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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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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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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2005)
2000년 / 340홈런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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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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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형
(2003~2019)
2017년 / 505도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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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KBO 리그 투수 마일스톤 기록 }}}}}}}}}

보유 기록
최연소 홈런 만 17세 11개월 20일[1]
최연소 1,000경기 출장 만 25세 11개월 12일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82~1995).svg
타이거즈 레전드 올스타
2009. 07.25. 한국야구위원회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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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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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82~1995).svg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17~2020).svg
타이거즈 레전드 올스타
2020. 08.26. KIA 타이거즈 공식 어플리케이션 팬 투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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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번
차영화
(1982~1989)
홍현우
(1990~2000)
정성훈
(2002)
LG 트윈스 등번호 33번
김상호
(1999~2000)
홍현우
(2001)
박용택
(2002~2020)
LG 트윈스 등번호 5번
한규식
(2001.7.13.~2001)
홍현우
(2002~2004)
안재만
(2005~2007)
KIA 타이거즈 등번호 38번
소소경
(2003~2004)
홍현우
(2005)
박정규
(2006~2009)
}}} ||
파일:/image/032/2005/11/04/5a0572b.jpg
홍현우
洪炫佑 | Hong Hyeonwoo
출생 1972년 9월 28일 ([age(1972-09-28)]세)[2][3]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서석초 - 광주동성중 - 광주상고[4]
포지션 3루수, 2루수, 1루수, 유격수[5]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0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90~2000)
LG 트윈스 (2001~2004)
KIA 타이거즈 (2005)
지도자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 타격 인스트럭터 (2008~2009)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 감독대행 (2009)
동강대학교 야구부 타격코치 (2014~2015)[6]
동강대학교 야구부 감독 (2016~)[7]
해설위원 CMB 광주방송 야구 해설위원 (2013)
응원가 LG 시절
The Fans - Ole Ole Ole[8][9]

1. 개요2. 선수 경력3. 주요 기록4. 은퇴 후5. 여담6. 연도별 주요 성적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해태 타이거즈, LG 트윈스, KIA 타이거즈의 우투우타 내야수.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3루수 2루수.

1990년에 해태 타이거즈에서 데뷔하여 이종범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의 후기 왕조를 이끌었으며,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활약을 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하였다. 이후 거액에 FA로 이적하였으나 부상과 부진으로 신음하며 대표적인 먹튀 선수라는 오명을 얻는다. 말년에 트레이드로 다시 KIA로 넘어와 1년을 보내고 은퇴한다.[10] 등번호는 5번(해태) - 33번(LG, 2001) - 5번(LG) - 38번(KIA, 2005).

현역 시절 별명은 '젊은 그대'.

2. 선수 경력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수상자 (1995~1997)

파일:external/dimg.donga.com/6801434.1.jpg

광주상고를 졸업하자마자 프로에 입단해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주전을 꿰차 역대 최연소 나이 데뷔 홈런(만 17세 11개월 20일)[11], 최연소 1000경기 출장 (25세 11개월 12일)이라는 기록부터 7년 연속 100안타, 두자릿수 도루와 8년연속 두자릿수 홈런, 3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홍현우를 믿고 코칭스태프와의 관계가 미묘[12]했던 한대화 LG 트윈스로 보내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13]

프로 입단 첫 해에는 백업이었지만, 91시즌 중반부터 주전을 차지해 .292의 타율과 8개의 홈런을 뽑아내며 기존의 주전 2루수였던 선배 백인호의 자리를 차지했고, 이듬해인 92년의 활약을 통해 본격적으로 홍현우라는 이름을 알렸다. 2루수로서 0.333이라는 훌륭한 타율과 17홈런을 기록할만큼 준수한 장타력을 뽐냈으며 무려 97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2위의 자리에 오른다.[14] 수비에서도 흠잡을 곳이 없었기에 골든 글러브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적이 엇비슷했을 뿐더러 한국시리즈 우승 프리미엄의 덕을 본 박정태에게 밀려 골든 글러브를 놓치고 만다.[15] 대놓고 표현하면 투타 92~93의 차가 있더라도 93 이종범에 비교해도 훨씬 우위였었다.

1993년은 타격성적은 전 해에 비해 대폭 하락했지만 그해에 입단한 대졸신인 이종범과 영건 키스톤콤비를 이루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고비때마다 활약하며 그 해의 우승을 이끌었다. 1993년에는 .262에 13홈런 61타점을 기록했다.[16] 이 당시 빙그레와의 경기에서 많은 점수차로 지고 있는 와중에 이종범과 웃으며 캐치볼을 하다가 선배한테 걸려 뺨을 4~5대 세게 맞았고 입안이 터진 일도 있었다.[17]

