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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02:01:11

김성근/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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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밈 절이 싫어서 중이 떠났는데 절이 쫓아와요 · 위기의 XX를 구할 마지막 희망 ·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 세이콘 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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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
2.1. 마산상고 감독2.2. 기업은행 코치, 감독2.3. 충암고 감독2.4. 신일고 감독
3. OB 베어스 투수코치-감독 시절
3.1. OB 베어스 투수코치 임명3.2. OB 베어스 감독 선임과 김영덕과의 악연3.3. 1984년의 선전과 져주기 게임 사태3.4. 계속된 가을 야구 성과 부진과 프런트와의 갈등3.5. 원년 멤버 중 가장 오랜 원팀맨의 사임3.6. 김성근 시절의 OB
3.6.1. 긍정적 측면: 마무리 투수와 로테이션의 도입3.6.2. 부정적 측면: 신인 육성 실패와 비매너 플레이 양산
4. 태평양 돌핀스 감독
4.1. 태평양 감독 임용과 김성근 사단의 시작4.2. 김성근 태평양의 시작, 오대산 극기 훈련4.3. 태평양 돌핀스의 돌풍, 신인 트로이카의 활약4.4.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 1. 훈련 수당 지급 문제4.5.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 2. 임호균 각서 파동4.6. 인천 야구의 첫 르네상스, 태평양
5. 삼성 라이온즈 감독
5.1. 우승 청부사로서의 삼성 부임5.2. 김성근 옹호론: 의외로 부실했던 당시의 삼성5.3. 팀 장악 실패와 선수단과의 충돌5.4. 김성근 비매너 플레이의 대표 사례, 위장오더 사건5.5. 여러모로 흑역사로 남은 삼성 감독 시절5.6. "큰 경기에 약한 감독"으로 경질 당하다
6. 해태 타이거즈 인스트럭터-2군 감독
6.1. 김성근 vs 김응용6.2. 해태 2군 시절 제자들: 이호준과 임창용
7.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7.1. 야인, 돌격대를 만나다7.2. 90년대 최약체 쌍방울, 정말 약체였나7.3. 1996-1997 시즌의 성공7.4. 쌍방울 성공의 배경: 벌떼 마운드와 돌격대 타선7.5. 외환 위기와 쌍방울의 몰락, 또 한 번의 경질7.6. 쌍방울 시기의 각종 비매너 플레이 일화
8.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9. LG 트윈스 감독 시절
9.1. LG 트윈스의 김성근 영입9.2. 당시 LG는 어떤 팀이었는가9.3. 프런트가 망가뜨린 팀, 김성근 감독 대행호의 출범9.4. 야신의 호칭을 남긴 2002 김성근호9.5. 프런트와의 갈등, 그리고 경질9.6.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 LG 트로이카와 조인성, 박용택의 발굴9.7. 김성근 시절의 혹사와 LG의 암흑기9.8. 외인 선수들과의 잦은 마찰
10. 야인 시절과 치바 롯데 마린스 시절
10.1. 스투 해설위원 임명과 출장코치 생활10.2. 치바 롯데 마린즈 인스트럭터 부임10.3. 치바 롯데 마린즈 순회코치 시절
11. SK 와이번스 감독
11.1. 왕조의 시작, SK 와이번스 감독 취임11.2. 당시 SK 와이번스는 어떤 팀이었나11.3.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2007 SK의 우승11.4. 리그를 압도했던 2008 SK11.5. 사투에 사투, 19연승에 빛나는 2009 SK11.6. 절치부심한 최강자, 2010년의 SK11.7. 2011년, 12번째 해임과 문학구장 소요 사태11.8. 김성근이 성장시킨 SK 왕조의 주역들
12. 독립 구단 고양 원더스 감독13. 한화 이글스 감독14. 일본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15. 은퇴와 그 이후16. 역대 감독 성적

[clearfix]

1. 개요

김성근 감독의 지도자 시절 경력을 정리한 문서. 30여 년에 걸친 지도자 경력 과정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만큼 그의 감독 시절과 역량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며, 심지어 서로 상충되기도 한다.

한때는 약팀을 맡아 전력을 정비해서 중상위권까지 치고 올라가게 만드는 일이 많아 리빌딩 전문가로 인식되곤 했다. 하위권 팀인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를 이끌고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것이 그 예로 언급되며, 침체기였던 LG 트윈스를 짧은 시간에 상위권으로 올린 것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같은 상위권 전력의 팀을 맡을 때에는 오히려 우승 청부사라는 이미지로 발탁되기도 하였다.[1] 실제로 강팀으로 나가기엔 뭔가 부족했던 SK 와이번스를 2000년대 후반 전성기로 이끈 것도 있다.

실제 경력을 보면 하위권을 기거나 침체기인 팀을 짧은 시간에 반짝 상위권으로 올린 실적이 많다. 하지만 그 대가가 만만치 않다는 것 때문에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린다. 그가 맡은 팀들이 대부분 김성근의 저주 문서에 있는 것처럼 퇴임 전후부터 성적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점과 혹사, 비매너 플레이 등 수 없이 많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요약하자면, 김성근/야구 스타일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극단적인 윈나우형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단기간에 팀의 자원을 최대한 쥐어 짜내어 성적을 내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팀의 전력 자체를 강화하여 단단하게 만드는 리빌딩으로서의 의미와는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다. 2015년을 앞두고 몇몇 선수가 보강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약팀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팀을 가을야구 경쟁에 참가시켰지만, 그때부터 온갖 혹사와 구설수를 남기면서 급격하게 추락하는 데 일조함으로써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팬들은 김성근을 감독으로 올린다는 건 악마와의 거래와 똑같다고도 한다. 다만 만년 최하위를 단 한 해라도 벗어나는 것이 과제이던 팀을 단 몇 년간이라도 강팀으로 만들었는데 좀 혹사하면 어떠냐는 지적도 있고, 심지어 중도에 모가지당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이 팀의 전력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로 변호하는 이들도 있다.

2. 아마추어 시절

프로 리그가 생기기 이전엔 마산상고, 충암고, 신일고 감독과 기업은행의 코치 및 감독을 역임했다.

2.1. 마산상고 감독

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은퇴한 후 은행 소속의 여느 은퇴선수들처럼 은행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어 문제 등으로 은행원 업무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마산 출신이었던 이창현 기업은행 감사가 김성근을 마산지점으로 발령하여 자신의 모교였던 마산상고 야구부의 감독으로 일하도록 편의를 봐줬다. 이로서 김성근은 1969년 마산상고 감독을 맡으면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덕분에 김성근은 기업은행 월급을 받으면서 동시에 마산상고 감독 월급까지 이중으로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선수들을 지옥훈련으로 내몰았다. 선수들이 강훈련에 견디지 못해 쓰러지면 양동이의 물을 부어 일으켜세웠다. 선수들은 이런 김성근을 두고 "사람새끼가 아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 김성근은 "사실 그때는 선수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도 몰랐어.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선수들을 훈련으로 몰아넣었어.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심했어. 마산상고에서 가르쳤던 선수들 중 야구선수로 성공한 애는 없지만 그래도 이번에 한국시리즈 우승하니까 마산상고 출신 두세명에게 축하전화가 오더라고"라며 웃었다.
-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8. 지도자 첫발 독종감독이 되다
김성근 감독의 지나치리만큼 혹독한 훈련으로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쓰러지기 수십번, 그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
- 동아일보, 1969-10-04
훈련의 강도는 높았다. 선수들이 쓰러지면 양동이로 물을 끼얹어 일으켜 세웠다. 의욕은 높고, 지도 방법은 몰랐던 초보 감독의 실수담이다. 그래도 선수들은 반발하지 않았다.[2] 부족한 야구부 예산에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사비(私費)를 털어 식비, 목욕비를 대는 젊은 감독의 열정(熱情)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적은 별무(別無)에 집 판 돈만 없어졌다. 이듬해, 다시 서울로 와 기업은행 투수 코치(1970~1971년)를 거쳐 감독(1972~1975년)에 올랐다. 당시 한일은행 감독이 김성근의 영원한 라이벌 김응용이다.
- 월간조선, "지금 이 공을 놓치면 두번째는 없다", 2022 #

마산상고 시절에도 선수들을 혹독하게 강훈련시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절부터 야구에 미쳐 있었던 것은 여전했는데, 부족한 야구부 예산에도 사비를 털어 식비, 목욕비를 대다가 서울 집 판 돈마저 날려먹었다고 한다. 이 시기 마산에서 아들 김정준을 얻었다.

마산상고 감독을 맡고 있던 도중 1970년 재일교포 선배였던 배수찬으로부터 기업은행 코치직을 제의받으면서 서울로 상경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마산상고를 급히 떠나게 되며 관계가 악화되었던 때문인지, 김성근은 NC 다이노스가 신임 감독 인선 과정에 있던 2011년까지 42년 동안 마산상고(현 용마고)를 방문하지 않았다. 관련기사[3]

2.2. 기업은행 코치, 감독

같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절친한 선배였던 배수찬[4]의 추천으로 기업은행 투수코치를 맡게 되면서, 김성근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1970시즌 투수코치로 일하다가 1971년[5] 기업은행의 감독이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배수찬과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만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당시 김성근에게 연세대에서 감독 제의가 들어왔는데, 이때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배수찬이 김성근에게 연세대 감독을 자신이 맡고 싶다는 말을 했고, 김성근 또한 이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배수찬이 연세대로 가자마자 기업은행에서 김성근에게 곧바로 감독을 맡긴 것. 배수찬은 이에 대해 김성근이 거짓 정보로 자신을 속여 자신을 연세대로 보냄으로써 김성근이 감독 자리를 꿰찬 것으로 생각했다. 김성근은 처음에는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배수찬은 믿지 않았으며, 결국 이 과정에서 둘의 관계는 갈라졌다.[6]

어쨌든 김성근이 본격적으로 감독의 길에 들어선 것은 바로 이 시절,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역임한 기업은행 감독이다. 이때 한일은행 감독이던 김응용과 많이 대결해서 많이 졌다고 한다. 당시 한일은행은 호화멤버를 자랑하던 최강 팀.
주심의 때늦은 판정과 애매한 행동 때문에 실업야구 사상 11년만에 게임 몰수의 불상사가 19일 실업야구 경기에서 생겼다. ... 4:1로 리드하던 6회말 기은이 주자 1루에 두고 볼 카운트 1S3B에서 히트 앤드 런 배팅을 시도했는데, 타자 양형오가 하이볼인 줄로 착각, 스윙을 않고 있는 사이 한일은행 우용득이 2루에 송구, 1루 주자 최주현은 터치 아웃되었다. 이때까지 주심 김옥경 씨는 투구에 대한 판정을 않고 있다가, 기업은행 감독 김성근 씨가 포볼이므로 주자와 타자 모두가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어필하자 뒤늦게 스트라이크를 선언, 주자 아웃을 판정했다. 김성근 감독은 주심의 판정이 오판이라고 항의, 게임이 중단되었고, 김옥경 주심은 "10분 동안에 다시 출전하지 않으면 게임을 몰수시키겠다"고 통고한 후 10분이 지나도록 기업은행 선수들이 벤치에 나오지 않자 그대로 게임 몰수 선언을 했다.
- 경향신문, 1974-09-20

이 시기부터 김성근 특유의 규칙을 이용한 어필 등이 시작되었는데, 위의 사건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주심의 스트라이크 선언이 늦었으니 포볼이 선언된 것이며 당연히 히트앤런 상황과는 별개로 1루를 채우게 되니 주자, 타자 모두 루상 진루 상황이라고 어필한 것. 스트라이크 콜은 공이 들어온 순간 바로 진행되어야 하는 만큼, 상황을 보면 김성근 감독의 어필은 정당한 어필이었다. 다만 이 시기는 아직 야구 수준이 현재 기준으로 많이 미치지 못하던 시절이었고, 해당 어필 과정에서의 충돌은 결국 경기 몰수로 이어졌다.

기업은행 감독 시절인 75년, 김성근은 서울에서 열린 제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코치로 발탁됐다. 선수로서. 그리고 코치로서 태극마크를 달았다. 우승을 차지해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상했다.

2.3. 충암고 감독

파일:image__2015_505346_14326770471948849.jpg
파일:external/azine.kr/201103281617123257.jpg 충암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시절 뒷줄 맨 오른쪽.(선글라스 착용.) [7]
"충암 때 모인 아이들은 전부 대구에서 올라온 아이들이었고"
- 【한겨레TV 대담】 김성근 감독편

1976년 11월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이 창단되면서 이쪽 감독 부임 이야기가 오가던 와중에, 충암고 쪽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충암고는 ‘가족’을 생각하라며 파격적인 제안을 던졌는데, 자녀 학비 면제, 학교 매점 운영권, 사택 제공 및 월봉 20만원, 계약금 600만원이라는 엄청난 제안이었다.[8] 그래서 얻은 별명이 ‘600만원의 사나이’.

충암고는 1970년 창단한 신생팀이었으나, 재단의 강력한 후원 아래 빠른 속도로 강팀으로 성장하고 있던 팀이었다. 특히 이 성장에는 타 지역 고등학교의 야구부들의 흡수가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 당시 대구 3대 야구 명문 중 하나였던 대건고등학교][9]가 야구부를 해체할 것이라는 정보가 돌았는데, 김성근은 본인이 직접 대구를 오가며 양측을 조율, 대건고 야구부 18명 전원을 모두 충암고로 전학시켰다. 이때의 제자 중 하나가 김성근의 대표적인 애제자 중 하나인 조범현이다. 같은 해인 1976년 서울의 철도고 야구팀도 해체되었는데, 역시 철도고에서도 다수의 학생을 데려왔다.

이처럼 김성근의 충암고는 세 개의 야구 명문고를 합친 막강한 전력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주축은 대건고 출신이었다. 1977년 당시 충암고의 주전 선수들 중 절반 이상이 대건고 출신이었다. 조범현, 기세봉, 이근식, 이태현, 이성수가 바로 그때 활약한 대건고 출신 선수들이다. 이런 막강한 전력을 이끌면서 충암고는 돌풍을 일으켰다.

이 시기 회자되는 사건 중 하나는 1977년 황금사자기 8강. 김성근 감독 본인 인터뷰에서 감독 생활 중 딱 세 번 눈물을 흘렸다고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때였다. 당시 신일고에게 끝내기 역전 3점 홈런을 맞으면서 4강이 좌절되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4강 이상을 기록해야 특기자로 대학 진학이 가능했던 상황 속에서 이는 큰 타격이었다.[10] 이후 절치부심한 충암고 야구부와 김성근은 한달 뒤 열린 봉황대기 8강에서 신일고에 설욕, 마지막으로는 역시 첫 우승을 노리던 광주진흥고를 물리치며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했다. 해당 우승은 창단 9년만의 우승이었으며, 이 대회에서 조범현은 MVP를 차지했다.

충암고 시절에는 또 에피소드가 있는데, 당시 봉황대기를 앞둔 시점에서 훈련 도중 선수에게 스윙을 가르치다 선수가 휘두른 배트에 입 부위를 그대로 맞았다고 전한다. 이 과정에서 앞니 세 개가 부러지는 사고가 일어났고, 입술을 24바늘이나 꿰맸다고. 이 때문에 현재도 김성근 감독의 위쪽 앞니 세 개는 의치이다. 다만 이 때문에 김성근 감독의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김성근 감독 스스로 이는 부정하였다.

이 시기 또 우승 3개월 만에 일화가 발생하였는데, 몇몇 선수가 한양대로 진학하기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스카우트 비용이 공중으로 사라진 것. 당시 해당 인사가 김성근 감독에게 이를 건넸다고 둘러댔고, 충암고에서는 이를 믿고 김성근 감독의 파면을 통보했다. 결국 스카우트 비용의 배달사고 주인공은 김성근이 아니라 한양대 인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성근은 계속 충암고 지휘봉을 잡을 수 있게 됐다.

이 시기에 충암고 재학생중에 윤석열 대통령이 재학생이었다.

1979년[11] 절친이었던 김동엽과 만난 자리에서 야구 명문 신일고 감독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김성근은 "내가 거기 가볼까나?"라고 말하며 농담했는데, 이에 행동파였던 김동엽이 신일고 이사장과 교장까지 직접 데려와 압박하며 김성근을 신일고 감독에 앉히는데 성공했다고 한다.[12]

이때 김성근은 아직 충암고와 3년이나 계약이 남아있던 상태였고, 법적 분쟁 끝에 김성근은 충암고와의 계약금을 뱉어내야 했다. 김성근 스스로도 충암고 자체에는 난데없는 계약 파기 통보를 했던 기억 때문에 아쉬움이 없었지만, 당시 안정적이던 기업은행 직장을 그만두고 충암고 감독을 맡은 것은 그 계약금 때문이었다고 아쉬움을 표한 바 있다.

이후 충암고는 여기에 맞대응, 당시 신일고 감독직을 그만둔 한동화를 급히 영입하면서 결국 양쪽의 스승이 바뀐 모양새가 되었다. 언론에서도 김성근, 한동화의 맞교환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충암고와 신일고의 경기는 배반당했다고 생각한 충암고 선수들이 독기를 품으며 덤비는 통에 당시로서도 제법 과열된 양상이었다.

2.4. 신일고 감독

파일:ededesfff.jpg
파일:신일고 야구부.jpg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시절

김성근의 신일고 시절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당시 신일고 야구부는 1975년에 창단된 직후 1976년과 1978년 황금사자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신흥 야구 명문고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1979~81년 동안 신일고는 4대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봉황대기에서 우승은커녕 결승에도 한번도 진출하지 못했다.[13]

사실 이는 선수층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기존 우승을 이끌었던 신일고의 주축 선수는 1983년 KBO 신인왕 박종훈, 양승호. MBC에서 활약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정수 등 프로 무대에서도 성과를 보였던 선수들이었다. 김성근 감독 시기의 주축 선수였던 이재홍, 서효인 등과는 애초에 급 자체가 달랐던 것. 다만 이 시기 제자였던 민경삼이 이후 SK 와이번스 시절 단장이 되어 김성근 감독을 영입, SK 왕조를 이끌었다.

1981년 이재홍 건국대 진학 강요 사건이 언론에 터졌다. 당시 신일고는 기대했던 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는데다 고분고분하지도 않은 김성근을 내치고 싶어 했는데, 때마침 입시 비리 사건이 터지자 곧바로 "우리 학교의 컬러에 맞지 않는 지도자"라며 김성근을 경질하기에 이른다.
김 감독이 그만두게 된 진짜 이유는 연세대와 건국대의 스카웃 싸움 대상 선수였던 이재홍 투수의 대학 진학 문제를 놓고 김 감독이 이재홍의 유니폼을 벗기면서 건국대 진학을 강요한 후유증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 이재홍에 대한 각 대학 팀들의 스카웃 싸움이 치열해지자 김 감독은 4명의 선수를 더 받아주겠다는 건국대 진학을 권유, 이재홍도 이를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9월 들어 이재홍이 돌연 연세대행을 고집하고 나섰다. 김 감독은 "고락을 함께 한 4명의 동료 선수를 위해 동료애를 발휘하라"고 설득하다가 이재홍이 끝내 말을 듣지 않자 황금사자기 서울 예선 때 이의 유니폼을 벗기는 강경 수단을 동원했던 것.
- 경향신문, 1981-10-28

해당 사건은 이러하다. 당시 신일고 에이스였던 이재홍에게 연세대와 건국대에서 동시에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는데, 김성근이 이재홍에게 동기 선수 4명을 같이 데려가겠다는 건국대에 진학할 것을 요구한 것. 처음에는 이재홍 또한 이에 동의하였으나, 9월 이재홍이 뜻을 바꿔 이를 거부하고 연세대 입학을 고집하자 김성근은 이재홍을 경기에 출장시키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김성근 감독은 신일고 감독에서 해임되었다.

당시에는 기량이 뛰어난 유망주가 입학하면 주위의 대학에 갈 실력이 되지 않는 동기 선수들을 끼워 입학시켜주는 관행이 있었다. 이는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던 관행이었는데, 이러한 관행으로 희생된 대표적인 선수로 강혁이 있다.[14] 마침 건국대가 이재홍을 영입하는 대가로 신일고의 다른 동기생도 몇명 끼워서 입학시켜 주겠다고 제의해왔던 것이다. 김성근은 동기선수도 입학시킬 수 있는 건국대에 진학할 것을 요구한 것. 이에 대해 김성근 본인은 학생야구는 인성, 의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런 유망주 끼워팔기 식의 입학 관행은 야구에만 전념하다 앞으로의 길이 막막해져버린 선수들을 구원해주는 역할도 하였지만, 동시에 부유층 자제의 편법적인 대학입학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즉 공부로 인문계 고등학교도 가기 어려운 부유층 자제를 운동부에 거액의 지원금을 내고 특기생으로 입학시킨 후, 운동부에 이름만 걸어놓고 해당 운동부의 유망주가 끼워팔기 조건을 제시한 대학에 입학할 때 끼워서 입학시키는 것으로 악용되었던 것. 따라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보지 않는 한 그 진의을 알기는 어렵다.[15]

당시 신일고 감독 경질에 대해서는 오히려 김성근보다 이를 중재했던 김동엽의 분노가 훨씬 컸는데, 곧바로 신일고 교장집까지 찾아가 차로 집을 들이받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고 전한다.

그리고 김성근이 실업자가 된 이 시기, 프로야구가 개막하였다.

3. OB 베어스 투수코치-감독 시절

3.1. OB 베어스 투수코치 임명

OB 베어스 No.38
김성근(金星根)
파일:external/img.kbs.co.kr/07.jpg
파일:OB 베어스 엠블럼.svg OB 베어스 투수코치 시절

프로야구 원년 당시 각 팀은 감독 1명에 타격-투수코치 각 1명씩 코치 2명 수준이었는데, OB로 가기 전에도 심말룡이 김성근을 끌어들여 당시 프로야구에 가장 늦게 뛰어들었던 삼미와 교섭하려 하였다가 실패한 일도 있었다. 이후 삼성 감독으로 선임되었던 서영무로부터도 제의가 들어왔다.[16]

이처럼 당시 감독과 코치 선임에는 기업들의 의사도 있었지만, 해당 기업 야구단에 들어가려는 야구인들, 그리고 이미 영입이 확정된 상태에서도 프런트와 기싸움을 벌이며 자신만의 코치진을 구성하려 하는 등 여러 의미로 치열한 싸움이 진행되었다. 김성근 또한 당시 프로야구의 창설 주역이자 해설가로 활약했던 이호헌을 만나 어디든 좋으니 기회를 베풀어달라고 사정하기도 하였다.[17] 그리고 최종적으로, 김성근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투수 코치가 되었다.

김성근의 투수코치 기용의 배경에는 삼화왕관 최인철 회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 두산 그룹에서 야구통으로는 으레 최인철 회장이 꼽혔으며, 때문에 두산이 프로야구 창단을 굳힌 뒤에도 최 회장은 자문역을 맡고 있었다. 이때 최 회장의 추천이 감독으로는 천안북일고의 김영덕, 코치로는 신일고의 김성근이었다. #

당시 OB 구단 단장 겸 대표이사였던 박용민에 따르면, 구단 창단 당시 자신은 야구에 대해 아무도 모르던 시절이었으며 그 조언에 따라 김성근을 처음 만나봤다고 한다. 직접 만났더니 무뚝뚝한 게 말이 없어서 선수들을 잘 휘어잡을 거 같아서 그를 코치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고. 동시에 김성근은 면접 과정에서 일본통인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에게도 큰 신임을 얻게 되었다.

다만 문제는 감독 김영덕과의 사이였다. 김영덕과 김성근은 같은 재일교포 출신이며 같은 교토 출신이었다. 또 김영덕이 일본에서의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에 시달리자, 김성근이 한국 실업야구에서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른살에 한국 실업야구에 진출, 고국 땅을 밟았던 인연도 있었다. 하지만 김영덕 감독은 강병철, 조창수 등을 코치로 인선하려 하였고, 비록 친분이 있었음에도 성격이 강했던 김성근을 꺼렸다.

실제로 최인철 회장의 조언에 따라 김성근의 투수코치 임명이 확실시되자, 김영덕 감독은 펄쩍 뛰며 이를 반대하였다. # 하지만 강병철, 조창수 등이 모두 코치 임명을 거부하였고, 김영덕 본인 또한 이호헌 등에 사정하면서 감독에 임명될 수 있었던 만큼, 당시의 김영덕은 발언권이 그리 큰 감독은 아닌 상황이었다. # 결국 구단 수뇌부에서 김성근을 투수코치로 내정하자, 김영덕 감독은 김성근에게 직접 연락해서 "난 솔직히 말해 네가 싫어서 말 안 했다. 위에서 널 쓰라고 하니 어쩔 수 없어 말하는데 내일 한번 들어와 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영덕-김성근-이광환의 원년 OB 베어스 코치진이 구성되었다.

1982년 OB 베어스는 원년 우승을 달성하였으나, 이러한 상황이었던 만큼 김영덕 감독과 김성근 코치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성격이 워낙 강했던 둘이었던 만큼, 시즌 중에도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았다. 김성근이 올린 2군 선수를 김영덕이 다시 교체해버리면서 김성근이 경기 도중 가방을 싸서 경기장을 빠져나가버린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존의 인연이 있었던 만큼 이때까지는 사이가 완전히 갈라진 상황은 아니었으나, 이는 후술할 일화가 이어지면서 사실상 앙숙 지간으로 악화되었다.

3.2. OB 베어스 감독 선임과 김영덕과의 악연

OB 베어스 No.81
김성근(金星根)
파일:OB베어스 김성근 감독.jpg
파일:OB 베어스 엠블럼.svg OB 베어스 감독시절[18]

1984년, 김성근은 김영덕에 이어 OB 2대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당시 삼성 측에서 김성근에게 5년 계약을 제안하였는데, 김성근은 삼성측에 “투수코치라면 유백만에게 맡겨보라”고 조언한 뒤 김영덕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코치 계약이 아니라 감독 계약이었다. # 당시 김영덕은 그런 자리가 있으면 나한테 양보하라고 말했다 하는데, 당시에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닥쳐온 것이다.

82-83년 OB와의 2년 계약이 끝나가던 김영덕은 10월 14일 구단 측에 “박철순이 다친 것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 1년간 일본으로 건너가 야구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OB 박용곤 구단주는 일본 유학을 떠난다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로부터 11일 후인 10월 25일 김영덕은 삼성과 감독계약을 맺었다. 이미 막후협상을 통해 계약 합의를 해둔 상태였다.

다만 이걸 김성근에게 온 제의를 가로챈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상황이다. 당시 삼성 노진호 단장이 밝힌 바로는 이때 김영덕, 김성근, 김진영 세 명에게 동시에 제의가 들어갔다고 한다. 이걸 서로 모르는 상황에서 김성근이 이를 김영덕에게 보고하자, 김영덕이 잽싸게 먼저 계약을 성사시킨 것.

이러한 이유로 김성근-김영덕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OB-삼성의 관계도 4차 대전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앙숙 관계가 되었다. 1984년 시즌 초 3연전 마지막날, 당시 경기 중 OB의 신인 포수 배원영이 선배들의 지시에 따라 삼성 벤치를 향해 김영덕 감독이 가장 싫어하던 별명인 "변태"를 외치며 놀리자, 경기 후 김영덕 감독이 OB 덕아웃을 찾아와 따귀를 날린 사건이 대표적. 그 해 두 팀은 4차례나 신경전[19]을 벌이면서 4차 대전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대표적인 앙숙 사이로 자리 잡았다.

3.3. 1984년의 선전과 져주기 게임 사태

1983년 리그 종료까지만 해도, OB 베어스의 전력에 대한 시선은 그리 좋지 않았다. 1982년 원년 우승을 달성하였다고는 하나, 그를 이끌던 불사조 박철순은 원년 혹사의 여파로 지병이던 허리 디스크가 재발하면서 1983년 시즌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수모, 더는 쓸 수 없는 카드가 되어버렸다. 그 외에도 선우대영, 강철원 등 주력 투수와 구천서 등 야수진이 줄줄이 부상당하면서, 전기 리그 6위, 후기리그 5위를 기록하며 사실상 리그 꼴찌 팀으로 전락하였다.

이런 분위기로 기대 없이 시작한 1984년이었지만, 당시 김성근 감독의 OB는 굉장한 선전을 하였다. 이러한 성과에는 강력한 투수진이 뒷받침되었는데, 신인 윤석환은 KBO 역사상 최초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으며 최종 성적 12승 8패 25세이브, 방어율 2.84를 기록하였으며, 역시 신인이었던 우완 사이드암 김진욱은 4월 한달간 4승 1패, 방어율 1위를 기록하며 초반 돌풍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하였다. 1984년 방어율 1.58로 방어율 1위에 오르는 기교파 장호연과 14승 4패 방어율 2.06을 기록한 계형철 등 기존 투수진들도 힘을 보탰다. 한편, 앙숙이었던 삼성 또한 4월 한달 동안 11승 5패로 7할에 육박하는 호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OB의 이러한 기세는 두번째 삼성과의 3연전에서 리그 1위 자리를 내주기에 이르렀고, 난투극까지 동반한 삼성과의 3번째 삼연전을 치른 이후인 5월 말에서 6월 초에 이르면 급격히 날개가 꺾였다. 결국 전기 리그를 30승 20패, 승률 6할로 마무리지은 OB는 전기 리그 1위 삼성에 두 경기 뒤진 2위의 성적으로 전기 리그를 마무리지었다.

삼성은 후기 리그 또한 몰아붙이며 통합 우승을 노렸지만, 7월 말 MBC와 OB를 상대로 벌인 5연전에서 1승 4패를 거두며 단숨에 중위권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되자 후기 리그 우승은 물건너 갔다 생각한 삼성은 한국 시리즈에 대비해 전력을 보존하고 상대적으로 만만한 팀이 올라오게 만들자는 작전으로 선회하였고, 그 과정에서 당시 1위를 다투고 있던 OB와 롯데 중 앙숙으로 껄끄러웠던 OB 대신 롯데를 밀어주는 전략으로 작전을 바꾸었다.

여기서 당시 야구 리그 룰을 이해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플레이오프가 없이 전기-후기 리그 우승 팀끼리 승부를 짓는 한국 시리즈만이 있었다. 즉 전기 리그를 우승한 삼성은 이미 한국 시리즈 진출은 확정된 상황이었고, 만약 후기 리그까지 우승하면 한국 시리즈 없이 통합 우승으로 끝나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미 후기 리그 우승이 힘들어진 상황에서, 만만한 롯데가 올라오도록 유도하려는 것이 삼성의 목표였다.

당시 OB는 전기 리그에 이어 후기 리그도 2위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최종 2경기에서 OB는 해태와, 삼성은 롯데와 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여기서 OB는 자신들이 남은 두 경기를 다 이기고 롯데가 최소 한 경기라도 지게 되면 순위 결정전을 치르게 되는 상황이었고, 롯데가 2패를 거두게 되면 1위로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의 2연전은 양쪽 모두 조작 상황이 들어가는데, 해태는 제과업계 라이벌인 롯데가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것이 껄끄러웠고, 삼성은 앙숙인 OB보다는 롯데가 진출하길 원했다. 그 결과 양측 모두 1.5군을 내보내고 어이없는 플레이를 남발하였으며, 오죽하면 이런 플레이에 열받은 MBC 방송국 측에서 경기 중계 중단을 심각하게 검토했을 정도의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누가누가 못하나의 져주기 경기 끝에 OB와 롯데 모두 2연전에서 승리를 거뒀고, OB는 0.586으로 전후기 리그 통합 승률 1위를 기록했음에도 모두 2위에 그치며 한국 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20] 반대로 삼성은 원하는 상대였던 롯데를 한국시리즈에서 만났지만, 아직까지도 전설로 회자되는 한 미친 투수 말도 안 되는 플레이로 1984년 한국 시리즈는 롯데의 우승으로 끝나고 말았다.[21]

3.4. 계속된 가을 야구 성과 부진과 프런트와의 갈등

김성근 감독의 OB는 이후로도 계속 리그 규칙으로 고통받았는데, 1985년 또한 전기 리그 2위, 후기 리그 5위를 기록하며 탈락하였다. 1986년 후기 리그 1위를 기록하였으나, 이때는 또 제도가 바뀌어 플레이오프 시스템이 생겼다. 당시 제도는 전후기 리그 2위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이 제도가 굉장히 기형적이어서 만약 자격이 2번 겹치는 팀이라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형태였다. 그 결과 전후가 2위였던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고, 앙숙이었던 삼성과 감독 임명 이후 첫 가을 야구를 치르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 가을 야구 보너스를 두고 선수단의 항명이 발발했고, 결국 선수단이 플레이오프 훈련을 앞두고 도망쳐버리는 대형 사태가 벌어졌다. 심지어 구단 또한 이에 대해 강경 대응하며 선수들에게 보너스를 받을 거면 임의탈퇴로 처리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등 내홍이 굉장히 심각하였다. 결국 감독의 중재로 상황은 무마되었지만, 삼성과의 플레이오프는 5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패배로 종결하였다.

1987년에도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성공하였으나, 역시 해태의 김응용에게 4, 5차전을 내주면서 가을 야구가 종료되었다. 이에 1988년부터 OB 구단 내에서는 김성근 경질을 위한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팬들에게 ‘김성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하고 다녔다. 심지어 88년 시즌 도중 구단 사무실에서 신임투표까지 부쳐졌다는 얘기까지 나오면서, 사실상 OB와 김성근의 관계는 끝났다는 게 일반론이었다.[22]

김성근 감독이 구단으로부터 배척당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첫번째 사례는 87년 플레이오프가 끝난 직후였다.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OB는 9회초까지 3:2로 리드, 한국시리즈 진출을 목전에 두었으나 9회말 2사후 유지훤이 주춤거리는 바람에 동점을 허용하고 기어이 역전패당했다. 결국 5차전마저 내줘 아쉽게도 그것으로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김성근 감독은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급성간염에 걸려 영동정형외과에 입원했다가 1주일뒤에는 강동성심병원으로 병상을 옮겼다.

김성근 감독은 양쪽 병원을 합쳐 보름이상 입원하고 있었으나 박용민 단장, 경창호 이사는 물론 구단 직원 중에서 문병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몇몇 선수들이 문병을 가려고 하자 구단이 가지 말라고 말렸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안부 전화나마 걸어준 사람은 민병준 구단사장뿐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이때 구단 프런트에 철저한 배신감과 환멸을 느끼면서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한다. 구단이 김성근에게 알리지 않은 채 이광환을 2군감독에 임명한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임기 초기에는 일본통인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종신감독, 못해도 최소 10년 이상 재임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다.[23] 총수 일가 출신인 박용민 단장도 "한국 풍토에서 나오기 힘든 한팀 10년 감독을 만들겠다."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박용민 단장은 김성근이 몰수게임 파동 등 사건를 일으킬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언론에 대고 직접 김성근을 감싸주었고 이 때문에 김성근은 몇 차례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 자신이 박용곤 회장 등 그룹 수뇌부와 직접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려는 모습에 대한 프런트의 반감이 겹치고, 점차 프런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갈등이 빚어졌다. 무엇보다 당시 OB의 프런트가 굉장히 일을 부지런히 하는 축이었기 때문인지도. 그리고 이 과정에서 OB 프런트가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밀었던 차기 감독 후보가 김성근과 같은 원년 코치 출신이었던 이광환이었다.

3.5. 원년 멤버 중 가장 오랜 원팀맨의 사임

파일:RXs3JoH.jpg
이광환과 김성근

이광환은 원년 OB 시절 타격코치로, 사진과 같이 김성근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24] 그러나 둘은 야구관이 굉장히 다른 편이었는데, 김성근 감독이 한국 야구 초기 관리야구의 대표 주자였다면 이광환은 자율야구의 대표 주자로 이후 한국 프로야구의 양대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1988년 미국 연수를 다녀온 후 OB 2군 감독에 취임하면서, 이광환은 김성근 OB 감독의 스파르타식 야구에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기자들에게 의견을 피력하여 기삿거리를 만들었다.[25]

이러한 둘의 야구관 갈등은 초창기부터 계속해서 있었다. 원년 당시 타격코치였던 이광환은 김성근과 타격 이론의 차이 및 식단에서까지 차이를 나타내며[26] 충돌을 빚은 바 있었다. 또 타격 이론에서도 김성근은 일본 야구 스타일대로 배트헤드의 스윙스피드를 이용한 타격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이광환은 근육의 힘은 직선 운동이 아니라 물걸레짜듯 비트는 데서 훨씬 강하게 나온다는 인체 생리학에 의거한 타법을 펼쳤다. # 코칭 스태프로서의 직무에 대한 생각도 두 사람은 엇갈렸다. 김성근 감독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손수 보살피고 가다듬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반면 이광환 코치는 야구 이론을 통일시키되 전문 코치로서의 활동 영역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27] 이에 따라 이광환은 사장, 김성근은 가정교사라는 기사도 후에 나온 바 있다. #

프런트에서는 이에 대해 일단 이광환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보내는 것으로 갈등을 봉합했다. 하지만 1988년에 이광환이 귀국하면서 구단은 김성근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광환을 2군 감독으로 임명하였고, 선수 콜업 문제 및 처우 문제 등으로 인해 사사건건 갈등하게 이른다.
“김 감독이 언짢아한 건 맞아. 자기 후임이 될 사람을 데려왔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나. 그때 김 감독에게도 말했지. ‘사장이 죽어도 기업은 계속된다. 기업이라면 반드시 차기 사장감을 키워야 한다. 야구단도 마찬가지다. 항상 포스트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김 감독이 대놓고 이광환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럴 사람은 아니다.”
- 박용민 당시 OB 베어스 단장 #

여기에 프런트가 은근히 이광환의 편을 들었다. 당시 구단 관계자들은 대놓고 "대통령도 후계자를 키우는 판에 전문기술로 먹고사는 야구감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닌 이상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후임자를 키우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김성근감독이 저만 잘하면 앞으로도 5년이건, 10년이건 얼마든지 OB감독을 더할 수 있는 게 아니냐. 그런데 왜 공연히 이광환 2군감독을 의식하는지 모르겠다." 라는 식으로 언플하였다. 하지만 김성근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후임자를 키운다는 개념이 문제가 아니라 등뒤에 자기가 원치 않는 후임자가 자리를 노리고 앉은 상황이었고,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의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탁기 사건. 당시 선수들은 직접 빨랫감을 날랐는데 이광환 감독이 미국에서 본 것을 따라서 2군 연습장에 세탁기를 도입한다. 이를 알게 된 김성근 감독이 2군에 대한 특혜라고 판단하여 1군에도 요구하지만 프런트는 생트집잡는다고 거부한 사건인데, 결국 1군 선수들은 여전히 빨랫감을 나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이 이광환 2군 감독보다 파워게임에서 밀렸다는 인식이 선수들 사이에 퍼졌다.

