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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9:45:06

정동진(1946)

정동진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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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우승코치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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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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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박영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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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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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2007년
<rowcolor=#b21528> 초대 (삼미 초대)
2대 (삼미 2대, 청보 초대)
박현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
감독 대행
이선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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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1984~1985)
감독 대행
이재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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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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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감독 대행
박현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감독 대행
신용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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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rowcolor=#fff> 3대 (청보 2대)
4대 (청보 2대, 태평양 초대)
5대 (태평양 2대)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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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강태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1988)
감독 대행
임신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1990)
<rowcolor=#ff9933> 6대 (태평양 3대)
7대 (태평양4대)
8대 (현대 초대) 9대 (현대 2대)
박영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
정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5)
김재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2006)
김시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
윗첨자1 : 김진영 감독이 1983년 중반 폭행 사건으로 인해 현장에 복귀하지 못했고 이재환, 이선덕 코치, 박현식 고문이 감독 대행직을 맡았다.
1985년에는 18연패로 인해 신용균 코치가 임시로 대행을 맡았고 모기업이 청보로 넘어가자 다시 복귀했다.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1번
결번 정동진
(1984~1988)
결번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1번
결번 정동진
(1989)
박규대
(1990~199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1번
결번 정동진
(1990)
이상범
(1991~1992)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95번}}}
결번 정동진
(1992)
손영철
(1996)
{{{#131B66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77번}}}
정영기
(1991~1992)
정동진
(1993~1995)
이선웅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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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丁東鎭| Jeong Dong-jin
출생 1946년 4월 23일 ([age(1946-04-23)]세)
경상북도 대구부 (現 대구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구수창초등학교 ( 졸업)
대구중학교 ( 졸업)
대구상업고등학교 ( 졸업)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제일은행 야구단
지도자 대구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7~1978)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1984~1988)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89~1990)
태평양 돌핀스 감독 (1992~1995)
해설위원 SBS 야구 해설위원 (1996~1998)
경력 KBO 규칙위원 (1997~1998)
KBO 경기운영위원 (1999~2004)
KBO 육성위원장 (2004~2005)
병역 대한민국 해병대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프로 출범 이전3.2. 삼성 코치 시절 (1984~1988년)3.3. 삼성 감독 시절 (1989~1990년)3.4. 태평양 감독 시절 (1992~1995년)
4. 평가5. 이후6. 기타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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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기에는 포수였고 프로 야구 삼성 라이온즈(1989~1990년)와 태평양 돌핀스(1992~1995년)의 감독을 역임했다.

한국 야구의 유명 감독 중에서는 보기 드문 덕장 스타일이며 우용득, 김경문, 유승안, 조범현, 이만수, 김태형 등 역대 포수 출신 KBO 리그 감독들의 계보에서 사실상 첫 손에 꼽히는 감독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

대구상고 출신으로 실업야구 시대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10여년 간 국가대표 포수로 명성을 날렸다.

인사이드 워크를 중시했던 수비형 포수로 경기 전 선발로 등판하는 투수에게 상대팀 타자들의 장·단점에 대해 꼼꼼히 메모해둔 것을 전해줬다. 덕분에 한국 야구 역사상 국가대표 포수, 특히 수비형 포수로서의 계보에 반드시 그 이름이 들어가는 인물이다.

3. 지도자 경력

3.1. 프로 출범 이전

대구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지내며 몇차례의 우승을 해내기도 했다. 대구상고 감독 시절 그가 키워낸 선수들 중에는 대구 야구가 낳은 최고 스타인 이만수도 있었다.[1] 이후 1978년부터 약 7년 간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의 평범한 은행원으로 지낸다.

3.2. 삼성 코치 시절 (1984~1988년)

그러다가 삼성 라이온즈에서 KBO 리그 출범부터 꾸준히 영입을 타진한 끝에, 1984년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합류한다. 선수 시절 대구를 대표하던 스타 포수였기에 당시 서영무 전 감독의 퇴진 이후 극심해진 삼성 선수단 내 갈등의 중재 역할,[2] 포수들의 기량 발전을 위해 영입했다.

