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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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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해태 타이거즈
MVP 이종범[1]
중견수~ 김창희 잡았습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해태와 LG의 한국시리즈 5차전. 6:1로 해태가 승리했습니다. 97한국시리즈, 해태의 우승입니다. 네~ 해태 타이거즈, 4승 1패로 97 한국시리즈도 또 우승을 해냈습니다.

MBC 양진수 캐스터의 우승콜
1. 개요2. 일정3. 엔트리4. 결과
4.1. 1차전4.2. 2차전4.3. 3차전4.4. 4차전4.5. 5차전
5. 총평6. 여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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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7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파일:LG 트윈스 심볼(1990~2005).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심볼(1996~2001).svg
LG 트윈스 해태 타이거즈
1997년 열린 KBO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 LG 트윈스간에 펼쳐졌다. 당시 두 팀의 대결은 한국시리즈 8회 진출 8회 우승의 해태와, 구단 이름을 바꾼 후 한국시리즈 패배가 없는 LG[2][3]의 맞대결로 화제를 모았다. LG 트윈스의 전신 MBC 청룡 시절까지 포함하면 1983년 이후 14년 만에 맞이한 리턴 매치였다.

결과는 해태 타이거즈의 통산 9번째 우승. 한국시리즈 MVP는 1993년에 이어 이종범이 차지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이해 페넌트레이스에서 2위~5위인 LG 트윈스, 쌍방울 레이더스, 삼성 라이온즈, OB 베어스를 상대로 37승 1무 34패를 기록할 정도로 평타 수준이었지만, 현대 유니콘스, 한화 이글스,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38승 16패를 기록하면서 1위를 차지했다. 특히 롯데는 해태에게서 3승 15패를 기록, 해태의 패넌트레이스 우승을 도와주는 훌륭한 먹잇감이 되었다. 반면 LG 트윈스 해태 타이거즈에 10승 8패로 우위를 보이고도 쌍방울 레이더스에 6승 12패[4], 삼성 라이온즈에 8승 10패를 기록하면서 발목이 잡혔다. LG 역시 하위권 4팀을 상대로 모두 우세했다. 특히 현대를 상대로는 해태가 롯데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15승 3패로 철저하게 짓밟았다.[5] 그러나 롯데를 상대로는 처음에 7승 1무로 앞서다가 7월에만 7연패를 기록한 탓에 남은 3경기를 모두 이기고 나서야 간신히 10승 1무 7패로 앞설 수 있었다. 이것이 상당히 뼈아팠던게 이 해는 1위~4위가 6게임 차이일 정도로 용호상박으로 치고 받았던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즉 7월의 롯데전 7연패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1위도 노릴만 했던 것. 쌍방울 레이더스 역시 해태 타이거즈와 8승 10패, LG 트윈스에는 12승 6패를 기록했지만 삼성 라이온즈에게 5승 1무 11패를 기록했다. 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에게 7승 1무 10패, LG 트윈스에 10승 8패, 쌍방울 레이더스에 11승 1무 5패를 기록했지만 이 팀은 엉뚱하게도 이 해 6위였던 현대 유니콘스에게 7승 1무 10패로 발목이 잡혔다.[6]

특히 1997 시즌에 해태는 LG와의 맞대결에서 광주 홈에서 5승 4패, 잠실 원정에서 3승 6패를 기록했는데, 잠실에서 당한 6패 중 5패가 8회 이후 역전패였다. 그 중에는 4월 15일~16일 2경기 연속 연장 끝내기패, 6월 29일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이 있던 경기[7]에서 박재용이 당대 최고의 마무리 이상훈을 상대로 역전 만루홈런을 때려내고도 공수교대 후 9회말에서 재역전패를 당한 경기와 9월 10일 임창용이 9회말 투아웃에서 허문회에게 안타를 내준 이후 견제 악송구를 범하고 이병규에게 동점타를 허용한 이후에 맞이한 연장 14회말에서 조계현 송구홍에게[8] 역전 끝내기 안타를 내준 경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 한국시리즈는 "이종범 1명 vs LG 트윈스 전원"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이종범이 홀로 공수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또한 이종범이 승부를 결정짓는 3개의 홈런을 작렬하고, 홍현우, 김창희, 김종국이 4차전에서 나란히 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장타력을 과시했고, 이대진이 2승, 임창용이 3세이브를 기록할 정도로 해태는 그야말로 되는 집안이었었다.[9] 반면 LG도 해태와 충분히 해볼만했는데, 이해 해태에게 패넌트레이스에서 10승8패로 우위를 보였고 1990시즌, 1994시즌 페넌트레이스, 한국시리즈를 석권했고 그 멤버들이 대부분 팀을 이끄는 만큼 우승 DNA도 있었는데다, 해태와 페넌트레이스에서 1.5게임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시리즈 전체 7경기 중 최대 5경기를 자신들의 안방에서 치르게 된데다 1, 2차전을 잠실에서 치르게 되었고, 상술한 대로 잠실 해태전에서 5번이나 8회 이후 역전승을 거두었기에 자신감도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경기마다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해태 타이거즈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김상진은 5차전에 선발로 나와 완투승을 기록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기록이다.

