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6:40:40

정광필


<colcolor=#f0ad73>
조선 영의정
중종 ~ 광해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min-height: calc(1.5em + 9.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제48대

류순
제49대

박원종
제50대

김수동
제51대

류순정
제52대

성희안
제53대

송질
제54대

류순
제55대

정광필
제56대

김전
제57대

남곤
제58대

정광필
제59대

장순손
제60대

한효원
제61대

김근사
제62대

윤은보
제63대

홍언필
제64대

윤인경
제64대

윤인경
제65대

홍언필
제66대

이기
제67대

심연원
제68대

상진
제69대

윤원형
제70대

이준경
제70대

이준경
제71대

권철
제72대

이탁
제73대

홍섬
제74대

권철
제75대

홍섬
제76대

권철
제77대

홍섬
제78대

박순
제79대

노수신
제80대

류전
제81대

이산해
제82대

류성룡
제83대

최흥원
제84대

류성룡
제85대

이원익
제86대

윤두수
제87대

이원익
제88대

이산해
제89대

이항복
제90대

이덕형
제91대

이항복
제92대

윤승훈
제93대

유영경
제94대

이원익
제95대

이덕형
제96대

이원익
제97대

이덕형
제98대

기자헌
제99대

정인홍
제100대

박승종
}}}}}}}}}
정광필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중종 ~ 광해군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calc(1.5em + 6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좌의정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제65대

김수동
제66대

박원종
제67대

류순정
제68대

성희안
제69대

송질
제70대

정광필
제71대

김응기
제72대

신용개
제73대

안당
제74대

남곤
제75대

이유청
제76대

정광필
제77대

심정
제78대

이행
제79대

장순손
제80대

한효원
제81대

김근사
제82대

김안로
제83대

윤은보
제84대

류부
제85대

홍언필
{{{#!wiki style="margin: -16px -11px"
제85대

홍언필
제86대

윤인경
제87대

류관
}}}
제88대

성세창
제89대

이기
제90대

홍언필
제91대

윤인경
제92대

황헌
제93대

심연원
제94대

상진
제95대

윤개
제96대

안현
제97대

이준경
제98대

심통원
제99대

이명
제100대

권철
제101대

홍섬
제102대

박순
제103대

이탁
제104대

박순
제105대

홍섬
제106대

노수신
제107대

김귀영
제108대

정유길
제109대

노수신
제110대

정유길
제111대

류전
제112대

이산해
제113대

정철
제114대

류성룡
제115대

최흥원
제116대

윤두수
제117대

유홍
제118대

김응남
제119대

윤두수
제120대

이원익
제121대

이덕형
제122대

이항복
제123대

정탁
제124대

이원익
제125대

이항복
제126대

이헌국
제127대

김명원
제128대

윤승훈
제129대

류영경
제130대

기자헌
제131대

심희수
제132대

허욱
제133대

기자헌
제134대

이항복
제135대

이덕형
제136대

이항복
제137대

정인홍
제138대

한효순
제139대

박승종
제140대

박홍구
<colbgcolor=#c00d45,#94153e> 역대 정승
(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역대 영의정
(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우의정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제78대

