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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3 16:04:27

김성근/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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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꼴지를 일등으로
2.1. 비판2.2. 반론
3. 선수 육성의 대가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3.1. 비판3.2. 반론
4. 데이터 야구의 대가
4.1. 비판4.2. 반론
5. 아웃사이더/비주류
5.1. 프런트의 불의에 저항하다가 번번히 경질된 외골수?
5.1.1. 구단 프런트와의 불화5.1.2. 그룹 총수들에게는 저자세
5.2. 한국 야구에 대한 공헌?

1. 개요

파일:김성근감독슈트.png

김성근 김응용에 이어 KBO 감독 누적 승수 2위로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충분히 KBO 리그 역사에 기록될 만한 감독이다. 그러나 승리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타일, 끊이지 않는 혹사 논란 등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감독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07 SK 와이번스 시절부터 최근 최강야구 감독에 이르기까지, "야신"이라는 칭호를 필두로 이러한 문제점이 상당히 희석되거나 가려져 있는 인물로, 강성 팬덤과 야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입문층, 그리고 이러한 김성근식 플레이에 치를 떨어왔던 기존 야구 골수 팬덤층[1] 사이에 가장 큰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김성근은 2005-2006년 NPB 치바 롯데의 코치로 활동하면서, 바비 발렌타인의 영향을 받으며 언론과 팬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으며, 더 나아가 마치 스승인 바비 발렌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언론 플레이와 인맥 등을 통해 이미지 관리를 잘하는 감독으로 변모하였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누가 봐도 실책이었던 삼성, 한화 시절조차도 상당 부분 미화되는 등[2] 이미지의 왜곡이 일어나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이에 따라 이 문서에서는 김성근 감독의 대표적인 이미지들에 대해 파악하고, 그러한 이미지들이 얼마나 실상에 가까운지, 또 어떤 부분은 허상인지에 대해 분석하여 좀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김성근이란 인물에 대해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꼴지를 일등으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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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거의 성적이 최하위인 팀의 감독으로 들어갔다. 태평양이 그랬고 쌍방울이 그랬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부임할 당시의 삼성이나 LG도 마찬가지였다." - 「김성근이다」 p.42
"지금까지 14개팀을 맡으면서 한번도 상위권팀을 맡아본 적이 없다." - 사사구 The Interview 인간 김성근을 만나다

김성근 감독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꼴찌팀, 최하위권팀을 상위권팀, 우승팀으로 만든 감독이라는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본인 또한 「꼴찌를 일등으로」라는 자서전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김성근 본인 또한 자신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3]

실제로 김성근 감독은 상위권 팀을 거의 맡은 적이 없고 하위권, 혹은 최하위권에 가까운 팀을 많이 맡았던 것이 사실이다. 김성근이 감독을 맡기전 팀 순위를 보면 83년 OB는 6팀중 5위, 88년 태평양은 7팀중 7위, 90년 삼성은 7팀중 2위, 95년 쌍방울은 8팀중 8위, 2000년 LG는 8팀중 4위, 감독대행을 중간에 맡은 01년 LG는 감독 대행 취임 당시 8팀중 8위, 06년 SK는 8팀중 6위, 14년 한화는 9팀중 9위로 그나마 반타작 이상이라도 했던건 90년 삼성 라이온즈, 00년 LG 트윈스 밖에 없었으며, LG 트윈스는 01년도 꼴지 상황일 때 감독 대행으로 시작된 만큼 삼성을 제외한 모든 팀이 최하위권 팀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그 팀들이 김성근 감독 휘하에서 중상위권 이상으로 도약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2.1. 비판

객관적인 사실로 하위권이라는 것이 나와있는 만큼, 이 부분은 사실 여부를 따질 것은 별로 없다. 따라서 해당 부분에 대한 비판은 주로 이러한 도약이 김성근 감독의 공로가 크다, 아니면 김성근은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고 구단의 역할이 오히려 더 중요했다의 문제로 나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페이롤[4]이다.

김성근이 하위권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감독이라는 이미지에 대한 비판은 주로 ''적어도 김성근이 지휘봉을 잡고 나서는, 구단의 투자까지 더해져 상위권으로 발돋움을 한 것이다.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과정에서 주로 이야기되는 것은 해당 팀들의 페이롤이 굉장히 높았다는 것을 꼽는다. 일반적으로 연봉이 높은 선수라는 것은 수준이 뛰어난 선수라는 것을 말하고, 김성근 감독 부임과 함께 페이롤이 급격하게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선수들을 팀에서 많이 수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야기이다. 「관련 기사: 김성근 감독 가는 팀은 페이롤도 1위」

실제로, 1993년 KBO가 공식적으로 선수연봉 집계를 시작한 이후 김성근이 맡았던 팀 중 쌍방울 레이더스(1997), SK 와이번스(2009~2011), 한화 이글스(2016~2017)가 선수연봉총액 1위를 기록했다. 페이롤 공식 집계 전이지만 삼성 라이온즈야 1993년 공식집계 시작 이후에도 2016년 제일기획으로 이관되기 전까지는 페이롤 부분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했던 팀이니 말할 나위가 없다. 심지어 김성근 부임 당시 김성근이 원했던 15명의 선수를 죄다 사면서 삼성의 이런 전례없는 싹쓸이 선수 영입은 다른 구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91년 2월 4일 무분별한 선수 확충을 자제하자는 KBO 사장단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특히 가난한 팀으로 유명했던 태평양, 쌍방울 같은 팀조차도, 김성근 감독 부임과 함께 각각의 팀들 모두 상당한 수준의 지원을 해주었던 것을 볼 수 있다. 1989년 태평양 돌핀스의 신동관 태평양 부회장은 청보 시절에 임명된 팀의 코칭스태프들을 한명 빼고 전원 물갈이 했고, 당시 태평양 전담 스포츠기자 2명 가운데 한명이자 김성근의 지인이었던 김수인 기자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했다. 신동관 부회장은 김성근이 요구한 21개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줬고, 김성근이 원한 코칭스태프를 모두 영입했고 정영기, 천창호, 김한근, 이광길, 이충우 등 김성근이 원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는 등 파격 지원 행보를 이어갔다.

쌍방울 또한 이는 마찬가지였다. 쌍방울이 95시즌까지는 야구단 투자에 인색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1996년 김성근 영입과 동시에 하위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었다. 쌍방울은 김성근 감독에게 전년도(1995년)보다 네배나 증가한 15억여원의 스카우트 비용을 지원한 것을 비롯해 김성근 감독이 재임한 3년여 동안 총 26명의 선수를 영입했을 정도로 통큰 지원을 해줬다.

김성근 감독 최악의 실패 사례였던 한화 또한 마찬가지다. 꼴지를 벗어나기 위해 김성근 감독 취임 전에도 정근우, 이용규 같은 거물급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김성근 감독 취임 이후에는 배영수, 송은범, 권혁, 심수창 등 FA 선수들을 싹쓸이하고 그 외에도 김성근 감독이 원하는 선수들을 모조리 픽업해오면서 페이롤 1위를 찍었다.

즉 꼴지, 혹은 꼴지에 가까운 최하위권 팀들을 맡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성근 영입과 함께 팀에서는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으며, 김성근 감독 시기 해당 팀들은 그 전 해의 꼴지 팀이던 시절과는 아예 다른 팀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애초에 선수 구성이 어예 달라졌기 때문. 이것은 김성근 감독이 잘해서라기보다는 구단의 전폭적인 투자가 성과를 이룬 것으로 보는 편이 맞다.

2.2. 반론

페이롤이 높다고 야구를 잘하는 것이라면, 한화는 한국시리즈를 5번은 더 우승했어야 정상이다(...) 농담 같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한국에서의 페이롤은 생각보다 팀 전력과의 상관 관계가 높지 않다. 대표적으로 김성근 감독이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2007년, 국내 선수들의 페이롤 순위는 다음과 같다. 관련 기사

딱 봐도 페이롤과 순위의 상관 관계를 논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한국 프로야구의 특성 때문인데, 2010년 LG가 신연봉제를 도입하기 이전까지 한국 프로야구는 연공 서열이 상당히 크게 영향을 주는 연봉 제도를 고집하고 있었고, 심지어 이는 지금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즉 잘하는 선수가 많이 받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고참일수록 연봉이 높고 신참일수록 연봉이 적다.

삼성, 현대 같은 전통적으로 페이롤이 높은 팀들 외에 2007년 한화가 유독 연봉이 높은 것도 같은 원리다. 당시 한화는 송진우-정민철-구대성으로 대표되는 원로 라인이 주축 선수였던 일명 노인정 구단이었고, 당연히 오래된 선수들이 많았던 만큼 페이롤 상위를 차지하였다. 이는 송진우, 정민철이 모두 은퇴한 2010년 한화가 갑자기 페이롤 최하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2008년 3위 2009년 4위, 2010년 8위).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쓸 생각은 안 한다고. 예를 들어 작년에 안치용이라든지 그 최동수 같이 SK에서, 버리기 일보 직전 아이들이 일하는 거에요. 노장이라는 것은 1년 토탈 쓰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필요한 거에요. 위기 때, 어려울 때 걔네들이 한다니까. 경험 갖고."
-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김성근

특히 김성근 감독이 운영하는 팀은 페이롤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김성근 감독이 새로운 팀을 맡으면서 영입하는 선수 라인업을 보면 이 부분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두산은 원년부터 감독이었으므로 제외)

20대 영입 선수는 거의 전무하며, 거의 대부분 30대 중반에서 후반 선수들이다. 그나마 20대 선수였던 오봉옥은 음주운전 사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삼성에서 방출당한 선수였다. 80-90년대 선수가 30대 중반이면 사실상 은퇴 수순인 선수들만 사방에서 끌어다쓴 꼴이고, 선수들 면모를 봐도 예전엔 한가닥 했다지만 이 시기에는 거의 퇴물 취급받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딱히 팀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선수를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각 구단에서 버리는 방출/은퇴 선수들을 싸그리 긁어모은 것에 가깝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한화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 이렇게 영입한 선수들 중 실제로 주전급으로 기용되어 활약을 보인 선수가 거의 전무하다. 심지어 한화에서도 FA로 들어온 권혁, 정우람이 단연 주전이라 할만하고, 다른 선수들은 대부분 땜빵 선수들에 가까웠다. 거의 방출되다시피해서 넘어온 김현욱과 오봉옥 정도가 메인으로 뛰었으며, 그 외에는 노장들의 반짝 활약 이상의 임팩트를 남긴 선수가 없다. 오히려 김성근이 맡았던 모든 팀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던 선수들은 그 이전에 그 팀에 있었던 선수들, 혹은 태평양 시절 신인 트로이카나 LG 시절의 박용택, SK 시절의 김광현과 같은 신인 선수들이었다.

나쁘게 보면 김성근 감독이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작 저 선수들을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것은 김성근 감독의 지론과 전술에 관련이 있다. 기본적으로 김성근 감독은 필요할 때 한건 해줄 수 있는 베테랑들로 뎁스를 두텁게 만들면서 필요한 순간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그 과정에서 기존 주축 선수들의 활약과 터져 나오는 신인들의 활약으로 성적을 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실제로 비판 쪽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하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1997년 페이롤 1위조차, 실상을 살펴보면 1997년 쌍방울 선수들의 연봉 순위를 보면 김기태 1억 100만원, 김광림 9천만원, 조규제와 한대화 각 8천만원, 박경완 7700만원, 최태원 7300만원, 성영재 7200만원, 오봉옥, 김성래, 김실 각 6500만원, 이종두 6400만원, 김성현, 박노준 각 6200만원, 김원형, 박성기 각 5800만원, 김호 5600만원, 심성보 5000만원 등으로 1995년 선수단과 그 명단이 크게 다르지 않다.