여기에 OB 프런트는 노골적으로 OB맨들을 코치로 기용하면서, 김성근 감독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8년 타격코치로 원년 OB 선수였던 김우열을 데려온 것. 당시 프로야구에서 타격코치는 한명으로 고정되었는데, 이는 한꺼번에 두명을 두어 타격 이론이 서로 어긋나게 되면 지도를 받는 선수들이 헷갈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OB 박용민 단장은 윤동균에게 좌타자들을, 김우열에게 우타자들을 맡긴다는 ‘복수 타격 코치’제도를 구상하고 있었다. 명분상으로 이는 확실히 다른 구단보다 앞서가는 구상이었고, 김우열의 복귀는 이런 취지의 일환이었다.
OB 베어스가 89년에 대비한 제3대 코칭스태프 구성을 마쳤다. OB는 김우열(39)을 타격코치로 받아들이면서 ‘장기적인 코칭스태프 개편’의 단계를 마무리, 세대교체가 임박했음을 예고해주고 있다. OB 창단 멤버인 김우열의 복귀는 ‘단순 복귀’이상의 몇가지 복선이 깔려 있다. 빙그레와 마찰을 각오하면서 김우열의 복귀를 강력하게 추진한 OB의 속마음은 바로 앞으로 다가온 ‘김성근 후계 체제’에 대비한 사전포석과 구단의 운영 방침을 은연 중에 제시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 김감독은 비교적 약체인 OB를 이끌면서 기대 이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지난해부터 구단과의 마찰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OB의 미래 감독' 점찍어 놓은 이광환씨가 귀국하면서 김 감독은 "2군에 차기 감독이 와 있다", "구단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간에 계약 만료와 함께 나는 OB를 떠나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해왔다. ... OB는 김성근 감독의 퇴진을 기정 사실화해놓고 ‘제3대 감독’을 위한 코칭 스태프 개편의 첫 작업으로 김우열의 복귀를 추진하는 셈이다. ... 제3대 감독 체제로의 변환을 추진하고 있는 구단의 구상을 보면 1군에 감독 이광환, 투수코치 박철순, 타격코치 윤동균, 김우열, 수비코치 이삼열이고 2군은 이선덕, 최주억 또는 선수중에서 승격된 코치가 맡을 가능성이 높다.
주간야구, 1988-06-08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이천 구장에서 김우열을 처음 만나자마자 김성근 감독은 "야 임마. 네가 코치로 오기로 했으면 먼저 나한테 전화로라도 알렸어야 할 게 아냐. 너와 나 사이가 그것밖에 안되는 거야? 그동안 전화 한 통 할 시간이 없었어? 맹추같은 놈."이라고 화부터 냈다.[28] 감독 휘하 코치를 데려오면서 이러한 이야기가 정작 감독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 즉 표면적으로는 우타자 지도를 위해 김우열을 데려왔다고 하지만 OB구단은 소위 'OB맨'들로 코칭스태프를 채우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김성근은 자신이 물러난 뒤에 ‘포스트 김성근 체제’를 갖추려는 취지에서 구단이 미리 김우열을 데려다 놨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김우열의 등장이 곧 자기 등을 떠미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 김성근은 박용곤 구단주와의 독대 이후 사퇴를 결정하였다. 1988년 시즌 종료 후 계약이 종료되면서, 김성근은 팀을 나오게 되었다. 재계약 제의를 안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질, 해고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계약 만료가 맞다. 원년 코치로 2년, 감독으로 5년, 총 7년 동안 전 구단 유일하게 원년부터 코칭 스태프를 지켰던 유일한 원맨팀의 쓸쓸한 마지막이었다.

김성근 감독의 공식 결별 선언 이후 OB 베어스의 행보는 마치 정해진 것처럼 일사천리였다. 9월 8일 MBC와의 시즌 최종전. 이날 김진욱의 완봉 역투에 힘입어 OB는 김감독의 고별전을 1:0으로 승리했으며, 바로 다음 날인 9월 9일 OB는 이광환 2군감독의 1군승격을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감독에 올랐던 이광환 감독도 자율야구라는 걸 이해 못한 선수들과 프런트 때문에 1990년 시즌 도중에 해임당하였으며, 이후 1990년대 초 OB는 하위권으로 몰락하고 김인식 감독이 부임한 1995년에 이르러서야 두 번째 우승을 하게 된다.

3.6. 김성근 시절의 OB

3.6.1. 긍정적 측면: 마무리 투수와 로테이션의 도입

김성근 감독은 당시 타 팀과는 전혀 다른 운용으로 눈길을 끌었는데, 그 시작은 윤석환이었다. 당시 윤석환은 김성근이 한국 야구 최초로 마무리 투수를 도입한 사례로 치켜세워지고 있다. 이 시기 야구는 최동원의 롯데, 선동열의 해태, 장명부의 삼미, 심지어 원년 OB조차 박철순의 OB로 상징되는 등 특정 에이스가 팀을 이끌면서 선발, 구원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등판하며 팀을 이끄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김성근의 OB 베어스는 당시 최초로 선발 로테이션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김진욱, 계형철, 최일언 등이 선발을 도맡았으며, 선발이 지칠 무렵 윤석환이 등장하여 3이닝 정도를 던지면서 게임을 매조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윤석환은 57경기 146이닝 12승 8패 25세이브 평균자책점 2.84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그 결과 구원왕과 신인왕을 모두 거머쥐었다.

다만 이 시기의 마무리는 라루사이즘의 영향을 받은 후 만들어진, 지금과 같은 1이닝 마무리 투수는 아니었다. 즉 일명 중무리 투수. 그렇기에 당시의 마무리 투수 도입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으나, 이후 김성근 감독의 커리어 내내 따라다녔던 불펜 혹사 논란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윤석환은 84년 혹사의 여파로 첫해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으며,[29] 1988년 13승 3패 14세이브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으나 그 이후 다시 또 부상을 당하면서 더는 재기하지 못하였다.

이 시기 로테이션 개념을 도입하면서 김성근 휘하의 OB 베어스는 원년 에이스 박철순의 이탈에도 불구, 강력한 투수 왕국을 구축하였다. 이 당시 OB 베어스의 주축 투수였던 선수들이 계형철, 최일언, 김진욱 등. 특히 계형철은 당시 볼은 빠르지만 제구력은 형편없는 투수로 유명했는데, 김성근 감독 휘하에서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두 자리 승수를 올리며 맹활약하였다.[30] 최일언 또한 입단 3년차였던 1986년 19승 4패 방어율 1.58로 성적을 기록하며, 승률 타이틀을 수상하며 선동열의 4관왕을 저지하고 200이닝 이상 피안타율 1할의 대기록을 달성하였다.[31]

기존 서술에서 김성근의 문제가 성적 부진이었다고 되어 있었는데, 사실 원년을 제외하면 OB 베어스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하위권으로 분류되었던 팀이었다. 그럼에도 1984년 전기 리그 2위, 후기 리그 2위(전후기 통합 승률 1위)를 기록, 1985년 전기 리그 2위, 1986년 후기 리그 1위, 1987년 전기 리그 2위를 기록하는 등 성적이 그렇게까지 나쁜 편은 아니었다. 1988년 성적은 전기 리그 3위, 후기 리그 5위, 통합 5위로 성적이 부진했지만, 이미 김성근-이광환의 파워 게임으로 팀이 난장판이 된 이후의 기록. 다만 여러모로 운이 따르지 않아 통합 승률 1위에도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한 1984년, 계속된 가을야구에서의 역전패 등으로 이미지를 망가뜨린 것은 사실이었다.

3.6.2. 부정적 측면: 신인 육성 실패와 비매너 플레이 양산

다만 신인 육성에서는 그리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는데, 재임 5년 동안 OB 베어스의 주전 선수들은 대부분 기존부터 주전이었던 선수들이 많았다. 야수 김경문, 조범현, 신경식, 구천서, 유지훤, 양세종, 윤동균, 김광수, 박종훈, 한대화, 김우열과 투수 황태환, 박철순, 계형철, 박상열, 장호연, 강철원이 그들이다. 김성근 감독 첫해인 1984년 신인 윤석환, 김진욱, 최일언 투수 3인방과 외야수 김광림이 데뷔 첫해부터 주전을 차지했지만, 그 첫해를 제외하면 나머지 네 시즌 동안 주전으로 성장한 신인이 없었다.

그나마 김형석(85년 입단)과 박노준(86년 입단)이 1군에 기용된 신인이었지만, 김형석은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김성근 시절에는 확실히 주전을 차지하지 못했다. 박노준은 김성근 시절에 투타 겸업으로 기용되며 집중력 결여와 혹사로 결국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선수생명이 단축된 사례다. 박노준은 데뷔시즌인 86시즌에 타자를 겸하면서도 투수로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굴려지며 33경기에 등판해 110⅓이닝을 던져 5승 6패 7세이브(3위)를 거두는 혹사를 당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에 혹사의 여파로 부상을 당했고 그 와중에도 김성근에 의해 굴려지며 ERA가 6점대로, 그 다음해는 18점대로 치솟아 결국 투수로는 더이상 쓸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타격 부문에서도 대타로만 기용되며 이도저도 아닌 선수가 되고 말았다.[32]
OB-MBC전은 5-5 동점에서 MBC가 6회말 공격을 펼칠 때, 1사 후 주자 1-3루에서 2루 스틸을 시도하던 1루 주자 박흥식이 3피트라인을 벗어났기 때문에 아웃이라는 OB의 주장과 벗어나지 않았다는 심판의 판정이 팽팽히 맞서 끝내 몰수 게임으로 망가지고 말았다. ... 김성근 감독은 박흥식이 2루에서 1루로 되돌아 뛸 때 3피트 라인을 벗어났으므로 당연히 아웃이며, 박의 아웃이 즉시 선언됐다면 유의 홈인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신판진에 항의, 선수들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이근우 주심, 김양경 2루심을 비롯한 심판진은 OB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경기가 중단되자 두번의 경고를 발한 뒤 19분만에 그대로 OB의 몰수 게임 패를 선언하였다. OB는 일단 심판의 판정에 승복하고 계속 경기에 임하든지 불만이 있으면 제소할 것을 미리 선언하고 경기에 들어가야 마땅했는데도, 스스로 자해의 길을 택함으로써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됐다.
- 경향신문, 1985-07-17

OB 시절 김성근 감독은 1974년 실업리그 기업은행 시절의 몰수 게임에 이어 두번째 몰수 게임을 당했다. 당시 3피트 라인 아웃 판정은 분명 김양경 2루심의 판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선수단 철수까지 갈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고, 김성근 감독의 깐깐한 규칙 따지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규칙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하는 김성근 감독의 특징이 드러난 사건이긴 하지만, 동시에 팀에는 큰 해악으로 다가온 사건.

이 경기로 김성근은 4게임 출장정지와 벌금 50만원, 이근우 주심은 5게임 출장정지와 벌금 20만원의 징계를 받았다. 당시 오심과 몰수게임에 대한 OB의 제소가 묵살되고 김양경 2루심은 제재를 받지 않았는데, 그러자 OB 베어스의 박용민 단장이 구단 해체 불사 발언까지 하며 문제를 제기했고 김양경 2루심이 5경기 자진사퇴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OB-MBC전에서 유례 드문 부정위 타자 시비로 28분 간이나 경기가 지연. 시비의 발단은 9회 구원 투수로 나온 OB 박노준이 9회말 공격에서 8번 김경문의 자리에서 타격을 한데서 비롯됐다. 야구 규칙은 투수가 타자로 나올 때는 지명타자 자리에 들어가도록 명시되어 있으나, OB 김성근 감독이 실수를 범한 것이다. 상대 팀은 박이 타격을 끝낸 후 투수의 투구전에 주심에게 어필하면 아웃이 선언되나 MBC의 김동엽 감독마저 이 시기를 놓쳤다. MBC는 뒤늦게 어필했으나 이규석 주심은 박은 정위타자로 간주된다고 해석, 옥신각신이 벌어졌다. MBC는 이 경기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제소 게임으로하고 계속 경기를 벌였다.
- 중앙일보, 1986-07-05
야구 규칙에 ‘심판원은 부정위타자가 타석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주의를 환기시켜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이 주심은 룰대로 경기를 진행했고, 박노준은 3루수 앞 땅볼로 2사 2·3루 상황을 이어줬다. 이상하게 MBC 김동엽 감독은 조용했다. 여기서 김성근 감독은 또 대타 이승희를 썼다. 3루수 앞 땅볼로 결국 연장전. 김동엽 감독은 10회말 1번 김광수가 타석에 서자 그제야 규칙서를 본 뒤 이 심판에게 따지고 들었다. 박노준이 8∼3번을 뛰어넘어 4번으로 나섰고, 이승희는 또 5∼8번이 아닌 9번으로 나서 OB가 2차례나 부정위타자를 쓴 셈이었다. 김동엽 감독이 “박노준은 ‘부정위타자’가 아니라 ‘부정선수’이기 때문에 몰수게임이 돼야 한다”고 흥분하면서 21분간 경기가 중단됐다. 그러나 어필 시기를 놓친 뒤였다. 연장 11회말 박노준이 4번타자로 나서려고 하자 김동엽 감독은 또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연장 11회말 시간제한 1-1 무승부로 끝났다.
- 스포츠동아, 2014-03-13 #

1986년에는 프로야구 초유의 부정위타자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86년 7월 4일 잠실 MBC-OB전. 1-1 동점이던 9회말 OB는 선두타자인 5번 김형석이 MBC 에이스 김건우를 상대로 안타를 친 뒤 6번 김광림의 희생번트로 1사 2루 찬스를 잡았다. MBC는 소방수 김용수를 투입해 7번 유지훤을 고의4구로 걸렀다. 1사 1·2루 8번 김경문 타석. 여기서 OB 김성근 감독(현 고양 원더스 감독)은 이규석 주심에게 다가가 “박노준이 대타를 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 주심은 “안 된다”고 답했다.[33]

부정위타자의 기본규칙을 요약하면, 우선 부정위타자가 타격을 끝냈을 때 다음 타자에게 투구하거나 다른 플레이를 하기 전 주심에게 어필하면 정위타자는 아웃된다. 부정위타자의 타격에 의한 진루나 득점은 모두 무효. 만약 타격을 완료하기 전이면 상대방의 어필시 정위타자가 볼카운트를 이어받아 타석에 서면 된다. 어필이 없으면 부정위타자는 정위타자로 인정받고, 그 다음 타순으로 이어진다.

김성근 감독의 이미지를 봤을 때 규칙을 몰랐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심지어 2번에 걸친 부정위타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굉장히 독특한 상황. 이는 야구 규정의 맹점과 김동엽 감독의 무지를 이용한 비매너 플레이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심지어 전술한 신일고 감독 임명과 같이 김성근과 김동엽의 관계는 굉장히 절친했었음에도 이런 수를 썼다는 것.
OB 김성근 감독은 덕아웃에 모종의 사인을 보낸 뒤, 타임을 걸고 최일언에게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팬들에게는 OB 김 감독이 투수를 교체할 것처럼 비쳐졌다. 그러나 김 감독은 벤치로 돌아온 뒤, 뒤 차례에 걸쳐 대폭적인 내외야 선수 이동을 단행했다. ... 한참의 선수 교체로 시간을 벌여 숨을 돌린 최일언은 MBC 대타 송영운을 병살 타구로 처리했으나, 내야수로 기용된 유지훤이 1루에 악송구함으로써 한점을 잃었다. 그러나 계속된 주자 2루의 실점 위기에서 좌익수 김광림은 MBC 윤덕규의 안타로 홈까지 파고들던 MBC의 대주자 김봉기를 홈에서 잡아내는 멋진 송구를 했다. ... OB의 김 감독은 "애초부터 최일언을 교체할 의도는 없었다. 앞서고 있으니 수비로 승리를 굳힐 생각이었다. 덕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몸을 풀 시간을 벌기 위한 제스처였다. 또한 최일언에게도 한숨 돌릴 시간을 주기 위한 의도였다"라고 작전 성공에 만족해햇다.
- 동아일보, 1987-05-02

김동엽에게는 한번 더 작전으로 골탕 먹인 적이 있다. MBC가 분위기를 타면서 역전 찬스가 나오며 대타를 쓰자, 투수 교체를 하려는 척하며 수비수 위치 교체 등 시간 끌기로 상대의 흐름을 끊고 투수가 숨 돌릴 시간을 버는 전술을 사용한 것. 규칙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역시나 정상적이지 않은 플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김성근 감독은 규칙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갖은 수를 써서 이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그건 이후 김성근 야구 내내 이어지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비판론자들에게서는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매너 플레이를 일삼는 악마 같은 감독, 옹호론자들에게서는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변화무쌍한 전술로 승리를 가져오는 감독이라는, 실상 내용은 같지만 정반대의 해석으로 양쪽이 충돌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4. 태평양 돌핀스 감독

태평양 돌핀스 No.81
김성근(金星根)
파일:태평양돌핀스 김성근감독.jpg
파일:태평양 돌핀스 엠블럼(1988~1993).png 태평양 돌핀스 감독시절

4.1. 태평양 감독 임용과 김성근 사단의 시작

1988 시즌 후반기부터 김성근과 OB 베어스의 갈등은 거의 확실시되었고, 이에 당시 김성근은 평소에 거의 안면이 없는 기자들에게까지 일자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다니고 있었다. 당시 태평양 돌핀스 담당 기자였던 김수인의 회상에 따르면 평소에 친분이 없었던 김성근 감독이 어느날 갑자기 다가와 다정다감하게 말을 걸면서 “ 김형, 나 이번 시즌 끝나면 실업자되는데 어디 자리 한번 봐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김성근 감독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팀은 두 팀이었는데, 하나는 MBC 청룡, 하나는 태평양이었다.

당시 MBC는 88시즌을 전기 리그 꼴찌, 후기 리그 6위로 마친 유백만 감독이 리더로서의 신임을 얻지 못하자, 구단 측에서 김성근을 지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김성근 감독은 ‘이웃집’의 사령탑으로 건너가 같은 서울팀끼리 맨날 얼굴을 맞대고 아웅다웅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고 후술하였으며, OB와 달리 MBC는 구단 조직이 엉성하여 프런트 지원이 부족할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평가 때문이었다.[34] 한편, 태평양은 앞서 말한 MBC와 꼴찌와 꼴찌에서 두 번째를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나눠가졌던 태평양은 굳이 ‘감독 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않으려 했던 임신근 감독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당시 태평양 그룹은 1988년 3월 9일 청보 핀토스를 인수하여 태평양 돌핀스를 창단했다. 태평양 그룹은 야심차게 야구판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그룹 수석 부회장이었던 신동관이 구단 사장을 겸임했을 정도였다. 태평양 구단 수뇌부는 청보 시절의 잔재를 청산하고 팀을 재편하기 위해 청보 시절 임명된 코칭 스태프를 물갈이할 계획을 가지고 후임 감독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 시기 태평양 구단에는 야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이 부족했는데, 신동관 부회장도 그랬다. 스스로 야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음을 시인했던 신동관 부회장은 단 둘 뿐이었던 구단 담당 기자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전술했던 태평양 돌핀스 담당 기자였던 김수인 기자였다. 이에 신동관 태평양 그룹 부회장은 구단 담당 기자인 김수인 기자에게 차기 감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김수인 기자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김성근을 떠올리고 그를 신동관 부회장에게 직접 추천하였다. 아직 프로야구의 역사가 아주 짧을 때라 감독 경험이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무척 힘들던 시기였는데, 때마침 OB 베어스에서 5년이나 감독을 역임했던 김성근이 재계약에 실패하고 실업자로 나앉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성근은 5년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오랜 감독 경력을 갖고 있었던 데다 일본에서 선진 야구를 배운 야구 엘리트였으며, 일본-미국 등에 딱히 연고가 없던 태평양이 선택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OB 시절 프런트와 충돌이 많았던 김성근은 태평양 초기부터 꽤나 강하게 나갔다. 김성근은 계약 전에 일본어로 쓰여진 21개 조건을 들어달라고 요구했다[35], 당시 김성근 감독의 요구는 돈보다는 팀과 관련된 사안이 주를 이루었는데, OB 프런트와의 대립으로 큰 곤욕을 치렀던 그는 코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구단 프런트까지도 제 손으로 선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동시에 구단이 직접 선수나 코치에 이야기하는 것을 막고, 모든 사안을 감독에게 먼저 연락하라는 내용이었다.[36] 그리고 다음 조건으로는 팀 순위에 따른 팀 보너스를 옵션으로 내걸었다. 우승시 1억 원. 포스트시즌 순위에 따라 6~7000만원의 보너스를 요구했다. 이는 1986년 가을 야구 당시 선수단의 항명 소동을 겪었던 경험에 기인한 것도 있었다.

김성근은 당시 상황을 놓고 “나를 감독으로 불러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 감독을 맡으면서 그런 조건을 내건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그러나 예의를 무시했어. 그래야 코치나 선수가 구단이 아니라 감독인 나한테 매달린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야”라고 설명했다.

이에 신동관 부회장은 김성근과의 계약 철회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당시 신동관 사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것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김성근 감독은 "그렇다면 나도 안 갈테니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김수인 기자가 “사장님, 야구단을 제대로 만들겠다는데 웬만하면 다 들어주세요”라고 말했고, 다른 마땅한 감독 경력자가 딱히 없었기 때문에 김성근은 1억 2천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액 연봉으로 태평양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코치 연봉 책정까지 그에게 일임했다.
1988년 8월27일. 서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그리스에서 채화한 성화가 제주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그날 아침 OB 김성근 감독은 부산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박용민 단장과 마주앉았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침통함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당신 떠나기로 했다며? 신문보고 알았어."
"신문을 보지 않더라도 벌써 다 알고 계셨잖습니까. 경이사한테서 보고받았을 텐데요."
"……음. 떠나기로 했으면 누구누구 데려갈 텐가?"
"제가 데려가면 안되는 사람은 누굽니까?"
"아무도 없어. 괜찮아. 데려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아무나 다 데려가. 아무나 다 데려가도 돼. 그 대신 오늘 선수들 앞에서 당신이 떠난다는 얘기를 하겠나?"
감독이 떠나겠다는 말을 공식으로 하라는 것은 김독과 프런트의 싸움에 눈치를 살피고 있는 선수들을 더이상 동요시키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하죠.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대화를 마친 박용민 단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피숍을 떠났다. 김성근은 이글거리는 눈길로 박용민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 이종남 칼럼, 김성근의 굿바이 OB, 1995

당시 둘 사이에 오갔던 이 대화와는 달리, 당시 박용민 단장은 그보다 보름 전에 이미 김성근 감독이 구단을 떠난다는 것, 그리고 행선지는 태평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평양 신동관 사장이 박 단장과 골프장에서 만나 "우리는 감독을 갈아야겠는데 김성근을 데려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었고 박단장은 즉석에서 OK사인을 냈던 것. 신사장은 "김 감독은 사람됨됨이가 어떠냐"고 묻기까지 했고 박단장은 "매우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잘 쓰면 성공할 것"이라고 덕담을 들려주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당시 OB 코치진을 데려가는 과정에서 김성근 사단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김성근은 계약 조건에 따라 자신을 따르던 코치진의 영입을 요구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꼴찌팀 청보 핀토스의 잔재를 청산하고 싶어했던 태평양은 김성근의 요구를 수용하여 기존 코치 중 2군의 박용진 코치를 제외하고 전부 경질한 후 김성근 감독이 요구한 OB 출신의 코치들을 영입했다. 당시 영입된 인물이 신용균 수석코치, 최주억 작전코치, 박상열[37]에 프런트의 정진구 차장(현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38]이었다. 또한 당시 현장을 떠나 있던 이근식, 이종도를 불러들였으며, 은퇴 후 OB 구단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김대진까지 새로운 코칭 스태프에 포함시켰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감독들의 코치 사단의 원조라 불리는 김성근 사단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코치들과 프런트 멤버까지 대거 데려가면서 OB 구단은 김성근이 팀을 거의 거덜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앞에서의 글 내용과 같이, 이는 당시 OB 박용민 단장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진행된 일이라 더 이상의 후폭풍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누락된 인원들도 있는데, 1군 주무였던 구경백과 구단 이사 경창호였다. 구경백은 김성근의 태평양 행 제의에 대해 그의 아버지와 의논했는데, 아버지는 딱 잘라 "여러 말 필요없다. 너를 키워준 회사가 OB인데 떠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라고 충고하여 OB에 남기로 했다. 그리고 경창호는 평소 김성근과 서로 앙숙 관계였고 김성근의 경질을 주도한 인물이었지만, 인품이나 일처리 등은 매끄러운 양반인지라 김성근이 태평양으로 오면 이사 자리는 보장하겠다며 같이 가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경창호는 자신을 키워준 선배 박용민 사장을 봐서 못간다며 거절했고, 이후 OB 베어스 구단 사장과 두산그룹 부회장까지 지내며 나름 승승장구 했다.
윤동균. 그는 음주문제로 김성근 감독에게 숱하게 페널티를 먹고 말썽도 많았지만 근본적으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김성근 사람’이었다. 동대문상을 졸업하고 기업은행에 입단했을 때 처음 만난 감독이 김성근이었고 그때부터 사제지간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감독님,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그러자 김 감독은 한동안 망설였다. 인맥으로 따지면 윤동균은 김성근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OB가 공들여 가꾸려는 ‘OB맨’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넌 여기에 남아 있어. 잘난 OB맨들로 팀을 만든다니까 너한테도 기회가 올지 몰라. 넌 여기서 크는 게 나아."
윤동균이 구단과의 사이도 좋고 그룹 고위층의 총애도 받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고 내린 결정이었다. 윤동균은 3년 뒤인 91년 8월부터 감독 대행에 오른 뒤 92년부터는 정식 감독으로 활약했다. 순간의 판단이 잘못됐더라면 그의 인생 항로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 이종남 칼럼, 김성근의 굿바이 OB, 1995

가장 독특한 사례는 윤동균이었다. 당시 OB에서 선수 생활 말년을 보내며 선수 겸 좌타자 타격코치를 맡고 있었던 윤동균은 본인이 김성근을 따라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애초에 윤동균은 33살 이라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늦은 나이로 프로에 데뷔하였는데, 그가 늦깎이로 프로 선수가 되었음에도 40살까지 활약할 수 있었던 건 김성근과의 인연이 한몫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업은행에 들어갔는데 당시 김성근이 투수코치였고, 거기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인연을 맺었던 것이 그 시작. 비록 이후에는 투수가 아닌 타자로 전향해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보냈지만, 김성근은 그에게 야구의 길을 열어준 소중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김성근은 윤동균이 구단 수뇌부의 신뢰가 깊은 성골급 선수인걸 알고 있었다. 이에 김성근 측에서 윤동균의 미래를 위해서는 남는 게 낫다며 충언하였다. 결국 윤동균은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불명예 퇴진하기는 하였으나, 은퇴 후 감독까지 오르면서 김성근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당시 김성근 감독 사단은 한동안 팀 계약이나 시스템 때문에 오랜 기간 비난받았다. 그러나 이후 해외 축구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일반적으로 나오는 형태라는 게 알려지면서 감독 사단에 대한 시선도 많이 누그러졌다. 동시에 당시 나간 코치진은 OB맨들도 아니었고 김성근파와 이광환파로 나눠어 내흥에 휩싸여있던 OB에서 김성근에서 이광환으로 정권 교체가 되면서 어차피 정리 수순에 놓였을 사람들이었는지라, 오히려 김성근 감독이 구제해준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당시 OB 베어스는 OB 출신이 아니고 다른 구단을 거쳐온 코치들은 모조리 정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정리 대상 중에는 현역투수였던 박상열도 포함돼 있었다.

4.2. 김성근 태평양의 시작, 오대산 극기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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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평양 돌핀스 엠블럼(1988~1993).png 김성근 돌핀스의 상징 오대산 극기 훈련(1989년) [39]

김성근 감독 선임 후, 태평양은 대대적인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가 원한 코치들을 모두 영입하였고, 김성근이 요구한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이충우, 정영기, 천창호, 김한근, 이광길[40] 등 베테랑 선수들을 영입했고, 시즌이 시작한 후에도 지속적인 트레이드로 선수를 보강했다. 다만 김성근은 훗날 태평양을 '외인 구단', '이팀 저팀에서 선수들이 모여든 오합지졸이었던 팀'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태평양을 자기가 잘 조련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인데, 이 말은 그만큼 김성근 재임 기간 동안 타팀으로부터 많은 선수들을 영입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첫 시즌인 1989년 1월, 6박7일 간의 오대산 극기 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이에 대해 “당시 선수들 사이에 패배의식이 너무 뿌리깊었어. 또한 트레이드도 많고 팀도 어수선했지. 그 이전부터 인천팀에는 여기저기서 온 선수들로 구성되다보니 파벌이 심했어. 그래서 극한상황으로 내몰아 하나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야. 말 그대로 팀이라는 개념이지”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태평양 돌핀스는 신생 팀 특유의 외인구단 성향이 강했는데,[41] 당시 팀을 대표하는 베테랑 선수였던 김일권, 김윤환이 해태에서 오는 등 타 구단 소속 선수들이 팀에서 밀려난 상태에서 모여든 팀으로 기존 인천 선수들과의 알력 싸움이 심하였다. 이는 당시 분위기상 더했는데, 당시에는 연고지 의식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고 원맨팀이 당연시되는 상황 속에 트레이드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수를 해당 팀에서 추방한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선수협 사태 당시 최동원 트레이드가 대표적. 대표적으로 김일권은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으로 당시 감독이었던 김응용 감독에게 제대로 찍힌 상태에서, 그 후계자인 이순철이 성장하면서 대체가 가능해지자마자 팀에서 쫓겨나듯 태평양으로 넘어온 선수였다. 따라서 이런 팀 분위기를 쇄신하고 하나의 팀으로 뭉치게 해야 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작업이긴 하였는데, 그 방식으로 김성근은 오대산 극기 훈련이라는 희한한 수를 들고 나온 것.

구단은 이런 극기 훈련의 실효성의 의문을 품으면서 극기 훈련을 반대했고 당연히 훈련 비용도 일체 지급하지 않았다.[42] 그러자 김성근은 선수들에게 비용을 내라고 하면서까지 훈련을 강행했다. 일부 고참 선수들 또한 이런 훈련이 무슨 효과가 있겠냐면서 반발하였다. 당시 태평양의 주전 포수 김동기는 이때 "칼이라도 쥐어 준다면 당장 목에다 찔러 주고 싶었다."고 1989 시즌 뒤에 인터뷰에서 얘기했고 김일권은 오대산 훈련에서 얼음물 입수하자마자 튀어나와서 "야이 십새캬!!"라고 욕설을 했다(....) 김일권뿐만 아니라 다른쪽에서도 욕설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재일교포인 김신부는 이때 연봉 1억을 준대도 싫고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밝혔다.

오대산 극기 훈련은 1983년부터 연재되어 큰 인기를 끌고 1986년 영화로까지 제작된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실미도식 지옥 훈련의 실사판이었다. 김성근은 반발하는 선수들은 2군으로 보내겠다는 협박에 가까운 통보로 선수들의 반발을 억지로 무마했으며, 극기 훈련 이후로도 지옥 훈련은 계속되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의 아메리칸 펑고 훈련이 너무 힘들었는데, 당시 김일권의 말에 의하면 똥물까지 게워냈다고. 당시 김일권은 김성근에게 "야 이 개xx야 쳐라!" 소리치고 김성근은 아랑곳하지 않고 "알았다 xx야"하면서 쉬지않고 타구를 날렸다는 일화가 전한다.[43] 당시 오대산 극기 훈련 후, 김성근은 태평양을 포스트 시즌에 올려놓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하지만 실제로는 훈련 도중에 부상자가 속출해서, 당시 김성근 감독도 꽤 마음을 졸였던 모양이다. 정작 원조 태평양은 다음해 3박 4일로 일정을 대폭 축소했고 훈련 내용도 훨씬 완화되어 거의 형식적으로 실시했다. 나중에 SK 감독 시절 김성근 감독은 하면 안 되는 훈련이었다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이광환 감독의 메이저리그식 자율 야구 이전 한국 야구의 한계로 곧잘 지적된다. 하지만 이러한 극기 훈련과 같은 퍼포먼스는 당시 외인구단이었던 태평양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필요했던 것은 맞다고 볼 수도 있다. 팀 전체가 구심점이 없이 서로 내부에서부터 갈등하는 상황에서 가장 좋은 전술은 확실한 외부의 적을 상정하는 것이었고, 김성근 감독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적으로 상정하는 전술로 접근한 것. 정작 김성근 감독이 극기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고, 적어도 이런 방식을 취하면 팀을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응집시킬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선수를 다치게 할 수 있는 혹사의 방식이었다는 것이 문제.

다만 그런 맥락도 없이 극기 훈련이 성과를 보여준 것이라고 타 구단들은 생각했고 곧바로 그해 겨울인 1990년 삼성, OB, 롯데 등이 태평양과 유사한 혹한기 극기 훈련을 실시했다. OB는 태평양처럼 오대산에서, 롯데는 해병대에 의뢰해 한겨울에 유격 훈련을 했다. 삼성 구단은 김성근의 지옥 훈련에 크게 감명받았는지 그해 겨울에 두 차례나 극기 훈련을 실시했다. 우선 1월 6일부터 3박 4일 팔공산에서 극기 훈련을 한 후 2월 3일 다시 선수들을 소집해 서울 근교의 한 공수부대에 입소해서 극기 훈련을 치렀다. 혹독한 훈련 속에서 막 현역을 은퇴하고 코치로 부임했던 권영호가 실신하여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 혹한기 극기 훈련을 실시한 4개팀은 공교롭게도 그해 시원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삼성은 전년도와 같은 정규 시즌 4위에 그쳤고[44], OB는 5위에서 최하위인 7위로 떨어졌다. 극기 훈련의 원조인 김성근의 태평양도 3위에서 5위로 떨어졌다. 전년도 꼴찌(7위)였던 롯데만이 6위로 겨우 최하위를 면했을 뿐이었다. 반면 혹한기 극기 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나머지 3개팀은 그해 정규 리그 1~3위를 독식했다. 정규 리그 1위인 LG, 2위 해태, 3위 빙그레 등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상위 3팀은 모두 동계 극기 훈련과 무관했다. 때문에 1990년 열병처럼 퍼졌던 동계 극기 훈련 붐은 한해 반짝하고 사그러들었다. 훗날 삼성 류중일 감독은 1990년 반짝 유행했던 김성근식 동계 극기 훈련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선수 부상만 발생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4.3. 태평양 돌핀스의 돌풍, 신인 트로이카의 활약

당시 태평양 구단은 이팀 저팀에서 많은 선수들을 끌어왔는데, 이러한 투자는 기존 야구판에는 새로운 시도였다. 당시 야구는 박철순, 장명부, 최동원, 선동열, 이만수 등 몇몇 스타 선수들이 팀을 이끌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태평양이 영입한 선수들은 리그를 이끄는 뛰어난 선수들이 결코 아니었다. 커리어 내내 뛰어난 성적을 거둔 적도 없었고, 대부분 노장으로 은퇴를 앞뒀던 선수들이고 투자 가치가 없는 선수들로 분류되었다. 그럼에도 김성근 감독이 이를 적극 영입한 것은 취약했던 태평양의 뎁스를 두텁게 만드는 것에 일조하였고, 이런 선수들을 활용하여 타자를 상황에 맞게 돌려 쓰는 타자 쪽의 벌떼 야구를 실현시켰다.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꾸준히 하위권을 기록하던 태평양은 1989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돌풍을 일으킨다. 여기에는 이런 선수들의 영입도 컸지만, 당시 태평양 돌풍의 핵심에는 박정현, 최창호, 정명원의 신인 투수 트로이카가 있었다.

이들 중 완전 신인이었던 정명원을 제외하면, 나머지 선수들은 김성근 감독의 선구안이 정확히 발현되었던 것이었다. 당시 박정현은 2년차 중고 신인으로 데뷔 시즌 성적은 18 2/3이닝 7.71의 보잘 것 없는 성적이었으며, 최창호 또한 3년차로 2년 동안 23.1이닝 8점대 평균 자책점의 별볼 일 없는 선수였고 심지어 연습생 출신으로 아마추어 시절 증명된 바조차 없는 선수였다. 김성근 감독은 그전까지 전혀 주목받지 않았던 이들과 정명원 세명을 주축 투수로 기용하며 성장시켰고,[45] 해당 선수들은 당해 태평양의 65승 중 45승을 합작하며 태평양 돌풍을 주도하였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해태보다 팀 평균자책점이 낮은 구단은 1989년의 태평양이 유일했다.

다만 그 과정은 엄밀하게는 혹사였다. 당시 투수 중 박정현, 최창호는 주로 선발로, 정명원은 윤석환의 뒤를 이은 마무리로 주로 활약하였지만, 이는 표면적인 것이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활약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정현은 정규 시즌 242 2/3이닝, 준플레이오프 18 2/3이닝을 던지는 엄청난 혹사를 당했다.[46] 1989년의 포스트시즌 당시 박정현이 지나친 혹사로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간 것은 당시 많은 야구팬들에게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박정현 문서 참조.

당시 박정현은 선발로 25회, 불펜으로 13회 등판하며 242.2이닝을 던졌다. 최창호 역시 선발로 29회, 불펜으로 9회 등판했고 총 223.1이닝을 소화했다. 2년차 양상문은 선발 15회-불펜 20회 등판, 정명원은 선발 18회-불펜 20회 등판을 기록하였다. 그 해 200이닝 이상을 소화한 투수는 모두 5명이었는데 이중 2명이 태평양 소속이었다.

이 시기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런 혹사는 사실 흔한 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바로 앞에 5명이나 있었다는 것처럼 200이닝 이상을 기록하던 선수가 수두룩하던 시기였고, 오히려 최동원, 윤학길과 같이 한 명이 견뎌내던 것을 세 명으로 나누었다는 의미에서 당대에서는 그나마 양호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당시 태평양은 지나칠 정도로 약체로 타선은 리그 꼴찌였고, 기존 투수였던 임호균, 김신부 등은 그를 뒷받침할 수 없었기에 이들에 대한 부담은 더해져만 갔다. 결국 신인 3인방은 이듬해부터 바로 혹사의 여파로 부상으로 고전하며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고,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90시즌 태평양은 결국 7개팀 중 5위라는 하위권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한다.

1989년 태평양은 시즌 62승54패4무(승률 0.533)를 기록하며 시즌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기는 경기보다 지는 경기에 익숙했던 인천팬들도 신이 났다. 88년 16만 8000명에서 무려 250%가 증가한 41만 9000명이 인천 도원구장을 찾았을 정도였다. 김성근이 새로 SK 감독으로 부임한 2007 경기당 1만 명이 넘는 65만6426명[47]이 인천 문학구장에 들어차 전년도(33만1143명)에 비해 98.2%나 관중 수가 증가했다. 어쨌든 김성근은 1989년, 그리고 이후 SK 와이번스 시절까지, 인천 연고 구단과 인천 팬들에게 성적과 흥행을 책임진 절대적인 지도자로 추억에 남았다.

4.4.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 1. 훈련 수당 지급 문제

김성근 감독은 태평양에서의 첫 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그 특유의 강한 성격으로 태평양에서도 여지없이 프런트와 충돌을 빚었다. 이 중 언론 등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난 굵직한 갈등의 첫 번째는 훈련수당 지급 문제였다. 김성근은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한 직후 정신력을 개조해야 한다면 실시하고자 했던 혹한기 지옥훈련 실시를 주장했다. 그러나 구단측은 이런 혹한기 지옥훈련 성과에 대해 회의적으로 예측하였고 결국 훈련을 반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김성근은 선수들에게 훈련비를 각출해서 극기훈련을 강행했다.

