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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9:52:02

대전차총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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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현실적인 경우
2. 탄생 배경3. 실전4. 변형 작전
4.1. 대전차 지뢰4.2. 대전차 지뢰 묶음4.3. 총류탄4.4. 공병용 폭약통4.5. 수류탄4.6. 총검 돌격4.7. 기타 방식
5. 계란으로 강철 치기6. 그 외
6.1. 가상 매체에 등장한 비슷한 예
6.1.1. 인터넷 속 도시전설6.1.2. 그외 다른 매체 인용/유사사례

1. 개요

, Anti-tank Bayonet Exercise, Смертник

일본군의 자칭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 할힌골 전투에서 창안한 대전차전술. 종 효과가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꼬기 위한 풍자 목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전술인 대전차오함마술와 달리 이쪽은 일본 육군의 정식 교리로 채택되어 엄연히 실재했다.

전차를 상대로 총검 돌격하여 전차의 관측창에 총검을 찔러 넣어서 승무원을 살상한다는 개념인데, 물론 이를 실행하려면 전차의 정면에 달려들어야 한다. 즉 일본군은 진짜 전차에게 병사가 칼 한 자루 들고 정면으로 돌격하여 싸우게 하는 것을 전술이라 불렀다.

일본군의 막 나가는 대전차 능력(그 중에서 육탄 공격)에 대한 개별 문서가 딱히 없기 때문에, 이 문서에선 일본군이 전차에 어떠한 육탄공격을 했는지도 기술한다. 사실상 일본군의 대전차 육탄공격에 대한 문서로 봐도 무방하다.

사실 보병이 전차를 반드시[1] 막아야 하는데 적절한 대전차화기가 없을 경우 임시방편으로 지뢰나 폭약 등을 들고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은 다른 국가에서도 자주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이 대전차총검술이 욕을 먹는 것은, 이걸 장병 개개인의 죽음을 각오한 우발적 행동을 임시 방편이 아닌 정식 대전차 전술로 선택했다는 것이고, 그마저도 폭발물이 아닌 총검을 들고 달려드는 경우가 꽤 많았단 점이다.

1.1. 현실적인 경우

육탄돌격을 한다면 폭발물로 전차 자체를 날려 버리거나 궤도, 주포 등 중요 부위를 파괴해 무력화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쉬우며 성공률도 높다. 진짜로 폭발물 없이 전차와 싸워야 한다면 아래와 같은 방법들이 있다.
그 외에도 전차의 외부 관측장비를 파괴해 시야를 차단하는 방법이 있다.[2]

반면 총검으로 관측창을 쑤시는 건 육탄 돌격[3]과 관측창 제압[4]의 단점만 따온 가장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2. 탄생 배경

사실 할힌골 전투 당시까지만 해도 전차의 관측창은 직접 눈으로 보도록 되어 있는 구멍일 뿐인 데다가 방탄 유리 등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5] 전차의 주포와 기관총을 개나리 스텝으로 잘 피하고 무한궤도 깔리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도 있었다. 실제로 대전차 소총이 전차의 관측창을 노리는 것도 이 부분이 전차 내에 상시 뚫려 있는 몇 안 되는 부위인데다, 전차장 등 승무원 중 누군가가 상시 관측을 위해 얼굴을 들이대고 눈을 붙이고있는 곳이기 때문에 '잘하면' 내부의 승무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전차전을 한 상대가 하필이면 소련, 그것도 대숙청뒤 한참 군대 밑바닥이 무너진 상태의 소련군 상대였다는 점이다. 이때 소련도 아직 전차전의 개념이 정립이 되어있지 않은데다, 당시 주요 전차였던 T-26, BT-5 시리즈 전차의 고질적인 약점인 얇은 장갑과 가솔린 엔진이라는 문제점때문에 화염병 공격이 의외로 먹혔다. 장갑을 뚫고 피해를 준 게 아니라, 그냥 밖에서 터진 화염병 불길에 과열된 엔진룸과 가솔린 탱크가 열기에 발화해 차체가 전소해버리는 것. 그때문에 할힌골에서조차 600여대의 전차를 투입해 승리하고도 저 화염병때문에 300여대의 전차가 전소했다. 그런 관동군은 정신승리의 원조답게 전차는 전차로 잡는게 아니라 화염병으로 잡는다는 교리를 진짜로 믿어버렸다. 할힌골에서 졌음에도. 그러니 그런 문제점을 일찌감치 알던 미국의 전차,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한 후대의 소련 전차를 상대로 그때의 승리만 기억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은 아군 전차나 대전차포에 의한 대응보다 이러한 자살성의 돌격이 소련군 전차를 상대로 더 효과적이더라는 나름의 내부 분석까지 내놓았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영국군을 상대로 할 때도 이를 사용했다. 물론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조건부터 성공률까지 극악의 확률을 적극 밀어붙이는 이 말도 안되는 분석결과를 보고 자국 군대의 아찔한 기적의 논리에 탄식하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상적인 지휘관이 드물었다! 일본군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증명하는 부분이다.

3. 실전

(전략)... 보병들은 이 전차 부대들이 지나가야 할 지역을 거쳐서 진격했지만 일본군을 정글에서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전차들이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의 오른쪽 측면의 카트몬(Catmon) 산에는 우회하고 넘어간 일본군의 대규모 거점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차를 보호할 보병이 전혀 배속되지 않았다.