1994년부터는 트레이드된 한대화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272에 16홈런 72타점이라는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으며, 95년에는 .305 16홈런 65타점을 기록하며 이종범의 방위병 공백을 홀로 메꾸었다. 해태는 그해 4위를 기록하며 팀방어율 1위(3.06)과 팀타율 7위(.242)의 엇박자 행보를 보였는데, 그때 타선의 중심을 잡아준 선수가 바로 홍현우다. 그가 있었기에 해태는 비록 4위에 머물렀지만[18] 선동열, 이강철, 조계현 등 투수진과 더불어 명가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올스타전 직전에 폭행시비가 나서 팬투표에서 선발되었지만 올스타전에 나가지는 못했다. 그 대신 주전으로 출전한 한화 이글스 정경훈이 미스터 올스타를 받았다. 3루수 수비력을 키워준건 다름아닌 최고참 1루수 김성한이었다. 김성한의 글러브에 정확하게 공이 꽂히지 않으면 빠진 공을 주우러 1루 베이스 뒤쪽까지 뛰어가서 공을 주워다 공손히 바쳐야 했고 머리통을 한 대씩 맞았다고 한다.[19]

1996년 홍현우는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 중 하나이자 1990년대 KBO 리그 최고의 시즌 중 하나를 보냈는데, 0.332/0.453/0.533의 슬래시라인과 OPS 0.986, WRC+ 186.1, 17홈런 67타점 18도루를 기록하며, 팀의 8번째 우승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스탯티즈 기준으로 3루수로는 유일하게 두자릿수의 WAR/144를 기록하였다.(10.001) WAR이 역대 야수들 중 10위에 해당되고 WAR/144로 환산하면 9.555를 기록한 2010 이대호와 9.721를 기록한 1999 이승엽을 제치며, 그의 앞에 있는 선수는 이종범[20]과 2015년의 에릭 테임즈, 2003년의 심정수, 1991년의 장종훈 그리고 80년대 초반 80경기 체제의 백인천과 100경기 체제의 장효조뿐이다. 간단히 말해 KBO 역대 야수들 중 10위 이내에 들어갈 정도의 기록을 세웠다는 뜻이다.[21] WRC+ 에서 역대 29위라는 것,[22] 타이거즈 역사상 순수 타자로서의 능력은 94년도 이종범을 빼면 아무도 그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96년의 홍현우의 기록이 더욱 가치가 높은 이유는 96년은 KBO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투고타저의 시즌이었다는 점이다. 0.346을 기록한 양준혁이 타격왕이었고 나란히 0.332를 기록한 이종범과 홍현우는 2, 3위였다.[23][24] 홈런이 약간 부족해 보이긴 하지만 투고타저였던 당시는 25~30개면 홈런왕을 하는 시기였고 홍현우의 17홈런은 9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야말로 이종범과 함께 리그를 이끌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더욱이 96년 해태의 팀타율은 0.245였으며,[25] 이종범과 홍현우를 빼면 팀타율 .219였다는 점에서 타이거즈의 8번째 우승은 홍현우가 없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이종범이 방위로 인해 초반 몇 경기에 출전이 불가능한 때에도 출전해 팀을 지탱한 팀 유일의 96시즌 전 경기 출전 선수였다. 97년 시즌에 그의 타율은 다소 하락했지만 장타력은 상승하여 처음으로 20-20을 달성하며 팀의 V9에 핵심적 공헌을 했다.[26] 1998년에는 이러한 페이스가 다소 식어, .269 15홈런 69타점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다만 그해 3루 골글을 차지한 김한수와 war*에서 1정도 차이가 날 정도로 기량은 유지하고 있었다.[27] 당해 현대 유니콘스에서 스캇 쿨바 김경기가 3루를 분담하고 있었고, 스캇 쿨바보다는 분명 못한 성적이었다.[28]

투고타저 기조가 뚜렸했던 1993~1997시즌 사이를 뛰었기때문에 홍현우의 누적기록 내지 비율기록은 요즘에 보기엔 낮아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전적으로 보면 그는 매년 홈런과 타점 10위권 안에 안착했으며, 2루와 3루를 메인 포지션으로, 여차하면 유격수와 1루까지 커버할 정도로 폭넓은 수비실력을 보였다. 그런 그가 점점 주가가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더욱이 이종범이 일본으로 진출하면서 그의 존재감은 상당히 뚜렷해졌다. 그리고 대망의 99시즌이 밝았다.

1999년 시즌, 내야진 조정에 따라 다시 2루수로 전향한 홍현우는 2015년 야마이코 나바로[29]가 경신하기 이전까지 역대 2루수 한시즌 최다 홈런, 타점기록 이었던 34홈런 111타점을 쳐냈다. 비록 타고투저의 영향은 있었어도 2루수로만 시즌의 대부분인 123게임을 뛰면서[30] 30-30을 이루었으며 2루수로서 쳐낸 34홈런은 1987년 김성래가 홈런왕을 달성하면서 쳐낸 22홈런과는 까마득한 차이가 있었다.[31] 말 그대로 전성기. 양준혁, 샌더스와 클린업을 이루면서 타이거즈와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32] 그러나 정작 이해 2루수 골든글러브는 92년에 이어 또 박정태에게 밀려 논란이 있었다.[33] 이 논란을 의식했는지 박정태는 골든글러브 수상 소감 중 "홍현우 선수에게 미안하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렇게 홍현우가 어마어마한 성적을 내게 된 것은 바로 위기감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97년 즈음부터 리그에 30홈런타자가 하나 둘씩 등장하고, 98년에는 용병제도의 설립으로 타이론 우즈와 같은 거포용병들이 리그를 초토화 시키면서 타고투저의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무리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장타력을 보강한 것. 그래서 홍현우에게 99시즌은 그의 최전성기였지만, 동시에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공존한다.[34]이 여파였는지 FA 직전이었던 2000년은 부진[35][36]했지만 그 이전의 압도적인 성적, 젊은 나이 덕에 그해 FA 최대어로 떠올랐다.