즉 김성근 감독 시기의 선수 영입은 팀 컬러를 바꿀 정도의 투자라기보다는 단 한번의 기회를 위한 투자에 가깝다. 즉 뎁스를 두텁게 하면서 만약의 상황에 터져줄 로또를 많이 사모은 것에 가까운 만큼, 전력 상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는 것. 여기에 페이롤 상승도 선수단 자체가 커지니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선수들이 고참 선수들인 만큼 아무래도 상승폭이 상대적으로 더 커지는 것이다. 심지어 그럼에도 대형 선수들이 아니라 이미 시장에서 가치를 상실한 것으로 취급되는 선수들인 만큼 대부분 고참이면서도 그렇게 고액 연봉자들은 아니었고, 오히려 진짜 연봉 상승은 그를 통해 성적을 거둔 후 기존 선수들의 연봉이 오르면서 전반적인 페이롤이 커지는 현상에 가까웠다.[5]

따라서 김성근 감독의 꼴지팀을 일등으로 만드는 능력이 선수빨이었다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주전 선수들이 바뀐 것이 아니고, 김성근 감독의 커리어 중 상당수는 그 선수들을 경쟁 관계로 몰아넣기도 하고 단합시키기도 하면서 그 주전 선수 그대로 팀을 상위권으로 올려왔기 때문이다.[6] 오히려 이에 대한 비판은 베테랑에 대한 지론이 다른 경우 돈을 허투루 쓰는 경향이 있다는 쪽[7]에 오히려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이 프런트와 자주 충돌했던 부분도 이러한 부분이었고.

각 팀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김성근/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

3. 선수 육성의 대가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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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감독으로서 시합에 이기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목표는 선수 육성이다. 리더는 한 선수가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개발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 김성근 감독, "좋은 선수 없으면 좋은 팀 만들라" (2013.11.13)
김 감독은 '선수가 없다'는 말을 싫어한다. "선수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승부의 세계에서 선수가 없다는 말은 곧 지는 것이다"는 것이 김 감독의 말이다. 설령 선수가 부족하더라도 하소연해서 면죄부를 만드는 것보다 어떻게든 만들고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 김성근 감독, "선수가 없다? 프로에선 말이 안 돼" (2014.11.03)
“선수들의 미래가 나에게 걸려 있거든. 이건 내 삶의 큰 테마입니다. 선수는 만지기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나는 얼마나 철두철미 해야 하나'를 생각해요. 만들긴 쉬워도 가꾸기는 어렵죠.” 새해 기획 대담 고수vs고수 (2012.01.02)
기자 : 감독님 리더십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선수 육성입니다. 김성근이라는 리더를 만난 이후 기량이 늘었다거나, 한물갔다고 생각됐던 선수들이 부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성근 : 사람은 누구나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하는 선수도 하나의 장점은 있기 마련이죠. 그렇지만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모르고 살아요. 잠재능력을 3분의 1도 발휘하지 못하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편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에요. 자신과 싸우고 벼랑 끝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매일 벼랑 끝으로 자신을 내몰 때 비로소 인생이 절실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을 수도 있고 자기 개발을 할 수도 있어요.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도록 환경을 조성해 사람들의 숨겨진 장점을 개발하고 키우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기자 : 장점을 키워야 한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장점을 어떻게 이끌어내느냐인데요, 감독님만의 비결은 무엇인지요.
김성근 : 리더십의 비결은 ‘애정’입니다. 애정이 있는 아버지는 자식의 단점을 개선하고 장점을 키우려고 하겠죠. 감독도 마찬가지예요. 매일 승부를 강요받는 냉혹한 야구의 세계에서 선수가 조금만 부진하면 그 선수를 버릴 것을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애정이 있다면 선수를 방출하기보다는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키워주겠죠. – 매경 김병수, 문희철 기자 인터뷰 (2012.01.18)

김성근은 선수 육성과 조련에 있어 국내 최고의 대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미지는 김성근 팬들에 의해 확대 및 재생산되면서 김성근이 한번 만져만 줘도 유망주가 터진다 뭐 다른 의미로 터지긴 한다, 망가진 선수가 부활한다는 식의 종교적인 수준의 믿음으로까지 확대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동시에 최강야구가 야구 예능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이러한 믿음은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동시에 김성근 감독의 지론 중 하나는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이다. 심지어 이는 자서전 제목으로도 사용된 바 있다.

3.1. 비판

김성근 감독은 기본적으로 검증된 선수들을 위주로 기용하며, 신인급 기용 및 새로운 자원 발굴에 인색한 감독이다. 동시에 선수들의 군 입대 억제, 유망주를 내주고 베테랑을 데려오는 트레이드 등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의 힘은 최대로 끌어올리지만, 반대로 팀의 미래에는 악영향을 주는 행위도 매우 다반사로 발생하였다. 애초에 김성근 감독은 전형적인 윈나우형 감독이다. 아예 팀 자체가 망가져서 시즌 성적 포기하고 신인을 발굴하는 리빌딩팀이라면 신인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것이 맞지만, 성적이 우선시되는 윈나우팀은 성적이 우선이다.

기본적으로 신인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유망주라는 것이 게임처럼 딱딱 경험치만 먹인다고 잠재력이 터지지 않는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라 하더라도 루키 시즌부터 포텐이 터지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1군에 적응하는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한 해에 신고선수까지 10명이 훌쩍 넘는 선수를 뽑지만, 개중 2~3명 이상만 1군급 자원으로 성장시킬 수 있어도 성공한 드래프트로 평가받는 것이 KBO의 육성으로 기본적으로 유망주란 성공확률이 20~30%도 안 되는 복권인 것이고 미국에서도 확실한 선수를 내주고 대신 가능성 있는 유망주를 받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그 중 이정후나 원태인, 구자욱처럼 거의 확실히 성공할 것 같은 자원은 KBO에서는 절대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 반면 베테랑은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둔 선수인 만큼 계산이 서는 편이고, 운동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재활에 성공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높다. 그렇기에 윈나우형 감독은 유망주보다는 베테랑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다만 김성근 감독은 특히 이미 쓸모를 다한 것이 분명해보임에도 자신이 선호하는 선수들을 데려오는 데 집중하는 일을 자주 일으켰다. 삼성 때의 윤석환과 조범현, LG 때의 심성보, 한화 때의 송은범 영입 등은 순전히 자기 제자들 데려오는 것 이상으로 봐주기 어려울 정도의 일들. 정말 좋게 보더라도 이건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일을 망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데, 정작 김성근은 선수들을 소모품으로 여겨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마구 쓰고 버리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특히, 야수보다도 투수에 대해 이러한 행태가 집중된다. 선수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김성근의 선수 혹사 문제는 김성근/구설/선수 기용 관련 논란 문서에서 혹사 관련 내용만 한가득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혹사에 가려 비교적 덜 알려진 것이 김성근의 신인투수 기용 행태다. 김성근이 투수 육성의 대가로 잘못 알려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팀에 의외의 신인들이 등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성근의 실제 투수 운용을 보면 신인투수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를 거의 주지 않고 노장 선수들만 신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의 팀에 신인투수들이 비교적 많이 등판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김성근의 혹사 때문에 시즌 중후반에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하게 되고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많은 신인들이 1군에 올라와 임시로 기용되기 때문이다.

김성근의 팀은 혹사로 인해 주축 투수진들이 만성적인 부상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주축 선수들의 부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인선수들이 등판하는 경우도 타팀에 비해 많은 편이다. 이것이 일부 야구팬들에게 김성근이 신인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것으로 착시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신인투수들의 용도는 말그대로 땜빵용일뿐 결코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박빙이나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신인투수가 기용되는 일은 거의 없다. 심지어 팀이 크게 이기고 있는 경우에도 신인들을 등판시키지 않는다. 신인이 등판하는 경우는 크게 지고 있는 상황 등에서 주전 투수들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버려진 카드로 투입되는 땜빵용 기용인 경우가 많다. 선수를 키우기 위해서는 일정한 보직을 정해 주고 꾸준히 등판 간격을 유지해 주면서 다소 기복이 있더라도 믿음을 갖고 등판시켜야 한다. 그러나 김성근의 신인투수 기용은 팀의 상황에 따라 마구잡이로 갖다 쓴 후 주전선수가 부상에서 복귀하는 등으로 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다시 2군에 내려보내는 패턴이 반복된다.

조영민 사건에서처럼 큰 점수차로 지고 있는 경기에 신인선수를 내보내 경기가 끝날 때까지 굴려 혹사, 소모시킨 후 2군에 보내는 사례는 그나마 양반이다. 더욱 최악인 것은 빈볼을 던져야할 때 엔트리에 (땜방용) 신인투수가 있는 경우 그들을 등판시켜 빈볼을 던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주전 투수들에게도 빈볼을 많이 지시하지만, 이미 한차례 빈볼이나 항의 소동,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난 상황에서 다시 한번 빈볼을 던져 퇴장 및 출장정지 등의 징계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는 신인들을 올려 빈볼을 던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김준, 이동걸[8] 등 잘 알려진 사례 뿐만 아니라 신인시절 박현준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도 많다. 이렇게 고의 빈볼을 던진 투수는 대개 퇴장, 출장정지 등의 징계를 받게 된다. 그러면 김성근은 이들 투수를 2군으로 보낸 후 본인은 빈볼을 지시하지 않았고, 빈볼의 책임을 물어 선수를 2군으로 내려보냈다라고 해명하곤 했다(…)

3.2. 반론

논지 자체가 좀 혼란스러운데, 우선 신인 선수를 잘 기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애초에 윈나우를 노리는 팀에서 신인 선수를 고정적으로 기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애초에 오승환, 류현진 같은 괴물이 아닌 한, 신인을 박빙이나 이기고 있는 상황에 기용하는 경우가 대체 어디 있는가. 일단 신인은 대타, 대수비, 패전처리로 1군에 올리고 거기서 잘 하면 스타팅으로 내보내보고, 거기서 또 잘 하면 주전이 되는 것이 당연한 순번이다. 실제로 알버트 푸홀스도 이런 식으로 기회를 받아서 데뷔 첫 해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등록되어 있다. 신인 키우겠다고 그냥 고정 기용 박아놓고 돌리는 건 그 MLB에서조차 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실제 야구는 야구 게임이랑은 다르다.