이는 야구 규정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혹한기 극기훈련은 비시즌 활동중지 기간에 이뤄진 것이었기 때문에 규정상 구단에서는 월급이나 수당을 줄 수 없었다. 프로야구는 2월부터 10월까지가 공식적인 활동 기간이고 연봉은 이 기간에 한정하여 분할 지급되는 것이 현재까지의 원칙이다.

이는 사실 일종의 편법이다. 1년 내내 임금을 주면 근로자로 구분되기 때문에, 현행 노동법상 퇴직금 지급 의무와 4대 보험 의무 가입 의무가 발생한다. 나아가 법리상 근로 계약 중단 없이 2년 이상 계약이 지속될 경우 무기계약직 전환되어 해고가 제한되는 노동법 법리까지 인정받기 때문에, 선수단 인원 제한이나 임의 탈퇴 같은 제도까지도 근본적으로 다시 써야 한다. 1982년 프로야구의 출발 때부터 구단이 지출해야 하는 노동법상 선수의 권리와 복지에 들일 돈을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프로야구협회가 선수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규약을 만들어 쓴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법적으로 프로야구 선수들은 개인사업자로 분류되고 매년 10개월짜리 고용 계약을 받은 뒤 2개월 동안 서류상 실업자로 지내다가 재취업하기를 반복한다.

즉, 프로야구선수는 이 기간 외에는 돈을 받지 않으므로 집단 훈련을 할 의무가 없고, 구단은 훈련을 하건 말건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48] 당시 수당지급 문제는 이런 법적인 문제까지 얽혀 있었기 때문에, 구단으로서는 단순히 당장 나가는 돈 문제를 넘어서 결코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김성근 감독은 수당 지급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이 와중에 OB에서 같이 온 정진구 차장과 신용균 코치와도 사이가 멀어졌다. 게다가 결국 구단으로부터 수당을 받아내지 못하자 위에 언급한 대로 이를 선수들로부터 받아낸 탓에 선수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49]

훗날 선수협이 결성되면서 이 문제가 공식화되어서 선수들에 대한 비활동기간 훈련 금지 규정이 KBO에 의해서 지정되고, 수차례 재확인 되지만 김성근으로 대표되는 일선 감독들의 반발과 성적을 원하는 구단측의 입장으로 슬쩍 넘어가고 있다. 2000년대 비활동기간 훈련금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것도 김성근 감독이었다.

4.5. 구단 프런트와의 갈등 2. 임호균 각서 파동

김성근 감독과 태평양 프런트가 갈라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임호균 각서 파동이었다. 당시 삼미 시절을 상징하던 임호균이 1988-1989년 통틀어 1승도 올리지 못하는 등 노쇠하면서, 구단과 임호균 본인 또한 은퇴를 확정지은 상황이었다. 임호균 본인이 먼저 은퇴를 결심하고 해외 연수까지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를 김성근이 노련한 리더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붙잡은 것이다.[50]

당시 김성근 감독은 "임호균이 5승을 하지 못하면 사임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면서까지 임호균의 은퇴를 막으려 하였는데, 그전까지 쌓였던 감정도 안 좋았거니와 이미 정해진 상황을 되돌리려는 김성근 감독에게 반발한 프런트는 여기에 '선발로 5승'이란 단서를 달았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런저런 각서 사건[51]에 휘말려서 좋은 결말이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듯이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저 과정에서 프런트와 완전히 사이가 틀어진 김성근은 임호균을 단 한 경기도 선발 출장시키지 않았다.[52] 당연히 선발승도 0승. 여기에 태평양의 순위도 5위로 하락하면서, 김성근 감독은 계약 기간을 못채우고 잘리게 된다.

사실 여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1989년 포스트 시즌의 돌풍으로 당시 김성근 감독은 몸값이 상한가를 치면서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에도 김성근 감독이 팀을 옮기기 위한 꼼수로 각서를 작성한 건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였으며, 실제로 삼성그룹 수뇌부가 김성근이 삼성의 정신력을 개조할 적임자로 보고 후임 감독으로 내정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어쨌든 이 각서 파동으로 김성근 감독은 경질되었고,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며칠 후 김성근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은 OB 시절 경력까지 합해 프런트와 대립하는 감독으로 이미지를 굳힌다.

4.6. 인천 야구의 첫 르네상스, 태평양

도원아재로 대표되는 인천 올드 팬들은 인천 야구의 꽃을 현대의 우승이 아니라 김성근의 태평양 시절로 보는 사람도 많다. 인천의 야구 팬 가운데에는 이때부터 마침내 '인천 팬'이라는 동질적 집단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이도 적지 않다. 실제로 1989년 인천도원구장을 찾은 관객수는 약 42만명. 경기당 7000명에 육박하는 수치로 인천 연고 구단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사실 현대 시절은 이미 삼-청-태 시절 많은 상처를 받았던 만큼 초기에는 그 인기가 덜했으며, 2000년 1월 연고지를 서울로 이전하려 하며 인천 팬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만큼 인천 올드 팬들에게는 애증의 팀이기도 하였다.

다만 김성근에 대해서는 호오가 갈렸는데, 김성근이 태평양에서 해임되자마자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하자 당시 태평양 팬들은 김성근이 더 좋은 팀으로 옮기기 위한 구실로 각서사건을 만들었다고 보고 그를 맹비난했었다. 그래도 인천야구를 최초로 가을야구에 올린 감독인 만큼 그 자체를 인정해주는 편이었고, SK 와이번스 왕조의 수장으로 인식되면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은 사실.
KBO는 폭우로 인해 노게임으로 선언된 지난8일의 삼성-태평양의 대구 경기 때 태평양 김성근 감독이 고의로 경기 지연을 했는지 여부를 놓고 뒤늦게 진상을 조사하고 있다. KBO는 또 오광소 (오광소) 주심에 대해서도 경기 진행 책임을 조사하고 있다. 4회까지 3-2로 삼성이 리드하고 있는 가운데 김성근 감독은 강우로 경기진행이 어렵다고 주심에게 경기중단을 요구, 10여분간 경기가 중단됐고 투수와 외야수를 잇따라 교체하면서 시간을 끈 것이 노게임을 위한 고의적 책략이 아니었느냐 하는 「혐의」 이며 오광소 주심에 대해서도 경기 운영 미숙 등을 조사해 사실 여부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할 방침.
- 중앙일보, 1989-07-12

이 시기의 김성근 감독은 팀 입장에서는 승리를 가져오는 감독이었지만, OB 베어스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규칙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상대를 농락하는 일이 잦은 감독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9년 강우 콜드 사건. 폭우로 경기가 취소될 가능성이 보이자 지고 있던 경기를 5회 이전 취소하여 노 게임으로 만들기 위해 투수-외야수를 잇따라 교체하면서 시간을 끌었고, 결국 해당 경기가 취소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도 그를 지지하던 팬덤 층과 그걸 매번 당하는 타팀 중심의 안티 층의 반발이 빈번했다.

한편, 김성근 감독 경질 이후 태평양은 본격적인 김성근의 저주 사태의 시작이었다. 1994년 정동진 감독이 태평양을 2위로 이끌 때까지 4시즌 동안 태평양이 침체기에 접어든 배경으로는 김성근 감독 1년차 시절 태평양의 부흥을 이끈 투수 3인방이 그해 지나친 혹사의 여파로 거듭된 부상으로 몰락한 것을 꼽는다. 실제로 1994년 태평양의 돌풍 또한 정명원을 비롯한 부상 선수들의 복귀가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정명원은 전업 마무리로 KBO 리그 최초이자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인 44세이브포인트(4구원승40세이브)를 올렸고, 최창호 또한 12승으로 복귀하였다. 또 차세대 에이스였던 정민태가 커리어를 시작하는 등,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1989년 혹사의 흔적이 사라지면서 다시금 올라올 근간이 마련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 태평양의 추락은 프런트 지원의 실종 영향도 있는데, 이 또한 김성근 감독의 영향이 컸다. 당시 태평양에 대한 지원의 선봉에 서 있던 것은 신동관 부회장이었는데, 임호균 각서파통으로 야구판에서 김성근과 함께 신동관 부회장의 이미지도 실추되고 말았다. 특히 제일 큰 문제는 관객층이었다. 태평양은 화장품 회사인 만큼 주 고객층이 여성이었던 반면 당시 야구판의 주요 관객은 남성이었고, 심지어 1990년대에는 남성 화장품 시장도 아직 형성되기 전이었다. 즉 들이는 돈에 비해 인지도나 이미지 개선에 썩 도움이 되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논란만 계속 일어나는 판국이었다. 그 결과 신동관은 야구단에 대한 관심을 점차 끊었고, 1990년대 초에 높아진 농구 열풍에 편승하여 원래 자신의 주력 분야였던 여자 농구 쪽에 다시금 집중하기 시작했다.[53] 동시에 모기업인 태평양 또한 좋지 않은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정동진 감독의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 태평양 돌핀스는 1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현대에 매각되었다.

김성근 감독 이후 태평양의 부진은 팀컬러와 맞지 않는 감독 특성도 있었다. 김성근의 후임인 박영길 감독은 김성근과 반대 성향의 감독으로 80년대 빅볼 야구의 대표적인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박영길 감독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격이론가 중의 한 명이었으며 그가 삼성 라이온즈에서 코치와 감독을 맡던 시절 삼성의 타선은 리그를 그야말로 씹어먹었던 핵타선이었다. 그러나 김성근 체제 하에서 선수들은 번트와 단타에 길들여져 있기도 했고, 애초에 당시 태평양 선수들 중에서는 장타 포텐셜을 기대할 만한 선수가 별로 없었기에 장타 위주의 박영길 야구를 접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펜스 높이를 내리는 등 박영길 감독의 조치는 정작 태평양 타선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 채 투수진의 피홈런만 대거 늘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성근 감독 시절 이전과 이후, 심지어 박재홍 등이 들어오기 전인 현대 초반까지조차도, 당시 인천 야구의 선수층은 장타 포텐셜과는 거리가 멀고 강한 투수진으로 버티기에 집중했던 짠물 야구 스타일이었다.

다만 김성근 때 잘 나가던 태평양이 그가 떠나자 폭망한 것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성근 감독의 태평양은 첫해에는 좋은 성과를 거뒀으나, 2년차부터 5위로 쳐지면서 성적 하락이 시작되었다. 또한 김성근 감독이 경질된 후 1991~1992 시즌 동안 박영길, 정동진 감독이 거둔 성적은 5위, 6위로 김성근 감독 2년차와 별 차이없는 성적을 거두었다.[54]

5. 삼성 라이온즈 감독

삼성 라이온즈 No.91
김성근(金星根)
파일:삼성라이온즈 김성근 감독.jpg
파일:samsung_lions_logo_1989.png 삼성 라이온즈 감독시절
파일:external/spnimage.edaily.co.kr/PP07110200001.jpg
1992년 LA 다저스외의 합동 훈련. [55]

한화 이전 김성근의 흑역사로, 20세기 삼성 라이온즈 최악의 감독으로 요약된다.[56] 우승을 시키라고 데려왔지만 이전보다 낮은 성적에 혹사를 시켜서 556을 초래하는 등 단점만 부각되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보통 99688시기 이전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여겨진다. 이마저도 원래 삼성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받았으나 99688시기 감독이 등장하는 바람에 지금은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성근의 올드스쿨 스몰볼 성향은 삼성 라이온즈의 암흑기인 현재 팀이 추구하는 색깔과 완벽히 동일하다.[57]

또한 김성근은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최악의 코칭스태프 중 하나로, 김한수나 정현욱과는 달리 팀에 기여한 바도 없이 팀의 역사에 악영향을 끼치기만 했기에 삼성 팬덤에게 사실상 최악의 평가를 받는다.

5.1. 우승 청부사로서의 삼성 부임

의외의 사실로, 당시 김성근 감독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우승 청부사로서 불려온 것이었다. 1989년 김성근이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에 부임하여 오대산 지옥훈련 후에 1년만에 팀을 포스트시즌에 올려 놓자 삼성 수뇌부는 김성근을 삼성 감독의 적임자로 여기게 되었다. 당시 삼성 수뇌부는 뛰어난 전력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정신력이 부족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투수 코치 출신인 김성근이 리그 최강의 타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뒤쳐졌던 투수진의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김성근 감독 취임과 함께 삼성은 15명이나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하였다. 1991년 시즌을 앞둔 삼성은 우승을 하기 위해 작정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여 삼성 역대 최고의 전력, 우승후보 0순위로 꼽혔다. 김성근 감독이 원한 코치들을 모두 영입했을 뿐만 아니라 김성근 감독이 요청한 선수를 모두 싹쓸이로 영입했다. 이 과정에서 선수단 규모가 60명에서 75명으로 15명이나 증가했고 팀의 연봉 부담액도 2억 7천만원이나 늘었다.

당시 영입했던 선수로는 최일언, 윤석환, 신경식, 이광길, 허규옥, 조범현, 최홍석 등으로, 타 팀으로부터 7명이나 현금 트레이드로 대거 영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삼성은 팀 창단 이래 가장 완벽한 전력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 기사 삼성의 엄청난 투자 때문에 1991년 2월 4일 무분별한 선수 확충을 자제하자는 KBO 사장단 회의가 열렸을 정도였다.

5.2. 김성근 옹호론: 의외로 부실했던 당시의 삼성

하지만 이와는 달리 김성근 감독이 맡은 당시 삼성은 80년대 후반의 전력과 비교하면 애매했던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김성근 감독의 의견에 따라 영입했던 선수들은 하나 같이 팀 강화에 큰 도움이 되는 선수들은 아니었다. 윤석환과 최일언은 이미 OB 시절 혹사와 노쇠화 등으로 한물 간 선수로 취급받았고, 이광길, 조범현 등은 커리어 내내 큰 성적을 거뒀던 선수도 아니었다. 허규옥, 신경식 또한 이미 내리막길인 것이 훤히 보이는 수준이었으며, 최홍석은 아예 1988년 MBC에서 방출되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선수였다. 사실상 뎁스를 두텁게 만드는 용도였지 이들 선수가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을 선수는 아니었던 것. 오히려 신경식의 3할 부활이 특이한 사례였지, 김성근 감독 시기에도 삼성의 중심은 기존 삼성 선수들이었다.[58]

문제는 이 삼성 선수들이었다. 삼성의 전설을 이끌었던 선봉장 장효조는 선수협 파동으로 이미 팀을 떠난 지 오래였고, 공격의 핵심이었던 류중일, 김성래 모두 부상으로 부진하며 1993년까지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1990년 대활약했던 박승호 또한 해당 시즌 말고는 부진하였기에 김성근 감독의 옵션으로는 부족하였다. 즉 당시 김성근 집권기의 삼성은 1980년대의 삼성에서 오직 이만수 정도만 남아 있었고, 새로이 등장한 강기웅, 동봉철 정도가 주목할 정도 수준이었다.

투수 또한 문제가 심각했다. 애초에 삼성이 김성근을 영입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투수진 문제. 선수협 사태로 원년 멤버였던 김시진을 최동원과 트레이드하였으나 그 최동원마저 형편없이 몰락하였고, 김시진과 함께 트로이카를 이루던 김일융은 1987년 일본으로 다시 떠났으며, 이선희 또한 은퇴하였다. 삼성 최초의 마무리투수였던 권영호 또한 1988년 은퇴하였다. 즉 초창기 삼성을 빛내던 투수 전원이 이 시기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 주목할 만한 선수로는 김상엽, 김성길 정도.

즉 당시의 삼성은 선수 이름값 등만 보면 호화찬란했지만, 정작 선수 대부분이 이탈하거나 노쇠화, 혹은 1990년 반짝하는 정도 수준이었던 수준인지라 팀 자체의 전력을 상위권으로 분류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1990 시즌 삼성 팀 타율은 4위, 팀 홈런은 1위를 기록했고, 1993년 해당 선수들의 부상 복귀와 양준혁 등의 등장만으로도 1993년 삼성은 다시금 최강 타격 팀의 면모를 갖췄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 시기에는 애초에 그 선수들 대부분이 활약할 수 없는 환경이었던 것.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김성근 감독은 후술할 이유로 팀 전력 하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5.3. 팀 장악 실패와 선수단과의 충돌

김성근 감독은 삼성 시절 선수단 장악에 완전히 실패했고, 이는 본인 또한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당시 강기웅, 김성래, 이만수, 류중일 등의 프랜차이즈 스타들과 불화가 있었고[59] 팀의 선수단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KBO 기념방송에서도 선수단과 프런트와의 마찰을 자꾸 이야기 하는 걸 보면 본인도 삼성 감독 시절은 마뜩치 않아하는 듯.

대표적으로 삼성의 수비 시스템을 갈아엎으려 하다 이것에 대해 몇몇 선수들이 반발했다는 설이 있다. 이 시기 삼성의 수비는 류중일이 체계화시킨 매뉴얼대로 확정되어 있었는데, 이를 바꾸려고 했던 것. 하지만 당시 삼성 수비에는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히는 강기웅-류중일이 있었고, 다른 내야수비도 리그 최정상급이었다. 아무리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도 현상 유지만 해도 삼성 라이온즈는 당시 리그 최정상급 수비였다. 심지어 김성근이 바꾸려고 했던 그 삼성 수비 시스템은 삼성 몰락 전까지도 리그 최고 수준을 유지하던 시스템이었는데, 그걸 바꾸자고 들었다는 점은 당연히 삼성팬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다. 이 주장의 연장선에서 나온 추측이 라디오볼에서 사람 좋기로 유명한 모 감독이 김성근에 대해 강한 비토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이 류중일이 아니냐는 것.[60]

또다른 충돌은 팀 최고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이만수와의 충돌이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전형적인 고전적 지도자의 스타일을 보였는데, 그 과정에서 홈런을 친 뒤 셀러브레이션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선수를 질책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1980년대 프로야구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그 당시 홈런을 친 타자들이 거의 '오도방정' 수준의 셀러브레이션을 하면서 홈으로 들어오는 걸 많이 기억할 텐데, 이만수는 그중에서도 특히 심한 편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만수의 성적이 대폭 하락하는 바람에 결국 이 또한 포기.

심지어 이만수의 투수 리드를 마뜩찮아 했으며, 삼성 시절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이만수 때문에 삼성이 우승을 못한다고 비판하였다.[61] 곧바로 자신의 제자였던 조범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여 그를 주전 포수로 기용하면서 이만수 길들이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주포 이만수를 주전에서 배제하고 조범현을 주전으로 기용하자 삼성의 득점력은 눈에 띄게 감소했고, 결국 김성근은 이만수를 슬며시 주전으로 복귀시켰다.[62]

아울러 당시 노쇠한 조범현, 신경식과 같은 자기 제자들을 대거 영입했다가 이게 썩 성공적이지 못하면서 체질 개선에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프랜차이즈를 은근히 홀대한다는 평도 있었을 정도.

5.4. 김성근 비매너 플레이의 대표 사례, 위장오더 사건

당시 김성근 감독 플레이 중 가장 큰 오점으로 남은 것은 위장 오더 사건이었다. 1991년 7월 14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대구 홈경기를 앞두고 우완 선동열과 좌완 김정수 둘 중 누가 나올지 모르자, 김성근 감독은 일단 좌타자 일색인 오더와 우타자 일색인 오더 두 장을 작성한 다음 해태의 오더가 심판원의 손에 넘어온 것을 확인한 후, 배대웅 수석코치를 시켜 슬쩍 심판원에게 상대 선발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의도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 심판원이 선동열이라고 말해주자 배코치는 양쪽 뒷주머니에 나란히 꽂고 나온 두 장 중에서 선동렬을 상대로 준비한 우완투수용 오더를 꺼내려다 낌새를 챈 해태 김봉연 수석코치에게 붙들렸고 결국 두 장의 오더를 모두 빼앗겨 망신을 사고 말았다.
"이중오더는 설사 선발 라인업을 결정치못해 빚어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심하게 말하자면 사기극으로 매도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비난.
- 타이거즈 김응룡 감독 #

4월 페넌트레이스 벽두부터 10차례 안팎의 가짜오더를 작성하며 스포츠맨쉽을 던져 버린 이 일화에 대해 당시 언론들을 꼬리가 길어 잡힌 약삭빠른 잔꾀, 비신사적인 승부욕, 사기극과 같은 평가를 했다. # 물론 당시 삼성의 숙적은 해태에 1승 8패로 압살 중. 그런것들을 고려하면 김성근 본인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을 문제였다. 그리고 실제로 당일 김응룡 감독과 해태 선수들이 크게 반발하며 경기는 개판이 되었고, 선동열이 홈런 2방 7실점으로 무너지는 등 삼성은 승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는 김성근 감독의 이미지에 다시 한 번 치명타를 안겼고, 이후 삼성은 해태에 4승 14패로 그것보다 더한 압살을 당했다. 심지어 플레이오프에서 앙숙관계인 김영덕의 빙그레에 1승 3패로 패해 복수는 좌절되고 만다.

5.5. 여러모로 흑역사로 남은 삼성 감독 시절

선술했듯 이런 점 때문에 김성근은 20세기 삼성 라이온즈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된다. 서정환 역시 막장이었는데 굳아 따지자면 김성근 쪽이 더 높은 기대를 받았기에 더욱 큰 혹평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감독들 중 확실히 김성근보다 평이 안 좋은 감독은 암흑기의 김한수, 2022년 허삼영, 2023년 박진만 정도이다.

사실 전임 감독인 정동진 감독이 한국시리즈에서 졌다는 이유로 짤린 것을 감안하면, 2년 버틴 것이 용한 정도. 실제로 1991시즌을 마친 당시 김성근 감독이 3위로 첫시즌을 마무리하자, 많은 언론이 김성근 감독의 경질을 예측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래도 삼성 구단은 그간 감독들을 너무 일찍 경질했던 전통을 깨려는 시도였는지 김성근을 한번 더 믿고 1년 더 유임했다.

여러모로 삼성 올드 팬들에겐 1차 암흑기인 556 암흑기보다도 더 야구보기 싫었던 시절. 투수 혹사는 혹사대로 시키고 성적은 성적대로 못냈기 때문. 실제로 관중수 자체가 556 시기가 훨씬 더 많다. 김성근 시기는 특별한 외부 요인 없이 KBO리그의 관중수가 계속 늘어나던 황금기에 삼성만이 단지 '김성근 꼴보기 싫어서'라는 이유로 89, 90년 및 93, 94, 95, 96년과 비교했을 때 대략 평관 2,000명(거의 1/3)이 날아갔다.[63] 많은 팬들이 구단에 항의하기 위해서 야구장에 가지 않거나 선수단 버스위에 올라가는 등 김성근 경질을 위한 행동을 실천했으며 이 시기 이런 삼빠아재의 예로는 영화감독 장진이 있다.

어찌보면 삼성팬들만 암흑기라 주장하는 445 시절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실제로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김성근 시절과 선동열 시절을 동급으로 치환하는 경우가 많은데, 공통적으로 투수가 지나치게 혹사당한데다가 경기가 계산대로 안 흘러가면 멋대로 경기를 포기하는 점, 프랜차이즈 스타 홀대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게다가 삼성 감독으로써 잘 하지도 못 했으면서, 류중일을 선동열이 만든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식의 인터뷰를 하는 등의 사건으로 인해 선동열과 거의 한통속 수준의 취급을 받고 있다. 또 그 과정에서 타자는 기록 좋은 선수가 없었고 투수는 그냥 혹사당했으며, 프랜차이즈 스타들과의 갈등으로 팀 케미가 무너졌고 팬심도 최악이었다는 게 그 시절 삼성 팬들의 평가였다.

여기에 1997년 부정배트 의혹 사건 때도 당사자인 LG 트윈스가 아닌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인 김성근이 공문을 보내어 전수조사를 의뢰하기까지 하는 등, 삼성과 김성근은 악연에 가까운 행보들이 계속 이어져오기도 했다. 삼성은 김성근을 내쫓고 다시 1993년 준우승을 한 뒤엔 556의 암흑기를 거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팀을 다시 포스트시즌으로 올린 감독은 백인천이고 궤도에 올려놓은 감독은 서정환이며 우승 팀으로 만든 감독은 김응용이다. 이는 삼성 팬덤이 반김성근, 친김응용 성향이 강한 원인 중 하나이다. 김성근 체제가 삼성 암흑기의 신호탄이였는데 반하여 김응용 체제는 21세기 화려한 삼성 역사의 신호탄이였으니 더더욱. 이 때문에 삼성 팬들은 한화에서의 몰락 이전에도 김성근 감독 비판 세력의 선봉에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5.6. "큰 경기에 약한 감독"으로 경질 당하다

김성근 감독은 결국 부임 첫해 3위, 이듬해 4위라는 성적을 냈다. 하지만 1990년 준우승에도 불구, 우승이 아니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던' 삼성이었고, 당연히 이 정도 성적은 경질 대상이었다. 심지어 팀 자체가 내부적으로 전력이 많이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감독 요구에 맞춰 총 15명의 선수를 사다줬던 삼성의 프런트는 당연히 삼성이 우승 전력이라고 생각했고 우승은커녕 가을 광탈을 했으니 짤리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김성근 감독의 경질에는 특히 1992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준 플레이오프가 결정타였다. 첫 경기인 신인 염종석 성준의 맞대결에서 선발 4안타로 완봉패한 것은 성준 역시 완투를 했으며 염종석이 워낙 특급신인 포스를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칠 수 있었다. 하지만 3전 2승제의 2번째 경기에서 그해 7승을 거두며 부진했던 박동희[64]에게 마치 전 경기의 데자뷰라도 보여주는 것처럼 2경기 연속 산발 4안타 완봉패로 무기력하게 탈락해버린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이런 경기들로 인해서 김성근은 8,90년대를 관통하는 큰 경기에 약해서 우승할 수 없는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버리게 된다.[65]

6. 해태 타이거즈 인스트럭터-2군 감독

해태 타이거즈 No.90
김성근(金星根)

삼성에서 짤린 뒤, 전국의 대학교와 고등학교를 돌며 아마 선수들을 코치하는 순회 인스트럭터와 프로야구 경기장을 늘 찾으며 경기를 분석하는 등 야인생활을 전전했다. 그러던 와중 해태 타이거즈의 인스트럭터로 잠시 취업.

당시 김성근을 영입한 것은 해태 이상국 단장이었다. 김성근이 야인 시절 스포츠서울 객원기자로 현장을 돌고 있을 때 비행기에서 우연히 해태 이상국 단장과 만나 긴 대화를 나눴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이상국 단장이 그를 해태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스트럭터로 4개월 일하다가 나중에 정식으로 2군 감독이 되었다. 훗날 김성근 감독에게 해태에 들어간 이유를 묻자, "김응룡 감독이 해태에서 하도 우승을 많이 하자, 어떻게 그렇게 하는 건지 궁금해서 갔다." 고 말했다.[66]

해태 구단은 김성근을 2군 감독에 앉힌 바로 그해 1994년 처음 2군을 신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67] 당시에는 2군도 1군과 같이 무등 야구장을 사용했다. 문성록과 같이 출연한 김태완이 술회한 일화로 김성근 2군 감독 시절 삼성 라이온즈와의 무등 야구장 홈경기에서 5회부터 비가 내려 1,2군 매니저는 '게임을 끊자(중단하자)'고 말했으나 승부욕이 강한 김성근은 게임을 강행했다. 외야수의 실책으로 1-2로 패배하자 비가 더욱 내리는 와중에도 야수들을 다 그라운드로 보내고 직접 펑고를 쳤다고 한다. 그라운드는 심하게 망가졌고 김응룡은 매일 오후에 출근한다는 것을 안 김태완은 오전에 출근해서 그라운드 정비를 하려고 했으나 하필 김응룡이 그날따라 오전에 출근하여 그라운드가 망가진 건 보았다. 김성근을 제외한 2군 코칭스태프들과 매니저를 집합시켜놓고 2군의 무등 야구장 사용 금지령을 내렸으며 매니저에겐 반성문을 징구하여 기자들이 보는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이렇게 두 감독 사이에는 보이지 않은 신경전이 있었다.

당시 해태 2군의 홈구장인 함평 야구장은 시설이 너무나 열악했는데 함평 논두렁 가운데에 컨테이너 몇개 박아 놓은 게 전부였다. 그래서 2000년대초 기아에 인수될 때까지 해태는 2군 시설이 없었다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애초에 해태에서 2군은 주전들이 사고칠 때 유배보내는 곳이었고, 해태그룹 자체가 3류 재벌이라 2군에 돈쓰는 걸 아까워해서 제대로 된 2군 구장도 없었을 정도였다.[68] 1군도 무등구장 지하에 쇠봉에 콘크리트 부어서 만든걸 역기라고 그것도 박충식이 트레이드 전 제대로 웨이트 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실한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2군은 더할 나위 없었을 터. 해태는 96년말 오랜 숙원이었던 2군 전용 구장과 기숙사 시설을 신축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IMF로 백지화되었다. #

6.1. 김성근 vs 김응용

당시 인스트럭터 및 2군 감독 임명에 대해 일부에서 해태 김응용 감독이 김성근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그를 영입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인사권자인 이상국 단장이 김성근을 인스트럭터로 고용하겠다고 하니, 1군 감독이었던 김응용은 인스트럭터가 정식 코칭 스태프도 아니고 해서 굳이 반대 의견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69]

당시 해태의 감독 김응용은 김성근과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이유는 호칭 문제였다. 김응용은 호적상 1941년생인데 실제는 1939년생이다.[70] 김성근은 1941년생[71]. 하지만 김성근은 옛날부터 그를 '응용이'로 불렀다고 한다. 김응용은 선수 시절 때 김성근의 그런 반말에 부아가 치밀었다고. 실제 호칭 문제로 김응용은 여러차례 김성근에게 불쾌감을 표시하고 시정을 요구했으나 김성근은 결코 고치지 않았다.

지도자가 되고 나서도 김성근과 김응용 감독은 위 삼성 감독 시절 부분에 언급한 이중오더 사건 등으로 서로 좋지 않은 관계였다. 김성근이 해태 2군으로 오고 나서도 단 둘이 밥을 먹은 것은 단 한번밖에 없었을 정도로 관계는 여전히 냉랭했다고 한다.

다만 김응용-이광환, 김성근-김영덕, 김영덕-강병철 같은 사례와 비교했을 때 적어도 서로에 대해 (내심이야 어쨌든) 좋은 말도 자주 했었고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참석한 적도 많았던 김응용과 김성근 정도면 굉장히 양호한 축에 드는 것이 사실이다. 애초에 롱런한 KBO 원로 감독들이 성품이 온화한 김인식 정도를 제외하면 다들 콩가루 인간 관계이기도 하고.

6.2. 해태 2군 시절 제자들: 이호준과 임창용

이 시기 2군 감독인 김성근 밑을 거쳐간 신인 투수가 임창용 이호준이다. 이들은 노랭이 해태에서 비교적 유망주 투수로 꼽혀서 일본으로 연수를 보냈는데, 김성근 감독을 피해서 땡땡이를 쳤다고 한다. 유망한 강속구 투수였던 이호준은 1994년 데뷔 시즌에 투수로 8경기에 출장했으나 깃털직구라서 부진하여 2군에 내려가 김성근의 지도를 받게 된다.[72]

김성근은 이호준에게 투수 자질이 보인다면서 집중 지도했으나 김성근의 조련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김응용 감독은 이호준을 타자로 전향시켜 1996시즌 타자로 1군 무대에 돌아오게 된다. 덕분에 이호준은 나중에 강타자로 터졌다.[73]

당시 김성근 감독의 대표적인 성과는 임창용이었다. 임창용은 당시 데뷔 시즌에 이미 김응용 감독으로부터 선동열보다 구위가 낫다는 평까지 받았을 정도로 1군에서 실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놀기 좋아하는 성격. 임창용이 맨날 친구들과 술먹고 놀아서 김응용 감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덕에 입단 초에는 2군을 밑돌던 날라리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었다.[74] 결국 김응용은 사생활을 바로잡으라는 의미에서 임창용을 2군으로 보냈다.

임창용의 2군 시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으나, 이런 방황하던 임창용을 다잡아준 이가 바로 김성근 당시 해태 2군 감독. 임창용이 놀다가 팀 훈련을 제끼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어느날 "너 집에 가 임마 이제 야구 하지마"하고 쫓아냈는데, 감독실을 나선 임창용이 가만 생각해보니, 평생 야구만 한 자신이 이제 야구장에 안오면 정말로 할 게 없었다고 한다. 그냥 가면 안될 것 같았던 임창용이 감독실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있었는데, 감독실 안의 김성근은 그 나름대로 임창용이 진짜로 가버리면 어쩌나 전전긍긍[75]했고 결국 신경전에서 승리한 김성근 감독이 밖에서 읍소하고 있던 임창용[76]을 다독이며 "나랑 같이 딱 1년만 해보자"고 설득, 전설이 시작되었다. 김성근 2군 감독은 갓 스물이 된 임창용을 위해 30일동안 여관에서 숙식을 같이 하기도 했다. 당시 깡마른 체형이었던 임창용에게 구위를 올리려면 체격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식사량을 늘리도록 지시했고,[77] 한번 많이 먹으면 삼겹살 3인분, 곱창전골에 밥 2공기까지 먹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훈련이 모두 끝난 밤에는 테니스 라켓을 이용해 섀도우 피칭을 시켰다고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김성근만 나선 건 아니고, 노장 이순철의 역할 또한 컸다. 임창용뿐 아니라 당시 선수들 중 염색하고 머리를 기르던 선수들이 많았는데, 김성근이 당시 해태의 군기반장이었던 이순철에게 선수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머리가 길다, 염색하지 마라고 지적해도 안듣는다고 푸념하자 다음날 아침 선수단 전원이 염색을 지우고 스포츠로 머리를 깎고 도열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때 김성근조차 어쩌지 못했던 임창용 또한 머리를 밀어버렸다는 후문. 당시 해태의 선수간 군기가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어쨌든 그때 임창용은 김성근으로부터 정신적인 부분은 물론, 체력적인 부분에서도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김성근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임창용은 6월에 1군에 콜업되어 9월까지 29이닝을 던지면서 안착에 성공한다.[78]

7.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 No.91
김성근(金星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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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KPuIYF.png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시절

7.1. 야인, 돌격대를 만나다

김성근의 삼성 시절은 삼성 팀뿐 아니라 김성근 본인에게도 커리어상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김성근이 팀을 맡으면 팀이 약팀으로 전락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 그 덕에 해태 인스트럭터 등을 전전하며 연명하는 수준이었고, 이제는 다들 감독으로 커리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6년, 뜬금없이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으로 발탁되면서 야구계에 복귀하게 된다.

김성근을 쌍방울 감독으로 영입한 인물은 이용일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이었다.[79] 쌍방울 레이더스가 계속 최하위권을 전전하자 창단 이래 구단주 대행을 맡아 사실상 야구단을 책임져 오던 이용일도 이제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 쌍방울 그룹에서 자리보전도 문제였지만 야구계를 대표하는 원로 중 한명으로 그간 쌓아온 명성이 점차 나락에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당시 이용일이 처음에 영입하려 했던 인물은 일본프로야구 출신인 김영덕 백인천이었다. 참고로 김성근은 일본 사회인야구 출신이다. 어쨌거나 모두 일본 야구 출신이고 선수 장악력이 높고 훈련 강도가 높으며 스몰볼, 작전 야구를 좋아하는 등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감독들이다. 그러나 김영덕은 김종희 한화그룹 회장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팀 감독은 맡지 않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또 백인천은 삼성 감독 제의를 받았기에 당연히 거절했다. 결국 처음에는 선택지에 없었던 김성근에게 기회가 오게 되었다.

하지만 구단주인 이의철 쌍방울 그룹 부회장이 김성근을 원치 않았다. 쌍방울팬들은 연고지인 전북 출신의 감독을 원하고 있었고, 이의철 부회장은 팬들의 이런 바람대로 지역 출신 스타를 차기 감독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의철 구단주는 차기 감독으로 김봉연이나 김준환을 원했다. 이들은 전라북도 연고지 출신에다가 나이도 젊었고 김준환은 이미 쌍방울에서 코치를 맡고 있어서[80] 팀 사정을 잘 알고 있고 선수단 파악도 수월했다. 그러나 이용일은 현재 쌍방울 같은 최약체 팀에게는 굉장히 강한 카리스마로 팀을 휘어잡을 수 있는 감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김성근 감독은 고집이 세고 아마추어 스타일로 선수들을 혹사시킨다는 비난도 많이 받지만 당시 쌍방울은 그런 감독이 필요했다. 나는 이의철 구단주에게 "제 판단으로는 김성근 감독이 적임자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 [출처: 중앙일보] [白球와 함께한 60年] (31) 쌍방울과 김성근 감독

사실 이용일은 초기에는 쌍방울에서 비교적 웰빙 야구를 추구하면서 장기적인 전력 상승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쌍방울의 전력 향상은 요원해 보였고 쌍방울이 올라가기 전에 자신이 옷 벗을 위기에 처한 것. 이미 이 시기의 김성근은 혹사 등이 어느 정도 알려진 이후였지만, 결국 이용일 구단주 대행은 쌍방울에 대해 극약 처방을 하게 되었다.

7.2. 90년대 최약체 쌍방울, 정말 약체였나

당시 쌍방울은 1991년 창단 이후 단 한 번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해보지 못하고, 꼴찌만 밥먹듯이 하던 약체 팀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실제로 1991년부터 1995년까지 7-8-7-8-8위라는 압도적인 꼴찌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쌍방울의 전력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특히 타선에는 김기태, 박경완, 조원우 등 잠재력을 갖춘 젊은 중장거리 타자들이 많았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전해인 1995년 쌍방울은 팀 홈런, 팀 타율 모두 4위를 기록했다.

다만 이 팀은 투타에서 심각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 투수진은 정말 압도적인 꼴찌 팀. 팀 방어율 4.67로 단독 꼴찌에 볼넷도 안타도 가장 많이 내주는 팀이 당시 쌍방울이었다. 그나마 사람 구실하는 건 김원형 정도였다. 성영재는 이닝은 꾸역꾸역 먹어주지만 5점대 방어율로 제 활약을 못하는 상태였고, 조규제는 1991년 신인왕 이후 그런 시즌을 다시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나마 봐줄 만하다는 타격이라고 해서 썩 좋은 상황도 아니었다. 태평양, 해태가 당시 워낙 하위에 머물러서 그렇지, 쌍방울의 상황도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다. 1995 시즌을 봤을 때 타율과 홈런 등 클래식 스탯에서 높게 치는 분야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그게 득점으로 이어지질 않았다. 세이버메트릭스에서 높게 취급하는 출루율과 장타율은 6위였고, 그렇다고 희생번트가 적은 뻥야구를 하는 팀도 아니었다(희생타 103개, 리그 1위). 실제 득점도 6위. 즉 번트는 번트대로 대고 홈런도 나름 잘 나오는데 정작 점수를 못 뽑는 기형적인 팀.