해태 시절의 홍현우의 플레이스타일은 삼진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삼진 수를 능가하는 볼넷을 얻어내는데다 장타력까지 갖추었으며, 타점도 상당히 쌓아올리는 전형적인 ops형 타자였다. 출루율왕을 차지한 1996시즌엔 이종범과 거의 차이가 없는 WAR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다만 적극적일 때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타격에 임했는데, 그로 인한 별명으로 홍병살이라는 별명이 존재했다. 그러나 1995시즌에 전경기 출장을 했음에도 병살타는 단 1개에 불과했으며, 병살타의 갯수가 두 자릿수를 기록한 것도 4시즌 정도에 불과하다. 그저 병살타 1위였던 97년이 해태의 마지막 우승의 해였으며, 그로인해 굉장히 강하게 뇌리에 박히게 된 것.

타격만 비교하자면 1990년대 최고타자로 꼽히는 이종범, 양준혁, 김기태, 장종훈그리고 당시 기준으로는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이승엽, 박재홍과 비교해본다면 조금은 부족했다. 그러나 이종범을 제외하면 수비 부담이 적은 1루수, 코너 외야수, 지명타자를 맡은 저들과 달리 수비 부담이 상당히 컸던 2루와 3루는 물론 내야 전 포지션을 커버가능한 전천후 내야수였다. 즉, 타격은 위에서 언급한 선수들에게 밀릴지 몰라도 그들이 할 수 없었던 수비가 가능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선수였다.[37] 거기에 고졸인데다 팀에서 빠르게 자리 잡은 덕분에[38] 29세라는 굉장히 젊은 나이에 FA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2000년 당시 생겨난 FA제도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렸다.[39] 오히려 WAR을 본다면 18억을 지른게 아깝지 않을 정도 였다.

시즌 뿐 아니라 한국시리즈에서도 상당히 강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종범과 2승을 올린 조계현에 묻혔지만 그야말로 그 둘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쳤다. 3차전에서 광주상고 1년 선배인 박충식에게서 6회 솔로홈런을 터뜨리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박충식의 181구 완투를 유도했으며, 5차전에서는 결승 타점인 희생플라이를 쳤다. 7차전에서는 이종범의 도루에 이어 적시타를 터뜨리기도 했다. 야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일 그의 홈런이 없었다면 기력을 모두 소모하지 않은 박충식의 존재만으로도 시리즈의 향방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96년 시리즈에서 1차전에서 현대의 선발 위재영을 흔드는 2점 홈런을 터뜨리며 승기를 잡았으며 97년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서 김용수를 상대로 0:2의 불리한 상황에서 추격하는 솔로홈런을 쳐냈다. .

종종 나오는 이야기가 비슷한 시기에 뛰었던 김한수와의 비교인데, 홍현우의 경우 2루수 출전 이닝이 커리어의 절반에 가까운 점에서 이미 김한수와의 비교는 무리라고 볼 수 있다. 그냥 그기록이 풀타임 3루로 뛰었어도 우르크로 따지면 김한수랑 차이가 크다. 더욱이 선수 생활을 3루수와 1루수로 보냈음에도 임팩트 있는 성적보다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승부를 보는 김한수이기에, 수비부담이 더한 2루까지 병행한 홍현우에게 누적성적에서 밀린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비교가 힘든 상황. 새삼스럽지만, '''홍현우는 두 사람의 평균 OPS, wOBa 그리고 wRC+ 모두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비단 누적뿐 아니라 임팩트에서도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 단적으로 김한수 커리어 하이가 99년인데, 홍현우는 그 해에 KBO에서도 역대급의 성적을 거두었다. 김한수 역시 분명히 훌륭한 3루수임에 변함이 없으나, 한대화-홍현우-김동주-최정으로 이어지는 3루수계보에 들어갈 만큼의 성적으로는 아쉬운 측면이 있다. 혹자는 홍현우는 30세에 들어서 곤두박질 쳤으니 단기 임팩트만 좋은게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홍현우는 20대 초반부터 10년간 거의 매해 리그에서 5위~10위권정도에 랭크될 정도로 뛰어난 타자였기에 꾸준함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다. 김한수는 타고투저 시즌에 대부분의 선수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총 14시즌동안 의미있는 성적을 낸 시즌이 홍현우의 10개의 시즌에 미치지 못하며, 한 시즌도 리그 5위권에 랭크되지 못했다. 즉, 임팩트나 누적이나 홍현우가 김한수에게 우위인 셈이다. 김한수가 내세울만한 것은 김한수가 커리어의 대부분을 3루수로 나와서 3루수로서 누적이 더 좋다는 것. 그러나 선수 개인에 대한 평가로 보면 포지션 변경으로 인한 적응 문제를 잘 극복하며 꾸준히 리그 최정상급의 내야수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올라간다.

