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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18:55:50

하나야 타다시

파일:Hanaya_Tadashi_1.jpg

花谷 正
1894.01.05~1957.08.28

1. 개요2. 태평양 전쟁 이전의 경력3. 버마 전선에서의 행적
3.1. 부하들에게 저지른 만행
4. 패전 이후5. 어록6. 평가7.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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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 장성.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다치바나 요시오 같이 순전히 광기에서 비롯된 민간인 대량학살을 저지른 자들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 '전형적인 일본군'이다.

2. 태평양 전쟁 이전의 경력

오카야마 현 히로도촌[1]에서 태어난 하나야는 오사카 육군지방유년학교,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4년 5월에 육사 26기로 졸업한 후 12월에 보병 소위로 임관해 제54연대에 배치되었다. 1922년 육군대학교 34기를 졸업한 엘리트였던 하나야는 참모본부를 거쳐 지나반원, 관동군 참모로 일한 후 1929년 8월에 소좌로 승진해 보병 제37연대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1931년, 하나야 타다시가 봉천의 관동군 사령부 특무기관에서 근무 중일 때 관동군 고급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하라 간지 일당이 작당 모의하여 만주사변의 시발점이 된 철도 폭파 조작극 류탸오후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때 하나야도 일당에 끼어들어 이시하라와 함께 작전 계획을 짰었다.

사건 당일에는 관동군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만주로 파견된 다테카와 작전부장을 이타가키와 함께 접대하면서 요정에서 술을 왕창 퍼먹여 쓰러지게 만드는 역을 맡았다. 그 후에는 만주사변 사태를 수습하러 온 일본 총영사 앞에서 하나야는 군도에 손을 짚고 "아무것도 베지 않고 이 칼에서 손을 떼는 일은 없을 거요." 하고 야쿠자나 진배없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

만주사변이 성공하고 이타가키나 이시하라 같은 주모자들이 열렬한 환호를 받자 일당이었던 하나야도 승승장구, 참모본부를 거쳐 보병 제35연대 제 1대대장이 되었다.

1933년에 하나야는 군부를 비판한 호쿠리쿠 타임즈 사에 독단으로 대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기자와 사원들을 폭행했다. 대낮에 언론사를 집단으로 습격해 언론인을 폭행한 사건의 막장성 때문에, 심지어 하나야의 빽이었던 만주사변 일당 라인의 고위 장교들조차도 이번만큼은 도저히 실드를 쳐줄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좌천당하여 1933년 8월에 중국 지난(濟南)의 무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하나야가 받은 '처벌'은 이게 다였다.

1935년 8월에 관동군 참모를 거쳐 제2사단 사령부, 예비 제2사단 참모장을 역임한 후 1937년 8월에 대좌로 승진해 보병 제43연대장으로 중일전쟁에 참전했는데... 연대장 시절 사관학교 동기였던 휘하 대대장이유도 없이 연대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패 수치와 울분을 견디지 못한 대대장이 자살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중일전쟁 중 다시 참모장교로 임명되었을 때는 전선이 교착됐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상급자인 일선 지휘관에게 "너 같은 육군대학교도 나오지 않은 놈은 장개석이 출세시켜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하고 폭언을 퍼붓기까지 했다. 이후 산시 군벌 옌시산과의 협상을 위해 산시에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옌시산은 일본의 태도가 고압적이라는 이유로 협상결렬을 선언했다. 물론 막후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했단 첩보를 입수한 것이 컸지만.

아무리 막장 일본군이라지만 하나야가 이렇게까지 막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가타쿠라 다다시를 비롯한 하나야와 함께 만주사변을 일으켰던 고위 장교들이라는 엄청난 빽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사고를 쳐대는 미친 놈이라도 빽의 후원으로 사단장까지 되었다. 같은 파벌끼리 보신을 위해 무능한 인물도 장성으로 발탁한 일본군의 고질적 병폐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 인간이 무능한 높으신 분이 아닌 무능한 또라이였다는 것.(...)