(중략)

...일본군 장교는 뭔가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 자신만만하여 마지막 전차로 달려들었고 차체의 기관총 군도로 힘껏 내리쳐 반쪽을 내려고 했다.[6] 그 장교는 곧바로 다른 전차의 기관총에 벌집이 되었다. 짧지만 요란한 교전이 끝나자 일본군은 후퇴했지만 계속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경전차 소대를 소화기로 공격했다.

(중략)

...마침내 C중대에서 다른 중형전차 소대가 도착했다. 일본군은 격퇴되었고 부대 전체가 중대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가 꼬박 지나갔다. 조금도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전차 한 대[7]를 상실했다. 전차들은 383보병연대에 도착하지 못했다.

Committee 16, Officers Advanced Course The Armored School, Armor in Leyte >: Sixth Army Operations, 17 Oct-26 Dec 44, (1949). pp.94~97

영국군 미군의 전차는 이미 장갑도 강화된 데다가 관측장비는 프리즘을 이용한 잠망경식으로 바뀌었고 관측창에 방탄 유리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방탄유리는 인간의 완력으로 내지르는 총검 찌르기 정도에는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그것도 미군/영국군보다 체격적으로 왜소하며 더욱이 보급난과 막장 병영 운영으로 거의 매일 굶고 지내며 부조리한 내부 분위기 때문에 정신도 피폐하던 일본 군인의 완력이 영향을 줄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초월적인 집탄율로 총탄을 명중시킨 곳에 또 때려 구멍을 어떻게든 만들 순 있겠지만, 금방 보강될 테니 차라리 대전차포를 쓰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당장 저 위의 상황도 대전차포나 그에 준한 수단만 사용했으면 전멸할 수도 있을 정도로 취약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구 일본군의 어이없는 전술 중 상당수가 대전차 상황에서 나왔다는 점은 20세기 초 당시에 있었던 신기술의 급작스런 개발과, 그에 따라갈 자원도 군비도 없이 신속히 적응해야만 했던 일본군의 좌절감+사령부의 인명경시가 드러나는 일면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은 메이지 유신 선포 이후에도 대내외적으로 전쟁을 거쳤으며, 이 덕분에 1차 대전까지는 베테랑 병사들이 많아 개개인의 전투력이 매우 높았고 대보병 전술에 있어서는 상당한 발전을 거친 이후였다. 그러나 기관총과 전차, 항공기라는 신무기가 전장에 도입된 이상 이제는 대보병 전술만으로는 육상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 자체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대전차장비의 보강, 지원도 없이 천황폐하가 하사한 장비는 단 하나도 손실해서는 안 된다[8]면서 좌우지간 막으라고 위에서는 쪼아대니 가뜩이나 부조리한 분위기 속에 이런 상황 변화에 갑자기 적응하려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사람이 떼로 달려들어서 막는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이런 참사가 연이어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일본도 전차 국산화를 위해 치하 중전차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서방 열강이 다루는 전차와 비교하면 오히려 경전차급 스펙이이었으며 화력과 기동력도 딸렸다. 대전차포도 일본이 자국 기준 중전차 스펙이라고 오해한 스튜어트 경전차를 무력화할 수 있는 선에 그쳐버렸다. 이는 일본군이 진주만 이전까지 상대한 미군, 영국군의 전력이 2선급 전력이어서 그 상대로 승전을 거두며 자만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근거없는 자신감을 갖고 전차에 칼질을 한 건 어이가 없지만 서방의 2선급 전력을 상대로 승전하면서 상대전력을 오판한 것도 있고 만약 오판을 안 했어도 급격한 공업화로 열강에 비해 기술력이 딸려 만들지도 못 하거나 만들더라도 양산이 힘들거나 조악했다. 할힌골 전투때의 폐급 소련군한테도 털릴 정도로 어차피 다른 대전차 병기도 제대로 없는 일본이였다. 보통 미국이나 영국이였다면 성능업을 기준으로 대안이라도 모색했는데 일본은 당시 정신력과 필사의 각오로 이길수 있다는 광신도급 사상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9]

4. 변형 작전

일본의 자기희생, 1945: '전차 한 대에 10명'
Japanese Self-Sacrifice, 1945: 'Ten Men For One Tank'
파일:10 Man for 1 Tank.jpg
각각 1번과 2번은 99식 파갑폭뢰, 3번은 총류탄, 4번은 공병용 폭약통, 5번은 해치를 통한 수류탄 투척, 6번은 총검 돌격이다.
그림 속 전차는 미군의 75mm 장착형 셔먼.

물론 일본군은 이렇게 칼질만 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위 그림과 같은 다양한 대전차 자폭공격술을 구사했다.