박원종
제79대

류순정
제80대

성희안
제81대

송질
제82대

정광필
제83대

김응기
제84대

신용개
제85대

안당
제86대

김전
제87대

이유청
제88대

권균
제89대

심정
제90대

이행
제91대

장순손
제92대

한효원
제93대

김근사
제94대

김안로
제95대

윤은보
제96대

류부
제97대

홍언필
제98대

김극성
제99대

윤인경
{{{#!wiki style="margin: -16px -11px"
제99대

윤인경
제100대

류관
제101대

성세창
}}}
제102대

이기
제103대

정순붕
제104대

황헌
제105대

심연원
제106대

상진
제107대

윤개
제108대

윤원형
제109대

안현
제110대

이준경
제111대

심통원
제112대

이명
제113대

권철
제114대

민기
제115대

홍섬
제116대

이탁
제117대

박순
제118대

노수신
제119대

강사상
제120대

정유길
제121대

김귀영
제122대

정지연
제123대

정유길
제124대

노수신
제125대

정유길
제126대

류전
제127대

이산해
제128대

정언신
제129대

정철
제130대

심수경
제131대

류성룡
제132대

이양원
제133대

윤두수
제134대

유홍
제135대

김응남
제136대

정탁
제137대

이원익
제138대

이덕형
제139대

이항복
제140대

이헌국
제141대

이항복
제142대

이헌국
제143대

김명원
제144대

윤승훈
제145대

류영경
제146대

기자헌
제147대

심희수
제148대

허욱
제149대

한응인
제150대

심희수
제151대

이항복
제152·153대

정인홍
제154대

정창연
제155대

정인홍
제156대

한효순
제157대

민몽룡
제158대

박승종
제159대

박홍구
제160대

조정
<colbgcolor=#c00d45,#94153e> 역대 정승
(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역대 영의정
(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종묘 배향공신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c00d45,#94153e> 태조 조준, 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 남재, 이제, 남은
정종 익안대군
태종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박원형
성종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인종 홍언필, 김안국
명종 심연원, ■이언적
선조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효종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현종 정태화, 조경,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숙종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경종 이유, 민진후
영조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 이종성, 민백상
정조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문조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철종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동무종향)
: 문묘 종사 동국 18현을 겸하는 6인(서무종향)
}}}}}}}}}
<colbgcolor=#b82642><colcolor=#f0ad73>
조선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정광필
鄭光弼
<nopad> 파일:鄭光弼.png 상상화
출생 1462년( 세조 8)
한성부 회현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사망 1539년 1월 5일[1] (향년 76 ~ 77세)[2]
(음력 1538년, 중종 33년 12월 6일)
묘소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 3-1
재임기간 제55대 영의정
1516년 5월 20일[3] ~ 1520년 1월 17일[4]
(음력 중종 11년 4월 9일 ~ 1519년, 중종 14년 12월 17일)
제58대 영의정
1527년 11월 24일[5] ~ 1533년 4월 2일[6]
(음력 중종 22년 10월 21일 ~ 중종 28년 2월 28일)
시호 문익(文翼)
본관 동래 정씨[7]
사훈(士勛)
수부(守夫)
부모 부친 - 정난종(鄭蘭宗, 1433 ~ 1489)
모친 - 전주 이씨 이지지(李知止)의 딸
부인 은진 송씨 - 송순년(宋順年)[8]의 딸
자녀 슬하 4남
장남 - 정노겸(鄭勞謙)
차남 - 정휘겸(鄭撝謙)
3남 - 정익겸(鄭益謙)
4남 - 정복겸(鄭福謙)[9]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문신이자 중종 재위기의 최장수 정승. 정승 기간이 14년이며 영의정만 2번에 걸쳐 9년을 했다.

이 사람의 직계 후손이 철종을 옹립한 정원용이다.

2. 생애

아버지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은 세조 시절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이시애의 난 당시 황해도 관찰사였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조참판이 된 인물로 신공신 세력 중 하나였다. 1469년 <세조실록>의 편찬에 관여하고 이후 <예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고위 관료였다.

정광필 본인은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503년 연산군에게 밤늦게 사냥하는 것이 몸에 좋지 않다고 간언했다가 '일하기 싫어서 하는 핑계'로 본 연산군에게 밉보였고,[10] 1년 후 1504년 갑자사화 때에 그때의 간언을 이유로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부제학에 복직해 이조참판,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한 뒤[11]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12] 조광조 등장 전 남곤은 차세대 정승감으로 떠올랐는데 이때 정광필도 '미래의 정승감으로는 남곤이 1순위'라고 했다.

조광조의 득세를 가장 많이 막았지만[13] 일부 의견이 맞는 부분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거나[14]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15]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었다. 이때 정광필은 조광조의 죄를 적어놓은 문안에(이건 중종의 명령으로 남곤이 썼다.) 딴지도 걸고[16] "조광조의 죄는 파직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붕당은 큰 죄인데 함부로 할 수 없고 조광조를 앉힌 건 전하잖아요."하며 눈물을 흘리며 빌어도 봤지만 실패했다. 조광조 축출에 참여한 남곤에겐 회의 도중 매섭게 쳐다 보는데 남곤은 이를 매우 무안하게 여겼다고 실록에 나와 있다.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17] 작서의 변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훗날 경빈 박씨에 이어 복성군이 사사되자 "진성군을 죽일 때는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도 됩니다."라고 했다가 명예직인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1537년 총호사로서 장경왕후 희릉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유배되었으나[18] 1538년 김안로의 사사로 풀려났다. 이 때 영의정 윤은보, 좌의정 홍언필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19] 중추부영사로 1539년 77세 나이로 사망했고 중종의 묘정, 회덕의 숭현서원, 용궁의 완담향사에 배향되었다. 중종의 배향공신으로 오른 4명 중 1명인데 나머지 3명은 다름아닌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이므로 정광필을 당대에도 높아 평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묘소는 경기도 군포시에 있으며 문집 《정문익공유고》가 남아 있다.