당시 규정에 의하여 1차전, 2차전은 무등 야구장이 아닌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치러졌다. 플레이오프 진출팀이 서울 연고팀일 경우 순위에 상관 없이 1, 2, 5, 6, 7차전을 잠실에서 열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5-7차전을 무조건 잠실구장에서 치르게 하는 중립구장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오프 진출팀이 서울팀이라면 3차전부터 경기를 계속 잠실에서 치러야 했고, 그 때문에 지방 구단이 경기력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이를 고친 것이다.[10] 앞서 1995년 당시 잠실팀들을 상대로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롯데 자이언츠는 이 규정을 불리하게 적용 받아 선수들의 체력 등 경기력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김용희 전 감독은 KBO에게 규정의 불공평함을 토로했고 이후 바뀐 규정이 바로 위에 있는 규정이 되었다.[11][12]

이로써 해태는 KBO 한국시리즈 9번 진출에 9번 모두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작성한다.

해태 타이거즈를 기억하고 있는 올드 팬들에게는 이 해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엇갈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해의 우승으로 9전 9승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영광이지만, 해태 타이거즈라는 이름으로 거둔 최후의 우승이었고[13] 우승을 결정지은 후 정확히 일주일 뒤인 1997년 11월 1일 IMF 사태로 모기업 해태제과가 부도를 맞아 팀의 전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면서 1998년부터는 중하위권으로 떨어졌다.[14] 더구나 이 해 팀의 우승을 결정지은 마지막 투수는 팀의 새로운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였음에도 얼마 안되어 병마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래저래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태에게 '마지막 영광이자 긴 고난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김은식 작가의 해태 타이거즈 김대중이라는 책을 보면, 해태의 리즈 시절에는 호남 출신인 김대중은 엄청난 탄압을 받는 야인이었고,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 되자 해태가 본격적으로 몰락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가 나온다. 게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망한 2009년 8월에는 KBO 역사에서 아직도 깨지지 못한 월간 최다승인 20승을 쓸어담아 KIA가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올랐고, 두 달 뒤 열린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이 시리즈 우승 이후 12년 만에 우승( 2009년 10월)과 함께 지긋지긋하게 타이거즈를 괴롭혀 왔던 아홉수를 풀어낸 것을 보면, 해태와 김대중의 운명은 묘하게 엇갈리는 듯하다.[15] 이는 2009년 9월 24일 군산시 월명 야구장에서 열린 정규시즌 우승 확정 경기에서도 9회 한명재도 언급했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1990년 통일 이후에 한동안 부진에 빠진 것과도 뭔가 흡사하다.[16]

국가부도의 날 영화에서 몇 번 자료화면으로 등장한다.

2. 일정

1997 한국시리즈
LG 트윈스 VS 해태 타이거즈
<rowcolor=#ffffff> 경기 경기 시간 경기장 AWAY 결과 HOME 방송사
1차전 10월 19일 14: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해태 타이거즈 6 1 LG 트윈스 파일:SBS 로고(1994-2000).svg
2차전 10월 20일 18:00 1 10 파일:MBC 로고(1986-2005).svg
3차전 10월 22일 18:00 무등 야구장 LG 트윈스 1 5 해태 타이거즈 파일:KBS 1TV 로고(1984-2018).svg
4차전 10월 23일 18:00 4 7 파일:SBS 로고(1994-2000).svg
5차전 10월 25일 14: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1 6 파일:MBC 로고(1986-2005).svg