일러스트도 '일본의 자기희생: 전차 한 대에 열 명'이라며 까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의 그 대전차 방식이 워낙 허접하고 효율이 낮은지라, 현실에선 전차 하나 잡는 데 열 명이 희생된 것도 진짜 적게 죽은 것이라 할 만한 일도 비일비재했다. 당장 위의 그림은 보병이 기갑을 잡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다. 미군 보병 동행없이 전차 혼자 돌아다니는 건 그냥 전차병들 전원이 자살하려는 것과 같다. 실전에서는 당연히 기계화보병이나 전차에 수반하는 보병이 있었을 것이고, 저렇게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도 않았다. 실제 전투에서는 미군은 전차 하나당 보병이 최소 열 명은 붙어 다닌다. 게다가 삽화에 그려진 부사수용 차체 기관총 말고도 주포 옆에 동축기관총이 존재한다. 전차가 360도 제자리회전을 하면서 두 기관총을 난사하기만 해도 전차에 가까이 붙은 일본군들은 벌집이 될 것이다. 기관총을 피하기 위해 무리해서 전차에 올라타려고 하다가는 무한궤도에 깔려 몇십 톤이 넘는 전차 무게에 압사당할 수도 있고 올라타더라도 포탑이나 포신[10]에 부딪혀 차체에서 떨어지고 궤도에 밟혀 육편덩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장포신인 76mm를 장착한 장포신형 셔먼이나 105mm 점보셔먼의 경우 더더욱.
퓨리(영화)에서 알보병으로 전차를 상대하는게 어떤 의미인지 아주 잘 표현했다. 실제로 유럽 동부전선의 라세이냐이 전투에선 KV-2 단 한 대가 독일군 1개 사단을 막은 사례가 있다. 독일군은 전차까지 포함된 사단인데도. 위 그림처럼 상황에서도 10명으로 셔먼 전차 한 대를 잡을 수 있다는 건 적게 죽은 게 맞다.

4.1. 대전차 지뢰

상식적으로 대전차 지뢰는 그냥 예상 이동경로에 설치하는 것이지만 1번으로 나오는 방식은 대전차 지뢰의 일종인 99식 파갑폭뢰를 들고 전차에 근접해 붙여 터뜨리는 것이다.

전쟁 초기에 대전차수단이 부족했던 독일군이 원조인 흡착지뢰를 사용했지만 그쪽은 성형작약탄을 사용하므로 후기형의 관통력이 180mm다. 이 정도면 상대가 T28처럼 수백mm 떡장갑을 둘둘 바른 초중전차 수준의 괴물급이 아닌 이상 전차의 어느 부위에 흡착지뢰를 붙이더라도 확실한 효과를 낼 수 있으므로 위력 면에서 비교가 안 되고, 무엇보다 일본과는 자석의 질이 달라 일본군처럼 딱 붙여도 붙질않는 상황은 거의 없었다.[11] 이걸 잠수함을 통해 일본에 전파해줬더니 부족한 기술력으로 이 99식 파갑폭뢰를 만들어 낸 것.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Zimmerit_Tiger_II_2_Bovington.jpg

치메리트(Zimmerit) 코팅은 독일군이 연합군도 이런 전술을 사용할까봐 쓴 장갑이다. 그러나 연합군은 흡착지뢰를 사용하지 않았고[12] 결국 폐지되었다.[13] 연합군이 이런 전술을 쓰지 않은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14] 연합군은 이미 충분한 대전차화기( 바주카, PIAT)와 M10 GMC(후에 90mm를 장착한 M36 잭슨으로 교체), 파이어플라이(17파운더 장착) 등 다양한 전차, 그리고 독일 전역을 폭격하던 공군이 있어서 굳이 보병을 갈아넣어야 하는 작전을 써야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전차 화기가 없으면 노획해 쓰는 정도로 사용되긴 했지만. 결국 저건 그냥 좀 특수한 전차의 증가장갑이 되고 말았다.[15]

4.2. 대전차 지뢰 묶음

2번으로 나오는 방식으로, 위의 대전차 지뢰를 묶어서 집속수류탄처럼 더욱 강력한 폭탄을 만들었다. 하지만 저렇게 지뢰를 여러 개 묶어버리면 너무 무거워져서 근거리에서도 지뢰를 던질 수가 없기에 직접 다가가서 붙여야 했다. 당연히 무거워 속도가 느려져 난이도가 올라가는 데다가 덩치마저 크니 전차병들 눈에도 잘 띄어 가장 먼저 사살된다.

4.3. 총류탄

3번으로 나오는 방식으로, 총류탄을 발사한다. 성형작약탄을 쓴 대전차총류탄이라는 물건이 실제로 존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대전차 총류탄 관통력은 M9 대전차 수류탄은 40mm, M9A1 대전차 수류탄의 경우 60mm였고 출처[16], 독일군의 SS-Gewehrpanzergranate 61의 경우 120mm였다. 그에 비해 일본군의 2식 대전차 수류탄의 관통력은 30mm형의 경우 30mm, 40mm형의 경우 50mm 출처밖에 되지 않았기에 40mm형으로 측면이나 후면에 수직으로 발사하지 않는 이상 관통은 어려웠다.

반대로 일본군의 치하는 미군의 총류탄에 포방패를 제외한 모든 부위에 관통되었다. #

4.4. 공병용 폭약통

4번으로 나오는 방식(폭약통)인데 방법은 공병용 폭약통을 주포에 집어넣든지 뭘 하든지 해서 넣고 그 동안 전선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이후 스위치를 눌러 기폭하는 것인데 전차가 공병이 폭약통을 다 설치하고 발화할 때까지 가만히 있을리 없다.