3. 여담

4. 대중매체


[1] 율리우스력 1538년 12월 26일 [2] 율리우스력 기준 향년 75 ~ 76세 [3] 율리우스력 5월 10일 [4] 율리우스력 1월 7일 [5] 율리우스력 11월 14일 [6] 율리우스력 3월 23일 [7] 첨사공파(詹事公派)-문익공파(文翼公派) 파조 [8] 숙종 때 노론의 수장인 우암 송시열의 직계 조상 [9] 좌의정 정유길의 아버지. [10] 국문에 처하려고 했는데 이극균이 반대했다. 연산 9년 10월 9일 기사에 나와 있다. [11] 이 사이에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되는데 사관은 그가 백성을 위한 대책을 많이 내세울 것 같다고 생각해 임명했지만, 정작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12] 정승에 오르기 전에 성희안이 "이 사람만 한 정승감이 없습니다."라며 추천했다. [13] 현량과 실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가 남곤과 정광필이다. [14] 폐비 신씨의 복위와 관련된 논쟁에서 정광필은 조광조의 가장 큰 지지자였다. [15] 정작 조광조는 정광필을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소인 취급하며 정광필이 제시하는 타협안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정광필은 조광조의 아버지뻘 나이였으며 관직에 몸담은 경력 및 직급 모두 조광조보다 월등히 높았다. [16] 가장 크게 딴지를 건게 조광조의 죄안은 대신들이 죄를 알고 써놓은 냥 했는데 이에 정광필은 "우리는 부른 뒤에 알았는데요?"라고 했다. 정광필 덕에 죄안의 일부가 고쳐지기도 했으며 기묘사화 가담자들도 처벌의 수위를 낮췄고 조광조의 목숨도 조금 연장되었으며 처벌 대상자들의 처벌도 낮춰졌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얼마 안 가 죽었다. [17] 이때는 심정, 이행, 이항 등이 영의정에는 명망가를 앉힘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앉게 되었다. [18] 이에 백성들은 다들 슬퍼했다고 한다. [19] 근데 실권이 없었기에 실정이랄 것도 없다. [20] 확실히 대단히 강직하긴 했던지 김안로 집권기는 그의 나이 70대 무렵의 일인데 그런데도 끊임없이 김안로와 다른 의견을 내어 그의 미움을 샀는데 끝내는 김안로의 무고로 벌을 받게 되었을 때 김안로는 사람을 시켜 정광필에게 나라에서 큰 화를 내릴건데 자진함이 어떻겠냐고 묻게 했지만 정광필은 사람 죽고사는건 하늘이 내리니 죽으라면 죽고 다만 명령을 기다릴 뿐이라고 답하였다. 이미 정광필이 김안로에게 보복을 당했을 때는 심정, 이항, 이행 등 수많은 이들이 김안로에게 보복당해 죽거나 유배당했음에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은 것이다. [21] 기묘사화 때는 중종에게 밉보여서 정승에서 물러나야 했고 김안로가 권신이던 시절에는 김안로에게 밉보여서 정승에서 물러나야 했다. [22] 당시는 사림이 득세하던 시절이라 조광조 축출에 앞장선 남곤 등은 비판을 들었지만 울면서 간한 정광필은(하도 상황이 뭣하다 보니 파직만으로 끝나면 안되겠냐고 했지만) 높이 평가했다. 정작 남곤이 조광조 축출에도 마지못해서 방관적 찬성하다가 정광필 못지않게 조광조를 살리려고 애를 쓰고, 조광조가 초반에 사사당할 뻔한 것을 막은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 또한 조광조의 죽음에 정광필과 함께 가장 슬퍼했다는 점은 싸그리 무시했다. 남곤의 경우, 죄를 뒤집어쓰지 않는다면 조광조는 천거해준 은인이자 자신을 계속 후원해준 후원자를 시와 문장을 잘한다는 이유로 배신하고 소인으로 몰아서 공격한데다가 그런 공격을 당했음에도 자신을 살리려고 애를 쓰며 슬퍼해주는 선배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선배가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는 오해나 하는 편협한 인간이 되기 때문에 무시된 것으로 보인다. [23] 관복 같은 옷에 두르던 띠 [24] 정유길(鄭惟吉), 정지연(鄭芝衍), 정창연(鄭昌衍), 정태화(鄭太和), 정치화(鄭致和), 정지화(鄭知和), 정재숭(鄭載嵩), 정석오(鄭錫五), 정홍순(鄭弘淳), 정존겸(鄭存謙), 정원용(鄭元容), 정범조(鄭範朝). 하지만 정광필 자신까지 넣으면 13명이 되어 예언이 틀리게 된다. [출처] 지명이 품은 한국사 4 서울·경기도 편, 이은식 저, 타오름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