2.2.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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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고, 당시 자금난에 시달리며 인수 기업을 찾던 해태 타이거즈는 거액을 들여 홍현우를 잔류시킬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어 시장으로 나오게 된다. 이후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삼성 라이온즈[40] 등이 FA 시장에 나온 홍현우를 영입하기 위해 경쟁을 펼쳤고, 결국 4년 총 18억의 거액을[41] 받고서 LG 트윈스로 이적한다.[42] 해태에서는 FA 보상 선수로 최익성을 받았다.[43]

그리고 그는 제대로 멸망하며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먹튀로 전락했다. LG에서 그의 성적은 처참할 정도였는데, 통산타율 .290을 왔다갔다하던 타격은 2003년(.238)을 제외하고 2할을 넘겨본 적이 없으며 4년 동안 221게임에만 출장하며 홈런은 14개, 도루는 2개를 기록하는 등 진정한 추락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추락한 원인은 FA를 앞두고 무리하게 파워를 끌어 올리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미친듯이 했는데, 그것이 무릎부상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44] 참고로 홍현우가 LG시절에 친 안타를 돈으로 환산하면 안타 1개에 약 1,117만원, 홈런 1개에 1억 5,714만원[45], 그리고 도루 1개에 9억원을 투자한 셈이라고 한다. 거기다 준주전으로 뛴 2003년을 제외하면 거의 매 시즌 부상 및 2군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결정적으로 뉴탯티즈 기준 승리기여도가 음수이다.

사실, 박동희의 인터뷰에 따르면 금액은 SK가 LG보다 더 많이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큰 무대에서 놀고 싶다는 마음에 LG와 계약했는데, 자신은 이것을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잠실 야구장이 워낙 넓다 보니 해태시절에는 타격 슬럼프에 빠져도 홈런 한방 치면 금세 회복이 되었는데, 잠실에서는 바로 펜스 앞에서 잡혔던 타구가 유독 많아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46]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 이미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지만, 계약 당시 가장 작은 구장 중 하나인 도원구장을 사용한 SK와 계약했다면 그의 성적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홍현우도 2000년 시범경기 중 땅볼타구를 처리하다 댄 로마이어[47] 충돌하는 바람에 이미 무릎에 부상을 얻은 상황이었고, 그 부상을 달고 2000년 시즌을 뛰었기 때문에 당시 LG가 FA 계약을 할 때부터 홍현우의 무릎 상태에 의구심이 든다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 이 무릎 부상 이후 두 번 다시 반등하지 못한걸 보면 어느 구장을 갔더라도 1999년까지의 퍼포먼스는 두 번 다시 보여주지 못했을 거라는 냉정한 평가도 있다.[48]

생각보다도 훨씬 더 심한 홍현우의 부진에, 당시 LG 팬들은 분노와 조롱을 넘어 그의 플레이 자체를 일종의 밈으로 만들어 자학개그를 하기도 했다.[49] 홍현우를 그분으로 부르고, 당시 홍현우의 스킨헤드 헤어스타일을 불교 승려에 빗대어 삼진이나 병살을 당하면 "그분의 대자대비함"이라고 비꼬았으며, 어쩌다가 안타라도 치는 날에는 미륵의 법력이 제대로 통했다며 역시 모셔오길 잘 했다는 글이 올라오는 식이었다. 특히 2003년 이후 LG는 이광환 2기 - 이순철 감독체제 하에서 성적도 신통찮았고 팀 분위기가 어수선했기 때문에, 홍현우의 부진은 팀에게도 팬들에게도 치명적이었다.

2.3. KIA 타이거즈 시절

결국 2004 시즌 후 외야수 이용규와 함께 친정 팀 KIA 타이거즈에 투수 이원식 소소경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친정 팀에서도 부상과 기량 저하로 인해 과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결국 2005년 시즌 후 KIA에서 방출된 뒤[50] 곧바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51] 은퇴 당시 나이는 겨우 33세로, 해태 시절 선배였던 이종범보다도 훨씬 빠르게 은퇴했고, 더군다나 동갑내기이자 1년 후배인 박경완이 40대가 넘어서까지 뛴 걸 생각해보면 홍현우의 은퇴는 매우 빠른 편이라고 볼 만하다.

