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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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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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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91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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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KBO 리그 도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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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즈 레전드 올스타
2009. 07.25. 한국야구위원회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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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은 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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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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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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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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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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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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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박흥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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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023)
이범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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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번
팀 창단 서정환
(1982)
정진호
(1983~1986)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6번}}}
차정득
(1982)
서정환
(1983~1989)
백인호
(1990~1992)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3번}}}
김인식
(1986~1989)
서정환
(1990~1994)
김훈
(1996)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2번
김동섭
(1994~1995)
서정환
(1996~1999)
김성근
(2000)
해태/ KIA 타이거즈 등번호 89번
결번 서정환
(2001~2007)
히라노
(2011)
}}} ||
파일:서정환 전 감독.png
서정환
徐定煥 | Seo Junghwan
출생 1955년 7월 5일([age(1955-07-05)]세)
경상북도 대구시 동부출장소
(現 대구광역시 동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대구신암초[1] - 경상중 - 경북고 - 건국대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멤버
소속팀 포항제철 야구단 (1977, 1981)
삼성 라이온즈 (1982)
해태 타이거즈 (1983~1989)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1군 주루코치 (1990~1994)
요미우리 자이언츠 연수코치 (1995)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1996~1997)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8~1999)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2001)
해태-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01~2002)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03)[2]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03)[3]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수비코치 (2004)[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2004~2005)[5]
KIA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 (2005)[6]
KIA 타이거즈 감독대행 (2005)[7]
KIA 타이거즈 감독 (2006~2007)
해설위원 MBC ESPN-SPORTS+ 야구 해설위원 (2007~2010)
경력 KBO 경기운영위원 (2012~2016)
KBO 규칙위원 (2012~2016)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 (2010)
병역 육군 경리단 (1978~1981)

1. 개요2. 선수 경력
2.1.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경력4. 해설자 경력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해태 타이거즈 서정환.png
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 소속의 내야수이자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감독, KBO 경기 감독관.

1998년~1999년,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을 맡았고, 이는 삼성 라이온즈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2005년 7월~2007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있던 인물. 선수 시절의 포지션은 유격수 2루수. 등번호는 삼성과 해태에서 6번을 계속 달았다. 코치로써는 1994시즌까지 33번을 달고 1/3루에서 주루코치 역할을 하였다.

프로 야구 출범 후 일어난 최초의 트레이드의 대상자로 유명하며, 이적 후 초창기 해태의 내야를 맡으며 해태가 왕조로 도약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감독이 되고 나서 이미지를 왕창 까먹었다. 삼성에서는 당대 최고의 퍼포먼스를 찍던 이승엽 임창용을 앞세우고도 1999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경기가 삼성쪽으로 기울었는데도 역전을 허용에 결국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 우승하지 못했으며, KIA에서는 한기주, 신용운 등의 투수들을 혹사시키며 부상을 입게 만들어 KIA의 고질적인 불펜 불안의 근본 원인을 제공하였다.

2. 선수 경력

파일:삼성 서정환.png

1977년에 포항제철 야구단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실업야구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부터 군복무를 위해 육군 경리단에서 뛰었다. 1981년 제대 이후에 포철로 복귀했다. 1982년에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자 탄생한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창단 멤버로, 개막전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당시 사이클링 히트를 치기도 했던 유격수 오대석에 밀려 주전 확보가 힘들게 되었다.
파일:해태 왕조의 유격수 서정환.png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04081426_1.jpg

히스토리 09 서정환 "울면서 팔려가지 않았다"
결국 삼성에서는 자신의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 이에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서영무에게 트레이드를 자청하여 원년 시즌을 마치고 그 해 말 해태 타이거즈에 현금 1,500만 원에 트레이드되었다.[8]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길 사실 해태 말고도 삼미 슈퍼스타즈와도 저울질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 가족이 서울 영동시장[9]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보니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하는 삼미 정도면 서울에서 직접 운전해서 출퇴근해도 괜찮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삼미 구단 실무자와 연봉 얘기까지 오가며 트레이드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해태 타이거즈 홍보과장이던 이상국이 찾아와서 간곡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삼미에서 받기로 한 연봉인 1300만 원 보다 50만 원을 더 받기로 하고[10] 해태로 결정했다고 한다.[11] 서정환의 마음을 움직였던 말로는 " 차영화 선수와 원래 키스톤 콤비 아니었냐? 그리고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신태중과 같이 한솥밥을 먹지 않았냐?"였다고 한다.[12]