오히려 그런 것 치고는 김성근 감독은 윈나우형 감독답지 않게 신인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편이다. 특히 그런 모습이 가장 크게 드러났던 것은 SK 왕조 시절. 당시 주전 박재홍을 두고 자꾸 신인을 주전 중견수로 쓴다며 세자저하라는 비꼼 섞인 별명까지 있었던 신인 시절의 김강민이 대표적이다. 또 아무리 상무에서 기량을 쌓아 왔더라도, 이제 한 시즌 제대로 보내고 제대한 3년차 새파란 박정권에게 기회를 주면서 2009년 1루수로 정착하게 만들었던 것은 분명 김성근의 공이다. SK 왕조를 이끈 선수의 주축 중 정근우, 최정 정도를 제외하면 외야 라인 등은 대부분 김성근 감독이 발굴한 선수들이고, 심지어 그 정근우와 최정조차도 김성근 감독 시기 전까지는 수비가 최대 약점으로 지적받던 선수들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LG의 최동수, 거기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쌍방울의 마지막 톱타자 윤재국이나 이연수, 심성보, 최태원 등 돌격대 선수들, 거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성근의 애제자 1순위로 꼽히는 조범현이나 기업은행 시절 발굴한 윤동균까지. 선수 잘 키워내기로 유명한 감독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비난받는 것에 비하면 좋은 선수를 많이 키워낸 육성 실적이 제법 있는 감독이다. 즉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같이 하위권 팀의 전력을 가다듬어 상위권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리빌딩 전문가는 분명 아니지만, 팀의 전력을 쥐어짜서 하위권 팀에도 성적을 거두면서 그 과정에서 좋은 선수들을 육성하여 그 팀의 전력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정도의 능력은 계속해서 보여준 바 있다.

김성근 감독의 육성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사실 타자보다는 투수 쪽인데, 세간에도 김성근이 투수 조련과 운영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은 투수를 아주 잘 키워냈으며, 태평양 돌핀스의 짠물 트리오라 불린 신인 3인방, 양상문, 김현욱, 이동현, 전병두, 고효준, 송은범, 김광현 등등 수많은 투수들을 키워냈고 특히 불펜 파이어볼러들을 잘 키워냈다. 대표적으로는 SK 시절의 전병두, 고효준, 엄정욱 같이 구위만 좋고 제구가 아예 안 되는 선수들을 육성하여 좋은 스윙맨으로 만들어냈다. 삼성 2군 감독 시절 키워낸 배영수 또한 좋은 사례로, 배영수 본인이 당시 그 훈련을 통해 하체를 가장 잘 사용하는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도 버린다는 개념에 대한 내용이 잘못 전달되는 느낌이 있다. 김성근 감독이 선수를 소모품 쓰듯이 혹사시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것을 버린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애초에 오류다. 정작 김성근 감독은 혹사는 혹사대로 시키지만, 선수는 선수대로 계속 끌고간다. 심지어 다른 팀 감독임에도 선수가 기존 팀에서 방출, 은퇴 위기 상황에 전화하면 그 선수를 어떻게든 또 데리고 간다(...). 이걸 좋다고 볼 것이냐는 문제는 좀 다른 문제지만, 버린다고 볼 수는 없는 것. 2군으로 보내는 것도 버리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애초에 야근을 죽어라 시키는 것과 해고하는 것은 아예 다른 이야기이고, (그 처벌이 합당한지는 차치하고) 감봉이나 인사 발령 등 징계를 주는 것과 해고하는 것 또한 다른 문제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지론은 후자에 가깝다.

4. 데이터 야구의 대가

"대한민국에서 데이타 제일 먼저 시작한 건 납니다." -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 - 야구의 신 김성근 2부
기자 : 감독님은 한국 프로야구계에 데이터를 정착시킨 주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모든 감독들이 갖고 있는 똑같은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하기에 다른 구단보다 성적이 좋았는지, 탁월한 데이터 마이닝[9] 비결이 궁금합니다.
김성근 : 야구라는 스포츠는 확률 게임입니다. 확률이 높은 쪽으로 선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렇지만 데이터 마이닝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 데이터를 버려야 합니다. 데이터를 그대로 믿으면 망합니다. 순간순간의 직감에 따라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물론 전제는 모든 데이터가 완벽하게 머릿속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숫자 암기는 기본이고, 여기에 그날 투수의 심리나 상대방 타자의 심리, 컨디션 등을 고려해 직감적으로 어떻게 데이터를 활용할지 결정하죠. 비수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데이터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합니다. – 매경 김병수, 문희철 기자 인터뷰

김성근은 1990년대 데이터 야구라는 용어가 생소하던 시절부터 자신이 한국 데이터 야구의 시초라고 자처해 왔다. 구체적으로 쌍방울 감독으로 있을 때 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이 데이터 야구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매일 경기가 끝나면 집에 가서 데이터를 분석하느라 거의 밤을 새고 다음날 바로 경기장에 나온다는 것. 일단 데이터를 모으는데만 해도 새벽 3시까지 걸린다고 한다.

일부 언론 기자들은 김성근이 철저한 데이터에 따라 팀을 운용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중요한 사실은 김성근 감독이 이러한 벌떼야구를 함에 있어 결코 감(感)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기반에는 철저한 사전 데이터 분석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선수기용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를 ‘데이터 야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주전과 비주전, 노장과 신인의 차별을 없애고 최근 성적, 훈련 성적만으로 선수를 기용했다. 고액 연봉의 선수들도 매 경기 교체아웃 당하기 일쑤였고, 무명에 가까웠던 신인 선수들은 자신의 잠재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 데이터야구 파헤치기! ①알고보면 더 재밌는 기록의 스포츠

그의 강연에서 데이터 야구는 반드시 나오는 단골 소재로 쓰였으며, 이처럼 언론과 인터뷰할 때 마다 자신의 야구는 데이터 야구라고 스스로 강조한 덕분에 김성근은 한국에서 데이터 야구의 선구자로 자리 매김했다. 나아가 데이터마이닝(data mining)의 대가라 불리며 통계학과 수학 전문가로까지 묘사되기까지 했다. 심지어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에서 주최한 "DB잡(JOB)콘서트"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성근 감독은 한국 데이터 야구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2010년 초까지만 해도 이 부분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화 시절부터 이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고 세이버매트릭스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정말 김성근 감독이 데이터 야구를 하고 있는 것이 맞느냐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4.1. 비판

실제 김성근 감독의 경기 운용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위 기사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나아가 "데이터를 버려야 한다",“오늘은 데이터를 버렸다”, "데이터를 그대로 믿으면 망한다."라는 식의 선문답적인 발언을 강조하면서 이미 자신은 데이터 야구를 초월한 경지에 오른 존재인 것처럼 언플해왔다. 사실 이 발언들을 뜯어보면 결국 직감에 의한 야구가 정답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데, 물론 스포츠, 더 나아가서는 정-재계의 최종결정권자들에게는 분명히 본인의 직감 으로 의사결정을 해야되는 상황이 있다. 하지만, 그 직감적 판단 아래에는 그간의 경험이나, 정량적 데이터라는 기초자료가 바탕이 된 상태여야하는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성근은 그 실제로 한화 이글스 감독에 부임한 이후 김 감독이 자신의 발언대로 데이터를 완전히 버리고(데이터를 전혀 보지 않고), 직감에만 의존하는 야구를 하는 것이 확인되면서 위의 발언들이 틀린 말은 아닌게 되었다. 결국 직감에만 의존할 뿐, 데이터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신의 스타일을 그럴듯하게 거짓으로 꾸미고 포장한 것에 불과한 것.

사실 김성근은 인터뷰에서 데이터 야구가 구체적으로 뭐냐, 데이터 야구의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데이터를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데이터만 믿으면 망한다, 직감이 중요하다라는 식의 뜬구름 잡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말의 방향을 돌리면서 질문을 피해갔다. 그나마 김성근이 직접 데이터 야구의 구체적인 사례로 든 것은 충암고 시절 6~7명을 상대팀에 몰래 보내서 정보를 빼온 것, OB 코치 시절 삼성 포수 이만수의 팔근육을 읽고 사인을 훔친 것 두 가지이다. 이게 왜 데이터 야구지? 김성근은 이런 데이터 야구(?) 덕분에 전력이 약했던 충암고와 OB가 우승할 수 있었다고 자기 스스로를 미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10]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실제로는 데이터에 의존하지 않고 감에만 의존하는 운용을 해왔다.
느낌이, 감성이 예민하지 않으면 안 돼. 특히, 프로야구 이 승부세계는 느낌이 강해야 되는 거야.
- 김성근 "SK 이미지를 망친 건 내가 아니었다"

한화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마구잡이식 투수 기용과, 리그 최하위권의 번트 후 득점 성공률(8위), 대타성공률(7위) 등 총체적인 난맥상을 보이면서 김성근의 데이터 야구는 실체가 없는 허구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투수의 기본적인 구질 조차 제대로 파악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데이터 야구는 커녕 감독으로서의 자질에 의심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구질 파악은 고사하고 2016시즌 리그 신인왕 신재영이 어떤 구종의 공을 던지는지도 모른다는 점이 더 큰 문제[11]로 지적되고 있다.

과거 SBS에서 방영한 야구 프로그램인 야구본색에서 그의 스몰볼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구질이 유리하고 어떤 투수가 그 구질을 잘 구사하는가를 철저하게 계산한 결과물이라고 했는데, 실상은 그런 계산은 커녕 자기팀 투수가 어떤 구질을 던지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

과거 김성근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주위가 흔들려도 나는 내 올바른 진심 하나면 된다고 봤다. 오로지 선수만 생각했고 팀만 생각했다. 야구만 생각했고 승리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다."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中 -
팀과 선수 생각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말해왔지만, 실상은 어떤 선수가 어떤 구종의 공을 던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떤 이는 김성근은 과거 데이터야구를 한 감독이라고 추켜세워주며 다만 시대에 맞추지 못한 거라고 실드를 치는 데 그야말로 노리타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일단 과거 방식이건 뭐건 데이터 야구라면 최소한 주먹구구식 데이터라도 수집하고 적용해야 하지만 그랬다는 예가 있긴 한가? 나름 예라고 든 첩자를 보내서 상대방 훈련을 염탐하는 건 데이터 야구가 아니라 비매너이다. 또, 당연하지만 야구 데이터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다양하고 방대해지는데 데이터 야구 한다는 양반이 거기에 따라오지 못하는 건 분명 문제이다. 그리고 데이터 야구를 한다고 했으면 당연히 오늘 상대팀 투수의 구질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 붙는 상대라 구종도 모른다는 말은 그냥 아예 데이터 안 본다는 소리.

4.2. 반론

애초에 데이터 야구에 대한 개념에서의 차이가 문제이다. 김성근 감독의 데이터 야구는 야구에서 일반적으로 데이터 야구라고 할 때 떠올리는 세이버매트릭스의 개념과는 아예 다르다. 애초에 김성근 감독이 세이버매트릭스 야구를 하고 있다면 일본 야구라는 또다른 별칭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성근 감독의 데이터 야구는 통계적으로 파고드는 야구라기보다는 일명 쿠세 야구에 더 가깝다. 상대의 습관 등을 현미경처럼 파악해서 그 약점을 파고들고, 스윙 궤적이나 팔로 스루 등을 좀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찾는 것이다. 김성근 감독이 데이터 야구를 한다면서 정작 숫자를 등한시하는 듯한 발언들이 많은 것도 이쪽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일반적인 야구팬들이 받아들이는 의미의 데이터 야구라면, 김성근 감독의 야구는 데이터 야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성근 야구가 또 데이터 야구가 아니냐고 하면 그 또한 애매해지는 것도 사실.