4.5. 수류탄

5번으로 나오는 방식. 전차에 올라가서 해치에 수류탄이나 폭발물을 넣는다. 그나마 이 방법은 가장 정상이다. 연합군이건 추축군이건 대전차 무기가 없고, 적 전차를 빨리 막아야 할 상황이면 다들 한 번 정도는 시도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디파이언스, 퓨리에서도 이런 전술이 나온다.[17] 대한민국 국군 한국 전쟁 초창기에 전차 수나 대전차 전력 부족으로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다른 국가의 교리는 대전차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교전을 회피할 수도 없을 때 "최후의 시도" 정도로만 쓰는데 반해 일본군은 이게 육군정식교리라는 것에 큰 차이점이 있다

파일:external/mcvthf.org/Nails.jpg

유럽 전선의 연합군 전차병들은 대전차포나 판처파우스트 같은 상식적인 대전차전이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존 전차에 굳이 속도나 시야를 방해하여 전차의 생존률을 높이는 임시 개조를 할 필요가 적었지만[18][19], 태평양 전선의 연합군 전차병들은 정신력을 믿고 돌격하는 일본군 보병들이 이런 비상식적인 대전차공격을 하려고 저글링처럼 달려들어 피해를 입자 이런 일본군 보병을 막기 위해서 기존 해치 위에 철망 등으로 조잡한 가짜 해치를 추가하거나, 위 사진처럼 해치와 그 주변에 못과 철사 등을 가득 용접해서 해치를 쉽게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쯤이면 미군의 거북전차라 해도 과언이 아닌게, 과거 조선의 거북선 상판의 못들이나 위 사진의 전차에 용접된 못들이나 적이 위에 달라붙어 내부를 파괴하려는 걸 막기 위한 조치라는 점이 같다. 심지어 그 적군이 일본군인 것까지도 똑같다. 이쯤 되면 일본군은 못에 질릴 만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오늘날까지의 전차들은 안에서 해치를 닫고 들어가면 밖에서는 못 연다. 밖에서 해치를 닫는 걸쇠와 안에서 해치닫고 잠그는 걸쇠가 따로 있으며, 조종수 해치는 아예 밖에서는 여닫지 못한다. 설사 이런 장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해치 자체가 쇳덩어리로 되어 있어 쉽게 열 수 있는 물건은 절대 아니다. 즉 전차 혼자 돌아다녀도 내부 승무원이 해치를 연 상태가 아닌 이상[20] 불가능하다.

4.6. 총검 돌격

6번으로 나오는 방식. 전차 관측창에 총검을 찔러서 적 승무원을 공격한다. 앞서 언급한 그야말로 전차를 상대로 하는 총검술이다. 하지만 전간기 전차면 모르겠으나 전쟁 중후반기의 전차들은 대부분 잠망경 방식 관측창을 채택한데다 관측창에 쓰이는 유리가 방탄유리여서 총검 정도로는 뚫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기 때문에 사실상 목숨을 내다버리는 행동이었다.[21]

4.7. 기타 방식

그 밖에 전차의 총안구[22]를 노리고 시안화칼륨이 가득 담긴 1식 가스 수류탄[23]을 던졌다거나, 막대기 끝에다 성형작약탄을 달아놓은 ' 자돌폭뢰'라는 물건을 만들었다든가, 포신만이라도 부수려고 갈고리 폭탄을 제조하거나, 심지어는 곡괭이를 들고 잠망경이나 기관총 등을 부수고 해치를 깨서 승무원을 사살하려고 했다는 정신나간 사태에 대한 증언도 있다.

그리고 위의 그림을 보면 누워 있는 병사가 보이는데, 저걸 더 발전시켜서 폭탄을 안고 땅속에 파묻혀서 대기하고 있다가 전차가 그 위를 지나가면 자폭하는 복룡이란 것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실제 역사와 차이가 있지만 영화 마이웨이에서 일본 육군 보병들이 전차를 상대로 자폭하는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24][25]

심지어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간혹 목격되었던 전차 박치기를 넘어선 전술도 구사했는데, 일본 육군 제 14 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토모유키(山下奉文)의 지시하에 계획된 전차 특공(戦車特攻)이라 불리던 전술을 실행한 바 있었다. #

그 당시 M4 셔먼의 등장으로 움직이는 통조림으로 전락한 95식 경전차와 97식 중전차 이렇게 2대를 특공전차로 개조했는데, 전차 전면에 약 1미터 정도 돌출된 장대에 10킬로그램 폭약을 2개 장착한 다음, 여기 연결된 수류탄 신관으로 충돌 즉시 폭약을 기폭시켜 자폭함과 동시에 함께 전차 뒤에 탑승한 자폭 병사가 뒤따라 자폭한다는 계산하에 1945년 4월 16일 작전에 투입하여 2대의 셔먼을 격파한 일이 있었다. 물론 동원된 특공대원들은 전사했다.

5. 계란으로 강철 치기

위에 열거한 방식은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효과적인 대전차 공격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실전에 들어가면 이미 작전부터 정신나갔는데 손에 쥐어주는 장비가 고급품일 리도 없다. 병사만 죽어나가고 전차는 격파하기는커녕 손도 못 대는 경우가 부지기수.[26]

병사 손에 쥐어주는 장비의 열악함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나치 독일에서는 그래도 동맹국이니 판처파우스트 판처슈렉과 같은 보병 무기를 일본측이 자체 생산해서 사용 할 수 있도록 연합국의 살벌한 경계망을 뚫고 잠수함으로 참고로 할 완제품과 설계도까지 보내주었는데, 기술력이 독일보다 훨씬 부족했던 일본이 복제품이라고 하기도 곤란한 쓰레기만 만든 것이다.

