가 없었고, 계림회에 왔다는 기록도 없었다.

5.1. 국군 창설

해방 직후 일본 육사 대선배인 26기 이응준 대좌의 집에 동기인 유승렬 대좌, 신태영 중좌, 안병범 중좌, 박승훈 소좌, 이대영 소좌, 김준원 대위와 27기인 김석원 대좌, 백홍석 중좌, 장석륜 중교[20]등이 모여 안방에 앉아 신생 조선인 부대 창설을 위해 논의 하였을 때, 그 아들/사위들인 채병덕 소좌, 김정렬 대위, 유재흥 대위은 옆방에 모여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 아들 사위/아들 세대에서는 가장 선배인 채병덕과 동기인 이종찬만이 소좌이고 나머지 전원 그 이하계급이었다.[21]

이후 미군정은 '경찰예비대'를 창설 준비를 영어에 능통한 만주군 출신 원용덕에게 요청한다. 그는 일본 육사의 중심인 이응준 등 사설 군사단체의 간부들을 모아 1945년 11월 20일에 미군정청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결과 좌익계는 제안에 거부한다며 장내를 빠져나갔고, 자신들만이 국군이 될것이라고 생각한 광복군계도 거부하였다. 결국 만주군관학교 대선배 원용덕과 일본육사 대선배인 이응준 둘이서 면접으로 군사영어학교 학생을 뽑아 '경찰예비대' 창설을 준비하였고 이는 국군 창설로 이어졌다.

원용덕은 군사영어학교 부교장으로 창군의 주역들을 교육 시켰고, 이응준은 미군정의 고문이 되어 국방경비대 창설을 설계하였다. 또한 군사영어학교에는 110명 중 일본 육사 출신이 13명이 들어 갔다.[22] 이중에서 이응준은 대령으로 임관, 이형근, 채병덕, 유재흥, 장석륜은 대위로 임관했다.

최초에 국방경비대가 운용될 때 각 연대마다 2명의 미군 고문관이 파견되었다. 만주군 출신은 만주군 시절부터 배속된 일본군 장교의 감독/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미군 고문관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 육사 출신들은 미군 고문관을 받아들이지 못해 충돌이 많았다. 미군과 관계가 좋기로 유명한 백선엽이 만주군 출신이고, 그 반대의 경우로 미군들이 노발대발한 김석원이 일본 육사 출신인 것은 이런 연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48년 12월 10일 이응준과 채병덕은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5명의 장성 일원이 되고, 이응준은 초대 육군총참모장에 취임한다. 두달 후에는 채병덕과 함께 소장으로 진급한다. 채병덕은 이응준의 후임으로 2대 육군총참모장이 되었다.(당시 34세))

사단장급으로 보자면 초대 1사단장이 김석원 대령(26기), 2사단장 유승렬 대령(26기), 3사단장 이응준 소장(26기)로 동기들이었으며 6사단장에는 아들인 유재흥 대령(55기), 8사단장엔 사위인 이형근 준장(56기)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국 전쟁중이던 1952년에 신태영(26기)이 4대 국방부장관에 임명된다.

5.2. 조선인(한국인)

일본 육사는 1874년 개교하였는데 1883년 박유굉(사관생도 11기)이 그 예비코스인 육군 '유년생도', 1886년 '사관생도'로 진학한 이래 1945년까지 60년간 조선인 114명을 배출 하였다. 여기에 1940년대 전반에 2년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초급장교 3명과 4년제 만주국육군관학교(신경) 예과 졸업자로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한 24명을 추가하면 모두 141명에 달한다. 다만 만주군에서 위탁 교육으로 들어온 편입생들은 일본육사 예과 수료생들과 교류가 없었다. 이는 일본 육사 총 졸업생 5만2천명 에 비하면 약 0.27% 가량.