3. 엔트리

3.1. 해태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 199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colbgcolor=#09081e> 감독 1명 김응용
코치 6명 유남호, 차영화, 김종모, 김성한, 이상윤, 장채근
투수 8명 김정수,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임창용, 김상진, 강태원, 박진철
포수 3명 최해식, 권오성, 김지영
내야수 8명 백인호, 이종범, 김종국, 홍현우, 장성호, 이경복, 이호준, 김태룡
외야수 6명 최훈재, 이호성, 김창희, 박재벌, 박재용, 조현

3.2. LG 트윈스

LG 트윈스 199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colbgcolor=#000000> 감독 1명 천보성
코치 5명 정삼흠, 이광은, 김용달, 김인식, 최정우
투수 10명 이상훈, 임선동, 손혁, 김용수, 전승남, 김기범, 차명석, 김건우, 신동수, 송유석
포수 2명 김동수, 최동수
내야수 8명 류지현, 서용빈, 박종호, 김선진, 신국환, 허문회, 권용관, 송구홍
외야수 5명 동봉철, 노찬엽, 이병규, 심재학, 박준태

4. 결과

4.1. 1차전

한국시리즈 1차전, 10월 19일 일요일, 14: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30,500명 (매진)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해태 이대진 0 0 1 0 1 1 0 2 1 <colbgcolor=#dcdcdc,#222222> 6 12 - 6
LG 김용수 0 0 0 0 0 1 0 0 0 1 5 - 4
중계방송사: 파일:SBS 로고(1994-2000).svg | 캐스터: 유협 | 해설: 정동진

승리: 이대진, 패배: 김용수, 세이브: 임창용
홈런: 이종범 (5회 1점) 이상 해태. 박종호 (6회 1점) 이상 LG
심판: 주 /1 /2 /3 /좌 /우

1차전은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렸다. ‘에이스 오브 에이스’라 불렸던 해태 에이스 이대진과 당시 한국시리즈 MVP 2회에 빛나는 LG의 에이스였던 ‘노송’ 김용수[17]의 선발 대결. 3회 볼넷으로 출루한 이종범이 2루 도루에 성공한 후 장성호에게 던진 포크볼이 원바운드되는 틈을 타 3루까지 출루한 후 최훈재의 우전 적시타로 선취점을 올린다. 이종범은 5회 2아웃에서 김용수의 변화구를 받아쳐 좌월 솔로 홈런을 기록한다.

이후 해태는 6회 김창희의 1타점 적시타와 8회 장성호의 2타점 적시타 등 4점을 추가하며 경기를 매조지었다. LG는 해태 선발 이대진에게 6이닝 1실점으로 묶이는 빈공에 허덕인다. 박종호가 이대진으로부터 얻어낸 솔로홈런이 이 경기의 유일한 득점이었다. 7회 마운드에 오른 임창용이 3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세이브를 올린다.

해태 이대진은 전 해에 이어 한국시리즈 1차전 승리투수의 영광을 누린다. 반면 1990년과 1994년 우승 당시 두 차례 모두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던 김용수는 이종범에게 5회 솔로홈런을 맞은 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8연승이 끝난 경기.[18]

4.2. 2차전

한국시리즈 2차전, 10월 20일 월요일, 18: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30,071명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해태 김상진 0 0 0 1 0 0 0 0 0 <colbgcolor=#dcdcdc,#222222> 1 5 - 3
LG 임선동 0 0 0 5 5 0 0 0 - 10 14 - 6
중계방송사: 파일:MBC 로고(1986-2005).svg | 캐스터: 양진수 | 해설: 허구연


승리: 임선동, 패배: 이강철
심판: 주 백대삼/1 허운/2 김호인/3 김찬익/좌 이규석/우 조종규

잠실구장에서 열린 경기. 장단 14안타로 10점을 몰아친 LG가 화끈한 타격으로 전날의 설욕을 한 경기. LG 선발 투수는 임선동, 해태 선발 투수는 김상진. 해태가 먼저 4회 초에 1점을 뽑으면서 앞서갔지만, LG는 해태의 바뀐 투수 이강철에게 4회 만루 찬스를 뽑아냈고 타석에 좌타자 동봉철이 등장하면서 해태도 투수를 김정수로 교체했고 LG도 우타자 노찬엽을 올렸다. 노찬엽은 풀카운트 승부 끝에 우중간 2타점 2루타를 날리며 역전에 성공했고, 곧이어 이종범의 실책과 심재학의 좌월 2타점 2루타로 LG는 4회 대거 5득점에 성공한다. 그야말로 소총수가 무엇인지 보여줬다.[19]