여하튼 만주국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할힌골 전투 당시 지휘를 맡기도 하다가 1940년에 육군소장으로 진급했다.

하나야는 상술한 내용에 나오듯 인격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부하 장교들을 수시로 구타하고 처벌하거나 자결을 강요하는 등의 악행을 저질러 평판이 매우 나빴다. 또 육군대학 졸업자라는 엘리트 의식 때문에 말버릇이 "육군대학도 나오지 못한 놈이 무슨 소리냐!"일 정도로 거만하여 비육군대학 출신자나 전과해 온 장교들을 특히 집요하게 괴롭혀 위로는 고급 장교들로부터 아래로는 사병들에 이르기까지 정신질환을 앓게 된 자나 자살자가 속출했기에 부하들로부터 대단한 증오를 받았다. [2]

3. 버마 전선에서의 행적

제29보병사단장으로 취임해 태평양 전쟁 당시 제1군 참모로 종군한 하나야는 1943년 6월에 중장으로 승진했다. 10월에 제55사단장으로 취임하여 버마로 건너간 하나야는 1944년 2월, 임팔 작전의 전초전이자 조공이었던 하호 작전의 지휘를 맡았다.

'저돌적인 맹장'이란 평판(…)을 듣던 하나야는 "하호 작전의 목적은 우리 사단이 영국군 제 5, 7사단을 해치우고 적의 반격 의지를 뒤엎을 뿐만 아니라 적의 풍부한 물자를 빼앗아 우기가 닥쳐오는 5월까지 본래의 수비 위치로 되돌아오는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쳐댔다. 하나야의 이 발언 때문에 하호 작전은 도둑 작전이라고도 불린다.

'보급은 적으로부터 취하는 것'이라는, 실로 무타구치스러운 발상을 전제로 세운 작전이었으니 당연히 하호 작전은 시작부터 싹수가 노랗다 못해 시커멨다. 전력이 빈약하기 그지없는 일본군 제55사단은 하나야의 무자비한 닦달에 떠밀려 일단 사흘 만에 영국군 7사단을 포위하는 데는 성공했고, 도쿄의 대본영은 포위 섬멸전을 벌이고 있다고 위세등등하게 발표하며 김칫국을 마셔댔다. 그러나 영국군은 신속하게 인도로부터 3개 사단을 차출하여 제7사단 구원에 나서는 한편 항공기를 총동원하여 7사단에 안정적인 공중보급을 제공했다.

그러자 하나야는 애꿎은 부하들에게 온갖 폭언, 구타, 공격 강요, 할복 강요 등을 자행하며 직경 3 km 원형진지 안에 무려 전차 1백 대와 포 수백 문을 배치한 영국군 7사단의 철벽방어에 닥돌시켜 무수히 개죽음을 당하게 하였다. 공중보급은커녕 화포 전력조차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일본군 55사단이 이런다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호 작전 개시 15일째인 2월 16일, 영국군 26사단이 일본군의 배후로 공격해오자 하나야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무수한 부하들에게 작전실패의 책임을 물어 자결을 강요해서 ' 할복 사단장'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하나야였지만, 당연하게도 자신은 결코 하호 작전의 실패 책임을 지고 할복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공습을 어찌나 두려워했는지 부대가 행군 중 잠시 쉴 때도 자신만을 위한 방공호를 파라고 명령할 정도인 겁쟁이 하나야가 그런 일을 할 리 만무했다.

3.1. 부하들에게 저지른 만행

아래의 일화는 영국군의 폭격으로 인하여 55사단의 탄약 집적소가 파괴된 것에 대해 사단 병기부장 H대좌의 책임을 묻는다며 하나야가 한 달이 넘도록 구타와 폭언으로 괴롭힌 끝에 그를 권총자살에 이르게 한 내용이다.
하나야 사단장은 매일 H대좌(= 대령)를 불러냈다. 그리고 하나하나 탄약 집적소의 피해에 대해 힐문을 계속했다. H대좌가 답변할 때마다 욕하고 주먹질을 퍼부었다. 하나야 사단장은 어떤 답도 받지 않았다. 실수를 찾아내 철저히 추궁하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 몰아넣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럴 때에만 날카롭게 머리가 돌아갔다.