다만 위의 사례에서 신재영 투구를 커브로 불렀다는 것 가지고 물고 뜯는 것은 너무한 해석이다. 인터뷰 시점 팔순을 바라보는 노장이 헷갈릴 수 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실제로 슬라이더라기보단 커브의 성질을 띠고 있다. 해당 글에서는 버티컬 슬라이더라면 커브와 헷갈릴 수 있지만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횡무브먼트가 강하기 때문에 헷갈릴 수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건 신재영이 우완 사이드암 투수라는 것을 잊고 서술한 내용이다.

사이드암 투수의 커브각은 일반적인 오버핸드나 쓰리쿼터의 커브보다 횡무브먼트가 강하다. 커브의 특성은 종적 변화가 큰 것, 그리고 탑스핀이 걸리는 특성상 브레이킹이 특정 시점부터 급격히 나타나는 것인데, 사이드암은 그 특성상 종적 변화보다는 브레이킹에서 커브의 특성이 나타난다. 사이드암이나 언더스로 중 커브의 일종인 업슛을 주무기로 썼던 김병현의 커브를 보면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12] 즉 슬라이더의 경우에는 공이 그리는 궤적이 특별히 끊어지는 지점 없이 횡적 무브먼트로 나타나지만, 커브의 경우 브레이킹이 크게 걸리면서 퉁 하는 느낌으로 갑자기 꺾이는 느낌이 나오게 된다. 단순히 횡적 무브먼트가 크다고 해서 슬라이더와 커브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파일:랜디슬라이더.gif

파일:파일160622.gif

이러한 이유로 신재영 본인조차도 투심형 슬라이더를 장착하면서 신인왕까지 올라가기 전까지는 슬라이더와 커브를 구분하지 못했으며, 관련 기사 실제로 당시 넥센 감독이었던 염경엽 또한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꺾이는 양상이 다른 슬라이더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관련 기사 실제 투구 모습을 보면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초반 움직임이 약하다가 후반부에 급격하게 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비록 좌완이긴 하지만 같은 사이드암 계통인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와 비교해 보면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 특히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투심 실밥을 잡고 던지기 때문에, 슬라이더가 기본적으로 던지는 방향으로 휘어들어가는 것과 달리 약간의 역회전도 걸려 있다. 오히려 이러한 구종 성향은 슬라이더보단 커브에 가깝다. 심지어 해당 비판 글과는 달리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횡적 무브먼트와 종적 무브먼트가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파일:신재영 슬라이더.jpg

여기에 그립을 이야기할 때 손날이 타자 쪽으로 향하면 커브, 직구와 커브의 중간이면 슬라이더라고 하는데, 사진을 보면 사이드암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손날이 정확히 타자 방향을 향한다. 즉 김병현이 슬라이더 그립으로 커브를 던지는 것과 반대로 신재영은 커브 그립으로 슬라이더를 던지는 것에 가깝고, 이러한 부분들을 총체적으로 고려했을 때 신재영의 슬라이더는 최근 유행하는 슬러브에 가까운 구종이다. 슬러브의 대표 주자인 코리 클루버의 공 같은 경우 횡무브먼트가 크기 때문에 투구 분석 업체마다 슬라이더로 부르기도, 커브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과 비슷한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슬라이더 형태는 우규민, 임창용 등 사이드암 계통 투수들에서 자주 나타나는 양상이며, 사실 야구의 구종이란 것이 선수마다 같은 구종이라도 그 무브먼트 양상이 다르고 그립이 다른 만큼, 일반 야구팬들이 인식하는 것처럼 여기까지는 커브, 여기까지는 슬라이더 같은 식으로 칼같이 나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뭐라고 부르냐에 따라 커브일 수도, 슬라이더일 수도 있는 것.[13] 즉 신재영이 커브와 슬라이더를 분리해서 자주 던지는 것도 아닌 상황인 이상, 둘을 착각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즉 데이터 야구의 선도자로 알려져 있는 부분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오히려 LG 시절 김성근 경질의 사유로 데이터 야구는 재미없다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김성근의 데이터 야구는 야구계에서는 옹호자이든 반대자이든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사항이다. 다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미신과 징크스에도 굉장히 민감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고, 그 데이터 야구의 특성 자체가 우리가 현 시점에서 주로 떠올리게 되는 세이버매트릭스가 아니라 쿠세 야구인데다 본인도 징크스 등을 엄청나게 따지는 스타일이다 보니 저게 데이터 야구가 맞나 하는 혼란이 오게 되는 것.

5. 아웃사이더/비주류

김성근은 항상 자신이 재일교포 출신이기 때문에 차별받아온 완벽한 아웃사이더였다고 언플해왔다. 이러한 언플 덕분에 고양 원더스 감독시절까지도 김성근은 야구계 주류와 거리가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재일교포 2세로 별다른 연줄 없이 실력 하나로 팀을 올려놓으면 토사구팽 당하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팀에서 또다시 재기하는 승부사. 이게 고양 원더스 시절까지 따라다녔던 이미지였다.

그러나 김성근의 프로 1군 감독 경력만 살펴봐도 그는 프로야구 태동기부터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SK, 한화에서 감독을 맡으며 지속적으로 감독직을 역임했다. 아마지도자, 2군 감독, 코치, 독립구단까지 합치면, 3년이상 현장을 떠났을 때가 없었다. 한구 프로야구, 아마야구 역사를 통틀어 김성근 만큼 많은 구단에서 감독과 코치 경력을 쌓은 사람은 없다. 1980/90/2000/2010년대에서 모두 프로야구 감독을 해본 사람은 김응용, 김성근 이 둘뿐이다. 프로가 없던 시절의 실업야구부터 치면 거의 40년 까까이 최고의 야구무대에서 감독과 코치로 경력을 꾸준히 쌓아 왔다. 박수는 엘지를 떠나고 SK에서 우승을 하면서 부터 받았다고 해도, 야구 지도자 최고의 위치인 프로감독을 꾸준히 해왔는데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말하고 있는 것.

비주류/아웃사이더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적어도 KBO 리그에서 차별받았다는 것은 거짓 내지 과장에 가깝다. 김성근은 실제로 일본 출신에다가 고집불통, 자기만 아는 성격으로 동년배 중 친하다고 할 만한 야구인이 별로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야구판은 지연, 학연으로 돌아가는데 김성근은 한국에 지연도 학연도 가지지 못했기에 명백히 비주류가 맞다. 그러나 완전히 외톨이까지는 아니고, 후술하듯 일본파의 인맥이 있어서 그나마 같은 일본파들하고는 좀 어울렸지만, 본래 일본파들은 실력은 뛰어나서 우대는 받을지언정 절대적인 머릿수는 소수였고 국내파들도 실력이 상승하며 그 수가 더 줄어들어 2000년대에 재일교포 야구인이 구계에 몇명이나 남아있는지 생각해보면 일본파인 김성근은 비주류, 적어도 소수파는 확실히 맞다. 그러나 이런 야구판에서 여기저기서 그렇게 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목숨과도 같다는 야구감독직에 무려 30년 넘게 김성근이 있을 수 있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김성근은 운영에 있어 전권을 탐하는 인물답게 그 시절부터 이미지메이킹에 힘썼고, 같은 야구인들이 아닌 재벌 구단주와 기자들로부터 신임을 얻기 위해 힘썼기에, 그런 점이 김성근을 비주류임에도 야구판에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냥 공 던지고 칠 줄만 아는 야구인들과 달리 결국 야구단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구단주와 그들이 내놓는 돈이고, 그들이 돈을 내놓게 하는 원동력은 대중이기에 현장야구인들 사이에서는 철저히 소수파이고 왕따였지만, 야구는 야구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스폰서들과 함께 하는 것이기에 관객과 스폰서를 자기 편으로 만든 김성근은 어떤 면에서는 슈퍼 갑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여론에 힘입어 한화 이글스 감독에 취임할 당시 정점을 찍었다.

김성근이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구단주들과 커넥션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지는 아래 "5.3.2. 구단 총수들에게는 깍듯한 태도" 항목에 설명되어 있다. 김성근은 재벌 구단주의 힘을 이용해서 야구 역사상 누구보다도 화려한 커리어로 무장했고, 누구보다 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감독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를 '야구계'의 아웃사이더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지 모르나, 현장에서 직접 야구를 하는 체육인들, 소위 말하는 '현장 야구인'들 사이에서의 아웃사이더는 맞다. 실제로 사람 좋기로 유명한 김경문이나 류중일 감독 등이 김성근 얘기만 나오면 학을 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흔히 그의 출신을 들어 그가 설움을 당했고 주류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이후 그를 끝없이 따라다니던 단어는 쪽바리로, 한국말이 어눌하다는 이유와 이런저런 차별로 인해 한국 체육계에서 배척받아 왔다는 것. 일제강점기 시절을 통한 반일감정과 군사정권 때 냉전이란 극한 대립속에 재일교포가 반쪽바리, ( 조총련을 통한) 간첩질이나 하는 국가반역자라는 인식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다큐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서는 한일간의 야구격차가 크던 1960년대 후반까지는 재일교포 야구인들의 한국 야구 발전 기여에 대해 국가적인 환대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나, 문세광 사건 등으로 재일교포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나빠지면서 차별이 심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장효조의 증언 등에서 짐작해 볼때, 고교야구에서 재일교포 야구단에 대한 편파 판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점도 분명 볼 수 있다. 관련기사. 일본야구 출신에 대한 팬들의 여론이 마냥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롯데에서 감독대행으로 있었던 도이 쇼스케(등록명 도위창)은 코칭스탭으로 재직 중 시즌 중에 감독이 경질당하자 감독대행으로 감독직을 수행해 호성적을 거두었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팬들의 비난을 받아 정식 감독계약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야구계에서 재일교포는 차별의 대상이라기 보다 우대의 대상에 가까웠다. 물론 대중적 인기라는 측면에서 비슷한 실력이면 재일교포였던 김일융보다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김시진의 인기가 더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야구 외적인 면을 제외한다면 김영덕, 송재박, 김일융, 장명부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야구 무대에서 뛴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은 실력만 있으면 그 대우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었다. 교토 출신인 김영덕 전 감독도 실력에 있어서는 국내에서 차별받지 않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는 재일교포들이 선진야구를 습득했다는 이유 하나로 국내선수들을 제치고 주전을 꿰차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대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김일융의 경우 비록 인기는 김시진보다 못했지만, 김시진보다 약 세 배 많은 연봉을 받았으며, 이에 더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계약금, 이적료, 집, 승용차까지 삼성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애초에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출범할 때부터 장훈 등 재일교포 야구인들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 졌다.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에는 일본에서 기회를 받지 못하던 재일동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해 활약했으며, 야구단 창단 당시 프런트에는 일본통이 많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이건희 회장이 일본통이었으며 일본 유학 시절 카네다 마사이치 등 재일교포 야구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정도로 열렬한 야구팬이기도 했다. OB 베어스 구단주인 박용곤 회장도 일본통으로 일본 출신인 김성근을 매우 아낀 것으로 유명하다.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신격호 회장도 재일교포 야구선수 카네다 마사이치 등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질 정도로 야구팬이며[14],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 프로야구단 롯데 오리온즈[15] 운영하고 있었고, 한국에서도 프로야구가 생기기 오래 전부터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을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기업인이자 한국야구계 행정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최인철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코시엔을 밟아본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56년부터 있었던 재일교포 야구단들과의 친선경기에선 재일교포 야구인들이 자신들의 장비를 낙후된 장비를 쓰던 한국선수들에게 주고 오던 실정이었다. 현장이나 윗선이나 다 이러니 야구계는 전반적으로 재일동포에 대해 우호적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코치, 프런트 경험만 가졌던 사람 수도권 구단 감독자리까지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김성근은 배수찬[16]과 함께 공안기관에 불려간 일을 재일교포 야구인에 대한 차별 사례로 많이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이것은 매우 특수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은 김신조 사건으로 시국이 경직된 상황에서 발생한 일로[17] 배수찬의 경우, 당시 그의 가족들이 대표적인 친북 반국가단체인 일본의 조총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던데다가, 그의 어머니를 포함한 일가족과 친척들이 재일교포 북송사업 때 자진 월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배수찬은 북한에 있던 그의 가족들과 비밀리에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김신조 사건 발생 이후 공안당국이 이것을 문제 삼아 배수찬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이와 더불어 남한에서 배수찬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던 김성근도 공안기관에 하루동안 조사를 받고 나온 것이었다. 배수찬은 일본 사회인 야구팀에 있던 김성근을 설득하여 대한민국 실업야구팀인 교통부 야구팀에 입단시킨 장본인이며, 1962년 기업야구 야구팀이 창단하자 함께 팀을 옮기기도 했다. 1970년 기업은행에 투수코치가 공석이 되자 당시 별다른 지도자 경험이 없던 김성근으로 투수코치로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이도 배수찬이었다. 심지어 배수찬은 김성근을 대신해서 김성근의 장인에게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설득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몇년 후 급진좌파 재일교포 문세광이 또다른 대통령 암살시도 사건을 일으킨 것을 보면 소환조사가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보기도 힘들다. 이렇듯 배수찬의 사례는 다소 특수한 사례였는데, 이것이 마치 당시 재일교포들이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이유없이 공안당국에 끌려가 조사받는 차별을 당한 예로 인용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18] 관련 칼럼