3. 주요 기록

파일:KBO 로고(세로형).svg KBO 주요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기록 비고
1999년 30-30클럽 달성 [52]

4.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잠시 야구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한때 순천시에서 스포츠센터와 찜질방을 운영하는 등 야구와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모교인 광주동성고의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으면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윤여국[53] 당시 광주동성고 감독이 신병으로 쉬었을 때에는 감독 대행을 맡았다.

2009년 광주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해태 타이거즈 레전드 올스타중의 한 명( 2루수)으로 선정되어 그라운드를 밟았다.[54] 참고로, 홍현우 전체 커리어를 3루수 위주라고 분류하느냐 2루수로 분류하느냐는 상당히 애매한데, 2루수로 분류할 경우는 2루수 출신 최다홈런 기록자(188개)가 된다. KBO에서 홍현우보다 더 많은 통산 홈런을 친 선수 중에 2루수로 분류되는 선수는 없다.

2014년에 동강대학교 야구부 타격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야구부 감독은 해태시절 선배인 문희수이다. 그리고 가끔씩 광주지역방송인 광주CMB에서 KIA 타이거즈 홈경기 해설도 한다. 2015년 11월 4일 문희수에 이어 동강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2024년 현재도 재임중이다.

2022년 초부터 주목받았던 아득한 고교 후배이자 KIA 타이거즈의 고졸 신인 김도영을 보고 19살 신인답게 지금의 모습을 즐겨보라며 애정어린 조언을 하기도 했다. #[55]

5. 여담

해태 시절 별명이 "애늙은이", "젊은그대"[56]였다. 대졸 선수가 대부분이던 시절 조기 입학을 하고 고졸 후 곧바로 입단했기에 선배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선배들이 놀리려고 지어준 별명이라고 밝혔다. 야구 팬덤에서는 빡빡 민 머리로 홍미륵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57]
파일:홍현우-만자니오.jpg
위 사진과 같이 촬영 센스는 참 이상한데 원근법을 무시한 사진 한 장이 마치 홍현우는 난쟁이에 만자니오가 거인을 만들어버렸다.[58]

이 선수를 표현하자면 90년대 WAR* 1위 이 한마디로 표현이 가능하다. 양준혁, 김기태, 이승엽, 박재홍보다 장타력은 쪼금 부족했고, 유지현, 정수근, 이종범에 비하면 주력과 수비는 쪼금 떨어졌지만 말 그대로 저들을 버금가는 능력을 가진 완벽에 1% 부족한 99% 5툴 플레이어, 동시대에 120% 5툴 플레이어었던, 말 그대로 이종범에 가려진 2인자. 이종범에 가려졌을 뿐 홍현우가 없었다면 96~97 우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59] 하지만 30에 들어서자마자 너무 일찍 노쇠화가 되어 먹튀가 되고 말았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2년 선배인 구한성이 술회하기를 인하대를 졸업하고 입단한 구한성보다 광주상고 졸업 직후 어린 나이에 주전 강타자로 발돋움한 홍현우에게 쉽게 먼저 말을 내릴 수 없었다고 했다. 34타수 무안타의 극심한 부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홍현우에게 기회를 준 김응룡 감독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기회를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술회했다.

20대 초반부터 주 전력이었기에 원정숙소 룸메이트 배정 때도 방졸로 선배 방장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대신 연습생, 매니저들과 같은 방을 썼다고 한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0 해태 타이거즈 51 77 .169 13 3 0 1 5 4 0 8 .247 .244
1991 91 226 .292 66 17 2 8 29 36 3 28 .491 .367
1992 126 420 .333
(3위)
140
(3위)
25 3 17 97
(2위)
87 6 89
(3위)
.529 .447
(2위)
1993 123 446 .262 117 21 1 13 61 56 10 68
(4위)
.401 .355
1994 126 463 .272 126 20 2 16 72 70
(5위)
14 54 .428 .347
1995 125 465 .305 142
(2위)
24 1 16 65 63 34
(4위)
62 .465 .385
1996 126 443 .332
(3위)
147
(3위)
30
(3위)
4 17 67 83
(3위)
18 101
(1위)
.533
(4위)
.453
(1위)
1997 126 436 .271 118 29 0 22 79
(4위)
73 20 93
(2위)
.489 .395
1998 126 442 .269 119 24 1 15 62 80 13 82
(4위)
.430 .381
1999 129 487 .300 146 26 0 34 111
(4위)
99 31 67 .563 .382
2000 88 291 .234 68 16 2 14 50 42 12 67 .447 .374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LG 트윈스 60 182 .198 36 9 0 2 16 18 1 30 .280 .310
2002 25 68 .118 8 3 0 1 8 3 0 5 .206 .173
2003 97 286 .238 68 12 3 9 27 34 1 41 .395 .332
2004 39 95 .179 17 5 0 2 12 11 0 7 .295 .229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5 KIA 타이거즈 25 59 .220 13 3 0 1 1 6 0 3 .322 .258
<rowcolor=#373a3c> KBO 리그 통산
(16시즌)
1483 4886 .275 1344 267 19 188 762 765 163 805 .453 .375