특히 당시 쌍방울 최대의 문제는 뿌리 깊게 깔린 패배주의였다. 이는 단순히 신생팀이라서의 문제를 넘어서, 이 팀 자체에 깔려 있는 문제점이었다. 8구단 드립은 핑계고 사실 해태 타이거즈의 기반을 약화시키려고 만든거 아니냐부터 주변에 해태 팬들 많으니까 이 팀은 해태 2중대가 딱 어울린다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돌았고, 실제로 이 기간 동안 전주에서의 인기는 해태보다 낮았다. 거기에 선수들도 대부분 노쇠화, 부진 등으로 자기 팀에서 밀려나 쫓겨오듯 온 선수들이었다.[81]

물론 당시 이용일 구단주 대행은 김성근 영입과 함께 팀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김성근 신임 감독에게 전해보다 네 배나 많은 15억을 스카우트 자금으로 배정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을 해줬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1996년에는 딱히 들어온 선수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이 선수들의 유입이 본격화된 것은 1997년.[82] 다만 분명 스카우트 자금은 크게 배정되었는데 의외로 선수단 유입이 적었던 것은 특이한 현상이긴 하다.

즉 당시 쌍방울은 분명 약팀이 맞다. 김성근 비판층에서는 1996년 쌍방울의 15억 스카우트 자금 배정, 1997년 페이롤 1위 기록을 예시로 들며 쌍방울이 굉장히 많은 투자를 했고 많은 선수들을 영입한 것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선수단을 보면 상황은 그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당장 1997 시즌 쌍방울 타선이 강타선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걸 이끌던 김기태, 박경완, 최태원 등은 애초에 김성근 임명 전부터 쌍방울에 있던 선수들이었다.

쌍방울이 돌풍을 일으켰던 1996-1997 시즌 외인이라 할 수 있는 건 김성래 한대화 정도이고, 그나마도 한대화는 원래부터 김성근 감독과 갈등이 심했던 만큼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스탯티즈 등에서 제공되는 당시 선수 이동 정보들을 봐도 기존 김성근 감독이 타 팀에서 했던 것처럼 노장들 몇 데려온 것이 다일 뿐, 뭔가 두드러지는 유입 사례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태평양, 삼성 때의 은퇴 선수 영입이 훨씬 화려할 지경. 도대체 그 15억과 페이롤 1위의 돈은 다 어디로 간 건가[83]

1991-1992 삼성을 우승 전력으로 판단한 것도 그렇고, 야구 팬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과거든 지금이든 시즌 시작 전 전문가들의 의견은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당시 전문가들도 1996년 쌍방울을 절대 상위권 전력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당시 4강으로 꼽혔던 팀은 전 시즌 3강을 형성했던 OB와 LG, 롯데, 그리고 삼성. 하지만 그 예상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1996년에는 이 4팀이 모두 탈락하고 해태, 현대, 쌍방울, 한화가 상위권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다만 당시 쌍방울의 가난함이 사실은 심하게 과장되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팀이 원정경기를 떠날 때마다 싸구려 여관방을 전전하고 무등 야구장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원정은 숙박하지 않고 매일 당일치기로 치렀으며 스프링캠프도 제대로 못가서 전주 시내 공원에서 비닐하우스를 치고 훈련을 했다던지 동네 기사식당에서 외상음식을 먹어가며 시즌을 치렀다[84]고 하는데, 이 시절 일들이 많이 부풀려져 있는 경우도 많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고 사실이라 하더라도 쌍방울 선수들이 겪은 어려운 일화들은 IMF 이후 쌍방울이 부도가 나며 사정이 많이 어려워진 1998년 말~1999년 정도에나 해당되는 일이다. 김성근을 미화하는 논조로 작성했던 칼럼에서조차도 IMF 이전에는 쌍방울의 처우가 다른 팀에 비해서 별로 나쁘지는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7.3. 1996-1997 시즌의 성공

김성근은 사령탑에 취임하며 “목표는 60승”이라고 밝혔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당시 60승은 전년도 5위 기록이었으나, 그조차도 냉소적인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996년 쌍방울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목표보다 10승이 많은 70승 54패 2무를 기록하며 정규 리그 2위를 하는 파란을 일으킨다. 포스트시즌에서는 현질로 무장하여 창단 첫 해 돌풍을 일으킨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먼저 2승을 거두며 벼랑 끝까지 밀고 갔으나 결국 내리 3연패를 당하는 리버스 스윕을 당하며 돌풍은 멈추었다.[85]

1997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문가들은 96년의 기적을 무시하며 시즌에 앞서 쌍방울을 또다시 확실한 꼴찌 후보로 꼽았다. 마운드의 주축세력인 오봉옥 박성기 등이 4월에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에이스 성영재도 허리부상으로 5월 이후 힘을 쓰지 못하는 등 악재가 더욱 겹쳤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악착같은 쌍방울 야구는 결국 3위에 등극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팀에서는 바람잡이 선발(...)에 이은 벌떼 야구로 사상 초유의 20승 구원투수가 나왔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1승2패로 물러났다.

구단 사상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연고지 내에서도 위상이 커졌는데[86] 이 때 이르러 전주시민들은 비로소 쌍방울 레이더스 해태 2중대 팀이 아닌, 우리들의 홈 팀으로 받아들였다. 쌍방울 시절부터 팀과 같이 해 온 박철호 SK 와이번스 전 홍보팀장은 김성근의 업적에 대해 "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 전주구장에 암표장사가 나타났다. 이거 하나로 충분하다."라고 회고했다.
“프로야구 감독을 하면서 쌍방울 때만큼 전력투구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새벽 혹은 해가 뜰 때까지 데이터와 씨름을 했으니까. 그때부터 상대 타자를 보면 뭘 기다리는지까지 보이기 시작했어. 선수 분업화를 통해 공부도 많이 했고. 야구에 눈을 떴다고나 할까.”
- 김성근

김성근 팬덤에서는 물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김성근 야구의 진수는 SK 와이번스 때가 아니라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에 나왔다고 말한다. 훗날 김성근 본인도 자기가 맡은 팀 중 제일 애착이 가는 팀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도 않고 " 쌍방울 레이더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실제로 당시 상황에 맞춰 최대한의 능력을 뽑아내는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쌍방울 시절이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팀 특성에 맞게 홈 구장부터 개편하였다. 일단 안타가 많고 김기태, 박경완 정도 말고는 거포가 없다는 팀 특성에 맞게 전주 야구장의 펜스를 높였다. 동시에 마운드 높이를 낮췄는데, 이는 언더핸드 투수에게는 유리하고 오버핸드 투수에게는 불리한 방식이었다. 당시 쌍방울 팀 특성상 성영재, 김현욱, 김기덕 등 언더핸드 투수들이 많은 것을 이용한 것. 이처럼 홈 구장을 투수에 친화적으로 개조한 후, 투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면서 성적을 끌어올렸다.

특히 당시 쌍방울은 이러한 홈 구장 개편의 영향인지 홈 경기에 매우 강해서, 홈구장 17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당시 17연승 기록 작성의 순간이 진짜 장관이었다. LG전 0-0 상황에서 9회초 신인 안재만에게 데뷔 첫 홈런을 내줘서 0-1로 뒤쳐졌다가 바로 9회말에 김호가 끝내기 2점 홈런을 날리는 명승부를 만들어냈다. 바로 다음날 안재만에게 또 홈런맞아서 연승 기록이 끊긴 건 비밀 당시 쌍방울의 홈 승률은 1996년 0.629, 1997년 0.677로 리그 전체 1위였다. [87]

이때부터 야구계에서는 김성근에 대한 두 가지 평가가 엇갈렸다. 한쪽은 “하위팀을 상위팀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이 탁월한 감독”이라는 평가였다. 89년 태평양의 돌풍에 이어 96년과 97년 만년 하위팀 쌍방울을 포스트시즌에 올려놓았으니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그래도 우승을 만들지는 못하는 감독”이라며 평가절하했다. 당시 야구계조차도 ‘김성근 야구’에 대해 경외감을 표하는 쪽도 있었지만 안티 세력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7.4. 쌍방울 성공의 배경: 벌떼 마운드와 돌격대 타선

당시 쌍방울은 고정된 선발은 거의 없었지만, 상황에 맞춰서 언더핸드와 우완 투수, 좌완 투수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승리를 일궜다. 일명 김성근표 벌떼야구의 시작이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벌떼 야구가 선발-불펜 없이 닥치는대로 투입되었다는 오해와는 달리, 1996-1997 양 시즌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의외로 선발들의 보직은 꽤나 정확히 지켜졌다. 당시 에이스였던 성영재는 1996년 24경기 중 24경기, 1997년 23경기 중 22경기를 선발로 투입되었다. 유현승은 각 10경기, 6경기 모두 선발 출장[88], 김원형은 26경기 중 23경기, 29경기 중 28경기 선발 출장하였다. 1997년에는 아예 활약하지 못했지만, 박성기는 26경기 중 20경기를 선발 출장하였다.[89]

반면 당시 대표적인 불펜 투수였던 김현욱은 1996-1997 두 시즌 119경기에 달하는 경기 중 단 한 경기를 제외하면 오직 불펜으로만 출전하였다. 마무리였던 조규제 또한 100경기 모두 불펜 출전. 즉 대략 1-3선발까지는 제대로 지켜졌고, 대신 4-5선발과 불펜 부분에서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대략 SK 와이번스 시절 김광현+용병 2를 기본으로 깐 상태에서 송은범, 고효준, 전병두 등이 선발과 계투를 오가던 것과 비슷한 상황. 당시 이런 마당쇠 역할을 수행했던 대표적인 선수가 김기덕 오봉옥.[90]

당시 쌍방울 투수들의 활약은 놀라웠다. 리그 전체 꼴찌를 기록하던 팀 방어율은 1996-1997시즌 모두 3위까지 올라왔다. 특히 이 투수진의 부활 배경에는 불펜 투수들의 활약이 컸는데, 스탯티즈의 WAR 점수를 보면 1996년 쌍방울 선발진은 리그 5위, 1997년은 리그 7위로 중하위권 수준이었다. 그러나 구원투수 WAR는 두 해 모두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였다.

당시 타선 또한 크게 상승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포텐셜은 있었으나 제대로 점수를 내지 못하던 비효율적인 타선을 효율적으로 개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1996년 팀 홈런은 전년 83개(리그 4위)에서 58개(리그 꼴찌)로 크게 줄어들었으나, 정작 OPS는 0.683(리그 6위)에서 0.709(리그 2위)까지, 득점은 476점(리그 6위)에서 545점(리그 3위)까지 크게 올라갔다. 즉 홈런은 많았지만 산발성으로 점수를 내지 못하던 팀을 뜯어고쳐서 꾸준히 점수를 낼 수 있는 OPS형 팀으로 개조한 것. 심지어 1997 시즌에는 역시 득점 리그 3위(602점), OPS 리그 2위(0.766)를 기록한 것에 더해, 홈런도 110개 리그 3위로 다시 올라섰다.

특히 당시 팀의 개조는 외부 선수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부 선수들의 성장세가 컸다. 심지어 1997년 홈런 증가 또한 그러했는데, 외부 선수들이 홈런을 쳐줘서 올라간 성적이 아니었고 내부 선수들의 홈런이 1996년 일시적으로 줄어들었다가 늘어난 것이 컸다. 1996년에도 활약했던 김기태, 박경완, 심성보 3명이 두자리수 홈런을 기록한 게 대표적. 즉 김성래 정도를 제외하면 기존 선수들이 정상적으로 안착한 결과로서 성적을 끌어올린 것에 가까웠다. 물론 번트는 여전히 리그 1위였고 단순 숫자로 보면 더 늘어났지만, 팀 타선 개선에는 확실히 성공한 것.

다만 당시 팀의 선전 한가운데에는 역시 혹사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구원 20승이라는 역대급 성적을 올린 김현욱. 당시 김현욱은 삼성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지만, 입단 첫 해인 1993년 1군 6경기에 등판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허리 부상을 입어 신고선수로 전환되었다. 이후 1995년 류명선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었는데, 1996년 김성근 감독에게 자신을 붙잡고 봐달라며 매달리면서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김현욱은 1997년 구원으로만 20승을 올리며 다승왕, 평균자책점 1위(1.88), 승률 1위(0.909) WHIP 1위 피안타율 2위(.204), 탈삼진 4위(135개)등 리그를 정복하며 최고의 투수 반열에 올랐다. 이 당시 최고의 한 해를 보내긴 했지만, 중간계투로 70경기 157⅔이닝을 던지는 역대급 혹사가 일어난 것. 동시에 이 시기 다승왕 밀어주기 논란에 휩싸이면서 안타깝게 이대진에게 투수 부문 KBO 골든글러브를 빼앗기고 말았다.[91]

특히 김현욱은 무릎을 많이 사용하는 사이드암 투수였고, 결국 연말에는 무릎 수술을 받았다. 이듬해인 1998년에도 무릎 부상에서 미처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복귀하여 그 해에도 선발 등판 없이 13승 7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3.34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68경기 129⅓이닝을 던지는 등 여전히 혹사에 시달렸다. 이처럼 무릎 부상 후 너무 일찍 복귀해버린 것은 결국 조기 은퇴의 요인이 되었고, 선수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에도 애로사항이 꽃피고 만다.[92]

7.5. 외환 위기와 쌍방울의 몰락, 또 한 번의 경질

김성근 감독이 성적을 냈던 첫 2년간 쌍방울 그룹은 야구단에 상당한 수준의 투자를 했다. 쌍방울 그룹은 만년 하위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함과 동시에 나름대로 야구단에 적극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로 모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모기업의 지원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당시 쌍방울의 운영은 굉장히 방만한 수준이었다. 전술했듯이 일명 돈질, 외부 영입의 문제가 아니긴 하였지만, 선수단 연봉이 전 구단 페이롤 1위를 기록했던 것은 엄밀한 사실. 거기에 이미 1996년부터 무주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무주리조트나 쌍방울 건설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비용 문제가 쌍방울 구단의 존폐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방만한 지출과 선수단 연봉관리가 이후 구단 해체 및 재창단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만든 것도 일정 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거지 수준으로 지원이 줄어든 것은 아니고, 전년도(97년)에 비해 20% 줄어든 수준이었다. 쌍방울이 전년도 페이롤 1위 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지원이 박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그걸 견뎌내는 방식이었다. 성적이 나왔으니 선수들 연봉을 깎을 명분은 없었고, 이를 견뎌내기 위해 박경완, 김실, 박성기 등 고액연봉자 주축 선수들을 팔면서 지원금이 삭감된 부분을 벌충한 것이다. 당시 쌍방울은 조금이라도 비용이 들 만한 선수들은 모두들 내보냈다. 1998년 시즌 시작 때 한대화, 박노준, 이종두 등 노장선수들은 은퇴하였다. 한기철, 김미호 등 9명은 보류 명단에서 빠졌고, 1998년 용병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국내 8개 구단 중 유일하게 용병 영입을 하지 못하고 새해를 맞이하였다. 선수단 규모는 47명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그래도 김원형, 성영재, 김기덕 정도가 있어 투수진은 봐 줄 만했지만, 야수진은 최태원을 제외하면 사실상 끝장나는 분위기였다. 시즌 중에도 마무리 조규제를 현대에 현금 3억+광고 협찬 3억+가내영, 박정현과 바꾸었다.

물론 선수단 유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구단은 유출된 선수보다 훨씬 더 많은 선수들을 새로 영입했다. 1998시즌에만 가내영, 김유진, 박정현, 박창현, 이근엽, 박계원, 이동수 등이 새로 영입되었고, 윤재국 같은 신인들도 등장하였다. 실제로 신인 트로이카로 대활약했으나 그 이후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던 박정현이 이 시기 어느 정도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이런 상황 속에서도 김성근 감독의 지휘 아래 당시 쌍방울은 8월까지 3-5위를 오가며 끝까지 가을 야구를 노리는 모습을 보였다. # 그러나 차포 다 뗀 상태에서 타팀이 버리는 선수들만 모은 팀으로는 결국 한계가 있었고, 결국 1998년은 6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때야말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티는 김성근식 야구가 가장 정점을 보여준 시기로 평가받기도 한다.

사실상 끝장난 것은 1998년 시즌 이후. 당시 쌍방울은 김기태, 김현욱 두 간판 선수를 삼성에 현금 20억에 트레이드했다. 이때 김성근 감독은 사실상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1999년에는 최하위로 내려앉고 말았다. 7위와 승률이 2할이나 차이나는 압도적인 꼴지였다. 1999시즌 전 KBO에서는 쌍방울에게 구단 유지를 위해 최소 승률 3할을 맞추라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이것이 결국 김성근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반기를 3할 승률로 마치기 위해 조바심이 나있던 김성근은 1999년 6월 18일 남은 여섯 경기를 모두 이겨야 전반기 3할을 달성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결국 사상 초유의 심판 폭행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 KBO는 김성근 감독에게 12경기 출장 정지 및 벌금 200만원의 중징계를 내렸고, 쌍방울은 남은 경기에 내리 패하며 2할 5푼에도 못미치는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감했다.

결국 쌍방울 구단은 7월 올스타전 기간에 김성근을 경질하고 김준환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다.[93] 정말 의외인 것은, 김성근 감독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잘린" 것은 쌍방울 때가 처음이었다. 숱하게 감독직에서 물러났지만, 이 모든 것은 다 계약 기간 종료와 함께 물러난 것이었다. 경질 당시 쌍방울의 승률은 0.224. 공교롭게도 후임인 김준환 감독 대행도 똑같이 0.224의 승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시즌 후 쌍방울 레이더스는 해체되었다.

7.6. 쌍방울 시기의 각종 비매너 플레이 일화

쌍방울 감독 시기는 과거부터 악명 높았던 김성근의 사사건건 시비걸기 행태가 과거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시기이기도 하다. 박재홍 부정타격 시비,[94] 부정 방망이 항의 사건, 마운드 높이 시비, 심판 폭행 사건 등 여러 형태의 사건들이 줄줄이 나오던 시기.
올 프로야구 초반, 뛰어난 타력으로 현대 돌풍을 이끌고 있는 박재홍의 타격 자세를 놓고 만들이 많다. 박재홍이 방망이를 휘두르고 난 뒤 왼발이 타자석을 벗어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야구 규정을 어기고 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 지난 9일 현대와 쌍방울의 인천 경기 도중, 쌍방울 김성근 감독은 오석환 주심에게 이 문제를 놓고 강하게 항의했다. 이에 해태 벤치도 11일 광주 경기에서 그의 타격 자세가 규정을 위반하는지 여부에 대해 명확한 판정을 내려줄 것을 심판진에게 여러 차례 요구했다.
동아일보, 1996-05-14
25일 인천구장은 박재홍의 타격 자세 시비로 몰수 게임 직전까지 가며 16분간 경기가 중단됐다. ... 그러나 이는 김감독 고도의 신경전. 선두타자 김인호에게 홈런을 맞은 박성기에게 안정을 찾을 시간도 벌어주고 최근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박의 기를 미리 꺾어두자는 심리작전. ... 이 문제로 박의 플레이는 분명 위축된 것도 사실. 지난주 박이 24타석 무안타의 극심한 슬럼프에 빠진 것도 발목 부상과 동계 훈련 부족이 원인이지만, 타격 문제 시비가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도 크다.
- 경향신문, 1996-06-26

쌍방울 감독 시절 내내 김성근 감독이 가장 신경썼던 상대는 현대 유니콘스였다. 그 중 첫 사건은 당시 신인이었던 박재홍의 타격 자세였다. 박재홍은 1996년 데뷔 첫 해 홈런왕, 타점왕, 대한민국 최초 30-30클럽을 기록하며 리그를 말대로 씹어먹었는데, 실제로 당시 박재홍의 타격 자세는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박재홍은 홈플레이트와 워낙 가까운 지점에 붙어 타격했는데, 왼발이 타석 앞쪽 라인을 넘어서서 타격하였던 것. 이를 김성근 감독이 지적하자, 해태 김응용 감독도 같이 동참하여 이에 대해 지적하기도 하였다. 다만 명확히 어겼다기에는 애매한 수준이었고, 심판진의 판정 이후 KBO에서 유권 해석을 내려 규정 위반이 아니라고 해석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김성근 감독의 본격적인 목적은 정말 어겼느냐를 지적하기보단, 너무 강력했던 박재홍을 흔드는 것이 제일 큰 목적이었다. 실제로 이를 통해 박재홍을 부진에 빠뜨리는 데 성광했고, 김성근 감독은 현대와의 경기에서 상당한 재미를 봤다.

이후 박재홍은 SK 와이번스에서 김성근 감독과 선수-감독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된다. 다만 김성근 감독의 야구 특성상 붙박이 주전으로 뛸 수 없었고, 자신보다 훨씬 어린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플래툰으로 기용되었기에 당시 김재현과 마찬가지로 갈등이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등이 대부분 풀린 것으로 보이는 김재현과 달리 박재홍은 해설 중 김성근 감독에 대해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당시의 앙금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부정방망이 시비'가 한달 가까이 프로야구계를 휘젓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가 '문제의 방망이'를 들고 일본에 이어 미국에 재차 검사를 의뢰하고 있는 가운데, 27일에는 쌍방울 김성근 감독이 규정상 검은색 방망이는 쓸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 삼성이 방망이 덕으로 좋은 성적을 올렸는지는 속단할 수 없다. 요점은 삼성의 성적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면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 한겨레, 1997-05-29

두번째 사건은 부정방망이 논란이었다. 이 사건은 본래 1997년 당시 삼성-LG 3연전에서 LG 천보성 감독이 삼성 백인천 감독에게 삼성 선수들이 부정 배트를 쓴다며 먼저 시작한 논쟁이었다. 당시 배트는 백인천 감독이 미국 지인을 통해 직접 주문하고 제작한 배트. 근데 정작 KBO에 정식 이의를 제기한 것이 김성근 감독이었다.

여기서의 부정 배트란 처음에는 압축배트 문제였다. 압축배트란 나무를 압축함으로써 탄성 계수가 높아져, 타격 시 반발력을 향상시켜 비거리를 늘린 배트를 말한다. 다만 이것은 검사 결과 아닌 것으로 판정되었는데, 그러자 바로 김성근 감독은 방망이 색 중 검은색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들고 나왔다.

사실 KBO 규정대로라면 공인 마크가 찍혀있지 않은 것, 방망이의 색깔 규정을 어긴 것은 부정 배트인 것이 맞다. 그러나 이는 이미 사문화된 규정이란 게 문제. 정작 공인 마크 문제를 따졌던 LG 또한 공인 마크가 없는 방망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색깔 방망이를 제소한 쌍방울조차 검은색 방망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었다. 즉 일종의 내로남불 문제.
수원구장의 마운드 높이가 실제로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1일 현대-쌍방울전이 끝난 뒤 토목기사를 동원, 정밀 측정한 결과 마운드 높이가 41.3cm(오차범위 ±3mm)로 야구 규칙에 명시된 25.4cm보다 15.9cm 더 높았다고 12일 발표했다. ... 쌍방울 김성근 감독은 11일 경기 직전 마운드의 높이가 규정보다 높은 것 같으니 측량해줄 것을 심판진에 요구하다 김병주 구심에게 퇴장당했다.
- 동아일보, 1998-07-13

1998년에는 수원구장 마운드 높이를 문제삼아 경기를 지연시키다가 퇴장당했는데, 실측 결과 실제로 15cm가 높았던 것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오버핸드 투수일 경우 키가 큰 투수일수록 더 높은 타점에서 공을 뿌리게 되어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을 생각할 때, 15cm나 차이가 난다면 실제로 유리했던 것은 사실이고 규정 위반도 사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걸 그냥 곱게만 볼 수 없는 것이, 정작 쌍방울은 전주구장 마운드를 거의 평지 수준으로 깎아버렸다는 것. # 전술했듯이 쌍방울은 유능한 언더핸드 투수가 많았고, 오히려 마운드를 깎아버리면 언더핸드 투수에게는 유리하고 타팀의 오버핸드 투수에게는 불리한 상황이 벌어진다. 즉 자팀에게는 유리하게 규정을 어겨놓고 타팀이 규정을 어겼다고 지적한 케이스라 전형적인 내로남불 케이스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독특한 부분이, 이 시기까지 오면 김성근 혼자 규칙 갖고 난리다 하는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김성근 감독이 뭔가를 지적하거나 하면 이때다 하며 다른 감독들도 동참하는 양상이 이때부터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부정방망이 사건은 애초에 LG 천보성 감독이 시작했지만 쌍방울 김성근 감독이 키운 거였는데, 심지어 그 외의 다른 감독들도 "삼성방망이가 의문스럽다"는 묘한 발언을 되풀이하며 묘하게 동참하는 느낌을 풍겼다. 또한 박재홍 타격 자세 문제에도 해태 김응용 감독이 뛰어들었던 것도 독특한 부분.

즉 과거의 김성근 감독이 하는 흔들기는 그 이전까진 김성근 혼자 이상한 트집잡기한다는 이미지였다면, 이 시기에는 다른 감독들도 이런 것을 이용하기 시작했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이는 그전까지 아마추어리즘이 지배하였던 한국 프로야구가 점점 진짜 프로로서 악착같이 싸우는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일 수도 있는 부분이다.

8.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삼성 라이온즈 No.72
김성근(金星根)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가 코치진을 대폭 개편했다. 최근 서정환 감독을 해임하고 김용희 감독을 선임했던 삼성은 19일 김성근 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을 2군 감독으로 영입하고, 올 시즌 한국시리즈 우승팀 한화 이글스의 계형철 투수코치를 스카우트했다. 또 삼성은 쌍방울의 조범현 포수 코치와 장효조 전 롯데 타격코치를 영입해 코칭스태프 진용을 보강했다.
- 한겨레, 1999-11-20

김성근 감독은 2000년, 삼성의 2군 감독이 되었다가 그해 말 김응용 감독이 취임하면서 1시즌만에 해임되었다. 사실 애초에 김응용 감독과 그의 사단이 2000시즌부터 삼성을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일이 꼬여버리는 바람에 삼성 취임이 1년 후로 늦춰지게 되었다. 갑자기 일이 꼬여버리자 삼성 구단은 급히 2000년 1시즌을 위해 임시로 코칭스태프들을 꾸렸는데, 1군 감독에 김용희, 타격코치에 장효조, 2군 감독에 김성근 등이 그들이었다.

이때의 임명을 잘 보면 장효조와 김성근 모두 과거 삼성과 껄끄러운 인연이 있었다. 삼성 시절 장효조는 매년 연봉 협상에서 삼성 구단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것으로 유명했다. 1988년 롯데로 트레이드된 후 장효조는 거의 삼성 구단과는 척을 졌다. 장효조는 롯데로 트레이드되고 나서 고향인 부산으로 집을 옮겼고, 죽을 때까지 거주지를 부산에서 대구로 옮긴 적이 없었다. 삼성 구단 역시 장효조를 코칭스태프로 기용하라는 팬들의 열화를 무시하고 2000년을 제외하면 무려 2010년까지 장효조를 한번도 코치로 기용한 적이 없었다.

김성근 역시 말할 나위 없었다. 삼성 시절의 실패 당시 선수단의 반발은 실제로는 항명까지 이어졌고, 삼성 출신 코치들과 프런트까지 선수단 항명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OB 베어스 항명 파동와 다르게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결국 삼성에서의 실패 이후 쌍방울 감독 임명 전까지 김성근은 야구 메인 프레임에서 사실상 밀려났으며, 인스트럭터와 해태 2군 감독으로 연명하며 고생한 바 있었다. 쌍방울 감독 시절에도 김성근과 삼성은 여러모로 척을 졌는데, 자신과 척을 졌던 삼성에게 여러 차례 빈볼을 던지는 등 많은 트러블이 있었다.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일화로는 이만수 추격 사건, 부정배트 소동 등이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임명된 것은 말 그대로 땜빵 목적. 당시 1군 감독이었던 김용희조차 사실상 김응용 영입 이전까지의 바지사장 목적이었고, 경질된 전 감독인 서정환을 사장 보좌역, 전전 감독인 백인천은 타격 인스트럭터로 하여 잔여 연봉 보전해주는 등 황당한 인선이 계속된 상태였다. 즉 이 시기 삼성은 말 그대로 김응용 체제 시작 전의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김응용 사단이 들어오자마자 죄다 경질당하기도 했고. 그래도 이 시기 김성근이 맡았던 중요한 제자가 몇 있으니 바로 배영수와 강동우.

당시 배영수는 2000년 1차 지명으로 입단하였는데, 당시 팀 고졸 신인 역대 최고 계약금이었던 2억 5천만 원을 받고 입단했다. 바로 개막전 엔트리에 들었지만 기회를 크게 받지 못했는데, 건방진 신인이었던 배영수는 당시 투수코치 겸 수석코치였던 계형철[95]에게 선발로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계형철 코치는 근데 너 이거 던지면 바로 깨지고 2군 간다 하면서도 기회를 줬고, 실제로 배영수는 당시 엘지와 붙었던 해당 경기에서 한 이닝 동안 7실점으로 폭망하고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영수는 처음으로 김성근 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

당시 김성근은 매일 아침 배영수를 방송으로 호출해 공을 500개씩 던지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하체로 공을 던지는 법을 익히면서 선수로서 크게 성장하였다. 당시 일주일간 던진 공이 자그마치 3500개.[96] 배영수 본인도 경북고 시절의 자신은 기본기의 기자 조차 없는 선수였고, 이 시기 김성근 감독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하체를 잘 쓰는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김성근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바 있다.[97] #

강동우는 1998년 10월 펜스에 부딪치면서 왼쪽 정강이뼈가 뒤틀리며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사실상 야구 인생이 끝날 뻔한 위기를 겪었다. 당시 부상은 '야구 선수로는 물론이고 정상인으로서의 생활도 힘들다라고 했을 의사도 부정할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으며, 이후 2년간의 재활이 시작되었는데 이를 도운 것이 김성근 감독이었다. #

다만 이 시기 구타 사건도 몇 차례 있었다. 사실 지금에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올드 스쿨 감독이나 선수들은 보통 훈육이란 명목으로 제자나 후배들을 구타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는 김응용, 백인천 등 올드 스쿨 지도자들은 대부분 있는 이슈였고, 김인식 정도가 독특한 예외였다. 김성근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는데, 당시 폭행당한 것으로 유명한 선수가 선술한 배영수와 정현욱.

9. LG 트윈스 감독 시절

LG 트윈스 No.76
김성근(金星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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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svg LG 트윈스 재임시절

9.1. LG 트윈스의 김성근 영입

김성근 감독은 2001 시즌을 앞두고 LG 2군 감독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감독이었던 이광은이 구단에 요청해서 영입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유는 분위기 쇄신. 그러나 이광은 감독과 김성근 2군 감독은 그전에 전혀 인연이 없는 사이였던 만큼, 이를 그대로 믿을 만한지는 의문. 오히려 2000년부터 이광은 호가 기존 전력을 생각해볼 때 계속된 부진을 거듭하고 있었던 만큼,[98] 이광은을 쳐내기 위해 초보 감독 이광은보다 경력이든 뭐든 압도적인 야구계의 대선배 김성근을 들이밀면서 나가라고 압박을 줬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임명은 사실상 프런트의 암묵적인 지시 아래 이광은을 잘라내고 차기 감독으로 올라가는 전형적인 수순이었다. OB 시절 김성근이 이광환에게, SK 시절 김성근이 이만수에게 당한 것과 비슷한 맥락.

독특한 부분은 정작 그 전임 감독인 이광은도 초보 감독이긴 하지만 김성근과 마찬가지의 스몰볼 관리야구 체제였다는 점. 실제로 이광은이 선수진과 충돌했던 가장 큰 이유 또한 이광환 이후 자율야구를 중심으로 흘러왔던 LG에 관리 야구를 강요하는 이광은이 맞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었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보내기 번트 지시에 반발한 서용빈이었다. 그런 사람을 몰아내려고 하면서 가장 자율야구와 거리가 먼 김성근을 데려왔다는 것은 당시 LG 프런트가 얼마나 생각없이 움직였는지, 이후 김성근 감독을 쳐낼 때의 핑계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그 자율 야구가 맘에 안 들어서 이광은을 임명했고, 이광은 같은 초보 감독으로는 그게 한계가 있으니 김성근을 데려와서 그걸 더 강요하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 이후 김성근 또한 LG 야구와 컬러가 맞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쳐낸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기 LG 프런트의 행보는 굉장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보라 할 수 있다.

2000년 시즌 종료 후 LG는 대대적인 투자로 FA 최대어 홍현우를 데려왔고, 한화 1999 우승의 중심에 있었던 거포 댄 로마이어를 영입, 일명 '준마재현' 타선을 구축했다. 당시 준마재현이란 양준혁-로마이어-김재현-홍현우. 여기에 당시 신인이었던 이병규와 꾀돌이 유지현이 테이블세터를 구축하고, 하위 타선마저 서용빈, 조인성으로 이어지는, 적어도 이름값만으로만 보면 LG는 물론 한국 역사상 최강의 타선이라 할 수 있었다. 2루수 이종열 정도를 제외하면 역대급 핵타선인 데다가, 이병규(좌)-유지현(우)-양준혁(좌)-로마이어(우)-김재현(좌)-홍현우(우)-서용빈(좌)-조인성(스위치)로 이어지는, 마치 게임에서나 볼 법한 역대급 좌우놀이 타선. 선수협 파동으로 여느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던 동계훈련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나 대내외적으로 우승후보 내지는 최소한 4강권이라는 기대를 갖고 시즌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체 그 타선은 어디로 간 건지 이광은 감독은 2001년 시즌 시작하자마자 개막전, 그것도 당시 쌍방울을 물려받아 창단한 최약체 SK를 상대로 1회 만루 찬스에서 홍현우가 병살을 치고, 2연패를 맞이하며 추락하기 시작한다. 투수진은 '노송' 김용수가 은퇴한 가운데 외국인 투수들이 하나같이 부진했고, 최향남 최원호가 부상으로 개점휴업했으며, 기존 선수들 또한 자신감 없는 피칭으로 마운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믿었던 타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찬스에 한방을 기대했던 선수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팀배팅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LG는 급기야 최하위로 추락해 김성근 2군 감독을 1군 수석코치로 임명하는 등 긴급 처방을 취했다. 그러나 급기야 개막 후 9승 1무 25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면서 이광은 감독이 경질되었으며, 자동으로 김성근 1군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팀을 맡으며 김성근 호가 출범한다.

9.2. 당시 LG는 어떤 팀이었는가

김성근이 맡기 전 LG는 꼴찌 팀은 맞다. 실제로 2001 시즌 김성근이 맡을 시점에서는 꼴찌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 LG 트윈스가 최하위에 걸맞은 약체팀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꽤 많은 편이다. 김성근이 부임하기 직전까지 LG 트윈스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 1996년과 1999년 두 번을 제외하고 매년 꾸준히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나름 강팀이었다. 게다가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1997년과 1998년에는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두기도 했기 때문.

전술했듯이 2001년의 LG 타선은 그 이름값만으로만 보면 역사상 그렇게 강한 팀이 없다고 할 정도의 핵타선이었다. 1994년부터 LG를 이끌어왔던 서용빈, 유지현, 김재현 신인 트로이카가 여전히 LG를 지키고 있었으며, 양준혁, 홍현우와 같은 강타자들이 외부에서 영입되었다. 신인 이병규는 1999년부터 팀의 주전 타자로 3년 연속 안타왕과 골든글러브를 매해 차지하는 말 그대로의 천재였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이 선수들이 당시에도 그 상태였는가이다.[99]

이 시기 최대의 변수는 선수협 사태였다. 2000년 선수협 사태 당시 LG 선수 중 김재현, 양준혁은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던 선수들이고, 유지현은 당시 선수협 5적이라 불릴 정도로 이들과 극렬하게 각을 세웠다.[100] 그런 와중에 제일 강경파였던 양준혁이 팀에서 쫓겨나 LG로 들어와버렸으니, 당시 주전 선수들 간에는 이미 이 문제를 두고 파벌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101]

또 커다란 사건은 서용빈의 병역비리 사태. 1997년 서용빈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하고 재기하였으나, 1998년 시즌 개막 직전 교통사고로 인한 턱관절 손상에 이어 1999년에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병역 비리로 구속되어 통째로 시즌을 날렸다. 2000년 다시 복귀하기는 하였으나 소송은 계속되고 있는 상태였고, 무려 2년이라는 공백기 동안의 훈련 부족까지 겹친 상태인지라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특히 양준혁 영입에 따라 포지션을 위협받으면서 이광은 감독과의 불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2000년 선수단 무단 이탈 사태는 이러한 영향도 분명 있었다.

여기에 용병 또한 최악으로 뽑아왔는데, 바로 댄 로마이어였다. 로마이어는 1999년 데이비스와 함께 한화의 우승을 이끌었고 2시즌 동안 74홈런을 기록한 강타자로 그 실력은 최고였지만, 그럼에도 한화가 재계약을 포기한 것은 그 성격 때문이었다. 로마이어는 동료 선수들에게 타격에 대하여 지적과 설교를 자주 하며 반 농담 삼아 플레잉 코치라고 불렸고, 한화 시절에도 국내 코치들이 로마이어의 이런 행동을 월권 행위로 여겨 못마땅스레 여겼다. 심지어 당시 한화 1군 수석 코치였던 유승안이 "로마이어를 쫓아내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겠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 이런 막장 팀 분위기에 제멋대로인 용병까지 결합한 상황. 여기에 양준혁이 DH로 사실상 고정인 상황에서 1루를 서용빈과 경합해야 하니, 전력상으로도 이탈이 발생하는 상황. 결국 로마이어는 이런 습관을 LG 시절에도 버리지 못했고 2001년 7월에 중도 퇴출 당했다.[102]

2000시즌 종료 후 역대 FA 최대어란 기대 아래 합류한 홍현우는 아직까지도 전설적인 먹튀 반열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통산타율 .290을 왔다갔다하던 타격은 2003년(.238)을 제외하고 2할을 넘겨본 적이 없으며 4년 동안 221게임에만 출장하며 홈런은 14개, 도루는 2개를 기록하는 등 진정한 추락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추락한 원인은 FA를 앞두고 무리하게 파워를 끌어 올리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미친듯이 했는데, 그것이 무릎부상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당시 홍현우가 LG 시절에 친 안타를 돈으로 환산하면 안타 1개에 약 1,117만원, 홈런 1개에 1억5,714만원 그리고 도루 1개에 9억원을 투자한 셈이라고 한다. 거기다 준주전으로 뛴 2003년을 제외하면 거의 매 시즌 부상 및 2군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즉 당시 LG 타선은 그 이름값과는 꽤나 다른 상황이었다. 팀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베테랑(유지현, 김재현, 양준혁, 서용빈)들은 선수협 갈등, 병역비리 등으로 사분오열하며 자기들끼리 싸우거나 제 앞가림도 못하는 판이었고, 기껏 데려온 외부 영입 선수는 현재까지도 기록적인 먹튀 선수로 부상에 시달려 1군 출전도 제대로 못하는 선수였다. 여기에 당시 조인성은 1998년 이제 새로 들어와서 자리도 제대로 잡지 못한 신인 포수였고, 오히려 1999-2000 시즌 중 이런 팀 분위기 속에서 혼자 날아다니던 이병규가 독특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결국 이 시기는 LG 트윈스가 안 좋던 시절 항상 지적받았던 콩가루 집안이란 비판이 가장 적절했던 시절.