김성근이 재일교포였기 때문에 차별받고 프로 감독에서 자주 경질된 것처럼 비춰지기도 하는데, 이 또한 사실과 전혀 다르다. 첫 프로감독인 두산(OB) 시절에는 시원찮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일본통이었던 그룹 고위층의 신뢰 덕분에 비교적 장기 집권했지만, 프런트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운영하하면서 계속 갈등을 일으킨데다가 임기 마지막 해에 시즌 중 올해를 끝으로 나간다고 언론 플레이를 먼저 하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그룹 고위층의 신뢰조차 잃어버렸다. 태평양 시절에는 애먼 임호균을 화살받이로 사용해 스스로 나갈 명분을 만들어 나갔다. 삼성에서는 지금까지의 삼성의 야구색과는 전혀 다른 야구색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면서 선수단과 끊임없이 반목하고 우승은 커녕 한국시리즈 진출도 못하고 가을야구 탈락. 비밀번호 556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고 잘렸다. 쌍방울은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페이롤 1위를 찍을 만큼 전폭적으로 지원해줬으나 모기업이 부도나고 어려워지자 결국 구단과 갈등을 벌이다 경질되었다. LG에선 단장과 마찰을 빚은후 그룹 VIP가 개인일정 보내는 곳에 연락도 없이 찾아가 읍소하려 하다가 역으로 불쾌감만 주고 잘렸다. SK에선 팀이 내부적으로 곪아가는 가운데 프런트와 갈등이 최고조인 상황에서 임기 마지막 해에 시즌 중 재계약 의사가 없고 시즌 끝나고 떠나겠다고 먼저 밝히며 프런트와 이만수, 선수들 모두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다음날 SK로 부터 경질 통보를 받았다. 프로야구 탄생 이후 김성근이 도위창처럼 일본 출신이라 불이익 받은적은 없다.

아웃사이더 이미지가 생긴 또다른 이유는 김성근은 특유의 비매너 플레이와 내로남불적 행태로 타팀팬들로부터 수시로 비난을 받곤 했었는데, 이게 김성근과 김성근의 팬들들의 언플을 거치며 아웃사이더 이미지로 미화되었기 때문이다. 김성근은 상대팀을 흔들어 놓기 위해 방망이 색깔, 마운드 높이, 로진 가루, 사인훔치기 등 당시 사문화된 규정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며 항의하며 시간을 지체하는 모습이 자주 비쳐줬고, 게다가 김성근의 말은 김성근의 말로 반박가능하다 할 정도로 내로남불하는 언행을 수시로 쏟아내며 야구팬들의 비난을 초래했다. 더하여 늘 뚱한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앉아있는 모습에 어눌한 말투가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이미지로 보이지 못했는데 이게 SK 시절을 거치며 야구판에 자기 편 하나 없는 고집스러운 '야저씨' 이미지로 재가공되었다.

인터넷 문화가 발전하지 않았던 쌍방울이나 시절이나 프로야구 전체의 암흑기였던 LG 시절에는 김성근을 추종하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SK 감독을 맡으면서 자신의 철학을 4년간이나 밀어준 프런트를 만났고 상위권 전력에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었던 팀에서 그는 눈부신 성적을 냈고, 베이징올림픽으로 인한 야구 부흥,이에 그를 추종하는 인터넷 팬덤과 언론 기자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팬텀을 등에 업고 그의 행동은 상당 부분 미화되고 윤색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게다가 김성근 본인도 많은 양의 언론플레이를 쏟아내고 자서전 출간, 강연등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했다. 나치 프로파간다 수준의 미화로 점철된 다큐멘터리 파울볼은 KBO 역사상 어떤 감독도 받지 못한 언론 지원이었다.

김성근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오른 고양 원더스 시절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보도 마데이의 비극, 외인은 소모품이 아니다가 김성근의 혹사 야구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진 2015년 9월에서야 기사화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도 크다. 물론 고양 원더스의 과도한 외국인 투수 의존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미약하게나마 꾸준히 있었지만 고양 원더스 해체 전까지는 이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프로에서 밀려난 선수들이 다시 프로에 대한 꿈을 꾸게 해준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에 가까웠다.

이런 행보들을 바탕으로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로 프로야구계에 다시 복귀한 2015, 2016년 KBO의 주요 감독과 심판들이 거의 다 본인의 제자 혹은 제자의 제자세대이고 구단주로부터 프런트의 권한으로 인식되던 선수 선발 등 전무후무하게 팀운영의 전권을 부여받은데다 비판의식없이 옹호하는 일부 기자, 칼럼니스트들과 커뮤니티, 댓글 등의 여론을 조작할 정도로 노리타란 멸칭으로 불릴 정도로 광적인 팬들을 거느린, 단순히 한 팀의 감독 그 이상의 존재감과 위상을 자랑했다.[19]

SK 감독에서 경질된 이후로도 하향평준화나 삼성 우승폄하 발언으로 이만수, 류중일 등을 비난하며 야구계 어른 행세를 했다. 그럼에도 당사자들을 포함해서 일선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별 말을 못했다.[20]

이제는 2016년 4월 23일 친 김성근 기자로 유명한 박동희마저도 자신이 작성한 기사 '시대의 요구, 김성근 야구의 종언' 에서, 김성근을 야구계의 주류중 주류라고 표현했고 그 말이 맞다. 과거에는 비주류였으나 연차가 쌓이고 야구 내외적으로 노력도 해서 주류가 된 케이스.

5.1. 프런트의 불의에 저항하다가 번번히 경질된 외골수?

5.1.1. 구단 프런트와의 불화

"구단하고 트러블 많이 있었고... 내가 구단에 갈 때는 야구하러 왔지 상사한테 아부하러 간건 아니라는 이런 확고한 그걸 가지고 있어가지고 잘 위에 사람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감독 자리라는 건 어떤 자린지 내가 알고 있으니까 일부러 트러블을 만드는 경우도 있어요. 태평양에 갔을 때는 저보다 한참 위에 아버지 같은 분( 신동관 태평양그룹 부회장 겸 야구단 사장)[21]이었는데 (중략) 이건 사장하고 싸워가지고 내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결례라는 걸 알고서도 제가 덤볐어요." - 2012년 4월 2일 '프로정신과 리더십' 특강, 한국경제연구원 KERI Forum
"나는 고개를 안숙이니까. 위에 사람들은 고분고분한 사람들을 좋아하겠죠. 나는 뭐가 있더라도 느끼고 보면 말을 해야 되겠고 그러니까 위에 사람들이 볼 때는 제가 아주 안좋은 인간이었겠죠. 사장 입장에서는 내가 사장님 감사합니다 이런 존재가 아니니까 껄끄러웠겠죠. 그니까 자르는 사람은 위에 사람이에요. 이건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요. 선수들은 나 안짤랐어요. 이건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쵸? 선수가 나 배반한 건 없어요. 그죠?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봐요. 그죠? 위에 사람 한 사람 두 사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에요. .. 나는 선수들에게 욕을 먹는 지도자는 아니었지 않나 싶어요.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 야구의 신 김성근 2부

여러 팀을 거치는 동안 항상 구단 프런트와 불화가 있었다. 구단 프런트에게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조금이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프런트와 갈등을 벌였다. 구단에서 현장 감독과 프런트가 해야 할 일이 각각 구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등학교 야구부마냥 모든 것을 다 자신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길 원했다. 김성근이 말하는 전권부여는 야구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현장에서 감독 영역에서 전권을 가지고 여기에 프런트가 간섭말라는 수준을 넘어서서, 감독이 원하는 것에 대해 뭐든지 프런트가 지원해줘야 하는 방식이다. 한화 감독을 맡으면서도 전권을 부여받았다.

신임 감독 시절인 OB 베어스 감독 시절부터 김성근은 프런트와 엄청 싸웠다. 단 그룹 총수 일가 출신인 박용민 단장 겸 사장[22]에게는 전혀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고 항상 그 밑선과 갈등을 벌였다고 한다.

태평양 돌핀스 시절부터는 단장, 사장급과 직접 싸웠다. 태평양 돌핀스는 1988년 시즌 개막 직전 급하게 청보 핀토스를 인수했기 때문에 첫 시즌은 청보 핀토스의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을 그대로 데리고 시즌에 임해야 했다. 그러나 연말에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예고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태평양 돌핀스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결국 연패가 이어지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시즌을 종료하게 되었고, 시즌 종료와 동시에 태평양 그룹은 청보의 잔재를 걷어내고 팀을 재건하기 위한 대대적인 투자에 들어갔다. 구단 사장에 취임한 신동관 태평양 부회장은 구단 담당 기자[23]였던 김수인 기자에게 새로운 감독을 추천해달고 요청했고, 이에 김수인 기자가 안면이 있었던 김성근을 감독으로 추천했다. 김성근은 태평양에 부임하면서 신동관 사장에게 일본어로 적힌 21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이에 신동관 사장은 김성근 대신 다른 감독을 알아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다른 마땅한 감독감도 없었고, 김성근을 추천해준 김수일 기자가 "야구단을 제대로 만들겠다는데 큰돈 들지 않으면 다 들어주세요”라고 말하는 마람에 결국 김성근과 계약하고 그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줬다. 그런데 김성근은 취임하자 마자 오대산 극기훈련을 추진했고, 구단은 만화영화에나 나올법한 이런 전례없는 극기훈련의 효과에 대해 의구심 표하며 오대산 훈련을 반대하고 훈련비를 지원하지 않았다. 오대산 극기훈련에 반대한 것을 제외하면 태평양 구단은 김성근의 요구사항을 거의 다 들어주며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여러 선수들을 새로 영입하면서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했고 이렇게 새로 영입한 선수들은 당장 팀의 주전으로 김성근 1989시즌 태평양이 호성적을 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김성근은 오대산 극기훈련 비용 거부를 빌미로 프런트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89년 강화된 전력의 태평양이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자 김성근의 주가가 치솟았고, 삼성, 롯데 등 여러구단에서 김성근을 원한다는 구체적인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김성근은 임호균 각서 파동을 일으켜 구단과 극한의 대립을 이어갔고 결국 시즌이 종료되면서 본인이 원하는대로 경질당한 후 삼성 감독에 취임했다.