H대좌는 연일 얻어맞고 얼굴이 검푸르게 부어 있었다. 홀로 있을 때는 49세의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어디로 도망칠 수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군대라는 조직이었다.

병기부의 업무 보고를 명받은 병기 담당 근무 대장 후지오카 대위가 하나야 사단장에게 가서 서류를 내밀자 갑자기 호통을 쳤다. "사관학교 출신도 아닌 네놈들이 뭘 알아? 이래서 사관학교를 안 나온 놈은 안 돼. 부장을 불러!" 다시 H대좌가 보고서를 가지고 가자 하나야 사단장은 잠깐 훑어보더니 창 밖에 내던졌다. 몬순(우기)의 폭우가 쏟아지는 중이다. 다시 작성해야 했다. 나중에 참모에게 들으니 두 글자 내지 세 글자만 고쳐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사단장은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H대좌는 이젠 잘못을 빌 뿐이었다. 그것 말고는 더 할 말도 없었다. "제 잘못입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사과해도 얻어맞았다. "이 자식, 사과하면 다라고 생각하나. 천황 폐하의 탄약을 없앤 놈은 역적이다. 불충한 놈!" 하나야 사단장은 이 대의명분 때문에 제재한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양이가 쥐를 괴롭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H대좌는 사과를 계속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시정하겠습니다."

그날 밤. 비가 때때로 격렬하게 내려 밀림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사단의 수의부장인 나카무라 요시오 중좌가 하나야 사단장의 결재를 받으러 가니 사단장의 오두막에서 거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또 누군가가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나카무라 중좌는 미야케 전속부관의 방에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다. 미야케 중위에게 눈짓으로 누가 당하고 있는지 묻자 "고급부관입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심하게 질려 있었다.

사단장실의 소리는 생생하게 울렸다. 하나야 사단장은 고함치면서 오랫동안 계속 때리고 있었다. 잠시 때리는 소리는 가라앉았지만 사단장의 욕하는 목소리만 들렸다. 때리다가 피곤해지면 사단장은 욕설을 계속하기 일쑤였다. 이대로 잠잠해질까 생각하고 있을 때 또 때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잠시 계속되었다. 나카무라 중좌는 쿠리타 중좌를 애처롭게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매일 당하면서 그것을 참으며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인내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H대좌가 와서 사단장에게 알려줄 것을 미야케 부관에게 부탁했다. 곧 사단장실의 소리를 듣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열도 있는 듯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쿠리타 고급부관이 돌아왔다. 얼굴이 검붉게 울퉁불퉁 부어올라 있었다. 피가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쿠리타 중좌는 말없이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곧 다시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단장은 쿠리타 고급부관을 실컷 때린 뒤이다. 나카무라 중좌는 사단장이 피곤해서라도 더 이상 때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단장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H대좌를 때렸다. 가끔 큰 소리가 나는 것은 H대좌가 쓰러지기 때문이었다.

그게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사단장실을 나온 H대좌의 얼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있었다. 피로 끈적끈적하게 젖어있었다. H대좌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H대좌님, 몸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무엇이든 참는 게 제일입니다."

나카무라 중좌가 위로했지만 H대좌는 울면서 떠나갔다.

쿠리타 고급부관이 얻어맞은 것은 H대좌의 처벌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하나야 사단장은 "근신 30일에 처한다" 라고 명했다. 쿠리타 고급부관은 너무 무거운 처벌인 것 같아서 "1주일 정도가 어떻겠습니까?" 라고 의견을 제시했다가 맞았다.