이러한 상황은 투수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LG 투수진이 사분오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한 리더였던 김용수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 김용수가 2000년 시즌을 기점으로 이광은 당시 감독과 LG 구단에게 등 떠밀리듯 은퇴한 것. 당시 김용수는 1999년 FA 자격 신청을 포기하면서 조금이라도 LG에서 더 있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던 상황이었고, 1999년에도 26세이브를 올리며 건재함을 보여줬으며, 2000년에는 클래식 기록이 나빠보이지만 무려 127이닝을 소화한 것을 볼 때 은퇴가 너무 일렀던 것이 사실이다.

은퇴 기자 회견에서도 김용수는 은연 중에 “1년 정도는 더 뛰고 싶었는데…”라며 기자 회견 중에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당시 김용수의 은퇴는 2000년 이광은 감독에 대한 항명 사태까지 연결된 내용이었다.[103] 게다가 은퇴 전 김용수는 마무리 훈련 도중 “만약 구단이 은퇴시킨다면 구단이 마련해주는 은퇴식이나 은퇴경기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는데, 그 결과 은퇴식, 은퇴경기 모두 이뤄지지 못했다. KBO 최초 영구 결번식을 가진 선수로서는 굉장히 모욕적인 상황.[104]

즉 김성근을 옹호하는 측의 말처럼, 당시 LG가 "최하위권을 전전하던 LG", "최하위의 약체 팀"이라고 할 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판하는 측의 말처럼 좋은 전력인데 고작 그거밖에 못했다 또한 아닌 상황.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 LG의 부진은 야구판에서 자주 나오는 말, "야구는 결국 선수가 하는 것", "좋은 선수 모아놓으면 당연히 우승한다"라는 격언이 결코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볼 수 있다.

9.3. 프런트가 망가뜨린 팀, 김성근 감독 대행호의 출범

이러한 내부 상황과는 달리 선수들 이름값은 대단했기에, LG 트윈스는 2001시즌에도 무난하게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것이라는 언론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난하게 4강에 들 것이라는 언론 평가와 달리 2001시즌 시작과 함께 LG 트윈스는 10경기 1승 9패라는 최악의 부진을 보였다.
LG는 김성근 2군 감독을 1군 수석 코치로 긴급 수혈하고 필사적인 연패 저지에 나섰지만 뒤숭숭한 분위기는 아직 가라앉지 않는다. 연차로 따지면 이감독의 13년 선배인 김성근 수석은 이미 이감독에게서 투수 운영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다.이광은 감독은 마운드 운영을 제외한 타격과 작전, 수비에만 책임을 지는 구도. 이감독은 “내가 직접 구단에 부탁해 김성근 수석을 모셨다”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초짜 감독과 감독급 코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랄까. ... LG의 올 시즌 실험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조 토레와 돈 지머의 뉴욕 양키스마냥 잘 나갈까, 아니면 지난 99년 삼성처럼 한 명이 사임하는 것으로 끝날까. 전국 최다 팬을 보유한 LG의 행보는 2001시즌 프로 야구의 또 다른 관심사다.
- 주간동아 283호, #

결국, 시즌 시작 열흘만인 4월17일 프런트는 특단의 조치로 이광은 감독의 10여년 선배인 김성근 2군 감독을 1군 수석코치로 임명하고 감독의 고유권한인 투수 운용 전권을 이광은 감독에게서 빼앗아 김성근 수석코치에게 위임했다. 이로써 LG 트윈스는 이광은 감독-김성근 수석 코치의 '1팀 2체제'가 한달간 지속되었다.

김성근 수석코치가 투수를 지휘하자마자 LG는 4연승을 기록하며 반전을 꾀하는가 싶었지만, 머리가 두 개인 상태에서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인 파워 게임이 여지없이 시작되었다. 4월 21일 9회 3-3 동점 상황에서 벌어진, 마치 귀신들린 듯한 무더기 실책을 시작으로 팀의 연승이 끊겼고 연달은 실책으로 3연패를 기록하자, 이광은 감독은 김성근 코치의 의견을 묵살하고 양준혁, 홍현우, 발데스 등을 2군으로 내리며 팀 쇄신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점차 김성근 코치의 권한을 제약한 끝에 5월 8일 어버이날 경기부터 투수 교체 권한까지 다시 뺏어오기에 이른다. 김성근이 명목상으로라도 투수 권한을 잡고 있던 시기의 성적은 7승 1무 10패.
[김성근 등록말소 배경] 부적절한 지휘체계로 혼란… 이감독에 힘주는 마지막 기회
이번 조치는 김수석의 요청에 따라 취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LG 이광은 감독은 “김수석이 특별히 부탁을 해왔다. 감독으로서의 내 위치와 위상을 고려해 결단을 내린 것으로 생각한다”며 “팀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만큼 모양새를 따질 때가 아니다. 김수석의 도움은 앞으로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감독은 “5회 이전에 투수교체를 해야 한다거나 접전 상황 등 중요한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하겠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감독의 지시를 받고 김수석이 투수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가는 것이 김수석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등록말소의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6일 김성근 당시 2군감독을 수석코치로 임명하면서 “위기탈출을 위해 최고 수준의 소방수를 영입한 것”이라던 LG의 설명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
2001-05-08 기사 #

그러나 김성근이 물러나고 나서 팀 성적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5월 8일 당일 승리 이후 이광은 감독이 경질될 때까지, 6경기 동안 LG는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였다. 최종 성적은 9승 1무 25패. 결국 5월 16일 이광은 감독이 경질되고, 김성근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임명되어 남은 98경기를 이끌게 되었다.[105]

당시 LG 트윈스의 갈팡질팡 행보는 프런트가 팀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보였다. 처음에는 이광은 감독에게 다 맡기나 싶더니 10경기 동안 크게 부진하자 김성근을 올려 팀을 두 개로 쪼개놓았고, 잠깐 성과가 좋다 싶었으나 바로 파워 게임으로 팀이 다시 부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또 18경기만에 김성근의 투수 권한을 뺏고 이광은에게 몰아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부진이 시작되니 7경기만에 이광은 감독을 경질, 김성근 감독 대행호가 출범하였다. 팀의 체제라는 건 시즌 내내 굳건해야 하는데 4-5월 2개월 동안 체제가 4번이나 바뀐 것. 이처럼 당시 LG는 팀 선수 내부로도 문제가 많았지만, 프런트의 갈팡질팡 행보가 이를 더욱 망가뜨리는 분위기였다.

어쨌든 이런 우왕좌왕 끝에 등장한 김성근 감독 대행의 첫 행보는 팀 분위기를 다잡는 것이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인터뷰에서 “자극을 주면서 하겠다. 현재 상황은 신바람야구로 좋고 관리야구도 좋지만 우선 싸울 수 있는 팀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라고 취임 일성을 밝혔다. 이를 위해 먼저 중심타자였던 양준혁을 1번으로 돌렸고, 로마이어와 서용빈을 모두 활용하기 위해 우익수 역할을 고정 수행하도록 하였다.[106]

여기서의 핵심은 서용빈이었는데, 기존 이광은 감독 시기 서용빈은 기용 관련하여 갈등을 빚으며 선수단을 무단 이탈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 대행은 2001년 시즌 내내 서용빈의 1루수직을 보장해 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 3명 모두 거의 전 경기 출장을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처럼 팀의 분란을 일으키는 베테랑들에게 믿음을 주면서 양쪽 모두를 품는 것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107]

투수에서의 핵심은 신윤호였다. 당시 LG는 김용수의 반강제 은퇴 이후 투수진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최향남은 이광은 감독의 방침에 반발하여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오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였다. 장문석은 2000 시즌 이광은 감독의 이상한 기용[108]에 휘말리면서 망가져버렸고, 2000년 그래도 활약해주던 해리거조차 시즌 내내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109] 붙박이 선발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이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 대행이 투수진의 중심으로 택한 선수가 바로 신데렐라 신윤호였다.

신윤호는 충암고 시절 주형광과 함께 고교야구계의 좌우 쌍두마차라고 불리며 "제2의 선동열" 이라고 불릴 정도의 엄청난 기대를 받던 역대급 유망주였다. 정작 데뷔 후에는 구리 2군 숙소에서 틈만 나면 이탈하기 일쑤였으며 무단 이탈해서 오토바이를 타다가 교통사고를 내기도 했고 심지어 축구 팀 버스와 승용차를 두들겨 부수고 다니는 등의 기행[110][111]과 불성실한 연습 태도로 인해 고교 때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렇기에 입단 7년차였음에도 아무 활약도 없었으며, 사실상 구단조차 포기하고 버려지는 선수 취급을 받던 선수.

이런 신윤호에게서 어떤 모습을 봤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김성근 감독 대행의 집중적인 조련으로 멘탈을 다잡은 신윤호는 기량이 급상승, 일명 신데렐라로 불릴 정도로 큰 활약을 하였다. 당시 기록이 1군 70경기(2위)[112] 144⅓이닝 15승 6패 18세이브(4위) 32세이브포인트, 평균자책점 3.12(2위).[113] 이 활약으로 신윤호는 손민한과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으며 다승, 구원, 승률 1위를 하여 3관왕에 올랐고 MVP투표 1차에서는 이승엽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2차투표에서 이승엽, 신윤호를 투표하지 않은 기자들이 이승엽에게 투표하면서 MVP는 수상하지 못했다. 이승엽 인지도가 신윤호에 비하면 넘사벽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래도 투수 골든 글러브까지 받았다.[114]

타선의 안정화, 신윤호를 중심으로 한 투수진의 안정화를 기반으로 LG는 본격적인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팀이 제대로 안정되기 시작한 6월 승률은 12승 1무 10패로 0.545, 7월 승률은 7승 3무 5패로 0.583. 이 과정에서 개막 후 두달 이상 최하위에서 허덕이던 LG는 7월 26일 4위 해태에 2경기 뒤진 5위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초반 부진은 너무 컸고, 이쯤 되면서 신윤호를 비롯한 선수진도 점차 지쳐가며 8월에는 추락을 거듭, 결국 다시 최하위로 떨어졌다(8월 승률 8승 1무 10패, 승률 0.444). 9월 가을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부활하며 치고 올라가고 특히 마지막 8경기 중 7경기를 승리하며 치고 올라갔지만, 결국 창단 첫 최하위를 면했지만 가을 야구는 실패, 58승 8무 67패 승률 0.464, 6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115]

9.4. 야신의 호칭을 남긴 2002 김성근호

김성근 감독 대행은 2001 시즌, 자신이 맡은 이후 팀 승률 49승 42패 1무 0.538의 성적을 남겼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승률만으로 보면 당시 3위였던 두산 베어스의 0.508보다 3푼이 높은 수치. 당시 망해가던 팀을 잘 추스러서 마지막까지 가을야구 싸움을 벌였던 공적을 인정받아, 김성근은 2002 시즌을 앞두고 감독 대행 꼬리표를 때고 정식으로 감독이 되었다. 정식 감독이 된 김성근은 그해 겨울, 자신의 전매 특허와 같은 혹독한 동계 지옥훈련을 시키며 선수들을 훈련시켰다.
희한한 일이다. 꼬박 1년 전인 2001년 3월의 국내 신문들을 뒤져보면 전문가들의 예상에서 LG는 삼성과 함께 강력한 우승후보로 등장했다. 2002시즌 개막을 기다리는 지금 셈이 밝기로 국내 톱인 김성근감독은 "지난해보다 전력이 좋아졌다"고 자신하지만 LG는 어처구니없게도 '꼴찌 후보'라는 극언까지 섞인 박정한 평가를 받고 있다.
- 조선일보, 2002-03-31 #

다만 언론의 시선은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물음표 전력 투성이라는 것이 감점 요인. 선발 후보 6명의 지난해 합작승수가 고작 9승(이동현, 경헌호 각 4승, 안병원 1승). 유지현-홍현우의 주전 키스톤이 나란히 지난 겨울 몸에 칼을 댄데다 지난해의 '용병 3명 몫'을 대체한 만자니오 외에 전력 보강이 전무한 마운드는 온통 '부상 재활파'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001 시즌보다는 전력이 나아졌다고 김성근 감독은 이야기하였으며, 특유의 역산법으로 가능한한 빨리 70승을 달성하겠다며 거창하게 2002 시즌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LG 트윈스는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 초반에 극심한 부진을 겪으며 최하위를 기록하는 수모를 겪었다. 변명 같긴 하지만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는데, 당시 LG 트윈스는 악재란 악재가 쏟아지던 시기였다. 양준혁의 이적이야 뭐 예상되었던 바였지만, 기대를 가득 안고 삼성에서 데려온 용병 매니 마르티네스가 개막전 덕아웃 옆 대기석에서 철망 밖에 있던 어린이 팬에게 사인을 해주다가 손바닥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 여기에 계속된 통증으로 정밀 검진을 받던 유지현마저 팔꿈치에서 뼛조각을 발견하면서 팔꿈치 수술과 손목 인대 수술을 받으며 이탈했다.

여기에 현대에서 데려온 기대했던 용병 톰 퀸란은 13경기 21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결국 4월 23일에 2군행 통보를 받은 뒤 5월 3일에 웨이버공시되어 방출당했다. 이 퀸란 영입이 좀 어처구니가 없는데, 당시 퀸란이 현대와 재계약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본인이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 애초에 퀸란이 현대 시절조차 장타율과 3루 수비 능력만으로 먹고 사는 선수일 뿐 타격 기록 자체가 엉망인 선수였는데, 심지어 은퇴까지 생각하고 있는 이런 선수를 데려온 LG 프런트가 그저 막장일 뿐.

그 결과 5월 18일, LG는 최하위 롯데만을 밑에 남긴 7위를 기록하기에 이른다.[116] 특히 4-5월간 승률이 계속해서 부진하였고, 특히 5월 승률은 4할을 겨우 넘기는 수준을 기록하면서 김성근에 대한 경질 여론까지 일어나기 시작. 하지만 7위를 기록한 5월 18일날 첫 등판을 시작으로 LG의 영혼과 같은 이상훈이 복귀하였고, 마르티네스도 부상을 치료하고 복귀하였다. 그리고 LG의 대반란이 시작되었다.

당시 LG의 여름 승률은 엄청난 수준이었는데, 특히 6월 성적은 9연승을 기록하며 13승 2무 6패로 자그마치 0.684에 달하였다. 7월 그나마 부진한 게 0.556이었고 8월에는 다시 6할대인 0.632. 심지어 초반의 부진에도 불구, 한때는 현대를 누르고 3위에까지 올라섰으며, 8월 8일 이후 4위 아래로는 내려간 적이 없다.[117] 다만 이 과정에서 봄 시즌의 부진으로 발생한 경질 여론, 여름부터 김성근을 응원하던 팬덤층으로 LG 팬덤 내에서도 김성근에 대한 여론이 나뉘기 시작했다.

이 시기 LG의 반등 원인은 역시 김성근이라 할 만한 불펜진의 활약이었다. 타선은 양준혁, 유지현의 이탈로 평균 이하였고, 선발진은 만자니오와 최원호를 제외하면 규정이닝 달성자도 없는데다[118] WAR는 2할 승률로 역대 프로야구 리그 중에서도 기록적인 최하위를 기록한 롯데보다 못한 낮았다. 심지어 리그 하반기에 들어서면 그나마 겨우 복구해놓은 타선이 소송에서 패한 서용빈의 입대[119], 김재현의 고관절 부상[120]으로 계속하여 흔들렸다. 그러나 불펜진에서 장문석, 이동현, 이상훈 트리오의 활약으로 두산을 제치며 4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부족한 타력은 팀도루 2위를 기록한 기동력으로 만회했다. 여기에 시즌 후반기에 복귀한 유지현, 신인 박용택의 대활약도 큰 힘을 보탰다.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 김응용[121]

그리고 2002년. LG는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하여 플레이오프까지 승리, 악착 같은 승부 끝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다. 당시 현대와의 준플레이오프는 2승으로 가볍게 이긴 편이었지만, 기아와의 플레이오프는 1승 2패로 몰린 상황에서 4차전 심성보의 결승타로 기사회상한 후 마지막 5차전에서 신인 박용택이 홈런 2방을 포함, 3안타 4타점에 플레이오프 최다루타 타이기록인 10루타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치며 3승 2패로 겨우 올라왔다. 당시 박용택의 6회 홈런 이후에 LG로 분위기가 넘어가자 흥분한 관객이 광주 무등야구장에 불을 지르는 등의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미 7경기를 치르며 지칠 대로 지친 LG와 상대하는 삼성 라이온즈의 손쉬운 승리가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부는 생각 이상의 격전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은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명승부중 하나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너 어디 가?"
"저 밖에 던질 투수가 없지 않습니까?"
"나갈 수 있겠나?"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시고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고 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이상훈

당시 LG 트윈스가 9대 6으로 앞선 9회 말, 시리즈 전적 3승 3패 동률을 눈앞에 둔 순간이었다. 하지만 투수 교체가 필요한 시점이었으나 당시 LG 불펜은 투수 대부분을 소모한 상황이었고, 상대 타선은 중심 타선인 이승엽-마해영으로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 한국시리즈의 이승엽은 20타수 2안타의 극단적인 타격 부진을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는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 타자 이승엽. 그리고 여기에서 한국시리즈 3경기 연속 등판의 투혼을 보여주었던 이상훈이 등판하였다. 하지만 구위가 이미 많이 떨어진 이상훈을 이승엽이 공략하며 동점 3점 홈런을 때려냈고, 이상훈이 강판당하고 뒤이어 올라온 최원호가 곧바로 마해영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연속으로 내주면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마운드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 최원호의 마지막 모습 이후 LG는 10년 동안 가을 야구를 맛보지 못했다.

김성근 통산 커리어에서 포스트시즌에서 2개 라운드를 통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포스트시즌만 나가면 번번히 광탈하여 포스트시즌에 약한 새가슴 감독이라는 오명을 들었지만, 2002년 포스트시즌은 이러한 불명예를 처음으로 극복했던 시리즈였다. 이후 SK 감독 시절에 한국시리즈를 연속으로 재패하면서 이런 이미지를 완전히 걷어낸다.

9.5. 프런트와의 갈등, 그리고 경질

2002년도는 이건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들어야 되는 문제라고 보는데, LG가 8회초에 2점 놓고, 4점 리드했어요, 그때. 4점 리드면 이기는 거예요, 거의 다, 8회니까. 그런데 4점 들어온 다음에 내가 번트 지시를 했다고. 그럼 번트를 하면, 보내기 번트를 시켰는데 써드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근데 거기서 번트를 성공했다, 한 점 들어왔으면 세상의 비난 무지 받았을 거예요. 근데 내가 냈다고, 냈는데, 코치가 사인을 놓쳐버렸어요. 놓치는 순간에 졌다 싶었다고, 나는. 이건 거짓말이 아니고, 내가 직감이 왔다고, 졌다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9회에 뒤집어졌잖아요. 그 문제는, 그게 나한테 좋은 경험이 됐는데, 그때 그 한국시리즈가. 한국시리즈는 우승하는 게 목표지, 준우승이 목표 아니에요. 6차전에서 지든, 5차전이 되든 그런 건 별 문제가 아니에요. 7차를 어떻게 이기냐 하는 문제였지. 그때 이상훈이라고 하는 피쳐가 클로져였는데, 이상훈이를 내가 6차전에 써버리면 7차전에 쓸 토막이 안돼요. 그럼 7차전 못 이기는 거예요. 물론 흐름이 있으니까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지만, 승부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거기서 번트를 대면 이상훈이 안 쓰고 7차에 갔으면 가능성이 있은 거예요. 번트 하나 실패하니까 졌다 싶은 거예요
그때는 아쉬움이라고 하는 것은 큰 역전패, 마지막에. 그리고 혼신의 힘이라고 하는 걸 아이들에게서 봤고, 그때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코리안시리즈, 3단계를 올라왔으니까, 지칠 대로 지친 한없이 지친 상태였어도 애들은 잘했지 않나 싶은데, 내가 야구장에서 눈물을 흘린 게 그때가 처음이에요. 뒤에 기대가지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사장은 지니까 기분 좋아서 김감독 수고했어, 그러더라고, 그리고 결국은 자르더라고요.
- 김성근[122]

전통적으로 프런트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던 LG 트윈스 구단의 특징과 프런트의 관여를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김성근 감독의 성향상 이들의 마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LG 프런트가 어윤태 - 유성민 체제로 바뀌고 난 후 프런트와 김성근의 마찰은 더욱 심해졌다.[123] 결국 프런트는 김성근을 정식 감독으로 앉힌 지 얼마 안 되어 방해 공작을 펼치는 등 슬슬 김성근 경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김성근이 경질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가장 큰 원인은 김성근식 야구와 LG가 추구하던 야구관이 상충되었던 점이 꼽힌다. 번트와 잦은 투수 교체를 가져가는 극단적인 스몰볼 성향의 김성근식 야구는 '신바람 야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던 LG 트윈스의 야구관이 대척점에 있었다. 이에 대해 많은 팬들과 구단 관계자들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구단주인 구본무 회장도 김성근 야구가 LG가 추구하는 야구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직접 거론했을 정도다.

여기에 2002년 초반의 부진으로, 구단 수뇌부 또한 김성근의 지도력을 그리 신뢰하지 않기도 했다. 분명 당시의 LG를 찬찬히 뜯어보면 당시 김성근의 성과는 꽤나 기적적인 성과로 볼 여지가 많았다. 그러나 LG 트윈스는 김성근이 부임하기 전 8년 동안 7회 포스트시즌에 진출에 1회 우승과 2회 준우승을 거둔 강팀이었던 만큼, 이 정도 성적은 그렇게 눈에 차는 성적은 아니었다.

당시 LG 프런트와 김성근의 갈등을 보여줬던 사례는 여러가지였는데, 대표적인 거로는 2001년 시즌 종료 후 FA가 된 양준혁을 안 잡고[124] 보상선수도 돈으로만 받은 것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신인 지명 역시 고영민, 조동찬 등을 거르고 실업 야구를 거쳐 상무에서 뛰고 있던 26세의 김우석을 2차 1라운드에서 지명하는 등 당혹스러운 행보를 보여줬다.[125] 또한 외국인 선수 계약에 있어서 2001시즌 준수한 활약을 보인 투수들인 더그 린튼 에프레인 발데스를 내보내고 은퇴를 준비하던 공갈포 톰 퀸란을 데려온 행동과 시즌 후에 당시 한화 이글스 감독이었던 이광환을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 등이 당시 김성근과 프런트의 대립을 보여주는 사례다.

2002년 말 김성근 경질설이 나돌자, 과거 OB시절부터 구단주와 직접 독대해서 일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호했던 # 김성근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하여 구본무 구단주에게 직접 이야기하기 위해 구본무 회장의 개인 스케줄을 알아내어 골프장에 직접 찾아 가기도 했다. 사실 프런트 전체와 갈등하고 있었던 만큼, 구단주급이 아니면 이를 돌릴 방법이 없기는 했다. 그러나 구본무 구단주는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김성근의 돌발 행위를 매우 언짢아 했다는 후문이다.

이렇듯 김성근의 표면적인 해임 이유는 우승 실패였지만, 실제로는 2002 시즌 초반 극도의 성적 부진, 팀의 이념과 상반되는 김성근의 극단적인 스몰볼 성향, 계속된 프런트와의 갈등, 구단주의 의향 등 여러 문제가 얽혀 있었다.
시즌 초 성적이 부진하였을 때 우리도 감독님 스타일에 한소리 한 것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린 정규 시즌 후반기와 포스트시즌에 선수들의 보여주었던 투혼과 멋진 플레이와 적장의 "신"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감독님의 작전을 보면서 더 이상 회의적이었던 팬들 조차도 감독님과 선수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더 많은 팬들이 야구장에 모여 우리 서울 트윈스를 외쳤고 많은 트윈스 팬들은 감독님의 야구 스타일을 인정하였다. 또한 우리 트윈스 팬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의 팬들조차 감독님과 선수들을 인정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중략)...
하나. 이광환 감독 선임을 취소하고 김성근 감독님의 대한 부당한 해임을 철회하라...!!!
둘. 구단의 독재 경영을 주도한 어윤태 사장은 감독님 및 선수, 팬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라...!!!
셋. 이번 사태까지 오게 한 장본인 어윤태 사장과 유성민 단장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하라...!!!
넷. 한국 프로야구의 발전을 가로막고 구단 독재 경영을 일삼는 구단 사장들은 각성하라...!!!
다섯. 구단 운영은 구단에서 야구는 감독과 선수, 팬이 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
'LG 할머니'라고 본인을 밝힌 심계순(72)씨는 "트윈스 야구와 김성근식 야구는 맞지않는다. 김성근 감독은 트윈스의 '신바람 야구'를 없애려 노력했다. 트윈스와 맞지 않는 감독을 해임시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회원은 "나는 김성근 감독이 이번에 팀을 코리안시리즈에 올려놓은 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한번도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해보지 못한 김성근 감독이 트윈스라는 팀을 만났기 때문에 준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이성환, "우리는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2002-11-30

당시 LG 팬들의 반응은 조금 복잡했는데, 김성근 해임에 반대하는 세력과 해임 자체는 찬성이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세력이 나뉘었다. 당시 LG 트윈스 홈페이지 내 '쌍둥이마당'을 중심으로 한 온라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엘지만행공동대책위원회는 김성근 해임 자체를 반대하였고, 오프라인 모임으로 구성되었던 8개 동호인연합회는 "김성근 해임과 관련 하여 저희 8개 동호인연합회는 구단의 의사 결정을 존중 하며 감독 해임을 절대 지지한다는 것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라고 이야기하며 해임은 찬성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이었다.

당시 동호인들의 성향을 보면 굉장히 지금과는 격세지감이 드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오프라인 동호인층이 고연령층이고 온라인 여론을 주도하는 층이 저연령층이다. 2000년대 초반인 만큼 이런 성향은 더더욱 그러했다. 실제로 기사에서 나오는 LG 할머니 같은 분을 봐도 이런 부분을 알 수 있다. 즉 오히려 저연령층 팬덤에서는 김성근 감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고, 신바람야구를 오랜 기간 접해왔고 응원해왔던 고연령층 팬덤에서 김성근 감독을 비판했던 것. 지금 온라인 팬덤층이 김성근 감독에 훨씬 더 비판적인 것을 생각해보면 시대가 많이 바뀌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팬덤의 분화와는 별개로, 이러한 경질 과정에 대해서는 한마음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이는 항의 시위로 이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후임으로 이광환 감독이 부임했는데 프런트는 처음부터 후임으로 이광환을 준비했었다는 OB 시절의 악연이 반복되었다는 것. 또한 이광환 감독 부임 후 OB와 LG는 각각 암흑기를 겪는다. 다만 이걸 이광환의 무능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데, 실제로 꼬여가는 상황은 이광환이 아니라 김성근 본인이 있었어도 해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서용빈, 유지현, 이상훈, 김재현 등을 정리하려는 의도 등은 상당히 윗선에서 진행되었고 이게 실제로 드러난 2003년 7월부터 이광환 감독은 이를 반대하다 시즌 후 2군으로 좌천당하게 된다. 김성근 감독의 성향상 역시 이광환이 겪은 것과 마찬가지의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99%이다. 10년 간의 끔찍한 비밀번호김성근의 제자 김기태가 끊었다.

9.6.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 LG 트로이카와 조인성, 박용택의 발굴

김성근 감독이 지휘를 맡게 되면 번트 위주의 스몰볼 야구로 타자들 성적이 급감한다는 평가가 있는데, 적어도 LG 시절은 결코 그와 맞지 않았다. 특히 이 당시 크게 활약했던 선수는 1994년 신인 시절부터 LG를 이끌어온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3인방.

당시 서용빈은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과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연이은 사건사고로 오랜 공백 끝에 커리어가 크게 망가진 이후였다. 심지어 바로 전인 2000년 선수단 무단 이탈 사태를 일으키며 감독과 구단에 찍히는 등 커리어가 망가질 위기였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서용빈을 1루에 붙박이 고정시키고 주장까지 임명하는 등 신뢰를 보냈으며, 그 결과 군 입대 직전인 2001~2002년 두 시즌 동안은 전성기 만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활약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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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또한 돌글러브로 유명한 선수였음에도, 공격력 강화라는 핑계 아래 어정쩡한 우익수 수비를 맡으며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를 수비 부담이 적은 좌익수에 고정시킨 것 또한 김성근의 업적. 심지어 난데없는 희귀병으로 선수 생명이 끝날 위기에서도 김성근은 그를 지명타자로 고정시키며 끝까지 신뢰하였다. 그 결과 대구에서 열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2루타성 타격을 하고 타점을 올리면서도 절뚝거리면서 1루로 간신히 걸어나가 팬들을 감동시킨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126]

유지현도 김성근 감독 시기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이는 2루수 컨버젼의 성공이 컸는데, 김성근 감독이 2001년부터 무명이었던 권용관을 기용하면서 2루수-유격수를 보기 번갈아 보기 시작했고 팔꿈치 수술로 시즌을 늦게 시작한 2002년에는 권용관이 주전 유격수를 맡는 대신 완전히 2루수로 전향해 3할 1푼의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여전히 준수한 리드오프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이 나가자마자 2003년 급격한 하락세를 맞았고, 1994년부터의 은사 이광환 감독이 이 슬럼프를 고쳐보려 했으나 이광환마저 2군 감독으로 경질, 이순철에 의해 강제로 은퇴당했다.

이들 트로이카는 김성근 감독 경질 후 몇년 만에 팀 분위기 쇄신이란 명목 아래 말 그대로 숙청당했다. 김재현은 기껏 고관절을 치료하고 왔더니 2004년 FA 협상에서 구단으로부터 경기 중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도 구단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각서를 요구받자 그에 분노하여 SK로 이적하였고, 유지현은 전술한 대로 이순철에 의해 강제 은퇴당했다. 서용빈은 군에서 복귀한 후 사실상 전력 외로 분류되었고, 2005년 은퇴하였다. 신바람 야구를 이끌던 3인방이 사실상 마지막으로 같이 활약한 시기가 관리야구의 대명사였던 김성근 감독 시기였던 건 시대의 아이러니.

조인성이 주전으로 발돋움한 것도 김성근 시대의 산물이었다. 1998년 데뷔한 조인성은 2000-2001년까지는 김정민, 장재중과 같이 플래툰으로 뛰었으나, 2002년 김성근 감독 휘하에서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투수 리드에서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127] 블로킹이나 도루저지에서 강점을 보였고, 하위타선의 뇌관 역할을 잘 수행했다.

김성근 시기 LG에서 가장 주목받은 선수는 역시 박용택이었다. 박용택의 커리어에서 김성근 감독은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고려대 졸업 후 박용택은 계약금 2억 3천만 원 + 연봉 2천만 원으로 총 2억 5천만 원으로 계약할 계획이었으나 그 당시 타자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있던 이현곤, 김민우가 더 높은 액수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박용택이 자기 몸값을 더 높게 쳐달라고 항의하자 구단 측에서 그럼 계약하지 말고 마무리 캠프에 가서 김성근 감독한테 인정받고 오라고 한 것.

김성근 감독에 대해 잘 몰랐던 박용택은 거리낌없이 구단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신인들, 고졸 선수들을 선수로도 생각을 안 한다고 만약에 선수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2천만 원, 3천만 원으로 계약을 할 수도 있다며 겁을 줬지만 박용택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약하지 않은 채로 석 달을 지옥 훈련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이 박용택에게 "야! 너 왜 계약 안 해?"라며 물어봤고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자 김성근 감독은 박용택을 주전 감으로 인정해 구단과 계약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박용택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MVP까지 차지하는 맹활약을 펼쳤고, 덕분에 그동안 번번히 준플이나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김성근은 프로감독생활 18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 둘의 관계는 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입단 직후 박용택은 하루에 송구를 500개씩 던지라는 김성근의 훈련 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하였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박용택을 두고 이병규와 김재현의 대를 이을 만한 타자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으나, 마음이 여린 점을 문제 삼았다. 문제는 이 500개 송구 훈련 과정에서 박용택의 부상이 심해졌고, 이후 이 어깨 부상이 발목을 잡으면서 소위 소녀어깨로 전락했다는 것.

다만 당시 박용택이 엉뚱한 부분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2002년 시즌 후반에 세면대에서 난데없이 팔굽혀펴기를 하다 세면대를 부숴먹고 손바닥이 찢어지며 순위 싸움을 하던 후반에 결장한 것. 이 때문에 김성근 감독에게 크게 질책받는 등 혼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9.7. 김성근 시절의 혹사와 LG의 암흑기

당시 김성근 감독의 LG 트윈스는 기적적인 4강 진출과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로 항상 꼽히는 2002 한국 시리즈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으로 오는 길은 험난했고, 역시나 김성근 감독의 커리어 내내 따라다니던 혹사의 그늘은 벗어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선수는 역시 2001년의 신윤호였다. 신윤호는 사실상 구단에서 포기한 선수였고, 김성근이 비로소 살려낸 선수였다. 하지만 규정 이닝을 넘어 불펜 투수로서는 이례적으로 144이닝[128]이라는 무지막지한 수의 이닝을 먹은 탓에 혹사 논란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으며, 김성근 감독의 대표적인 혹사 사례로 꾸준히 언급되고 있다.

물론 신윤호 본인은 이에 대해 인터뷰에서 이후의 몸 관리가 문제였음을 밝히고 있고, 오히려 김성근 감독 덕분에 잠시나마 돈도 많이 벌어 봤고 선수 생명을 더 이어갈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는 뜻을 비추고 있다.[129]크보 공인 멘탈레기를 그나마 사람이라도 만들었으니 그거라도 다행이지 아무리 봐도 이거 멘탈을 갱생시키는 대신 몸을 망가뜨리는 악마의 거래 신윤호는 한동안 LG 최후의 15승 투수로 남아있었으나 2020년 케이시 켈리가 19년만에 15승을 기록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토종 투수로는 아직까지 LG 최후의 15승 투수다. 그렇다고 혹사가 정당화 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당시 혹사당한 선수는 신윤호뿐은 아니었다. 2001년 혹사당한 선수는 신윤호 하나였지만, 2002년 부활한 장문석, 당시 신인이었던 이동현, 이상훈 등 2002년 주축 투수진 혹사 또한 상당한 수준이었다. 또 신인 박용택 등에게 무리한 훈련을 강요하여 어깨 부상을 입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투수들 대부분이 여전히 김성근 감독과 깊은 인연을 맺고 감사해하는 것은 사실이며,[130] 이동현의 경우 은퇴 기자회견에서 많은 팬들은 2002년 당시 너무 많이 던져서 수술을 하게 됐다고 하는데, 김성근 감독님이 나를 그만큼 기용해주셔셔 성공할 수 있었다며 김성근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기도 했다. '은퇴' 이동현, "김성근 감독님께 너무 감사드린다"

적지 않은 수의 LG팬들은 LG의 6668587667 암흑기의 원인이 김성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냉정히 말해, 이후 3년 동안 666을 찍은 것까지는 김성근의 혹사여파나 단기적인 운영으로 인한 잘못이 크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이후로도 7년이나 더 암흑기를 겪은 것은 김성근 감독 한명의 잘못이 아니라, 감독, 프런트, 선수단 전체에 암흑기운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는 게 맞다.[131] 하다못해 한화조차 김성근 감독을 경질한 이후 2년만에 반짝이지만 포스트시즌을 갔다.

특히 LG 암흑기의 원인은 오히려 김성근보다는 포스트 김성근의 방향성에서 큰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바로 그 다음 시기였던 이광환-이순철 감독 시기, LG는 2002 김성근 신화를 만들었던 기존 베테랑 선수들을 대거 정리하기에 이른다. 당시 정리 1순위로 지목되었던 선수는 자그마치 유지현, 김재현, 이상훈이었다. 즉 투타에서 기둥을 잡아줄, 그것도 신바람야구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90년대 LG 신바람야구를 상징하던 베테랑을 모조리 아웃시켜버린 것. 이때의 정리에는 그 온화한 이광환 감독조차 크게 반발하였고, 당시 프런트는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국내에 귀국한 선동열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겠다는 영입을 빌미삼아 그를 2군 감독으로 보내버리며 결국 경질하였다. 여기에 김재현을 내주면서 투수 준척급이 즐비한 SK[132]에서 난데없는 안재만을 데려왔던 것, 때맞춰 터진 병역 비리 등 수많은 건수들이 다 겹친 결과였다. 정작 혹사당했던 선수 중 이상훈은 거의 강제 은퇴시켰고 신윤호는 애초에 쓸 수 없는 수준의 선수는 김성근이 용케 써먹은 선수였으니 이동현, 장문석 정도가 혹사 여파를 맞은 선수라고 볼 수 있었다. 즉 김성근의 혹사 여파는 굉장히 한정적이었으며, 그것이 장장 10년에 걸친 암흑기 원인이라기엔 너무 과도한 해석이 들어간 것.

9.8. 외인 선수들과의 잦은 마찰

LG 시절 김성근은 유독 외인과의 충돌이 많았다. 쌍방울 시절인 99년 감독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용병을 맞이했을 때도 충돌이 많긴 했지만, 이 시기가 어떻게 보면 가장 독보적으로 충돌이 많았던 시기.

그 첫 타자는 댄 로마이어였다. 그는 이미 한화에서 외국인 선수 시즌 최다 홈런 기록를 기록하며 당시 역대 최고의 용병 중 한명으로 꼽히던 선수였다. 댄 로마이어는 베테랑 선수로서의 책임감과 팀에 대한 애착이 강한 선수로, 어린 선수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를 좋아하는 용병이었다. 그러한 로마이어를 두고 김성근 감독 대행은 용병이 감히 주제넘게 코칭스태프의 권한에 월권 행위를 한다면서 그를 퇴출시켰다.

다만 로마이어는 당시 타점은 많았지만 성적이 전년도에 비해서 떨어진 상태였다. OPS가 0.821로 0.912를 기록했던 전년도에 비해서 타격성적이 확연히 한급 가라앉은 상태였고, 클래식으로 봐도 타율이 3푼 가량 떨어져 있었고 홈런도 시즌 절반가량 지난 시점에서 11개로 모든 면에서 성적이 한화 시절보다 한급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코칭스태프의 눈에 났으니 퇴출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상황까지는 아니었고, 애초에 이전 한화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도 이 오지랖 문제로 짤려서 LG로 오게 된 것이다. 무리하게 시즌 도중 로마이어를 짜른 것은 실책일지도 모르나, 당시 로마이어의 행위는 한국 야구 정서에서 굳이 김성근이 아니더라도 이해받기는 힘든 것이었다.

데니 해리거는 2000년 LG에서 17승을 거두며 팀내 WAR 1위를 차지했던 LG의 에이스였다. 그러나 2001시즌 들어 감독 대행이 된 김성근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해리거가 시즌 초 부진하자 김성근은 그를 퀵후크 강판시켰고 이에 자존심이 상한 해리거는 덕아웃에서 글러브를 던졌다. 이에 김성근은 팀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해리거에게 2군행을 지시했고 구단측에 퇴출을 요구했다. 결국 퇴출되지는 않았지만 이후 해리거는 김성근 감독과의 트러블을 이어가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퇴출되었다.