삼성에 부임한 후 수석코치를 맡았으며 특유의 인화력과 지도력으로 선수들의 신임을 얻었고, 그 결과 1986년 시즌 직후 김영덕 감독이 물러난 뒤 후임 감독으로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선배인 박영길 타격코치에게 양보했다.

3.3. 삼성 감독 시절 (1989~1990년)

그러다가 1988 시즌 후 박영길 감독이 해임되자[3] 1989년에 후임으로 삼성의 감독에 취임한다. 그 와중에 1988 시즌 후 그룹 차원의 개입으로 장효조, 김시진 등이 롯데 자이언츠 트레이드되었고, 반대로 최동원 김용철 등이 삼성에 오는 변화가 일어난다.[4] 어수선한 팀 분위기 속에 일단 1989년 시즌에서는 4위로 끝내고, PO 연패를 끊었다. 팀이 도움이 되리라 예상했던 최동원은 부상과 트레이드 거부 문제로[5] 1989년 8월이 넘어 합류하고, 결국 1990년 시즌 후 조기 은퇴를 한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정규 시즌 4위로 출발해 상위권 팀들을 잇달아 연파하면서 한국시리즈에까지 오른다. 그동안 매번 한국시리즈 우승을 좌절하게 했던 해태 타이거즈마저 3연승으로 격파한 것이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LG 트윈스에게 4연패로 고배를 마셨고, 바로 감독에서 해임된다.[6][7] 보도자료 상 사유는 재계 라이벌인 LG에게 무기력하게 4패로 물러났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국가대표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측근 황규봉, 우용득 코치를 내치려는 구단 측과 갈등을 빚었던 것이 화근이었다고. #1 #2

그 뒤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 때만 해도 정윤수, 이태일 살려조 수준으로 굴린, 온화한 성격이지만 선수 혹사에는 둔감한 김인식 스타일의 감독이었으나...

3.4. 태평양 감독 시절 (1992~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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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루키-싱글 A-더블 A-트리플 A 등 각 단계를 거치면서 코치 연수를 했다. 미국 연수 1년 만인 1992년, 다시 한번 박영길 감독의 후임으로 태평양 돌핀스의 사령탑에 올랐다.[8][9] 태평양 감독 부임 2년째인 1993년에는 대구상고와 삼성 시절 제자인 김시진을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 부임 첫 해 1992년은 6위, 이듬해인 1993년은 꼴찌였지만 구단은 정동진 감독을 경질하지 않고 계약기간인 3년을 끝까지 지켰다. [10] 유임 결정에 보답하듯 정동진 감독은 1994년에 성과를 내는데...

1994년에 부상에서 돌아온 투수들이 제 몫을 다하면서 돌풍을 일으켜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오른다. 하지만, 당시 상대는 이광환 감독이 이끌던 신바람 야구 열풍의 LG 트윈스였다. 결국 김재현, 서용빈, 유지현이라는 신인 3총사와 한대화, 노찬엽, 김동수, 김용수, 이상훈을 앞세운 LG 트윈스에 또 4연패를 당해 준우승에 그쳤다.[11] 결국 정동진 감독의 KBO 한국시리즈 전적은 모두 LG를 상대하여 승리 없이 8전 8패가 되었다.[12] 그래도 태평양은 김성근 감독 시절에 기록한 3위를 넘어 최고 성적을 달성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진출의 공로로 태평양과 재계약했지만 1995 시즌은 팀이 현대그룹으로 매각되던 시절이라 분위기도 어수선했고, 주전 투수들의 이탈과 기존의 타선을 이끌던 선수들의 부진이 겹치면서 전년도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해 정규 시즌을 7위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과 함께 계약 기간 1년을 남긴 시점에서 수석코치 김재박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그렇게 정동진은 태평양의 마지막 감독으로 남았다.

비록 감독 재임 중에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그가 인내심을 가지고 재활을 시켜가면서 기다려 준 인천지역 내 우수한 투수들은 그 뒤 현대 유니콘스의 전성시대를 이끈 주역이 되었으니, 정동진은 현대 유니콘스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감독이라 할 수 있다.