일례로 독일군의 흡착지뢰를 모방해서 자돌폭뢰를 만든 적이 있는데, 자살공격용이라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독일제는 제대로 된 지연신관을 갖추고 180mm가 넘는 장갑 관통력을 보이는 데 반해, 일본제 양산품은 고작 60mm의 장갑 관통력을 보이며 신관도 지연신관을 못 만들어서 발화 즉시 폭발하는 충격신관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실상 쓰레기에 가까웠다. 이러니 독일에서 무기까지 대량으로 직수입하기 전에는 무기를 제대로 된 것으로 교체할 수 없던 것이었다.

게다가 위의 사진에 나오는 경우는 전차가 보병의 엄호 없이 혼자서 뚝 떨어져 있는, 전차를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최상의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보통 전차 옆에 호위용 보병이 반드시 있거나 동료 전차가 근처에 있기 때문에 저런 짓거리를 하다가는 접근도 하기 전에 맞아죽는다.[27] 더구나 미군은 이미 2차 세계 대전에서 보병과의 합동전술을 개발한 데다 전장에서 보병과 전차병은 목숨을 걸고 지켜주는 신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28] 저런 식의 자살공격이 더욱 먹히지 않았다.

일례로 기습을 당해 보병이 소수만 남고 그나마도 부상당한 상태에서 전차의 사각을 끝까지 지켰다든지, 반대로 보병들이 위험에 처하자 전차가 위험을 무릅쓰고 돌격해 구했다는 미군 기록들이 다수 존재한다. 반면 일본은 미군처럼 유기적인 형태인 보병-전차 간 합동작전 개념이 없었고 종잇장 수준의 치하는 미군 셔먼[29]이나 대전차화기에 곧바로 격파당했기 때문에 합동전투 자체가 힘들었다. 그 결과 일본군 지휘관은 자포자기 수준의 대전차총검술을 더욱 강요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군의 희생만 커졌다. 더구나 셔먼의 장갑은 일본군의 어지간한 무기로는 뚫지 못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는 셔먼을 방패삼고 작전을 수행하며, 대전차총검술을 구사하는 한심한 일본군의 시체를 쌓아올렸다.

이에 더해서 순수 보병 전술상으로도 이는 인적 자원의 낭비였다. 카미카제와 동일한 문제로 당장 위와 같은 육탄 돌격을 성공하려면 당연히 전차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고 각종 은엄폐를 통해 전차에 최대한 접근해서 무거운 폭발물을 성공적으로 장착시킬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는 당연히 매우 유능한 보병을 필요로 한다. 담력, 감투 정신, 은엄폐 능력, 체력을 모조리 갖춘 용사가 말이다. 이런 인적 자원을 일반 보병전에 돌리면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군은 소수의 이런 인재들을 겨우 대전차총검술에 낭비시켰고, 결과는 전체 보병 전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30]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접근에 성공했더라도 열악한 장비 탓에 타격을 주지도 못했다.

인적자원을 순수하게 자원으로 보더라도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전투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연령을 18세로 볼 경우 그 개개인의 육성비용은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무엇보다 굉장히 범용성 높은 자원인지라 무가치하게 소비시킬 수 없다. 당장 현대 미국이 군인 한 명의 희생을 막기위해 고가의 장비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병력의 육성 비용이 더 많이 깨지기 때문. 아무리 인명경시풍조가 심각했더라도 인적자원만큼 보충이 제한적인 자원을 마구 낭비한 것이 일본군의 패인으로 이어졌다.

애초에 전차의 교전거리 자체가 아무리 밀림이라고 해도 꽤 길다. 근접을 하려면 잘 매복해 있다가 근처에서 한꺼번에 튀어나와야 붙을 수 있을까 말 까한데 그런 짓을 했다간 주변 보병들에게 벌집이 될 뿐이다.

6. 그 외

한국 전쟁 초기 북한의 기습 침공을 당한 국군이 사용한 전례도 있다.( #) 물론 이 경우도 정식 교리는 절대 아니었고, 개전 초기 전차는커녕 장갑차도, 대전차화기도 제대로 구비할 수 없었던 국군이 북한군의 진격을 어떻게든 막아보고자 아득바득 달려든 결과물로, 이 역시 상기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최후 수단의 사례 중 하나이다. 즉, 어디까지나 타 국가들의 상황들처럼 육탄 돌격 이외의 효과적인 대전차수단이 없었던 상황이라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임기응변이었다는 것. 이러한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와 기습공격의 충격력 때문에 제6보병사단과 같은 몇몇 예외를 불구하고 전방사단은 패배하여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의정부 방면을 방어한 7사단, 2사단, 5사단, 3사단, 수도사단은 이와같은 육탄돌격을 시도하였지만 적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1사단, 6사단, 8사단은 북한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전 초기 춘천-홍천 전투에서는 육탄 11용사가 적 자주포와 전차 10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기도 했다. 이때는 아군의 대전차포의 적절한 엄호가 있었고 일본군처럼 무작정 돌격하지 않았다. 좁은 지형을 이용해 맨 앞 전차를 무력화시키고 따라오던 전차들이 멈춰설 수밖에 없게 만든 후, 적 전차장이 상황 파악을 위해 해치를 여는 순간 달려들어 전차를 제압하기를 반복한 결과이다. 즉, 무작정 달려든 것이 아닌,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 아래 진행된 전술이다. 또한 위의 육탄 11용사는 모두 생존했다. 1949년 적 토치카에 육탄공격을 가한 육탄10용사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반면 기록에 의하면 개성 송악산 고지를 재탈환한 육탄10용사 전원은 전사하였다.