7. 관련 문서



[1] 2위는 최정의 18세 2개월 23일. [2] 특이하게도 72년 9월생임에도 모종의 이유로 학교를 1년 일찍 입학, 71년생들과 같이 졸업했다. 프로필상 72년생은 주민등록이 잘못됐거나 호적상 나이고 실제로는 71년생일 거라는 설도 있었으나 본인이 이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3] 김기태도 69년 7월생이지만 조기입학해서 유급없이 68년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기에 양준혁과 생일이 불과 3일 차이임에도 아직도 양준혁한테 형 소리를 듣고 있다. [4] 39회 졸업. [5] 아마 시절 유격수로 활약했었으며 프로 데뷔 첫해에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개막전 유격수로 출전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6] 2015년은 수석코치 겸 [7] 2015년 9월부터 감독대행직 수행 [8] 날려라 날려라 날려라 홍현우~ 홍현우~ X2 [9] 이 시기 현대 박경완도 같은 노래였다. 단지 홍현우는 "날려라" 였고 박경완은 "홈런" 이였다. [10] 이때 같이 온 선수가 팀의 간판 스타로 성장한 이용규 [11] 홍현우가 1년 일찍 학교를 갔기에 가능했다. 2017년 김성윤의 데뷔 홈런 당시 중계를 하던 엠스플 측 자료화면으로 확인되었으며, 원래 기록 소유자로 알려져 있던 최정보다도 더 빨랐다. 다만 통념과는 달리 역대 최연소 신인 기록은 갖고 있지 않다. [12] 골든글러브에 한해 기본으로 홈런 20개를 기록했던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해태 특유의 짠 보너스와 연봉으로 불만이 많았고, 김응룡과도 마찰이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단적으로 93년도 올스타전 당시 수비도중 손에 찰과상을 입어 쉬고있다가 자신의 타석을 깜박한 한대화를 덕아웃에서 구타하기도 했다. [13] 한대화가 선수시절을 보낼 당시는 3루 대신 2루를 주로 봤었다. [14] 이해에 기록한 97타점은 역대 만 20세 선수의 기록 중 최다이다. war도 3위로, 박정태를 앞섰다. [15] 되돌아볼 때, 스텟으로 결산을 해보면 홍현우가 약간의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다. 해태가 우승했다면 홍현우, 빙그레가 우승했다면 막상막하의 경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16] 1993년이 워낙 심한 투고타저였기 때문에 20홈런을 넘긴 선수도 김성래, 양준혁 둘 뿐인데다, 홍현우보다 홈런을 많이 친 선수가 앞의 둘을 포함해 장종훈, 이종범, 김동수, 강기웅, 이종두까지 7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태평양, 쌍방울, OB, 롯데에서는 홍현우보다 많은 홈런을 친 타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만큼 펀치력에서는 리그 상위권의 성적을 보인 시즌이었다. [17] 97타점을 치는 타자에게, 지고 있는 경기에서 웃는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했을 정도니 당시 프로야구 내(특히 해태같은 팀)에 만연했던 강압적 위계질서를 짐작할 수 있다. [18] 당시 3위 팀과 4위 팀의 게임차가 3.5게임 이상 차이나면 준플레이오프는 치르지 않는다는 규정때문에 해태는 4위를 차지하고도 포스트 시즌에 나가지 못했다. 1998 시즌까지 유지된 이 규정으로 시즌 4위가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한 사례는 95년 해태가 유일하다. [19] 이런 방식은 젊은 시절 선동열이 선배 포수 심재원과의 훈련을 통해 제구력을 가다듬었던 것과 비슷하다. [20] 오타가 아니다. 무려 WAR/144가 10이 넘는 시즌이 3시즌(94, 96, 97)이나 되며 이 3시즌 모두 96홍현우를 능가한다. [21] 3루수로는 WAR가 8.75로 8.82에 이은 2010년 7관왕의 이대호에 이어 2위지만, 2010년은 133경기 체제였고 1996년은 126경기 체제였던 관계로 144경기 체제를 전제로 하면 홍현우의 우위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홍현우는 후반기에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우위라고는 단정짓기 힘들다. 시즌 활약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 느낌을 비교하는 거다. [22] 물론 WRC+는 타자로서만의 기록이기에 2010년의 이대호가 1996년의 홍현우를 능가한다. [23] 147/443의 홍현우와 149/449를 기록한 이종범, 역시 2모차이로 이종범의 승리였다. [24] 타이거즈 선수의 개별시즌 역대 최고 출루율은 타율 0.393에 0.452라는 출루율을 기록한 1994년의 이종범이 아닌 .453을 기록한 1996년의 홍현우라는 점도 특기할만한 사항. [25] 이종범 홍현우를 빼면 딱히 좋은 타격을 보인 선수는 없었다. 이순철도 한창 하락세를 타면서 삽질하던 시기였고, 김종국 은 프로 초년에도 멘도사였다. 이건열이나 박재용, 이호성은 2할 5푼 전후의 타격을 보였다. 