승기를 뺏긴 해태는 박진철을 등판시켰고, LG는 5회에도 홍현우의 실책과 3안타 등을 묶어 대거 5득점에 성공, 점수를 10:1로 벌린다. LG 선발 임선동은 5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를 따냈고, 천보성 전 감독의 벌떼야구로 해태의 타자들을 잘 막아 경기를 끝냈다. 1996년 한국시리즈 MVP였던 이강철이 이 날의 패전 투수였다.

4.3. 3차전

한국시리즈 3차전, 10월 22일 수요일, 18:00, 무등 야구장 15,200명 (매진)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LG 손혁 0 0 1 0 0 0 0 0 0 <colbgcolor=#dcdcdc,#222222> 1 - - -
해태 조계현 0 0 0 0 0 1 2 2 - 5 - - -
중계방송사: 파일:KBS 1TV 로고(1984-2018).svg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
승리: 강태원, 패배: 이상훈, 세이브: 임창용
홈런: 이종범 (6회 1점), (7회 2점) 이상 해태
심판: 주 /1 /2 /3 /좌 /우

류지현의 적시타로 1:0으로 앞선 상황에서 LG의 천보성 전 감독은 선발 손혁을 조기 교체하고 김기범, 차명석을 투입해 5회까지 무실점으로 해태 타선을 막는다. 그러다 6회말 선두 타자로 나온 해태 이종범이 차명석의 공을 받아쳐 좌월 솔로홈런을 기록한다. 이후 1사 만루 찬스에서 마무리 이상훈이 더 이상의 실점을 막았지만, 7회 이종범이 다시 이상훈의 142km/h 속구를 때려 우중월 연타석 투런 홈런을 기록하며 역전에 성공한다. 뒤이어 해태는 홍현우 김창희의 2루타, 최해식의 희생플라이[20]로 8회 2점을 보태며 5대 1로 승리를 거둔다.

해당 시리즈 처음으로 광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경기. 5회 2사부터 선발 조계현에 이어 구원 등판한 강태원이 8회까지 역투하며 승리투수를 챙겼고, 임창용이 세이브를 챙겼다. 패전투수는 이상훈이다.

4.4. 4차전

한국시리즈 4차전, 10월 23일 목요일, 18:00, 무등 야구장 15,200명 (매진)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LG 김용수 1 1 0 0 0 0 0 0 2 <colbgcolor=#dcdcdc,#222222> 4 - - -
해태 이대진 0 1 1 1 0 0 4 0 - 7 - - -
중계방송사: 파일:SBS 로고(1994-2000).svg | 캐스터: 유협 | 해설: 정동진
승리: 이대진, 패배: 김용수, 세이브: 임창용
홈런: 홍현우 (2회 1점), 김창희 (4회 1점), 김종국 (7회 2점) 이상 해태
심판: 주 /1 /2 /3 /좌 /우

1차전에 이어 이대진 김용수의 에이스간 재대결. 홈런 3방을 쏘아올린 해태의 장타력이 LG를 압도한 경기. 이대진은 7이닝 2실점으로 2승을, 김용수는 4이닝 3실점으로 2패를 기록했다. LG는 1회 1사 3루에서 서용빈의 2루 땅볼과 2회 1사 1루, 2루에서 신국환의 1타점 적시타로 2:0으로 앞서 나갔다. 그러나 해태는 2회 말 홍현우의 좌월 솔로 홈런으로 추격했고, 3회 말에도 1점을 뽑으면서 추격했다.