미군이 제공해서 한국군이 개전 전부터 보유하고 있던 2.36인치 M9 바주카와 57mm 대전차포로는 T-34-85 전차의 장갑을 뚫기가 어려웠다. 57mm 대전차포는 철갑탄 사용시 320m부터 관통이 되기는 하는데 실전에서 전차가 정직하게 전면을 들이대지는 않을테고 T-34는 경사장갑과 원형장갑이 발려 있어 피탄 부위에 따라 관통 여부가 달라진 탓에 관통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게다가 철갑탄이 충분히 보급되지도 않았고 바주카도 턱없이 모자라 사단장이 바주카를 들고 전차를 격파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M3 105mm 견인곡사포로 맞히면 유효타가 들어가긴 하지만 수량이 부족하여 사단 화력지원에도 힘에 부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대전차 지뢰나 폭약, 수류탄을 들고 돌격, 그 후에 터뜨리는 전술을 마지막 수단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저게 정식 교리였다. 할힌골 전투 이후 대전차 능력에 대한 보강이 요구되었지만 일본군은 그때 그 수준에서 별로 발전하지 않았고,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태평양 전쟁에서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동맹 추축군 이탈리아에게도 비슷한 게 있었던 거 같다. #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폴고레 공수사단처럼 훌륭한 사례가 있었던걸 봐서는 육탄공격을 해도 일본군처럼 무모하게 전차 정면으로 달려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육탄공격하고 별개로 애초에 이탈리아의 대전차 병기가 일본보다 수가 더 많고 효과적이었다. 위의 폴고레 공수사단도 대전차포의 엄호를 받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소련군은 개를 이용한 대전차 전술이 있었다. 대전차 견 문서 참조. 소련이 대전차 전술 방면에서는 인간의 목숨을 이용한 방어전술을 구사했던 일본군보다는 훨씬 낫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은 흡착지뢰를 사용했고 영국과 미국은 끈끈이 폭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 둘은 쓰기가 힘들긴 해도 사용하면 효과는 있었다.

전차를 상대로 대전차총검술을 사용하는 와중에, 연합군 전함과 상륙함을 상대로는 이른바 후쿠류(伏龍)라고 불리는 대함창봉술을 시전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오해가 없도록 첨언하자면 절대로 적 함선에 올라타서 적 선원들을 상대로 창봉술을 한다는 게 아니다. 징집병들을 잠수부로 훈련시켜서 막대기에다 기뢰를 꽂은 물건을 준 뒤 들고 찌르게 한다는 얘기다. 일본 측의 공식 기록으로는 결국 실전 투입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미군 측의 기록으로는 상륙함 일부가 이런 부류의 잠수부들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있다.

6.1. 가상 매체에 등장한 비슷한 예

6.1.1. 인터넷 속 도시전설

아래 이야기는 한국 웹에서 주로 검색이 되는 상황이며 #, # 해당 관련서지정보는 나오지않는 # #상황이니 실제 일어났던 이야기인양 낚이지말자.
1962년 전차장 출신 전차병 조나단 웰스(Jonathan Welles) 병장이 출간한 회고록 《Realms field》에서는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쪽바리[31]가 총검을 들고 우와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그리고 그 예리한 총검 끝이 내 시야에 와서 박힌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는다. 그 직후 쪽바리의 표정이 보고 싶어서.

쪽바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다. 총검이 관측창의 방탄유리를 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쪽바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차 궤도에 깔렸기 때문이다.

흙먼지보다 고약한 것은 쪽바리의 으깨진 시체가 무한궤도 구동축에 들러붙는 것이다. 물도 부족한데 마른 솔질로는 떨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귀찮아도 떼어내야 한다. 안 하면 1마일 안에 있는 파리 떼는 다 몰려든다. 몇몇 미군 병사들은 레어 햄버거[32]가 들러붙었다며 욕을 했다.

6.1.2. 그외 다른 매체 인용/유사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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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출처
이 영화에서도 일본군은 이 무모한 짓을 정식 교리로 채택하고 사용한다. 화염병, 대전차 지뢰, 대전차 자폭트럭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정작 대전차총검술은 등장하지 않았다.[33] 작중 대전차포들도 등장하나, 이동 중이었는데다 은/엄폐할 곳도 없는 평지였는지라 등장하자마자 BT 전차들에 의해 개박살 나 버린다. 그 이후 전개는 위에 쓰여진 대로다.
단, 영화에서 BT전차들이 이 반자이 돌격 아니 육탄공격에 다수의 피해를 입는 건 실제라기보단 영화적 연출에 가깝다.
실제라면 아무리 BT 전차 주변에 지원할 보병이 없었다 해도 은엄폐할 공간이 하나도 없는 평지에 보병들이 달려가봤자 적 전차를 부수지도 못하고 이동하는 표적만 될게 뻔한 일이다. 그 원작 내용에 해당하는 소설 D-Day에서는 대전차 총검술만이 묘사되고 BT-5의 철망을 총검으로 찢어 엔진부에 화염병을 던지는 식으로 묘사된다. 이게 그나마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보병부대가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나마도 전차를 싸웠던 부대의 4할 정도만이 살아남았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후, 전차부대가 트럭에 실린 보병들과 함께 공격을 개시하면서 총검과 화염병을 이용하는 대전차전은 더이상 무용지물이 되고 대식과 요이치는 포로로 잡히게 된다.
위의 2번에서 등장했던 예처럼 멜타 폭탄을 소지하여 근거리에서 투척할 수 있는 병과도 있다.(택티컬 스쿼드, 세라핌 스쿼드 등) 이런 병과를 적의 뒤에 배치해서 근접하여 차량을 터뜨리는 기동은 패스트 멜타라 부르는 기본 전술 중 하나이다. 물론 이런 무기는 확실하게 차량을 손상시키거나 터뜨릴 수 있고, 근거리에서 폭탄을 터뜨린다고 해서 사용자가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 그래도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꽤나 정신나간 일이라는 것을 한 유저 캠페인 전투에서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다.