장성호 는 그때까지만 해도 백업이었다. [26] 비록 타율은 .271에 그쳤지만, 볼넷을 많이 얻어내서 .395의 출루율을 기록한다. [27] 즉 당시는 세이버를 전혀 보지 않으면 볼넷 10개 안타 10개보다 안타 13개 볼넷 3개를 낫게 본다고 표현하면 적절하다. [28] 쿨바는 그 해 1루수 골든글러브 후보에 등록되었다. [29] 48홈런 [30] 3루수로는 단 6경기만을 뛰었다. 이때문에 마구마구에서 초창기부터 엘리 홍현우의 포지션을 3루수로 정한 것에 대해 비판이 많았었다. [31] 다만 99년이 이승엽의 시즌 54개 홈런으로 대표되는 타고투저였던 반면, 김성래가 홈런왕을 한 80년대는 선동열이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시즌마다 20승 투수도 여럿 나올 정도로 투고타저가 강세였다는 차이가 있다. [32] 양준혁과 홍현우, 이 둘은 1년뿐이긴 하지만 같은 팀에서 뛰었다. 99시즌 해태에서 양준혁이 주로 3번, 홍현우가 4번을 쳤다. 그 일년간 둘이 합작한 기록은 자그마치 .312 66홈런 52도루 216타점. 00년 두산의 우동수가 있고 03년 삼성의 이마양이 있다지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게다가 99년의 해태에는 전성기에 돌입하던 장성호와 .247/.408/.575 40홈런의 스텟을 기록한 트레이시 샌더스까지 있었다. 홍현우-양준혁 라인의 연속타자 50-50(홈런-도루)은 최초의 기록이다. 참고로 12년의 박병호- 강정호가 56-41을 기록하긴 했다. 그리고 15년에 나성범- 테임즈가 16년만에 75-63을 기록하며 이름을 올렸다, [33] 박정태 개인으로서도 미스터올스타에 연속안타 신기록을 세우는 등 몬스터 시즌이었지만,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한 롯데를 이끄는 카리스마형 주장에 인간승리의 주인공 등등 성적 외적으로 프리미엄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정태가 홍현우보다 타율 및 안타, 출루율 부문에서 앞섰지만 홍현우의 강점이던 OPS 부문에선 박정태가 .861에 홍현우가 .945로 홍현우가 8푼이나 앞섰다. [34] 이 시기부터 매니 라미레즈를 보며 벌크업을 했다고 한다. 1999시즌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 급격하게 추락한 것은 이 벌크업의 부작용인 무릎 부상일지도 모른다. [35] 상기 주에 나와있는 벌크업 부작용 외에도 로마이어의 슬라이딩으로 인해 시범경기에서 발목부상을 당한 채로 뛰었던 여파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몸 상태로 수비부담이 큰 포지션에서 뛰었기에 사실 2000년의 부진은 향후 FA 계약 이후 행보의 전주곡이었을 가능성은 다분했다. [36] 한편 이 시즌에는 발목부상 및 김종국의 2루수 복귀 등의 요인이 겹쳐 1루수로도 종종 출장했다. [37] 단적인 예로 외야수와 지타를 번갈아가면서 뛴 양준혁의 누적 POS는 마이너스 50, 1루로 출장했던 이승엽은 누적 POS 마이너스 150이 넘어가는데 홍현우의 경우 23을 기록했다. [38] 2년차인 91년 시즌에 91게임을 뛰며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39] 2014년 FA자격을 얻은 최정의 상황이 홍현우와 비슷한 점이 많은데(3루수, 3할+ 20-20을 기대할 수 있는 성적, 30세가 되지 않은 나이, 3년연속 골든 글러브 수상) 그해 FA최대어로 평가받으며 4년 86억의 대박 계약을 맺었다. [40] 이 중 삼성은 홍현우와 계약 조건 중 매년 타율 0.350, 30홈런 이상이라는 빡센 옵션 조건을 걸었는데 정황상 홍현우의 몸 상태를 어느 정도 인지한 상태에서 저런 조건을 제시했다. [41] 물론 A+급 선수가 100억을 심심찮게 넘기는 지금 기준으로는 거액이라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때는 FA 선수들의 몸값이 훅 뛰기 한참 전이었다. [42] 같은 해 FA 자격을 얻어 똑같이 4년 18억에 삼성에 잔류한 김기태와 더불어 FA 최고액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1년 후 삼성에 복귀한 양준혁이 27억으로 경신한다. [43] 결국은 보상선수인 최익성보다도 일천한 성적을 남겼다. 최익성은 그럭저럭 대타로서는 쓸만한 성적이라도 남겼다. [44] 흔히들 LG 이적 후 부상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부상은 FA 직전 시즌인 2000 시즌에 당했다. 그리고 그 시즌에 커리어 로우급의 성적을 거두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FA 직전 시즌에 무릎부상으로 한 시즌의 성적이 바닥을 쳤으면 가치가 하락해야 정상인데 1999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뛰어났고 고졸 데뷔라서 나이도 젊은 편이라 회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LG가 저렇게 지른 것이다. 2000년 시즌 시작 전 로마이어의 슬라이딩으로 인한 발목부상이 있어도 FA인데다가 팀 사정상 뛰느라 발목도 좋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도 무릎부상을 우려하는 의견은 있었지만 그냥 묻혔다. 