4. 평가


2014년 SPOTV에서 제작한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정동진 편

정동진 감독의 야구관을 요약한 글 정동진 야구

한 줄로 요약하면 김성근의 야구관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 투수의 어깨는 던질수록 강해진다", "체력이 안되면 무조건 정신력으로라도 참고 버티면서 던져라" 식의 마인드가 당연시되던 1990년대 초반에 부상 당한 투수들을 과감히 수술시키고 재활군을 설치해 체계적 재활 시스템을 만드는 등 한국 프로야구에서 선수관리, 재활 시스템의 수준을 진일보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이는 삼성 감독에서 물러난 후 약 1년 동안의 미국 마이너리그 연수 시절에 배운 것인데 정동진과 삼성에서 코치와 감독으로 한솥밥을 먹었던 류중일 전 LG 감독도 자신이 정동진 감독의 선수 관리 노하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특히 태평양 감독 시절 투수들을 미국으로 보내면서까지 수술시킨 과정은 훗날 재조명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1992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취임한 후 선수들의 몸상태를 살펴본 정 감독은 핵심 투수진 3인방인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의 몸상태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태평양 투수들의 몸이 망가진 것은 전전임 김성근 감독과 직전 감독인 박영길 감독의 무자비한 혹사로 만신창이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병원에 검진을 요청했고 각각 허리 디스크와 뼈조각 발견 등의 증상이 확인되어 망가진 몸 상태를 여실히 드러낸다. 여기에 한양대를 졸업하고 막 데뷔한 정민태마저도 팔꿈치가 아파서 강판되는 상황까지 초래됐는데 이 역시 동산고-한양대 시절 혹사에 따른 부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정 감독은 미국 내 토미 존 수술 최고 권위자였던 제임스 앤드류스 박사에게 수술을 의뢰했다. 이 과정에서 수술 결과를 의심하는 팀과 선수들에게 자신의 3년치 연봉을 다 내겠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나타냈고 그런 모습을 본 선수들이 이를 받아들이며 수술을 하게 되었으며 다행히 수술도 모두 성공했다. 핵심 선수들의 이탈로 인해 당장의 성적은 바닥을 면치 못했지만[13] 정명원, 최창호, 정민태 등이 모두 돌아온 1994년에는 김경기, 김동기, 윤덕규 등 극소수의 주축 타자에만 의존해야 했던 최약체 타선의 불리함 속에서도 팀 창단 이후 두 번째 가을야구 진출을 넘어 인천 연고팀 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성과를 내며 자신의 야구 철학이 옳았음을 성적으로 증명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상대팀 감독이었던 이광환이 투수분업화 도입을 통해 KBO의 경기 내적인 요소를 바꿨다면, 정동진은 과감하게 팀의 주축 투수들을 재활시키고 그것이 성공하면서 경기 외적인 요소를 바꿨다고 할 수 있다.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한 두 감독이 우리나라 투수들의 선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는 점에서 "1994년은 한국프로야구의 기념비적 분기점"이라고 평가하는 주장도 있을 정도.

5. 이후

1996년 SBS 야구해설위원, 1997년 일구회 회장을 거쳐서 KBO 경기감독관, 규칙위원장, 유소년 육성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에도 제자인 이만수의 요청으로 라오스에 야구지도를 가려고 했으나 건강 문제로 불발되었고 한다.

6. 기타

SBS 해설위원 시절 낫아웃 오심 사건으로 유명한 1997년 8월 23일 쌍방울 레이더스 삼성 라이온즈의 대구 연속경기 1차전 해설을 맡았다.

권위주의, 구타가 판치던 시절의 감독으로써는 보기 드문 덕장 스타일이었다. 대구상고 감독 부임 첫날 일부 선수들이 훈련도중 무단이탈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선수들에게 벌을 주는 대신 "너희들을 잘 통솔하지 못한 내 책임"이라고 말하며 얼차려 자세를 한 뒤 선수들 모두에게 자신의 엉덩이를 1대 씩 때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누구도 자신의 감독을 때리는 것을 주저하는 중에 이만수가 나서서 정동진 감독을 야구방망이로 매우 세게 때렸다[14]. 그런데 이게 이만수가 정동진 감독에게 하극상을 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의 대구상고 동문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서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정동진은 감독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만수의 고등학교 12년 선배이기도 했고, 인격이 선한 편이라 인망이 젊을 때부터 있던 사람이었기에 선후배들의 지지를 받던 사람이었다. 이만수는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사건 직후 선배들이 알게 되자, 대구를 벗어나 이모님 가족이 살던 서울로 도망쳐서 잠시 살다가 왔다고 한다. 본인은 살살 때리는 시늉만 하려고 했는데, 힘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관련 기사 그러나 목격자였던 김시진은 정동진 감독님을 누가 봐도 세게 때렸다며, 시늉 같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10인" 이만수 편에도 나왔다.