쿠리타 고급부관은 근신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H대좌가 추궁을 받고 폭력에 시달린 기간만 해도 한 달을 넘기고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심신의 고통 때문에 반 병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간신히 견디고 있는 것은 H대좌가 기개 있는 군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계는 있다. 무슨 수든 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쿠리타 중좌는 생각했다.

그 후 쿠리타 고급부관이 일부러 뜸을 들여서 H대좌의 처벌 명령을 받으러 가니 하나야 사단장은 코 밑의 반백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기분이 나쁠 때 하는 동작이었다. 사단장은 명령했다.

"H를 불러라."

하나야 사단장에게 부름을 받았을 때 H대좌는 대나무로 만든 침대에 누워있었다. 연일 가혹한 힐문을 받고 기력을 잃었다. 게다가 말라리아로 인한 발열까지 더해졌다.

H대좌는 사단장실로 들어갔다. 동작에 힘이 없었다. 하나야 사단장은 일어서서 "처벌을 선고한다" 라며 섬뜩한 눈으로 응시했다. 쿠리타 고급부관이 시립해 있었다.

"H대좌를 근신 30일에 처한다."

그 후에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오더니

"네놈은 생도 아니냐!"

라고 호통을 쳤다. 생도란 육군 유년학교 출신을 의미하며 엘리트라는 의식이 담겨져 있었다. 그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는 일반 중학교에서 온 학생과 맞서 서로 파벌을 만들었다. 또 유년학교에서는 ≪만주와 몽고를 정복하여 일본 영토로≫라는 생각을 소년 학생의 머리에 강하게 가르쳐 심었다. 하나야 사단장이 항상 유년학교 출신임을 자랑하거나 "만주사변은 내가 일으켰다" 고 자랑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나야 사단장은 소리쳤다.

"네놈, 생도의 긍지를 잊은 거냐!"

손을 치켜들어 갈겨댔다. H대좌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사단장은 양 손을 번갈아 휘두르며 좌우로 얼굴을 때렸다. H대좌는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하나야 사단장은 발을 들어 마루에 쓰러진 H대좌를 걷어찼다. 두세 번 걷어차고 나서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부끄러운 줄!"

근신 30일은 장교에게 최대의 처벌이었고 대좌 계급인 이를 때리는 것도 비정상이었다. H대좌는 말이 없었다. 그 얼굴에 하나야 사단장은 침을 뱉었다.

"이 책임을 어떻게 질 거냐?" 라고 내뱉고 자기 방으로 떠났다.

쿠리타 중좌는 눈을 돌리고 있었다. H대좌를 감쌌다가는 자신이 근신에 처해졌을 것이다. 얻어맞는 일이라면 H대좌 이상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처지였다.

H대좌는 선 채 흐느꼈다. 쿠리타 중좌는 어깨를 안고 "H대좌님, 참으십시오. 참으십시오." 라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달래면서 병기부의 오두막으로 배웅했다.

"나쁜 일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피곤해지십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머리에 백발이 성성한 H대좌가 소년처럼 흐느꼈다.

병기부 하사관들과 병사들은 이미 사태를 알고 비분강개한 낯빛으로 맞이했다. H대좌를 부장실로 배웅하고 나서 쿠리타 중좌는 밀림의 길을 되돌아왔다. 부관부의 오두막은 100 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쿠리타 중좌가 자기 방에 돌아온 뒤 곧 총성이 울렸다.

병기부의 오두막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쿠리타 중좌는 서둘러 달려갔다. H대좌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조용히 잠든 것처럼 누워있었지만 무릎을 수건으로 묶고 있었다. 흐트러진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한 몸가짐이었다. 오른손으로는 권총을 쥐고 있었다. 부하들이 H대좌가 자결할까 봐 걱정해 서류 더미 사이에 숨겨둔 것이었다. 그것을 어느새 찾아낸 것이다.

H대좌의 사망을 알리는 공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쇼와 19년 8월 25일, 버마, 아캬부 현 노탄고에서 머리를 관통한 총상으로 인해 전사

소장으로 특진 절차가 잡힌 것은 전쟁이 끝나고 11년이 지난 쇼와 31년이었다.