해태 타이거즈 입단 이후 5번의 우승을 맛보게 된다. 당시 선수 대부분이 군산상고- 광주일고 동문으로 이루어져서 호남 지역색이 강했던 팀인 해태에서 대구 출신으로 선수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으로 봐서는 친화력이나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던 듯하다.[13] 훗날 인터뷰를 보면 야구 하는데 지역색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서 선수, 코치, 감독 등을 차례대로 하는동안 광주에서 24년을 거주했으며 김장을 할 줄 모르는 부인을 챙겨주며 동네 주민들이 김치를 챙겨준 따뜻한 일화를 소개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호남지역 친구들을 떠올리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항상 충고해준다고 한다.

해태 내야진의 한 축이었으며, 호수비와 주루센스로 1980년대 해태의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해태는 내야수가 부족하여 원년 시즌을 시작하고 몇 달 후 실업야구팀 농협 야구단의 임정면[14]을 급히 스카웃하여 내야로 돌릴 정도였다. 1986년에는 도루왕을 하기도 했다. 이때 즈음 해태의 1번타자였다[15]. 그리고 몇년 더 뛰었으면서 88년 .323을 찍기도 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히길 시즌 초반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약해 여름부터 스탯을 깎아먹는 게 패턴이었는데 그해에는 7월경 부상을 입어 1달정도 경기를 못나갔고 이 때 체력을 벌어놨다고 한다.[16] 광주에 살면서 맛있게 먹은 음식으로 생고기와 홍어탕을 꼽았는데 김봉연, 김성한과 함께 먹으러 다녔다고 한다.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 선수 시절에는 차영화와 함께 나름대로 안정적인 키스톤 콤비를 꾸몄고, 1987년 백인호가 입단하자 유격수 자리에서 밀려나 주로 2루수로 출전하였다. 굉장히 마른 체형으로 김응용 감독 이하 당대의 해태 선수 출신치고는 왜소한 체형[17]으로 전 경기 출전을 할 만한 체력이 되지 못해 고생했다고.

2.1.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삼성 라이온즈 47 124 .202 25 1 1 2 19 18 9 6 .274 .237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해태 타이거즈 98 319 .257 82 11 3 3 34 33 13 31 .339 .320
1984 94 324 .250 81 11 0 5 27 38 9 33 .330 .318
1985 104 371 .275 102 13 0 3 21 46 17 40 .334 .346
1986 108
(1위)
375 .256 96 12 1 3 24 55 43
(1위)
45 .317 .335
1987 102 335 .278 93 12 3 3 28 38 19 42 .358 .358
1988 95 297 .323
(4위)
96 11 1 0 29 45 22 30 .367 .384
1989 64 132 .258 34 4 0 3 17 16 4 19 .356 .351
KBO 리그 통산
(8시즌)
712 2277 .267 609 75 9 22 199 289 136 246 .337 .338

3.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서정환/지도자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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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설자 경력

자신보다 1년 빨리 퇴임한 이순철 전 감독과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이순철 전 감독이 2007년 MBC ESPN에 새 해설위원으로 혜성같이 등장해 비난해설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로 본좌칭호를 얻은 것처럼 2008년의 해설 트렌드는 서정환 전 감독이었다. 처음엔 예전 안 좋은 이미지와 더불어 굴곡 심한 억양,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우물우물거린다며 사정없이 까였지만 곧 수정하여 특유의 구수한 해설과 더불어 불타는 친정사랑해설(=감정이입해설)로 2008년의 히트해설로 통하게 되었다. 타 해설위원들이 은근히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두둔하는 그런 편파해설이 아닌, 해설시엔 나름대로 중립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KIA 타이거즈가 지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 겨워 무의식중에 탄식을 내지르는 그런 인간적인 면이 현재 서정환 해설위원의 인기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18] 정도는 약하지만 삼성 경기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고 했다.