또 발목부상을 초래한 당시의 주자 로마이어와 한 팀이 된 것도 굉장히 미묘했다고 본인도 나중에 술회했다. [45] 웬만한 선수의 연봉 수준이다! [46] 이거 때문에 홍현우의 사례는 둘째치고, LG는 우타거포 육성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를 박병호 정의윤을 통해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컨택형을 거포형보다 중시하게 된 것이다. 당장 LG 타자들의 대표격인 박용택도 타팀이었으면 300홈런은 무난히 넘기고 이 외에도 문보경, 오지환, 유강남, 채은성, 이형종, 작뱅 등 중장거리형 타자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선수들이 거포로 클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을 보면 그냥 LG라는 팀 자체가 거포와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잠실이라는 홈구장을 핑계삼자니 같은 홈을 쓰는 OB-두산 베어스가 홈런왕을 숱하게 배출한 걸 생각하면 핑계도 안된다.) 실제 LG에서 한 시즌에 30홈런 이상을 기록했던 타자는 이병규와 로베르토 라모스 둘 뿐이며 이 둘은 모두 좌타자였다. 우타자로서 2000시즌에 35홈런을 기록한 찰스 스미스가 있지만 이는 삼성에서 뛰다가 시즌 중간에 LG로 이적한거라 실질적으로 LG 유니폼을 입고 친 홈런은 15개다. 그리고 구단 내 최다 홈런갯수가 로베르토 라모스의 38개인지라 4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단 한 명도 없는데 이는 역대 프로야구 구단들 중 쌍방울과 함께 유이한 사례이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구단들 중에선 유일하다.(21세기 창단 구단들인 SK-SSG, 키움, NC, kt도 각각 호세 페르난데스, 한유섬, 제이미 로맥(이상 SK), 박병호, 강정호(이상 키움), 에릭 테임즈, 멜 로하스 주니어라는 40홈런+ 타자를 배출했으며 심지어 해체된 삼청태현도 심정수와 박경완이라는 40홈런+ 타자를 배출했다.) [47] 아이러니하게도 홍현우가 LG 유니폼을 입게 된 2001년부터 로마이어도 한화를 떠나 LG로 오면서 같은 팀 소속이 되었다. [48] 과거 해태 시절 팀 선배이자 당시 LG 트윈스의 코치로 재직 중이던 이순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LG와 계약했을 당시부터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제대로 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한다. 출처 [49] 당시는 일명 아햏햏 시절로, 인터넷 막장화 이전이었다. [50] 이 당시 KIA는 창단 첫 최하위 여파로 인해 시즌 종료 후 리빌딩을 명목으로 홍현우를 포함해 이강철, 조규제 등 노장 선수들을 대거 방출해버렸다. [51] 당시에는 홍현우에 대한 부활의 기대감이 있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어 버려서 KIA가 큰 손해를 볼뻔 했다. 하지만 트레이드 과정에서 저울추를 맞추기 위해 타율 .125에 장타력도 없는 발만 빠른 외야 유망주를 LG에서 내줬는데, 그게 바로 이용규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용규리그 최고의 리드오프로 각성하게 된다. [52] 34홈런-31도루 [53] 광주상고의 언더스로 투수였으며 1979년 봉황대기 우승에 일조하며 MVP로 선정되었다. 당시 광주상고 유격수는 이순철. 성균관대와 실업야구팀 한국화장품을 거쳐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광주상고(광주동성고)를 거쳐 배명고, 전주고의 지휘봉을 잡았다. [54] 해태시절 홍현우는 3루 못지 않게 비등한 이닝으로 2루도 많이 봤으며, 자신의 최전성기 중 다수를 2루수로 보냈다는 점(92,99) 때문에 해태 레전드 2루수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3루수에는 한대화가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네임밸류가 약한 차영화 대신 홍현우가 선정되었다고 보고 있다. [55] 공교롭게도 김도영과 홍현우의 등번호는 모두 5번으로 동일하며, 2024년 최연소 30-30 클럽을 달성하며 타이거즈 역사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56] 야구게임 마구마구에서는 이 별명으로 만든 전용 잠재력이 있다. 효과는 2루 수비시 하이점프캐치 능력 발동. [57] 머리를 밀게 된 이유는 머리숱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머리숱이 너무 적어 가발을 쓰고 다니다가 거추장스러워서 1995년 전지훈련때 머리를 전부 밀어버렸다고 한다. [58] 사실 두 사람의 키를 비교해봤을 때 무려 후자가 전자보다 3cm밖에 차이가 안난다. [59] 특히 96은 10년도 이대호의 퍼포먼스와 비견 될 만큼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