곧이어 4회 말 신인 김창희가 김용수의 직구를 받아쳐 좌월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3:2로 역전한 해태는, 7회 말 김종국이 LG 구원투수 송유석을 상대로 좌월 2점 홈런을 날리는 등 대거 4득점하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LG는 9회 초 2점을 만회하며 반격했지만 2사 2루 찬스에서 박종호 임창용에게 삼진을 당하면서 해태의 승리. 임창용은 이 날 세이브로 시리즈 3세이브째를 기록했다.[21]

4.5. 5차전

한국시리즈 5차전, 10월 25일 토요일, 14: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30,500명 (매진)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B
LG 임선동 1 0 0 0 0 0 0 0 0 <colbgcolor=#dcdcdc,#222222> 1 2 - 2
해태 김상진 0 0 2 1 3 0 0 0 - 6 9 - 5
중계방송사: 파일:MBC 로고(1986-2005).svg | 캐스터: 양진수 | 해설: 허구연[타사중계5]

승리: 김상진[23], 패배: 임선동
심판: 주 /1 /2 백대삼/3 조종규/좌 허운/우

LG가 원정팀의 선공으로 해태가 홈팀의 후공으로 하는 중립경기로 LG는 선발투수로 2차전 승리투수인 임선동을, 해태는 2차전 선발투수로 등판해 3회에 조기 교체된 김상진을 선발로 올렸다. LG는 1회초 서용빈이 1타점 적시타로 류지현을 불러들이며 선취점을 얻는다. 그러나 서용빈은 주자로 있을때 1사 상황에서 발생한 후속타자 심재학의 평범한 뜬공아웃에서 투아웃 상황에서의 뜬공아웃으로 착각하여 이닝이 종료된 줄 알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다가 해태 수비진들의 후속플레이에 더블아웃당하는 본헤드플레이를 저질러 그거로 LG의 1회초 공격은 종료되었다. 해태는 3회 말 장성호의 1루 땅볼과 최훈재의 1타점 2루타로 역전에 성공한다. 뒤이어 4회 말 김종국의 중견수 앞 안타로 1점을 추가했고, 5회 말엔 2안타와 상대 실책으로 3점을 추가하며 승부가 해태 쪽으로 기울었다.

이 날 경기는 잠실구장에서 14시부터 열렸고, 날씨가 흐려졌다 비가 오다가 다시 해가 뜨는 등 날씨변덕이 매우 심했다.

9회까지 2안타 1실점으로 완투한 아기호랑이 김상진이 승리투수, 4.1이닝 3실점의 임선동이 패전투수가 됐다. 9회초 마지막에 박종호의 타구를 중견수 김창희가 잡아내면서 포수와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던 김상진의 모습은 2009년 기아 타이거즈가 우승하기까지 타이거즈 팬들의 마음 속에 마지막 우승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24] 이 시리즈 MVP는 이종범. 이로써 이종범은 1993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25]

5. 총평

5.1. 우승: 해태 타이거즈

5.2. 준우승: LG 트윈스

6. 여담

우승 당일 우승팀에게는 성대한 축하연이 열리고 구단주나 모기업 고위 경영진 등이 직접 방문하여 수고했다는 의미로 돈봉투를 돌린다. 다만 해태는 그룹 규모가 규모니만큼 축하연의 정도 및 돈봉투 액수는 적었겠지만...[26]
그러나 우승 당일 그 날은 숙소(서울 리베라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에서 술 땡긴 것이 전부. 높으신 분이 오는 일도 없었다. 그러자 최고참 김정수 이하 선수들은 우승했는데도 힘이 빠져 술만 연거푸 마시다가 자리를 뜬다. 선수들도 그룹 사정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승했는데.. 라고 기대했지만 눈앞에 닥쳐오니 흥이 안 났던 모양. 그리고 우승 당일 1주일이 지나고 11월 1일, 모기업 해태그룹 1997년 외환 위기 부도처리되고, 이종범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팀인 주니치 드래곤즈로 급히 임대하여 주니치에서 받는 임대료로[27] 2001년 전반기까지 구단을 꾸려갔으나, 결국 돈 앞에 장사가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자 후반기 구원의 손인 현대자동차그룹에서 해태 선수들을 인수하여 KIA 타이거즈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시작한다.