(장병들이) 하나야 사단장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사단 사령부의 병사들 사이에 퍼졌다.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H대좌가 자결한 직후에는 병기부 상사가 안색이 변해 수류탄을 들고 뛰쳐나갔다.

"그 미친놈을 쳐죽여 버리겠어!"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말렸다. 쿠리타 고급부관이 달래자 상사는 "사단장이라고 해도 이건 살인 아닙니까. 육군 형법이 이런 일을 용납한단 말입니까."라고 흐느껴 울면서 호소했다.

또 고참병 한 사람이 병기 근무 대장인 후지오카 대위에게 " 지뢰 불출의 허가를 받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러 왔다. 이유를 묻자 "하나야가 밟게 만들 겁니다."라고 답했다.

후지오카 대위가 거절하자 "묻는 건 저희가 하겠습니다. 폐는 끼치지 않겠습니다."라며 물고 늘어졌다. 진심으로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전사 − 임팔 견제 작전》타카기 토시로/아사히 신문사/1967년(문춘문고판(1984년).「戦死 -インパール牽制作戦-」 高木俊朗/朝日新聞社/1967年(文春文庫版(1984年).]

이건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일본군 55사단에서는 이 외에도 많은 장병들이 하나야에게 맞고 욕설을 듣고 미쳐 버리거나 자결했다. 말 그대로 대좌부터 이등병까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부하들까지 대동단결하여 상관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만 보아도 피해자를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하는 주체가 그 자체로 까이는 일본군임을 감안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

4. 패전 이후

1945년 7월에 제39군 참모장으로 취임하여 태국에 부임한 하나야는 제18방면군 참모장으로서 패전을 맞이했다. 반인륜 범죄 혐의에는 연관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일반 군인으로 처리되었고,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한 뒤 바로 귀환하도록 조치하였다. 1946년 7월에 귀국해 예비역이 된 하나야는 전후 군인연금으로 생활하면서 아케보노회(曙會)라는 우익단체를 혼자서 운영했다.

1955년에 하나야는 <만주사변은 이렇게 계획되었다>(『満州事変はこうして計画された』)라며 취재에 답하는 형식으로 만주 사변 및 관동군의 모략을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야의 증언은 신빙성이 지극히 결여되어 그 누구도 납득하지 않았다고 일본 측에서 주장하기도 한다. 가령 혐중혐한으로 유명한 역사작가 베츠미야 단로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만주사변의 전개과정을 다루면서 링크로 하나야의 악행을 상술하는 식으로 물타기를 시전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B군과 같은 일본 군사사에 밝다는 인사들이 베츠미야 단로가 하나야를 까는 글만 읽고 큭큭대는데 베츠미야가 하나야의 악행을 만주사변 발발과정 바로 다음에 링크시킨 이유를 생각한다면 제대로 낚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하나야의 증언을 부정하는 이유는, 하나야의 증언은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혼조 시게루 등이 주장한 '만주사변은 일본군의 자위권 발동이지 모략이 아니다.' 하고 일관되게 주장해온 바를 완전히 뒤집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인정하면 만주사변이 일본군의 모략이라는 사실을 당시 참가한 일본군 참모장교의 증언으로 확증할 수 있게 된다. 즉 그가 착하게 살았다면 상당히 임팩트 있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1957년 하나야가 병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구 만주국 관계자들이 참석해 현직 국철 총재가 장의위원장을 맡고 당시 일본 수상 기시 노부스케가 화환을 보낼 정도로 성대히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하나야의 악행을 뼛속 깊이 증오했던 옛 부하들은 단 한 사람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건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전후 일본 육군에 복무했던 사람들은 연대 위주 혹은 여단이나 사단 단위로 전우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사병과 장교의 구분없이 가입하고 격의없이 활동하면서 상호부조도 하였으며 부대전우회에 가입한 고급 간부의 장례는 전우회가 주관하여 진행하거나 아니면 옛 부하들이 대거 참석하는 게 관례였다. 그리고 다소 감정이 나쁘더라도 뒤에서는 욕을 퍼부을지언정 생계가 극단적으로 나빠지거나 장례식이 열릴 때에 한해서는 최소한의 도움이나마 주는 식으로 기본적인 배려는 했다. 전장에서 같이 싸운 전우라는 점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헌데 하나야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물론 적전도주로 악명 높은 도미나가 교지 역시 그랬지만. 그래도 무타구치 렌야의 장례식장에는 참석한 장병이 있었다. 다만 빈소를 때려부수기 위해서 온 것일 뿐. 이유는 무타구치 항목에 보면 알겠지만 그 마인칸 교외에서 연합군에 투항한 굶어 죽을 뻔한 병사와 장교들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사단장이었던 사람이 "저런 미친놈 때문에 열받겠지만 죄는 지으면 안 되잖느냐." 하고 말리기까지 했다고.