물론 해리거의 부진은 김성근과의 마찰과는 별 관련이 없고, 전년도 126경기체제 하에서 225이닝을 먹으며 상당히 무리를 했기 때문에 퍼진 것이지 이걸 굳이 김성근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고, 2군행도 본인의 잘못이다. 감독이 퀵후크를 했어도 그것은 감독의 권한이고, 미국이라고 퀵후크 하는 감독 없는 것도 아닌데 덕아웃에서 글러브 집어던지면서 난동을 부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이건 김성근이 아니라 다른 감독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2002년에도 김성근은 용병 투수 라벨로 만자니오와 갈등을 벌였다. 역시 시즌 중반 조기 강판되자 불만을 표출하며 항명을 하였고 김성근은 만자니오의 2군행을 지시했다. 그래도 만자니오는 포스트시즌에서 네 경기나 출전하여 활약하면서 준우승에게 크게 기여했다.

10. 야인 시절과 치바 롯데 마린스 시절

10.1. 스투 해설위원 임명과 출장코치 생활

"LG 감독에서 물러났을 때부터 SK 감독으로 다시 부임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첫 2년은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 김성근 자서전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p.205

LG 트윈스에서 물러난 이후, 김성근은 떠돌이 생활을 계속했으며, 가장 메인으로는 스포츠·레저·연예·오락기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일간신문인 스포츠투데이에서 해설위원으로 2년간 활동하였다. # 해설위원이라는 말 때문에 착각할 수 있는데, 신문사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방송 해설자가 아니라 일종의 칼럼 담당 해설위원이다.

사실 김성근은 방송국 정식 해설가로는 활동하기 어려웠는데, 가장 큰 문제는 발음 문제였다. 사실 1979년 야구 초창기에 김성근은 이미 동양방송에서 잠깐 해설을 했었으나, 당시 내용은 좋았으나 발음이 부정확한데다 "공이 이빠이 들어왔어요" 같은 일본식 표현을 하다가 바로 잘렸다.[133] 이후 김성근 감독이 방송에서 해설을 맡은 건 2008 베이징 올림픽 때였다. 다만 이런 스포츠 분야 신문 해설위원이 그렇듯 그렇게 활동이 많았던 것은 아니고, 일종의 명예직에 가까웠다.
김성근 전 LG 감독(61)의 요즘 ‘직업’은 ‘출장 코치’다. 초등학교서부터 대학, 동호인팀에 이르기까지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제주도는 물론 일본, 방콕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도 자비를 들여 다녀온다.
- [이영미 기자의 취중토크] ‘출장코치’하며 야인생활 김성근 전 LG감독

당시 김성근 감독의 주업은 오히려 출장 코치. 김성근은 2002시즌이 끝나고 LG 트윈스에서 해임된 후 2년 동안 주로 출장 코치(인스트럭터) 생활을 하며 지냈다. LG 감독에서 해임된 후 출장 코치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LG 감독에서 경질된 이듬해인 2003년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 본인이 직접 밝힌 내용이다.

이 시기 김성근 커리어의 주요 사건 중 하나는 박찬호와의 인연이었다. 당시 박찬호는 2002년 FA 대박을 터뜨리며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2002년도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에 이어 다저스부터 안고 있던 허리 부상이 악화, 2003년 시즌 7경기 29.2이닝 1승 3패 방어율 7.58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찍은 채 그대로 시즌 아웃되었다. 이에 박찬호는 당시 오키나와에 있던 김성근에게 투구폼 비디오를 전송, 도움을 요청하였고, 김성근 또한 이에 화답하여 ""투구 흐름이 끊기는 것은 많이 좋아졌지만 공을 던질 때 동시에 몸도 끌려나가 파워에서 손해를 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에 체중을 싣지 못한 채 팔로만 스윙하고 있다" 등 밸런스 관련 문제를 지적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04년 초 박찬호는 스프링캠프에서 다시 150km를 던지며 부활의 기미를 보였으나시즌 직전 허리 부상이 도지면서 역시 시즌 아웃되었다. 하지만 2005년 박찬호는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고, 2005년 7월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되었다.

2006년에는 아예 당시 치바 롯데 마린스 코치로 임명된 김성근을 찾아와 특별 피칭 지도를 받았다. 그 결과였는지 2006년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시즌을 소화하기 시작했으나, 다시 또 게실로 인한 장출혈과 빈혈로 시즌 후반 수술을 하게 되면서 로테이션에서 탈락하였다. 다만 플레이오프 때 부활하여 디비전 시리즈 1차전 등판,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었다.

당시 박찬호의 FA 계약은 역대 최악의 계약 중 상위로 꼽힐 정도로 최악의 계약으로 꼽힌다. 2002년 시즌을 시작한 이후 2005년까지 시즌을 제대로 소화한 것은 2002년과 2005년 딱 두번이었고, 그나마 성적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당시 쏟아진 한국 언론의 원색적, 비판적인 태도 때문에 한국 언론과의 관계도 최악이 되었다.[134] 그 과정에서 박찬호와 몇 안 되는 소통의 창구였던 인물이 김성근.

김성근이 박찬호의 커리어에 얼마나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김성근의 조언을 들은 2004년 초 다시 150을 던지며 부활의 기미가 보였고 2006년에도 분위기가 좋았던 것을 보면 부정적으로 볼 정도는 아니지만, 허리 부상의 재발과 갑작스러운 장출혈 등 변수로 부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 다만 이 인연으로 박찬호 또한 스스로를 김성근의 제자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후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10.2. 치바 롯데 마린즈 인스트럭터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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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과 이승엽
" 의사소통 과정이 복잡했다. 그때 한국인 코치가 있었으면 싶었다"
- 이승엽

김성근이 2년여 동안의 야인 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은 2005년 일본의 퍼시픽 리그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활약하던 이승엽의 전담 코치가 되면서 부터였다.[135] 당시 이승엽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으며, 일본 잔류와 국내 복귀를 놓고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이승엽은 의사소통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치바 롯데의 바비 발렌타인 감독과 타격 코치 모두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승엽의 담당 통역이 한국어를 일본어로, 타격 코치 담당 통역이 일본어를 영어로 바꿔 얘기했다. 그런데 담당 통역이 제 역할을 못해서 이승엽의 불만이 많았다.[136]

이처럼 당시 통역 문제와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문화적인 차이 등으로 고충이 많았던 이승엽은 한국어와 일본어에 모두 능통하면서 일본 야구판에 대해서 해박한 사람을 찾았다. 특히 재일교포 출신 김성근은 한국에서는 일본 야구에 가장 정통하고 일본야구계와 인맥도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해서, 일본 야구인들이 함부로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승엽은 이런 의사소통, 즉 통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단에 요청해 김성근을 개인 전담 인스트럭터로 영입했다.

당시 치바 롯데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 페이지 아카이브

당시 김성근의 직함은 '팀 코디네이터'로, 등 번호는 90번이었다. 이승엽이 구단에 요청해서 구단에서 채용한 직원이었다. 거물 용병이었던 이승엽의 전담 코디네이터로 일본 측 소개에 따르면 코치 대우. 이만수의 화이트삭스 시절 불펜 캐쳐와 비슷하며, 인스트럭터는 이른바 비정규 코치로 국내 구단에서도 주로 외국 야구 지도자들을 전지훈련 때 등 임시로 몇 개월간 봉급을 주고 고용하는 형색으로 국내 구단에서도 꽤 많이 채용하고 있다. 하는 일은 다르고 1년 내내 채용했다는 점이 다르지만 일반적인 인스트럭터가 계약직이라면 김성근은 이승엽 계약기간 내의 무기계약직 코치같은 느낌으로 채용된 것. 당시 김성근의 주된 업무는 통역과 이승엽 본인의 멘탈 관리, 훈련 파트너 등이었다.

김성근의 코치 임명은 굉장히 독특한 사례였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코치 선발 시 선수 시절 및 코치 커리어를 매우 중요시하는데[137], 상식적으로 자국보다 야구 수준이 처지는 나라 인물에게 야구 코치를 한번에 정식으로 줄 리는 만무하다.

김성근이 일본 야구에 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의 일본야구 현장 경험은 야구 비명문고인 가쓰라고 야구부 뿐이었고, 실업야구도 2부 리그 수준 경력만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일본에서 리틀야구팀 지도자도 한 적이 없는데 그런 김성근이 비공식으로나마 치바 롯데의 인스트럭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승엽 덕택이 크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성근 본인조차도 이승엽이 없었다면 지바 롯데에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했으며, 이러한 경력은 이후 치바 롯데 순회 코치로의 정식 임명, 그리고 커리어 말년의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임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리그 우승 당시 중계 영상. 1분 5초~10초 쯤에 잠깐 얼굴이 나온다.

이승엽의 의사 소통 문제 때문에 고용되었던 만큼 김성근의 역할은 통역이 우선이었고, 그 외에 이승엽의 훈련 보조를 해주는 정도였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14/2016091400698.html| 그래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하술하듯 이승엽과 김성근의 일화 중 김성근이 직접 타격을 지도하는 것은 1군 코치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카메라에 김성근이 와서 잠바를 걸어 놓으면 거기에 이승엽이 와서 훈련을 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 '거의'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약간은 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아무 지도도 안 했으면 구단에서 제지해서 굳이 잠바로 카메라를 가려가면서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승엽이 팀내에서도 워낙 몸값이 있던 용병 선수였던 만큼 이승엽이 김성근과 함께 구단 훈련장에서 훈련하는 것에 대해 당시 치바 롯데 구단 측에서도 적당히 눈감아줬다.

그리고 이승엽 전담 인스트럭터로 일하던 2005년 롯데가 구단 역사상 31년 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게 되는데, 이때 1군 선수진 사이에서 함께 우승의 기쁨을 누려보기도 했다. 이는 원년 OB 우승 이후 김성근 감독 커리어의 첫 우승이었다.
"이승엽의 베스트 스윙은 MLB에서 BEST 5 안에 든다, 하지만 그게 시즌중 5번 정도밖에 안 나온다."
"승엽아 너는 너만의 프로세스가 없다, 남들이 코치들이 만들어준 우물안에서만 논다"
"너는 너무 나약한 아이라서, 조금만 안되면 안된다고 포기해버린다"
"너만의 프로세스를 만들고, 포기말고 한계를 극복해라"
"연습만이 답이다"
"이승엽의 재능은 천재적이지만, 너는 한국에서 재능만 믿고 올라왔다"
"이승엽의 재능은 지바롯데 선수들 모두 인정했다"
- 김성근
" 한국에서 최고의 타자라 불리던 우물안 개구리가 일본에서 처참하게 실패하고 망가진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김성근 감독님이 절 살려줬습니다."
"김성근 감독님은 타격 기술도 기술이지만, 선수로서 멘탈을 만들어주신분입니다."
- 이승엽

이 둘의 인연은 2006년 이승엽이 치바 롯데에서 요미우리로 팀을 옮기면서 끝을 맺었다.[138] 이때 오히려 이승엽이 김성근에게 "김성근 코치에게 죄송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 전술한 대화처럼, 이승엽은 이때 이후 김성근 감독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139] 실제로 이승엽은 그 이후로도 자신의 스승으로 김성근을 인정하는 발언을 꾸준히 하였으며, 이는 이승엽의 두산 감독 취임, 김성근 은퇴 이후인 최강야구에서까지 이어진다.

10.3. 치바 롯데 마린즈 순회코치 시절

치바 롯데 마린즈 No.90
김성근(金星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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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 1회 예선전에서 당시 대표팀 감독 김인식과 함께

이승엽이 뛰던 2005년 시즌의 김성근은 치바 롯데의 정식 코치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팀 코디네이터로, 선수의 기술적 부분을 지도할 권한은 없는 비정규 코치였다. 발렌타인 감독의 묵인하에 구장 카메라를 가려놓고 부진에 빠진 이승엽과 1대1로 타격폼 교정을 했을 뿐이었다.

2006년 이승엽이 퇴단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후, 김성근은 치바 롯데의 정식 코치로 발령났다. 이는 김성근이 지도자 생활하면서 외국에서 활동한 첫 사례이자, KBO 출신으로서 NPB팀의 정식 코치가 된 최초의 사례이다. 다만 당시 김성근이 받은 직함은 1~2군 순회코치라는 특수 코치직으로, 타격 코치나 투수코치, 주루 코치와 같은 정규 코치는 아니었다. 당시 치바 롯데 구단의 발표에 따르면 1,2군을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 육성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직책이라고 한다

일본 코치들은 한국처럼 코치-선수가 사제 관계로 엮이는 것이 아니고, 현역 때 200승을 하든 3000안타를 쳤든지 간에 아무리 스타 출신 코치라도 선수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는 간섭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다만 2, 3군은 다르다. 기술적으로 완성된 취급을 하는 1군과는 달리 2군과 3군은 코칭스탭이 먼저 지도를 해주기도 하며, 애초에 롯데가 김성근을 아예 정식 코치로 고용한 것도 김성근의 이런 선수의 세세한 폼을 눈여겨보고 작은 문제점들을 잘 짚는 점을 높이 샀기 때문에 주로 2군 선수들 원포인트 코칭을 해주라고 정식 코치로 승격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은 당시 유망주였던 니시오카 츠요시를 죽탱이 날려서 교육시켰다는 둥의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타케하라 나오타카나 오마츠 쇼이츠처럼 선수 본인이 김성근과 매일같이 특타를 했다고 먼저 밝히는 경우도 있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 둘, 특히 오마츠 쇼이츠는 2019년까지도 김성근을 존경한다고 밝혔다.

여한튼 김성근의 자서전에 따르면 치바 롯데 시절 보고 느낀 것을 통해 완전히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김성근으로 변신했다고 주장한다. 체계적인 일본의 프로야구 시스템을 통해 시야가 확장되었으며, 메이저리그 1000승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의 지도법을 보고 아구관이 넓어져 그 여파로 엄청난 양의 공부를 소화했다고 한다.
"LG 감독에서 물러났을 때부터 SK 감독으로 다시 부임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첫 2년은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매 경기 꼼꼼하게 메모하면서 양 팀의 경기를 정리했다. 신기한 것은 내가 경기 '안'에 있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바깥'에 있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큰 변화였다. 야구를 보는 시각이 확장됐다. 시야가 넓어지니 여유가 생겼다. 더 큰 단계의 승리를 염두에 둘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지바 롯데 코치 생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메이저리그 1000승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 감독을 만난 일이다. 그는 한국의 감독들과는 달랐다. 내가 놀란 것은 야구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경기장에서 자기감정 표현에 무척이나 솔직했다. 워낙에 튀는 발언과 다양한 표정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유명했던 사람이다. 지바 롯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의 표현방식이 지나친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는 진지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가진 긍정적인 에너지가 놀라웠고 그것이 팀의 분위기를 바꿨다. 모든 선수들이 인사를 잘 했고 밝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훈련을 했다. 결코 훈련이나 경기 운영이 대충대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할 것은 제대로 지키면서 활력있는 플레이가 펼쳐졌다. 나중에는 나도 적응해서 팀의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언젠가부터 시야가 좁아지면서 많은 것을 놓친 것이 아닐까, 반성하게 되었고 야인으로 지낸 5년의 세월이 나를 가르쳤다....나는 야구를 즐기는 방법을 배웠고, 야구장 안에서는 냉철했지만 그 밖에서의 생활에는 여유가 생겼다. 청바지도 즐겨 입게 되었으며 원정 경기를 가면 청바지에 모자를 쓰고 MP3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걷기도 하게 되었다...난 이때 비로소 야구가 '생활'에서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성찰이 있고 끊임없는 배움이 있고 더 넓은 시야, 세계 야구라는 큰 틀에서 일본 야구, 한국 야구, 아시아 야구를 생각하게 되었다."

김성근 자서전,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205P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하고 난지 얼마 안 돼서의 인터뷰를 보면 바비 발렌타인을 자신에게 제2의 야구 인생을 알게해준 고마운 스승으로 생각한다고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지도자로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수많은 야구 전문서적과 재활의학서적까지 독파하게 된다. 당시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냐면 하도 오래 앉아있는 바람에 치질이 생겨 오랜기간 고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에서의 시간은 김성근을 선진적인 지도자로 변신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 전까지는 약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능력은 있으나 우승까지는 힘든 감독 정도였지만, 이 때의 체험을 통해 완전히 다른 지도철학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스스로 회상한 바 있다.

실제로 김성근은 한국에서 일본 야구통으로 행세해왔지만, 일본에서 제대로 야구를 배워본 적이 없었다. 일본 프로야구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고교 시절에도 전문적인 선수를 길러내는 사립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여 공립학교에 다니며 강가에서 돌멩이를 던지며 훈련했던 것이 거의 전부였다.[140] 사실 김성근이 유일하게 제대로 야구 교육을 받은 것은 부산 동아대에서였다.[141]

동시에 언론과 팬들에게 보다 열린 마음으로 대한다든가, 매일 타순을 변화무쌍하게 조정한다든가. 훈련방식도 위의 태평양 돌핀스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무조건 많이 굴리면 장땡이라는 사상에서 벗어나, 선수 개개인의 강약을 분석하고 부족한 부분을 효율적으로 보강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분석해서 접근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 재임 시절의 SK 와이번스는 슈퍼스타 몇 명에 의존하지 않고 많은 가용자원을 두고 플래툰 시스템을 돌리던 팀이었고, 이런 모습들은 발렌타인 감독의 영향을 받은 거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특히 언론과 팬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자세히 보면, 이후 SK 와이번스 부임시절 김성근 감독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 못지 않게 긍정적인 기사도 많이 쏟아지는 편인데, 팀의 호성적과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언론플레이와 자서전 등을 간행하면서 자신의 팬 기자들을 양성한 덕분이다.[142] 발렌타인 감독 역시 인맥이나 언론 플레이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던 만큼,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 SK 와이번스 감독

SK 와이번스 No.38
김성근(金星根)
파일:09김성근.jpg
파일:SK 와이번스 엠블럼(2006~2019).svg SK 와이번스 감독시절
지도자 인생 황혼기에 맞은 김성근의 최전성기로, 6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SK 와이번스를 4년 중 3년 우승시키며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팀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전까지 김성근은 다소 더러운 야구를 구사하지만 약팀을 맡아서 성적을 내는 리빌딩 능력만큼은 훌륭한 리빌딩 전문가[143] 이미지가 강했으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KBO 리그의 역대급 명장 반열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실 이 시기에서도 전병두 혹사 등 특유의 스타일로 인한 문제점이 있었으며, 한화 이글스 시절 보여준 매우 나쁜 모습으로 인해 한화 팬덤뿐만 아니라 악성 개인 팬덤인 노리타를 제외한 타 팀 팬덤에게도 전면적인 비판과 조롱을 받던 시기에도 SK 팬덤에서는 한화 시절은 그렇다쳐도 SK 시절까지 폄하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김성근이 한화를 떠난 뒤 시간이 지나 주 활약 시대에 따른 보정이 가해져[144]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많이 누그러진 지금은 트레이 힐만과 함께 프랜차이즈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반드시 꼽힐 정도로 레전드 감독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때의 활약으로 대다수 SK 팬들에게서 영구결번에 대한 여론이 긍정적이었으며, 구단에서도 추진 의사가 있었다. 2011년 김성근이 SK 감독직에서 경질된 후 구단 측에서는 김성근의 해임을 결정하기는 했지만 지금의 SK가 있기까지 많은 공로를 세운 감독인 점은 분명하며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고 전했다. 추가로 신영철 당시 SK 와이번스 사장은 그룹 차원에서 전관예우를 진행할 예정이며, SK의 고문직과 명예로운 퇴임을 위해 퇴임식 및 영구결번을 제안할 예정이라고 덧붙혔다. 그러나 김성근은 "내가 경질되며 많은 코치와 직원들이 그만두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나만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으며 시기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며 SK 측의 제안을 거절해 무산되었다. #

11.1. 왕조의 시작, SK 와이번스 감독 취임

김 감독은 "다시 유니폼을 입지 못하나 생각을 했는데 팬들을 볼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와서 정말 반갑다"면서 "앞으로 SK에 야구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칠테니까 많은 호응을 부탁한다"며 활짝 웃었다. 또 "2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프로야구는 팬들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팬들과 함께하는 즐겁고 재미있는 야구를 펼치겠다"면서 "SK 경기를 한차례 밖에 보지 못했지만 앞으로 선수들 스스로 근성있고 까칠까칠한 야구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한겨레, 2006-10-15.
#

이제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던 김성근. 하지만 그의 커리어가 다시 시작되었고 역사상 최고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바로 SK 와이번스와의 만남이었다.

SK 와이번스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된 후 그 선수단을 인수하여 창단된 팀이었는데, 본래 연고지로 서울을 노렸으나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 등 서울 구단들의 반발로 인천에 터를 잡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차 떼고 포 뗀 쌍방울 인수 후 재창단이었던 만큼 실력도 형편없었고, 무엇보다 당시 SK는 역대 최악의 비인기 구단이었다. 2000년 창단 첫 해 8개 구단 가운데 꼴찌에 머물렀으며, 문학 야구장을 찾은 총 관중은 8만 4563명이었다. 즉 경기당 1281명에 불과했으며 롯데 자이언츠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비인기는 인천의 특수성에 비롯되었다. 인천은 사실상 한국에서 야구가 처음 시작된, 말 그대로의 구도(球都)였다. 하지만 동시에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 야구와 관련하여 가장 수난이 많았던 지역이었다. 삼미와 청보 시기 꼴찌만 거듭하던 것에 도원아재로 대표되는 야구 팬들은 점차 힘을 잃어갔고, 태평양의 선전과 현대의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점차 인기가 늘어가나 싶었으나 현대의 배신[145]으로 큰 상처를 입고 야구의 인기가 거의 폭락하였다. 그 결과 SK 창단 때 인천 팬들은 여전히 현대를 응원하는 팬, 새로운 팀인 SK를 응원하는 팬, 아예 야구 자체를 저버린 팬으로 나뉜 상황이었고, 심지어 SK를 응원하는 팬조차도 SK를 과연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고 있는 상황이었다.[146] 게다가 도망간 2000 현대는 1985 삼성 라이온즈, 1993 해태 타이거즈, 2008 SK, 2016 두산 등과 함께 역대 최강의 팀 순위에서 항상 꼽히는 강팀이었고, 새로 들어온 SK는 쌍방울의 암울한 분위기를 여전히 품고 있는 꼴찌 팀이었다.

2005년 당시 새로 부임한 신영철 사장은 '스포츠+'엔터테인먼트'라는 내용의 스포테이먼트라는 기조를 들고 나왔고, 이 과정에서 성적을 내줄 감독과 흥행을 이끌 적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신영철 사장은 김성근 당시 치바 롯데 마린즈 코치와 접촉하였고, 당시 발렌타인 감독의 영향을 받은 김성근 코치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에 2006년 2군 전력 강화를 위해 김성근을 2군 감독으로 영입하려고까지 하였으나, 스승을 휘하에 둘 수 없다는 조범현 1군 감독의 거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당시 SK 와이번스 운영본부장으로 있던 민경삼 또한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민경삼은 김성근의 커리어 초창기였던 신일고 시절의 제자였으며, LG 프런트 시절에도 대표적인 친김성근파였던 최종준 전 단장 라인으로 김성근의 경질 당시 같이 LG를 떠나기도 했었다.[147] 이처럼 김성근과 밀접한 관계였던 만큼 민경삼 운영본부장도 당시 김성근 감독 선임을 지지했던 대표 인사였다. 나중에 김성근 감독 경질 과정에서 신영철, 민경삼이 가장 부각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다만 이 당시 SK는 이후 일어날 사태가 미리 예견되어 있던 구조였다. 2006 시즌 SK의 4강행이 사실상 어려워진 시점에서 1군 감독 후보 면접이 진행되었는데, 당시 SK 감독 후보는 4명이었다. 당시 김성근은 후보 4명 가운데 가장 박한 점수를 받고 있었다. 어느 구단 관계자는 신영철 사장에게 “김 감독은 SK가 추구하려는 스포테인먼트와는 정반대 지형에 있는 사람”이라며 “구단 마케팅에 매우 적대적인 감독”이라는 악평을 쏟아냈다. 그러나 민경삼, 신영철의 강력한 지지 아래 김성근이 감독으로 선임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조건이 붙었다. “다른 코치는 다 김 감독이 뽑아도 수석코치는 구단이 결정하겠다”는 것. 여기서 결정된 수석코치가 바로 이만수였다. 훗날 신영철 사장은 “김 감독에게 성적을 맡기고, 이 코치에겐 흥행을 맡길 작정이었다”며 “냉혹한 이미지의 김 감독과 따뜻하고 열정적인 이 코치의 이미지를 잘 혼합하면 굉장한 시너지 효과를 얻으리라 판단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야구계에서 김성근과 이만수의 불협화음을 우려했지만 신영철 사장은 그 불안을 일축하였는데, 결국 이것이 사단이었다. # 심지어 애초에 이만수를 데려올 때부터 SK가 그를 차기 감독감으로 미리 점지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돌았다. 이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이는 일화가 있는데, 이만수의 수석코치 취임식을 감독 취임식에 준하는 수준으로 별도 개최한 점이다. 이 자리에는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은 감독 김성근도 단상에 같이 앉아있었다. 이 당시 이만수 수석코치는 거창한 취임 소감을 밝히기도 했는데, 김성근이 바로 옆자리에 있는 와중에 "팀을 바꿔가도록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1군 선수단의 총책임자인 감독이 이미 있는데 수석코치가 팀의 방향 개편을 언급한 것은 훗날 두 지도자 간의 갈등이 예고된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1.2. 당시 SK 와이번스는 어떤 팀이었나

난 어느 팀을 맡든간에 처음엔 실망하는 편이에요. 내가 왜 이 팀에 왔나 싶어. 그러면 고민고민하게 되지. 그런 과정을 거쳐서 무엇이 팀을 살리는 가장 옳은 방법인지를 선택해요.
김성근 #
김성근 자신의 회고에서는 "이래가지고 어떻게 야구하냐"는 말이 이만수 수석코치 입에서 나왔을 만큼 당시 SK가 팀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 이건 김성근이 항상 하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김성근은 자신이 맡은 팀을 일관되게 깎아내리고 상대 팀의 전력은 심하게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있고, 한편으로는 팀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란 의견도 있다. 다만 후자의 사례로 볼 수 있는 사례가 많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나중의 회고조차 그러는 건 전자의 목적으로 보는 편이 맞을 듯.
“감독 한 사람으로 팀이 변하는 건 아니다”면서도 “조범현 전 감독이 이미 세대 교체를 염두에 두고 틀을 만들어놨다. 나는 거기에 마음을 넣은 것뿐”이라며 후배 지도자를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겨레, 2007-10-08 https://www.hani.co.kr/arti/sports/baseball/241523.htm
다만 SK 시절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김성근이 기존 전력을 고평가한 편이었는데[148], 조범현 감독이 팀을 잘 만들어놨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SK는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부실한 전력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전임 조범현 감독이 단기간에 팀을 추슬러 창단 4년차인 2003년에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를 연속으로 스윕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까지 했으며, 비록 준우승에 그쳤으나 당시 최강 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간 바 있다. 2005년에도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다. 타선에서는 이진영, 이호준, 박경완의 기량이 불을 뿜고 있었고 마운드에서는 토종 원투펀치 김원형과 신승현의 건재와 정대현, 위재영, 조웅천의 완벽한 계투진 덕에 2년 만에 다시 투타의 균형이 맞았다.

하지만 2005년 후반기부터 전력이 급격히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정규 리그 마지막까지 2위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가 최종전이었던 LG전에서 이호준이 찬스를 말아먹으며 패배하며 바짝 쫓아오던 3위 두산에게 덜미를 잡혀 3위로 내려앉았다. 결국 선수단 분위기는 바닥을 기었고, 결국 그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게 2승 3패로 패배하고 만다.[149] 그래도 전력 자체가 손실된 건 아닌지라 2006년에 4강 후보로 꼽혔지만, 결국 이런 분위기를 수습하지 못했고 야심차게 영입했던 일본인 타자 시오타니 가즈히코가 한국 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때마침 찾아온 손가락 골절상[150]으로 팀을 떠났고, 이후 영입한 선수들 또한 별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서 6위로 미끄러졌다.

하지만 팀 자체는 충분히 우수했다. 이진영, 이호준, 박경완, 박재홍 등 기존 베테랑들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고, 김원형을 위시로 한 투수진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위재영이 몰락했다고는 하나 조웅천, 정대현 등 불펜진이 건재하였고, 무엇보다 정근우, 최정, 김강민, 박재상 등 젊은 유망주들이 성장세를 타며 세대 교체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선수들을 기반으로 2007년 SK는 거대한 폭풍을 시작하게 된다.

11.3.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2007 SK의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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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은 감독 부임 이후 자신과 인연이 있던 가토 하지메를 투수코치로 데려왔고, 가토 코치의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절 동료인 오오타 다쿠지 코치와 수비 전담 지도자인 후쿠하라 미네오 코치도 함께 영입하는 등 일본인 코치들을 잇달아 영입한다.[151] 아울러 본인의 수제자들로 구성된 이른바 '김성근 사단'이 대거 SK 코칭스태프로 들어오게 된다. 대표적인 사람이 2군 감독을 맡았던 계형철.

당시 SK 선수단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창학 야구장과 일본 고치현 오키나와현에서 훈련을 이어갔는데, 익히 알려진 김성근 감독의 훈련 방식대로 어마무시하게 굴려졌다. 공포의 펑고로 불리는 수비 연습이 유명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신진급 선수들이 대거 기회를 얻게 되는데, 소위 최전성기 외야 3인방으로 불리는 김강민, 조동화, 박재상 등이 대표적이었다. 역대급 강훈련과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원숙해진 투수 운용을 바탕으로 SK는 초반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1위로 달려나갔다. 이 시기부터 김성근 특유의 초반 집중이 시작되었는데, 4월 승률 0.667을 시작으로 구단 사상 한 시즌 최다승(73승) 기록을 다시 썼고 첫 정규 리그 우승까지 이어졌다.

당시 SK의 기록은 굉장히 독특했다. 기존 강팀들이 특정 몇몇 선수들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던 것과는 달리 SK는 단 한 명의 개인 타이틀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이후 팀을 이끌 거라고 기대했던 김광현은 당시에는 신인이었던 데다가 시즌 성적도 보잘것 없었다. 그러나 김성근은 팀 구성원 전체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는 토털 베이스볼을 구축하였고, 김성근 특유의 데이터 야구가 들어맞으면서 두산 베어스를 4.5게임차로 제치고 창단 첫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희생도 뒤따랐다. 이 과정에서 신진급 선수들이 기회를 얻고 성장하였던 반면, 김재현은 커리어 사상 최악의 부진을 면치 못했고[152] 박재홍 플래툰 시스템의 희생양이 돼 1군과 2군을 들락날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동시에 재일 한국인 출신인 김성근을 비롯해 일본인 코치들이 다수 지도한 탓에 "SK의 야구가 일본야구를 지향하는 것 아니냐", "SK의 야구는 너무 재미가 없다", "김성근 야구는 너무 얄밉고 인간미가 없다" 등의 비판이 잇따랐다.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다니엘 리오스약물 파워 투구를 앞세운 두산에게 초반에는 고전하였다. 특히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이 논란이 커졌는데, 1차전 주루 플레이를 펼치던 이종욱이 정근우에게 걸려 넘어진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3차전에서 채병용이 안경현, 김동주와 연이어 벌인 빈볼 시비 사건을 기점으로 난투극이 벌어지며 두산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4차전 페넌트레이스에서는 고작 3승밖에 거두지 못했던 김광현이 깜짝 등판하여 22승을 거둔 리오스와 맞승부, 승리하면서 분위기는 대반전을 이룬다.

결국 SK는 1-2차전 2패에도 불구하고 연속 4연승,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업셋 우승을 달성하였다. 4차전 선발 김광현과 시즌 내내 부진했던 김재현의 부활, 항상 평범한 선수였지만 가을만 되면 미쳐버리는 가을동화 전설을 쓰기 시작하는 조동화의 활약이 빛났던 경기. 김성근에게도 그 오랜 프로 감독 커리어 사상 첫 우승이었다.

SK의 성적이 급상승하고 관중을 야구장으로 유입하고자 한 눈물겨운 마케팅은 결국 관중 폭발이라는 성과로 돌아왔다. 2007년의 SK는 1994년 태평양 돌핀스가 세웠던 인천 연고 구딘 단일 시즌 최다 관중 기록(47만 6277명[153])을 13년 만에 깨고 65만 6426명의 관중을 야구장으로 불러들여 역대 인천 연고 구단 사상 최초로 시즌 평균 관중 1만 명대 시대를 열었다.

11.4. 리그를 압도했던 2008 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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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의 야구가 막강하다는 평을 들은 것의 정점은 2008년이었다. 이른바 '지지 않는 야구'의 완성이었는데, 2007년 우승 전력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2007년 한국시리즈를 통해 각성한 2년차 에이스 김광현이 그야말로 슈퍼 에이스 역할을 하며 정규 시즌 MVP에 오르는 등 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를 낸 해였다. SK가 거둔 2008년 시즌 전적은 무려 83승 43패. 126경기 체제에서 83승을 거두고[154] 승패 마진이 무려 +40이 될 정도로 압도적인 시즌.

또 이 해 정규 시즌 최종 승률 0.659는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와이번스 구단 역대 통산 단일 시즌 최고 승률 기록이자 126경기 체제에서 거둔 KBO 리그 사상 최고 시즌 승률 기록이다. 당시 1년 내내 월간 승률이 6할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 이 때 SK팬들이 경기를 볼 때 느낌은 5점차 6점차로 뒤지고 있어도 이길거 같고 어차피 경기는 이기는 거니까 스탯이나 챙겨보자.

심지어 이때의 우승은 더 놀라운 것이, 사실상 외국인 선수와 4번 타자가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이루어낸 상황이라는 것. 2007년 17승을 거두며 팀의 에이스 역할을 했던 케니 레이번이 처절하도록 운이 따르지 않은 탓에 5승짜리 투수로 전락했고 또 다른 외국인 투수는 1년 내내 없었다고 할 정도로 함량 미달의 선수들이 연달아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4번타자 자리도 1년 내내 공석이었다. 이호준이 무릎 수술의 여파로 거의 1년을 통으로 쉬었다. 이 자리에는 박재홍, 김재현 등 기존 선수들이 들락날락해야 했다.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을 두산 베어스에게 내줬으나, 2차전부터 4경기를 내리 이기며 4승 1패의 성적으로 창단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이자 해태 타이거즈(1996~1997), 현대 유니콘스(2003~2004), 삼성 라이온즈(2005~2006)에 이어 통산 4번째로 통합우승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155] 다만, 김성근 감독 자신이 소망하는 아시안시리즈에서는 일본시리즈 우승팀인 세이부 라이온즈에게는 승리했지만 어이없게도 대만의 퉁이 라이온즈에게 참패하면서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우승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유독 타팀과의 충돌이 많았다. 시즌 초 로이스터의 롯데가 돌풍을 일으키며 선두를 질주하자 잘나가던 로이스터 감독에게 시비를 걸며 도발하면서 감정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2008년 4월 12일 조영민이 4회 광주일고 선배 정성훈을 몸에 맞는 공으로 내보낸 후 미안하다는 제스쳐를 하자, " 아무리 선배라도 필드에선 적인데 어떻게 미안하다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조영민을 120구나 던지게 '방치'하고, 바로 다음날 2군에 내려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롯데 이외에도 예전 쌍방울 시절부터 응어리가 많았던 김재박 감독과도 자주 충돌하고 윤길현 욕설 파문이 터지는 등 다양한 문제가 많았던 시기.

2008년 9월 3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프로야구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5월 10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 프로야구 감독 통산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뒤이어 2011년 5월 4일, 대전 한화전에서 7대 4로 이기면서 또 김응용에 이어 역대 감독 중 두 번째로 1,200승을 달성하였다.

11.5. 사투에 사투, 19연승에 빛나는 2009 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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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는 악재가 계속되었는데, 시즌 전 베이징 올림픽의 영웅이었던 이진영 LG 트윈스로 이적하였고, 마이크 존슨 크리스 니코스키는 애초에 함량 미달로 시즌 중 방출되어버렸다. 거기에 6월 24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무등 야구장 경기에서는 전력의 절반인 박경완이 주루 중 아킬레스건 파열로 시즌 아웃되었다. 게다가 8월 2일에는 팀의 핵심 에이스인 김광현이 두산 베어스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경기에서 김현수의 타구에 손등을 맞고 시즌아웃되어 버렸다.[156] 결국 SK는 온갖 악재 속에서 8월 한때 3위까지 밀려났다.

9월에 접어들자 SK 감독이었던 김성근에게 기자들이 '1위인 기아와의 게임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럼 지금부터[157][158]전승하면 되겠네'라고 대답한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단순한 포부에 불과할 뿐이라며 웃어넘겼지만...

하지만 대반전이 일어났다. 이 인터뷰 이후 9월 23일 삼성 라이온즈를 이겼으며, 이후 막판 20경기에서 기록한 성적이 20전 19승 1무. 19연승을 기록하며 프로야구 최다 연승 기록을 세우면서, 우승 매직넘버 단계에 있던 KIA 타이거즈를 말 그대로 턱밑까지 추격하였다.[159] 이 무시무시한 연승기록을 본 팬들은 "지지 않는 야구"라는 표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이는 SK 왕조를 상징하는 표현이 된다.

당시 성적은 1위 KIA와 반 게임도 되지 않은 승률차이로 정규 시즌 2위를 기록했는데, 심지어 이건 무를 사실상 패로 규정하는 당시 규정의 영향이 컸다. 2009 시즌의 승률 계산식은 (승수)/(전체 경기 수) 였기에, 무승부도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기아의 성적은 81승 5무 48패, SK의 성적은 80승 6무 47패. 2008년까지의 종전 승률제에 따르면 승률 0.630으로 0.628의 기아보다 2리가 앞서게 되어 페넌트레이스 우승팀이 바뀌는 상황. 이는 84년 전후기 통합 리그 승률 1위를 기록했음에도 한국시리즈조차 참가하지 못했던 것, 86년 후기리그 1위를 달성하고도 전후기 모두 2위를 차지한 롯데한테 밀려서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 것처럼 리그 규칙에 따라 김성근 감독이 손해본 대표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물론 제도는 시즌 시작부터 공지되는 것이니 억울하다고 할 건 아니지만.