1997년 외환 위기의 큰 피해자는 해태 뿐만이 아니었다. 해태보다 사정이 더 열악했던 쌍방울 레이더스도 제대로 직격탄을 맞았는데 팀의 절반이나 다름없던 박경완을 1997년 시즌 후 현대 유니콘스에게 결국 넘겨줬고[28] 직후에는 불펜의 핵인 조규제 김현욱은 물론 쌍방울의 상징과도 같았던 4번타자 김기태까지 팔아치우며 목숨을 연명하게 된다. 결국 1997년이 쌍방울의 마지막 전성기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2000년 1월 쓸쓸히 해체 수순을 밟았다.

LG 트윈스도 대기업 야구단임에도 불구 IMF의 여파로 시즌 후 이상훈이 이종범과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을 한다. 이상훈의 경우는 IMF와 상관이 없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약속한 포스팅비를 주지 않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헐값에 간판 스타를 보내기 싫었던 LG구단이 자매구단인 주니치로 보낸것이지 IMF와는 무관하다. 게다가 이상훈이 갔던 주니치는 당시 MBC 청룡 시절부터 자매 결연을 했던 구단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이상훈을 참조하면 된다. OB 베어스도 IMF 여파를 제대로 받아서 이명수, 김형석 등 몇몇 선수들을 방출한다. 김인식 감독은 특히 이명수와 김형석 방출건에 대해서는 구단에 대단히 섭섭해했다. 이 둘은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주역에 KBO 골든글러브를 받았던 선수들이였기 때문이다.[29] 사실 김형석 등 일부 선수들은 OB 베어스 항명파동으로 프런트에 제대로 찍혔기 때문에 이 즈음 구단의 긴축 경영을 구실로 보내버렸다. 이후 OB맥주 매각설이 흐른데다가 그룹 이름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려는 의도로 1999년 시즌에 두산 베어스로 바꾸었다.

롯데 자이언츠는 8년 만에 8위를 해버렸다. 주축 선수였던 주형광이 1996시즌 종료 후 현역으로 입대했으나 귀가 조치 후 재검에서 의병제대 판정을 받고 팀으로 복귀하여 시즌 내내 굴려졌다. 시즌 전 전준호는 문동환 입단에 따른 위약금 5억원을 편법으로 해결하는 조건으로 현대로 이적하여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30][31]

한편 현대 유니콘스 현대그룹 설립 50주년을 맞았고, 앞선 과정으로 롯데에서 전준호를 데려왔다. 그러나 그 전준호는 역시나 앞서 말했듯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고... 결국 가을 야구와는 거리가 먼 6위로 시즌을 마쳤다. 대신에 이명수 등 IMF 사태로 방출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였고, 쌍방울에서 박경완, 조규제라는 대어를 사왔다.[32] 이듬해 현다는 전준호가 부활하고 보강이 빛을 발한 덕에 창단 첫 우승 및 인천 연고 팀 17년 만에 우승이라는 겹경사를 누렸다. 삼성 라이온즈 이승엽의 본격적인 홈런왕의 서막을 여는 시대를 개봉했다. 이종범 양준혁, 박재홍 홈런왕 레이스 4파전이었는데 2개차로 아슬아슬하게 이승엽이 가져가게 되었다. 당시, 이종범은 유격수 사상 첫 30-30 클럽 클럽을 가입하였으며, 1번타자 홈런왕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지만, 시즌 중반 슬럼프가 도지면서, 이승엽에게 추월을 당하였다. 박재홍은 96경기만을 출전하며 30일간 부상으로 빠지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20-20 클럽 가입을 하며 홈런 4위에 해당되는 큼지막한 기록을 세웠으며, 양준혁 또한 박재홍과 더불어 20-20 클럽 및 30홈런으로 이종범과 공동 2위를 기록했다. 결국, 4명의 선수는 시즌이 끝나고 KBO 골든글러브를 받게 된다. 1998년 시즌 역시 세 사람 함께 받았으며 이종범은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여 KBO 리그와는 무관했다. 하지만 시즌 도중 사구 사고를 당해 이후 선수 생활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는 이 해 현대에도 밀리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 해 구대성은 팀 내 고과 1위였는데 연봉 협상 때 올려준다니, 오히려 본인이 연봉 삭감을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선수의 자의적 연봉 삭감 요청은 KBO 선수들 중 첫번째 사례다. 한동안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가 2021시즌을 앞두고 서건창이 연봉 자진 삭감을 요구하는 새로운 사례가 생겨나 유일한 사례는 아니게 되었다.