삼성 라이온즈는 우승하기 위해 김성근을 영입했다고 공언하면서 비시즌 기간 동안 무려 15명의 선수를 보강하는 가공할 돈질의 위력을 보였고, 이에 KBO와 각 구단 단장들이 모여 삼성을 성토하면서 무분별한 선수확충을 자제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례없는 대대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이 1991시즌 성적을 내지 못하자, 언론들은 성미 급한 삼성 구단이 바로 김성근이 경질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의외로 삼성은 김성근을 유임시켜 언론과 야구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사실 삼성이 김성근을 영입한 것은 그룹 총수의 의중[24] 때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에 삼성 프런트도 한 시즌만에 김성근을 함부로 자르지는 못한 듯 하다. 그러나 삼성 시절에도 구단의 전통적인 야구관과 차이로 많은 갈등을 벌였는데, 메이저리그 야구를 표방하며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LA 다저스 캠프로 전지훈련을 가서 합동훈련을 하던 삼성의 훈련 스타일에 반기를 들고 삼성의 미국 스프링캠프 일정을 축소하자고 주장하는 등 프런트와 갈등을 벌였다. 수비 시스템 등으로 삼성의 코치 및 선수들이 김성근에 반발한 것도 유명하다. 결국 두번째 시즌 종료 후 김성근은 경질되었다. 어쨌거나 김성근은 삼성에서 경질되고 재취업에 실패하면서 쌍방울 감독이 되기 전까지 야인생활을 하면서 고교 야구 인스트럭트, 객원 야구기자, 해태 인스트럭터 및 2군 감독 등 여러 직장을 전전해야 했다.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에는 한때 페이롤 1위를 찍을 정도로 구단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줬지만, IMF 이후 모기업이 어려움을 겪자 김성근은 모기업이 지원 안해준다면서 구단과 갈등을 벌였고[25]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

LG 트윈스 시절에도 역시 프런트와 마찰을 일으켰다. 이전 팀들과 달리 LG 트윈스는 전통적으로 KBO 구단들 중에서도 프런트의 힘이 아주 강한 구단이었기 때문에 김성근에게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2001시즌 6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전임 감독인 이광은이 부진의 책임을 뒤집어 섰다.[26] 이듬해인 2002년 정식 감독이 된 김성근은 70승을 거두겠다면서 야심차게 출발했으나 전반기에 극도의 부진을 겪었으면서 프런트와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여름에 반등에 성공하면서 극적으로 두산을 젖히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포스트시즌에서 선전하며 준우승까지 거두었다. 그러나 프런트와의 냉랑한 관계에 위기 의식을 느낀 김성근은 급기야 구단주의 개인 일정을 알아내어 골프장까지 찾아갔으나 구단주는 김성근 감독의 이런 돌발 행동에 크게 불편함을 느꼈다는 후문이 전해졌고, 결국 김성근은 경질되고 말았다. 경질된 후 김성근은 언론을 통해 어윤태 LG 구단 사장을 직설적으로 비난했다.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구단 사장인 신영철의 막걸리 야구 드립은 이러한 불화를 내포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SK 시절에는 이러한 상황은 고려않고 '월급 받아먹으면서 언론플레이도 못하고 언론으로부터 감독을 보호해 주지도 못 하는 능력 제로의 프런트라며 지탄하는 팬들이 다수였다.

언플과 팬들의 쉴드를 등에 업고 그가 팀에 끼친 악영향은 엄청났다. SK 경질 이후 그를 영입한 고양 원더스 프런트에서는 최대한 김성근의 요구에 맞춰 선수단 구성, 육성 전권을 부여하고 코칭스태프들을 김성근 사단으로 구성하면서 김성근을 지원했다. 그러나 고양 원더스는 김성근과 그 코치들, 김성근이 하루걸러 투입시킨 외국인 선수들 연봉 지불하다 해체되었다. 한화도 고액 FA 영입, 트레이드, 언론플레이, 외국인 선수 기용 등 무엇하나 발 맞춰주지 않는 감독 뒷바라지 하느라 2015시즌 내내 고생하고 가볍게 페이롤 1위를 찍었다.

이래놓고 프런트를 대하는 태도는 평소에도 매우 좋지 않다. 김성근은 강연에서 구단 사장보다 현장 감독인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장을 무시하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27] 심지어 태평양 감독 시절에는 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해 고의로 임호균 각서 파동 등을 일으켜 구단과 트러블을 일으켜 경질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1991년부터 2012년까지 22년간 KBO에 8구단 체제가 확립되었고, 김성근은 이 가운데 8구단의 전신이 되는 팀까지 포함하여 7구단에 몸을 담았다. OB 베어스에서 시작하여, 삼청태현의 셋째인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2군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와 그 선수단을 물려받아 재 창단한 SK 와이번스, LG 트윈스, 그리고 2014년 말부터 2017년 5월까지 재임한 한화 이글스까지. 유일하게 제외된 구단이 롯데 자이언츠이다. 상술한 전력을 읽어봤다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김성근이 프로팀 감독으로 부임할때마다 단서로 다는 전권부여에 대해 10개 구단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프런트가 롯데 프런트이기 때문이다. 유능하고 무능하고를 떠나서 감독에게 전권부여는 절대 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독의 영역까지 침범하다가 망하는 일[28]이 잦았던지라 김성근과는 상극중의 상극이다.

5.1.2. 그룹 총수들에게는 저자세

김성근 : 나는 최태원 회장이라든지 SK그룹에는 유감이 없어. 오히려 나를 키워준 거 고맙게 생각해. SK가 나를 다시 불러줬다는 자체가 그래. (…) 나는 어느 구단 가서도 오너는 참 좋은 분들 만났다고.
김은식 : 최태원 회장이랑 LG 계실 때 구본무 회장 말씀하시는 건가요? 또 지금 허민 대표랑…
김성근 : 음. 그렇지. 두산 박용곤 회장님도 그랬고. 참 좋은 분들이었다고. 소탈하고. 야구 좋아하시고. SK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사장들이 문제다. 사장, 단장. 그들이 중간에서 장난한다고. 이거 문제야.
김은식과의 인터뷰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성근은 평생 구단주인 대기업 총수에게는 저자세를 취했다. 공개적으로 여러차례 구단주들을 존경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성근이 불화를 일으키며 권력 투쟁을 했던 대상은, 어디까지나 중간관리자 프런트, 구체적으로 프런트 사장 또는 단장이었다. 김성근이 프런트와 극한의 대립을 일으켰을 때도 최고위층인 구단주를 언제나 두둔했다.

가히 황우석이 정치인들에게 했던 것과 비교할 만 하다. 상대가 재벌총수인데 그정도면 판검사, S급 변호사 쯤은 아무것도 아닌 분들이다. 김성근은 전경련에서나 볼 법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능했으며, 당장 한국에서 전경련 핵심 멤버를 갖고놀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보자. 문화계에서는 신정아도 이런 면에선 결국 똑같은 부류였다.

흔히 사람들은 김성근이 외곬이라서 11회나 감독 자리를 잃은 줄 알지만, 11회나 재취업한 까닭은 있다. 김성근은 과거나 지금이나 프런트가 꺼리는 감독이지만, 그룹 최고위층에 대해서는 항상 존경과 감사를 표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니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그들과 친분을 쌓고 직접 대면하려 애썼다. OB·삼성·한화 등에서 감독이 될 때 프런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룹 총수의 지시로 그의 영입이 이루어진 바 있다.

김성근은 누구보다 구단 총수의 힘을 잘 이해하고 직접 그들을 통해서 일을 처리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중요한 사안, 특히 자신의 거취와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늘 그룹 총수와의 직거래를 원했다. 구단 내에서 뜻이 관철되지 않았을 때, 또는 갈등이 생겼을 때 그런 성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프런트에서는 '김성근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구단주와 직접 독대를 해서 일을 해결하려 한다'고 불만이 많았다. 김성근은 구단 총수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항상 노력했고 경질된 후에도 항상 자신이 몸담았던 팀의 프런트를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구단주들에 대해서는 깍듯하게 감사의 말을 전하곤 했다.

특히 OB 베어스 감독 시절 김성근은 그룹 총수 박용곤 회장의 총애 덕분에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 장기집권할 수 있었다. 일본통이었던 박용곤 회장은 김성근을 무척 신뢰했다. OB 베어스 감독 시절 김성근은 임기 내내 성적 부진과 몰수 게임 파동 등 각종 논란을 일으켜 언론으로부터 여러 차례 경질설에 시달렸지만, 박용곤 회장은 그룹 중역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근이'라고 부르며 "내가 가라고 하기 전에는 가서는 안 된다"하면서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줬다.

각 구단 단장·사장들과 무수한 마찰을 빚었던 김성근이었지만, OB 감독 시절에는 단장과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OB 베어스 박용민 단장이 두산 그룹 총수 일가였기 때문이다. 대신 박용민 단장 아래 사람들과 많이 싸웠다고. 박용곤 회장의 절대적인 신임 덕분에 몰수게임 파동 등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박용민 구단 대표이사 겸 단장은 앞장서서 김성근 감독을 두둔하고 사건을 무마시켰다. 그러나 임기 첫 해를 제외하고 성적 부진[29]과 프런트와의 갈등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박용민 단장도 김성근에 대한 인내심에 바닥을 드러내고 이광환을 미국에서 불러들였고, 김성근에게는 재계약 불가 방침을 통보했다.

OB 시절 그룹 총수의 총애 덕분에 많은 혜택을 체감했던 김성근은 이후에도 여러 구단을 옮겨다니면서 여러 방식으로 구단 총수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김성근은 구단주와 직접 대면을 이루기 위해 면담이나 방문 같은 정상적인 형식과 절차가 아니라 VIP가 사적인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장소까지 찾아가 그룹 총수 만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구단주와 직접 대면해서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덕분에 프런트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도한 요구를 상당부분 관철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모 구단 시절에는 오히려 역풍을 맞은 적도 있었다.

김성근은 실업야구 시절부터 경성고무 오너 집안 출신인 이용일과 친분을 쌓았는데, 나중에 이용일이 쌍방울 부회장이자 구단주 대행이 되었을 때 김성근을 쌍방울 감독으로 영입하게 된다. 김성근은 92년 삼성 감독에서 경질된 후 감독으로서 경력이 사실상 끝났다고 여겨졌으나 이용일과의 친분 덕분에 1996년 감독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김성근은 훗날인 2011년 이용일의 측근이었던 유영구 KBO 총재가 명지학원 비리로 구속되었을 때 KBO 규약을 바꿔서 유영구 총재를 복귀시켜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기까지 했다.