심지어 여기에는 또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바로 2009년 6월 25일 경기. 당시 기아전에서 12회까지 5-5까지 벌어지는 접전이 벌어졌는데, 김 감독은 12회말에 상식을 뛰어 넘는 선수 교체를 했다. 마운드에 내야수 최정을 올리고, 1루수에 투수 윤길현을 기용한 것. 국 SK는 투수 최정이 던진 공을 포수 정상호가 뒤로 빠트리면서 5-6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고, 최정은 패전투수가 됐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그 상황에 등판이 가능한 유일한 투수 윤길현이 어깨 통증을 호소해 할 수 없이 최정을 투수로 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승호 등 투수가 남아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다음 경기를 위해 투수를 아낄 겸, 무승부 규정에 항의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고 해당 사건을 해석하였다. 문제는 바로 그 기아가 해당 년도 7리 차이로 우승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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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는 당시 가을야구에서도 역사를 써내려갔다. PO에서도 두산에게 먼저 2패를 당했지만, 내리 3연승을 기록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올랐다.[160] 다만 이 시기 SK 와이번스는 말 그대로 누더기가 된 수준이었는데, 망가진 투수진을 꿋꿋하게 지켜줬던 마당쇠 전병두의 시즌 아웃과 채병용의 부상, 2009 시즌 최고 선발 중 하나였던 송은범의 부상 등 악재는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2009 한국시리즈. 당시 SK는 거의 누더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던 전력에도 KIA와 7차전까지 가는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6회까지 5:1로 SK가 선전하였지만, 6회 나지완의 투런 홈런으로 5:3까지 기아가 추격. 9회말 5:5까지 따라잡은 상태에서 이미 한계에 도달한 채병용이 등판했지만, 결국 9회말 1아웃 상황에서 나지완이 솔로 홈런을 터뜨리면서 SK는 준우승에 머물렀다.[161]

2009년의 SK는 기존 김성근 감독의 색깔과는 굉장히 다른 팀이었다. 무엇보다 팀 타격에서 타석 및 득점, 안타, 홈런, 타점, 타-출장 전 분야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정근우를 제외한 주전 야수 전원이 2자릿수 홈런을 달성하였다. 오직 도루만 2위 기록. 또 팀 홈런-도루 160-160을 최초로 달성할 정도로, 김성근 감독이 맡았던 모든 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타격력을 보여줬던 팀. 물론 투수 또한 이닝, 탈삼진, 평균자책 및 9이닝당 삼진율 모두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투타 모두 강력한 팀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때부터 김성근 감독이 정말로 "야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도 김성근 감독은 조성환 부상 사건이나 두 차례의 위장 선발 논란, 기아와의 신경전 등 다양한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서 보여준 투혼과 명승부 덕에 악역 이미지가 많이 사라졌으며, 오히려 이러한 논란이 비매너라는 이름에서 승리를 위한 처절한 승부사 이미지로 바뀌었다. 또 2008-2009년 두 해간 SK 와이번스는 OBS경인TV에서 불타는 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팀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방송으로 풀어냈고, 이 과정에서 팀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화되었다.[162] 어떤 의미에서는 김성근 개인의 이미지로는 2007-2008년의 연속 우승보다도 더 이미지 변화를 가져온 시기.

2009년 10월 22일 KIA 타이거즈와 한국시리즈 5차전 때 경기 도중 선수단을 철수시킨 것으로 인해 한국 시리즈 감독 퇴장 1호라는 흑역사를 기록했다. 이것은 2009 시즌부터 신설된 '스피드업 규정'에 의한 것으로, 선수단 일부 혹은 전부 철수 시 감독은 즉시 퇴장 당하게 되어 있다.

11.6. 절치부심한 최강자, 2010년의 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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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핵심 불펜인 채병용, 윤길현이 군 입대를 했고 전병두, 정상호, 정대현이 부상 병동에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2월 17일 니혼햄과의 연습경기에서 부상에서 회복한 다르빗슈 유를 2이닝 3실점으로 바르며 10-6으로 승리한데 이어 다음날 주니치와의 경기에서도 9-3으로 압승하며 슼팬들을 설레게 했다.

2010년 SK는 말 그대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에이스 김광현의 복귀와 정우람, 이승호, 전병두, 고효준의 강력한 좌완 불펜(스윙맨)을 앞세워 시즌 내내 선두를 지키고 84승으로 팀 최다승 신기록을 수립, 정규 시즌 우승에 성공한다. 심지어 전 구단 상대 전적 우세를 기록했는데, 이때의 SK를 마지막으로 2023년 현재까지 전 구단 상대 전적 우세를 기록하는 팀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어 삼성 라이온즈 상대로 4전 전승으로 완승을 거두면서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팀 통산 세 번째 우승 및, 김성근 개인 통산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SK는 이로써 최근 4년간 3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달성했으며, 명실상부 당대 적수가 없는 강팀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동시에 이로써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해태와 타이기록) 기록을 세웠다. 김성근이 인천 예수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 시기.

2010년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스포츠 부문을 수상하였다. 스포츠 지도자로서는 최초라고 한다.

11.7. 2011년, 12번째 해임과 문학구장 소요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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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도 SK는 불안 요소를 안고 시작하였다. 2011년 시즌 김광현, 송은범의 부상으로 인한 부진, 뛰어난 외국인 투수 영입 실패 등, 이때도 역시 불안 요소를 안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쌍방울 시절을 연상케 하는 스윙맨을 최대한 활용하는 투수 운용으로 시즌초 선두권을 달렸다. 하지만 전병두 등 계투진의 혹사 여파와 정상호, 박경완의 부상으로 프로 입단후 포수경험이 거의 없던 최동수를 지속적으로 포수로 기용하는 극단적인 용병술이 실패하면서, 7월에는 결국 3위로 떨어진다.

제일 큰 문제는 바로 김성근 본인의 거취 문제였다. 시즌 중 재계약 문제로 프런트와 마찰을 빚었지만, 2000년대 후반 SK 왕조를 구축한 김성근 감독이 재계약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프런트와 김성근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으로 곪아 있었다.

사실 그 시작은 2006년 계약과 2008년 재계약부터 시작이었다.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부터 프런트에서 그의 사단도 아니며 원하지도 않은 이만수를 수석 코치로 부임시켰고,[163] 타 팀 감독의 계약기간이 3년인데 반해 2년 단기 계약을 맺었으며, 2007 시즌 초 홈구장 만원 사례에 마치 팀의 간판인 것처럼 대규모 팬티 퍼포먼스를 벌인 것을 볼 때, 프런트의 의도에 따른 2년 후 차기 감독이 이만수인 것은 기정 사실이나 다름없었던 것.

하지만 예상 외로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2연속 우승을 하며 최고의 성과를 거뒀고, 그에 따라 2009년 3년 재계약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단 내 김성근 감독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이만수가 1군 수석코치에서 밀려나 2군 감독으로 이동하게 된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해석 가능하다. 게다가 재계약 후 나온 당시 신영철 구단 사장의 막걸리 야구 발언, 김성근 감독의 이진영 등 FA 유출과 소극적인 영입 태도에 대한 구단에 불만을 나타냈던 것은, 당시까지는 그러려니 넘어갈 문제였지만 이 시기 들어서는 이것이 프런트와 감독간 파워 게임을 하는 이상기류였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2011 시즌 직전 넥센 히어로즈는 김성근 감독처럼 계약 마지막 해였던 김시진 당시 넥센 감독과 일찌감치 2014년까지 3년 재계약을 맺었고[164], 김성근 감독은 언론에 이 사례를 들면서 언론 인터뷰를 통해 프런트 측에 계약 종료 전 재계약을 압박했다. 사실 김시진 사례가 이례적인 것이긴 하지만,[165] 우승 감독인 만큼 빨리 불안한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언질을 요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 프런트는 공식적으로는 시즌 및 계약종료 후 재계약을 결정한다고 선언했으나, 이만수 2군 감독의 양해 문제 등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도 갈등이 불거졌다. 김성근 감독은 이 과정을 언론을 통해 불만을 터뜨렸고, # 결국 2011년 8월 17일 이번 시즌까지만 하고 SK 감독직을 그만 두겠다고 공개 발언을 하였다. 계약 만료 시즌에 스스로 시즌 중 재계약 거부 선언을 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 관련기사.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8월 18일, 바로 구단에서 경질되었다.. 본인 말로는 감독 인생 동안 12번 째 해임... 빨간 장갑의 마술사랑 동률이 머지않았다 이날 SK 프런트는 김성근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이만수 2군 감독을 감독 대행으로 임명해 남은 시즌을 꾸려가겠다고 발표했다.

그래도 올해까지는 김성근 감독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나아가 김성근 감독이 마음을 돌려 재계약 할지도 모른다고 희미하게나마 기대했던 당시 SK 팬덤에서는 프런트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166] 게다가 경질 통보를 문학구장에서 받았다는 기사까지 뜨면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167] 당시 경질 상황을 김성근 감독의 입장에서 요약한 박노준의 칼럼이 있다. 김성근 감독 경질 왜?
" 민경삼이 물러가라!"
" 신영철도 물러가라!"
"프런트는 사퇴하라!"[168]
당시 시위 구호

결국 당시 SK 강성 팬들의 분노는 문학구장 소요 사태로 이어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이만수 감독과 프런트에 대한 비토 여론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소요 사태 과정에서 덕아웃과 구단 전시물 등도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민경삼개XX, 신영철개XX, 프런트는 물러가라, 꺼져라 이만수, 유다 등등의 온갖 낙서의 향연이 펼쳐졌다. # ## 21세기 들어 그라운드에 불을 지른 행위는 처음이며,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이 난입한 경우도 1990년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 이후로 최대 규모였다. 구단 측의 발표에 따르면 소요사태로 인해 약 3500만원 가량의 피해를 입었다.

해당 소요사태는 그 다음날 저녁 주요 지상파 KBS, MBC, SBS 를 통해 보도되었다. KBS 뉴스9[169] SBS 8뉴스 MBC 뉴스데스크 일부 언론은 이를 스포츠 팬의 양상 변화로 풀이하기도 했다.

문학구장 소요 사태 외에도 경기 도중 관중 난입만 총 네 번이 있었는데, 1회초에 상의를 탈의한 남성이 난입한 후 붙잡혔고, 두 번째는 4회 도중 웃통을 벗은 관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했으며, 세 번째로 9회 송은범 유니폼을 입은 관중이 외야에서 뛰어내려 홈으로 전력질주하다 제지당했다. 마지막으로 경기 종료 후 덕아웃으로 한 관중이 들어와 인터뷰를 하던 이만수 감독 대행에게 욕설을 하다 끌려 나갔다. 물병 등 쓰레기가 그라운드에 떨어져서 수 차례 경기가 일시 중단되었으며, 아예 쓰레기통이 통째로 떨어지는가 하면, 그물에 매달리는 관중까지 등장했다. 이에 일부에선 도원아재들이 문학에서 부활했다는 불명예스러운 비아냥까지 쏟아졌다.[170]

해당 사건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한동안 관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는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이 점차 진정되는 과정에서 여전히 프런트에 반발하는 세력과 선수들을 위해 참아야 한다는 세력이 나뉘면서 SK 팬덤이 분화되었으며, 당시 김성근 감독을 지지하던 이들 중 상당수가 김성근 감독만의 악성 팬덤으로 변질되었다.

11.8. 김성근이 성장시킨 SK 왕조의 주역들

1990년대 해태, 2000년 초 현대의 뒤를 이어 2000년대 후반 SK는 대표적인 한국 프로야구의 왕조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왕조를 이룬 것은 김성근 감독의 공도 분명 컸지만, 그를 따랐던 선수들의 성장이 이를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대표적인 선수로는 야수로는 최정, 정근우,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 박정권, 나주환이 있었다. 이들 상당수는 그 전 감독인 조범현 감독 시절 발굴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최정은 조범현 감독 시절이던 2006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김재현-이승엽-김태균에 이어 네 번째로 10대 나이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바 있다.

이 때문에 김성근 감독이 이 선수들의 성장에 공헌한 바가 없다는 극단적인 논리를 펼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선수들의 기본 전력만 믿고 방심하거나, 다소 느슨하게 플레이하는 것을 다잡고, 선수들을 조련해서 더 나은 기본기와 많은 연습량을 통해 수비력과 기동력의 향상을 이끌어낸 것은 김성근 감독의 공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입스를 극복한 정근우와 수비가 안 돼서 1루수 컨버전까지 고려했던 최정을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만든 것은 김성근의 공. 나아가 당시 주전 박재홍을 두고 자꾸 주전 중견수로 쓴다며 세자저하라는 비꼼 섞인 별명까지 들었던 김강민도 김성근의 강력한 지지 아래 성장한 선수였다. 또 아무리 상무에서 기량을 쌓아 왔더라도, 이제 한 시즌 제대로 보내고 제대한 3년차 새파란 박정권에게 기회를 주면서 2009년 1루수로 정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동시에 두산에서 잉여자원으로 분류되었다가 트레이드로 데려왔던 나주환, 김성근 부임 이후 자리 잡은 포수 정상호 등도 이 시기 SK 왕조의 대표적인 선수들이었다.

투수진 또한 다양한 선수들이 등장했다. 2007년 엄청난 기대를 안고 올라왔지만 마땅한 성적을 올리지 못했던 김광현을 에이스로 성장시켰으며, 멘탈이 문제였던 송은범을 가다듬어 활용하였다. 가장 두각을 드러낸 부분은 스윙맨 분야. SK 시절의 전병두, 고효준, 엄정욱 같이 구위만 좋고 제구가 아예 안 되는 선수들을 육성하여 좋은 스윙맨으로 만들어냈다.[171]

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신인 발굴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2011년 경질 당시까지 주전 중 데뷔 5년차 김광현과 데뷔 7년차 최정이 각각 1군 붙박이 투수조와 야수조 막내였다는 것이 대표적인 비판 내용.[172] 다만 김성근이 원래 노장을 선호하는 편이기도 했지만 당시 SK는 우승을 향해 계속 달리던 팀이었고, 당시 라인업을 보면 굉장히 단단한 팀이었던 만큼 신인이 끼어들기 쉽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173]또 당시 서진용 사태[174] 등 스카우트들 또한 무능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김성근만을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175]

12. 독립 구단 고양 원더스 감독

고양 원더스 No.38
김성근(金星根)
파일:external/spnimage.edaily.co.kr/PS12070800033.jpg
파일:고양 원더스 엠블럼.svg 고양 원더스 감독 시절

이후 2011년 12월 5일 고양 원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독립 리그 구단 감독을 맡은 감독은 그가 처음이다. 고양 원더스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있긴 하지만,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여러 선수들을 프로 구단으로 진출시키고 5할 이상의 승률을 유지하는 등 활약을 펼쳤다.

프로에서 방출되거나 미지명된 선수들로 호성적을 거두면서 높은 평가를 받은 데다가 각종 우상 서적자서전 출간과 그를 미화한 프로파간다 영화 개봉으로 소외받은 약자들의 편에서 재기를 돕는 존경받는 사회적 리더로 이미지 메이킹하여 그의 개인팬층이 확산되고, 정치권 등에서 그와 사진찍기 위해 찾아오거나, 리더십 강연 요청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청와대에서도 강연을 하고 강연 수익으로 인한 세금만 수 억 원을 납부할 정도.

하지만 실상은 상술하였듯이 고양 원더스 부임 전과 부임 후에도 늘 국내외 프로구단 감독으로 부임을 노리고 있었고, 재능기부 및 봉사로 비춰진 세간의 인식과 달리 고양 원더스에서도 연봉 2억원에 기사 딸린 외제 관용차량 지원, 자신의 사단코치 대부분 기용할 수 있어 프로구단 감독 수준의 대접을 받고 일했다. 게다가 데럴 마데이 등 외국인 투수 5명이 전체 시즌 경기이닝의 대부분을 맡은 것이 밝혀지며 긍정적으로만 비춰지던 그의 고양 원더스 시절이 재평가되었다. 승리와 감독 개인의 명예에 집착해서 독립야구단 본연의 창단목적인 육성을 도외시한 승부 중심의 운영을 했다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승리 집착이야 선수들이 승리하는 만큼 다른 구단 눈에 띄고 다시 프로에 입성할 확률이 높아지니[176] 그것까지는 넘어갈수 있다 치더라도.. 도저히 그 넘어갈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란게 문제 거기서도 당연히 혹사를 시켰고 2014시즌 원더스 주요 외국인 등판일지[177]

2012년 8월 27일 한화 이글스 한대화 감독이 경질되면서 언론과 한화 팬들 사이에 하마평에 오르내리기도 했고 실제로 기사도 많이 터져나왔으나, 8월 29일에 고양 원더스와 2년 재계약을 맺으면서 이 하마평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한화 이글스에서 감독제의가 왔었고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김승연 회장의 아들이 직접 모셔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에 김성근 본인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지만 김성근 본인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한대화 감독을 시즌 끝까지 유임해달라는 것이 였는데 한화 프런트가 이를 어긴 탓에 무산되고, 결국 고양 원더스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김성근 본인의 주장. 하지만 한대화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김성근과 한대화의 악연을 생각하면 그냥 김성근의 언플일 가능성이 높다. [178] 2015년에 한화 감독에 부임하여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이 때 이 발언도 재평가 되고 있다.

2014년, 이 상황이 다른 팀에서 다시 또 반복되었다. 그러나 LG의 경우는 상극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이미 한번 좋지 않게 떠난데다 경험 많은 베테랑과 수비를 중시하는 김성근의 성향상 2군을 폭격 중인 팀 내 유망주들의 1군 정착에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 8월 28일 고양 원더스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계약이 종료되었다.(자동재생 주의) 벌써부터 주목을 받는중. 9월 11일 고양 원더스의 해체가 발표되었다.

김성근 감독의 13번째 감독 생활은 이렇게 끝나고만다. 빨간 장갑의 마술사랑 동률이네 김성근 감독 본인은 경질과 야인 생활의 반복이 익숙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런트와 마찰없이 팀이 통째로 와해되어서 감독직을 내려 놓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한다. 쌍방울의 경우는 와해 단계까지 왔지만 그 전에 명목상 경질이다. 그리고 10월 25일 고양원더스 해체 한달여 만에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한다.

위에서 언급한 과도한 외국인 투수 운용은 물론 프로로 간 선수들이 거의 대부분 살아남지 못하면서 고양 원더스는 안 좋은 의미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13. 한화 이글스 감독

한화 이글스 No.38
김성근(金星根)
파일:external/www.monthlypeople.com/864_16_1026.jp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svg 한화 이글스 감독시절
이건 야구가 아니다 - 고바야시 세이지

김성근 생애 최악의 흑역사. 2010년대 리그 역사적으로 큰 오점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179] 초반 호성적으로 역시 김성근이라는 소리를 듣나 싶었으나, 이내 투수 혹사 논란 및 노장 선호 성향 등으로 인하여 오히려 팀을 망치고 있다는 비판의 중심이 되고, 결국에는 또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불명예 퇴진하면서 그간의 명성을 크게 깎아먹은 시기.

13.1. 2014년

김성근/2014년 문서 참조.

13.2. 2015년

김성근/2015년 문서 참조.

13.3. 2016년

김성근/2016년 문서 참조.

13.4. 2017년

아무래도 계약 끝날때까지 계속할 모양.이었으나. 이날 저녁 상반된 기사가 나왔다.. 경질될지 그룹에 재신임받아 17년에도 한화 감독을 맡을지는 한화 구단측에서 공식적으로 입장을 내놓지 않아 불명이었으나...

11월 3일 공식적으로 유임이 확정되었다. 한화, 김성근 감독 유임 공식 발표.. '박종훈 신임단장 부임'

5월 23일, 감독직 사의 기사가 발표되었다.

또 지저분하게 뒤처리를 하고 사라지는 모양새다. 발단은 이 짧디짧은 속보에서 시작되었다. 구단과 감독 본인의 입장이 기사마다 다르다. 구단이 자신을 떠밀어냈다는 투의 어디서 많이 본 기사가 떴다. 누가 썼겠는가, 당연히 이들이 해당 기사마다 세력 과시 중이다. 애초에 경질이었다면 내부 회의에, 수석코치에게 눈 앞에 닥친 경기를 부탁하다시피 하다가 거절 당하고, 경질된 감독의 소재를 파악하기까지 했겠는가? 거의 장강훈의 기사에 대략의 토막이 입맛에 맞게 녹아있다. 결국 한화 프런트만 나쁜 놈이 되었다.

한화의 눈물겨운 타협시도를 다룬 기사.

또 다시 이렇게 극단적으로 끝냈다. 애초 장강훈의 지원 사격인 경질기사가 오인 사격으로 김성근을 끝장 낸 셈이 되었다. 사실 김성근은 그 동안 프론트를 협박할 때 사퇴쇼를 자주 벌였던 사람이다. 그리고, 경질 배경은 바로 구단주한화 이글스의 그간 성적을 보고, 대노해서 전격 경질을 결정했던 것이라고 한다. 안 맞은 게 다행이다. 다만 은퇴 후 강연이나 기타 방송등에서는 이 문서의 내용보다는 마지막 협상시 김성근은 추간판 탈줄증 등 본인도 건강이 좋지 않아 잠시 그만둔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 아예 그만두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2017년 문서 참조.

14. 일본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파일:金星根.pn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엠블럼.svg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시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2018년 이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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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018년 시즌 소프트뱅크의 '코치 고문'으로 영입되었다.[180]

일단 소프트뱅크의 구단주이자 재일교포의 정신적 지주인 손정의 회장의 의중이 크게 작용한 것을 알려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재일교포라고 규정한 바 있는 손정의 회장은 자신이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재일교포 사회에 큰 애정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손정의 회장은 재일교포로서 모국으로 돌아가 가장 성공한 인물인 김성근을 상당히 상징적인 인물로 보고 있으며 그의 의중에 따라 소프트뱅크에 고문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영입했다는 것.

소프트뱅크 현지에서 김성근은 주로 3군 코치들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선수 지도 권한은 없다. 선수들에게 직접 조언을 건네는 것은 금지사항이다. 시즌 초 김성근이 2~3군 선수에게 직접 조언을 했다가 소프트뱅크 프런트로부터 제지당한 바 있다. #

2020년부터는 1군 코치 고문으로 승격됐다. 호크스의 쿠도 키미야스 감독이 김성근과 많은 얘기를 해보고 싶다고 요청했다고. 사실 2019년 시즌 말부터 1군 훈련에 동행하는 등 기미가 보였다.

일단 현재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김성근의 야구관과는 정반대의 야구 이념을 가지고 있는 팀이다. 김성근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선수들의 웨이트 트레이닝에 극도로 부정적인 것으로 유명했고 이 때문에 선수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 야구 스타일-웨이트 트레이닝 경시 항목 참조. 하지만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김성근의 철학과 정반대로 일본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팀으로 유명하다. 모든 선수들에게 개인 웨이트 트레이너가 있을 정도로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착하는 팀이다. 다르빗슈는 소프트뱅크가 10년째 일본을 평정하고 있는 이유가 다름 아닌 웨이트 트레이닝 덕분이며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피지컬의 힘으로 타 팀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르빗슈 자신도 신인 시절부터 소프트뱅크 원정 갈 때마다 호크스 웨이트룸에 찾아가 코치들에게 비결을 전수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소프트뱅크 팀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현재의 자신은 절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

2022 시즌부터 감독부 특별 어드바이저로 정식 1군 코칭스태프에 합류하게 되었고, 등번호는 71번을 배정받았다. 또한 팀은 물론이고 일본 프로야구 전체 구단에서 현역 최고령 코치이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2018년 이후 문서 참조.

15. 은퇴와 그 이후

나는 야구장으로 가는 길을 가장 좋아한다. 그 길을 걷다 보면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라운드에서 아이디어의 결과가 생각하면 항상 흥미롭다. 그런데 (일본 소프트뱅크 구단에서) 5년 동안 야구장으로 가는 길을 걷다 보니, 이전까지 느낀 흥미롭고 좋아하던 길이 점점 없어졌다.
김성근, 2023 IS 스포츠마케팅 써밋 아카데미 강연 中 프로 현장을 떠난 이유를 설명하면서
2022년 10월 15일 소프트뱅크 구단을 통해 퇴단하겠다는 의사를 전했고 16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50년 간의 지도자 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한다고 밝혔다. 당초 소프트뱅크 구단은 재계약 의사를 밝혔으나 김성근이 직접 오 사다하루 소프트뱅크 구단 회장과 연락하여 은퇴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성근 감독은 올 시즌 중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지도자 생활을 접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이로써 50년 넘게 이어진 야구 지도자 경력에 공식적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16.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구단 경기 정규 리그 최종 순위
1982 OB 베어스 7 5 2 0 [감독]
1984 100 58 41 1 1위[182] 3위[183]
1985 110 51 57 2 4위[184] 4위[185]
1986 108 56 48 4 4위[186] 4위[187]
1987 108 55 52 1 4위[188] 4위[189]
1988 108 54 52 2 5위[190] 5위
통산 541 279 252 10 ­
연도 경기 정규 리그 최종 순위
1989 태평양 돌핀스 120 62 54 4 3위 3위[191]
1990 120 58 59 3 5위 5위
통산 240 120 113 7
연도 구단 경기 정규 리그 최종 순위
1991 삼성 라이온즈 126 70 55 1 3위 3위[192]
1992 126 67 57 2 4위 4위[193]
통산 252 137 112 3
연도 구단 경기 정규 리그 최종 순위
1996 쌍방울 레이더스 126 70 54 2 2위 3위[194]
1997 126 71 53 2 3위 3위[195]
1998 125 57 66 2 6위 6위
1999 81 17 59 5 8위[196] -
통산 458 215 232 11
연도 구단 경기 정규 리그 최종 순위
2001 LG 트윈스 98 49 42 7 6위 6위
2002 133 66 61 6 4위 준우승[197]
통산 231 115 103 13 ­
연도 구단 경기 정규 리그 최종 순위
2007 SK 와이번스 126 73 48 5 1위 우승
2008 126 83 42 0 1위 우승
2009 133 80 47 6 2위 준우승
2010 133 84 47 2 1위 우승
2011 93 52 41 0 3위[198] -
통산 610 372 231 13 ­
연도 구단 경기 정규 리그 최종 순위
2015 한화 이글스 144 68 76 0 6위 6위
2016 132 64 65 3 7위 7위
2017 43 18 25 0 9위[199] -
통산 319 150 166 3 ­
총계 2651 1388 1203 60 ­