7. 관련 문서


[1] 1학년 이만수, 2학년 김시진, 3학년 장효조. 이만수는 김시진과 원래 동기이나 유급으로 1년 후배가 됐다. [2] 다른 구단들에 비해서 심한 편은 아니지만, 삼성도 대구상업고등학교(現 대구상원고등학교) 출신과 경북고등학교 출신 사이의 미묘한 파벌 경쟁이 존재하긴 했다. 초대 서영무 감독 시절에는 감독 본인이 대구상고 선수 출신이면서 경북고 감독을 지냈던 인물이고, 대구지역 야구계의 원로였기에 팀 내 갈등을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3년 서 감독이 물러나고 대구지역 정서를 잘 모르던 재일교포 김영덕, 부산(경남고) 출신으로 초대 롯데 감독이었던 박영길이 차례로 후임 감독이 되면서 경고파와 상고파 간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에 대구 출신이었고, 당시 주축 선수들이 대구상고 감독 시절의 제자 내지 지방 후배들로 밀접한 인연이었던 정동진이 팀 내 갈등을 관리했던 것이다. [3]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게 4연패, 이듬해인 1988년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게 3연패를 차례로 기록했던 박영길 감독은 2년 동안 포스트시즌에서 1승도 못 올렸다는 이유로 삼성그룹 기획조정실의 감사를 받는 수모까지 당했다. [4] 이 트레이드는 최동원이 선수협 창설을 시도한 것에 대한 KBO구단들의 보복성 조치였다. [5] 훈련 부족과 체중 증가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던 상태이기도 했다. [6]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도 4연패로 우승을 놓쳐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한국시리즈는 아니지만 2000년에는 김용희 감독이 현대 유니콘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4연패를 당해 감독직을 떠났고, 다시 10년 뒤인 2010년에는 선동열 감독이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로 물러나 류중일에게 감독직을 넘겼으며, 2019년에는 장정석 감독이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로 물러나면서 당초 재계약이 유력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손혁 감독으로 교체되었다. [7] 그러나 김경문 감독은 각각 2005년과 2016년에, 김태형 감독은 2021년에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를 했지만 바로 감독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8] 삼성 감독을 맡았을때도 박영길 감독의 후임이었다. [9] 훗날 정동진의 인터뷰에 따르면 본래는 박영길 감독이 태평양의 수석코치를 맡아줄 것을 제의했고 이에 응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는데 한국에 도착하고 보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박영길은 감독을 그만 둔 상태였고 결국 자신이 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10] 사실은 경질당할 뻔 했지만 당시 사장이 인천 연고 구단들의 역사에서 계약 기간을 모두 채운 감독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경질을 취소했다고 전해진다. [11] 특히 1차전과 3차전은 이길수 있었던 경기였다. 만약 그 두경기중 한경기를 잡았거나 둘다 잡았다면 시리즈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12] 바꿔 말하면 LG가 기록한 세차례의 우승중 두차례는 모두 정동진 감독을 상대로, 한번도 패하지 않고 달성한 것이다. 이강철 감독과 유이한 LG 상대 준우승 감독이다. [13] 매일같이 왜 성적이 이 모양인데도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을 쓰지 않느냐는 팬들의 욕설 섞인 항의에 시달렸다고 한다. 참고로 이 당시까지만 해도 태평양의 연고지인 인천의 팬들은 극성맞기로는 전국 최강인 부산이나 광주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초강성 팬덤이었다. 만년 꼴찌팀 취급 받는 것도 서러운데 핵심 선수들을 어떻게든 투입해 꼴찌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상 당한 선수들이 마냥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에 속이 탔을 것이다. [14] 정동진의 증언으로 시꺼멓게 피멍이 들었다고 한다. 너무나 아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