한화이글스 시절 후반에 구단과 대립각을 세우며 박종훈 단장을 맹비난하던 시절에도 사장에 대한 비난은 일체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30] 사장이 한화그룹 선대회장의 조카 즉, 김승연 회장의 사촌동생인 김신연 대표이사였기 때문이다.

과거 인터뷰에서 김성근 이렇게 말했다.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김성근은 구단주에게 절대 아부할 생각도 없고, 바빠서 아부할 시간도 없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구단주의 사적인 스케줄까지 은밀히 알아낸 후 직접 찾아가 자신을 어필하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까지 행적 및 처신들을 보면 이 발언과 행적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구단주를 완전히 매혹시켰고 끊임없이 언론에 자신을 노출시켰으며 선수들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참스승, 그리고 정치 같은 거 모르는 야구바보의[31] 모습으로 자신을 미화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외국인 투수들을 혹사시키며 자신의 재취업 용도 이외엔 어떤 의미도 찾기 힘든 독립야구단의 2군 리그 성적을 철저하게 관리해왔다. 결국 구단주가 수십억의 손해를 보며 운영하고 유지한 원더스의 의의는 김성근의 화려한 컴백을 위한 토대로 전락했다.[32]

5.2. 한국 야구에 대한 공헌?

노리타들의 언론플레이에 의해 한국 야구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원로 야구인이자 사회 지도급 인사로 포장되고 있다. 하지만 막상 김성근이 한국 야구의 발전에 구체적으로 무슨 기여를 했는지 살펴보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야구계나 구단에게 쓴소리한 것을 제외하면 김성근이 야구계에 기여한 점은 그 실체가 없다.

다만 김성근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가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각종 위장 오더 사건( 태평양 시절, 삼성 시절, 쌍방울 시절) 및 초유의 이중 오더 사건, 윤석환 승률왕 밀어주기 논란, 마운드 높이 논란 등의 사건에서 김성근이 야구 규정의 헛점을 악용하자, 이러한 악용 사례를 막기 위해 야구 규정이 보완된 것이 여러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기여, 그리고 그의 적폐 야구가 현재 한국 야구계에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는 점으로써의 기여를 제외한다면, 김성근이 한국 야구계에 저지른 폐단들은 무수히 많을지언정, 그가 야구계에 순수하게 공헌한 바는 거의 없다. 그러니까, 본인이 의도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야구계가 바뀐 건 있지만..

김성근은 지금까지 국가대표 감독을 한번도 맡은 적이 없다. 물론 2007년 SK에서 처음 우승하기 전까지는 단기전에 약한 새가슴 감독의 대명사였기 때문에 국가대표 감독 물망에 한번도 오르지 않았다.

김성근이 국가대표팀에 미친 더 큰 해악은 본인과 본인의 팀(당시는 SK)을 이익을 위해 대표팀 코칭 스태프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대표팀을 흔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에게 동업자 정신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상식 있는 인간이라면 자기 대신 대표팀을 맡아준 김경문 감독에게 고마워하고 국가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응원해 줘야 정상인데, 김성근은 김경문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겨울 비시즌 기간동안 쉬지도 못하고 힘들게 올림픽 예선을 치루고 돌아온 대표팀을 향해서 코칭스태프들이 선수 관리를 엉망으로 해서 김광현, 정대현의 몸상태가 나뼈졌다면서 김경문과 대표팀 코칭스태프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결국 보다 못한 김응용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 나서서 " 김성근이의 수법이 또 나왔다. 김성근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건 라이벌인 김경문을 흔들기 위한 위한 것"라고 말하며 김성근을 강하게 비난했다.

건강을 핑계대며 2008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끝내 고사했던 김성근은 막상 올림픽 시즌이 되자 아들 김정준과 함께 SBS에서 올림픽 중계를 맡아 단기 알바로는 상당한 거액의 출연료를 챙기기도 했다. 당시 SBS에서도 대놓고 야구의 신을 불렀다고 대대적으로 광고까지 때렸을 정도. 그러나 정작 베이징 때는 아리가또 GG사또, 고엥민으로 대표되는 MBC가 큰 이득을 보았다[33]

2009년 WBC 대표팀 감독 역시 리그 우승팀 감독인 김성근이 맡을 차례였으나, 역시 KBO가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어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냥 하기 싫었던 걸 KBO가 태도가 어쨌네 저쨌네 하니까 욕을 먹는 것뿐인데, 김성근 본인은 그걸 모른다. 아마 계속 모를 거 같지만 KBO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은 감독은 김성근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미 사전에 우승팀 감독이 맡기로 합의되어 언론에도 진작부터 크게 보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요청이고 나발이고 할 것 없이 그냥 김성근이 아무 말 없이 맡았어야만 했던 상황을 그저 회피하기 위해 KBO에게 예의 드립을 치는 것. 김성근 광팬들은 "KBO에서 정중하게 요청하지 않았다"면서 예의 드립을 치며, 오히려 김성근이 야구계로부터 왕따 당하고 있다는 식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갔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안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것은 돈과 고생 문제. 일단 야구 국대 감독은 연봉이 안나온다. 지금이야 선동열 감독을 시작으로 전임감독제가 도입되었지만, 이 당시에는 그랬다. 돈도 안나오는데 WBC는 한창 스프링캠프 가야 할 시기에 대회가 있어서, 감독이 1년의 시작이자 전력점검인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 못하면 시즌을 치르는 데 여러가지 지장이 생긴다.[34] 이리저리 단기간에 여러 곳 비행기 타고 해외 다니는 것도 고생스러운 일이고. 애초에 우승팀 감독이 돌아가면서 맡기로 하는 이유도 아무도 안 하고 싶어하니깐 할당제로 만들어 놓은 것. 당번제로 해놓은 일 돈도 안되고 고생스럽다고 짼 것에 가깝다. 뭐 진실은 김성근만이 알겠지만. 진짜로 고령은 맞기 때문에 WBC처럼 단기간에 비행기 여러번 타는 스케쥴을 소화하기에는 건강이 안좋을 수도 있고...

또한 당장의 성적을 내는데 급급할 뿐, 젊은 선수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이 없어 유망주를 발굴한 적이 별로 없다. 유망주 발굴은 팀의 미래뿐만 아니라 야구계 전체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김응용, 강병철 등 원로 감독들이 말년에 성적이 안 나오면서도 유망주들을 키워내려 한 이유는 팀의 미래, 나아가 한국 야구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항상 유망주보단 즉전감을 선호했으며 그나마 괜찮은 유망주들은 혹사하여 채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신인 시절에 선발 중간 오가며 살인적인 혹사를 당한 박정현이 그러했다.

김성근과 노리타들이 주장하는 '실패한 선수들을 위한 다시 한 번의 기회'였다는 고양 원더스 데럴 마데이 등 퓨처스에 걸맞지 않은 외국인 선수를 비롯한 투수들의 혹사 위에서 이뤄진 업적이었으며, 그나마도 구단주의 예상을 뛰어넘는 재정 운영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런 사람에게 기업을 맡기면, 도산하는 건 순식간이다.

본인은 SK-고양 원더스 시절을 거치며 사회적 리더의 명성을 쌓고 강의를 다니며 야구계를 뛰어넘는 위상을 얻었지만, 감독과 구단들을 향한 몇 번의 쓴소리[35], 또한, KT가 수원을 연고지로 하는게 확실시되자 성균관대학교에서 인스트럭터를 한 것[36]을 제외하면 물적, 심적 모두 감독으로서 한국 야구계에 기여한 정도는 원로 감독치고는 너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김성근은 감독으로서 고액 연봉을 받았고, 수많은 강연과 여러 자서전을 저술하면서 역대 그 어느 감독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를 쌓았고 부동산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수백억원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그러나 김성근은 현재까지 어떠한 기부활동을 한 적이 없는 것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 사회의 리더 행세를 했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는 알려진 기부 실적은 없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김응용 감독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야구장을 지었고, 유망주들과 함께 숙식하거나 자비로 갈비같은 좋은 거 먹이고 훈련시켰으며, 원로 야구인들의 말년이 힘들 때 도움을 주고 있으며, 노년이 되어서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 물론, 협회장으로서의 김응룡은 명보다 암이 월등히 많긴 했다(...) 등 직책을 맡으며 야구계의 발전을 위해 발로 뛰고 있다. 이만수 전 감독도 활발히 물적 기부 및 재능기부를 펼치며 국내 외 야구계에 공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37], 노리타에겐 기독교인으로서 패드립이나 다름없는 유다라는 모욕을 당했다. 류중일, 한용덕 감독 등도 취임 중 1억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것이 알려져 있다. 또한, 강민호, 양현종, 차우찬, 장원삼, 박석민, 박용택, 정우람, 오재원, 신본기 등 여러 현역 선수들도 야구계 안팎에 기부를 하는 등 기부 문화가 야구계에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김성근은 자신을 추켜세우기 위해 쓴소리만 내뱉을뿐, 야구계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지갑을 여는 일이 없었다.

이에 대해 김성근 광팬들로 추정되는 일부 팬들은 김성근이 기부를 하건말건 상관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비난하고 있다.
기부야 개인맘이죠 .
하면 칭찬받을 일이지만 그렇다고 남이 이래라저래라 할것도 아닌데 남한데 기부하라마라하는게 더 웃긴인간임 - 엠팍 댓글
기부를 하던말던 그런거 가지고 뭐라하는거 자체가 웃긴거죠 - 엠팍 댓글

김성근 광팬들은 남한테 기부하라마라하는게 웃긴 인간이라고 비판했지만, 정작 김성근 본인이 언론 인터뷰에서 남들에게 기부하라고 말한 바 있다.
"자신에 대한 투자라 생각하고 기부를 망설이지 마라" - 김성근 인터뷰

김성근 광팬들은 김성근 감독님께서는 금전적 기부는 하지 않으셨지만 재능기부 등으로 야구계에 큰 공헌을 해왔다고 언플하고 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야구발전을 위해 앵간히 노력하시는분 아닌가요?
돈으로 어쩌고 하실 급은 아닌거 같은데..?
야구 인프라나 후배 양성이나 어쨋든 꽤나 이런쪽으로 재능이든 능력이든 기부하신거 같은데 느낌인가요..?
강연회나 다른 것들은 돈 받고 하셔서 기부라고 하기 좀 그런건가 싶기도 한데 야구판 내에서는 충분히 재능기부 하시는거 같은데.."
- 출처 : 엠팍