이들은 크게 다만 중기와 말기 사이에 왕공족 3명과 그 어학우[23]( 조선귀족) 2명, 기타 1명(이형석)등 총 6명이 입교 했었으며, 만주군관학교 출신 유학생들은 이러한 흐름과는 별개로 입교 하였다.
<초기 - 관비 유학생>
관비 유학은 관비 유학인데 박유굉 처럼 조선의 지원이 끊겨 구걸하다 시피 하며 살거나, 강제 귀국 후 사형당한 경우도 있다.
이 당시의 조선인 육사 출신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복무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러일전쟁 후 일본이 대한제국을 장악하자 군내 요직에 대거 진출 한다. 하지만 군대 해산( 1907년)으로 대부분 강제 전역 당하고 한일합방( 1910년)으로 예우상 일본군의 고위직 계급을 받거나, 한일합방 이후 조선인 왕공족의 무관으로 오랜기간 복무하여 일본군 고위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입교 하고 나서 조선이 망해 일본군이 된 중기, 처음부터 일본군이 될 목적으로 육사에 입교한 말기 조선인 생도와는 차이점. 다만 노백린, 이갑, 유동열 등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군동에 헌신 하였다.

-사관생도 11기-
박영효가 수신사로 도일할때 수행원으로 와서 게이오의숙(慶應義塾)[24]에서 일어를 속성으로 공부했다.
1883년 1월 유년생도로 입교, 1886년 사관 생도로 승격.
(사관생도 11기 다음 기수부터 사관후보생 1기로 개편됨)

-사관후보생 7기?-
무과출신으로 의화군(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도일.
1895년 5월 육사 입교, 1896년 3월 10일 수학증서 받음.
이 시기는 청일전쟁으로 수학연한이 단축되어 기수가 불분명함.
7기와 8기는 귀국후 주로 육군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
-8기?-
1896년 한국의 육군장교 6명(부위 2명, 참위4명)과 관비유학생 4+1명 입교. 장교들은 아관파천으로 인한 정세 혼란으로 전원 회국 명령. 관비 유학생은 1895년 게이오 의숙을 거침. +1에 해당하는 이희두는 군출신이긴 하나 장교는 아니어서 회국 명령은 안받아 관비유학생들과 함께 졸업 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연표에는 아래 11명이 최초 조선인 입교생이라고 하지만, 이들 전에 박유굉, 이병무가 있었음. 기수 불분명.
1907년 군대 해산기준 군부대신 이병무, 연성학교장 이희두, 무관학교장 조성근.
-11기-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일한 유학생중 21명이 게이오 의숙, 세이조 학교를 거쳐[25]
1898년 12월 육사에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
졸업은 했는데 본국의 지원이 끊겨 일본영사관의 도움으로 겨우 '참위'계급을 받았으며, 사정사정해 겨우 귀국 했지만 일심회 사건으로 다수가 처형 당하거나 옥고를 치르는 등 어렵게 살았다.
-15기-
대한제국 정부의 국비생 혹은 사비생으로 도일한 유학생 8명이 세이조학교를 거쳐 1902년 12월 육사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
육사 졸업후 도쿄 근위사단에서 견습사관 생활 할 때 러일전쟁이 터져 일본군 부대를 따라 관전장교 자격으로 전선 시찰함. 이러 러일전쟁으로 조선을 사실상 일본이 장악하자 그들의 지원으로 근대 교육을 받지 않은 무관들이 대거 군직을 떠나고 육사 15기 등이 요직에 등용됨.(11기중 일부 망명한 자들도 이때 귀국.) 특히 육군무관학교, 연성학교(구식장교 재훈련기관), 유년학교(무관학교의 예과과정에 해당) 등 3대 군사교육기관을 장악했다인데, 고작 2년 후 군대해산.

군대 해산후에는 1931년까지 '헛총 메고 빈 대궐 지키던' 1개 대대 규모의 '조선보병대'의 고위대원으로 남거나, '조선군사령부부'라는 이름으로 왕공족부무관이 되었다. 아래 일본군 대좌 어쩌구는 일본군으로 전공을 세워 받은 게 아니라 수십년간 조선 왕공족의 무관을 하며 받은 계급.