송유석은 1996년 초에 있었던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에서 주동자 그룹의 한 명으로 몰려 1996년 시즌을 마치고 LG 트윈스로 이적하여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친정팀을 상대하게 됐다. 당시 해태는 항명사건 주동자들에게 서서히 차례차례 보복을 가했는데 송유석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길 코칭스태프들은 송유석에게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패전처리로 내보낸 다음[33] 타자에게 빈볼을 던지게 했다. 경기 퇴장과 포스트시즌 출장정지 처분을 다분히 노린 코칭스태프의 꼼수였는데 송유석은 '아 이것이 하와이 항명사건의 보복이구나'를 마운드에서 직감했다고 하며 차마 빈볼을 던질 순 없어 포수 뒤의 백네트로 공을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정삼흠 전 코치와 통화하여 해태-LG 트레이드를 통해 유니폼을 갈아 입었다.

이 시리즈 2차전에서 패전투수가 된 이강철은 26년 후 kt wiz 감독으로서 LG에게 우승 트로피를 내주게 된다.

우승 엠블럼은 원래 1991년 한국시리즈 우승 엠블럼과 함께 SERISE세리세&시라이즈로 적혀있었다. 단 나무위키에 업로드된 우승 엠블럼은 오타가 수정되어 있는 형태로 업로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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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 선수단 명단 선수단 등번호
유니폼 KIA 타이거즈 유니폼
경기장 1군 파일: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로고.svg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월명종합경기장 야구장 무등 야구장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2군 기아 챌린저스 필드 전남 야구장
타이거즈 역사 해태 타이거즈 역사 KIA 타이거즈 역사 감독 해태 왕조 김씨 왕조(김씨 타선) KKK포 이강철-조계현-이대진 SKY CK포-LCK포 양현종-헥터 원투펀치 박전문 전장정(JJJ 라인)
타이거즈 기록 해태-KIA 타이거즈 기록 및 인물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1호 기록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공사 현장 변천사 홈런존 저주
우승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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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번째로 한국시리즈 MVP 2회 수상. 첫 번째는 김용수. [2] LG는 이전에 진출한 2차례(1990년, 1994년) 한국시리즈를 모두 4연승으로 우승했다. [3] 청룡 시절까지 포함하면, 1무 4패가 있다. 그 1무 4패를 안긴 팀이 바로 해태다. [4] 1995 시즌에도 정규시즌 3위였던 롯데전 6승 12패(후반기 1승 8패) 때문에 OB에 11승 1무 6패로 앞서고도 0.5경기차 2위에 머물렀고, 결국 준PO를 생략한 롯데에 플레이오프에서 2승 4패로 탈락했다. [5] 현대의 LG전 약세는 왕조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현대가 삼청태현 시절을 빼면 유일하게 상대 전적에서 뒤진 것이 LG이니 말 다한 셈. [6] 삼성은 재미있게도 현대가 존속했던 1996~2007시즌 중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해 본 것이 달랑 '3시즌'이 전부였다. [7] 이종범의 연속 도루성공 기록이 29개에서 멈춘 경기이기도 했다. [8] 송구홍은 1993년 4월 11일 광주 경기에서도 9회초 투아웃에서 조계현의 노히트 노런을 깨는 안타를 친 바 있었다. 공교롭게도 1997 시즌 종료 후 송구홍이 해태로 트레이드되기 며칠 전 조계현이 삼성으로 이적하여 이 둘은 선수로서는 같은 팀에서 만나지 못하다가 2012 시즌에 LG에서 조계현은 1군 수석코치로, 송구홍은 1군 주루코치로 서로 만났다. [9] 이후 어이 없게도 모기업은 IMF 사태가 터져서 부도가 나고 말았다. 돈만 있었으면. [10] 1, 2차전만 연고지에서 치르게 되어 있었던 1983년을 생각해 보면, 1차전만 광주, 2, 3, 4, 5, 6 ,7차전이 모두 잠실이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 [11] 하지만 당시 저 두 팀은 이미 잠실 팀이었다. 저 해에는 신설된 규정에 따라 준플레이오프 없이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가 성사된 유일한 시리즈였다. 3위 롯데는 플레이오프 7경기 중 4경기가 잠실이었고, 한국시리즈 또한 7경기 중 역시 5경기를 잠실에서 치러 엄청난 고전을 했었다. 