[1] 하지만 실제 경력을 살펴보면 OB 시절과 삼성 시절은 나름 상위권 전력으로 분류되었음에도 성적을 내는데 실패하였다. [2] 여기서 반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이다. 당시 선수들이 도망가서 잡으러다니기 바빴다는 내용이 김성근 본인의 인터뷰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3] 기존 서술에서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서울로 바로 상경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해당 기사를 비롯한 어디에도 그와 관련된 서술을 찾을 수 없다. 찾는다면 수정 바람. 그리고 애초에 위의 서술처럼 마산상고 감독 시절에도 정식 감독이 아니라 기업은행 마산 지점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겸임했던 거라, 기업은행 내에서 코치로 발령된 거라면 당연히 바로 상경하는 것이 당연하다. [4] 당시 배수찬은 기업은행 타격코치를 맡고 있었다. [5] 기록마다 다른데, 1971년이라는 기록과 1972년이라는 기록이 있다. [6] 이 사건 이전까지 배수찬은 김성근과 아주 절친했던 사이였다. 일본에서 사회인야구팀을 전전하고 있던 김성근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시켜준 이가 바로 배수찬이었다. 이듬해에는 김성근과 함께 기업은행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김성근이 오효순과 결혼을 하고 싶어했으나 한국말이 서툴어 고민하고 있을 때 직접 나서서 2:1로 장인과 술을 마시며 결혼을 설득했던 이도 배수찬이었다. 지방 마산상고에 있던 김성근을 기업은행 투수코치로 영입한 이도 바로 배수찬이었다. [7]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는 장호연. [8] 당시 기업은행 대리 월급이 15만원 수준이었다. 계약금 600만원은 당시 기준 집 한 채 수준의 값이었다. [9] 삼성 라이온즈 원년 멤버를 보면 경북고, 상원고, 대건고 출신이 엇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대건고 야구부가 해체된 직후 대구고에 야구부가 창설되면서 대구 3대 야구 명문고를 이룬다. [10] 당시 신일고에 역전패한 후 조범현이 ‘우리 대학 우째 가노’ 하며 통곡하였다고 전해진다. [11] 기존 대건고와 철도고에서 뽑아왔던 선수들이 1학년까지 다 졸업했단 이야기다. [12] 당시 신일고가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고는 하지만 충암고와 창단 시기가 그리 다르지도 않고, 양쪽 다 황금사자기와 봉황기를 우승한 명문이었다. 기존 서술에는 신일고에 욕심을 내서 이적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계약이 3년이나 남아 있어 계약금을 토해내야 했던 상황, 전력상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 엎치락뒤치락 했다는 것들을 감안하면 정말 별뜻 없이 농담했다가 일이 커졌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13] 4강은 2회 기록하였다. 그리고 임기 마지막해인 1981년 메이저 대회는 아니지만 화랑기에서 우승했다. 때문에 훗날 신일고 시절도 우승 감독으로 김성근의 커리어에 언급된다. [14] 당시 강혁 또한 OB 베어스와 한양대 양측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고, 처음에는 OB로 가기로 계약하고 입단식까지 마쳤으나 한양대 스카우트 시 같이 진학이 약속된 동기들과 부모의 회유에 마음을 돌려 한양대로 입학하게 된 것. 이 과정에서 OB 베어스가 괘씸죄를 들어 이중계약을 탄원했고, 강혁은 KBO에서 영구제명되어 대학 졸업 후에도 2년이나 지난 1999년에 이르러서야 프로 선수 자격이 복권될 수 있었다. [15] 이재홍은 결국 건국대로 진학했고, 프로에서는 MBC와 쌍방울에서 4시즌 동안 87경기에서 7승 17패 2세이브 ERA 5.67이라는 그저 그런 기록을 남기고 31살에 은퇴했다. 당시에 대졸 선수들이 길어야 10년 뛰고 은퇴하는 것을 감안하면 아주 못 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마 시절에 비해서는 한참 실망스러운 성적. [16] 당시 임신근이 삼성 투수코치 겸 선수로 정해져 있었지만, 서영무 감독은 김성근을 비롯하여 조창수, 유백만 등과 접촉하며 프런트의 의지가 아닌 자기만의 코치진을 구성하려 노력하였다. [17] 당시 이호헌 또한 이미 OB의 상황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좋은 소식이 갈 거라며 김성근을 달래서 보냈다고 전한다. [18] 번호 폰트와 두산그룹 로고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당시 사진은 아니다.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3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에 우승 멤버들을 모아 찍은 사진이다. [19] 4월 12일 따귀 사태 이후 5월 12일 맞붙었을 때는 OB 계형철과 삼성 김일융이 각각 상대에게 빈볼을 던지며 난투극이 발발했으며, 5월 14일 OB 양세종이 삼성 천보성의 머리를 태그하자 이를 무례한 행동으로 생각하고 반발한 삼성 측이 크게 항의하고, 삼성 팬들도 OB 선수들에게 병과 깡통을 집어던지면서 OB 구천서 선수가 그에 얻어맞아 이마가 붓고 코가 찢어져 병원에 실려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6월 2일 OB 1루 주자 이홍범이 삼성 유격수 오대석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렸다. [20] 김성근 감독은 이후에도 리그 규정에 따라 최고 성적을 거두고도 2위에 그치며 우승에 실패하는 경험을 또 하게 되는데, 바로 2009년이었다. 당시 SK는 무를 패배와 동급으로 기록하는 리그 규칙에 말려 기아 타이거즈에게 1위를 내주었고, 결국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장장 4시간 27분의 혈투 끝에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우승을 내주게 되었다. [21] 시리즈 종료 이후 삼성 구단은 져주기 게임에 대한 그룹 감사를 받았다고 하며 코칭스태프들은 져주기 게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단체 사표를 제출했는데 당시 구단주였던 이건희 회장이 총대메고 책임 지려고 하는 모습을 높이 사서 오히려 사표를 반려시키고 해외 전지훈련을 보내줬다고 한다. 다만 삼성은 이후 마치 저주에 걸린 듯 2002년 한국시리즈 전까지 단 한번도 한국시리즈에서 승리를 못하며 우승에 실패하였는데, 이를 일명 달구벌의 저주라고 부른다. [22] 사실 정식으로 무기명투표를 했거나 거수로 표를 헤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 감독을 신임한다는 쪽에 손을 든 사람은 이태현 홍보과장과 정진구 운영차장 뿐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와 투표 결과는 김성근 감독의 귀에 그대로 들어갔으며, 심지어 이태현 홍보과장과 정진구 운영차장은 이후 OB 구단에서 경질되었다. [23] 박용곤 구단주는 김성근이 88년1월15일 창단기념식장에서 구단중역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이, 성근이. 사람은 하나님이 오라고 오고 아직 남아 있으라면 남아 있는 거야. 너도 마찬가지야. 내가 가라고 하기 전에는 가서는 안돼. 알았어?"하고 웃으면서 말해 절대 신임을 보여줬었다. 이에 감읍한 김성근은 평생 OB를 떠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24] 실제로 이후로도 둘의 관계는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히어로즈 감독 말기에 시즌이 끝난 후 김성근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히어로즈와 SK와 연습경기를 가지려고 했으나 구단주 이장석의 주도로 감독에서 해임되어 이는 취소되었다. 이 때 "약속이 어긋나 (김성근) 형님에게 죄송하다는 전화를 드렸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일화도 있다. 또 해임될 당시에는 김성근 감독이 이끌고 있던 SK와의 3연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 때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면서 말하기를 한 3번은 더 짤려야 형님처럼 좋은 감독이 될까요라고 우스갯소리로 물었다고. [25] 이광환 감독은 당시에 대해 최근 "그 당시에는 내 소신껏 선수를 키워내고 싶었다. 김감독이 어떻게 받아들이건 내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분의 입장을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도 OB를 그만두고 물러나왔을 때 그 분이 얼마나 어려운 입장에 몰려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26] 당시 김성근 감독은 경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한다는 쪽이었고, 이광환 감독은 경기 전에는 되도록 가볍게만 먹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오늘날로 보면, 이광환 감독 쪽이 맞는 의견이다. 같은 시기 김성근 못지않은 강성 지도자로 유명했고 사적으로도 김성근과 매우 친했던 김동엽은 의외로 식단에 관해서는 이광환과 궤를 같이하는 과학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27] 이광환은 훗날 감독이 되고 나서 코치에게 그런 권한을 부여했다. [28] 심지어 당시 OB에서 김우열은 김성근 감독 라인으로 분류될 정도로, 둘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당시 OB는 김성근 라인과 이광환 라인으로 구분된다고 외부에서는 보고 있었는데, ‘김성근계’는 김우열, 계형철, 박상열, 조범현이 대표적이었고, ‘이광환계’는 박철순 김광수 김경문 김형석 등이었다. # [29] 다만 첫해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뿐이지 이후로도 윤석환은 꾸준히 활약하였다. 1985년 5승 1패 6세이브 3.34를 기록하였으며, 1986년에는 선발 전환 후 2승 4패 3.33, 1987년 7승 8패 2세이브 3.94를 기록하였다. 초특급 에이스는 아니지만 팀의 3-4선발 수준으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며 1986년을 제외하면 매년 100이닝 이상을 소화하였다. 기존 서술처럼 완전히 무너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편. [30] 이후 계형철은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부터 삼성 라이온즈 2군,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까지 김성근 감독과 함께한 대표적인 김성근 사단 코치로 그 관계를 이어나갔다. [31] 해당 기록은 박철순, 김시진, 선동열, 이상훈, 최일언 총 5명만 가지고 있는 기록이다. [32] 박노준의 실패는 사실 김성근만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김성근이 이도류 기용을 제안하기는 하였으나 박노준 스스로도 이도류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박노준 스스로도 당시 자신은 혹사를 당했다고 인정하였으나, 김성근 과의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 오히려 사실상 퇴물 취급을 받던 박노준을 마지막까지 기용했던 것이 김성근 당시 쌍방울 감독이었고, 이후 SK의 김성근 경질 사태 당시 가장 SK 프런트를 비판했던 인물 또한 박노준이었다. [33] 뒷날 김 감독은 ‘안 된다’를 ‘된다’로 잘못 알아들었다고 해명했다. [34] OB 베어스는 당시 2군 시스템을 KBO 최초로 도입하는 등 구단의 체계가 비교적 훌륭하게 짜여 있는 팀이었다. [35] 김성근은 이때 이미 20년 넘게 한국에서 야구인으로 지냈기 때문에 한국어가 유창했다. 그런데 굳이 일본어로 쓰인 계약 조건을 내민 건 대놓고 배째라 식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36] 당시 태평양은 구단에서 선수를 수시로 불러 선수단 분위기를 파악하는 일이 잦았으며, 코치가 감독에게 와서 “사장님이 감독님을 보자고 하신다”며 중간다리 역할도 했다. 김성근은 농구의 신동파가 태평양 감독 시절 이런 일에 당했다는 얘기도 익히 알고 있었다. [37] 당시 박상열은 코치진이 아니라 현역 선수였으나, 구단의 정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38] 정진구 차장은 OB 베어스 회식 자리에서 벌어진 김성근 유임 투표 때 김성근의 편을 들었던 유이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39] 광고에 나오는 모습과 달리, 실제 오대산 극기 훈련 때 김성근 감독은 시즌 구상을 위해서 선수들을 따라가지 않고 숙소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선수단의 불만이 팽배했다. [40] 저니맨으로 유명했던 선수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김성근 사단에 합류,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와 SK 와이번스를 거쳐 심지어 김성근 감독 은퇴 후 최강야구 출연까지 김성근 사단의 중심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41] 이는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생 팀들 중 구단 지원이 유달리 빠방했던 빙그레 이글스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다 한번씩은 거쳤던 과정이었다. [42] 아니나 다를까 김성근은 구단의 훈련 비용 미지급을 빌미로 첫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프런트와 갈등을 빚는다. [43] 하지만 그 과정에서 김일권은 생애 첫 3할 타율을 기록하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으며, 1989 시즌 62개의 도루를 기록, 자신을 밀어낸 해태 이순철과의 도루 경쟁에서까지 승리하며 도루왕을 되찾아왔다. [44] 이후 코시 진출 [45] 당시 투수 3인방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훈련량과 맞춤형 지도가 덧붙여진 결과였다. 우완 정명원과 좌완 최창호는 구위는 좋았지만 컨트롤 부족이 문제였다. 포수의 미트가 고정된 상태에서 공을 던지게 했다. 공이 미트를 벗어나면 벌칙이 주어졌다. 잠수함 박정현은 스트라이드를 하는 앞다리. 즉 왼발의 스텝에 포인트를 뒀다. 여기에다 박상열 2군 투수코치가 붙어 매일 목욕탕에서 물밑으로 팔을 2000번씩 휘두르는 훈련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우완 정통파. 좌완. 잠수함의 완벽한 삼각편대가 위력을 발휘했다. [46] 충격적인 것은 이렇게 많은 이닝을 던졌음에도 당해 정규 시즌 소화 이닝 2위를 기록하였다. 1위는 250이닝을 기록한 롯데의 윤학길. [47] 정규시즌 126경기, 홈경이 63경기 [48] 이는 이후 2000년대 선수협 등장 후 마무리 훈련 문제로 구단과 선수단 층의 충돌로 이어졌다. [49] 다만 여기서 김성근 감독이 그걸 요구할 거라면 구단이 돈을 내주지 않는 상황에서 선수들이 아니라 감독 본인의 자비를 들였어야 한다는 비판도 있는데, 김성근 본인도 자신의 참가에 대해서는 자비를 들였고 실제 이 사례를 제외한 많은 훈련에서 1세대 올드 스쿨 감독들이 자비를 들이는 건 흔한 일이었으며 김성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교 감독 시절에도 그런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기에 자비를 들이지 않은 이 훈련이 독특한 상황인데, 이는 그 방법이 옳은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전술하였듯이 선수들이 우선 자신을 증오하면서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오히려 자비를 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는 편이 맞다. [50] 김성근 감독은 이 당시 일을 회상하며 임호균이 구단에 의해 강제 은퇴당하는 상황을 막으려 했다고 주장하였으나, 임호균의 증언으로 이는 사실이 아니고 임호균 스스로 은퇴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51] 장명부의 승수에 따른 연봉차감 각서, 당시 고관절 질환을 앓았던 김재현 각서 사건 등 [52] 아예 출전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고, 중간계투로 7경기 등판,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4.60의 성적만 남겼다. [53] 신동관 회장은 1982년부터 1983년 실업여자 농구연맹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본래부터 여자농구 쪽 활동에 주력하다가, 그 경험을 토대로 야구단 운영을 맡았던 케이스였다. 이후 신동관 부회장은 1995년 한국여자실업농구연맹 회장에 선출되었다. [54] 1991년부터 8개 구단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박영길 감독 시절의 5위는 김성근 감독 시절인 1990년의 5위보다 높은 상대 등수이다. 다만 승률에서는 김성근 감독 시절에는 0.496, 1991년 박영길 감독 시절에는 0.444로 5푼 이상 하락하였다. [55]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메이저리그 야구를 배우라는 의미에서 구단이 주선한 이 합동훈련 일정을 반으로 줄이자고 주장했다. 이만수때도 그렇고 미국야구에 열폭하는 게 취미인가보다 [56] 일반적으로 서정환보다 평가가 비슷하거나 더 낮다. 다만 망가뜨린 선수가 노장인 김성길이다 보니 서정환이 망가뜨릴 뻔한 임창용보다는 주목도가 낮은 편. 삼성 감독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평이 처참하다. 거기다 이후 김성근이 삼성과 적대하는 스탠스를 보이는 바람에 이강철 못지않을 정도로 삼성 팬덤이 싫어한다. [57] 물론 김성근은 프런트에게 아부성 기사를 내서 신임을 받아 감독이 팀을 휘어잡는 방식을 선호하지만 홍준학 체제의 현 삼성은 롯데식 프런트 야구를 추구하는 구단이다. [58] 실제로 태평양 시절부터 김성근 감독이 팀을 처음 맡으면서 데려온 선수들은 리그에서 상위에 이르는 선수들이 아니라 이처럼 이미 선수 수명이 끝났다 싶은 나이 든 노장들이 대부분이었다. FA까지 선물받은 한화 시절이 좀 특이한 경우였지만, 그조차도 김성근 감독 부임 이전에 받은 정근우, 이용규 정도를 제외하면 이미 한물 갔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들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뎁스 강화와 필요한 순간 한건씩 해주는 베테랑의 영입이라는 평가와 함께, 제자들 연금 보험 마련해주는 거 아니냐는 논란이 함께 있다. [59] 다만 김성래의 경우에는 후에 김성래가 노쇠화로 인해 삼성에서 방출당하자 쌍방울로 불러서 현역 생활을 연장하게끔 도와준 바 있다. [60] 다만 이 주장은 2013년과 2014년 국가 대표팀의 전력분석원이 다름아닌 김정준이라는 것 때문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평소에 사이 안좋던 지도자들끼리도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를 맡은 동안에는 휴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진실은 저 너머에. [61] 다만 이만수의 수비 능력에 대해서는 실제로 논란이 많기는 했다. 김영덕, 김응룡, 심지어는 백인천 등의 감독들은 팀의 공격력을 믿고 이만수가 1이닝이라도 더 수비를 하게 하려고 투수에게 배팅볼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있고, 김성근 또한 이만수는 단순해서 상대팀 감독으로 상대하기 편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심지어 이만수 팔꿈치 근육을 보고 사인을 알아차렸다는 말까지 한 바가 있다. [62] 이후 훗날 SK에서 구단의 차기 감독으로 내정된 이만수에 대한 대우와 SK 감독에서 물러난 뒤 이만수를 언급하며 "예의가 없다(???)"고 인터뷰를 하는 등 둘의 관계는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이미 SK의 내홍의 뿌리는 8,90년대부터 깊어왔던 것. [63] 김성근 부임 전인 1990년 평관 7222명, 김성근 퇴출 후 1993년 평관 8557명인 팀이 김성근 시절만 5680명, 5011명으로 관중 동원에 블랙홀이 생겼다. 성적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게 역대 최악의 성적을 내던 1차 암흑기 시절인 556시절에도 평관은 8천명, 9천명, 7천명대로 김성근 시절과는 비교 할 수도 없이 인기였다. 그냥 삼성 시절 김성근 자체가 선동열마냥 인기가 엄청나게 없었다. [64] 실제로 1992년의 롯데는 우승팀이고 박동희는 롯데의 우승에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시점의 삼성에게는 당연히 알 수도 없고 중요한 것도 아니다. [65] 2000년대 SK 왕조를 경험한 최근 팬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과거의 편린이다. 실제로 야구계에서는 2000년대 들어와서도 '우승할 수 있는 감독'이라거나 '승운이 따르는 감독' 등은 따로 있다는 인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희수 류중일이 대표적. [66] 나중에 해태에서 나올때는 김응용 감독의 비결이 뭔지 궁금해서 봤는데 아무리 봐도 이해를 못하겠으니 나왔다고 말했다. [67]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문성록( 문선재의 부친)은 1990년에 2군이 생기면서 본인이 2군 매니저를 맡았다고 했다. [68] 구단이 기아자동차에 인수되고 한참후에야 제대로 된 2군 시설이 갖추어졌다. 현재 2군 함평 클럽하우스는 국내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 [69] 나중에 김성근이 삼성 라이온즈에서 2군 감독을 하던 시절, 김응용이 삼성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그때는 단번에 김성근을 경질했다. [70] 김응용은 1940년생인 장훈과 친구로 지내는데, 김성근은 장훈을 선배로 모신다. [71] 호적상 1942년생이다. [72] 이호준은 연세대에 입학하기로 하고 연세대 숙소에 입소했으나 엄격한 분위기와 욕설 등을 접하고 연세대 입학을 번복하고 해태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해태 입단 후에도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놀러다니는 등 자주 숙소를 이탈하여 경찰인 부친까지 이호준을 잡으러 다니는 등 초년병 시절이 파란만장했다. 본인 말로는 오랜기간 잡히지 않았던 이유로 밖에 돌아다니지 않고 방안에서만 지냈기 때문이었으며 결국 잡혀서 숙소로 갔다. 동갑내기 김재현(LG)의 신인 첫 20-20 달성 시 20호 홈런을 허용하여 코칭스태프의 눈총을 샀다. [73] 호랑이 같은 카리스마로 유명한 김성한 코치가 장성호와 이호준과 같이 짬뽕 한 그릇 먹고 훈련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장성호와 이호준은 지금도 김성한을 어려워하며 선수생활의 은인으로 모시고 있다. [74] 임창용의 놀기 좋아하는 성격은 당시 2군 시기로 어느 정도 다잡아졌지만, 결국 커리어 막판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을 터뜨리면서 제 성격 어디 안 간다는 걸 보여주고 말았다. [75] 후일 김성근 감독이 밝히기를, "창용이가 밖에 있는 거 같았는데 어느 순간 조용해져서 진짜 간 줄 알고 쫓아가야 되나를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76] 본인 말로는 무릎 꿇고 앉아있던 임창용에게 일본 사탕 하나 주면서 다독였다고 한다. [77] 항상 살 빼는 것을 강조했던 김성근 감독으로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화이다. [78] 그런데 바로 이듬해 김성근이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으로 부임해서 96,97 2년간 해태와 페넌트레이스 1위 경쟁을 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날카로운 칼을 벼려준 격이 되었다.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알 수 없는 법이다. [79] 1940-1950년대 야구 선수 출신으로, 대한야구협회와 한국프로야구 창단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한명이다.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에 재직하기도 하였다. [80] 김봉연은 해태에서 수석코치를 역임하고 있었다. 김응용의 후임 감독을 꿈꿨으나 지휘봉은 고교-팀 후배인 김성한에게 넘어갔다. [81] 1995년 선수층을 보면 삼성에서 온 김성래와 김실, 해태에서 온 박철우와 백인호, 태평양의 박정현, OB 출신의 김광림와 박노준, 신경식 등 전성기에 한가닥씩 하다가 노쇠화와 함께 쌍방울로 밀려나간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팀 베테랑들이 이 상황이니 신인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가던 것이 당시의 쌍방울이었던 것. [82] 이종두, 한대화 등이 이때 유입되었다. [83] 1997년 쌍방울 선수들의 연봉 순위를 보면 김기태 1억 100만원, 김광림 9천만원, 조규제와 한대화 각 8천만원, 박경완 7700만원, 최태원 7300만원, 성영재 7200만원, 오봉옥, 김성래, 김실 각 6500만원, 이종두 6400만원, 김성현, 박노준 각 6200만원, 김원형, 박성기 각 5800만원, 김호 5600만원, 심성보 5000만원 등이다. 잘 보면 김성근 감독이 선임되기 전인 1995년 기준으로 봐도 새로운 이름이 그리 많지가 않다. 즉 당시의 연봉 페이롤 1위는 의외로 신규 선수의 유입이 아니라 기존 선수 연봉이 크게 오른 것에 비롯된 것이 컸다. 보통 돈질이라 하면 상위 선수를 사오면서 페이롤이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데, 당시 쌍방울의 페이롤 1위는 그거와는 맥락이 굉장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 기준 고액 연봉이라 볼 수 있는 5천만원 이상 18명(현대 16명, 해태 10명)으로 당시 기준 해당 선수들에게 성적 대비 오버 페이가 지불된 것이라고는 생각할 여지가 있으나, 쌍방울의 벌떼 야구 플레이 특성상 주력 선수의 수 자체가 많은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해당 자료는 허구연, 프로야구 핸드북 97 참조. [84] 이 장면을 기억하는 야구팬들은 이후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몇년간의 모습과 히어로즈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벌인 행동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였다. 재정 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미국 플로리다주 브래던튼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85]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정수와 최해식이 술회하기를 현대는 인천 출신 심판의 지원을 알게 모르게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86] 이전까지는 해태의 기반을 약화시킬려고 쌍방울을 창단했다는 말까지 나돌았을 만큼 전주시 내에서의 인기도 별로였다. 그러나 1996년부터는 구단 사상 최초로 평균관중 4천명을 돌파했고, 주말 쌍방울 홈경기는 표를 구하는 게 전쟁인데다 위에 나온 대로 암표까지 등장했다. 김성근 감독이 오고 성적이 오르고나서야 비로소 연고지에서 해태의 인기를 누르는데 성공한 것. [87] 이것에 대해서는 묘한 소문이 존재하는데 전주에 원정 온 팀의 선수들이 묵는 원정숙소에 귀신이 나타나서 원정팀 선수들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결국 경기력 저하로 패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귀신의 존재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이런 소문 때문에 원정팀 선수들이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것은 사실인 듯. 예전 모 방송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었고 김성근 감독도 이런 소문을 들었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88] 류현승은 초반에 커리어 하이 페이스로 나가다가 10경기만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다. 즉 시즌 아웃 시기를 제외하면 모두 선발로만 출장하였다. [89] 정말 선발-불펜 없이 닥치는대로 투입된 시절은 당시 전성기가 아니라 쌍방울이 몰락한 1998-1999 시즌이었다. 이때는 정말 어떻게든 짜내서 싸우던 시절. [90] 오봉옥은 1995년 삼성에서 135 1/3이닝 2.90의 자책점으로 준수한 성적을 올렸으나, 12월 음주운전으로 동승자가 사망하는 대형사고를 치면서 삼성에서 방출당하였다. 김성근은 이런 오봉옥을 데려와 쌍방울에서 성공적으로 활용하였다. [91] 후에 스톡킹에서 회고하기를, 5회가 끝나기 이전에 이기고 있는 경기에 등판해 승리를 챙긴건 많아야 3게임이고, 대부분은 비기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타자들이 역전해줘서 챙긴 승리라고 한다. [92] 다만 당시 선수들 기준으로 36세 은퇴는 그렇게 이른 기록은 아니다. 또 이후 커리어가 무너졌다기에는 1997년 기록이 너무 압도적이라서 그렇지 2003년 은퇴 직전까지 63경기 8승 13홀드 85 2/3이닝 2.00 자책점을 기록하며 결코 나쁘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93]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준환은 김성근의 감독 경질 당시 모종의 사건이 있었으나 밝힐 수는 없다고 말했다. [94] 박재홍과는 훗날 SK에서 재회하게 된다. [95] 당시 1군 코치였지만 계형철은 대표적인 김성근 사단 코치 중 한 명이다. 실제로 배영수가 깨지고 난 후, "성근이 형한테 전화해놨으니 2군 가서 죽어봐라"하고 농담하기도 했다. [96] 혹자는 이를 혹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배영수 본인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사실 이처럼 스프링캠프나 훈련 중에 많은 공을 던지는 것에 대해서는 혹사인가 아니면 훈련으로서 당연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보통 일반인이나 통계 등을 따지는 전문가들은 혹사로 보고, 오히려 선수들은 혹사로 보지 않는 경향이 많은 편. [97] 다만 2000년 김성근 감독의 영향으로 1군급 투수로 올라선 것은 맞지만, 하체 훈련은 이후 2004년 이전 선동열의 영향으로 더욱 크게 발전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배영수는 삼성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성장하였다. [98] 2000년 플레이오프에 올라간 것으로 꽤 좋은 성적을 거둔 것처럼 묻히지만, 이는 당시의 양대 리그 제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 당시 매직 리그 1위였지만 드림리그 3위 삼성보다 승률이 낮았기에, 단일 리그 기준으로는 4위 수준의 성적. 동시에 팀 장악에도 실패하여 김용수, 최향남 등이 항명하기도 했고, 서용빈은 보내기 번트 지시에 반발하여 팀을 이탈하기까지 하였다. [99] 김성근 감독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항상 등장하는 내용은 정말 그 팀이 그렇게 약했느냐에 대한 내용이고, 그 과정에서 꼭 나오는 것이 선수들의 이름값이다. 하지만 어떤 선수도 항상 커리어하이의 성적을 내지 않으며, 노쇠화, 부상, 슬럼프 등 다양한 변수들이 있다. 김성근 감독에 대해 항상 따라다니는 혹사 등으로 김성근 감독이 부상을 일으켰다면 그건 김성근의 탓이 맞다. 그러나 이름값만 보고 왜 이 선수들 가지고 하위권이냐 하면, 그건 올바른 비판이 아니다. 우선은 당시 상황상 선수들이 어떤 상황인지를 좀 더 냉정히 판단하고, 그 선수들이 어느 시점에 활동했고 어느 시점에 활동하지 못했는지 또한 냉정히 판단할 때 비로소 비판이건 옹호건 정확한 내용이 나올 것이다. [100] 다만 유지현의 경우 원래부터 선수협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반 선수협 결성 당시에는 김기태(당시 삼성 주장, 역시 선수협 5적으로 지목되었다), 송진우, 박정태, 양준혁, 최태원과 함께 선수협 결성에 찬성한 편. 하지만 양준혁, 강병규 등 급진강경파가 아예 노조까지 주장하자, 김기태와 함께 노조 설립에 반대하며 친목 단체 성격으로 창립하여 구단 인정부터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온건 세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강경파와 온건파가 극렬하게 충돌, 온건파였던 유지현, 김기태는 결국 기존부터 선수협을 반대하던 이호성, 김경기, 김태형 등과 함께 선수협 반대 노선의 중심 축이 된다. 다만 나중에 선수협이 어느 정도 안착하자 본인이 주도하여 팀원을 선수협에 전원 가입시켰던 것만 봐도 구단과의 싸움을 걱정했던 것일 뿐, 선수협을 마음 깊이 반대하는 쪽은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101] 당시 선수협 5적으로 지목받은 선수 중 유지현이 가장 온건파였고, 실제로 당시 LG 주장이었던 유지현은 일단은 선수단을 데리고 선수협 창립총회에 갔으나 기회를 봐서 중간에 선수단을 데리고 나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후배였던 이병규의 후일담에 따르면, 당시 LG 선수들은 선수협을 반대하는 유지현과 선수협 핵심 멤버였던 김재현과 양준혁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으며 심정적으로는 선수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LG 선수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유지현은 결국 선수들을 데리고 나오기로 결심했는데, 선수협에 적극적이었던 김재현을 제외한 나머지 LG 선수들을 전부 데리고 나와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입단 동기였던 유지현과 김재현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되며, 이 둘의 관계는 거의 2019년 1994년 우승 멤버들 모임쯤에 와서야 회복되었다. [102] 당시 로마이어는 김성근 감독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지만, 김성근 감독 대행은 끝내 퇴출 지시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103] 이광은 감독 입장에서는 김용수가 껄끄러울 만도 했던 것이, 둘의 나이 차이가 고작 5살이었다. [104] 다만 김용수는 이 시기의 김성근과는 관련이 없었으나, 김성근 경질 이후 구단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김성근의 아이들이라 불리던 선수들에게 가혹하게 대해 은퇴를 종용했다는 증언이 있다. # [105] 2001 시즌 당시 김성근 감독대 행의 실제 승률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2002년보다 더 높았다. [106] 다만 양준혁의 우익수 임명은 5월 12일부터 시작되긴 하였다. [107] 당시 서용빈의 기용은 수비를 중시하는 김성근 감독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보였다. 김성근 감독은 커리어 내내 보통 공격보다도 수비를 중시하는 행보를 보여줬으며, 서용빈의 1루 수비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또한 같은 이유로 돌글러브로 유명했던 김재현은 우익수로 더는 기용되지 않고 좌익수 붙박이로 고정되었으며, 역시 수비력이 떨어지던 로마이어도 지명타자로 고정시키다가 결국 코치진과의 마찰 끝에 퇴출시켰다. [108] 선발/불펜을 오갔던 것이나 마구잡이로 기용한 것은 기본이었고, 페넌트레이스 내내 마무리를 5번이나 바꾸었다. 이해 LG의 국내 투수 선발등판은 김용수의 18회가 최다로, 해리거를 빼고는 붙박이 선발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 속에 김용수를 위시로 한 투수단 항명 사태까지 일어났다. [109] 이해 LG의 국내 투수 선발등판은 김용수의 18회가 최다로, 해리거를 빼고는 붙박이 선발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다. [110] 이 때 같은 LG그룹 산하의 축구팀 최용수와 맞짱을 뜨려 했는데, 최용수가 신윤호를 보고 쫄아서 도망쳤다는 카더라가 있다.(참고로 최용수도 축구계에서 한 주먹 하는 걸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당사자인 신윤호 본인은 최용수랑 싸웠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이를 부정했으나 자동차 부순 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술에 취해서 숙소에 들어오다가 앞을 막으니 누구 차인지도 모르고 손상시켰다고... [111] 정확히는 술에 취해서 축구팀과 야구팀이 같이 쓰는 구리 숙소에 왔을 때, 주차된 차들을 지나가다가 앞이 막히니까 백미러를 손으로 밀어 부러뜨리고 지나갔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술에 취해서 돌아가다가 차가 막길래 손으로 밀고 간 건데 그게 누구 차인지 어떻게 아냐고? [112] 선발 등판은 겨우 4경기에 불과했다. [113] 신윤호의 통산 승수는 28승이다.(…) [114] 하지만 신윤호의 투수 골든 글러브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 특히, 2012년까지 리그베다 위키에서 투수 골든 글러브 수상이 누락되어 있었던 선수는 신윤호가 유일하다. [115] 당시 중하위권 경쟁은 역대급으로 치열했는데, 4위 한화부터 8위 롯데까지의 승차가 고작 2경기 차이였다. 삼성이 압도적 1위, 현대가 7경기차 2위를 기록한 상황에서 두산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이 거의 고만고만한 성적을 거둔 것. 특이한 점은 당시 LG는 8무를 기록, 전 팀을 통틀어 승은 가장 적은데도 6위를 기록했다. [116] 다만 5월이면 아직 시즌 초반기이고, 당시 시즌은 4위 두산부터 7위 LG까지 2경기차이로 박빙인 상황이었다. [117] 유달리 이 시기 LG의 4강을 턱걸이라고 부르는 말이 많지만, 실제로는 8월에 이미 4위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2경기 차이의 4위였던 만큼 그렇게까지 턱걸이는 아니었다. 다만 막판까지 치열하게 중위권 다툼이 계속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118] 이마저도 만자니오와 최원호는 평균자책점이 4점대였다. [119] 당시 서용빈은 2001년 소송에서 패한 후 단 하나 남은 희망이었던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참가를 위해 야구에 매진하였다. 팀의 주장을 맡게 된 2002년 초반에는 3할을 넘나드는 타격을 보여주며 2002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 승선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최종적으로는 이승엽, 장성호에 밀려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그 후에 모든 것을 놔 버렸는지 힘빠진 타격을 보여주다가 최소한 시즌만이라도 끝내고 입대하게 해달라는 LG 구단의 요청도 병무청으로부터 거절당하며 리그 중반 공익 근무 요원으로 입대하기에 이른다. [120] 당시 김재현의 부상은 경기나 훈련 중의 부상이 아니라 희귀병인 대퇴골두무혈괴사증에 따른 부상이었다. 이는 김재현의 선수 생명마저 위협한 최악의 질병이었다. [121] 이때의 인터뷰로 김성근의 별명으로 야구의 신이란 뜻의 "야신"이란 별명이 생겼다. 그러나 김응용이 직접적으로 야신이라고 말한 적은 없으며, 오히려 "저는 야신이라고 안하고 그냥 신이라고 했었는데...신도 여러가지 신이 있잖아요."라고 껄껄 웃으며 김성근 감독을 물먹이는 듯한 인터뷰를 농담삼아 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인터뷰는 준우승한 상대팀 감독이었던 김성근 감독을 추켜올리며, 동시에 그 사람을 이긴 자신도 올리는 말에 가까웠다. 오랜 기간 김응용 감독과 싸워온 만큼 그 스타일을 알고 있던 김성근 감독 또한 그 진의를 꿰뚫어 보았으며, 이후 인터뷰에서 자기가 신이면 자기를 이긴 김응룡 본인은 뭐냐고 말하기도 했다. [122] 그때의 3루 코치는 김용국이었다. [123] 2002년 시즌부터 새로 부임한 어윤태 사장은 1994년 우승 당시 단장이었는데 LG 야구의 캐치프레이즈인 '신바람 야구'의 신봉자였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팀의 상징인 신바람 야구를 폄하하는 발언을 해가면서까지 번트 위주의 스몰 야구를 펼쳤던 김성근의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24] 다만 여기에 대한 반론을 하자면 당시 LG 프런트는 양준혁을 잡기 위해 일정 금액을 제시했으나, 본인이 먼저 36억을 부르며 협상을 파토냈다. 이후 선수협 관련으로 인해 전 구단에게 찍혀 FA 미아가 될 위기에 놓였으나 해태에서 잠시 함께했던 김응용 감독이 거둬들여 친정팀 삼성으로 가게 된다. [125] 김우석 선발은 김성근 감독이 2군 감독 시절부터 상무에서 뛰던 김우석을 좋게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이도 나이고 타격도 2군 리그에서 2할대를 찍을 정도로 영 시원치 않았던 선수인 만큼, 2차 1라운드에서 지목할 정도의 선수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김성근 감독의 지목을 핑계로 엿먹어보라면서 지목한 LG 프런트의 행패로 보는 경우가 많다. [126] 이 시기의 추억도 있고 해서 김재현과 김성근의 사제 관계는 굉장히 돈독한 편이었으나, 후에 SK에서 만났을 때는 플래툰 기용 문제로 굉장히 악화되기도 하였다. 김재현 스스로도 김성근 감독은 자신에게 시련과 영광을 준 분이라며 애증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 [127] 당시 김성근 감독 본인이 투수 리드 등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는 코멘트들이 자주 기사화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 비판이 부각된 건 이순철 시대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 [128] KT 위즈의 합류로 10구단 체제가 되어 자연히 규정이닝이 늘어난 2015년 때부터의 기준을 적용하여도 규정이닝 충족이다. [129] 다만 훗날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해 이를 언급했을 때에는 지금은 나올 수 없는 기록이라고 말하기는 했다. [130] 장문석 또한 2008년 사실상 LG에서 방출된 후 김성근 감독의 SK로 가서 재기를 노렸다. 이처럼 김성근 휘하에서 혹사당했다고 알려진 선수들 대부분이 의외로 김성근을 원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혹사 자체를 부정할 근거가 되진 않을 뿐. [131] 실제로, 암흑기시절 엘지에서 뛰었던 심수창은, 연습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정작 경기만 가면 선수들이 떨어서 경기력을 못냈다고 회고했다. [132] 당시 SK에서 보상선수로 지목 가능했던 투수로는 정우람, 윤길현, 고효준, 윤희상, 신승현 등 이후 한국 야구에 이름을 알린 선수들이 즐비했다. [133] 그 후임으로 들어온 것이 하일성이며, 그를 통해 하일성은 프로야구 초창기 전설적인 해설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 [134] 심지어 당시 대표적인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였던 민훈기와도 이때 관계가 틀어졌다. [135] 그런데 사실 인스트럭터 일 자체가 처음에는 그동안 김성근이 해오던 출장 코치의 연장선상이었다. [136] 2000년대 초반 당시 메이저리그에서 이런 비슷한 통역 문제들이 많이 발생했다. 90년대 초창기에 간 박찬호 추신수는 제대로 된 통역조차 없어서 본인이 영어를 배워야 했으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면 당시 일본,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는데, 상당수의 팀들은 전문 통역인을 붙여줬다. 하지만 야구에 문외한인 통역들은 야구 용어나 야구선수들과 코치들 간의 야구 언어와 미세한 컨디션 등을 제대로 통역하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2000년대 후반부터는 야구를 제대로 아는 선수 출신이나 코칭스태프 경력, 하다 못해 프런트 경력이라도 있는 사람을 통역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성민규가 한국인 선수 통역으로 기용된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137] 다만 프로에서 대실패한 선수도 30대 초반의 나이에 잘만 코치가 되는 걸 보면 스타플레이어였거나 경험이 많은 선수만 코치를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이시미네는 1라운더 출신인데 일본 프로야구는 중세분위기라 거기서 1라운더 출신이면 왕족같은 느낌이다. 심지어 중복 지명 출신이면 더욱. [138]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순혈주의로 굉장히 유명한 팀이다. 심지어 1군 감독의 경우 입단부터 은퇴, 이후 코치 생활까지 단 한번도 타 팀에서 활동하지 않은 완전 순혈의 원클럽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은 엄두도 내기 어려울 정도. [139] 나중에 김성근이 한화에서 최악의 성적을 거두면서 많은 야구인들이 김성근에 대한 지지 멘트를 철회했지만, 이승엽만큼은 이후에도 김성근을 챙기는 발언을 두어 번 하여 논란이 된 적이다. [140] 그의 자서전에 명시된 사실이다. [141] 이마저도 김성근 문서에 나왔듯이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어려워서 1년 만에 중퇴했기 때문에 동아대에서 많이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142] 스포츠춘추 박동희, 이데일리 정철우, 스포츠서울 장강훈, 스포츠월드 정세영, 스포츠서울 이재국 등이 대표적이다. 웹툰 작가인 최훈 또한 김성근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던 편이며, 장강훈은 아예 결혼식 당시 김성근이 주례를 서주었을 정도. 다만 그 이전부터 김성근에 호의적인 기자들은 몇 있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야구의 추억'을 쓴 오마이뉴스 김은식. 김은식은 인천 야구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 등 약팀에 대한 추억을 많이 쏟아내던 기자였고, 따라서 김성근에게도 호의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한화의 부진 이후 대부분이 김성근과 손절을 선택했고, 현재는 장강훈 정도만 남은 상태이다. [143] 물론 김성근의 언론플레이와 더불어 당시 대한민국 야구계에는 리빌딩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일어난 일로, 현재 기준으로 김성근의 스타일은 대체로 극단적인 윈나우형 승리지상주의 야구로 평가받는다. 보통 이런 성향을 리빌딩이라고 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김성근이 떠나고 나서 휘청인 팀들이 많다는 점에서 현대 기준으로는 올드스쿨 윈나우형 감독으로 평가된다. [144] 즉 김성근은 1940년대생에 1970년대부터 지도자를 했으므로 현재 극단적인 올드스쿨 스타일로 비판받았으나 야구가 많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의 시대부터 지도자를 해왔다는 점을 감안하여 평가가 다소 상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건 동시대부터 감독일을 해왔고 김성근 이전 한화 감독직을 맡으며 나쁜 모습을 보여줘 평가가 내려갔던 김응용도 마찬가지이며, 되려 현재는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이라는 커리어뿐만 아니라 감독 스타일 면에서도 자율 야구와 매니저로써의 감독의 역할을 정립한 선구자적인 감독으로 평가받으며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145] 당시 현대는 서울 연고지를 탐내고 있었고, 결국 서울 이전을 위해 연고지 권리를 SK에게 팔아버리고 광역 연고지였던 수원으로 도망가 버렸다. [146] 심지어 SK조차 처음에는 서울 연고지를 노렸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또 SK마저 배신하는 거 아니냐며 더욱 심하였다. [147] 당시 민경삼과 함께 전력분석팀이었던 김성근의 아들 김정준, 노석기도 SK로 가게 된다. [148] 이는 전 감독이 자신의 대표 애제자인 조범현이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의견도 있다. 그 이전에도 조범현은 대표적인 친김성근파로 유명하였다. # [149] 그리고 2005년의 이 참사는 14년 뒤인 2019년에 더 큰 역대급 대참사로 업그레이드돼 돌아오고 만다. [150] KIA 투수인 장문석의 공에 손을 맞았다. 결과적으로 이는 KIA에서 방출된 장문석이 이후 김성근의 제의를 받았음에도 SK에 오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151] 가장 큰 오해가 김성근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아들인 김정준을 전력분석원으로 고용했다는 이야기인데, 김정준은 아버지 김성근이 SK로 오기 훨씬 전인 2003년에 LG를 떠나 SK로 입사했다. 다만 아버지 김성근과 아들 김정준이 비슷한 시점에 그만둔 적이 있기는 하다. 2002년 아버지가 LG에서 해임되자 본인도 LG를 떠났고 2011년 SK를 떠나자 본인도 SK에서 짐을 쌌다. [152] 다만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정규 시즌의 부진을 정면으로 뒤엎는 성과를 보이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MVP가 된다. [153] 다만 여기에는 당시 제2 홈구장 수원야구장의 입장 관중 수도 일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순수하게 인천야구장에만 입장했던 관중은 40만 명대 초반이거나 30만 명대 후반으로 볼 수 있다. [154] 현재까지도 126경기 체제에서는 시즌 최다승 기록이 2008년 SK의 83승이다. 2008년 2위 두산과의 승차는 무려 13게임. [155] 페넌트레이스 우승팀에 상당한 어드밴티지를 주는 KBO 리그 환경상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를 동시에 석권한 통합 우승 사례는 꽤 많다. 그러나 2시즌 이상 연속으로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동반 우승을 거둔 팀은 현재까지도 해태, 현대, 삼성, SK 뿐이다. 삼성은 2005~2006년 2연패 이후 2011년부터 무려 4년간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를 동반 석권한 역사가 있다. [156] 심지어 당시 김광현의 분위기는 방어율 2.57, 12승 2패 138이닝으로 역대 커리어하이 분위기였다. 커리어하이로 꼽히는 2010년, 부활한 2018년조차도 오히려 그때보다 포스가 못했던 것으로 평가받는 편. [157] 이 때 SK는 시즌 종료까지 20경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158] 차후 김성근 감독이 밝힌 바로는 그냥 던져본 립서비스였다고 한다. 전승 드립은 팬들한테 먼저 나오긴 했었다. 근데 실제로 저렇게까지 연승을 이어나갈 줄은 본인도 몰랐다고 한다. [159] 이후 해당 연승은 다음해까지 이어졌으며, 2010 시즌 개막 후 3연승을 포함해서, 최종 연승 기록은 22연승이 되었다. 이는 아직까지도 KBO 역사상 최대 연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160] 이로써 김경문 감독은 김성근 감독을 만나는 족족 리버스 스윕을 당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그덕에 두산은 포스트 시즌 특정팀 상대 홈 8연패라는 기이한 대기록을 수립. 2009년까지 이렇게 당한 후, 2010년에 이르면 두산을 기다리는 SK 김성근 감독의 입장에서 호구 오능가?라는 유행어가 야갤에서 유행했다. [161]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이 2번 나왔는데, 하나는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하나는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공교롭게도 둘 다 패배측 감독이 김성근 감독이었다. [162] 불타는 그라운드는 2021년 다시 재개되었다. [163] 심지어 이만수는 삼성 시절부터 김성근과 썩 좋지 않은 관계였다. [164] 하지만 재계약 1년차였던 2012년 시즌 중 경질되고 만다. [165] 계약 종료 전 연봉까지 확정한 재계약은 KBO에서는 예외적인 방식으로 넥센 히어로즈 시절 김시진 감독과 NC 다이노스 김경문 감독이 유이하다. 다만 보통은 감독의 심리적 안정, 팀 장악력 유지를 위해 미리 언질은 하는 편. [166] 기존에는 이 서술에 김성근 감독 옹호 팬인 노리타들이 반응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 시기까지만 해도 노리타란 개념은 드러나지 않았으며 당시 SK 팬덤은 전체적인 분노에 휩싸였다. 노리타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성립한 것은 2011년 후반 아예 김성근의 SK가 아니면 응원하지 않겠다는 수준으로 감독 개인 팬덤이 강화되고, 이들이 SK 팬덤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심지어 2015년 한화로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김성근 감독 개인팬이 한화 쪽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노리타와 SK 팬덤은 그렇게 구별되지 않은 편이다. 현재 노리타들은 최강야구로 넘어가면서 아예 아구계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랜더스 갤러리 등에서 이 사건만은 그럴만 했다고 지금도 정당화하고 있다. [167]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문학구장에 출근한 순간 해고통지를 받고 짐을 챙겨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의 아들이자 같은 팀 김정준 코치의 말에 따르면, 김감독은 재계약 포기선언을 한 날 밤에 머리를 짧게 깎고 와서 "앞으로 남은 경기는 잘 치러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168] 당시의 모습은 4년 뒤 뉴스인 여기서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169] 앵커로서 이 사건을 보도한 민경욱은 당시 SK의 단장이었던 민경삼과 사촌 지간이다. [170] 실제로 그물망에 매달려 시위했던 관중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삼미 때부터 삼청태현을 응원하다 인천에 새로 창단한 SK로 갈아탄 올드 팬으로 추측. [171] 당시 김성근 감독은 해당 선수들에게 제구를 포기하고 그냥 세게 던질 것을 주문했고, 이것이 주효하게 먹혀 들어갔다. 다만 당시 이 스윙맨들은 구위는 특출났지만 여전히 제구가 엉망이었는지라, 삼진 아님 볼넷이라고 할 정도의 극단적인 투구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172] 당시 타 팀은 LG 오지환, 두산 정수빈, 롯데 양종민 등 1990년생들이 막내로 치고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한화 정도가 이례적으로 늦어지는 상황. [173] 한창 우승 경쟁을 하는 강팀에 잠재력 높은 신인이 1군에 자리가 없어 2군을 폭격하는 경우는 굉장히 흔하다. 게다가 이 당시 SK가 리그 역사에 남을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신인이 설 자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상황. 2020년대로 들어오면서 메이저리그식 윈나우 트레이드가 한국에서도 성행하면서 이런 선수들은 트레이드되어 기회를 잡고 주전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LG에서 키움으로 넘어간 이주형. [174] 당시 1라운드 1픽으로 지목되었지만 경력이 거의 전무한 무명 선수였기에 전부 당황하였다. 특히 당시 MLB에서도 주목했던 제물포고 에이스 이현호가 SK에 대한 애정을 계속 표현했기에, 당시 SK 스카우트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 입단하자마자 무릎 부상이 발견되어 육성선수로 전환되었다. 2017년 핵심 불펜으로 성장하면서 의외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지만, 2라운드에까지 이현호를 거르면서 김민식을 지명했고 김민식은 제대로 된 활약 하나 없이 은퇴하였다. [175] 2010년 김성근 감독이 박희수를 트레이드 카드로 쓰려 했던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박희수는 1983년생으로 김광현보다도 5살 위였다. 오히려 박희수의 급성장은 김성근 감독이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가 필요하다는 원포인트 지적으로 투심을 장착한 것과 트레이드 무산 후 쓰리쿼터로의 폼 교정 후에 이루어진 것. 만약 트레이드가 되었다면 박희수가 터졌을 거라는 보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애초에 박희수가 떠오른 2011년 시점 기준 스물아홉으로 젊은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과론적 해석을 한다 해도 이 세대 교체 논란에 들어갈 선수는 아니다. [176] 육성한다고 성적에 신경 안쓰고 맨날 지면 그것도 큰 문제다. [177] 이 부분은 고양 원더스 해체 이전부터 작게나마 꾸준히 비판이 있었지만 묵살당했다. 그러다가 김성근 신화가 사그러든 2015년 9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기사화가 되었다. [178] 당시 한화 팬덤들 사이 반응도 김성근..설마..? 하다가 김응용으로 방향이 틀어지자 김성근? 그게 누구임?으로 바뀌었으니... [179] 2010년대 전체를 통틀어 삼성 라이온즈의 안현호 단장과 함께 자팀 전력을 가장 심하게 초토화시킨 인물이다. 한화 시절만 한정한다면 롯데 시절 백인천 다음가는 최악의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180] 일단 구단에서 정식으로 영입한 것은 맞지만, 정식 지도자 직책은 아니다. 보통 고문, 자문, 인스트럭터, 코디네이터 등은 지도자 경력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삼성 구단이 김한수로 감독을 교체할 때 전임 감독인 류중일에게 고문 직책을 주었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을 지도자 경력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김성근 본인 또한 삼성 감독에서 경질되었을 때 이와 비슷한 직책에 앉은 적이 있었다. 김성근 경질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시 삼성 구단은 김성근에게 '총감독'이라는 직책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도 총감독을 김성근의 지도자 경력으로 보지 않는다. 뒷방직 [감독] 대행 7경기 [182]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전·후기 리그 통합 승률 1위 [183]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쳤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최종 순위는 3위 [184]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 [185]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 [186]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1위 [187]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 [188]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 [189]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 [190]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 [191]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 [192]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패배 [193]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배 [194]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 패배. 심지어 2승을 한 뒤 3연패 당하면서 KBO 포스트시즌 사상 처음으로 리버스 스윕을 당했다. [195]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 [196] 김성근 경질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는 승률 0.224로 8위였으며,
시즌 종료 후 쌍방울은 김성근 경질 당시와 똑같은 0.224의 승률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7]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를 통과한 것이 이 해의 일이다. [198] 경질 당시 [199] 경질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