노리타들의 말대로 물질적 기부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꼭 금전적인 기부를 하지 않더라도 재능기부 형식으로 야구계를 위해 기여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김성근은 재능기부 활동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기부할 재능이 있는가의 의문을 일단 제껴두고 2011년 SK 감독에서 경질된 후 단발성으로 용마고를 지도한 적이 있으며, 2017년 한화 감독에서 경질된 이후에는 울산공고와 성균관대에서 잠깐 학생들을 지도한 것이 전부다. 그러나 김성근의 이러한 짧은 재능기부 활동들도 결국은 당시 새로 감독을 구하고 있거나 기존 감독들의 경질설이 나돌고 있던 NC 다이노스(용마고), 롯데 자이언츠(울산공고), kt wiz(성균관대)의 차기 감독을 노리는 행보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야구팬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예를 들어 용마고(구 마산상고)의 경우 김성근이 1969년부터 1년여 동안 감독으로 지도한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 어느날 기업은행 투수 코치직 제의를 받자 김성근은 마산상고 측과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그만두고 바로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버리는 바람에 갑자기 감독을 잃은 마산상고가 어려움을 겪은 바 있었다. 이후 김성근은 40여년 동안이나 마산을 찾지 않다가 NC 다이노스의 감독 선임을 앞둔 시점인 2011년 8월 26일 돌연 마산을 찾아 용마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재능기부 활동을 벌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NC 다이노스는 9월 1일 김경문을 감독으로 공식 선임했다. 전날인 8월 31일 김경문 감독 내정 사실을 알아낸 김성근은 "김경문이가 됐다며?"라고 측근들에게 말한 후, 그 날 바로 재능기부 활동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자신이 재능 기부를 한 목적은 재취업을 위해 했던 행동일 뿐이지, 애초부터 본인이 순수한 의도로 한 게 단 하나도 없다. 물론 정말 순수한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본인만이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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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나 여러 비매너 플레이는 혹사와 더불어 그가 현재까지도 비판받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2] 대표적으로 유퀴즈 출연 당시 감독 재임기간 중 가장 성적이 좋던 2015년 한화 6위 성적 하나만 가지고 꼴찌팀을 중위권으로 만들었다는 등 한화의 부흥기를 끌었다는 등 자극적인 제목을 유퀴즈측에서 달았고 영상도 마치 김성근이 부임하고 나서 날아올랐다는 등 유리한 장면만 틀었다. # [3] 자서전 「김성근이다」(p.42)에서는 "지금까지 나는 거의 성적이 최하위인 팀의 감독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자신이 맡았던 시절에는 태평양, 쌍방울, 삼성, LG도 최하위권 팀이었다고 말했다. 또 「사사구 The Interview 인간 김성근을 만나다」에서도 자신은 "지금까지 14개팀을 맡으면서 한번도 상위권팀을 맡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4] 스포츠 팀에서 한 해 선수들이 받는 총 연봉을 합한 것을 말한다. [5] 여기서 한화의 실패 원인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화는 그 이전까지 주축이었던 선수가 김태균을 제외하면 정근우, 이용규 등 다 외부인 출신이었고, 그들마저 이미 보여줄 건 다 보여준 베테랑 선수들이었다. 후루꾸 시즌으로 유명한 2018년조차 타자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적이 없고, 현재 한화 선수진을 보면 2017년까지 신인급이든 주전급이든 활동했던 선수들이 하주석 빼고는 전무하며 그 하주석도 욕이란 욕은 다 처먹고 있다. 즉 김성근 감독은 기존 주전들과 새롭게 성장하는 신인들을 주축으로 하고 그들이 부족한 부분의 공백을 베테랑을 끌어와 메꾸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주전과 신인 성장이 전무하고 그나마 있는 선수들도 한물 간 베테랑들의 수준조차 넘어서는 선수가 없다 보니 그 끌어다놓은 베테랑들로만 야구를 하는 이상한 형태가 되었던 것. [6] 대표적으로 SK 시절에는 경쟁 관계를 통한 상승을 도모하여 왕조를 이룩했고, LG 시절에는 선수협 사태와 서용빈 병역비리 사건으로 팀 케미가 붕괴된 팀을 포지션 고정을 통해 단합시켜 준우승까지 이끌어냈다. [7] 심지어 해당 선수들 중에서는 김성근 감독의 제자 출신이 많고, 나아가 선수들조차도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하여 선수 연장 기회를 노려봤다는 이야기를 하는 선수들이 많다. 이러한 김성근 감독의 성향을 선수들 또한 잘 알고 있다는 뜻. [8] 이동걸 사례는 2021년 4월 김태균 야구의 참견에서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직접 말하면서, 실제 빈볼 지시자가 김성근 감독이 아니라 김태균보다 선배인 어떤 고참 선수인 것으로 밝혀졌다. [9] 데이터에서 주요 정보를 추출해 의사결정에 이용하는 첨단 수학 및 컴퓨터과학 기법. 인공지능(AI) 기법과도 상당부분 연계된다. 2010년대 이후 '빅데이터'라는 개념으로 확장.발전되었다. [10] 그러나 충암고는 김성근 부임 이전에도 이미 야구 명문고였을 뿐만 아니라, 김성근은 충암고에 부임한 후 대구의 야구명문고인 대건고가 야구부를 해체하려한다는 소문을 입수하고 발빠르게 대건고 야구부 18명 전원을 충암고로 전학시켜 대건고 전력을 주축으로 하여 우승을 거두었다. [11] 신인왕도 신인왕인데, 신재영은 당시 168이닝 15승 방어율 3.9를 기록하며, 넥센 선발로테이션의 핵심투수로 꼽혔다. 그 핵심투수의 구종조차 모르는데, 다른 투수들의 구종을 제대로 알았겠냐는 것. [12] 실제로 김병현도 업슛을 던질 때 슬라이더 그립을 사용하여 던졌다. [13] 예시로 든 코리 클루버는 아예 자기 공을 브레이킹볼이라고만 부른다. 커브로도 슬라이더로도 구분하지 않는다. [14] 카네다는 치바 롯데 마린즈의 전신인 롯데 오리온즈의 감독을 1973~1978, 1989~1990년 역임하며 팀의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5] 현재 이름인 치바 롯데 마린즈로 바뀌는 건 치바로 연고이전한 1992년부터. [16] 재일교포출신 야구인. 1960년대 국가대표, 1985년 두산의 전신인 OB베어스 2군 감독 역임. [17] 무장간첩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해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사건인데 시국이 경직되지 않을수가 없다. [18] 참고로 남한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배수찬은 그의 어머니가 재일교포 북송 때 북한으로 떠나겠다고 하자 평생 생이별해야 할지 모른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의 월북을 간절히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를 뿌리치고 월북하고 한다. 때문에 실의에 빠진 배수찬은 지도자 커리어가 중단된 후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19] 위에서 얘기한대로 2000년대 초반까지 그 노리타로 대표되는 김성근 감독 팬덤은 없다시피 했다. 있어봐야 팀 해체로 흩어진 과거 쌍방울팬들이나 갑작스런 경질로 LG 프런트에 분노했던 LG 트윈스 팬들정도였고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건 이때는 상상도 못할 일. 그리고 또한 그냥 성적을 못냈던 감독중 하나로 기억될정도였고 또한 언론플레이로 인해서 구단에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인식시켰다. [20] 한대화, 김기태(1969), 선동열, 김진욱(1960), 김시진, 양승호 [21] 1923년생으로 김성근보다 20살이나 연상이었다. 태평양그룹 부회장이었음에도 야구단 사장을 겸했다. 당시 신동관은 칠순을 바라보는 고령이었고, 김성근은 한창 팔팔한 40대 중후반이었다. 2012년 3월 29일에 사망했는데, 이 특강은 신동관 부회장 별세하고 4일이 지나서 한 특강이었다. [22] 창단을 주도했던 인물로 김성근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애초에 김영덕이 아니라 박용민이 김성근을 데려다 썼기 때문에 김성근 입장에선 은인이었다. [23] 당시에는 스포츠신문이 일간스포츠와 스포츠서울 두 가지 뿐이었고, 스포츠 기자도 그만큼 얼마 없던 시절이었다. [24] 당시 삼성그룹 수뇌부는 삼성 라이온즈가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우승에 실패한 이유가 정신력 부족 때문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오대산 혹한기훈련을 실시했던 김성근이 삼성 감독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25] 게다가 김성근을 데려온 이용일 구단주 대행도 1999년 1월을 끝으로 쌍방울그룹을 퇴사하면서 김성근의 든든한 백이 사라지고 만다. [26] 실제로 이광은이 팀을 제대로 이끈 것은 10여일에 불과했다. 시즌 초부터 팀이 부진에 빠지자 프런트는 개막 열흘만에 김성근에게 투수 운용 전권을 위임했고, 한 달 후에 결국 경질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광은이 투수 운영을 잘 한 것도 아닌 것이 다 이긴 경기를 구원투수인 최향남이 불을 질러서 말아먹은 사례가 있고, 이 외에도 9회 2사까지 잡아놓은 상황에서 김용수 내리고 장문석을 올려서 플레이오프에서 어이없게 지고 만 적도 있었다. 이미 이광은 감독의 투수운용능력이 시원찮은 것이 드러났는데 시즌 초부터 죽을 쑤고 있으니 김성근에게 권한을 준 것. [27] 사실 한화 이글스 사장인 김신연은 김승연 회장의 사촌으로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낮은 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나왔다는 것. [28] 미국 프런트와 달리 한국 프런트 야구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프런트가 지지 않으면서 감독 고유의 권한까지 간섭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는 2010년대 최하진 사장 시절 감독의 선수 운영, 특정 선수 기용 여부나 타순까지 직접 관여하려 든 정황이 발각되고, 소위 CCTV 사찰 사건까지 겹치며 정점을 찍었다. [29] 특히, 히트앤런 작전을 쓸 데 없이 많이 쓰면서, 선수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지독한 스몰볼을 고수했기 때문. [30] 2018년 현재까지도 재직중 [31] 고양 원더스를 주제로 한 다큐 영화 '파울볼' 후반부에 원더스 해체가 결정된 후 술마시며 자긴 정치를 몰랐다며 한탄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그동안의 행적을 고려하면 이 장면이 얼마나 치밀한 이미지 메이킹인지 알 수 있다. [32] 물론 허민 구단주도 이득을 제법 봤다. 어차피 돈이야 썩어날 정도로 많아서 그 돈으로 인생을 즐기는 단계였기 때문. 허민은 야구선각자 김성근과 꿈을 쫒는 선수들의 든든한 후원자란 명예를 얻어갔다. [33] 들어보면 알겠지만, 김성근은 경기의 흐름 자체는 비교적 잘 읽었지만, ~시프요로 대변되는 발음이 정말로 안 좋았다. 특히, 올림픽 해설은 야구를 잘 모르는 시청자들도 봐야되기 때문에 이점이 정말 크게 다가왔다. 김정준은 기대했던 데이터를 활용한 해설이 아닌 감 위주의 해설로 무색무취했으며, 편파경향이 심했다. 차라리 삼용철이라 까이는 이용철이나, 편파 해설하는 송진우가 나을 정도로!!! [34] 당장에 2009 WBC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김인식도 WBC 준우승의 성과를 이루어냈으나 그해 한화는 꼴찌를 기록하여 재계약에 실패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35] 그나마 9,10구단 창단에 대한 쓴소리를 빼면 선발 야구에 대한 지적 등 현실과 맞지 않는 지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구단 창단도 본인의 재취업을 위한 것 아니었냐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 실제로 김성근 감독은 NC가 창단할 때 마산까지 내려가 언플을 했었다. [36] 감독 선임을 위해 연고지쪽에서의 활동으로 포석을 깔아놓은 것이라는 평이 많았다. 조범현 감독을 선임하는 것으로 가닥이 나자 바로 인스트럭터를 종료했다. 물론, 인스트럭터라는 직책자체가 애초에 단기 교육이라는 전제하에 계약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계약기간이 끝나서 안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진실은 저 멀리에... [37] 대표적으로 베트남, 라오스같은 동남아 국가쪽으로 야구 관련 재능기부를 한 것. 또한, 유소년 야구나, 장년층에 있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야구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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