[1] 여기서 '반드시'가 중요하다. 나라에 제대로 된 대전차무기가 없어서 계속 후퇴하다가는 낙동강까지 밀리게 생겼다거나, 그게 아니라도 뭔가 지켜야 할 중요한 것이 있어 보병이 어떤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전차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즉 당장 전차에게 입는 피해보다 전차의 접근을 막지 못할 경우 더 큰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보병은 적절한 대전차 수단을 확보할 때까지 후퇴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벌어야 하는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일본군의 경우 정반대로 보병이 앞서고 전차가 뒤에 있었다. 일본군에게 있어서 전차는 히든카드였기 때문. [2] 완파/격파까지는 아니더라도 (특히 야간에는) 전투를 꽤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있다. 만약 외부 관측을 위해 승무원이 해치를 열었다면 승무원 사살까지 노려볼 수 있다. [3] 전차에 달라 붙어야 하므로 매우 위험하다. [4] 전차 자체를 무력화하기 어렵고, 관측창에 명중시킨다 해도 일격에 승무원을 사살한다는 보장이 없어 확실히 승무원이 무력화될 때까지 반복 공격을 해야 한다. [5] 하지만 BT전차도 BT-7으로 넘어가면서, 모두 방탄유리가 생겼다. [6] 아마도 총열을 베려고 했겠지만 기관총 총열은 기본적으로 강철이다. 공랭식 기관총의 경우에는 지속 사격에 유리하기 위해서 총열을 무지 두껍게 만든다. 총열을 얇게 만들면 쉽게 열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공랭식이 됐든 수랭식이 됐든 어떤 기관총이라도 구조상 튼튼한 내구도는 당연히 요구되는 사항이라 알량한 일본도, 사람의 근력 따위로 벨 수 있을 리도 없다. [7] 이 전차는 중략된 기록 중 일본군의 자돌폭뢰에 맞아서 무력화됐다. [8] 심지어 일본군 상층부는 현장에 뛰는 군인들도 치하 중전차의 장갑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영국군, 미군들은 전차 정면, 측면에 모래주머니를 달아 방호력과 생존성을 높인 것을 보고 자신들도 이를 반영했더니 "감히 천황이 하사하신 장비를 멋대로 훼손하다니"라고 외치며 다시 원상복귀시켰다. [9] 다만 이오지마 오키나와에서 보병의 보호를 받지 않고 셔먼만 투입했다가 매복한 대전차포나 47mm 포에 근거리에서 측후면에 피격 당해 손실된 경우가 발생했다. 아무리 전차가 우월해도 보병의 지원이 없으면 전차는 시가전, 정글전과 같이 근접전, 매복에 당했을 때 위험에 빠지기가 쉽다. 나치 독일도 보병이 없으면 판터로 미군을 추적해 잡으러 가는 걸 포기하기도 했다. [10] 십수 톤에 달히는 쇳덩어리를 전기모터로 구동하다보니 생각보다 회전하는 포탑의 운동에너지는 매우 높다. 보기엔 그냥 느린 속도로 슬슬 회전하는 것 같지만 포신에 맞게 되면 맞은 부분은 뼈가 부러지고 전차에서 추락해 바닥에 나동그라지면서 추가적으로 크게 다치게 된다. 실제로 정비중 회전하는 포신에 맞아 사망하거나 크게 다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11] 그런데 웃긴 건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영구자석이었던 알니코 자석을 처음 개발하고 생산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기술을 먼저 개발했음에도 덜떨어진 공업능력 때문에 제대로 활용을 못한 셈. 비슷하게 야기-우다 안테나만 봐도... [12] 하지만 태평양의 미군 기갑들은 파갑폭뢰를 사용하는 일본군의 육탄 돌격을 방어하는 상황을 자주 겪었다. 하지만 이들은 치메리트 코팅보다 훨씬 간단하게 야전에서 나무 판자를 전차 위에 덧대는 것으로 해결했다. 효과도 더 좋았고, 전차의 생산 공정에 악영향을 미치는 일도 없었다. [13] 무엇보다도 흡착지뢰에 쓰이는 자석을 예방하려 붙인 저 코팅은 자석이 붙기도 했다. [14] 미군의 경우는 구리스로 절인 낡은 양말에 폭약을 넣어 전차에 붙이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도 이와 같은 장면이 나온다. 물론 급할 때나 쓰는 방법이고 보통은 바주카를 쓴다. [15] 이것은 클라우제비츠의 빠돌이였던 히틀러가 공격무기가 있으면 반드시 대응되는 방어무기를 갖춰야 한다는 전략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16] 해당 출처에, 동일 수류탄의 관통력이 101mm라는 서술도 있음. [17]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게임 콜 오브 듀티에서 적 전차를 파괴할 때 다수의 아군들이 전차 위로 올라가서 해치 따고 수류탄을 밀어넣는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으며 고스트에선 주인공이 직접 장갑차 위로 올라가서 열려있는 해치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파괴하는 장면이 나온다. [18] 조지 S. 