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제8전구 사령장관 | ||
정체 | 朱紹良 | |
간체 | 朱绍良 | |
한국식 독음 | 주소량 | |
영문 | Zhu Shaoliang | |
자 | 일민(一民) | |
출생 | 1891년 10월 28일 | |
청나라
푸젠성
푸저우 (現 중국 푸젠성 푸저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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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3년 12월 25일 (향년 72세) | |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민국(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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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일본육군사관학교 | |
직업 | 군인, 정치가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국민혁명, 반장전쟁, 초공작전 등에 참여했으며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 8전구 사령장관을 역임하였다.2. 생애
1891년 푸젠성 푸저우(現 푸젠성 푸저우시)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장쑤성 무진이다. 16세에 양등소학을 졸업하여 그 다음해 푸젠육군소학에 진학했다. 19세의 나이로 난징육군제4중학에 진학하였고 일본진무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10년 도쿄에서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고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귀국하여 한커우에서 혁명에 참여했다. 도독부 참모로 임관했으며 그해 겨울 푸젠육군소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가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16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17년 귀주군벌 왕문화 휘하에서 잠시 복무하였다.1923년 쑨원을 만나 대원수부 고급참모에 임명되었고 1926년 제10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참여하였고 1927년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무창행영 참모장에 이어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2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3월 군사위원회 군정청장에, 9월에 육군 제8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9년 6로군 총지휘에 임명되었으며 리쭝런과 바이충시가 호남 사건을 일으키자 1차 장계전쟁에 투입되어 후난성의 광시군벌을 토벌하였다. 이어 1930년 중원대전에 참가하였다. 1930년 12월, 장시성 수정주임에 임명되어 19로군 총지휘 장광나이와 함께 제1차 초공작전을 지휘하였으나 크게 패하였고 1931년 4월에 지휘한 제2차 초공작전에서도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 1931년 제3차 초공작전에도 참가했으나 1차 양광사변과 만주사변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1931년 12월, 국민당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중국공산당이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고 세력을 늘리자 제4차 초공작전에 투입되어 이번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열하사변의 발발로 역시 결정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1933년 5월 감숙성 정부위원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간쑤성 정부주석 겸 민정청장이 되었다. 1936년 서북초비군 제1로군 총지휘를 겸하게 되었으며 11월에 개최된 국민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재선되었다. 1936년 서안 사건이 발생하였을때 장쉐량과 양후청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석방되었다.
1937년 3월 간쑤성 정부주석에 복직하였다.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관리부장에 임명되었으며 9월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송호전구총사령을 맡아 일본군에 맞섰다. 화중전선이 붕괴된 이후 3전구 중앙작전 총사령 겸 9집단군 총사령을 맡았고 간쑤성과 서북군사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1939년 8전구 사령장관에 임명, 2월에 군사위원회 남악군사회의를 통해 간쑤, 칭하이, 쑤이위안, 닝샤의 4개성 후방을 방어할 것을 지시받았고 그해 겨울의 1939년 동계공세작전에 참가하여 12월, 푸쭤이와 함께 쑤이위안성과 차하얼성에서 몽강군을 공격해 일본군 2개 기병연대를 궤멸시키고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나 일본군의 1개 여단의 반격에 철수하였다. 1940년 11월 간쑤성 주석에서 물러나 1944년 9월, 성스차이를 대신하여 임명된 오충신이 부임하기 전까지 신장성 정부주석 대리직무를 수행하였다. 1945년 5월 국민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재선되었다.
1946년 2월 군사위원회 부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군판회청(會瓣公廳) 주임을 겸하였다. 1947년 4월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5월 국민정부 충칭행영 주임에 임명되었다. 이후 충칭행영이 충칭수정공서로 개편되면서 수정공서 주임을 맡았다. 1949년 1월, 장제스가 하야 직전 국부천대를 위한 방어태세를 꾸리면서 푸저우수정공서 주임 겸 푸젠성 정부주석을 맡았으며 8월에 푸젠성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타이완으로 후퇴했다. 1950년 총통부 전략고문에 임명되었으며 1951년 국책고문을 겸하였다. 1953년 국민당 중앙당사위원회를 맡았다.
1963년 12월 25일, 타이베이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72세. 1964년 1급 상장으로 추서되었다.
3. 참고문헌
- 민국인물대사전, 하북인민출판사.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대명출판사.
- 기세찬,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경인문화사.
- 권성욱, 중일전쟁, 미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