이중에서 독립군인 유동열은 육사출신 독립군의 대부로 해방 후 국군 창설의 산파역할을 한 3인 중 하나.[26]
<중기 - 대한제국의 유복자들>
여기서부터는 일본 육사로 넘어간 후 대한제국이 망하는 바람에, 대한제국군이 되지 못하고 일본군으로 생활하게 된다.
대부분이 3년제 육군무관학교 재학중 1909년 폐교되어 도쿄중앙유년학교로 편입되었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일본 육사로 진학하게 된 케이스이다. 이후 1933년까지 조선인들에게 일본육사의 문호가 열리지 않았다. 다만 조선 왕공족이나 그들의 어학우로 조선귀족 등 극소수가 개별적으로 입학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위까지만 근무하며 군사기술을 익힌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한 약속을 지킨 것은 김광서, 이청천, 조철호, 이종혁, 이동훈 등 5명이다. 나머지중 반절은 1925년 대규모 군비축소 때 군대를 떠났으며, 해방 당시 군직에 있던 사람은 10명 내외로 홍사익/영친왕은 중장, 유승렬/이응준/김석원 등 3인은 대좌, 나머지는 중좌에 그쳤다. 장군이 되기 위해서는 육사 졸업 8년 안으로 3년제인 육군대학교(이하 육대)에 진학해야 하는데 왕공족 3총사 외에는 홍사익만 육대에 갈수 있었다. 홍사익은 학구파로 원래 성적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어차피 성적도 좋은거 그냥 영친왕 이은의 어학우 삼아 입학 허가가 났다는 게 다수설이다.

"일본군 장교라도 전원 친일파는 아니다. 독립운동 한 사람도 있다"는 주장은 이 시절 육사생중 딱 4명(김경천, 지청천 조철호, 이동훈)을 뜻한다. 이들 대부분이 대한제국 시절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나라가 망해 어쩔 수 없어 일본육사로 진학한 경우였다. 이후 기수 중에서 독립운동가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23기-
대한제국의 황실 장학생으로 1909년 12월 입교, 1911년 5월 졸업.
-26기-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됨으로 2학년 생도 18명이, 1909년 일본 육군유년학교 3학년에 입교. 1912년 12월 육사 진학. 13명이 1914년 5월에 졸업
또한 후배인 27기를 합쳐서 유학생 총 10명이 한국 병합 반대, 질병, 성적 불량등으로 중퇴함.
육사 26기~27기 생도들은 처지가 같아 사이가 매우 돈독했는데, '전의회'라는 친목 단체를 만들었고 그 회장에는 선배인 김경천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중위를 달면 다 같이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힘쓰기로 했는데 이를 지킨 것은 김경천과, 26기에는 지청천, 조철호, 27기에서는 이동훈, 이종혁뿐이다.
이후 이응준 등은 국군의 산파역을 하였고, 김준원, 신태영, 유승렬, 이대영등이 국군에 뛰어 들었지만 나이가 너무 많아 기력이 딸려 6.25때는 대부분 2선에 있었다.
-27기-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됨으로 1학년 생도 25명이, 1909년 도쿄중앙유년학교 예과 2학년에 편입. 1913년 12월 육사 진학. 20명이 1915년 5월에 졸업
-29기-
영친왕은 1907년 일본의 학습원,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5년 11월 육사 입교, 1917년 5월 졸업. 어학우로 이완용 내각의 대신 조중응의 아들 조대호와 본인의 외사촌 엄주명이 따라갔다. 다만 후자는 중앙유년학교 시절 신병으로 1년 휴학.
-30기-
-42기-
의친왕의 장남 이건 역시 일본의 학습원과 토쿄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26년 4월에 육사 입교, 1930년 7월 졸업
-45기-
의친왕의 차남 이우는 운현궁 호주권 상속으로 왕공족이 됨. 역시 학습원과 도쿄유년학교를 거쳐 1929년 4월 육사에 입교, 1933년 7월 졸업. 다만 44기로 입교한 이형석은 신병으로 1년 휴학하여 45기로 졸업
이형석은 이시기에 특이 케이스인데 본인 말로는 "본격적인 조선인 입교를 압두고 시범적으로 나를 선정한 게 아닌가 싶다"고 증언하였다.
<말기 - 조선인 입교 가능>
만주사변이 일어난지 2년 후 부터 일본측의 입장이 바뀌어 조선에 있는 일본인중학교에 다니던 극소수의 조선 학생들에게 학교장과 배속 장교들이 간절히 권유하여 그 중 일부가 육사에 지원하게 된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로 4학년 1학기를 마치면 입학자격이 부여되었고, 이후 조선인들이 다니던 고등보통학교(이하 고보) 출신들도 간간히 보인다. 처음에는 매년 2~3명씩 입학하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1942년)에 6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들은 선배인 육사 26기~27기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라는 점에 착안하여[27], 만약 독립이 되면 우리나라 군대에 신기술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이 기술병과를 선택 하였다. 초기, 중기에 대한제국에서 유학온 생도들과 달리 이들은 일본군이 될 목적으로 일본육사에 온 순수한 친일파. 이들은 조선말 조차 잘 하지 못하여, 해방후 육사에서 일본어를 섞어 강의했다거나, 명령을 내리는데 발음이 부정확해서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장차 독립된 조국의 군대에 도움이 되기 위해 기술병과를 지원했다는 점에서 식민지 청년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진 첫 기수인 49기의 채병덕과 이종찬은 영친왕 이은의 후원으로 일요일에 외출하여 쉴 수 있는 하숙을 얻었고, 그 이름을 '계림회'로 등록하여 학교측에 신고 하였다. 이곳은 육사 26기, 27기 선배들이 쓰던 일요 하숙집과 같은 건물이었다. 채병덕과 이종찬 이후 후배들은 모두 계림회원에 속하며 총 45명이다.