패튼도 기동성 저하를 이유로 자신의 3군단 소속 전차에 모래주머니 같은 추가장갑을 두르는 것을 금지했다. [19] 대신 수직장갑인데다가 얇아서 취약한 측면장갑을 보호하기 위해 옆면에 매트리스, 무한궤도 여분, 통나무 등을 붙이는게 성행했다. [20] 시야가 너무 안 좋아서 승무원이 직접 해치 열고 바깥을 관측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21] 방탄 잠망경을 통해 총검으로 돌격해오는 일본군들을 보고 그 정신력에 어쩌면 정말로 무서웠을지도. 물론 대부분은 비명을 지르며 전차에 치여 죽거나 차체 기관총에 맞아 벌집이 되는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22] 총안구는 포탑 등에 구멍을 뚫어서 전차병의 개인화기로 전차에 달라붙은 보병을 사격하기 위한 구멍이다. 물론 평소에는 내부에서 막을 수 있다. [23] 물론 말이 수류탄이지, 실은 청산가리가 들어있는 유리병에 가까웠다. [24] 복룡 자체는 대함 전술이나, 대전차 전술로도 있었다고 한다. [25] 일본 제국의 한심한 공업 능력은 신관의 완벽한 작동에 의한 폭파조차 보장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독일군이 전해 준 흡착지뢰 설계도를 가지고 자기들이 만들어보니 잘 붙지도 않고 터지지도 않는 수준의 성능을 보였다. 사실 이렇게 지뢰를 움직이게 한다는 방법 자체는 프랑스와 독일의 골리아테 등은 물론, 일본에서도 98식 공병전차 야이고를 통해 이미 고안된 방법이다. 하지만 야이고의 실전 기록은 복룡과 달리 남은 자료가 부족하다. [26] 당연하지만 상대가 전차 웨이브를 하는 상황에서 이를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군, 맞전차, 혹은 대전차포 등이다. [27] 상기한 미군 일지에서 일본군 장교가 옆에 있던 다른 전차의 기관총 세례에 끔살당했단 이야기가 이래서 있는 것이다. [28] 말이 신뢰관계지 애초에 전쟁터에선 이걸 안 지키면 죽는다. [29] 굳이 셔먼으로 갈 필요도 없이 M3 스튜어트로도 충분히 치하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M3 스튜어트는 경전차이고, 치하는 중형전차임을 생각하면 치하의 굴욕. [30] 이는 똑같은 뻘짓인 카미카제와 유사한 단점이다. 당장 카미카제를 성공시키려면 미군의 대공포화를 뚫고 절묘하게 함선의 약점을 파고 들어야 한다. 당연히 이는 미친매우 고난도의 조종술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런 고난도의 조종술을 가진 조종사라면 그냥 일반적인 폭격을 가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그리고 이런 실력 있는 파일럿을 후방으로 돌려 교관을 시키며 후진 양성을 시키는 게 전력향상에 도움이 된다. 연합군은 이런 방식을 통해 파일럿들의 노하우를 전수시키며 병력 전체의 질적 향상에 힘을 쏟았다. [31] Japs, 일본인을 지칭하는 비하어. [32] 깔아뭉개 으깨진 일본군 장병의 육편이 전차에 들러붙은 모양을 비유한 표현. [33] 기관총을 쏘는 소련군 전차병을 일본도로 찌르고 베는 장면은 나온다. [34] 여담으로 이 치하는 SU-76M을 개조한 물건이라고 한다. [35] 쏘는 무기는 커녕 대전차 지뢰, 폭뢰도 없다. 이리 된건 전차가 귀족/기사의 상징이나 다름없다보니, 귀족들이 평민 위주인 보병이 전차를 공격가능한 무기를 소유하는걸 껴려해서이며, 전쟁에서 구닥다리 기사도 정신이 아직도 통용되는 세계관이라 지뢰같은 비열한 방법론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36] 애초에 여긴 기관총은 최신기술에 실험적인 무기고, 관절부라는 취약점을 지닌 보행병기를 대상으로 하니 무척 효과적일수 밖에 없다. [37] 애초에 이걸 사용하는 옼스들은 비실거리는 일본군과는 다르게 맨손으로 사람정도는 쉽게 찢어죽이고 팔다리가 잘려도 돌팔이 의사 옼스가 다시 붙이면 멀쩡해지는 괴물들이다. [38] 원작 버전. TV판에선 캐터필러 절단 후 해치를 열고 상반신만 내민 전차장을 죽인 다음 수류탄을 넣었다. [39] 이런 FPS 게임들은 보통 보병의 움직임이 현실보다 훨씬 빠르다. 현실적인 수준을 보려면 ARMA를 해보자. [40] 애시당초 설정 상 광전사는 베테랑일 경우 홀로 울트라리스크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니 홀로 선 채 사각을 노출한 탱크를 잡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