그냥 롯데가 운이 없었을 뿐... [12] 그런데, 규정이 바뀐 지 2년 후에 KBO가 양대리그를 시행하면서 플레이오프-한국시리즈 규정 또한 크로스 토너먼트로 바뀌었고, 그 때 이 규정이 폐기되었다가 2001년 단일리그로 회귀하자 다시 부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996년 이전 규정이 부활하는 바람에 플레이오프 진출 팀이 두산 베어스였던 2001년 한국시리즈는 3차전부터 계속 잠실구장에서만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13] 물론 21세기에 들어서도 2009년, 2017년, 2024년에 타이거즈라는 이름을 달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해냈지만 해태라는 팀명이 KIA로 바뀐 후의 우승이었다. [14] 사실 1998년의 경우 마지막까지 4강 싸움을 하다 최종전에서 OB에게 패하며 1경기 차로 놓친 것이었으나,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15] 2017년에는 김대중 계통인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이 대통령이었지만 사실 이것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어서 가능했다. 아마 탄핵이 없었다면 새누리당 정권에서(딱 박근혜 정부의 말미 중 말미 시기다.) 우승이 이뤄졌을 것이다. [16] 사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자신의 연고지에 속한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경우는 이명박(2011, 2012 삼성), 박근혜(2013, 2014 삼성), 윤석열(2023 LG) 이렇게 셋이다. [17] 이듬해 한국시리즈에서도 역시 2패를 당한다. [18] LG가 그다음날 2차전을 이겨서 만약 1차전도 이겼다면 한국시리즈 10연승을 달렸을 것이다. [19] 안타깝게 LG는 심재학과 김동수를 제외하면 홈런 10개 이상 선수가 전무했다. 두 선수의 홈런은 각각 15개, 17개다. [20] 김동수와 김창희의 충돌이 있었던 상황에서 김창희의 발은 베이스를 터치하지 못했으나 주심은 세이프로 선언했다. [21] 그리고 2016년 다시 고향팀인 타이거즈로 돌아와서 역대 포스트시즌 최고령 세이브이자 세이브를 따낸 것은 타이거즈에서 있던 6,927일(약 19년) 만에 포스트시즌 세이브를 달성했다. [타사중계5] KBS 제2라디오 캐스터 김재영 - 해설 이광권. [23]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20세 230일). [24] 그리고 20년 뒤에 열린 한국시리즈에서 25살 사이드암 투수가 김상진처럼 완투는 아니었지만, 서울팀 상대+잠실에서 치르게 된 생애 첫 한국시리즈 선발 등판에서 5.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이 때의 장면을 회상하게 했다. 다만 김상진은 첫 경기에서는 패전했다. [25] 야수로는 사상 첫 2회 MVP 달성자였다. [26] 사실 해태는 다른 구단보다 모기업의 재력이 부족했기에 구단 초창기에도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박했던 팀이었다. 그래서 선수들의 불만이 꽤 오랫동안 쌓여있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박한 대우 때문에 선수들이 암묵적 봉기에 나서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1984년 봄의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이다. [27] 1995년 시즌을 마치고 선동열도 당시 같은 구단이던 주니치로 보내어 일본 구단으로 부터 많은 돈을 받아 구단 살림에 썼었다. [28] 현금 9억원 + 포수 김형남, 야수 이근엽도 함께 건너갔다. [29] 그리고 이명수는 현대에 입단, 이듬해 열린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30] 문동환은 롯데 자이언츠의 지명을 거부하고 거액의 계약금을 받으며 현대 피닉스에 입단했다. 롯데가 문동환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현대 피닉스에 위약금을 지급해야 했는데 현대 유니콘스가 5억원을 주고 롯데 자이언츠의 전준호를 데려왔다. 롯데는 문동환에게 5억원의 계약금을 지급하고 문동환은 그 돈으로 위약금을 현대 피닉스에 물어준 것이다. [31] 그러나 1997 시즌 전준호의 성적은 프로 데뷔 후를 기준으로 가장 부진했다. 이는 시즌 전 갑작스러운 현대 이적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32] 정작 조규제는 기대치만큼은... [33] 1995년 시즌에는 10승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구위가 좋았으나 1996년에는 다소 부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