이들 중 해방 당시 육사 또는 육군예과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제 59기, 60기, 61기생을 제외한 선배들은 대다수가 참전 경험이 있으며 전사자도 다수. 해방 후 육사 26기~27기가 국군 창건의 산파 역할을 했다면 6.25를 겪으며 육군과 공군의 최고 간부층을 형성한 것이 이들 육사 말기생들이다.

일제 패망 당시 최종 계급은 49기~53기는 소좌, 54기~56기 대위, 57기 중위, 58기는 소위였고 59기~61기는 육사 또는 예과사관학교 재학중 이었다.

일본군 계급 뒤 전사 표기는 물론 일본군으로 전사한 것이며, 국군 계급 뒤 전사는 6.25중 전사. 추서는 전사 후 1 계급 특진 한 경우로 역시 전사자이다.

-49기-
1932년 겨울 당시 평양중학교 4학년 채병덕과 조선귀족 이하영(1858) 자작의 손자이자 경성중학교 학생인 이종찬이 응시 합격하여 이듬해 4월 예과에 입교 하였다. 이후 1937년 6월 졸업.
-50기-
1934년 4월 입교, 1937년 12월 졸업. 지인태는 1938년 6월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52기-
1936년 4월 입교, 1939년 9월 졸업
-53기-
1937년 4월 입교, 1940년 2월 졸업.
-54기-
학제 개편으로 육군사관학교 예과가 육군예과사관학교로 바뀌어 패망 때 까지 유지됨
1937년 12월 육군예과사관학교 입교, 1940년 9월 육사 본과 졸업.
-55기-
1938년 12월 입교, 1941년 7월 졸업.
-56기-
1939년 12월 입교, 1942년 12월 졸업
-57기-
1941년 4월 입교, 1944년 4월 졸업.
-58기-
1942년 4월 입교, 1945년 6월 졸업
-59기-
1943년 4월 입교, 1944년 10월 본과 진학
-60기-
1944년 3월 입교, 1945년 7월 본과 진학
-61기-
1945년 4월 입교.
<만주 육군군관학교 유학생>
만주사변 당시 만주의 지배자였던 장쉐량 빤스런 할 때 버리고 간 6만 병력을 베이스로 삼아 일본은 독립군 토벌 목적의 만주군을 만들었다. 기존의 만주인 장교들의 보충 교육을 위해 2년제 봉천 군관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일본 육사를 모방하여 4년제 신경 군관학교를 만들었다.(합쳐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문서에 표기)

만주군관학교 입학생 T/O를 반띵하여 일본계 반, 만주계(대만, 조선인 포함) 반으로 구성하였다. 일본계는 일본 육사 시험에서 아깝게 떨어진 자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만주까지 간거고, 조선인은 대체로 한반도 북쪽에 살던 고등보통학교 출신자들이었다.