일본인은 좀 심한 대우를 받아도 가급적 기본적인 도움은 주는 성향이 있는 편이다. 일본의 무라(촌) 사회에서는 사회가 정한 룰을 어겨 퇴출당한 자라고 해도 집에 불이 났거나, 가족이 큰 병을 앓거나, 장례식을 할 때에 한해서는 도움을 준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화재, 질병 등이 번지면 자신들도 곤란해진다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긴 하지만, 자기 마을에 한때나마 속한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3] 이런 성향의 일본인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반응. 그야말로 '꼴도 보기 싫다.'는 극심한 트라우마였던 셈.

생전에도 하나야가 신장병으로 입원해야 하는데 비용이 모자란 탓에 옛 동기생이 전우회를 찾아가서 부탁하였더니 바로 엄청난 욕설을 듣고서 쫓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부대전우회는 원래 예전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런 도움을 주자고 만들어진 것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그나마 하나야는 자기를 대신해서 가준 동기생이 있기라도 했으나 무타구치 렌야는 그 전우회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직접 가서 전투에 패한 이유는 부하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는 내용의 팜플렛을 돌리다가 전우회원들에게 멍석말이와 몽둥이 찜질을 차례로 당하고서 추방당했다. 참고로 무타구치 렌야는 하나야 같은 답이 없는 부하 폭행범은 아니었고 자신의 엉터리 작전으로 병사들을 아사 상태로 만들어 그 정도였던 상황인데, 만약 무타구치가 하나야 이상의 악질적으로 부하들을 갈구던 인간이었으면 그냥 상관 살해 크리가 났을 가능성이 높다.

5. 어록

다음은 하나야가 55사단장 시절에 부하들을 상대로 남긴 어록이다.
(전선의 부대로부터 식량 보급을 요청하는 전문을 받고) "나무와 풀을 먹어도 체하진 않는다."
"식량을 자꾸 요청하는 건 일선 부대가 겁쟁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약해빠진 놈들은 위협(해서 억지로 싸우게)하지 않으면 전쟁에 이길 수 없다."
(제55사단 102연대 제5중대 오카자키 소위가 적 진지 돌입을 위해 공준사 지원을 요청하자)
"네 이놈, 포격 지원을 해달라고 하는데 저런 진지는 야습하면 함락시킬 수 있다. 야습이 무서운가? 너와 포탄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포격 지원은 없다."
부관: 사단장님, 어째서 저를 때리십니까. 제가 그렇게 미우십니까?
하나야: 미워서가 아니다.
부관: 그렇다면 어째서 때리십니까."
하나야: "네놈이 때리기 좋으니까."
(부관에게) "그 명령을 위반한 장교를 할복시켜라. 네가 책임자이니, 녀석을 찾아내지 못하면 네가 할복해야 할 것이다."
(전황이 너무 불리해 어쩔 수 없이 포를 파괴하고 후퇴해온 포병 소위에게)
"생사를 함께 해야 할 화포를 버리고 구름 한 점 없는 전장을 홀로 도망쳐온 네놈을 '허공 소위'라고 명명한다. 자, 복창해라!"
"네 이놈, 당장 여기서 할복해라! 네놈의 칼이 녹슬어 있다면 내 칼을 빌려주마. 네놈 대신 지휘할 놈은 얼마든지 있다!"
"네놈 같이 나약하고 불충한 놈은 장교가 아니다. 지금부터 상병이다. 부끄러운가? 그럼 자결해라!"
"네놈이 가고 싶은 곳은 야스쿠니 신사냐, 아니면 군법회의냐?"