서정환 해설위원 특유의 구수한 해설은 동네 할아버지같은 편안하지만 전문성은 적은, 그래서 호불호가 갈리는 임주완 캐스터하고 할때 싱크로율이 매우 좋다고 한다. 젊은 세대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지만, 프로야구 시청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장년층, 노년층에게는 서정환&임주완의 인기가 제일 높다고 하며, 시청률 역시 둘이 할 때 제일 높다고 한다.

2009년에는 방송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나, 2010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엑스포츠가 SBS에 먹히는 바람에 MBC Life에서도 프로야구 중계를 하게 되면서 해설자로 복귀하였다. 다만 2011 시즌부터 해설직에서 그만두었고, 현재는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있다고 한다. #



서정환이 해설을 맡은 KIA 경기 중 각종 승부처에서.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3분 7~8초 쯤에 투수와 2루수가 연달아 포구에 실패했을 때 내뱉은 감탄사와 4분 15초쯤에서 1루 주자가 런다운에 걸렸을 때 지른 탄성 외에도 승부처마다 각종 탄성을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모습이 보는 사람을 실소하게 만든다. 위 동영상은 서정환의 어록 중 극히 일부로, 외에도 LG전에서 내뱉은 "분위기에 반전을... 아~ 아~ 뭐야 이거?" 등이 유명하나, 자료가 꽤 오래되어서인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5. 여담

6. 관련 문서


[1] 통학 당시 북구가 아닌 동구였다. 그러나 신암동은 여전히 동구 소속이다. [2] ~5월 22일 [3] 5월 23일~ [4] ~6월 20일 [5] 2004년 6월 21일~2005년 5월 8일 [6] 5월 9일~7월 24일 [7] 7월 25일~ [8]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1호 선수 트레이드이자 1호 현금 트레이드 사례로 기록된다. 정확히는 삼성이 서정환에게 준 입단 계약금을 해태 구단이 삼성에게 물어주는 조건이었다. 최초의 선수 간 트레이드는 1983년 6월 27일 이루어진 차동열 - 정영기 트레이드이다. [9]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10] 당시 50만 원이면 웬만한 샐러리맨 두 달 치 월급이었다. [11] 만약 삼미로 갔다면 해태와 삼미 양팀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12] 육군 경리단 야구단, 실업팀, 국가대표 등 여러 인연들이 있었다. 김봉연-김준환은 1년 선배, 김일권은 동기였다. 아마도 유급을 해서 그런 듯. [13] 특히나 서정환이 선수 생활을 했던 1980년대 중후반까지는 영호남 지역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양준혁, 손혁 등은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이를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갔을 정도로 해태는 호남 외 타 지역 출신 선수가 적응하기 어려운 팀으로 알려져 있었다. [14] 마산상고- 건국대 출신으로 1976년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였다. [15] 바로 전해까지 해태 1번타자이자 도루왕은 김일권이었다. 그런데 1986년과 1987년에 다리 부상으로 김일권이 타율 2할도 못칠 정도로 부진하면서 1번자리가 서정환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김일권은 1987시즌이 종료되면서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됐다. 해태의 1번타자 자리는 서정환의 은퇴 이후 이순철이 이어받게 된다. [16] 실제로 1988 시즌 타격 4위였고 336타석에 들어섰는데, 이 시즌 한국프로야구 규정타석은 334타석으로 규정타석을 턱걸이로 채웠다. [17] 코치, 감독시절 타격 방법으로 계속 부딪혔던 최익성은 20대부터 웨이트를 열성적으로 하고 후배들에게 퍼트린 근육질의 선수이다 [18] 쉬는 날에 무등야구장을 찾아 관람하고 있는 모습이 타 방송사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19] 당시 김봉연 지명타자, 김성한 3루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