2년제 봉천 군관학교 출신 3명(김석봉, 석희봉,정일권)은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한체로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한 것이며, 4년제인 신경 군관학교 출신자의 경우 2년 교육 후 일본인 전원과 만주계 중 우수 학생들은 일본육사 본과에 유학생대 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었다. 유학생들은 제복에 '만'자 표지가 있었고, 육사생도와 섞이지 않은채 자신들끼리만 교육 받고 성적도 따로 매겼다. 그리고 신경학교 5기생 부터는 조선인들은 일본계로 인정 받아 전원 일본 육사로 유학갈 자격을 얻었다. 일본 육사 재학기간이 엿가락 처럼 변경되는 시절이라(1년10개월~1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의 기수는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만주 유학생 출신은 총 27명.

졸업 후에는 물론 만주국으로 돌아가 만주군이 되며, 관동군 산하의 일본군들이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는 꼭두각시 군대였다. 장점이라면 일제 패망후에 소련군이 관동군을 시베리아로 끌고 갔지만, 만주군은 군대 취급도 안하여서 그냥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육사에서 2년 유학했음에도 일본육사계열로 분류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만주군계이다. 초창기 대한민국 육군은 만주계, 일본육사계, 학병계라는 3대 파벌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정일권과 백선엽이 수장격.

만주군 출신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오랜 기간 정부와 군의 권력을 장악한다. 단적인 예로 박정희가 의장인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이주일이 부의장, 박임항, 박원석, 최주종, 김윤근이 위원이다. 반면에 순수 일본 육사 출신의 최고위원은 정래혁만 있다뿐.

말기의 일본육사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자의에 의해 일제에 부역한 빼도박도 못할 친일파. 그중에서 일부는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악명높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다.

-54기 상당-
봉천군관학교 5기, 졸업 후 만주군으로 임관한 다음 1939년 3월 육사 본과 편입
-55기 상당-
봉천군관학교 5기생이나 만주군 기병학교를 거치느라 1년 늦은 1940년 4월에 육사 본과 편입
-56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1기 예과 수료, 1941년 8월 본과에 편입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11명 중 무려 6명이나 성적 우수로 일본 육사에 올 수 있었다.
-57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2기, 1942년 10월 본과 편입
-58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3기, 1944년 5월 본과 편입
-59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5기, 1944년 10월 본과 편입. 이 기수부터 일본계로 인정 받아 5명 전원 일본 육사 편입했음.
-60기 상당-
신경군관학교 6기. 9명 중 7명 1945년 7월 본과 편입. 한달 후 일본 패망.

6. 유명 출신인물

사실 그 일본의 육군 장교 양성기관이고, 거기에 일본군이 일본 정치에 끊임없이 개입했기 때문에[28] 거의 대부분의 일본 육군 장교출신들, 그리고 상당수의 일본 정치인들이 일본 육사를 나왔다. 상술했듯 한국계도 상당수였다. 다만 한국쪽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출신들도 제법 있으며, 중국에서도 일본육사를 간 케이스가 여럿 존재한다.