6. 평가

이 인간의 이야기를 '일본군은 정예였지만 적의 물량에 압도당해 패배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100번 읽게 하고 싶어. 이런 놈이 육군 중장에 사단장 각하였다니...
- 어느 일본 네티즌의 평가

일본에서조차 졸장보다 더한 혹장(酷將 가혹한 장군) 이라 불리고, 차라리 삼대오물도 인간성은 이놈보다는 낫다고 평가받는다. 삼대오물은 (책임감을 느껴 자살한 스기야마 하지메는 제외하고) 책임감 없고 무능한 인물들이었어도 적어도 괜한 부하를 트집잡아 괴롭혀대는 짓은 안 했다. 형편없는 작전지휘로 부하들을 간접적으로 괴롭히긴 했다 무능하긴 했지만 그건 직장에서의 해고나 시험에서의 낙방과 같은 능력 부족에 따른 퇴출사유[4]지 사회에서 배척당해야 할 죄는 아니다. 반면 하나야 타다시가 말아먹은 스케일은 삼대오물에 비하면 작은 편이지만 그가 보여준 행위는 가혹행위의 모든 병폐를 거진 다 보여주었다.

그러나 부하들에게 저지른 인간 쓰레기 같은 면모와는 달리 앞서 언급된 삼대 오물처럼 반인륜 범죄와는 일절 무관했고 그래서 전쟁 범죄자로도 취급되지 않고 무난히 풀려났다.폭행당했던 아군들 단체로 실신 그렇기 때문에 전범들과는 별개로 최후의 일선을 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본 외 나라들에서는 곧잘 사람 취급은 해주는 편이다.

7. 관련 항목



[1] 츠야마시 [2] 하지만 욕설을 들은 사람이 대놓고 반발할 경우에는 찍소리도 못하고 되려 자기 의견을 철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나야가 다녔던 오사카 육군유년학교의 5년차 선배인 나가시마 소장이 소문의 주인공으로 하나야가 습관대로 "육군대학도 나오지 않은 놈이 장개석 덕분에 출세한 거"라고 욕을 하자, 화가 난 나가시마는 "나는 사단장보다 유년학교 5년차 선배고, 할 만큼 해서 소장까지 올라왔다. 내가 틀린지 당신이 틀린지 한 번 토론해보자." 맞서면서 긴 시간에 걸쳐 전술토론을 하자 하나야가 어찌 못하고 "당신이 옳다."고 인정하고 발을 뺐다고.(...) 즉, 하나야는 상대가 대담하게 정면 대응을 하면 뒤로 물러날 정도로 비겁한 성격이었다는 이야기.근데 이래놓고도 제정신 못 차리고 정신승리나 하는 사람도 많다는걸 감안하면 인정이라도 할 줄 아는게 눈꼽만큼은 낫다. [3] 이를 '무라하치부'라고 한다. 인간이 겪는 10가지 큰 일을 추려 이웃들이 상부상조하곤 했는데 마을의 룰을 어기면 이러한 지원이 끊겼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화재와 장례는 개인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이웃들이 돕도록 했고, 그 나머지 8가지에는 지원이 아예 끊는 것이다. [4] 다만 무타구치나 도미나가는 예비역 장성으로 예편했기 때문에 연금 지급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독일군도 SS가 아닌 일반 국방군 출신이나 SS출신이라도 강제차출되어 배치된 병사, 부사관, 장교는 문제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