6.1. 일본인

6.2. 중국인



[1] 육군병학료(陸軍兵学寮)에서 병학교로 변경함. 병(兵) 학교(學校)가 아니라 병학(兵學) 교(校). 병학, 즉 군사학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해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일본해군병학교는 이 명칭을 유지했다. [2] 정확히는 자마시로 이전하고 나서부터. 그 이전에는 육사 위치에서 따온 이치가야대(市ヶ谷台)라고 불렸다. [3] 무대(舞臺)는 춤추기 위한 높고 평평한 시설물이다. [4] 한국전쟁 당시에도 육사 생도 1~2기생이 끌려가서 1/4정도가 사망 하였다. 그러다 육군종합학교로 옮겨져서 육종 1~2기생으로 장교 임관 하게된다. 그나마 졸업을 앞두었던 생도 1기는 1955년에 육사10기로 인정 받았으나 교육기간이 한달도 안되던 생도 2기는 그냥 없는 사람 취급 받아 육사 기수도 부여 받지 못했다. [5] 청일전쟁 후 군비확장의 일환으로 도쿄, 센다이,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구마모토 등 과거 진재가 있던 곳에 유년학교 6개가 생겼다. 각 정원은 50명으로 총 300명. 2년동안 지방에서 배우다가 3년째 도쿄의 중앙유년학교에서 교육받게 된다. [6] 유년학교 출신들은 일반 중학교 출신을 깔보았다. 스스로를 'D' 또는 '카디'라고 하였는데 프랑스어로 유년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뜻이다. 일반 중학교 출신들은 공포(Platpatrone 독일어임)에 질려 소리만 지른다는 뜻의 'P'라고 불렀다. 심지어 사관학교 교관이나 구대장이 P임이 밝혀지는 순간 말을 듣지 않았다. [7] 대한제국이 살아 있을때 넘어갔던 조선인들의 경우, 당시는 육사예과가 아니라 일본중앙유년학교 졸업후 본과로 넘어갔다. [8] 일본군은 신병교육대가 없고 자기 부대에서 고참들과 섞여 자면서 교육 받는다. [9] 국어, 한문, 작문 [10]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중 하나를 선택 [11] 1코마가 50분 단위이다. [12] 법명으로 속명은 사메지마 마사즈미(鮫島正純)였다. [13] 만주국육군군관학교예과 2년 교육후 성적 우수자에 대한 특례로 일본육사 본과로 유학갔다. [14] 탈출하여 독립군이 된 지청천, 김경천 장군 포함 [15] 탈출하여 독립군이 된 이종혁 포함 [16] 조선인이 다니는 고등보통학교에는 교련 과목이 없어서 육사 입시에 불리했다. 채병덕, 이종찬은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 출신. 이후 1934년 9월부터 고보에도 일본군 장교들이 파견되어 교련교육이 시작된다. [17] 한동네이긴 하지만 학교가 달라 서로 몰랐다. 이후 정일권은 성적우수로 일본육사로 유학오게 되어 유재흥과 같은 55기가 된다. 다만 교육을 따로 받아 서로 모르는 것은 여전했다. [18]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중화민국 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 독일 상선에서 항해사로 일했다.) 등 창설 멤버 대부분이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이었다. [19] 1943년에야 수병에 한해 지원을 받았고, 그나마 함정에는 배치하지 않고 육전대나 설영대(시설대), 항공대, 육상 경비대 등에만 배치했다. 해군병학교는 패전시까지 조선인의 입학을 불허했으며, 소수가 일본인 가정에 양자로 들어가 서류상 내지인(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입학 및 임관한 바는 있다. [20] 일본군 중위 후 만주군으로 옮겨 중교까지 승진 [21] 그렇기 때문에 채병덕이 자신보다 7기수 아래이자 계급도 대위인 이형근이 장인빽으로 대한민국 군번 1번을 받았다고 분노하며 최초의 계파 싸움이 벌어졌다. [22] 군사영어학교 수료로 쳐준 이응준 포함 [23] 일본의 황족이 입학하면 어학우 자격으로 같이 가서 시중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데 조선왕공족도 이런 예를 따랐다. [24] 후쿠자와 유키치가 도쿄에 만든 사립 학교로 현대의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전신. 구한말에 조선인 유학생 수백명이 도일하였는데 상당수가 게이오의숙에서 1년 가량 일본어와 기초학과에 해당하는 '보통학'을 공부했다. [25] 일본 중앙유년학교와 동격의 학교로 명성이 높음. 1885년에 창립되었으며, 초기에는 세이조학교 또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자만 육사에 갈 수 있었다. 1897년에야 육군보충조례에 의해 5년제 심상중학교 출신자도 육사 입교 가능 [26] 다른 2명은 육사 26기 이응준 대좌, 만주군 원용덕 중교. [27] 33명중 3명만 기병. 나머지는 전원 보병 [28] 애초에 육해군 대신 현역 무관제를 유지했기에 현역 군인인 육해군의 장성들이 내각에 참여하는 구조였고, 이들이 내각 조각에 참여를 거부하면 내각이 무너지기 때문에 내각은 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거기에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부터가 상당수가 군인 출신이었기도 하다. [육군3장관] 육군대신, 참모총장, 교육총감 [30] 이 시절 하마구치 내각에서 무임소대신을 맡는 방식으로 업무를 맡았다. [31] 조선총독을 지내며 무단 통치로 악명높았던 그 사람 맞는다. 아버지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871년 일본 육사 출범 전에 소위로 임관했다. [32] 다만 일본군에서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기에, 여전히 육군 대장이었다. 즉 원수 육군 대장. [육군3장관] [육군3장관] [35] 사실 육군대학 출신이면 갈 일이 없는 한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